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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경북입향 경위는 1518년 기묘사화 때 조온의 현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죽자 조위의 증손인 현감 조종(趙琮)은 화를 피하여 영주로 이거하였다.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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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입향 경위는 1518년 기묘사화 때 조온의 현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죽자 조위의 증손인 현감 조종(趙琮)은 화를 피하여 영주로 이거하였다. 조종(趙琮)의

◐一자 조인완(趙仁琬)의 후손은 풍기 와단에,

◐二자 조예완(趙禮琬)의 후손은 임하면 오대리에 정착하고,

◐三자 조지완(趙智琬)의 손자 조관(趙貫)은 병자호란 뒤 출세를 단념하고 옛 안동부 감천현(현 예천군 감천면)에 이거하였으며 후손 중 문과 6명, 진사 15명을 배출하여 일대에 두루 알려진 가문이 되었다.

◐四자 조신완(趙信琬)은 봉화군 소천면 대현리에 정착하여 세거하였다. 조신완의 증손자인 조적(趙績)이 세상을 뜨자 부인 청송심씨는 막막한 두메산골을 벗어날 결심을 하고 아들 3형제를 데리고 무작정 길을 떠나 저전리에 정착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한양조씨 집성촌이 이루어졌다. 조신완(趙信琬)의 증손 조적은 안동 저전(현 서후면 저전리)에 정착하였으며, 조적의 세 아들의 후손들이 현재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서후면 저전리을 중심으로 인근 마을에 세거하여 오고 있다. 마을 북쪽에 천등산(天燈山)이 우뚝 솟아 있고 천등산에서 발원한 송야천이 마을을 가로질러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저전리에 거주하는 총 190여 가구 가운데 한양조씨는 약 160가구가 살고 있다. 관련 유적으로 마을 동쪽에 쌍계서재(雙溪書齋)가 있다.

◐五자 조형완(趙亨琬)의 아들 조원(趙源)은 영양으로 이거하여 후손이 일월과 주곡에서 크게 문호를 개창하였다.

영양에 입향한 후 원당리(原糖里: 영양읍 하원동)에 살다가 호은공 조전(壺隱公 趙佺)선생이 주곡동으로 옮겨간 뒤 자손이 번성하고 벼슬과 학문이 끊이지 않았으며 호은선생의 아들 정형(廷珩)선생은 1630년(인조8年)에 진사하고, 증손 호봉(壺峯) 덕순(德純)선생과, 옥천(玉川) 덕린(德?)선생의 형제가 숙종조에 대과하여 호봉은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지평에 이르렀고, 옥천은 승지로서 성학과 문장으로 당시 남인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주실마을은 조지훈 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壺隱宗宅.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이 마을 한복판에 널찍이 자리잡고 있고, 옥천종택(玉川宗宅: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2호),월록서당 등 숱한 문화자원들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주곡동 옥천종택(注谷洞 玉川宗宅)

이 집은 17세기말 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양(漢陽) 조씨(趙氏)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 1658~1737)의 고택(古宅)이다. 조덕린은 조선 숙종(肅宗) 17년(1671)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교리(校理)와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이 집의 구조는 살림채인 정침(正寢)과 글을 읽는 별당(別堂)인 초당(草堂)과 가묘(家廟)인 사당(祠堂)으로 구성되어 있다.

월록서당(月麓書堂)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2호

• 소재지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이 건물은 조선 영조(英祖) 49년(1773)에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 1658~1737)의 손자인 월하(月下) 조운도(趙運道, 1718~1796)가 발의하고 한양조씨(漢陽趙氏), 야성정씨(野城鄭氏), 함양오씨(咸陽吳氏)등이 추축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당이다. 이 서당에서 공부한 이들 가운데 많은 석학(碩學)과 명현(名賢)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옥천 선생의 손자 월하(月下) 조운도(趙運道) 선생과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선생이 서당이 없어 학자의 수업에 지장이 있음을 크게 개탄하고 월록서당을 영건하게 되었다. 서당의 중간은 마루이고 양쪽이 방인데, 왼쪽은 존성재(存省齋), 오른편은 극복재(克復齋)라는 편액이 불어 있으며,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의 서당기와 천사 김종덕(川沙 金宗德)과 간옹 이헌경(艮翁 李獻慶)의 시판이 새겨져 있다. 이 서당은 월하와 만곡을 위시하여 향내 후진양성은 물론 동남문풍의 중심이 되었다. 서당의 현판은 숙종조 영의정인 번암 채제공이 지었다.

조지훈 생가(趙芝薰 生家)

•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

• 소재지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201

이 집은 청록파(靑鹿派) 시인의 한 사람이며, 대표적인 한국 현대시인이고 국문학자였던 조지훈(1920~1968)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그의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본명은 동탁(東卓)이며 지훈은 호이다. 선생은 1939년 문장지(文章誌)에[고풍의상, 古風衣裳]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나와 ≪청록집≫,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등을 남겼다. 그는 시인이자 국문학자로서 유명한 것은 물론 지조(志操)있고 풍류(風流)있는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집은 주곡(注谷)마을에 처음 들어온 입향조(入鄕祖) 조전(趙佺)의 둘째 아들 조정형(趙廷珩)이 조선 인조(仁祖) 때 지은 것이다. 이 집은 경상도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兩班家)의 모습을 하고 있는 ‘ㅁ'자형집으로 정침(正寢)과 대문채로 나누어진다.

《청록집》《풀잎단장》《조지훈시선》《역사 앞에서》《여운》등 그가 남긴 시집들은 모두 민족어의 보석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승무〉〈낙화〉〈고사〉와 같은 시들은 지금도 널리 읊어지고 있는 민족시의 명작들이다. 전통적인 운율과 선(禪)의 미학을 매우 현대적인 방법으로 결합한 것이 조지훈 시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조지훈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느 누구도 훼손하지 못할 만큼 확고부동하다. 매천 황현과 만해 한용운을 이어 조지훈은 지조를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지사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한 일송 김동삼의 시신을 만해가 거두어 장례를 치를 때 심우장에 참례한 것이 열일곱(1937년)이었으니 조지훈이 뜻을 확립한 시기가 얼마나 일렀던가를 알 수 있다.

조지훈은 민속학과 역사학을 두 기둥으로 하는 한국문화사를 스스로 자신의 전공이라고 여기었다. 조부 조인석과 부친 조헌영으로부터 한학과 절의를 배워 체득하였고 혜화전문과 월정사에서 익힌 불경과 참선 또한 평생토록 연찬하였다. 여기에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원고를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국어학 지식이 더해져서 형성된 조지훈의 학문적 바탕은 현대교육만 받은 사람들로서는 감히 짐작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넓고 깊었다. 광복이 되자 10월에 한글학회 국어교본 편찬원이 되고 11월에 진단학회 국사교본 편찬원이 되어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국어교과서와 국사교과서를 편찬하였고 그 이후 1968년 기관지 확장으로 작고하기까지 조지훈이 저술한 〈멋의 연구〉《한국문화사서설》《한국민족운동사》《시의 원리》 등의 저서는 한국학 연구의 영원한 명저가 되었다. 조지훈은 진리와 허위, 정의와 불의를 준엄하게 판별하고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엄격하게 구별하였다. 〈지조론〉에 나타나는 추상같은 질책은 민족 전체의 생존을 위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터뜨린 양심의 절규이었다. 조지훈은 근면하면서 여유있고 정직하면서 관대하고 근엄하면서 소탈한 현대의 선비였다. 매천이 절명의 순간에도 "창공을 비추는 촛불"로 자신의 죽음을 관조하였듯이 조지훈은 나라 잃은 시대에도 "태초에 멋이 있었다"는 신념을 지니고 초연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 조지훈에게 멋은 저항과 죽음의 자리에서도 지녀야 할 삶의 척도이었다. 조지훈은 호탕한 멋과 준엄한 원칙 위에 재능과 교양과 인품이 조화를 이룬 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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