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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참봉공파종중▣

◈조선 중․후기 영양의 유교문화권과 한양조씨이야기◈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1. 11. 20.

 

조선 중․후기 영양의 유교문화권과 한양조씨이야기◈

1.16세기 영양의 인물과 문화

1)16세기 조선의 정치적 상황

16세기 조선사회는 연산군이 재위하면서 무수한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소위 4대 사화(巳火)가 발생한 시기이다. 영남사림의 종장으로 추앙받든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조의제문을 지어 간접적으로 세조의 단종을 죽이고 집권한 것을 훈구파들이 트집잡아 김종직의 문하의 제들들이 제거당하던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그 이후 폐비 윤씨 사사사건에 의해 다시 많는 선비들과 후구파들이 같이 화를 당한 갑자사화가 연산군 시절에 일어났다. 1506년 박원종, 유순정,성안의 등이 주도한 중종반정에 의해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여 좆광종,김정, 김식 등의 기묘사림들이 개혁정치를 단행했으나 주초위왕 사건과 위훈삭제 사건에 의해서 개혁파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림들이 사사되고 귀양가는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중종이 죽고 잠시 인종이 즉위하여 사림정치의 시작되는가 했으나 인종이 즉위 1년도 되지 않고 흉을 당하고 문정왕후의 소생인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주도한 소윤들이 인종의 외삼촌인 대윤의 윤임과 사림파들을 제거하는 사화를 일으킨다. 이것이 1545년 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결국 1567년에 집권한 선조가 즉위하면서 선비들의 집단인 사림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사람정치가 본격화 되었다. 그러나 1575년을 기점으로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되는 을해당론이 발생하여 본격적인 붕당정치가 시작되어 1589년에 많은 동인들이 희생되는 정여립모반사건과 정철의 건저의 사건으로 다시 동인들이 집권하는등 붕당정치가 격화되고 있던 시점에 결국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영양에서도 많은 인물들이 임진왜란에서 맹활약하는데, 이렇게 16세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경험하면서 16세기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2)16세기 정치적 사건

①무오사화(1498)

 

원인/과정-김종직의 조의제문(세조즉위비판)을 김일손이 사초에 실으려다 훈구세력들(이극돈, 유자광, 윤필상, 노사신 등)이 연산군을 부추겨 사림파의 거두인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손 등의 신진사류들을 처형한 사건을 말한다. 결과-향사례․향음주례를 주관하던 사람들의 기구가 혁파되었고, 다수의 신진사류들이 사형․파직,유배를 당하였고 극히 소수만이 정계에 남게 되었다.

②갑자사화(1504)

원인/과정-임사홍, 신수근 등 몇몇 척신들이(궁중파) 연산군에게 윤씨의 폐비사사사건의 내막을 알려 이에 관련된 훈구파 한명회, 정창손 등이 부관참시 당하고 김굉필, 정여창 등의 사림들이 화를 당한 사건을 말한다.

※ 사림파 정리 ★★매우중요

①계보-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김일손․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조식․이이․성혼․김장생→송시열

②등장시기-성종때를 전후하여 등장한 신진세력으로 선조이후 완전집권

③세력기반-고려말의 향리로써 지방의 중소지주계층이 조선왕조를 거부하고 낙향하여 유향소,서원,향약,사창제 운영 등의 사회․경제적 기반과 성리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향촌세력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④학풍-경학을 중시하고 성리학외의 학문, 종교사상에 척사론적 입장과 왕도정치 추구와 향촌자치 추구, 학술언론 중시, 단군보다 기자를 중시하는 소중화 의식을 강조하고 예학․보학을 숭상하며 문학․군사학․기술학을 천시하였다. 또한 서원서당으로 대표되는 사학중심의 교육을 주장하였다

중 종(1506~1544)

①중종반정(1506)

연산군의 실정에 대하여 박원종, 성희안 등의 훈구대신이 연산군을 추방하고 이복동생인 진성군(중종)을 추대한 사건을 말한다.

②조광조의 혁신정치(1515~19) (★★매우중요)

 

중종의 훈구세력 견제와 유교정치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파들을 등용하였다. 도학정치사상에 바탕을 둔 혁신정치를 행하다가 38살의 나이로 사약을 받게되었다.

※혁신정치 내용

위훈삭제-중종반정때 부당하게 공신으로 책정된 76명의 공신의 칭호와 토지 및 노비를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

지방의 사림을 정권에 등용시키기 위하여 천거제 형식인 현량과를 실시하였다.

․이조․병조의 전랑직에게 인사권, 낭천권을 주게하였다.

정통성리학질서를 추구하기 위하여 유향소 철폐와 사마소 설치, 향약 실시를 주장하였다.

유교윤리를 보급하기 위하여 삼강행실, 이륜행실, 주자가례, 소학 등을 보급하였다.

불교, 도교행사를 금지하기 위하여 승과제도, 소격서 철폐

현실에 대한 개혁으로 내수사장리 폐지와 방납의 폐단시정을 주장하였다.

토지집중의 완화를 위하여 균전론과 한전론을 시행할 것을 주장

․한글보급을 위하여 언문청을 설치하였다.

③기묘사화(1519)

사림파의 급진개혁에 위기의식을 느낀 중종과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의 훈구세력이 조광조, 김식, 김인국 등의 사림세력을 위훈삭제 사건과 주초위왕(조광조가 왕이 될 것이라는 무고설) 사건으로 사림세력을 제거한 사건을 말한다.

④삼포왜란(1510)

비변사 임시기구화 되고, 임신약조(1512, 제포만 개항)가 체결

⑤사량진 왜변(1544)

정미약조(1547)가 체결되었다.

 

인․명종 재위

①을사사화(1545)

왕위계승을 둘러싼 외척간의 대립으로 인종의 외가인 대윤(윤임, 장중왕후)의 유림과 명종의 외가인 소윤(윤원형, 문정왕후)의 갈등으로 인종이 9개월 만에 죽자 정권을 잡은 소윤측이 대윤세력과 유관, 유인숙 등 사림들도 더불어 피해를 본 사건으로 48명의 피해자가 발생하였다.

②정미사화(1547)

전라도 양재역 벽서사건(위로는 여왕(문정왕후) 아래로는 간신이 날뛰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다)으로 소윤이 대윤의 잔당을 제거하였는데 이때 사림세력인 회재 이언적도 제거되었다.

 

 

③을묘왜변(1555)

국교가 단절되고, 비변사가 상설기구화 되었다.

④임꺽정의 난(1559~62)

16C는 우리나라가 소빙기로 전염병과 가뭄이 심했다. 그런데다 훈구파의 전행으로 임꺽정 등 도적떼들이 양반 부호들을 대상으로 약탈하여 백성들의 큰 호응을 얻다가 3년여만에 진압된 난을 말한다.

사림세력은 향촌에서의 세력(서원․향약․농장)기반으로 명종말기(문정왕후 사후)부터 정계진출을 활발히 하여 선조때 이르러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붕당정치가 발생하게 되고 전개된다. 즉 붕당은 사림파끼리의 주도권 싸움으로 중앙과 지방(서원)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활동하게된다.

 

선조(1567~1607년)

①붕당발생(乙亥黨論,1575)

이조전랑직 문제로 구세력을 대표하는 이이의 문인인 심의경, 신세력을 대표하는 이황의 문인인 김효원이 대립한 사건으로 붕당발생의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영남학파의 동인과 기호학파의 서림으로 붕당되었다. 서인은 대체로 서울근방의 생활근거를 둔 고관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학문적으로 이이, 기대승, 김인후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정책이 주로 현실문제에 역점을 두어 제도개혁을 통한 부국안민에 치중한 반면 동인은 영남의 이황과 조식문인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이밖에도 개성의 서경덕의 문인도 가담하여 심성론에 치중하여 도덕적 자기절제를 통해 부패를 막으려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②정여립 모반사건(己丑獄死,1589)

 

동인계열의 급진파인 정여립이 전라도 진안에서 대동계를 조직하여 황해도까지 조직을 확대하다 조사를 맡은 서인 정철이 수많은 동인계 인사를 역모사건으로 연루되어 제거한 사건을 말한다.

③정철 건저의(세자책봉 건의) 문제(1591)

좌의정 정철이 인빈 김씨가 신성군을 낳자 빨리 세자를 정할 것을 건의하자 신성군파가 왕을 충동질하여 정철등을 숙청한 사건을 말한다.

④남인․북인 분당(1591)

정철처벌문제를 둘러싸고 이황계열은 온건한 처벌을 주장하고 조식․서경덕 계열은 강경한 처벌을 주장하다가 동인계열이 남북으로 분당되어 선조 후반기는 서인(이이),남인(이황),북인(조식․서경덕)으로 정립되었다.

⑤임진왜란(1592)

조․일 7년전쟁

⑥정유재란(1597)

⑦북인계열 대북․소북으로 분당

정철일파의 실각으로 동인 특히 북인이 우세한 가운데 임진왜란이 시작된 후에 후궁인 공빈김씨 소생인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인목대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추대하려는 세력과의 사이에서 갈등이 야기되었는데 광해군 추종세력을 ‘대북’, 영창대군 추종세력을 ‘소북’이라 하였고, 선조가 돌아가고 광해군이 즉위(1608)하자 임진왜란 중 항일전쟁을 주도했던 대북파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⑧일본과 국교재개(1607,에도막부)

일본의 도쿠카와 막부가 조선과의 국교재개를 간청해와 사명당 유정을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하고 조선인 포로 7천여 명을 되돌려 받은 뒤 국교를 재개하였다(왜란중 포로로 끌려간 유학자중 이황의 문인인 강항이 귀국후 간양록이라는 견문기를 저술, 또한 이탈리아로 팔려간 사람으로 안토니오 코레아가 있다). 이후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에 이르기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약 250년간 평화관계를 지속했다.

⑨광해군 즉위(1608)

⑩기유약조 채결(1609)

 

3)16세기 문화

①문정왕후가 불교를 중시하여 보우를 봉은사 주지로 삼고 선교양종과 승과제도를 부활케하여 오랜만에 불교가 중흥하여 서산, 사명과 같은 명승들이 배출되었으나 문정왕후 사후 사림의 비판을 사서 보우가 처형되었다.

②대용식물 조제법을 적은 서적인 구황찰요(진휼청)를 간행했다.

4)16세기 학술문화

①백운동서원-최초서원으로 주세붕이 풍기에 세움, 안향 제사

②주자대전 보급-주자대전 고의(권벌)

③잠서언해(김안국)-한글판

④승과 폐지-토목공사에 강제징발

⑤서적 편찬-신증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승람을 증복 간행한 것으로 현존함)

5) 15세기 16세기 영양의 인물과 문화

16세기 영양은 1413년(태종13)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영해부에 편속되었다.

15세기 영양인물로 병마절도사를 지낸 신암(愼菴,1415~1488) 남손장군이 있다. 용담군수를 역임한 송정 남수의 둘째 아들로 1415년 영해부 인창리에서 태어났다. 만년에 퇴관하여 영양 현동에 입향하여 몇해 후 동부동으로 이주하였다. 후손들이 일월면 섬촌동에 세거하고 있다. 현재 섬촌리 708번지에는 영양남씨 신암공파종택이 도문화재자료 48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건물은 원래 18세기 중엽에 안동권씨 문중에서 건립한 것을 영양남씨 후손들이 1893년 매입하여 종택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편 섬촌리 626-2번지에 있는 섬촌리 신암정(愼菴亭)은 남손을 기리기 위해 1947년 중수건립한 정자이다.

 

아들인 남찬은 함양오씨의 입향조인 부장 오필을 사위로 맞이하여 영양남씨와 함양오씨가 혼맥을 이었다. 오필은 안동 임하로 落南한 오엄(吳儼)의 증손으로 진보에서 영양 원당리로 이거하여 함양오씨 영양 입향조로 나중에 사위로 한양조씨의 영양입향조인 조원(趙源)을 맞이 하였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영양남씨,함양오씨,한양조씨가 입향하여 후손들이 계속하여 영양의 문화를 주도하게 되고 군내에 많이 세거하게 된다. 조원을 기리기 위한 재사가 영양읍 상원2리 비리골 산자락에 있는 상원리 율수당이다.정면4칸, 측면2칸의 규모로 팔작기와지붕을 이고 있다. 한양조씨 참판공 조원의 종택은 일월면 도계리에 있는 사의정사(思義精舍)이다.

한편 영양남씨는 남민(南敏)을 시조로 하며 남민의 7세손 대장군(大將軍) 남진용(南鎭勇)의 세 아들대에 장남 남홍보(南洪輔)가 영양(英陽), 차남 남군보(南君甫)는 의령(宜寧), 삼남 남광보(南匡甫)는 고성(固城)에 정착하여 살면서 분관하여 중시조이자 각 파의 일대조가 되었다. 영의공 남민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재사가 영양읍 동부리 527번지에 있는 도항재(道項齋)이다.

남군보의 9세손이며 통정대부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 남철의 3자로서 안동부에서 입암면 신사동으로 입향한 남지손이 이 당시에 영양의 인물이다.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역임한 김해김씨 영양입향조인 김세보(金世輔,1468~1538)가 연산군(燕山君) 때에 벼슬을 그만두고 영양(英陽)에 들어와 일월산(日月山) 중에 은거하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입암(立岩) 신사동에 들어와 살았고 그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명철회양군자라 불리던 김세보가 부용재 및 신락당을 지었다. 부용재는 구조가 정면4칸, 측면1칸반의 규모로 팔작기와지붕을 이고 있다.

이 건물은 마을안쪽의 민가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데, 마을 안에서도 지형이 높은 곳에 있다. 민가로 둘러 싸이기 이전에는 부용재 뒤에 있는 김세보의 13대손인 김종환(金鍾煥)이 세운 기암정(沂巖亭)과 반변천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는 권상길(權尙吉)의 남곡정사(南谷精舍), 그리고 박언필(朴彦弼)의 도은정(島隱亭,입암면 산해리 182번지)이 한 눈에 들어올 만큼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박언필은 춘천박씨로 문의공 박항의 후손으로 중종조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호가 도은으로 청계 김진의 자제인 약봉 김극일과 도의교를 맺으면서 살았다.

 

문화재 부용재-1930년 건립

부용꽃처럼 향기로운 덕이 배어있는 곳

 

 

1450년 문관에 급제하고 대사간에 이른 경상도관찰사 금숙의 아들인 금숭은 벼슬을 그만두고 입암면 신사동에 이거하여 살았다.

 

문화재

영양 돈간재 및 주사-경북 기념물 142호. 1560년대 건립 .청기면

16세기 영양문화와 학술을 주도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인물은 청계 김진(1500~1580)이다. 그는 안동 임하 내앞본가에서 출생하여 1580년 청기 초동 흥림초사에서 서가하였다. 진사에 합격하고 오직 자제교육과 지방사회에서 교육자로서 사회교화에 힘쓴 인물로 청계 김진은 약봉 극일, 귀봉 수일, 운암 명일, 학봉 성일, 남악 복일 등 다섯 아들 모두를 과거에 합격시킨 의성 김씨 중흥조이다. 특히 학봉은 퇴계의 정맥을 이은 인물이다. 의성 김씨는 서산 김흥락, 김대락, 김동삼 등 독립운동 유공자만 38명에 달한다. 1550년대 후반부터 영양 청기에서 농장을 경영하면서 영양최초의 서당인 영산서당(英山書堂) 창건을 주도한 것은 영양문화창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청계 김진(1500~1580)등 모두 23명이 1578년에 발의한 영산서당 건립에 동참한 것으로 보아 영양의 한양조씨 가문이 사회적경제적인 기반이 단단해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영산서당은 1577년(宣祖10) 9월에 그 당시 청기면 초동椒洞 (현 靑杞面)에 일시 우거하던(영양 돈간재 및 주사-경북 기념물 142호.돈간재 편액은 김진의 증손자 표은 김시온공의 작품) 진사 청계靑溪 김진金璡선생이 향내 노소인사 수십 인으로 더불어 주창하고 발기하여 창설하게 되었다. 그 당시 발기인은 김진金璡, 김호金虎, 남문성南文成, 오시준吳時俊, 남필성南弼成, 남천수南天授(남손의 현손으로 참봉), 김응현金應鉉, 오익수吳益壽, 남천흥南川興, 오민수吳敏壽, 정홍鄭洪, 남윤조南胤曺, 권응우權應虞, 남경南璟, 조광인趙光仁,조광의趙光義등 16인이 각자 곡물 2곡(1斛은 10斗)을 출자하여 그 곡식을 해마다 장리로서 거두어서 장차 서당을 창설코자 하였는데, 청계공靑溪公 김진金璡 선생은 영양이 영해부寧海府에 속하여 인구가 적고 풍속이 미개하여 향풍과 예문이 뒤떨어진 것을 느끼고 타향인데도 불구하고

곡물을 15곡을 회사하여 영산서당 건립에 많은 공적을 남기었다. 그러나 그 곡식을 가지고는 서당을 건립할 수가 없어서 매년 향회를 열고 곡물을 거두었는데 이듬해 거둔 곡식이 18석 4두 6승이라 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해 추가로 권성權誠, 남국간南國幹, 박봉서朴鳳瑞, 이귀승李貴承, 남사문南士文, 남사명南士明, 남인록南仁錄등 7인이 가입하였다. 그 후 1637년에 서당 향회鄕會를 열고 서당창설취지와 향풍개선을 위한 강령을 다음과 같이 정하고 죄과罪過의 경중輕重에 따라 처벌하여 기강紀綱을 세웠다, 부모불효 형제불화父母不孝 兄弟不和, 붕우불신 능만장상朋友不信 凌慢長上, 비방토주 사비보상誹謗土主 私費寶上, 이렇게 매년 향회를 열어 상호강신과 곡물의 출납을 하였으며 1638년에 서당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한편 영산서당은 존재 이휘일과 갈암 이현일(1627~1704)의 부친인 석계 이시명(1580~1674)에 의해서 영산서원으로 개창되었으며, 영양 사족의 학문과 문화 활동의 중심 공간으로 기능을 하였다. 이렇게 매년 향회를 열어 상호강신과 곡물의 출납을 하였으며 1638년에 서당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 때 청계선생이 필목(명과, 삼베) 등 15필(1필은 40자)을 영산서당에 기증하였다. 그 해 서당을 세우게 되었는데 위치는 영산하로서, 영양읍내의 우편이었다고 전하는데 현재 현1동(縣一洞)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당을 창설한 후 7년이 지나서 청계선생의 장자인 김극일金克一과 권춘계權春桂, 구찬조具贊祚, 오극성吳克成(吳敏壽의 子)등 4인이 추가로 가입하여 부자간에도 서당건립에 참여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1592년(宣祖25)에 뜻하지 않은 임진란이 일어나자 국사가 어지럽고 인심이 흉흉하여 사람들이 흩어지는 바람에 자연적으로 10여년 간은 향회와 학도의 수업이 1602년(宣祖35)까지 중단되었다. 그 때의 서당 규모는 방과 마루, 부엌방 창고, 오양간까지 지었으며 규모가 상당히 컸다.

서당은 처음에는 훈장을 두었다가 차차 학도의 수와 재정 형편이 좋아져서 교관 또는 교수를 두어 당사堂舍에서 기거起居하고 학자들이 담당하여 가르치니 곡식과 의복을 공급하고 숙직을 두고 사역使役에 충당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의 서당의 규모와 학도의 수가 많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매년 춘추로 향회를 열어 그 비용은 보상곡寶上穀(창설자가 낸 곡식) 의 취리를 거두어서 강회시 훈장訓長의 요식미料食未, 말의 사료대. 기타 제경비 들을 지출하고 유사有司를 두어 매년 교대하면서 서당 살림을 살았다. 그 후 1655년(孝宗6)에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선생이 당장堂長으로 있을 때, 시인 백운자白雲子, 권상일權尙逸 선생이 학관學官으로 있었던 일도 있다. 그 때 석계선생은 문풍조성과 사자양성士子養成에 힘을 써서 향내 유림과 더불어 영산서당을 서원으로 승격시킬 것을 주창하여 1655년(孝宗6)에 서원으로 승격 되었다.

영산서원은 1638년에 세운 영산서당을 1655년(孝宗6)에 석계 이시명 선생이 당장堂長으로 있을 때 서당을 서원으로 승격 시킬 것을 주창하여 서원이 되었다.

그 때 영산서당을 일부 수리하고 후면에 묘우廟宇만 새로 세우고 서당은 종전의 것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 때 영산서당에 보관된 서적, 재산까지 서원으로 인계하였으며, 숙종 20년에 사액賜額(임금이 서당 이름을 지어준 것) 하였다.

그러나 서원으로 승격된 뒤에도 종전과 같이 춘추로 강신講信하였지만, 학자의 춘추 혹은 삼동 강학講學과 매월 초일일 강회講會는 종전보다 규모가 커졌다. 서원에 유사有司 또는 원임院任, 원장院長을 선임하여 강회 때에는 반드시 성주城主(현감)와 교관敎官 또는 학우의 강관講官으로 유사有司와 같이 회합,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등을 강론하여 그 뜻과 비결을 배웠다.

본군에는 복현될 때까지 향교가 없었으므로 향내 선비들의 수학처修學處로는 영산서원 뿐 이었으나, 숙종 9년에 복현이 되고 영산하에 관아를 영건하고 객사를 신축할 때 건물이 퇴락하므로 부득이 현동으로 이건하게 되었다. 이건한 연대는 상고詳考할 수 없으나 복현한 1683년(숙종9)에 서원으로 승격한지 28년째이니 이때를 전후하여 이건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새로 세운 서원은 마루와 행랑채가 훨씬 넓고 시장과 떨어졌으며 배산임수背山臨水하고 앞에는 층암절벽의 경치가 있으며 강이 있어 학도學徒의 수양과 공부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1694년 (숙종 20)에 ‘영산英山’이라고 사액되었으며, 그 뒤 김성일金誠一을 추가 배향하였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묘우廟宇, 강당, 신문神門, 동재東齋, 서재西齋, 전사청典祀廳, 주소廚所 등이 있었다. 창건 당시에는 이황李滉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사액서원이 된 후 김성일金誠一을 추향追享하였다. 현재는 향사를 지내지 않는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현재는 옛터만이 남아있어 서원터라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참고문헌 : 『전고대방典故大方』『경상북도사』(경상북도, 1983). 『英陽郡誌』

 

 

 

 

 

 

문화재- 회곡고택(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79호)

청기면 기포리 261번지

2.안동권씨 회곡 권춘란(權春蘭, 1539~1617)

 

 

자는 언회(彦晦)이고, 호는 회곡(晦谷)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신라 말기에 왕건을 도와 고창(지금의 안동시)에서 후백제의 견훤을 무찌르는데 공을 세우고

 

태사(지금의 부총리에 해당) 권행(權幸)의 후예이다. 그의 조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통예원좌통예

 

(通禮院左通禮) 행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에 추증된 권모(權模)이고, 부친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된 권석충(權錫忠)이다.

 

권춘란은 1539년(중종34) 지금의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에서 권석충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선천적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고결한 인품을 숭상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주위사람들이 장래에 그가 크게

 

빛날 것으로 기대했다. 어린 나이에 감히 할 수 없는 주역(周易) 공부에 관심을 보여 틈만 나면 주역의

 

괘효(卦爻)를 본따서 그렸다. 한번은 이런 그의 행동을 부친이 보고는 “이것은 대인(大人)이 배우는

 

것이어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권춘란은 오히려

 

“저는 항상 대인의 뜻을 사모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여 부친이 학문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진

 

구봉령(具鳳齡)에게 그를 보내는 계기가 되었다.

 

본격적인 배움의 길에 나선 권춘란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새벽 일찍 서당 앞에 가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으니, 배움에 대한 열정이 한결같았다. 그리하여 수업의 진도 또한, 남보다 빨랐으며,

 

 

스승인 구봉령에게 배운 뒤 이황(李滉)의 문하에 나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미 구봉령을 통하여

 

선생의 총명과 인품에 대해 알고 있었던 이황은 찾아온 선생을 위해 윗자리를 피하면서 매우 정중히

 

대하였다고 한다.

 

권춘란은 2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5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검열, 대동찰방, 정언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나아갔다. 비록 관직생활을 짧게 하였지만, 공직에 나아가면 그는 언제나 민심을 살펴 불쌍한

 

백성들을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었다. 영천(榮川: 지금의 영주)군수 시절에 백성들이 미신을 좋아해서

 

음사(淫祀)를 숭배하는 것을 보고는 단호히 철폐령을 내려 영주의 해괴한 풍속을 없앴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관직생활에는 별다른 뜻이 없었다. 다만, 오직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전념하는 데에만 뜻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말년에 회곡고택에서 지낼 때 안동에 이름난 선비인 류성룡(柳成龍)과 의문

 

나는 점을 편지로 주고받기를 좋아하였다.

 

권춘란의 효행과 우의가 아주 깊었다. 어머니가 병중에 계실 때는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달여 드려

 

한 달 만에 낫게 하였고, 스승인 구봉령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장 달려가 간병하기를 부모

 

모시듯 하였다. 또한,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상일에 나서기를 싫어하였지만,

 

선생은 사재를 털어 의병을 돕는 한편 의병장 김윤명(金允命) 휘하에 들어가 맞서 싸우길 주저하지

 

않았다.

 

 

- 개국공신(開國功臣)의 집안, 안동권씨.

안동 권씨의 시조인 권행(權幸)의 본래 성(姓)은 경주 김씨이다. 신라와 후백제, 후고구려가 대치하고 있던

 

시대인 서기 930년(경순왕4) 왕건의 이끄는 고려군이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고창군(高昌郡: 지금의 안동)

 

에서 대치하자 김선평(金宣平), 장정필(張貞弼)과 함께 고려군을 도와 후백제군을 무찌르는 데 공을 세웠다.

 

이에 왕건이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하여 식읍(食邑)으로 내리고, 권행에게 권씨(權氏) 성을 내린 것에서

 

안동 권씨가 시작되었다.

 

안동권씨는 10세(世)를 전후하여 크게 15파로 갈라진다. 그중에서도 추밀원부사공파(樞密院副使公派: 權守平)와

 

복야공파(僕射公派: 權守洪), 인가파(仁可派), 좌윤공파(佐尹公派: 權至正)에서 인물이 많이 나왔다. 권춘란은

 

이러한 집안에서 권행의 24세손으로 태어났다.

 

 

- 관련유물

회곡고택으로 들어오는 길에 있는 사당에 회곡선생문집(晦谷先生文集), 장곡선생유서통(藏谷先生諭書筒)과

 

교지(敎旨), 옥관연(玉冠硯), 옥관자(玉冠子), 관인(官印), 호패(號牌), 공신록(功臣錄), 행장기(行狀記) 등

 

가문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유세통[유서통(諭書筒)]

 

'유세통'은 '유서통(諭書筒)'에서 온 말로, 유서통은 옛날에 임금이 고관(高官)들에게 중대한 어명(御命)을

 

 

내릴 때에 어명을 적은 지령서를 유서(諭書)라고 하였으며, 그 '유서(諭書)를 담은 대나무 통'을 일러서

 

'유서통(諭書筒)'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유서통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공문서(公文書)이기 때문에 엄중한

 

보호가 필요했다.

이에 나라에서는 이 유서통을 메고 가는 자(者)에게 만약 길을 가로막거나 시비를 걸거나 방해를 하면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강력한 법을 적용하였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고 보니, 신분이 높지 않던 전령(傳令)들은 이 유서통을 메고 가면서 평소에 천한 신분으로 말미암아

 

푸대접을 받았던 양반 권력층에 대해서 한 풀이라도 하듯이 갖은 행패를 부리면서 거들먹거려도 감히 그 누구도 대항

 

하며 함부로 다룰 수가 없었다.

 

따라서 유서통을 멘 전령들은 주막(酒幕)이나 관아(官衙), 심지어는 양반들에게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행패를 부리곤 하였다.

그 이후로 분수도 모르고 함부로 행패를 부리는 자를 일러서 "무슨 '유세통'을 짊어졌냐"고 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유세를 부린다'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3.회곡고택(晦谷古宅)

 

명 칭 : 회곡고택(晦谷古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기포리 261

건 축 주 : 권춘란(權春蘭, 1539~1617)

건축시기 : 1592년(추정)

이건시기 : 1738년

문 화 재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9호, 1988.09.22 지정

 

 

 

 

 

- 건축 이야기

회곡고택은 권춘란에게 맏아들을 입양한 동생 권춘계(權春桂)가 임진왜란 직전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며,

 

뒤에 권춘란이 만년에 살던 곳이다. 이후 후손들이 지금의 건물이 있는 영양으로 입향하였다고 하나 고택이

 

옮겨온 연대는 상세하지 않다. 다만, 사당은 원래 정침의 우측에 있었던 것을 1738년(영조14)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는 기록이 사당의 상량목에 남아 있다.

 

 

 

- 건축 특징

회곡고택은 정침에 있는 안방에서 외여닫이문으로 윗방을 통해야만 안대청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이채롭다.

 

사당이 고택의 앞에 배치되어 있어 일반적인 종택 ? 고택의 사당 배치구조와는 다르며, 또한, 사당의 전면에

 

퇴칸을 둔 구조는 경북북부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라고 하겠다.

 

-건축 구성

회곡고택은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5칸, 측면5칸 규모의 ㅁ자형 맞배지붕 건물이다.

 

산기슭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바닥이 평평하지 않아서 돌로 기단을 쌓아 바닥을 평평하게 하였다. 대문의

 

좌측에는 외양간과 부엌을 두고 우측에는 사랑공간을 배치하였는데, 사랑채는 사랑방과 사랑마루로 이루어

 

져 있다. 사랑마루 뒤에는 중방 1칸을 연접시켰고, 안채는 세 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윗방과 건너방을

 

두었고, 윗방의 전면에는 안방과 부엌을 연접시켜 좌익사를 이루게 하였다. 그리고 건너방의 전면에는 고방과

 

통래칸이 사랑채 뒤쪽의 중방과 연접되면서 우익사를 이루게 하였다.

 

사당은 정면3칸, 측면1칸 규모의 맞배기와 건물이다. 주위에는 기와를 얹은 토석담장을 두르고, 전면에 사주문을

 

세워 사당으로 출입케 하였다. 세 칸을 모두 통하게 하여 장마루를 깔았고 전면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

 

 

 

 

 

5. 월담헌 및 사월종택, 주곡동 옥천종택 및 한양조씨의 입향,

약산당 –약산 조광의 –경북 문화재 자료 제 81호, 신구2리 197번지

만곡정사- 만곡 조술도(1729~1803), 경북 문화재 자료 제341호 .주곡리 소재

월잠 종택-

하담 고택

조동흥 가옥

주강정 및 사고종택-조임의 4자 사고 조정옥이 건립한 살림집, 상원1리

 

6 .회곡고택과 조선중기 회곡 권춘란의 학문적 업적과 사승관계

불천위

오극성, 국불천위 권춘란-유서통(대나무통 임금하사)유세, 석계 이시명,옥천 조덕린

 

 

1장. 영양의 한양조씨 이야기

1. 17세기 이래 영명한 인물이 계속해서 배출된 일월면 주곡리의 주실마을은 시인 조지훈(본명 동탁, 1920~1968)의 출생지로 유명하다. 그의 부친 신간회(1927)활동을 한 조헌영과 요절한천재 시인 조동진을 기억할 인물들이다. 일월산의 한 자락 끝인 주실마을은 한양조씨의 집성촌이다. 호은공으로 불리는 조전이 그의 아들 정형과 함께 1629년 이 마을에 정착해 역사가 385년 정도 된다.

2. 한양조씨의 시조는 고려시대 첨의중서사를 지낸 조지수(趙之壽)이다. 그 이후 조휘-조양기-조임-조소생으로 이어지는 4대에 걸쳐 99년동안 영흥의 쌍성총관부는 이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실질적인 한양조씨의 종손은 조돈(趙暾)이다. 그는 조임의 동생으로 고려에 귀화해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탈환에 도움을 주었고 예의판서를 지냈다. 그의 아들은 유명한 조인벽으로 그의 둘째 부인이 이성계의 손위누위였으나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불참하고 강우너도 양양에 은거했다. 충현사가 그를 기리는 사당이다.

조인벽은 조온과 조연의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은 아버지와 달리 이성계를 도와 공신으로 좌찬성과 우의정에 올랐다. 16세기 기묘사화에 희생된 개혁 정치가 정암 조광조는 조온의 4대손이고, 조연의 후손들이 바로 주실마을의 한양조씨이다.

조연의 증손자인 조종(趙琮)이 영남입향조로 조연의 아들 조린이 둔 다섯 아들 가운데 둘째인 조운종의 아들 조종이 조광조과 관련된 기묘사화(1519)의 여파로 영주 율지리로 낙향하게 되었다. 조종과 조광조는 9촌간의 일가였기 때문이다. 조종의 모친은 의안대군 이화의 증손녀로 영주 초곡에 문중산소가 있다. 그의 처가는 평해 황씨로 역시 영주에 거주하고 있었다.

 

조종의 아들들인 인완, 의완, 예완, 지완, 신완,형완 등 여섯 아들 가운데 인완의 둘째는 풍기로 이사했고, 형완은 풍산에 이사했으며 형완의 아들 조원(趙源)이 영양 원리동으로 이사했다.

이와 같은 한양조씨들의 선대 세계는 아래와 같다.

 

시조         우의정 병조참판   영남입향조 풍산 1553영양
조지수 조휘 조양기 조돈 조인벽 조연 조린 조운종 조종 조형완 조원

 

 

 

3. 한양조씨의 영양시대를 연 인물은 조원(1511~?)이다. 그는 함양 오씨 오필(吳滭)의 따님과 결혼하여 처가가 있는 영양 원당리(현 하원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공신의 후손이라는 후광과 함양오씨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조원은 영양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한양조씨 양경공파 영양입향조이신 11세 참판공 휘 원의 종택이 쇠락함에, 99년12월 종택중건 발기인 모임을, 2001년 4월 기공식을 가진 후 2002년 6월 23일 준공식을 거행하여 "思義精舍" 의 완공을 보게 되였다. 현재 일월면 도계리 영양향교부근에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75호

參判公 宗宅(참판공 종택)

 

4. 조원은 조광인(趙光仁, ?~1582)과 조광의(趙光義, 1543~1608) 두 아들을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떴다. 그러나 두 형제가 영양 일대의 사족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며, 해동이로(海東二老)라 불리는 등 입지를 굳혀갔다.

조광인(趙光仁, ?~1582)과 조광의(趙光義, 1543~1608) 두 형제는 학봉 김성일을 비롯한 5형제를 모두 과거급제시킨 아버지로 유명한 청계 김진(1500~1580)등 모두 23명이 1578년에 발의한 영산서당 건립에 동참한 것으로 보아 영양의 한양조씨 가문이 사회적경제적인 기반이 단단해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영산서당은 1577년(宣祖10) 9월에 그 당시 청기면 초동椒洞 (현 靑杞面)에 일시 우거하던(영양 돈간재 및 주사-경북 기념물 142호.돈간재 편액은 김진의 증손자 표은 김시온공의 작품) 진사 청계靑溪 김진金璡선생이 향내 노소인사 수십 인으로 더불어 주창하고 발기하여 창설하게 되었다. 그 당시 발기인은 김진金璡, 김호金虎, 남문성南文成, 오시준吳時俊, 남필성南弼成, 남천수南天授, 김응현金應鉉, 오익수吳益壽, 남천흥南川興, 오민수吳敏壽, 정홍鄭洪, 남윤조南胤曺, 권응우權應虞, 남경南璟, 조광인趙光仁,조광의趙光義등 16인이 각자 곡물 2곡(1斛은 10斗)을 출자하여 그 곡식을 해마다 장리로서 거두어서 장차 서당을 창설코자 하였는데, 청계공靑溪公 김진金璡 선생은 영양이 영해부寧海府에 속하여 인구가 적고 풍속이 미개하여 향풍과 예문이 뒤떨어진 것을 느끼고 타향인데도 불구하고 곡물을 15곡을 회사하여 영산서당 건립에 많은 공적을 남기었다. 그러나 그 곡식을 가지고는 서당을 건립할 수가 없어서 매년 향회를 열고 곡물을 거두었는데 이듬해 거둔 곡식이 18석 4두 6승이라 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해 추가로 권성權誠, 남국간南國幹, 박봉서朴鳳瑞, 이귀승李貴承, 남사문南士文, 남사명南士明, 남인록南仁錄등 7인이 가입하였다. 그 후 1637년에 서당 향회鄕會를 열고 서당창설취지와 향풍개선을 위한 강령을 다음과 같이 정하고 죄과罪過의 경중輕重에 따라 처벌하여 기강紀綱을 세웠다, 부모불효 형제불화父母不孝 兄弟不和, 붕우불신 능만장상朋友不信 凌慢長上, 비방토주 사비보상誹謗土主 私費寶上, 이렇게 매년 향회를 열어 상호강신과 곡물의 출납을 하였으며 1638년에 서당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한편 영산서당은 존재 이휘일과 갈암 이현일(1627~1704)의 부친인 석계 이시명(1580~1674)에 의해서 영산서원으로 개창되었으며, 영양 사족의 학문과 문화 활동의 중심 공간으로 기능을 하였다. 이렇게 매년 향회를 열어 상호강신과 곡물의 출납을 하였으며 1638년에 서당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이 때 청계선생이 필목(명과, 삼베) 등 15필(1필은 40자)을 영산서당에 기증하였다. 그 해 서당을 세우게 되었는데 위치는 영산하로서, 영양읍내의 우편이었다고 전하는데 현재 현1동(縣一洞)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당을 창설한 후 7년이 지나서 청계선생의 장자인 김극일金克一과 권춘계權春桂, 구찬조具贊祚, 오극성吳克成(吳敏壽의 子)등 4인이 추가로 가입하여 부자간에도 서당건립에 참여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1592년(宣祖25)에 뜻하지 않은 임진란이 일어나자 국사가 어지럽고 인심이 흉흉하여 사람들이 흩어지는 바람에 자연적으로 10여년 간은 향회와 학도의 수업이 1602년(宣祖35)까지 중단되었다. 그 때의 서당 규모는 방과 마루, 부엌방 창고, 오양간까지 지었으며 규모가 상당히 컸다.

서당은 처음에는 훈장을 두었다가 차차 학도의 수와 재정 형편이 좋아져서 교관 또는 교수를 두어 당사堂舍에서 기거起居하고 학자들이 담당하여 가르치니 곡식과 의복을 공급하고 숙직을 두고 사역使役에 충당하였다. 이것은 그 당시의 서당의 규모와 학도의 수가 많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매년 춘추로 향회를 열어 그 비용은 보상곡寶上穀(창설자가 낸 곡식) 의 취리를 거두어서 강회시 훈장訓長의 요식미料食未, 말의 사료대. 기타 제경비 들을 지출하고 유사有司를 두어 매년 교대하면서 서당 살림을 살았다. 그 후 1655년(孝宗6)에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선생이 당장堂長으로 있을 때, 시인 백운자白雲子, 권상일權尙逸 선생이 학관學官으로 있었던 일도 있다. 그 때 석계선생은 문풍조성과 사자양성士子養成에 힘을 써서 향내 유림과 더불어 영산서당을 서원으로 승격시킬 것을 주창하여 1655년(孝宗6)에 서원으로 승격 되었다.

영산서원은 1638년에 세운 영산서당을 1655년(孝宗6)에 석계 이시명 선생이 당장堂長으로 있을 때 서당을 서원으로 승격 시킬 것을 주창하여 서원이 되었다.

그 때 영산서당을 일부 수리하고 후면에 묘우廟宇만 새로 세우고 서당은 종전의 것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 때 영산서당에 보관된 서적, 재산까지 서원으로 인계하였으며, 숙종 20년에 사액賜額(임금이 서당 이름을 지어준 것) 하였다.

그러나 서원으로 승격된 뒤에도 종전과 같이 춘추로 강신講信하였지만, 학자의 춘추 혹은 삼동 강학講學과 매월 초일일 강회講會는 종전보다 규모가 커졌다. 서원에 유사有司 또는 원임院任, 원장院長을 선임하여 강회 때에는 반드시 성주城主(현감)와 교관敎官 또는 학우의 강관講官으로 유사有司와 같이 회합,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등을 강론하여 그 뜻과 비결을 배웠다.

본군에는 복현될 때까지 향교가 없었으므로 향내 선비들의 수학처修學處로는 영산서원 뿐 이었으나, 숙종 9년에 복현이 되고 영산하에 관아를 영건하고 객사를 신축할 때 건물이 퇴락하므로 부득이 현동으로 이건하게 되었다. 이건한 연대는 상고詳考할 수 없으나 복현한 1683년(숙종9)에 서원으로 승격한지 28년째이니 이때를 전후하여 이건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새로 세운 서원은 마루와 행랑채가 훨씬 넓고 시장과 떨어졌으며 배산임수背山臨水하고 앞에는 층암절벽의 경치가 있으며 강이 있어 학도學徒의 수양과 공부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1694년 (숙종 20)에 ‘영산英山’이라고 사액되었으며, 그 뒤 김성일金誠一을 추가 배향하였다. 당시의 경내 건물로는 묘우廟宇, 강당, 신문神門, 동재東齋, 서재西齋, 전사청典祀廳, 주소廚所 등이 있었다. 창건 당시에는 이황李滉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사액서원이 된 후 김성일金誠一을 추향追享하였다. 현재는 향사를 지내지 않는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현재는 옛터만이 남아있어 서원터라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참고문헌 : 『전고대방典故大方』『경상북도사』(경상북도, 1983). 『英陽郡誌』

 

조광인(趙光仁, ?~1582)과 조광의(趙光義, 1543~1608) 형제 가운데 조광의는 음직무관의 종8품직인 수의부위에 임명되는 등 지속적으로 관직을 제수받고 1572년에는 내금위에 들어 갔다. 임란시 군량을 보탠 공으로 정3품 통정대부에 오르고 장례원판결사를 제수받는다.

 

5. 조원 손자대 활동

조광인은 수월 조검(儉, 1570~1644)과 사월 조임(任, 1573~1644) 두 아들을 두었다. 조광의는 조건(趙健), 조전(趙佺), 조간(趙侃), 조신(趙伸) 등 4형제를 두었다. 조검의 자는 자순(子純), 호는 수월(水月)이고, 아들 셋은 정곤․정서․정린이다. 수월헌水月軒 "물과 달이 어우러진 처마 높은 집"이라는 뜻이다. 충효로서 널리 알려진 수월(水月) 조검(趙儉)선생의 정자다.

선생은 선조 3년(1570)에 원당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 소학을 배울 때 고인들의 가언선행(嘉言善行)을 들으면 심중에 즐겨하고 모방코자 노력하였으며 차차 장성하여 인륜을 두렵게 지키며 언행이 공손하였다.

선생은 조실부모하여 오랫동안 부모를 받들지 못한 것을 종신토록 통한으로 여겼는데, 조모가 겨울에 병상에서 강어(江魚)를 원하였다. 그러나 얼음이 강을 덮어 구하기가 어려워 울며 강 아래 위를 수차 내왕하면서 "부친이 평시에 부모를 섬기는 정성이 지극하셨으니 영검이 계신다면 고기를 구하도록 하여달라"고 애원하니, 갑자기 얼음이 깨지면서 잉어가 얼음위로 뛰어 오르고 또 그것을 까마귀가 물어 선생에게 날라주어 그 잉어를 가져와 조모에게 공궤(供饋,받들어서 먹게하는 것) 한즉 병이 나았다. 이에 모두 효성이 신명을 통하였다고 하였다.

선생의 충효를 추앙하기 위하여 후일에 자손들이 지은 정자이며 세 칸 겹집으로 左右書室(좌우서실)이며 중간은 마루로서 좁고 난간을 둘렸다.정자 앞에는 연못을 두어 운치를 가미하였다.이에 후세 사람들이 수월공의 효성을 본받기 위해, 그 곳을 잉어가 나른 골짜기란 뜻으로 비릿골이라고 하였고, <승정처사 수월공 검축천단비란 비각과 비리동천(飛鯉洞天)>이란 비를 세웠다.

조임(趙任, 1573~1644)은 자는 자중(自重)이고, 호는 사월(沙月)이며, 본관은 한양이다. 그는 임란과 호란 때에 큰 공을 세워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영양 한양 조씨 세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아버지는 조광인(趙光仁)이고, 어머니는 광주안씨 안수인(安壽仁)의 따님으로, 두 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임은 10세 때 부친을 여의고 상(喪)을 집행하는데 성인과 같이 하였으며, 글을 읽을 때에도 나라가 위급함을 당한 안타까움을 탄식하였다. 또한, 일찍이 정암 조광조 선생께 가학의 진수를 이어받지 못하고, 퇴도 선생께 배움을 청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학문에 대한 지향을 보였다. 뒤에 송간(松澗) 김윤명(金允明)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조임은 10세때 부친을 여의고, 영해면 원구2리 옷금 안동 권씨 종가에 장가를 든 후 처외가인 인량리 대흥 백씨인 백장단(白長湍)댁의 재산을 천석 넘게 얻었다. 이 재물을 가지고 이름난 승려인 성지(性智)가 터를 잡은 곳에 집을 세웠다. 또한 종택은 낙동강 지류인 반반천 상류의 옥선대를 바라보는 경승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임란 등의 전란에도 병화를 입지 않아 영양에서 제일가는 명지로 꼽힌다. 월담헌이라는 이름은 주자의 「무이구곡가」에서 취하였고, 현판의 글씨는 창석 이준(李埈)의 친필이다.

어떤 사람이 “그대의 헌함 이름은 ‘달이 빈 산에 가득하고, 물이 못에 가득하다’는 뜻인가?”라고 물었다. 내가 “무이구곡(武夷九曲)은 주자가 산수에 흥취를 붙인 것인데, 나처럼 용렬한 사람이 어찌 현인의 마음과 자취에 비길 수 있겠는가. 다만 물이 못을 이루어 달빛을 더욱 잘 받아들이고, 헌함이 못 위에 있어 맑은 기운을 서로 비추기 때문에 경치에 따라 이름을 붙였을 뿐이네.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약관의 나이로 맏형인 수월(水月) 조검(趙儉)과 함께 화왕성 전투에 진력하니 의병대장 곽재우가 일찍이 보지 못한 일이라며 기이하게 여겼다. 계속 벼슬을 제수받아 1627년에는 자헌대부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시 문을 닫고 폐인으로 자처하며 거처하는 집을 월담헌(月湛軒)이라 명명하고, 이준․홍우정․이시명 등과 더불어 도의를 갈고 닦으며 세상사에 한탄하면서 생애를 보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약관의 나이로 맏형인 수월(水月) 조검(趙儉)과 함께 화왕성 전투에 진력하니 의병대장 곽재우가 일찍이 보지 못한 일이라며 기이하게 여겼다. 1627년(인조5)에 후금이 침입하는 난이 일어나 나라에서 군량미가 부족해 나라에서 모속령(募粟令)을 내리니 “이 땅에서 먹고 사는 것이 나라 은혜 아닌 것이 없는데 어찌 벼슬에 있지 않다고 하여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곳간을 열어 양곡을 나라에 헌납하였다.

1636년(인조14)에 청이 다시 침입하였으나 이미 70이 가까운 고령이라 몸소 싸움터에 나갈 수 없게 되어 집 뒤에 단을 세우고 매일 밤 목욕재계하고 단에 올라 이 땅에서 오랑캐를 몰아 낼 것을 하늘에 빌었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 화의가 이루어지자 단에 올라 통곡하니 이 단을 향리 사람들이 ‘축천단’이라 불렀다. 축천단 비각은 2009년 현재, 도지정 문화재로 지정하는 심의 단계에 있다

만년에는 경학에 전심하여 자리 곁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논어 구절을 새겨 평생 경계하였다. 평소에는 전장을 갈라 조상을 받드는 제수를 넉넉히 하고, 조카들 중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 주니 영해부사 유대일(兪大逸)이 감탄하기를, “류씨가훈(柳氏家訓) 범씨의장(范氏義庄) 해동대노(海東大老) 산남유일(山南遺逸)”이라고 하였다. 또한, 숙운정( 문화재자료 제 490호로 2005.09.15 지정) 을 지어 벗들과 시가를 짓고, 시사를 논의하였으며, 원근의 후생들을 강학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1644년 3월19일 명나라의 의종황제가 죽고 명이 이자성의 난과 청의 침입으로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필시(絶筆詩)를 한 수 남기고 1644년 7월5일 운명하였다. 그때의 절필시는 다음과 같다.

桑海狂灡直北飜 상전이 벽해로 변하는 미친 물결이 정북방에서 몰아치니

尊周一念淚風泉 명나라를 위하는 생각으로 바람부는 구천에서 눈물지운다

丹旌帶去崇禎字 붉은 명정에는 숭정호를 적어 가지고 가니

無愧男兒一死年 남자의 한번 죽는 해로선 부끄럽지 않다

만곡 조술도가 지은 묘갈명과 석문 정영방이 묘지명을 지었다.

현재 영양읍 하원리에 있는 사월종택은 그가 1602년에 지었으며 월담헌은 이 집 사랑채의 당호이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문화재 –월담헌과 사월종택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하원리 205-1에 소재한 월담헌(月潭軒)과 사월종택(沙月宗宅)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이 집은 사월(沙月) 조임(趙任, 1573~1644)이 조선 선조(宣祖) 35년(1602)에 세운 것이라 전해지는 건물로, 낙동강 동쪽 원류인 반변천(半邊川) 상류의 뛰어난 경승지에 자리 잡고 있다. 안채의 정침(正寢)은 건축수법으로 보아 1592년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건물이라고 추정되지만 월담헌(月潭軒)은 더 후대에 지어진 것이다.

 

이 집은 ‘ㄷ’자 형의 정침과 ‘ㄴ’자 모양의 사랑채인 월담헌(月潭軒)이 연결되어 ‘尸(시)’자형을 구성하고 있지만, 원래는‘日(일)’자형에 가까운 구조로서 제청(祭廳)과 대문간채도 있었으나 철거되었다 한다.평면구성은 안동지방의 전형적인 “ㅁ자형 뜰집”의 한 유형으로서 사랑채에 누(樓)마루를 시설하여 집의 격조를 높였고, 안채와 연결부위에 기둥을 쌓아 신축(伸縮) 공간을 둔 점이 특이하다. 또한 이 집에는 ‘성화(成化) 17년(1481)’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막새기와가 전해져 오고 있어 오래된 집임을 알려주고 있다.

월담헌은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누각을 주 건물로 하여 주택을 사각형으로 배치하였다. 이는 매우 희귀한 예로, 개인 주택으로 정남향(正南向)인 집은 궁중 건물이 아니고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방이 셋이고, 마루가 4칸으로 규모가 크고 건축 양식이 특이하다. 이 종택은 400년 이상의 고식을 간직하였고, 누마루의 각 문에는 중간설주를 문짝 사이에 배치하였다. 누각형 재청(齋廳)이 사당 앞쪽에 있었으나 현재 소실되었다.

 

영양 하담고택

회나무와 함께 살아가는 오래된 집 하담고택은 조시벽(趙是璧, 1670~1753)이 1700년대에 건립한 한양조씨 사월파 문중의 건물이다. 고택의 앞뜰에는 조시벽의 아들이 심은 회나무가 있다.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41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영양읍 상원리,하원리에 있는 한양조씨 사월파 유적지인 월담헌 및 사고종택과 더불어 문중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곳이다. 고택의 건축은 경상도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민가 형태인 ㅁ자형을 띠고 있으면서도 안채가 독립된 모습이다.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5칸 반이고 지붕은 팔작기와로 만들어졌다. 입구에 평방형의 고인돌이 눈길을 끌고, 안뜰에는 조그마한 연못과 보호수로 지정된 회나무, 향나무가 있어 고택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영양 한양조씨의 분가

한양 조씨가 영양의 각 지역으로 분가하여 살게 된 것은 영양 입향조인 조원의 손자대에 와서라고 할 수 있다. 조검은 도계리, 조임은 원당리, 조건은 가곡리, 조전은 주곡리 즉 주실마을에 정착하였다. 이는 그것을 밑받침하는 경제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원당리에 정착한 조임은 1636년 병자호란 뒤에 문을 닫고 폐인으로 자처하며 집을 월담헌이라 이름하고, 당시의 제현들인 창석 이준, 석계 이 시명, 만산 나만갑, 두곡 홍우정과 도의를 갈고 닦으며 세상의 일을 한탄하였다. 이때 지은 정자가 하원동에 있는 숙운정(宿雲亭)이다. 숙운정은 원래 월담헌 동편 선유굴 사이에 있었으나 퇴락하여 새로 월담헌 정침에서 수백보 앞에 옮겨 세웠다. 숙운정이라 이름 지은 것은 동진(317~420)의 도연명의 첨단숙운(詹端宿雲,구름이 처마 끝에 자고 간다는 뜻)의 뜻을 취한 것이다.

숙운정은 앞으로 반변천이 흐르고 뒤에는 영혈사의 옛터에 세워놓은 연대암과 원당지 연꽃의 경치가 아름답다. 현판은 중건시 경상감사와 학부대신을 역임한 동곡 조인승선생의 친필이다.

영양입향조 참판공 조원의 손자인 사월선생의 신도비는 한산 이돈우의 비문과 서산 김흥락이 글씨로 하원리 산기슭에 세워져 있다.

 

한양 조씨 사고파(沙皐派)는 바로 사월 조임의 넷째 아들인 통덕랑 사고 조정옥(趙廷玉)에서 갈린 문중으로, 현재 영양군 영양읍 상원1리 475-1번지에 소재한 사고 종택(沙皐宗宅) 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99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축주는 조시광(趙是光), 조정옥(趙廷玉)으로 건축시기는 18세기 중반이다. 사고 종택은 정자와 별묘까지 갖추어 상류 주택으로서의 격식을 유지하고 있다. 최초 건립연대는 18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나 중건할 때 대규모의 보수가 이루어져 건물에 후기적인 요소가 들어있고, 평면상에 변형된 부분이 많이 보인다.

건축 구성은 전면에 세워진 5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ㅁ자형 정침이 자리하고 있다. 정침의 오른쪽 뒤편에는 사당이 별도의 공간을 이루며 구성되어 있다. 정침의 좌측 뒤쪽에는 손자인 주강 조시광이 건립한 주강성이 방형의 토석담장을 두른 별도의 공간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주강정의 전면에는 주사(廚舍)와 별묘(別廟)가 각각 배치되어 있다.

정침은 평면은 중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 온돌방과 마루방을 두고, 우측에 팔작지붕을 얹은 3칸 규모의 사랑채를 배치하였는데, 좌측칸의 마루방과 우측칸의 대청은 좌우로 돌출되어 양 날개집의 형상을 일게 하였다. 안채는 3칸 규모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너방을 두었다. 안방과 건너방의 전면에는 부엌과 고방을 연접시켜 각각 좌,우익사를 이루게 하였다.

주강정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연접시킨 후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 또한 대청의 전면에 사분합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이루게 하였다. 가구는 오량가의 소로수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또한 종택 옆으로 주강(注江) 조시광(趙是光)이 지은 주강정이 자리하고 있다.

 

한양조씨의 통혼

영양 입향조인 조원은 함양 오씨, 손자인 조검은 부호로 알려진 무안 박씨 박효장의 사위가 되었다. 또한 영해의 유력사족인 재령 이씨와의 통혼이 이루어져 조전이 재령이씨 영해파 종손인 이신일을 사위로 맞음으로서 양가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서계 이시명이 석보에서 수비로 이사하면서 영양서당의 책임을 맡아 교류가 더 빈번해졌다.

조검․조임․조건․조전․조간․조신 등의 종형제 들과 이시명의 교류로 인하여 조광의의 손자이자 조건의 아들인 조정환이 이시명의 4子인 이숭일을 사위로 맞이했다. 조정환과 조규는 친형제처럼 석계문하에서 같이 공부했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퇴계-학봉-경당-존재-갈암으로 이어지는 퇴계적통을 이은 갈암의 문인록인 『금양급문록』에는 조덕린을 비롯한 한양 조씨가 8명이 포진하고 있다.

한편 영해의 영양 남씨 집성촌인 괴시리 마을로 조검의 아들 조정곤이 남율의 사위가 되었으며 조전은 남율의 아들 남필대를 사위로 맞았다. 또한 조정환은 석문 정영방(1577~1650)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동래 정시와의 통혼이 이루어 졌다. 정영방은 서애의 수제자인 우복 정경세(1563~1633)의 제자로 지보출신으로 영양 연당리에 정착한다.

 

조전의 두 딸은 19세기 퇴계의 적통을 이은 정재 류치명을 배출한 임란 의병장인 기봉 류복기의 자손과 혼인하여 전주류씨왕의 통혼도 이루어 졌다.

조전과 조정형의 대를 이은 조군과 조덕린대에 이르러서는 안동지역의 유력 사족인 진성 이씨 의성 김씨 광산 김씨 안동권씨 풍천 류씨 들과도 통혼이 이루어져 간다.

 

주실에 터를 잡은 조전과 주실마을

 

 

정묘호란이 막 끝난 1629년 조전과 그의 아들 조정형이 주실마을에 터를 잡는다. 따라서 주실마을의 입향시조는 조원의 손자이자 조광의의 둘째 아들인 조전(趙佺,1576~1632)이다. 조전은 1576년 태어나 자가 여수(汝壽)요 호는 호은(壺隱)이다. 현재 주실마을의 호은종택의 호은은 바로 조전을 말한다. 조전은 형인 조건이 후사없이 일찍 죽어 홀로 가문을 이끌어 나갔다. 임란시 부친인 조광의와 종형제 들과 더불어 의병에 참여하였으며 1632년 57세때 세상을 하직했다. 최산립의 딸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다. 맏아들이 조정형이고 둘째가 조정환이다. 둘째 조정환이 출계하여 큰아버지 조건의 뒤를 이었다.

조정형은 최철과 이명준,김시양에게 배웠다. 울진 장씨 호문의 딸과 혼인하여 군(頵),병(頩),변 삼형제와 네 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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