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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운곡시사( 耘谷詩史, 운곡 원천석 선생의 1144수) ◈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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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시사 전문 1

序-001) 박동량(朴東亮)의 서문 ; 운곡행록시사서(耘谷行錄詩史序) 내 일찍이, 원주 사람 원천석(元天錫)이 고려말에 숨어살면서 책을 써서, 우왕(禑王)과 창왕(昌王) 부자가 신돈(辛旽)의 자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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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시사 전문 2

書月谷名師卷谷深山月更分明 永夜寥寥氣自淸此是上人傳性處 塵沙世界致昇平Ⅲ-090) 명봉월사(明峯月師)의 시권에 씀달 바퀴가 바다 문 동쪽에 솟아오르니천 길 높은 봉우리가 푸른 하늘에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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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시사( 耘谷詩史)  (운곡 원천석 선생의 1144수)◈                         

序-001) 박동량(朴東亮)의 서문 ; 운곡행록시사서(耘谷行錄詩史序)

내 일찍이, 원주 사람 원천석(元天錫)이 고려말에 숨어살면서 책을 써서, 우왕(禑王)과 창왕(昌王) 부자가 신돈(辛旽)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자세하게 서술하였는데, 우리 왕조가 들어서자 세상에 나오지 않고 일생을 마쳤으니, 그 맑은 풍모와 높은 절개는 포은(圃隱)과 야은(冶隱) 등 여러 선생과 비교할 만하지만, 자손들이 그 책을 숨겨둔 지 오래 되어 읽어 본 사람이 없고, 그 이름조차 사라져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고 들었다.

200년 뒤에 내가 이 고을에 관찰사로 왔다가 마침 선생이 지으신 운곡시집(耘谷詩集)을 얻어 보니, 비록 기록한 것이 많지는 않아도 예전에 들었던 사실과 달라서, 모두 특필할 만한 사실이었다.

아아! 우왕(禑王)이 처음 왕위를 이어받을 적에 최도통(崔都統)․목은(牧隱)․포은(圃隱) 같은 몇몇 원로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당시에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어서 즉위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이의가 없었다. 그뿐 아니라 목은(牧隱)이 먼저 말하기를, “마땅히 전왕(前王)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까지 했다. 그런데 창왕(昌王)을 폐위할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왕(禑王) 부자는 신돈의 자손이다”고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창왕을 폐위시킬 길이 없었기 때문에, 다만 이것으로써 구실을 삼았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왕씨(王氏)의 후손은 이미 공민왕(恭愍王) 뒤에 끊어진 셈이니, 몇몇 분들이 과연 누구를 위해 정충(精忠) 대절(大節)로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죽고 말았는가. 하물며 당시에는 조정의 기강이 그다지 문란하지 않고 군국(軍國)의 큰 정사도 몇몇 분들에게 일임되어 있었으니, (그분들이) 거짓 임금을 쫓아내고 나라 왕실의 성(姓)을 존속시키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설 분들이 아니었던가. 그분들이 취할 태도는 이미 마음속에 강구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역사를 쓰는 저 무리들도 일찍이 왕씨(王氏)의 국록을 먹은 자들이건만 죽음으로써 본분을 다하지 못하고, 도리어 우왕(禑王) 부자를 신돈(辛旽)의 출생으로 덮어씌웠으며, 그것도 모자라 공민왕이 병풍 뒤에서 홍륜(洪倫) 등의 외설스런 짓을 보았다고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지금도 (역사를) 읽는 자들이 모두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긴다.

우왕의 한 가지 사실만 근거해서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으니,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라는) 선생의 한 마디 말씀이 아니었더라면 천백년 뒤까지도 반드시 그릇된 기록을 답습하는 일이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서야 우리나라에 역사가 있다고 말하겠는가. 충신과 의로운 선비가 나라에 유익함이 바로 이와 같다.

목은(牧隱)과 포은(圃隱) 같은 분들이 조정에 계셨기에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떠난 뒤에도 (고려왕조가) 수십 년 동안이나 부지할 수 있었다. 선생같이 재야에 숨어 계시는 분이 시를 읊고 회포를 서술하면서 사실에 근거하여 바로 썼으니, 말씀 한 마디 글자 한 자가 모두 충분(忠憤)에서 나온 것이다. (선생의 글로 인해서 우왕과 창왕이) 왕씨의 부자(父子)로 정해졌을 뿐만 아니라 󰡔고려사󰡕 가운데 어지러운 말과 망녕된 글들도 이로 말미암아 변증할 여지가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궁하게 묻혀 살거나 세상에 나가 벼슬한 길은 달랐지만, 나라의 빛이 된 것은 마찬가지이다.

만약 당시의 임금들이 일찍이 충(忠)과 사(邪)를 판단해 처음부터 끝까지 국정을 위임하고 그 경륜을 펼치게 했더라면 목은과 포은(圃隱)이 어찌 문천상(文天祥)이나 육수부(陸秀夫)같이 (죽게) 되었겠으며, 지초(芝草)를 먹고 국화를 먹는 것도 어찌 선생이 좋아서 스스로 택했으랴. 슬픈 일이로다.

선생의 시고(詩稿) 2권은 모두 선생이 스스로 쓰신 것이고, 대부분 산인(山人)이나 석자(釋子)들과 오가며 주고받은 것인데, 그 가운데 약간은 바로 선생의 대절(大節)을 담은 글이라서 빨리 세상에 널리 퍼뜨려 표식(標式)을 삼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곧 베껴내어 한 책으로 만들고, 연대순으로 편집하여 제목을 󰡔시사(詩史)󰡕라고 하였다. 풍속을 살펴보려는 자들이 보지 않으면 안될 책이니, 붓을 잡는 자들이 (이 책에서) 채집할 수 있도록 대비해 둔다.

 

만력(萬曆) 계묘년(1603) 여름. 강원도 관찰사 박동량(朴東亮)은 삼가 쓰다.

耘谷行錄詩史序

嘗聞原州人元天錫在麗末隱居著書。言禑․昌父子非辛出事甚悉。逮我朝。閉門終身。其淸風峻節。直可與圃․冶諸公相伯仲。而子孫秘其書久益密。人無得以見者。幷與其名遂泯泯不傳於世。後二百年。余按節到是州。適得其所爲詩耘谷集。雖所紀不多。與向所聞異。要之不失爲特筆也。嗚呼。方禑之嗣王位也。數三元老如崔都統․牧隱․圃隱諸公猶在也。不惟當時上下無異議。牧隱首曰。當立前王之子。及昌之廢也。始曰。禑父子乃旽之子孫。盖不如是則昌無可廢之道。特爲此以籍之耳。不然。王氏之祀已絶於恭愍之後。而以數公精忠大節。竭誠盡瘁。死而後已者。果爲誰乎。況朝廷綱紀不甚潰裂。而軍國大政。一委之數公。則廢僞君存國姓。必不出他人之後。其所進退取舍。講于中者固已審矣。彼修史輩亦嘗食王氏之祿者。旣不能一死。又以禑父子冒之辛。此猶不足。至記恭愍從屛後觀洪倫等褻行事。至今觀者莫不醜唾。據禑一事。不足知其誣。微公一言。千百載下。必將襲謬不已。可謂東國有史乎。若是乎忠臣義士之有益於爲人國家也。有牧隱․圃隱諸公而立於朝。則當天命人心已去之後。能有所扶持。至於數十年之久。其隱而在下也有如公者。則吟咏陶寫之間。據實直書。一言一字無非忠憤所激。不但王氏之爲父子者定。麗史中亂言妄書亦將因此。而或有辨證之地。則窮達出處雖不同。其爲邦家之光一也。當時之君。早辨忠邪。終始委任。得以展布所蘊。牧隱․圃隱豈終爲文天祥․陸秀夫之徒。而茹芝餐菊亦豈公之所欲自托者哉。可悲也夫。公之詩二卷。皆公所自書。多與山人․釋子所嘗往來酬唱。而其中若干首。卽公之大節所寓以存者。亟當廣布於世。爲之標式。遂抄而爲一冊。編其歲月於其間而名之曰詩史。盖觀風者之所不可已。而亦以備秉筆者採焉。

萬曆 癸卯 夏。江原道 觀察使 朴東亮。謹書。

 

序-002) 정장(鄭莊)의 서문 : 운곡선생문집서(耘谷先生文集序)

선생은 우리 태종(太宗) 대왕께서 즉위하시기 전의 바로 그 스승이시다. 선생께서는 고려 정치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치악산(雉嶽山)에 숨어 사셨는데, 명나라 건문(建文) 경진년(1400)에 태종 대왕께서 왕위를 이어받자 가장 먼저 대관(大官)으로 선생을 모시려 했지만, 선생께서는 응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이듬해에는 대왕께서 300리 길을 달려 몸소 선생의 집까지 찾아오셨지만, 선생께서는 역시 피하고 만나지 않으셨다. 대왕께서도 선생이 끝내 굽히지 않을 것을 아시고, 그의 아들 형(泂)에게 기천현감(基川縣監)의 벼슬을 내리셨다. 또 옛날에 밥 짓던 계집종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참 동안이나 문 앞의 돌에 앉아서 서글피 생각하셨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고 하였다.

선생은 은자이면서 시와 문장을 지으셨는데, 그 문장이 바로 역사였다. 자양(紫陽)의 붓을 이어받을 수 있었지만, 화재를 당해 전하지 않는다.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겨우 시집 두어 권뿐이다. 퇴계(退溪) 선생께서도 “운곡시(耘谷詩)는 역사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선생의 시가 역사라면 후세에 전할 것은 의심할 바가 없다.

아! 세상 사람들이 선생을 감반(甘盤)과 백이(伯夷)에게 비유하지만, 이 어찌 선생께서 기대하셨던 평이랴. 마침 만났던 시기가 그러했기 때문에 감반(甘盤)도 되고 백이(伯夷)도 되신 것이니, 역시 선생에겐 불행스러운 일이었을 뿐이다.

시와 문장은 선생이 뜻이 있어 지은 것인 만큼 백세 뒤에라도 취할 것이 있을 텐데, 문장은 이미 불행히도 타버렸고, 시는 상자 속에 감춰져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지가 거의 400년이나 되었다. 이는 꺼린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13대손 효달(孝達)이 종중 사람들과 의논하여 판각에 부치려고 하자, 모두들 “백이의 노래도 주나라에서 기휘(忌諱)하지 않았는데, 선생의 시를 어찌 조선에서 기휘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선생의 시가 세상에 나옴으로써 고려 오백년의 역사가 빛을 보게 되었으니, 선생을 위해서 다행이라고 하겠다.

시는 사람의 성정(性情)에서 나오는 것인데, 선생께선 하늘과 땅의 정대한 기운을 타고 나셔서 성정을 이루셨다. 그래서 선생이 읊으신 시들은 훌륭하고도 고상한데다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의 전아한 법칙을 겸하였으니, 참으로 천고의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선생을 일러서 감반(甘盤)이라고 하거나 백이(伯夷)라고 하는 것도 보탠 말은 아니다. 그러나 선생께서 본다면 하나의 뜬구름이 허공을 지나가는 것과도 같을 뿐이다.

선생의 전형이 시에 있고 선생의 정신이 시에 있으니, 자손된 이로써 선생을 존중하고 사모하는 길도 역시 시를 존중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자손들이 (선생의 시를) 간행하게 된 뜻이다.

아! 선생께선 덕(德)으로써 학업을 가르쳐 우리 왕조의 억만 세(世) 터전을 열어 주시고, 절조(節操)로써 숨어 지내사 군신(君臣)의 억만 세(世) 기강을 세워 주셨다. 조선 한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 은택(恩澤)을 받게 되었으니, 그 누가 다행하게 여기지 않으랴.

선생의 시가 후세에 전하는 것은 선생을 위해서만 다행스런 것이 아니라 읽는 이로 하여금 성정(性情)의 바름을 되찾아 학술을 두터이 하고 절의(節義)를 힘쓰게 하며, 인심을 일으키고 세속을 교화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집이 세상에 간행되는 것이 온 나라와 후세를 위하여 다행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나 같은 사람이 선생의 덕과 절조에 대하여 감히 무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선생의 시에 대해서만은 더욱 경복(敬服)하고 감탄하는 바이다.

 

후학(後學) 초계(草溪) 정장(鄭莊)은 삼가 쓰다.

 

耘谷先生文集序

先生卽我太宗大王微時師也。見高麗政衰。遯荒於雉嶽山中。及大明建文庚辰。太宗大王繼承寶位。首以大官召。先生不應。翌年。上馳三百里躬臨廬。先生避不見。上知不屈。官其子泂基川縣監。召舊㸑婢語。坐門前石悵然久。後人名其石曰太宗臺。先生隱著詩與文。文則史也。可以繼紫陽筆。而入於火不傳。見存者惟詩集數卷耳。李退溪曰。耘谷詩史也。詩以史則傳於後無疑。噫。世人以先生比之甘盤․伯夷。此豈先生素所期哉。適會而爲甘盤爲伯夷。亦於先生不幸耳。至若詩文。則先生有意而爲之。期百世後有取焉。文則已不幸而灰矣。詩則藏於巾衍中。迨四百年不行于世。有所諱也。先生十三代孫孝達甫。謀宗人入剞劂。皆言伯夷之歌不諱於周邦。則先生之詩亦何諱於朝鮮耶。詩出於世而高麗五百年統緖爲有光。竊爲先生幸也。夫詩者出於性情。先生稟二氣之正大以爲性情。故發於吟哦者渢渢灝灝。兼詩書典雅之則。千古詩家中一人。謂先生甘盤。謂先生伯夷。無以加矣。自先生視。一浮雲過太虛耳。先生之典刑在詩。先生之肝肺在詩。爲子孫尊慕之道。詩爲重。此子孫之入梓意也。噫噫。先生以德授業。開我朝億萬世基。以節肥遯。立君臣億萬世綱。朝鮮一邦之人咸受賜也。孰不爲幸。而先生之詩又傳之後世。則不但爲先生幸也。使覽者究厥性情之正。敦學術勉節義。則其於作人心化世俗。大有補焉。然則是集之行於世者。豈非一邦後世之幸歟。故愚於先生之德之節。無容議爲。獨於先生之詩。尤有所敬服感歎也。

後學 草溪 鄭莊。敬識。

序-003) 정범조(丁範祖)의 서문 ; 운곡선생문집서(耘谷先生文集序)

국초 변혁기에 왕씨(王氏)를 위하여 절개를 세운 분들 가운데 정포은(鄭圃隱)․길야은(吉冶隱)․원운곡(元耘谷) 세 선생이 더욱 뛰어나니, 이 분들을 은(殷)나라의 삼인(三仁)에 비유하였다.

이 가운데 포은(圃隱) 선생은 당시 원로로써 종묘 사직의 안위(安危)와 국가의 흥망을 책임지고 있었으므로 한 번 죽음으로써 막중한 강상(綱常)을 책임졌다. 야은(冶隱)은 문하주서(門下注書)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나라의 운명이 장차 다하여 대명(大命)이 (우리 태조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자기 힘으로 구할 수 없을 바에야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서 금오산(金烏山)의 일민(逸民)이 되는 것을 달갑게 여겼다. 이 두 선생이 스스로 깨끗이 처한 절의는 해와 별처럼 밝아, 국사에 실리고 후세에 외워 그 자취가 드러났다.

그러나 원선생(元先生) 같은 분은 전조(前朝)의 한낱 진사(進士)일 뿐이니, 일찍이 왕씨(王氏)의 조정에 서지도 않았고 국록을 먹지도 않았다. 특히 태조께서 등극하시기 전의 동학(同學) 친구셨으니, 선생이 시운(時運)에 영합하여 좌명훈신(佐命勳臣)이 된다 한들 그 누가 “옳지 않다”고 하랴. 그러나 선생께서는 대대로 국록을 먹던 집안의 후손으로써 의롭게도 두 성(姓)을 섬기지 않고, 큰 산 깊은 바위에 숨어서 나무나 돌과 함께 늙으셨다. 그 자취는 은미하였지만, 처신한 절의로 말한다면 포은(圃隱)이나 야은(冶隱) 두 선생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아! 이제 선생의 유집(遺集)을 읽고 선생의 심사를 엿볼 수 있으니, 그 읊은 시와 부른 노래가 나무꾼이나 고기잡이의 노래와 뒤섞여 나타나지만, 때때로 나라를 생각하고 가슴속을 그려낸 것들이 있다. 곧바로 찌를 적엔 비분강개(悲憤慷慨)하고 부드럽게 부칠 때엔 배회엄억(徘徊掩抑)하여, 기자(箕子)의 「맥수가(麥秀歌)」나 백이(伯夷)의 「채미가(採薇歌)」의 유음(遺音)이 완연하다.

선생의 뜻이 (자신의 시를) 상자 속에 감추고 석실(石室)에 비장하여 인간 세상에 알리려고 하지 않은 것은 그 자취만 숨긴 것이 아니라 그 말까지 숨긴 것이다. 그러므로 선생이 처신한 절의가 두 선생보다 더 어려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이치가 정신(貞臣)․의사(義士)로서 끝내 드러나지 않는 적이 없기 때문에, 임금의 수레가 문 앞에 이르고 바위의 이름이 태종대(太宗臺)가 되면서 그 자취가 한 번에 나타나게 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절의를 사모해 제사를 받들면서 그 자취가 두 번 들어 나게 되었으며, 그 뒤를 이어 (선생을) 찬양하는 글들이 계속 나오면서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 장차 백일하에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제 범조(範祖)가 그 자손의 부탁을 받아 외람되게 서문을 쓰는 것도 (선생의) 숨은 사실을 드러내는 데에 어찌 한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성상(聖上) 24년 경신(庚申 1800) 맹하(孟夏).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 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舘事) 홍문관제학(弘文舘提學) 예문관제학(藝文舘提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금성(錦城) 정범조(丁範祖)는 삼가 쓰다.

 

當國初鼎革之際。爲王氏立節。推鄭圃隱․吉冶隱․元耘谷 三先生尤卓偉。譬殷之三仁焉。雖然。圃隱。元老也。佩宗社安危國家興亡。則以一死任綱常之重。冶隱猶是門下注書也。見邦籙將訖。大命有歸。力不能救。則逴然長逝。甘作金烏逸民。盖二先生自靖之義。皎如日星。國史書之。後世誦之。而其迹顯。至若元先生。特前朝一進士耳。未嘗立王氏之朝食王氏之祿。而龍潛聖人。卽同學舊契也。乘運攀附。爲佐命勳臣。夫誰曰不可。而特以世祿之裔。義不事二姓。匿伏大山嵁巖之中。與木石同老。而其迹微而隱。其處義視二先生爲尤難。嗟夫。今讀先生遺集。可以規測其心事矣。其謳吟詠歎。與樵歌漁唱鍇出。而有時感念宗國。輸寫胸臆。直指則悲憤慷慨。婉寄則徘徊掩抑。宛然有麥秀採薇之遺音。盖先生之意。欲襲之巾衍。秘之石室。不欲散落人間。是不徒隱其跡。而又將隱其辭。故曰。其處義視二先生爲尤難已。雖然。天下之理未有貞臣義士伏而不顯者。故車駕臨門。巖號太宗。而其跡一顯。鄕人慕義。祠而祭之。而其跡再顯。嗣是而揄揚之筆愈出而愈著。將不勝其顯白矣。今範祖之因其子孫之托。猥撰卷首之文。庸詎非闡微之一助也歟。

聖上二十四年 庚申 孟夏。資憲大夫․刑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五衛都摠府摠管。錦城 丁範祖。謹序。

Ⅰ-001) 1351년(신묘) 3월. 금강산(金剛山) 가는 길에 횡천(橫川)에 이르러

풀 보드랍고 꽃 붉어 천리가 봄이기에

채찍 내리고 말 가는 대로 성문을 나섰네.

가고 또 가다가 화전(花田) 땅에 가까워져

나무꾼 만날 적마다 친구 소식을 자주 묻네.

 

辛卯三月。向金剛山到橫川。

草軟花紅千里春 垂鞭信馬出城闉

行行漸近花田境 頻向樵蘇問友人

Ⅰ-002) 갈풍역(葛豊驛)을 지나면서

말을 채찍질하며 유유히 갈풍역(葛豊驛)을 지나노라니

산천 모습은 예나 이제나 같구나.

사람 드물어 고요한 강가 길에는

철쭉꽃만 층층이 물에 붉게 비치네.

 

過葛豊驛

策馬悠悠過葛豊 山川形勢古今同

人稀境靜江邊路 躑躅千層映水紅

Ⅰ-003) 창봉역(蒼峯驛) 길 위에서

왼쪽에는 시냇물 오른쪽엔 푸른 산

기이한 경치 다 보려니 눈길 바쁘구나.

시냇가 풀 바위틈 꽃이 서로 비추는 곳에

나그네 발길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듯하네.

 

蒼峯驛路上

左邊溪水右靑山 考閱奇觀目不閒

澗草巖花相映處 行裝如入畵圖間

Ⅰ-004) 원양역(原壤驛)

말먹이는 역 마을에 해는 벌써 석양인데

옛이야기 나눌 사람 없고 까마귀만 우짖네.

주민들이여! 싫어하지 마소. 말달리는 일을

이 세상 슬픔과 기쁨이 모두 운명이라오.

 

原壤驛

秣馬郵亭日正晡 人無話舊有啼鳥

居民莫厭奔馳役 世上悲歡命矣夫

Ⅰ-005) 춘주(春州)

다시 와보니 성곽이 내 고향 같고

눈에 가득한 강산이 내 놀던 곳일세.

다행히 늦봄 삼월 좋은 철을 만나

꽃과 달에 의지해 이 시름을 푸네.

 

春州

重來城郭似吾州 滿眼江山是舊遊

幸値芳菲三月暮 好憑花月解閑愁

Ⅰ-006) 원천역(原川驛)

붉은 복숭아 두어 그루가 엉성한 울타리 위로 솟았는데

문 밖의 봄바람에 가는 버들이 늘어졌네.

옛 역 마을은 썰렁해 사람 소리도 들리지 않고

비둘기만 살구꽃 가지 위로 날아오르네.

 

原川驛

紅桃數樹出疎籬 門外東風細柳垂

古驛荒凉人語少 鶉鳩飛上杏花枝

Ⅰ-007) 학을 탄 신선

학 타고 구름에 오른 신선 흰 도포 입고

예사롭게 바다 위에서 반도(蟠桃) 먹고 취하네.

삼산(三山)에 오가면서 어찌 멀다고 하랴

흰 날개 탄 저 기상 절로 높구나.

 

鶴上仙

鶴上雲仙白錦袍 尋常海上醉蟠桃

三山往返何論遠 駕彼霜翎意自高

Ⅰ-008) 매화가지 끝에 걸린 달

눈썹 같은 초승달이 차가운 밤을 알려주니

매화 가지의 밝은 바탕이 더더욱 어여뻐라.

밤 고요하고 바람도 멎은 데다 사람들 흩어지자

차가운 빛 비추는 곳에 그윽한 향기만 맑구나.

 

梅梢月

一眉新月報寒更 偏愛梅梢素質明

夜靜風停人正散 冷光相照暗香淸

Ⅰ-009) 그림 속의 산

그림 속에 늘어선 산들이 누구의 솜씨인지

늙은 잣나무 푸른 소나무가 붓끝에 생생하네.

그 중에 암자가 있건만 스님은 불러도 나오지 않으니

아마도 선정(禪定)에 들어 남은 봄을 보내는 게지.

 

畵山

圖成列峀是何人 古栢蒼松筆下新

中有菴僧呼不出 却疑參定遏殘春

Ⅰ-010) 칼잎 부들

두어 줄기 나란히 늘어섰는데

푸른 칼날에 물 위 바람이 모여드네.

풀무를 빌지 않고도 잘 단련되었으니

조물주의 기이한 솜씨를 이제 알겠네.

 

蒲釰

數行羅列勢相同 翠刃相攢水面風

不假烘爐能鍛鍊 方知造化有奇功

Ⅰ-011) 사냥 구경

휜 새가 갑자기 후리 속으로 떨어지고

이따금 보라매가 늦바람을 잡아채네.

옥 굴레 금 안장에 푸른 창 잡고서

박달나무 곤봉에 깃 화살, 붉은 활까지 둘러멨네.

짐승들은 갈 길 막혀 어쩔 줄 모르고

씩씩한 사냥꾼들은 기세 당차구나.

노루 사슴 가득 싣고 저물 녁에 돌아오니

가을 하늘에 풍악 소리 흘러 넘치네.

 

觀獵

霜翎忽落四圍中 時見蒼鷹掠晩風

玉勒金鞍兼翠戟 檀槍羽箭與彤弓

豺狼遇窘趍蹌急 士卒生獰勢氣雄

滿載麕麚廻日暮 樂聲洋溢殷秋空

Ⅰ-012) 폭포

물방울 흩날리는 소리에 서늘한 기운 이어지고

뿜어내는 구슬 부서지는 가루가 바위 앞에 흩어지네.

한 줄기가 높이 걸려 천 길이나 뻗쳤으니

이게 바로 하늘에서 떨어진 은하수일세.

 

瀑布

奮沫聲中爽氣連 噴珠碎玉翠巖前

一條高揭彊千丈 眞是銀河落半天

Ⅰ-013) 베개에 달린 방울

이른 아침 베개에 달린 방울 소리에 임금께서 일어나시어

나라 걱정하는 정성스런 마음을 여러 신하에게 보이시네.

아침 내내 그 소리 귓가에 잇달아 들려

(定應難○○○○)

 

枕鈴

枕鈴明主御淸晨 憂國誠心示衆臣

達旦聲連頭側畔 定應難○○○○

Ⅰ-014) 남만(南蠻)에서 들어온 종이

한원(翰苑)에 값진 종이 많기도 하건만

남만(南蠻)에서 진상한 것이 가장 으뜸일세.

창을 바르자 머리 옆에 눈빛 비치고

벽에 붙이자 눈앞에 은빛 번쩍이네.

가난한 양속(羊續)은 이불 만들어 추위 견디고

명필 우군(右軍)은 붓 잡아 먹물 적셨지.

희고도 미끄러워 티 하나 없으니

글 하는 사람 벗되어 몇 년을 지내왔던가.

 

蠻牋

翰苑珍奇紙最先 南蠻貢進九重天

糊窓雪色明頭側 帖壁銀光眩眼前

裁被禦寒羊續窶 揮毫洒墨右軍賢

敝然平滑無織累 長伴詞人幾許年

Ⅰ-015) 지남거(指南車)

무지개 같은 깃발들이 사면에 둘러싸고

붉은 바퀴 화려한 바퀴통이 빛나는구나.

바람 따르는 술법으론 정인(鄭人)이 부끄럽고

길 찾아 돌아갔다고 월(越)나라 사신 자랑했네.

멍에 앞의 방향은 남쪽 끝까지 가리키고

멍에 채의 모형은 북두의 기틀일세.

헌원씨(軒轅氏)가 치우(蚩尤)를 치려던 그날

이 기계를 만들어 위엄을 떨쳤네.

 

指南車

霧旆霓㫌四面圍 彤輪華轂有光輝

鄭人應愧奔風術 越使堪誇得路歸

輗軏正當离表極 梁輈栢法斗星機

軒轅欲伐蚩尤日 作此奇權奮虎威

Ⅰ-016) 어진 이를 불러들인 이불 (맹종 孟宗의 어머니가 열두 폭 이불을 만들어 두고 어진 이들을 불러들여 아들과 함께 공부하게 했다)

바르게 아들 가르치려는 마음이 초연해

이불 만들어 세상 인재를 널리 불러들였네.

번쩍이는 무늬가 베개마다 빛나고

훌륭한 벗들이 머리 나란히 하고 잠들었네.

따스하고도 찬란한 빛이 환하게 비치니

길쌈도 바느질도 모두 아름다워라.

그대 집안의 아름다운 이름이 만고에 전해 오니

그 당시 참예치 못한 내가 한스러워라.

 

招賢被(孟宗母作十二幅 招諸賢與子共學)

循循敎子意超然 作被旁招間世賢

的的奇紋連枕煥 明明善友共頭眠

氤氳燦爛光輝映 紡績裁縫巧並全

赫爾家聲傳萬古 愧予難與出當年

Ⅰ-017) 조(趙) 목감(牧監)의 외진 집에 대해 씀 (두 수)

Ⅰ-017-01)

좋은 산 많은 곳에 외진 집 마련해 두고

높은 다락에 올라 피리 부니 흥이 넘치네.

술잔 들고 꽃 아래서 취하다

약초 밭 찾아 비속에서 김 매네.

오두막 사랑은 일찍이 도원량(陶元亮)에게 본받고

학문에 힘쓰기는 동중서(董仲舒)에게 배웠네.

성긴 발 말아 올리곤 아무런 일도 없어

솔숲 행랑에 온종일 누워서 책만 본다네.

Ⅰ-017-02)

한 평생 즐거움이라곤 한가롭게 지내는 것

맑은 바람에 베개 하나로 낮잠 실컷 주무시네.

달구경하는 밤에는 다락 주렴 거둬 올리고

꽃 가꾸는 봄 동산엔 호미를 가지고 다니네.

낚시터 시냇가에 뜬 구름 흩어지고

손님 보내는 정자 앞에는 나무 그림자 드리웠네.

길에 가득한 푸른 이끼에 티끌 하나 없는데

추녀 끝 비낀 햇살이 거문고와 책을 비추네.

 

題趙牧監幽居(二首)

好山多處卜幽居 長笛高樓興有餘

每把酒樽花下醉 常尋藥圃雨中鋤

愛廬早効陶元亮 勉學曾傳董仲舒

靜捲疎簾無一事 松廊盡日臥看書

 

平生滋味在閑居 一枕淸風午睡餘

愛月夜樓頻捲箔 養花春圃每携鋤

釣魚臺上溪雲散 送客亭前樹影舒

滿路蒼苔塵不到 半軒斜照映琴書

Ⅰ-018) 나라에 금주령이 내렸는데 제호조(提壺鳥) 소리를 듣다

도연명(陶淵明)을 다객(茶客)이 되게 했으니

다시는 고양(高陽)의 술꾼 모일 일이 없건만,

산새는 금주령이 내린 것도 모르고

술 너머서 이따금 술잔 들라고 권하네.

 

國有禁酒之令聞提壺鳥

已敎元亮爲茶客 無復高陽會酒徒

山鳥不知邦國令 隔林時復勸提壺

Ⅰ-019) 이(李) 상서(尙書)가 보낸 시에 차운하다 (두 수)

Ⅰ-019-01)

그대처럼 뛰어난 재주는

옛날에도 드물고 지금도 드무니,

달 밝고 바람 맑은 글귀인데다

금 두드리고 옥 떨치는 소리일세.

책상에는 온 나라 역사가 쌓여 있고

벽에는 거문고 하나가 걸려 있네.

이미 지란지계를 맺었으니

얕고 깊은걸 따지지 마세나.

 

Ⅰ-019-02)

임금과 신하가 한 마음 한 뜻인 것을

내 이미 그대에게서 보았으니,

은혜 물결이 넓고 넓게 흐르고

덕스런 말씀이 밝고 밝게 퍼지네.

언제나 술잔으로 정성 바치고

거문고 매달아 마음을 경계하네.

숲 아래라고 어찌 선비가 없으랴

꿈속에서도 대궐 깊이 찾아간다네.

 

次李尙書所示詩韻(順天, 二首)

才華似吾子 罕古亦稀今

月白風淸句 金舂玉振音

堆床千國史 掛壁一張琴

已結芝蘭契 不須論淺深

 

君臣咸一道 我已見方今

浩浩流恩渥 明明播德音

獻誠常以酒 爲戒每懸琴

林下豈無士 夢尋銀闕深

Ⅰ-020) 1354년(갑오) 10월. 회양(淮陽) 가는 길에 횡천(橫川)에 이르러 벽에 걸린 시에 차운함

북쪽 오랑캐가 압록강 건너지 못하는 것은

우리 훌륭한 장수의 전략 덕분일세.

요즘 두만강 어구가 시끄럽다니

벽에 걸린 새로운 시 읽으며 두 장군이 그립네.

 

甲午十月。向淮陽到橫川。次板上韻

北寇難侵鴨綠東 賴吾賢帥轉籌功

近聞豆口妖烟起 讀徹新詩憶二公

Ⅰ-021) 초나흗날. 횡천(橫川)을 떠나면서 (두 수)

Ⅰ-021-01)

잠자던 까마귀 막 일어나고 먼 산이 밝아오기에

새벽 일찍 행장 차려 눈 맞으며 떠나네.

나무꾼 영감은 나그네 뜻도 모르고

머리 돌려 앞길 묻는 걸 이상스레 여기네.

Ⅰ-021-02)

구름 쌓이고 바람 찬데다 눈까지 하늘에 가득해서

산천도 알아볼 수 없게 캄캄하기만 하네.

들밭에서 굶주린 까마귀 우는 걸 보고

양양의 맹호연이 문득 생각나네.

 

初四日發橫川(二首)

棲鴉初起遠山明 蓐食催裝冒雪行

樵叟不知征客意 却嫌回首問前程

 

雲重風寒雪滿天 昏昏未可辨山川

野田行見飢烏噪 忽憶襄陽孟浩然

Ⅰ-022) 홍천(洪川) 현판 시에 차운함

하늘과 땅에 감사드리며 시 한 수를 읊으니

이곳 백성들도 풍년이 든다고 기뻐들 하네.

난간에 기대보니 마을 가까운 줄 알겠구나.

베 짜는 소리가 숲 너머에서 들려오네.

 

次洪川板上韻

上謝乾坤偶一吟 居民聊喜順陽陰

倚欄認得人家近 機杼聲來隔一林

Ⅰ-023) 말흘촌(末訖村)에 묵으면서

저물어 가는 산 마을에 흥겹게 찾아드니

가시나무 숲 아래 길이 구부러졌네.

말머리 앞에 이따금 주민들이 절하고는

멀리 시냇가 가리키며 저희 집이라네.

 

宿末訖村

暮向山村得得過 棘荊林下路橫斜

馬頭時有居民拜 遙指溪邊是我家

Ⅰ-024) 초닷새. 마노역(馬奴驛).

인간 만사에 어찌 떳떳함이 없을손가

명실(名實)이 어긋나면 세상이 미워하네.

맡은 일이란 게 파발마 따라 달리는 신세니

마노(馬奴)라는 역 이름이 제대로 어울리네.

 

初五日馬奴驛

人間萬事豈無恒 名實相違世所憎

役是奔馳隨馹騎 驛名端合馬奴稱

Ⅰ-025) 인제현(麟蹄縣)

강 건너 고개 넘어 향성(鄕城)에 이르고 보니

사방 둘러싸인 산 가운데 들판이 평평하네.

밭이며 논들이 물난리 겪었다더니

나무 끝에 걸린 뗏목 가지가 길가다 보이네.

사람이 드무니 달아난 집 많은 걸 알겠구나.

땅이 좁아서 훌륭한 이름 얻기 어렵네.

임금께서 보살필 마음 깊이 품으셨으니

백성들아! 다시는 걱정하지 말게나.

 

麟蹄縣

渡江穿嶺到鄕城 四擁山中一野平

聞道水災田畝盪 行看樹杪海査橫

人稀始覺多逋戶 地窄終難得盛名

聖主深懷完護意 吏民休復有愁情

Ⅰ-026) 초이렛날. 서화현(瑞和縣)에 묵으면서

아침에 인제현을 떠나

가고 또 가서 서화현에 이르렀네.

두어 집 모여 살며 닭도 개도 조용하고

한 마을 물과 구름이 아름답더니,

차가운 북녘 바람이 갑자기 불어와

질펀한 저녁 눈이 많기도 해라.

난간에 기대어 마음 정하지 못했네.

갈까 말까. 어쩌면 좋을까.

 

初七日。宿瑞和縣。

朝發麟蹄縣 行行到瑞和

數家鷄犬靜 一洞水雲嘉

冽冽朔風緊 漫漫暮雪多

倚欄心未決 去住欲如何

Ⅰ-027) 초여드렛날. 길 위에서 지음

두어 간 갈대집들이

눈 내리는 산 앞에 비스듬하네.

천 그루 나무 다 베어내고

손바닥만한 밭을 갈고 김 매네.

금잔(金盞)의 바닥 같이 고요하고

옥호천(玉壺天) 같이 깊숙하구나.

양 창자같이 구불구불한 길이

바위 앞에서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네.

 

八日道中作

數間蘆葦屋 斜傍雪山前

伐盡千株木 耕耘一片田

靜如金盞地 深似玉壺天

屈折羊腸路 巖頭斷復連

Ⅰ-028) 초아흐렛날. 장양(長陽)을 떠나 천마령(天磨嶺)에 올라서서 금강산(金剛山)을 바라보다

일만 이천 봉우리가 반은 구름에 잠겨

상서로운 기운이 이따금 천문(天門)을 감싸네.

둘 없이 귀의할 마음을 다시금 지니고

자비하신 법기 보살께 머리 숙이네.

 

初九日。發長陽。登天磨嶺望金剛山。

萬二千峯半入雲 時看瑞氣擁天門

更將無二歸依念 稽首慈悲法起尊

Ⅰ-029) 통포현(通浦縣)의 현판 시에 차운함 (회양 淮陽 자사 刺史 강영순 康永珣이 중수기 重修記를 지었다, 두 수)

Ⅰ-029-01)

커다란 집을 관아로 새로 중수해

그 모습 날아갈 듯 우뚝 솟았네.

문득 강공이 남긴 필적을 쳐다보니

줄줄이 취한 글씨가 빽빽하고도 성기구나.

Ⅰ-029-02)

석숭(石崇)의 부귀도 마음에 없고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문장도 원치를 않네.

산 높고 물 맑은 곳을 찾아가

한가롭게 노닐며 이소(二疏)를 배우리라.

 

次通浦縣板上韻(淮陽刺史康永珣作重營記, 二首)

重營厦屋作官居 勢似翬飛起凡如

忽見康公留盛製 行行醉墨密還疎

 

富貴無心石氏居 文章不願馬相如

要尋山水淸高處 更退閒遊學二疏

Ⅰ-030) 회양(淮陽) 땅에서 동지를 쇠다

나그네길에 잠시도 걸음 멈추기 어려워

총총히 세월 가는 줄 몰랐네.

타향에서 갑자기 동지 아침을 맞고는

푸른 산 마주앉아 책력을 뒤적이네.

 

淮陽過冬至

客裏誠難暫駐驢 忽忽未暇計居諸

異鄕忽遇陽生旦 坐對靑山檢曆書

Ⅰ-031) 열 이튿날. 교주(交州)를 떠나 금성(金城)에 이르러

저녁 해가 가물가물 서산에 지는데

시냇가 사립문은 아직 닫지 않았네.

어디선가 나무꾼들이 달빛 받으며 돌아오는지

푸른 그늘에 피리 소리가 흩어지네.

 

十二日。發交州到金城。

 

夕陽明滅隱西山 溪岸柴門尙未關

何處樵童乘月返 笛聲搖落翠微間

Ⅰ-032) 청양(靑陽) 가는 길 위에서

산길 이십리에

다니는 사람 없어 고즈넉하네.

시냇물은 얼어붙어 소리도 끊어졌는데

구름 흩어지니 산 빛이 더욱 밝구나.

기이한 경치를 어떻게 다시 설명하랴

이상한 모습들을 말하기 어려워라.

나는 두 번째 오는 나그네라서

남 모르게 옛정이 가슴속에 느껴지네.

 

靑陽路上

山程二十里 寂寂無人行

凍合溪聲斷 雲收岳色明

奇觀何更說 異狀固難名

我是重遊客 潛生感舊情

Ⅰ-033) 열 나흗날. 일찍 청양(靑陽)을 떠나며

첫 닭 우는 소리에 청양을 떠나니

밝아오는 하늘빛이 푸르고도 쓸쓸하네.

잠자던 새들은 사람 피해 숲으로 들고

굶주린 사슴은 언덕 너머서 소리 지르네.

북두칠성은 은하수 북쪽으로 차츰 희미해지고

달은 이제 눈 덮인 산 서쪽에 지네.

깊은 생각이 어찌 끝나랴

시 읊다보니 골짜기 지나는 것도 몰랐네.

 

十四日。早發靑陽。

曉發靑陽第一鷄 欲明天色碧凄迷

避人棲鳥穿林去 爭穴飢麕隔岸啼

星斗漸稀銀漢北 月輪初入雪山西

却將何限冥搜意 不覺沈吟過一溪

Ⅰ-034) 방산(方山) 길 위에서

가는 말 잠시 멈추고 시 한 수 읊노라니

뽕나무에 연기 어린 마을이 호젓하구나.

아름답게 내리는 눈이 버들개지 같건만

사방 먹구름에 하늘이 어두워지네.

 

方山路上

暫停歸騎久沈吟 桑柘烟村深復深

雪意嬌多若飛絮 黑雲四合天陰陰

Ⅰ-035) 열 닷새. 방산(方山)을 떠나 양구군(楊口郡)에 이르렀는데, 아전이나 백성들의 집이 모두 기울어지거나 땅바닥에 쓰러졌으며, (온 마을이) 텅 비어 연기 나는 집이 없었다. 길가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이 고을은 낭천군(狼川郡)에서 아울러 다스리는 곳인데, 옛부터 땅이 좁고 척박해서 백성이나 산물이 쇠잔했습니다. 근래에 와서는 밭마저 권세가에게 빼앗기고 인민들을 못살게 하는 데다 세금마저 굉장히 많아, 발붙일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겨울철만 되면 세금을 독촉하는 무리들이 문이 메어지도록 잇달아, 한번이라도 명을 어기면 손과 발을 높이 매달고, 심지어는 곤장까지 때려서 살과 뼈가 해어지게 하니, 살던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져서 마을이 이같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오언시 여덟 구를 지어 마을이 쇠망해 가는 실정을 적어둔다.

十五日。發方山到楊口郡。吏民家戶欹斜倒地。寂無烟火。問諸行路。答曰。此邑乃狼川郡之兼領官也。自古地窄田磽。民物凋殘。比來權勢之家奪有其田土。擾亂其人民。租稅至多。雖容足立錐之地。無有空閑。每當冬月。收租徵斂之輩。塡門不已。一有不能則高懸手足。加之以杖。剝及肌骨。居民不堪。流移失所。故如斯也。予聞其語。作五言八句。以著衰亡之實云。

 

무너진 집에는 새들만 지저귀고

백성들은 달아난 데다 아전도 보이지 않네.

해마다 민폐만 더해가니

어느 날에야 즐겁게 지내랴.

땅은 모두 권세가에게 빼앗겼는데

포악한 무리들은 문 앞에 잇달았네.

남아 있는 사람들만 더욱 가엾으니

이러한 고생이 누구의 잘못이던가.

 

破屋鳥相呼 民逃吏亦無

每年加弊瘼 何日得歡娛

田屬權豪宅 門連暴虐徒

孑遺殊可惜 辛苦竟何辜

Ⅰ-036) 춘주(春州) 신(辛) 대학(大學)의 교외 별장에 씀

함부로 나가지 않는 것도 세상 길 험난해서일세.

벼슬 떠나 돌아오니 그 뜻이 한가롭구나.

구름과 바람 달빛 속에 살아가면서

영욕과 명리에 마음이 없네.

시냇가 바윗돌에 고요히 앉아 낚시질하고

맑은 날에는 집 뒤 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네.

이 가운데 어느 게 들사람 흥취에 맞나 묻는다면

청려장 짚고 얼근히 취해 석양에 돌아오는 거라네.

 

寄題春州辛大學郊居

不曾浪出世途艱 歸去來兮適意閑

寄跡雲烟風月裏 無心榮辱利名間

釣魚靜坐溪邊石 採藥晴登屋上山

若問箇中多野興 杖藜乘醉夕陽還

Ⅰ-037) 1355년(을미) 7월 어느 날. 춘성(春城)의 두 서생 김생(金生)과 안생(安生)이 공부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여러 서생들이 시를 지어 송별하는데 추(秋)자 운을 얻음.

춘성의 두 서생은 오래된 지음(知音)인데

소양강 강 마을에서 날 찾아왔었지.

소양은 내가 옛날에 놀던 곳

버들 둑 꽃 핀 언덕에 풍류가 많았지.

지난 일 연기처럼 세월이 변했지만

푸르른 산수에는 가을 구름 떠돌겠지.

수업이 한창인데 두 사람 떠난다니

돌아가려는 그 뜻을 붙잡을 길이 없네.

그대들 보내는 내 마음도 아득하니

이별주 한 잔을 그대들은 사양치 말게.

소양강 물이 잘 있는지 안부나 전해주어

그리운 내 시름을 달래나 주게.

 

乙未秋七月有日。春城金․安二生罷課還鄕。諸生作詩送別。得秋字。

 

春城二子舊知音 來自昭陽江水頭

佋陽乃我舊游地 柳堤花塢多風流

往事如烟歲月變 山水蒼茫雲正秋

講席將闌二子去 浩然歸志難挽留

送君此行意無極 別酒一盃君勿休

佋陽江水好在否 說我相思千斛愁

Ⅰ-038) 형님께서 보내 주신 시에 차운함 (이때 선군 先君께서 억울하게 못난 자들에게 비방을 얻은 일이 있었다, 네 수)

Ⅰ-038-01)

남 따라 비방하는 자들 역시 남에게 속히는 짓이니

불 붙여 하늘을 살라봐야 어리석은 짓일세.

이 부끄러움을 멀리할 좋은 꾀가 떠오르지 않아

밤 깊도록 우두커니 앉아 이 생각 저 생각 하고 있네.

Ⅰ-038-02)

저 푸른 하늘만은 속이지 못할 테니

그들의 사악한 망발 미친 짓으로 여길 밖에.

네 몸 살피라는 훈계를 전해 받았으니

우리들에게 세 번 다시 생각하라고 알려 주시는 걸세.

Ⅰ-038-03)

영무(寗武)보다도 어리석으니 꾸짖은들 무엇하랴.

백옥(伯玉)처럼 그릇됨을 알아야 그 뜻이 더욱 흘륭하네.

주나라 때에 입 꿰맨 이야기를 배웠더라면

한퇴지(韓退之)도 조주(潮州)에 좌천되지는 않았겠지.

Ⅰ-038-04)

걱정 잊고 노닐며 남을 탓하지 않으니

얼근히 취해 저녁바람까지 사랑스럽네.

오호(五湖)의 풍월을 항상 염원했으니

묻노라! 가는 길에 몇 고을이나 거치던가.

 

次家兄所示詩韻(時先君謬被庸夫甚謗, 四首)

從他謗亦任他欺 把火燒天却是癡

遠恥良謀難自辨 夜深危坐萬般思

 

早識蒼天不可欺 任他邪侫發狂癡

省躬譏誡言堪託 爲報吾儕三復思

 

愚添寗虎有何尤 伯玉知非意轉遒

若學周家緘口事 退之應免貶潮州

 

散慮逍遙事不尤 醉來偏愛晩風遒

五湖烟月平生念 且問歸程隔幾州

Ⅰ-039) 이른 봄 비

한 차례 비가 봄빛을 재촉하며

부슬부슬 두루 뿌리네.

살구꽃은 이제 막 예쁜 모습 드러내고

원추리도 벌써 움이 트려고 하네.

마디가 있어 뜸하다 다시 쏟아지고

가까운 곳 먼 곳까지 골고루 나눠 주네.

풍년의 징조를 먼저 전하니

기쁜 기운이 집집마다 흡족하구나.

 

早春雨

一雨催春色 濛濛遍灑多

杏花將吐艶 萱草欲生芽

有節疎還密 無私邇及遐

豊祥先有應 喜氣洽家家

Ⅰ-040) 활(弓)

초승달이 하늘에 걸린 모습으로

여섯 가지 재료를 그 가운데 갖추었네.

공들여 만든 위력 삼균(三鈞)이나 되니

적군의 간담이 한 화살에 없어지네.

변경을 쳐들어오는 도적이나 엿보고

편지 전하는 기러기는 쏘지 마시게.

술잔에 뜬 뱀 그림자 벽에 없으니

내 이제 활을 잡고서 오랑캐 진압하려네.

 

勢似初三月掛空 六材俱備在其中

工成恩最三鈞美 賊膽渾無一箭功

挾矢但窺侵境盜 鳴弦莫向寄書鴻

已無壁上杯蛇影 我欲提撕制遠戎

Ⅰ-041) 말(斗)

옛 성인이 그 당시 모양 따서 만들기를

속은 비고 밖은 튼튼한데다 네 귀가 평평하게 했지.

곡식을 헤아리는 그 공로가 가장 크고

공사(公私)를 재는 쓰임새도 가볍지 않아,

크고 작은 일에 중용을 얻어 속임수 없고

예나 지금이나 표준이 분명하네.

이 제도 무엇을 상징했던가

위로는 하늘이고 아래로는 땅의 모양이라네.

 

古聖當年像物成 中虛外實四隅平

槩量米粟功惟重 較定公私用不輕

大小得中欺詐絶 古今無別準繩明

要知制度從何處 上表宸居下地形

Ⅰ-042) 솥

주(周) 나라가 흥하고 한(漢) 나라가 번성했던 태평성대에

옮겨가는 신기한 자취를 그 누가 알았으랴.

분음(汾陰)에서 나왔으니 성인의 덕을 나타내고

사수(泗水)에서 구했으니 번창할 때를 열었네.

팔진(八珍)를 갖춰 놓으면 사람을 늙지 않게 할 수 있고

구전(九轉)을 고아 만든다면 세상도 옮길 수 없네.

매실과 소금 같은 신하가 많아진다면

이제부터 나라의 터전이 튼튼해지리.

 

周興漢盛太平時 遷徙奇蹤未可知

出自汾陰彰聖德 求於泗水啓昌期

八珍羞備人難老 九轉丹成世不移

調得鹽梅臣庶衆 定應從此固邦基

Ⅰ-043) 물가의 정자(水亭)

물가에 고요히 앉았노라니 너무나 흥겨워

천금이라도 얻은 듯 자리가 서늘하구나.

짧은 모자 가벼운 소매에 상쾌한 기운 통하고

아름다운 꽃 그윽한 풀이 맑은 향내를 뿜어내네.

검푸른 나무그늘에서 아지랑이를 맞아드니

일렁이는 물결이 햇빛을 살찌우네.

눈 앞의 값진 경치를 그리고 싶은데

동강난 무지개와 비낀 햇살 사이로 부슬비 내리네.

 

水亭

臨流靜坐興偏長 快得千金日榻凉

短帽輕衫通爽氣 好花幽草噀淸香

蔥蔥樹影迎嵐翠 漾漾波流沃日光

欲畵望中無價景 斷虹斜照雨微茫

Ⅰ-044) 내가 젊었을 때부터 선비로 이름낼 뜻을 둔지가 오래 되었는데, 이제 관찰사께서 내 이름을 군적(軍籍)에 기록했다. 그래서 시를 지어 스스로를 위로한다.

살아오면서 학문에만 힘쓰고

마음으로는 항상 요로에 나가길 바랐는데,

재주와 학문이 기둥에 이름 쓴 나그네에 미치지 못해

내 이름이 훈련받는 병사 명부로 옮겨졌구나.

행단의 풍월과는 인연이 끊어지고

변방의 연기 티끌이 꿈에 자주 나타나네.

옛부터 출세하거나 숨어사는 것도 다 분수 있으니

천명대로 살아가리라고 말할 뿐일세.

 

余自少有志於儒名者久矣。今按部公幷錄於軍籍。作詩以自寬。

生來只學兎如新 方寸常希據要津

才業未同題柱客 姓名移屬鍊兵人

杏壇風月魂空斷 楡塞烟塵夢已頻

自古行藏皆有分 但將天命語諸隣

Ⅰ-045) 중국(中原)에 가는 춘주(春州) 소경(少卿) 박윤진(朴允珍)을 배웅하다.

옛부터 중원(中原)은 경치가 좋았지.

오늘 맘껏 노닐러 가는 그대가 부럽네.

배에 달빛 가득한 금휴포(琴休浦)에서

술 싣고 조용히 밤새도록 놀아보세.

 

送春州朴少卿遊中原(允珍兩遊字)

自古中原形勝地 羨君今日飽淸遊

滿船明月琴休浦 載酒從容盡夜遊

Ⅰ-046)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생각나는 대로 읊음

Ⅰ-046-01)

온 땅에 덮인 풍진이 지난해보다 더하니

사방 어느 곳인들 시끄럽지 않으랴.

우리나라 터전이 반석처럼 견고하다면

하늘이 이 백성을 편히 잠자게 하련만.

Ⅰ-046-02)

사람들이 모두들 새해 온 것을 모르니

일에 취해 애쓰는 것이 얼마나 애처로운가.

세상 따라 살아가는 게 남자의 일이라면

편히 잠들 곳 없을까봐 걱정하지 않으련만.

 

卽事(紅亂始起)

匝地風塵勝去年 四方何處不騷然

我邦若固盤安業 天使斯民奠枕眠

 

人皆不覺到新年 醉事劬勞幾悵然

與世推移男子事 莫憂無地可安眠

Ⅰ-047) 회포를 써서 조(趙) 목감(牧監)에게 부침

뭇 사람들의 시끄러운 비방을 피하려

띠 띠고 단정히 앉아 위태한 때를 넘기네.

자유(子由)의 거짓 행동은 우리 편이 아니고

안회(顔回)의 어리석음이 나의 스승일세.

세상을 따라가는 것도 깊은 뜻 있어

남의 잘잘못은 생각하지도 않네.

누구와 더불어 마음속 일을 말하랴

부질없이 푸른 산 마주앉아 옛 친구를 생각하네.

 

書懷寄趙牧監

爲避紛然衆所譏 束身端坐過危時

由之行詐非吾儻 回也如愚是我師

與世升沈深有意 較人長短獨無思

憑誰共話心中事 空對靑山憶舊知

Ⅰ-048) 버들개지

늘어진 가지 흔들리는 그림자가 언제나 사랑스럽건만

바람 따라 흩날리는 솜꽃은 가엾기만 하구나.

우리 집의 가고 머무는 것은 원래 정함이 없어

동서남북 어딘들 막힘이 없네.

 

柳絮

長愛柔條弄影微 飜嗟亂絮逐風飛

自家行止元無定 南北東西竟不違

Ⅰ-049) 초여름에 교외로 나가다

뽕나무 오디가 익고 보리도 거두는데

모내기는 여태껏 끝내지 못했네.

부드러운 바람 맑은 날씨 서쪽 들길에서

흐르는 물에 멱감는 새들이 이따금 뵈네.

 

首夏郊行

椹熟桑林麥已秋 揷秧猶未遍原頭

軟風晴日西郊路 時見幽禽浴淸流

Ⅰ-050) 1360년(경자) 정월 19일 딸아이를 낳았다. 예쁘고 영리했는데, 금년 5월 17일 병으로 죽어 시를 지어 곡한다.

번뇌란 본래 뿌리가 없는 것이고

씨앗은 은애로부터 생겨나는 것일세.

불쌍히 여기는 내 마음이야 누그러질 수 있지만

슬피 우는 어미 소리는 차마 들을 수 없네.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이 참된 이치라면

함께 죽으려 하는 것은 망녕된 말일세.

숱하게 남은 슬픔을 다 말할 곳이 없어

아직도 눈물 흘리며 지나간 자취를 기억하네.

 

庚子正月十九日生女。頎然且異。至今年五月十七日病亡。筆以哭之。

曾知煩惱本無根 種子生從恩愛門

惻惻我懷猶可緩 哀哀母哭不堪聞

須臾便滅是眞語 欲與俱亡爲妄言

萬種餘傷無處說 涕零尙記剜舟痕

Ⅰ-051) 조(趙) 목감(牧監)을 곡(哭)함 (두 수)

Ⅰ-051-01)

젊은 시절의 재기는 온 고을에 으뜸이었고

늙은 시절의 청빈은 숨어사는 이보다 뛰어났네.

명리 때문에 허망함을 따르지 않고

선교(禪敎)에 의지해 진리 닦기를 즐겼네.

슬프게도 북망산에 나비 되어 날아가니

아마도 서방 세계에 머물며 주인이 되시겠지.

눈물 흘리며 무덤 풀을 내 어찌 보랴

뒷날 찾아와서도 다시 수건 적시리.

Ⅰ-051-02)

병 속의 새가 갑자기 날아가니

석화(石火)가 빛이 없고 풀잎의 이슬도 말랐네.

모였다 흩어지고 났다 죽는 것이 원래 정함 없으니

부귀와 공명이 다 부질없네.

산도 슬픈 빛을 머금어 소나무 난간에 이어지고

시냇물 목 메인 소리가 대 사립을 둘러 흐르네.

황천길 막지 못함을 일찍이 알았건만

우리에게 끼친 정으로 눈물이 옷을 적시네.

 

哭趙牧監(二首)

少年才氣冠鄕隣 晩節淸貧押隱倫

不以利名常逐妄 且憑禪敎好修眞

悲凉北枕飛蝴蝶 留滯西方作主人

淚葉豈應看宿草 尋蹤異日更沾巾

 

縠穿甁雀忽驚飛 石火無光草露晞

聚散生亡元不定 功名富貴盡爲非

山舍慘色連松檻 溪送愁聲遶竹扉

早識九原難可作 情鍾我輩共沾衣

Ⅰ-052) 스스로 읊음

전생의 습기(習氣)가 아직 가시지 않아

세상 깔보는 마음이 갈수록 더하네.

이 잡던 이야기들을 땐 쓰라렸고

소먹이며 부르던 노래 생각할 땐 서글펐지.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연명(陶淵明)이 그립고

애써 공 이루던 복파장군(伏波將軍)이 우습구나.

시비를 잊으려면 역시 술이 있어야 해

구름과 달 더불어 맘껏 취하고 싶네.

 

自詠

生生習氣未消磨 傲世心懷日更多

聞道悲辛捫蝨話 追思轗軻飯牛歌

歸來適意希元亮 勤苦成功笑伏波

攻破是非猶有酒 欲將雲月醉無何

Ⅰ-053) 남쪽 계곡 버드나무 아래 시원한 곳을 찾아 자고천(鷓鴣天)을 지으니, 계모임의 장공(張公)과 이공(李公)이 생각났다 (두 수)

Ⅰ-053-01)

양쪽 언덕 늘어진 버들 그림자 바라보다

온종일 서늘함 따라 돌아갈 줄 모르네.

한가한 몸 즐거운 곳이 바로 지금이니

명리(名利)의 땅에 살던 것이 그릇됨을 알겠네.

Ⅰ-053-02)

아지랑이 막 걷히고 해도 기울었는데

지팡이에 기대어 이따금 한숨 쉬네.

옛 친구들 솔숲의 흙이 되었으니

세상과 어긋난 나를 그 누가 알아 주랴.

 

南谿柳下追凉。作鷓鴣天。憶契內張趙二公(二首)。

夾岸垂楊弄影微 追凉盡日却忘歸

身閒樂土知今是 跡寄名場悟昨非

 

初收暮靄轉斜暉 倚筇時復一悽悕

故人化作松間土 誰識吾行與世違

Ⅰ-054) 풀벌레

명아주 평상에 벌레 우니 벌써 가을인가.

초당에 밤기운이 청명하구나.

찍찍 울음소리 홀연히 들려오니

당당하게 흘러가는 세월만 탄식하네.

오동나무 우물가에 벌레소리 들리자

창가 외로운 베개에 수심 깊어지네.

푸른 등불 서재에 비바람 뿌리자

벌레 소리에 시인은 다락에 기대었네.

 

草虫

虫弔藜床序已秋 草堂良夜氣淸幽

忽聞【口則․口則】聲音急 却歎堂堂歲月流

聲緊孤梧金井畔 愁深隻枕玉窓頭

一軒風雨靑燈火 爲爾騷人獨倚樓

Ⅰ-055) 칠석(七夕)

견우 직녀 오래 못 만났다고 아쉬워 말게나.

이날의 약속만은 만고에 끝이 없네.

달나라 궁전 구름 누각에서 만나

금 북과 옥 가마를 함께 멈추었네.

구슬 계단 밤 빛은 즐거움을 바치는데

은하수 새벽빛은 이별을 재촉하니,

실 꺼내어 바늘 꿴 사람이 그 얼마던가

맑은 길 쳐다보며 다시금 기뻐하네.

 

七夕

莫嫌牛女久相違 萬古無窮此日期

月殿雲樓相會處 金梭玉輦共停時

瑤階夜色供歡樂 銀漢晨光促別離

披縷貫針人幾許 俾看淸路更軒眉

Ⅰ-056) 앞의 운(韻)으로 시 두 수를 지어 송(宋) 목백(牧伯)에게 올렸다.

Ⅰ-056-01)

아! 내 일이 뜻대로 되지를 않아

출처(出處)와 희비를 예측할 수가 없네.

갑자기 병들어 몇 달을 지내고 보니

찬 물에 자라같이 오그라들었네.

온갖 쓰라림을 말할 수 없고

만 가지 걱정이 잠시도 떠나질 않네.

어제도 세금 내라 독촉받으니

가난한 살림살이에 눈썹 펼 틈도 없네.

Ⅰ-056-02)

스스로 저지른 잘못은 피할 길도 없으니

화복(禍福)이 기약 없음을 이제 알겠네.

뜻밖의 재앙이 갈수록 많아지고

경치 좋은 시절도 다 놓쳤구나.

본래 마음이 게으르고 옹졸한데

이제는 두 다리마저 비틀거리니,

아침 저녁으로 은혜만 바라는 구구한 마음

마치 못난 여인이 억지 눈썹 그리는 것 같네.

 

用前韻作二詩呈宋牧伯

却嗟身事與心違 出處悲歡豈預期

忽作病夫經數月 有如寒鼈縮多時

百般辛苦難能釋 萬種憂愁不暫離

昨日差人催納布 何當白屋可伸眉

 

自孼由來不可違 方知禍福本無期

偶逢災厄尤多日 辜負風烟正好時

從此片心成懶拙 至今雙脚尙支離

望恩朝暮區區意 還似無鹽强畵眉

Ⅰ-057) 송(宋) 목백(牧伯)의 화답을 받고 다시 차운함 (세 수)

Ⅰ-057-01)

인자한 성품에 청백하게 다스려

재상의 남다른 은총을 지금 받으시네.

다니는 곳마다 바지가 다섯이라 노래 부르니

칼 세 자루 꿈을 비로소 믿게 되었네.

덕에 감화된 사람마다 아름답다 일컬으니

은혜를 입고서야 그 누가 떠돌 걱정을 하랴.

선정한다는 소리가 궁전까지 들리면

겹눈동자와 아름다운 눈썹에 기쁨이 넘치시리.

Ⅰ-057-02)

참되게 살아가자니 세상과 맞지를 않아

창해에 가서 안기생(安期生)을 만나고 싶네.

젊은 시절 행세가 이러하니

장성한들 공명을 언제 이루려나.

일에 부딪치면 백주(柏舟)편을 생각하고

정을 느끼면 서리(黍離)편만 읊는다네.

저 의지할 곳 없는 무리들을 보게나

눈썹에 뜸을 떠도 병 고치기는 어렵구나.

Ⅰ-057-03)

어린 시절의 소원을 장성해서 못 이뤘으니

궁달(窮達)은 원래부터 바라지도 않았네.

기이한 재주 없으니 쓰일 곳도 없지만

마음 바르면 때를 만나기 마련일세.

흰 구름 흐르는 물에 숨어 지내니

밝은 달 맑은 바람도 함께 떠나질 않네.

온갖 생각을 누구와 말할 수 있나

한 잔 술에 잠시라도 눈썹을 펴볼까 하네.

 

牧伯見和。復次韻(三首)。

慈愛淸平共莫違 黃扉異寵已當期

行看五袴歌騰處 始信三刀夢破時

感德人皆稱成美 飽恩誰復歎流離

政聲傳聞承明殿 喜溢重瞳八彩眉

 

悃愊無華與世違 欲尋倉海訪安期

早年行止由斯道 壯歲功名在那時

觸事每思舟汎汎 含情空詠黍離離

請看無告無扶類 刺舌猶難兎灸眉

 

幼年心願壯年違 窮達由來未敢期

才本無奇無用處 心如有道有逢時

白雲流水還堪隱 皎月淸風共不離

百爾所思誰與說 且憑盃酒暫開眉

Ⅰ-058) 도경선사(道境禪師)의 시에 차운함

스님께서는 조계(曹溪)의 원로신데

법희식(法喜食) 자시길 좋아하시네.

고칠 것도 닦을 것도 없어

선인(善因)을 일찍이 심으셨네.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바른 생각 잠시도 쉬지를 않고,

단정히 앉아 진여(眞如)를 깨달으니

육식(六識)이 모두 비어버렸네.

아! 나는 무엇 하느라고

이 이치를 익히지 못했던가.

괴로움 바다에 돌아다니면서

지리한 생활만 계속해 왔지.

언제나 눈과 귀에 따라

소리와 빛에만 얽매였었지.

스님께 한 말씀 얻기 바라노니

실상(實相)을 어디에서 얻어야 하리까.

 

次道境詩韻(禪師之鑑)

師本曹溪翁 好湌法喜食

無訂亦無修 善因曾所植

於四威儀中 正念不消息

端坐悟眞如 虛閑是六識

差予欲何爲 此理未純熟

役役苦河中 瀾漫且狼藉

常隨眼耳根 局於聲與色

願師垂一言 實相從何得

Ⅰ-059) 신(辛) 사주(社主)를 곡(哭)함

인생이 허깨비 같음을 일찍이 알아

마침내 조사(祖師)의 선(禪)을 닦아 얻었으니,

티끌에서 벗어난 깨끗한 마음은 빙호(氷壺)의 달이고

세상을 피해 한가로운 몸은 설악(雪岳)의 하늘일세.

절 아래 눈과 바람 일어나고

유루(庾樓) 앞에 거문고 꿈이 끊어졌으니,

지난 일 생각해봐야 이미 묵은 자취라

흰 구름 푸른 산도 함께 슬퍼하네.

 

哭辛社主

早識浮生夢幻緣 晩年參得祖師禪

出塵心淨氷壺月 遯世身閑雪岳天

玉麈風輕祇樹下 瑤琴夢斷庾樓前

回頭往事成陳跡 雲白山靑共慘然

Ⅰ-060) 유곡(幽谷) 굉(宏) 스님이 상원사(上院寺) 주사굴(朱砂窟) 서쪽 봉우리에 암자를 새로 짓고 이름을 무주암(無住庵)이라고 했는데, 그 높고 뛰어난 경치를 아름답게 여겨 시 한 수를 지어 굉(宏) 스님에게 올렸다.

새 암자 지어 놓고 도 닦는 대사께서

오가는 흰 구름 내려보며 다니네.

눈은 위 아래 머나먼 허공과 통하고

마음은 삼천 세계가 활짝 트였네.

바람 고요한 찻마루엔 연기만 자욱하고

밤 깊은 선탑엔 달빛 길이 밝구나.

스님 말없이 앉아 무주(無住)를 관하시니

무주의 그 마음은 어디에서 나오시나.

 

幽谷宏師於上院寺朱砂窟之西峰。新搆一菴。名之曰無住。嘉其高絶。作一首呈于宏上人。

締搆新菴養道情 俯看來往白雲行

眼通上下虛空遠 心豁三千世界平

風定茶軒烟自鎖 夜深禪榻月長明

上人燕坐觀無住 無住心從甚處生

Ⅰ-061) 12월 17일. 동년(同年) 정도전(鄭道傳)이 찾아와서 지어준 시에 차운함

◎ 정도전

동년인 원군이 원주에 숨어사니

다니는 길 험한데다 산골도 깊구나.

멀리서 온 나그네 말에서 내리자

겨울 바람 쓸쓸하고 날은 저물었네.

반갑게 한번 웃으니 그윽한 뜻이 있어

술잔 앞에서 다시 마음을 털어놓았네.

나는 높이 노래 부르고 그대는 춤추었으니

이 세상 영욕을 이미 잊었네.

十二月十七日。同年鄭道傳到此贈予詩云。

同年元君在原州 行路不平山谷深

客子遠來已下馬 朔風蕭蕭西日沈

一笑欣然有幽意 尊酒亦復論是心

我唱高歌君且舞 榮辱自我已難諶

次韻以謝

 

그대와 함께 급제한 지가 몇 해 되었나

사귄 도리가 얕은지 깊은지 따질 것도 없게 되었네.

제각기 일에 끌려 두 곳에 있지만

사람 만나면 상세히 안부 물었지.

오늘 만남은 하늘이 시킨 일이니

마시고 웃으며 마음을 털어놓세나.

그대여! 돌아갈 길을 재촉 마시게

우리의 이 뜻을 자중하시게나.

 

與君同榜如隔晨 交道不復論淺深

各以事牽在兩地 逢人細問浮與沈

今朝邂逅天攸使 開尊且喜細論心

公乎公乎莫催轡 此意自重誠之諶

Ⅰ-062) 임기가 차서 서울로 돌아가는 송(宋) 목백(牧伯)을 전송함 (두 수)

Ⅰ-062-01)

어지러운 시절에 우리 백성을 잘 다스리어

밥 짓는 연기가 여염집에 오르며 은혜와 사랑이 새로웠네.

임기도 끝나기 전에 은총 받고 불려 가시니

수레채 잡고 울부짖는 백성이 많기도 하네.

Ⅰ-062-02)

정치란 본래 백성을 잘 기르는 것

공의 맑은 덕에 날이 갈수록 감화가 새로워라.

오늘 아침 깃발 돌려 서울로 돌아가신다니

축수하는 이 심정 남보다 갑절일세.

 

奉送宋牧伯政滿如京(二首)

時當世亂撫吾民 烟火閭閻惠愛新

不待瓜期承寵喚 攀轅號泣幾家人

 

政㝡由來在養民 感公淸德日惟新

今朝返旆朝天路 祝壽深情倍衆人

Ⅰ-063) 동년(同年) 김비(金費)가 보내 준 시에 차운함

Ⅰ-063-01)

숨어사는데 뜻을 둔 지가 이제 겨우 십 년

우물 속에서 하늘 보는 게 늘 부끄러웠지.

오늘 아침 홀연히 어진 동방(同榜)을 만나니

분수 밖의 하늘과 땅이 정말 넓기도 하구나.

Ⅰ-063-02)

바위 골짜기에 살아온 지가 몇 해 되었나

초파리를 없애며 독 속의 하늘을 쳐다보았네.

한 잔 술 밖에는 영욕이 없으니

분수 따라 한 평생을 즐겁게 살리라.

 

次同年金費所贈詩韻

有意遐窮僅十年 常嫌眼界井觀天

今朝忽遇賢同榜 分外乾坤政豁然

 

巖谷棲遲度幾年 醯鷄烹割瓮中天

一尊酒外無榮辱 隨分生涯獨快然

Ⅰ-064) 동년(同年) 안중온(安仲溫)이 보내준 시에 차운함 (세 수)

Ⅰ-064-01)

재주가 뛰어난데다 글 솜씨까지 민첩해

일찍이 임금 앞에서 칙서를 받들었지.

원컨대 공거(公車)를 향해 한 번 천거해 주기를

산림에도 세상 구제할 선비가 또한 있으니.

Ⅰ-064-02)

지팡이 짚고 그윽한 곳 찾다가 언덕에 오르니

눈 앞의 봄빛이 모두 새 단장일세.

꽃다운 봄빛도 날이 많지 않으니

석양 멈춘 곳이 어딘지 물어보네.

Ⅰ-064-03)

주나라 무왕이 강태공 낚시를 거두게 했고

촉나라 임금도 공명의 집을 세 번이나 찾았지.

가시나무 숲이라고 지란(芝蘭)의 향기가 없을손가.

산길이 싫다 말고 내 집을 찾아주소.

 

次安同年仲溫見贈詩韻(三首)

尤能吏幹捷文材 曾是君門受勅廻

願向公車煩一薦 山林亦有濟時才

 

策杖尋幽陟彼崗 眼前春色摠新粧

十分芳意無多子 且問何方駐夕陽

 

周后一收姜叟釣 蜀君三顧孔明廬

棘林豈欠芝蘭馥 莫厭山程訪我居

Ⅰ-065) 동년(同年) 안중온(安仲溫)의 희우시(喜雨詩)에 차운함

가뭄을 씻어 멀리까지 뿌리고

바람에 섞여 가는 먼지를 적시다가,

주룩주룩 내리며 기름진 젖줄 흡족케 하니

구름 같은 벼이삭이 산뜻해졌네.

솔길엔 푸른 이끼가 돋아나고

연못엔 하얀 마름이 자라는데,

그 누가 알아주랴! 우산 쓴 나그네를

무너진 집안에서 청빈을 즐기네.

 

次安同年喜雨詩

濯旱連遙塞 和風浥細塵

淋漓膏乳洽 薈鬱稼雲新

松逕生蒼蘚 荷塘長白蘋

誰知持傘客 破屋樂淸貧

Ⅰ-066) 병중에 회포를 적음

문 닫고 늘 앉아서 무슨 일을 했던가

들판의 스님같이 한적하게 지내네.

게을러서 언제나 세속의 웃음거리 되고

병 잦아 친구 드문 게 한스럽긴 해도,

샘과 바위 즐기니 그 밖엔 마음에 없어

한 바구니 밥 한 바가지 국에 즐거움을 부쳤네.

베개 맡에 시원한 바람 불고 난간에 달이 밝아

임금 덕을 노래하며 누워서 책을 읽네.

 

病中書懷

杜門長坐事何如 閒寂還同野衲居

懶重每逢時俗笑 病多深恨故人疎

分甘泉石心無外 樂寄簞瓢興有餘

一枕淸風一軒月 詠歌君德臥看書

Ⅰ-067) 1361년(신축) 11월 홍두적(紅頭賊)이 왕경(王京)에 침입하였다. 나라에서 임시로 도읍을 옮기고자 대가(大駕)가 남행하여 복주(福州)에 머무셨다. 명하여 평장사(平章事)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摠兵官), 평장사(平章事) 안우(安祐)를 상원수(上元帥), 정당문학(政堂文學) 김득배(金得培)․찬성사(贊成事) 이방실(李芳實)․동지밀직(同知密直) 민환(閔渙)․밀직부사(密直副使) 김림(金琳) 등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여러 장수와 양계(兩界) 육도(六道)의 마병(馬兵)․보병(步兵) 십만을 거느리게 하여. 1362년(임인) 정월 18일 바로 도성에 들어가 사면으로 협공하여 적을 완전히 소탕함으로써 우리 삼한(三韓)으로 하여금 왕업(王業)을 다시 일으키게 했다. 이에 절구 두 수를 지어 태평성대를 축하한다.

Ⅰ-067-01)

북쪽 오랑캐의 간교한 꾀가 크지가 않아

우리 나라 융성한 왕업이 다시금 무궁해졌네.

피비린내 나던 칼과 창, 티끌까지 고요해지니

사해 백성 편안한 것이 한날의 공일세.

Ⅰ-067-02)

넘친 충성 뛰어난 의기 몇몇 영웅들이

도성에 진격하여 그 계책 끝없었네.

완고한 도적 쓸어 없애고 평정한 날에

칼과 창 거두어 놓고 논공행상이 한창일세.

 

辛丑十一月。紅頭賊兵。突入王京。國家播遷。大駕南巡。留住福州。命平章事鄭世雲爲摠兵官。平章事安祐爲上元帥。政堂文學金得培․贊成事李芳實․同知密直閔渙․密直副使金琳等爲副元帥。摠領諸將帥兩界六道之馬步十萬。於壬寅正月十八日。直至京城。四面合攻。掃蕩賊塵。使我三韓。復興王業。作二絶以賀太平云。

 

北寇奸謀未足雄 東韓盛業更無窮

腥膻釰戟風塵靜 四海民安一日功

 

輸忠奮義幾英雄 振旅京師計莫窮

掃盡頑兇平盪日 各收㫌戟竟論功

Ⅰ-068) 영친연(榮親宴)을 사례하여 김(金) 목백(牧伯)에게 올린 시와 짧은 서문(인 引)

【짧은 서문】외람되게 연방(蓮榜)에 올라서 분수에 넘치는 새 은혜를 받고 특별히 당음(棠陰)에 나아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은총을 받으니, 기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황송한 마음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우리 김목백께선) 위로 현명하신 임금을 받드시니 세간에 드문 보필(輔弼)이라, 일찍이 삼도(三刀)의 꿈을 꾸고 항상 “다섯 바지의 노래”를 들으셨습니다. 아전들의 횡포를 밝게 분별하시니 백성들이 소송하지 않았으며, 먼저 청백리의 도를 세우시니 아전들이 청렴한 위풍을 두려워했습니다. 송아지를 남긴 시묘(時苗)가 아니시면, 고기를 달아맨 양속(羊續)이십니다. 천고에 어깨를 견줄 자가 없으니, 천하에 그 누가 감히 흉내를 내겠습니까. 행차 머무는 곳에 천리 강산이 다 기뻐하고, 여염 백성들이 다시 살아나 저녁 짓는 연기를 서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집에 은혜가 가장 컸으니, 임금의 은총이 이미 재상의 문에 가까웠습니다.

백성을 걱정하느라 잔치도 소홀히 하니 반나절도 마음 터놓고 즐길 기회가 없었는데, 저를 위해 예의를 갖추어 일세의 성대한 잔치를 마련하셨습니다. 천금의 화려한 집을 열어 저의 늙은 어버이를 맞으시고, 하루의 비단 자리를 베풀어 높은 자리를 허용하시니, 옥잔과 구름항아리가 나열하고 흰 수염 흰 머리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온갖 놀이가 쉬지 않으니 모두 신선의 훌륭한 유희이고, 여덟 가지 소리가 차례로 울리니 모두 궁(宮)․우(羽)의 맑은 소리였습니다. 노래 소리 요란하고, 술잔도 낭자하게 벌어졌습니다. 즐거운 일과 좋은 날은 옛부터 자랑거리였으니, 지금의 이 성대한 잔치를 어디에 비하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제 학문이 몹시 황당하고 성품이 본래 우둔했는데, 이제 동곽(東郭)에서 피리 불던 재주로써 진번(陳蕃)이 맞이하는 의자에 앉았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나 귀로 듣는 것이 모두 만나기 어려운 승사(勝事)이니, 손이 춤추고 발이 덩실거리고 싶은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 깨끗한 즐거움이 어찌 끝나겠습니까.

제가 느끼는 즐거움이 세상의 즐거움과 다르고 보니 제 몸이 꿈속에 들어가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열 말의 좋은 술이 천리에 맛있고, 붉게 단장한 석 줄의 기생들이 일시에 돌아듭니다. 맘껏 취하는 때에 광간(狂簡)하다고 손가락질 당한들, 은혜와 영광은 끝이 없으니 이 감격이 어찌 다하겠습니까. 가득한 술잔을 사양할 수 없어, 지성으로 즐거워할 뿐입니다. 함께 일어나 은혜에 절하니 밤이 깊어지고, 은덕을 갚으려니 이 한 몸 다해도 가볍습니다. 지금의 이 정성으로 채찍이라도 잡고 싶으니, 뼈가루가 부서진들 결초보은(結草報恩)하려는 마음을 어찌 잊겠습니까. 지극히 포용해 주시는 마음에 몹시 감격하여 웃음거리를 올릴 뿐입니다. 시는 이렇습니다.

Ⅰ-068-01)

하늘이 백성 위해 우리 님을 보내셨으니

북원(北原) 고을이 이제 이미 순박하게 바뀌었네.

거문고 타면서 누운 누각엔 구름이 북쪽에 솟아나고

고삐 잡고 돌아오는 관아엔 아침 해가 늦어지네.

산 속 고을에 어진 이 수고한다고 부끄러워 마오

나라의 은총 다가온 줄 이제야 알겠네.

목마른 백성 모두들 은혜 물결을 누려

마음껏 헤엄치며 기쁨이 그지없네.

Ⅰ-068-02)

구름 맑고 연기 짙어져 봄이 한창인데

아가위나무 그늘 아래 화려한 잔치 베푸셨네.

주고받는 노래 한 곡조에 사람은 그림 같고

오가는 술 천 잔에 하루가 한 해 같네.

자리마다 축하 인사에 모두들 경사스러우니

이 가운데 광채가 가장 어여쁘네.

한 문중의 영광을 어찌 다 말하랴

태산 같은 은혜를 짊어지니 두 어깨가 무겁네.

 

謝榮親宴詩幷引上金牧伯

竊以濫登蓮榜。優承分外之新恩。特詣棠陰。別荷世間之異寵。不勝【懽+薨】忭。無任兢惶。恭惟云云。上達英精。間生碩輔。會破三刀之夢。常聞五袴之辭。明分雀鼠之庭中。民無獄訟。先置薤水之門外。吏畏威淸。若非留犢之時苗。應是懸魚之羊續。千古來無可肩者。一天下誰敢齒哉。軒盖所臨。千里江山皆有喜。閭閻再活。萬家烟火共相望。恩最重白屋之中。寵已迫黃扉之上。憂民疎宴樂。雖無半日之開懷。遇我備禮義。以爲一時之勝事。闢千金之華搆。邀我老親。開一日之錦筵。許容高座。玉斝雲罍兮羅列。霜鬚鶴髮兮欣歡。百戱亦未休。盡是神仙之善戱。八音無相奪。皆爲宮羽之淸音。歌吹喧闐。盃槃狼藉。肆筵設席今玆盛。樂事良辰古所誇。伏念學甚荒唐性多癡鈍。以東郭吹竽之技。受陳蕃下榻而迎。目所見耳所聞。皆是難逢勝事。手之舞足之蹈。不勝何限淸歡。樂旣異於塵間。身恐入於夢裏。十斗香醪千里味。三行紅粉一時廻。當淋浪酩酊之辰。爭指點狂簡之態。恩榮無極。感荷何窮。雖滿酌而肯辭。以至誠而樂與。共起拜恩侵夜出。欲將酬德殺身輕。在此霞誠。奚啻執鞭之願。從當粉骨。敢忘結草之心。多感包容之至哉。聊呈撫掌之資耳。詩曰。

天爲吾民遣我公 北原今已變淳風

彈琴臥閣雲生北 按轡廻衙日晏東

莫愧賢勞山郡裏 方知寵迫廟堂中

涸鱗共得恩波闊 游泳洋洋喜不窮

 

雲淡烟濃二月天 召棠陰下設華筵

霖鈴一曲人如畵 霞醞千杯日似年

座上獻酬俱可慶 箇中先彩最堪憐

一門榮遇夫何說 荷擔恩山重兩肩

Ⅰ-069) 조카 식(湜)이 보내 온 시에 차운함

백성 대하기를 어찌 함부로 하랴

백성은 바로 하늘이 내신 백성이란다.

그들이 바라는 것 주어야 하고

괴로움 많게 해서는 안된단다.

은혜와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

(사또라도) 길가는 사람처럼 보게 된단다.

너도 이제는 부모가 되었으니

백성을 자식처럼 보살피거라.

마음 흩어진 지도 이젠 오래 되었으니

너그럽게 용서하며 다스리거라.

공도(公道)에 합당한 인사라야

덕망이 남보다 뛰어나는 법.

이 마음으로 임금과 백성 대해야

내 할 일 하는 것으로 알거라.

우리 형님 이 세상 떠나신 지도

이제 벌써 열아홉번째 봄이니,

두어 자 높이 외로운 무덤에서

기쁜 마음이 저절로 넘치시겠지.

어두운 가운데서도 염원 있으니

어찌 천금 보배에다 비하랴.

나 이제 다행히도 여기 머물며

너의 경륜만을 빌고 있단다.

십 년 동안 운곡 골짜기에서

몸소 밭 갈며 자진(子眞)을 본받았지.

즐거움은 옛날 그대로인데

가난은 지난해보다 점점 더해지네.

네가 보내온 시 그 뜻이 두터워

읽고 나자 술에라도 취한 듯해라.

때때로 너를 좇는 꿈이

멀리 동쪽 바닷가를 둘러오지만,

두 곳이 너무나 떨어져 있어

소식마저 자주 듣기 어려웠지.

부디 소식이라도 자주 보내거라

문에 기대어 기다리는 어머니가 집에 계시니.

 

次姪湜所寄詩韻

臨民豈易忽 民是天生民

要須與所欲 毋使多艱辛

苟不施惠愛 視如行路人

爾今爲父母 保之如子身

散也今久矣 宜赦以循循

公道合人事 德望出于倫

以此致君民 是爲逢我辰

吾兄棄斯世 于今十九春

孤墳高數尺 喜氣應自新

冥冥間所念 奚啻千金珍

我今幸留滯 祝爾掌經綸

十年耘谷口 躬耕效子眞

樂猶昔時樂 貧甚去年貧

來詩意轉厚 讀之如飮醇

時時逐渠夢 遠繞東溟濱

所嗟兩懸隔 音問難頻頻

連連送書信 家有倚門親

Ⅰ-070) 김매는 늙은이의 노래

Ⅰ-070-01)

김 매는 이 늙은이 한 평생 가여워라.

겉치레 꾸미려하는 마음 없었지.

때때로 얼근히 취해 시나 읊으면

십리의 산과 시내가 동정하는 빛이었지.

Ⅰ-070-02)

김 매는 늙은이는 부질없이 나가지 않아

마음이 세상과 멀어졌네.

순박했던 옛 시대를 생각하면서

혼자 앉아서 허공에다 돌돌(咄咄) 두 글자만 쓰네.

Ⅰ-070-03)

김 매는 늙은이가 늙어가면서 병이 많아

귀밑머리도 드문드문 세어졌지만,

산을 마주하는 그 신세 유유해서

흰 구름 밝은 달을 한가롭게 즐기네.

Ⅰ-070-04)

김 매는 늙은이가 형 한 분을 잃어

황천에 가셨으니 다시는 만날 수 없네.

외로운 신세 그 누구가 어려움을 구해주랴

사마우(司馬牛)의 걱정보다도 더 많은데.

Ⅰ-070-05)

김 매는 늙은이가 올해 농사라곤

논밭 한 이랑도 갈지 않았네.

원래 내 배는 텅 비어 있어

채울 물건도 없고 보전할 물건도 없네.

Ⅰ-070-06)

김 매는 늙은이가 김 매지 않아

가라지만 어지럽게 우거져 있네.

하늘이 인물을 경계하지 않아

세속 교화시킬 현량이 아주 없구나.

Ⅰ-070-07)

김 매는 늙은이의 생애가 썰렁해

해마다 네 벽이 텅 비어 있네.

봄바람 가을달만 지니고 있어

모자람도 남음도 없네.

Ⅰ-070-08)

김 매는 늙은이가 하남(河南)에 처소를 얻었건만

게으르고 못난 탓에 시속에 맞지 않네.

세상을 깔보며 스스로 만족하니

세상이 비웃고 남들이 속인들 어찌하랴.

Ⅰ-070-09)

김 매는 늙은이가 권세와 이익을 생각지 않아

홀로 즐겁다가 불평하기도 하네.

본성에 따라 천성을 즐기는 일이야 어찌 하랴만

가진 것은 한 바구니 밥과 한 바가지 국뿐이라네.

Ⅰ-070-10)

김 매는 늙은이가 붓(管城子)을 잡기만 하면

미친 듯이 맘껏 흥겨움을 내쏟으니,

관성자(管城子) 또한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의 시루에 먼지 앉는 것 이상하다네.

 

耘老吟

耘老平生可憐 心無綵繪之飾

有時半醉高吟 十里溪山動色

 

耘老不曾浪出 心神與世疎闊

追思上古淳風 獨坐書空咄咄

 

耘老衰遲病多 蕭蕭兩鬢霜髮

對山身世悠悠 閑弄白雲明月

 

耘老曾離一兄 九原未可重作

孑然誰與急難 司馬牛憂不博

 

耘老今年農業 不耕一畝水田

由來我腹空洞 無物可容可全

 

耘老不耘禾穀 亂苗稂莠荒蕪

皇天不儆人物 化俗賢良絶無

 

耘老生涯廓落 年年四壁空虛

只有春風秋月 ○○無欠無余

 

耘老河南得所 疎慵不入于時

傲傲休休愚甚 任從世笑人欺

 

耘老全忘勢利 陶陶且或囂囂

導性樂天何敢 嗟嗟只有簞瓢

 

耘老聊將管城 發生十分狂興

管城且笑且言 怪爾一生塵甑

Ⅰ-071) 귀뚜라미를 읊다 (자고천 鷓鴣天)

바람 고요한 빈 뜰에 이슬방울이 맑은데

창 너머 우는 소리가 슬픔을 자아내네.

먼 길 떠난 나그네가 듣고는 시름 더하고

가난한 아낙네들은 어둠 속에 깜짝 놀라네.

초가을 밤이 벌써 삼경이나 되었는데

베틀 북 울리면서 먼동 트기를 기다리네.

슬프구나! 네 신세가 내 신세 같건만

이따금 하소연해도 들어주는 이가 없네.

 

促織詞(鷓鴣天)

風靜空階玉露淸 隔窓啾喞動哀情

征夫一聽應添恨 寒婦初聞忽暗驚

秋七月夜三更○ 弄鳴機杼到天明

却嗟爾事如吾事 往往呌闐無助聲

Ⅰ-072) 갈매기를 읊음

봄날의 강과 바다는 끝이 없으니

물결 따라 하루 종일 마음대로 오가네.

정해진 곳이 없으니 뜬 구름 같고

언제나 깨끗하니 정신이 흰 눈 같네.

마음이 얽매이지 않아 티끌 세상을 떠났고

비와 연기에 젖어 사니 고기잡이와 친구 되었네.

나 또한 평생 욕심을 잊고 사니

전날의 약속 저버리지 말고 날마다 친하세나.

 

白鷗詞

江海無涯浩蕩春 隨波逐浪自由身

浮雲態度元無定 白雪精神固未馴

心絶累格離塵○ 淡烟疎雨伴漁人

平生我亦忘機者 莫負前盟日相親

 

【위 열 일곱 수는 원고에 빠진 것인데 연월일(年月日)의 순서에 따라 여기에 붙여 둠】

(右十七首 逸於原稿 而以年月第次 係之于此)

Ⅰ-073) 1364년(갑진) 정월 17일. 눈이 내리다

하늘빛이 흐리다가 쌀쌀해지니

눈꽃이 땅에 덮이고 언 구름이 드리웠네.

매화꽃이 버들개지 같아 아름다운 시구를 찾고

하얀 띠가 은 술잔으로 보여 옛일을 생각하네.

모습을 지으며 옆으로 흩날리자 원근이 이어지고

허공을 비추며 모여들어 동서에 가득하니,

모르겠구나! 오늘 밤 산음(山陰) 달빛에

흥겨워 섬계(剡谿)를 찾을 사람이 그 누구일지.

 

正月十七日雪(甲辰)

天色陰沈成慘淡 雪華鋪地凍雲低

梅花柳絮探佳句 縞帶銀盃見舊題

作態斜飛連遠近 映空先集滿東西

不知今夜山陰月 乘興何人訪剡谿

Ⅰ-074) 도경산재(道境山齋)에 놀다

멀리 산 암자를 향해 푸른 골짜기를 찾아드니

푸른 바위 뿌리에 물 부딪치는 소리 맑구나.

그윽한 산의 봄이 좋아 나그네 발길 멈추고

낡은 절에 해가 기울자 스님이 문을 닫네.

골짜기 가득 연기와 노을이 자욱하게 잠기고

추녀 끝 소나무 잣나무에 푸른 구름이 감도니,

물외(物外)의 경치가 모두 기이해

잠시 티끌 세상 시끄러움을 잊고 서 있네.

 

遊道境山齋

遠訪山菴尋碧洞 水聲激激蒼巖根

幽山春好客留屐 古寺日斜僧閉門

滿洞烟霞紫氣鏁 遶軒松栢蒼雲翻

異跡奇觀皆物外 適來忘却塵間喧

Ⅰ-075) 안(安) 사호(司戶) 집에 몇몇 사람이 모여 술잔을 나누면서 시 한 수를 지어 이을생(李乙生) 선생에게 보임

그대가 압록강을 건너간 뒤부터

술잔 들고 그대 생각 아니한 적이 없었지.

끊어진 줄 이어주자 거문고 소리 새로워지고

바퀴 비녀장을 뽑아 던지자 우물에 물결 솟아나네.

단지 속에 망우물이 떨어지지 않으니

자리에 어찌 해어화가 없을손가.

내가 노래 시작하자 그대는 춤을 추니

좋은 날 이 즐거움을 자랑할 만도 하이.

 

安司戶家。五六人成小酌。作一首示李先生(乙生)。

一從君去鴨江涯 擧酒思君日益多

已續斷絃琴有韻 宜投脫轄井生波

尊中不盡忘憂物 座上何稀解語花

我欲放歌君起舞 良辰樂事可堪誇

Ⅰ-076) 도경(道境) 대선사(大禪師)의 장실(丈室)에 보냄

뽕나무에 오디 많이 여물고

밤꽃도 이미 늘어졌네.

둥지의 제비새끼들은 모두 젖 떨어지고

박(箔)에 오른 누에들은 실 얽기를 시작하네.

물상(物像)이 변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빠른 세월을 문득 탄식하니,

인간 세상에 마치 붙어사는 것 같아

우리네 인생이 참으로 슬프구나.

언제나 서글픔 느끼면서

사방으로 허덕이며 돌아다니니,

경치 좋은 곳에는 발 디디기 어렵건만

숨어 살다보니 눈썹 찌프릴 일이 없네.

티끌세상 얽매임을 벗어나지도 못하고서

부질없이 물과 구름을 찾아다니네.

가고 싶어도 아무런 계책이 없고

다시 놀러 가려다 기회를 놓쳤네.

하는 일 없이 긴 날을 보내고

좋은 시절을 어느새 지내버렸네.

춤추는 나비는 내 옹졸함을 비웃고

우는 매미는 내 어리석음을 호소하니,

모두들 천 섬이나 되는 한을 지녀

이 한 편의 시를 지었네.

선상(禪床) 앞에 받들어 올리노니

이 마음 모름지기 헤아려 주소서.

 

寄道境大禪翁丈室

桑林椹多熟 栗樹花已垂

巢鷰盡離乳 箔蠶初引絲

行看物像變 却嘆光陰移

人世恰如寄 吾生良可悲

悠悠長慘感 役役幾奔馳

勝地難容足 幽居欠蹙眉

未除塵土累 空懷水雲奇

欲往終無計 重遊早失期

徒然消永日 倏忽過良時

舞蝶欺予拙 鳴蜩訴我癡

相將千斛恨 題作一篇詩

奉寄禪床下 此心須細知

Ⅰ-077) 도경(道境) 대선사(大禪師)의 화운시를 받고 다시 차운함

도경(道境)이 바로 신선의 경지(仙境)이니

솔 그늘이 뜨락에 가득하네.

추녀 끝에는 차 연기 자욱하고

약초 밭에는 비가 부슬거리네.

한 골짜기가 넓고도 그윽하니

황홀한 삼청(三淸) 세계가 옮겨온 듯해,

길이 멀어서 티끌 세상과 끊어졌고

숲이 가까워 들새들만 슬피 우네.

다만 편히 쉬면 될 뿐이지

무엇하러 부질없이 돌아다니랴.

물 맑으니 귀 씻을 만하고

산 좋으니 눈썹 펼 게 기뻐라.

달은 구름과 함께 고요하고

사람도 지경 따라 기이하구나.

반드시 뒷날의 만남을 의논하세나

지난 약속을 이미 어겼으니.

가는 곳마다 경치 아름다우니

때 놓치지 말고 즐겁게 노세.

슬프구나! 내 본성이 성기고도 게을러

부질없이 어리석은 짓만 배웠으니,

아무런 계책 없음을 깊이 탄식하며

옹졸한 시나 바치는 게 부끄러워라.

앞으로는 명승지를 찾아가리다

한가한 맛을 옛날 일찍이 알았으니.

 

禪翁見和。復次韻。

道境眞仙境 松陰滿院垂

茶軒烟羃羃 藥圃雨絲絲

一洞寬平豁 三淸怳惚移

路遙塵俗絶 林近野禽悲

但可安棲息 何爲浪走馳

水淸思洗耳 山好喜伸眉

月與雲俱靜 人兼境㝡奇

必須謀後會 已過在前期

美景多隨處 歡遊要及時

嗟余本疎懶 徒自學愚癡

深歎無良策 空慙獻拙詩

擬將尋勝地 閑味昔曾知

Ⅰ-078) 늦가을 (두 수)

Ⅰ-078-01)

가을 산 짙은 빛이 언제나 좋아

참모습 그림으로 그리고 싶네.

곱게 물든 낙엽이 다 흩날려도

시냇가 소나무는 변함없이 푸르네.

Ⅰ-078-02)

단풍 물든 고개는 붉은 노을에 잠기고

갈대꽃 물가엔 흰 눈이 덮였는데,

한 떨기 국화가 적막하게 꽃을 피워

동쪽 울타리에만 가을이 다하지 않았네.

 

秋晩(二首)

長愛秋山色更濃 擬將圖畵寫眞容

霜林落葉渾飛盡 依舊靑靑澗底松

 

深鎖赤霞楓葉嶺 平鋪白雪荻花洲

菊叢寂寞金葩嫩 唯有東籬獨未秋

Ⅰ-079) 마전사(麻田寺)에 가서

티끌 세상 바삐 달리다 견딜 수 없어

암자를 향하느라 솔길 찾아들었네.

창가 달빛에 나그네 혼은 깨어나고

골짜기 노을에 학의 꿈은 한창일세.

고개 구름 벗삼아 맑은 흥취 더하고

뜨락 잣나무 마주앉아 지난 이야기 물어보네.

골짜기와 산 따라다니며 얻은 시구를

노을 향해 유쾌히 두세번 읽어보네.

 

遊麻田寺

塵土驅馳也不堪 特尋松磴訪僧菴

客魂已醒涵窓月 鶴夢初酣滿洞嵐

好伴嶺雲添逸興 更將庭柏問眞談

適來偶得谿山句 快向烟霞讀再三

Ⅰ-080) 동년(同年) 허중원(許仲遠)이 시를 보내왔으므로 글자를 나누어서 운을 삼아 28수를 짓다

Ⅰ-080-01) 개똥벌레(螢)

그대가 서쪽 봉황성을 향할 적에

정처 없는 발길이 물위의 마름 같았지.

새벽에 강가 정자를 건널 때 선뜻한 물은 아주 파랬고

저녁에 촌집에 들리면 먼 산이 푸르게 보였지.

우뚝 높은 절개는 가을 소나무 같고

빛나는 이름은 여름 난초의 향내 같았지.

서울에서 글 읽던 자리를 멀리 생각해보니

흰 눈이 환히 비춰 반딧불은 필요 없었지.

 

許同年仲遠以詩見寄。分字爲韻二十八首。

螢字

記君西向鳳凰城 蹤跡猶如水上萍

曉過江亭寒水碧 晩依村舍遠山靑

挺然高節秋松茂 赫爾英名夏蕙馨

遙想京都讀書榻 雪華輝映不須螢

Ⅰ-080-02) 창(窓)

오랫동안 연촉(蓮燭) 없이 난강(蘭釭)을 마주했으니

여관방 창가에서 생각 끝이 없었겠지.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본래 일정치 않으니

짝 잃은 외기러기를 슬퍼하지 마시게.

 

窓字

久違蓮燭對蘭釭 無限思量在旅窓

聚散由來難自定 莫嗟孤鴈未成雙

Ⅰ-080-03) 괴로움(苦)

세상 밖에서 부침(浮沈)해보니

산 빛만 고금이 없네.

사람의 마음은 아침 저녁이 다르니

진실하고 허망함을 어찌 헤아리랴.

그대의 시 한 수를 읽어보니

말이 왜 그리 괴로운지,

그대의 뜻은 천금보다 무겁지만

아이들 마음은 깃털같이 가볍다네.

원래는 피차(彼此)의 구분이 없으니

먼지 뒤를 따르는 개미 떼와 같다네.

겉모습만 보고 믿지는 말게나

행실을 취할 바 없으면 어찌하겠나.

내 인생은 풍류를 끊었으니

혼자 다니며 언제나 처량하건만,

술잔 들고 푸른 산을 대하면

즐겁게 노래 부르고 춤도 춘다네.

 

浮沉世間外 山色無今古

人心異朝昏 實虛那足數

看君一首詩 詞語何更苦

君意重千金 兒心輕一羽

元無彼此分 後塵如蟻聚

且莫信毛皮 所行無可取

我生絶風流 獨行常踽踽

把酒對靑山 陶然歌且舞

Ⅰ-080-04) 업(業, 금련 金蓮을 대신해 지음)

그대 보내고 그대 생각 아니한 날이 없어

맑은 눈물 줄줄이 붉은 뺨을 적셨지.

두 곳을 강과 산이 가로막았건만

밤마다 꿈과 혼이 산 넘고 물 건넜네.

아이와 집을 떠난 지가 몇 해나 되었던가

수심의 성은 몇 겹으로 둘러싸여,

난간에 기대어 머리 긁고 바라보며

근년에 겪은 악업(惡業)들을 탄식하네.

그대는 이제 오릉랑(五陵郞)이 되었으니

꽃과 달, 누대에 마음 흐뭇하겠지만,

새 사랑 생겼다고 옛 맹세 잊지 마시게

믿음을 어긴 사람은 후회한다네.

명심코 지난 허물을 돌아보시게

사람은 자기 눈썹을 보지 못하는 법이라네.

바라건대 힘써서 용문(龍門)에 오르시어

만리 구름 길에 영화를 떨치시게.

 

業(代金蓮)

送君無日不懷君 淸淚涓涓滿紅頰

雖然兩地隔江山 夜夜夢魂能跋涉

兒家離別知幾何 此別愁城最重疊

倚欄搔首獨含情 却嘆年來多惡業

知君去作五陵郞 花月樓臺心自愜

休將新愛負前盟 背信人難可追榻

銘心歷歷省愆尤 人自不能見其睫

但願努力到龍門 萬里雲衢穩跨躡

Ⅰ-080-05) 일(一)

선생은 남달리 뛰어나서

본래 영인(郢人)의 자질을 지녔었지.

장차 가진 포부를 펼치려고

같이 다니며 시필(詩筆)을 휘둘렀지.

마음이 같으니 도(道)도 같아서

금슬(琴瑟)처럼 잘 어울리고,

서로 마음속이 맑아서

티 하나 없이 정일(精一) 했었지.

어찌 제향(帝鄕)을 향해 가면서

내게 한 마디 인사도 없이 떠나셨나.

한스러운 건 다른 마음이 아니라

떠나는 날도 몰랐기 때문일세.

떠나간 길을 바라보니

강물은 멀고 푸른 산이 싸였네.

천금 같은 몸을 잘 지녀

평안하게 만사가 잘 이뤄지길 비네.

서울에서 옛날 알던 친구들

몇 사람이나 그곳에 있는지,

그대에게 내 안부를 묻거든

그럭저럭 지낸다고 일러 주시게.

 

先生有魁奇 本自懷郢質

將欲轉吾介 相從弄詩筆

心同道亦同 好合如鼓瑟

湛然方寸間 無雜而精一

胡爲向帝鄕 與我無告出

所恨非他情 不覺發行日

回頭歸去程 水遠靑山密

願保千金軀 平安加萬吉

京洛舊知音 幾人在華秩

憑君問吾行 報道無得失

Ⅰ-080-06) 추위(寒)

새로 보내준 시 한 수 말이 씁쓸하니

그대의 마음 편치 않은 걸 알겠네.

내게 그 사연 말씀하셨기에

남 몰래 흐르는 눈물 씻어내었네.

 

新詩一首語酸寒 看了知君意未安

卽與儂家說其故 諱人輕灑淚闌干

Ⅰ-080-07) 삶(生)

인간사를 자세히 생각해보니

처량하게 온갖 느낌이 나네.

떠오르고 잠기는 것이 날에 따라 다르고

모였다 흩어지는 것도 구름이 가는 것 같네.

생전의 즐거움만 취하면 그만이지

세상의 영화가 어찌 필요하랴.

이 생각을 말할 곳 없어

시로 써서 참마음을 부치네.

 

細算人間事 悽然百感生

升沈隨日在 聚散似雲行

但取生前樂 何須世上榮

此懷無處說 聊寫寄眞情

Ⅰ-080-08) 굽힘(枉)

사내가 뜻을 얻어 출세하면

덕음(德音)에 순량(循良)한다고 모두 존경하건만,

옛부터 현인 달사가 몇 사람이던가

명예가 뒤따름이 그림자와 메아리 같네.

이제 허군을 보니 뛰어난 재주를 지녀

남다른 언행이 크고도 넓은데다,

두텁게 익힌 시례(詩禮)에 여유가 있어

반드시 바른 사람을 쓰고 굽은 사람은 버리네.

온갖 행실이 맑은 위의를 지녔으니

그대가 우리 향당(鄕黨)에 속한 것 기쁘기만 해라.

아아! 나는 학문이 가벼운데다

마음 밭이 거칠어 잡초가 묵었으니,

문에 나가도 길 없어 어디를 가랴

때에 따라 부질없이 물상(物像)을 살펴보네.

밤 깊도록 오똑 앉아 그대 있는 곳 생각하니

때마침 밝은 달이 내 책상을 비추네.

 

男兒得意行於時 德音循良多敬仰

古來賢達知幾人 美譽相隨如影響

今看許子負雄才 言行離倫坦蕩蕩

敦詩厚禮有餘裕 必須擧直措諸枉

百爾所行盡淸儀 喜君已附吾鄕黨

嗟予小少學輕狂 心地茫然鏁榛莽

出門無路何所之 空自隨時觀物像

夜深危坐憶君居 時有皎月照書幌

Ⅰ-080-09) 점(占)

치악산(雉嶽山)은 높이 솟고

사천수(沙川水)는 철철 흘러,

물소리 언제나 그치지 않고

산 빛도 볼수록 싫지 않아라.

그 가운데 초가집 마주 서 있어

고즈넉하게 사립문이 언덕 위에 있네.

하루 아침에 주인이 궁궐로 뵈러 갔으니

산도 말없이 무언가 생각하네.

시내와 산들이 금의환향 원하리니

그대여! 계원(桂苑)의 봄빛을 일찍 차지하시게나.

 

雉嶽山形嵯峨 沙川水光瀲(氵+艶)

水聲長流不停 山色相看無厭

中有茅廬相對開 寂寂柴門臨古塹

一旦主人朝玉墀 山自無言如有念

溪山忙待衣錦還 願吾子 桂苑春光須早占

Ⅰ-080-10) 원(原)

헤어진 뒤에 그리워한 것이 몇 번이던가

꿈속의 혼이 밤마다 중원(中原)에 찾아가네.

곳곳마다 즐겁게 지낼 곳이야 있지만

만난다고 다 이야기할 사람 못되는 게 한스러워라.

그대는 날랜 솜씨 닦을 테니 부럽군.

오랫동안 산골에만 갇힌 내가 가여워라.

그대 생각하며 장안 가는 길을 돌아보니

비낀 해만 뉘엿뉘엿 먼 마을을 비추네.

 

別後思量發幾番 夢魂相覓到中原

雖逢處處堪行樂 却恨人人未與言

羨子方知修月斧 嗟余久載望天盆

爲君回首長安道 斜日溟濛照遠村

Ⅰ-080-11) 산(山)

도(道)가 곧으니 세상 길에 용납되기 어려워

한 평생 발자취를 물과 산에 맡겼네.

하늘과 땅 사이에서 높이 읊고 크게 취하며

외로운 구름 한가롭지 못함을 웃어 보네.

 

道直難容世路間 一生蹤跡寄湖山

高吟大醉乾坤裏 笑看孤雲尙未閑

Ⅰ-080-12) 박(薄, 연아 演雅)

맑은 하늘에 새가 날고

깊은 못엔 고기가 뛰노네.

꾀꼬리는 높은 나무로 옮겨서 울고

매가 가을 허공을 주름잡네.

기러기는 천리길에 편지 전하고

학은 깊은 못에 소리 들리네.

거미는 그물 치느라 처마에 달려 있고

누에는 실 빼느라 잠박에 있네.

닭은 홰 위에서 때를 알리고

까치는 담장 머리에서 기쁨을 알리네.

반딧불도 어둠을 없앨 수 있고

개구리 소리도 음악이 될 수 있네.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이르고

참새는 지저귀며 숲에 모였네.

살을 무는 모기는 주둥이가 길고

이슬 마시는 매미는 날개가 얇구나.

오르내리며 우는 것은 어린 비둘기이고

꿈틀꿈틀 가는 것은 자벌레일세.

창고 뚫는 쥐는 이가 강한데

수레 막는 버마제비는 팔이 약하네.

말똥벌레도 덩어리를 굴릴 수 있고

나비는 꽃술만 찾아 다니네.

제호조(提壺鳥)는 맛있는 술을 찾고

포곡조(布穀鳥)는 농사 짓기를 재촉하네.

귀뚜라미는 구슬프게 우는데

할미새는 어찌 멀리 떨어져 있나.

붉은 봉황은 높은 언덕에 울고

저녁 까마귀는 깊은 골짜기를 찾네.

나는 꼬리 끄는 거북이를 배웠지만

그대는 바다를 주름잡는 악어와 같네.

고래 물결 사이에도 흰 갈매기는 있으니

그 한가로운 신세에 내 몸 붙이고 싶네.

 

薄(演雅)

淸漢鳥飛行 深淵魚戱躍

鶯遷喬木啼 鷹向秋空掠

傳書千里鴻 聲聞九皐鶴

結網蛛掛簷 引絲蠶在箔

知時竿上鷄 報喜墻頭鵲

螢光可除冥 蛙樂堪爲樂

戾天有飛鳶 棲林多噪雀

噬膚蚊觜長 飮露蟬翼薄

低昻鳴乳鳩 屈伸行尺蠖

偸倉鼠齒剛 拒轍螗臂弱

蛣蜣能轉丸 蛺蝶尋花萼

提壺呼美酒 布穀催東作

蟋蟀苦呻吟 鷦鷯何落魄

丹鳳戾高崗 暮鴉投遠壑

我學曳尾龜 君如橫海鰐

唯有鯨波間 白鷗閑可託

Ⅰ-080-13) 행동(行)

그대여! 이 세상의 부귀와 현우(賢愚)를 보시게

출세와 은둔, 기쁨과 슬픔이 다 숙명일세.

대체로 악한 자는 그 재앙을 받고

선을 쌓은 자는 후손까지 복을 받는다네.

큰 집을 지니고 복록이 가득해도

그 본성을 끝까지 지니기 어려워라.

어질구나! 안회(顔回)는 어떤 사람이기에

누항(陋巷)에 살며 도시락 표주박에도 덕행이 온전했던가.

세상 사람들 다투어 권력가에게 미끼를 먹여

이익과 명예를 얻느라 서로 날뛰는데,

그 누가 알아주랴! 십 년 동안 등불 아래 가난한 선비가

홀로 경서(經書)를 붙들고 공맹(孔孟)을 바라는 줄이야.

다락에 기대어 때로 행장(行藏)을 탄식하다가

고요히 산과 물을 바라보며 길게 시를 읊네.

 

君看貧富與賢愚 出處悲歡皆宿命

大都爲惡受其殃 積善應當有餘慶

渠渠厦屋食千鍾 畢竟誠難保其性

賢哉回也是何人 陋巷簞瓢全德行

世人爭欲餌權豪 逐利求名競馳騁

誰得知十年燈下 一寒生 獨把經書希孔孟

倚樓時復嘆行藏 靜對湖山發長詠

Ⅰ-080-14) 이름(名, 완랑귀 阮郞歸)

한 구석 산 고을에 물과 구름이 맑아

시냇물 소리가 옛 성을 에워싸네.

흐르는 물에 먼지에 찌든 갓끈을 씻으니

이름 모를 산새들이 서로들 맞아주네.

오랫동안 서울에 머무는 허군을 그리워하다

훌륭한 이름 전해 듣고 기뻐하네.

부디 잘 있다가 빨리 돌아오길 바라노니

숲과 샘물도 변함없이 기다린다오.

 

名(阮郞歸)

一區山郡水雲淸 溪聲遶古城

臨流可以濯塵纓 幽禽相送迎

○思許子久留京 喜聞傳美名

願君安好速廻程 林泉無變更

Ⅰ-080-15) 부(不)

인생 백년은 시비(是非)의 한 판이니

내 마음 알아주는 그대가 친구일세.

흰 망아지는 내 마당에서 풀을 뜯어먹고

노란 꾀꼬리는 높은 버드나무에서 지저귀었지.

그 당시 즐겁던 일들이 이젠 다시 없으니

그 옛날 벗들이 지금은 어디 있나.

그윽한 회포를 누구에게 털어 놓으랴

자리 한 구석에 수염 허연 늙은이만 남아 있으니.

 

人生百歲是非間 知我何心是朋友

皎皎白駒食我場 喈喈黃鳥囀高柳

當年樂事更能無 往日交遊今在不

且問幽懷誰與開 座隅唯有蒼髥叟

Ⅰ-080-16) 식(識)

발걸음에 맡겨 작은 시냇가에 이르니

숲과 언덕이 저녁 빛으로 보이네.

새가 날아도 하늘 끝까진 못 가는데

사람 멀리 있으니 그 생각 그지없네.

지팡이에 기대 오랫동안 말 없으니

이 깊은 회포를 그 누가 알아 주랴.

집에 돌아와 짧은 노래를 지어

나의 한가한 소식을 대신 부치네.

 

信步小溪邊 林原看暮色

鳥飛天不窮 人遠思無極

倚杖久無言 幽抱誰能識

歸來成短歌 以寄閑消息

Ⅰ-080-17) 금(金)

고요히 서창(書窓)에 기대 두세 번 읊으니

이 맑은 시를 천금엔들 비하랴.

거룩한 임금께서 국 끓이는 솜씨를 내리신다면

재주와 덕이 이한림(李翰林)보다 뛰어나련만.

 

靜倚書窓三復吟 淸詩可以比南金

聖君若下調羹手 才德超於李翰林

Ⅰ-080-18) 연(蓮)

연못에 가득한 달빛 맑고도 곱고

나무에 얽힌 서리 깨끗도 하구나.

나그네길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니

시름 머금은 한 송이 가을 연꽃일세.

 

月滿錢塘淨麗 霜摧玉樹婢娟

客子遠遊不返 含愁一朶秋蓮

Ⅰ-080-19) 가(可)

깨어도 노래하고 취해도 노래하니

어설픈 내 행동이 세상과 등졌네.

굵은 베 누더기로 온 몸을 둘러싸고

십 년 동안 오막살이에 혼자 앉았네.

잠자코 지내자니 어리석은 듯하건만

출세나 은둔이나 어느 쪽도 좋아라.

궁달(窮達)은 본래 명(命)이 있는 법

소먹이며 노래한들 그 무엇하랴.

그대는 완사종(阮嗣宗)을 보지 못했던가!

좋고 나쁨을 입에 담지 않는 것이 화를 피하는 길이라네.

이제부터 세상 밖에서 노니는 데다 뜻을 두노니

창주(滄洲)에 가서 낚싯배 한 척을 사고 싶어라.

 

醒亦歌醉亦歌○ 疎散吾行與時左

麤繒大布穩纏身 十載蝸廬常獨坐

沈沈黙黙凡如愚 出處無可無不可

由來窮達命之然 何用飯牛歌轗軻

君不見阮嗣宗臧否不掛口 所以能避禍

從今有志方外遊 欲向滄洲買得釣魚舸

Ⅰ-080-20) 연민(憐)

농사걷이 끝나고 한 해가 저무니

빠른 세월이 가장 가련하구나.

지난 일 생각하면 별별 생각 많건만

임금을 도우니 그대가 바로 어진 이일세.

구름 걷힌 곡령(鵠嶺)에서 아침 해를 맞으니

눈 쌓인 오산(蜈山)에도 섣달 그믐이 가까웠네.

여관방 춥고 긴 밤을 어이 견디시나

옛 집의 청전(靑氈)을 멀리서 그리워할 테지.

 

農功已畢歲廻旋 鼎鼎流光最可憐

懷故意存吾有感 致君時至子爲賢

雲收鵠嶺迎朝日 雪擁蜈山近臘天

旅舍不堪寒夜永 定應遙憶舊靑氈

Ⅰ-080-21) 촛불(燭)

허군(許子)이 맑은 시를 읊으면

꽃바람이 빈 골짜기에 일었지.

여수(麗水)의 금처럼 빛을 숨겼고

형산(荊山)의 옥같이 값을 기다렸지.

칼을 보면서 깊은 술잔을 당기고

책을 뒤적이며 짧은 촛불을 태웠지.

우리의 사귐이 아교풀 같으니

끊어진 줄도 이을 수가 있으리.

 

許子哦淸詩 英風起空谷

韜光麗水金 待價荊山玉

看釰引深盃 閱書燒短燭

交道似鸞膠 斷絃猶可續

Ⅰ-080-22) 비단(錦)

그대는 참으로 훌륭한 선비

시를 지으면 비단을 짠 것 같았지.

즐겁게 취해 한 번 읊으면

구름과 달이 높은 베개를 감돌았지.

 

吾子眞賢儒 作詩如織錦

怡然發醉吟 雲月繞高枕

Ⅰ-080-23) 병풍(屛)

잔잔히 물 흐르는 소리가 언제나 음악 아뢰고

구름과 산이 둘러싸며 멀리 병풍 펼쳤네.

한가롭게 사는 맛을 묻는 이가 있다면

물소리와 산 빛에 취해 깨지 못한다고 하리라.

 

流水潺湲常奏樂 雲山邐迤遠鋪屛

外人若問閒居味 聲色中間醉未醒

Ⅰ-080-24) 깊이(深)

그대는 보지 못했던가! 두목(杜牧)이 호주(湖州)의 약속 못지켜

꽃 지고 녹음 우거진 것을 스스로 한탄했지.

또 보지 못했던가! 최호(崔顥)가 그 해 얼굴을 보지 못해

붉은 복숭아 문밖에서 부질없이 상심했었지.

선생의 경우는 이 두 사람과 달라서

이르는 곳마다 모두 이름난 꽃숲이었지.

금 연못에 밤마다 연 캐러 가면

짙은 향내가 흰 옷자락에 젖어들었지.

평생 행락을 마음껏 즐겼으니

맑은 흥취가 얕고 깊고를 어찌 따지랴.

헤어진 뒤에 새로 지은 시가 문득 내 책상에 떨어지니

그리운 마음을 달랠 길 없네.

그대여! 말고삐를 빨리 돌리소.

나 혼자 차가운 이불에서 외롭게 만들지 마소.

 

君不見杜牧不及湖州約 自恨花殘成綠陰

又不見崔顥當年不見面 紅桃門外空傷心

先生所遇異於斯 到處皆是名花林

金塘夜夜採蓮去 苒苒濃香薰素襟

平生行樂盡適意 淸興何須論淺深

別後新詩忽然落吾案 相憶相思猶未禁

君乎君乎速廻轡 毋使儂家含憤守寒衾

Ⅰ-080-25) 처소(處, 나비가 꽃을 생각하는 격 蝶戀花)

나그네는 제 살 곳을 얻기 어려운 법

가을 연못가에서 몇 번이나 고향을 꿈꾸었던가.

날 저문 장안(長安)에서 얼마나 시름겨운지

높이 날아가는 외로운 새도 부러워했지.

나 또한 친구 없어 외로운 신세이니

고즈넉한 집에는 산새 소리만 들려오네.

옛 놀음이 문득 떠오르건만

지난 일 이제는 찾아볼 곳이 없네.

 

處(蝶戀花)

客裏應難爰得所 鄕思悽然夢繞秋蓮渚

日暮長安愁幾許 羨他孤鳥高飛去

我亦凉凉無伴侶 閒寂幽居只有山禽語

忽憶前遊多意緖 悠悠往事尋無處

Ⅰ-080-26) 비추임(照)

요즘 편지마저 드물고 보니

다시 만나 웃을 일만 기다려지네.

어느 날에야 부슬비 내리는 밤 평상에서

푸른 등불 마주하고 서로 바라볼거나.

 

邇來音信稀疎 竚待重遊一笑

何時細雨夜床 共看靑燈相照

Ⅰ-080-27) 어떠한지(何)

귀 씻고 몸 온전히 해 시끄러운 세상 피했던

영천(潁川)의 남긴 자취가 어떠한지 묻고 싶네.

표주박 버린 바위에는 그 당시 달이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겠지.

 

洗耳全身避世譁 穎川遺跡問如何

棄瓢巖畔當年月 尙至于今不屬他

Ⅰ-080-28) 정(情)

내 친구 허군(許夫子)은

형제같이 서로 친했지.

언제 술 한 통 앞에 놓고

다시 한 번 정겹게 이야기하려나.

 

吾友許夫子 相親如弟兄

何時一樽酒 重與細論情

Ⅰ-081) 유종원(柳宗元)의 문집을 읽고 (두 수)

Ⅰ-081-01)

회사(懷沙)의 일을 오래도록 못 잊어

강과 바다를 오가며 십 년이나 방황했었지.

머나먼 만리 밖 영릉(零陵)의 꿈이

몇 번이나 봄바람 따라 고향을 찾았던가.

Ⅰ-081-02)

거친 땅 귀양살이를 한스럽게 잊지 못해

소상강(瀟湘江)에 눈물 흘리며 귀밑머리 희어졌네.

지금도 맑은 밤이면 우계(愚溪)의 달이

선생의 취향(醉鄕)에 비춰 들겠지.

 

讀柳宗元集(二首)

長自懷沙事不忘 往還江海十餘霜

悠悠萬里零陵夢 幾逐春風到故鄕

 

竄逐窮荒恨未忘 對湘垂淚鬢如霜

至今淸夜愚溪月 夢照先生入醉鄕

Ⅰ-082) 1365년(을사) 초여름 외진 집(幽居)에서

나무 그늘이 장막을 친 듯 짙은데

산새들은 철이 돌아왔다고 자주 알려주네.

해당화 꽃이 한창 피었고

살구 열매도 이제 막 굵어지는데,

마음이 멀어지자 구름처럼 정처 없고

몸이 한가로워 하루 해가 길구나.

맑게 개인 창가에서 아름다운 시구를 찾아

새로운 시를 다시 짓는다네.

 

首夏幽居(乙巳)

樹影濃加幄 幽禽屢報時

海棠花正發 山杏子初肥

心遠雲無定 身閑日更遲

晴窓覓佳句 聊復寫新詩

Ⅰ-083) 형님께서 원(元) 서곡(西谷)과 함께 시를 화답해 보내셨기에 다시 두 수를 씀

Ⅰ-083-01)

꽃 숲 너머로 꾀꼴새 지저귀고

비가 막 개어 날씨 화창하네.

정원을 에워싼 버들은 연기 속에 가느다란데

지붕에 달린 복숭아 이슬 맞아 실팍하네.

나고 들면서 걱정하고 즐거워할 것 없으니

공명이 이르건 늦건 무슨 상관이랴.

바람 맞으며 짧은 머리를 빗다가

술 불러 오고 또 시를 읊네.

Ⅰ-083-02)

서곡(西谷)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는데

연못가 정자에 꽃다운 철이 지나가네.

못물이 줄어들어 연 줄기도 약해지고

바람이 훈훈해 약초 넝굴이 살찌네.

오가는 구름이 내 걸음을 가리고

산 빛은 자리 위를 비추는데,

무엇하며 노니느냐고 내게 묻는다면

차 다리고 또 시도 짓는다고 하겠네.

 

家兄與元西谷見。和復書二首。

鸎囀花林外 淸和雨霽時

遶園烟柳細 出屋露桃肥

行止無憂樂 功名任早遲

臨風梳短髮 喚酒且吟詩

 

卜居西谷裏 池舘過芳時

水減荷莖瘦 風熏藥蔓肥

雲光侵步武 山色照棲遲

若問逍遙處 煎茶且賦詩

Ⅰ-084) 춘성(春城) 향교(鄕校)의 여러 대학(大學)들에게 보냄

내가 떠나온 뒤에 세월이 너무나 빨라

예전에 놀던 자취 이제는 다 달라졌네.

즐거운 일은 해마다 더 줄어들고

갈수록 알아주는 이 없어 부끄러워라.

편지 끊긴 원천(原川)에게선 잉어도 오지 않고

꿈에나 광해를 찾으면 나비가 먼저 날아오네.

옛친구들이여. 모두들 평안하신지

석양 비치는 가을 산에 시름이 가득하네.

 

寄春城鄕校諸大學

烏兎相騰背我歸 舊遊蹤跡已爲非

共知樂事年來少 却愧知音日漸稀

信斷原川魚不到 夢尋光海蝶先飛

故人各各平安否 愁滿秋山照夕暉

Ⅰ-085) 나옹(懶翁) 화상(和尙)의 운산도(雲山圖)에 씀

푸른 산이 흰 구름 속에 은은히 비치며

멀고 가까운 경치가 낱낱이 다 보이네.

반 폭 화려한 종이에 마음은 만리이니

기묘한 붓이 신에 통한 줄 이제 알겠네.

 

題懶翁和尙雲山圖

靑山隱映白雲中 遠近奇觀一一窮

半幅華牋心萬里 方知妙筆卽神通

Ⅰ-086) 각림사(覺林寺) 당두(堂頭) 원통(圓通) 스님의 축상시(祝上詩)에 차운함

영롱한 서기(瑞氣)가 온 골에 가득하고

염불 소리가 멀리 흰 구름 가에 들리네.

산신령께서도 우리 임께 헌수(獻壽)했으니

덕화의 하루가 한 해처럼 길어지리.

 

次覺林堂頭圓通祝上詩韻

瑞氣蔥龍滿洞天 梵聲遙振白雲邊

岳靈已獻吾君壽 化日舒長政似年

Ⅰ-087) 꾀꼬리 소리를 듣고

새벽부터 푸른 나무에 꾀꼬리 소리

굽은 난간 가까이 차츰 들려오네.

푸른 누각 꿈에서 놀라 깨어나니

눈에 가득한 동산이 온통 봄빛일세.

붉은 꽃 반쯤 지고 봄은 저무는데

묵은 비가 막 개어 하늘 맑구나.

때마침 고운 햇빛에 날씨도 좋아

집 남쪽 골목 북쪽에 아지랑이 잠겼는데,

버들 그림자 옆을 뚫고 혀를 굴리니

규방 여인의 마음을 괴롭히는구나.

부끄럽구나! 나도 또한 푸른 산의 사람이라

푸른 산 두어 점을 이웃삼아 사노라니,

문 밖에 찾아오는 수레와 말이 적고

산새만 찾아와 서로 친하네.

포곡조(布穀鳥)가 처음으로 씨 뿌리라 알려주고

제호조(提壺鳥)도 자주 술 권하는데,

오늘 아침에 또 꾀꼴새 소리를 들으니

봄이 어디 갔는지 묻는 것 같네.

봄이 너를 버리고 돌아보지 않으면

네가 나를 벗삼아 지내도 좋으련만,

가여운 네 울음이 고즈넉한 시름 깨뜨리고

가녀린 네 울음이 알맞은 곳 얻었구나.

골짜기에서 나와 교목(喬木)으로 옮기는 게 바로 내 마음이건만

높은 바람을 어디서 빌려야 하나.

 

聞鶯

凌晨碧樹黃鸝聲 漸近曲檻嚶嚶鳴

悠然驚斷翠樓夢 滿眼林園春意生

千紅半落春欲暮 宿雨初收天氣淸

此時風日姸且好 舍南巷北晴烟橫

斜穿柳影轉饒舌 惱殺粧閣幽人情

愧予本是靑山人 靑山數點爲四隣

門無車馬經過少 只有山鳥長常親

初聞布穀報耕種 亦有提壺呼酒頻

今朝又聞黃鳥語 似問東君歸去處

東君背汝不回頭 汝可與吾爲伴侶

憐渠啼破寂寥愁 却羨綿蠻爰得所

出谷遷喬吾有心 借便高風在何許

Ⅰ-088) 1366년(병오) 늦은 봄

비 그치고 꾀꼴새 소리 재잘거리니

개인 산이 사방에 더욱 푸르네.

나무 그늘은 풀 길까지 덮었고

버들 그림자가 사립문을 가렸네.

술 마실 기회야 많지만

정원의 꽃이 흩날릴까 염려되네.

누가 증점(曾點)의 옷을 마련해주면

나도 무우(舞雩)에서 놀다가 오고 싶네.

 

暮春(丙午)

雨過鸎啼滑 晴山碧四圍

樹陰連草徑 柳影掩柴扉

尊酒宜多辨 園花恐亂飛

誰成曾點服 吾與舞雩歸

Ⅰ-089) 여름 구름

천 가지 모습으로 변하며 눈앞을 가로막더니

다시 기이한 봉우리 되어 들쑥날쑥 피어나네.

비를 품고 천둥을 타며 자주 뒤집히다가

별을 토하고 달을 숨기며 자유롭게 다니네.

 

夏雲

變成千狀眼前橫 更作奇峯勢不平

拖雨駕雷翻覆頻 漏星藏月卷舒行

Ⅰ-090) 돈 무늬 같은 이끼(苔錢)

뜨락에 가득 고요한 자취를 남기고

파릇파릇 서재를 비추는 모습 사랑스럽네.

만약 네 둥근 무늬가 세상의 보배라면

어찌 내 문 앞에 자라나 있으랴.

 

苔錢

滿庭留得寂寥痕 偏愛蒼蒼映小軒

若使圓紋爲世寶 肯容生長在吾門

Ⅰ-091) 구름 같은 벼(稼雲)

구름 같은 벼이삭 두루 패어 하늘 끝까지 닿으니

풍성한 빛을 보기만 해도 흐뭇하구나.

이 구름이 가을 들판에 바람이나 일으키지

어찌 새벽 산에 비 내릴 줄 알랴.

넘실넘실 동서 언덕에 가득하고

널리 위 아래 논에 깔렸네.

느지막이 낫을 들고 다 거둬들이면

집집마다 즐거운 잔치 풍년을 노래하리.

 

稼雲

稼雲開遍際晴天 飽看油然氣色連

只解飜風秋野外 豈能含雨曉山邊

溶溶已滿東西陌 浩浩平分上下田

晩向鎌頭都捲盡 萬家相慶樂豊年

Ⅰ-092) 기와(瓦)

누런 진흙을 다지느라 힘도 많이 쓴데다

굳고 단단한 그 모습 불구덩이를 거쳤구나.

높고 낮은 차례가 줄줄이 가지런하고

깔고 덮은 고랑은 위 아래로 트였네.

햇볕 쬐고 바람 쐬어 빛도 나지만

구름 덮이고 빗줄기 때리는 게 무정하구나.

무안(武安)의 당일엔 모두 우뢰 되었으니

천고에 사람들의 온갖 느낌을 자아내네.

 

陶盡黃泥力靡輕 堅剛本自火坑成

高低序次夫何錯 仰覆開溝也不平

日爍風磨仍有色 雲埋雨打似無情

武安當日皆爲震 千古令人百感生

Ⅰ-093) 벼루(硯)

십 년 글방 공부를 너와 벗삼았으니

일상생활의 값어치가 백금보다도 중하네.

먹 이빨에 자주 갈려 본 모습을 잃었지만

몇 번이나 붓을 적셔 옛 글을 배웠던가.

이슬 떨어뜨려 문지를 땐 자던 새도 놀랐고

얼음 깨어 씻을 땐 숨은 고기 달아났지.

네 덕분에 평생 학업을 성취하는 날

그 은공을 다 쓴다면 수레에 가득 실으리.

 

十載螢窓伴汝居 端居價重百金餘

累經墨齒虧新樣 幾沐毫頭學古書

滴露硏時驚宿鳥 和氷洗處東潛魚

憑渠若就平生業 寫得功恩可載車

Ⅰ-094) 칼(釰)

늠름한 칼날이 눈서리같이 차가와

번쩍이는 빛을 쳐다보기도 어렵네.

다행히 달인(達人)을 만나 옥을 파헤치고

훌륭한 장군 따라 일찍이 단에도 올랐지.

뱀을 벤 명예는 천하가 떠들썩했고

코끼리를 벤 이름에 세상이 다 놀랐네.

나 또한 널리 구한 지 오래 되었건만

배에 금 긋는 어리석음을 얻기 어렵네.

 

鋒鋩凜凜雪霜寒 閃電浮光未易看

幸遇達人曾掘獄 好隨良將早登壇

斬蛇壯譽騰天下 斷象英名動世間

我亦旁求年已久 刻舟愚甚得爲難

Ⅰ-095) 이슬(露)

달 밝은 하늘에 이슬이 막 내려

뜨락 나무에 엉긴 모습이 시원하구나.

해맑은 풀잎이 어찌 그리 깨끗한지

아롱다롱 솔가지에 잠시 머물다 가네.

매미 잎에 맑게 엉겨 빨아 먹을 만하고

거미줄에 방울 달려 정말 어여쁘네.

이슬방울 떨어지는 소리 귀에 자주 들리니

몇 사람이나 낮잠 자다가 깨어났을까.

 

露華初下月明天 偏重庭柯氣灑然

湛湛草頭何皎潔 瀼瀼松頂乍留連

澄凝蟬葉還堪吸 點綴蛛絲最可憐

雨後滴聲頻到耳 幾人驚起午窓眠

Ⅰ-096) 묵언(黙言) 굉(宏) 스님에게 답함

오똑 앉아서 잠자코 말 없으니

이것이 유마(維摩)의 둘 아닌 문(不二門)일세.

밝은 구슬 한 알이 광명을 나타내니

거리낌없는 시방 세계의 태평스런 자취겠지.

 

答黙言宏上人

兀然端坐黙無言 此是維摩不二門

一顆明珠光始現 十方無礙大平痕

Ⅰ-097) 조(趙) 총랑(摠郞)이 누졸재(陋拙齋)의 시에 화답한 것을 보고 다시 같은 운을 써서 바침

세월은 가는 대로 내버려두고

언제나 청한(淸閑)한 것이 내 소망일세.

도에 통하기를 당나라 이백(李白)이 일찍이 바랐고

한나라 장량(張良)은 제후에 봉해지는 것도 원하지 않았네.

세상 인연도 가을 구름처럼 담담해지고

들사람 흥취가 설날 술 향기와 어울어졌네.

이 몸은 이미 늙었지만 태평성대를 만나

젊은 시절 되찾을 길 없어 한스럽기만 하네.

 

趙摠郞見和陋拙齋詩。復用前韻呈似。

從敎歲月去堂堂 長得淸閑我所望

通道早希唐李白 封侯不願漢張良

世緣淡似秋雲影 野興融如臘酒香

身已老來逢盛代 挽廻强壯恨無方

Ⅰ-098) 2월 어느 날. 조계(曹溪) 참학(參學) 윤주(允珠) 스님이 영남에서 돌아와 내게 들렸다가, 그의 스승인 인각(麟角) 대선사(大禪師)로부터 받은 시를 보여 주였는데, (이 시를 보고) 상서(尙書) 화지원(華之元)이 차운하여 짓고, 나도 차운하여 시 두 편을 지었다.

◎ 인각(麟角) 대선사(大禪師)

한 알의 마니(摩尼) 구슬 그 빛이 번쩍여

둥근 빛은 형산(荊山)의 박옥(璞玉)에도 견주기 어렵네

하늘 끝 땅 끝까지 자유롭게 오가건만

옷 속에서만 찾았으니 큰 잘못을 저질렀네.

 

 

◎ 화지원(華之元)

오랫동안 진흙에 묻혀도 여전히 번쩍이건만

그 누가 돌 사이에서 박옥을 캐낼 줄 알랴.

대사께서 잘 다듬어 임금께 바치시면

백 번 바쳐도 단 한 번 그릇됨이 없으시리.

 

Ⅰ-098-01)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면서 항상 빛나니

원래 미옥(美玉)도 아니고 박옥(璞玉)도 아닐세.

삼천 세계를 환히 다 통했으니

어딜 돌아다닌들 잘못 있으랴.

Ⅰ-098-02)

다듬거나 갈지 않아도 그 빛이 그대로이니

이 구슬의 광채가 박옥보다 뛰어나네.

어찌 깊은 상자에 오래 감출건가.

제 값 받고 팔아도 잘못 없으리.

 

二月有日。曺溪參學允珠自嶺南來。過予因示師尊隣角大禪翁所贈詩曰。

一顆摩尼光爍爍 圜光難比荊山璞

天涯地角任縱橫 覓向衣中成大錯

華尙書之元次韻曰。

久混泥沙猶灼爍 何人解採石間璞

請師彫琢近承明 百獻吾知無一錯

次韻(二首)。

非色非空常炳爍 元非美玉亦非璞

廓然瑩澈大千中 動用周旋何有錯

 

不假磨礱輝景爍 此珠光彩勝良璞

何須韞櫝久深藏 待價沽哉眞不錯

Ⅰ-099) 도경(道境) 대선사(大禪師)의 편지에, “선생께서 불행히 지난해에 아들을 잃고 올해엔 또 부인을 잃는 등, 슬픈 일이 잇달아 일어나 그지없이 애통하시리라 생각됩니다. 너무 상심하실까 염려되어 인과(因果)의 말을 빌려서 시를 지어 바치니, 바라건대 마음을 다스리시어 슬픔을 푸소서.” 라고 하면서 시 두 편을 보내 왔는데, 말씀이 간절하여 내 마음에 느낀 바 있으므로 차운하여 네 수를 바친다.

◎ 도경대선사(道境大禪師)

물질은 원래 허하여 모습도 이름도 없는데

덩어리가 이뤄지면 미생(微生)에 의탁하네.

예나 지금이나 갑자기 왔다 가버리니

어찌 날마다 슬퍼하며 마음 상하랴.

 

◎ 도경대선사(道境大禪師)

은혜와 사랑은 좋은 인연이 아니라

죽고 사는 것에 서로 얽매여 있을 뿐,

달인(達人)은 텅 빈 세상에 홀로 거닐며

껍질 벗은 매미같이 살아 간다오.

Ⅰ-099-01)

세간의 소리와 빛이 모두 헛된 이름이니

사람의 일 그 누가 죽고 사는 것을 정했나.

온갖 슬픔이 잇달아 그치지 않아

몇 년 동안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네.

Ⅰ-099-02)

모든 것이 실체가 없는 모양이고 이름이지만

쇠망해 가는 걸 볼 때마다 별생각이 다 나네.

진중하신 우리 대사께서 비밀을 여시어

인과(因果)의 말씀으로 친한 정을 보이셨네.

Ⅰ-099-03)

같이 살다가 함께 늙는 인연이 없어

나 버리고 먼저 갔으니 이것도 업(業)일세.

허망함을 깨닫고 눈물 그치려 하지만

매미같이 우는 아이들 소리는 견딜 수 없네.

Ⅰ-099-04)

대사께선 여러 겁(劫)에 좋은 인연 심어서

세속의 인연을 이미 벗으셨네.

시골 지아비가 고뇌에 걸렸으니

가을 매미같이 마른 모습을 이해해 주시겠지.

 

道境大禪翁寄書曰。先生不幸。去年哭子。今又失主婦。悲哀相繼。痛甚無極。予懼其傷也。推因果綴言爲詩以奉贈。庶亂思而紓哀也。詩曰。

一物元虛絶相名 塊然成質托微生

忽來倏去非今是 何用哀哀日損情

又曰

恩愛殊非結好緣 死生纏縛互相牽

達人獨步淸虛外 處世還如脫蛻蟬

詞語切懇。感於予心。次韻奉呈(四首)。

世間聲色摠虛名 人事誰能定死生

萬種悲哀連不絶 數年無日不含情

 

都將無實假形名 每見衰亡百感生

珍重吾師開秘密 發明因果示親情

 

同居偕老也無緣 背我先歸業所牽

已覺妄因休洒淚 不堪兒哭似蜩蟬

 

羨師多㥘種良緣 脫却塵勞世事牽

應念野夫罹苦惱 羸形也似九秋蟬

Ⅰ-100) 김(金) 목백(牧伯)의 천음정(川陰亭) 시에 차운함

흐르는 물 앞에 두고 떠날 줄을 모르니

나무 그늘 시내 그림자가 가을을 갈무리했네.

들새도 어진 원님 덕화에 감화되어

언덕 너머에서 우짖으며 오래 머무시라 권하네.

 

次金牧伯川陰亭詩韻

穩坐忘歸對水流 樹陰溪影別藏秋

野禽亦感賢侯德 隔岸相呼勸久留

Ⅰ-101) 소(牛)

갈라진 발 뚫린 코로 인가(人家)에 있건만

평평한 들판 비탈진 풀 길에서 한가롭게 자라네.

뿔 두드리며 부르던 슬픈 노래야 알지만

돌 밟은 자국이 꽃 같은 줄이야 그 누가 알랴.

 

【(한 漢나라 무제 武帝) 원봉(元封, B.C. 110~105) 연간에 (한 백성이) 소를 바쳤는데, (그 소가 밟은) 바위 위의 자국이 꽃과 같았다.】

 

岐蹄穿鼻在人家 閒牧平原草路斜

但解悲歌長扣角 誰知踏石跡如花

 

(元封中奉獻牛石上之跡如花)

 

Ⅰ-102) 까치(鵲)

사람의 마음은 사물에 따라 달라지니

숲 속으로 날아드는 네 모습 가엾구나.

만약 내게 좋은 소식 전해 준다면

서쪽 추녀에서 네 마음껏 울게 하리라.

 

大抵人心逐物移 憐渠飛入樹高低

若將喜信傳吾輩 須向西軒自在啼

Ⅰ-103) 지루한 비 (두 수)

Ⅰ-103-01)

지루한 비가 보름이나 이어져

지친 몸으로 다락에 기대었건만,

주룩주룩 소리는 그치지 않아

적적한 생각을 거둘 수 없네.

돌길엔 황매(黃梅) 비가 떨어지고

시냇가 집엔 푸른 이끼가 가득하네.

문 밖을 나가도 길 어지러워

여기 저기 고인 물만 언덕 가득 흐르네.

Ⅰ-103-02)

반달이나 처마에 비 떨어지니

숲과 언덕 어디고 물소리 뿐일세.

지렁이는 풀 덮힌 길에 오르고

자라도 이끼 낀 뜨락에 기어드네.

지축(地軸)에서 파도가 새는지

하늘 표주박을 밤낮 기울이는지,

끝없는 구름이 위 아래 덮였고

서해와 동해가 서로 닿았네.

 

苦雨(二首)

苦雨連旬半 凄然㥘倚樓

浪浪聲不止 寂寂思難收

野逕黃梅落 溪堂綠薢稠

出門迷道路 潢潦滿原流

 

半月連簷雨 林原盡水聲

蛟螭升草陌 魚鼈入苔庭

坤軸波濤漏 天瓢日夜傾

一雲同上下 西海接東溟

Ⅰ-104) 석죽화(石竹花)

품위와 빛깔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언제나 우거진 풀 속에 있네.

비에 젖어 가는 잎 돋아나고

이슬에 젖어 고운 떨기 가지런하네.

그림자는 모래 둑 달빛에 어렴풋해도

향기는 버들 언덕 바람에 번지네.

누가 보고 즐기겠느냐 말하지 말게,

그 옆에 할미꽃이 있으니.

 

石竹花(蹲鴟花也)

品色雖云好 常依草莽中

雨沾生細葉 露浥亞芳叢

影淺沙堤月 香連柳岸風

莫言誰見賞 邊有白頭翁

Ⅰ-105) 1367년(정미) 6월. 목백(牧伯)께서 명령을 내려 남쪽 정자부터 북쪽 누각에 이르는 관도(官道) 좌우에 어린 소나무를 심게 하자 푸른빛이 저절로 줄을 이루게 되었다. 10년 뒤에 녹음을 이루게 되면 그 그늘이 얼마나 넓겠는가. (목백께서) 베푼 사랑을 노래하고 칭송할 자가 또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이에 시를 지어서 기록해 둔다

 

丁未六月。牧伯出令。自南亭至北樓官道左右。使種稚松。蒼蒼然自成列。且待成陰。十年之後。所庇幾何。歌頌遺愛者亦幾人乎。作詩以識之。

 

푸른 산에서 뿌리를 옮겨와

동쪽 서쪽 길가에 심었으니,

가는 잎은 은혜 비속에 함께 돋아나고

곧은 가지는 은혜 바람에 다투어 자라,

두 줄의 푸른빛이 눈과 서리를 이겨내고

몇 리에 걸친 맑은 소리가 관현악같이 들리겠지.

아전과 백성들에게 알리노니, 부디 잘 기르소.

그늘 이뤄지는 훗날에 어진 원님을 기억하소.

 

移根來自翠微巓 西種東栽一路邊

細葉共生恩雨裏 貞枝爭長惠風前

兩行翠色凌霜雪 數里寒聲咽管絃

爲報吏民須好養 成陰異日記吾賢

Ⅰ-106) 백운연(白雲淵) 장로(長老)의 시에 차운하다 (보내온 시에 아내를 잃었다는 뜻이 있었다)

어리석은 자는 허망되게도 생사에 얽매이고

어진 자는 밝은 마음으로 오가게 맡기니,

육문(六門)에 얽매여 불도를 못 깨닫고

삼계(三界)에 오가면서 유도를 모르네.

비결(秘訣)을 들어서 귀의할 길을 바랐더니

진종(眞宗)을 말씀하여 시름을 씻어 주셨네.

뼈에 절하거나 시체에 매질하는 것이 다 잘못이니

항상 통달한 이와 한가롭네 노닐고 싶네.

 

次白雲淵長老詩韻 (來詩有失婦之意)

迷倫逐妄輪生死 賢士明心任去留

纏縛六門無解釋 往來三界不知儒

願聞秘訣將歸道 爲說眞宗欲洗愁

禮骨鞭屍皆有失 常思達者與閑遊

Ⅰ-107) 12월 27일. 아내 무덤에 찾아가 술을 부어 놓고

구름이 산을 덮고 섣달 눈이 깊이 쌓여

사시나무 거센 바람이 용의 울부짖음 같네.

외로운 무덤 위에 석 잔 술을 따르니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이 옷자락을 가득 적시네.

 

十二月二十七日。酹家人塚。

雲擁山崖臘雪深 白楊風緊似龍吟

我來三酹孤墳上 不覺潛然淚滿襟

Ⅰ-108) 1368년(무신) 설날 아침 눈이 내리는데 원립(元立) 선생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므로, 이에 차운하여 답하였다.

◎ 원립(元立)

정미년(1367)이 끝나고 무신년(1368) 되었으니

동군(東君)이 태평스런 봄을 선포하네.

설날 아침의 경사를 그대는 기억하시게

풍년 들 징조로 많은 눈이 내렸으니.

Ⅰ-108-01)

달은 인(寅)월이고 날은 신(申)일인데

만리 하늘에 봄이 벌써 돌아왔네.

채색 구름이 눈을 뿌려 아름다운 기운 엉기니

새해 맞는 집집마다 경사스런 징조를 받아들이네.

Ⅰ-108-02)

그 누가 임금 향해 좋은 말씀 아뢰어

사군(使君)의 어진 정치를 따뜻한 봄같이 베풀게 할까.

넓은 은혜로 이미 양춘가절 맞았으니

그대와 나의 기쁜 마음 한결같이 새로워라.

 

戊申正朝有雪。元先生立作詩云(二首)。

丁未年終已戊申 東君布下大平春

元正吉慶君須記 先應豊祥密雪新

次韻答之

月是寅今日是申 天衢萬里已廻春

彩雲灑雪凝佳氣 納慶千門共履新

 

誰向承明爲善申 使君仁政暖如春

洪恩已合陽和力 君我歡情一樣新

Ⅰ-109) 정월 24일 서곡(西谷) 장(張) 상서(尙書)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도경((道境) 선사(禪師)가 만사(挽詞) 두 수를 지었고 목백(牧伯)께서도 두 수를 지으셨는데, 이에 차운하여 다음 네 수를 지었다.

◎ 도경선사 1

나이 팔십까지 살기는 옛부터 드물었건만

푸른 산에 혼자 누우면 만사가 다 그만일세.

만가(挽歌) 한 곡에 사람들이 흩어지고 나면

만사 종이만 낭자하게 사립문에 걸리겠지.

 

◎ 도경선사 2

십 년을 서로 따르면서 웃고 이야기했으니

남과 사귄 도리는 그 누가 공(公) 같으랴.

문수동 어구에 하늘 가득 눈이 내리니

말 위에서 술잔 나눈 것이 꿈속 같구나.

 

◎ 목백 1

맑은 봄빛에 아지랑이가 아득하니

가는 버들 새 부들풀이 곳곳마다 같구나.

술 익고 꽃이 핀들 누구와 함께 이야기하나

적막한 서곡(西谷)에는 슬픈 바람만 일어나네.

 

◎ 목백 2

장공(張公)께서 이제 구천(九泉)으로 가셨으니

술자리에서 힘찬 말소리를 다신 들을 수 없네.

눈물 씻고 생각하니 도리어 즐겁구나

날마다 어진 재상 모시고 꽃바람에 취했으니.

Ⅰ-109-01)

물위에 뜬 거품도 그림자 보이지 않고

초당도 이제 옛 주인이 아닐세.

팔십년 행락이 한낱 묵은 자취이니

쓸쓸한 달빛만 사립문을 비추네.

Ⅰ-109-02)

노래하고 춤출 때에 누구와 같이하랴.

술잔만 마주하면 우리 공(公)이 그리워라.

죽고 산 사람을 세어본 뒤에 머리를 돌려보니

흰 구름 속 푸른 산만 옛 모습 그대로일세.

Ⅰ-109-03)

슬픈 노래로 흰 구름 속에 영구를 보내고 나자

다시 만날 길 없어 슬프기만 하구나.

해마다 그리워하며 애가 끊어지겠지.

산언덕 소나무 달빛에 쓸쓸한 바람 일어나네.

Ⅰ-109-04)

황석공(黃石公)에게 병서(兵書)를 받아

한(漢)나라 도운 공과 명예는 누가 같으랴만,

마른 뼈 이미 황천의 흙이 되었으니

남기신 덕을 사모하는 우리들 한이 깊어라.

 

正月二十四日。西谷張尙書亡。道境作挽詞云(四首)。

年登八十古來稀 獨臥靑山萬事非

一曲挽歌人散後 紙牋狼藉掩荊扉

又云

十載相從笑語同 向人交道孰如公

文殊洞口漫天雪 馬上含杯似夢中

又次牧伯詩云

春光淡沲氣茫茫 細柳新蒲處處同

酒熟花開誰與語 寂寥西谷起悲風

又云

張公一去九泉中 酒席雄談豈更同

拭淚飜思還獨喜 日陪賢相醉花風

次韻。

水上浮漚影已稀 草堂猶是主人非

八旬行樂空陳跡 惟有荒凉月照扉

 

狂歌醉舞與誰同 對酒先當憶我公

點檢存亡一回首 靑山依舊白雲中

 

悲歌葬送白雲中 怊悵無因再會同

料得年年腸斷處 一崗松月起悽風

 

跪從黃石受兵書 佐漢功名孰並同

枯骨已爲泉下土 恨深吾輩慕遺風

Ⅰ-110) 2월 28일 새벽. 날이 개어 서교(西郊)로 나갔다

미끄러운 진흙탕 길에 말 가는 대로 달리는데

살구꽃 숲 너머 한 마리 비둘기가 우네.

연기 낀 푸른 언덕엔 아지랑이 걷히고

바람 잔잔한 맑은 시내엔 가는 물결이 이네.

구름 사이로 햇빛이 새어 무지개 빛 찬란하고

비 자국이 잎에 남아 이슬방울 분명해라.

이 가운데 무엇이 봄날의 흥취를 더하던가.

풀길 위아래가 꾀꼬리 소리일세.

 

二月十八日曉晴。到西郊。

泥滑長程信馬行 杏花林外一鳩鳴

烟沈翠麓晴嵐捲 風軟淸溪細浪生

日色漏雲霞錦爛 雨痕留葉露珠明

箇中何物添春意 草陌鶬鶊上下聲

Ⅰ-111) 밤비(夜雨)

짧은 꿈 막 깨어 일어나니

미친 바람이 숲을 흔드네.

등불 밖은 삼경인데 밤비가 내려

외로운 나그네 십 년 마음을 더하네.

역력한 빗소리 싫진 않지만

유유한 한(恨)이 더욱 깊어져,

여러 친구들은 어찌 지내나

나 혼자 슬픈 시를 읊네.

 

夜雨

短夢初驚起 狂風動樹林

一燈三夜雨 孤客十年心

歷歷聽無厭 悠悠恨益深

干君那箇事 獨自强哀吟

Ⅰ-112) 영남(嶺南)으로 가는 조계(曺溪) 참학(參學) 윤주(允珠) 스님을 배웅하는 시와 서문

【서문】부처님의 발자취가 세상에 계신 지 오래 되었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을 저술한 것이 경(經)이고, 보태어 이룬 것이 논(論)인데, 그 도(道)는 대개 효경(孝敬)에 근본을 두고 온갖 덕을 쌓아서 무위(無爲)에 귀결시킨 것이다. 부연해서 가르쳐 세상에 전한 것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하나는 선(禪)이고, 하나는 교(敎)이다. 교(敎)는 앞에서 말한 경(經)과 논(論)이고, 선(禪)은 (부처께서) 49년 동안 삼백회가 넘는 법회를 가진 뒤에 최후로 영산(靈山) 법회에서 꽃을 들어 보이셨는데 가섭이 미소를 지은 것이다. 그때부터 인도의 47조사(祖師)와 중국의 23조사가 서로 전수하여 아무리 사용해도 끝이 없었다. 경우에 따라 변용하고, 종횡으로 미묘하게 사용하여, 자타(自他)를 모두 이롭게 하는 것이 바로 선(禪)이다.

지금 스님께서는 일찍이 선도(禪道)에 뜻을 두고 조계(曹溪)에 자취를 붙여, 인각(麟角) 대선사(大禪師)의 문하에 노닐며 밤낮으로 복습(服習) 수행(修行)하여 덕의 근본을 심으셨다. 올해 정월에 서울 보제사(普濟寺)에 가서 담선회(澹禪會)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어머님께 문안드리기 위해 천릿길을 멀다하지 않고 찾아오셨으니, 이것이 어찌 효경(孝敬)에 바탕을 둔 행실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장차 한 마음으로 (닦아서) 무위(無爲)에 돌아갈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으리라.

어느 날 갑자기 스님께서 지팡이를 짚고 바랑을 짊어지고 맨 차림으로 나를 찾아와, “나는 지금 영남으로 가려는데, 선생께서 시 한 수를 지어 주시면 나그네길에 고적함을 달랠 수 있겠소.”라고 하시며, 동포(同袍) 스님인 인비(仁斐) 스님이 지어준 절구 한 수를 보여주셨다. 나는 본래 몹시 우둔한 사람이라 장구(章句)에 대해 마음 쓴 바가 없었으니 어찌 감당하랴만, 스님의 수행을 보고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내 마음에 감동된 바가 있었으며, 예의로써도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시에 차운하여 절구 2수를 지어 노자를 대신하고자 한다. 강을 건너고 산을 오르면서 만물을 구경하는 동안, 또는 슬퍼지거나 초연해지는 순간, 이 시를 읊으면서 경치를 보신다면 정말로 다행이다.

Ⅰ-112-01)

앞길에 늘어선 산을 낱낱이 세어보며

새벽 깊은 골짜기에 시냇물 소리 밟으시겠지.

맑은 연기 고운 풀 봄바람 길에

대지팡이 푸른 바랑 들사람 정에 어울리네.

Ⅰ-112-02)

구멍 없는 피리로 옛 곡조를 불고

줄 없는 거문고로 새 소리를 다루네.

연기 낀 덤불 속을 가고 또 가다보니

한 조각 뜬구름이 세상 밖의 정일세.

 

送曺溪參學允珠遊嶺南詩 (幷序)

佛之跡在乎世久矣。其留而存者佛之言也。言之著者爲經。翼而成者爲論。其道盖本乎孝敬。積以衆德。歸於無爲耳。敷演敎誠。傳於世間者。離爲二門。一曰禪。一曰敎。敎則前所謂經論是也。禪則四十九年三百餘會。最後靈山會上拈花。而示飮光微笑。自玆以降。西乾四七。東震二三。祖祖相傳。用之不盡。隨機應變。妙用縱橫。以利自他者是也。今有上人早留心於禪道。寄跡于曺溪。遊於隣角大禪翁之門下。晝夜服習。修而行之。以植德本。越今年正月。赴澹禪會于京師普濟寺。罷會而還。覲於慈堂。不遠千里而來。此其本乎孝敬者歟。若然則將一心歸無爲。到○○○必無疑矣。忽一日。乃手其杖肩其箱而過予曰。我今欲向嶺南。請子一句以爲行路破寂之資。仍示同袍禪者仁斐所贈絶句詩一首。僕頑鈍甚矣。於章句間無所用心。何敢當也。然觀其行聽其言。誠有感於予心者。由禮而不敢讓焉。次其韻作二絶以贐行。於其涉江登山摸狀物像悽愴超忽之際。以其所遇之景吟看。幸甚幸甚。

指點前頭列峀靑 曉晴幽谷踏溪聲

淡烟細草春風路 竹杖靑箱稱野情

 

無孔笛中吹古調 沒絃琴上弄新聲

行行好向煙蘿去 一片閑雲不世情

Ⅰ-113) 임(任) 상서(尙書)가 거문고를 타는 것을 듣고 쓴 시와 서문

【서문】내 속된 성품이 비루하고 거칠어서, 거문고나 비파에 일찍이 마음 쓴 적이 없었다. 그렇긴 하지만 음률을 조절할 줄 모를 뿐이지, 광․협(廣狹) 방․원(方圓)의 제도나 고․저(高低) 긴․완(緊緩)이 알맞은지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볼 수는 있다. 이것이 바로 도연명(陶淵明)이 “거문고의 뜻을 취할 뿐이지, 어찌 거문고에 소리를 내기 위해서 애쓰겠느냐?” 라고 말한, 그러한 뜻이 아니겠는가?

지금 봉선(奉善) 호군(護軍) 임공(任公)께선 일찍이 악부(樂府)의 수령관(首領官)으로써 여덟 가지 악기를 관장하여 각기 그 묘함을 다하게 하였으니, 선계(仙界)에서 인간 세상에 내려와 무디고 시끄러운 소리를 변화시켜 한가롭고 우아한 경지에 이르게 만드신 분이 어찌 아니시랴. 이 달 20일에 이곳 고향에 와서 밤에 초연히 앉아 거문고를 찾아 타니, 그 소리가 물 흐르듯 맑아 내 불편한 마음을 풀게 하였다. 이에 장구(長句) 4운(韻) 1수를 지어서 자리를 같이 한 여러분들께 보이니, 이 정(情)은 마음속에서 움직여 말로 나타낸 것이다.

 

내 비록 음률(音律)을 잘 알진 못해도

거문고를 좋아한다는 이름은 얻었네.

맑은 시냇가에서 다섯 곡조를 한가롭게 뜯으니

밝은 달밤 삼경에 흥이 깊어져,

한 번 타는 소리에 티끌 세상의 회포 사라지고

두 번 두드리자 옛 뜻이 생겨나네.

맑은 소리가 이미 진취(眞趣)를 얻었으니

줄마다 훌륭한 운치를 말해서 무엇하랴.

 

 

聞任尙書彈琴詩(幷序)

余俗性鄙野。於琴瑟間曾不用心。雖不知調弄音律。其廣狹方圓之制度。高低緊緩之得中。亦可考而詳也。此豈陶淵明所謂但取琴中意。何勞絃上聲之意歟。今有奉善護軍任公。曾爲樂府之首領官。於其八音。各盡其妙。豈非自從仙界來降人世。化頑嚚而歸于閑雅者也。月二十日。到于鄕而夜坐。悄然索琴而彈之。其音冷冷然普矣。可以解吾慍。吟得長句四韻一首。示諸同席。此情動於中而形於言者也。

我今雖不解音聲 但好絲桐浪得名

閒弄淸溪歌五曲 興深明月夜三更

一彈宛轉塵懷靜 再鼓飄零古意生

旣已冷然得眞趣 絃絃雅韻不須評

Ⅰ-114) 3월 20일. 춘주(春州)를 향하여 떠나다

날씬한 말에 가벼운 차림으로 성문을 나서면서

나그네 마음은 멀리 석양 길을 가리키네.

온갖 봄 경치가 구경꾼의 눈길을 끌어

이 걸음이 자못 적막하지는 않겠네.

 

三月二十日。向春州發行。

細馬輕裝出郡城 歸心遠指夕陽程

萬般春景牽遊目 此去殊非寂寞行

Ⅰ-115) 횡천(橫川)에 묵으면서

여관이 고즈넉해 하루 밤이 길더니

꿈길에 봉래섬 찾아 구름다리를 건넜네.

깜짝 놀라 깨어보니 동창(東窓)이 밝고

반쯤 깨진 달이 나무 가지에 걸렸네.

 

宿橫川

旅舘寥寥一夜遙 夢尋蓬島渡雲橋

覺來忽見東窓白 半破氷輪掛樹梢

Ⅰ-116) 갈풍역(葛豐驛)을 지나면서

긴 다리 다 건넌 뒤에 자주 돌아보네.

가슴 가득한 봄날의 흥취를 어쩔 줄 모르겠네.

물가 풀밭엔 노랑나비 춤추고

두 언덕 나무마다 꽃이 피었네.

 

過葛豐驛

過盡長橋首屢回 滿懷春思浩難裁

水邊細草飛黃蝶 樹樹閑花隔岸開

Ⅰ-117) 창봉역(蒼峯驛)

정자 밖 숲 속에 고목이 우뚝하고

창봉(蒼峯) 푸른 기슭에 푸른 구름 날아가네.

시냇물이 맑아서 거울 보는 듯한데

산 기운은 어슴프레 연기가 끼었네.

잠시 쉬며 방황하다 차마 떠나지 못하는데

숲 너머 우는 새 소리 들을 만하네.

역마을 사람 아뢰길, 해가 벌써 기울었다니

말 위에 다시 올라 부질없이 달리네.

 

蒼峯驛

亭外森森古木尊 蒼峰蒼翠蒼雲飜

溪流澄澄開鏡面 山氣藹藹橫烟痕

暫憩彷徨不忍去 隔林啼鳥猶堪聞

郵民報道日已側 且復上馬空馳奔

Ⅰ-118) 사물동(沙勿洞)에서

골짜기가 깊어 봄 경치 많으니

나그네 눈길을 바쁘게 하네.

따스한 구름은 분가루 같고

무성한 풀잎은 돗자리 같네.

바위의 꽃은 붉은 비단 찬란하고

시냇가 물은 푸른 비단 산뜻해라.

산들바람이 옷소매에 불어와

웬만한 길 먼지쯤은 견딜 만하네.

 

沙勿洞中

洞深春景富 所見惱遊人

濃暖雲如粉 芊綿草似茵

巖花紅錦爛 澗水碧羅新

習習風吹袂 聊堪躍路塵

Ⅰ-119) 홍천(洪川)을 지나면서

물가에 뽕나무 우거진 두어 집 마을

활짝 핀 복사꽃이 오얏꽃을 비추네.

그 누가 고사리 캐러 푸른 골짜기에 왔는지

시내 건너서 한가롭게 노래 부르네.

 

過洪川

水邊桑柘兩三家 好事桃花暎李花

採蕨何人來碧洞 隔溪閑放一聲歌

Ⅰ-120) 원양역(原壤驛)

한낮에 홍천 객관을 거쳐

늦게 원양정에 닿았네.

저무는 해 그림자를 보고 또 보니

푸른 산 그림자가 점점이 푸르구나.

 

原壤驛

午過洪川館 晩投原壤亭

看看斜日影 點點暮山靑

Ⅰ-121) 춘주(春州)

소양강 위의 누각을 다시 찾아오니

다락 가득한 봄빛이 더욱 풍류스럽네.

구름과 연기 꽃과 달을 한가롭게 읊는 곳에서

얽히고 설킨 나그네 시름을 풀어보려네.

 

春州

重到佋陽江上樓 滿樓春色更風流

雲烟花月閑吟處 消遣縈盈客裏愁

Ⅰ-122) 향상(向上) 최안을(崔安乙)이 보내온 시에 차운함 (두 수)

Ⅰ-122-01)

소년 시절의 재기(才氣)가 조정의 으뜸이더니

영화로운 반열 다 거치며 이름 퍼졌네.

해를 뚫는 충성은 역사에 오르고

구름 뚫는 문장은 값이 천금일세.

역(驛) 누각 밤 달에 마음 흐뭇하고

들판 주막 봄바람에 흥취 더욱 깊구나.

여기가 대장부들 즐겁게 놀던 곳이니

몇 번이나 미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가.

Ⅰ-122-02)

골짜기에서 나온 꾀꼴새 털과 깃을 고르며

높은 나무에 옮겨 앉아 예쁜 목소리 내려 하네.

값진 구슬 여러 해 동안 궤짝에 간직했으니

어느 날에야 모래 파서 참 금을 보려나.

공명(功名)이 늦건 이르건 하늘에 맡기지만

강 건널 땐 반드시 얕고 깊고를 알아야지.

나그네길에 좋은 나그넬 만나 반가우니

기꺼이 한 번 웃으며 마음을 털어놓으세.

 

次崔向上安乙所贈詩韻(二首)

少年才氣冠朝端 揚歷榮班播美音

貫日孤忠懸古鑑 裁雲秀句比南金

驛樓夜月情方洽 野店春風興轉深

此是丈夫行樂處 幾敎紅粉暗傷心

 

鶯飛出谷調毛羽 擬欲遷喬囀好音

韞櫝多年藏美玉 陶沙幾日見眞金

功名也任期先後 揭厲應須較淺深

且喜客中逢好客 欣然一笑共論心

Ⅰ-123) 청평사(淸平寺)

돌계단 넘고 넘어 솔문에 닿으니

낮 염불소리 온 골짜기에 구름과 이어졌네.

한적한 곳에 안거하면서 무엇을 하시는가

깊은 복을 빌어서 우리 임금께 바치네.

 

淸平寺

排鱗松磴到松門 午梵聲連一洞雲

閒寂安居何日用 但將玄福奉明君

Ⅰ-124) 이령(梨嶺)을 넘으면서

고갯길이 몹시도 울퉁불퉁한데

높은 소나무 푸른 그늘을 감돌아드네.

말이 지치니 사람도 지치고

산이 깊으니 물도 깊구나.

흰 구름이 먼 골짜기에서 일어나고

붉은 해는 먼 봉우리에 걸렸는데,

가는 곳마다 외지고 그윽해

촉도음(蜀道吟)을 노래하며 지나가네.

 

過梨嶺

程途多犖确 高轉翠松陰

馬困人猶困 山深水亦深

白雲生遠壑 紅日掛遙岑

到處窮幽邃 行歌蜀道吟

Ⅰ-125) 꾀꼴새 소리를 듣고 느끼다

날씨가 화창하니 물색이 아름다워

비 개인 산 햇빛이 구름 사이로 새네.

꾀꼴새 소리 갑자기 듣고 마음이 아파지니

사람 가고 꽃이 지면 또 일년일세.

 

聞鸎有感

天氣淸和物色婢 雨晴山日漏雲邊

忽聞鸎語傷懷抱 人去花殘又一年

Ⅰ-126) 원통사(圓通寺)에 가서 (두 수)

Ⅰ-126-01)

뵈는 것마다 속세가 아니어서

나그네 눈을 돌리게 하니,

구름에 들어간 두 줄기 시냇물은 고요하고

하늘을 떠받든 사방의 산은 높기만 하네.

냉담하게 살려면 승격(僧格)을 따라야 하니

부질없이 바쁜 우리들이 부끄럽네.

세상일들을 잊고 선탑(禪榻)에 기대어

시구를 찾으며 붓을 휘두르네.

Ⅰ-126-02)

산 속 선방에 고요한 밤이 되니

어찌 꿈엔들 세속 번뇌가 있으랴.

성정이 고요하니 달빛 늘 가득하고

정신이 맑아 바람 절로 높구나.

복을 빌면서 삼보(三寶)께 귀의하니

이 하늘이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일세.

대자대비께 우러러 절하니

향 연기가 백호(白毫)에 둘렸네.

 

遊圓通寺(二首)

所見非塵世 遊人眼更勞

入雲雙澗靜 撑漢四山高

冷淡隨僧格 奔忙愧我曺

忘機倚禪榻 覓句一揮毫

 

禪窓岑寂夜 曾不夢塵勞

性靜月長滿 神淸風自高

冥禧歸寶位 密護是天曺

瞻禮大悲主 香煙繞白毫

Ⅰ-127) 달밤에 본 흰 작약(芍藥)

밤이 서늘해 한가롭게 거니니 꽃이 에워싸

향내 은은히 번지고 달은 한가운데 떴네.

마치 어여쁜 여인이 비단 소매 걷고서

옥 등잔 앞에 마주앉은 것 같네.

 

月夜看白灼藥

夜凉閑步遶芳叢 香霧霏霏月正中

正似美人披練袂 嫣然相對玉燈籠

Ⅰ-128) 동쪽 뜰에 달빛과 꽃이 활짝 피어 있는 밤에

맑은 향기 퍼지고 바람은 잠잠한데

옥 도끼로 흰 옥 떨기를 다듬었네.

밤들며 꽃 빛이 더욱 밝고 깨끗해지니

내가 마치 광한궁에 있는 것 같네.

 

東階月花盛開夜看

淸香散漫靜無風 玉斧修成白玉叢

入夜花光添皎潔 却疑身在廣寒宮

Ⅰ-129) 가을날

멀리 단풍나무를 구경하느라

기둥에 기댔더니 어느새 해 기울었네.

까마귀는 날 저물었다고 시름을 끌면서 가고

기러기는 가을 뜻을 이끌고 돌아오네.

떨어지는 나뭇잎을 어찌 바라보랴

마음 아프지 않을 수 없네.

누런 나뭇잎 우수수 흩날리니

가을바람이 내 옷깃에 불어오네.

 

秋日

目窮紅樹外 倚柱已斜暉

鴉引暮愁去 鴈牽秋意歸

那堪對搖落 不可無傷悲

黃葉亂蕭瑟 西風吹我衣

Ⅰ-130) 병중에 짓다

적막한 시름을 걷잡을 수 없는데

창밖에는 눈보라가 참으로 스산하네.

어금니가 아파 침과 뜸이 이어지고

머리에 먼지 덮였지만 빗질도 못했네.

먼 봉우리에 이는 구름은 무심하고

마주선 산은 약속이라도 한 듯,

좋은 때 다 지나고 동짓날 아침이라

달력을 뒤적이며 날짜를 세어보네.

 

病中作

寂寞愁懷未可攄 一窓風雪正蕭疎

齒牙疾痛連針灸 頭髮蒙塵不洗梳

雲自無心生遠峀 山如有約對幽居

良辰已過陽生旦 黙數光陰檢曆書

Ⅰ-131) 눈 내리는 것을 보면서 소경(少卿) 원립(元立)에게 부침 (두 수)

Ⅰ-131-01)

지난밤 구름이 달을 가리더니

아침에 온 천지가 눈에 덮였네.

가지에 붙은 건 매화로 보이고

숲에 떨어진 건 버들개지 같구나.

노래하는 누각엔 술값만 늘어나고

참선하는 승방엔 차 연기 자욱한데,

혼자 읊어도 화답하는 이 없으니

어지신 원군이 더욱 생각나네.

Ⅰ-131-02)

산성에 어느덧 세밑이 되니

구름마저 얼어붙어 호되게 춥네.

눈보라가 갈대꽃처럼 흩날리자

사람들 털옷에다가 솜옷까지 둘렀네.

나는 새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집마다 연기도 일어나지 않아,

따뜻하게 해줄 거라곤 오직 술뿐이니

청주와 탁주를 어찌 따지랴.

 

看雪。寄元少卿立(二首)。

夜看雲蔽月 朝見雪漫天

着樹粧梅玉 穿林散柳綿

歌樓添酒價 禪舍鎖茶烟

獨詠無人和 唯思元子賢

 

山城驚歲暮 雲凍苦寒天

密雲飄蘆絮 重裘擁木綿

未看飛鳥影 不見起人烟

供暖惟尊酒 何須論聖賢

Ⅰ-132) 마전사(麻田寺)에 가서

1368년(무신) 12월

입춘 여드레 뒷날,

나그네가 승방을 찾아드니

승방은 푸른 언덕 옆에 있네.

양지쪽 벼랑엔 눈이 반쯤 녹았고

그늘진 골짜기에는 바람이 차가운데,

주인은 문을 열지도 않고

편안하게 선실(禪室)에 앉아 있네.

도를 물어도 잠자코 말없으니

이가 바로 유마힐이라,

눈으로 보면 마음 저절로 알아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다네.

단정히 앉아 모든 걸 잊었으니

비낀 해만 무심히 책을 비추네.

산새야! 돌아갈 길을 재촉 말거라

언제 다시 올런 지 알 수가 없네.

 

遊麻田寺

戊申十二月 立春後八日

客子訪僧居 僧居依翠密

陽崖雪半消 陰壑風蕭瑟

主人不開門 安然坐禪室

問道黙無言 正是維摩詰

目擊心自知 無得亦無失

端坐凡忘機 斜日照書帙

山鳥莫催歸 重遊恐難必

Ⅰ-133) 입춘날. 소경(少卿) 원립(元立)에게 부침

흰 머리가 정녕 나를 놓아주지 않아

당당히 세월이 가고 또 가네.

늙어가면서 새 달력 보기 두렵고

병든 뒤에는 낡은 입춘첩을 바꿀 마음도 없네.

즐거운 때가 되면 그대여! 사양치 말게

술이 다 떨어지면 내가 사리라.

풍광이 벌써 젊은 마음을 일으키니

꽃 아래 함께 만나서 맘껏 취하세나.

 

立春日。寄元少卿立。

白髮丁寧不放吾 堂堂歲月又云徂

老來却恐看新曆 病後無心換舊符

行樂及時君勿讓 酒杯窮處我當沽

風光已作靑春意 花下相期共醉扶

Ⅰ-134) 농부가 읊다

포곡조(布穀鳥)는 나무 끝에서 밭 갈라 재촉하는데

살구꽃 마을 밖에는 비가 막 개었네.

권농사자(勸農使者)는 왜 이리도 늦게 오는지

먼 숲 가까운 동산은 벌써 한층 푸른데.

 

野叟吟

布穀催耕啼樹頭 杏花村外雨初收

勸農使者來何晩 遠近林園綠已稠

Ⅰ-135) 1369년(기유) 3월. 영해부(寧海府) 가던 도중에 짓다

꽃다운 풀이 무성해 길을 덮으려 하는데

봄 산에서 짹짹거리며 새들이 서로 부르네.

물이 바위 틈에서 나오며 거문고를 울리고

꽃이 솔 언덕을 비추며 그림을 이루었네.

 

己酉三月。向寧海府途中作。

芳草萋萋路欲蕪 春山磔磔鳥相呼

水生石澗鳴琴筑 花映松崗作畵圖

Ⅰ-136) 제주(堤州) 남쪽 들판에서

십리 봄 언덕에 비가 막 지나가자

꾀꼬리가 오르내리며 개인 빛을 희롱하네.

부드러운 모래 연한 풀 시냇가 길에

이따금 꽃송이 떠서 물 건너기 향기롭네.

 

提州南郊

十里春原新雨過 鶬鶊上下弄晴光

軟沙細草溪邊路 時有幽花渡水香

Ⅰ-137) 냉천역(冷泉驛)

온 골짜기에 구름과 물이 고요하고

인가(人家)도 없어 적막하니,

오직 사람 맞으며 웃는 거라곤

들에 복사꽃 산에 살구꽃뿐일세.

 

冷泉驛

一溪雲水靜 寂寞無人家

惟有迎人笑 野桃山杏花

Ⅰ-138) 죽령(竹嶺)

말을 채찍해 죽령 구름을 뚫고 달리니

행장이 마치 하늘 문에 닿은 듯하네.

높고 낮게 멀고 가깝게 산은 끝 없건만

남북 동서에 길은 절로 분명하네.

곳곳마다 구역 경계를 평평하게 그었고

겹겹이 골짜기가 서로 이어졌는데,

채찍 멈추고 사방을 돌아보니 하늘과 땅이 너무나 넓어

눈 앞에 아득한 빛이 저녁 자취에 들어오네.

 

竹嶺

策馬行穿竹嶺雲 行裝彷彿接天門

高低遠近山無盡 南北東西路自分

處處封疆平布列 重重洞壑互馳奔

停鞭四顧乾坤豁 眼界微茫入暮痕

Ⅰ-139) 순흥부(順興府)에 묵으면서

성에 가득한 아름다운 경치가 어찌 그리도 산뜻한지

풀은 푸르고 꽃은 붉어 저마다 봄일세.

죽계(竹溪)의 밝은 달빛에 시 읊으며 즐기노라니

시원한 이 마음이 티끌 세상을 떠났네.

 

宿順興府

滿城佳致一何新 草綠花紅各自春

吟翫竹溪溪上月 灑然方寸絶纖塵

Ⅰ-140) 영주(榮州)를 지나면서 (영주의 옛 이름은 구산 龜山)

희고 붉은 꽃 사이로 길이 갈라져

물 맑고 산 좋은데다 비가 시를 재촉하네.

푸른 바지 흰 소매 어느 집 자제이신지

꽃숲을 등지고 서서 눈도 돌리지 않네.

 

榮州路上(号龜山)

白白紅紅挾路岐 水淸山好雨催詩

靑裙皓袂誰家子 背立花林目不移

Ⅰ-141) 안동(安東)에 묵으면서 현판 시에 차운하여 동년(同年) 권종의(權從義)에게 지어 주다

뜻밖에 서로 만나 눈이 다시 환해지니

십 년 동안 그리던 정을 이제야 풀었네.

푸른 등불 아래 이야기 다 못 나누고

총총히 떠나려니 한가롭지 못해라.

 

宿安東。次板上韻贈權同年從義。

邂逅相逢眼更淸 已償思慕十年情

留連未辦靑燈話 却恐忽忽不暇行

Ⅰ-142) 영해(寧海)에 이르러 관사(官舍)의 현판 시에 차운함

단양(丹陽)의 풍경이 양양(襄陽)보다 뛰어나

사람마다 시 짓느라 붓 잡기에 바쁘네.

바다 기운이 추녀에 이어져 개인 빛이 떠오르고

햇살이 벽에 비쳐 비단같이 산뜻하네.

연기 낀 물가에 선 해오라기는 희기도 흰데

꽃 떨기에 둘린 나비는 점점이 노랗구나.

이런 모습을 보자 내 마음이 밝고도 고요해지니

무슨 일이 또 다시 내 가슴을 흔들랴.

 

到寧海。次官舍板上韻。

丹陽風景勝襄陽 覓句人人援筆忙

海氣連軒浮霽色 日光涵壁照新章

鷺翹煙渚離離白 蝶遶花叢點點黃

對此襟懷淸且靜 更無餘事攪吾腸

Ⅰ-143) 관어대(觀魚臺)

깊은 못에 살 곳을 얻어 즐거움이 넘치니

많은 물고기 꼬리들이 길고 짧구나.

내가 고기를 안다든다 자네가 나를 안다고

같다 다르다 다시는 따지지 마세나.

 

觀魚臺

深淵得所樂洋洋 衆尾莘莘短復長

我自知魚子知我 莫將同異更啇量

Ⅰ-144) 봉송정(鳳松亭)

언제 학이 울고 춤추어 덕을 보러 오겠나.

소나무 심고 기다린 지가 벌써 오래 되었네.

이 정자가 이미 순지(荀池) 상서에 응했으니

앞 연못의 한 송이 연꽃을 꺾으실 테지.

 

鳳松亭

鳴舞何時覽德來 栽松欲待已多年

此亭已應荀池瑞 須折前塘一朶蓮

Ⅰ-145) 정신동(貞信洞)

버들 푸르고 꽃 붉어 한 골짜기가 그윽한데

맑은 시내 양 언덕은 모두가 기생집일세.

묻노니 그 누가 정결을 지키는가

부질없이 비단창 닫고 백주시(栢舟詩)를 읊조리네.

 

貞信洞

柳綠花紅一洞幽 淸溪兩岸盡靑樓

問誰守信懷貞潔 空掩紗窓詠栢舟

Ⅰ-146) 연지계(燕脂溪)

이 긴 물줄기를 누가 연지(燕脂)라 불렀던가.

산 빛을 띠고 넘실거리며 흐르네.

복사꽃 몇 잎이 물결 따라 흘러내리니

아마도 예쁜 여인이 묵은 화장을 씻는가 보네.

 

燕脂溪

誰號燕脂一派長 溶溶漾漾帶山光

桃花點點隨流到 疑是佳人洗宿粧

Ⅰ-147) 읍선루(泣仙樓)

읍선루 바깥에 버드나무가 그늘 이뤄

머무는 사람 떠나는 사람 한을 금치 못하네.

헤어지는 눈물 줄줄이 물결에 더해져

한 못의 봄 물이 다시금 깊어가네.

 

泣仙樓

泣仙樓外柳成陰 人住人分恨未禁

別淚行行添作浪 一塘春水更方深

Ⅰ-148) 무가정(無價亭)

정자 이름이 무가(無價)라 하니 값을 헤아리기 어렵네.

산과 물을 노닐며 보기로는 이곳이 으뜸일세.

바다 하늘에 구름도 걷혀 정말 좋은데

눈썹 같은 초승달이 솔가지에 걸렸네.

 

無價亭

亭名無價價難期 山水遊觀此最奇

正好海天雲破處 一眉新月掛松枝

Ⅰ-149) 영덕(寧德)에 이르러(영덕의 옛 이름은 야성 野城)

구름 맑고 바람 가벼운 십리 길에

말머리 산도 좋고 비까지 막 개었네.

작은 시내가 맑고 얕은 성 동쪽 길에

한 그루 매화꽃이 물 건너 환하구나.

 

到寧德(号野城)

雲淡風輕十里程 馬頭山好雨新晴

小溪淸淺城東路 一樹梅花隔水明

Ⅰ-150) 주등역(酒登驛) 가는 길에

봄추위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도랑에 불은 빗물이 밭 갈기를 재촉하네.

지는 꽃 비둘기 울음 적적하기만 한데

나물 캐는 촌아이들이 이따금 보이네.

 

酒登驛路上

一分春寒猶未退 雨催耕種水生渠

落花寂寂鳴鳩外 時見村童拾野蔬

Ⅰ-151) 원적암(圓寂菴)

사방에 푸른 산이 촘촘이 둘렸는데

그 가운데 푸른 골이 깊숙하구나.

대나무 바람은 처마 끝에 불고

꽃 그림자는 다락 위에 올랐네.

선탑엔 스님이 선정(禪定)에 드는데

차 끓이는 마루에 나그네가 잠시 쉬네.

이 좋은 곳을 찾아오니 너무 기쁘구나

반나절 맑게 노닐 수 있었다니.

 

圓寂菴

四擁靑山密 中開碧洞幽

竹風生屋角 花影上樓頭

禪榻僧初定 茶軒客小留

喜予尋勝地 半日得淸遊

Ⅰ-152) 24일. 단양(丹陽)을 떠나면서 부사(府使) 한공(韓公)의 시에 차운하여 여러 친구들에게 남겨 주다

바다 마을 삼월에 우연히 들렸다가

꽃과 버들 좋은 곳을 노닐며 구경했네.

오늘 봉송정 위에서 헤어지면

언젠가 꿈속에 혼이 찾아오겠지.

 

二十四日發丹陽。次府使韓公詩韻留別諸公。

海村三月偶尋芳 遊賞花叢與柳行

今日鳳松亭上別 他年應入夢魂場

Ⅰ-153) 평해(平海) 망사정(望槎亭)

망사정 위에서 뗏목을 바라보는 사내가

팔월 하늘의 아침 바람이 시원해지길 기다리네.

한껏 바라봐도 바다는 끝이 없으니

어디가 해 뜨는 곳인지 알 수가 없네.

 

平海 望槎亭

望槎亭上望槎郞 竚待朝天八月凉

極目尙難窮里數 不知何處是扶桑

Ⅰ-154) 월송정(越松亭)

솔 그늘 십리에 흰 모래밭 평평한데

정자 바깥에 부딪치는 물결이 천둥소리일세.

선경(仙境)이라 티끌 세상의 발자취를 받아들기 어려우니

바람 받으며 잠시 쉬는 내 걸음이 부끄럽구나.

 

越松亭

松陰十里白沙平 亭外晴雷驟浪聲

境勝難容塵世足 臨風暫憩愧吾行

Ⅰ-155) 영희정(迎曦亭)

해 뜨는 걸 보려면 꼭두새벽에 와야 하는데

한낮에 올랐으니 뜻에 맞추지 못했네.

물결 위에 뜬 신기루(蜃氣樓)만 보고서

방황하다 어느덧 날 저무는 것도 몰랐네.

 

迎曦亭

迎曦宜及曉頭來 日午登臨意未當

但見波頭浮蜃氣 彷徨不覺已斜陽

Ⅰ-156) 울진(蔚珍)에 묵으면서(울진의 옛 이름은 선사 仙槎)

아침에 기성(箕城) 푸른 바다를 떠나

석양에 취운루(翠雲樓)를 거쳐 왔네.

한밤에 선사(仙槎)의 달을 보고 읊으니

나그네길의 끝없는 시름이 이제야 풀리네.

 

宿蔚珍(号仙槎)

朝發箕城碧海頭 夕陽行過翠雲樓

夜軒吟翫仙槎月 消遣征途無限愁

Ⅰ-157) 임의정(臨漪亭) 시에 차운함

앞에는 물빛 뒤에는 산 빛이 있어

사철 아름다운 경치가 해마다 그대로일세.

갈매기 두어 쌍이 날아가는 저 너머

맑은 연기 너머로 부슬부슬 비 내리네.

 

次臨漪亭詩韻

水色山光在後前 四時佳景自年年

數行鷗鷺驚飛外 疎雨霏霏隔淡烟

Ⅰ-158) 지현(知峴)에 올라 울릉도(蔚陵島)를 바라보다

저 멀리 두어 점이 아스라히 보이는데

그곳이 울릉도라고 사람들이 말하네.

만약 청전(靑田)의 학을 타기만 하면

푸른 바다 가로질러 다녀오고 싶구나.

 

登知峴望蔚陵

數點稀微浩渺間 人言此是蔚陵山

若爲駕彼靑田鶴 橫截滄溟往復還

Ⅰ-159) 용화역(龍化驛) 시에 차운함

하늘과 땅이 물에 뜨고 물은 허공에 떠

바위 치는 파도 소리가 자리에 들어오네.

물고기 변화하는 날을 이곳에서 만나면

하루 아침 구름 길에서 용이 될 수도 있으리라.

 

次龍化驛詩

乾坤浮水水浮空 打石濤聲入座中

此地若逢魚變日 一朝雲路可腰紅

Ⅰ-160) 삼척(三陟)에 묵으면서 단양(丹陽)의 옛 친구들에게 부침

옷을 벗고 한가히 누우니 마루가 서늘하구나.

객관은 고즈넉한데 달빛이 침상을 비추네.

한밤에 대숲 바람이 나그네 창을 두드려

놀라서 깨어보니 단양을 꿈꾸었네.

 

宿三陟。却寄丹陽故友。

解衣閑臥一軒凉 公舘寥寥月照床

半夜竹風舂旅枕 忽然驚破夢丹陽

Ⅰ-161) 평릉역(平陵驛) 시에 차운함

푸른 바다 아득하게 푸르고

푸른 산 점점이 푸르구나.

이 좋은 경치를 간직하고 싶어

말에서 내려 숲 속 정자에 오르네.

 

次平陵驛詩韻

碧海迢迢碧 靑山點點靑

欲將探勝槩 下馬上林亭

Ⅰ-162) 우계(羽溪)에 묵으면서 현판의 시에 차운함(우계의 옛 이름은 옥당 玉堂)

푸른 바다 서쪽에 성이 하나 있어

우계가 일찍이 옥당(玉堂) 이름을 얻었네.

온 동산에는 매화와 대나무, 구름 빛이 고요하고

십리에 뻗은 뽕나무와 삼밭은 경치도 맑구나.

숲 너머 우는 비둘기가 비 소식을 알리자

처마에 나는 제비가 바람을 피하네.

벽에 걸린 시들을 쳐다보다가

끝내 화답 못하니 부끄러워라.

 

宿羽溪。次板上韻(号玉堂)。

滄海西頭有一城 羽溪曾得玉堂名

一園梅竹雲光靜 十里桑麻景氣淸

林外鳴鳩呼雨過 簷間飛鸞讓風輕

仰看壁上珠璣句 欲和多慙竟未成

Ⅰ-163) 향자(鄕字) 운에 차운함

삼월 봄바람에 나그네는 고향이 멀어

넓은 들판 깊은 골짜기를 몇 번이나 지났던가.

오늘 아침 동쪽 바다를 이미 떠났건만

구름과 연기 돌아보며 남몰래 애가 끓네.

 

次鄕字韻

三月春頭客遠鄕 幾經平曠及幽荒

今朝已與東溟別 廻望雲煙暗斷腸

Ⅰ-164) 광탄(廣灘)을 건너는 배 안에서

철쭉꽃이 층층이 푸른 물가를 비추니

강가의 봄빛이 별다른 천지일세.

배 저어 복사꽃 물결을 바로 지나며

한가한 사람이 그림 그려 전할까봐 걱정스럽네.

 

廣灘舟中

躑躅層層映碧漣 一江春色別藏天

漾舟直過桃花浪 恐被閒人畵筆傳

Ⅰ-165) 정선(旌善) 지나는 길에

산은 높고 골은 깊은데

숲 속 그늘진 곳에서 새들만 지저귀네.

떨어진 꽃이 이따금 말머리에 날아들어

시 읊다가 돌아보며 길게 휘파람 부네.

 

旌善路上

巖巒嵂崒洞幽深 山水陰陰有啼鳥

落花時向馬頭飛 得句回頭一長嘯

Ⅰ-166) 남강(南江)에 배를 띄워 수혈(水穴)을 구경하고는 의풍정(倚風亭)에 오르다

Ⅰ-166-01)

그 누가 티끌 세상에서 신선 되기 어렵다고 했나.

여기 오니 옥호천(玉壺天)이 있음을 알겠네.

붉은 단장 환한 모습이 물 속의 물이라

목란 배에 취해 누워서 햇볕 받으며 꿈꾸네.

Ⅰ-166-02)

바람바위 물구멍이 옛부터 이름나

아침마다 저녁마다 동쪽을 바라보네.

한 번만 봐도 이미 진면목을 알겠으니

이제부턴 한 평생을 유한(遺恨) 없이 지내리라.

 

登舟南江。看水穴。登倚風亭(二首)。

誰道塵几隔上仙 此來知有玉壺天

紅粧明媚水中水 醉臥蘭舟夢日邊

 

風巖水穴昔聞名 東望朝朝暮暮情

一見已知眞面目 也無遺恨過平生

Ⅰ-167) 벽파령(碧坡嶺)에 올라 (두 수)

Ⅰ-167-01)

강 따라 십리 길 험난하기만 해서

벼랑 밑 바위틈으로 기어서 왔네.

아래로 깊은 못이 천 자나 넘게 보여

조심조심 떨리고 눈마저 아찔했네.

바위 꽃 시냇가 풀이 울긋불긋 비치고

산새도 슬피 울어 봄이 고즈넉한데,

끝없는 나그네 회포를 그 누가 알아주랴

한가로운 내 발자취를 묻는 사람도 없네.

Ⅰ-167-02)

가고 또 가서 벽파령에 이르니

천 구비 사다리길이 하늘까지 이어졌네.

눈 아래 산들은 개미 둑과도 같고

구름과 연기 자욱한 하늘에 석양이 가물거리네.

오랫동안 서성거리며 긴 한숨 쉬자

길가 높은 나무에 바람 소리만 쓸쓸하네.

 

登碧坡嶺(二首)

沿江十里行路難 側身過了懸崖石

下瞰深淵千丈强 戰戰兢兢勞眼力

巖花澗草暎紅綠 山鳥悲鳴春寂寂

客懷牢落有誰知 無人問我閑蹤跡

 

行行上到碧坡嶺 千回棧道連雲天

眼底衆山如蟻垤 夕陽明滅空雲烟

遲留望久發長嘆 道邊喬木風蕭然

Ⅰ-168) 방림역(芳林驛)을 지나는 길에

묵은 안개가 나무에 깊숙이 걸리고

풀에 엉킨 이슬방울 차갑기만 해라.

말은 구름 그림자 끝을 달리고

새는 물소리와 함께 지저귀네.

사람은 멀리 있어 그리움 끝이 없고

산이 높아서 길이 고르지 않아,

기나긴 나의 회포 어찌 끝이 있으랴

지는 꽃 바람에 다 부쳐 보내리라.

 

芳林驛路上

宿霧棲深樹 冷冷草露濃

馬飛雲影畔 鳥語水聲中

人遠思無極 山高路不平

悠悠何限意 都付落花風

Ⅰ-169) 안창역(安昌驛)

구름다리 길을 다 지나고 보니

안창역이 말 앞에 있네.

고향이 이제 멀지 않으니

나그네 시름이 풀리는구나.

 

安昌驛

過盡雲橋路 安昌在馬頭

故園今已近 聊可謝覊愁

Ⅰ-170) 작약(芍藥)이 활짝 핀 것을 보고 원(元) 소경(少卿)에게 부침

동쪽 뜨락에 아련히 향기 구름이 엉켜드는데

작약꽃 활짝 피니 유달리 아름답네.

혼자 보고 혼자 즐기니 무슨 흥취가 있으랴

아침 저녁 난간에 기대

그대만 생각하네.

 

芍藥盛開。寄元少卿。

東階藹藹鏁香雲 芍藥奇芳獨出群

獨賞獨吟無興味 倚欄朝暮每思君

Ⅰ-171) 춘주(春州) 공북정(拱北亭) 시에 차운함(두 수)

Ⅰ-171-01)

삼라만상이 정자 하나를 받드니

하늘도 아낀 좋은 곳이 참모습을 드러냈네.

아득한 두 줄기 물이 흰 비단을 펼치고

은은한 산들이 푸른 병풍을 펼쳤네.

삼신산(三神山)의 기이한 모습을 황홀하게 옮겼으니

십주(十洲)의 아름다운 경치를 정녕 보겠네.

그대여! 취했다고 올라오길 꺼리지 말게.

찾는 이 없으면 뜨락에 풀만 가득할 텐데.

Ⅰ-171-02)

올라와 보며 크고 작은 정자들 가리키다가

맑은 강물 굽어보니 내 모습이 비치네.

고맙게도 구름과 연기가 술자리를 마련해주니

그림이라도 그려서 병풍에 올리고 싶네.

몇 일 걸리지 않고 세운 정자를 모두들 좋아하니

유람하는 나그네들 언제나 편안하겠네.

이곳에 와서 참된 흥취를 얻었으니

신선을 배우면서 어찌 󰡔황정경󰡕만 읽어야 하랴.

 

次春州拱北亭詩韻(二首)

萬像森羅拱一亭 天慳披豁露眞形

迢迢二水鋪霜練 隱隱千山展翠屛

三島奇觀移怳惚 十洲佳致見丁寧

使君莫憚登攀醉 鈴索長閑草滿庭

 

登臨指點短長亭 俯鑒澄江照我形

却愛雲烟供酒席 欲敎圖盡上金屛

經營不日人相悅 遊覽多時客自寧

到此凝然得眞趣 學仙可更讀黃庭

Ⅱ-001) 1370년(경술) 봄. 정선(旌善) 자사(刺使) 안길상(安吉祥)이 목백(牧伯)에게 보낸 시를 보고 목백 좌우에 바친 시와 짧은 서문(인 引)

◎ 안길상(安吉祥)

이년 동안 산 속 고을에 묻혀 있으면서

자주 앉아 읊조리다가 청려장 짚고 거닐었네.

고금 언제나 있는 구름과 연기를 사랑하고

동산과 서산의 해와 달을 뜨고 지게 하였네.

바람 부는 정자는 마음을 맑게 하는 곳

깨끗한 샘물은 더러운 발을 씻을 만해라.

태평성대의 고을살이가 내 분수임을 알았으니

이 몸 거두어 숲에 사는 게 합당하다오.

 

【짧은 서문】생각하건대 비길 데 없이 가련한 한낱 홀아비가 일찍이 천발(薦拔)의 은혜를 입었으니, 참으로 소광(踈狂)한 저의 뜻을 이룬 셈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은혜 입은 것을 가지고 제 욕망을 이루려고 구한다면, 마치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또 (벼슬) 주기를 바라거나 (벼슬 주겠다는) 말을 기다리는 것은 마치 나무 그루터기를 지키면서 토끼를 기다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한바탕 웃으시기를 바라면서 시 3편을 바칩니다.

Ⅱ-001-01)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를 다 물리쳤으니

태일(太一)의 명아주 태우는 모습을 일찍 보았네.

홀을 잡고 산을 보면 구름이 북쪽에 걷히고

거문고 타다 누각에 누우면 해가 서쪽에 지네.

아름다운 이름이 이미 청사(靑史)에 쓰였으니

은총으로 부리시며 조서가 내리리라.

알아 두소서. 은혜 물결이 가장 깊은 곳을.

길가의 까마귀 까치도 높은 곳엔 깃들지 않는다오.

Ⅱ-001-02)

세상 사람들이 무슨 말하든 내버려 두소.

눈 다 녹은 봄 산에 명아주가 캘 만하네.

매화나무 너머 가벼운 연기가 실오라기 같은데

살구꽃 서쪽 하늘엔 비낀 해가 한 뼘 남았네.

다스리고 가르치는 게 다행히도 물같이 맑으니

맘껏 놀면서 술 취한들 무엇이 걱정이랴.

고맙게도 인자한 바람이 모두에게 골고루 불어

이 초라한 집까지 은혜와 사랑이 미쳐 왔다오.

Ⅱ-001-03)

재주가 얕아 일찍이 세상에 버림받고

나물 밥 명아주 국도 달게 여겼네.

꿈은 용만(龍巒) 북쪽의 금 대궐로 날아가는데

몸은 봉령(鳳嶺) 서쪽의 사립문에 부쳐 산다오.

역사책 읽으려 한밤 창가에서 짧은 촛불 태우고

오이 심으려 봄 밭의 깊은 진흙을 파헤치니,

그 누가 알랴! 적막한 수풀 아래서

벗 잃은 외로운 새가 홀로 둥지 지키는 것을.

 

庚戌春。旌善刺使安吉祥寄詩于牧伯云。

二年山郡被推擠 坐嘯多時或杖藜

祗愛雲烟亙今古 終敎日月自東西

風亭正可淸心地 水穴眞堪濯足泥

盛代爲州知己分 收身也合故林棲

次韻幷書短引。拜呈牧伯左右。

伏以無雙窮困。有一孤鱞。曾蒙薦拔之恩。實達疎狂之志。以所爲求所欲。猶緣木而求魚。望其賜待其言。若守株而待兎。庶承一笑。聊獻三篇。詩曰。

姦兇邪侫盡排擠 曾見方燃太一藜

拄笏看山雲捲北 鳴琴臥閣日沈西

美名旣已書靑史 寵喚應當降紫泥

要識恩波最深處 道邊烏鵲不高棲

 

任看時俗互撞擠 雪盡春山可採藜

半縷輕烟梅樹外 一竿斜日杏花西

幸逢政敎淸如水 何害遨遊醉似泥

深感仁風無厚薄 旁吹惠愛及寒棲

 

才薄曾爲世所擠 分甘蔬糲與羹藜

夢飛金闕龍巒北 身寄柴門鳳嶺西

讀史夜窓(☆)燒短燭 種苽春圃撥深泥

誰知寂寞疎林下 失友寒禽守獨棲

Ⅱ-002) 사호도(四皓圖)에 씀

네 사람이 함께 상산(商山)에 들어가

흰 수염에 세월이 깊어졌구나.

소나무 그늘에서 바둑 한 판 두며

세상 길 향한 마음을 모두 끊었네.

 

題四皓圖

共入商山裏 霜獖(?)歲月深

松陰棋一局 揮斷世途心

Ⅱ-003) 삼소도(三笑圖)에 씀

손잡고 같이 푸른 돌길을 걸어가면서

해가 서쪽에 지든 말든 아랑곳없네.

세 사람 웃음에 하늘과 땅이 좁아

말도 잊고서 호계(虎溪)를 지났네.

 

題三笑圖

同携蒼石路 也任日將西

三笑乾坤窄 忘言過虎溪

Ⅱ-004) 1370년(경술) 초여름. 회포를 씀 (두 수)

Ⅱ-004-01)

봄 가는 줄도 몰랐는데

어느새 한낮이 길어졌네.

바람 부는 난간에 꽃잎이 떨어지고

연기 낀 언덕엔 버들가지 늘어졌네.

물색은 바라볼수록 변해 가고

광음도 차츰 바빠지는데,

시절을 느끼면서 옛친구 생각하니

초여름 되면서 혼자 슬프구나.

Ⅱ-004-02)

세상이 변해가니 풍속도 따라 변하고

사람이 돌아가니 봄도 따라 돌아가네.

풀이 깊어지자 꽃도 다 떨어지고

버들이 우거지자 버들개지 날기 시작하네.

늙기가 두려워 철 바뀔 때마다 놀라고

시름을 막으려 지는 해에 맡겨 두네.

혼자서 살았던 오 년 동안의 맛이

마치 들판의 스님 같다고나 할까.

 

庚戌首夏書懷(二首)

不覺靑春過 唯知白日長

風軒花片片 煙岸柳行行

物色看看變 光陰漸漸忙

感時懷舊客 對此獨悲傷

 

世變風還變 人歸春又歸

草深花盡謝 柳暗絮初飛

畏老驚移節 防愁任落暉

單棲五年味 還似野僧非

Ⅱ-005) 단오날(端午)

바람 따뜻하고 날씨는 청명한데

집집마다 문 위에 쑥 사람을 걸어 놓았네.

창포 술 한 항아리 마주 앉으니

난초 물가에 홀로 깨었던 신하가 우습구나.

 

端午

薰風微軟氣淸新 萬戶千門掛艾人

靜對菖蒲一尊酒 笑他蘭渚獨酷臣

Ⅱ-006) 성(成) 상국(相國)이 보낸 시에 차운함

생애는 높은 산봉우리의 달 같고

마음은 화로의 식은 재 같아,

지난 일은 찾을 곳 없고

흐르는 세월도 한번 가면 오지를 않네.

다락에 올라 만물 바뀌는 걸 바라보다

술잔 들고서 꽃이 피었나 물어보았네.

푸른 산과 마주앉아 웃으며 살아가니

부귀공명이 어디 있는지 내 어찌 알랴.

 

次成相國所示詩韻

生涯孤嶠月 心似一爐灰

往事尋無處 流年去不廻

登樓看物化 把酒問花開

相對碧山笑 功名安在哉

Ⅱ-007) 파리(蠅)를 조롱함

파리야! 파리야! 너는 어찌된 놈이기에

너를 보고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구나.

몸 하나에 발이 여섯인 미물인데다

높이 날 줄 모르면서 날개만 달렸구나.

비린내 맡고 모여들 땐 시끌벅적해

쫓아도 다시 오니 무엇을 찾느냐?

똥을 싸서 온갖 물건 더럽히다가

흰 것은 검게 하고 검은 것은 희게 하네.

잠시도 쉬지 않고 잉잉거리며 돌아다니다

울타리에 앉더니 내 자리까지 왔느냐?

붓끝에서 쫓으면 곧 놀라서 날아가고

부채에 맞으면 발붙이지 못하네.

네 성품이 어리석고 미련하지만

온 세상에 미움 받으니 애처롭구나.

시인들의 꾸지람은 예나 이제나 같건만

너는 그것도 모르고 부질없이 날뛰는구나.

이제부턴 부디 가볍게 날뛰지 말거라.

가볍게 날뛰어야 백해무익이란다.

더위를 따라다닌들 얼마나 오래 가랴

시월의 바람 서리가 네 액운을 재촉하리라.

 

嘲蠅

蒼蠅蒼蠅汝何物 見汝無人相悅懌

一身六足甚微細 未解高飛徒有翮

聞腥聚集聲紛然 驅去復來何所索

能成點穢汚凡物 白者爲黑黑爲白

營營役役無暫休 止樊亦自來我席

筆端遇逐忽驚飛 扇上逢彈難寄跡

汝生稟質愚且癡 被世嫌憎良可惜

詩人所責古猶今 汝不知汝頗勞劇

勸汝從此減輕狂 輕狂於汝百無益

趍炎赴熱不多時 十月風霜催汝厄

Ⅱ-008) 가을 생각

새로 목욕한 가을 모습이 고요해

시내와 산에 비가 막 개었네.

단풍나무 언덕에 해가 기울고

성긴 국화 울타리에 연기 젖었네.

매미가 늙었으니 대숲이 싸늘하고

기러기 돌아오니 변방이 비었겠네.

유유히 지내면서 시절이 느껴지니

여름 지나는 것이 아쉽기만 해라.

 

秋思

新沐秋容靜 溪山雨霽初

日斜楓岸逈 烟濕菊籬疎

蟬老竹林冷 鴈廻楡塞◎

悠悠感時節 畏日惜居諸

Ⅱ-009) 하(河) 목백(牧伯)의 삼가정(三可亭) 시에 차운함 (두 수)

Ⅱ-009-01)

졸졸 흐르는 시냇물은 깊은 골목과 통하고

층층 누각은 끊어진 산을 이었네.

하늘이 아낀 곳을 이미 다 드러내어

문장이 노성하니 서로 보고 기뻐하네.

Ⅱ-009-02)

공명(功名)은 새로운 해와 달이고

풍화(風化)는 옛 강과 산일세.

은혜 입고 고마워한 사람이 그 얼마던가

멀리서 오는 이들이 이 정자를 우러러보리.

 

次河牧伯三可亭詩韻(二首)

細澗通深巷 層樓補斷山

天慳皆已露 文老喜相看

 

功名新日月 風化舊江山

多少感人惠 遠垂來者看

Ⅱ-010) 강소성과 절강성(江浙)으로 유학가는 운유자(雲遊子) 각굉(覺宏) 스님을 배웅하면서 쓴 시와 서문

【서문】 유곡(幽谷) 각굉(覺宏) 스님은 명신(明信)한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스님이 되어 도를 배웠다. 여러 명산을 돌아다니며 학업을 성취한 뒤에 강월헌(江月軒) 나옹(懶翁)의 제자가 되었다. 총림(叢林)에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장주(藏主)의 책임을 두 차례나 맡았다. 경(經)을 보면 반야(般若)의 도리를 얻었고, 논(論)을 읽으면 삼관(三觀)의 이치를 기뻐했다.

어느 날 대중에게 하직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나물 먹고 물 마시면서 밤낮으로 정진하였는데, 부처가 있는 곳에는 얼른 머리를 돌리고 부처가 없는 곳에는 발도 붙이지 않았다. 도(道)의 자취를 노래하고 읊조리면서 수행한 지가 십여 년이나 되었다.

올해 7월 자자일(自恣日) 뒤에 물병과 지팡이를 끌고 산에서 내려와 내게 말했다. “학자(學者)는 조롱박처럼 한쪽 모퉁이에만 매여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멀리 강소성과 절강성으로 유람하면서 밝으신 스승을 만나 뵙고저, 지금 떠나려 합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동쪽 나라와 강소(江蘇)․절강(浙江)은 수륙(水陸)으로 만리나 떨어져 있고, 풍수(風水)와 음양(陰陽)의 기운이 우리 나라와 다릅니다. 게다가 지금 그곳에는 전쟁이 그치지 않고, 길도 매우 험합니다. 스님의 행장이라야 지팡이 하나 뿐이어서 몸을 지탱하고 목숨을 보전할 도구가 하나도 없으니, 어찌 그토록 편안하고 무심할 수 있습니까?”

스님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무릇 불자(佛者)란 법(法)으로 몸을 삼고, 지혜를 목숨으로 삼으며, 선열(禪悅)을 음식으로 삼습니다. 자비(慈悲)를 의관(衣冠)으로 삼고, 법계(法界)를 집으로 삼습니다. 원래 생멸(生滅)과 증감(增減)의 피차 구별도 없습니다. 공경하고 믿으며 공손하게 예의로 대한다면 세상 사람이 모두 내 형제이니, 어찌 길의 험난과 몸의 안위를 걱정하겠습니까?”

나는 스님의 명신(明信)한 태도를 보고 참으로 마음에 느낀 바 있었으며, 그 말을 듣고 이번 여행을 장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짧은 시를 따로 지어 드린다.

 

동쪽 삼한과 중국은

그 거리가 만리 길인데,

한 몸이 본래 머무름 없어

외로운 구름처럼 멀리 떠나네.

씩씩한 그 모습 장한 데다가

밝은 그 마음 근원이 더욱 밝구나.

이번 떠나면 얻는 것 많으리라

그대에게 묻노니 어디로 가시려나.

나그네 머물 곳은 본래 정처 없으니

부디 그곳에 인정 두지 마시게.

걸음 걸음마다 화장(華藏)의 세계를 밟아

대천(大千) 세계에 태평을 이루소서.

 

送雲遊子覺宏遊江浙(幷序)

幽谷宏師。明信人也。自齠齕染削學道。遊諸名山。業旣就。叅預江月軒懶翁之門。爲弟子職。每處叢林間。爲徒衆所推。再經臟主之任。視經得般若之義。讀論悅三觀之理。一日。辭衆入于金剛山。木食澗飮。晝夜服習。有佛處急回頭。無佛處不着脚。歌詠道趣。修而行之者十有餘年矣。越今年秋七月自恣日後。攜甁錫出山而來告予曰。學者不可匏繫一隅。我欲遠遊江浙。叅訪明師。卽今行矣。答曰。吾東國與江浙之地。相距水陸萬里。其風水陰陽之氣。與吾土不同。况復干戈未定。道里甚艱。師惟一杖行裝。無一支身保命之具。其可安然無心乎。師笑而且曰。夫佛者以法爲身。以慧爲命。以禪悅爲食。以慈悲爲衣冠。以法界爲堂奧。元無生滅增減彼此之別。抑又敬而信。恭而禮。則四海之內皆兄弟也。何憂其道途之艱梗。身命之安危哉。僕見師之明信。誠有感于予心。予聽其言而壯其行。於是別作短章以贈之。

東韓與中國 相距萬里程

一身本無住 遠去孤雲征

稜稜容貌壯 炯炯心源明

此去多所獲 且問將何行

甚麽焉客處 這箇物人情

步步踏飜華藏海 大千沙界致昇平

Ⅱ-011) 하윤원(河允源) 자사(刺史)에게 올린 시와 서문

【서문】저 어진 사대부(士大夫)들을 보면 때에 따라 세상에 나와 백성들에게 덕을 입히고, 종묘 사직에 공을 세웠다. 그래서 (그 이름을) 금석(金石)에 새기고 죽백(竹帛)에 써서 그 빛을 후세에 끝없이 전했다. 이는 사람마다 느끼는 바이니, 고금이 같았다.

옛날에 남의 신하된 자 가운데 여러 고을에 부(符)를 나누어 받아 정치 교화를 널리 베푸는 자가 많았다. 너그럽게 정치를 베푼 자로는 노공(魯恭)이 중모령(中牟令)이 되어 오로지 덕화(德化)에만 힘쓰고 형벌을 일삼지 않았으며, 급암(汲黯)이 동해(東海) 태수가 되어 관대하게 다스리며 세밀하거나 까다롭지 않았다. 유총(劉寵)은 회계(會稽) 태수가 되어 번거롭고 까다로운 절차를 없앰으로써 고을이 크게 교화되었고, 공수(龔遂)는 발해(渤海) 태수가 되어 오로지 문학과 예법으로 일체를 편하게 했다. 최경진(崔景眞)은 평장(平章) 태수가 되어 죄를 지은 사람에게 부들채찍(蒲鞭)만을 썼으니, (이러한 정치가 바로) 너그러운 정치이다.

정치를 잘한 자로는 황패(黃覇)가 영천(潁川) 태수가 되어 교화를 힘써 행했으니, 그의 재주는 사람을 이롭게 하는 데에 뛰어났다. 위삽(魏颯)은 계양(桂陽) 태수가 되어 그가 베푼 법령이 모두 사리에 합당했으며, 한연수(韓延壽)는 동도(東都) 태수가 되어 온 천하에 으뜸갔다. 양언광(梁彦光)은 파양(鄱陽) 태수가 되어 가장 잘 다스렸다는 칭찬을 들었으며, 유광(劉廣)은 거주(莒州) 자사가 되어 선정으로 으뜸이 되었으니, (이러한 정치가 바로) 잘하는 정치이다.

감화시키는 정치로는 정홍(鄭弘)이 회양(淮陽) 태수가 되어 수레를 따라 비가 오게 했으며, 맹상(孟嘗)이 합포(合浦) 태수가 되자 (다른 고을로) 떠났던 구슬들이 되돌아왔다. 대봉(戴封)이 서화령(西華令)이 되자 황충(蝗虫)이 그 경계 안에 들어오지 않았고, 유곤(劉琨)이 홍농(弘農) 태수가 되자 사나운 호랑이가 새끼를 업고 강을 건너갔으며, 왕고(王皐)가 중천령(重泉令)이 되자 난새가 뜰에 날아들었다. 정치에서 세 가지 기이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

보답하는 정치로는 당빈(唐彬)이 업현령(鄴縣令)이 되어 예절로써 이끌고 풍속을 바로잡아 1년만에 이루었으며, 제오방(第五訪)은 신도령(新都令)이 되어 손만 흔들어도 교화가 행해져 이웃 고을 백성들까지 다 돌아왔다. 복자천(宓子賤)은 선부령(單父令)이 되어 거문고만 타며 마루에서 내려서지 않았는데도 고을이 잘 다스려졌으며, 고개지(顧凱之)는 산음령(山陰令)이 되어 밤낮 발(簾)을 드리우고 있었는데도 사무가 간편하고 정사가 다스려졌으니, (이러한 정치가 바로) 보답하는 정치이다.

청렴한 정치로는 호위(胡威)는 서주(徐州) 자사로 옮겨 늘 청렴 결백함을 숭상하며 정치 교화에 힘썼다. 유우(劉虞)는 유주(幽州)의 목사(牧使)가 되어 다 떨어진 옷에 미투리를 신었으며, 밥상에 생선과 고기가 없었다. 양속(羊續)은 남양(南陽) 태수가 되어 (선물 받은) 생선을 (뜰에) 매달아 (뇌물 바치려는) 뜻을 막았다. 시묘(時苗)는 수춘령(壽春令)이 되어 송아지를 두고 떠났으니, (이러한 정치가 바로) 청렴한 정치이다.

농상(農桑)을 권장하는 정치가 있으니, 장담(張湛)이 어양(漁陽) 태수가 되자 뽕나무에 곁가지가 없고 보리 이삭이 두 갈래로 무성했다. 소신신(召信臣)이 남양(南陽) 태수가 되자 몸소 밭을 갈아 백성들에게 권면하고, 도랑을 파서 물을 통하게 했다. 조궤(趙軌)는 협주(峽州) 자사가 되어 오천 이랑이나 되는 밭에다 물을 대어 사람들을 이롭게 했으니, (이러한 정치가 바로) 농상(農桑)을 권장하는 정치이다.

또 옥사(獄事)를 바르게 판결하여 소송을 그치게 하는 정치가 있으니, 왕환(王渙)이 낙양령(洛陽令)이 되자 모든 재판을 법리에 따라 처단하여 곡진하지 않음이 없었다. 주처(周處)는 광한(廣漢) 태수가 되어 고을에 많이 밀렸던 소송을 하루아침에 죄다 판결했으니, (이러한 정치가 바로) 옥사를 바르게 판결하여 소송을 그치게 하는 정치이다.

또 백성들이 노래하기를, “관아에 뛰어난 정치 있으니, 그 덕이 어질고도 밝구나(官有殊政, 厥德仁明)”라고 한 것은 곽하(郭賀)가 형주(荊州)를 다스릴 때의 일이다. “예전에는 적삼도 없었는데, 지금은 바지가 다섯일세(昔無襦, 今五袴者)”라고 한 것은 염범(廉范)이 무도(武都)를 다스릴 때의 일이다. “나를 찌르는 가시가 있으면 잠군(岑君)이 베어주고, 나를 해치는 벌레가 있으면 잠군이 막아주네. 배불리 먹고 배 두드리니, 어찌 재앙을 알랴(我有枳棘, 岑君伐之. 我有蟊賊, 岑君遏之. 含哺鼓腹, 焉知凶災)”라고 한 것은 잠희(岑熙)가 위군(魏郡)을 다스릴 때의 일이다. “강직하여 스스로 이룬 분이 남양(南陽)의 주계(朱季)일세(强直自遂, 南陽朱季)”라고 한 것은 아전들이 그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그의 은혜를 사모하여 부른 노래이니, 주휘(朱暉)가 임회(臨淮)를 다스릴 때의 일이다. “무성한 저 아가위나무를 베지도 말고 치지도 말라(蔽芾甘棠, 勿剪勿伐)”라고 한 것은 소공(召公)의 교화를 백성들이 잊지 못해 노래한 것이다.

또 육운(陸雲)이 능의령(凌儀令)이 되고, 양호(羊祜)가 형주(荊州) 자사가 되며, 순욱(荀勖)이 안양(安陽) 태수가 되었을 때에는 다들 사랑을 끼쳤으므로, 아전과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여 사당과 비석을 세웠다. 제오륜(第五倫)이 회계(會稽) 태수를 그만둘 때에는 그 고을 늙은이들이 수레를 붙들고 울면서 수백 리를 따라갔고, 요원숭(姚元崇)이 형주(荊州)를 그만둘 때에는 그가 탄 말의 채찍과 등자를 백성들이 끊어버려 (그를 가지 못하게) 붙잡으려 했다. 후패(侯覇)가 임회(臨淮)를 그만둘 때에는 백성들이 수레바퀴 밑에 누워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위대하도다! 이런 분들이여. 이들의 덕망과 명예가 뛰어나 전기(傳記)에 실려 빛나고, 만고에 전해지며 후세인들을 격려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각기 한 가지 재주만 능한데도 멀리 유풍(遺風)을 전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이 고을을 다스리는 우리 자사께선 천품이 영민하고 풍채가 헌칠하며, 가을 물같이 맑고 보름달같이 밝다. 명령은 우뢰 같으면서도, 은혜는 단비와 같다. 우리 백성들을 다스리면서, 옛날 훌륭한 수령의 정치를 참작하여 지금에 알맞는 정치를 시행한다. 나라 다스리는 말을 상고할 때에도 사람들에게 일컬어지는 것을 받들어 지키며, 백성들 사이에 사리에 맞지 않았던 것들은 모두 혁신하였다.

도리에 맞지 않으면 털끝 만한 물건도 백성들에게서 취하지 않고, 혹시 나라 일을 위해서 부득이 세금을 매기거나 부역을 시킬 일이 있으면 미리 시일을 정했으며, 고을 안에 방(榜)을 붙이고 고을 밖에 글을 보내 모두들 듣고 알게 하였다. 백성들이 다 기꺼이 따랐기에 이뤄지지 않는 일이 없고, 없어지지 않는 폐단이 없었다. 2년 동안 백성들이 아전을 보지 못했으며, 예전에 죄를 짓고 달아났던 사람들도 그 어진 풍모에 따르고 의리를 사모하여 모두 본토로 돌아오게 되었다.

사신을 맞이하거나 보내는 비용도 백성들에게서 거둬들이지 않고 모두 공금으로써 충당하여, 남자에겐 곡식이 남아돌고 여자에겐 비단이 남아돌아, 떨거나 굶주리는 걱정이 없어졌다. 가혹한 법을 없애는 동시에 화목한 풍속을 일으켜서, 백성이나 아전이 어쩌다 죄를 짓더라도 너그럽게 용서하고 사랑하였다. 형벌을 가하지 않고 이치로 타이르며 덕으로써 이끌었으니, 이것이 바로 너그러운 정치이다.

홀아비와 과부들에게 은혜를 고루 베풀며, 완악하고 간사한 자에게는 위엄을 떨쳐, 정성을 다하고 게으르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교화를 베풀었다. 계획하고 행하는 일들이 모두 사리에 맞았으며, 민첩하게 하기를 힘썼다. 일은 간략하면서도 이치에 알맞았으니, 이것이 바로 잘하는 정치이다.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차릴 때에는 자기에게 넉넉하게 하면서도 남에겐 야박하게 하는 것이 공통된 심정인데, 공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부임하던 첫날부터 먼저 관아에 공급하는 일을 제한하여 술과 안주를 금지하는 한편, 자잘한 온갖 일들을 하나하나 없앴다. 뇌물을 받지 않았으며, 꺼림직한 일들도 멀리했다. 다른 군수들이 보내온 물건도 끝내 사사롭게 쓰지 않고 관용(官用)에 보충하였다. 아침 저녁 밥 한 그릇과 국 한 그릇으로 부엌이 한산하고 밥상이 썰렁했으니, 이것이 바로 청렴한 정치이다.

법 아닌 것을 살펴 금함으로써 사악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충직하게 변화하고, 완고하고 흉악한 자들을 징계함으로써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이 순량(循良)한 자로 변하였다. 죄인을 다스림에 있어서 관용의 덕을 베풀어 신명(神明)이 돌보셨으며, 소송을 판결함에 있어서 공정을 다하여 백성들이 올바른 자리를 얻었다. 백성들에게 해독이 되는 것은 사방에 끊어졌으니, 이것이 바로 보답하는 정치이다.

농상(農桑)에 힘쓰기를 권면하여 땅을 모두 개간하고, 비바람이 때에 맞춰 순조로운데다 황충까지도 (경계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김을 맸으며, 서리까지도 늦게 내려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으니, 이것이 바로 감화시키는 정치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너그러운 정치, 잘하는 정치, 청렴한 정치, 보답하는 정치, 감화시키는 정치를 공께선 한 몸에 이미 다 갖추셨으니, 우리도 한 눈으로 다 볼 수가 있다.

아아! 나라에 어려움이 많은 때를 당하여 현명하신 임금님의 염려스런 마음을 깊이 생각하여, 우리 변두리 고을을 다스리면서 뜻을 굳게 잡고 충성과 힘을 다하며 어질게 다스리려고 애써 다 죽어가던 백성들을 모두 되살아나게 하셨으니, 그 은혜와 사랑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이로 말미암아 정치를 잘한다는 명성이 조정에 들릴 뿐 아니라, 선비와 백성으로부터 나라 안팎의 멀고 가까운 곳까지 다들 (공의) 아름다운 덕을 찬미하였다. 그래서 훌륭한 이름이 청사에 빛나고 만고에 전해져 썩지 않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의 덕행 가운데 옛사람도 미치지 못할 것이 또 하나 있으니, 여러 벼슬을 역임하면서 늘 요직을 맡았고, 네 도(道)와 두 지방을 다스렸으며, 병권(兵權)을 두 차례나 잡아 커다란 공을 세웠다. 10년 동안 (조정의) 안팎을 드나들면서, 한 나라의 막중한 권력을 모두 한 손에 장악하였다.

공이 세운 충절은 조야(朝野)에 드러났으며, 대인(大人) 상국(相國)들과 때를 같이해 풍속을 살피고 때를 같이해 고을을 다스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이러한 은총과 영광은 삼한(三韓)에서도 천년에 걸쳐 한 집 뿐이라, 조천납촉(照天蠟燭)과 수정등롱(水精燈籠)이 다시 세상에 나온다 한들 어찌 공을 당할 수 있으랴”라고 하였다.

나 역시 그 교화를 받은 한낱 어리석은 백성으로, 그 은혜와 덕택을 입은 지 오래 되었다. 장차 그 덕을 칭송하려고 했지만, 좁은 소견으로 아무리 엿본들 그 푸른 것을 표현하고 흰 것을 찬양하는 데에 무슨 유익이 있으랴. 그러나 잠자코 있어 전하지 않으면 후세 사람들이 오늘의 아름다운 사실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그래서 24구의 시 한 편을 지어 내 친구 여러분께 보이고, 또 후세 사람들에게 느낌이 있기를 바라면서 삼가 이 시를 써서 책상 앞에 바친다.

《유수(劉隨)가 성도(成都) 통판(通判)이 되었을 때에 엄하고도 밝게 통달하여서 사람들이 “수정같은 등롱(水精燈籠)”이라고 했고, 전원균(田元均)이 정사나 소송을 맡을 때에는 그 실정을 다 물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늘을 비추는 촛불(照天蠟燭)”이라고 했다.》

 

거룩한 임금 모신 지 이십 년인데

어지신 사군(使君) 만난 것 또 기쁘구나.

은혜의 물결 흘러 넘쳐 천리 강산을 적시고

인수(仁壽)의 지역 넓고 빛나 두 세대를 칭송하네.

미풍양속 이루어 백성을 교화하니 참으로 아름답고

집에는 효도 나라엔 충성 온전히 갖추셨네.

때 따라 내리는 호령은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고

세상에 뛰어난 공명은 한낮의 해일세.

감옥이 오래 비어 몽둥이와 밧줄이 한가롭고

마을이 되살아나 재물이 넉넉하니,

한 고을의 기풍이 다시 변하고

삼한(三韓)에 이미 도가 전해졌네.

홀(笏) 잡는 아침마다 산 기운이 시원하고

거문고 울리는 밤마다 달빛 둥글구나.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마음 무거워 세금은 줄어들었고

늙은이들 이야기 높을수록 송덕(頌德) 소리 이어지네.

이처럼 정치 잘한 분 지금도 드물고 예전에도 드물었지.

의로운 명성 이후에 없고 예전에도 없었네.

용루(龍樓) 봉각(鳳閣)에 은총이 자주 내리니

산새와 들짐승도 제 자리를 얻었네.

나는 길가에 선정비 세우려 하고

아전들은 정자 옆에서 수레바퀴에 누우려 하니,

고금의 훌륭한 정치는 다 이러했지.

아가위나무 그늘에 편안히 앉으니 저절로 고요해지네.

 

上河刺史詩(幷序, 允源)

觀夫賢士大夫應時而出。德被生民。功施社稷。勒之金石。書之竹帛。光耀後世。垂之無窮。此人情之所感。今古之所同也。古之爲人臣者。分符列郡。旁施政敎者多矣。其寬政則魯恭爲中牟令。專以德化而不任刑。汲黯之爲東海守。其理寬大而不細苛。劉寵爲會稽守。簡除煩苛。郡中大化。龔遂爲渤海守。專以文法。一切便宜。崔景眞爲平章守。人有罪過。但用蒲鞭者 是也。其善政則黃覇爲潁川守。力行敎化。其才長於利人。衛颯爲桂陽守。其所施令。莫不合宜。韓延壽爲東都守。爲天下㝡。梁彦光爲鄱陽守。稱爲理㝡。劉廣爲莒州刺史。善政爲第一者 是也。其感政則鄭弘爲淮陽守。隨車致雨。孟嘗爲合浦守。去珠復還。戴封爲西華令。蝗不入境。劉琨爲弘農守。暴虎負子渡河而去。王皐爲重泉令。鸞翔於庭。政稱三異者 是也。其報政則唐彬爲鄴縣令。道禮齊俗。朞月乃成。第五訪爲新都令。手反化行。隣縣歸之。宓子賤爲單父令。鳴琴不下堂而邑理。顧凱之爲山陰令。晝夜垂簾。務簡事理者 是也。其廉政則胡威遷徐州刺史。世尙淸潔。勤於政化。劉虞拜幽州牧。弊衣繩履。食無魚肉。羊續爲南陽守。懸魚杜意。時苗爲壽春令。留犢而去者 是也。其有勸課農桑則張湛爲漁陽守。桑無附枝。麥秀兩岐。召信臣爲南陽守。躬耕勸課。開通溝瀆。趙軌爲峽州刺史。灌田五千頃。人賴其利者 是也。又有辨獄止訟則王渙爲洛陽令。能斷法理。莫不曲盡。周處爲廣漢守。郡多滯訟。一朝決遣者 是也。又復民有歌曰。官有殊政。厥德仁明者。郭賀之守荊州也。昔無襦今五袴者。廉范之守武都也。我有枳棘。岑君伐之。我有蟊賊。岑君遏之。含哺鼓腹焉知凶災者。岑熙之守魏郡也。强直自遂。南陽朱季。吏畏其威。民懷其惠者。朱暉之爲臨淮也。蔽芾甘棠。勿剪勿伐者。召公之化民不忘也。又有陸雲之爲凌儀令。羊祜之爲荊州刺。荀勗之爲安陽守。各留遺愛。吏民思之。爲立祠碑。第五倫之罷會稽也。父老攀轅相泣。相隨數百里。姚元崇之罷荊州也。所乘鞭鐙。民皆截留。侯覇之罷臨淮也。百姓臥轍不許去。偉哉此徒。赫然德譽。光輝傳記。寥寥萬古。激勵後人。然各能一藝。遠播遺風耳。今我刺史之鎭玆邑也。天姿粹敏。風采軒昻。以秋水之淸。氷輪之白。晴雷其令。時雨其恩。緩撫吾民。酌古良牧之政宜于今者。宗而奉之。考諸理國之說稱于人者。承而守之。民間舊有不便事理。一皆革去。如其非道。一毫之物。不取於民。或有邦國之須。不得已斂役。則計定日時。榜示于內。牒傳于外。感使聞知。民皆悅從。事無不立。弊無不蠲。二年之間。民不見吏。往日逋逃。趍風慕義。盡還本土。凡使客迎送之費。不抽民戶。皆以公錢支應。男有餘粟。女有餘帛。凍餒之患絶矣。因以刪除苛法。宣暢和風。其爲民吏或有罪過。寬容且慈。不加刑罰。諭之以理。導之以德。此其政之寬也。惠均於鱞寡。威振於頑獷。恪勤匪懈。旁施美化。凡所處畫。悉皆合宜。務爲敏速。事簡理㝡。此其政之善也。大抵食前方丈。厚已簿人。人所同也。公則不然。到任初日。先制公衙供給之事。禁斷酒肴。凡百雜冗。一一蠲免。不納苞苴。身遠嫌疑。雖他郡守令所寄之物。終不容私以補官用。朝與夕惟一飯一羹。廚火蕭疎。机案凄凉。此其政之庶也。禁察非法。邪侫化爲忠直。懲戒頑兇。姦猾變爲循良。體獄有陰功。神明扶佑。決訟至公正。民庶得宜。毒民害物者絶於四境。此亦報其政也。勸課農桑則土地盡闢。風雨順時。飛蝗不入。人不失時。去其荒穢。霜又延降。五穀豊熟。此亦感其政也。然則所謂寬政․善政․廉政․報政․感政。公於一已俱已備焉。吾於一眼悉得見之。於乎。當國步多艱之際。深念聖明君之憂勤。撫我殘封 操持勁義。盡忠竭力。賢勞庶務。使吾殘民咸得蘇息。其爲惠愛。曷勝言哉。由是。政聲傳聞于廟堂。以至士庶。中外邇遐皆稱嘆美。方知盛譽光輝靑史。傳萬古而不朽也。公之德行。又有古人所末及者。揚歷班行。每當要地。提按四道。採訪二方。再執兵權。樹立大功。出入中外十年之間。一國重權。皆歸掌握。立成之節。表于朝端。與大人․相國觀風一時。爲郡一時。人皆曰。如此榮寵。三韓千載。一家而已。雖使照天蠟燭。水精燈籠。復生於世。豈敢與公當也哉。僕亦化下一愚民也。涵泳恩澤者久矣。將欲訟德。操管所窺。有何益於褒靑讚白乎。然黙黙而不傳。則後之人焉能盡知今日之美論哉。因成二十四句一章。以示吾擠二三之者庶有感於將來者。謹寫其詩奉呈机下。《劉隋爲成都通判。嚴明通達。人謂之水精燈籠。田元均凡有政訟。問之盡情。人謂之照天蠟燭》

利見龍飛第十十年 喜予方遇使君賢

恩波浩浩涵千里 壽域熙熙詠二天

成俗化人誠盡美 孝家忠國亦俱全

乘時號令晴雷殷 冠世功名白日懸

囹圄久空閑木索 閭閻再活足財錢

煌煌一邑風還變 赫赫三韓道已傳

拄笏朝朝山氣爽 鳴琴夜夜月華圓

子民心重徵租絶 父老談高頌德連

政價罕今尤罕古 義聲無後更無前

龍樓鳳閣應催寵 獸穴禽棲㧾得便

我欲立碑官路畔 吏當臥轍野亭邊

韋絃薤水猶多事 燕坐棠陰自寂然

Ⅱ-012) 전(前) 자사(刺史) 하공(河公)에게 부침 (두 수)

Ⅱ-012-01)

죽마(竹馬) 타는 아이들까지 세후(細侯)를 말하니

삼 년 동안 끼친 사랑이 참으로 깊어라.

깃발 돌려 조정으로 가신 뒤부터

물빛과 산 모습까지 시름을 띠었다오.

Ⅱ-012-02)

삼가정(三可亭) 앞에 한 줄기 시냇물이

올해에도 작년 가을같이 졸졸 흐르네.

잘 다스렸다는 명성이 시냇물 소리와 함께 오래 전해져

길가는 나그네들 사이에 그 이야기 그치지 않으리.

 

奉寄前刺史河公(二首)

竹馬兒童說細侯 三年遺愛固深留

自從返旆朝天後 水色山容尙帶愁

 

三可亭前一波流 潺湲還似去年秋

政聲長與溪聲遠 應是行人說不休

Ⅱ-013) 늦봄 (두 수)

Ⅱ-013-01)

꽃 언덕 버들 그늘에 한껏 마음 쏟노라니

늦바람에 흩어지는 맑은 향내가 몹시 사랑스럽네.

한 번 취했다 깨기도 전에 좋은 시절 다 지나가니

꽃다운 봄 뜻도 어느새 그만이구나.

Ⅱ-013-02)

어느새 봄 모습이 바야흐로 한창이라

꽃 떨구는 바람에 나비 시름하고 벌들 원망하네.

동군(東君)이 떠나는 뜻을 그 누가 붙잡으랴

버들 꽃 저녁 하늘에 부딪치는 모습만 바라볼 뿐이네.

 

暮春(二首)

縱情花塢柳陰中 酷愛淸香散晩風

一醉未醒佳節過 十分芳意旋成空

 

春事方闌不覺中 蝶愁蜂怨落花風

東君去意誰能挽 只見楊花撲暮空

Ⅱ-014) 복사꽃

복사꽃 한 그루가 푸른 봄날에 아양 떨어

이슬에 씻긴 붉은 단장이 햇빛에 비쳐 산뜻하네.

시를 짓던 그날의 나그네를 물을 뿐이지

꽃 아래 놀던 지난해 사람은 생각지 말게.

 

桃花

穠桃一樹媚靑春 露洗紅粧照日新

但問題詩當日客 莫思花下去年人

Ⅱ-015) 조(趙) 시랑(侍郞)이 보낸 시에 차운함

빙설 같은 마음을 두세 번 다듬어서

임금의 은혜 노래하며 태평성대를 축하하네.

나는 구름을 밟고 달나라 궁전에 오르고 싶건만

그 누가 지팡이 던져 은하수 다리를 만들려나.

한 마음으로 붉은 정성 간절하지만

귀밑에 늘어나는 흰 털 보고 깜짝 놀랐네.

지난 세월 돌아보다가 혼자 웃으니

서리 띤 단풍나무 잎이 바람에 나부끼네.

 

次趙侍郞所寄詩韻

須將氷雪琢三條 歌詠君恩賀盛朝

我欲躡雲登月殿 孰先投杖作銀橋

一心雖切丹誠重 雙鬢初驚白髮饒

點檢年光還獨笑 帶霜楓葉逐風飄

Ⅱ-016) 또 조(趙) 시랑(侍郞)에게

변암(弁巖)의 산 빛은 푸르디 푸르고

치악산 구름은 희디 희구나.

구름은 그대같이 저 혼자 한가롭지만

산은 아마도 내가 바쁘다고 비웃겠지.

오두막 얽어서 삼봉(三峰)을 향하려 했으니

어찌 권세에 낚여서 구맥(九陌)을 바삐 달리랴.

황금 집 붉은 문은 귀한 사람을 빠뜨리지만

솔바람 밝은 달은 한가한 나그네를 부르네.

생애는 표주박 하나로 만족하니

내 몸에 석자 비단이 원래 없었네.

가난하게 사는 맛을 누가 물으면

푸른 시내 푸른 산이 세상을 막았다 하리.

 

弁巖山色靑彌靑 雉岳雲光白又白

雲自如君獨等閑 山應笑我多忙迫

結廬將欲向三峯 餌勢何煩奔九陌

金屋朱門陷貴人 松風皎月招閒客

生涯自足一枚瓢 身上元無三尺帛

若問窮居氣味長 碧溪水外靑山隔

Ⅱ-017) 관찰사 김도(金濤)가 가뭄에 비를 얻고 지은 시에 차운함

가뭄 귀신(旱魃)이 자취를 거두자마자

구름이 지나면서 때 맞춰 비를 내리네.

밭가는 보습의 공이 가장 귀하니

사방에 그 기쁨 끝이 없구나.

하늘과 땅 빛은 깨끗이 씻겨지고

풀과 나무도 모두 되살아나네.

마른 뿌리들이 다 활기를 띠니

방울방울 떨어진 비가 헛되지 않았구나.

 

次金按部旱中得雨詩韻(濤)

旱魃纔收跡 雲行雨及時

一犁功㝡重 四海喜無涯

淨世乾坤色 咸蘇草樹姿

枯根皆再活 滴滴不虛施

Ⅱ-018) 여름 날 스스로 읊음 (두 수)

Ⅱ-018-01)

게으르기엔 고즈넉한 난간이 딱 알맞은데

산새 소리도 귀에 시끄러워 듣기 지겹네.

비 지나간 산 빛은 서늘한 자리에 들고

연기에 쌓인 풀빛은 푸르게 문에 이어졌네.

세상 정에 담박해도 나이는 늙었는데

살림살이 청빈해 도(道)는 그대로 있네.

열흘 넘는 병석에 친구마저 끊어져

그리움 거두고 한가롭게 누워 아침 저녁을 보내네.

Ⅱ-018-02)

뽕나무가 그늘 이뤄 작은 난간에 닿았고

이끼 낀 오솔길에 세상 시끄러움 멀어졌네.

손님 드물어 하루 종일 문 두드리는 사람도 없고

몸이 게을러 뜨락도 쓸지 않을 때가 많네.

도연명(陶淵明) 동산의 솔과 국화에는 마음이 스스로 멀고

안회(顔回)의 골목 바구니 밥과 바가지 국에 즐거움 오히려 있어,

옛 현인들의 자취가 다 이러하니

멀리 맑은 향내 맡으며 내 어두움을 부끄러워하네.

 

夏日自詠(二首)

疎慵端合寂寥軒 苦厭幽禽聒耳喧

雨過山光凉入座 烟籠草色翠連門

世情淡薄年仍老 家計淸貧道尙存

病榻旬餘知己絶 卷懷閑臥送朝昏

 

桑柘成陰接小軒 蒼苔一逕隔塵喧

客稀盡日無敲戶 身懶多時不掃門

松菊陶園心自遠 簞瓢顔巷樂猶存

古賢趣尙皆如此 遙挹淸芬愧我昏

Ⅱ-019) 관찰사 김도(金濤)의 모란(牧丹) 시에 차운함

붉은 꽃동산에 봄이 깊은데

그 가운데 꽃 중의 왕이 있네.

활짝 핀 모습은 신선처럼 빼어났고

하늘하늘 고운 빛은 온 나라 꽃 가운데 으뜸일세.

이슬에 엉긴 세 송이 꽃은 무겁고

바람에 흔들리는 한 가지는 길구나.

싸늘한 가을 울타리의 국화꽃이야

비와 이슬의 향내를 어찌 알랴.

 

金按部牧丹詩次韻

春深紅紫苑 中有百花王

灼灼仙姿秀 夭夭國艶芳

露凝三朶重 風動一枝長

冷淡秋籬菊 那知雨露香

Ⅱ-020) 못에 핀 연꽃을 읊은 시에 차운함 (두 수)

Ⅱ-020-01)

봉황지(鳳凰池)에서 은총이 순령(荀令)을 재촉하니

공명(功名)이 이르고 늦는 거야 그대로 맡겨야지.

가을 연꽃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라

상서로운 조짐으로 공을 위해 기약하네.

Ⅱ-020-02)

붉은 꽃 푸른 잎들이 맑은 못을 비추고

흩날리는 향그런 안개에 해가 더디네.

한 송이 반쯤 피어 한을 머금었으니

이듬해 시 읊으며 구경하자고 누구와 약속하랴.

 

次詠池蓮詩韻(二首)

寵催荀令鳳凰池 也任功名有早遲

請看秋蓮含喜氣 故將祥瑞爲公期

 

淺紅深翠照淸池 香霧霏霏日正遲

一朶半開如有恨 明年吟賞與誰期

Ⅱ-021) 자성(子誠) 아우에게 참외를 보내면서

산언덕에 풀 베고 참외를 심었건만

오랜 가뭄에 열매 많이 맺을 수 없었네.

마침 두세 개가 비 맞아 익었기에

아이 불러 따다가 그대 집에 보내네.

 

以苽寄子誠第

山楸伐草種甛瓜 旱久無由結實多

適有數枚和雨熟 呼兒摘取送君家

Ⅱ-022) 자성(子誠) 아우가 화답한 시를 보고 다시 차운함 (세 수)

Ⅱ-022-01)

동릉(東陵)을 향해 오이 심기를 배우려 했지만

재주 원래 없음을 스스로 탄식했네.

평생 임천(林泉)에 살 분수를 지녀

언제나 우리 집을 마주한 푸른 산을 사랑하네.

Ⅱ-022-02)

늙어가면서 이 몸이 매달린 조롱박 같아

움직이기 싫어해서 남에게 조롱을 받네.

뜨락을 쓸고 향을 사르며 경을 외고 앉았으니

촌사람의 행동거지가 중의 집 같구나.

Ⅱ-022-03)

내게 경거(瓊琚)를 보냈는데 모과(木瓜)로 사례하니

깊은 정 후한 뜻에 염려만 하네.

아침 저녁 자주 오가는 걸 어찌 꺼리랴

형의 집이 아우 집에 가까워 더욱 기쁘네.

 

子誠見和。復次韻(三首)。

欲向東陵學種瓜 自嗟才智固無多

平生只有林泉分 長愛靑山對我家

 

老來身若繫匏瓜 懶動從敎謗讟多

掃地燒香念經坐 野夫居止似僧家

 

投我瓊琚報木瓜 情深意厚孔懷多

不妨朝慕頻來往 且喜兄家近弟家

Ⅱ-023) 조(趙) 시랑(侍郞)이 보낸 시운에 차운함

그대가 황주(皇州)에 들어간 뒤부터

국화꽃 단풍나무가 또 다시 가을일세.

매미는 늙고 난새는 돌아가 바람도 쓸쓸한데

고기 잠기고 기러기 끊어져 소식마저 아득하구나.

비 개인 곡봉(鵠峰)의 경치도 구경할 만하지만

해 돋는 치악산(雉嶽)도 역시 장관일세.

훤실(萱室)과 난정(蘭庭)이 모두 평안하시니

고향 생각하며 너무 걱정하지 마오.

 

趙侍郞寄詩次韻

自從吾子入皇州 菊澗楓林又一秋

蟬老驚歸風颯颯 魚沈雁沒信悠悠

鵠峯霽色雖堪賞 雉嶽晴光亦自優

萱室蘭庭並無恙 莫思桑梓剩生憂

Ⅱ-024) 9월 5일. 손님과 함께 술 한잔 나누면서

동쪽 울타리에 두어 떨기 국화가

중양절(重陽)을 기다리지 않고 피었기에,

아이를 불러 한 송이 꺾어다가

며느리 시켜 새 술을 거르게 했네.

이때부터 항아리 속의 물건이

맑은 향내를 내 술잔에 풍기게 하니,

혼자 술잔 들고 혼자 시를 읊으며

그윽한 정을 내 스스로 달래기 어려웠네.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침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네.

한편으로 놀라고 한편으로 기뻐하며

마주 앉아서 꽃 핀 대를 바라보았네.

술잔 주고받으며 웃고 이야기하다

옥산이 무너지는 것도 알지 못했네.

네 가지 일 다 갖추기 참으로 어려우니

찾아온 이 시간을 놓치지 마세나.

술 속에 살아가던 여덟 신선도

죽어서는 그 뼈가 티끌 되었고,

술 마시기 좋아하던 고양(高陽)의 무리도

한번 간 뒤로는 돌아올 줄을 모르네.

가을빛이 너무나 쓸쓸하니

붉은 나뭇잎이 푸른 이끼에 떨어지네.

붉은 대추는 딸 때가 되었고

빨간 밤도 구워 먹게 되었네.

그대여! 부디 노래하고 춤추세나

우리 집 술은 항아리에 가득하다네.

아름다운 이 계절을 맘껏 즐기세나

귀밑머리가 더더욱 희어질테니.

 

九月五日。與客小酌。

東籬數叢菊 不待重陽開

呼兒折一朶 命婦蒭新醅

從此尊中物 淸香熏我杯

獨擧還獨詠 幽情難自裁

忽聞扣戶響 適有佳賓來

飜然驚且喜 共坐看花臺

對酌笑還語 不知玉山頹

四事固難並 要須及時哉

飮中八仙子 骨化爲塵埃

高陽嗜酒輩 一去無復廻

秋光正蕭洒 紅葉棲蒼苔

丹棗正堪剝 赤栗亦可煨

君須歌且舞 我酒盈山罍

努力賞佳節 雙鬂欲暟暟

Ⅱ-025) 봄추위 (1373년, 계축)

비바람이 날쳐서 봄추위가 계속되니

홑적삼으로 난간에 기대기 겁나는구나.

버들눈과 꽃망울은 모두 물이 안 올랐지만

산 얼굴과 물 자태는 그래도 바라볼 만하네.

술잔 들고 칼을 보면 마음은 아직도 씩씩하고

글귀 찾아 붓 휘두르면 뜻이 절로 너그러워지네.

계절 바뀌는 모습을 보려고 숲 속으로 가려다

진흙길이 아직 마르지 않아 꺼림칙하네.

 

春寒(癸丑)

雨飛風慢作春寒 乍着單衫㤼倚欄

柳眼花唇俱已澁 山容水態但堪觀

引杯看釰心猶壯 覓句揮毫意自寬

欲向林園檢時事 却嫌泥路不曾乾

Ⅱ-026) 말(馬)

때를 만나지 못해 소금 수레에 시달리다가

백락(伯樂)을 만나자 슬프게 울부짖었네.

가벼운 발굽 오똑한 귀에 날랜 힘을 보태어

삼천리 밖으로 달리겠노라 늘 생각하네.

 

力困鹽車未遇時 相逢伯落且悲嘶

輕蹄峻耳添驕力 常念三千里外馳

Ⅱ-027) 소(牛)

굳센 뼈 기이한 털에 수레를 끌만큼 힘센데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농사꾼 집에 있구나.

햇빛 받으며 풀밭에서 잠 자는게 좋으니

어찌 오(吳) 나라에서 달빛 보며 헐떡이는 소 같으랴.

 

壯骨奇毛力任車 自隨牽挽在農家

也宜向日眠芳草 何喘吳門月似波

Ⅱ-028) 홍수(弘首)가 반찬거리를 보내 왔기에 시를 지어 사례함

몸이 늙고 집이 가난해서 살아가기 어려우니

무슨 여유가 있어 반찬까지 마련하랴.

배불리 먹기를 구하지 않는다는 말도 쓸 데가 없으니

행실을 힘 쓸 수 없어 몸도 편안치 않네.

원헌(原憲)의 가난을 달갑게 여기던 내가 부끄럽고

원공(遠公) 같이 너그러운 그대 마음이 고마워라.

두세 번 보내온 음식이 내 밥상에 올랐으니

사귄 정이 이리 깊은지 여기서 보겠네.

 

弘首惠以佐餐之物。詩以謝之。

身老家貧計活寒 有何餘物可供餐

食無求飽言無用 行不能彊體不安

愧我分甘原憲窶 感君心似遠公寬

再三嘉貺來吾案 深淺交情就此看

Ⅱ-029) 서곡(西谷) 서(徐) 봉익(奉翊)이 벽에 그린 산수화에 씀 (두 수)

Ⅱ-029-01)

만 겹 구름바다에 만 겹 산이

붓끝에 옮겨 들어와 그 뜻이 한가롭네.

우리 서공의 어질고 슬기로움을 알려면

모름지기 이 그림부터 먼저 보아야 하리라.

Ⅱ-029-02)

강가의 외로운 암자는 반쯤 산에 가리웠고

바위머리 소나무와 달은 절로 맑고 한가롭네.

이 가운데 기묘한 것은 인간 세상 아니어서

우리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니 자세히 보라.

 

題西谷徐奉翊畵壁山水(二首)

萬重雲海萬重山 移入毫端意氣閑

欲識我公仁且智 要須先向此圖看

 

江上孤菴半隱山 石頭松月自淸閑

就中奇妙非人世 爲報吾儕着眼看

Ⅱ-030) 밤에 앉아 스스로 읊음

섬돌에 귀뚜라미 찍찍 울고 북두성이 드리웠는데

고요히 앉았노라니 밤이 더욱 더딘 줄 느끼겠네.

바람이 멈추니 이슬꽃이 풀넝쿨을 휘감고

구름이 열리자 달 그림자가 소나무 가지에 구르네.

한 일 없이 세월만 보낸 것 깨닫고 보니

이 가을 되면서 온갖 생각 많아지네.

잠자코 나이를 세며 거울을 보다가

희어져 가는 더부룩한 머리털에 문득 놀랐네.

 

夜坐自詠

砌蛩啾喞玉繩垂 靜坐偏驚夜更遲

風定露華縈草蔓 雲開月影轉松枝

已知度日無功用 直到逢秋更慮思

黙數身年臨鏡面 忽驚蓬鬢欲垂絲

Ⅱ-031) 해질 무렵에야 개임

산골짝에 장마비가 개이자

나무 그늘에 시원한 기운이 나네.

산 구름은 일렁이며 버들 꽃 모자를 헤치고

시냇물은 흘러가며 거문고 줄을 타는구나.

강가에는 햇빛이 붉게 쏟아지고

하늘 저 너머 멧부리가 푸르게 높은데,

이끼 깨끗한 길에 청려장 짚으며 생각하니

티끌 세상의 마음을 씻어버릴 만하구나.

 

晩晴

積雨霽林壑 嫩凉生樹陰

山雲披絮帽 澗水鼓瑤琴

紅瀉江邊照 碧高天外岑

杖藜苔逕淨 聊以滌塵襟

Ⅱ-032) 생원(生員) 김루(金壘)에게 약을 청하는 시

타고난 체질이 본래 허약한데다

병의 뿌리가 늘 몸에 박혀 있어,

오장 육부에 답답하게 맺힌 곳이 많고

근육도 갈수록 시큰거리네.

온 배가 예사로 아파서

두 눈썹을 밤낮 찌프리고 지내네.

자루가 비어서 약 거리가 없으니

머리 들어 어진 그대를 바라만 보네.

 

上金生員壘乞藥

稟質本微弱 病根元在身

腑臟多鬱結 筋力益酸辛

一腹尋常痛 雙眉日夜嚬

囊空無藥餌 矯首望仁人

Ⅱ-033) 서울 가는 조(趙) 시랑(侍郞)을 보내면서

조공(趙公)은 참으로 좋은 선비라

젊어서부터 문장이 뛰어났네.

보배 가운데 유달리 아름다운 옥이고

여러 꽃 가운데 으뜸인 아름다운 난초일세.

서련(犀聯)에서는 은총을 이어받고

임금께도 벼슬 은혜를 입어,

뵈러 가는 걸음은 천릿길도 가벼우니

그 영화가 온 고을을 두루 비추네.

기쁜 마음은 공우(貢禹)와 같고

막중한 지위는 왕양(王陽)보다 더하건만,

떠난다는 인사가 어찌 그리 급한지

정을 나눌 겨를도 없는 게 한스러워라.

강과 산에는 쌓인 비가 걷혀

언덕과 들에 서늘한 기운 드는데,

가을바람 부는 길에는 매미 소리가 시끄럽고

밤비 내리는 침상 곁에는 벌레가 우는구나.

이별하는 시름이야 느낌 깊을 테지만

떠나는 흥도 헤아리기 어려울 테지.

이 은근한 뜻을 저버리지 말고

애달파하며 술잔이나 기울이세.

임금 모실 때가 이미 왔으니

나라 빛낼 마음을 잊지 마시게.

선인의 무덤을 다시 뵈올 땐

높이가 석 자는 더 높아졌겠지.

 

送趙侍郞如京

趙公眞吉士 少小有文章

美玉異諸寶 猗蘭冠衆芳

犀聯承寵渥 鳳闕拜恩光

覲省輕千里 榮華照一鄕

喜情同貢禹 位重勝王陽

告別知何迫 論懷恨未邊

江山收積雨 原野入新凉

蟬噪秋風路 虫鳴夜雨床

離愁深有感 去興浩難量

莫負殷勤志 須傾繾綣觴

致君時已到 華國意毋忘

復見先人塚 更高三尺强

Ⅱ-034) 서곡(西谷) 원(元) 선생(先生)의 부인 전씨(全氏)를 곡(哭)함

결혼해 이곳에 오신 뒤부터

가도(家道)가 흥창하였네.

딸 하나에 아들 다섯 귀하게 기르고

여든 두 살 되도록 장수하셨네.

거품과 그림자는 끊어졌지만

물소리와 더불어 한(恨)은 길리라.

지나간 자취를 어디서 찾을른지

쓸쓸한 달빛만 환히 비추네.

 

哭西谷元先生妻全夫人

婚姻故來此 家道乃興昌

一女五男貴 八旬二歲强

信從泡影斷 恨與水聲長

陳跡尋何處 荒凉白月光

Ⅱ-035) 낭천(狼川)에 묵으면서

잠 못 이뤄 오래 앉았노라니 온갖 감회가 일어나는데

반 바퀴 산 속 달이 창에 비춰 환하네.

먼 길 나그네를 두견새가 못내 괴롭혀

오경(五更)이 되도록 꽃 그늘에서 우네.

 

宿狼川

久坐無眠百感生 半輪山月照窓明

杜鵑惱殺遠遊客 啼隔山花到五更

Ⅱ-036) 지난 밤 하늘 동쪽․서쪽 모퉁이에 붉은 기운이 있기에

어젯밤 하늘 동쪽 서쪽에

붉은 기운이 서로 깜박거려,

어두운 길을 걸어가는 동안

마치 달빛같이 환히 비췄네.

처음에는 보랏빛 구름이 비끼더니

차츰 불꽃처럼 치열해,

먼 하늘을 우러러보자

멀리 쏘는 그 빛이 더욱 밝았네.

바라보기만 해도 이상하니

그 변화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난 것을 비로소 알고

비결을 잊지 않으려 기록해 두네.

 

前夜。天之東西隅有赤氣。

昨夜天東西 赤氣互明滅

昏昏行路間 照耀如白月

初疑橫紫雲 漸若火焰烈

仰視天字深 遠射光彌潔

所見異於常 變化安能說

方知表吉祥 記取不忘訣

Ⅱ-037) 금성(金城) 가는 도중에서

한낮에 곧바로 산양(山陽) 길을 지나

걷고 또 걸어 추파령(趍坡嶺)에 올랐네.

고개가 높아서 하늘이 멀지 않고

봉우리들 내려다보니 아득하구나.

깊은 골짜기 아름다운 경치를 말할 수 없어

이 몸이 항아리 속 세계에 들어온 듯하네.

바위 꽃 시내 풀은 서로 아양을 떨며

봄바람 앞에서 절로 그림을 이루었네.

기암 괴석이 아름다운 나무들과 뒤섞이고

온갖 진기한 새들이 서로 지저귀네.

맑은 시냇물 굽어보면 움켜쥐고 싶고

좋은 산 바라보면 그림으로 전하고 싶네.

추파령 옛 역이 이 근처였던가?

산 속 초가집에서 저녁 연기가 일어나네.

한 줄기 냇물 풍경이 더욱 뛰어나

양 언덕의 꽃 빛이 푸른 시냇물에 담겨 있네.

봄을 찾는 즐거움 옛부터 누렸건만

이곳에 오른 내 기쁨 옛사람을 만난 듯,

뛰어난 경치 다 찾아보고도 마음에 차지 않아

다시 읊어서 시 한 편을 이루었네.

 

金城途中

亭午直過山陽路 行行上到趍坡嶺

趍坡巓高天不遠 下視列峀蒼茫然

洞深佳致不可狀 却疑身入壺中天

巖花澗草爭媚嫵 自成圖畵春風前

奇巖怪石雜佳木 珍禽百族相喧闐

俯淸流兮思挹掬 看好山兮堪畵傳

問坡古驛已當近 傍山茅店生炊烟

一川風景更奇絶 兩岸花光涵碧漣

散慮尋春古所託 喜予攀附遨頭賢

窮探勝槩尙未足 且復吟哦成一篇

Ⅱ-038) 원천역(原川驛)을 지나면서

강 따라 읊으면서 원천(原川)을 지나노라니

날은 따뜻하고 바람도 가벼운데 한낮이 가까웠네.

온통 오얏 꽃 빛이 삼 리쯤 되는데

말달리는 채찍 끝에 풀이 연기 같구나.

 

過原川驛

沿江朗詠過原川 日暖風輕近午天

一色李花三許里 馬飛鞭末草如煙

Ⅱ-039) 도중에 지음 (두 수)

Ⅱ-039-01)

봄 그늘 짙어가고 새들은 지저귀니

가는 곳마다 읊지 않고는 견딜 수 없네.

기이한 경치 손꼽아가며 자주 눈을 돌리니

개인 냇가 꽃다운 풀에 정을 금하기 어렵네.

Ⅱ-039-02)

꽃은 밝은데 버들은 어둡네.

물은 얕은데 산은 깊구나.

계절 바뀌는 걸 느끼면서 긴 휘파람 불다가

어느새 높은 봉우리에 다다랐구나.

 

途中作(二首)

春陰不散鳴幽禽 到處那堪無我吟

指點奇觀頻擧目 晴川芳草情難禁

 

花花明明柳柳暗 水水淺淺山山深

感時悠然發長嘯 不知行到高高岑

Ⅱ-040) 모진(母津)에서 (두 수)

Ⅱ-040-01)

인자한 얼굴 멀리 헤어진 게 작년 가을이라

자나깨나 그리운 한이 끊이지 않았네.

곧바로 강가에 이르니 갑절 슬퍼져

남 몰래 두 줄기 눈물을 맑은 강물에 뿌리네.

Ⅱ-040-02)

누가 이곳을 “어머니(慈親) 나루”라고 이름했던가.

아침엔 남쪽에서 저녁엔 북쪽에서 아들같이 오네.

바라건대 이 물이 맛있는 젖이 되어

어머니 여읜 온 천하 백성들을 다 길러 주었으면.

 

母津(二首)

慈顔遠別去年秋 寤寐思量恨未休

直到江邊倍怊悵 暗將雙淚灑淸流

 

誰把慈親號此津 朝南暮北子來人

願將此水爲甘乳 普養離親天下民

Ⅱ-041) 마현(馬峴)에서 가평(加平)에 이르러 (두 수)

Ⅱ-041-01)

하루 종일 산길 넘고 물을 뚫었네.

헐떡이며 가파른 바위를 몇 번이나 지났던가.

몸 추스리며 험한 곳 벗어나 평지에 이르자

머리 돌리니 저녁 까마귀 날아드는 게 보이네.

Ⅱ-041-02)

저녁 연기 쓸쓸하고 가까운 이웃도 없어

요즘 세상 물정이 옛날과 다르구나.

논밭은 거칠어지고 가시덤불뿐이니

아직도 남아 있는 고을 이름이 안타깝구나.

 

自馬峴到加平(二首)

盡日行穿山水窟 巉巖鳴咽幾經過

將身脫險就平地 回首微茫已暮鴉

 

烟火蕭條無近隣 邇來風物還非昔

土田荒廢但荊榛 邑號疆存殊可惜

Ⅱ-042) 춘성(春城) 길에서

낮은 모자에 얇은 적삼 어느 곳 나그네인지

버들 서쪽 꽃 밖에서 봄을 찾고 있네.

반쯤 깨고 반쯤 취해 말 등에 앉았노라니

저녁 그림자 푸른 산에 아름다운 시가 읊어지네

 

春城路上

矮帽輕衫何處客 柳西花外尋芳春

半醒半醉一驪背 暮影靑山佳句新

Ⅱ-043) 최안을(崔安乙)이 보낸 시에 차운함

유술(儒術)이 어찌 내 한 몸을 위한 것이랴

집에 전해오는 것은 시권(詩卷) 뿐일세.

본래 훌륭한 재주라곤 없으니

출세 길이 어찌 당키나 하랴.

시골로 돌아온 도연명(陶淵明)을 사모하고

유현(劉炫)처럼 준일하길 바랐네.

다만 꽃 피고 달빛 비치는 누각을 찾아다니며

즐거이 놀기에 게으르지 않을 뿐일세.

예전에 놀던 곳을 다시 찾아와 보니

내 마음 나도 어쩔 줄 모르겠네.

복사꽃은 옛처럼 붉게 피었건만

정든 사람 모습은 어디에 있나.

멍하니 난간에 기대었건만

내 마음 그래도 편치가 않네.

나를 보려는 사람도 원래 없거니와

나도 역시 보기를 바라지 않네.

 

次崔安乙所贈詩韻

儒術豈謀身 家傳只詩卷

斷斷無良才 未可膺慱選

歸來慕淵明 俊逸希劉炫

惟尋花日樓 遊樂但無倦

重來舊遊地 我心不可轉

桃花依舊紅 何處精人面

悠然空倚欄 不可以安晏

元無願見人 吾亦不願見

Ⅱ-044) 춘주(春州) 천전촌(泉田村)에 묵으면서

고요한 초가집이 조그만 배 같은데

종이도 없는 창에 바람이 차갑구나.

처마에 떨어지는 밤비 소리에 첫잠을 깨고 보니

벽에 걸린 푸른 등불이 나그네 시름을 비추네.

 

宿春州泉田村

茅舍寥寥小似舟 破窓無紙冷颼颼

滴簷夜雨眠初覺 半壁靑燈照客愁

Ⅱ-045) 안보역(安保驛) 남쪽 강을 건너면서

도롱이 입고 조각배를 탔는데

푸른 물결에 연기 자욱하고 비는 부슬거리네.

뱃전에 기대 물 속의 물을 들여다보니

뜬 삶(浮生)이 뜨고 또 뜬 것인 줄 비로소 알겠네.

 

渡安保驛南江

一背簑衣一葉舟 雨疎煙淡碧波頭

憑舷徹見水中水 始信浮生浮復浮

Ⅱ-046) 공탄(恐灘)

모래 가에 말을 세우고 흐르는 물 바라보니

두려움 이길 수 없어 더욱 오래 머물었네.

하늘을 뒤흔드는 울부짖음은 천둥소리이고

돌에 부딪쳐 치고 받는 모습은 눈보라일세.

위험 무릅쓴 배 위의 나그네는 보기 두려운데

한가로운 물가 갈매기는 너무 부럽구나.

이곳을 위태로운 곳이라 말하지 말게

평탄한 길에 노닐다가도 뒤집어지는 일 많다네.

 

恐灘

立馬沙頭看水流 不勝兢戰更遲留

振空哮吼雷聲殷 觸石舂撞雪彩浮

冒險畏看船上客 得閑長羨渚邊鷗

莫言是處艱危甚 飜覆偏多坦路遊

Ⅱ-047) 만세사(萬歲寺)에 묵으면서

연기 깊은 돌길에는 자색 이끼 덮였는데

솔문에 다다르니 어느새 저녁 종소리일세.

바람에 흔들리는 파초 울음은 세상 모습 아닌데

서리에 꺾여 떨어지는 잎은 가을 모습으로 변하네.

달빛 비치는 누각 법고를 사람이 와서 두드리고

눈 녹은 시냇가의 물방아는 물이 저절로 찧어주네.

잠에서 깨어난 산 아이가 불씨를 일으켜

한 바리 스님의 죽을 기꺼이 올리네.

 

宿萬歲寺

烟深石逕紫苔封 行到松門已暮鍾

風動蕉鳴非世態 霜摧水落變秋容

月樓禪鼓人來鼓 雪澗機舂水自舂

睡罷山童吹宿火 一盂僧粥喜相從

Ⅱ-048) 1374년(갑인) 3월. 변암(弁巖)의 새 집으로 옮겼는데 형님이 오셨기에 작은 술자리를 마련했더니 형님께서 시를 지어 주셨으므로 이에 차운하여 두 수를 지음

◎ 家兄

일찍이 연하(烟霞)에 즐거운 뜻을 지녀

깊숙이 살기에 편안한 곳을 얻었구나.

사립문 앞에는 오솔길이 나고

소나무 서까래가 층층 바위에 기대었네.

풀을 베어서 세 오솔길을 내고

술잔을 잡으니 한 바구니 밥도 즐거워,

나 이곳에 와서 반나절 머물었지만

사간(斯干)을 본받아 덕을 기리네.

Ⅱ-048-01)

속세 인연을 다 끊지는 못했지만

머물러 살기가 한가롭고 편안하다오.

물을 끌어다 남쪽 언덕을 개간하고

소나무를 심어서 북쪽 봉우리를 둘러쌌지요.

내 한 몸이야 초가집에 들여놓을 수 있으니

꿈에도 구슬 바구니는 돌아보지 않으리다.

오솔길에 푸른 이끼가 미끄러우니

티끌 먼지가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리다.

Ⅱ-048-02)

반나절이나 웃고 이야기하니

가슴이 시원하고 몸도 편안하외다.

맑은 바람은 굽은 난간으로 불어오고

비낀 햇살이 층층 봉우리를 비추는군요.

시골 술이라 깊은 술잔으로 따르고

푸성귀도 작은 바구니에 가득하다오.

취한 채 산새 소리를 듣노라니

소나무 그림자가 난간으로 옮기는군요.

 

甲寅三月。移居弁巖新居。家兄來設小酌。題詩贈之曰。

早有烟霞趣 深居得所安

柴扉當細路 松桷倚層巒

薙草開三逕 停尊樂一簞

我來留半日 頌禱效斯干

次韻二首。

俗緣雖未盡 居止要閑安

導水開南岸 裁松遶北巒

身堪容草屋 夢不顧珠簞

一逕蒼苔滑 塵埃未易干

 

半日開談笑 襟懷靜且安

淸風來曲檻 斜照映重巒

村酒酌深單 野蔬盈小簞

倚酣聞鳥語 松影轉欄干

Ⅱ-049) 생각나는 대로 읊음(쌍운 雙韻)

바람이 성긴 발을 흔들며 산 비가 내리니

조그만 동산 풀잎이 푸른 연기에 젖네.

새 한 마리 숲을 뚫고서 갑자기 날아들자

글귀를 찾던 산 속 사람이 길게 읊으며 서 있네.

 

卽事(雙韻)

風動踈簾山雨來 小園烟草靑烟濕

穿林一鳥忽飛廻 覓句幽人長嘯立

Ⅱ-050) 유곡(幽谷) 굉(宏) 스님이 전에 미나리를 주시고, 이번에 또 오이를 보내 주셨기에 시를 지어 사례함

Ⅱ-050-01)

전날에는 잇달아 미나리를 보내시고

오늘은 또 오이 따서 가난한 집에 보내시니,

지난번엔 줄기줄기 푸른 실을 먹었고

지금은 하나하나 푸른 구슬을 삼키네.

두 번이나 마음 쓰셔서 내 목마름을 풀어주셨건만

한 평생 스님 은혜를 갚을 길이 없네.

먹고 나자 가슴속이 거울같이 밝아져

작은 난간에 기대앉아서 남산을 바라보네.

Ⅱ-050-02)

좋은 선물이 몇 차례나 채마밭에서 왔는데

그 은혜 갚으려 해도 가난한 살림 부끄러워라.

반수(泮水)의 미나리보다 맛 좋아 먹을 만하건만

동릉(東陵)의 오이보다 귀해 차마 삼키지 못하겠네.

스님은 불손(佛孫)이라 항상 중생을 구제하시니

나는 비록 속인이지만 매번 그 은혜를 입네.

이 시가 질탕해 참으로 우습지만

고요히 난간에 기대어 한 번 읊어보소서.

Ⅱ-050-03)

일찍이 선기(禪機)를 파악하여 물외(物外)에 노니신지라

암자는 고요하고 솔문도 닫으셨네.

본성에 세 가지 마음 갖춰진 것 보시고

서강(西江) 물을 모두 한 입에 삼키시네.

어지신 님의 복을 받들어 장수하시길 빌고

미혹한 중생 깨우치며 넓은 은혜를 펼치시네.

세상 사람이 어찌 감히 그 깊은 경계를 엿보랴

조사(祖師)의 인(印)이 일찍이 강월헌(江月軒)에 전해졌네.

 

幽谷宏師前以水芹見惠。今復惠瓜。詩以謝之。

往日連連惠水芹 摘瓜今復寄寒門

莖莖昔作靑絲食 箇箇今將碧玉呑

再度有心澆我渴 一生無計報師恩

啖終懷抱淸如鏡 坐看南山控小軒

 

嘉貺屢從蔬圃下 欲將酬德愧無門

美勝泮水尤堪嗜 品貴東陵不忍呑

師是佛孫常濟物 吾雖俗子每承恩

此詩跌宕眞爲笑 敢請吟哦靜倚軒

 

早把禪機遊物外 巖居寂寂掩松門

覰窮本性三心備 吸盡西江一口呑

奉福明君祈鶴筭 發蒙迷輩布鴻恩

世人豈敢窺深室 祖印曾傳江月軒

Ⅱ-051) 또 유곡(幽谷) 굉(宏) 스님이 보내 주신 침과(沈瓜)에 대해 사례함

단표누항(簞瓢陋巷)의 이 골목을 찾는 이가 없는데

송계(松桂)의 문에서 이 물건이 왔네.

달고 연한 것 몇 개를 잘게 씹어보다가

달고 신 맛에 한 상자를 모두 먹었네.

목마른 병과 주리던 병을 이미 다 고쳤으니

하늘의 은혜와 법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네.

스님과 함께 구이를 실컷 먹으려 하니

다헌(茶軒)을 쓸고 치워서 깨끗이 준비해 두소.

 

又謝沈瓜

無人見訪簞瓢巷 有物來從松桂門

甘脆數枚曾細嚼 甛酸一榼又全呑

已痊渴病兼飢病 深感天恩與法恩

擬欲共師同飽炙 宜須淨備掃茶軒

Ⅱ-052) 1375년(을묘). 도경(道境) 스님의 시에 차운함 (두 수)

Ⅱ-052-01)

헤어져 있다보니 자리 위의 보배 되기가 어려웠네.

귀밑머리는 희어져가고 시루엔 먼지가 앉았네.

십 년 동안 이 숲에 찾는 이가 없었건만

진중하신 우리 스님께서 이 사람을 기억하셨네.

Ⅱ-052-02)

원래 통달한 선비는 스스로 보배를 지녔으니

티끌 속에 있어도 티끌을 벗어나네.

부귀하면 걱정 많아지고 가난도 괴로우니

한 평생 구름에 누워 사는 사람이 부러워라.

 

次道境詩韻(二首, 乙卯年)

疎散難爲席上珍 鬂生霜雪甑生塵

十年林下無車馬 珎重吾師記此人

 

由來達士自懷珎 雖在塵間逈脫塵

富貴多憂貧賤苦 一生長羨臥雲人

Ⅱ-053) 전(前) 자사(刺史) 민공(閔公)이 서(徐) 봉익(奉翊)의 별장에 쓴 시에 차운한 시와 서문

【서문】 봉익(奉翊) 판도판서(版圖判書)에서 물러난 서윤현(徐允賢) 공이 하루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는 조그만 누각 앞 연못에 맑은 샘물을 끌어들이고, 그 곁에 밤나무 정자(栗亭)를 만들었습니다. 못 가에 논 한 마지기가 있는데, 더운 철에 올라가 보면 서늘한 기운이 책상에 생겨납니다. 그곳에서 연꽃을 구경하고 농사를 감독하며 그윽한 정을 펼친 지가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올해 7월 어느 날, 전 자사 민공(閔公)이 농사를 장려하기 위해 들판을 다니다가 마침 이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한 번 둘러보고 시를 지어 주었습니다. 그 시를 현판에 써서 붙이자, 내 누각의 가치가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대도 나를 위해서 그 운에 따라 시를 지어, 우리 자사(刺史)의 풍화(風化)를 찬미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는 그 시를 내게 보였다. 내가 그 시를 읽어보고 이렇게 말했다. “민공의 덕행은 마치 규벽(圭璧)과 같아서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내가 우물 속에서 보는 소견으로 하늘을 칭찬해봐야 무슨 이로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잠자코 말하지 않으면, 민공이 백성을 기른 은혜나 서공이 민공과 사귄 도리를 뒷사람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민공이 우리 백성들을 다스림에 있어서 참으로 사심이 없었고, 사람을 쓰는 일에 있어서도 구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었고, 민공도 혐의를 멀리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서공이 벼슬에서 용기있게 물러나 숲과 샘에 살면서 맑은 흥을 즐기는 줄 알고 민공이 별장을 지나다가 자기가 보는 대로 붓 아래 나타냈으니, 고을을 다스리는 여가에 자기를 알아주는 친구끼리 서로 만나서 고을살이의 즐거움을 잠시나마 얻은 것을 이 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서공이 연하(煙霞)에 꼭 붙어살아 세상에 아첨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찾아온 상공을 만나 그 영광이 온 마을에 떠올랐고, 아름다운 시를 얻어서 기뻐 춤추는 모습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들을 돕지 않으사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깃발을 돌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서공에게 한(恨)스러운 일입니다. 저도 역시 이 고을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인데, (상공께서) 인끈을 풀으시는 날 마침 상복을 입은 중이라 함께 전송하지 못했으니, 이 역시 제게 한을 남겼습니다. 다행히 서공의 깨우침을 입고 사모하는 정이 갑절이나 더해, 삼가 원운(元韻)을 따라 시 4수를 지어 올립니다.”

Ⅱ-053-01)

맑은 물 한 줄기가 굽은 못에 이어졌고

두어 봉우리 푸른 빛이 높은 누각을 둘러쌌네.

주인이 산하(山河)의 정기를 타고 났기에

부귀를 다 누리고도 늙지를 않네.

Ⅱ-053-02)

집이 푸른 산에 이어져 구름도 지붕에서 생기고

누각이 맑은 못을 누르니 물에도 누각이 비치네.

자사(刺史)께서 시 한 수를 지어 주셨으니

신선마을 뛰어난 경치에 이것이 으뜸일세.

Ⅱ-053-03)

나라 일이나 백성 일에 모두 힘쓰고

강 누각과 절 누각에 두루 노니셨네.

벼슬에 오른 날부터 사랑을 남겼으니

소남(召南)의 풍화가 앞날까지 미치리라.

Ⅱ-053-04)

행장이 갑자기 조정으로 옮겨갔지만

그 모습 아직도 고을 누각에 또렷하네.

은혜 산이 무거워 아직도 갚지 못하면서

머리에 가득한 서리와 눈을 스스로 가여워하네.

 

和前刺史閔公題徐奉翊郊居詩(幷序)

奉翊版圖判書致仕徐公允賢一日謂予曰。吾居小樓前。引淸泉於荷塘。開栗亭於其側。池邊有水田一頃。暑月登臨則凉生机案。賞蓮觀稼 暢敍幽情有年矣。越今年秋七月有日。前刺史閔公因勸農郊行。適過于此 一周覽而題詩。卽板而書于座右。吾樓之價益高爾。盍爲我纔其韻而美我刺史風化乎。因示其所寄詩。僕讀其詩。乃曰。閔公之德行。如圭如璧。不可尙已。以予之井觀。有何益於譽天乎。然黙黙而不語。則後之人焉知閔公牧民之惠。與夫徐公之與閔公深有交道乎。惟公之撫我民也固不私。其取人也固不苛。故民得聊生。身遠嫌疑。乃知徐公之勇退。棲于泉石。遣盡淸興。因過郊居。以其所見。形容於筆下。其所以理郡餘暇。知己相邀。暫得爲州之樂。於此可見矣。徐公之所以膠膝煙霞。不媚於世。得遇相公之來過。光浮閭里。賭得佳章。懽欣鼓舞。亦可見矣。卒以天不佑民。不苽而返旆。是徐公之所恨也。僕亦州民之一也。當其解印之日。適居縗絰之中。未得攀轅 是亦吾生之遺嘆也。幸因徐公之所諭。倍殫思慕之情。謹次元韻作四首以呈似。

 

一派淸流連曲沼 數峯蒼翠繞危樓

主人稟得山河氣 富貴俱全尙黑頭

 

屋連靑嶂雲生屋 樓壓淸池水暎樓

刺史更題詩一首 仙村勝槩此爲頭

 

劬勞王事兼民事 倚遍江樓與寺樓

一自朝天遺愛在 召南風化感前頭

 

風儀忽爾朝城闕 體貌森然在郡樓

㝡重恩山猶未荅 自憐霜雪已渾頭

Ⅱ-054) 1375년(을묘) 11월 23일. 형님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시자 도경선옹(道境禪翁)이 만가(挽歌) 두 장을 지어 보냈으므로, 이에 차운하여 스스로 슬픔을 달랜다.

◎ 도경 스님 1

평생에 마음을 꾸밀 줄 모르셨지.

본성이 밝고도 밝아 그르침이 없었네.

어찌 이 사람을 일찍 떠나게 했나

푸른 하늘이여! 이 일을 어찌하랴.

 

◎ 도경 스님 2

하늘이 돕지 않아 한 문인을 잃었으니

순정한 선비 가운데 그 누가 그대 만하랴.

두 형제가 빛나게 문필을 휘둘렀는데

원성(原城) 한 고을에 홀로 구름을 남겼네.

Ⅱ-054-01)

이어진 가지 인연이 두터워 항상 염려했는데

오늘 서로 떨어질 줄이야 어찌 생각했으랴.

눈물을 뿌리며 하늘에 호소해도 하늘은 말이 없으니

한 평생 믿고 의지했는데 내 장차 어찌하랴.

Ⅱ-054-02)

이승에서 다시는 글을 의논할 데가 없어

부질없이 푸른 산 마주하며 형님을 생각하네.

할미새와 끊어져 나비를 꿈꾸다가

홀연히 깨고 나니 뜬구름 같구나.

 

乙卯十一月念三。家兄病亡。道境禪翁作挽歌二章云。

平生彩繪不飾心 素質皎皎元無蹉

忍使斯人早歸去 蒼天蒼天可乃何

又云

天何不佑喪斯文 未識醇儒誰似君

二陸炳然揮翰墨 原城一邑獨留雲

次其韻以敍悲哀

連枝綠厚常孔懷 豈謂今日相違蹉

灑淚呼天天不語 一生依怙吾將何

 

此生無復共論文 空對靑山苦憶君

信斷鴒原飛蛺蝶 忽警身世似浮雲

Ⅱ-055) 1376년(병진) 늦봄. 이(李) 저곡(楮谷)의 술자리에서 여러분께 지어 바치다.

티끌 세상에 한 번 만나 웃어보기도 어려우니

좋은 시절이 오면 맘껏 놀며 즐거워하세.

일은 날마다 한없이 생기지만

마음은 푸른 산과 일찍이 약속했네.

지는 꽃 즐겨 보며 깼다가 다시 취하니

어찌 새벽 거울을 보며 탄식하고 또 슬퍼하랴.

지난 해 함께 앉았던 사람들 올해에는 적어졌으니

자주 흰 옥 술잔 들기를 힘쓰시게나.

 

丙辰暮春。李楮谷席上呈諸公。

塵世難逢一解頤 要須行樂及良時

事隨白日生無限 心與靑山素有期

好對殘花醒復醉 何煩曉鏡嘆還悲

昔年坐客今年少 努力頻傾白玉巵

Ⅱ-056) 7월 10일. 다시 위 운을 따라 쓰다.

죽고 삶을 볼 때마다 눈물이 턱까지 흘러내려

사람들이 말하길, 얼굴이 옛보다 못하다 하네.

늠름한 마음이야 예전 그대로지만

성성한 백발은 이미 때가 되었네.

세상과 어긋나며 혜강(嵇康)의 게으름을 배우고

여름을 보내며 송옥(宋玉)의 슬픔이 생각나네.

팽상(彭殤)이 같은 줄 일찍이 알았으니

이 신세를 깊은 술잔에나 부치리라.

 

七月十日。復用前韻。

每看存沒悌垂頤 人道容顔減舊時

凜凜壯心雖似昔 星星衰髮已當期

違時且學嵇康懶 送夏仍懷宋玉悲

早識彭殤同一軏 却將身世付深危

Ⅱ-057) 괴로운 가뭄

산성(山城)에 몇 달 동안 비가 오지를 않아

넓은 들판에 풀도 없이 천리가 시뻘게졌네.

사람들은 가뭄 병에 걸려 서로 탄식하며

몇 번이나 구름 바라보고 애가 탔던가.

상양(商羊)은 춤추지 않고 한발(旱魃)은 잔인해서

때아닌 서풍(西風)이 쉬지 않고 불어대네.

오래 메마른 논에는 누런 먼지가 일어나고

곳곳에 샘물마다 물줄기가 끊어졌으니,

일년 농사를 다시 말해 무엇하랴

피와 조는 다 말라붙고 콩 보리도 없네.

농부들은 보습도 놓아버리고 호미도 내던졌으니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끝내 무엇을 얻으랴.

돌아와 탄식하며 처자들에게 말하는데

그 가운데 말 한 마디가 참으로 가여워라.

해마다 세금 내면 조금은 남았는데

올해엔 아침 저녁 끼니 잇기도 어렵다네.

이제는 목숨마저 이미 끝장 났으니

무엇을 가져다 세금 액수를 채우랴.

옛부터 성 동쪽(城東)에 신령스런 사당이 있어

날마다 무당들 모여 복을 빌어 주네.

북 소리 나팔 소리가 천둥같이 시끄러운데다

머리에 불동이 이고 줄을 이어 다니네.

소리 치며 뛸 때엔 땀이 옷을 적시건만

하늘을 우러러봐도 푸르기만 하구나.

그토록 애쓰건만 비는 내리지 않으니

후세의 그 누가 영감(靈感)을 알아주랴.

또 절간을 찾자 스님들이 모여

진경(眞經)을 펼쳐 읽으며 법석(法席)을 베풀었네.

【이때 나라에서 명령을 내려 운우경(雲雨經)을 읽게 하였다】

정성이 이러하건만 비는 계속 오지를 않아

조물주도 마땅히 꾸중을 들어야겠네.

인민들이 힘입을 데라고는 부처와 하늘뿐인데

기도해도 이뤄주지 않으니 아무런 이익이 없네.

이무기(蛟龍)도 단잠에 빠져 사람을 돕지 않으니

밝은 구슬을 빼앗고 귀양이라도 보내야겠네.

이무기야! 빨리빨리 천둥 수레 타고서

하늘 바가지 기울이는 역사를 시작하라.

새들도 목이 말라 다투어 슬피 울며

맑은 시냇물 찾아서 날개 짓을 하네.

시내와 못도 바짝 말라 물고기들도 없어지고

이따금 참새들만 모래밭에서 노는구나.

부엉이와 올빼미도 어찌할 줄 모르고

나무 그늘만 찾아다니니, 어디로 가랴.

때때로 소리 지르며 무엇을 구하다가

땅쥐를 잡아채느라 지치는 줄도 모르네.

숲 속에서 비를 부르는 비둘기는 가엽기도 하지

훨훨 날아 서쪽 남쪽의 밭둑 길을 지나는구나.

풀과 나무는 거의 다 잿바닥이 되었으니

서로 부르는 급박한 소리를 차마 들을 수 없네.

만약 이런 지경에 시수(時數)를 만나면

만백성의 주림과 액운을 참으로 면하기 어렵네.

만물이 무엇을 안다고 이리 초췌해졌나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늘 꾸짖음을 당해야 하건만,

알건 모르건 모두 같이 벌받고 보니

천도(天道)엔 필연 변역(變易)이 없나 보네.

선하면 복 받고 악하면 화 받는 것이 떳떳한 진리이고

상주고 벌주는 것도 순리를 따라야지.

내 이제라도 용왕을 불러서

굴속에 있는 이무기들을 때려 일으키고 싶네.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 당겨다가

천지의 큰 불꽃을 한 번 씻어 버리고 싶네.

 

苦旱

山城數月霖雨絶 大野不毛千里赤

人罹旱暵相嗷嗷 幾望雲霓頗勞劇

啇羊不舞旱魃虐 律外西風吹不隔

水田久涸起黃埃 處處靈泉俱絶脉

一年農事更何論 稗粟焦乾無菽麥

田夫釋耒不攜鋤 費盡筋力終何獲

歸來嘆泣語妻孥 就中一言良可惜

年輸租稅得臝餘 難繼饔湌度朝夕

到今生命已焉哉 更將何物充賦額

城東自古有靈祠 日聚巫覡祈恩澤

喧闐鼓吹殷如雷 首戴火盆行絡繹

嘵嘵踊躍汗流裘 仰視天宇深紺碧

忍看勞苦自不㶐 灑 後世誰知靈感跡

又尋佛宇集緇流 披讀眞經開法席 (時國令讀雲雨經)

虔誠如此長不雨 造物亦當深驚責

人民所賴佛天神 禱不輒遂事無益

蛟龍方睡不佑人 欲奪明珠宜󰜅謫

要須大急駕雷車 傾倒天瓢作行役

埜禽知渴競悲號 尋向淸流爭振翮

川枯澤竭魚鼈空 時有鳥戱沙磧○

鴟鶚不解救愆陽 揀擇樹陰安所適

時時長嘯常有求 掠取地鼠不疲斁

可憐林下喚雨鳩 翩翩飛過西南陌

草木幾爲猥燼場 不忍相呼聲窘迫

若逢時數至於斯 萬姓誠難免飢厄

物有何知見憔悴 人有罪犯逢天嚇

無知有識俱等蒙 天道必然無變易

福善禍淫是眞常 賞罰宜須從順逆

我欲招呼龍伯翁 打起蛟螭空窟宅

挽回天上銀河流 一洗乾坤大炎爀

Ⅱ-058) 북원령(北原令) 자사(刺史) 김공(金公)이 관아 북쪽에 있는 남산(男山) 기슭에 높은 정자를 세우고, 그 아래에 맑은 샘을 팠다. 산 벼랑을 의지해 대(臺) 하나를 쌓고, 샘물 줄기를 끌어다가 두 못을 만들었다. 금 잉어를 놓아기르고 붉은 연꽃을 심었으며, 기이한 꽃과 이상한 풀들이 못 가에 올망졸망 자랐다. 푸른 산과 흰 구름이 그 가운데 비추고, 샘물 빛과 나무 그림자가 맑아서 저절로 시원한 기운이 일어났다. 샘 양쪽 언덕은 수십 명이 앉을 만하고, 거문고 한 장과 바둑판 하나에 시를 읊고 술잔을 돌리기에 넉넉했다. 동남쪽에는 치산(稚山)이 평평하게 둘려져 있어, 마치 병풍을 친 듯했다. 눈앞의 물상(物像)들이 각기 그 모습을 드러내어, 여러 해 동안 묻고 살았던 부끄러움을 다 씻어주었다. 내가 그 맑고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했으니, 고시(古詩) 한 편을 읊어 좌우에 드리고자 한다.

골짜기를 새로 열어 맑고도 그윽한데

여름철에도 서늘하니 마치 가을 같구나.

높은 정자에 올라 먼 곳을 생각하니

어찌 구차하게 영주(瀛洲)의 신선을 찾으랴.

푸른 이끼 바위 곁에 새 우물을 파니

맑고 차가운 한 줄기 물이 동쪽으로 흘러가네.

밤 고요한 연못에는 달빛 환하고

비 개인 솔 난간에는 바람 서늘한데,

푸른 산은 말이라도 할 듯이 나와 마주하고

만물의 모습들이 저마다 두 눈길을 끄네.

산새들은 공을 위해 거문고를 연주하고

밝은 해도 공을 위해 유유히 허공에 걸렸네.

나는 이제 몸과 세상을 모두 다 잊었으니

여기 와서 그대 모시고 노니는 것이 즐거워라.

그대는 듣지 못했던가! 취옹(醉翁)이 양천(釀川) 가에서 놀 때에

널려진 술잔들을 산(算)가지로도 다 세지 못했던 것을.

그대는 또 듣지 못했던가! 이 샘물 위에서 손님과 마주앉아

큰 잔에 술 부어 놓고 흥겹게 놀던 이야기를.

시를 지어 뒷세상 사람들에게 남겨 주어

흐르는 샘물과 함께 길이 전하게 하리.

 

北原令刺史金公於公衙之北男山之麓。搆危亭於其上。鑿淸泉於其下。依山崖而築一臺。導泉源而爲兩池。放金鱗種紅藕。奇花異草叅差於側畔。靑山白雲隱映乎中間。泉光樹影。自然凝成淸爽之氣。其泉之兩岸。可坐數十人。而琴一張棋一局。嘯詠流觴之設足以容矣。有東南廻平。雉山邐迤。如展翠屛。眼邊物像。各逞顔色。盡雪多年湮沒之恥。僕伏覩淸勝之境。吟得古詩一篇。呈似左右。

新開洞穴淸且幽 夏天氣候凉如秋

試登危搆起遐想 區區何更尋瀛州

蒼苔巖畔鑿新井 一條淸冷向東流

夜靜荷塘月皎皎 雨餘松檻風颼颼

靑山若語共相對 物象各自牽雙眸

山禽爲公奏琴筑 白日爲公懸悠悠

我今身世兩忘却 攀緣且喜陪淸遊

君不聞醉翁逍遙釀泉畔 觥籌交錯散不收

又不聞我公對客此泉上 奉酒以爲大白浮

作詩留示後來者 可與泉流傳不休

Ⅱ-059) 춘주(春州) 신(辛) 대학(大學)이 보낸 오언시(五言詩) 쌍운(雙韻) 삼십운에 차운하여 삼가 부치다

그대는 재주 뛰어난데다 인품까지 훌륭해

세상에 보기 드문 영명한 선비일세.

말할 때마다 모두 문채가 있고

남을 따르면 자기 몸을 잊어버리네.

진솔한 성품으로 시골에 살면서

여러 집 자제들을 잘 가르쳤고,

언제나 공손하고 또 온순했으니

아름다운 그 명성이 어찌 끝나랴.

수염에 서리가 껴도 꺼리지 않고

붓 바다가 넓고 넓어 끝이 없구나.

일찍부터 한묵장(翰墨場)에 놀면서

그 자취를 근궁(芹宮) 속에 부쳤네.

소나무와 대나무 오동나무와 가래나무를 심어

문 밖에 푸르름이 줄을 이었고,

시냇가에 초가집 지었으니

어진 사람이 사는 마을이라 불리네.

그대의 도덕에 향기 있으니

세상에 아무도 같은 이 없고,

언제나 백옥 술잔을 기울이니

부(富)와 귀(貴)까지 다 갖추었네.

그러나 침상에만은 기대지 마시게

사씨(謝氏)가 일찍이 기생을 끼고 놀았으니.

문학에 있어서는 복상(卜商)을 가볍게 여기고

천성을 기르기에도 원(園)․기(綺)보다 뛰어났네.

다만 부자(夫子)의 담장에 기대었을 뿐이니

동곽(東郭)의 신발이 도리어 우습네.

옛날에 베를 끊은 어머니가 있었으니

아들을 가르치면서 지향할 바를 알았네.

배움이 능히 상서(祥瑞)를 이루니

녹(祿)이 그 가운데 있는 법일세.

이 말을 내 어찌 잊으랴

곰곰히 생각하며 혼자 기뻐하였네.

가진 거라곤 오직 책 한 상자뿐이어서

비웃는 사람이 마치 시장에 모여드는 것 같았지.

밝게 드러난 이는 더럽히기 어려운데

덕과 지혜를 갖추지 못한 게 부끄러워라.

봄빛이 동양(東陽)보다 뛰어나

산에 의지하고 또 물에 임했네.

뵈는 거라곤 모두 유다른 곳이니

몇 사람이나 옥 같은 발자취를 멈추었던가.

서리 내려 나뭇잎이 처음 물들면

만물의 모습이 시 지을 거리를 마련해주니,

멀리 생각할수록 미칠 듯이 떠올라

마음의 감상을 오히려 믿기 어렵네.

나는 이제 고기 낚는 사내가 되었으니

다른 재주라곤 하나도 없어,

일어나는 일마다 어쩌지 못하니

공명을 이룰 생각이야 어찌 뜻하랴.

선생만은 홀로 마음 걱정이 없어

티끌 세상 밖에서 한가롭게 살아가네.

어지신 임금 받드는 데 뜻이 있으니

때를 타고 일어날 줄 이제 깨달으셨네.

아마 왕업을 창성케 하여

꽃다운 이름을 새 역사에 기록하리.

재주 높아 늙어도 쓰러지지 않으리니

형설(螢雪)의 공이 어찌 부끄러우랴.

인의(仁義)의 이치를 잘 모르니

이 천한 사람이 어찌 감당하랴만,

붓을 휘둘러 안부를 물으며

은근한 정을 종이 한 장에 쓰네.

 

次春州辛大學所寄五言雙韻三十韻奉寄

公才俊且長 間世英明士

出言皆有章 從人而捨已

恂恂處於鄕 敎誨諸家子

恭儉亦溫良 令聞何窮已

何嫌鬚帶霜 筆海浩無涘

曾遊翰墨場 跡寄芹宮裏

門外翠連行 松葟與桐梓

臨溪構草堂 盡道仁人里

道德有馨香 世上無相似

常傾白玉觴 富貴俱能備

且莫獨倚床 謝氏曾攜妓

文學輕卜商 養性超園綺

但依夫子墻 却笑東郭履

昔有斷織孃 敎子知所指

學也能致祥 祿在其中矣

此言吾敢忘 尋思獨歡喜

惟持書一箱 笑者如歸市

難以忝明揚 愧未兼雙美

春色勝東陽 依山又臨水

所見異於常 幾人留王趾

霜落葉初黃 物象供詩思

遙憶意猖狂 心賞猶難恃

我作釣魚郞 斷斷無他技

事事未裁量 成名豈自意

先生獨無傷 塵外寄棲止

志在奉明王 方覺乘時起

應使帝業昌 英名記新史

才高老不僵 螢雪何須耻

賤子豈敢當 不知仁義理

揮筆敍溫涼 殷勤書一紙

Ⅱ-060) 또 짓다

왕업이 하늘과 함께 길고 기니

산림에 묻혀 사는 선비가 없네.

만 백성은 모두 밝게 다스려지고

벼슬아치들도 다 맑고 깨끗하네.

덕과 은혜가 산 고을까지 미쳤으니

백성 사랑하기를 갓난아기 돌보 듯하며,

위아래가 모두 밝고 어질어

성대한 왕업이 끝이 없구나.

임금님의 수명이 천만년이니

복의 바다가 어찌 끝이 있으랴.

곳곳마다 모두들 기뻐 날뛰고

어진 바람이 안팎에 통하네.

나 또한 지위를 사모하지만

몸이 옛 동산 숲 속에 살아,

십 년 동안을 초가에 누웠으면서도

청운(靑雲)의 꿈은 만리를 달렸네.

반(班)․마(馬)의 향내를 맡았으면서도

뜻대로 되지 않아 부끄러워라.

부질없이 항아리의 술만 따르니

문무(文武)를 겸비하기가 참으로 어렵구나.

상위에 가득한 책을 사랑할 뿐

노래하고 춤추는 기생에게는 마음이 없네.

농(農)․공(工)․상(商)은 배우지 못했지만

이따금 앉아서 거문고를 타네.

바탕이 더러운 흙담 같으면서도

황석(黃石)의 신발 아래 꿇어앉기를 원했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날 위해 말씀하셨지.

“효도하는 마음은 왕상(王祥)을 본받고

사람되는 길은 충서(忠恕) 뿐이다”고.

이 말씀을 내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감격하며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네.

책 상자 짊어지고 다닌다고 비웃지 마소

백리해(百里奚)도 시장바닥에서 천거되지 않았던가.

재주 있는 사람이라 맑게 드러난데다

헌칠하고 정숙하며 아름답다네.

충신이 어찌 곽분양(郭汾陽) 뿐이랴

재주도 이약수(李若水)보다 뛰어나다네.

몸가짐은 오상(五常)을 행하니

꽃다운 발자취를 그 누가 이어가랴.

시절은 이미 유월이나 되었건만

마음은 아직도 작년이 생각나네.

나 본래 포부만 커서 훌륭히 빛나니

그대 없으면 또 누구를 믿으랴.

바라건대 한림(翰林)의 낭관(郎官)이 되어

태평성대 조정에 재주를 아뢰시게.

학문을 헤아릴 수 없는데다

벼슬에 나아갈 뜻도 일찍부터 있었으니,

구해지지 않는다고 상심할 것도 없고

그쳐야 할 때에는 그치는 법일세.

이윤(伊尹)이 은왕(殷王)을 도운 것도

다만 창생(蒼生)을 위해 일어났을 뿐인데,

공께선 훌륭한 도덕을 지녔으니

주나라 주사(柱史)에게 부끄럽지 않으리라.

강하고 굳세어 쓰러지지 않으니

그날의 부끄러움을 씻으려 함일세.

보내온 시를 내 어찌 감당하랴

그 묘한 이치를 다 알 수가 없네.

백 번을 읽었더니 내 마음이 시원해져

구름 연기가 온 종이에 짙게 배었네.

 

王業共天長 山林無逸士

萬姓盡平章 搢紳皆潔已

德澤及山鄕 愛民與赤子

上下盡明良 盛業終無已

寶筭千萬霜 福海寧有涘

處處皆歡場 仁風通表裏

我亦慕班行 棲身故園梓

十載臥茅堂 靑雲心萬里

猶聞班馬香 却愧未能似

徒自倒壺觴 文虎難兼備

只愛書滿床 無心歌舞妓

不學農工商 或坐禪緣綺

質若糞土墻 願跪黃石履

阿爺與阿孃 爲我說所指

孝心體王祥 忠恕而已矣

此語我何忘 慨然心有喜

莫笑負笈箱 百里擧於市

才子獨淸揚 欣然淑且美

忠豈郭汾陽 才超李若水

將身行五常 誰復繼芳趾

時節到槐黃 猶思去年思

我本斐然狂 無公亦何恃

願作翰林郞 盛朝須奏技

學問不可量 取官曾有意

維以不永傷 可以止則止

伊尹輔殷王 只爲蒼生起

公有道德昌 不愧周柱史

强剛不仆僵 欲雪當日恥

來詩吾敢當 不可窮妙理

百讀意淸凉 雲烟濃滿紙

Ⅱ-061) 춘주(春州) 향교(鄕校) 여러분들께 부침

춘성(春城)은 산수(山水)의 고을인데

내 일찍이 그곳에 나그네 되었지.

그 뒤에 몇 번이나 봄과 가을이 지났던가

지나간 일들은 모두 묵은 자취되었네.

청루(靑樓)에는 몇 사람이나 남았는지

밤마다 꿈에 혼이 찾아오네.

멀리서 들으니 향교의 학생들이

날마다 시와 술자리를 베푼다지.

이락루(二樂樓) 사이에서 시를 읊으니

붓을 휘두르며 많이 얻어지겠지.

내 성품은 본래 어둡고 게으른데다

산만하게 살아서 좋은 계책이 없네.

마치 새 싹을 뽑아 올리는 사람 같으니

자라는 것을 도와준들 무슨 소용 있으랴.

때가 오지 않는다고 스스로 한탄할 뿐

애쓰는 이 마음을 그 누가 풀어주랴.

장차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지만

남북으로 갈라져 있어 원망스럽네.

옛부터 사귀던 정을 저버리지 마시게

사람의 마음은 아침 저녁이 다르다네.

 

寄春州鄕校諸公

春城山水鄕 我昔曾爲客

邇來春復秋 往事成陳跡

靑樓有幾人 夜夜夢魂迫

遙聞黌舍生 日開詩酒席

吟哦二樂間 弄筆多有獲

我生本幽慵 散蕩無良策

還如揠苗人 助長終何益

自嗟時不來 憤排憑誰釋

將欲與晤語 深愧隔南北

莫負舊交情 人心異朝夕

Ⅱ-062) 향교 여러 친구들이 화답한 시에 다시 차운함

나는 들었네. 저 주매신이

일찍이 나무꾼이었는데,

나뭇짐 지고 다니면서 언제나 글을 읽어

한원(翰苑)에 발을 붙였다는 이야길.

옛부터 현인 달사들 가운데

나고 들면서 군박한 이들 많았으니,

검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것은

묵자의 굴뚝과 공자의 자리였네.

사람에게 비록 도심(道心)이 있다지만

배우지 않으면 어디로부터 얻으랴.

이제 세 사람이 보내온 시를 읽어보니

세 사람에게 신기한 책략이 있어,

정직하고 신실하고 또 많이 들었으니

이 친구들이 참으로 세 가지 유익한 벗일세.

그리워하던 지난날의 마음이

한번 읽고는 얼음같이 다 풀려,

읊기를 마치고 머리를 돌리자

저녁 햇살이 난간 북쪽을 비추네.

가슴속에 쌓였던 회포 시원해지니

오늘 저녁이 얼마나 즐거운 저녁인가.

 

諸公見和。復次韻。

吾聞朱買臣 曾作採樵客

負薪常讀書 翰苑寄蹤跡

古來賢達人 出處多窘迫

不煖亦不黔 墨堗兼孔席

人雖有道心 不學從何獲

今看三子詩 三子有神策

直諒又多聞 此友眞三益

懸懸昔日心 一讀已氷釋

吟罷却回頭 斜陽照軒北

凝然懷抱淸 今夕是何夕

Ⅱ-063) 겨울밤 춘성(春城) 객관(客舘)에 묵고 있을 때 변(卞) 대학(大學)이 술을 가지고 찾아 왔기에 시를 지어 사례함

아홉 번이나 일어나니 밤이 정말 길구나

나그네 혼이 고향 생각하느라 더욱 처량하네.

등불 앞에서 맑은 이야기 참으로 듣기 어려우니

천 섬이나 되는 새로운 시름을 막을 수가 없네.

산이 가까워 북풍이 마른 나무에 불고

처마가 비어 지는 달이 빈 책상을 비추는데,

그대가 나그네 한을 풀어 주니 정말 고마워라

술잔 잡고 은근하게 권하고 또 권하네.

 

冬夜。寓春城客舘。卞大學携酒來訪。詩以謝之。

九起嗟兮夜正長 旅魂鄕思轉悲凉

一燈淸話誠難辨 千斛新愁未可防

山近朔風吹槁木 簷虛落月照空床

感公欲洗羇離恨 把州慇勤勸百觴

Ⅱ-064) 김을귀(金乙貴) 상공(相公)의 시권(詩卷) 뒤에 쓴 시와 서문

【서문】형 우림낭장(羽林郎將) 김철(金哲) 공이 서울에서 돌아와 소매에서 시권(詩卷)을 꺼내 보여 주면서 말했다. “내가 서울에 갔을 때에 그대가 부탁한 편지를 김상공에게 전했더니, 김상공이 이 시권을 내게 주면서 ‘원군(元君)이 내게 보여준 정이 너무 간절하고도 송구스러워, 이 시권을 그대 편에 부치네.’ 라고 말했소. 그대는 그렇게 알아 두시오.”

나는 (그 시권을) 두세 번 펼쳐 읽어보았다. 이 시권은 상공이 그의 선친 상국(相國)을 모시고 금성(錦城)에 와 있을 때에 지은 것인데, 그때 사귀던 여러 벗들과 주고받은 시가 매우 많았다. 시 지은 뜻을 보니 부화(浮華)한 말이 없었으며, 상공이 귀양살이 하다가 부름을 받고 다시 조정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뜻을 나타내면서 그 마음을 위로한 시들이었다.

나는 상공을 모시고 노닌 지가 오래 되었는데, 한 번 헤어진 뒤에 여러 해가 바뀌었다. 비록 가 뵙고 싶은 뜻은 간절했지만, 축지술(縮地術)이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마음만 괴로워한 지가 여러 해 되었다. 이제 간곡한 말씀을 듣고 보니 놀랍고도 기쁜 마음을 견딜 수 없어, 삼가 원운에 따라 (시를 지어) 시권 뒤에다 써서 사례한다.

 

옛날 우리들이 함께 노닐던 즐거움을

사람들이 늘 이야기했었지.

천왕계(天王溪) 위에 떠 있던 달빛이

지금도 변함없이 남쪽 난간을 비추네.

 

書金相公詩卷後(幷序, 乙貴)

兄羽林郞將金公哲自京師來。袖詩卷以示予曰。如京之日。以君之所囑之書。傳寄于金相公。金相公授予以此卷。而且曰。元君所示。情眷至切。不勝悚荷。以此卷傳附于君。君其悉焉。僕披至再三。相公陪先君相國到鎭錦城時所著也。與諸交友𢉼和甚多。觀其詩意。無浮華語。皆用相公見謫于玆。被召還朝之意。慰解其情耳。僕曩與相公陪遊日久。一別之後。星霜屢易。雖切往謁之志。愧無縮地之能。勞心忉忉者有年矣。乃今特蒙惓惓。不勝驚喜。謹次元韻。書于卷後以謝之。

昔我相從樂 令人每所言

天王溪上月 依舊照南軒

Ⅱ-065) 또 짓다

Ⅱ-065-01)

내 몸이 벌써 늙었다니 부끄럽구나.

넓게 트인 구름 길도 따라잡기가 어렵네.

구슬 같은 시축(詩軸)에 답하려 했지만

내 재주가 가낭선(賈浪仙) 같지 않아 몹시 부끄럽네.

Ⅱ-065-02)

그 옛날 현후(賢侯)께서 내 집을 찾으셨을 때

흰 구름 벼랑에 마주앉아 회포를 이야기했지.

지금까지도 그 크신 은덕을 갚지 못했으니

성성한 이 흰 머리털로 내 어찌하랴.

Ⅱ-065-03)

요순(堯舜) 같은 임금에다 시대에 드문 신하

그대의 남다른 풍채가 세상 사람들을 비추네.

다행히 구름과 용이 서로 만났으니

바라건대 천둥과 비를 일으켜 궁한 고기들을 살리소서.

 

愧我身年已晩年 豁然雲路未追攀

欲𢉼一軸珠璣句 深愧才非賈浪仙

 

昔日賢侯訪我家 論懷共坐白雲崖

至今重德猶難報 其乃星星白髮何

 

致君高舜間時臣 卓落淸標照世人

幸値雲龍相會合 願興雷雨化窮鱗

Ⅱ-066) 도경(道境) 선사가 보낸 시운에 차운하여 만세사(萬歲寺) 당두(黨頭)의 좌하(座下)에 드린 쌍운(雙韻)의 시

헌칠하고 깨끗한 학이 청전(靑田)에서 났으니

뭇 새들이 푸드득거려도 어깨를 견줄 수 없네.

높고 씩씩한 태도는 앞에도 뒤에도 없어

푸른 구름 만리 하늘에 높이 날아올랐네.

인간 세상에 잠시 와서 법연(法筵)을 맡아

남을 이롭게 하는 마음으로 늘 머무시며,

양주(楊州)의 십만 전을 침 뱉아 버리고

송월(松月) 삼천 편만 읊을 뿐일세.

본래 의탁할 곳 없으니 모든 인연을 끊고

목마르면 마시고 배고프면 먹으며 피곤하면 누우셨지.

한 평생 이 목숨을 어찌 헛되이 버리랴

고해(苦海)의 바람과 물결 속에서도 편안히 노니시네.

바리 하나 누더기 한 벌로 세월을 보내어도

사방의 사부(四部) 사중(四衆)이 홀로 어질다고 기렸네.

때때로 스님 문 앞을 찾아가려 했지만

맞이하고 보내는데 번거로우실까 염려되었네.

흰 머리털과 선탑(禪榻)이 바로 시 짓는 자리인데

소나무 아래 찻잔의 향기를 늘 생각했네.

요즘 봄기운이 이미 시작했으니

푸성귀 잎과 고사리 싹이 날마다 자라겠지.

참다운 법에 그 줄거리를 이미 정돈했으니

차 끓이고 부르실 때가 이미 가까워졌네.

내 시가 변변치 못해 부끄럽지만

바라건대 그 가운데서 고를 만한 것만 읽어보소서.

 

次道境所示詩韻。呈萬歲黨頭座下(雙音)。

軒軒逸鶴生靑田 衆鳥翶翔難並肩

昻莊態度絶後先 碧雲萬里高飛騫

暫來人世主法筵 利他心切常留連

却唾楊州十萬餞 但吟松月三千篇

本無依托絶攀綠 渴飮飢湌恒困眠

平生性命豈徒捐 苦海風浪遊安然

一盂一衲送流年 四方四衆稱獨賢

時時我欲踵門前 恐煩杖屨勞送延

鬢絲禪榻是詩場 每思松下茶甌香

邇來春氣已發陽 蔬葉蕨芽隨日長

旣於眞法整其綱 煮茗招呼時近當

吾詩不腆堪爲下 請覽其中可採者

Ⅱ-067) 동년(同年) 사인(舍人) 김우(金偶)의 시에 차운함 (두 수)

Ⅱ-067-01)

서쪽 난간에서 미리 알린다고 까치가 지저귀었건만

온 종일 그윽한 집에 별다른 일이 없었지.

갑자기 영광스런 빛이 사방을 비추더니

동각(東閣)의 참 군자를 반가이 맞이했네.

Ⅱ-067-02)

서너 점 푸른 산이 내 문 앞에 다가선데다

땅이 외지고 마음도 멀어 내 몸에 아무 일 없었네.

공부에 힘을 다했건만 종이 되었으니

천고의 외로운 충성 기자(箕子)가 가엾구나.

 

次同年金偶舍人詩韻(二首)

西軒預報鵲査査 盡日幽居無別事

忽有榮光照四隣 喜逢東閣眞君子

 

數點靑山當我門 地偏心遠身無事

工夫費盡下爲奴 千古孤忠笑箕子

Ⅱ-068) 멀리 보이는 골짜기에 구름이 일다

은 같은 봉우리가 숲 속에 솟아났네.

가뭄 구제할 마음은 바쁜데 왜 그리 한가한가.

마치 상산(商山)의 일없는 네 늙은이가

저후(儲后)를 따르기 위해 일어나는 것 같구나.

 

雲興遠壑

銀巒湧出樹林間 救旱心忙態尙閑

還似商山無事老 爲從儲后起將還

Ⅱ-069) 별장(郊居)에서 맞이한 한식(寒食)

마을이 멀어 술병 찬 사람도 없는데

숲 너머 산새들은 제멋대로 부르네.

비 개인 뒤 풀빛이 솔 길에 이어져

봄빛이 자리 모퉁이 비추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네.

 

郊居寒食

村遠無人佩酒壺 隔林山鳥恣相呼

雨餘草色連松逕 驚却春光照座隅

Ⅱ-070) 도경(道境)에 가다

산 암자를 찾으려고 돌다리를 건너니

솔가지 너머 푸른 기와가 들쑥날쑥하네.

문에 이르러 선기(禪機)가 고요함을 비로소 깨달았으니

푸른 이끼를 밟지 않아서 푸른빛이 넘치는구나.

 

遊道境

欲訪山菴渡石橋 參差碧瓦隔松梢

到門始覺禪機靜 不踏蒼苔綠色饒

Ⅱ-071) 동년(同年) 익주(益州) 심방철(沈方哲)이 윤장원(尹壯元)에게 받은 시를 보고 차운함

◎ 윤장원

우리 대부(大夫)의 문에 영웅 호걸은 없지만

효행의 상공 재목인 그대를 보았네.

만약 함께 급제한 서울 친구들을 보면

빈 골짜기에서 뜬 구름하고 살더라고 말 전해주오.

Ⅱ-071-01)

경사가 전해오는 이름 있는 집안을 이어받아

힘껏 충성을 바쳐 성스러운 임금을 보필하네.

천년에 드문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이 모였으니

태평성대에 풍운이 열린 줄 비로소 알겠네.

Ⅱ-071-02)

한 나라의 영웅이 한 문중에서 나왔으니

함께 재업(才業)을 이루어 명군을 도왔네.

부끄러워라. 나는 평생의 뜻을 펴지 못했으니

소매자락 떨치고 돌아와 혼자 구름에 누웠네.

 

同年沈益州方哲示尹壯元所贈詩云

英豪無我大夫門 孝行公材又見君

若見京師同榜友 爲言空谷謝浮雲

次韻

傳家餘慶襲高門 竭力輸忠翊聖君

千載明良相會合 方知盛代啓風雲

 

一國英雄出一門 共將才業致明君

愧予未展平生志 拂袖歸來獨臥雲

Ⅱ-072) 금성령(金城令)으로 부임하는 자성(子誠) 아우를 보내면서

군수로 부임하는 그대를 보내면서

노자로 줄 게 하나도 없네.

네 글자를 선물로 주니

바로 정(正)․직(直)․공(公)․평(平)이라네.

 

送子誠弟赴金城令

送君爲郡守 無物堪贈行

寄之以四字 曰正直公平

Ⅱ-073) 더위 속에 한가롭게 읊음

한참이나 책상에 기대어 있다가

두건을 벗고 길게 시를 읊었네.

바람이 잠잠해 해 그림자 지더니

구름이 흘러와 하늘에 그늘지네.

책상머리에 싸우는 개미도 없고

숲 사이에 나는 새도 끊어져,

시를 읊으며 산 빛을 마주하노라니

도(道)의 맛이 깊은 줄 이제야 깊이 알겠네.

 

暑中閑詠

移時倚書榻 岸幘發長吟

風定日中影 雲來天半陰

床頭無戰蟻 林下絶飛禽

舒嘯對山色 深知道味深

Ⅱ-074) 자사(刺史) 설공(偰公)과 산성별감(山城別監) 윤득룡(尹得龍)이 창화(唱和)한 시에 차운함

저녁볕 다락 위에 피리 소리가 긴데

발 걷자 서산의 비가 서늘한 기운을 보내주네.

나그네와 주인의 풍류가 참으로 그림 같으니

술 취한 미치광이가 그대들을 따른다고 어찌 방해되랴.

 

次刺史偰公與山城別監尹得龍唱和詩韻

夕陽樓上笛聲長 簾捲西山雨送凉

賓主風流眞似畵 醉狂何害次公狂

Ⅱ-075) 동년(同年) 심(沈) 익주(益州)가 보여준 시권(詩卷)은 윤장원(尹壯元)이 지은 절구(絶句)인데, 여러 사람이 글자를 나누어 운(韻)을 삼아 글을 짓는 중에, 나는 금(錦)자를 얻었다.

사신으로 남쪽에 온 지 일년 동안에

백성들이 편히 산다고 사관(史官)이 벌써 기록했네.

가는 곳마다 다행히 동년들의 모임이 있어

다투어 새로운 시를 지으니 비단 짜는 것 같구나.

 

同年沈益州所示詩卷。卽尹壯元所製絶句。諸公分字爲韻。予得錦字。

奉使南來一歲間 史官已記民高枕

行途賴有會同年 競作新詩如織錦

Ⅱ-076) 1376년(병진) 윤9월. 일본(日本)의 여러 선덕(禪德)들이 여기에 왔는데, 그 총림(叢林)의 전형(典型)이 우리 나라 제도와 비슷해서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다.

종풍(宗風)은 말이 없고 법도 없는데

멀리 해 뜨는 곳에서 아득히 건너왔네.

성품의 바다는 본래 맑아서 안과 밖이 없으니

일마다 물건마다 백호 광명을 발하네.

 

◎ 정종(正宗) 스님의 화답

동해의 산과 서해의 물이 모였으니

산은 첩첩이 둘리고 물은 아득해라.

법의 즐거움이 모두 하나로 돌아감을 알겠으니

면목이 당당해 나름대로 빛나는구나.

 

◎ 경송(巠松)의 화답

바람이 인자한 배를 보내되 뜬 자취가 없으니

모든 바다가 절로 아득한 줄 알겠네.

선정(禪定)의 마음을 비추는 한 바퀴 달은

만세에 변함없는 불법 속의 빛일세.

 

◎ 전수(全壽)의 화답

조계(曹溪)의 한 방울 물은 본래 맛이 없으니

어찌 바람 물결이 만리 아득함을 말하랴.

말로써 불법을 전하려 한다면

.. 석 자 칼날의 빛이리.

丙辰潤九月。日本諸禪德來此。其叢林典刑。如我國之制。作一詩以贈。

宗風無語亦無法 遠自扶桑渡杳茫

性海本澄無內外 頭頭物物放毫光

正宗禪者答曰

東海山和西海水 山重疊矣水滄茫

須知樂法皆歸一 面目堂堂自已光

 

巠松答曰

風送慈航無泛跡 須知萬海自茫茫

禪心○○一輪月 萬世○○○○裏光

全壽答曰

曹溪一滴本無味 爭說風波萬里茫

若以語言要傳法 ○○三尺釰鋒光

Ⅱ-077) 정(鄭) 사예(司藝)의 시에 차운함

구월 구일에 하늘빛이 맑아

쓸쓸히 물든 나뭇잎이 가을 소리를 보내오네.

서재를 깨끗이 쓸고 기쁜 자리를 베푸니

풍류 손님들 모두가 밝고 어지네.

잔을 주고 받는 모습이 참으로 그림 같아

깊은 술잔이 철철 넘치며 국화꽃잎을 띄웠네.

삼봉(三峰)의 시와 글씨가 모두 절묘하니

맑고 아름다운 구절이 음갱(陰鏗)의 시 같고,

익숙한 솜씨로 취한 먹을 뿌리니

종이에 가득한 빛이 구름과 연기 엉키었네.

사신이 된 상공이 가장 호걸스러워

한 평생 완생(阮生)같이 거리낌없이 살았네.

바람 앞에서 시를 읊어 장한 기운을 토하면

붓끝에 구슬 같은 구절들이 순식간에 이뤄지네.

설자(偰子)가 거문고를 타면 옛 곡조가 많아

멀고 가까이서 그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다 쏟네.

세상에 으뜸 가는 재주들을 어찌 다시 말하랴

젊은 시절 그 이름이 금방(金榜)에 높이 걸렸네.

이같이 뛰어난 이들이 한 자리에 모였으니

고금에 없는 학사들이 평생의 정을 털어놓았네.

회포를 이야기하다 산에 달 떠오른 것도 몰랐으니

반 바퀴 달이 옥 술잔에 일렁이네.

또 동쪽 울타리를 향해 서리 속 국화 향기를 주워 모으네.

 

次鄭司藝詩韻

九月九日天光淸 蕭蕭霜葉送秋聲

淨掃鈴齋闢歡席 風流賓客皆賢明

獻酬交錯眞似畵 深危瀲瀲浮金英

三峯詩筆俱絶妙 淸佳句句如陰鏗

成章信手酒醉墨 雲烟滿紙相交橫

奉使相君最魁傑 一生放曠如阮生

臨風嘯詠吐壯氣 筆端珠琲須臾成

偰子彈琴傳古多 聞風邇遐心盡傾

冠世才華何更說 妙歲高題金榜名

如斯豪俊在一座 遨頭學士豁展平

生情論懷不覺山月 上半輪輝玉觴 又向東籬掇拾霜中香

Ⅱ-078) 설(偰) 자사(刺史)가 도경(道境) 선사에게 보낸 시에 차운함

Ⅱ-078-01)

솔바람과 시냇물이 모두 선(禪)을 말하니

고요한 도경(道境)이 참으로 동선(洞仙)일세.

판각(板閣)은 날개 벌려 흰 구름 위에 솟았는데

저녁볕 솔 난간에 푸른 연기가 비꼈네.

Ⅱ-078-02)

선심(禪心)이 밝게 빛나 끝내 늙지 않고

자비 구름을 널리 펴서 마른 중생을 다 적시네.

다행히도 현명한 자사를 이제 만났으니

새 시를 다투어 지어 ○○○

Ⅱ-078-03)

산 속이라 비와 이슬이 많음을 더욱 느끼니

진공(眞空)에도 역시 인정의 끌림이 있네.

서로 따르는 마음이 지허(支許)의 무리에 부끄럽지 않아

호계(虎溪)의 한 웃음이 인연 없는 게 아닐세.

 

次偰刺史寄道境詩韻

松風溪水俱說禪 寥寥道境眞洞仙

板閣翬飛白雲外 日斜松檻橫蒼煙

 

禪心炯炯竟不老 廣布慈雲潤枯槁

幸今相遇刺史賢 爭賦新詩○○○

 

山中多感雨露偏 眞空亦有人情牽

相從不愧支許輩 虎溪一笑非無緣

Ⅱ-079) 또 짓다

Ⅱ-079-01)

집에 있어도 사영운(謝靈運)은 언제나 참선했고

시에 능한 이태백(李太白)은 주선(酒仙)이었네.

이런 사람들 한번 가서는 돌아오지 않으니

천년 지나간 일이 부질없는 연기일세.

 

Ⅱ-079-02)

빨리 흐르는 세월이 늙기를 재촉하니

서리맞은 초목들이 다 말라버렸네.

공업(功業)이 뜬구름 같은 줄 일찍 알았으니

우리 생전에 맘껏 즐거워하세.

Ⅱ-079-03)

하늘이 내게 남다른 뜻을 내려주셔

세상 일에 얽매이거나 끌리지 않게 하셨네.

달을 맞아 술잔 들고서 두 사람을 생각하노니

부끄럽게도 그들과 인연 맺지 못했구나.

 

在家靈運長叅禪 能詩太白爲酒仙

斯人一去不復返 千年往事空雲烟

 

鼎鼎流光催衰老 霜餘草木俱已槁

曾知功業似雲浮 且樂生前吾○○

 

上天生我意有便 不使世務相拘牽

擧杯邀月憶二字 愧予未得同攀緣

Ⅱ-080) 도경(道境) 선사가 지은 「산 속 지독한 추위(山居苦寒)」란 시에 차운함

언 구름과 엷은 해가 서로 토하고 삼키는데

바람이 긴 하늘을 까불어 하늘이 성난 듯하네.

늦겨울이 차고 매서워 연화(烟火)가 희미하니

뼈 속까지 차가운 괴로움을 견딜 수가 없네.

산 사람은 일이 없어 두터운 갖옷 입은 채로

베개 높직이 베고 누워 자느라 한낮 된 줄도 몰랐네.

창호지에 바람이 불어 천둥소리 들리고

처마 끝에 고드름 달려 옥 젓가락 같구나.

일어나 차 달이면서 화로 앞에 앉았노라니

서산에 지는 해가 높이 걸린 등불 같네.

향기 어린 방장(方丈)을 바람과 눈에 내버려 두니

청한(淸寒)한 모습 그 누가 구름 속의 스님 같으랴.

변암(弁巖)의 나무꾼이 춥다고 외치면서

혼자 절구를 찧어도 가련케 여기지 않네.

두어 간 허술한 집에 바람소리 차가워

답답한 이 회포를 참으로 풀기 어려웠는데,

갑자기 한 곡조의 양춘사(陽春詞)를 받드니

춘대(春臺)에 쉽게 오른 것 같이 시원하구나.

 

次道境禪翁山居苦寒詩韻

凍雲淡日相吐呑 風簸長空天欲怒

窮陰凜冽烟火微 骨寒未可能耐苦

山人無事擁重裘 高枕不知日將午

風蕭窓紙似雷吼 王筯下垂簷溜氷

起來煎茶對爐火 西峰落日如懸燈

凝香方丈任風雪 淸寒誰似雲居僧

弁巖樵臾獨呼寒 躬自臼磨人不惜

數間疎屋冷颼颼 鬱鬱心懷難解釋

忽奉一曲陽春詞 豁若春臺容易陟

Ⅱ-081) 선기(僎其) 스님을 곡하다 (작년에 유곡(幽谷) 굉(宏) 스님과 함께 천림사(泉林寺)에서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옛부터 서로 따르며 정이 이미 깊었으니

완연한 그 자취 천림사에 남아 있네.

다시 만날 날 생각할 때마다 늘 그리웠으니

지금 이처럼 상심할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구름 진흙을 밟던 기러기는 발자취만 남기고

화표주(華表柱)에 날던 학은 소리가 끊어졌네.

푸른 산기슭에서 다비(茶毗)를 한다니

봄바람에 머리 돌리며 옷깃에 눈물 뿌리네.

 

哭僎其大選 (去歲。與宏幽谷讀書泉林寺)

往昔相從意已深 宛然遺迹在泉林

每思再面常懷故 豈謂傷心乃及今

鴻踏雲泥留趾瓜 鶴飛華柱絶聲音

茶毘底處靑山畔 回首春風淚灑襟

Ⅱ-082) 조계(曺溪) 장로(長老) 선수(禪竪) 스님께서 구(丘) 스님께 지어준 시에 차운함

고즈넉한 장실(丈室)에 앉아 경(經)을 이야기하니

시냇가 달과 솔바람도 빛과 소리를 보내네.

세상 밖에 노닐어 참으로 도(道)에 합하니

속세의 시끄러움이 어찌 마음에 걸리랴.

흰 구름 푸른 봉우리는 참 즐거움을 이바지하고

자색 거리 붉은 티끌에 아름다운 이름을 날렸네.

반가이 동포(同袍)를 만나 좋은 시를 지으니

푸른 못 가의 봄 풀이 꿈속에서도 푸르네.

 

次曺溪長老禪竪。贈丘大選詩韻。

寥寥丈室坐談經 溪月松風送色聲

物外逍遙誠合道 世間紛擾豈關情

白雲靑嶂供眞樂 紫陌紅塵動美名

喜遇同袍題秀句 碧池春草夢邊靑

Ⅱ-083) 곡계(谷溪)의 시권에 씀 (1385년, 을축)

Ⅱ-083-01)

골짜기 바람 맑고 시냇가 달은 밝아

그 빛 잡을 만하고 그 소리 들을 만하네.

우리 스님만이 이 즐거움을 즐거워해

바로 그곳에서 공(空)한 성품을 전하네.

 

Ⅱ-083-02)

본래 이뤄진 계곡이라 혼탁하지 않아

골짜기 깊고 시내는 머니 근원이 다함 없네.

맑고 시원한 물 한 바가지를 나눠서

인간의 뜨거운 번뇌를 다 씻고 싶어라.

 

書谷溪卷(乙丑)

谷風淸溪月明 光可攬聲堪聽

惟我師樂此樂 卽常處傳空性

 

本自成渠○不渾 谷深溪遠莫窮源

願分一勺淸冷波 滌盡人間熱惱煩

Ⅱ-084) 파원(派源)의 시권에 쓰다 (종사 宗師)

처음이 없는 그때부터 본래 엉켜 있어

가득 차고도 고요하니 공(空)이면서도 공이 아닐세.

나뉘어 흐르는 그 가지를 멀다고 하지 말게

천 물결 만 이랑이 한 집안 바람일세.

 

書派源卷(宗師)

自從無始本冲融 湛湛寥寥空不空

莫謂分流支裔遠 千波萬浪一家風

Ⅱ-085) 무제(無際)의 시권에 쓰다 (해사 海師)

넓은 하늘과 큰 땅은 삼켜도 다함이 없고

돌고 도는 해와 달은 아무리 비춰도 끝이 없네.

넓고 비고 밝고 트임을 헤아려 보셨는가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으면서 안팎으로 통했네.

 

書無際卷(海師)

廣大乾坤呑不盡 廻旋日月照難窮

廓然瑩澈思量否 無相無名內外通

Ⅱ-086) 원로(元老) 오익(吳翊)을 뵙고 좌하(座下)에 절구 두 수를 바침

Ⅱ-086-01)

화기가 두 뺨에 떠올라 붉으니

여든 여섯에도 강건해 봄바람이 이네.

반도(蟠桃)가 익는 것을 다시 보리니

금강경(金剛經)을 받들어 읽은 큰 공덕 때문이리.

 

Ⅱ-086-02)

그윽한 꽃이 붉게 타며 산을 붉게 비추고

아름다운 새들은 짹짹 산들바람에 지저귀네.

장수를 기원하는 한 잔 술에 봄 흥이 절로 나니

원로에게 기이한 공이 있음을 이미 알겠네.

 

謁吳元老翊。呈似座下。二絶。

和氣光浮兩頰紅 强康八十六春風

定應再見蟠桃熟 持誦金剛大有功

 

幽花灼灼映山紅 好鳥喃喃語軟風

獻壽一盃春興遠 已知元老有奇功

Ⅱ-087) 흥법사(興法寺) 대선사(大禪師) 성진(省珍)이 조계(曺溪) 행각(行脚)인 문진(文軫)과 사근(斯近) 두 사람이 지은 시 한 축(軸)을 사람을 시켜 내게 보내면서 시를 청하기에 차운하여 부침

경계가 고요하니 마음도 멀어지고

사람이 한가하니 도(道)도 더욱 높아지네.

두 사람이 뛰어남을 분명히 알면서도

가는 세월에 맡겨 몇 해를 보냈던가.

소나무 달 사이로 서늘한 밤 기운이 흩어지고

강물과 구름 사이에 봄 그림자 일렁이는데,

손님이 찾아와 좋은 시를 지으니

길게 읊조리면서 황혼에 서 있네.

 

興法大禪翁省珍以曺溪行脚文軫․斯近兩人所著詩一軸。走价責予詩。次韻奉奇。

境靜心還遠 人閑道益尊

端知兩奇絶 任送幾寒溫

松月夜凉散 江雲春影翻

客來題好句 長嘯立黃昏

Ⅱ-088) 또 짓다

온 강의 바람과 달빛이 솔문에 이어지고

만 골짜기 구름과 안개가 한 골로 모여들었네.

우뚝한 (불)상을 외로운 동산에 세우고

장엄한 불탑은 뜨락에 솟았네.

조계(曺溪)의 두 손님이 우연히 찾아왔으니

등 넝쿨 푸른 빛도 그대들 위해 움직이네.

주인과 나그네가 웃고 이야기하니

한가롭고도 담박하기가 구름 같구나.

만약 술을 사려면 도연명(陶淵明)을 끌어오고

셋이 웃으며 즐겁게 논다면 나도 함께 하리라.

이제부터 한 평생 숨은 이들을 사모하면서

그곳 향해 밤마다 맑은 꿈을 꾸리라.

 

一江風月連松門 萬壑雲嵐朝一洞

巍巍像設○孤園 庭有端莊孤塔聳

曹溪兩客偶尋來 烟蘿翠色爲之動

主賓相對開笑談 閑淡如雲無雜冗

若能沽酒引陶潛 三笑歡遊吾可共

從此平生慕眞隱 嚮方夜夜勞淸夢

Ⅱ-089) 청명일(淸明日). 스스로 읊다

세상 맛 가운데 한가함이 으뜸인 줄 일찍이 알았으니

만금이 어찌 낚싯대 하나만 하랴.

누가 시켜서 이익 쫓아 분주히 다니는가

고요함 지키면서 가난하게 사는 게 가장 편안하네.

싸락눈 내릴 땐 철 바뀜에 놀라고

지는 꽃 날릴 땐 가는 봄을 아쉬워했지.

좋은 시절 만나면 한껏 취해 보세나

바람과 달빛은 다함이 없고 하늘과 땅도 넓으니.

 

淸明日自詠

世味曾知莫若閑 萬金何似一漁竿

奔忙逐利知誰使 守靜居貧要自安

細雪○時驚節換 落花飛處惜春殘

還須趁取良辰醉 風月無窮天地寬

Ⅱ-090) 늦봄 (여섯 수)

Ⅱ-090-01)

동풍이 불어 온 산이 붉었었지.

봄 기세 당당하더니 이젠 이미 그만일세.

세상일 차츰 어려워지고 몸도 차츰 늙어가니

십 년 먹을 갈고도 공 없는게 부끄러워라.

Ⅱ-090-02)

연기 낀 풀 거친 동산에 흙 언덕이 이어져

청려장 짚고 마음 내키는 대로 푸른 잔디를 밟으며 가네.

이따금 강개한 마음에 소뿔을 두드리며

봄바람에 한 곡조 영척(寗戚)의 노래를 부르네.

Ⅱ-090-03)

긴 날에 벗이 없어 혼자 술잔을 드노라니

숲새 지저귀며 봄 보내는 시를 화답하네.

어젯밤에 바람 따라 산 비가 지나가더니

언덕에 진 복사꽃이 한 치나 깊었구나.

Ⅱ-090-04)

봄바람 조화에 어찌 사(私)가 있으랴

풀마다 꽃마다 저마다 한철일세.

흰 머리털은 끝내 검어질 줄 모르니

봄바람이 어찌 나만은 생각해 주지 않나.

Ⅱ-090-05)

몸의 일은 빗나가고 마음의 일은 어긋나

봄이 돌아가면 또다시 꽃 시절을 아쉬워하네.

동군(東君)이 가고 나면 돌아보지도 않는데

인간 세상의 시비는 왜 그리 끝이 없나.

Ⅱ-090-06)

흐르는 물 앉아서 바라보며 흐르는 세월 한탄하니

지는 꽃과 우는 새가 모두 하염없구나.

흥하고 쇠하는 이치를 누구와 함께 말하랴

앞 숲에 누런 밤이 남았다는 말만 들었네.

 

暮春(六首)

東風吹盡滿山紅 春事堂堂又已空

世故漸艱身漸老 十年磨硯愧無功

 

烟草荒園接土坡 杖藜隨意踏靑莏

有時慷慨敲牛角 一曲春風寗戚歌

 

氷日無人伴獨斟 埜禽啼和送春吟

昨宵山雨隨風過 桃塢殘紅一寸深

 

春風造化豈容私 百草千花各一時

依舊鬢絲渾不變 乃何於我獨無思

 

身事蹉跎心事違 春歸又復惜芳菲

東君去去勿回顧 人世滔滔皆是非

 

坐歎流光對水流 落花啼鳥摠悠悠

有誰說與興衰理 只聽前林黃栗留

Ⅱ-091) 깃발을 돌려 서울로 가는 도병마사(都兵馬使) 설(偰) 상군(相君)을 전송함

하늘이 우리 백성들을 돌보지 않으시어

공께서 이 시름을 풀어 주셨는데,

헤어지는 정이 처량해 끝이 없으니

떠나는 마음이야 겉잡을 수 없겠지.

베지 말라는 아가위나무는 그대로 있고

맑은 물도 그대로 흘러가는데,

부질없이 한 줌의 눈물 흘리며

붙잡을 길 없음을 못내 서러워하네.

 

奉送都兵馬使偰相君返旆如京

天不佑吾俗 公能解此愁

離情悽不斷 去意浩難收

勿剪棠猶在 還澄水自流

空將一掬淚 深恨挽無由

Ⅱ-092) 강수심(江水深) 4장 6구를 지어 원(元) 도령(都領)에게 부침.

Ⅱ-092-01) 강물은 깊고 구름은 숲에 가득해라.

누런 매실에 빗줄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초가집에는 온종일 사람이 오지 않네.

나 혼자 쓸쓸히 자다가 일어나

시를 읊으며 그윽한 생각을 달래네.

Ⅱ-092-02) 강물은 맑은데 구름은 북으로 가네.

숲 너머 그윽한 새는 비 개었다 지저귀고

서늘한 저녁 소나무 아래 부채가 필요 없네.

하늘가 저녁 구름이 반쯤 걷히자

허공을 비치는 산 빛이 쪽처럼 푸르네.

Ⅱ-092-03) 강물이 흐르다가 언제나 그치려나.

젊은 시절 세월은 붙잡아 두기 어려우니

옳고 그름과 명예 이익이 다 어디 있으랴.

오늘 내일 아침이 백발을 재촉하니

그대여! 금항아리 술을 많이 마련하소.

 

江水深四章章六句。寄元都領。

江水深雲滿林

黃海雨脚猶森森 茅齋竟日人不至

我獨蕭然睡還起 吟哦足慰幽幽思

 

江水淸雲北征

隔林幽鳥呼新晴 晩凉松下不攜扇

天際暮雲纔半捲 映空山色靑如澱

 

江水流幾時休

少壯光陰難挽留 是非名利終何有

今日明朝催白首 勸君多辦金樽酒

 

江水澄舟可乘

飽風帆影如雲騰 東西南北任所適

若向殷川成大績 天下蒼生免沉溺

Ⅱ-092-04) 강물이 맑아서 배를 탈 만하네.

바람 가득한 돛 그림자가 날아가는 구름 같아

동서남북 어디로든 가는 대로 내맡겨 두네.

은천(殷川)을 향해 큰 공적 이루면

천하 창생(蒼生)들이 물에 빠질 걱정 없으리.

 

江水澄舟可乘

飽風帆影如雲騰 東西南北任所適

若向殷川成大績 天下蒼生免沉溺

Ⅱ-093) 7월. 횡천(橫川) 가는 도중에

산 안개 희끗희끗 개려다 마는데

풀 깊은 시냇가 길에 사람 발길이 끊어졌네.

이 가운데 무엇이 시 지을 생각을 돋우나.

언덕 너머 비둘기가 비를 부르며 우네.

 

七月橫川途中

山霧霏微晴未晴 草深溪路絶人行

就中何物撩詩思 隔岸一鳩呼雨鳴

Ⅱ-094) 비 내리는 날. 춘성(春城) 객관(客舘)에 머물면서 염(廉) 선생께 책을 빌림

뜨락 나무에 비가 내리는 산 속 객관의 가을날

나그네 창가의 정황이 더욱 유유하구나.

책을 빌리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쓸쓸하고 적적한 시름을 달래려고 함일세.

 

春城客舘雨中。呈廉先生借冊。

雨滴庭柯山舘秋 旅窓情况轉悠悠

欲求書冊非他意 消遣寥寥寂寂愁

Ⅱ-095) 염공(廉公)이 보낸 화답시를 보고 다시 차운함

내 일찍이 이곳에 논 지 십삼 년인데

꽃과 달 누대(樓臺)에 지난 일이 아득하네.

산과 물은 옛 모습이건만 사람은 옛사람 아니어서

다시 와 고금의 시름을 걷잡기 어렵구나.

 

廉公見和。復次韻。

我曾遊此十三秋 花月樓臺往事悠

山水舊形人不舊 再來難禁古今愁

Ⅱ-096) 또 짓다

발을 드리운 고요한 집에 가을밤이 길고도 기니

섬돌 벌레의 울음소리에 나그네 마음 시름겹네.

창 밖 오동나무에는 비 내리는데 푸른 등잔 가에 앉았노라니

생각도 한이 없고 시름도 한이 없네.

 

閣靜簾虛夜正秋 砌蛩鳴咽客情悠

隔窓桐雨靑燈畔 無限思量無限愁

Ⅱ-097) 철원관(鐵原舘) 북관정(北寬亭) 시에 차운함

한 말 술을 가지고 양주(凉州)와 바꾸지 말라더니

이곳에 오니 비로소 세상 시름을 씻을 만하네.

들에 가득한 벼 구름에는 풍년이 들어

난간에 부는 솔바람에 여름도 가을 같구나.

지는 노을과 흐르는 물에 티끌세상 정이 끊어지고

푸른 풀 거친 터에 옛 뜻이 아득하네.

흥취가 멀리 하늘 밖에서 일어나니

하필 봉래섬 만이 신선 노는 곳이랴.

 

次鐵原舘北寬亭詩韻

休將斗酒換凉州 到此聊堪滌世愁

滿野稼雲年有稔 灑軒松吹夏凝秋

落霞流水塵情絶 靑草荒墟古意悠

逸興遠從天外起 不須蓬島是仙遊

Ⅱ-098) 멀리 부침 (남을 대신해서 짓다)

그대는 멀리 있어 눈빛 선선한데

산은 푸르고 강물은 흘러가네.

강물 흐르는데 시름은 끝이 없어

편지마저 끊어져 소식 들을 수 없네.

소식 없어 꿈만 괴롭게 날아가고

하늘 까마득한데 구름은 늘어졌네.

구름이 늘어지고 해도 지려는데

그대가 멀리 있어 나 즐겁지 않네.

 

寄遠(代人作)

渠在遠兮眠空寒 山蒼蒼兮江漫漫

江漫漫兮愁不盡 魚鴈沒兮無音信

無音信兮夢勞飛 天杳杳兮雲依依

雲依依兮日將晩 我不樂兮渠在遠

Ⅱ-099) 추석날 선영(先塋)에 참배함 (두 수)

Ⅱ-099-01)

십 년 동안 아이 적 마음으로 이 언덕에 있었네.

올 때마다 석 잔 술에 한결같이 슬펐네.

흰 구름 흐르는 물 유유한 이곳에

소슬한 가을바람이 사시나무(白楊)에 일어나네.

Ⅱ-099-02)

단풍잎과 갈대꽃이 눈에 가득한 가을날

가을되니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네

아버지 어머니 다 돌아가셨는데 형마저 왜 떠나셨나

시름겹고 시름겨운데 또 시름이 닥치네.

 

中秋拜先塋(二首)

十載兒心在此崗 每來三酹一哀傷

白雲流水悠悠處 蕭瑟悲風起白楊

 

楓葉蘆花滿眼秋 逢秋難禁淚潛流

父亡母沒兄何去 愁復愁來又一愁

Ⅱ-100) 고암(高巖)의 시권에 쓰다 (영사 寧師, 쌍운 雙韻)

종풍(宗風)을 쳐부수어 안계(眼界)가 비었으니

곧은 기상이 성신(星辰) 밖에 우뚝 솟았네.

높고 높아 흰 구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니

만고 천추에 그 푸름이 다하지 않으리.

 

書高巖卷(寧師 雙韻)

打破宗風眼界空 節然直聳星辰表

巍巍不動白雲中 萬古千秋靑未了

Ⅱ-101) 이날(9월 8일) 국서(國書) 원천경(元天景)이 안덕종(安德從) 원문질(元文質)과 함께 술을 가지고 찾아오다

시골집에 가을이 깊어가니

빈 뜨락에 낙엽이 깊이 쌓였네.

여러분의 그 뜻이 고마워라

이 늙은이 마음을 위로하러 오시다니.

국화 핀 길에 향기 가득하고

단풍나무 숲에 붉은빛 떠오르는데,

이 가운데 취흥에 겨워

읊조리다 깨고 나니 혼자 우습구나.

 

是日。元國書天景與安德從․元文質携壺訪及(九月 八日)。

村舍秋將晩 空庭脫葉深

感他諸子意 慰我老人心

香滿菊花徑 紅浮楓樹林

就中乘醉興 還笑獨醒吟

Ⅱ-102) 은혜를 청하는 이언(俚言) 두 수를 목병마사(牧兵馬使) 주(周) 상군(相君)에게 바침

Ⅱ-102-01)

이성(伊城) 남쪽에 자갈밭이 있어

이 땅의 이름이 대곡원(大谷員)일세.

민부(民部)의 공문(公文)이 조상 적부터 오더니

군사 뽑는 붉은 글씨가 내게까지 전해졌네.

Ⅱ-102-02)

옛부터 비보(裨補)라는 일컬음을 듣지 못했는데

어찌 지금에 와서 온전하길 살피는가.

바라건대 조목조목 실상을 따져서

만약 거짓말이라면 푸른 하늘이 굽어보시리.

 

乞恩俚言二首。呈牧兵馬使周相君。

伊城南面有磽田 此地名爲大谷員

民部公文來祖上 選軍朱筆至吾傳

 

未聞自古稱裨補 何故于今審悉全

願以科科推實狀 若陳虛語有靑天

Ⅱ-103) 또 짓다

초가집에 이끼 낀 사립문, 자갈밭 뿐이니

처량한 살림살이가 남 보기 부끄럽네.

한 바구니 밥에 푸성귀로 내 분수를 따르고

시렁에 가득한 경전은 아버지에게서 전해졌네.

젊은 시절에 이미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으니

늙었다고 어찌 목숨 보전하기를 걱정하랴만,

남은 생애 호연지기를 어디에 대고 기르랴

통발에 두 하늘 있음을 아직 다 못 잊었네.

 

茅屋苔扉與石田 凄凉活計媿諸員

一簞疏糲隨吾分 滿架經書是父傳

壯歲已能心不動 衰年豈患命難全

餘生浩氣憑何養 未盡忘荃有二天

Ⅱ-104) 불경을 베끼는 이(化經者)에게 지어주다

경전을 베끼려고 서로 금은을 뿌리면서

내생에 부처가 될 인연을 심는다고 하지만,

만물은 마침내 썩어지게 마련이니

반드시 떠도는 티끌처럼 흘러 다니게 될 걸세.

밝은 경전은 이름과 모양을 벗어났건만

어리석은 사람들이 허망과 진실을 분별 못하네.

제게 있는 값진 보배는 알지 못하고

부질없이 마음과 힘을 다해 남의 보물만 헤아리네.

 

贈化經者

寫經爭欲費金銀 曰種來生做佛因

漸次磷緇成朽物 必應流轉作浮塵

大淳明藏絶名相 少智慧人迷妄眞

不省自家無價寶 謾勞心力數他珎

Ⅱ-105) 초겨울. 벗에게

깊숙이 숨어사니 무엇을 가졌으랴

좋은 일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네.

말하건 안 하건 진실뿐이고

나아가거나 물러나거나 천명뿐일세.

구름 낀 숲에는 들 두루미가 뛰노는데

연기 자욱한 골짜기에 가난한 선비가 서 있어,

갑자기 바뀐 계절에 다시 놀라니

겨울 햇볕이 어느새 자리 모퉁이를 비추네.

 

初冬。示友人。

幽居何所有 好事不如無

語黙誠而已 行藏命矣夫

雲林翹野鶴 煙壑腐寒儒

忽復驚時節 冬暉照座隅

Ⅱ-106) 또 짓다

사는 곳이 누추하고 외지지만

날 알아주는 벗이 어찌 아주 없으랴.

손님은 바로 대나무 군자이고

벗님은 소나무 대부일세.

선(禪)을 물으려 늙은 스님을 맞고

학문에 힘쓰려 젊은 선비를 모시는데,

푸른 산이 가까운 것도 또한 기쁘니

한가한 구름이 집 모퉁이를 둘러싸네.

 

棲遲雖陋僻 知己豈全無

賓是竹君子 友于松大夫

問禪邀老釋 勉學引新儒

且喜靑山近 閑雲繞宅隅

Ⅱ-107) 또 짓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어찌 다 말하랴

인정이 없을 수는 없어,

거나해지면 술손님을 부르고

우연히 나무꾼과도 짝하네.

지극한 도(道)는 옛 성인을 사모하지만

실없는 이야기하며 늙은 선비가 부끄러워라.

그대에게 재략 있음이 부러우니

한 모퉁이를 들면 세 모퉁이를 아네.

 

世態那堪說 人情不可無

陶然招酒客 偶爾伴樵夫

至道希先聖 常談恥老儒

多君有材畧 擧一反三隅

Ⅱ-108) 겨울비를 보고 느낀 바를 적음

구름 모습이 활발해지며 빗소리가 잦더니

해도 빛을 잃고 하늘이 어두워지네.

숲 너머 시냇가에 차가운 빗자국이 생기고

싸늘한 연기가 물가 마을에 가득 잠겼네.

고개 마루 외로운 소나무엔 곧은 가지가 누워 있고

온갖 풀 덮인 동산에는 마른 잎이 흩어졌네.

괴이하구나! 현영(玄英)이 여름 명령을 행하다니.

난간에 기대 시름스레 서서 혼자 말이 없네.

 

冬雨寓感

雲容㪍鬱雨聲繁 白日無光天氣昏

寒潦欲生林外間 冷烟空鏁水邊村

貞枝偃蹇孤松嶺 枯葉離披百草園

怪爾玄英行夏令 倚欄愁立獨無言

Ⅱ-109) 홍시(紅柿)를 보낸 오(吳) 영해(寧海)에게 고마워함

꼭지 떨어진 아름다운 과일이 소반에 빨갛게 쌓여

한 번 빨아먹자 엉켜 있던 시름이 다 없어지네.

상군(相君)의 두터운 마음을 깊이 감사하노니

광주리에 가득 담겨 하늘 동쪽에서 왔구나.

 

謝吳寧海惠紅柿

解苞佳實飣盤紅 一吸凝然萬慮空

深感相君誠意重 滿筐飛到自天東

Ⅱ-110) 영천사(靈泉寺) 법화(法華) 법석(法席)의 권화시(勸化詩)

발원하여 부처님 법당을 다시 새롭게 세우니

우뚝 높은 기와지붕이 구름 언덕에 닿았네.

임금님의 천년 장수를 빌며

나라가 만대 창성하기를,

향 연기를 피우며 서로 치하하니

시주들의 큰 보시를 우러러 의지하네.

많고 적음을 따지지 말고 모두 따라 기뻐하여

연화 세계 큰 도량(道場)에 함께 들어가세.

 

靈泉寺法華法席勸化詩

發願重新佛法堂 高甍突兀接雲岡

祝釐君主千年壽 裨補邦家萬代昌

欲設香烟因慶讚 仰憑檀越助弘揚

莫論多寡皆隨喜 同入蓮花大道場

Ⅱ-111) 겨울밤에 읊음

쌀쌀한 눈보라에 밤이 참으로 기니

두터운 이불 덮고도 추위를 못 견디겠네.

백년의 공명(功名) 때문에 머리털은 희어져

만단(萬端)의 상념이 등잔불 앞에 가물거리네.

시절을 느끼며 친구 적은 게 부끄럽고

세상을 겪을수록 갈 길 어려움을 노래하네.

읊기를 마치고 창가에서 좋은 꿈 이루려

흰 구름 선실(禪室)에다 부들자리를 폈네.

 

冬夜吟

蕭蕭風雪野漫漫 雖是重衾不耐寒

百歲功名雙鬂變 萬端思念一燈殘

感時還愧知音少 閱世高歌行路難

吟罷小牕成好夢 白雲禪室展蒲團

Ⅱ-112) 이을화(李乙華) 박사(博士)에게 부침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이 늙기를 재촉하는데

잇달아 안부를 묻는 그대가 고맙구려.

시골에 사는 내게 무슨 걱정 있으랴

서울에 머무는 그대가 슬프구려.

늙어갈수록 함께 이야기할 친구가 없어

그대 언제쯤 돌아올른지 알고 싶구려.

고향의 뽕나무 가래나무는 모두 옛날 그대로니

처자 생각하느라 너무 애쓰지 말구려.

 

寄李博士(乙華)

鼎鼎流光催老衰 感公連度問安危

卜居鄕黨吾何慮 旅食京華子所悲

還愧晩年無與語 不知幾日是歸期

故園桑梓皆依舊 莫爲妻孥費苦思

Ⅱ-113) 저곡(楮谷) 원군군(元郡君)을 곡함

정숙하고 현량한 인품이라 원래 그르침 없었으니

아내의 덕과 어머니 몸가짐에 누가 더하랴.

밥상을 들어 눈에 가지런한 모습을 다시 보기 어려우니

백란(伯鸞)의 그 정을 어떻게 하랴.

 

哭楮谷元氏郡君

貞良淑質元無蹉 婦德母儀誰敢加

擧案齊眉難再見 伯鸞情意當如何

Ⅱ-114) 또 짓다

오늘 아침 하늘에 해가 빛을 잃더니

해로가(薤露歌)가 끝나자 사람들은 흩어졌네.

난옥(蘭玉)의 문정(門庭)에 우리 형님도 안 계시니

한 번 길게 탄식하고 또 탄식하네.

 

【형님이 예전에 이 분의 사위였는데,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렇게 말했다.】

 

今朝天日無光明 薤露歌殘人欲散

蘭玉門庭欠我兄 一番長歎又長歎

(家兄曾爲婿 世故云)

 

Ⅲ-001) 1386년(병인) 설날. 스스로 읊다

화창한 기운 퍼지며 새 소리도 그윽한데

시냇가 얼음이 막 풀리고 햇빛도 떠오르네.

바람과 연기가 노는 사람의 흥을 돋구는데

눈과 서리는 유난히 병든 나그네 머리에 많구나.

밤낮으로 온갖 시냇물 쉬지 않고 흘러

고금의 모든 일이 유유하게 지나가네.

해마다 달라지는 내 모습을 그 누가 가엽게 여기랴

봄을 다시 만나고 보니 절로 부끄럽구나.

 

是日自詠(丙寅元日)

和氣舒遲鳥語幽 澗氷初解日華浮

風烟欲攪遊人意 霜雪偏饒病客頭

畫夜百川流浩浩 古今萬事去悠悠

誰憐歲歲年年貌 又復逢春却自羞

Ⅲ-002) 설날. 조(趙) 봉선(奉善)이 보낸 시에 차운함

찾아와서 안부 묻는 것만 해도 고마운데

아름다운 시까지 보여 주어 병든 얼굴을 풀게 하다니.

우리네 성정이야 맑은 물 같을 뿐이지

어찌 저 산같이 오랜 수명을 기대하랴.

시름을 푸는 데는 책 세 권이면 그만이고

기운을 기르는 데는 밥 한 바구니도 남으니,

나 역시 그대가 늙지 않기를 바라며

아침 저녁으로 오로지 남산(南山)을 지켜보네.

 

次趙奉善元日見贈詩韻

感君來訪問平安 更見佳章解病顔

只要性情如止水 那期壽命似重巒

遣愁每把書三卷 養氣常餘食一簞

我亦祝君難老筭 暮朝專意指南山

Ⅲ-003) 또 짓다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고 편안하기만 구하니

십 년 동안 구름과 숲이 내 얼굴을 비췄네.

소나무 시냇가 남쪽 언덕엔 모두가 숲이고

초가집 삼면은 모두 봉우리일세.

부질없이 장한 뜻 품고 긴 칼을 어루만지며

주린 창자 달래려고 작은 도시락을 찾네.

새해를 하례하는 시 한 수를 반갑게 얻고 보니

그 은의(恩義)가 산보다 중한 줄 비로소 알겠네.

 

不曾求飽但求安 十載雲林照我顔

松澗南頭皆樹木 草慮三面盡峯巒

空懷壯志彈長鋏 聊慰飢腸喚小簞

喜得賀正詩一首 始知恩義重丘山

Ⅲ-004) 24일. 천명(天明)과 헌(憲)․식(湜) 세 사람이 술을 가지고 찾아 왔다. 이날 눈이 내렸다.

세 사람이 봄 눈을 밟으며

각기 술 한 병을 들고 왔네.

서로 반가워하며 아름다운 경치를 대하니

한 잔 또 한 잔일세.

한 평생 불평스럽던 기운을 다 털고 나자

시원한 가슴속에 한 점 티끌도 없네.

가볍게 날아드는 눈발이 자리 옆을 적시고

늦바람이 성긴 발 속으로 불어드네.

떨기에 나무에 쌓이는 모습 기이하니

눈에 가득한 숲과 동산이 모두 흰 옥매(玉梅)일세.

네 가지 일 갖춰 이 즐거움 얻었으니

시비(是非)와 우환(憂患)이 또 어디 있으랴.

그대는 듣지 못했던가! 자유(子猷)가 흥겨워했던 섬계(剡溪) 달밤에

손님과 주인의 이야기 칼날이 번개처럼 번쩍였고,

또 이소(李愬)가 군사를 거느렸던 채주(蔡州)의 밤에

군사들로 하여금 입에 자갈을 물렸었지.

눈 속에서 즐기던 이들 옛부터 많았건만

어찌 오늘 밤 우리들이 함께 취한 것 같으랴.

시를 지어 그대들의 두터운 뜻을 사례했건만

내 가슴에 무언가 슬픔이 남아 있네.

 

二十四日。天明․憲․湜三人携酒來訪。是日有雪。

三人踏春雪 各佩酒壺來

聊與對佳景 一杯仍一杯

 

蕩盡平生不平氣 湛然方寸無纖埃

輕飛片片入座側 晩風故向疎簾廻

縈叢惹樹斗奇絶 滿眼林園○玉梅

兼幷四事得斯樂 是非憂患安在哉

君不聞子猷乘興剡溪月 賓主談鋒如轉雷

又不聞李愬行兵蔡州夜 盡令士卒空含枚

雪裏閑忙古雖夥 豈如令夕共醉陶然一笑開

裁詩謝厚意 胸次有餘哀

Ⅲ-005) 29일 그믐날. 눈비가 많이 내리는데 눈병은 더해가고 무료하기에, 시를 지어 두세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세 수)

Ⅲ-005-01)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들 집이 고즈넉한데

하루 종일 부슬부슬 비만 내리네.

눈병이 심해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가슴이 답답하니 시만 읊는다네.

구름 속의 고니들이 대각(臺閣)에 가득하다 들은 듯하니

어찌 모래밭의 갈매기가 그물에 걸리랴.

봄의 조화로 젊음을 빌리고 싶어

이 노쇠한 몸을 쓸어서 양춘 화기(陽和)에 부치네.

Ⅲ-005-02)

초봄의 경치를 어느새 보내고 나서

좋은 때가 얼마나 있는지 또 물어보네.

한 번 가버린 젊은 시절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니

삼월이 될 때마다 시만 읊는다네.

연기에 둘러싸인 언덕 버들은 누런 실을 흔들고

얼음 녹은 시냇물에는 푸른 비단이 일렁이네.

놀 때가 되면 반드시 기억하리라

눈 개고 바람 맑은 날이 언제인지를.

Ⅲ-005-03)

잘되고 못되는 숱한 일들을 눈앞에 겪고 나니

인생에 즐거운 일이 많다고는 할 수 없네.

옹졸한 꾀로선 부귀공명을 이룰 수 없는데다

환란을 당하면 취해 읊기도 어려웠네.

들사람 흥은 봄을 만나 술처럼 더해지고

세상 정은 날이 갈수록 비단처럼 엷어만 가네.

푸른 도롱이 푸른 부들 복사꽃 물에

산음(山陰)의 장지화(張志和)를 잊기 어렵네.

 

二十九晦日。雨雪大作。因眼疾甚無聊。以示二三子(三首)。

郊居寂寂絶經過 終日霏霏雨雪多

病眼朦朧休顧望 幽懷壹鬱但昑哦

似聞雲鵠盈臺閣 那見沙鴗到網羅

欲與春工賭强壯 掃予衰老付陽和

 

初春光景轉頭過 且問良辰有幾多

一去少年無更返 每逢三月可淸哦

烟籠岸柳搖黃線 氷釋溪流漾碧羅

行樂及時須記取 雪晴風日轉暄和

 

幾許榮枯眼底過 浮生樂事未言多

功名末可成迂計 憂患難應入醉哦

野興逢春濃似酒 世情隨日薄如羅

綠蓑靑蒻桃花水 苦憶山陰張志和

Ⅲ-006) 김해(金海) 선달(先達) 신맹경(申孟卿)에게 부침

늙어가며 이따금 옛날 놀던 일이 생각나

다락에 기대어 남쪽 바라보며 그대 모습을 그리워하네.

팔 년 동안 영남에선 소식조차 없어

천리 멀리서 그리워하는 마음을 저 달만 알고 있네.

 

寄金海辛孟卿先達

老去時時念昔遊 倚樓南望慕淸儀

八年嶺外無音信 千里相思月獨知

Ⅲ-007) 내가 불행히 일찍 아내(주부 主婦)를 잃고 의지할 데 없는 아이들을 위해서 홀아비로 지낸 지가 지금까지 21년이나 되었다. 이제 자식들 혼사(婚事)가 끝나 모든 염려가 다 없어져, 시 한 수를 지어 스스로를 위로한다.

어미 잃은 아이들을 눈 앞에 두고서

궁박한 생활을 분수로 여긴 지가 이십여년일세.

시렁 위에 쌓인 책 천 권만 알았을 뿐이지

주머니 속에는 돈 한 푼 없어도 마음 안썼네.

늙도록 새살림할 대책 세우지 못하고

남은 생애 부질없이 옛 인연을 그리워했네.

이젠 자식들 시집 장가도 다 끝내 여한 없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저승길 향해도 되리.

 

余不幸早失主婦。慮迷息失所。索然守鱞。迨今二十一年矣。卽今婚嫁已畢。稍弛念慮。故作詩一首以自貽。

失母兒童在眼前 固窮知分十十餘年

但知架上堆千卷 也任囊中欠一餓

到老不成新活計 殘生空憶舊因綠

已終婚嫁無遺恨 方得安然向九泉

Ⅲ-008) 소암(笑巖)의 시권에 쓰다 (오사 悟師)

높은 바위 만 길이 물결같이 푸르니

금빛 두타(頭陁)가 눈에 더욱 환해라.

하하 웃고 일어나는 그 경지 기특하니

삼천 대천 세계가 일시에 평평해지네.

 

書笑巖卷(悟師)

崎巖萬仞靑如澱 金色頭陁眼更明

要識呵呵奇特處 大千沙界一時平

Ⅲ-009) 늦봄. 병에서 일어남

붉은 꽃들은 다 없어지고 버들은 그늘을 이뤘는데

푸른 채마밭에 묵은 비가 개었네.

병으로 누웠느라고 봄이 지나가는 것도 모르다가

억지로 지팡이에 기대 꾀꼬리 소리를 듣네.

 

春晩病起

千紅掃盡柳成陰 綠滿蔬畦宿雨晴

病臥不知春事老 强扶藜杖又聞鸎

Ⅲ-010) 3월 29일

봄빛도 오늘 아침이면 다하니

동군(東君)께서는 어디로 가시나.

매화 향기는 강가 길에서 거두고

버들 빛은 들집 사립을 비추네.

서운한 정이야 어찌 다하랴만

당당한 그 자취를 붙잡을 수 없네.

몇 번이나 다시 만났던가

그대 보내는 술잔을 또다시 드네.

 

三月二十九日

春色今朝盡 東君安所之

梅香歛江路 柳色䁐郊扉

悒悒情何限 堂堂迹未追

重逢知幾許 又擧送君卮

Ⅲ-011) 스스로 읊음

세상에 부쳐 사는 몸이 뜬 것만 같아

하늘과 땅도 하나의 여관일세.

책을 뒤적이며 예와 지금을 느끼고

생각을 흩으면서 추위와 더위를 겪네.

백발은 참으로 쓸쓸한데

청춘은 또 어디로 돌아갔나.

평생에 잘한 것 하나 없으니

늙어서 누가 너를 가엾다 하랴.

 

自詠

寓世身如浮 乾坤爲逆旅

披書感古今 散慮經寒署

白髮政飄蕭 靑春又歸去

平生無一良 老至誰憐汝

Ⅲ-012) 남쪽 시내

흐르는 물에 가까이 앉아 맑고 시원함을 즐기니

깨끗한 물결 시냇가에 봄빛이 가득하네.

물을 움켜쥐고 싶어 차마 씻지를 못하겠네

내 갓끈은 티끌 하나도 없건만.

 

南溪

臨流弄淸快 淨淥滿溪春

可攬不堪濯 我纓無一塵

Ⅲ-013) 가을 집 병중에서

일찍이 돈하고는 오랫동안 절교(絶交)했으니

생애는 초가집 한 간으로도 넉넉하네.

누가 술을 사서 도연명(陶淵明)을 맞이하려나

스스로 시를 써서 맹교(孟郊)를 본받고 싶네.

누런 벼 이랑엔 가을비가 막 걷히고

푸른 솔가지엔 저녁 연기가 남아 있는데,

철 따라 나는 산물들이 내 늙음을 재촉하니

효험도 없는 처방을 병중에 내버렸네.

(韓子云云)

 

秋居病中

會與錢兄久絶交 生涯亦足一間茅

有誰齎酒邀元亮 欲自題詩拜孟郊

秋雨初收黃稻頃 暮雲猶在翠松梢

更看節物相催老 無效方書病裏抛

韓子云云

Ⅲ-014) 조(趙) 봉선(奉善)이 이백당(李栢堂)에게 준 시에 차운함 (이때 백당(栢堂)이 여강(呂江)의 안치(安置)에서 풀려나 돌아왔다)

장사(長沙)의 정황이 가볍지 않아

답답하게 두 해를 보냈으니,

발은 창주(滄洲)에 묶여 있어도

마음은 대궐 언저리를 달렸겠지.

처음부터 잘했으니 끝까지 잘할 테고

예전에 없었으니 앞으로도 없으리라.

금계(金鷄)가 내렸다는 소식을 반갑게 들었으니

고기가 시냇물에 있어야 할 줄 정녕 알겠네.

 

次趙奉善贈李栢堂詩韻(時栢堂呂江安置 遇免)

長沙情況重 鬱鬱再經年

迹滯蒼洲上 心馳紫闕邊

善終兼善始 無後亦無前

喜聽金鷄下 定知魚有川

Ⅲ-015) 또 짓다

대저 사내 대장부의 뜻은

젊은 시절에 공명을 이루는 것이니,

나가건 들어오건 분수에 넘지 않고

쓰이건 버림받건 시대에 맡길 뿐이네.

날랜 천리마는 남의 뒤가 되지 않건만

절름발이 염소가 어찌 앞설 수 있으랴.

바라건대 충의의 깃발을 잡고

그 배를 타고 은천(殷川)을 건너시게.

 

大抵男兒志 功名要壯年

行藏非分外 用捨在伊邊

逸驥不爲後 跛拜何敢前

願將忠義節 丹楫用殷川

Ⅲ-016) 또 짓다 (진정 陳情)

풍정(風情)이야 젊은 시절과 같건만

흰 머리털은 이미 늙은 나이일세.

구름 속에 묻힌 나를 잊고서

아침 해를 받는 그대를 기뻐하네.

높이 날아오르는 길이 여기 있으니

앞에 없었던 사업을 이루시게.

내 너무 쇠한 것이 부끄러우니

흘러가는 시냇물만 부질없이 탄식하네.

 

又(陳情)

風情如少日 雪髮巳殘年

忘我老雲裏 喜君朝日邊

翶翔當在此 事業更無前

○愧吾衰甚 悠悠嘆逝川

Ⅲ-017) 명암(明菴)의 시권에 쓰다 (오사晤師)

우뚝 높은 줄기가 총림(叢林)에 뛰어나

편히 앉아서 정․혜․심(定慧心)을 관(觀)하시네.

깨우친 달이 이미 둥글어 삼계(三界)가 환한데

미혹된 구름이 다 걷히니 여섯 창문이 어두워졌네.

공(空)도 아니고 색(色)도 아니며 안도 밖도 아니어서

멸함도 없고 태어남도 없으니 고금이 따로 없네.

암자에 사시면서 무슨 즐거움이 있으신가

앉고 누우며 줄 없는 거문고를 타고 논다네.

 

書明菴卷(晤師)

挻然高幹秀叢林 宴坐聊觀定慧心

覺月巳圓三界朗 迷雲盡卷六窓陰

非空非色非中外 無滅無生無古今

且問菴居何所樂 四威儀弄沒絃琴

Ⅲ-018) 본적공판(本寂空板) 첫 권에 씀

고요히 앉아 모든 생각을 다 잊었으니

담연하고 공적(空寂)한 것이 바로 진상(眞常)일세.

이 경지의 소식을 누가 말할 수 있으랴

천 이랑 맑은 못이 달빛을 띠었네.

 

書本寂空板首卷

靜坐無爲萬慮忘 湛然空寂是眞常

這般消息誰能說 千頃澄潭帶月光

Ⅲ-019) 인암(忍菴)의 시권에 쓰다

남들이 헐뜯건 말건 내버려두고

독약과 칼날로써 그 뜻을 옮기지 않네.

생사 없는 자비와 인내의 힘을 이미 얻었으니

도풍(道風)이 미묘함을 생각하기도 어렵네.

 

書忍菴卷

從他謗亦任他非 毒藥鋒刀志不移

旣得無生慈忍力 道風微妙固難思

Ⅲ-020) 오도(悟道) 고개를 오르면서

아침나절 오도 고개를 올랐네.

어찌하면 도의 뜻을 깨달을 수 있으려나.

가을 산 아름다운 경치를 이제는 알겠으니

서리맞은 단풍잎이 모자 끝을 비추네.

 

登悟道岵

朝日登臨悟道岵 悟如何道意無厭

秋山景槩今方覺 樹樹霜楓映帽簷

Ⅲ-021) 무너진 운대사(雲臺寺)

구름 봉우리 위로 오르고 또 오르니

몇 겹이나 될른지 가파르기도 하구나.

이끼 덮인 돌에 우연히 올라

구름 너머 종소리를 생각하네.

골짜기가 깊어 아침 햇볕이 모자라고

산이 높으니 가을 기운이 짙은데,

바람맞으며 무너진 절을 탄식하다가

긴 소나무에 말없이 기대었네.

 

廢雲臺寺

上上雲峯上 嵯峩第幾重

偶登封蘚石 猶想隔雲鍾

谷密朝陽欠 山高秋氣濃

臨風歎興廢 黙黙倚長松

Ⅲ-022) 국망(國望) 고개에서

푸른 벽이 우뚝 허공에 솟아

구름 연기 만리가 별천지일세.

하늘 모퉁이에서 가만히 송악(松嶽)을 바라보니

서기(瑞氣)가 영롱하게 임 계신 곳을 둘렀네.

 

國望岵

翠壁巖巖聳太虛 雲烟萬里是方輿

天隅隱約看松嶽 瑞氣蔥蔥擁帝居

Ⅲ-023) 상원사(上院寺)

단풍 숲에는 가을이 저물어 가고

솔숲 절에는 해가 가물거리네.

먼 골짜기와 하늘은 옛 그대로인데

다시 세운 불전들은 분명하구나.

나그네 마음은 물같이 맑고

스님 말씀은 구름같이 담박해,

고요히 앉아서 깊은 사색에 잠기니

풍경 소리가 들을 만하네.

 

上院寺

楓林秋欲晩 松寺日將曛

依舊洞天遠 重新殿宇分

客心淸似水 僧語淡如雲

靜坐發深省 風鈴聲可聞

Ⅲ-024) 서쪽 이웃집에 한 노파가 살았다. 다른 자식은 없고 딸 하나만 있었는데 창기(娼妓)가 되었다. 노파가 늙고 병들자 그 딸이 이웃들에게 빌어 부양했는데, 악부(樂府)의 부름을 받고 곧 길을 떠나게 되었다. 노파가 수족을 잃고 매우 슬피 통곡하므로, 그 소리를 듣고 이 시를 짓는다.

우는 소리가 슬프고도 원망스러워 천문(天門)에 들리니

모녀가 헤어진다고 밝은 해도 어두워지네.

성색(聲色)이 옛부터 한갓 즐거움에 이바지하니

태평시대 기상이 이 가운데 있을건가.

 

西隣有一婆。無他息。惟一女爲娼妓。婆老且病矣。其女乞諸隣而養之。卽爲樂府之所招。逼迫上道。婆失其手足。哭之甚哀。聞其聲而作之。

哭聲哀怨至天門 母女分離白日昏

聲色古來供一豫 昇平氣像此中存

Ⅲ-025) 원신(元信)의 시권에 씀(정사 淨師)

원(元)은 선(善)에 있어서 으뜸이고

신(信)은 도(道)에 있어서 으뜸일세.

스님은 이미 청정하시니

공적(空寂)이 바로 참된 근원일세.

 

書元信卷(淨師)

元爲善之長 信爲道之元

上人巳能淨 空寂是眞源

Ⅲ-026) 부정(副正) 이실(李實) 형을 곡함

사해가 모두 형제라고는 하지만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몇이나 되랴.

남과 사귀는 도가 언제나 친밀했지만

내게 유달리 사랑이 많으셨네.

맑은 눈물이 비오듯 흐르니

황천(黃泉)에 물결이 부풀었겠지.

 

哭李副正兄實

四海雖兄弟 知心能幾何

與人交道密 於我愛情多

淸淚紛如雨 黃泉漲水波

Ⅲ-027) 지난밤 꿈에 마을 사람(鄕黨) 수십 명과 함께 말을 타고 한 별장(郊居)에 이르렀다. 말에서 내려 평상에 앉았더니 옆에 있던 한 사람이 말했다. “뜻밖에도 그대의 영화스런 대우가 여기까지 이르렀구려.” 내가 그 말을 듣고 웃다가 깨어, 시 두 절을 지어서 스스로 꿈풀이한다.

Ⅲ-027-01)

나이가 쉰이 지난 늙은 미치광이가

조정 반렬에 붙는 것을 어찌 바라랴.

조물주가 사람을 놀리다니 참으로 괴이해라

일부러 꿈꾸게 해서 평상에 앉히다니.

Ⅲ-027-02)

꿈 속에서도 꿈 속의 몸을 가졌으니

허황한 것이 모두 참은 아닐세.

가엽구나! 백년 동안 뜨고 가라앉는 일들이

베개 위 바람에 날리는 나비의 꿈일세.

 

夜夢與鄕黨數十輩。騎馬到一郊居。下馬據胡床。傍有一人曰。不圖君之榮遇至於斯也。吾聞其語。發笑而覺。作二節以自解。

年過知命老疎狂 攀附犀聯豈可望

造物戱人良可怪 故令魂夢據胡床

 

夢裏猶將夢裡身 遽遽役役摠非眞

可憐百歲升沈事 一枕狂風蝴蝶春

Ⅲ-028) 김(金) 진사(進士)가 보낸 시에 차운하다 (세 수)

Ⅲ-028-01)

아아! 우리 도(道)가 때를 따라 동쪽으로 와

소매 떨치고 돌아와서 들 늙은이와 친구 되었네.

한 굽이 숲과 샘이 경치 좋은 곳이니

가을달에 봄바람 정말 좋구나.

Ⅲ-028-02)

젊은 나이에 명성이 하늘 동쪽을 흔들었으니

어찌 말 잃은 늙은이를 마음으로 기대하랴.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 오늘의 할 일이니

바라건대 그대는 소왕(素王)의 바람을 떨치시게.

Ⅲ-028-03)

푸른 시내 동쪽에 오두막을 사랑해

그대 아니면 그 누가 이 늙은이를 찾아오랴.

세상을 업신여기는 희황씨(羲皇氏)야 내 어찌 바라랴만

한갓 산 달과 솔바람을 사랑할 뿐일세.

 

次金進士所贈詩貂(三首)

眞嗟吾道與時東 拂袖歸來伴野翁

一曲林泉形勝處 也宜秋月又春風

 

早年聲價動天東 何用心期失馬翁

整頓頹網當是日 請君須振素王風

(來詩有塞翁失馬之意)

 

愛廬心遠碧溪東 非子誰能訪此翁

寄傲羲皇吾豈敢 只憐山月與松風

Ⅲ-029) 1386년(병인) 동짓날. 느낀 바를 원(元) 도령(都令)에게 보이다

지난 해 동지엔 눈에 꽃이 피더니

올해 동지엔 귀밑 털에 서리 내렸네.

해마다 조금씩 옛 얼굴 바뀌더니

거울에 비친 내 모습 보며 정신이 아득해졌네.

나 옛날 부지런히 책 읽을 적엔

충의를 지니고 임금을 섬길 뜻 품었지.

이 백성들 편안히 살게 하고

빛나는 수역(壽域)을 팔방에 넓히려 했었지.

내 생각 빗나가 하나도 효과 없었으니

쓸쓸한 내 행동이 이리도 처량하네.

일찍이 궁달(窮達)은 하늘에 달린 줄 알았으니

다락에 기대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탓하지 않으리라.

하늘과 땅도 하나의 한가한 물건으로 생각했으니

홀로 도롱이 입고 물가에서 놀리라.

구름과 안개 바람과 달은 절로 모습 바뀌는데

바둑 두는 초가집에는 평상에 책이 가득하네.

돌아보니 세상살이 얼마나 험난했던가

사람 바다에 미친 물결 소리가 들리는 듯하네.

명예를 다투고 이익을 구하느라 날마다 달리고 싸우는데

담요에 개미 끼고 등불에 나방 달려드는 것을 막기 어렵네.

머리 내밀고 나가기만 해 돌아올 줄 모르니

앞길을 살피지 않으면 위기가 닥쳐오네.

청렴하고 사양하던 기풍이 스러져 세상은 변해가니

옛 도(道)를 만회하려 한들 무슨 방법이 있으랴.

방어(魴魚)처럼 지쳐버려 법령은 해이해지니

만신창이(滿身瘡痍) 그 모습이 가슴 아프구나.

선비란 옛부터 자신을 많이 그르치는데

하물며 나같이 재주 변변치 못한 사람이랴.

풍진세상(風塵世上) 일들은 꿈에도 오지 않으니

호리병 속의 세월이 긴 줄을 이제야 알겠구나.

어제 저녁 눈을 보고서 세밑이 된 걸 알고 놀랐는데

오늘은 또다시 양기가 생기는 것을 보게 되다니,

양기가 만물과 화합해 다들 생동하는데

어찌 내게만 늙음을 재촉하나.

만물과 나는 이치가 같으니 어찌 나 혼자만 잃으랴.

걱정과 즐거움, 스러지고 자라는 것을 누가 구분하랴.

뜬구름은 피었다 스러지고 달도 차면 기우는데

인생살이 모이고 흩어지는 게 참으로 황당하구나.

그대는 일찍이 군자의 뜻을 지녔으니

마땅히 칼을 차고 광명을 향해 나아가리라.

온 세상이 나를 업신여겨도 그대만은 후대하여

언제나 시와 술 가지고 내 마음을 풀어 주었지.

그대는 보지 못했던가! 강가의 맑은 매화가 탐스런 열매를 맺어

복사꽃 오얏꽃이 번화한 곳에서는 미움 당하고,

또 보지 못했던가! 높은 산 차가운 소나무가 곧은 절개 품고서

눈과 서리 날리는 언덕에 늠름히 홀로 선 것을.

한 조각 봄빛이 운곡으로 찾아드니

봉황산 산빛도 푸르름이 더하네.

 

丙寅冬至感懷。示元都領。

去年冬至眼生花 今年冬至鬢帶霜

年年漸改舊容貌 照鏡對影神蒼茫

我昔辛勤讀書日 意將忠義事高陽

坐使斯民安所止 凞凞壽域開八荒

枉謀謬筭百無效 孑然行止何凉凉

曾知窮達在于命 倚樓休復嗟行藏

早作乾坤一閑物 獨携簑笠遊滄浪

雲烟風月自多態 碁局茅亭書滿床

回看世路幾飜覆 似聞人海波瀾狂

爭名求利日奔競 氈蟻燈蛾難可防

騈頭進步却忘返 末省前路危機當

廉讓風衰世以變 挽回古道知何方

魴魚赬尾法令弛 瘡痍滿眼堪悲傷

儒冠自古多誤巳 况予才智元無良

風塵世事不來夢 方信壺中日月長

昨晩看雪驚歲暮 今日又逢生一陽

陽和萬物動生意 胡乃與吾催老僵

物我同理何得喪 孰分憂樂並消長

浮雲起滅月圓缺 人生聚散誠荒唐

看君早有君子志 也宜劒佩趍明光

擧世薄我君獨厚 每將詩酒論心腸

君不見江路淸梅有佳實 見忌繁華桃李場

又不見○○寒松抱貞節 獨立凝巖霜雪崗

一片春光到耘谷 鳳凰山色添靑蒼

Ⅲ-030) 조(趙) 봉선(奉善)의 어머니 신(申) 부인(夫人)의 만사(挽詞)

백주(栢舟)의 맑은 절개가 고을에 으뜸이었는데

육십 평생이 한낱 꿈이 되고 말았네.

은택은 이미 방진(方進)의 신에 말랐고

눈물 줄기는 먼저 노래자(老萊子)의 옷자락을 적셨네.

슬픈 바람이 쓸쓸히 무덤에 불어오고

서늘한 달은 여전히 초가집을 비추네.

젊을 때 이웃에 살며 사랑을 받았던 내라

상엿줄 함께 잡고 영차(靈車)에 절하네.

 

趙奉善母申夫人挽詞

栢丹淸節冠鄕閭 六十餘年一夢餘

恩澤巳幹方進屨 淚行先濕老萊裾

悲風颯爾吹蒿里 凉月依然照草廬

我少居隣承撫養 偏乘此紼拜靈車

Ⅲ-031) 추전별감(推田別監) 권공(權公)이 목백(牧伯)에게 올린 시에 차운함

떠나갔던 구슬이 합포(合浦)로 되돌아오고

신기한 칼이 풍성(豊城)에서 나왔네.

은혜와 사랑이 온 백성에게 미치니

그 충성이 임금을 감동케 하네.

정치는 가을 물같이 깨끗하고

위엄은 새벽 서리같이 맑으니,

바라건대 그 높은 바람을 빌리고 싶네.

언덕 구석에 꾀꼴새 한 마리가 있으니.

 

次推田別監權公上牧伯詩韻

去珠還合浦 神劒出豊城

惠愛歸黎庶 忠誠感聖明

政如秋水淨 威若曉霜淸

願借高風便 邱隅有一鸎

Ⅲ-032) 섣달 그믐날 밤. 아우 자성(子誠)이 술을 가지고 왔기에 함께 이야기하다가 절구 한 수를 짓다

한 점 푸른 등잔이 자리를 비춰 밝은데

술잔은 끝이 없고 북두성은 기울어 가네.

아름다운 오늘밤에 아름다운 일 있으니

형제가 고금의 정을 서로 이야기하네.

 

除夜。子誠弟携壺來。共話作一絶。

一點靑燈照座明 酒盃無盡斗杓橫

可憐今夜可憐事 兄弟相論今古情

Ⅲ-033) 서방구품도(西方九品圖)가 이뤄지기를 원하는 시

서방(西方) 구품도(九品圖)를 그리려 하는 까닭은

임금께 축수하고, 나라 위해 복 빌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라네.

시주들이여! 모두 같이 태어날 원(願)을 세우는 데에

털끝만치라도 아끼거나 있고 없고를 따지지 마시게.

 

願成西方九品圖詩

欲畵西方九品圖 壽君福國濟迷徒

檀家各發同生願 母惜毫毛計有無

Ⅲ-034) 또 짓다

서방정토(西方淨土)는 미묘 장엄해서

그 차례가 십육관(十六觀)으로 나뉘어졌네.

바라건대 사람마다 피안(彼岸)에 오르시어

이 그림 이뤄지면 먼저 마음속으로 보소서.

 

西方淨土妙莊巖 次第相分十六觀

願共人人登彼岸 繪成先使眼中着

Ⅲ-035) 관찰사를 지낸 풍저창사(豊儲倉使) 이공(李公)이 다음과 같은 시를 보내왔으므로 내가 지난해 송정(松亭)에서 이별한 뜻을 추억하고 아울러 오늘의 회포를 서술하여 (차운 시를) 부쳐 드리다.

◎ 이공 (李公)

원성 원씨(原城原氏)는 역시 높은 사람이니

붉은 티끌 향해 자신의 참모습을 손상시키지 않네.

지난해 내 걸음은 한낱 이름만 취했을 뿐,

백성들에게 사랑 남기지 못해 부끄러워라.

 

Ⅲ-035-01)

공은 옛날의 현인에게도 부끄럽지 않으니

지조가 맑고 높으며 성품이 천진스럽네.

지난해 은혜와 위엄을 다 말하기 어려우니

어찌 우리 백성들에게 끼친 사랑이 없으랴.

Ⅲ-035-02)

정자 앞의 푸른 소나무는 몇 사람이나 겪었을까.

거짓된 사람과 참된 사람을 다 알고 있겠지.

헤어지는 마당에 사나이 눈물을 막을 수 없으니

낭관(郎官)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서일세.

Ⅲ-035-03)

붉은 티끌이 사람을 그르칠까 두려워

홀로 구름과 달을 즐기며 천진(天眞)대로 살아간다오.

신야(莘野)에서 보습 하나로 살며 다른 일 없으니

다만 이 몸이 요순(堯舜)의 백성 되기를 원할 뿐일세.

Ⅲ-035-04)

평생에 걱정이라곤 남을 몰라보는 것 뿐

골짜기 어구에서 밭 갈며 자진(子眞)을 본받네.

그대의 진중하신 뜻에 깊이 감사하노니

숲 아래 한 백성까지 잊지 않으셨구려.

 

前按部豐儲倉使李公寄詩云。

原城元氏亦高人。不向紅塵損我眞。

去歲吾行徒取愧。○無遺愛在斯民。

僕追記去年松亭拜別之意。兼敍所懷以寄呈。

知公不愧古賢人 志操淸高性卽眞

去歲恩威難盡說 豈無遺愛在吾民

 

亭畔蒼松閱幾人 應知有膺與其眞

臨離未禁男兒淚 不爲郎官只爲民

 

却恐紅塵枉活人 獨將雲月養天眞

一犁莘野無餘事 但願身爲高舜民

 

平生只患不知人 谷口躬耘効子眞

深感我公珎重意 未忘林下一遺民

Ⅲ-036) 1387년(정묘) 정월 7일(인일 人日, 두 수)

Ⅲ-036-01)

오늘 아침이 인일(人日)인데

바로 입춘(立春) 전날일세.

역수(曆數)로는 비록 새해지만

풍광(風光)은 아직도 지난해일세.

눈발은 꽃길 밖에 흩날리고

연기는 가시 울타리에 젖었는데,

비단을 끊는 것은 내 일이 아니라서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하늘에 맡겼네.

Ⅲ-036-02)

가랑눈이 새벽에 개이더니

차가운 날씨에 나무가 얼어붙었네.

사립문에 사람 자취 끊어졌지만

소나무 언덕에 새 소리 들리는구나.

출세할 생각은 이미 없어졌지만

임금 은혜에 보답하기가 끝내 어렵구나.

해가 갈수록 이 마음 잊지 못해

부질없이 술항아리를 마주하였네.

 

丁卯年人日(二首)

今朝是人日 正在立春前

曆紀雖新歲 風光尙去年

雪飄花逕外 烟濕棘籬邊

剪彩非吾事 榮枯付上天

 

微雪曉初霽 天陰木稼繁

柴門人迹絶 松塢鳥聲喧

旣失謀身計 終難答聖恩

年來聊復爾 空對一匏樽

Ⅲ-037) 환원회사(還源廻師)의 시권에 씀

처음이 없는 그때부터 아득히 비추면서

담담하게 성인(聖人)의 태(胎)를 길러 왔네.

고즈넉한 광명의 경지를 알아둘지니

구름 흩어진 푸른 하늘에 개인 달이 나타난다네.

 

書還源迴師卷

返照茫茫無始來 湛然長養聖人胎

要知寂寂廻光處 雲散靑空霽月開

Ⅲ-038) 명암(明菴) 총(聰) 스님의 시권에 씀

영명(靈明)한 한 알의 구슬로써

여래장(如來藏)을 더듬어 얻네.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닌데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삼광(三光)이 그 빛을 가리우고

육합(六合)에 밝은 광명이 통하네.

그 이유를 물으려 하자

스님께서 손바닥을 어루만지네.

 

書明菴聰禪者卷

靈明一顆珠 探得如來藏

非色又非空 無名亦無相

三光掩彩華 六合通輝朗

欲問其所由 上人還撫掌

Ⅲ-039) 정암(貞菴) 신충(信忠) 시자(侍者)의 시권에 씀

소나무와 잣나무가 눈 속에 홀로 푸르러

총림(叢林)의 옛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네.

이미 참마음으로 진실한 도를 행하니

악마와 외도가 어찌 그 문정(門庭)을 엿보랴.

 

書貞菴信忠侍者卷

雪中松栢獨靑靑 扶植叢林舊典刑

旣把眞心行實道 有何魔外覬門庭

Ⅲ-040) 배웅

스님의 몸은 구름 같아서

바람처럼 머무는 곳이 없네.

마음 가짐은 충직하고

몸가짐도 매우 견고하네.

그 까닭을 물었더니

웃기만 하고 말하지 않네.

스님이 말 없는 게 아니라

가벼이 대답하지 않기 때문일세.

한 평생 구름과 물 사이에

쾌활하고 청한하게 즐기시네.

높은 발자취를 따르기 어려운데

깊은 산 안개 속으로 다시 들어가네.

 

送行

上人身如雲 飄然無所住

飾心以忠直 志操大堅固

問之所以然 粲笑言不吐

上人非無言 不輕所答故

平生雲水間 快活淸閑趣

高蹤難可追 更入千山霧

Ⅲ-041) 환희사(歡喜寺) 당두(堂頭)의 시에 차운함 (네 수)

Ⅲ-041-01)

일이 많은데다 병까지 많아

근래 사람답지 못한 게 부끄러워라.

형의 시 한 수를 얻고 보니

다시 정신이 새로워지네.

Ⅲ-041-02)

오랫동안 티끌 세상에 나그네 되어

물 구름 속에 사는 사람을 늘 부러워했네.

머지 않아 옷깃 떨치고 일어나

서로 따르며 정신을 길러보려네.

Ⅲ-041-03)

천종(千鍾) 오정(五鼎)의 부귀도

어찌 구름에 누운 사람만 하랴.

날마다 하는 일이 모두 착하니

내 마음을 부지하는 그것이 정신일세.

Ⅲ-041-04)

한적한 산당(山堂)이 고요하니

아마도 속세 사람은 드나들지 않겠지.

흰 구름이 날아와 친구가 되니

참으로 심신을 즐겁게 하네.

 

次歡喜堂頭詩韻(四首)

多事仍多病 年來愧不人

得兄詩一首 聊復暢精神

 

久爲塵土客 長羨水雲人

早晩拂衣去 相從好養神

 

千鍾五鼎貴 那似臥雲人

日用皆爲善 扶持是有神

 

閒寂山堂靜 必應無外人

白雲來作伴 聊與可怡神

Ⅲ-042) 투공(透空) 잠(岑) 스님의 시권에 씀

언제나 같은 흰 구름 속에

허공에 뜬 푸른빛이 밝기도 하네.

신령스런 빛이 통하는 곳에

사해(四海)가 함께 태평하구나.

 

書透空岑上人卷

依舊白雲裏 浮空翠色明

靈光通徹處 四海一時平

Ⅲ-043) 배웅

짚신 신고 바랑 메고 행전(行纏)을 두른 뒤에

동쪽과 서쪽 만리 하늘에 뜻을 두었지.

회암(檜巖)의 바윗길을 다시 향하는데

지팡이 하나로 온 산천을 휘젓네.

 

送行

草鞋霞衲布行纏 志在東西萬里天

更向檜巖巖下路 一條笻杖抹山川

Ⅲ-044) 홍산회사(弘山恢師)의 시권에 씀

비 개인 뒤 맑은 빛이 먼 하늘에 이어져

골짜기마다 봉우리마다 하나하나 조회하네.

옛도 없고 지금도 없어 바뀜이 없으니

어떠한 겁화(劫火)도 사를 수 없네.

 

書弘山恢師卷

晴光遠接塞天遙 萬壑千峯一一朝

無古無今無變易 假饒劫火未能燒

Ⅲ-045) 빗속에 생각나는 대로 읊음

비바람 쓸쓸해 초당을 닫았는데

고즈넉한 생각은 한이 없구나.

시는 흥이 나서 붓을 잡았지만

술은 즐겁지 않아 잔을 못 들겠네.

귀밑 털은 시름이 많아 온통 눈 같은데

마음은 오랜 병에 식은 재 같네.

지난해 복사꽃이 다 피지 않았는데

남은 봄추위가 갔다가 다시 오네.

 

雨中卽事

風雨蕭蕭掩草萊 寂寥情思固難裁

詩能遣興能操筆 酒不成歡不擧杯

鬢爲愁多渾似雪 心因病久巳如灰

去年桃塢花全末 强半春寒去却來

Ⅲ-046) 3월 상사일(上巳日). 느낌이 있어 원(元) 소경(少卿)에게 부침 (네 수)

Ⅲ-046-01)

숲이 파래지면서 봄 단장을 하고

맑은 구름 가벼운 바람에 하늘도 새로워지네.

중원(中原)의 이 시절을 멀리서 생각하니

물가에 풀 밟는 사람이 얼마나 모였을까.

Ⅲ-046-02)

사심 없는 비와 이슬이 한창 봄이고

깊은 골짜기 평평한 언덕도 한결같이 새롭네.

도덕의 높은 은혜도 이와 같건만

어찌 걱정과 즐거움은 사람마다 다른가.

Ⅲ-046-03)

한 평생 오똑히 살며 여러 봄을 겪었건만

지금도 부끄러움이 언제나 새롭네.

양쪽 귀밑이 온통 희어졌는데도

내 몸은 아직 하등(下等) 인간을 면치 못하다니.

Ⅲ-046-04)

백년 동안 잘 살건 못 살건 한낱 꿈인데

거울 속에 더 늙어졌다고 슬퍼하지 말게나.

그대여! 모름지기 꽃구경 약속을 만들지니

한 고을에 마음 같은 이가 몇 사람 되지 않는다네.

 

三月上巳有感。寄元少卿(四首)。

樹林深翠欲粧春 雲淡風輕天氣新

遙想中原此時節 水邊多少踏靑人

 

無私雨露是靑春 窮谷平原一樣新

道德尊恩還若此 乃何憂樂不均人

 

兀兀吾生度幾春 到今慙愧一何新

簫簫兩鬂全垂白 末免身爲下等人

 

百歲榮枯一夢春 莫悲衰色鏡中新

請君須辦看花事 一邑同心不數人

Ⅲ-047) 각원(覺源) 선사(禪師)가 법화경(法華經)을 강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게송(偈頌)을 지어서 내게 보여 주었으므로 이에 화답해 절구 세 수를 지어 바침

◎ 각원선사(覺源禪師)의 게송(偈頌)

공자 같은 성인이 비록 보살(菩薩)이지만

세속 진리의 문(世諦門)을 이룩하였네.

그 한 마디 금구(金口)의 말씀이

끝없는 바다를 건널 수 있네.

Ⅲ-047-01)

내 들으니 우리 선사(禪師)께서는

같은 유학(儒學)의 후신이라,

교문(敎門)이야 조금 다르지만

본성을 다루는 근본은 마찬가질세.

Ⅲ-047-02)

미혹을 가리키고 몽매(蒙昧)를 깨우쳐

일찍이 큰 도사(導師)가 되셨네.

묘한 법 펼치시는 걸 자세히 들으니

비가 사심없이 적시는 것 같네.

Ⅲ-047-03)

화택(火宅)에 세 수레를 마련해 두고

모두 이끌어 삼보(三寶)에 귀의케 하네.

나도 이제 전진하기 어려우니

궁한 자들은 의심하고 두려워하리.

 

禪師覺源講法華經。作一頌示予云。

孔聖雖菩薩 猶成世諦門

一言金口說 能度海無邊

和成三絶呈似。

聞說吾夫子 儒同之後身

敎門雖少異 治性本同倫

 

指惑開蒙昧 嘗爲大導師

諦聞宣妙法 如雨潤無私

 

火宅設三車 引他歸寶所

我今難進前 窮子懷疑懼

Ⅲ-048) 신륵사(神勒寺) 스님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 고암(杲菴)이 게송(偈頌)을 보내왔으므로, 이 시를 받들어 화답함.

◎ 고암(杲菴)의 게송(偈頌)

수미산주(須彌山主)가 감통하여

마디 없는 가지[枝] 하나를 내려 주었네.

수명이 달 같아서 길이 늙지 않으니

주장(柱杖)으로 잡고서 마음대로 휘두르리.

Ⅲ-048-01) 앞의 게송을 차운함

나는 여러 법을 전혀 모르니

어찌 하늘이 가지 하나 내려 주시길 바라랴.

허깨비 같은 이 세상에 다 상(相)이 있으니

바라건대 인자한 가호(加護)로써 무위(無爲)를 가르쳐 주소서.

Ⅲ-048-02) 고암(杲庵)을 위한 노래(頌)

구름 걷힌 하늘빛이 바다에 닿았는데

태양이 북두성 남쪽에 날아오르네.

밝게 통하는 그 광명은 안팎이 없으니

억만 건곤(乾坤)이 바로 하나의 암자일세.

 

神勒和尙國一都大禪師杲庵寄頌云。

須彌山主感通知 降賜一條無節枝

壽等蟾輪長不老 能將柱杖任施爲

奉答云。

我於諸法摠無知 豈意皇天降一枝

如幻世間皆有相 願垂慈護指無爲

(右次前頌韻)

 

雲捲天光接海涵 太陽飛上斗杓南

晃然通徹無中外 億萬乾坤卽一菴

(右訟杲庵)

Ⅲ-049) 새 고사리를 먹다

오늘 아침에 어떤 손님이 초가집에 찾아왔네.

새로 캔 고사리가 작은 광주리에 가득하네.

연하게 무쳐 먹으니 봄 맛이 느껴져

삼킨 뒤에도 그 향기가 어금니에 남아 있네.

 

食新蕨

今朝外客到茅堂 新採兒拳滿小筐

軟煮方知春有味 啖終牙齒有餘香

Ⅲ-050) 판서(判書) 정을산(鄭乙産)의 아내 신군군(辛郡君) 만사(挽詞) (네 수)

Ⅲ-050-01)

한 평생 현숙한 자질이 초란(椒蘭)을 타고 나셔

온 고을에 으뜸가는 부덕(婦德)을 갖추셨지.

사십 구 년만에 너무 빨리 돌아가셔

백천(百千) 삼매(三昧)로도 붙들기 어렵구나.

텅 빈 규방엔 원앙(鴛鴦)이 외롭고

외짝 베개엔 비취(翡翠)가 차가워라.

우리들만 슬퍼하는 게 아니라

흰 구름 흐르는 물도 모두 슬퍼하네.

Ⅲ-050-02)

사천(沙川) 시냇가를 다시 돌아보니

물빛과 솔바람 소리가 슬픔을 함께 부르네.

만물은 그대로건만 사람은 떠났으니 생각은 끝이 없는데

하늘 높고 땅 잠잠하니 어디 가서 물으랴.

항아(姮娥)는 다시 돌아가 월궁(月宮)에 머물고

왕모(王母)도 선부(仙府)로 돌아가 노니시겠지.

가군(家君)께는 슬퍼 마시라 전해 주소서.

노년이신 어머님께서 남쪽 고을에 계신다고.

Ⅲ-050-03)

희디흰 구름 사이의 달이고

푸르고 푸른 눈 속의 소나무일세.

남편을 도와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하고

친족들과 화목하여 환한 얼굴 보였네.

난새는 거울 속에 그림자가 끊어지고

기러기는 진흙 위에 발자국을 남겼네.

최질(縗絰)이 한 항렬이나 남아 있으니

어찌 뒤따를 사람 없을까 걱정하랴.

【부인에게 뒤이을 아들이 없어, 조카딸을 양자로 삼아 상주(喪主)가 되게 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Ⅲ-050-04)

정숙한 모습은 규방의 모범이고

부드러운 덕은 부녀다운 위의를 갖췄는데,

하루 아침 바람에 나무가 꺾어지니

온 골짜기 물과 구름이 슬퍼하네.

꽃이 떨어지니 봄 얼굴이 암담해지고

연기가 엉키니 새벽빛이 더디네.

처량한 만가(挽歌)도 이제는 다 끝났으니

묵은 자취를 다시는 찾을 길 없네.

 

判書鄭乙産妻辛郡君挽詞(四首)

平生淑質禀椒蘭 德冠鄕閭婦德完

四十九年歸去速 百千三昧挽留難

空閨寂寂鴛鴦冷 隻枕悠悠翡翠寒

不獨吾儕多慘感 白雲流水摠悲歎

 

沙川川上再回頭 水色松聲共喚愁

物是人非思罔極 天高地黙問何由

姮娥更返月宮住 王母復歸仙府遊

爲報家君休痛甚 老年慈母在南州

 

皎皎雲間月 蒼蒼雲裏松

相夫登顯位 睦族示雍容

鸞絶鏡中影 鴻留泥上蹤

一行縗絰在 何患後無從

(夫人無嗣。侄女作養子主喪故云)

 

肅整爲閨範 柔和著婦儀

一朝風木撼 滿洞水雲悲

花謝春容淡 烟凝曉色遲

挽歌悽巳斷 陳迹更難追

Ⅲ-051) 옛 뜻

백호산(白虎山) 꼭대기에 소나무 한 그루

추위를 잊으며 천년 절조를 홀로 지켰네.

더러운 냄새와 꽃다운 향내를 얼마나 겪었기에

늙은 줄기가 반만 남은 채로 옛길에 의지해 서 있나.

 

古意

白虎山頭松一樹 凌寒獨抱千年操

幾看遺狊與流芳 老幹半槮依古道

Ⅲ-052) 무정(無淨) 일(一) 스님의 시권에 씀

스님의 행실은 아란야(阿蘭那)인데

고요한 마음은 순야다(舜若多)가 아닐세.

이러한 삼매(三昧) 바다를 이미 얻었으니

원융(圓融)은 둘도 아닌 본체 마하(摩訶)일세.

 

書無淨一禪者卷

上人行是阿蘭那 寂靜心非舜若多

旣得如斯三昧海 圓融不二體摩阿

Ⅲ-053) 허주(虛舟) 해(海) 스님의 시권에 씀

흐름을 따르건 거스르건 어찌 길 잃은 나루랴.

몇 차례 봄이나 달빛 싣고 돌아왔던가.

하루 종일 나루에 한가롭게 놓아 둔 것은

저 중생들을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일세.

 

書虛舟海禪者卷

隨流返流豈迷津 載月歸來問幾春

盡日渡頭閑自放 欲令含識免沈淪

Ⅲ-054) 여정(驢井) 해(海) 스님의 시권에 씀

동그란 눈에 쫑긋한 귀로 봄 풀에 배가 부른데

마주한 맑은 샘물에서 한 줄기 신령한 물이 흘러나오네.

이 샘물이 흘러가는 끝을 물으신다면

흐르는 물이 달빛 띠고서 넓은 바다에까지 닿는다오.

 

書驢井海禪者卷

凝眸聳耳飽春草 相對澄澄一派靈

若問這邊端的處 源流帶月接滄溟

Ⅲ-055) 나옹(懶翁)의 영정에 찬함

Ⅲ-055-01)

독한 마음과 웅혼한 간담으로 연경(燕京)에 들어가

호승(胡僧)의 독한 입을 전수받았네.

독한 입과 독한 마음이 하나 되는 곳에

동한(東韓)의 해와 달이 서곤(西坤)을 비추리.

Ⅲ-055-02)

지공(指空)을 뵙고 진수를 얻어

참신한 칼날이 다시 빛을 번쩍였네.

해가 부상(扶桑)에서 나와 두루 비추니

그 남은 빛이 한 폭의 그림일세.

 

讚懶翁眞

毒心雄膽入于燕 强被胡僧毒口宣

毒口毒心相契處 東韓日月照西坤

(胡僧指空也)

 

叅見指空得髓 斬新鋒燄發硎

日出搏桑照遍 餘輝一幅丹靑

Ⅲ-056) 서(徐) 선생(先生)이 살구를 보내 고마워하다

오랜 가뭄 끝에 붉은 구름이 둘려

더위가 위세를 부리며 작은 다락을 누르는데,

아름다운 과일이 식탁에 오르니

그윽한 향내가 온 자리에 가득하네.

금 같은 알맹이가 손을 떠나자마자

얼음 알맹이가 벌써 목구멍에 들어왔네.

시원한 마음으로 고요히 생각하니

이 무거운 은혜를 갚기 어렵구나.

 

謝徐先生惠杏

挾早彤雲遍 炎威逼小樓

飣槃佳果到 滿座暗香浮

金彈纔離手 氷丸巳入喉

洒然懷抱靜 此惠重難酬

Ⅲ-057) 목백(牧伯) 서공(徐公)의 향학(鄕學) 방문

우리 공께서 여가를 틈타 서생들을 찾아오시니

이 나라가 태평성대인 줄 다시 알겠네.

공부자(孔夫子)께서도 어진 제자 만난 걸 기뻐하사

빙그레 웃으시며 남쪽을 향하셨지.

 

牧伯徐公訪鄕學

我公乘暇訪書生 方覺朝家更太平

夫子喜逢賢弟子 莞然徵笑向离明

Ⅲ-058) 좌망 (안자 顔子가 지체의 존재를 다 잊고 총명을 내 보내며, 육체를 떠나 지각을 다 버렸다. 그렇게 하여 큰 도에 통하였는데, 이것을 좌망 坐忘이라고 하였다.)

사체(四體)와 육진(六塵)을 다 내보내고

천만 가지 생각까지도 모두 끊었네.

물이 흐르건 바람이 불건 무슨 상관이랴

구름은 가도 자취 없고 달도 등한하기만 하네.

 

坐忘(顔子。墮支體。黜聰明。離形去智。通於大道。謂之坐忘)

四體六塵都放下 千思萬慮絶追攀

水流不管風簫灑 雲去無蹤月等閑

Ⅲ-059) 희이(希夷, 노자 老子가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희 希라 하였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 夷라 하였다)

원래 그림자도 메아리도 없이 허령(虛靈)한 덩어리인데

억지로 이름 지어 보고 듣는다 하네.

육근(六根)과 육진(六塵)을 거치지 않는 미묘한 곳은

환한 가을달이 바다를 비추는 그 광명이리.

 

希夷(老子。視而不見曰希。聽而不聞曰夷)

元無影響體虛靈 强自安名曰視聽

不涉根塵微竗處 皎然秋月照滄溟

Ⅲ-060) 세 가르침이 하나의 이치(三敎一理)라는 시와 서문

【서문】여여거사(如如居士)는 삼교일리론(三敎一理論)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 성인은 함께 나서 두루함이 있으니 바른 가르침으로 주장을 삼았다. 유교는 궁리진성(窮理盡性)으로 가르쳤고, 불교는 명심견성(明心見性)으로 가르쳤으며, 도교는 수진연성(修眞鍊性)으로 가르쳤다. 제가치신(齊家治身)과 치군택민(致君澤民)은 유교의 일이고, 장정양신(嗇精養神)과 비선상승(飛仙上昇)은 도교의 근본이며, 월사초생(越死超生)과 자리이인(自利利人)은 석가의 방편이다. 그러나 그 다하는 곳을 요(要)하면 처음부터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이로서 본다면 세 성인(聖人)이 가르침을 베푼 것은 오로지 치성(治性)으로 하였으니, 이른바 진성(盡性)이라든가, 연성(鍊性)이라든가, 견성(見性)의 도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 지극하고 맑고 맑은 곳으로 돌아가면 모두 하나의 성(性)이니 무슨 막힘이 있겠는가. 다만 세 성인에게는 각각 문호(門戶)가 있어, 뒤의 문도(門徒)들이 각각 종지(宗旨)에 의거하여 모두 자기를 옳게 여기고 남을 그르게 여기는 마음으로 속이고 헐뜯으니, 사람마다 가슴속에 세 교(敎)의 성(性)이 밝게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나귀 탄 사람이 다른 나귀를 탄 사람을 보고 웃는 격이니 참으로 안타깝다. 그래서 네 절구를 지어 거사의 뜻을 잇는다.

Ⅲ-060-01) 유교

사물을 따지고 몸을 닦으며 깊은 이치를 찾아내니

마음을 다해 성품을 알고 또 하늘을 아네.

이로부터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으니

개인 달이 밝아오고 맑은 바람이 불어오네.

Ⅲ-060-02) 도교

여러 묘체의 문이 깊고도 깊어

참된 기틀과 신기한 변화가 하늘에 응하네.

그 정기를 닦아서 곧바로 희이(希夷)의 경지에 이르면

물소리도 산 빛도 모두 함께 고요해지네.

Ⅲ-060-03) 불교

하나의 원융한 성품이 열 가지 묘리를 갖춰

시방 세계에 두루 법이고 하늘에 통하는 기운일세.

저 참다운 본체를 어떻게 말하랴

푸른 바다에 차가운 달이 아울러 해맑구나.

Ⅲ-060-04) 세 교리를 모아서 하나로 귀결시키다 (會三歸一)

세 가르침의 종풍이 본래 차이 없건만

옳고 그르다고 다투는 소리가 개구리처럼 시끄럽네.

한 가지 성품이라 모두 거리낌없으니

불교 유교 도교가 다 무엇이던가.

 

三敎一理(幷序)

如如居士三敎一理論云。三聖人同生有周。主盟正敎。儒敎敎以窮理盡性。釋敎敎以明心見性。道敎敎以修眞鍊性。若曰齊家治身。致君澤民。此特儒者之餘事。若曰嗇精養神。飛仙上昇。此特道家之祖迹。若曰越死超生。自利利人。此特釋氏之筌蹄矣。要其極處。未始不一。由此觀之。三聖人之設敎。專以治性。所謂盡之鍊之見之之道雖有小異。歸其至極廓然瑩澈之處。皆同一性。何有所窒礙哉。但以三聖人各有門戶。門之後徒各據宗旨。皆以是巳非人之心互相訿謷。殊不知各人胸中。三敎之性明然具在也。騎驢者笑他騎驢。良可惜哉。因寫四絶。以繼居士之志云。

 

格物修身窮理玄 盡心知性又知天

從玆可贊乾坤化 霽月光風共洒然

 

衆竗之門玄又玄 眞機神化應乎天

精修直到希夷地 水色山光共寂然

 

一性圓融具十玄 法周沙界氣衝天

只這眞體如何說 碧海氷輪共湛然

 

會三歸一

三敎宗風本不差 較非爭是亂如蛙

一般是性俱無礙 何釋何儒何道耶

Ⅲ-061) 윤유월

따가운 볕이 삼분(三分)쯤 사라졌으니

서늘한 날씨가 머지않아 기쁘구나.

천공(天工)이 더위에 시달리는 무리를 가엽게 여기신다면

보름쯤 더위를 더 물리쳐 주시겠지.

 

閏六月

畏景三分巳盡消 新凉一陣喜非遙

天工憫世趍炎輩 添却煩蒸十五朝

Ⅲ-062) 서쪽 기슭에 송정(松亭) 한 곳을 새로 세우다

낮은 산기슭에 작은 정자를 세우니

땅이 외져서 수양하기에 알맞네.

물 맑은 숲 밖에선 마음을 씻을 만하고

바람 지나가는 봉우리에선 귀를 기울일 만하네.

부슬비와 옅은 안개가 가까운 들판을 가로지르고

흰 구름과 푸른 산은 새 병풍을 둘렀네.

산열매가 막 익어 굶주림을 잊고

바위 샘이 차가와 갈증을 달랠 수 있네.

인간 세상이 언제나 시끄러움을 이제 알았으니

기러기 길이 멀고 아득함을 내 어찌 알랴.

늙어가며 내 평생 사업이 가엽구나.

두어 그루 소나무 그늘에 한 권의 경서뿐일세.

 

西麓。新開松亭一所。

短麓前頭築小亭 地偏端合養眞靈

水明林表心堪洗 風過峯巓耳可聆

疎雨淡烟橫近野 白雲靑嶂展新屛

療飢山果肥初熟 慰渴巖泉冷且冷

但覺人寰恒擾擾 豈知鴻路有冥冥

自憐遲暮平生事 數樹松陰一卷經

Ⅲ-063) 서(徐) 선생(先生)이 찾아와 주어 고마워하다

병으로 누워 무료한데다 불같은 날은 길기만 한데

그대의 행차에 술까지 가져와 정말 고맙네.

처량한 살림살이를 무엇으로 달래랴만

소나무 그늘에 시원한 의자 하나는 있다네.

 

謝徐先生見訪

臥病無聊火日長 感君軒騎載壺觴

凄凉活計將何慰 只有松陰一榻凉

Ⅲ-064) 비 내리는 밤 심정을 쓰다 (두 수)

Ⅲ-064-01)

열흘 잇달아 오랜 비가 아직도 개질 않아

처마에 듣는 빗방울 소리가 바람 따라 들려오네.

작은 거울에는 서리가 귀밑을 가득 덮고

낮은 등잔은 시름에 찬 내 모습을 비추네.

나 혼자 사람 안 만난다고 남들은 나무라지만

나는 남들이 내 이름 모르는 게 기뻐라.

티끌 세상에 나갈지 머물지를 끝내 결정치 못했는데

멀리서 닭 울음소리가 그치질 않네.

Ⅲ-064-02)

보리 갈려고 집집마다 개이길 바라지만

빗소리는 거듭 창문을 두드리네.

몸 바깥 일을 생각지 않고 분수를 따를 뿐이니

어찌 세상일이 마음을 괴롭히랴.

병든 사람하고 누가 이야기하길 좋아하랴

때를 알리는 그윽한 새만 저 혼자 이름 부르네.

어젯밤 뜨락 나무가 서늘해졌으니

섬돌의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이제 듣겠군.

 

雨夜書情(二首)

連旬久雨不曾晴 風送簷間點滴聲

小鏡雪華饒病鬢 短擏燈影照愁情

人譏我獨絶人事 我喜人無知我名

塵世去留終未決 蕭蕭不廢遠鷄鳴

 

蕎麥耕家共喜晴 不堪重作打窓聲

休思身外但隨分 何事世間皆稱情

遲暮病夫誰晤語 報時幽鳥自呼名

昨宵庭樹新凉至 又聽寒螿遶砌鳴

Ⅲ-065) 이 달 조정(朝廷)에서 대명(大明)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의복제도를 바꾸었는데, 일품(一品)에서 서관(庶官)과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각각 등급에 따라 달랐다. 이에 절구 네 수를 지어 기록한다

Ⅲ-065-01)

천자의 위엄이 바닷가까지 미쳐

의관 법제를 이미 선포하였네.

옛것 버리고 새 옷 입음이 어찌 그리 빠른지

외국 사람이 이제 중국 사람 되었네.

Ⅲ-065-02)

옛부터 삼한은 큰 나라를 섬겨

그 전례를 따라야 화를 입지 않는다네.

풍속과 교화가 중흥되는 날을 만나면

다른 지방이 모두 항복할 것을 비로소 믿으리라.

Ⅲ-065-03)

금 고리․은 띠가 허리 사이를 비추고

높은 모자에 둥근 동정이 어울리는구나.

엄숙한 제도같이 정치도 그렇게 된다면

이제부터 백성들 소망을 달랠 수 있으리라.

Ⅲ-065-04)

달인(達人)은 본래 시비를 뛰어넘으니

하늘 모자 구름 옷에 강과 바다를 띠로 띠었네.

칼을 어루만지며 다락에 올라 한바탕 웃으니

장한 기운이 하늘 끝까지 뻗치네.

 

是月。朝廷奉大明聖旨。改制衣服。自一品至於庶官․庶民。各有科等。作四節以誌之。

天子宣威及海濱 衣冠法制已敷陳

着新華舊何斯速 外國人爲中國人

 

自古三韓事大邦 從循典禮不蒙(犭+○)

得逢風敎重興日 方信殊方儘可降

 

金銀鈒帶映腰間 高預帽宜團領上

禮度嚴明政亦然 從玆足慰蒼生望

 

達人超出是非間 天帽雲衣江海帶

彈鋏登樓一笑開 慨然壯氣橫天外

Ⅲ-066) 환희사(歡喜寺) 당두(堂頭)가 보낸 시에 차운함

Ⅲ-066-01)

오늘 아침 병에서 일어나 잠시 눈썹을 펴고

갑자기 산에서 내려온 사람을 반가이 맞이했네.

세상 밖에서 보낸 편지가 너무 기뻐서

푸른 구름 향해서 아름다운 시를 읊었네.

 

Ⅲ-066-02)

무더위에 시달려 눈썹도 펴지 못하고

시원한 연못과 대(臺)를 못내 그리워했네.

사영운(謝靈運)의 나막신으로 고쳐서 신고

선탑(禪榻)에서 흰머리끼리 함께 시를 의논하세나.

 

次歡喜堂頭所贈詩韻

今朝病起暫開眉 忽見山人下翠微

喜得一封方外信 碧雲高詠惠休詩

 

身勞霾熱未伸眉 苦憶池臺暑氣微

擬欲重修靈運屐 鬂絲禪榻共論詩

Ⅲ-067) 조카 식(湜)이 유월 복숭아를 보냈기에 참외로 답함

병든 목구멍이 바싹 말라 먼지가 생기니

달고 신 맛을 찾은 지 한 달이 넘었네.

네 편지와 사랑스런 과일을 받고

씹어 먹을수록 내 정신이 상쾌해졌다.

언제나 유월이면 익기 시작하니

천년을 기다리지 않아도 그 맛이 새롭구나.

본래 경거(瓊琚)가 모자라니 무엇으로 보답하랴

동릉(東陵)의 참외 몇 개를 가는 사람에게 부친다.

【소평(邵平)은 동릉후(東陵侯)인데, 뒤에 청문(靑門)에서 오이를 심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동릉과(東陵瓜)라고 하였다.】

 

姪湜以六日桃見惠。以甛瓜爲答。

病喉乾燥欲生塵 爲索甛酸已四旬

得爾封緘施惠愛 欣予咀嚼爽精神

每當六月肥初熟 不待千年味更新

本乏瓊琚何以報 東陵數箇付來人

(邵平爲東陵侯。後種瓜靑門。人謂東陵瓜)

Ⅲ-068) 해동의 두 현인을 찬양함

Ⅲ-068-01) 전 총재(冢宰) 육도(六道)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

해동의 명성이 중원을 뒤흔들어

장막 속의 군사작전이 번거롭지 않았네.

충성스럽고 장한 마음은 산과 바다보다도 무겁고

이룩한 덕업은 하늘 땅처럼 컸네.

삼한의 기둥과 주춧돌처럼 공이 더욱 무거워

육도의 인민들이 비구름처럼 우러렀네.

하늘이 이 나라 사직을 붙드시려면

공의 수명이 곤륜산 같아지이다.

Ⅲ-068-02)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색(李穡)

북방 구름이 늘 태평한 기운을 띠고 있으니

이게 바로 명공(明公)이 할 일 다했기 때문일세.

두 손으로 일찍이 해와 달을 도왔고

한 마디 말씀이 바로 하늘과 땅을 정했네.

가슴에 가득한 지혜와 용맹으로 오로지 나라 위하니

한 시대 영웅들이 반나마 문을 메웠네.

두 조정을 드나들며 장수와 재상을 겸했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이룬 공업(功業)을 다 말할 수 없네.

 

海東二賢讚

前冢宰六道都統使 崔瑩

海東聲價動中原 帷幄軍籌簡不煩

忠壯心懷輕海岳 生成德業大乾坤

三韓柱石功彌重 六道雲霓望益尊

天爲我邦扶社稷 願令公壽等崑崙

判三司事

朔雲常帶太平痕 知是明公盡所存

雙手已曾扶日月 片言端合定乾坤

滿懷智勇專憂國 一代英雄半在門

出入兩朝兼將相 始終功業舌難論

Ⅲ-069) 육언(六言) 선대(扇對)를 읊다

사람들은 상원(上苑)의 복사꽃이

고운 볕에 흐드러지게 피는 걸 좋아하지만,

나는 동쪽 울타리의 국화꽃이

서리를 견디며 홀로 향내 발하는 것이 사랑스럽네.

 

自詠六言扇對

人憐上苑桃花 瀾漫繁開艶陽

我愛東離菊蘂 馨香獨發凌霜

Ⅲ-070) 참다운 느낌

조물주는 본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해

악한 자는 화를 받고 선한 자는 복을 받네.

아황(娥皇) 두 여인은 얼룩진 대나무를 만들었고

전씨(田氏) 세 사람은 붉은 가시꽃을 시들게 했지.

겨울 죽순(竹筍)과 얼음 잉어는 효성 덕분이고

영지(靈芝)와 서봉(瑞鳳)은 문명에 응한 것일세.

바라건대 당우(唐虞) 시대같이 어진 임금을 만나서

백성들 변하고 시대가 화합한 태평성대를 노래했으면.

 

眞感

造物由來感至誠 惡爲殃禍善休禎

娥皇二女成班竹 田氏三人瘁紫荊

冬芛氷魚緣孝懇 靈芝瑞鳳應文明

願逢仁聖唐虞世 民變時雍詠太平

Ⅲ-071) 가을비

가을비가 열흘이나 내려 친구들도 끊어졌으니

쓸쓸한 이 심정을 정말 견디기 어렵네.

멀리 두보(杜甫)가 긴 한숨 쉰 것을 생각하다가

한유(韓愈)가 세상에 미움받은 걸 이해하겠네.

대들보에 소리가 나니 제비가 떠나려는지

서재가 추워지니 파리도 달아나네.

밤 되면 바람 소리가 더욱 스산해

천 섬 시름 곁에 등잔불만 외롭네.

 

秋雨

秋雨連旬絶友朋 寂廖情思浩難勝

緬懷杜叟興長歎 且解韓公世所憎

聲近畵樑催別鷰 寒侵書榻脇癡蠅

夜來風作添蕭瑟 千斛愁邊一點燈

Ⅲ-072) 스스로 읊음 (두 수)

Ⅲ-072-01)

신세가 유유하다보니 온갖 느낌이 일어나는데

가을 장마가 그치지 않고 초가집 처마에 뿌리네.

눈 앞에 세상 일은 해마다 변해 가고

흰 머리털도 해마다 늘어 가네.

뒤집으면 구름 되었다가 엎으면 비가 된다니

무심히 뜨거움에 붙었다가 또 더위를 쫓아 가네.

바깥 사람이 잊혀진 곳을 찾으려 하면

실컷 먹고 바람 난간에 누워 낮잠을 자야 하리.

Ⅲ-072-02)

부귀는 오래 가지 못함을 일찍 알았으니

세상 정이 마치 음식에 소금 없는 것 같네.

시냇가 소나무와 잣나무는 지조를 지킬 만하고

숲 속의 나물과 토란도 염치를 기를 만하네.

바람과 달빛 맑을 때에 마음도 절로 한가하니

구름과 연기 좋은 곳을 내 어찌 싫어하랴.

산 빛이 사람의 일을 따르기 싫어해

초가집 처마에 마주서서 갈대밭을 비추네.

 

自詠(二首)

身世悠悠百感兼 秋霖不止灑茅簷

眼前時事年年變 頭上衰華日日添

却笑飜雲幷覆雨 無心附熱又趍炎

外人欲識忘筌處 軟飽風軒到黑甛(舌+甘)

 

富貴曾知未久淹 世情還似食無鹽

澗松亭栢堪爲操 溪蔌林芋可養廉

風月淸時心自放 雲烟好處意何厭

山光不肯隨人事 相對茅簷照葦簾

Ⅲ-073) 무문전사(無門全師)의 시권에 씀

모자람도 남음도 없는 성품이 저절로 원만하니

무슨 문과 자물쇠가 있고 가운데와 가장자리가 있으랴.

이 집의 풍격을 그 누가 엿보랴

동서남북 위아래가 텅 비어 넓고도 넓네.

 

書無門全師卷

無欠無餘性自圓 有何關鎖及中邊

此家風格誰能覰 六合空空政豁然

Ⅲ-074) 명산철사(明山澈師)의 시권에 씀

여섯 창문이 환히 트여 전체가 드러나니

미혹된 구름이 멀리 떨어진 줄을 비로소 믿겠네.

이곳이 바로 원통(圓通)의 참된 경계(境界)이니

천 봉우리 만 골짜기가 모두 뜬 빛일세.

 

書明山澈師卷

六窓虛豁體全彰 方信迷雲墮杳茫

此是圓通眞境界 千峯萬壑摠浮光

Ⅲ-075) 천중정췌사(天中正揣師)의 시권에 씀

참된 기틀을 바로잡아 스스로 재고 헤아리니

의천(義天)이 맑고 밝아서 신령스런 빛이 움직이네

이미 만물과 나를 같이 여겨 한 곳으로 돌아갔으니

동서남북 어디인들 치우침이 있으랴.

 

書天中正揣師卷

正把眞機自度量 義天澄朗動靈光

旣齊物我同歸一 不倚東西南北方

Ⅲ-076) 적봉(寂峰) 스님의 시권에 목은(牧隱)의 운을 빌려 지음 (두 수)

Ⅲ-076-01)

스님은 이미 바가바(薄伽婆)를 얻었으니

보리수 맑은 그늘에 가지 하나를 빌렸네.

고요한 안거(安居)에 뜻이 있는 줄 알겠으니

사람 바다에 일어나는 물결 소리를 듣기 싫으실 테지.

Ⅲ-076-02)

괴로움을 제도하고 자비를 일으킴이 노파 같아

일찍이 남가일몽(南柯一夢)에서 놀라 깨어났네.

한 덩어리 푸르고 고요한 그곳은

마음이 푸른 물결을 비추는 달빛 같다네.

 

書寂峯禪者卷(借牧隱韻, 二首)

上人叅得薄伽婆 祗樹淸陰借一柯

闃爾安居知有意 厭聞人海起風波

 

濟苦興悲似老婆 已曾驚破夢南柯

一堆蒼翠寥寥處 心似氷輪照碧波

Ⅲ-077) 동년(同年)인 김진양(金晉陽)과 이여충(李汝忠) 두 분의 편지를 받고

영외(嶺外)에서 온 편지는 값이 만금이니

물과 구름 천릿길을 찾아오기 어려웠네.

열어서 읽어보며 세 친구가 되었으니

십 년 동안 그리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위로 받았네.

 

得同年金晉陽․李汝忠兩公書

嶺外音書直萬金 水雲千里路難尋

開緘宛若成三友 償得懸懸十載心

Ⅲ-078) 참방(叅方) 가는 소암오사(笑巖悟師)를 배웅하면서 목은(牧隱)의 운을 빌려 지음

유한(有限)함으로 무한(無限)을 좇지 마시게.

편안히 앉아 허공을 바라봐도 할 수 있다네.

이제 떠나면 반드시 얻는 것 많으리니

집에 돌아와 설법할 때는 언제쯤 되시려나.

 

【 동파(東坡)의 시에 “다리 힘이 다할 때에 산이 더욱 좋아지니 유한한 몸으로 끝없이 달리지 말라.“고 하였다.】

 

送笑巖悟師叅方(借牧隱韻)

休將有限趂無涯 燕坐觀空可以爲

此去必應多所得 還家設法問何時

(東坡云 脚力盡時山更好 莫將有限趂無窮.)

Ⅲ-079) 유방(遊方) 가는 적봉원사(寂峰圓師)를 배웅함

이르는 곳마다 모두 적막한 봉우리(寂峰)이니

동서 만리에 길이 겹겹일세.

소매 떨치고 함께 떠나고 싶건만

구름 자취가 높고 높아서 따라갈 수가 없네.

 

送寂峯圓師遊方

到處依然是寂峯 東西萬里路重重

欲將拂袖同歸去 雲跡高高未可從

Ⅲ-080) 9월 3일. 어머님(慈親)의 휘일(諱日)이므로 환희사(歡喜寺)를 방문함

Ⅲ-080-01)

산길이 굽이굽이 감돌아드는데

짚신에 등 지팡이 한가한 걸음일세.

다행히 중양절(重陽節) 아름다운 때를 만나

반갑게 당두(堂頭) 대로형(大老兄)을 뵈었네.

봉우리 빛은 마치 산간(山簡)이 취한 것 같고

시내 빛은 백이(伯夷)의 맑은 마음 같구나.

숲새들도 지난번 노닐던 손님을 맞으려고

다헌(茶軒)에 가까이 날아와 정답게 지저귀네.

Ⅲ-080-02)

늦가을 한가한 틈에 육화(六和)를 찾으니

범궁(梵宮)이 황폐해져 지나는 객도 끊어졌네.

세상일에 인연이 적어 좋으니

기쁜 정이 절로 솟아남을 알겠네.

골짜기 벗어난 맑은 구름이 흰 비단처럼 날리고

산에 가득 떨어진 잎은 붉은 비단처럼 깔렸네.

모든 욕심을 잊고 물외(物外)에 오자

사람 바다에 떴다 가라앉는 중생들이 우습기만 하네.

 

九月三日。遊歡喜寺(因慈親諱日)。

路轉山腰平不平 草鞋藤杖稱閑行

幸因景迫重陽節 喜謁堂頭大老兄

岳色渾如山簡醉 溪光正似伯夷淸

暝禽爲迓曾遊客 飛近茶軒疑疑鳴

 

秋晩乘閑訪六和 梵宮寥落絶經過

爲憐世事塵緣少 始信歡情喜氣多

出洞晴雲飛素練 漫山脫葉剪紅羅

得來物外忘機處 笑殺浮沈人海波

Ⅲ-081) 머리 흰 네 늙은이(四皓)

네 늙은이(四皓)가 상산(商山)에 들어간 것은

본래 진(秦)나라 폭정을 피하기 위함일세.

향그런 계수나무 숲에 몸을 숨기고

푸른 소나무 골짜기에 생각을 흩었네.

그래도 세상 걱정하는 마음은 있어

한나라 태자를 위해 한 번 일어났지.

사람의 마음은 예나 이제나 다름 없으니

하늘의 이치도 헤아릴 수가 있네.

한 나그네가 연기와 노을 속에 늙었지만

장한 기운은 하늘에 가득 찼는데,

부질없이 채지가(採芝歌)에 맞춰

홀로 읊조리다가 홀로 술잔을 드네.

 

四皓

四皓入商山 本欲避秦虐

棲身香桂林 散慮翠松壑

亦有憂世心 一爲漢儲作

人心無古今 天理因可度

有客老烟霞 壯氣塞寥廓

空將採芝歌 獨詠還獨酌

Ⅲ-082) 늦가을에 품은 생각

세월이 흘러가니 몸도 따라 늙어

서리는 숲에 가득하고 눈은 머리에 가득하네.

잔 글씨를 억지로 읽느라 병든 눈을 비비고

새 술을 다시 걸러 마른 목을 축이네.

잎이 흩날리니 산 모습이 추워서 여윈 듯하고

구름이 걷히니 하늘빛이 개여 흐를 듯하네.

옛날이 가고 지금이 오니 모두 한 순간

서글피 피리 불며 높은 다락에 기대었네.

 

秋晩寓懷

年光身事儘悠悠 霜滿林園雪滿頭

强讀細書揩病目 更蒭新釀潤乾喉

葉飛山熊寒將瘦 雲捲天容霽欲流

古往今來同一瞬 慨然橫笛倚高樓

Ⅲ-083) 새벽에 일어나 읊음

산 방이 정말 고요해서

산 달 만이 어둠을 깨뜨려 주네.

일어나 앉아 닭소리를 들으니

밤 기운이 절로 맑아 오네.

양심이 이때 돋아나건만

빈 배에 닻을 매지 않아,

그 근원을 찾아가려 해도

너무나 넓어서 더듬을 길이 없네.

질곡(桎梏)을 잃을까 염려되어

잡았던가 놓았던가 자주 생각하는데,

어느새 하늘이 밝아

푸른 하늘은 담담하기만 하네.

 

曉起吟

山室正寥寥 山月破幽暗

起坐聽鷄鳴 夜氣自恬憺

良心從此萌 虛舟不繫纜

擬欲尋其源 浩汗無由探

將恐桎梏亡 操捨頻較勘

須叟天字明 碧空何澹澹

Ⅲ-084) 27일. 한산군(韓山君)의 초청을 받고 신륵사(神勒寺) 가는 도중에

서리 내린 숲 봉우리에 잎이 흩날리고

그늘진 골짜기에 햇빛이 희미하네.

채찍 하나에 여윈 말 타고 관산(關山) 길을 가노라니

시상(詩想)이 떠오르는데 바람이 옷에 가득해라.

 

二十七日。被韓山君召。向神勒寺途中作。

霜後林巒葉盡飛 天陰日色正喜微

一鞭瘦馬關山路 詩思悠悠風滿衣

Ⅲ-085) 아야니(阿也尼) 서쪽 강을 건너다

빨래하던 마을 처녀가 여울 가에 서서

“왜 물 흐르는 걸 지켜보느냐” 묻네.

네게 말해봐야 이 이치를 어찌 알겠느냐

가는 자 붙들기 어려움을 깊이 슬퍼해서라네.

 

渡阿也尼西江

洗衣村女立灘頭 問我奚爲看水流

報道汝何知此理 深嗟逝者固難留

Ⅲ-086) 도중에

석지령(釋智嶺)과 분지령(粉知嶺) 두 고개 사이

왼쪽에도 높은 산이고 오른쪽에도 높은 산일세.

홀연히 한 운유자(雲遊子)를 만나고 보니

몸은 한가해도 발자취 한가하지 못한 내가 부끄럽구나.

 

途中

釋智粉知兩嶺間 左高山亦右高山

忽逢一箇雲遊子 愧我身閑迹未閑

Ⅲ-087) 시골집

모래를 모아 섬돌 만들고 멍석으로 문을 달아

썰렁한 초가집 처마는 한낮에도 침침하네.

나라 근본이 이미 상했건만 누가 돌보랴

일찍이 무릉도원(武陵桃源)에 못 들어간 게 한스러워라.

 

村舍

聚沙爲砌席爲門 懸磬芽簷畫亦昏

邦本旣殘誰顧念 却嗟曾未入桃源

Ⅲ-088) 금당천(金堂川)

나뉘어진 경계가 옛부터 근원이 있어

시냇물 한가운데 건곤(乾坤)이 갈라졌네.

흐르는 물에 서서 말 멈추고 돌아보니

앞 발은 황려(黃驪) 땅이고 뒷 발은 북원(北原) 땅일세.

 

金堂川

分割封疆古有源 一溪中坼二乾坤

臨流駐馬時廻顧 前足黃驪後北原

Ⅲ-089) 월곡명사(月谷明師)의 시권에 씀

골짜기가 깊으니 산 달이 더욱 밝아

긴 밤이 고즈넉하고 기운 절로 맑구나.

이곳이 스님께서 성품 전하는 곳이라

티끌 모래의 세계가 다 태평을 이루리.

 

書月谷名師卷

谷深山月更分明 永夜寥寥氣自淸

此是上人傳性處 塵沙世界致昇平

Ⅲ-090) 명봉월사(明峯月師)의 시권에 씀

달 바퀴가 바다 문 동쪽에 솟아오르니

천 길 높은 봉우리가 푸른 하늘에 우뚝하네.

이곳이 스님께서 깨달은 곳이니

시원하게 옛 가풍을 모두 깨뜨리셨네.

 

書明峯月師卷

氷輪湧出海門東 千仞高峯聳碧空

知有上人叅得了 豁然打破古家風

Ⅲ-091) 조암경사(照菴鏡師)의 시권에 씀

때 벗기고 빛을 닦아 티끌 하나 없으니

때때로 털고 닦은 이가 바로 이 사람일세.

얼굴 보면 두 눈썹이 있는 곳에

한현(漢現)과 호래(胡來)가 나날이 새롭네.

 

書照菴鏡師卷

刮垢磨光絶點塵 時時拂拭有斯人

看形剔起眉毛處 漢現胡來日日新

Ⅲ-092) 고암(杲巖)의 운(韻)을 빌려 또 씀 (스님이 창수 唱首임)

사자후(獅子吼)를 외쳐 마왕(魔王)의 궁전에 떨치니

마왕과 외도(外道)가 모습을 감추었네.

수없는 천룡(天龍)들이 함께 기뻐하니

청정한 여섯 신통을 갖추셨겠지.

 

借杲巖韻又書(師爲唱首)

作獅子吼振魔宮 魔外藏形指顧中

無數天龍共忻悅 必應淸淨六神通

Ⅲ-093) 요암영사(療菴瑛師)의 시권에 씀

스스로 값진 보배를 지니시고

언제나 갈고 닦으시네.

그 쓰임이 끝내 다함없으니

수많은 중생들을 다 이롭게 하네.

 

書療菴瑛師卷

自有珍無價 尋常琢復磨

終應用無盡 利物遍恒沙

Ⅲ-094) 유방(遊方) 가는 지희(志曦) 스님을 배웅함

서북에 또 동남에 뜻을 두고서

푸른 바랑 먹물 옷에 행전을 둘렀네.

강물 위를 갈대 줄기로 넘기도 하고

뜰 앞의 잣나무와 이야기도 나누시겠지.

둘이 아니면서도 둘이 없음을 늘 닦으셨으니

앞의 셋과 뒤의 셋을 묻지 마시게.

나도 언젠가 찾아가고 싶건만

어느 곳에 구름 암자를 정하실지 알 수가 없네.

 

送志曦上人遊方

志于西北又東南 靑布行縢緇布衫

江上葦莖將欲跨 庭前栢樹已曾叅

恒修不二兼無二 莫問前三與後三

我亦他年尋訪去 不知何處結雲菴

Ⅲ-095) 스스로 읊음

어젯밤에 비가 쓸쓸히 내리더니

오늘 새벽에 산 안개가 짙게 끼었네.

조용히 옷깃을 바로 하고 앉았더니

나도 모르게 긴 시가 읊어지네.

동쪽 울타리에 가을빛이 있어

국화꽃이 황금처럼 찬란하구나.

국화꽃 떨기를 즐기다 보니

맑은 향내가 흰 옷깃에 스며드네.

외로운 꽃이 차가운 서리도 깔보니

군자의 마음이 꿋꿋하구나.

어루만지며 두세 번 감탄하다 보니

아침볕이 먼 숲에 비쳐 오네.

 

自詠

昨夜雨蕭蕭 曉來山霧深

脩然正衣坐 不覺發長吟

東籬有秋色 菊蘂粲黃金

繞叢自怡悅 淸香熏素襟

孤芳傲霜冷 苦哉君子心

撫已再三嘆 朝陽輝遠林

Ⅲ-096) 형(泂)에게 악창(惡瘡)이 나다

부모는 오직 병을 걱정한다는 말이 진실하니

옛 성인도 제자들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지.

비록 돌봐주진 못해도 편히 자기 어려우니

사사로운 뜻이 오히려 제오륜(第五倫) 같네.

 

泂發惡瘡

惟疾之憂語甚眞 聖人言此誨門人

雖無省視難安寢 私意還同第五倫

Ⅲ-097) 10월 초하루. 총지(摠持) 어머니가 작은 술자리를 베풀다

어제 신륵사를 떠나 멀리서 왔기에

기운이 나른해져 피곤을 견디기 어려웠지.

새로 걸른 술에다 산나물 볶음까지

나를 위로한다고 이 술잔을 권하네.

 

十月初一日。摠持母設小酌。

昨日遠從神勒來 難堪困憊氣全衰

新篘栢酒山梁炙 專慰勞神勸此盃

Ⅲ-098) 이튿날 아침. 묘음(妙音)의 부모가 또 작은 술자리를 베풀다

이른 새벽에 부부가 서리를 밟고 오더니

향그런 술을 손수 데워 이 늙은이를 위로해 주네.

효도하고 공경하는 것이 하늘이 정하신 뜻이니

이불 껴안고 일어나 앉아 잔을 멈추지 않네.

 

明晨。妙音父母設小酌。

淸晨夫婦踏霜來 手煖香醪慰老衰

孝敬正孚天定意 擁衾起坐不停杯

Ⅲ-099) 이날 빗속에 곡성(谷城)이 찾아오다

비를 무릅쓰고 찾아와 소나무 아래 문 두드리는데

만두가 합에 가득하고 술은 항아리에 가득하네.

취하고 취해 하늘과 땅이 넓어지니

얼굴에 벌써 붉은 빛 떠오른 줄 알겠네.

 

是日雨中。谷城來訪。

冒雨來敲松下門 饅頭滿榼酒盈樽

酣酣兀兀乾坤豁 始覺天和已露痕

Ⅲ-100) 환희당(歡喜堂) 대로(大老)의 시에 차운함

Ⅲ-100-01)

우리 형이 푸른 산에서 날 찾아 오셨으니

걸음걸음 지팡이 바람에 구름이 날리네.

한 평생 친한 뜻이 너무나 고마워

만나는 곳마다 같이 웃고 이야기하네.

Ⅲ-100-02)

지난날 벼슬길은 한바탕 꿈이었지.

얼굴엔 먼지 가득하고 서울 거리에선 바람만 맞았지.

이제 늙어서 연하(烟霞)의 손님 되었으니

허수아비같이 덧없는 인생들을 우습게 보리라.

Ⅲ-100-03)

내 몸이 쇠약해져 초가집 속에 누워 있으니

세상 맛은 전혀 없어도 도(道)의 바람은 있네.

형께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 누구와 함께 붓 휘두르며 시를 읊으랴.

 

次歡喜堂大老詩韻

吾兄來自碧山中 步步雲飛一錫風

多感平生親厚意 每相逢處笑談同

 

宦路前遊一夢中 塵埃滿面九街風

如今老作烟霞客 應笑浮生幻化同

 

我衰閑臥草廬中 世味全無有道風

不是大兄居近處 揮毫朗詠與誰同

Ⅲ-101) 중덕(中德) 벽봉((璧峰) 스님(별호 성규 性圭)의 시권에 씀

우러러보면 매우 높아 허공에 닿으니

갈고 닦지 않아도 저절로 영롱하네.

화엄(華嚴)의 바닷물에 환하게 담궈 냈으니

체(體)와 상(相)을 말하기 어렵고 쓰임도 끝이 없네.

 

題璧峯性圭中德卷

仰則彌高接太空 不因磨琢自玲瓏

瑩然浸得華嚴海 體相難言用莫窮

Ⅲ-102) 중덕(中德) 가능(可能) 스님이 시를 구함

단비(斷臂)와 용미(舂麋) 두 조옹(祖翁)께서

법등(法燈)을 서로 이어 종풍(宗風)을 퍼뜨렸으니,

각기 한 곳을 이어받아 명호(名號)를 삼고

세 마음을 갖추고자 성품이 공(空)함을 깨달았네.

푸른 바다는 다시 밝은 달 속에 해맑고

푸른 산은 흰 구름 속에 움직이지 않네.

이러한 경계를 사람마다 갖췄으니

모름지기 참 근원을 찾아 공력을 기울이세.

 

可能中德求詩

斷臂舂麋兩祖翁 法燈相纔播宗風

各承一處爲名號 欲備三心了性空

碧海更澄明月裏 靑山不動白雲中

如斯境界人皆具 須覓眞源要着功

Ⅲ-103) 생각나는 대로 읊음

오래 앉았노라니 해가 벌써 기울었는데

오가는 사람 없어 사립문이 적막하네.

물가 누각에 따오기 나는 글귀를 읊조리다가

비오는 마을에 소먹이는 그림을 한가롭게 구경하네.

소나무 차가운 시냇가에 한 해가 저물어

국화 시든 울타리에서 가을을 보내네.

늙어갈수록 느낌이 많고 병도 많으니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명(命)인 줄 알겠네.

 

卽事

坐久依然日已晡 柴扉寂寂往來無

淸吟水閣騖飛句 閑覽雨村牛牧圖

松冷澗邊驚歲暮 菊殘籬畔送秋徂

老來多感仍多病 信矣行藏命矣夫

Ⅲ-104) 조(趙) 봉선(奉善)이 짓고 계모임에서 함께 발원한 십영(十詠) 시권 뒤에 씀 (두 수)

Ⅲ-104-01)

그대들은 자세히 들으시게.

십영(十詠)은 불경을 추린 것일세.

젊은 시절도 보전하기 어려운데

세월이 어찌 날 위해 머물랴.

Ⅲ-104-02)

육진(六塵)이 망녕된 생각을 일으키고

삼독(三毒)이 참된 심령을 덮어 버리니,

양 잡는 도살장에 함께 들어가서도

아아! 취해서 깨어나질 못하네.

 

【능엄소(楞嚴疏)에 이르기를, “마치 양이 도살장에 들어갈 때에 한 걸음 한 걸음 죽을 자리에 나아가는 것과도 같다”고 하였다.】

 

題趙奉善所述契內同發願十詠卷後(二首)

群公須諦聽 十詠摭諸經

少壯猶難保 居諸況不停

 

六塵撩妄想 三毒蔽眞靈

共入屠羊肆 嗚呼醉未醒

(楞嚴疏云。如羊入屠肆 步步趨死地)

Ⅲ-105) 또 짓다

나도 이제 십영시(十詠詩)를 보고

같이 보리(菩提)의 마음을 내려 하네.

지옥(地獄) 가는 길을 누가 열었던가

천당(天堂) 가는 다리도 스스로 만들었네.

나의 조작인 줄 이미 알았으니

모름지기 저 미혹을 버려야 하네.

안양(安養)이 어찌 분수가 아니랴

여러분께서 마땅히 힘쓰시게.

 

我今看十詠 同欲發菩提

地獄誰開路 天堂自作梯

旣能知我造 須要指他迷

安養豈非分 諸公當勉今

Ⅲ-106) 형(泂)의 시에 차운함 (네 수)

Ⅲ-106-01)

네게 어쩌다 액운이 거듭 닥치나.

평상 위에 또 평상을 얹는 듯 위태롭구나.

어느 하루 염려되지 않는 날이 없으니

천 오리(天莖) 귀밑 털에 서리(霜)가 더하네.

Ⅲ-106-02)

모나고 둥근 것이 본래 맞지 않으니

달팽이 껍질이 어찌 코끼리 평상을 본받으랴.

온갖 차별된 모양이 다 이러하니

서리(霜)를 업신여기는 푸른 소나무만 사랑스럽네.

Ⅲ-106-03)

세상일에 하나도 적당한 것이 없어

산 속 절간을 찾아가 선상(禪床)을 빌리려네.

지난날 더러운 티끌을 하나도 씻지 못한 채

누추한 골목에서 가을을 만나 또 서리(霜)를 밟네.

Ⅲ-106-04)

세상 업신여기는 희황씨(羲皇氏)야 어찌 감당하랴

다만 병이 많아서 평상을 떠나지 않을 뿐일세.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천지에 가득해

맑고 차가운 하룻밤 서리(霜)가 되려네.

 

次泂韻(四首)

汝厄重重甚不當 危如床上又安床

一秋無日無思慮 添得千莖鬂上霜

 

方圓本自不相當 蝸殼何能効象床

差別萬端皆此類 獨憐松翠巧凌霜

 

世事都無一適當 欲尋山寺借禪床

未湔舊染塵埃累 陋巷逢秋又踏霜

 

寄傲羲皇何敢當 只緣多病不離床

浩然壯氣充天地 疑作淸寒一夜霜

Ⅲ-107) 15일. 빗속에 생각나는 대로 읊음

병든 몸으로 먹고 살 길을 찾아보아도

찬거리 될 만한 게 하나도 없네.

아침 내내 궁색한 골목에 앉았노라니

꼬르륵 오장 육부에서 소리가 났네.

답답한 가슴을 견딜 수 없는데

겨울비는 왜 이리 지리하게 내리나.

갑자기 어떤 사람이 문을 두드리더니

술병과 찬그릇을 가지고 왔네.

화로에 마주앉아 한 잔 따르며

내 마음 기쁘게 만들어 주니,

성현의 가르침을 어겨 부끄러워라

배부르길 구하고 편안하길 구하다니.

술에 취해 저절로 흥겨워지자

탄환처럼 시 구절이 쏟아져 나오네.

읊다보니 해는 이미 기울었건만

처마 끝에 낙숫물 소리는 그치지 않네.

 

十五日雨中卽事

病夫謀口腹 無物可供湌

終朝坐窮巷 鍧然鳴肺肝

鬱鬱懷抱惡 冬雨何漫漫

忽有人扣戶 把壼幷少簞

擁爐開小酌 使我心欣歡

慙予違聖訓 求飽又求安

陶然乘逸興 吐句如彈丸

吟哦日已側 簷溜聲未殘

Ⅲ-108) 조(趙) 봉선(奉善)이 노래 여덟 절을 지어서 제목을 구하다

노래는 사람의 폐(肺)와 간(肝)을 그린 것이니

기쁨과 슬픔이 여러 가지 있네.

속마음을 읊은 여덟 절 노래 보고는

멍하니 어루만지며 두세 번 감탄했네.

 

趙奉善作八節歌。求題目。

大抵歌詞寫肺肝 歡娛感慨有多端

今看八節陳情曲 撫已茫然三復歎

Ⅲ-109) 월암(越菴) 초(超) 스님의 시권에 쓰다

눈으로 보지 않고 귀로 듣지 않아

모든 소리와 빛을 초월하였네.

육처(六處)에 모두 그러해

이미 참된 소식을 깨달아 얻었네.

강에 달이 비추고 소나무에 바람 부는데

도(道)는 함이 없고 즐거움은 끝이 없으니,

이 암자의 주인이 누구던가

스님이 바로 선지식(善知識)일세.

 

書越菴超上人卷

眼不見耳不聞 超諸聲越諸色

於六處皆亦然 已領敢眞消息

江月照松風吹 道無爲樂無極

此菴中誰主人 是上人善知識

Ⅲ-110) 느낀 바가 있어 (이때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으려는 무리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여덟 수)

Ⅲ-110-01)

나라의 명맥이 끊어져 가니 정치를 보살펴야 하고

인륜의 기강이 무너져 가니 교화를 펼쳐야 하건만,

임금의 문은 깊게 잠겨서 아홉 겹으로 막혔으니

아뢸 곳 없는 백성들이 저 푸른 하늘에 호소하네.

Ⅲ-110-02)

지초와 난초 밭에는 향내가 퍼지지 않고

아름다운 그늘에 가시덤불이 한창일세.

그 향내 물리치고 싸늘한 기운까지 더하니

태양 빛이 담 그늘을 비춰주지 못하네.

Ⅲ-110-03)

자리를 말 듯이 온 산천을 독차지하고

주머니를 뒤지듯이 노비까지 다 수색하네.

닭과 벌레를 얻고 잃음이 어느 때에야 다하려나

하늘 끝을 바라보니 어느새 석양일세.

Ⅲ-110-04)

의장(儀仗)의 말(馬)이 울지 않아 말(言)의 길이 막히고

울타리의 파리가 뜻을 얻으니 해괴한 일이 많네.

헌사(憲司)가 밝은 교화는 펴지 않고서

의관(衣冠)을 바꾸라고 날마다 독촉하네.

 

【이 무렵 의복제도를 바꾼다는 통첩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Ⅲ-110-05)

쟁탈하는 바람이 일어나니 귀신의 지역인가

염치의 도를 잃었으니 사람 세상이 아닐세.

머리를 돌려 홀연히 옛 왕조 일을 생각하다가

멀리 창오산 바라보며 눈물이 얼굴에 가득해지네.

Ⅲ-110-06)

은하수가 가을되면서 한결 깨끗한데

고운 물결 밤 깊으면 더욱 맑아지네.

바라건대 하늘이 이 물을 인간 세상에 퍼부셔서

탐람하고 의롭지 못한 마음을 다 씻어 주소서.

Ⅲ-110-07)

사막(沙漠)의 건곤(乾坤)인지, 어찌 이리 적막한가.

금릉(金陵) 가는 길이 정말 아득하구나.

아침 저녁 머리 들고서 남북을 바라보건만

풍교(風敎)가 어느 때에야 이 지방에 불어오려나.

Ⅲ-110-08)

적송자(赤松子)를 따르려 해도 단사(丹砂)가 이뤄지지 않고

황벽(黃檗)을 찾으려 해도 그 도를 감당하기 어렵네.

도도히 흐르는 사방 바다에 발 디딜 곳도 없으니

다섯 자 병든 몸을 어디에 감추려나.

 

有感(時田民兼幷之徒蜂起, 八首)

國脉將頹當輔治 人綱欲廢要開張

君門深鎖九重隔 無告嗷嗷籲彼蒼

 

淸芬不播芝蘭圃 美蔭方深枳棘林

減却馨香添爽氣 大陽偏不照墻陰

 

奮占山川如卷席 窮搜奴婢似探囊

鷄虫得失何時了 注目天涯已夕陽

 

伏馬不鳴言路澁 樊蠅得意駭機多

憲司非欲宣明化 糾察衣冠日更加

(梁衣服改制之牒數故反之)

 

爭奪風興非鬼域 廉恭道喪不人寰

回頭忽起前朝念 遙望蒼梧淚滿顔

 

銀漢逢秋添晈潔 練波終夜更澄淸

願天挽向人間注 洗盡貪婪不義情

 

沙漠乾坤何寂寞 金陵道里政微茫

暮朝翹首望南北 風敎何時扇此方

 

欲訪赤松丹未就 擬尋黃檗道難當

滔滔四海無容足 五尺病軀何處藏

Ⅲ-111) 동짓날. 감회를 쓰다

지난해 동짓날에

감회 시를 지었지.

작은 창문 앞에서 펼쳐 읽으며

망연히 슬픈 마음을 달랬는데,

올해 동짓날엔

염려를 걷잡을 수 없네.

해마다 이 날을 지나건만

두 귀밑에는 온통 서리가 내렸고,

병까지 그만 깊어져

기력이 지난 해와 아주 달라졌네.

태평성대에 태어나 자랐고

늙어서도 태평성대를 만났건만,

조정이 황제 명령을 받들어

의관제도를 바꿔야 한다니,

높건 낮건, 귀하건 천하건

중하(中夏) 사람이지 동이(東夷)가 아닐세.

예법과 제도가 이미 이러한데

정치와 교화는 왜 베풀지 않나.

백성들 살림은 더욱 쓸쓸해져

밭갈기도 누에치기도 다 틀렸으니,

문에는 언제나 거적자리를 내려뜨리고

땅이라곤 송곳 세울 자리도 없네.

세금도 다 못 냈는데

가을마당에 벌써 남은 게 없어,

아무리 애쓴들 어디로 가며

헤매는 사정을 그 누가 걱정하랴.

이익을 다투는 무리들은

채찍과 몽둥이를 마구 휘두른다니,

어려서 배웠지만 쓸 모 없이 늙어

이러한 꼴을 보고 부질없이 탄식만 하네.

이제 양기(陽氣)가 생기는 날이 되었으니

찡그렸던 눈썹도 조금 펴지겠지.

군자도(君子道)가 곧 자라면

너희들도 할 일이 있으리라.

부디 농사 짓기에 힘써

나라의 터전을 굳게 하거라.

나는 비록 노쇠한 몸이지만

너희들 보면 즐거움이 넘치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나 혼자 우습네

백성 일을 알아야 할 자는 따로 있으니,

자기 몸도 돌보지 못하는 터에

남의 처지를 어찌 생각하나.

이 날을 보내는 게 참으로 아쉬우니

만물이 다 자연의 모습을 지녔네.

술잔 들고서 남산을 향해

님의 수명 끝 없기를 비노라니,

묵은 터가 다시 훤해지고

화기가 아침 볕에 떠오르네.

 

冬至日寓懷

去年冬至日 題作感懷詩

披向小窗讀 茫然撫已悲

今年冬至日 念慮不能持

年年過此日 兩鬢垂霜絲

蹉跎抱沈疾 氣力殊昔時

生長大平日 老値大平期

朝廷承帝命 改制冠服儀

尊卑幷貴賤 中夏非東夷

禮度旣如此 政刑何不施

民居轉蕭索 耕桑俱失宜

門戶常懸席 土田無立錐

未充貢賦額 浚盡無餘脂

勞勞不遑處 誰肯嘆流離

忍看征利徒 鞭朴及肌膚

幼學壯無用 對此空嗟咨

今遇一陽生 聊可以伸眉

君子道方長 爾生當有爲

勉爾穩耕鑿 以固我邦基

我雖衰也甚 看汝藥凞凞

念玆還自笑 民事非汝知

己身不自恤 餘復何思惟

是日足可惜 品彙含天姿

擧酒對南山 祝君壽無涯

桑墟更平遠 和氣浮朝曦

Ⅲ-112) 도령(都令) 원립(元立)이 술을 가지고 멀리 찾아와 고마워하다 (두 수)

Ⅲ-112-01)

온갖 시름이 술을 만나면 달아나니

술 들고 초가집 찾아와 준 그 마음 깊구려.

평소의 은혜도 늘 고마웠는데

이 추운 날 오시다니 더욱 고맙구려.

Ⅲ-112-02)

내 병은 이제 헤어날 수도 없어

신세가 마치 쑥 한 다발 같네.

얼음 눈 산길에 멀리 찾아오느라 애썼으니

그 은혜와 정이 태산보다도 무겁고 높네.

 

謝元都領立携酒遠訪(二首)

滿恨千愁遇酒逃 意深携到小蓬蒿

尋常尙感陶然惠 況此天寒價更高

 

我今衰病未能逃 身世還同一束蒿

氷雪山程勞遠訪 恩情重興泰山高

Ⅲ-113) 정(鄭) 예안(禮安)이 큰형 판서(判書)를 모시고 어머니를 뵈러 초계(草溪)로 돌아간다기에 배웅하다 (두 수)

Ⅲ-113-01)

날씨 추운데 먼 길 나그네 되었으니

늙으신 어머님을 뵙기 위해서일세.

색동옷 입고 어머니 즐겁게 해드릴 걸 생각하니

십분 봄빛이 천륜(天倫)을 비추리라.

Ⅲ-113-02)

나도 도촌(桃村)의 문하인(門下人)인데

늙어가며 교제 끊은 게 몹시 부끄럽네.

십 년 동안 고개 너머서 그리워하던 뜻을

동년(同年)인 정숙륜(鄭淑倫)과 이야기하네.

 

送鄭禮安陪大兄判書歸覲草溪(二首)

天寒遠路作行人 只要萱庭拜老親

遙想綵衣堂上喜 十分春色照天倫

 

我是桃村門下人 老來深愧絶交親

十年嶺北相思意 說與同年鄭淑倫

Ⅲ-114) 조위(趙瑋) 선생의 방문을 받고 고마워하다

고맙게도 얼음 눈 부딪치며

산길을 밤중에 찾아오다니!

초 심지를 자르며 긴 시간을 보내고

술항아리를 여니 봄 기운이 따뜻하구나.

맑은 이야기에 바닷물이 출렁거리고

남 모르는 흥이 은하수를 움직이네.

두터운 뜻을 잊기 어려워

한 곡조 노래를 읊어 보았네.

 

謝趙先生瑋見訪

多君觸氷雪 山路夜相過

剪燭更籌永 開樽春氣和

淸談飜海水 逸興動星河

厚意誠難忽 吟成一曲歌

Ⅲ-115) 병 때문에 경신(庚申, 1380년)의 약속을 지키지 못함을 생원(生員) 김조(金祖)에게 알리고, 아울러 좌상(座上) 여러분께 드리다 (두 수)

Ⅲ-115-01)

겨울 추위가 날이 갈수록 더하니

병든 몸이 더욱 시큰거리네.

걸어갈 수도 타고 갈 수도 없어

멍하니 혼자서 탄식한다오.

 

因病未赴庚申之期。寄金生員祖。兼簡座上諸公 (二首)。

冬寒連日甚 病骨益辛酸

步騎俱難得 茫然獨自歎

Ⅲ-116) 또 짓다

누구누구 모인 곳을 멀리서 생각하니

송장 같은 몸이 어찌 감히 참여하랴만,

술항아리 앞에는 우스개 소리가 많은 법이니

이야기와 웃음이 맘껏 즐거웠겠지.

 

遙想盍簪處 三尸豈敢干

樽前多戱謔 談笑盡淸歡

Ⅲ-117) 아이들에게 묵은 세배와 설상을 받고

아이들이 둘러앉아 술잔을 올리니

늙은이 마음 든든해지며 웃음꽃이 피네.

귀밑에 서릿발이 삼천장(三千丈)이지만

눈앞에 난초 같은 손자들 예닐곱이나 된다네.

이런 세상에 살면서 조상의 업을 어찌 빛내랴만

너희들은 마땅히 우리 가문을 빛내야지.

잊으려 해도 잊기 어려운 한이 있으니

너희들 어머니가 먼저 가고 나 홀로 남은 것일세.

 

兒女輩餽歲

兒女團圝列酒樽 老懷强壯笑談溫

鬂邊霜雪三千丈 眼底蘭蓀六七孫

世俗豈能光祖業 爾曺當以慶吾門

可忘恨處難忘恨 汝母先歸我獨存

Ⅲ-118) 섣달 그믐밤

Ⅲ-118-01)

해시(亥時)를 마지막으로 정묘년(1387)이 끝나고

자시(子時) 초부터는 무진년(1388) 봄일세.

북소리 그치지 않고 푸득거리 한창이니

온갖 사귀 물리치고 복된 경사가 몰려드소서.

Ⅲ-118-02)

등잔불이 다해 가니 밤이 얼마나 깊었나.

병든 가슴 무료해 아홉 번 일어나 한숨 쉬었네.

귀밑에 서리 늘어날까 걱정되어

자주 처마 끝으로 은하수를 바라보았네.

 

除夜

亥末已終丁卯臘 子初方啓戊辰春

鼓聲不絶鄕儺盛 驅逐精邪福慶臻

 

一燈垂燼夜如何 病肺無聊九起嗟

却恐霜絲添兩鬂 數從簷隙望星河

Ⅲ-119) 1388년(무진) 설날

나 어릴 적에 새해를 만나면

늘 선배들 따라 돌아다니길 좋아했지.

늙은 나이에 젊은 시절 즐거움을 생각하니

젊은 시절 기쁨이 늙은 시절 슬픔일세.

눈 덮인 물가 부들은 움이 트려 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시냇가 버들은 줄이 늘어지는데,

해를 보내고 맞으며 유달리 생각이 많아

억지로 붓 적셔서 이 시를 쓰네.

 

戊辰元日

我昔爲兒遇歲時 每隨前輩競奔馳

衰年紀憶芳年樂 少日歡娛老日悲

帶雪渚蒲芽欲動 颺風溪柳線初垂

履新思舊偏多感 强自濡毫寫此詩

Ⅲ-120) 7일. 유변(劉辨)의 방문을 받고

작은 서재에 인일(人日)인데도 발자국 소리가 끊어져

눈 덮인 성긴 울타리에 들바람 소리만 들려왔었지.

흰 옷 입은 이가 술 메고 찾아와 문 두드리니

쓸쓸하던 마음이 다 풀어졌네.

 

七日。劉辨見訪。

小齋人日絶跫音 殘雪疎籬動野吟

擔酒白衣來扣戶 豁然消釋寂寥心

Ⅲ-121) 명(明)․헌(憲)․식(湜) 세 사람의 방문을 받고 고마워하다

개 한 마리가 문 앞에서 짖더니

세 사람이 고개를 넘어 왔네.

풀 덮인 길이라 찾아오기 힘든데

저마다 술병까지 가져 왔네.

좋은 술에 안주까지 갖췄으니

시름 찬 눈썹 병든 눈이 활짝 열렸네.

취한 끝에 지난해를 생각하면서

눈을 마주하고 깊은 술잔을 따르네.

【지난해 봄눈이 내렸을 때에도 세 사람이 함께 찾아왔으므로 이렇게 말했다.】

 

謝明․憲․湜三人見訪

一犬當門吠 三人過嶺來

區區尋草徑 各各把山壘

旨酒嘉肴雜 愁眉病眼開

醉餘思去歲 對雪倒深盃

(去年春雪。三人同訪故云)

Ⅲ-122) 고달사(高達寺) 이의징(李義澄) 대선사(大禪師)에게 부침

머리를 돌려 멀리 혜목산(慧目山)을 바라보니

흰 구름 사이에 한 덩어리 푸른빛이 있네.

그 가운데 천태(天台) 늙은이가 계셔서

백세의 한가로움을 굳건히 차지하셨네.

 

奉寄高達寺李大禪師(義澄)

回首遙看慧目山 一堆蒼翠白雲間

就中知有天台老 籯得强剛百歲閑

Ⅲ-123) 육도(六道) 도통사(都統使) 최영(최상 崔相)이 꿈에 명(明) 나라 황제를 알현하자, 황제께서 각색 의복을 하사하시면서 운자(韻字)를 불러 시를 지으라고 명하시니 상국(相國)이 그 운에 따라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바쳤다고 한다. 내가 그 소식을 듣고 삼가 차운하여 절구 두 수를 지어 비망(備忘)으로 삼으려 한다.

◎ 최영

색색 비단옷을 제 어깨에 걸치니

은혜에 감격하고 흥에 겨워 쓰러질 듯하옵니다.

백천 만세에 백성의 어버이 되셨으니

온 천하 백성 집에 자자손손 전하리다.

Ⅲ-123-01)

조정에 뛰어나 어깨 견줄 이 없으시니

붉은 뺨에 빛이 떠올라 이마까지 비추네.

한 몸의 충담(忠膽)이 바다같이 넓고 장해

천자의 은혜 빛이 꿈속까지 전했네.

Ⅲ-123-02)

칼은 허리에 활은 어깨에

한 나라 운명을 혼자 짊어지셨네.

하룻밤 꿈이 천년 왕업에 응했으니

지극한 덕과 훌륭한 공을 사필(史筆)로 전하리라.

 

六道都統使崔相夢謁大明皇帝。皇帝以各色衣服賜之。仍呼韻命製。相國隨韻奏呈云。

色色羅衫着我肩 感恩狂興醉如顚

百千萬載爲民父 四海民巢子子傳

聞之奉次韻。作二絶以備忘云。

特立朝端絶幷肩 光浮紅頰照華顚

一身忠膽洪河壯 天子恩光夢褢傳

 

釰在腰間弓在肩 邦家陧机卽扶顚

一宵夢應千年業 至德膚功史筆傳

Ⅲ-124) 상국(相國) 조반(趙胖)을 찬양함 (이때 상국이 의롭게 강포한 무리들을 제압하다가 그들에게 욕을 당했는데, 곧 임금의 은혜를 입어 화를 면했다.)

일찍이 천하를 맑게 할 뜻이 있어

흉악하고 간사한 자들을 소탕하려 했었지.

충성은 해와 달 위에 빛나니

기운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하네.

처음엔 분을 내며 전갈 꼬리(蠆尾)에 부딪치다가

다시 은혜를 느끼며 용의 얼굴(龍顔)에 절하였네.

사신(史臣)의 삼천 붓이 다 닳아 없어지리니

나라 보전한 그 공이 태산보다도 무겁네.

 

贊趙相國胖 (時相國以義制强暴之徒。被其所辱。尋蒙上恩免禍)

旱有澄淸天下志 慨然將欲掃凶姦

忠懸兎走鳥飛上 氣塞鳶飛魚躍間

發憤初經觸蠆尾 感恩時復拜龍顔

史臣應禿三千筆 保國功名重泰山

Ⅲ-125) 삼가 들으니 주상(主上) 전하께서 (백성들의) 토지를 겸병(兼幷)하는 포학한 무리들을 정의롭게 다 소탕하여 사방이 평안해졌다고 하기에 시를 지어 하례함

Ⅲ-125-01)

어진 정치 베풀며 호령이 새로워지니

영단(英斷)을 내려 천신(天神)을 움직이시네.

날뛰던 무리들을 하루 아침에 다 소탕하니

발가벗은 백성이 하나도 없어졌네.

늠름한 위엄이 강포한 자들을 놀라게 하고

화목한 즐거움이 곤궁한 자들에게 흘러넘쳐,

높은 기상과 빛나는 문장을 우러러보고

나라의 터전이 억만년 봄인 줄 비로소 깨닫겠네.

Ⅲ-125-02)

순(舜) 임금이 사흉(四兇)을 제거한 것처럼

사방 백성들이 함께 즐거워했네.

온 나라 백성들이 생업을 편안히 하고

힘 자랑하던 시랑(豺狼)들은 벌써 자취를 감추었네.

물결 고요하고 바람 잠잠해 바다 빛을 너그럽게 하고

구름 걷히고 해가 떠올라 하늘 얼굴도 숙연해졌네.

이제부터 성한 덕이 멀리까지 흘러가

화하(華夏)와 만이(蠻夷)가 다 함께 복종하리.

Ⅲ-125-03)

벼슬 바다에 뜨고 가라앉는 것도 반드시 원인이 있으니

밝고 밝은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네.

가련하구나! 간사한 권력배와 토호의 무리들

망령되게도 충량(忠良)한 사직의 신하라고 자처하다니.

영화로운 이름 얻고도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우니

많은 이익 탐내다가 자기 몸을 잊었네.

논과 밭이 바로 집을 망치는 화근이니

남의 땅을 빼앗자마자 사람을 빠뜨리네.

Ⅲ-125-04)

하늘이 이 백성을 마음대로 살게 하려면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들을 모두 처형해야 하리.

예전엔 노략질하는 구름 속의 새매였지만

지금은 물 속에 잠겨 헤엄치는 고기를 부러워하겠지.

하루 아침에 심신이 취해 어리어리하니

백년의 영화와 부귀가 한낱 꿈일세.

헐뜯고 기리는 것이 임천(林泉)에는 이르지 않으니

두어 자 낚싯대와 한 상자의 책 뿐일세.

Ⅲ-125-05)

돌고 도는 것이 하늘의 운수인데

이 이치를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네.

상제(上帝)께서 형감(衡鑒)을 여시고

우리 임금께선 기강을 펼치시니,

강퍅한 무리들은 모두 죄를 받고

백성들은 함께 빛을 보네.

다른 나라까지 위풍이 떨치고

동방에 교화의 날이 길어지니,

가시 숲에는 묵은 독기가 걷히고

난초 밭에는 아름다운 향기 퍼지네.

포악한 자를 막으니 나라의 운이 영원하고

쓰러진 곳을 바로잡으니 도업이 번창하네.

아아! 늙고 병든 이 몸도

강개한 마음으로 충성되기를 사모하니,

태평곡을 한가롭게 부르며

장수 비는 술잔을 임금께 올리네.

 

伏聞主上殿下奮義掃盡。兼幷暴虐之徒。四方晏然。詩以賀之。

奮義施仁號令新 慨然英斷動天神

一朝淸掃白拈賊 四海渾無赤脫民

凜澟威加强暴類 凞凞樂洽困窮倫

仰看星斗文章煥 方覺皇基億萬春

 

正似虞時去四兇 四方咸樂變時雍

率濱民俗應安業 當道豺狼已絶蹤

浪靜風恬寬海色 雲收日杲肅天容

自今盛德流諸遠 華夏蠻夷盡服從

 

宦海浮沈必有因 明明頭上在蒼旻

可憐比儻權豪輩 妄謂忠良社稷臣

旣得榮名難保命 專征厚利頓忘身

土田眞是侯家崇 纔得兼幷卽陷人

 

天使斯民得意居 姦凶儻輩盡登車

昔爲標掠雲間鶻 今羨潛游水底魚

一朝心神醉兀兀 百年榮貴夢遽遽

毁譽不到林泉下 數尺漁竿一笈書

 

循環是天運 此理固難量

上帝開衝鑒 吾王布紀綱

豪强皆伏罪 黎庶共瞻光

異域威風振 東方化日長

棘林收瘴毒 蘭圃播馨香

禁暴謀猷遠 扶顚道業昌

嗚呼抱衰疾 慷慨慕忠良

閑放太平曲 祝君擎壽觴

Ⅲ-126) 상국(相國) 이유(李宥)에게 삼가 부침

서로 헤어진 지 벌써 구 년이 지났건만

눈 속엔 언제나 옛 모습이 남아 있네.

금부처(金佛)는 아직도 영수사(靈樹寺)에 새롭고

은두꺼비(銀蟾)는 월송정(月松亭)에 그대로 있네.

산 얼굴도 언제나 보는 그대로인데

세상일만은 모두 예전에 듣던 것과 달라,

이 못난 들판 늙은이는 별다른 생각 없이

백세 넘도록 강녕하시길 빌 뿐이라오.

 

奉寄李相國(宥)

相違已變九年星 眼裡常存古典刑

金佛尙新靈樹寺 銀蟾依舊月松亭

山容只是常時見 世事俱非昔日聽

甲末野人無別念 但祈百歲保康寧

Ⅲ-127) 봄날 우연히 씀 (두 수)

Ⅲ-127-01)

세월은 빨라 어느새 봄인데

세상일은 끝이 없어 모래처럼 많구나.

백년 한 평생이 그 얼마인가

사철 가운데 삼월이 가장 좋구나.

서울에 문물(文物)이 흥성하다는 말을 반갑게 듣고

마을 거리를 향해 술집을 물어보네.

태평성대에 같이 즐거운 날을 만났으니

이 아름다운 철에 꽃구경을 해야겠네.

Ⅲ-127-02)

병든 나그네가 흰 귀밑 털을 견디기 어려우니

출세를 꾀하는 술업(術業)은 찐 모래 같네.

늙어 가는 마음이 이토록 쓸쓸하니

젊은 시절 풍류를 어찌 다시 자랑하랴.

실 모자와 베 적삼이 속된 모습이지만

차 끓이는 화로와 불경 책은 스님의 집일세.

고맙게도 봄빛은 사사로운 뜻이 없어

산에는 살구꽃이고 숲에는 복사꽃일세.

 

春日偶書(二首)

光陰焂忽又春華 世事無涯數似沙

百歲一生能幾許 四時三月最堪誇

喜聞京國興文物 且向鄕閭問酒家

幸値太平同樂日 要當佳節賞群花

 

病客難勝鬂上華 謀身術業似蒸沙

老衰情興何微薄 少壯風流豈復誇

紗帽布衫雖俗貌 茗爐經卷是僧家

感他靑帝無私意 山杏林桃又欲花

Ⅲ-128) 내가 2월 하순에 병을 얻어 3월 그믐에 무너져 가는 무진사(無盡寺)에 옮겨와서 여름 두 달을 지냈으니, 날짜는 5월 24일이고 철은 유월이다. 이제 거처를 옮기면서 시 한 수를 쓴다.

이월 봄바람에 병상에 누워

여름 늦도록 아직 강건해지지 않았네.

눈 어둡고 귀 멍멍해 미친 개 같고

다리 지치고 정신 피곤해 절름발이 염소 같네.

산 속 낡은 암자에서 소서(小暑)를 지내니

창 서쪽 늙은 나무가 서늘한 바람을 보내 주네.

더위 피하는 소나무 그늘 아래

누가 술 한 항아리를 마련해 주려나.

 

予二月下旬得疾。三月晦。移接無盡廢寺。經夏二朔。五月二十四日。乃六月節也。將欲遷居。偶書一詩。

二月春風臥蟻床 夏闌猶未得彊康

眼昏耳聵同狂犬 脚困神疲似跛牂

山畔廢菴經小署 窓西老樹送微凉

却思逃署松陰下 誰辦花(玆+瓦)白雪漿

Ⅲ-129) 거처를 옮기면서 (두 수)

Ⅲ-129-01)

그 누가 병을 안고 옮겨 다니게 하나.

도(道)의 뿌리가 미약해서 세상 정에 끌리기 때문일세.

소나무 그늘 아래 풀 깔고 앉아

돌돌(咄咄) 두 글자를 공중에 쓰고는 하루 종일 졸았네.

Ⅲ-129-02)

말을 알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배우려 해도

근심과 질병에 얽매여 견딜 수 없네.

늙어 가며 세상맛이라곤 다 없어졌으니

길고 짧거나 잘 살고 못 사는 걸 낮잠에 부치리.

 

遷居(二首)

抱疾遷居誰使然 道根微劣世情牽

無聊藉草松陰下 咄咄書空盡日眼

 

欲學知言養浩然 不堪憂病共纏牽

老來世味消磨盡 長短榮枯付一眼

Ⅲ-130) 6월 초이틀. 생각나는 대로 읊음

가뭄에 더위까지 겹쳐

온 천지가 불타는 것 같네.

유심히 녹수곡(綠水曲)을 타다가

이마를 찌푸리고 붉은 구름을 바라보네.

짹짹 지저귀는 산새 소리를

병든 나그네 하염없이 듣고 있는데,

이웃 스님이 찾아와 술잔 권하니

붓을 잡고 은근한 마음을 고마워하네.

 

六月初二日卽事

挾旱炎威盛 乾坤正似焚

有心彈綠水 蹙頞望彤雲

磔磔幽禽噪 悠悠病客聞

隣僧來把酒 援筆謝殷勤

Ⅲ-131) 안(安) 도령(都令)의 형 안정(安鼎)이 벼 섬을 보내 왔다

병든 몸이 어리석고 둔해 마른 나무토막 같은데

움막이라도 편안코 즐거우니 자랑할 만하네.

바구니 밥이 안회(顔回)의 골목보다 나으니

시루에 먼지 낀들 범단(范丹)의 집을 부러워하랴.

지난날 은혜를 이미 많이 받았는데

오늘의 이 은혜는 갑절이나 더하니,

내 생애를 누가 고단하다고 말하랴

마음이 배부르니 거짓없이 지낸다오.

 

安都領兄鼎惠稻石

病軀癡鈍類枯槎 安樂窩居只可誇

簞食有餘顔子巷 甑塵何愧范丹家

在前惠澤連連下 况此恩光倍倍加

誰道吾生多齟齬 飽飡方寸正無邪

Ⅲ-132) 새벽에 일어나

새벽 기운이 좀 서늘하고 산 안개가 짙은데

구슬 같은 이슬이 나뭇잎 끝에서 솔숲까지 이어졌네.

밤비가 앞산 기슭을 지나갔나 했더니

갑자기 아침 햇살이 북쪽 봉우리를 비추네.

바깥 나그네가 어찌 이 초가집까지 찾아오랴

들새가 거문고 소리를 알아듣는구나.

아름다운 구절을 찾아 아름다운 경치를 갚으려 했건만

병든 뒤의 시정(詩情)을 찾을 수 없네.

 

曉起

曉氣微凉山霧深 葉端珠露綴松林

卽疑夜雨樓前麓 忽見朝陽照北岑

外客何曾過草幕 野禽能解奏瑤琴

欲搜佳句酬佳景 病後詩情杳莫尋

Ⅲ-133) 병중에 들은 대로 기록함

병든 사내는 즐거움이 적으니

풀이나 나무같이 썩어 가는 몸일세.

봄부터 여름이 끝날 때까지

끙끙 앓으면서 외로움을 지켜왔네.

요즘 들으니 조정에서 명령을 내려

연호를 없애고 의복도 고쳤다더니,

장정(壯丁) 숫자대로 군사를 다 뽑아

위아래가 모두 바쁘게 뛰어달리며,

장차 십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려 한다네.

이제 요해(遼海)의 길을 건너면

씩씩한 기운으로 깃발을 날리고,

무서운 위엄이 중국(中原)에 떨쳐

감히 두려워 복종치 않는 자가 없겠지.

응당 개선하는 날이 이르리니

사방 오랑캐(四夷)가 다 귀속되고,

성스런 임금(聖主)께서 무궁한 수명 누리시며

주나라 무왕(周武)의 발자취를 이어 밟으시리라.

내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함께 태평곡(太平曲)을 부르려 했는데,

어이 압록강을 건너지 않고

갑자기 말고삐를 조국으로 돌리나.

서도(西都)에 계시던 임금님 수레도

어이 그리 바쁘게 돌아오시나.

안타깝구나! 우리 도통공(都統公)이시여!

홀로 서서 원망을 듣게 되었네.

기둥과 주춧돌이 이미 기울었으니

크나큰 집을 그 누가 지탱하랴.

처음과 끝이 한결 같지 않으니

부끄러워 볼 면목도 없네.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건만

화(禍)와 복(福)을 제 어찌 알랴.

 

病中記聞

病夫少歡趣 衰朽同草水

自春至夏末 呻吟守幽獨

近聞有朝旨 除年號改服

抽兵盡丁數 上下事馳逐

貔貅十餘萬 欲渡鴨江綠

方期遼海路 壯氣浮旗纛

虎威振中原 誰敢不畏伏

應當凱旋日 四夷皆附屬

聖主壽無疆 繼踐周武躅

我雖老且病 與唱太平曲

乃何不渡江 奮然回轡速

翠華在西都 反駕何跼促

可憐都統公 獨立招怨讟

柱石旣傾危 將何支厦屋

終始不如一 靦然無面目

頭上有蒼蒼 焉知禍與福

Ⅲ-134) 엎드려 들으니, 주상(主上) 전하께서 강화(江華)로 옮기고 원자(元子)께서 즉위하셨다기에 감회를 읊음 (두 수)

Ⅲ-134-01)

성(聖)과 현(賢) 서로 만나 교대하는 것도 알맞은 때가 있으니

천운이 돌고 도는 것을 이제야 알겠네.

초야에 묻힌 백성이라고 어찌 나라 걱정이 없으랴

더욱 충성을 다해서 나라의 안위(安危)를 염려한다네.

Ⅲ-134-02)

새 임금이 즉위하고 옛 임금은 옮기시니

쓸쓸한 바다 고을에 바람과 연기뿐일세.

하늘 문 바른 길을 그 누가 열고 닫으랴.

밝고 밝은 거울이 눈앞에 있는 것을 보아야겠네.

 

伏聞。主上殿下遷于江華。元子卽位。有感(二首)。

聖賢相遇適當時 天運循環自此知

畎畝豈無憂國意 更殫忠懇念安危.

 

新主臨朝舊主遷 蕭條海郡但風烟

天關正路誰開閉 要見明明鑑在前

Ⅲ-135) 느낌

흉포한 자들을 소탕하자 정치가 새로워져

해외까지 위엄 떨치니 한창 봄날일세.

온 나라 군사 일으켜 싸움터로 몰고 나가

성 쌓고 곡식 옮기며 인민들을 동원했으니,

어찌 그 수고가 끝내 무익하랴

기만당할 걸 두려워하지만 반드시 이웃 있으리라.

숲 속에선 세상 이야기할 수 없으니

하루 종일 산 바라보며 입을 다물고 있네.

 

感事

掃除兇暴政惟新 海外聲華白日春

擧國興兵驅士卒 築城移粟動人民

豈徒辛苦終無益 還恐欺謾必有隣

林下不堪談世事 對山終日莫搖唇

Ⅲ-136) 7월 7일

삼베옷으로 가을 맞기가 정말 겁나니

병든 뼈는 쓰라리고 머리는 희어졌네.

겨울 석 달 동안은 내내 등불에 지치고

십 년 동안 숲과 샘에서 맑고 그윽하게 살았건만,

천년 학(千年鶴)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만리 갈매기(萬里䲭)도 길들이기 어렵네.

직녀를 향해 재주를 빌리려 하지만

내 마음 거리낌없으니 다시 무얼 구하랴.

 

七月七日

麻衣正㥘又逢秋 病骨酸辛已白頭

燈火三冬嘗困勉 林泉十載飽淸幽

悠悠不返千年鶴 浩浩難馴萬里䲭

欲向天孫乞新巧 寸心無累更何求

Ⅲ-137) 생각나는 대로 읊음

병든 뒤라서 생각마저 아득하니

유유한 내 신세가 정말 가엽구나.

붕새와 메추리 노니는 것도 다 분수가 있으니

용과 뱀의 회합이 어찌 인연 없으랴.

시내와 산의 나무들은 참으로 그림 같고

눈과 달, 바람과 꽃은 돈에 팔리지 않네.

게으른 내가 이 취미를 얻으니 참으로 기뻐

이 소식을 가벼이 전하지 말게나.

 

卽事

病餘情思更茫然 身世悠悠儘可憐

鵬鷃逍遙皆有分 龍蛇會合豈無綠

溪山樹木眞如畵 雪月風花不着錢

政喜疎慵還得趣 箇中消息莫輕傳

Ⅲ-138) 10일. 여러 서생들의 방문함 (세 수)

Ⅲ-138-01)

푸성귀 과일에다 맛있는 안주와 술

만두 속에는 삶은 돼지고기까지,

병 뒤의 입과 배를 보탤 만하니

깊은 잔을 사양치 않고 맘껏 마시네.

Ⅲ-138-02)

자리에 누워 앓은 지 넉 달이 넘었건만

외진 곳의 내 집을 그 누가 찾아 왔으랴.

먼 길 마다 않고 찾아와 위로하니

그대들 성의가 고맙고 또 고마워라.

Ⅲ-138-03)

소나무 그늘이 차츰 옮겨지고 해는 서남쪽으로 기우니

맑은 이야기 높은 웃음소리에 반쯤 취했네.

정자 위의 저녁 바람이 짧은 모자에 불어오니

분에 넘치는 맑은 흥을 달래기 어렵네.

 

十日。諸生來訪(三首)。

菜果嘉肴雜酒盆 饅頭褢面褢蒸豚

病餘口腹堪爲養 不讓深盃盡意呑

 

臥榻呻吟四朔餘 地偏誰復訪吾盧

不辭遠路尋來慰 多感諸生意不踈

 

松陰漸轉日西南 談笑淸高倚半酣

亭上晩凉生短帽 十分淸興定難戡

Ⅲ-139) 산 속의 정자(山亭)

나 혼자 산 속 정자에 날마다 오르는 것은

서늘한 바람 더위를 식혀 주는 게 좋아서라네

늙은이 적막한 회포를 무엇으로 달래랴

쓸쓸한 귀밑 털을 차츰 걷잡을 수 없네.

물 건너 먼 봉우리가 점점이 푸르고

연기 속 높은 나무는 층층이 푸른데,

멍하니 앉았노라면 돌아갈 것도 잊어

소나무 가지엔 달이 뜨고 잎에는 이슬 엉기네.

 

山亭

獨向山亭日日登 爲憐凉吹掃煩蒸

老懷寂寞殊無賴 衰鬂蕭疎漸不勝

隔水遠峯靑點點 帶烟喬木綠層層

忘機靜坐仍忘返 月上松梢葉露凝

Ⅲ-140) 계모임 여러분의 방문을 받고 고마워 함 (두 수)

Ⅲ-140-01)

몇 년 사이에 온갖 병이

이 작은 몸에 모여드니,

강장(强壯)한 이가 몇 사람 있으랴만

나같이 쇠약한 자는 없으리라.

좋은 벗들이 안부만 물어도

이 늙은이 끝없이 기쁜데,

친하게 사귀자는 뜻이 너무 진중해

시골길에 술병까지 가져 오셨네.

Ⅲ-140-02)

구름이 서산에 기운 해를 보내고

바람이 반쯤 지난 가을을 재촉하는데,

항아리마다 맛 좋은 술이 가득하고

식탁마다 진수성찬이 차려졌네.

실컷 마시고 맘껏 취하세

좋은 날은 물 따라 흘러가 버린다네.

흥에 겨워 초연히 앉았노라니

마음이 마치 물에 뜬 빈 배 같네.

 

謝契內諸公見訪(二首)

年來百般病 叢集一微軀

强壯幾人在 衰遲如我無

良朋問辛苦 老叟極歡娛

珎重交親意 村程各佩壺

 

雲送將西日 風催欲半秋

樽樽盈美酒 案案列珎羞

痛飮須泥醉 良辰逐水流

飄然乘逸興 心若泛虛舟

Ⅲ-141) 또 두 수를 지어 계장(契長) 원립(元立)에게 보임

Ⅲ-141-01)

오늘 저녁이 어떤 저녁인지

이 병든 사내도 호기(豪氣)가 더하네.

아름다운 손님들이 세속 사람 아닌데다

고요하기는 마치 산 속 스님의 집 같구나.

Ⅲ-141-02)

정자 앞 잣나무에는 옥 이슬이 맺히고

언덕 위 등 넝쿨에는 가을 바람이 불어오는데,

가난한 집이라 촛불도 없으니

달 떠오르길 기다려 등불 삼으세.

 

又賦二首。示元契長立。

今夕定何夕 病夫豪氣增

佳賓非世俗 靜者有山僧

 

玉露樓亭栢 金風動岸藤

貧居無燭火 須待月爲燈

Ⅲ-142) 또 짓다

올 봄엔 병무(兵務)가 급했으니

술자리 같이할 줄이야 어찌 생각했으랴.

그대가 한가한 손님이 되어

나를 취하게 만들어 주니 고맙군 그래.

풍정은 아직도 소년 시절인데

흰 머리털이 가을 하늘을 비추니,

세상에 관심 가졌던 일들이

하나도 이곳엔 찾아오질 않네.

 

今春兵務急 豈意酒樽同

感子爲閑客 令吾作醉翁

風情敵年少 雪髮照秋空

世上關心事 一無來此中

Ⅲ-143) 가을 집에서 생각나는 대로 읊음

외로이 살면서 무엇을 걱정하랴만

가을이 되자 더욱 쓸쓸해지네.

기러기 너머 개인 빛이 먼데

귀뚜라미 옆에 밤 꿈이 길구나.

시냇가 소나무는 푸른 빛을 띠고

울타리 국화는 누런 빛을 내니,

여기서 맑은 절조를 가다듬고

맑은 향내도 이웃할 수 있네.

 

秋居卽事

幽居何悄悄 秋思轉悲凉

雁外晴光遠 蛩邊夜夢長

澗松含晩翠 籬菊吐新黃

對此礪淸操 馨香可比方

Ⅲ-144) 도경사(道境寺)에 가서 당두(堂頭)의 시에 차운함

그림같이 좋은 산이 가을을 뽐내는데

선옹(禪翁)과 함께 와서 세상 밖에 노니네.

도경(道境)과 도인(道人)이 다 도가 있으니

함께 머물면서 함께 기뻐하네.

 

遊道境寺。次堂頭韻。

好山如畵正矜秋 來伴禪翁物外遊

道境道人俱有道 得堪留處喜相留

Ⅲ-145) 총림(叢林)으로 가는 천태(天台) 달의(達義) 스님을 배웅하다

거룩하구나! 우리 천태 선자는

지혜있는 자의 행(行)을 행하여,

마음은 시냇물 따라 맑고

몸은 고개 구름같이 가볍네.

보내는 정이야 끝이 없지만

돌아올 때엔 눈 더욱 밝아지겠지.

총림이 응당 무성하겠지만

한 가지 영화를 더 얻게 되겠군.

 

送天台達義禪者赴叢林

偉我天台士 能行智者行

心隨溪水淨 身與嶺雲輕

此去情無極 重來眼更明

叢林應茂盛 添得一枝榮

Ⅲ-146) 지난번 변암(弁巖) 남쪽 봉우리 아래 새로 초가집 한 간을 지었다. 지형이 가파르고 외진데다가 집 모양까지 아름답지 못하고, 앞뒤와 오가는 것이 다 마땅치 않은데다 몹시 누추하고 옹졸하였다. 그 주인은 몸가짐이 도에 어긋나고 뜻을 세운 것이 세상과 맞지 않았으며, 또 모든 처사가 세상 물정을 모른 데다 거처마저 썰렁하였으니, 그 누추하고 옹졸함이 더욱 심했다. 이 집의 누추하고 옹졸함이 주인의 누추하고 옹졸함과 들어맞았으므로, 집 이름을 누졸재(陋拙齋)라고 하였다. 이에 장구(長句) 여섯 수를 지어 스스로 읊어 본다.

Ⅲ-146-01)

북으로 깊은 시내를 마주보며 초가집을 세우고

내 여생을 이곳에서 보내려 하네.

처세하는 지모(智謀)도 옹졸하거니와

수신(修身)하는 사업도 좋은 게 없어 부끄러워라.

창 열면 우연히 푸른 소나무와 마주하고

땅 쓸고 사르면 백출(白朮) 향기가 풍기네.

이 경계의 이 사람이 향배(向背)를 어겼으니

길가는 사람도 아마 방향 모른다고 비웃겠지.

Ⅲ-146-02)

서리 뒤에 산초는 푸른 빛이 짙어가니

한 그루 전나무와 두어 그루 소나무일세.

천년을 겪은 그대들의 쓸쓸한 지조가

십 년 늙어 가는 내 얼굴을 친구해 주니 고마워라.

멀리선 마을의 피리 소리가 들려오고

가까이선 이웃 절의 아침 저녁 종소리가 들려와,

이 사이에서 띠를 벨 생각이 간절하니

일없는 사람에게 소식 전하지 마시게.

Ⅲ-146-03)

도(道) 있는 나라에 항상 사는 것이 기뻐서

늙은 몸을 끌고 밝은 창에 기대어,

가슴 헤치고 날마다 책을 읽거나

때로는 술항아리 마주하고 번민을 달래네.

조각조각 일어나는 골짜기 구름을 누워 바라보고

쌍쌍이 우는 산새 소리를 앉아서 듣노라니,

세상 정과 티끌 일들은 다 잊었지만

오직 시마(詩魔)만은 아직도 항복하지 않네.

Ⅲ-146-04)

자갈밭 초가집에 광문(廣文)이 살았건만

누추하고 옹졸함이 어찌 운곡(耘谷)의 오두막 같으랴.

그래도 몸은 들여놓으니 마음이 만족하고

지혜가 넘치지 못하니 어찌 세상을 업신여기랴.

시냇가 바람과 달이 어찌 정을 그치게 하랴

십리의 구름과 연기도 그림을 그릴 수 없네.

길이 막히고 땅이 외져 늙고 병든 이에게 알맞건만

찾는 친구 드물어 마음 서운하네.

Ⅲ-146-05)

세상 어디건 한가한 몸 붙여 살기는 무방하니

원래 하늘과 땅 사이의 한 산민(散民)이라,

초라한 초가집이 산기슭에 의지하고

쓸쓸한 옛 절을 이웃 삼아 지내네.

바위틈에 우물 파서 늘 갈증을 풀고

산나물 뜯어다가 가난을 달래네.

백년의 영고성쇠가 눈 깜짝할 사이이니

고금에 죽고 산 사람을 세어 보시게.

Ⅲ-146-06)

붉고 푸른 천 봉우리 속에 자취를 붙였으니

한 평생 드나듦이 스님같이 한가롭구나.

산허리에 비낀 해는 몸을 기울여 보내고

지붕 위로 날아가는 구름은 손을 뻗어 잡네.

허술한 울타리는 틈나는 대로 손질하고

예전에 지은 시를 다시 고치네.

바깥 사람은 오지 않아 사립문이 고요하니

책을 낀 아이들만 자주 오가네.

 

頃者於弁巖南峯之下。新作一茅齋。其地勢也危僻。締構也不巧。且向背往復。俱不適宜。陋而拙者甚矣。其主人。行已也違於道。立志也違於世。又處事之迂闊。居止之淸凉。其爲陋拙。又有甚焉者矣。以其齋之陋拙。合於主人之陋拙。名之曰陋拙齋。因成長句六首以自詠。

北臨深澗搆茅堂 斷送餘生庶可望

處世智謀誠有拙 修身事業愧無良

開窓偶對蒼松翠 掃地仍燒白朮香

此境此人違向背 路人應笑不知方

 

霜後山椒翠色濃 一株蒼檜數株松

憐渠冷落千年操 伴我衰遲十載容

遠聽村墟長短笛 近聞隣寺暮朝鍾

此間深有誅茅意 莫向閑人道所從

 

喜我恒居有道邦 老將身計寄明窓

放懷日日開書帙 排悶時時對酒缸

臥盾洞雲生片片 坐聞山鳥語雙雙

世情塵事都忘了 惟有詩魔尙未降

 

石田茅屋廣文居 陋拙那同耘谷廬

尙可容身心已足 豈堪慠世智無餘

一溪風月情何極 十里雲烟畵不如

路隔地偏宜老病 但嫌稀少故人車

 

無妨彼此寄閑身 元是乾坤一散民

草草草堂依斷麓 蕭蕭蕭寺作比隣

開穿石井常澆渴 收拾山蔬且慰貧

百歲榮枯駒過隙 存亡黙數古今人

 

迹寄千峯紫翠間 一生行止似僧閑

半山斜日傾身送 過屋飛雲引手攀

新作蕃籬頻補理 舊題詩句更追刪

外人不到柴扉靜 把冊兒童數往還

Ⅲ-147) 첫 눈

풍년이 들 조짐이라 빛이 더욱 새로우니

집집마다 사람들이 경사롭다고 말하네.

개인 뒤 우연히 동산을 바라보다가

나무마다 매화 꽃 피어 봄인가 했네.

 

新雪

瑞應豐年色更新 嗷嗷相慶幾家人

晩晴偶向林園望 誤認梅花萬樹春

Ⅲ-148) 나무에 눈이 얼어붙어

무진년(1388) 동짓날 뒤

병술일(1389) 이른 아침에

안개가 모이고 찬 기운이 엉켜

한낮이 되도록 눈이 그치지 않았네.

소나무와 전나무는 다 늘어지고

밭고랑의 싹들을 다 덮어버려,

이 눈이 아름다운 곡식이라면

내 바가지에 가득 담겠네.

산마다 은세계이고

나무마다 옥가지이니,

이 모습 바라보며 깊은 생각이 들어

혼자 읊조리니 그 소리 놀랍구나.

 

木稼

戊辰冬至后 丙戌日晨朝

霧合氣凝結 日高猶未消

糢糊松檜上 偃亞枯禾苗

若使爲嘉穀 可能盛我瓢

山山銀世界 樹樹玉枝條

對此有深念 獨詠聲曉曉

Ⅲ-149) 이틀 뒤. 또 큰 눈이 내리다

음기가 차갑게 엉켜 새벽 안개 짙으니

겨울이 일 만들어 눈 농사를 지었네.

들풀에 두텁게 붙어 줄기마다 고개 숙이고

숲 가지에 가볍게 붙어 이삭마다 늘어졌네.

흰 가루 땅에 가득해도 쓰는 사람이 없으니

떨기에 옥가루 쌓인들 그 누가 찧으랴.

음양의 신기한 변화를 헤아리기 어려우니

그 누가 천공(天公)을 향해 길흉을 물으랴.

 

後二日又大作

陰氣寒凝曉霧濃 玄英用事作爲農

厚粘野草莖莖亞 輕着林枝穗穗重

滿地粉塵人不掃 縈叢玉糝孰爲舂

陰陽神變誠難測 誰向天公問吉凶

Ⅲ-150) 11월 23일. 비가 내리다

겨울비가 부슬거려 사방 산이 어두우니

그윽한 회포 답답하고 쓸쓸하구나.

한가롭게 하는 일없어 성정은 고요하지만

병들어 나가지 않으니 허리와 다리가 굳어졌네.

아득한 빗줄기는 바라보는 눈을 가리고

급한 빗소리는 늙어 가는 얼굴을 재촉해,

음양의 이치가 하늘 뜻인 줄 알겠으니

때아닌 비를 퍼부어 아끼질 않네.

 

十一月二十三日有雨

冬雨紛紛暗四山 幽懷鬱鬱寂寥間

閑無幹事性情靜 病不出行腰脚頑

迢遰色添遮望眼 蕭踈急促衰顔

定知燮理符天意 律外滂沱故不慳

Ⅲ-151) 이튿날 눈이 내리는데 우곡(牛谷)에 사는 부부가 음식을 베풀다

밤에는 등불에 비 뿌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침엔 한 자나 쌓인 눈에 놀랐네.

온갖 새들도 자취를 감췄는데

갑자기 두어 사람 오는 게 보였네.

나무엔 주렁주렁 구슬이 달리고

산들은 첩첩이 은으로 둘렸는데,

고맙게도 하늘이 날 도와 주셔

아름다운 경치에 깊은 잔을 기울였네.

 

明日有雪。牛谷夫婦設食。

夜聽侵燈雨 朝驚尺雪堆

惟看百鳥戢 忽見數人來

瓊樹重重匝 銀巒疊疊廻

感知天厚我 嘉景侑深盃

Ⅲ-152) 섣달(臘月) 스무 이렛날(念七). 정(鄭) 예안(禮安)이 찾아오다

반갑게 만나 한 번 웃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술항아리 열고 맘껏 기뻐하다니.

취흥은 무르익고 이야기는 부드러워

하지 못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었네.

 

臘月念七。鄭禮安來訪。

欣逢一笑尙爲難 何况開樽共盡歡

醉興方濃談話軟 也無非意敢相干

Ⅲ-153) 그 이튿날엔 이(李) 저곡(楮谷)이 찾아오다 (두 수)

Ⅲ-153-01)

들사람의 풍미가 스님보다도 담백해

세밑의 시름을 견디기 어려웠는데,

눈 밟고 찾아오다니 그 뜻이 두터워라

바라건대 병 없으시고 산같이 장수하시게.

Ⅲ-153-02)

병들어 쇠한 몸에다 백발까지 되었으니

뜻과 기백이 젊은 시절과는 다르건만,

술항아리 기울이면 미친 흥이 일어나

죽은 재에도 불이 다시 붙을 때가 있다네.

 

明日。李楮谷來訪(二首)。

野人風味淡於僧 歲暮愁懷未可勝

踏雪相過知厚意 願言無恙壽如陵

 

病軀衰甚已華顚 志氣全非少壯年

倒盡淸樽發狂興 死灰猶有火重燃

Ⅲ-154) 손녀 묘음동(妙音童)이 준 버선(足巾)을 읊음

베 버선이 눈같이 희어

이것을 이름하여 보신(保身)이라 하네.

네가 가져다 준 뜻이 정말 고마우니

새 봄을 밟고 싶은 내 마음을 알았구나.

 

詠足巾(孫女妙音童所贈)

布襪白如雪 是名爲保身

憐渠持贈意 知我履新春

Ⅲ-155) 섣달 그믐밤

내일 아침이면 나이가 예순인데도

아직 웅혼한 마음은 스러지지 않아,

청주(靑州)가 어디 있는가 물어보고

그곳에 종사하면서 오늘밤을 보내려네.

 

除夜

年逢耳順在明朝 尙有雄心未靈消

且問靑州在何許 擬從從事送今宵

Ⅳ-001) 1389년(기사) 정월 설날 아침에 (두 수)

Ⅳ-001-01)

내 나이 이제 예순이 되고 보니

성인의 말씀이 스스로 부끄럽네.

아직 이순(耳順)이 되기도 어려우니

마음이 통한다고 어찌 말하랴.

아름다운 수석과 함께 살면서

태평스런 하늘 땅에 깊이 고마워하네.

봄이 이른 것을 벌써 알겠으니

새벽빛이 내 집 문을 비추는구나.

Ⅳ-001-02)

또 봄을 맞이하는 나그네가 되어

새벽 알리는 까마귀 소리에 놀라 깨어났네.

사람들이 다투어 절하고 하례하며

말끝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네.

형제 자매의 은정은 갈수록 무겁고

아이 손자들의 효성과 공경도 더하니,

멀리 벼슬길에 노는 아이만 가엽군

여관방에서 얻어먹으며 서울에 머물고 있네.

【이때 형(泂)이 서울에 있었다】

 

己巳正朝(二首)

身年當六十 自愧聖人言

耳順誠難得 心通豈敢論

寓居佳水石 深謝泰乾坤

已覺東君至 晨光照我門

 

又作逢春客 偏驚報曉▒ ▒ : 亞+鳥

人人爭拜賀 口口共稱嘉

弟妹恩情重 兒孫孝敬加

遙憐宦遊者 旅食滯京華

(時泂在京師)

Ⅳ-002) 춘주(春州)에 양전관(量田官)으로 부임하는 아우 부정(副正)을 보내면서

자네가 떠나갈 먼 길을 생각하니

시내와 산 곳곳에 또 봄이 오겠지.

가벼운 바람은 말고삐에 불고

빛나는 해가 오건(烏巾)을 비추겠지.

경계(經界)는 밭도랑부터 바르게 하고

공가(公家)의 부역(賦役)도 고르게 하라.

모름지기 이 뜻을 잘 알고

우리 백성들을 잘 살게 하라.

 

送弟副正赴春州量田

念子歸程遠 溪山又欲春

輕風吹馬轡 麗日照烏巾

經界溝塗正 公家賦役均

要須知此意 先使阜吾民

Ⅳ-003) 최(崔) 순흥(順興)에게 부침(이때 최순흥이 춘주 양전관으로 있었다)

춘성(春城)은 아득히 먼 곳이어서

다락에 기대 멀리서 그대를 바라보네.

백성 살림은 괴로움 면하게 하고

나라 일에는 부지런하길 사양치 말게.

치악(雉嶽)은 푸른 허공에 뜨고

아산(鵝山)은 흰 구름 너머 있으니,

언제나 그대 말고삐 돌려

술잔 들고 함께 문장을 이야기할까.

 

寄崔順興((時在春州量田)

杳杳春城遠 倚樓遙望君

民生應免苦 王事不辭勤

雉岳浮蒼翠 鵝山隔白雲

何時廻玉轡 把酒共論文

Ⅳ-004) 정초(正初) 서재에서 (네 수)

Ⅳ-004-01)

새해 정월이 반 넘어 지나가니

병에서 일어나 심기(心機)를 살펴보네.

발을 씻다가 몸 여윈 줄 알고

머리를 빗다가 털이 드문 걸 느꼈네.

풍광은 차츰 부드러운데

차가운 기운이 아직도 남아 있어,

머리를 돌려 먼 숲 석양을 바라보니

사람은 돌아가는데 구름은 돌아가질 않네.

Ⅳ-004-02)

두(斗)․소(筲)를 어찌 헤아리랴

종(鍾)․정(鼎)을 이미 잊어버렸네.

함께 이야기할 사람도 적은데

마음대로 되는 일도 또한 드무네.

시절이 맑아 찬 맛은 멀건만

날이 갈수록 세상 인정은 각박해지니,

하늘과 땅 은혜에 감사할 뿐일세

가난한 집에도 봄은 또 돌아왔네.

Ⅳ-004-03)

요로(要路)에 앉기를 바라지 않으리니

위기를 만날까 두려워서라네.

옛 법은 풍속 따라 변해 가는데

옛 사람 닮은 이는 드물구나.

도(道)의 정은 언제나 고요하고

시 지을 생각은 현묘한 경지에 들어가,

욕심 떠난 게 바로 참다운 즐거움인데

도연명(陶淵明)은 어찌 돌아오질 않나.

Ⅳ-004-04)

날씨가 따뜻해져 물성(物性)이 돌아오고

천기(天機)도 빠르게 돌아가니,

그윽한 골짜기에 새 소리 부드럽고

작은 서재엔 이야기 소리 드무네.

눈이 녹아 봄 물이 불어나고

구름이 머물자 저녁 바람 잠잠한데,

동쪽 봉우리 길을 앉아서 바라보니

해 기우는데 스님이 혼자 돌아가네.

 

正初齋居(四首)

新正將欲半 病起省心機

洗足知身瘦 梳頭感髮稀

風光初婉娧 寒色尙熹微

回首遠林晩 人歸雲未歸

 

斗筲何足筭 鍾鼎已忘機

可語人猶少 如心事亦稀

時淸寒味遠 日漸世情微

弟感乾坤惠 窮居春又歸

 

莫希當要路 還恐有危機

古法從今變 今人似古稀

道情恒寂靜 詩思入玄微

恬惔是眞樂 淵明何不歸

 

凞凞廻物性 冉冉轉天機

幽谷鳥聲軟 小齋人語稀

雲消春水漲 雲定晩風微

坐看東峯路 日斜僧獨歸

Ⅳ-005)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 장군이 사형 당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함 (세 수)

Ⅳ-005-01)

수경의 빛이 묻히고 기둥과 주춧돌이 무너져

사방의 백성과 만물이 모두 슬퍼하네.

빛나는 공업은 끝내 썩고 말았지만

굳센 충성이야 죽었다고 사라지랴.

사적을 기록한 푸른 역사책이 일찍 가득했건만

가엾게도 누른 흙이 이미 무덤을 이뤘네.

생각컨대 아득한 황천 밑에서도

눈을 도려내어 동문에 걸고 분을 풀지 못하시겠지.

Ⅳ-005-02)

조정에 홀로 섰을 때 감히 덤빌 자 없었으나

충성과 의리 때문에 온갖 어려움을 겪었네.

육도(六道) 백성들의 소망을 따라

삼한(三韓)의 사직을 편안케 했네.

동렬의 영웅들은 얼굴 더욱 두터워지고

아직 죽지 않은 간사한 자들은 뼈가 서늘해졌으리.

어지러운 때를 다시 만나면 누가 꾀를 내려는지

이 시대 사람들 간사하게 일하는 것이 가소롭기만 하네.

Ⅳ-005-03)

내 이제 부음 듣고 애도하는 시를 지었으니

공을 위해 슬픈 게 아니라 나라 위해 슬픈 거라오.

하늘 운수가 통할지 막힐지를 알기 어렵고

나라 터전이 편안할지 위태할지도 정해질 수가 없네.

날카로운 칼날이 이미 꺾였으니 슬퍼한들 무엇하랴

충성스러운 신하 항상 외롭다가 끝내 견디지 못했네.

홀로 산하를 바라보며 이 노래를 부르니

흰 구름과 흐르는 물도 모두들 슬퍼하네.

 

聞都統使崔公被刑。寓歎(三首)。

水鏡埋光柱石頹 四方民物盡悲哀

赫然功業終歸朽 確爾忠誠死不灰

紀事靑篇曾滿帙 可憐黃壤已成堆

想應杳杳重泉下 抉眼東門憤未開

 

獨立朝端無敢干 直將忠義試諸難

爲從六道黔黎望 能致三韓社稷安

同列英雄顔更厚 未亡邪侫骨猶寒

更逢亂日誰爲計 可笑時人用事姦

 

我今聞計作哀詩 不爲公悲爲國悲

天運難能知否泰 邦基未可定安危

銛鋒已折嗟何及 忠膽常孤恨不支

獨對山河歌此曲 白雲流水㧾噫嘻

Ⅳ-006) 외당형(外堂兄) 이(李) 부령(副令)이 선군(先君)을 추봉(追封)했기에 그 묘소에 참배하고 절구 두 수를 지어 드림

Ⅳ-006-01)

무덤이 푸른 기슭 앞에 석 자나 높아졌으니

아들이 일찍이 대부(大夫) 반렬에 뛰어올랐네.

추봉한 지위가 막중한 홍추사(鴻樞使)이니

아마도 이 영광이 구천(九泉)에서 빛나리라.

Ⅳ-006-02)

무덤 앞에다 정성껏 음식 차려 놓고

아들 손자들이 두어 줄 늘어섰네.

두 번 절하고 생전의 일 생각하니

부질없이 감격스런 눈물이 샘처럼 흘러나오네.

 

外堂兄李副令追封先君。拜其塋。作二節以呈似。

塚尺三高翠麓前 子曾超躡大夫聯

追封位重鴻樞使 應是榮旡耀九泉

 

庶羞羅列墓門前 子侄成行僅數聯

再拜忽思平昔事 空將感淚灑如泉

Ⅳ-007) 수은(袖隱) 추(椎) 스님의 시권에 씀

굳센 방망이의 오묘한 쓰임이 어떤 것인지

오랫동안 손을 떼고 자취를 드러내지 않네.

조사(祖師)의 관문을 부수고도 아무 일 없었으니

사위의(四威儀) 안에 신기한 칼날 감추었으리.

 

書袖隱椎上人卷

剛槌妙用是何容 縮手多時不露蹤

打碎祖關無一事 四威儀內韞奇鋒

Ⅳ-008) 명암(鳴巖)의 시권에 쓰다

한 번 내려치는 방망이 소리가 멀리 떨치니

법고(法鼔)를 두드려 하늘까지 울리네.

맑은 우뢰가 손길 따라 일어나니

육합(六合)이 모두 화평하고 맑아지리라.

 

書鳴巖卷

一下槌聲遠 訇天法鼓鳴

晴雷隨手起 六合晏然淸

Ⅳ-009) 소나무를 심는 것을 보고 쓴 시와 서문

◎ 당인(唐人)

노인의 집을 지나면서도

노인의 마음은 알 수가 없네.

무엇 때문에 늙은 나이에

소나무 심어 그늘을 기다리나.

 

【서문】당나라의 어떤 사람이 이웃집 늙은이가 소나무 심는 것을 보고 위와 같은 시를 지었다. 이 시는 그 노인을 비웃으며 지은 것이다. 내 나이 올해 예순이 되었는데, 산 위의 정자 옆에 어린 소나무 수십 그루를 심다가 갑자기 당나라 사람의 그 마음을 생각하고, 절구 3수를 지어 응답한다.

Ⅳ-009-01)

살고 죽는 데에는 늙은이도 젊은이도 없으니

자라나는 것은 소나무의 마음에 있을 뿐이네.

혹시 백세의 수명을 기약할 수 있다면

푸른 그늘 기다리는 게 어찌 어려우랴.

Ⅳ-009-02)

이다지도 심하게 노쇠했으니

길게 바란다고 어찌 내 마음대로 되랴.

푸르고 푸른 빛을 사랑할 뿐이지

우거진 그늘이야 어찌 기대하랴.

Ⅳ-009-03)

대부라는 이름은 부끄럽지만

군자의 마음만은 굳게 지녔네.

내 뜻을 알고서 지켜준다면

뒷날 이 뜨락에 그늘이 가득하리라.

 

栽松(幷序)

唐人觀隣老栽松詩云

雖過老人宅 不解老人心

何事殘陽裏 栽松欲待陰

此給其老人而作也。我今年當六十。於山亭之畔。種稚松數十株。忽憶唐人之意。作三節以答之曰。

 

存亡無老少 生長在松心

倘保期頤壽 何難待綠陰

 

衰遲何大甚 長遠豈吾心

但愛靑靑色 何期鬱鬱陰

 

應耻大夫號 固特君子心

故人如見憶 他日滿庭陰

Ⅳ-010) 적음연사(寂音演師)의 시권에 씀

침묵으로 말씀한다고 일찍이 들었더니

그 사람을 이제 비로소 보게 되었네.

도(道)가 커지니 말이 끊어지고

마음이 맑아지니 온 세상 티끌이 빛나네.

천룡(天龍)도 어렵게 귀를 기울이고

온갖 악마들도 이미 몸을 감추었네.

어느 곳에다 이 소식 전할까

영축산에서 봄날 한 번 웃네.

 

書寂音演師卷

曾聞說時黙 今得見其人

道大絶言語 心淸輝刹塵

天龍難側耳 魔衆已藏身

甚處傳消息 靈山一笑春

Ⅳ-011) 배웅

적음연(寂音演) 선사가 사립문을 찾아와

참방(參方)하러 떠난다고 하직을 알리네.

머리엔 채양 넓고 둥근 삿갓을 쓴데다

몸에는 긴 소매에 넓은 장삼을 입었네.

푸른 산이 걸음을 맞으니 행장이 평온하고

맑은 달이 마음을 비추니 도용(道用)이 미묘하겠지.

묻노니, 그 짚신 값이 얼마던가

높은 발자취 가볍게 고개 구름 따라 날아가네.

 

送行

寂音禪德到柴扉 意慾叅方告曰歸

頭戴廣簷圓頂笠 身披長袖濶腰衣

翠嵐迎步行裝穩 明月當心道用微

且問草鞋錢幾隻 高踪輕遂嶺雲飛

Ⅳ-012) 설암(說菴)의 시권에 쓰다

진종(眞宗)을 부연(敷演)할 때에 혀뿌리를 휘두르면.

우뢰 소리 진동하여 자비스런 구름 퍼뜨리네.

때로는 무생곡(無生曲)을 가리켜 보이니

천룡(天龍) 팔부(八部) 중생이 귀를 모아 듣네.

 

書說菴卷

敷演眞宗掉舌根 雷音振動布慈雲

有時指擧無生曲 八部天龍攝耳聞

Ⅳ-013) 선달(先達) 김초(金貂)의 시에 차운함 (다섯 수)

Ⅳ-013-01)

원래 닭과 학은 같이 살지 않으니

삼동(三冬) 내내 글만 읽는 그대가 부럽구려.

금방(金榜)의 아원(亞元)이라 이름 참으로 높았으니

아마도 언젠가는 금어(金魚)를 차시겠지.

Ⅳ-013-02)

십 년 동안 천석(泉石)에서 혼자 가난하게 사니

바둑판 하나에다 책이 한 권일세.

재주가 변변찮아 세상 쓰임에 어긋났을 뿐

동쪽으로 온 것이 농어 때문은 아닐세.

Ⅳ-013-03)

평생의 지극한 즐거움이 한가롭게 사는데 있어

날마다 도(道) 실린 책을 펼쳐 보았네.

이미 한 마음을 잡았으니 물아(物我)가 한가지라

자네는 나를 알고 나는 고기를 아네.

Ⅳ-013-04)

누추한 골목이라 안부를 묻는 사람도 없는데

창가에 산속 햇빛이 도서를 비추네.

앉으면 꽃 층계에 벗 부르는 꾀꼴새 소리를 듣고

다니면 부들 시내에 수달이 물고기 좇는 걸 보네.

Ⅳ-013-05)

두어 이랑 쑥대밭 고즈넉한 집에서

병이 많아 시서(詩書)를 뒤적이지 않았네.

오늘 아침에야 임천(林泉)의 글귀를 보내려고

쌍잉어 흰 종이의 편지를 봉하네.

 

次金先達貂詩韻(五首)

由來鷄鶴不同居 羨子三冬苦讀書

金榜亞元名信美 定應明日佩金魚

 

十年泉石獨貧居 一局碁邊一卷書

但以才疎違世用 東來不是爲鱸魚

 

平生至樂在閑居 日日披看載道書

已把一心齊物我 子能知我我知魚

 

陋巷無人問起居 半窓山日映圖書

坐聞花塢鸎呼友 行見蒲溪獺趂魚

 

閒寂蓬蒿數畝居 病多元不考詩書

今朝欲寄林泉句 尺素裁封雙鯉魚

Ⅳ-014) 토산(兎山)으로 부임하는 승봉(承奉) 신성안(辛成安)을 보내면서(당시 감무 監務 임용은 참 參 이상이기 때문에 이렇게 썼다)

토산은 경기(京畿)에 가까운 산 고을이라

감무(監務)의 푸른 적삼을 자주 빛 옷으로 갈아입었네.

어진 임금 위해서 병폐를 제거할 뿐이지

가고 멈춤(行止)이 뜻대로 안 된다고 탄식하지는 마시게.

닭을 잡는다고 소 잡는 칼을 쓰지 않으랴

풍속을 어루만지면 조서(鳳詔)를 받들어 돌아가리라.

노래 마치고 술 얼근해지자 손잡고 헤어지니

방초 어울어진 강가에 말이 날아가는 것 같네.

 

送辛承奉(成安)赴兎山(時監務之任 用叅以上故云)

兎山山郡接京畿 監務靑衫換紫衣

但爲聖明除弊瘼 莫將行止嘆乖違

割鷄不是牛刀用 撫俗還承鳳詔歸

歌闋酒闌分袖去 草芳江路馬如飛

Ⅳ-015) 조대(措大) 원문질(元文質)을 곡(哭)함 (두 수)

Ⅳ-015-01)

어릴 적부터 글읽기에 마음 간절해

나도 그 당시 한 편을 가르쳤었지.

나보다 나중 온 사람이 먼저 가다니

슬픔을 이기지 못해 푸른 하늘에 하소연하네.

Ⅳ-015-02)

눈앞에서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물거품이니

백년의 사귐도 잠시에 지나지 않네.

가엽구나! 이십사년 동안의 일이야말로

꿈속 거품 중에도 꿈속 거품일세.

 

哭元措大(文質)(二首)

讀書心切自童年 我亦當時敎一聯

後我來人先我去 不勝怊悵籲蒼天

 

過眼榮枯水上爻 百年猶是暫時交

可憐四六年間事 夢幻泡中夢幻泡

Ⅳ-016) 단오날. 빙정(氷亭) 아우에게 (다섯 수)

Ⅳ-016-01)

산 속 서재에 고요히 앉았노라니 해가 참으로 길건만

한 잔 창포 술에는 향기가 남았네.

고을 사람들의 풍악 소리가 귀에 들리니

조상님 끼친 풍속이 우리 고향에 있네.

Ⅳ-016-02)

살구에 씨가 생기고 버들 실도 길어졌네.

물 건너 산다화(山茶花)가 그윽한 향내를 보내네.

산 바라보며 새로운 시구를 찾으려 하다

나도 모르게 가물가물 수향(睡鄕)에 들어가네.

Ⅳ-016-03)

잠 깨고 나니 시 생각이 더욱 그리운데

차 항아리 향기로우니 더욱 기뻐라.

내 평생 몇 번 째 단오날인가 손 꼽아보니

비단옷 한 번 못 입고 시골에서 늙었네.

Ⅳ-016-04)

아름다운 천중절(天中節)에 흥이 더욱 솟네.

소나무엔 맑은 그늘 풀에는 향기가 나네.

잎 우거진 버들 숲은 꾀꼴새 장막이고

꽃 활짝 핀 채소밭은 나비들의 고향일세.

Ⅳ-016-05)

사람은 노을 속에 늙어가고 세월은 길기만 한데

재주가 없는 데다 향기마저 모자라 탄식하네.

형제의 모임을 자주 마련하고

좋은 철 만날 때마다 취향(醉鄕)에 놀기를 바랄 뿐일세.

 

端午。贈氷亭弟(五首)。

靜坐山齋日正長 一巵菖歜有餘香

郡人鼓樂聲來耳 祖聖遺風在我鄕

 

杏子生人柳線(☆)長 酴醾(☆)隔水送幽香

對山擬欲搜新句 不覺昏昏入睡鄕

 

睡餘詩思轉悠長 且喜茶甌深更香

屈指吾生幾端午 身無綵縷老於鄕

 

天中佳節興偏長 松有淸陰草有香

葉密柳林鸎幕府 花繁菜圃蝶家鄕

 

人老烟霞歲月長 自嘆才薄乏馨香

但思屢辨鴒原會 每遇良辰樂醉鄕

Ⅳ-017) 육순을 맞아 (두 수)

Ⅳ-017-01)

내 생애는 흩날리고 또 미친 듯했지.

병 많은 몸이나마 쉰까지는 지나왔지.

이 세상의 바람과 천둥을 이미 면했건만

어찌 얼음과 숯불이 다시 마음을 괴롭히나.

끝없는 세월은 붙들기 어려우니

유한한 몸으로 다치지나 말아야지,

공자께서 말씀하신 이순(耳順)이 부끄러우니

요즘 들어 듣고 본 것을 다 잊어버리네.

Ⅳ-017-02)

도를 배웠건만 이루지 못하고 들은 것도 적으니

무슨 일을 빙자해 임금 은혜를 갚으려나.

한 평생 수석(水石)이 내 분수인 줄 알면서도

두 시대 티끌 속에 세상 어지러움을 겪었네.

내 기질을 어찌 거원(籧瑗)처럼 되기를 바라랴만

성정(性情)은 언제나 소옹(邵雍)의 말씀 본받으려 했네.

만사에 이미 통발을 잊은 지 오래이니

마음 편히 하면 흰 구름에 누울 만하네.

【강절집(康節集)에 성정음(性情吟)이 있음】

 

六十吟(二首)

我生飄蕩又疎狂 多病筋骸五紀强

已免風雷於世上 更何氷炭到心腸

無窮歲月難留滯 有限肥膚莫毁傷

但媿宣尼言耳順 邇來聞見摠相忘

 

學道無成寡所聞 欲憑何事報明君

一涯水石知涯分 二世塵埃混世紛

氣質敢希蘧瑗化 性情常效邵雍云

已於萬務忘筌久 足以安心臥白雲

(康節集。有性情吟)

Ⅳ-018) 소강절(邵康節) 선생의 춘교십영시(春郊十詠詩)에 차운한 시와 서문

【서문】옛사람의 시를 읽고 옛사람의 뜻을 보면, 고금(古今)이 비록 다르지만 그 뜻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부귀(富貴)와 빈천(貧賤), 영고(榮枯)와 득실(得失)에 따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슬퍼하고 답답하게 여기는데, 그 까닭은 정(情)이 감발(感發)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 안타깝구나, 정(情)이여! 어찌 사람을 이렇게까지 만드는가. 내가 선생의 격양집(擊壤集)을 읽다가 공성십음(共城十吟)에 이르러 보니, 그 자서(自序)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내 몸이 궁하게 사는 것을 슬퍼하여 춘교시(春郊詩) 열 수를 지었는데, 비록 고상하지는 못하지만 정(情)을 끌어냈다고 할 만하다.” 그 시의 뜻이 내 마음을 깊이 감동시켰다. 그렇다면 하늘이 준 성품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풍미(風味)를 생각하며 각기 그 운에 차운하여 시 열 수를 지었다.

Ⅳ-018-01) 봄날 교외에 한가롭게 살다 春郊閑居

교외에 살다보니 고요하고도 한가로워

푸른 아지랑이가 산시(山市)에 이어졌네.

시냇물은 대밭을 꿰뚫고 흐르며

사립문은 지는 꽃을 마주하고 닫혔네.

붓을 들어 길게 읊조리다가

난간에 기대 얼핏 잠도 들었네.

누가 이 들나물을 캐어 왔나

잘게 씹을수록 봄 맛이 나네.

 

 

Ⅳ-018-02) 봄날 교외에 한가롭게 거닐다 春郊閑步

사심이 없는 천지의 봄이라

바람이 맑고 햇빛이 산뜻하네.

물 건너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고

다리 건너 들사람도 만났네.

풍성한 물상(物像)들을 가만히 살피다가

내 생애 가난함을 잊어버리고,

꽃다운 풀밭 위에 우연히 앉아

도탄에 허덕이는 백성을 생각했네.

Ⅳ-018-03) 봄날 교외의 꽃다운 풀밭 春郊芳草

교외 들판에 비가 한 번 지나가

풀빛이 멀리까지 끊어지지 않았네.

누가 저 녹색 비단을 가져다가

하나하나 솜씨있게 잘 마름질했나.

눈에 가득한 연기와 빛이 아득하니

봄날의 흥취가 유유히 일어나네.

그 옛날 선생께서도 맛있는 술이 있었으면

이 경치를 바라보며 술잔을 따르셨겠지.

Ⅳ-018-04) 봄날 교외에 꽃이 피다 春郊花開

교외에는 봄 그늘이 엷어

온갖 꽃이 이 초가집을 비추네.

무성한 가지는 꺾어도 되지만

부드러운 잎을 따면 안 되네.

해가 기울자 그림자도 바뀌어지고

부슬비 지난 뒤라 향기가 떠오르네.

이 아름다운 꽃이 열흘을 못 가다니

장차 마음 쓸쓸해질까 염려가 되네.

Ⅳ-018-05) 봄날 교외의 한식날 春郊寒食

아름다운 이 계절을 맘껏 즐겨야지

아름다운 이 계절을 놓치면 안 되네.

가는 곳마다 이름난 동산이 있어

철 따라 나는 산물에 깜짝 놀랍네.

꽃이 피려다 미처 못 피고

얼핏 따스하다가 어느새 추워지네.

성을 에워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준마들도 모두 한가롭게 나왔네.

Ⅳ-018-05) 봄날 교외에서 저녁에 바라보다 春郊晩望

그윽한 새들은 서로 지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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