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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근대유학문선] 수구(守舊)란 무엇인가?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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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유학문선] 수구(守舊)란 무엇인가?

세상이 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세상이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네. 굴원(屈原)의 슬픔이다. 세상이 탁하면 나도 탁하고 세상이 취했으면 나도 취하리. 어부의 지혜이다. ‘여세추이(與世推移)’의 경지이다. 나라가 있을 때에도 여세추이는 떳떳하지 못했다. 이항복은 어느 날 수박을 선물받자 광해군의 조정에서 타협하는 자신의 여세추이를 비판하는 뜻임을 알아차렸다. 하물며 나라가 없어진 뒤의 여세추이는 무엇이었을까? 1912년 호남 유학자 유영선은 영남에서 온 손님과 문답을 나누었다. ‘수구(守舊)’를 붙들 것인가? ‘여세추이로 돌아설 것인가? 그는 추호도 망설임이 없었다.

[번역]

현곡(玄谷) 주인이 곤궁한 집에 틀어박혀 세상을 붙좇지 않고, 새것을 싫어하며 수구(守舊)를 한 지 몇 년 되었다. 하루는 경상 좌도에서 손님이 왔다.

성인은 세상과 함께 옮겨가는데 그대는 어찌 괴롭게 그리 지내시오?”

주인은 묵묵히 한참을 있었다.

성인은 일이 이치에 해롭지 않은 것은 속세를 따르지만 이치에 해로우면 따르지 않으오. 만약 일이 이치에 해로운지 여부를 묻지 않고 세상과 함께 옮겨간다면 성인이라는 것이 도리어 물 위의 조롱박1)이니 어찌 성인을 귀하게 여기겠소?”

손님이 대번에 대꾸했다.

심하도다, 그대의 오만함이여! 내 듣기로 성인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시중(時中)2) 때문인데, 변통을 하지 않는다면3) 어느 하나만 고집하는 것이니, 어느 하나만 고집한다면 어찌 도를 해치지 않겠소? 태백(太伯)이 형만(荊蠻)에 달아나 그 풍속을 따라 단발을 하고 문신을 했는데 공자는 지극한 덕이라 칭찬했으니4) 이것이 세상과 함께 옮겨가는 일이 아니겠소?”

주인은 무연(撫然)했다.

그대가 말하는 시중은 군중을 따르는 일이지 우리 성인의 시중이 아니니 성인을 무욕(誣辱)하는 잘못이 어느 쪽이 더 크오? 태백이 단발하고 문신한 것은 그가 천하를 사양하기 위해서였소. 단발하고 문신해서 세상에 버려진 사람이 되었음을 알린 뒤에야 계력(季歷)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태왕(太王)의 뜻을 지킬 수 있었으니5) 이것이 태백이 지극한 덕이 되는 까닭이오. 만약 태백이 이것을 위해 단발하고 문신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성문(聖門)의 죄인에서 벗어날 수 있겠소?”

손님이 아연 다시 청했다.

중용을 보면 현재 이적(夷狄)의 위치에 있으면 이적에 맞게 행동하라고 했고6) 지금의 세상을 살면서 옛 도로 돌아가면 재앙이 그 몸에 미친다고 했으니7) 이 말이 무슨 뜻이겠소? 나는 이적의 세상을 살면 이적의 일을 하고 지금 세상을 살면 지금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주인이 정색했다.

그대 모습을 보니 어리석고 몰지각한 무리와 떨어져 있지 않은데 감히 성인을 들먹인단 말이오?”

손님이 말했다.

그대의 밝은 가르침을 원하오.”

주인이 말했다.

“(그대가 말한) 중용 14장은 현재 처한 위치를 보고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라고 말한 것이오. 그래서 부귀와 빈천과 이적과 환난을 차례로 말하면서 어디에 들어가도 자득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소. (그대가 말한) 중용 28장은 자기 생각을 쓰고 자기가 전횡하는 잘못을 말한 것이오. 그래서 지금 세상에 태어나 옛날로 돌아가면 재앙이 미친다고 경계하였소. 여기서 지금 세상이라는 것은 곧 주나라가 앞의 두 시대를 본보기로 삼아 찬란하게 빛났다8)는 때이니 폭군이 인륜을 어지럽히고 오랑캐가 중화를 어지럽히는 날을 함부로 가리키지 않소. 만약 그대의 소견대로라면 당하자연’(當下自然)9)이 제일의 도리가 되는데 무슨 까닭에 성인이 괴롭고 괴롭게 경계하는 말을 했겠소?”

손님은 마침내 지팡이를 던져 버리고 두 번 절했다.

제가 도를 들었소이다. 군자가 아니었다면 거의 이번 생을 그르칠 뻔했소이다.”

[원문]

玄谷主人杜門窮廬, 不肯與世追逐, 而厭新守舊者有年. 一日客自嶺左而來, 曰聖人與世推移, 子何苦乃爾? 主人默然良久, 曰聖人於事之無害於理者從俗, 而害於理則不從, 若不問其事之害理與否而但與世推移, 則所謂聖人者乃一水上葫蘆, 何貴乎聖人? 客乃率爾而應, 曰甚矣, 子之傲也! 吾聞所貴乎聖人者, 以其時中, 若膠柱鼓瑟, 則亦執一也. 執一豈不賊道乎? 太伯逃之荊蠻, 而從其俗斷髮文身, 孔子稱之以至德, 此非與世推移者耶? 主人撫然, 曰子之所謂時中, 乃從衆之事, 而非吾聖人之時中也. 誣辱聖人孰大焉? 太伯之斷文, 以其讓天下也. 斷文而使知爲棄人, 然後可以安季歷之心而守太王之志. 此太伯之所以爲至德也. 若太伯非爲此而斷文, 則烏得免聖門罪人乎? 客忽訝然而更請, 曰思傳素夷狄行乎夷狄, 居今世反古道, 災及其身, 此言何謂? 吾則以爲居夷狄則行夷狄之事, 居今世則行今之事. 主人正色, 曰觀君狀貌, 不離於蒙騃沒覺之流, 而敢議到聖人耶? 客曰願吾子明敎之. 主人曰思傳十四章, 言其見在所居之位而行所當爲之事, 故歷言富貴貧賤夷狄患難, 而曰無入而不自得. 二十八章, 言其自用自專之非, 故戒生今反古之災及. 其所謂今之世乃周監二代郁郁文哉之時, 非泛指暴君亂倫裔戎亂華之日也. 若如子所見, 則只當下自然爲第一等道理, 何故聖人苦苦垂戒耶? 客乃投杖而再拜, 曰僕聞道矣. 若非君子, 幾誤此生矣.

 

[출전]

유영선(柳永善), 현곡집(玄谷集) 10 야사문답(野舍問答)

[해설]

새 천 년 들어와 자주 썼던 메일체에 서술어 종결어미 이 있다. 그리 갑니당. 넘 재미있습니당. 이 표현 방식은 오래되었다. 대동기문에 의하면 어느 비오는 밤 두 나그네가 서로 장기를 두다가 심심풀이로  의 운을 써서 문답을 나누었다. “무엇하러 서울에 가는공” “녹사하러 올라간당” “내가 그대를 위해 얻어줄공” “우습다. 당치도 않당 이것이 맹사성(孟思誠)의 유명한 공당문답(公堂問答)’이다.

공당문답과 달리 진중한 문답들도 많았다. 이이(李珥) 동호문답(東湖問答), 홍대용(洪大容) 의산문답(醫山問答), 유인석(柳麟錫) 우주문답(宇宙問答)은 조선 유학자의 삼대 문답이라 칭해도 좋을 정도로 걸출하다. 동호문답은 사가독서제에 따른 독서당 과제물이었지만 도학적 경세론에 입각한 정치개혁의 의지가 충만했다. 유계(兪棨)는 이를 이어받아 강거문답(江居問答)을 지어 논의를 확장했다. 대한제국기에는 구국의 방안을 논한 작품 서호문답(西湖問答)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동호자(東湖子)’가 묻고 서호자(西湖子)’가 답하는 형식을 통해 동호의 구시대가 저물고 서호의 신시대가 도래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이에 앞서 송병선(宋秉璿)의 문인 이도복(李道復) 대한매일신보 서호문답을 투고해 을사오적을 필주했다.

전우(田愚)의 문인 유영선(柳永善, 18931961) 야사문답은 국망 직후의 작품이다. ‘수구를 붙들 것인가, ‘여세추이로 돌아설 것인가? 이적의 세상에서는 이적의 세상살이를, 지금의 세상에서는 지금의 세상살이를. 나그네는 끊임없이 집 주인에게 여세추이를 설득한다.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강조한다. 그러나 집주인은 나그네를 설득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이다. 이적의 세상, 지금의 세상이 되었다고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사람다운 도리가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자연(自然)’보다 중요한 것은 천리의 당연(當然)’이다.

여세추이인가? ‘수구인가? 이것은 전우의 문하에서 중요한 문제였다. 1921년 생애 말년의 전우가 자손과 문인에게 남긴 글이 있다. 요즈음 사람들은 입만 열면 고금이의(古今異宜)’, ‘여세추이를 말하지만 자신의 70여년 독서는 수구의 한 길이었으며 시세가 변한들 내가 어찌 감히 변할까를 말했던 정이(程頤)의 뜻을 본받아 결코 유속(流俗)에 휩쓸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수구는 국망 이전부터 전우의 한결같은 지론이었다. 신문사와 학회가 멸망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협박해 신학(新學)에 들어가게 하지만 차라리 구학(舊學)을 지키다 죽겠다는 것이 그의 심정이었다. 국망 이전이든 이후이든 그에게 수구는 세속적인 세상에 대한 비타협이며 저항이었다.

그러면 전우의 수구, 유영선의 수구는 연원이 오래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의 수구는 대개 술어적으로 守舊로 쓰였고 순상수구(循常守舊)’라는 말에서 보듯 하던대로 한다는 인순(因循)’의 뜻에 가까웠다. 비타협과 저항으로서의 수구는 근대에 출현하였다. 일본에서는 1877년 서남전쟁을 배경으로 정부에 저항한 구식 사무라이 집단을 수구라 일컬었고, 조선에서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정부의 개화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선비를 수구라 일컬었다. ‘수구라는 이름의 저항은 미증유의 사건이었다.

수구는 달라진 세상에 대한 다양한 저항 방식의 하나였다. 유인석은 조선 정부가 단발령을 강행하자 사우를 모아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의논했다. 그 세 가지는 거의소청(擧義掃淸), ‘거지수구(去之守舊)’, ‘자정수지(自靖遂志)’였다. 유인석의 의병이 거의소청에 해당하고 송병선의 자결이 자정수지에 해당한다면 전우의 선택은 거지수구의 실천이었다. 전우는 군산도로 떠나 수구의 기지를 세웠다. 곧 그곳에서 구학의 신학 비판이 전개되었다. 1909 4월 전우는 양계초의 신학을 치열하게 비판했다. 동년 5 구학중인(舊學中人)’ 유영선도 신학 비판에 가세했다. 유영선은 1921년에는 야소교 목사 홍우종(洪祐鍾)을 만나 기독교 교리를 비판했다.

수구란 무엇인가? ‘여세추이와 대립하는 개념으로서 수구란 무엇인가? 전우와 유영선은 유학 이념의 수구를 말했지만 민주주의 이념의 수구를 말할 수 있다. 헌정 질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끝내 민주주의를 붙들었던, 민주주의의 수구가 있었기에 419혁명이 가능했고 촛불혁명이 가능했다. ‘수구란 세상에 대한 비타협이며 저항이었다.

 

 

 

1) 물 위의 조롱박 : 원문의 수상호로(水上葫蘆)는 불교 용어인데 大慧 宗杲 어록에 따르면 자유자재로 다녀 구속이나 견제 받지 않고 깨끗한 곳 더러운 곳 드나들며 막히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는다.(自由自在, 不受拘牽, 入淨入穢, 不礙不沒)’고 하였다.
2) 시중(時中) : 中庸 2장에 군자가 중용의 도를 행하는 것은 군자의 덕으로 때에 맞게 하기[時中] 때문이다(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라는 구절이 있다.
3) 변통을 하지 않는다면 : 원문은 교주고슬(膠柱鼓瑟)인데, 이 말뜻은 거문고의 기러기발을 아교로 붙여 고정시켜 놓아 제대로 연주할 수 없게 만드는 것으로 변통할 줄 모르는 고지식함을 가리킨다.
4) 공자는  칭찬했으니 : 論語太伯 태백은 지극한 덕이라 이를만하다(太伯其可謂至德也已矣)’는 공자의 칭찬하는 말이 있다.
5) 계력(季歷)의 마음을  지킬 수 있었으니 : 주나라 태왕이 막내아들 계력의 아들 창( : 후일의 문왕)에게 성덕이 있음을 보고 계력에게 왕위를 전하고자 하니, 태왕의 맏아들 태백은 아우 중옹(仲雍)과 함께 형만으로 떠났다.

 

6) 현재 이적의  행동하라고 했고 : 中庸 14장에 부귀의 위치에서는 부귀에 맞게 행동하고 빈천의 위치에서는 빈천에 맞게 행동하며, 이적의 위치에서는 이적에 맞게 행동하고 환난의 위치에서는 환난에 맞게 행동하니, 군자는 어디에 들어가도 자득하지 않음이 없다.’는 구절이 있다.
7) 지금의 세상을  미친다고 했으니 : 中庸 28장에 어리석은데 자기 생각을 쓰기를 좋아하고 비천한데 자기가 전횡하기를 좋아하며 지금 세상에 태어나 옛 도에 돌아간다면 이와 같은 자는 재앙이 그 몸에 미친다는 구절이 있다.
8) 주나라가  빛났다 : 論語 八佾 주나라는 앞의 두 시대의 제도를 본보기로 절충하여 문화가 찬란하게 빛났다.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는 구절이 있다.
9) 당하자연(當下自然) : 양명학의 본체관을 표현하는 어구이다. 王守仁의 문인 王畿에 따르면 양지는 靈明함을 바탕으로 見在함을 자각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곧바로 드러나며 이러한 드러남과 현재함은 양지의 고유한 자연적 능력이다.”(이상훈, 2012, 왕용계 사상에 대한 주요 의난과 논변 고찰」『유학연구27, 419) 柳永善의 스승 田愚 당하자연을 명말 양명학자 李贄의 종지라고 보았다. 곧 이지는 당하자연을 종지로 삼아 사람들마다 모두 見成 聖人이라고 말해 천하에 함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육구연의 當下便是와 이지의 當下自然이 모두 도에 해로운 발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항해 當下當然 爲學의 요점으로 삼는다 하였다. 즉 앞뒤를 생각지 말고 利害를 헤아리지 말고 목전에서 이치에 합당함만을 보라는 것이다.

(田愚, 艮齋文集前編 4 答朴應瑞-轍在 ; 15 看李贄書識感 ; 田愚, 艮齋文集後編 6 答崔炳翊 ; 8 與高東是崔基俊)

 

[참고문헌]

柳永善, 玄谷集 9 新書論

柳永善, 玄谷集 10 蘇學問答

李珥, 栗谷全書 15 東湖問答

兪棨, 市南集 17 江居問答

洪大容, 湛軒書 4 醫山問答

柳麟錫, 毅菴集』 「宇宙問答

柳麟錫, 毅菴集 27 雜錄

 

田愚, 艮齋文集後編 12 示子孫門人

田愚, 艮齋文集別編 1 答某

李道復, 厚山集 8 西湖問答

大韓每日申報 1906 2 7, 西湖問答

大韓每日申報 1908 3 5~18 西湖問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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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노관범(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부교수)

▣유영선(柳永善)▣

1893년(고종 30)∼1960년. 근현대의 유학자.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자는 희경(禧卿), 호는 현곡(玄谷)이다. 유영선은 갑오개혁과 동학혁명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893년에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나, 나라가 망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일제강점기에 청장년의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광복을 맞아(53세) 인생의 후반기를 보냈으니 일생의 대부분을 혼란기에서 보낸 셈이다.

아버지는 유기춘(柳其春)이고 어머니는 광주 이씨이다. 5세 때 할아버지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12세 때는 할아버지를 따라 당시 고부 영주산에서 강학 활동을 하고 있던 전우(田愚)를 찾아가 스승의 예를 행하고 문하에 들어갔다. 당시 전우는 영남의 곽종석과 함께 조선 말기의 끝자락을 장식한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였다. 처음 전우에게 나아갔을 때에, 전우는 유영선의 나아가 어리기 때문에 몇 년을 기다렸다가 공부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유영선이 눈물을 흘리며 떠나지 않자 전우가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18세 때에 전우와 함께 군산도에 들어갔다가 나라가 망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에 유영선은 스승을 모시고 산속으로 들어가 통곡하며 침식을 잊으니 목이 메이고 말이 막혀서 몸을 보전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20세 때(1912)에는 전우를 따라 계화도로 옮겼으며, 이때부터 성기운(成璣運)․권순명(權純命)․오진영(吳震泳) 등과 전우의 문집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28세 때인 1920년 11월에 전우의 문집을 완성하였다. 이렇게 전우를 모시면서 배운 공부는 유영선의 학문적 성취와 성리설에 대한 견해를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30세(1922) 때 전우가 죽자 심상(心喪, 마음으로 하는 상례) 1년을 입었다. ‘심상’은 상복은 입지 않으면서 상중에 있는 것과 같이 처신하는 것을 말한다. 심상은 대체로 제자가 스승을 위해 하는 것으로, 스승과는 혈연관계가 없지만 슬퍼하는 마음이 친자식 못지않기 때문에 심상을 한다.

당시 전우를 모신 제자들이 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서도 화도(華島) 삼주석(三柱石)이라 불렸다. ‘화도 삼주석’이란 전우의 문하를 지탱하는 세 돌기둥이란 뜻이니, 당시 전우의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특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전우의 문인에 관한 내용은 1962년에 나온 『화도연원록(華嶋淵源錄)』이 가장 자세하다. 이 연원록은 「관선록(觀善錄)」․「급문(及門)」․「존모록(尊慕錄)」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여기에 등록된 인원이 모두 2,338명으로 전우의 직전제자 범위에 든다고 볼 수 있다. 유영선의 학문이나 사상 형성에 있어서, 특히 조부인 유지성(柳志聖)의 영향이 컸다. 그는 손자인 유영선을 일찍부터 맡아 가르쳤고, 자손들의 교육을 위해 수천 권의 서책을 집안에 마련할 정도로 교육열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유영선이 전우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함으로써 이이-송시열-이재-김원행-홍직필-임헌회-전우로 이어지는 기호학파 낙론계열의 주요한 학통을 계승한다. 조부인 유지성은 간재와 친밀할 뿐만 아니라 학문적 교유도 잦았다. 아버지 유기춘은 임헌회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이러한 집안의 학문 배경으로 인해 유영선은 임헌회와 전우의 학문을 어려서부터 접할 수 있었다. 더구나 조부가 직접 전우에게 교육을 부탁함으로써 유영선은 전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9년을 한결같이 수학하여 그의 학통을 이었다. 말년에는 자비를 들여 현곡정사를 지어 후학들을 양성하였는데, 전국에서 찾아온 제자들의 수가 수백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신사범(申思範)․임종수(林鍾秀)․정헌조(鄭憲朝)․유제경(柳濟敬) 등이 있다.

유영선의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태극도설」․「기질명덕설」 등과 관련하여 주고받은 서신을 분류하여 『성리유선(性理類選)』(44세, 1936)을 편찬하였으며, 『담화연원록(潭華淵源錄)』(48세, 1940)을 지어 공자와 주자를 계승하여 이이-송시열……전우로 이어지는 도학의 학통을 정리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 집안 자손들을 가르치기 위한 저서로 『훈자편(訓子編)』․『규범요감(閨範要鑑)』 등이 있다. 특히 예학에 밝았는데, 『사례제요(四禮提要)』(60세, 1952)는 관혼상제의 예학에 관해 총 정리한 저술이다.

“관혼상제는 인간이 인간되는 도리로써 한번 예를 잃으면 오랑캐로 돌아가고, 두 번 예를 잃으면 짐승에 가깝게 된다”

라고 하여 관혼상제를 따를 것을 강조하였다. 그의 사후에 아들에 의해 『현곡집』(1978) 32권 16책이 출간되었다. 유영선은 고창에 용암사를 건립하고 전우의 영정을 봉안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에 이 용암사에 배향되었다.

유영선은 집안의 학문 배경과 전우를 사사하면서 성리학을 자신의 주요 학문으로 삼았다. 유영선의 성리학적 특징은 기호학파의 전통적 입장인 ‘리는 무위(無爲)하고 기는 유위(有爲)하다. 성은 무위하니 리이고 심은 유위하니 기이다’는데 근거하여 자신의 성리학 이론을 전개한다. 성리학은 이 세상의 존재를 리와 기의 범주로 설명한다. 리는 원리 또는 법칙을 가리키고, 기는 구체 사물을 가리킨다.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호흡되고 생각되는 모든 것은 기의 영역에 포함된다. 반면 리는 이러한 기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이유 또는 근거가 된다. 이처럼 리는 원리이고 법칙의 개념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며 냄새도 없는 개념이다. 때문에 이러한 리의 성질을 ‘무위(無爲)’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말 그대로 함이 없다는 것으로, 작용의 성질을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반대로 기는 구체 사물이기 때문에 작용의 성질을 가지므로 유위(有爲)라고 말한다. 즉 어떤 행함이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리의 개념을 두고 조선의 유학자들은 정의를 달리한다. 유영선처럼 리를 철저히 ‘무위’의 개념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리를 지나치게 ‘무위’의 개념으로 해석할 경우 리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또는 할 수 없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을 우려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래서 리의 무위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리가 실제로 이 세상의 모든 기적 존재를 주재하는 주재성 또는 능동성을 강조하게 된다. 실제로 기의 세계를 주재하기 때문에 능동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리에 능동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리가 실제로 인간의 심의 작용을 주재하여 인간의 마음이 올바르게 작용하도록 돕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람의 경우, 사람의 몸을 주재하는 것은 마음인데, 이 마음이 몸을 주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리의 실제적 주재성을 확립하여 현실세계의 혼란을 야기하는 기의 활동을 철저히 차단해나갈 것을 강조한다. 율곡의 학문과 이론을 계승한 율곡학파에서 주로 전자를 주장한 반면, 퇴계의 학문과 이론을 계승한 퇴계학파에서는 주로 후자를 주장한다.

유영선을 율곡계열의 학자로 그의 이론은 철저히 ‘리가 무위하고 기가 유위하다’는데 근거하여 전개된다. 리는 무위하므로 작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기의 몫이 된다. 따라서 성리학에서의 주요 이론인 리의 동정(動靜, 움직이고 고요한 것)문제 또한 반대한다. 동정하는 것은 결코 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유영선은 ‘성은 무위하므로 리이고, 심은 유위하므로 기이다’는데 근거하여 자신의 심성이론을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심과 성을 서로 다른 별개의 물건으로 구분하고, 성은 높고 심은 낮다는 ‘성존심비(性尊心卑)’의 이론을 전개한다. 성은 형이상의 개념이기 때문에 높은 것이 되고, 심은 형이하의 개념이기 때문에 낮은 것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성은 순수한 리이기 때문에 순선한 것이지만, 심은 리와 기가 합쳐져 있기 때문에 선과 악이 함께 한다. 또한 심은 유위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로 규정하고, 심은 기이므로 항상 성을 근본으로 삼을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스승인 전우 ‘심본성(心本性)’의 이론적 요지이며 또한 유영선의 성리학적 특징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심본성’은 심은 어디까지나 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심은 기이니 선과 악이 함께 있으므로 항상 순선한 성을 표준으로 삼아야 악으로 빠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영선은 왜 심이 성을 근본으로 삼을 것을 강조하는가.

이것은 당시에 심을 리로 규정하여 판단과 행위의 기준으로 삼는 당시 ‘심즉리’를 주장하는 심학파들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심학파의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심즉리’를 주장한 이진상(李震相)과 그의 제자 곽종석(郭鍾錫)이다. 이들은 인간의 선한 행위의 근거를 직접 심에서 구함으로써 그 실천을 더욱 강조하고 보편화시킨다. 이들처럼 심을 리로써 규정할 경우, 자칫 심이 내리는 판단이 자의적으로 해석됨에 따라 현실의 모든 일들을 주관적으로 판단되어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예컨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 결국 옳은 일이라고 판단하게 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객관적 기준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고, 나의 생각과 판단을 그대로 실천하면 된다. 그러나 내 마음의 생각과 판단이 옳다는 이러한 주장은 자칫 지나치게 주관적인 경향에 빠져서 객관적인 기준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므로 나의 입장에서 옳다고 판단되는 일이 상대방 입장에서 그른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인 표준이나 기준이 애매모호해진다는 말이다.

때문에 유영선은 어떤 일에서나 도덕규범에서나 객관적 표준을 수립할 것을 강조한다. 그 객관적 표준은 바로 심이 성을 근거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의 마음이 곧장 리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성에 근본할 때만이 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때의 리는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객관적 도덕표준을 가리킨다. 이에

“성을 높여서 스승으로 삼는 것은 바른 학문이 되고, 심을 믿고 자만하는 것은 이단의 학문이 된다”거나 “심은 기에 속하니 심이 감히 멋대로 써서는 안되고 반드시 성으로 근본을 삼으니, 이것이 학문의 바뀔 수 없는 정론이다”

라고 강조한다. 심은 어디까지나 기이기 때문에 심을 믿고 자만하면 이단의 학문에 이르게 되니, 반드시 성을 스승으로 삼아 따르고 높여서 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심본성’을 주장하고, 이러한 ‘심본성’에 근거하여 성은 심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성존심비’를 주장한 것이다.

 

[참고문헌]: 『현곡집』(유영선, 여강출판사, 198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사상사에서 간재학의 위치」(금장태, 『간재학논총』1, 간재학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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