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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남악집(南岳集):조종저(趙宗著)◑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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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집(南岳集):조종저(趙宗著)◑

형태서지

권수제판심제간종간행년권책행자규격어미소장처소장도서번호총간집수
남악집(南岳集)
남악집(南岳集)
활자본(芸閣印書體字)
1704년 간행
6권 3책
10행 20자
21.4×13.9(cm)
上下二葉花紋魚尾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4084
한국문집총간 속 39

저자

성명생년몰년자호본관특기사항
조종저(趙宗著)
1631년(인조 9)
1690년(숙종 16)
경숙(褧叔)
간재(艮齋), 남악(南岳)
한양(漢陽)
조익(趙翼)의 문인. 최후상(崔後尙), 오도일(吳道一), 임상원(任相元) 등과 교유

가계도

기사전거 : 
墓誌銘(崔錫鼎 撰), 趙幹墓誌銘(任相元 撰, 恬軒集 卷33), 趙重呂墓碣銘(朴世采 撰, 南溪集 卷74), 漢陽趙氏大同世譜 등에 의함

행력

 종저 聚 叔                              
이자종저자취숙호간재만종남산하청학동개호남악신미생칠세능속문최지천장후심중국상유림대문자진부언기유수동교임자탁문과력전낭사서동벽병인제회양기사승통정경오졸유남악집삼권간재신통일권배안동김씨부장령대기상낙백문경후임신생기묘졸묘친산계하유좌합폄명곡최석정현곡박세채찬지

왕력서기간지연호연령기사
인조 9 1631 신미 崇禎 4 1 태어나다.
인조 25 1647 정해 順治 4 17 7월, 조부상을 당하다.
효종 1 1650 경인 順治 7 20 11월, 부친상을 당하다.
효종 6 1655 을미 順治 12 25 3월, 浦渚 趙翼을 곡하다.
현종 1 1660 경자 順治 17 30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다.
현종 8 1667 정미 康熙 6 37 布衣로서, 제주에 표류한 漢人 90여 명을 청나라로 압송하려는 조의에 반대하여 〈請放還漂人疏〉를 올렸으나 불납되다. ○ ‘艮止’의 뜻으로 ‘艮齋’라 扁室하고 자호로 삼다. ○ 8월, 상소 후의 漫錄인 「艮齋新笥」 1책을 저술하다.
현종 10 1669 기유 康熙 8 39 가을, 동몽교관이 되다.
현종 11 1670 경술 康熙 9 40 4월, 모친상을 당하다.
현종 13 1672 임자 康熙 11 42 동몽교관이 되다. ○ 겨울, 문과 별시에 합격하다.
현종 14 1673 계축 康熙 12 43 10월, 사서가 되다. ○ 12월, 〈辭司書兼陳所懷疏〉를 올려 痘瘡으로 몇 달간 폐강한 세자에게 書筵을 열어 진강할 것을 청하다.
현종 15 1674 갑인 康熙 13 44 문학, 정언, 지평이 되다. ○ 10월, 병조 좌랑으로서 古今의 나이 어린 제왕에게 권학하는 말을 채집한 「冲年龜鑑」을 편성해 올려, 馬裝을 하사받다. ○ 정언이 되어 京畿 지역의 조세를 반으로 줄이도록 계청하다.
숙종 1 1675 을묘 康熙 14 45 봄, 병조 정랑이 되다. ○ 10월, 都堂錄에 兪夏益, 權瑎 등과 함께 17인에 선발되다. ○ 8월, 襄陽 府使가 되다.
숙종 2 1676 병진 康熙 15 46 11월, 수찬이 되다.
숙종 3 1677 정사 康熙 16 47 여름, 사예가 되다. ○ 7월, 헌납이 되었으나, 退憂堂 金壽興의 특별 서용을 반대하는 계청에 異議하여 체직되다. ○ 8월, 京試官으로 忠南에 가다. ○ 11월, 수찬이 되다. ○ 체직되고, 이후 杜門하다.
숙종 6 1680 경신 康熙 19 50 12월, 부교리가 되었으나,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체직되다. ○ 廣陵에 퇴거하다.
숙종 13 1687 정묘 康熙 26 57 4월, 집의가 되다.
숙종 14 1688 무진 康熙 27 58 3월, 淮陽 府使로서 〈宰淮陽時請糶減稅疏〉를 올려 기근과 癘疫으로 인해 봄 세금을 감해주고 진휼할 것을 청하다.
숙종 15 1689 기사 康熙 28 59 봄, 通政大夫가 되다.
숙종 16 1690 경오 康熙 29 60 1월 4일, 졸하다. ○ 楊州 伊淡里에 장사 지내다.
숙종 30 1704 갑신 康熙 43 - 삼남 趙儀祥과 손자 趙鎭禧가 芸閣印書體字로 문집을 인행하다.
기사전거 : 

墓誌銘(崔錫鼎 撰), 趙重呂妻平山申氏墓誌銘(任相元 撰, 恬軒集 卷33), 朝鮮王朝實錄, 本集內容 등에 의함

恬軒集卷之三十三 / 墓誌銘 西河任相元公輔著

●趙重呂妻平山申氏墓誌銘

▣貞夫人申氏墓誌銘

庚午。余歲晏山居。謝絶訊問。而趙承旨儀徵。修書自通曰。吾祖妣申夫人閫閾之行。足以範俗。其終也○ 先君欲自志其藏。無祿。先君繼而逝。孤竊傷先君之志未克就。不揆而爲之狀矣。念先君以文字相琢磨者惟公。而且綦予之茲孤。敢以不朽請幸公摭而序之。以焜燿吾兩世之望也。余受而復曰。余猥與先尊執事遊。而子之見託亦深。何敢辭。且子之狀。詳而剴。可據而志也。夫人姓申氏。系出平山。左議政槩之後也。高祖吏曹判書鏛。曾祖進士匡國。祖縣監確。考知中樞府事景珍。妣昌寧曹氏。年十九。爲趙休川公繼室。休川諱重呂。官弘文校理。終於堂下三品。休川公以兩從功。追贈吏曹參判。夫人亦從而封。始休川公早失恃。而侍其考都事公。且未第而喪其耦。家益旁落矣。夫人來而卽受中饋之寄。奉養之具。不足則取諸其家而贍之。未嘗有矜色也。都事公有媵侍。夫人能降心而謹遇。無所勃磎。以安都事公焉。又嘗得人參。蓋知事公所資與而將買宅者也。休川公有季姊而病。卽空囊而濟之無靳也。休川公姨母寡而窶。公輒分其祿。時進之以珍。夫人能先意而共奉之也。休川公又睦於宗。塾其宗之秀者而誨焉。夫人均其衣食。一如其所生也。休川公初取而有一子。卽縣監宗冕。夫人勤恤之瘉於淮陽。日子一也。吾恐其或偏也。又育其兩孫。令淮陽授之書。疾病則親自救之。蓋休川公居常不問產。宦又不遂而夫人經紀有度。不至罄恥。公寔賴之而無憂內矣。休川公遭都事公憂。毀而不起。夫人幾以自殉。仍嬰羸疾。不善起居者。迨十餘年矣。出居廣陵田舍。課童隷力耕稼。親女工敬祀事。未嘗以貧瘠自愁也。以庚戌四月初十日卒。壽六十一。夫人婦而事都事。公以孝佐休川公而行義。和其族黨。終而母其兩子。伯得以蔭階。仲得以文學。世其美。孫亦班侍從踐銀臺。夫人之樹德而凝福。已侈大哉。葬于楊州伊淡里負辛之原。距休川公墓數步。有一子。宗著文科。歷三司升通政。取掌令金泰基女。有三子。長儀徵承旨。儀鳳,儀祥。銘曰。

一德之貞相夫子。持之以終成其嗣。從而宅焉。安且邇。于以銘之揚其懿。

 

편찬및간행

저자의 유문은 장남인 承旨 趙儀徵이 家藏草稿를 바탕으로 수집 편차하여 明谷 崔錫鼎(1646~1715)의 산정을 거친 稿本을, 저자의 삼남 趙儀祥과 손자 趙鎭禧가 1704년에 최석정에게 서문을 받아 芸閣印書體字로 인행하였다. 《초간본》 이 본은 현재 규장각(奎4084), 장서각(D3B-1137)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외의 저술로서 간행 연도가 불분명한 「艮齋新笥」 1冊 53板 목활자본이 장서각(C14B- 26)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704년에 인행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본 영인저본 중 권1의 제30판은 卷次가 누락되어 있고, 권5목록과 권6목록은 落張이므로 동일본인 장서각장본으로 보완하였다.

序(崔錫鼎 撰), 自敍(趙宗著 撰, 艮齋新笥), 艮齋新笥跋(吳道一 撰, 西坡集 卷19), 本集內容 등에 의함

구성과내용

본집은 6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에 1704년에 崔錫鼎이 쓴 序가 있으며, 권3~6에는 권별 목록이 있다. 각 시문에 대체로 작품 연도가 표기되어 있으며, 시에는 內弟 吳道一, 崔後尙, 최석정, 李翊相, 僧 性聰, 任有後 등과 교유한 것, 양양 임지에서 지은 것, 琴妓 등 妓女를 소재로 한 것 등이 있다.

권1은 五言絶句(11題), 七言絶句(59), 五言律詩(20), 七言律詩(49), 六言(1)이다. 물ㆍ바람 소리에 밤을 지새우며 읊은 〈靑鶴洞漫詠〉, 양양에 부임하면서 오도일과 석별한 〈將赴襄陽出宿東郭 ……〉과 부임 후에 지은 〈臨瀛之北有石 ……〉, 〈次淸澗亭板上韻〉, 〈留題峴山客舍〉 등, 영암에 귀양 간 金壽恒을 찾아뵙고 올린 〈靈巖訪文谷謫居 ……〉, 〈文谷座上論西湖峴山形勝 ……〉, 최석정ㆍ오도일과 수창하며 차운을 부기한 〈酬汝和貫之〉, 광릉에 퇴거하여 백낙천과 소동파의 出處를 생각하며 自警의 뜻으로 지은 〈病中偶觀白集 ……〉, 영남의 裨將으로 가는 최후상을 송별하며 읊은 〈送崔周卿佐嶺南幕〉, 課製인 〈次黃佐雪後早朝韻〉 등 6수, 최후상, 洪處亮, 임유후 등을 애도한 만시(10) 등이 있다.

권2는 五言古詩(10), 七言古詩(21), 聯句(1)가 있고, 권미에 恬軒 任相元이 저자의 詩를 評한 〈題南岳古詩後〉가 있다. 1686년에 사은사와 서장관으로 부경하는 남구만과 오도일에게 준 〈奉送藥泉相公 ……〉, 〈贈吳貫之燕行〉, ‘艮齋’라 자호한 후 당시의 심경을 술회한 〈自嘲〉, 우국충정으로 神宗, 宣祖, 仁祖, 孝宗을 추모하고 표류한 漢人의 商舶을 애탄하며 지은 〈四憶一歎詩〉, 卞搏, 李台揆, 洪九成 등을 애도한 만시(6) 등이 있다.

권3은 序(10), 記(4)이다. 趙世彙, 임유후, 金得臣 등의 送序와 安垕의 詩稿, 「冲年龜鑑」과 金錫胄의 「息庵集」의 序, 燕 昭王이 郭隗를 招賢한 고사를 소재로 한 〈黃金臺記〉, 폐허가 된 劉隱居의 故址 와룡암에 새로 제갈량의 화상을 모신 연유와 의의를 기술한 〈臥龍菴記〉 등이 있다.

권4는 書(8), 祭文(14)이다. 최후상, 성총 등에게 보낸 편지와 趙翼, 柳命益, 홍구성, 趙持衡 등을 추도한 제문이 있다.

권5는 疏(6)이다.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부묘를 청한 〈代館學儒生請神德王后祔廟疏〉 등이 있다.

권6에는 장인 金泰基의 墓碣, 최후상과 趙相抃 妻의 墓誌, 강원 감사 崔寬에게 내리는 敎書, 孤山書院上樑文, ‘人材盛衰’에 관한 殿策, 漢城試와 別初 등에서 지은 執策(5), 監初에서 지은 賦 〈臨死愧孫登〉, 雜著인 〈南漢山城新寺勸善文〉이 있다. 附錄으로 1692년에 최석정이 지은 墓誌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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