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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한(趙緯韓) | 출생 | 1567년(명종 22) |
사망 | 1649년(인조 27) |
■玄谷集卷之十二(십이권) / 記 一首■
●襄陽東溟書院創建記 a073_29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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余以中丞。論事過當。斥補于玆土。下車之初。先以興學校育人才爲急務。重創聖廟而大之。改造齋舍而新之。又置學田以爲諸生朝夕之供。而第念校生多有免軍之徒。紛紜雜亂。其中雖有俊秀拔萃之才。不得精業於黌齋。以此列邑皆設書院于靜散地。爲多士修養之所。而顧此邑獨無焉。余慨然興喟。鳩材募工。欲效白鹿之舊制矣。適値朝廷革去本府之大浦鎭。軍器軍糧。移于本府。而萬戶所居之館舍。嵬然獨存。勢將毀撤而補用於官家。余翻然喜曰。此必天公感余愛士之誠。畀此一館。以爲諸生講學肄業之地。何必毀諸。乃因舊館而額之曰。東溟書院。蓋齋房講堂。儼然維新。一鄕之父老諸生。聚而謝焉。余曰。凡書院之設。必得其地之名賢碩德之士而祠焉。古所謂鄕先生歿而可祭於社者。其謂是也。此地亦有可祠之先賢乎。座上前正盧景福。年今八十。明經及第。常顯於朝。多識前言往行。爲一鄕鉅人長德。鬚眉皓白。癯如老鶴。出位而言曰。此府僻在嶺海之間。前賢先哲之班班可譜者未嘗得聞。而少時因鄕父老。嘗聞世傳之古語。則曰有龍源府院君趙公某。國初來隱于此地。有餘風遺澤云。世傳河趙臺者。乃河崙趙浚所游之地。而或曰非趙浚。乃龍源君也。雖未能的知其然否。而龍源君之來此也審矣。請以龍源君爲祠焉。余聞之。瞿然而驚曰。龍源府院君。乃余之八代祖也。其事功出處。世遠不大傳。未得其詳也。嘗考家乘。龍源府院君。以麗朝勳舊。位望蓋世。屬麗運告訖。眞人起於一家。而公退而不仕。隱於東海之濱。其高風大節。至今輝映宇宙。不幾合於可祭於社乎。而余以耳孫。不敢創擧斯禮。逡巡退讓者三。於是鄕父老諸生一口言曰。龍源君之節義。流傳於一鄕者久矣。一鄕之人士聞其風而興起。有廉恥禮義者。無非龍源君之賜也。鄕論如是。太守何敢以先世之私而嫌焉。遂作祠宇於院之北偏隙地而祠焉。余不得已而從之。乃置齋僕者一人。守院者二家。鹽盆一坐。漁船一隻。屯田七石。以爲春秋享祀之需及諸生讀書之糧。願諸生勉之。毋墜余至意也。噫。廢興有數。成毀無常。昔日介冑防戍之處。今作靑衿俎豆之所。他日人材蔚興。多士輩出。歷敭朝廷。冠冕世世。使嶺外荒僻之鄕。爲鄒魯絃誦之邦。則不佞經始之功。不其多乎。願諸生勿忘菁莪時術之意。勉之哉。但所恨者。余以病罷。不待瓜時。經自解歸。不得親奠香火於祠廟之下。而又不得與諸生口講指畫。論難磨礱於函丈之間。遽卽別去。豈能無介然於心乎。書院建立之謀。僉知盧景福主之。祠宇監董之人。崔挺立,李賢一也。天啓戊辰正月日。府使某謹識。
▣동명서원(창건)기(東溟書院 (創建)記)▣
내가 중승(中丞)으로 있을 때에 사건을 논하는데 너무 지나치다고 배척을 받아 이 땅으로 보직되었다. 수레를 내리면서부터 먼저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기를 것을 급무로 삼아 향교(鄕校/聖廟)를 중창하여, 크게 짓고 재사(齋舍)를 개조하여 새롭게 하였다. 또 학전(學田)을 마련하여 제생을 조석 식사의 이바지 거리로 삼았다. 그런데 생각건대 교생들중에 군(軍)을 면하려는 자가 많이 있어 떠들고 소란을 피우므로 비록 준수하고 뛰어난 인재가 있어도 오히려 재사(黌齋)에서 착실히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렬읍(列邑)에서도 모두 서원을 한적한 곳에 지어 많은 선비의 학업을 닦는 장소로 삼고 있는데 돌아보건대 이 읍에만 홀로 없으므로 나는 분개한 마음으로 탄식하면서, 재물과 목공을 모아 백록동(白鹿洞)의 옛 제도를 본받으려 하였더니 마침 조장에서 본부 대포진(大浦鎭)을 철거할 계제를 당하였다. 군기와 군향을 본부로 옮겨 왔으나 만호(萬戶)가 살던 관사(官舍)만 홀로 우뚝하게 솟아 있어 장차 헐어다가 관용에 보태 쓰게 되었다. 내가 선뜻 기쁜 생각이 나서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하느님이 내게 집 한채를 빌려 주서 제생의 공부하는 장소로 삼으려는 것이니 꼭 헐어야할 이유가 없다. 」
하고 이에 구관(舊館)을 그대로 쓰기로 하고 현판을 걸어 동명서원(東溟書院)이라 일렀으니, 대개 제실과 강당이 의젓하고 다시금 새로웠다. 이에 부로와 제생이 모두 모여 감사하므로 내가 이르기를,
「무릇 서원을 세우는 데는 반드시 그 지방의 명현이나 높은 덕이 있는 자를 모셔서 사당을 지어야 하는 것이니 예전부터 이르는 바, 『향 선생(鄕先生)이 죽으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말은 이것을 이르는 것이니 이 고장에도 또한 사당에 모실만한 선현(先賢)이 있는가?」
하였더니 전 정언(前 正言)노경복(盧景福)은 나이 지금 八十으로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일찍이 조정에서도 드러났으며, 전일의 착한 분의 행적도 많이 알고 있으므로, 이 고장의 거인이며 덕이 두터운 자로 일컫는데 수염과 눈썹은 희고 말라서 백학과 같았다.
앞 자리에 나와 말하기를
「이 부(府)는 멀리 떨어져 큰 고개와 바다로 쌓여 있어 예전의 어진이로 손 꼽을 만한 분은 일찍이 들은 적이 없으나, 고장 부로들의 전하는 말에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 조아무개(趙某)라는 분이 국초에 이 땅에 와 숨어 살았는데 그의 남긴 풍습과 혜택이 매우 크니 조공의 사당을 세울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두렵고 놀라와서 이르기를,
「용원 부원군(龍源府院君)은 나의 八세 조(祖)이다. 그 분의 사업, 공훈과 벼슬하고 물러간 일은 세대가 멀으므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가승(家乘)을 상고해 보면 공은 여조(麗朝)에 있어 예전에 세운 공훈(功勳)으로 명망이 세상을 뒤덮었는데 마침 고려의 운은 다하였고, 진인(眞人)은 한 집안에서 일어났으므로 벼슬하지 않고 물러가 동해 가에 숨어 있었으니 그 높은 풍도와 큰 도의심은 지금까지 세상에 빛나니 마침 사당을 지을만 하나 나는 그 분의 먼 자선으로 감히 이 예절을 거행하는데 앞장 서서 할 수는 없다.」
하여 세 번이나 머뭇거리면서 사양하였더니 부로와 제생이 입을 모아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용원군의 절의(節義)는 전해 온지가 오래되었는데 우리 양양 사람은 그 남아 있는 말만 듣고도 감동하였으니, 예의와 염치가 있는 것은 모두 그의 덕택이니 일 향의 의논이 다 그러한데 부사(太守)는 어찌 자기의 선조라고 혐의할 것인가.」
하고 드디어 최정립(崔挺立), 이현일(李賢一)을 시켜 서원 북쪽에 사당 짓는 일을 감독하게 하여 제사지내게 하므로 나도 마지못해 그대로 따랐다. 이에 소금 가마 한 자리와 어선 한 척과 둔전(屯田) 七석(石) 지기를 마련하여 춘추향사(春秋享祀)의 미천과 제생이 공부하는데 쓸 양식으로 삼았다. 아! 흥하고 패하는 것도 운수가 있고 이루어지고 헐어짐은 일정한 법이 없으니 옛날 군인의 적을 막던 곳이 오늘날 선현을 향사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후일에 인재와 선비들이 쏟아져 나와 계속하여 조정에 벼슬하여 사대부가 대를 잇게 되면 태령밖에 있는 거칠고 궁벽한 시골로 하여금 공자, 맹자의 도덕을 지키는 지방(鄒魯絃誦之邦)이 될 것이니 내(不佞)가 이것을 경영하여 설립한 공도 또한 크다고 하지 않겠는가. 원컨대 제생은 힘쓸지어다.
후손 양양부사 위한(後孫 羊羊府使 緯韓)
註)양절공-한풍군-가산공파 14세 위한(緯韓):1567(明宗21~1649(仁祖27) 자는 지세(持世), 호는 현곡(玄谷), 官行 예조판서(禮曹判書)
![](https://blog.kakaocdn.net/dn/UQN9R/btsJdR7oFQr/EWPL1s6wgM8Sxa5kax4nK1/img.jpg)
2009년 8월 석사학위논문
<최척전>에 나타난 작가의식 연구:
●현곡공玄谷公-조위한趙緯韓[출생:1567년명종-22~사망1649년인조-27 ]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한 청
A StudyonConsciousnessofWriteronthe<ChoiCheok
Jeon>
2009년 8월 25일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한 청
<최척전>에 나타난 작가의식 연구
지도교수 김 수 중
이 논문을 문학석사학위 신청 논문으로 제출함
2009년 4월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한 청
한 청의 석사학위 논문을 인준함
위원장 조선대학교 교수 인
위 원 조선대학교 교수 인
위 원 조선대학교 교수 인
2009년 5월
조선대학교 대학원
목 차
ABSTRACT
Ⅰ.서론 ···············································1
1.연구 목적 ·················································1
2.연구 방법 ·················································4
3.연구사 개요 ···············································5
Ⅱ.작가 조위한과 <최척전>의 형성 배경 ·········9
1.조위한의 삶과 문학 ······································9
1)한국 고소설의 실명 현상 ····································9
2)<최척전>의 작가 ············································20
3)조위한의 생애 ···············································23
2.<최척전>의 형성 배경 ··································28
1)가탁 방식과 역사적 사실 ···································28
2)현실적 시공간 ···············································35
3)가정사의 체험 ···············································37
4)중국문학에 대한 관심 ·······································39
5)의병활동과 중국 여행 ·······································44
Ⅲ.<최척전>의 작가의식 분석 ····················47
1.역사에 대한 작가의식 ··································47
1)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적 인식 ······························51
2)의병과 관련한 태도 ·········································58
3)호족 명나라 침입 전쟁의 시각 ·····························62
2.대외적 공간에 대한 작가의식 ··························66
1)중국에 대한 동경 ···········································66
2)일본을 보는 이중적 시각 ···································81
3)안남으로 향한 공간의 확대 ·································85
3.한국적 정서에 대한 작가의식 ··························87
1)가족애의 고취 ···············································88
2)생활 철학으로서의 불교의식 ································89
3)강인한 여인상 ···············································92
4)포용적인 인간애 ·············································94
Ⅳ.<최척전>과 <홍도전>의 관계 ·················97
Ⅴ.결론 ············································104
【참고문헌】········································106
ABSTRACT
A Study on Consciousness of Writer on the
<ChoiCheokJeon>
HanJing
Advisor:Prof.Kim Su-Jung.Ph.D.
Dept.ofKoreanLanguage& Literature
GraduateSchoolofChosunUniversity
<ChoiCheokJeon> isliterary workwhich haveguidednew model
ofliderary circles thatgrafttogetherwith various types in Korean
classicsdescriptionofthehistoryofliteratureandisdifferentcertainly
with existing. This manufacture could chase age and history
relationship ofwriterstation while have found ethnic emotion as a
Korean and consciousness of Korean through <ChoiCheok Jeon>,
according to thefact<ChoiCheok Jeon> istherepresentativework
thatis evaluated high as a realistic narration developing events by
using actualand realistic theme of17th century especially.And the
supreme value what <Choi Cheok Jeon> has is 'Human love'
'Humanity'justlyintheprocessabove.
Thereason thatthismanufacturecould considerofthemeaning of
<ChoiCheokJeon> isfirstlybecauseitisreflectingrealstorybefore
literatureandbecauseexperienceofwriter,JoWi-Hanisreflectedon
thiswork completely.Wecan understand thisfactsthrough analyses
abouthow <ChoiCheokJeon> ismade.Alsoitispossilbletoconfirm
what'sthemeaning ofthisliteraturethrough experienceofpain of3
warswhich publicsatthattimeexperiencein realand thingswhich
added thestory ofmain charectorof<Hong Do Jeon> who isreal
existedtothisworkandintentiontocompensatepainofwars.
BeforeChoiCheoktakerepeatedlypainofdispersionthatistragedy
offamily which washappenedby thewar.And ithasbeen guiding
'Meetingagainoffamily'asthealternativethathaveovercomepainof
'Dispersion'.Theonly method thatcan curepain ofdispersion could
be'Meetingagain'andnowaycouldbethealternativeplaninsteadof
"Meetingagain'.WriterJoWi-Handealswithsorrow ofdispersionin
publicwhichnoonecouldavoidfrom eventhewriterofthisliterary
in history ofEastAsiaand Koreaand show ustheconclusion that
familymeetingagainmiraclyeachotherinhappy-end.
During retirementin Namwon when he can say itwas the most
difficultandhardtimetospendforentirehislife,hehasrediscovered
gloomyphaseofthetimethathaven'tseeninanywhereatthesame
time,heshouldleavefamilywhohelovedsomuch.Andsorrow which
Jo Wi-Han faces wascommon lash to allpeopleswho live atthat
same time.Jo Wi-Han setdirections to side thatsearch for hope
ratherthan toabandon solely in thischeerlessness.Fortunely hehas
thegifted ability asaliterary man tobeabletomix togetherwith
ownexperienceoflife,sympathyandthecommonpaininthatperiod.
And Jo Wi-Han write a novel, <Choi Cheok Jeon> within
cheerlessness ofthe age.Novel,<ChoiCheok Jeon> which has the
massageof'hope',cutting offthecheerlessfrom thecontentsandit
returntoNamwonagainandmakeitendofroamingaboutthestory.
<ChoiCheok Jeon> is definetly the mostrepresentative humanity
novel in 17th that cured perfectly the pain by the war with
catharsis-'humanity'aswellasitisthemostcharmingandattractive
novelinKoreaIbelieved.
- 1 -
Ⅰ.서론
1.연구 목적
한국 서사문학사에서 <최척전>만큼이나 다양한 시각에서 연구된 작품도
드물 것이다.전쟁소설,포로소설(피로소설),애정소설,역사소설,불교소설,사
실계소설 등의 명칭 모두 <최척전>에 부여되는 소설 유형의 용어들이다.이
는 <최척전>이 그만큼 다양한 시각에서 다양한 소설적 요소를 접목하여 다
양한 유형 변화를 시도한 작품임을 보여주는 말이며,동시에 <최척전>이 갖
는 소설사적 가치를 인정하는 표현이다.
<최척전>은 17세기 초에 창작된 소설로서 저작 연대와 작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현존하는 이본으로는 한문본 5종,국문
본 1종,한문 축약본 5종이 전하는데,1)이중 조위한이 <최척전>을 지었다고
하는 근거는 한문본인 <최척전>의 서울대본과 고려대본 마지막에 ‘天啓元年
辛酉閏二月日 素翁題’,‘素翁趙緯韓號 又號玄谷’이라 한 기록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天啓元年’이라는 표현은 明 熹宗 원년으로 광해군 13년,1621년을 의
미하고,‘玄谷’,또는 ‘素翁’은 당시 조위한의 호로 불렸던 것이다.2)이 기록으
로 말미암아 <최척전>이 조위한의 창작품임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없어졌다.
<최척전>은 이명선을 통해 최초로 언급된 이후3)김기동에 와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도되는데,4) 작품이 갖는 문학적 특징과 성격으로 인해 학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모았다.특히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당시의 현실 시간 그대로라
1)지연숙,「<최척전>이본의 두 계열과 善本」.『고소설연구』제17집,한국고소설학회,2004.
지연숙은 본 논문을 통해 규장각본,고려대본,간호윤본이 원본 계열에 속하며,김모본과 천리
대본은 변이가 심한 것으로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김모본을 거쳐 천리대본으로 나아갔다고 밝
힌 바 있다.이는 그간에 선본으로 알려진 것이 천리대본이라는 주장과 달라 관심을 끈다.특히
천리대본은 탈락과 변이가 잦고 오류도 많아 원본에서 가장 멀어진 이본이라고 했다.
2)<최척전>의 작자설에 관한 것은 Ⅱ장에서 보다 자세하게 언급할 것이다.
3)이명선,『조선문학사』,조선문학사,1948.
작품이나 작자에 대한 본격적인 고찰이라기보다는 간단한 언급 정도의 수준이었다.
4)김기동,『이조시대소설연구』,성문각,1974.
작품의 서지사항,작자,창작 동기와 함께 작품 분석을 통해 <최척전>이 불교계 소설임을 언급하
였다.
- 2 -
는 점,임진왜란과 정유재란,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 등 3대 전란을 소재로
가족사의 비극적인 운명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그리고 공간적 배경으로 남
원이라는 현실적 공간에서 출발하여 중국,일본,나아가 당시로서는 상상적
공간인 안남까지 확장되는 방대한 스케일의 구성이라는 점과 각각의 서사 공
간이 작품의 주 무대가 된다는 점 등에서 그러하였다.이러한 서사 공간 배
경의 확장은 지금으로 보아서도 상당히 파격적인 설정이다.이러한 특징으로
<최척전>은 다수의 학자들 사이에서 주요한 관심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대의 작품으로 알려진 허균의 <홍길동전>,권필의 <주생전>에
비한다면 <최척전>에 대한 연구 성과는 많지 않은 편이다.특히 작가에 대한
연구는 더욱 그러하다.이에 대한 이유 중 하나가 작자에 대한 기본적인 자
료 자체가 빈곤했다는 점이다.조위한의 행적은 물론 연보와 행장,문집 어느
것 하나도 확실하게 알려진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다 보니 조위한에
대한 연구는 김기동이『한국고전소설연구』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것을 제외하
면 연구가 거의 진행되지 않다가 최근 민영대에 의해서 많은 자료들이 발굴
되었다.5)
문학,특히 소설 작품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작가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이
뤄져야 한다.문학은 작가의 의도적 산물이자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본
고는 이 점에 주력하여 <최척전>을 작자의 의식과 연계해 고찰해 보고자 한
다.
우선 필자가 <최척전>을 분석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외국인 독자이자 서
사문학을 공부하는 국문학도로서 가장 한국적인 문학,한국인의 의식을 읽어
낼 수 있는 문학을 연구해 보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다.그러한 점에서 <최
척전>은 상당 부분 수긍할만한 작품이라는 판단이 섰다.즉 <최척전>의 가
치를 무엇보다 ‘한국적 소설’이라는 측면에서 찾았다는 말이다.<최척전>은
말 그대로 당시의 현실과 사실을 근간으로 3차례에 이어진 전란이 가져다 준
시대의 아픔을 3대의 가족사를 통해 고스란히 재연해 낸 작품이다.당시의
시대가 던져 준 아픔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민중 모두가 직면한 일반화된
5)민영대는 조위한에 대한 문헌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결과 그의 家藏 筆寫本 <玄谷公年譜>,<漢陽
趙氏世譜>,박세채의 문집인『南溪先生文集』에 실려 있는『知中樞府事玄谷趙公行狀』을 입수하였
고,후손들 집안에 흩어져 전하던『玄谷集』총 14권 중 11,12,13,14권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 3 -
삶의 모습이었을 것이고,<최척전>은 대다수의 연구자들이 인정하였듯 사실
계소설로서 지극히 평범한 한 가족의 당면한 전란 속 삶의 이야기를 구체적
으로 묘사해 낸 작품으로서 사실성을 높이 평가받은 작품이다.한 국가의 민
족적인 특질 또는 민중의식을 파악해 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고
난과 역경의 상황에서 민중들이 어떻게 그 역경을 이겨내고 삶을 꾸려 가는
지를 고찰하는 과정이야말로 민중의식을 읽어낼 수 있는 적절한 텍스트라는
판단으로 본고의 텍스트로서 <최척전>을 선택하게 되었다.
<최척전>의 또 다른 매력은 당시 소설의 주된 기제인 전쟁,애정,종교,영
웅성 등 다양한 소재들이 녹아 있다는 점이다.이 한 편의 작품 분석을 통해
당시의 소설적 면모를 상당 부분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또 주요 등장
인물이 많다는 점 또한 두드러진 특징이다.다양한 캐릭터를 분석하는 과정
에서 공통된 한국인의 정서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여기에
<최척전>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갈등 관계에 있는 적대국
의 인물들도 다수 등장하여 이야기를 끌어간다.이 과정 속에서 필자는 한국
인의 삶의 모습뿐만 아니라 당시 민중들의 대내외적인 시각과 시대의식을 동
시에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최척
전>을 분석 대상으로 삼은 것이며,이를 통해 작품에 내재된 한국인의 의식
을 외국인 독자이자 연구자로서 분석해 보고자 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이다.
둘째,<최척전>의 서사구조 속에는 현실이라는 당시의 시대상과 함께 다양
한 문학적 특징들이 복합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그러한 문학적 특징들
을 되짚어 보면서 작자 조위한의 작자의식이 어떠했기에 그러한 문학적 특징
들이 나타난 것인지를 역으로 추적해 보고자 한다.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통
해 궁극적으로 작자가 <최척전>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의도가 무엇인지
를 파악하고 그 의도 속에서 탄생한 작품 <최척전>이 갖는 소설사적 가치를
다시 한 번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이 가능하다고 판단하는 이유는 우선 작품과 작가의 관계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에서이다.작품은 작가의 산물이고 시대적 산
물이다.그리고 작품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작자에 대한 연구가 선행
되어야 한다는 점은 당연한 귀결이다.문학의 특징 역시 작가의 의도적인 산
- 4 -
물로 작품에 녹아져 있는 것이라고 볼 때 문학의 특징을 고찰해 보는 작업은
작가의 포괄적인 의식을 읽어내는 작업이 될 것이다.
2.연구 방법
본고의 목표는 앞서 두 가지로 제시한 바 있다.이 목표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작가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 고찰과 조위한이
<최척전>의 작가로서의 타당성에 대한 재점검일 것이다.더구나 조위한이 사
대부 가문 출신이라는 점에서 이 작업은 더욱 필요하다.이는 고소설의 특징
중 하나인 ‘실명 현상’에 대한 언급과 함께 제시돼야 할 필요성이 전제되는데,
소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팽배했을 당시임에도 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내
걸고 작품을 창작해 낸 의도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따라서 Ⅱ장에서는 한국
고소설에 대한 당시의 시대적 모습과 함께 작가 조위한의 생애와 작품,그리
고 <최척전>의 작가로서 조위한에 대한 타당성에 대한 고찰이 이뤄질 것이
다.아울러 <최척전>의 특징 중 하나이자 작자의식을 파악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작품과 작자 사이의 연계성에 대한 고찰과 함께 형성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Ⅲ장은 작자의 의식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장이다.특히 작품에 녹
아 있는 대표적인 특징,즉 16,17세기의 굵직한 가장 굵직한 3대 전란을 중
심으로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로 풀어 가고 있다는 점에서 어떻게 이것을 작
품으로 형상화하고 있는지의 고찰을 통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작가의 시대의
식을 살펴 볼 것이다.또 <최척전>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인 확장된 공
간,즉 17세기를 중심으로 당시 변화의 중심에 함께 서 있는 동아시아 3국인
조선,중국,일본,그리고 안남에 이르기까지 각국의 인물들에 대한 형상화
방식과 단락별 서사 구조를 중심으로 특징 분석을 통해 작자 조위한의 대외
적 인식을 함께 고찰해 보겠다.
이어서 <최척전>에 나타난 한국적 정서를 작가의식 연구의 관점에서 분석
해 보고자 한다.한국의 고소설로서 시대와 환경을 뛰어넘어 세계를 무대로
삼은 이 작품의 바탕에 근본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정서를 파악하는 것
- 5 -
이 <최척전> 이해의 궁극적 과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Ⅳ장에서는 동시기의 작품으로서 영향 수수관계 논란이 일고 있는『어우야
담』의 <홍도전>과의 상관성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작가 조위한은 실제로 3
대 전란을 겪고 그 과정에서 모친과 처자식을 잃은 비운을 겪게 되며,전쟁
에 의병으로 참여하기도 하는 등 <최척전>을 이루는 기본적인 모티프들과
많은 부분들에서 닮아 있다.따라서 작품과 작자의 체험 사이의 간극을 살피
는 것,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허구와 사실을 짚어 보는 것은 작자의 체험이
문학으로 어떻게 형상화되는지 살필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또 동시대의
작품인 <홍도전>과 <최척전> 작품 기본 서사구조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두
작품에 대한 영향 수수관계는 보다 자세한 고찰을 필요로 한다.
3.연구사 개요
<최척전>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요약,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명선은 <최척전>에 대하여 최초로 언급하였는데 작품의 구체적인 내용
과 작가에 관한 고찰은 전혀 없었고 다만 작가와 작품이 있다는 것을 소개하
였다.6)
문선규는 조위한이 <최척전>을 지었음을 밝히고 이 작품이 ‘최척의 고사’
를 기술한 것이라 소개하였으나 그 이상의 자세한 내용과 작자에 대한 언급
은 없다.7)
김기동은 <최척전>에 대하여 제일 먼저 관심을 가지고 서지․작자․창작동
기를 정리하면서 작품을 세밀히 분석하여 불교적인 요소를 가려 뽑아 부처의
가호가 시종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고 보고 불교계 소설로 분류하였다.그리
고 주제도 불교적 요소를 가진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표현한 작품이라 밝혔
다.8)
소재영은 본 작품을 역사적 사실성을 바탕으로 그 위에다 가공적인 인물들
을 등장시켜 만들어낸 역사소설의 성격을 띠는 가정소설로 분류하고 임진왜
6)이명선,『조선문학사』,조선문학사,1948.
7)문선규,『조선한문학사』,정음사,1976.
8)김기동,『한국고전소설연구』,교학사,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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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을 배경으로 한 피로문학으로서의 가능성을 시사하였다.또 조선시대의 작
자들이 가끔 이용하던 假托의 방법을 이용한 작품이라는 견해도 밝혔다.9)
김재수는 본 작품에 대해 사실을 소설화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보면서 ‘사실
적 실기문학의 백미’라고 평가하였다.조위한은 직접 최척에게서 자세한 이야
기를 듣고 탁월한 문장력으로 문학적 수식을 더하고 소설적 구조를 갖추어
사실적인 기록문학으로 저술하였음을 밝혔다.10)
강진옥은 주인공 최척과 옥영이 임진왜란․정유재란․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을 통해 반복되는 만남과 이별을 고난과 구원의 문제로 보았으며,이들
이 고난의 현실 속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실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라고 살폈다.‘역사가 개인을 함몰시키려 하지만 종교는
운명의 늪에서 개인을 구출하여 구원에로 이끌어가며,이 과정에서 부처의
현신은 강한 의지와 고난현실의 대결과정에서 실현되는 끝없는 자기부정과
갱신을 거쳐 존재론적 전환을 이룬 존재의 자기표백’이라고 보는 등 색다른
방향으로 연구하였다.11)
김장동은 본 작품을 역사적인 배경의 소설화라고 보면서 ‘실화가 소설로 전
이된 형태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고찰하였고,실화를 소설화하는 논픽션의 새
로운 소설의 분야를 개척해서 후대 기록문학의 전형적인 선례를 남겼다고 기
술하였다.12)
박일용은 <최척전>을 한국 소설사 초기에 나타난 작품으로 파악하였다.본
작품은 전 시대의『금오신화』에 흔히 보이던 전기성을 완전히 탈피하고 서사
세계의 갈등과 주인공들의 의지가 현실세계에서 펼쳐지는 형식을 획득하는
작품이라고 주장하였다.이 소설이 현실의 갈등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초기소
설의 특징을 견지하고 있으면서도 초기 소설이 후대의 통속적인 일대기 소설
로 이행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형식을 취한다는 작품이라고 주장하기도 하
였다.13)이어서 <최척전>은 애초의 설화를 수용하면서도 주인공들의 결혼과
9)소재영,「기우록논고-피로문학의 가능성시론-」,『상봉김성배박사 회갑기념논문집』,형설출판사,
1977.
______,『임병양란과 문학의식』,한국연구원,1980.
10)김재수,「<최척전>의 소설화 과정」,『광주교육대논문집』제26집,광주교육대학교,1985.
11)강진옥,「<최척전>에 나타난 고난과 구원의 문제」,『이화어문논집』제8집,이화여자대학교 한국
어 문학연구소,1986.
12)김장동,『조선조역사소설연구』,이우출판사,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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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인한 이별의 과정을 독자적인 시각으로 구체화하여 새로운 작품으
로 창작했다고 보았다.결혼과 전쟁으로 인한 이별의 과정은 인간적 애정에
입각하여 결혼을 성취하려는 주인공들의 의지에 대하여 유가적인 당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기존질서 사이의 대립,중세의 절대적 재앙인 전쟁에 의해
무너지는 민중들의 삶의 토대 등 현실세계의 갈등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형상
화하였다.14)
박희병은 <최척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당시의 전쟁이 조선인의 삶에,그
리고 중국인의 삶에 어떤 운명의 그림자를 드리웠는가를 탐구하는 데에 온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고 보면서 주제는 ‘당시의 전란이 초래한 가족 이산
의 고통과 강한 가족애에 의한 재회의 달성’이라고 하고 <최척전>을 애정소
설로 파악하였다.그리고 본 작품이 사실을 기초로 하여 성립된 소설이라고
하면서 조위한의 저술태도가 사실주의적이라고 주장하였다.구체적인 작가의
실제 삶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작품의 여러 곳에서 작가의
사실주의적 면모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본 작품이 초기소설의 사실주의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면서 17세기 소설로 하여금 사실주의의 진경을 이룩하는
데에 선도적으로 기여한 바가 큰 작품임을 주장하였다.그는 <최척전>을 ‘후
대 더욱 발전된 양상을 보이는 사실주의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작품’으로 파
악하였다.15)
정명기는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본 작품에 대한 반성적 시각과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그 동안 <최척전> 연구의 문제
점과 새로운 연구 방향을 제시하면서 천리대학에서 입수한 새로운 자료 필사
본 <최척전>이 있음을 소개하였다.16)
박태상은 본 작품을 살핀 후 애정소설로 규정하였다.그리고 허균 문학 이
후의 17세기 공백기를 메워준 작품,임진왜란의 참상 고발과 포로문학으로서
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작품,여주인공의 전쟁에 따른 수난과 가족과 이별
의 고통 그리고 남편과의 재회를 통한 사랑의 성취,모색 등을 통하여 애정
13)박일용,「조선후기 애정소설의 서술시각과 서사세계」,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1988.
14)박일용,「장르론적 관점에서 본 최척전의 특징과 소설사적 위상」,『고전문학연구』제5집,고전문
학연구회,1990.
15)박희병,「최척전-16,7세기 동아시아의 전란과 가족 이산-」,『한국고전소설작품론』,집문당,1990.
16)정명기,「최척전」,황패강교수 정년퇴임기념논총『고전소설연구』,일지사,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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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소설이라는 점 등을 열거하여 <최척전>의 소설사
적 위상을 새롭게 조명하였다.17)
김진규는 <최척전>을 ‘포로소설’이라고 규정하며,임란 포로의 체험이 어떻
게 소설적으로 변용되었던가를 살피고 <최척전>이 가지고 있는 ‘포로소설’적
특징을 인간의 존재 양상과 결부하여 분석하였다.18)
민영대는 조위한의 후손을 찾아내『漢陽趙氏世譜』,박세채가 쓴 조위한의
<墓表>,家藏 필사본으로 전하는 <年譜>,<行狀>을 통해서 조위한의 가계,
생애,인물됨,저술,연보에 대해서 연구하였고 조위한의 문학 활동 -漢詩․
辭․歌詞․紀行文(隨筆)․小說 - 에 대해서 살펴보았다.<최척전>과『현곡
집』을 통해서 작가의 체험을 본 작품에서 투영하였음을 입증하였고,이 작품
을 ‘한국 소설사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사실주의에 의한 소설이며 근대 소설
적 성격을 가진 최초의 소설’로 평가하였다.그리고 남녀평등의 애정관을 보
여준 본격적인 애정소설로 파악하였다.19)
이상과 같은 <최척전>에 대한 연구 성과를 보면 작가에 대한 규명 연구,
주제 파악,소설사적 위상 등을 파악할 수 있다.그러나 작가가 소설을 통해
나타내려 했던 시대의식과 대외적 의식에 대한 연구가 다소 결핍됨을 발견하
게 된다.이로 인해 본고에서는 선학들의 연구 업적을 토대로 하여 작품의
문학적 성격과 작품에 반영된 작가의 시대의식과 대외의식을 중심으로 작가
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와 작품의 내용 속에 그의 생각
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피고자 한다.
17)박태상,『조선조애정소설연구』,태학사,1997.
18)김진규,「임란 포로소설 연구-<최척전>을 중심으로」,『동의어문논집』제11집,동의대 국어국문
학회,1998.
19)민영대,『조위한과 최척전』,아세아문화사,1993.
_____,『조위한의 삶과 문학』,국학자료원,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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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작가 조위한과 <최척전>의 형성 배경
1.조위한의 삶과 문학
1)한국 고소설의 실명 현상
한국 고소설의 특징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지만 작가론적 관
점에서 작가 失名 현상이 두드러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현상이다.현전
하는 고소설 작품 수는 약 1,270여 편으로 추정된다.20)그러나 이중에서 작자
의 이름이 알려져 있는 작품은 불과 50여 편을 헤아릴 뿐이다.그것도 작자
를 확연히 알 수 없는 경우까지를 포함한 숫자이다.나머지 작품의 대부분은
작자의 이름을 알 수 없다.그러다보니 작품에 대한 분석에서 일정 부분 한
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올바른 작품 분석을 위해서는 작가 연구가 선행되어
야 하기 때문이다.문학 작품이 작가의식의 산물이자,시대의 산물이라는 점
을 인지할 때 더욱 그렇다.그러한 측면에서 <최척전>은 작가를 분명히 알
수 있어 작품에 대한 분석이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심화되어 이뤄질 수 있다
는 장점이 있다.
그렇다면 왜 대다수의 작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았는지,반면
에 작가 실명 현상이 두드러진 시대에서 작가 ‘조위한’은 굳이 자신의 이름을
숨기지 않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에 앞서 당시 사회에서 관행적인 작자 실명 현상에 대한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는데,다음의 다섯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당시의 시대가 안고 있는 ‘소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인식 때문이
다.21) 조선시대에서 유학은 사상이나 정치적인 면에서 실질적이자,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학문적인 입장에서도 학문의 위계를 철학역사문학의 순
으로 순위를 매겨 왔던 것도 사실이다.여기에서 나온 것이 바로 ‘載道的 문
20)우쾌제,「고소설 명칭․총량 및 연구 경향의 통계적 고찰」,『인천어문학』제5집,인천대학교 국
어국문학과,1989,p.17.
21)김수중,『고전소설과 문학정신』,태학사,2007,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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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관’이고,이는 바로 이 시기를 대표하는 문학관이기도 했다.
조선 전기의 유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문학이란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道를 실천하는 방법론이라는 재도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22) 즉 道를
실어 나르기 위한 도구로서의 문학의 가치이지,문학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특히,소설이 갖는 문학적 특징인 비사실성과 허구성,상말의
사용과 문체의 천박성 등을 들어 당시의 지배층은 이를 배격하였다.
여러 유생들의 독서는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그 근본으로 삼고,『소학
(小學)』과『가례(家禮)』를 문호(門戶)로 삼아서 국가가 양성하는 방법을
따라야 한다.그리고 성현의 친절한 교훈을 지켜서 모든 선(善)이 본래
부터 자기에게 갖추어져 있음을 알고,옛날의 도가 지금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며,모두 몸으로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하여 체(體)를
밝히고,쓰임에 적합한 학문을 해야 할 것이다.그리고 제사자집(諸史子
集)과 문장,과거를 보기 위한 학업은 널리 통달하도록 힘쓸 것이나,마
땅히 내외본말(內外本末)과 경중(輕重),완급(緩急)의 차례를 알아서 항
상 스스로 격려하여 타락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그 외에 황당하고
요망하며 음란한 글은 모두 서원(書院)안에 들여오지 말 것이며,눈앞
에 가까이 하여 도를 문란하게 하고 뜻을 미혹(迷惑)하게 해서는 안 된
다.23)
지난번에 장필무(張弼武)를 불러 만나셨을 때,말씀하시는 중에 ‘장비
의 한 마디 소리가 만군을 달아나게 하였다고 한 말이 정사에는 보이지
않고,『삼국지연의』에만 있다고 들었다.’고 하셨습니다.이 책이 출간된
지 오래되지 않아서 소신은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그런데 둘레의 친
구들을 통하여 그 내용을 들어보니,심히 망령되고 허황함이 많다고 합
니다.천문지리와 같은 책은 전에는 숨겨졌다가 후에 드러나는 일이 있
기도 하였습니다.그러나 사기(史記)와 같은 경우,처음에 잃어버렸던
전(傳)은 후에 와서 억측하기가 어려운데도 설명을 덧붙여 늘렸으므로
22)최운식,『한국고소설 연구』,보고사,2004,p.42.
23)諸生讀書 以四書五經爲本原 小學家禮爲門戶 遵國家作養之方 守聖賢親切之訓 知萬善本具於我 信
古道可踐於今 皆務爲躬行心得明體適用之學 其諸史子集文章科擧之業 亦不可不爲之旁務博通 然當
知內外本末輕重緩急之序 常自激昻 莫令墜墮 自餘邪誕妖淫僻之書 竝不得入院近眼 以亂道惑志.李
滉,<伊山院規>,『退溪集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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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괴이하고 허황된 것입니다.신이 후에 그 책을 보니,과연 무뢰한
사람이 잡된 이야기를 모아 고담(古談)처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이것
은 이것저것 뒤섞여 무익할 뿐만 아니라,의리에도 심히 해롭습니다.주
상께서 우연히 한번 보시기는 하였지만,심히 미안스럽습니다.그 내용
중에서 말씀드린다면,동승(董承)의 의대조서(衣帶詔書)이야기나 적벽
전승(赤壁戰勝)대목 같은 것은 각각 괴이하고,황당한 일이거나 근거가
없는 허망한 말을 부연한 것입니다.주상께서 이 책의 근본을 모르실까
하여 감히 아룁니다.이 책은『楚漢衍義)』와 같은 책으로,이러한 종류
의 책은 하나가 아닌데,모두가 의리를 해치는 것들입니다.시문이 화려
하게 수식된 것은 오히려 괜찮은데,하물며『전등신화』,『태평광기』등
과 같은 책은 모두 사람의 심지(心志)를 오도합니다.주상께서 그것의
무망함을 아시고,이를 경계하신다면 학문의 공에 절실하실 것입니다.24)
위의 두 인용 글을 통해 당시의 유학자들 독서의 대상과 기준이 무엇인지
를 알 수 있다.독서의 대상은 유가의 경전이지 결코 소설이 아닐 뿐더러 소
설류는 ‘도를 문란하게 하고 뜻을 미혹하게 한다’하여 배격되었던 것이다.그
리고 소설이 배격된 이유는 소설의 내용에 담긴 허구성,즉 황당하고 요망하
며 음란하다고 한 것에 따른 것이었다.
소설은 이와 같이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소설이 갖는 문체적인 특징에서도
배격의 대상이 되었다.이것이 현실화 된 것이 바로 정조(1752~1800)의 문체
반정이다.
24)頃日張弼武引見時 傅敎內 張飛一聲走萬軍之語 未見正史 聞在三國志衍義云 此書出來未久 小臣未
見之 而或因朋輩間聞之 則甚多妄誕 如天文地理之書 則或有前隱而後著 史記初失其傳 後難臆度 而
敷衍增益 極其怪誕 臣後見其冊 定是無賴者裒集雜言 如成古談 非但雜駁無益 甚害義理 自上偶爾一
見 甚爲未安 就其中而言之 如董承衣帶中詔 及赤壁之戰勝處 各以怪誕之事 衍成無稽之言 自上幸恐
不知其冊根本 故敢啓 非但此書如楚漢義等書 如此類不一 無非害理之甚者也 詩文詞華 尙且不關 況
剪燈新話太平廣記書 皆足以誤人心志者乎 自上知其誣而戒之 則可以切實於學問之功也.선조 2년 6
월 임진조,『조선왕조실록』권2.
奇大升이 1569년에 선조 임금에게 올린 글이다.이글을 보면 그 당시 궁중에서의 소설의 독서
상황과 당시의 소설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다.이 글에서 기대승은 당시에 널리 읽혀지고 있던
『삼국지연의』,『초한연의』,『전등신화』,『태평광기』등의 소설이 끼치는 부정적 영향을 가리켰다.
소설은 정사에 비하여 ‘괴이하고 황당한 일’이고,‘근거 없는 허망한 말’로 의리를 해롭게 하고,
마음과 뜻을 오도한다고 하여 선조 임금에게 경계하신다면 학문의 공에 절실하실 것이라고 하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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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는 뜻이 순하면서 말이 서로 통해야 귀한 것이다.요즈음 이른바
기교경발(奇巧警拔)하다는 것을 내가 보니,초쇄(噍殺,소리가 슬프고
낮은 것,또는 가락이 유창하지 못하고 낮은 것)하고 비리(鄙俚)하지 않
은 것이 드물다.이것이 패해(稗海)의 수입을 금지하는 까닭이니,반드
시 문체를 변화시키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25)
위의 인용 글을 통해 당시 소설의 문체에 대한 인식,즉 ‘초쇄하고 비리하
여 사대부들이나 문인들의 문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인식을 명확
히 알 수 있다.
요컨대 당시의 소설은 허구적인 이야기로 개인적인 학문의 진보를 가로막
고,사회적인 악영향을 가져올 수 있는 피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소설을 본인이 창작했다고 이름자를 걸 수는 없었을 것이
다.이것이 바로 작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숨길 수밖에 없었던 주요 원인이다.
둘째,소설을 필사하거나 板刻하는 과정에서 작자 이름이 누락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26)소설이 언제 발생했느냐에 대한 논란은 많다.일반적인 입
장에서 볼 때 최초의 한문소설은 조선 세조 때 김시습이 지은『금오신화』로
인정한다.그러나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나말 여초의 <조신전>,<수이전>
등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소설의 발생 시기를 소급 적용하기도 한다.그러
나 소설에서 독자의 대중화는 17세기 이후에 와서 이루어졌음에 이견은 없
다.
소설이 대중화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많이 읽혀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
는다.그러나 조선시대 당시만 해도 소설의 유통 구조는 열악했다.초창기에
는 직접 손으로 필사하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15·6세기까지만 하
더라도 거의 모든 작품이 이 ‘전사’라는 방법에 의해 독자들에게 유통되었다.
채수의 <설공찬전>을 당시 사람들이 한문으로 베끼거나 언문으로 번역해서
읽었다는 사실이 전사 유통의 좋은 예가 된다.17세기에 창작된 <구운몽>,
25)敎曰 文字貴於意順而辭達 近日所謂奇巧警拔云者 以予視之 則其不涉於噍殺鄙俚者鮮矣 此所以禁
貿稗海 必以變文體爲眷眷也.『大東紀年』卷五.
정조 임금이 순정한 고문만을 인정하고,소설 같은 새로운 문체를 인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6)정주동,『고대소설론』,형설출판사,1966,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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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창선감의록> 등도 전사에 의해 유통되었고,그 후 사대부가
여인들이 탐독한 소설은 물론 낙선재본 소설들도 거의 전사에 의해 유통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작품이 읽혀지기 위해서는 유통이라는 전제조건이 붙는데,당시
의 유통체계로 볼 때 전사가 유일한 방법이었다.그러나 전사를 하는 과정에
서 과연 원작자의 원본에 얼마나 충실하였느냐는 하는 것은 속단하기 어렵
다.물론,전사자로서의 의무에 충실했다면 원본과 대조해 내용상의 차이가
없이 똑같겠지만,전사자 자체가 다양한 群이었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필요
성이 제기되면 누구나 전사가 가능했고,여기서 전사자는 전사자이기 전에
한 작품에 대한 독자일 수 있다는 점이다.독자는 작품에 대한 기대를 갖게
마련이고,작가의 의도나 서사 전개에 대한 불만을 가질 수도 있다.이러한
욕구를 전사의 과정에서 투영해 내는 것이다.즉 전사의 과정에서 필사자의
임의적인 첨삭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말이다.이로 인해 이야기의 기본 구조
는 같을지라도 표현의 방법에서 시작해서,전개 과정의 일정부분은 다시 가
감이 있게 된다.이렇게 완성된 작품에 작가가 누구인가를 따지는 일은 그다
지 의미 있는 일이 아니다.그러다보니 자연 작가가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는
견해이다.
또 소설 유통의 방법으로서 큰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18·9세기 국문소설
발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바로 소설 낭독자이다.이들은 소설
독자를 문자 해독력이 없는 평민층에까지 확대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
음은 물론,18·9세기 국문소설 발달의 기반을 다지는 데에도 기여한 바가 크
다 하겠다.청중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에 따라 강담사·강독사·
강창사로 구분되기도 했던 이들은 이야기를 얼마만큼 감칠맛나게 잘 전달해
서 청중들로부터 인기를 끄느냐가 중요한 관건이었지 작가가 누구였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대상이 아니었다.낭독사들에 의해 작품은 재해석되게 마련이
었기 때문이다.또 청중 역시 낭독사를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
있느냐가 중요했지 당시 작가가 누구였느냐도 중요한 대상이 아니게 된다.
그러나 보니 자연 작자의 이름은 누락되거나 잊혀지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셋째,이미 존재하여 떠돌던 설화를 수용하여 소설화하였으므로 자기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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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밝힐 수 없었다는 점이다.27)고소설 중에는 설화를 소재로 하여 구성한
작품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대표적인 설화 작품집『破閑集』,『補閑
集』,『櫟翁稗說』등의 시화류에 실린 이야기들과『於于野譚』,『東野彙輯』,『橋
漫錄』,『靑邱野談』의 야담집들에 실린 이야기의 대다수가 당시 전해 오는 설
화들을 채록한 것들이다.그러나 채록하는 과정에서 이야기는 구비문학적 성
격에 따라 가감이 이루어질 것이고,채록하는 작자 자신들도 앞뒤의 문맥이
나 채록 의도에 따라 일정 부분들은 윤색했을 것이다.이러한 이야기 구조를
토대로 본격적인 소설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춘향전>,<심청
전>에서 시작하여 <전우치전>,<임경업전>,<구운몽> 등이 그러하다.
한국의 대표적인 고소설 중 하나인 <춘향전>은 남원지방에서 전해 내려오
는 유명한 배경설화 ‘암행어사 설화’,‘열녀 설화’등이 기본적인 서사구조로 바
탕을 이루고 있다.여기에 당시 사회적인 문제로서 갈등의 화두인 ‘신분제’를
인간의 영원한 로망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뛰어넘어 민중의 염원인 ‘만인
평등’을 이뤄내고 있으니 이는 지극히 낭만적인 해결이자 아름다운 사랑이야
기로 갈무리 된 작품이다.이 대중적인 작품이 명창 판소리꾼들을 만나 더욱
인기를 구가하며 전국으로 확산,유통할 수 있게 된 것이다.특히 오늘날 전
하는 <춘향전>의 이본들은 당시 판소리 창자들의 개인적 취향에 따라 어느
정도의 첨삭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약간씩의 상이한 내용들이 기록으로 전
한 탓일 것이다.
이와 같이 일부 소설의 탄생의 경로 속에는 설화에서 소재를 취하고 거기
에 일정부분 작가의도의 첨삭 등이 이루어져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다.따라서 이렇게 탄생된 작품을 개인의 이름을 걸고 유통시키기는 힘들었
을 것이다.그러다보니 자연 작자 미상의 작품으로 남게 된 것이다.
넷째,여성 작가들로 추정되는 작품들이 있으나 여성의 경우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수 없었다는 점이다.이는 시대상황에 기인하는 것으로 조선 사회는 여
성에 대한 사회의 인식과 이해의 폭이 극히 좁았던 시대이다.28)그럼에도 고
소설 중에는 여성의 의식이나 심리를 잘 나타낸 소설이 많이 있어 여성 작자
27)최운식,「재생설화의 소설화」,『서원 방용구박사 화갑기념논총』,국제대학 인문사회과학연구소,
1975,p.185.
28)김수중,앞의 책,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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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등장을 추정할 수 있다.대표적인 예로 <박씨전>을 들 수 있다.<박씨
전>은 18세기 후반쯤의 작자 미상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박씨전>의 내용
을 살펴보면 남성인물과 여성인물이 능력 면에서 두드러진 대조를 보이며,
이 여성들의 대다수가 남성들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우월성을 보인다.특
히 신선의 딸인 박씨와 侍婢 桂花,만 리를 훤히 내다본다는 胡王后 馬氏와
女刺客 奇紅大 등 이 작품에서는 가히 여인 천하라 할 만큼 여성들이 출중하
고 남성보다 우위에 있다.작품에서의 주인공 역시 이 여성들이며 작품 전편
에서 눈부신 활약상을 보이는데,궁극에 가서는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해내
게 된다.이 영웅적인 여성인물,남성보다 더 우월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아낸
<박씨전>은 그야말로 여성 중심 의식의 소설이다.이런 여러 가지 점들을 통
해 볼 때 이 소설의 작자는 여성이 아니었는지 추측해 볼 수 있지만 작자가
일체 언급돼 있지 않아 입증하기는 어렵다.
남녀가 유별한 조선 사회에서 집 밖의 출입조차 지극히 통제적이고 사회생
활 자체를 꿈꾸기 어려웠던 여성에게는 떳떳하게 이름을 밝힐 수 있는 자리
가 많지 않았다.이런 한계 때문에 여성 작가들은 소설을 창작하고 나서도
자기의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하였을 것이다.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글을
알고 타고난 文才를 지닌 여성들이 있었음은 당연하다.이런 여성들을 중심
으로 당시 여성들,또는 자신들의 욕망과 갈등을 풀어줄 해결책으로 허구의
이야기인 소설은 아주 적절한 대리 만족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17세기 이후
소설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로 여성 독자와 여성 작자의 증가
를 꼽을 수 있을 것인데,여성에게 있어 소설은 경험하고 싶으나 경험할 수
없었던 세상 밖 이야기에 대한 정보지이자 욕망과 갈등 해결의 창구 역할을
했던 때문일 것이다.
다섯째,원고료에 해당하는 돈을 받고 작품을 썼을 경우에 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29)소설을 지으려면 상당한 식견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이러한 식견을 갖추고 있어 소설을 창작하고도 자기의
이름이 세상에 밝혀지기를 꺼려한 사람으로는 몰락 양반층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대대로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 데다가 생활 수단을 갖지도 못하였고,
29)조동일,『한국문학통사3』,지식산업사,1994,p.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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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공․상의 생활 수단을 갖지도 못하였으므로,경제적 어려움이 이만저만
이 아니었을 것이다.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세책가나 방각본 영업
을 하는 상인의 요구에 따라 소설을 써 주고 돈을 받아 생계에 보탤 수 있었
고,소설 속에 몰락한 자기의 처지,몰락하면서 겪게 된 세계와의 대결,그리
고 세상의 형편에 관하여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그래서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소설의 창작에 관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유충렬
전>·<조웅전>과 같은 유형의 군담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당쟁으로 실
세한 몰락 양반층이나 그 후손이라 추정할 수 있다.따라서 <유충렬전>·<조
웅전>과 같은 계열의 작품들은 몰락 양반들의 실세회복의식에서 쓰여졌을
것이라 생각된다.30)
이와 같은 이유들이 고소설의 특징 중 하나인 실명 현상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물론 그렇다고 유학자들에게 소설이 무조건적인 배격의 대
상이었던 것은 아니다.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소설에 대한 효용성이 제기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소설에 대한 효용성을 언급한 몇 가지 사례를 아래와
같이 살펴볼 수 있다.
金鰲居士가 新話를 전하였는데,
白月과 寒梅가 완연히 여기에 있었구나.
잠시 내게 빌려주어 병든 눈을 문질러 닦고 나니,
두통이 이에 따라 거뜬히 나았구나.31)
무릇 역대의 소설들이 있어 多聞에 도움을 주었고,옛날의 일들을
증명하기도 했으니 역시 무시할 수 없다.32)
시험 삼아『三國志』한 匣을 읽어보니 평론이 신기하여 볼만한 것이
30)조동일,『한국소설의 이론』,지식산업사,1977,p.432참조.
31)金鰲居士傳新話 白月寒梅宛在慈 暫借河西揩病目 頭風從此快痊之.金麟厚,『河西全集』.
김인후가『금오신화』를 빌려다 읽고 느낀 것을 시로 표현한 것으로『금오신화』의 내용이 자
신의 병든 눈을 맑게 하고 두통을 낫게 한다고 하였다.소설에 대한 긍정적인 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32)夫歷代之有小說諸書 所以資多聞 證考實 亦不可少也.李晬光,『芝峰類說』.
이수광은『芝峰類說』을 통해 소설은 견문을 넓히고 옛 일을 증명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소설
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며 효용성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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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았고,그 범례 또한 볼만하며,그 서문 역시 하나의 奇字로써 命意하
였고,글 쓰는 법 역시 신기하더라.33)
龍戰,鬼車,雊雜篇을
공자가 남겨둔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다.
말이 세상의 교화에 관계되니 괴이해도 무방하고
일이 사람을 감동시키니 허탄해도 재미있다.
河間傳 그 사연도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
毛穎傳 그것도 모두가 허구이지.
큰 함박의 옛이야기는 莊子의 수법이고
離騷 天問의 가사는 屈原의 필력이다.
여기에『剪燈新話』는 옛 수법을 본받았으니
도깨비 뛰놀며 魚龍도 춤을 춘다.34)
소설에 대한 배격론이 우세한 가운데 이와 같이 일부 몇 학자들을 중심으
로 소설에 대한 효용성과 그에 대한 가치가 언급되기도 한다.그러나 소설에
대한 효용론은 여전히 소수의 의견에 머물렀고 소설이 대중화된 것은 17세기
이후에 들어서의 일이다.
소설에 대한 배격론이 지배적인 가운데도 지금까지 알려진 중요한 소설과
작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시습(1435~1493):『금오신화』
채 수(1449~1515):<설공찬전>
33)試觀三國一匣 其評論 新奇多可觀 其凡例 亦可觀 其序文 亦以一奇字命意 而文法 亦甚奇.安鼎福,
『順菴雜錄』.
안정복은 당시 유행했었던 소설 <삼국지>를 읽고 이야기와 범례가 신기하여 글 쓰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언급하였다.역시 소설의 효용성을 인정하는 대목이다.
34)龍戰鬼車與雜 夫子不刪良有以 語關世敎怪不妨 事涉感人誕可喜 曾見河間記淫奔 復見毛穎錄亡是
濩落大瓠漆園吏 怪詭天問三閭子 又閱此話踵前踐 夔罔騰逴魚龍舞.金時習,<題剪燈新話後>,『梅
月堂文集』下.
김시습은 <剪燈新話>를 읽고 내용이 세상의 교화에 관계되니 괴이해도 무방하고 일이 사람
을 감동시키니 허탄해도 재미있다고 하였다.특히 <전등신화>를 읽고 ‘내 평생 뭉친 가슴 풀어
주네’라고 하는데,이는「전등신화」가 자신의 가슴에 맺힌 불만을 풀어주었다는 의미로서,소설
이 지닌 사회비판적 내용이 독자인 김시습에게 충분히 전달되어 당시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일
정 부분 불만을 해소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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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의(1475~ ?):<대관재몽유록>
신광한(1484~1555):『기재기이』
임 제(1549~1587):<화사>,<수성지>,<원생몽유록>35)
최 현(1563~1640):<금생이문록>
조위한(1567~1649):<최척전>
권 필(1569~1612):<주생전>
허 균(1569~1618):<홍길동전>
윤계선(1577~1604):<달천몽유록>
권 칙(1599~1667):<안여식전>,<강로전>
정태제(1612~1669):<천군연의>
김만중(1637~1692):<구운몽>,<사씨남정기>
조성기(1638~1689):<창선감의록>
홍세태(1653~1725):<김영철전>36)
이정작(1678~1758):<옥린몽>
박지원(1737~1805):<허생전>,<호질>,<양반전> 등
김소행(1765~1859):<삼한습유>
목태림(1782~1840):<종옥전>,<춘향신설>
심능숙(1782~1840):<옥수기>
정기화(1786~1827):<천군본기>
서유영(1801~1874):<육미당기>
남영로(1810~1857):<옥루몽>
박태석(1835~ ?):<한당유사>
정태운(1849~1909):<난학몽>
여기에 한문 단편 작자로서 이옥(1760~1812),김려(1766~1822),안석경
(1718~1774)등이 있으며,이 밖에 <일락정기>를 지은 ‘만와’,<청백운>을
지은 ‘초료산주인’,<절화기담>을 지은 ‘석천주인’,<광한루기>를 지은 ‘수산’,
35)<원생몽유록>의 경우 작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임제와 원호 설이 그것이다.
36)<김영철전>은 권혁래 교수는 최근 박재연 교수가 발견,소개한 장편의 한문 필사본 <김영철
전>을 토대로 원 작가로 ‘김응원’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양승민․박재연,「원작계열 <김영철전>의 발견과 그 자료적 가치」,『고소설연구』,제18집,한
국고소설학회,2004.
권혁래,「<김영철전>의 작가와 작가의식」,『고소설연구』,제22집,한국고소설학회,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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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선기>를 지은 한은규 등이 있으나,현재까지 이들에 대한 실증적인 자료
가 확보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이 중에 <일락정기>를 지은 ‘만와’는 이이
순(1754~1832)일 것이라는 학설이 제기되어 있다.이들 작가들을 종합해 볼
때 몇 가지의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다.
첫째,사대부 출신들로서 손꼽히는 문인 출신이 많다는 점이다.위의 작가
대다수가 당대에 인정받는 문인들임을 알 수 있다.
둘째,사대부 출신 문인들로서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하다는 점이다.
‘세조왕위찬탈’을 계기로 속세와 인연을 끊고 방외인으로 살아간 김시습,‘중
종반정’에 대한 측면 비판을 시도했던 채수,‘신분제’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내세우며 새로운 이데아를 꿈꾼 허균,양반계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
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해 낸 박지원 등이 대표적인 예로 제시될
수 있다.
셋째,강직한 성격으로 유배생활이 잦고 그만큼 굴곡 많고 일생이 불우했던
인물들이 많다는 점이다.조선 후기의 문인 김려(1766∼1822)의 경우,15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27세에 진사에 급제한 전도유망한 선비였으나 32세 되던
1797년,친구 강이천의 옥사에 연루되고 패사소품을 즐겨 썼다는 이유로 문
체 문제에 뒤얽히면서 10여 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그러나 이러한
유배생활은 오히려 그들이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문학적 안목을 기르는 역할
을 하게 된다.신광한 역시 1518년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류가 축출된 기
묘사화 때 기묘사림으로 몰려 여주에 칩거하면서 우울한 중년기를 보냈고,
명나라 대문장가 고천준을 맞는 문사의 엄선에서 뽑혀 문명을 떨쳤던 권필
역시 광해군의 妃인 柳氏의 아우 柳希奮 등 戚族들의 방종을 宮柳詩로써 비
방하여 親鞫 받은 뒤 유배되었다.귀양길에 올라 동대문 밖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주는 술을 폭음하고 이튿날 죽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이름이 알려진 고소설의 작자들은 대체적으로 사대부 출신으
로서 뛰어난 문재를 지닌 인물이 많다는 점,그러면서 동시에 불합리한 현실
과 타협하기 보다는 유배생활을 택할 만큼 강직한 성향을 지녔고 권력을 따
르거나 남의 이목을 중시하기보다는 자신에게 떳떳한 삶을 살아 왔다는 것들
이 인물 유형의 기틀을 이룬다.그리고 이들의 염원 또는 사회와 시대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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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불만 또는 욕구들이 소설에 투영되었다는 점 또한 익히 알려진 사실들이
다.특히 작자와 작품의 성향이 일치한 작품일수록 자신들의 작품에 애써 이
름을 감출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2)<최척전>의 작가
<최척전>의 작가가 조위한이라는 사실에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그
렇다면 조위한이 <최척전>의 작가로 정확하게 인정받은 근거는 어디에 있으
며,또 작가를 드러내지 않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조위한이 소설을 쓴 작자
로서 자신의 이름을 숨기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
다.
<최척전>의 작가가 ‘조위한’임을 알려주는 자료로는 우선 이본들을 제시할
수 있다.현존하는 이본은 한문본 5종,국문본 1종,한문 축약본 5종이 있
다.37) 이중 조위한이 <최척전>을 지었다고 하는 근거는 한문본인 서울대학
본 마지막에 쓰여 있는 ‘天啓元年 辛酉閏二月日 素翁題’라는 기록과,뒤를 이
어 작은 글씨로 ‘素翁趙緯韓號 又號玄谷’이라 한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고려
대학본에도 ‘天啓元年 辛酉閏二月日 素翁題’이라 되어 있다.여기서 天啓元年
은 明 熹宗을 원년으로 광해군 13년인 1621년을 지칭하고 玄谷,또는 素翁은
조위한의 ‘호’이다.또 李德懋의『靑莊館全書』에도 ‘내가 일찍이 소옹의 <최척
전>을 읽어 그 내용을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38)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척전>의 작자는 조위한임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학계에서 <최척전>에 대한 최초 언급은『조선문학사』에서 이명선이 제기
한 것이 처음이다.그는 고소설을 연대순으로 열거하면서 인조대에 조위한이
<최척전>을 지었다고 작자명을 분명히 하였다.이명선 역시 필사본의 마지막
부분에 근거하여 작자를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39)이어 문선규,김기동 등 다
37)지연숙,「<최척전> 이본의 두 계열과 善本」.『고소설연구』,한국 고소설학회,2004.
지연숙은 본 논문을 통해 규장각본,고려대본,간호윤본이 원본 계열에 속하며,김모본과 천리
대본은 변이가 심한 것으로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김모본을 거쳐 천리대본으로 나아갔다고 밝
힌 바 있다.이는 그간에 선본으로 알려진 것이 천리대본이라는 주장과 달라 관심을 끈다.특히
천리대본은 탈락과 변이가 잦고 오류도 많아 원본에서 가장 멀어진 이본이라고 했다.
38)族姪復初光錫條.余嘗讀素翁崔陟傳 而詳知也.李德懋,『靑莊館全書』第15卷 <雅亭遺稿> 7,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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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연구자들에 의해 <최척전>의 작자는 조위한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작자 생존 당시 또는 그의 사후 기록들 중 어느 곳에도
<최척전>에 대한 언급이 없어 미흡한 감이 남아 있음은 사실이다.그의 문집
인『玄谷集』과 송시열이 썼던 <神道碑銘>과 家藏 필사본 <年譜>,<行狀>등
어디에도 조위한의 다른 작품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만 <최척전>에 대한
기록은 없다.
<최척전>은 조위한이 작품을 발표하던 당대에도 이미 읽혔음을 알 수 있
다.작자와 동시대에 살던 이민성의 문집『敬亭集』에 ‘怪哉崔陟傳不知誰小作’
의 기록이 그것이다.40) 이처럼 조위한 당대에 <최척전>이 읽혀졌지만 작자
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그러던 것이 현전하는 사본에는 이름이 밝혀져
있다.작자보다 후대의 인물로서 전자에 언급한 이덕무의『청장관저서』의 기
록과 이수봉의 소장본『어우야담』의 사본에도 <최척전>의 작자가 ‘조위한’이
라는 기록이 전해진다.이로 미루어 <최척전>의 작자는 조위한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또 하나가 전자에서 언급한 이름이 알려진 사대부 작자들에서 찾을 수 있
는 공통점을 조위한에게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조위한의 <연보>와 <행장>에 따른 기록이다.이에 의하면 조위한의
가문 역시 선대로부터 혁혁한 전통으로 이어져 온 대표적인 명문가의 사대부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엄격한 아버지의 가르침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학
업에 정진하여 그는 형제들과 일찍이 학문에 일가를 이루었다.41) 그의 절친
한 친구였던 허균의 문집『惺所覆瓿藁』에는 ‘前五子詩’와 ‘後五子詩’가 소개돼
있는데,‘전오자시’에서 허균은 현곡을 가리켜 ‘문장이 빼어난 다섯 명 중 첫
째가는 인물’이라고 칭찬했다.탁월한 文才였음을 보여주는 말이다.그의 문
집인『玄谷集』등에 남겨진 700여 수의 漢詩에서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특히 그의 한시 중에는 雜體詩가 많다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잡체시는 기존
한시와는 다르게 표현 형식에서 다양한 변화를 가한 것으로 일부에서는 유희
39)민영대,앞의 책,『조위한의 삶과 문학』,p.41.
40)影印 韓國文學集叢刊 76,『敬亭集』卷之四,<題崔陟傳>條.
41)<行狀>,訓迫甚嚴家法 少長日必晨輿 盥櫛拜謁 唯謹有少失儀 卽公輒不降色 其他多類此 以故諸子
擧能啣訓懋學 卒有所成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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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위해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기존의 한시가 갖는 표현의 한계를 극복해
낼 수 있는 대안으로서 권필,성운 등 조위한의 師友들이 잡체시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42)
그러나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조위한의 인생은 그가 살았던 17,18세
기의 현실에서 세 번에 걸친 유배와 파직이 보여주듯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수차례의 무고와 유배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혼란했던 정치상과 백성
들의 곤궁한 삶을 그대로 표현한 <流民嘆>이라는 제목의 국문가사를 지어
광해군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그러나 <流民嘆>은 기록으로만 남아있지 안타
깝게도 현전하지 않는다.43) 57세 때(인조 1년,1623년)에는 仁城君을 비롯한
왕비의 친척과 임금의 친족들이 지나치게 恣行하자 이들의 죄를 논하기도 하
고44),왕비의 친척인 鄭百昌의 잘못을 논박하다 인조에게 미움을 사 외직으
로 쫓겨나기도 했다.이와 같이 탁월한 문인적 자질에 강직한 성향,그리고
실험정신이 강하고 현실 비판 또한 서슴지 않았던 조위한이었기에 아픈 시대
현실에 대한 모색의 일환으로 웅장한 스케일의 <최척전>을 창작할 수 있었
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위한의 생전에,또 그의 생전 기록에서 왜 <최척전>에 대한 언
급이 없는 것인가?이는 아마도 당시 팽배한 소설 배격론의 영향이었을 것이
라는 판단이다.‘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당시의 시각이 워낙 부정적이어서
조위한 역시 작품을 창작한 후 의도적으로 이름을 게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
인다.그러나 작품이 당시 사람들에게 읽혀지면서 작자가 누구인지 모르다가
조위한이 서서히 작자로 알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42)이에 대해서는 이희경의「조위한의 잡체시 연구」,경상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2002참조.
이희경은 이 논문을 통해 조위한의 잡체시 27수에 대한 주제를 분석하였는데,‘인생 무상과
은일 지향’,‘인생 비애에 대한 숭화의식’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다양한 표현 양식의 잡체시를 통
해 조위한의 실험정신이 잘 드러난다고 한 바 있다.
43)<유민탄>에 대한 기록은 조위한의 <연보>와 <행장>에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홍만종의
『旬五志』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44)爲仁城君所斥避啓,『玄谷集』권11,한국문집총간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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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위한의 생애
玄谷 趙緯韓은 宣祖․光海君․仁祖 3대를 걸친 인물이다.그는 1567년 서울
의 서부 盤石村에서 趙楊庭과 谷山 韓氏 사이의 4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
다.어릴 때부터 학문에 매우 뛰어났고 특히 글 읽기를 즐겼는데,할머니가
그의 글 읽는 소리를 즐겨 듣곤 하였다.45)시에 대한 재주도 뛰어나 10세에
이미 주위를 놀라게 한 시를 지었고,특히 11세 봄에 친구들과 어울려 매화
와 버드나무가 봄을 다투는 전경을 보고 시를 지어 읽는 사람들의 칭송을 받
았으며,이해 겨울에는 전염병으로 인해 避接 나갔다가 죽을 위기를 넘기고
회복되자 시로써 아버지에게 자신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였다.46) 15세에는
『四書三經』을 외웠고,16세에 先秦의 고문을 널리 섭렵하였다.
그는 청년기에 들어서부터 여러 차례 鄕試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과거 시
험에 운이 없어서 늦은 나이인 35세에 이르러서야 겨우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이때 그는 윤근수의 추천을 받아 미관말직인 중림찰방에 임
명되었다.이어 선공감직장,주부,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다가47)광해군 1년
(1609)43세 때에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비로소 본격적인 관계 진출을 시
작하였다.48)성균관전적,좌랑겸춘추관기사관,예조정랑,지제교 등을 지냈다.
광해군 5년(1613)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파직 당하였다.인조반정으로(1623년)
재등용되어 사성겸지제교를 제수 받았으며,사헌부의 장령,집의,편수관 등
을 역임하였다.다음 해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토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
고,병자호란 때도 항전하였다.벼슬은 예조참의,형조․병조․공조참의에 이
45)<行狀>,生稟秀異 已有出群之氣 甫數歲受學 文理大闡 誦讀琅然 吳夫人素鍾愛必引置左右曰 此吾
耳邊絲竹也.
46)<年譜>,輿隣友作柳輿梅爭春詩 入題曰 相爭春色誰先後 陌頭楊柳溪邊梅 見者稱之 十二月得癘疾
是病也幾危 而甦才起作詩 送于判書公所曰 臥病南窓下 思親淚滿巾 父母在何處 遙知父母處 欲去病
未能.
47)<墓表>,詞業早成 顧多厄于有司 萬曆辛丑始登上痒 年已三十五歲 尋除重林督郵 陞少府監直長.
48)<世譜>,己酉增廣第二.
<墓表>,光海初載中文科第二名.
<光海君日記>,己酉出身.
<年譜>,己酉十月登增廣科第二人.
<行狀>,己酉登增廣殿試第二名.
<神道碑銘>,遂登己酉第.
위의 기록들에서 작자가 己酉年에 과거에 급제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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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렀다.
조위한은 명문장가로 광해군의 난정을 풍자하는 <流民嘆>49)이라는 가사를
지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저서로 문집『玄谷集』이 전하며,본고에서 고
찰하고자 하는 한문소설 <崔陟傳>이 있다.조위한이 남긴 글들은 대부분이
그의 문집에 실려 있는데 그가 11세에 지은 시,<流民嘆>,그리고 <崔陟傳>
등에 대한 언급은 없다.그 이외에도 그가 지었던 작품이 상당량 있다고 추
정할 수 있다.50)
조위한이 남긴 작품을 세 시기로 나눠서 살펴보겠다.
(1)은거생활 전 시기(1567~1618).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위한은 10세에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고,
11세 봄에 친구들과 어울려 매화와 버드나무가 봄을 다투는 정경을 보고 시
를 지어 읽는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이해 겨울에는 전염병으로 인해 避接
나갔다가 죽을 위기를 넘기고 회복되자 시로써 아버지에게 자신의 뜻을 나타
내기도 하였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족들을 거느리고 경기도 연천․토산
등지로 피난생활을 하다가 그는 유일한 혈육이던 어린 딸을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잃고 길가에 가매장한 후 시 <哀亡女>51)를 읊었다.임진왜란으로 인
하여 조위한이 가족을 잃은 가장 불행한 체험은 훗날 문학 활동을 하는 데
좋은 기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임진왜란이 끝난 후 그가 실의에 빠져 용
산에 살고 있을 때(선조 32년, 1599년)조찬한․권필․이안눌․임전과 함께
49)‘流民嘆은 玄谷 조위한이 지은 것이다.昏朝의 번거로운 정치와 列邑의 혹독한 賦稅를 개탄하여
그 정경을 자세히 엮어 놓았다.’
洪萬宗,『旬五志』(李民樹 譯),乙酉文庫 65,1974.
50)작자와 특별히 절친 교우 관계를 가졌던 허균의『惺所覆瓿藁』에는 그에게 보냈던 많
은 양의 편지와 그와 관련된 글들이 남아 있는데,조위한의 문집에는 허균에 대한 기
술이나 그와 관련된 작품이 전혀 없다.허균이 광해군 10년 역적으로 몰리어 사형 당
했고 그 후에도 伸寃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글들은 모두 삭제했을 것임은
명백하다.허균을 제외한 이때에 절친한 관계를 유지한 다른 사람들 - 권필,이안눌,
이항복 등 - 과 주고받았던 시들은 많이 전하고 있다.또 <流民嘆>의 경우는 나라의
어지러움과 백성들의 참상을 고발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崔陟傳>은 당시 소
설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지 못하였던 때문에 후손들이 문집을 편찬하면서 수록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이런 이유로 조위한이 후손이 문집을 만들 때 많은 글들을
삭제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51)『玄谷集』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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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일 동안 文酒之會를 즐겼다.헤어질 때 아쉬워하며 <余寓居龍山,與善
述․汝章․子敏․寬甫․留連十餘日,有文酒之會,將散,以五言近體,別汝章>52)
를 지었다.다음해 여름에(선조 33년,1600년)권필과 강화도의 마니산에서
독서하고 겨울에는 장성의 토천으로 가서 동생 조찬한,권필 등과 어울려
<土泉同宿聯句>,<土泉再會聯句>,<述懷聯句>53)를 지었다.이들이 지은 시
는『현곡집』과 조찬한의 문집인『玄洲集』,54)권필의 문집인『石洲集』55)에 다
같이 실려 있다.선조 36년(1603)에 윤근수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나갔으며,
다음 해에 그가 노량에 살던 황정욱을 방문하였을 때 시를 수창하였다.56)선
조 40년(1607)가을에 鴨島에서 崔笠․權韠과 <鴨島述懷>57)를 수창하였다.
조위한이 늦게 관계로 진출하여 광해군 2년(1610)8월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국의 풍물을 견문하고 여행하면서58) 많은 견문시 <遊太
白山>,<白馬江>,<在西湖>,<臯蘭寺次石洲韻>,<萬瀑洞遊楓岳時>,<靑鶴洞
次肅羽韻>,<渡臨津>,<波憾岳陽城>,<長城>,<大凌河>,<小凌河>,<過遼
寧衛>,<題滄浪亭>,<玉河館>,<秦皇島>,<入遼陽城>등과 가족과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시 <憶女兒>,<夢見少女>,<憶伯兄>,<憶舍弟>등을 지었고59),
권필의 부인이 죽었을 때 挽詩 <挽石洲內子>60)를 짓기도 하였다.이 시기에
명의 提督인 한만상과 시를 수창하기도 했다.조위한이 중국에 간 때는 마침
그의 아내가 임신 중이었다.그는 아내에게 반드시 아들을 낳아 달라 부탁하
고 중국으로 향하였다.조선시대 대표적인 사대부로 사당과 사찰을 지날 때
마다 찾아가 정성을 드렸고 <四月八日>을 비롯하여 <雙溪寺>,<禾嚴寺>,
<長安寺>,<新興寺>,<佛日>등 절,부처와 관련된 시를 지었다.그는 순탄
한 벼슬길을 예상했으나 광해군 5년(1613)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삭탈관직을
당하였다.광해군 9년(1617)이항복이 인목대비 폐출을 극력 반대하다가 북청
52)『玄谷集』권6.
53)『玄谷集』권10.<述懷聯句>가 끝난 다음 권필의 跋文의 내용은『玄洲集』,『石洲集』의 내용과
동일하다.
54)『玄洲集』권9.『玄谷集』의 내용과 같은 권필의 跋文이 있다.
55)『石洲集』권8.
56)『玄谷集』권5.
57)『玄谷集』에 <鴨島述懷>가 있음.
58)許筠,<送趙持世赴京序>,『惺所覆瓿藁』권5文部.
59)『玄谷集』권5.
60)『玄谷集』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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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유배 갈 때는 送別詩 <山壇次五峰韻贈別白沙相國>을 지어 전송하였다.
광해군 10년(1618)이항복이 유배지에서 죽자 애도의 시 <哭白沙李相國恒
福> 두 수를 지었다.61)이해에 가정생활이 어려워지고 세상을 잊고 속세와의
인연을 끊기 위해 온 가족을 이끌고 남원의 주포에 와서 은거 생활을 시작하
였다.
(2)은거 생활기(1618~1623)
조위한이 남원 주포에서 은거하는 동안에 뜻 맞는 벗들과 어울려 시를 짓
고 술을 마시고 여행을 즐기며 세상을 잊기 위하여 노력하였다.이곳에 머물
며 그는 도연명의 <歸去來辭>에 차운하여 지은 <次歸去來辭>를 통하여 세
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과 또 옛날부터 불우한 자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
에 슬퍼할 것이 없다는 것,두류산의 그윽하고 깊숙함을 바라보며 인간 세상
의 시비를 잊고자 하며,벼슬은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자연 속에
서 술을 즐기며 때에 따라 농사짓고 음풍농월하며 살고 싶다는 자신이 은거
하는 뜻을 나타냈다.62) 이 무렵 조위한이 동생 조찬한과 함께 몇몇 벗들을
대동하고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여행기록을 <遊頭流山錄>63)으로 남겼다.세
상일을 잊고자 한적한 시골에 은거하면서도 조위한은 당시 고생하는 백성들
의 모습과 망해 가는 나라의 현실을 목도하고 <流民嘆>이라는 한글가사를
지었고 나라 안에 크게 유행시켰으나 광해군에게 미움을 사 위기를 자초하기
도 하였다.64)<최척전>의 마지막 부분에,‘나는 남원 주포에 우거한 적이 있
었다.그 당시 최척이 때때로 나를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위와 같이 이야
61)『玄谷集』권6.
62)민영대,앞의 책,『조위한의 삶과 문학』,p.56.
63)『玄谷集』권14.
64)<年譜>,<行狀>,<神道碑銘>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仁祖實錄』(卷21,7年 己巳條)에도 仁祖가 趙緯韓을 弘文館의 校理로 발령하면서 그의 높은
文名과 <流民嘆>이 걸작임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緯韓少有文名 善諧謔 多爲禮法之士
所詘 昏朝時作流民嘆 備陳其時政亂民困之狀 一時傳之爲絶唱).
또 洪萬宗의『旬五志』(李民樹 譯,乙酉文庫 65권,乙酉文化社,1971,pp.265-268)에도,‘내가
우리나라 가곡 중에서 제일 좋다는 것만 몇 편 뽑아서 여기에 평가해 보기로 한다.…流民嘆은
玄谷 趙緯韓이 지은 것이다.昏朝의 번거로운 정치와 列邑의 혹독한 賦稅를 개탄하여 그 정경을
자세히 엮어 놓았다.이 글은 정협이 지었던 流民圖와 함께 서로 표리가 된다고 하겠다.’라고,趙
緯韓의 <流民嘆>에 대한 평가가 기술되어 있다.
<神道碑銘>,又作流民嘆一篇 極道人民愁苦邦家顚覆狀 主見而惡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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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였다’(余流寓南原之周浦 陟時來訪余 道其事如此)란 기술이 있다.조위한
이 주포에 살았을 때 <최척전>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주포에 낙향하고 온
것이지만 이 시기에 그는 문학 활동에 전념하였다.
(3)인조반정 이후(1623~1649)
조위한은 은거 생활을 하다가 인조반정을 맞아 노년의 나이지만 벼슬 생활
을 다시 시작한다.이때 인성군을 비롯하여 왕비의 가속과 임금의 친족들이
왕의 세력을 믿고 지나친 恣行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서 <爲仁城君所斥引避
啓>65)로 탄핵하였다.조위한은 이것 때문에 외직인 양양 도호부사로 쫓겨났
다.그 곳에서 재직하고 있는 동안에 큰 아들 倚를 사별하고 애도 시 <祭亡
子倚文>을 지었다.그는 만년에 들어 국화 가꾸기를 즐겨하였고 완상한 시를
지었다.66)
조위한은 평소에 사귄 대문장가 허균,권필,이안눌,임숙영,학자이며 정치
가인 김장생,박지계 등과 함께 통쾌하게 술을 마시며 詩會를 즐겼다.그의
문집에 실린 많은 시가 이런 상황을 잘 나타낸다.<醉贈浴川崔使君皓>,<與
天翁子敏夜醉秋娘家因往兩宜堂墟 二首>,<廣遠樓監司慶退甫 暹兵使朴叔燁爲
設餞宴醉後席上口號>,<夜宴樓舡醉歸>,<醉題在閒堂>,<醉呈體使四首> 등
시가 있다.또한 설악산,금강산을 여행하면서 지은 시 <河趙臺>,<鏡浦臺>,
<秘仙亭>,<永郞湖>,<三日浦>,<叢石亭> 등이 있다.허균은 조위한의 시
재능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칭찬하였다.
조지세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지명은 시에 있어서 바르지
않다.구름이 많고 꿈같은 혜택의 기운과 같았다.악양성의 물결이 유
감스럽게도 무릇 십자육자 지명에 위의 네 자를 더하여 그 힘을 씀이
두 자가 많은 것이 유감스럽다.어찌 감히 이치에 있는 것과 같아 살
피지 못한 공이겠는가?67)
65)『玄谷集』권11.
66)『玄谷集』권9.
67)趙持世嘗曰 我國地名入詩不雅 如氣蒸雲夢澤 波憾岳陽城 凡十字六字地名 而上加四字 其用力 只
在烝憾二字 爲功豈不省耶 此言亦似有理.許筠,앞의 책,卷25說部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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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필여장,이안눌자민,조위한지세 나의 재종형 허체자하가 어렸을
적에 친구 이재영과 함께 품성이 어질었다.다섯 사람의 문장이 때에
함께 힘을 써 세상에 떨쳤다.어찌 문인이 목숨에 재앙이 있는데 함께
있었겠는가.68)
위의 두 인용문을 통해 조위한이 문장에 뛰어났고 불우한 현실을 딛고 꿋
꿋하게 자신의 의지를 지켜나갔던 인물이면서 자신의 시 재능을 유감없이 발
휘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2.<최척전>의 형성 배경
1)가탁 방식과 역사적 사실
앞서 언급했듯 소설은 시대의 묘사이고 생활에 대한 표현이다.즉 소설은
시대와 생활의 총체적인 모습을 형상화하는 장르적 특징이 있다.이렇게 형
상화되는 소설의 모습은 작가의 의식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작가 의식의 결
과물이 소설로 태어나기 때문이다.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최척전>의 작
가는 조위한이다.따라서 <최척전>에는 조위한의 의식이 녹아져 있고 독서라
는 소통의 방법을 통해 독자는 그것을 읽어낼 수 있다.
<최척전>의 말미에는 작가가 작품을 쓴 동기가 제시되어 있다.
나는 남원 주포에 우거한 적이 있었다.그 당시 최척이 때때로 나
를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위와 같이 이야기하였다.그리고 그 전말
을 기록하여 후세에 인멸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나는 사
양할 수 없어 그 경개를 대략 기록하였다.69)
조위한의 <연보>에 따르면 실제로 그는 남원 주포에 우거한 적이 있다.그
68)權韠汝章 李安訥子敏 趙緯韓持世 而余再從兄許褅子賀 曁小時呢友李再榮汝仁 五人者 文章俱稀世
而窮於時亦同 豈文人結習 例厄於命也歟.許筠,앞의 책,卷二,詩部二,<前五子詩>.
69)余流寓南原之周浦 陟時來訪余 道其事如此 請乃記其顚末 無使湮沒 不獲已 略擧其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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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최척전>의 주인공인 ‘최척’을 만나 그의 기이한 인생사를 들은 경험이
있고 ‘최척’이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해 달라는 청을 함으로써 조위한이 기록
으로 남긴 것이 <최척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기록하는 방식을 일명 假託의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가탁의 방법은
당시 문인들에게 인기를 끄는 서사전개 방법 중 하나였다.조위한과 막역한
사이였던 권필의 <주생전>이 그러하고 작자 미상의 <운영전>도 가탁의 방
법을 취하고 있다.그 이전의 몽유계소설도 꿈을 가탁하여 작가의 의도를 표
출한 작품류이고 가전체 문학도 다른 사물을 빌려와 가탁의 방식을 사용하였
다.이와 같이 ‘가탁’이라는 방법은 당시 작가의 의도를 포장해 내기에 매우
적절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최척전>의 ‘최척’은 정말 가탁의 인물일까?우선 세 가지로 접
근해볼 수 있다.첫째,최척이라는 인물이 실존 인물인지의 여부이다.실존
인물이라면 <최척전>은 당시의 시대상을 그대로 비춰주는 다큐멘터리식 소
설이 되는 것이다.
‘최척’이라는 인물의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견해가 엇갈린다.양
승민은 실증 자료를 통해 실존 인물이라고 고증하였다.70) 그러나 양승민은
조위한과 최척과의 만남을 주선한 인물로 梁慶遇(1568~?)를 제기하는데,이
에 대한 입증 자료가 없어 단지 추정일 뿐이고,조위한의 연보나 행장 어디
에도 최척과 그에 관한 교우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뿐만 아니
라 당시 남원에서 기록으로 남겨진 임란에 대한 자료 어디에서도 ‘최척’에 대
한 자료는 없어서 <최척전>의 ‘최척’이『도탄집』에 나오는 실존 인물의 ‘최
척’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반면 <최척전>과 비슷한 서사구조를 가진 <홍도전>이라는 작품이 있다.71)
<홍도전>은 정유재란이 끝난 13년 뒤인 1610년에 남원부사로 부임한 어우당
유몽인이 남원 지역에서 들은 이야기를 채록해『어우야담』의 인륜편 ‘효열조’
70)양승민,「<최척전>의 창작 동인과 소통과정」,『고소설연구』제9집,한국고소설학회,2000.
양승민은 이 논문에서 작품에 등장하면서 실존 인물이었던 邊士貞의『桃灘先生文集』을 짤막
한 인용문을 통해 ‘최척’이 남원에서 살았던 실존 인물임을 언급했다.이 자료에 의하면 최척은
당시 변사정의 참모로 書記직을 역임하고 있었다.
71)<최척전>과 <홍도전>은 기본적인 서사구조가 동일해 영향 수수관계에 대한 논란이 있다.이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다음 장으로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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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기록한 것으로 남원 고을의 ‘정생’이라는 인물을 통해 전란의 비극을 표현
한 작품이다.<최척전>과 영향 수수관계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는 작품이기
도 하다.이로 보아 ‘최척’이라는 인물은 조위한이 임의로 끌어온 허구적 인물
일 가능성이 커진다.
둘째,소설화의 접근 과정으로서 ‘최척’을 앞세우고 작가의 의도를 간접적으
로 제시하는 방법이다.첫 번째에서 언급했듯 ‘최척’은 허구의 인물일 수 있
다.그러나 <홍도전>에 나오는 ‘정생’이라는 인물과 아주 유사하다.‘정생’은
실존 인물이다.그런 점에서 보면 ‘최척’은 허구의 인물이되 ‘정생’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에서 허구성을 강화한 작품이 <최척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다.게다가 <연보>를 통해 조위한이 중국을 동경해 왔고 중국여행을 6개월
정도 한 바 있으며,<최척전>에 나오는 3대 전란과 그로 인한 가족들의 죽음
등을 겪은 조위한의 실제적 체험이 <최척전>의 이야기와 상당 부분 유사하
다.그렇다고 보면 <최척전>의 탄생 배경에는 ‘작자 조위한의 실제 체험’과
‘<홍도전>에 실린 정생의 실화’그리고 ‘작가의 허구적 구성’이 3박자를 갖추
어 태어난 것이다.
즉 정생의 실화에 조위한의 체험과 문인적 재질이 합하여 <최척전>이 탄
생되었다.그리고 작자 조위한은 자신의 주된 의도를 <최척전>의 주인공 ‘최
척’을 통해 우회시켜 표현하였다.
그렇다고 볼 때 작가 조위한의 작자의식이 작품에서,그리고 주인공을 통해
서 어떻게 표출되었는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이 작업을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최척전>의 기본적인 서사구조 파악과 조위한의 사실적 체험에
대한 비교,대조가 있어야 한다.
먼저 최척전의 기본적인 서사구조는 다음과 같다.
① 최척과 옥영의 등장 및 소개
․임진왜란 때 최척이란 인물이 아버지와 남원의 만복사 동쪽에 산다.
․어려서부터 의기가 있었고 활쏘기와 사냥을 즐겨하나 학문에는 전혀
뜻이 없다.아버지가 최척을 정상사의 집으로 보내 공부를 시킨다.
․옥영이 서울에서 살다가 임진왜란을 만나 어머니를 모시고 나주 회진
에 피난하다가 남원의 정상사의 집으로 와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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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최척과 옥영의 혼인 과정
․정상사 집에서 옥영이 최척을 오랫동안 지켜본 다음 구혼을 뜻하는 시
를 보낸다.옥영의 종이 춘생이 둘의 중개자 역할을 한다.최척과 옥영
이 서로 편지를 보내고 서로 배필로 결정한다.최척이 아버지에게 혼
사를 주선해 줄 것을 아뢰고 최척의 아버지가 정상사에게 둘의 혼사를
성사시켜 줄 것을 부탁한다.
․옥영의 어머니 심씨가 최척이 가난하기 때문에 혼사를 거절한다.옥영
이 어머니를 설득하여 결혼 날짜로 9월 15일을 잡는다.
③ 최척과 옥영의 혼인 방해 요소(1차 이별)
․최척이 의병에 가게 되고 결혼 날짜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
․옥영의 이웃에 양씨라는 부호가 이 틈을 타 정상사 부부에게 뇌물을
주고 옥영의 혼사를 부탁한다.
․옥영의 어머니는 양씨와 10월에 결혼하기로 날짜를 잡고 양씨와의 결
혼을 강행하려 한다.이에 옥영이 자살을 시도한다.
․다행히 회생되고 그 이후 누구도 양씨와의 혼사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④ 최척과 옥영의 결혼 및 몽석의 출생
․뒤늦게 최척이 귀가하여 11월 1일 옥영과 결혼한다.
․결혼 후 아이가 생기지 않자 부부가 만복사에 올라가 부처에게 기자정
성을 드린다.부처의 점지로 다음해 10월 등위에 어린 아이 손바닥만
한 붉은 점이 있는 큰 아들 몽석이 태어난다.
․행복한 결혼 생활이 계속되지만 부부의 시 화답과 미래에 불행이 닥칠
것을 예견하고 슬퍼한다.
⑤ 최척 가족의 이별(2차 이별)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최척 가족이 살고 있는 남원성이 함락된다.
․최척의 온 가족이 지리산 연곡으로 피난 간다.
․양식을 구하기 위해 최척이 구례로 나오던 그때 왜병이 연곡을 쳐들어
간다.
․피난민을 무수히 살상하고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간다.
․연곡에 남아 있던 최척의 가족도 포로로 끌려가고 이로 인해 이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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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최척이 가족을 찾기 위해 온 산과 강을 헤매다가 죽어 가는 춘생을 만
났을 뿐 아무도 찾지 못한다.
․몽석은 춘생의 등에 업혀 피난하다가 길가에 잃어버렸고 연곡사의 중
혜정이 데려다 양육한다.
․옥영이 왜병 돈우에게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간다.여러 번 자결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부처에게 계시를 받은 후 돈우와 함께 살면서 중국의
閩浙 지방과 琉球를 오가며 장사를 다닌다.
․최숙과 심씨는 연곡으로 피난하다가 왜병의 습격으로 가족들과 흩어진
다.
․왜병들이 물러난 후 연곡사에서 몽석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와 옛집에
서 산다.
⑥ 가족과의 이산 후 최척의 행적
․최척은 아내를 찾기 위해 명나라 군사 여유문을 따라 중국으로 가고
여유문의 집에서 살게 된다.
․여유문이 그의 동생을 최척에게 아내로 삼도록 권유하는데 최척이 거
절한다.
․여유문이 죽자 최척은 또 다시 갈 곳이 없게 되어 중국 명승지를 유람
한다.
․속세에 뜻을 잃고 방랑하다가 도술을 연마하러 청성산으로 가던 중 주
우라는 친구를 만나 그의 만류로 속세에 머물며 장사를 다닌다.
⑦ 옥영과의 재회
․경자년 4월 초하루 최척이 주우와 안남에 정박한다.
․이날 밤에 이웃 배에서 조선말로 외우는 염불 소리를 듣고 최척이 피
리를 분다.
․염불 소리가 갑자기 그치고 최척과 옥영이 지난 날 불렀던 시를 읊는
소리가 들려온다.이로 인하여 부부가 해후하고 항주에서 산다.
․최척과 옥영이 만난 다음 해 또 부처의 계시로 둘째 아들 몽선을 낳는
다.몽선도 역시 몽석과 같이 등에 붉은 사마귀가 있다.
⑧ 둘째 아들의 출생과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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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午年 몽선이 17세 되자 아내를 구하고자 한다.이웃에 홍도이라는 처
녀가 아내 되기를 자원한다.
․홍도가 젖을 떼기도 전에 그의 아버지 진위경은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조선에 구원병으로 출전하다가 돌아오지 않는다.그래서 조선으로 가
서 아버지를 찾는 것은 홍도의 소원이다.홍도는 다 자라기도 전에 어
머니마저 돌아가시어 이모의 집에서 길러진다.
․홍도의 뜻을 잘 아는 홍도의 이모가 최척 부부에게 청혼하여 이들이
결혼한다.
⑨ 가족과의 3차 이별과 포로 생활
․기미년 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이 일어나자 최척이 오세영에게 서기
로 뽑혀 요양으로 가게 된다.최척과 옥영이 다시 이별한다.
․명나라 군사들이 호족에게 대패하고 최척이 포로가 된다.
․큰아들 몽석의 만남과 포로 생활 탈출,남원으로의 귀향한다.이때 조
선에서 파병되었던 구원병들이 호족에게 항복하고 포로가 된다.최척
이 포로수용소에서 큰 아들 몽석을 만난다.
․최척 부자는 삭주 토병이었던 부자의 도움으로 수용소에서 탈출한다.
최척 부자가 은진에 이르렀을 때 최척은 등창이 심하여 사경을 헤매는
데 이때 마침 진위경을 만나 치료 받고 나아진다.셋이 함께 남원으로
돌아온다.
⑩ 남원에 있던 가족과의 재회
․남원에서 살아남아 있었던 아버지 최숙과 장모 심씨와 재회하게 된다.
․진위경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가 중국에 남아 있는 몽선의 장인임을 안
다.
․만력 연간에 조선으로 원정을 오고 주장의 뜻을 어기게 된다.주장이
장차 군법으로 다스리려고 하기에 밤에 몰래 달아나서 여기게 머물게
되고 영남 대구에서 박씨 사람의 집에 의탁해 침술로 생계를 유지해
온다.
⑪ 옥영의 귀국 결심
․옥영은 명나라 군사가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하려 하는데 부처
의 계시로 포기한다.조선인은 살아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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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귀국을 결심한다.
․몽선이 바다의 위험함을 이르며 만류하는데 홍도는 어머니의 뜻을 따
르도록 몽선을 종용한다.
․옥영이 삼국의 옷을 준비하고 몽선과 홍도에게 조선말과 일본말을 가
르친다.
․경신년 2월 이들이 중국을 출발한다.해로에서 중국인,일본인을 만나
위기를 당하나 그때마다 중국인,일본인 행세를 하여 위기를 넘긴다.
심한 폭풍을 만나 사경에 빠지지만 옥영이 부처에게 기원함으로 가까
스로 살아남는다.해적을 만나 배를 빼앗기고 무인도에 표류한다.
⑫ 남원으로 귀국 후 온 가족과의 해후
․조선통제사의 배를 만나 경신년 4월 순천에 이른다.
․이어 남원에서 온 가족이 해후한다.최척 부부가 만복사에 찾아가 부
처에게 감사의 제를 드린다.
<최척전>은 위와 같이 크게 12개의 서사 단락으로 나눠볼 수 있다.작품에
설정되어 있는 시대배경은 임진왜란인 1592년을 기점으로 정유재란을 거쳐
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이 있을 때까지 약 29년 동안을 다루고 있다.좀 더
상세히 밝히자면 선조 25년에서부터 광해군 13년까지 동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역사적 사실담이다.그리고 이런 시간 설정은 <최척전>의 작가 조위한이
이 시기에 직접 생존하였고,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호족이 명나라를 침입
하자 광해군이 강홍립을 장수로 하여 구원병을 보낸 역사적 사건을 직접 체
험하였거나 목도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척전>의 서사 단락을 보다 확장해 해석해 보면 동아시아 지역을 무대
로 3대 전란이 일어난 29여 년 동안 이산가족들의 재회 과정을 다룬 이야기
임을 알 수 있다.이 과정에서 주인공들은 3번의 이별과 3번의 재회를 거듭
해 반복하면서 전쟁의 참상과 그 직면한 현실에 대응하는 집념과 극복의 모
습을 담아내고 있다.
이 서사구조를 중심으로 조위한의 <연보>와 <행장>,그의 문집인『현곡
집』을 통해 드러나는 실제적인 삶의 모습과 비교해 보겠다.72)
72)민영대는 <최척전>의 작가가 조위한임을 알아내기 위해 후손들을 탐방하여 일화를 채록하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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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현상적 시공간
조위한이 <최척전>을 지은 시기 ‘天啓元年’은 그가 55세였던 광해군 13년
(1621년)에 해당한다고 이미 밝힌 바 있다.작품에 설정되어 있는 시대배경은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을 거쳐 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이 있을 때까지로 약
29년간에 해당한다.즉 조위한 역시 29년간의 작품의 시간을 직접 체험했다
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작품의 주요 배경으로 되어 있는 남원 역시 두 차례에 걸쳐 그가 10여 년
동안이나 살았던 지역이며,<최척전>을 썼던 곳이기도 하다.남원을 찾게 된
첫 번째 동기는 그의 나이 25세(1592년)되던 해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란처
를 물색하다가 어머니의 외척이 살던 남원으로 피란하게 된다.이때 첫 딸이
피난지에서 죽게 되는 비극을 겪고 26세에는 김덕령 장군의 수하에 들어가
왜적을 물리치는 일에 참여하고 명나라 군사들과 교류하였다.73)27세에는 어
머니 韓氏가 사망하고 3년 喪을 마친 후 30세에 상경한다.
두 번째는 조위한이 좀 늦은 나이에 35세의 나이에 ‘진사’로 출사하고 관직
을 제수 받으나 남원에 있던 어머니의 묘를 너무 사치스럽게 고향으로 옮겼
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직 당하였다.조위한이 47세(1613년)되던 해에는
며,<漢陽趙氏年譜>를 입수하였으며,28세손 趙誠明을 만나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家藏 筆
寫本 <玄谷公年譜>와 박세채의 문집인『南溪先生文集』에 실려 있는 <知中樞府事玄谷趙公行
狀>을 입수하였고 후손들 집안에 흩어져 있던『玄谷集』도 확인한 바 있다.이로 인해 조위한의
실제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했다.
73)<神道碑銘>,先是十餘年間倭寇猶未平 嘗從金將軍德齡 試軍旅事 天將有愛公者 公欲隨入朝中博觀
天下.
김덕령(1567~1596)은 본관 광산.자 경수(景樹).시호 충장(忠壯).광주(光州)출생.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장성현감 이귀(李貴)의 천거로 종군 명령이 내려졌으며,전
주의 광해분조(光海分朝)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았다.1594년 의병을 정돈하고
선전관이 된 후,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여러 차례 왜병을
격파하였다.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을 장살(杖殺)하여 체포되었으나,왕명
으로 석방되었다.다시 의병을 모집,때마침 충청도의 이몽학(李夢鶴)반란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자 도중에 회군하였는데,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체포·구금되었
다.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 2)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고,1668년 병조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1678년(숙종
4)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고,1681년 병조판서에 가증(加贈)되었다.영조 때 의열사(義烈祠)
에 형 덕홍(德弘)·아우 덕보(德普)와 병향(竝享)되었고,1788년(정조 12)좌찬성에 가증되었다.
1974년 광주 충장사(忠壯祠)를 복원하여 충훈을 추모하고 있다.생애와 도술을 묘사한 작자·연대
미상의 전(傳記)소설 <김덕령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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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옥사에 연루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게 되는데,이때 자결하려 하나 형의
만류로 그만 두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옥에서 풀려난 후 52세(1618년)되던
무오년(광해군 10년)조위한은 온 가족을 거느리고 남원의 주포74)로 이주하
게 된다.75)가정생활이 어려워지고 세상이 점차 어수선해지자 가족을 이끌고
남원의 남쪽 주포로 이주하여 은거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76) 주포에서 은거
생활을 하던 중 <次歸去來辭>를 지었는데,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과
또 옛날부터 불우한 자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슬퍼할 것이 없다는 것,두
류산의 그윽하고 깊숙함을 바라보며 인간 세상의 시비를 잊고자 하며,벼슬
은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자연 속에서 술을 즐기며 때에 따라 농
사짓고 음풍농월하며 살고 싶다는 자신이 은거하는 뜻을 나타냈다.77)광해군
13년(1621년)에 주포에 머물면서 당시 백성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과 부역에
시달리는 참상을 목도하고 <流民嘆>이라는 우리말 가사를 짓기도 하였다.현
실을 비판한 이 노래가 나라 안에 크게 유행하여 광해군에게 미움을 받아 위
기를 자초하였다.78)
한편 <최척전>에서의 남원은 ‘최척’의 고향이자 사랑하는 아내 옥영을 만
났던 곳이고 동시에 가족들이 모두 함께 행복한 삶을 누렸던 유일한 공간이
다.전란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졌던 최척의 가족들이 결말에 가서 다시 모두
남원에서 해후하게 되며 해피엔딩하게 되는 것도 ‘남원’이라는 공간이 지닌
마음의 안식처이자 유일한 행복 공간으로서의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볼 때 조위한에게서 ‘남원’은 비극적인 장소이자 은일의 공간이다.
조위한이 남원을 찾게 된 이유가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에서 피란처를 찾았던
연유이고,그 와중에 딸의 죽음과 모친상을 당하게 된다.그가 두 번째로 ‘남
74)‘주포’는 현재 사용되지 않는 지명이다.『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남원에서 15리 떨어진 곳이라
표기돼 있『남원지』에는 주포가 옛 행정구역으로 ‘周浦坊’이었으며,뒤에 주포방이 현재의 주생
면 제천리로 바뀌었다고 기록돼 있다.
75)이 사실은 그의 <행장> -‘公與諸遂被逮 居數日而釋 自此禁錮 戊午捲家還南原 有終焉之計 復次
淵明歸去來辭 以見志.’<연보> -‘戊午 公五十二世 正月 家下南原 卜築干周浦蓼水之上’등의 가
록을 통해 알 수 있다.
76)<年譜>,丙丁之後奸佞擅權 威福自作胸襟孔棘 而其中有相功之日 以匡誘批以利害 公自是絶迹交遊
杜門堅守 又恐有無妄之禍 以爲遠遁之計.
<行狀>,公卽南歸築室于蓼水之上 日與一二故人賦詩觴詠 翛然與世相亡 其所以潔身遠遯婆娑丘園.
77)민영대,앞의 책,『조위한의 삶과 문학』,p.56.
78)<神道碑銘>,又作流民嘆一篇 極道人民愁苦邦家顚覆狀 主見而惡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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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을 찾은 것도 그의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이다.이 시기에 그는 거기
서 은일사상을 실현할 수 있었다.따라서 조위한에게 ‘남원’이라는 공간은 가
장 힘든 시기의 ‘은일의 공간’이자 ‘도피의 공간’이기도 하다.
한편 전란을 피해 옥영의 피난 행로는 작자인 조위한의 피란 행로와 아주
유사하다.임진년에 옥영이 서울에서 살다가 난을 피해 나주,회진을 거쳐 어
머니의 외척이 살던 남원으로 와서 정상사 집에 의탁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 비춰 <최척전>은 조위한의 삶의 체험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
을 뿐 아니라 ‘남원’이라는 공간이 갖는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물론 최
척과 조위한이 느끼는 ‘남원’의 공간 이미지는 정반대이지만,가장 어려운 시
기를 ‘남원’에서 지냈던 조위한이니만큼 ‘남원’이 ‘마음의 안식처’또는 ‘행복의
공간’으로 영위되기를 꿈꾸었을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조위한의 염원이 작품
<최척전>에서 최척의 실제적인 고향이자 마음의 안식처이고 기적적인 재회
의 장소로 ‘남원’을 택하게 했던 것이다.
3)가정사의 체험
<최척전>에서 두 주인공 최척과 옥영의 결연은 임진왜란 당시 남원에서
이루어진다.전란을 피해 남원으로 피난 온 옥영이 최척을 알게 되고 옥영의
적극적인 구애와 서로의 의사 타진을 거쳐 계사년인 1593년 두 사람은 결혼
에 이르게 된다.그런데 두 주인공의 이 결혼 대목은 조위한의 동생인 조찬
한의 결혼과 여러모로 유사하다.서울 출생인 조위한과 조찬한이 임진왜란을
만나 남원으로 피난 오게 된 점,그리고 거기서 동생 조찬한과 나주가 고향
인 고흥 유씨와 결혼을 올린 점,결혼을 올린 연도가 계사년이 1593년이라는
점이 모두 동일하다.즉 최척은 실제 인물인 동생 조찬한을 근간하여 탄생한
인물이라는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다만 조찬한의 아내 유씨는 정유재란
을 당하여 절사하게 되는 비운을 겪는다.반면 <최척전>에서 최척은 사랑하
는 아내와 세 번의 이별과 만남을 견뎌내며 다시 모든 가족이 함께 재회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막을 내린다.
실제 동생 조찬한을 대상으로 최척을 설정하였다면 조위한은 세 차례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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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을 통해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이별을 어떻게든 거부하고 싶거나 과거를 보
상받고 싶었을 터인데,이러한 의도적인 포석 하에 구성되어진 것이 바로
<최척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위한은 19세이던 1585년에 남양 홍 씨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얻는
다.그러나 임진왜란을 당하여 피난길에 오르던 길에 유일한 혈육이었던 딸
을 굶주림으로 잃게 된다.첫 부인과도 정유재란으로 사별하게 되어 두 번째
부인을 맞게 되나 그녀에게서도 아들을 얻지 못하고 딸만 두게 된다.그러다
보니 대를 잇고 가문을 이어줄 아들에 대한 조위한의 염원은 남달랐을 것이
다.그러던 광해군 2년 8월인 1610년 예부랑중으로 재직하던 때 사은사 서장
관으로 중국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이때가 마침 부인이 임신 중이었던 시기
이다.조위한은 조선을 떠나면서 부인에게 ‘반드시 아들을 낳아 나를 기다려
달라’79)고 당부할 정도로 아들을 간절히 원하였고 중국으로 향하는 길에도
그의 마음은 오직 아들을 얻고 싶은 마음뿐으로 사당이나 사찰을 지날 때마
다 들어가서 부인이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기원하였다.결혼 후
20여 년이 지나도록 아들을 갖지 못한 그의 자식에 대한 정성을 읽어낼 수
있는 대목이다.조위한은 45세가 된 1610년에서야 겨우 첫 아들 倚를 안아볼
수 있었고 5년 후 둘째 아들 億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이 아들이 없어 근심하면서 자식을 갈구하는 염원은 <최척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최척이 아내를 맞이한 후로 원하는 바가 뜻대로 이루어졌고 가업도
점차 넉넉하게 되었다.하지만 후사가 늦어지는 것이 늘 근심이었다.
그래서 매월 초하루 날에는 부부가 만복사로 가서 기도를 올렸다.그
다음해 갑오년 초하룻날에도 다시 만복사로 가서 기도하였다.그날 밤
장육금불이 옥영의 꿈에 현신하였다.“나는 만복사의 부처라오.그대의
정성을 가상하게 여겨 기특한 사내아이를 점지해 줄 것이야.아이를
낳으면 반드시 이상한 징표가 있을 것이야.”때가 이르자 과연 한 사
내아이를 출산하였다.그런데 아이 등에 어린애 손바닥만한 붉은 점이
있었다.드디어 그 아이 이름을 몽석이라 하였다.80)
79)<行狀>,必生男子 以待吾還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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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인용문에서와 같이 최척은 결혼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자식이 없자
늘 근심을 갖고 절을 찾아가 지성으로 빌기를 반복한다.그리고 결국 장육금
불의 현신을 통해 꿈에도 그리던 사내 아이 둘을 차례로 점지 받게 된다.
<최척전>과 조위한의 실제의 모습이 똑같은 대목이다.그러나 조위한의 장남
‘倚’는 몸이 약해 안타깝게 16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게 된다.이 슬픔은 그가
지은 祭文을 통해 애절하게 표현된다.
간절히 자식을 염원하며 기원했던 조위한의 실제적인 체험과 바람이 <최척
전>에 그대로 반영되는 한편,<최척전>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큰 아들 몽
석을 기적적으로 다시 만나는 장면을 통해 조위한은 자식을 잃은 슬픔을 의
도적으로 거부하며 다시 재회를 이끌어 낸 것으로 풀이해 볼 수 있다.
4)중국문학에 대한 관심
조위한은 어려서부터 중국에 대한 관심이 아주 컸다.그와 관련한 기록인
<神道碑銘>,<行狀>등에 따르면 조위한은 열다섯,열여섯 살 때 이미 경서
를 외웠으며 先秦古文을 널리 섭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문중에서 전하는
<年譜>나 <墓表>등 작자에 관한 여러 기록에서도 그가 중국의 전적을 두루
섭렵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조위한의 문집인『玄谷集』의 발문을 쓴
조경은은 조위한이 어려서부터 문장을 좋아하여 先秦과 兩漢의 문장이 아니
면 읽지 않았고『太史』와『戰國策』에 심취한다고 하였다.81)이경석은 서문에
서 조위한이 先秦과 兩漢,魏晋의 고문을 안 본 것이 없었으며『詩經』을 읊
어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킬 정도라고 하였다.82) 이것으로 보아 그가 일찍부
터 중국의 고전에 박식했음을 알 수 있다.이렇게 조위한이 어려서부터 중국
문화를 많이 배웠고 문물이 찬란했던 중국에 대한 관심과 동경이 강할 수밖
80)본 논문에 인용된 <최척전>의 번역문은 민영대의『조위한의 삶과 문학』을 참고하였음.
陟娶妻之後 所求如意 家業稍足 而常患繼嗣之尙遲 每以月朔 夫妻往禱於萬福寺 明年 甲午元月 又
往禱之 其夜丈六金身 見於玉英之夢曰
“我萬福寺之佛也 我嘉爾誠 錫以奇男子 生必有異相”
及期而果生男子 背上有赤痣 如小兒掌 遂名曰夢釋.
81)조위한,『玄谷集』,조경의 跋文.
82)위와 같은 책,이경석의 序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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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없었다.
한편 조위한은 벼슬에 오르기 전에 그와 막역한 친구인 허균과 중국 여행
의 험난함을 말하자 조위한은 “우리들이 중국에 태어나지 못한 것이 이미 불
행이라 하겠는데 하물며 행로의 수고로움으로 위대하고 장려한 구경을 폐할
것인가,이는 우물 안 개구리의 소견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 하면서 자신이
과거에 급제하여 사신으로 발탁되면 반드시 함께 중국을 여행을 하기로 약속
하기도 하였다.83)중국에 태어나지 못한 것이 이미 불행이라 생각할 정도로
중국에 대한 동경을 나타냈다.행로가 고생스러워도 각오하려는 의지가 엿보
였다.조위한이 중국을 얼마나 동경했는지,중국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였
는지,중국을 얼마만큼 긍정적으로 생각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광해군 2년 8월(1610년)조위한이 예부랑중으로 재직하던 중 조위한은 때
마침 꿈에도 그리던 중국 여행의 기회를 잡게 된다.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
라에 갈 수 있게 된 것이다.실제로 조위한은 중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느낀
것을 시로 나타내는데,대표적인 작품으로 <渡三又河是日大風>,<大凌河>,
<小凌河>,<過寧遠衛>,<謁夷濟廟>,<入遼陽城二首>,<過李提督如松祠>,
<長城>,<山海關>,<波撼岳陽城>,<題滄浪亭>,<玉河館>,<秦皇島>,<在
西湖>,<遊太白山>84)등을 들 수 있다.이 시들이 지명이나 사당,성 이름을
제목으로 삼아 조위한이 행로를 알 수 있다.그리고 이런 여행 체험은 실제
로 작품 <최척전>에 잘 반영되어 나타난다.특히 <최척전>의 주인공인 최척
의 旅路 地域으로 소개되는 곳곳이 사실 조위한이 이때 당시 거쳐 갔던 지역
이었음을 알 수 있기도 하다.뿐만 아니라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중국고사
의 활용도 중국에 대한 동격의식이 <최척전>에 녹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
들 중 하나이다.
특히 옥영이 정상사 집에서 공부하는 최척의 모습을 살펴보고 자신이 의탁
할 만한 낭군이라고 생각하고 최척에게 청혼의 뜻이 있는 <摽有梅>를 보내
면서 두 사람의 결연은 시작되는데,<摽有梅>는 중국『詩經』의 召南篇에 실
린 고사로 유명하다.<摽有梅>는 매실 열매를 던지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여
인의 노래로 특히 혼기에 차 있는 여인이 구혼의 뜻을 전하는 시로 알려져
83)허균,『惺所覆瓿藁』卷5,文部,<送趙持世赴京序>.
84)조위한의『玄谷集』에 수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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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데,이를 <최척전>에 인용한 것이다.
또 <摽有梅>를 받은 최척이 옥영에게 답신한 글에서 중국 고사의 인용 대
목이 나온다.
아침에 글을 받고는 제 마음이 감동하였습니다.다시 시녀를 만나니
기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매양 거울 속의 그림자만을 바라볼 뿐이
었습니다.또한 그림 속의 사람을 불러낼 수도 없었습니다.거문고 소
리로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상자 속의 향을 훔칠 수 있다는 것을 모르
는 바가 아닙니다.하지만 봉래산이 얼마나 깊으며 약수가 얼마나 멀
리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이리저리 궁리하다 보니 심신이 모
두 지치고 말았답니다.그런데 오늘은 뜻밖에도 양대의 비가 홀연히
꿈에 나타나고 서왕모의 서신이 문득 도착하였습니다.속히 진진의 우
호를 맺음으로써 월하노인의 인연을 이룰 수 있다면 삼생의 소원을 이
루어 동혈의 맹세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글로 말을 다 적을 수
없으니 어떻게 마음을 모두 전할 수 있겠습니까?85)
여기서 시녀(靑鳥)는 반가운 使者나 편지를 이르는 말로 푸른 새가 온 것
을 보고 동방삭이 서왕모의 사자라고 한 漢武의 고사에서 유래한다.<최척
전>에서 ‘청조’는 최척에게 글을 전해준 옥영의 시비 춘생을 가리키는 말이
다.
거문고 소리로 마음을 움직이는 것(琴心 可挑)은 司馬遷의『史記』의 <司馬
相如列傳>의 ‘而以琴心挑之’에서 유래한 고사이다.한나라 때 卓王孫은 음율
을 좋아하고 과부가 된 卓文君이라는 딸이 있다.司馬相如가 卓文君의 마음
을 유혹하기 위하여 거문고를 타고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전한다.여기 ‘琴
心 可挑’는 거문고 소리에 실은 탄주자의 마음이다.즉,여자의 마음을 움직
이려고 거문고를 타는 사람의 마음을 뜻하는 것이다.상자 속의 향을 훔칠
수 있는 것(篋香 可偸)은『晉書』<賈謐傳>의 ‘韓壽偸香’에서 유래한 고사이
다.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남녀가 결합함을 이르는 말이다.봉래산이 얼마
85)朝承玉音 實獲我心 卽逢靑鳥歡喜難勝 每憑鏡裡之影 難喚畵中之眞非不知琴心 可挑篋香 可偸而實
未側 蓬山幾重 溺水幾里 經營計較之際 鹹已黃 而項已枯矣 不意今者陽臺之雨 忽然入夢王母之書
遽爾來報倘 成秦晋之好 結月老之繩 則庶遂三生之願 不偸同穴之盟 書不盡言言豈悉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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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깊으며 약수가 얼마나 멀리 있는 것(蓬山幾重,溺水幾里)에서 ‘蓬山’은 중
국 전설에서 나타나는 가상적 靈山인 三神山 가운데에 있으며,신선이 살고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다고 한다.또 蓬丘,蓬島,蓬萊,蓬山,蓬壺이라고 부른
다.‘溺水’는 신선이 살았다는 중국 서쪽의 전설적인 강이다.길이가 3천 리나
되며,부력이 매우 약하여 기러기의 털도 가라앉는다고 한다.‘蓬山幾重,溺水
幾里’은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과 가깝게 있으면서도 쉽게 만날 수 없고 안타
깝게 여기면서 인용한 고사이다.심신이 모두 지치고 말았다는 것(馘已黃,而
項已枯矣)은『庄子』의 <列禦寇> ‘槁項黃馘’에서 유래한 고사이다.사람의 목
이 말라빠지고 얼굴이 누렇게 되고 건강하지 않은 모습을 형용한다.
양대의 비(陽臺之雨)는『文選』에 실린 초나라 宋玉의 <高唐賦>의 ‘巫山之
夢’또는 ‘巫山之雨’에서 유래한 것이다.남녀간의 密會나 情交를 이르는 말이
다.중국 초나라의 襄王의 선왕이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무산의 神女를 만
나 즐거움을 누렸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陽臺’는 四川省의 巫山縣 부근의
산 이름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남녀가 密會하는 곳이라 한다.서왕모의 서
신(王母之書)은 서왕모가 동방삭에게 보낸 편지로 반가운 글이라는 뜻이다.
서왕모는 먼저『山海經』에서 나타난다.중국 崑崙山에 사는 사람 얼굴에 호
랑이의 이빨,표범의 털을 가진 신선이라고 한다.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불사
의 약을 가진 선녀라고 전해진다.漢代에 서왕모의 이야기가 민간에 널리 퍼
졌다.진진의 우호를 맺는 것(成秦晋之好)은 춘추전국시대 秦과 晋나라 사이
에 대를 이어 혼인을 맺던 세의가 있었음을 이르는데,전하여 남녀가 결혼하
는 것을 말한다.월하노인의 인연을 이루는 것(結月老之繩)은 중국 당나라의
韋高가 달밤에 어떤 노인을 만나 장래의 아내에 대한 예언을 들었다는 데서
유래한다.전설에서 월하노인이 가지고 있는 주머니의 붉은 끈으로 남녀의
인연을 맺어 준다고 한다.여기서 최척이 옥영과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결연
을 이루고 싶다는 뜻이다.이 두 고사는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하는 것을 말
한다.동혈의 맹세(同穴之盟)는『詩經』의 <王风·大车>의 ‘谷則異室,死則同穴’
에서 유래한 고사이다.부부가 죽어서 같은 무덤에 묻힌다는 맹세로,흔히 부
부의 금슬이 좋음을 비유한다.여기서는 최척은 옥영에게 ‘부부가 되자는 맹
세’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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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서울 도성에서 생장하였기 때문에 여인의 정정한 행실에 대하
여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그런데 불행하게도 일찍 부친을 잃었고 자
라서는 난리까지 만났습니다.혼자서 홀어머니를 섬기며 형제도 없이
살면서 남방으로 이리저리 떠돌다 친척에게 의탁하였던 것입니다.나
이 이십이 다 되도록 지아비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이제 하루아침에
전쟁이 터져 도적들이 횡행하고 있습니다.옥 같은 몸을 지키기가 쉽
지 않을 것이며,강포한 자들의 추행을 면하기 어려울까 항상 두렵습
니다.그 때문에 늙은 어머니도 상심하여 저의 신세를 염려하고 계십
니다.그러나 걱정스러운 바는 오히려 넝쿨풀이 의탁할 만한 곳은 반
드시 큰 나무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인생 백 년의 고락이 실로 남
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만일 그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평생을 바라보며 살 수 있겠습니까?그런데 근래 낭군을 뵈오니 말하
는 소리가 종용하고 몸을 놀리는 모습은 한아하였습니다.그리고 성실
하고 믿음직한 기색이 환하게 얼굴에 드러나 있었습니다.훌륭한 지아
비를 구하려 한다면 그대를 버려두고 다시 누구를 얻을 수 있겠습니
까?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그대의 첩이 되는 편이 나
을 것입니다.하지만 저는 운명이 기구하니 낭군에게 합당하지나 않을
까 하여 두렵습니다.어제 시를 보냈던 것은 음란한 생각을 가지고 했
던 것이 아니었습니다.다만 낭군의 태도를 헤아려 보고자 하였을 뿐
이었습니다.제가 비록 보잘것없으나 애초 저자 거리의 여자는 아니랍
니다.어떻게 남몰래 담을 넘어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반드시 부모님
께 알리고 혼인의 예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그렇게만 된다면 정절
과 믿음을 스스로 지킬 것입니다.감히 남편 반드는 일을 게을리 할
수가 있겠습니까?시를 던져 먼저 욕되게 하였고 스스로 중매하는 더
러운 행실을 다시 저질렀습니다.이제 다시 사사로운 편지를 주고받고
자 한다면 더욱 유한한 정조를 잃게 될 것입니다.이제는 서로의 마음
을 잘 알았으니 부질없이 편지를 전할 펼요가 없겠지요.오늘부터는
반드시 매파를 통하여 연락하여야 할 것입니다.제가 거듭 행로의 놀
림을 받지 않게 해주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86)
86)妾生長輦殻之下 粗識貞靜之行 而不幸 早失嚴父 生丁亂難 獨奉偏慈 終鮮兄弟漂淪南土僑寄宗黨
年垂及筓 尙恐一兵戎搶攘 盜賊橫行 則難保珠玉之沈碎 不無强暴之所污 以此老母傷心 以我爲念 然
而猶所患者 絲蘿所托 必在喬木 百年苦樂 實有他人 苟非其人 豈可仰望而終身 近觀郎君 辭氣雍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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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인용문은 옥영은 최척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의 내용이다.서울 도성
(輦殻之下)은 예로부터 전하는 成語인데 ‘천자가 타는 수레 아래’라는 뜻으로
전하여 ‘京城’을 가리키는 말이다.넝쿨풀이 의탁할 만한 곳은 반드시 큰 나무
이어야 한다는 것(絲蘿所托 必在喬木)은 중국 당나라 杜光庭의『虬髥客傳』의
‘絲蘿非獨生,願托喬木,故來奔爾.’에서 유래한 고사이다.菟絲와 女蘿가 큰 나
무에 의탁한다는 뜻으로 여자가 훌륭한 남자에게 의지하여 그 처첩을 됨을
이른다.남편 반드는 일(案擧之敬)은『後漢書』의 <梁鴻傳>에서 나온 梁鴻의
아내인 孟光의 ‘擧案齊眉’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부부의 도리를 다해 남편
을 지극히 공경한다는 뜻이다.서로의 마음을 잘 알았다는 것(肝膽相照)은 송
나라 趙令畸의『侯鯖彔』의 ‘同心相親,照心照膽壽千春.’에서 유래한 것이다.서
로 마음을 터놓고 친밀히 사귄다는 뜻이다.
5)의병활동과 중국 여행
이밖에 <최척전>과 작가 조위한 사이의 상관성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의
병 활동과 조위한이 전란을 통해 가족을 읽고 절망에 빠져 지내다 중국으로
떠나 방랑객이 되고자 하는 부분 등을 들 수 있다.
<최척전>에서 주인공 최척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남원에서 의병에
참여하게 되는데,조위한 또한 임진왜란 당시 남원에 피난 와 있으면서 김덕
령 장군의 수하에 들어가 왜적을 물리치는 일에 참여하고 명나라 군사들과
교류하였다.87)또 조위한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딸과 어머니,그리고
擧止閑雅 誠信之色 藹然於面目 若求賢夫 拾子伊 誰與爲人妻 寧爲老子之妾 而薄命崎嶇 恐不得當
也昨者投書 非爲其誨淫之意也 只欲試郎 君之俯仰也 妾雖無狀 初非依市之徒 寧有鑽穴之逃心 必告
父母 終成委禽之禮 則貞信自守 敢懈擧案之敬 投詩先讀 已犯自媒之醜行 欲往復私書 尤失幽閑貞操
今旣肝膽相照 不須書札浪傳 自此以後 必以媒妁相通 以母令妾 重貽行路之譏 千萬幸甚.
87)<神道碑銘>,先是十餘年間倭寇猶未平 嘗從金將軍德齡 試軍旅事 天將有愛公者 公欲隨入朝中博觀
天下.
김덕령(1567~1596)은 본관 광산.자 경수(景樹).시호 충장(忠壯).광주(光州)출생.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장성현감 이귀(李貴)의 천거로 종군 명령이 내려졌으며,전주
의 광해분조(光海分朝)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았다.1594년 의병을 정돈하고 선
전관이 된 후,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여러 차례 왜병을 격파
하였다.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을 장살(杖殺)하여 체포되었으나,왕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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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잃게 되는 불행으로 실의에 빠지고 세상에 살 뜻을 잃게 된다.이에
의병활동 중 만났던 명나라 장수를 따라 중국 유랑의 길을 택하고자 결심하
나 형의 만류로 포기한 바 있다.
반면 <최척전>에서는 최척이 전쟁으로 가족들이 모두 죽었다고 판단하고
절망에 빠져 중국 여행을 떠나고 한 때 신선술에 탐닉하여 청성산을 향해 가
지만 도중 ‘주우’라는 인물을 만나고 주우의 만류로 청성산행을 포기하고 함
께 장사하는 것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최척전>은 작가 조위한의 삶과 염원이 그대로 표방된 작품
임을 알 수 있다.여기서 <최척전>의 문학적 가치이자 작가의 의식의 소산을
발견할 수 있는데,조위한은 <최척전>을 통해 당대의 현실에 대한 아픔을 가
감 없이 묘사해 놓았다.특히 조위한이 현실에서 이룰 수 없었던 가족 간의
이별을 <최척전>에서는 주인공들의 집념으로 극복해 내며 결국 ‘재회’를 성
취해 나가는 이야기로 전란이 몰고 온 아픔과 절망을 가족애를 중심으로 극
복해 내고 있다.이것이야말로 17세기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최척전>이 갖고
있는 최상의 가치일 것이다.억눌린 슬픔과 아픔으로 절망에 젖은 조위한과
당시 모든 민중들에게 조위한은 <최척전>을 통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희망
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또 작품에 등장하는 최척의 모습 어디에도 양반의 권위적인 면모은 없다.
양반임에 틀림없지만 <최척전>을 통해 형상화 된 최척은 부귀,권력과 출세
를 추구하는 전형적 양반 인물 유형이기보다 가족을 사랑하는 전형적인 한
인간애의 모습을 지향해 내고 있다.동시에 전란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
에 없는 민중의 모습으로 등장하며 ‘고생담’을 나누는 가운데 그로부터 기층
적 삶의 현장에서 갈등하는 민중의 모델로서 대표성을 띤 인물로 나타난다.
조위한은 양반이면서 동시에 결코 양반으로서의 모습이 아닌 가장 인간적인
석방되었다.다시 의병을 모집,때마침 충청도의 이몽학(李夢鶴)반란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
되자 도중에 회군하였는데,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체포·구금되었다.혹
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 2)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고,1668년 병조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1678년(숙종
4)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고,1681년 병조판서에 가증(加贈)되었다.영조 때 의열사(義烈
祠)에 형 덕홍(德弘)·아우 덕보(德普)와 병향(竝享)되었고,1788년(정조 12)좌찬성에 가증되었다.
1974년 광주 충장사(忠壯祠)를 복원하여 충훈을 추모하고 있다.생애와 도술을 묘사한 작자·연대
미상의 전기(傳記)소설 <김덕령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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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의 최척을 통해 입신양명과 유학적 이념을 제거해 버린다.그리고 이러
한 인간적인 면을 부각하는 인물 설정은 비단 최척 뿐만 아니라 작품에 등장
하는 옥영 등 주요,주변 인물 모두에게 동일하게 투영된다.<최척전>에서
등장하는 이들 인물들의 관심사와 이야기의 초점은 오직 당시의 전란이 몰고
온 아픔에 향해 있고,이 아픔은 또 당시를 살아가는 기층 민중,양반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당면한 아픔이요,인간적인 비애가 되어 있다.조위한은 이 인
간적인 비애를 <최척전>을 통해 휴머니즘이라는 장치를 통해 극복해 내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척전>은 불교계 소설,사실계소설,포로소설 등 다양
한 소설 유형 속에서도 무엇보다 휴머니티 강한 인간 중심의 소설로서의 가
치가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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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최척전>의 작가의식 분석
1.역사에 대한 작가의식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최척전>은 작가 조위한이 남원에 거주할 때 최
척을 만나 그의 체험을 전해들은 내용을 적은 것이다.그런데 작품의 내용과
작가의 경험을 대비해 보면 대부분의 내용은 오히려 작가 조위한의 체험이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함을 알 수 있다.
작품의 역사적 배경은 임진왜란,정유재란,그리고 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
쟁 등 실제의 전쟁 선조 25년(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광해군 10년(1618년)에 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도 동시에 작가 조
위한이 살던 시대였다.그러면 조위한이 어떤 의식을 표현하기 위해서 역사
적 사건을 중시하고 있는 것일까?본장에서는 임진왜란,의병참여,그리고 호
족 명나라 침입 사건으로 나누어 조위한이 작품에서 드러낸 시대의식을 살펴
보고자 한다.
임진왜란은 선조 25년(1592년)에 일본이 조선의 땅을 침략한 전쟁이다.이
전쟁으로 인해 조선은 큰 피해를 입었다.이 무렵 明淸교체기를 맞이하여 중
국의 중심 권력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이동할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일본
권력의 구심점은 豊臣秀吉에서 德川家康으로 바뀌기 전이었다.
그 당시에 조선은 일본의 정치 상황에 대한 무지와 東西分黨으로 인한 양
반 관료들의 분열과 대립에서 야기된 南倭北胡의 침입에 대한 국방 대책의
소홀함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조선은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를 가지고 있었
다.핵심 권력자들의 다툼은 국력의 저하는 물론 건국이념 그 자체를 파괴하
게 되었다.이 권력다툼은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중앙으로 진출하려는 사림
세력을 꺾기 위하여 사화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 모두가 자신이 확보한 권력
을 유지하고자 한 것에 기인한다.88)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李珥가 南倭北
胡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는데 국가재정의 허약으
88)이장희,『임진왜란사연구』,아시아문화사,1999,pp.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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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실현되지 못하였다.사회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전쟁을 맞
았다.거듭된 패전을 당했던 조선은 중국 명나라에게 구원 요청을 하였다.임
진왜란은 조선,중국,일본 삼국으로 확대되고 7년간을 진행하였다.당시 중
국 명은 중국 대륙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조공국가와 일정한 정치․경
제적․문화관계를 유지하였다.89) 조선과 중국 명나라는 조공관계였다.이 때
의 조공관계는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보호와 복종의 관계인데,명은 상대국
가가 제3자로부터 침략을 당하거나 내부적 권력 찬탈이 발생하였을 때는 강
력하게 간섭하거나 경고하기도 하고,때로는 불간섭하였다.90)이러한 명과의
관계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명군이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다.그리고 명은
이 조선에서 일어난 전쟁이 중국 중심부로 확산되어 올 것을 우려하여,조선
에 파병함으로써 사전에 그 위험을 차단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조선에 군사를
파견하였다.91)선조 25년(1592년)7월,처음으로 파병했는데 평양에서 대패하
였다.일본군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다음해에 대규모의 파병이 이루어졌다.
조선은 이런 관계로 맺어진 崇明思想이 임진왜란 때문에 더욱 굳어졌다.
그런데 7년간에 걸친 전쟁은 조선에게 큰 사회적 변동을 일으켰다.전란으
로 인한 인명의 손실,田結의 감축과 각종 시설의 파괴는 엄청난 것이었으며
그 복구를 위해서는 오랜 기간에 걸쳐 막대한 노력과 재원을 기울여야 하였
다.또 전쟁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 위정자 층의 무기력과 분열,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그들의 정신적 위축과 지배층으로서의 권위 실추는 그 후 지배체제
의 동요,사회기강의 이완 현상으로 직결되어 가고 있었다.지배층에 대한 불
신과 백성들의 경제적 궁핍이 극심하여지면서 조선 사회의 근간을 이루던 사
회제도와 가치 체계도 변화되기 시작하였다.92)더구나 커다란 전쟁을 치르고
제대로 회복될 시간도 없이 선조가 죽고,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였다.광해군
은 즉위하자마자 유일한 혈육인 형 임해군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가 처형하였으며,93) 많은 이복동생들을 제거하였다.이어 선조의
89)강동엽,「‘최척전’에 나타난 임진왜란과 동아시아」,『동악어문논집』제38집,동악어문학회.
2001,p.134.
90)전해종,『한중관계사연구』,일조각,1970,p.8참조.
91)최소자,『사명당 유정』,지식산업사,2000,pp.404~405.
92)권혁래,『조선 후기 역사소설의 성격』,도서출판 박이정,2000,p.21.
93)『璿源譜略』에 의하면 宣祖는 첫 번째 왕비였던 懿仁王后에게서는 所生이 없었고,後宮인 恭嬪
金씨에게서 臨海君․光海君,仁嬪 金씨에게서 義安君․信聖君․定遠君,順嬪 金씨에게서 順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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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敎에 언급된 일곱 신하 유영경․한응인․박동량․신흠 등을 멀리 유배 보
냈으며 이들 중 더러는 죽음에 이르기도 하였다.즉위 5년에는 癸丑獄事를
일으켜 선조의 嫡統이며 자신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비롯하여 인목대비의
친정 가족들,이외에도 수많은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였다.94)그 사이 조선의
기반마저 흔들리는 위기를 맞았지만 백성들도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겪었다.이것을 다음의 기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先王朝의 癸巳․甲午年 사이에,새로 倭寇의 침략을 겪은 다음이어
서,무명 한 필 값이 쌀 두 되었으며 말 한 필 값이 쌀 서너 말에 지
나지 않았다.굶주린 백성들은 白晝에 사람을 무찔러 죽이고,父子․夫
婦가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그 위에 전염병이 겹쳐서 길에
는 죽은 사람이 서로 베개를 하였으며,水口門 밖에는 시체가 산더미
처럼 쌓여 성보다 두어 길이나 높았으므로 僧徒를 불러다가 매장하는
데 을미년에 가서 겨우 마쳤다.95)
임진년 난리 후로 백성들이 모두 떠나고 흩어져서,비록 大家世族이
라도 모두 생업을 잃고 거지가 되어 돌아다녔으며,여자들은 높고 낮
은 사람을 가릴 것 없이 적들의 손에 몸을 더럽힌 자가 몹시 많았다.
이 중에서 뚜렷이 나타나게 절개를 세운 자는 자정에서 알아보고 旌門
을 세웠다.시체는 쌓여 들에 가득하고 매장된 것은 얼마 없었다.아비
가 자식을 팔고 남편이 아내를 팔았으며,癸巳年 봄에 이르러서는 사
람들끼리 서로 잡아먹고 시체를 쪼개어 앞을 다투어 물어뜯으며,골육
끼리도 또한 서로 죽이는 자도 있었으니,우리 동방에 변란이 있은 후
로 참혹하기 오늘과 같은 때는 없었다.96)
君,靜嬪 閔씨에게서 仁聖君․仁興君 등 13명의 王子와 10명의 翁主가 있었다.臨海君은 光海
君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인바 이미 어머니도 죽었고,이때에 이르러는 光海君의 유
일한 혈육이었다.
94)민영대,앞의 책,『조위한의 삶과 문학』,p.31.
95)先王朝癸巳甲午年間 新經倭寇 木綿一匹直米二升 一馬價不過三四斗 飢民白晝屠剪 至父子夫婦相
殺食 重以疫癘 道路死者相枕 水口門外 積屍如山 高於城數丈 募僧徒埋瘗之 訖乙未乃至(卷一,災
異部,饑荒條).南晩星,『芝峰類說』,卷一,災異部,<饑荒條>,乙酉文化社,1978,p.44.
96)민족문화추진회,『국역대동야승』권14,(『大東野乘』卷55<聞韶漫錄>),1974,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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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안팎이 모두 기근에 허덕이고 양식을 운반하기도 힘든데다가
노약자는 병들어 누웠고 젊은 장정들은 도둑이 되고 만 형편이었다.
더욱이 질병이 심해서 쓰러져 죽는 자 그 수를 알 수 없었으며,심지
어는 父子와 夫婦가 서로 뜯어먹기까지에 이르렀다.노천에 뒹구는 뼈
만 짚단 같이 늘어져 있었다.97)
위의 글을 통하여 당시에 돈 있어도 쌀을 구하지 못하는 경제 상황을 알
수 있다.굶주림이 심해서 부자,부부가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고 전염
병은 성행하여 이로 인해 죽은 사람이 산더미처럼 쌓였다는 당시 전쟁의 실
정이었다.작가 조위한이 이런 정치의 부패와 백성들이 핍박당하는 현실을
보고 <流民嘆>노래를 지었다.이 노래 조선 사회에 크게 유행하여 광해군에
게 미움을 받아 죽을 위기를 초래하기도 하였다.98)
중국 명나라도 재정적 어려움을 초래하였고 세력이 약화되었다.동북지방에
서 세력을 확장하는 女眞族을 견제할 수 없어서 明淸 교체를 하게 되었다.
명에 의하여 좌우되던 17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심세력은 후금에서 청
으로 발전하면서 청으로 옮겼다.
당시의 일본 경우에는 戰國時代 말기에 전국을 통일시키려던 織田信長이
살해되고,부장였던 豊臣秀吉이 권력을 쟁취하였다.豊臣秀吉이 중국 대륙을
정복하기 위하여 조선에게 도움을 청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假道入明’을 구실로 조선을 침략하고 임진왜란을 일으켰다.그러나 전쟁의 목
적을 이루지 못한 豊臣秀吉은 선조 30년(1597년)에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다.
전쟁은 豊臣秀吉의 죽음으로 끝났다.豊臣秀吉의 정치적인 세력 확장이 실패
로 돌아가고 사망한 후에 關東지방에 근거를 둔 德川家康이 실권을 장악하고
德川幕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豊臣秀吉과 달리 德川幕府가 조선에게 수교
를 강력히 요구하여 조선과 국교가 재개되었다.그 이후 약 200여 년간 조선
과 일본의 국교가 지속되어 평화가 형성되었다.한편,임진왜란 때문에 국력
97)李民樹,『懲毖錄』권2(乙酉文庫 33),乙酉文化社,1970,p.188.
98)緯韓少有文名 善諧學 多爲禮法之士所詘 昏朝時作流民嘆 備陳其時政 亂民困之狀 一時傳之爲絶唱.
『仁祖實 錄』권21,7년 기사조,
<年譜>,目賦役重 餓爭載塗 乃以俗諺作 辭意悲惋 曲盡情態 一時膾炙 以此流入宮中 至於光海 中
外物議幾 不免奇禍 秋後當修史白江李公特爲採見其事.
<神道碑銘>,又作流民嘆一篇 極道人民愁苦邦家顚覆狀 主見而惡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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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쇠퇴한 명나라는 새로 발흥한 후금에게 국경을 침범당하여 조선에 구원병
파견을 요청하였다.그 당시 조선은 발흥하는 호족을 무시할 수 없고 임진왜
란 때 구원병을 보내 전쟁을 도와주었던 명나라의 은혜도 저버릴 수 없는 상
황이었다.그런 상황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여 요동출병을 명하였
지만 상황에 따라서 판단하도록 하였다.만약에 명나라가 승리할 수 없으면
호족에게 항복하고 명나라가 승리할 것 같으면 명나라를 위해 끝까지 싸워야
된다고 명하였다.광해군이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물러나고 인조 신정부는
親明排淸政策을 시행하여 청나라에게 두 차례의 호란을 당하였다.결국은 조
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부속되었다.
이런 시대에 작가 조위한이 <최척전>을 창작하였다.조위한이 이런 현실에
대한 의식은 <최척전>에서 형상화시킨 당시 사람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통하
여 잘 나타나 있다.
1)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적 인식
작가 조위한은 선조․광해군․인조 3대에 걸쳐 살았던 인물이다.이 기간 속
에 임진왜란․정유재란․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의
삶은 처절한 전쟁 체험을 피할 수 없었다.조위한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가족
을 거느리고 경기도 연천․토산 등지로 피난하였다가 겨울에는 다시 어머니
의 친정이 있는 남원으로 내려와 피난살이를 하였다.99) 피난길에 유일한 어
린 딸을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잃고 남원에 이르러서 어머니를 잃는 슬픔을
당하였다.정유재란이 일어날 때 전라도 봉산으로 피난하였고 나주에서 신혼
생활을 하던 동생이 걱정되어 내려갔다가 제수의 殉節을 목도하였다.가족을
잃고 상심에 빠져 세상에 살 뜻을 잃은 채 중국의 명승지인 江浙․蘇杭을 여
행하고자 명나라 군사와 약속하고 떠나려다 형 유한의 만류로 포기하였다.100)
조위한은 가족관계에 있어서 안타까운 경험을 하였다.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99)朴應犀之獄條 前判官趙緯韓供 臣率老母避亂南原 兄緯韓扈從全州.이긍익,『燃藜室記述』,卷20.
100)…與天朝將士吳明濟會遊龍山 欲偕入江浙不果 文集有獨身飄泊于龍山 旣無父母又無妻子 不樂於
人世 將有出塵遠遊之志 適遇天將水兵之來泊于江上 得與浙人相善 約與之偕入東吳 浪迹於蘇杭之
間 而爲仲氏泣挽 不得遂去.『玄谷集』卷之十三,<祭亡子倚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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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을 초래할 수 있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反戰의식을 자신의 경
험을 통해 강화시키고 있다.이런 작가의 반전의식을 작품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주의를 주었다.
“네가 공부는 하지 않으니 무뢰한과 다름이 없구나.필경 어떤 사람
이 되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냐?하물며 지금 나라에서 군사를 일으키
고자 고을마다 군사를 모집하고 있지 않느냐?활쏘기나 사냥을 일삼아
늙은 아비에게 근심을 끼치지 말아라.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과거
공부에만 열중하려 보거라.그러면 비록 급제하여 이름을 신적에 올리
지 못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무기를 들고 군사로 종군하는 일만은 면할
수 있지 않겠느냐.성 남쪽에 사는 정상사라는 사람은 내 어린 시절
친구로 학문에 힘써 문장이 훌륭하단다.초학자는 가르칠 만할 것이다.
어서 찾아가 배우도록 하거라.”최척은 그날로 서책을 준비하고 정상
사를 찾아가 배움을 청하고 부지런히 공부하였다.101)
위의 인용문의 내용은 최척의 아버지 최숙이 공부 안하고 친구와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 최척에게 공부하라고 권유하는 내용이다.공부 시키는 이유
는 자식의 사회적 출세나 가문의 중흥에 있진 않고 전쟁이 일어났으니 과거
에 급제하면 군역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그 당시 양반들의 입신
양명의 관념과 완전히 다르다.<홍길동전>에서 길동이 ‘대장부가 세상에 나
매 孔孟을 본받지 못하면 차라리 병법을 배워 대장인을 요하에 빗겨 차고 동
정서벌하여 국가에 대공을 세우고 이름을 만대에 빛냄이 장부의 快事라102)’라
는 말을 하였다.즉,장부는 모름지기 文이 아니면 武를 통해서 입신양명해야
하는 유가 관념이다.그런데 최척은 이런 文武를 통한 입신양명의 관념에서
벗어나 군역을 면하기 위해서 아버지 친구인 정상사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부
101)其父嘗誡之曰
“汝不學無賴 畢竟做何等人乎 況今國家與戎 州縣方徵武士 汝欲射無獵爲事 貽老父憂 屈首受書
從事於擧子業 雖未得策名 登第亦可免負羽從軍 城南有鄭上舍者 余少時友也 力學能文 可以開導
初學 汝往使之”
陟卽日挾冊 及門請業不輟.
102)경판 24장본 <홍길동전> 부분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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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런히 공부를 하게 된다.전쟁에 참전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한다.
최숙과 최척의 이런 행동이 그 당시 백성들의 참전 기피의식을 볼 수 있다.
만약에 최척이 군사로 징집되면 늙은 아버지가 의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전쟁은 가족 이산을 초래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누구라도 고통과 슬픔을
초래할 수 있는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할 수 있다.여기서 조위
한이 군사 징집을 반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다.즉 반전의식의 발로이다.
“제 주인 댁은 본래 서울 숭례문 밖 청파리에 있었습니다.낭자의
부친은 이경신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다.그러므로 어머니 심씨
홀로 낭자와 함께 살고 있었답니다.낭자의 이름은 옥영으로 낮에 시
를 던졌던 사람이 바로 그 낭자입니다.지난해에는 난을 피해 강화로
갔다가 그곳에서 배를 타고 나주의 회진으로 가셨습니다.그리고 가을
에는 다시 회진에서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이 집의 주인은 우리 마
님과 친척이라서 우리에게 매우 잘해 주십니다.…”103)
위의 글은 여주인공 옥영의 계집종이 춘생은 최척에게 알려준 옥영에 관한
이야기이다.임진왜란 때 옥영은 어머니 심씨를 모시고 서울에서 살다가 전
쟁을 피하기 위하여 배를 타고 강화도 갔다가 나주 회진을 거쳐 어머니의 외
척이 살던 남원으로 왔다.옥영뿐만 아니라 그 당시 전쟁으로 인한 그 당시
사람들이 누구나 다 겪었던 피난 생활이 틀림없다.이 부분은 작가 조위한의
피난 생활과 아주 비슷하다.조위한이 직접 임진왜란을 당하여 고향을 떠나
고 가족을 거느리고 정처 없이 돌아다녔던 고통스러운 체험이 작품에서 자연
스럽게 나타난 것이다.
① 정유년 팔월 적병이 남원성을 함락하자 사람들은 모두 도망가 숨
었다.최척의 일가도 역시 지리산 연곡으로 몸을 피했다.최척은 옥영
에게 남장을 착용하게 하였다.그러자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그녀를 여자로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산으로 피한 지 여러
103)“本家本在京城 崇禮門外靑坡里 主父李景新早沒 寡母沈氏獨與處子居焉 處子名玉英 投詩者是也
上年避亂 自江華乘船 來泊于羅州會津 及秋自會津 轉來于此 此家主人 與兒主母家族待之甚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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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자나자 양식이 떨어져 장차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렀다.최척은
몇몇 장정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양식을 구하고 적세도 탐지하려 하
였다.일행이 구례로 갔다가 문득 적병과 조우하자 최척은 바위와 수
풀에 몸을 숨겨 화를 피했다.그러나 그날 적병이 연곡으로 들어가 온
산야를 휘저으며 살상하고 약탈하여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았다.하지
만 최척의 일행은 길이 막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사흘이 지나 적병이
물러간 후 최척은 다시 연곡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연곡에서 볼 수 있
는 것은 시체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유혈이 낭자하여 시내를 이룬 모습
뿐이었다.마침 숲 속에서 은은하게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최척이
그곳으로 찾아가니 온 몸에 상해를 당한 노약자 몇 사람이 있었다.노
인들은 최척을 보자 통곡하며 말했다.
“적병이 산에 들어와서 3일 동안 재물을 약탈하고 인민들을 베어 죽
였으며,아이들과 여자들은 모두 끌고 어제 겨우 섬진강으로 물러갔네.
가족들을 찾고 싶으면 물가에 가서 물어 보게나.”104)
② 최척은 하늘을 부르짖으며 통곡하고 땅을 치며 피를 토한 뒤,즉
시 섬진강으로 달려갔다.몇 리도 채 못 갔는데,문득 어지럽게 널려진
시신들 속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그 소리는 끊겼다 이어졌다 해서
소리가 나는 것인지 아닌지 분간하기도 어려웠다.가서 보니 피가 얼
굴에 낭자하여 어떤 사람인지 알아 볼 수가 없었다.그가 입고 있는
옷을 살펴보니 춘생이 입고 있던 것과 비슷했다.그래서 최척은 큰 소
리로 불러 말했다.
“너는 춘생이 아니냐?”
춘생이 눈을 들어보더니,얼굴이 비참하게 일그러지며 기어드는 목
소리로 희미하게 몇 마디를 중얼거렸다.
“낭군이시여,낭군이시여!주인어른의 가족들은 모두 적병에게 끌려
갔으며,저는 이런 몽석을 등에 업고 달아났으나 빨리 달릴 수가 없어
적병의 칼에 맞게 되었습니다.그 즉시 저는 땅에 넘어져 기절했다가
104)至丁酉八月 賊陷南原 人皆逃竄 陟之一家 避于智異山燕谷 陟令玉英着男服 雜錯於廣原之中 人之
見之者 皆不知其爲女子也 入山累日 糧盡將饑 陟與丁壯 數三出山 求食且覘賊勢 行到求禮 猝遇
賊兵 潛身於岩藪而石避之 是日 賊入燕谷 則但見積屍 遍橫流血成川 林叢間 隱隱有號咷之聲 陟
就訪之 老弱數輩 瘡痍遍身 見陟而哭曰
“賊兵入山,三日 奪掠財貨 芟刈人民 盡驅女子 昨已退屯蟾江 欲求一家 門諸水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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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 만에 깨어났는데,등에 업혔던 아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춘생은 말을 마치더니 이내 죽고 말았다.최척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땅에 쓰러져 기절했다가 한참 후에야 깨어났다.이윽고 정신을
가다듬어 섬진강(蟾津江)으로 가서 보니,강둑 위에 상처를 입고 쓰러
진 수십 명의 노약자들이 서로 모여서 통곡을 하고 있었다.최척이 다
가가서 묻자,노인들이 대답했다.
“산 속에 숨어 있다가 왜적에게 여기까지 끌려 왔네.왜적들은 여기
에서 장정들만 가려 배에 실어 가고,이처럼 병이 들거나 칼에 찔린
노약자들은 버려두었네.”
최척은 이 이야기를 듣고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하였다.혼자만 온전
하게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자살을 하려고 했으나,주위 사람
들이 만류하여 죽을 수도 없었다.그래서 강의 상류로 터덜터덜 걸어
올라 갔는데,막상 돌아갈 곳도 없었다.샛길을 찾아 겨우 고향에 이르
러서 보니,담벼락은 무너지거나 깨어져 있었다.그 밖의 다른 것들도
모두 불타버려 쉴 곳은 물론,곳곳에 시체가 언덕처럼 쌓여 발 디딜
틈도 없었다.105)
인용문①은 정유재란으로 인해 남원에서 살던 최척의 가족과 남원지방 백
성들이 지리산 연곡으로 피난을 갔다가 양식을 구하러 나와 있는 동안 왜적
들이 지리산을 3일 동안 기습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죽이고 포로로
잡아간 대목이다.최척은 가족과 이별의 아픔을 겪었다.가족과 이별하게 되
어 정신없이 헤매던 최척은 백성들의 희생의 참상을 직접 목도하였다.이 부
분을 통해서 전쟁이 얼마나 많은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는지 여실히
105)陟號天痛哭 僻地嘔血 卽走蟾江 未行數里 許見於亂屍中 呻吟斷續 若存若沒 而流血被面 不知其
何人也 察其衣裳 甚似春生之所着 大聲而呼曰
“爾莫是春生乎”
春生張目視之 喉中作語曰
“郎君郎君 主家皆爲賊兵所掠而去 吾負阿釋 不能趨走 賊引兵斫殺而去 吾偃地卽死半日而甦 不知
背上之兒 生死去留”
言訖而氣盡 不復生矣 陟搥胸頓足 氣絶而卜 旣而復生 無可奈何 起向蟾江 則岸上創殘老弱數十相
聚 而哭往問之 則(曰)
“俺等隱於山中 爲賊所驅及舡 賊抽丁壯同載 推下罹鋒老羸者如此”
陟大聲痛哭 無意獨全 將欲自裁 傍人救止之 踐踐江頭而去無所之 還尋歸路三書夜 僅達其鄕閭 頹
垣破瓦 餘燼未息 積屍成丘 無地着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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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주었다.
인용문②는 최척이 가족을 찾는 과정에서 직접 목도한 것으로서 옥영의 계
집종인 춘생이 도망갔을 때 적에게 칼에 맞게 되고 시체더미 속에서 마지막
죽어가는 모습이다.전란 속에서 이렇게 적에게 상처 입고 고통스럽게 죽는
모습은 비일비재하였을 것이다.잔인한 적병들은 장정들만 가려 배에 실어
가고,병이 들거나 칼에 찔린 노약자들을 버렸다.
위의 글을 통해서 당시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가지게 되었다.정유재란으로 인해 죽음을 당하는 백성들이 不知其數
였을 것이다.이별하게 된 가족 수도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조선
백성들 뿐만 아니라 조선으로 파병된 중국 명나라 구원병들도 많이 죽음을
당하였다.조선 땅에서 유랑하여 가족과 재회하지 못하게 되었다.작품 중에
홍도의 아버지 진위경은 한 예가 된다.홍도가 젖을 떼기도 전에 아버지 진
위경은 유총병을 따라 조선에 출전하였다.그런데 홍도는 장성해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고 생사불명이다.그래서 홍도의 소원은 조선 땅에 가서 아버
지의 넋을 불러놓고 통곡한 뒤,시신을 모시고 돌아와 장례를 지내는 것이
다.106)세상에 태어나서 아버지를 한 번도 못 보는 홍도의 심경을 알 수 있
다.이렇게 홍도처럼 전쟁 때문에 아버지와 이산하게 되는 명나라 아이들과
진위경처럼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국에서 유랑하게 되는 명나라 군사들
이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조선 인구가 많이 유출되었다.이는 역사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선조 32년(1599년)조선에 왔던 명나라 군사들이 철수할 때
그들에게 종속된 조선인들이 그들을 따라 명나라로 들어간 수가 적지 않았다
고 하는데 이후 이들은 山海關 동쪽,南滿洲 방면에서 부락을 이루고 살았고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구가 훨씬 많았다.107)위의 글에서도 이런 묘사가 나
와 있다.적병들은 많은 장정들을 가려 배에 실어 갔다.당시 이렇게 포로 되
어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 백성의 수가 많았을 것이다.작품에서 주인공 옥영
이 왜병인 돈우에게 붙들렸고 일본으로 끌려갔다.최척도 의탁할 곳이 없어
서 마침 명나라 군사들을 만났고 그 중의 여유문을 따라 중국으로 가게 되었
106)(紅桃)常痛其父殁於異域 而生不知其面目也 願一至父死之國 推白骨而來 耿耿冤恨銘于心腑.
107)이채연,『임진왜란 포로실기 연구』,출판사 박이정,1995,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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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렇게 조선의 인구가 밖으로 많이 유출되었다.그리고 수많은 여인들이
적병에게 강제로 욕을 당하였을 것이다.때문에 이런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
하여 이름도 모를 수많은 여인들이 목숨을 초개 같이 버렸으며 殉節한 여인
들 중 이름이 알려진 여인들의 旌門이 현재도 전국의 각지에 많이 세워져 있
는데 이로써 우리는 이때의 상황을 헤아려 볼 수 있다.108)작가 조위한의 동
생이었던 조찬한의 부인 高興 柳氏가 정유재란 때 왜병에 저항하다가 순절하
였다.지금 전라남도 장성군 北一面에 그녀의 旌門이 아직 남아 있다.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에게 초래한 고달픈 삶과 가족과 이산한 슬픔의 묘사
를 보면 조위한이 전쟁에 대해 부정하는 태도를 알 수 있다.즉 반전의식이
다.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전쟁 중에 옥영이 남원으로 피난 와서
최척과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다는 좋은 일도 있었다.이 부분은 조위한의 동
생인 조찬한이 피난하다가 나주에서 高興 柳氏와 혼인한 일과 유사하다.조
위한은 작품에서 전쟁이 백성들에게 초래한 고통과 슬픔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고달픈 삶에서 두 주인공이 전쟁을 계기로 하여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다는 묘사도 하였다.잔혹한 현실이라도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그리고 행복과 불행은 항상 반복 작용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조위한은 조선,중국,일본 넓은 공간배경으로 이 작품을 창작함으로써
자신의 세계의식을 나타낸 것이다.조위한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이
루어졌다고 이해할 수 있다.임진왜란을 통해서 백성들은 자아를 각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세계와 역사 변화에 대한 인식도 넓혔다.특히
일본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면서 적개심을 품었고,중국 명나라에 대한 崇明
思想을 깊이 확인했다.
요컨대,작가 조위한은 전쟁이 국가나 백성들에게 초래한 참상을 묘사하여
이토록 불행한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된다는 반전의식을 표출했다고 볼
수 있다.
108)민영대,앞의 책,『조위한의 삶과 문학』,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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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의병과 관련한 태도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위한은 남원에서 피난하던 중 구국을 위하여 잠시 의
병에 참여하였다.다음의 글을 통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先時十餘年間,倭寇猶未平,嘗從金將軍德齡試軍旅事.天將有愛公者,公
欲隨入中朝博觀天下.109)
嘗流寓湖南屬倭寇未靖邊搖用兵,公遂從義兵將金德齡陳中.110)
與天朝明將吳明濟會遊龍山, 欲偕入江浙間不果, 文集有獨身飄泊于龍山,
旣無父母又無妻子,不樂於人世,將有出塵遠遊之志,適遇天將水兵之來泊于
江上,得與浙人相善,約與之偕入東吳,浪迹於蘇杭之間,而爲仲氏泣挽,不
得遂去.111)
위의 인용문을 보아,조위한은 임진왜란 때문에 남원으로 피난했을 때 김덕
령 장군의 수하에 들어가 왜적을 물리치는 일에 참여하였다.김덕령(1567~
1596)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웠던 의병장 중의 한 사람이다.그는
선조 26년(1593년)에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虎翼將軍이라는 賜號를 받았으
나 선조 28년(1595년)에 李夢鶴의 亂때 적의 책략으로 적장과 내통한다는 무
고로 받아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옥중에서 죽었다.바로 이때 조위한이 김덕
령 장군의 수하에서 의병 활동을 한 것이다.그는 진정으로 전쟁에 유린된
나라를 보호하고 싶었고,왜병을 미워하여 섬멸하고자 했던 심경을 알 수 있
다.그 과정에서 명나라 군사들과도 교류하고 명나라 장수에게서 특별히 사
랑을 받았다.그 당시 조위한은 피난길에 가족을 많이 잃어버렸기 때문에 세
상을 살 뜻을 잃어서 명나라 군사와 약속하고 중국에 가서 천하를 널리 구경
하고자 계획하였다.그러나 형 유한의 만류로 포기하였다.의병활동은 나라가
어려울 때 강요나 지시에 의한 참여가 아닌 자발적인 것이다.조위한이 의병
109)<神道碑銘>.
110)<行狀>.
111)『玄谷集』卷十三,<祭亡子倚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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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참여한 것은 자신의 忠君사상과 애국의식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최척전>에서 최척은 잠시 동안 의병참여에 관련한 내용도 나와 있다.
남원부 사람으로 전에 참봉을 지냈던 변사정이 의병(義兵)을 모집하
여 영남(嶺南)으로 가려고 하였는데,최척은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했기
때문에 의병에 뽑혀서 동행하게 되었다.최척은 진중(陳中)에 있으면서
옥영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몸이 아프게 되었다.혼례를 치르기로
약속한 날이 되어 소장(訴狀)을 올려 휴가를 청하자,의병장이 화를 내
며 말했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감히 결혼을 하겠다는 말인가?임금께서 몽진
을 하시느라 어가가 산야로 떠도는 중이야.신자들이 병기를 놓을 겨
를 마저 없지 않은가?하물며 자네는 아직 장가를 들 나이도 아니지
않은가?적을 물리친 후에 혼사를 도모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야”
의병장은 끝내 최척의 귀가를 허락하지 않았다.112)
최숙은 그러한 사연을 편지에 자세하게 적어 아들에게 보냈다.최척
은 마침 심하게 앓고 있었다.그 소식을 듣고는 놀라 병세가 더욱 위중
하게 되었다.의병장이 그 이야기를 듣고 최척을 즉시 집으로 돌려보냈
다.113)
최척은 옥영과의 결혼 날짜를 정하고 기뻐하며 손가락을 꼽아 기다렸으나,
그가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했기 때문에 영남으로 가는 변사정에게 뽑혔다.
‘義兵將邊士貞,遣其副將李潛,領兵三百.114)’‘남원의 전 참봉 邊士貞을 2000여
명 모았다115)’라는 기록을 보아 남원에서의 의병활동이 실제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또한,변사정도 역사에 있었던 인물이다.최척은 옥영과의 결혼 날
112)無何 府人前參奉邊士貞 起義兵赴嶺南 以陟有弓馬之才 遂與同行 陟在陳中憂念成疾 及其約婚之
日 呈狀乞暇 則義將怒曰
“此何等時 而敢求婚娶乎 君父蒙塵 鉞在草莽 臣子當枕戎之不暇 而况汝未及有室之年 滅賊而圖婚
亦未晩也”
竟不許.
113)崔淑以書抵其子 具道所以 陟方患病篤 聞此驚感 轉成危革 義將聞之 卽令出送.
114)『宣祖修正實錄』卷27,26년 癸巳 7月條.
115)『燃藜室記述』卷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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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를 지나쳤기 때문에 의병장에게 휴가를 청했는데 거절 당하였다.의병장은
임금께서 난리를 당할 때 신하로서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서 잘 겨를도 없이
왜병과 싸워야 된다고 말하였다.결국 의병장은 최척의 귀가를 허락하지 않
았다.최척의 의병참여는 작가 조위한이 남원에서 의병 활동을 체험한 것에
서 영향을 미친 것을 볼 수 있다.
그 당시 조선 사회는 유교사상으로 국가의 근본을 삼았다.삼강오륜이 생활
의 기본이 되고 忠孝는 유교의 도덕규범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덕목이
다.116)삼강오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강:① 임금은 신하의 근본이다(군위신강)
② 아버지는 자식의 근본이다(부위자강)
③ 남편은 아내의 근본이다(부위부강)
오륜: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는 친애에 있으며-부자유친
②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고-군신유의
③ 부부 사이에는 서로 침범치 못할 인륜의 구별이 있으며-부부유별
116)忠은 원래 자기와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을 다하는 정신자세를 의미하는 개념이었으며,孝는
처음부터 자식의 부모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가리키는 개념이었다.그 후 충의 개념이 군주에
대한 신하의 도덕적 의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어감에 따라 충과 효를 연기(連記)하기 시작
했다.〈순자 筍子〉예론(禮論)에 충신효자(忠臣孝子)라고 하여 충과 효를 대칭적으로 사용한 것
이 처음이며,〈효경 孝經〉에도 충과 효가 연기되어 있다.한대 이후에는 충효로 연기하는 것
이 일반적이었다.그 배경에는 충과 효가 본질에서 동일한 도덕규범이라는 ‘충효일치’의 사상이
있었다.‘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한다.’,‘효로써 군주를 섬기는 것이 곧 충이다.’,‘부모에게
효도하기 때문에 군주에게 충을 옮길 수 있다’,‘충효는 2가지 도리가 아니다’등에서 충과 효
의 가족 내에서 부모의 권위에 복종하는 정신태도와 집권적 정치체제 내에서 군주의 권위에
복종하는 정신태도가 같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따라서 일상적인 가정생활 속에서 부모의
권위에 복종 하는 정신자세가 길러지면 자연히 관료가 되어서도 군주의 권위에 복종하는 정신
자세가 된다는 것이다.그러나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혈연적·자연적이라면 군신관계는 녹사(祿
仕)에 의해 비로소 맺어지며,치사(致仕)하면 군신관계가 해제되는 것이다.충효사상에서는 군
주와 부모의 권익에 대해 신하와 자식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복종할 것을 가르치면서도,한편에
서는 군주와 부모의 잘못을 간쟁하는 것이 신자(臣子)의 도덕적 의무라고 했다.이런 점에서
유교의 충효사상에서 충과 효의 덕목이 모두 권위주의에 바탕을 둔 도덕규범이면서도 아랫사
람의 도덕적 주체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따라서 충효사상은 충
과 효를 동일시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자와 군신 간에 현실적 차이가 있다.자식의 경우는 부모
의 잘못을 간해도 부모가 듣지 않을 경우에는 울면서 부모를 따르는 것이 도리이나,신하의 경
우는 군주가 간언(諫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떠나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고 했다.자식
과 신하의 도덕적 의무에서 이러한 차이가 인정되는 것은 ‘친합’(親合)또는 ‘천속’(天屬)으로
표현되는 혈연적인 부자관계와 ‘의합’(義合)으로 표현되는 인위적인 군신관계의 차이에서 연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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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장유유서
⑤ 벗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뜻한다-붕우유신
위의 규범을 통해서 임금은 신하의 근본이고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義理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즉 신하로서 임금의 권익에 대해 무조건으로 복종
해야 한다.자신의 이익과 임금의 이익을 충돌이 생길 때 자신의 이익에 무
조건으로 포기하고 임금의 이익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평소 배운 것이 무엇이며 읽고 논한 것이 무엇이냐.신하가
忠에 죽고 자식이 孝에 죽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평소 배우고
논한 것이 과연 여기에 있다.어찌 오늘에만 一介 半介의 死忠死孝者가
보이지 않으랴.117)
위의 글은 의병을 촉구하는 내용이다.擧義의 명분을 밝힘에 있어 忠君愛國
이 백성의 의무임을 강조하면서 化家爲國의 儒敎的 倫理觀을 고양시키고 있
다.
작품 중에 변사정,최척 등이 나라가 어려워질 때 자발적으로 의병에 참여
하는 행동은 忠君愛國과 化家爲國의 유교사상을 나타낸다.主辱臣死 정신과
鄕土守護 정신의 표현이다.나라가 침략당할 때 나라와 임금을 지키는 것은
백성의 의무이다.그런데 최척은 임진왜란이라는 조선의 민족적 위기를 당했
음에도 불구하고 옥영과의 결혼 날짜가 다가오자 나라를 보호하는 것을 포기
하고 변사정에게 휴가를 청하였다.이때 개인적 이익과 국가의 이익에 충돌
이 생긴 것이다.변사정은 임금이 난리를 당할 때 감히 혼사에 대해서 말하
느냐 물으면서 거절하였다.개인적 행복을 추구하기 전에 먼저 나라를 구해
야 한다는 작가 조위한이 유교적 忠君愛國 사상을 나타낸다.
그런데 최척의 아버지는 최척에게 편지를 쓰고 양씨 집안과의 혼사 문제
등 그 동안의 모든 사실을 다 알려 주었다.최척은 병이 더 심해졌다.어쩔
수 없이 변사정은 최척을 집으로 보내버렸다.忠君愛國의 면에서 보면 변사
117)吾等平日所學者何事 所讀論者何事 其不在於爲臣死忠 爲子死孝者乎 平日所學所論者 果在於此
則何獨今日未見一介半介死忠死孝者哉.李魯,『龍蛇日記』壬辰 11月 17日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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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公과 私를 구별하지 못하고 公적인 임무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다.이런
면에서 보면 <최척전>은 인간적인 면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3)호족 명나라 침입 전쟁의 시각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최척전>은 임진왜란,정유재란,호족 명나라 침입
전쟁 등 작가가 살던 당시의 시대를 그대로 작품의 배경으로 설정하였다.여
기서는 작가 조위한이 호족 명나라 침입 전쟁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갖는지
살펴보겠다.
7년 간에 걸쳐 진행되었던 임진왜란은 조선에게 뿐만 아니라 중국 명나라
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다.임진왜란을 치르면서 중국 동북지방 호족이 발흥
하여 명나라를 위협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였다.17세기 초 명나라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국력이 쇠퇴하여 호족의 누르하치가 강성해져 명의
국경을 자주 침범하였다.명나라 神宗은 호족을 막기 위해 대군을 일으키면
서 조선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광해군을 비롯하여 조정에서 이 문제를 어
떻게 처리할지 고민하였다.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 ‘망해가던 나라를 다
시 세워준 은혜(再造之恩)’로 숭앙 받았던 명나라를 버릴 수 없고,가면 갈수
록 강해지는 호족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급기야 광해군 10년(1618년)
명나라는 조선에게 호족을 공격하는 데 구원병 수만 명을 파견해 달라고 요
청하였다.명의 출병 요구를 수용하는 여부를 놓고 벌어진 찬반 논의는 광해
군과 대북파118)사이를 갈라놓았을 뿐 아니라 북인 내부의 균열을 초래하였
다.119)李爾瞻120)등 대북파는 후금에 대해 준열한 斥和論을 견지하면서 명을
도와야 한다는 입장에 섰고,광해군과 그의 입장에 동조하는 신료들은 후금
에 대한 羈縻策을 강조하면서 원병 파견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121)
118)북인은 선조 말년을 거치면서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집권세력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북인들
은 대북파를 비롯하다.
119)한명기,『임진왜란과 한중관계』,역사비평사,1999,pp.244~250.
120)이이첨(1560~1623),조선 중기의 문신.선조 때 대북의 영수로서 광해군이 적합함을 주장했다.
광해군 즉위 후 조정에서 소북파를 숙청했다.영창대군을 죽게 하고 김제남을 사사시켰다.폐
모론을 주장,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인조반정 뒤 참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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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여 요동출병을 명하였지만 상황
에 따라서 판단하도록 하였다.만약에 명나라가 승리할 수 없으면 호족에게
항복하고 명나라가 승리할 수 있으면 명나라를 위해 끝까지 싸워야 된다고
명하였다.
이때 명나라 喬遊擊의 副摠 오세영은 최척을 서기로 삼아 요양으로 출전하
게 되었다.그런데 주장이 적을 가볍게 여기고 싸우다가 전군이 크게 패하였
다.누르하치는 명군만을 살상하고 조선 병사는 유혹하거나 위협하기만 하고
죽이지 않는다는 전략을 세웠기 때문에 최척은 포로가 되어 살아남았고,조
선병으로 출전한 큰 아들 몽석과 호족 포로수용소에서 극적인 만남을 이루었
다.그 당시 喬遊擊이 살아남은 군사 10여 명을 거느리고 조선 진영으로 들
어가 조선옷을 달라고 하였다.강홍립은 조선옷을 지급하여 남은 명군들이
죽음을 면하였는데 종사관 이민환이 이러한 사실이 호족에게 발각될까 두려
워 옷을 뺏고 명군들을 붙잡아 적진에 보내버렸다.강홍립은 형세를 보아 호
족에게 투항하였다.
광해군은 이런 대외 정책이 명분론이나 조선의 국가관의 면에서 비판 받았
다.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백여 년이라,義理로는 곧 君
臣이 恩惠로는 부자와 같다.그리고 임진년에 再造해 준 그 恩惠는 만
세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중략)광해는 背恩忘德하여 천명을 두려
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기미년 오랑캐를 정벌한 때에는 은밀히 帥臣을 시켜 동태를 보아 행동
하게 하여 끝내 全軍이 오랑캐에게 投降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四海에
펼쳐지게 하여,예의의 나라인 三韓으로 하여금 오랑캐와 금수가 됨을
면치 못하게 하였으니,그 통분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
가.122)
부모와 같은 중국 조정의 은혜를 저버리고 우리 동방 예의의 풍속을
무너뜨려 三綱이 땅을 쓸은 듯 없어졌으니,이를 어찌 차마 말할 수
121)정만조,한충희,김인걸 외,『조선의 정치와 사회』,집문당,2002,p.282.
122)『仁祖實錄』권1,인조 元年 3월 甲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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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겠는가.심지어 사치가 도에 넘치고 형벌이 문란하여 백성들이 곤궁
하고 재정이 고갈되며 내외의 질서가 무너짐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망
치고 종사를 전복하기에 충분하였다.이와 같은 소소한 일들은 자전의
하교에 모두 거론되었으므로 더 이상 재론하지 않는다.123)
조선왕조는 건국 초부터 유교적 도덕왕국의 건설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조선의 국가관은 철저히 유교적 통치원리에 의해 추구되는 이상적 도덕국가
완성을 지향하였다.위의 글은 이런 이념으로 출발하여 조선은 중국 명나라
를 2백여 년 동안 섬기고,義理로는 君臣와 부자 관계임을 밝혔다.그래서 광
해군의 대청정책은 동방 예의의 풍속을 무너뜨려 三綱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이는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임진왜란을 맞은 조선의 정치는 부패해지고 문란하여,재정은
고갈되었고,백성들은 굶주림으로 허덕였다.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더 이상
상처를 입을 수 없었다.자국의 이익을 위해 섬기고 있었던 명나라는 쇠퇴하
여 세력이 강해지는 호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광해군의 현실주의 외
교정책에 입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이런 국익을 우선하는 국제사회의 힘
의 역할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당시 국제사회의 현실을 바라보
던 작가 조위한의 시각은 이 작품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였다.
한편,작가 조위한은 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을 통해서 개인적 의식도 나
타낸다.
그 오랑캐가 말했다.
“두려워 마시오!나 또한 삭주의 사병이었소.부사의 학정이 끝이 없
어,그 고초를 견디지 못하고 가족을 거느리고 오랑캐 땅으로 들어온
지 이미 십 년이나 되었는데,그들은 성품이 강직하고 또한 가혹한 정
치는 없다오.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을진대,무엇 때문에 구차스럽게
아전배들이 채찍질에 시달려야 한단 말이오.오랑캐의 추장이 나로 하
여금 팔천 명의 정병을 거느리고 조선인 포로를 감시하여 도망치는 것
을 방비하게 하였소.지금 그대들의 말을 들어보니 매우 기이한 일이
123)『仁祖實錄』권1,인조 元年 3월 甲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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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내 비록 노추에게 질책을 당하더라도 어찌 차마 그대들을 보내지
않겠는가?”
마침내 늙은 오랑캐는 식량을 마련하고 지신의 아들을 시켜 샛길을
가르쳐 주면서 최척과 몽석을 풀어 주었다.124)
최척은 포로가 되어 호족 포로수용소에서 큰 아들 몽석과 극적으로 만났다.
어떤 오랑캐가 부자가 만나는 기이한 이야기를 듣고 식량을 준비하고 샛길을
가르쳐 최척과 몽석을 풀었다.오랑캐가 원래 조선 삭주 토병이었는데 삭주
목사의 학정에 시달리지 못하고 가족을 데리고 정든 고향을 떠나 호족으로
도망갔다.대부분의 백성들이 학정에 시달리며 살 도리밖에 없었지만,토병은
스스로 자신의 권익을 찾아 대대로 살았던 고국을 떠나 가혹한 정사가 없는
호족의 땅에서 자리를 잡아 팔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게 되었다.그는 조선에
비해 호족은 가혹한 정사가 없다고 하며 호국에서의 생활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고 있었다.그러나 당시 후금과의 전쟁에 명을 도와 참전해야 했던 조선
은 현실에서 호족이 결코 우호적인 존재가 아니었다.조선은 호족과 이런 관
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는 호족을 우호적인 존재로 보았다.또한
유교의 복종을 미덕으로 생각하던 조선 백성들이 의식이 크게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유교라는 대의명분이 아닌 개인의 삶을 우선하는 실리를 추구한
것이다.즉 개인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삭주 토병을 통해서 당시 조선 사회의 정치가 얼마만큼 부패했는지,
백성들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고국을 버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삼각했던 부패의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비판의식의 발로라고 해
석된다.
124)老胡曰
“無怖 我亦朔州士兵也 以府使侵虐無厭 不勝其苦 擧家入胡 已經十年 胡人性直 且無苛政 人生如
朝露 何乃苟趣捶楚之鄕乎 奴酋使我 領八千精兵 管押本國人 以備逃逋 今聞爾輩之言 大是異哉
我雖得責於奴酋 安得忍而不送乎”
明日備給粮粮 使其子指送間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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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외적 공간에 대한 작가의식
1)중국에 대한 동경
작가 조위한은 어렸을 때부터 한문중심으로 교육을 받고 중국 전적을 많이
읽어 자연스럽게 중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갔다.<神道碑銘>에 이미 열여
섯 살에 先秦의 고문을 두루 섭렵했다는 기록이 있다.<行狀>에 열다섯,열
여섯 살 때 이미 경서를 외웠으며 先秦古文을 두루 읽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문중에서 전하는<年譜>나 <墓表>등 작자에 관한 여러 기록에서 그가
중국의 전적을 두루 섭렵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그가 학문에 뛰어나
고 열한 살 때 지었다는 작품들이 지금까지 남아있다.125)조경은 조위한의 문
집인『玄谷集』의 발문에서 그가 어려서부터 문장을 좋아하여 先秦과 兩漢의
문장이 아니면 읽지 않았고『太史』와『戰國策』에 심취한다고 하였다.126)이경
석은 서문에서 조위한이 先秦과 兩漢,魏晋의 고문을 안 본 것이 없었으며
『詩經』을 읊어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킬 정도라고 하였다.127)이것으로 보아
그가 일찍부터 중국의 고전에 박식했음을 알 수 있다.이렇게 조위한은 어려
서부터 중국문화를 많이 익혔으므로 문물이 찬란했던 중국에 대한 관심과 동
경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중국에 대한 강한 동경은 중국으로 여행 가는 한
이유가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그는 동생 조찬한과 같이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살이를
하였다.피난생활을 하다가 어린 딸을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잃었고,남원에
서 어머니를 잃었다.서른한 살 때 부인과도 사별하였다.정유재란이 일어나
서 다시 전라도 봉산으로 피난하였을 때 호남이 적병에 의해 유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주에서 신혼생활을 하던 동생이 걱정되어 내려갔다가 제수의
殉節을 목도하였다.조위한은 남원에서 피난하던 중 김덕령 장군의 수하에
125)<年譜>에 친구들과 어울려 매화와 버드나무가 봄을 다투는 정경을 보고 지었던 시 ‘相爭春色
誰後先 陌頭楊柳溪邊梅’와 또 전염병으로 인해 避接 나갔다가 죽을 위기를 넘기고 화복하자 아
버지에게 자신의 뜻을 나타냈던 ‘臥病南窓下思親淚滿巾 父母何處去 兄弟在何處 遙知父母處 欲
去病未能.’이라는 시가 있다.
126)조위한,『玄谷集』,조경의 跋文.
127)위와 같은 책,이경석의 序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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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 왜적을 물리치는 일에 참여하였고,이 때 처음으로 명나라 군사들과
교류를 시작했으며 명나라 장수에게 사랑을 받았다.128) 이 시기에 전쟁으로
인해 단란했던 가정이 완전히 해체되었고,난이 끝난 후 오랜 동안 방랑하다
가 고향에 돌아왔으니 모실 부모도 처자도 다 잃어버렸다.그는 세상에 살
재미를 잃고 명나라 장수들과 같이 평소 동경했던 중국의 명승지로 알려진
江蘇省과 浙江省을 여행하기로 하였다.그러나 형 조유한의 만류로 포기하였
다.129)
조위한이 벼슬에 오르기 전에 허균이 중국에서의 여행의 괴로움을 말하자
조위한은,“우리 들이 중국에 태어나지 못한 것이 이미 불행이라 하겠는데 하
물며 행로의 수고로움으로 위대하고 장려한 구경을 폐할 것인가,이는 우물
안 개구리의 소견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 하면서 자신이 과거에 급제하여
사신으로 발탁되면 반드시 함께 중국을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130)중국에 태
어나지 못한 것이 이미 불행이라 생각할 정도로 중국에 대한 동경을 나타냈
다.행로가 비록 고생스러워도 각오하는 의지가 엿보였다.조위한이 중국을
얼마나 동경했는지,중국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중국을 얼마만큼
긍정적으로 생각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그런데 허균은 갑작스러운 병으로
인해 갈 수 없게 되었다.
광해군 2년 8월(1610년)조위한은 예부랑중으로 재직하던 중 사은사 서장
관으로 명나라에 가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중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느낀 것
을 시로 나타냈다.대표적인 작품이 <渡三又河是日大風>,<大凌河>,<小凌
河>,<過寧遠衛>,<謁夷濟廟>,<入遼陽城二首>,<過李提督如松祠>,<長
城>,<山海關>,<波撼岳陽城>,<題滄浪亭>,<玉河館>,<秦皇島>,<在西
湖>,<遊太白山>131)등이 있다.이 시들이 지명이나 사당,성 이름을 제목으
128)<神道碑銘>,先是十餘年間倭寇猶未平 嘗從金將軍德齡 試軍旅事 天將有愛公者 公欲隨入中朝博
觀天下.
129)<年譜>.
『玄谷集』卷之十三,<祭亡子倚文>.
…與天朝將士吳明濟會遊龍山 欲偕入江浙間不果 文集有獨身飄泊于龍山 旣無父母又無妻子 不樂
於人世 將有出塵遠遊之志 適遇天將水兵之來泊于江上 得與浙人相善 約與之偕入東吳 浪迹於蘇杭
之間 而爲仲氏泣挽 不得遂去.
130)허균,『惺所覆瓿藁』卷5,文部,<送趙持世赴京序>.
131)조위한의『玄谷集』에 수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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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삼고 있어 조위한의 행로를 알 수 있다.이런 여행 체험은 작품 <최척전>
에서 잘 반영하였다.또한,중국에서 새로운 문물을 보고 자신의 경이로움을
나타나는 시들도 있다.북경의 저자를 다니던 중 수족관에서 노는 물고기를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며 읊었던 <琉璃甁貯水養紫魚數箇實案上澄澈若空一魚
之影或有大小或成五六殊爲異觀>,악사가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겨울 매화와
흰 눈을 소재로 노래를 지어 부르는 것을 보고 지은 <聽于樂師彈琴>,실물과
거의 같은 조화를 만들어 파는 사람을 보고 느낌을 읊었던 <有賣造花者紅藥
白梅共一紙盆其巧逼眞置諸案上而賦之>,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것
을 보고 읊었던 <鸚鵡>132)등이 있다.이 시들이 작가 중국의 인심이나 풍경
에 대한 관심이 컸던 것을 잘 나타낸다.
또한 조위한은 한문으로 지었던 작품들도 자신이 중국에 대한 동경심을 잘
나타낸다.그는 계축옥사에 연루되었다가 파직․금고 생활을 하던 중 세상에
나오지 않을 계획으로 남원 주포에 내려와 살면서 자신의 은거한 뜻을 나타
내는 <次歸去來辭>를 지었다.세상이 자신을 알자주지 않아도 옛날부터 불우
한 자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슬퍼할 것이 없고 농사지으며 술을 벗 삼고
음풍농월하면서 여생을 보내겠다는 뜻을 담았다.이 작품은 작가가 도연명이
지은 <歸去來辭>의 운을 빌려 지은 것이다.작자뿐만 아니라 전 시대의 이인
로를 비롯하여 성현,정경세,신흠,이안눌,허균 등도 <歸去來辭>에서 운을
빌려 자신들이 은거하는 뜻을 나타냈다.133)이 작품에서 중국의 고사가 상당
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134)아들의 죽음을 애도한 <祭亡子倚文>에서도 중
132)역시『玄谷集』에 수록하고 있다.
133)李仁老(1152~1220)<和歸去來辭>(『東文選』)
成 俔(1439~1504)<次歸去來辭>(『許白堂文集』)
鄭經世(1563~1633)<次歸去來辭>(『愚伏集』)
申 欽(1566~1628)<和歸去來辭>(『象村集』)
李安訥(1571~1636)<次歸去來辭韻>(『東岳集』)
許 筠(1569~1618)<和陶元亮歸去來辭>(『許筠全集』)
申 最(1619~1658)<和歸去來兮辭>(『海東辭賦』)
洪奭周(1774~1841)<和陶歸去來辭>(『淵泉全書』)등이 있다.
134)晉나라 때 문인 潘岳의 秋興이라든가 張翰의 征衣,陝西省에 있는 終南山의 파란 산 기운,戰
國시대 魯나라 사람 顔闔은 魯君의 부름에도 도를 지키고자 끝까지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顔闔鑿壞’,삼국시대 魏나라 사람 管寧이 황건적 난 때 遼東으로 피난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管寧浮舟’,晉나라 혜강이 사형 당할 때 거문고를 타며 ‘廣陵山(琴曲의 명칭)
도 오늘로써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或絶響於林丘’,요순시대의
태평대,요임금 때 巢父와 許由가 산 속에서 세상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은거했던 고사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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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의 고사가 많이 나타냈다.135)이런 것으로 보아 작가가 중국의 전고에 두루
박식한 것을 알 수 있고,중국의 문화에 대한 동경심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에는 조위한의 체험을 많이 반영한 <최척전>에서 작가의 중국에 대한
동경을 어떻게 나타내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배경적 측면
<최척전>의 주요 배경은 조선 남원이다.그러나 정유재란으로 인해 가족과
이산하게 된 최척이 의탁할 곳이 없어서 중국 명나라 군사 여유문을 따라 중
국으로 갔고 20여 년 동안 살았다.중국은 최척의 두 번째 고향인 것이다.최
척은 여유문의 집인 浙江省 紹興에서 살면서 여유문과 의형제를 맺었다.여
유문은 병으로 인해 죽자 최척은 또 다시 의탁할 곳이 없어 중국 곳곳을 돌
아다녔다.長江을 따라 湖南省 洞庭湖 주변을 중심으로 四川省 龍門,浙江省
禹穴,雲南省 瀟湘江,湖南省 岳陽樓,江蘇省 姑蘇臺 등 일대 중국 대표적인
명승지를 유람하다가 속세에 뜻을 잃고 四川省의 靑城山에 가서 도술을 배우
려 하였다.예전부터 최척이 사귀었던 친구 주우라는 사람을 만나 그의 만류
로 靑城山행을 포기한 후 상선을 타고 함께 장사를 다니게 되었다.그러다가
안남에 이르고 옥영과 우연히 해후하고 杭州의 湧金門에 정착하였다.湧金門
에서 19년 동안 살다가 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으로 인해 서기로 뽑혀 명나
라 군사를 따라 遼陽으로 북정하였다.명나라가 졌기 때문에 최척은 포로가
되고 삭주 토병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조선으로 돌아왔다.
여기 최척이 유람한 지역들은 풍류와 예술이 함께 어우러지고 당시 중국문
화의 조선 이입과정과 깊은 관련을 가지는 곳이다.당시 조선의 시인묵객이
면 누구나 동경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그리고 四川省의 靑城山은 그 당
시 隱者들이 숨어 장생불사를 꿈꾸며 도술을 연마하는 유명한 산이라고 하였
다.이렇게 중국의 여러 지역을 배경으로 설정하여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은 작가의 중국 여행체험과 중국에 대한 동경에 의해서 이루어진 결과로
인용하였다.
135)아들의 夭死를 孔子의 아들 伯魚,『太玄經』을 지은 한나라 揚雄의 아들 東鳥와 비유하였고,아
들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을 孔子의 제자 子夏나 曾子와 비유하였다.또는 春秋戰國時代 魏나라
사람 東門吳,楚나라 현상 孫叔敖가 어렸을 때 兩頭蛇를 죽였던 고사 등을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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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다.
(2)인물의 관점
① 여유문
여유문은 정유재란 때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파병된 중국인이다.남원에서
최척을 만나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 불쌍하게 여겨 중국으로 데리고 갔다.
여유문은 최척을 매우 아껴 같은 막사에서 식사를 하고 잠도 같이 잤다.그
리고 오갈 데 없는 최척과 의형제를 맺었다.紹興에서 함께 살면서 여유문은
단신인 최척의 처지를 긍휼히 여기고 자신의 동생과의 결혼을 주선했는데 최
척은 가족이 생사불명의 상태에서 새로운 아내를 얻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완강하게 사양하였다.그리고 일찍이 여유문은 오세영에게
최척의 인물됨을 이야기하였기 때문에 후에 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이 일어
날 때 오세영이 최척을 서기로 삼아 데려갔다.결국은 최척은 호족의 포로가
되고 포로수용소에서 큰 아들 몽석을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삭주 토병의 도
움으로 도망가고 귀국하게 된다.최척에게 여유문은 생명의 은이며 고난을
극복하도록 도와준 선한 인물이다.여유문을 통해 최척의 삶이 극적으로 전
환되는 계기를 부여하는 것은 중국의 인물들을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에서 비
롯된 일이다.
② 주우
주우는 최척이 중국에서 사귀었던 중국 친구이다.여유문이 죽자 최척은 세
상에서 살 뜻을 잃고 청성산으로 가서 도술을 배우려 하였다.주우는 이런
사연을 듣고 세상에 그런 이치가 없다고 말하면서 함께 장사를 하며 살아가
자고 권하였다.그는 안남의 포구에서 최척과 옥영이 재화하는 과정에서 일
을 그르칠 뻔한 두홍의 과격한 행동을 자제시키고 매사가 잘 되도록 도운 지
혜로운 인물이다.최척과 옥영이 재회하도록 결정적 동기를 부여한 인물이기
도 하다.생명의 은인보다 더 고마운 사람이라 할 수 있다.그 것뿐만 아니라
주우는 옥영을 데려오기 위해 돈우에게 백금을 주기도 하고 최척과 옥영이
중국에서 살 수 있도록 방을 마련해 주는 등 깊은 우정을 나눈다.최척과 옥
영이 중국에서 살게 되고 훗날 몽선과 홍도의 결혼도 이루어질 수 있게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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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준다.여유문의 선행을 보완하는 구실을 담당하는 인물이다.
③ 오세영
오세영은 중국 소주 사람이다.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이 일어났을 때 喬
遊擊의 副摠으로 북정하게 되었다.그는 일찍이 여유문에게서 최척이 재주가
있고 용맹하다는 것을 들어서 최척을 서기로 데려갔다.이렇게 최척을 만주
로 데려갔기 때문에 명나라 군사가 패전한 후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서 아들
을 만나는 계기를 만들어 준 인물이다.최척의 인생행로에 도움을 끼친 인물
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선한 중국인이다.
④ 두홍
두홍은 최척과 주우가 함께 장사를 다닐 때 함께 배를 타고 다니던 인물
가운데 한 젊고 용맹한 장정이다.최척이 안남의 포구에서 이웃 일본 상선에
서 나온 조선말로 읊은 시구는 바로 자신의 아내가 손수 지은 것이라고 확신
하였기 때문에 실성한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주우가 물어도 최척은 목
이 메고 눈물이 떨어져 말을 할 수 없었다.최척은 기운을 차리고 이웃 일본
상선에서 읊은 시구가 자신의 아내가 지은 것이고,시를 읊은 목소리도 자신
의 아내의 목소리와 너무 비슷하다고 말했다.최척은 온 가족이 포로로 잡혀
간 일을 말하자 주변 사람들이 다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다.이때 두홍이 얼
굴에 의기를 띠고 주먹으로 노를 치면서 분연히 일어나서 일본 상선으로 달
려가 구하여 오겠다고 나섰다.주우가 밤중에 소동을 일으키는 것은 공연히
될 일도 망칠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만류하고 주변에서도 이를 옳게 여기자 분
기를 자제하였다.중국인 두홍을 의협심 강한 청년으로 그리고 있다.
⑤ 홍도
홍도는 중국 명나라 여인으로 정유재란 때 조선으로 파병되었던 진위경의
딸이다.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조선으로 떠나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다 자
르기도 전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셨기 때문에 홍도는 이모의 집에 의탁하게 되
었다.만약에 아버지가 전사하면 조선에 한 번 가서 넋을 불러 놓고 통곡한
뒤 시신을 모시고 돌아와 장례를 지내겠고,아니면 조선에 가서 아버지를 찾
겠다는 것은 홍도의 소원이었다.참 효심이 갸륵한 여인이다.그래서 몽선이
혼처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자 이모에게 중매를 부탁하였다.당시 명나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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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사정으로 보면 대국 명나라의 여인으로 자존심을 버리고 유랑민과 다
름없는 조선인인 몽선의 아내가 되기를 자원한 것이 된다.어떻게 해서든 조
선으로 가야만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조선인과 결혼함에 있어
서 대국 여인의 자존심을 문제 삼지 않은 것이다.홍도의 이런 행동은 자신
의 애정보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더 중요시한 결과로 해석된다.뒤에 옥영
이 귀국을 결심하고 조선으로 향하고자 할 때 몽선은 해로의 어려움 때문에
극구 만류하지만 홍도는 적극 나서서 시어머니를 도와 남원에 도착하였다.
의지가 굳고 효심이 깊은 중국인 여인상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⑥ 진위경
진위경은 홍도의 아버지이다.정유재란 때 조선으로 파병되었다가 귀국하지
못하였다.순천에서 주둔하고 있을 때 적세를 염탐하다가 주장의 뜻을 어기
게 되었고,주장이 군법에 회부할 것을 두려워하여 탈출한 뒤 조선에 머물게
되었다.그는 대구의 박생이라는 사람의 집에 의탁해 침술을 배우고 생계를
유지해 왔다.은진에 이르렀을 때 중병을 얻은 최척을 만나 그를 치료해주고
함께 남원으로 내려왔다.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최척과 사돈임을 알게 되었다.
진위경이 귀국하지 못하고 조선에 머물게 됨으로써 중국에서 아버지의 생사
를 모르는 홍도로 하여금 조선인과 결혼하지 않을 수 없는 직접적인 동기를
부여한다.특별히 동경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이야기의 진행을 돕는 긍정적
인물로 묘사되었다.
⑦ 오봉림
오봉림은 홍도의 이모부이다.홍도가 장성하기도 전에 어머니를 잃자 자신
의 집에 데려다 양육하였다.홍도에게 養育之恩이 있는 사람이다.홍도가 몽
선의 아내를 되기를 자원하자 본래부터 홍도의 뜻을 알고 있는 이모부는 최
척을 만나 홍도의 뜻을 전하여 이들이 결연하도록 도와주었다.오봉림은 의
지할 곳이 없던 홍도를 데려다 양육하고 홍도가 몽선에게 시집갈 수 있도록
주선한 인물이다.
이상으로 보아,<최척전>에서 나타난 중국 사람들은 다 긍정적인 인물이
다.주인공 옥영과 최척 가족의 재회를 직접적이나 간접적으로 돕는 역할을
수행한다.작가 조위한의 중국 사람에 대한 호의적 감정이 작용하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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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있다.
(3)중국문학과의 친연성
최척과 옥영이 서로 보낸 편지 중에 나타난 중국 고사의 인용 사례를 들어
보기로 한다.
옥영은 정상사 집에서 공부하는 최척의 모습을 살펴보고 자신이 의탁할 만
한 낭군이라고 생각하고 최척에게 청혼의 뜻이 있는 <摽有梅>의 마지막 장
을 보냈다.<摽有梅>는 중국『詩經』의 召南篇에 있다.마지막 장은 ‘摽有梅頃
筐墍之 求我庶士迨其謂之’이다.‘던지는 매실 열매 광주리 다 비었네.나를 찾
는 임들아 어서 한 말씀하시라’는 시구이다.이는 매실 열매를 던지면서 남자
를 유혹하는 여인의 노래로 특히 혼기에 차 있는 여인이 구혼의 뜻을 전하는
시로 알려졌다.옥영이 이 시구를 보내는 행동은 사랑 고백이라고 할 수 있
다.최척과 혼사를 이루고 싶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아침에 글을 받고는 제 마음이 감동하였습니다.다시 시녀를 만나니
기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매양 거울 속의 그림자만을 바라볼 뿐이
었습니다.또한 그림 속의 사람을 불러낼 수도 없었습니다.거문고 소
리로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상자 속의 향을 훔칠 수 있다는 것을 모르
는 바가 아닙니다.하지만 봉래산이 얼마나 깊으며 약수가 얼마나 멀
리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이리저리 궁리하다 보니 심신이 모
두 지치고 말았답니다.그런데 오늘은 뜻밖에도 양대의 비가 홀연히
꿈에 나타나고 서왕모의 서신이 문득 도착하였습니다.속히 진진의 우
호를 맺음으로써 월하노인의 인연을 이룰 수 있다면 삼생의 소원을 이
루어 동혈의 맹세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글로 말을 다 적을 수
없으니 어떻게 마음을 모두 전할 수 있겠습니까?136)
위의 인용문은 최척은 옥영이 보낸 <표유매>의 마지막 장을 받은 후 옥영
에게 쓴 답장 편지의 내용이다.시녀(靑鳥)는 반가운 使者나 편지를 이르는
136)朝承玉音 實獲我心 卽逢靑鳥歡喜難勝 每憑鏡裡之影 難喚畵中之眞非 不知琴心 可挑篋香 可偸而
實未側 蓬山幾重 溺水幾里 經營計較之際 鹹已黃 而項已枯矣 不意今者陽臺之雨 忽然入夢王母之
書 遽爾來報倘 成秦晋之好 結月老之繩 則庶遂三生之願 不偸同穴之盟 書不盡言言豈悉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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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다.푸른 새가 온 것을 보고 동방삭이 서왕모의 사자라고 한 漢武의 고
사에서 유래한다.본 작품에서는 최척에게 글을 전해준 옥영의 시비 춘생을
가리킨다.거문고 소리로 마음을 움직이는 것(琴心 可挑)은 司馬遷의『史記』
의 <司馬相如列傳>의 ‘而以琴心挑之’에서 유래한 고사이다.한나라 때 卓王孫
은 음율을 좋아하고 과부가 된 卓文君이라는 딸이 있다.司馬相如가 卓文君
의 마음을 유혹하기 위하여 거문고를 타고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전한다.
여기 ‘琴心 可挑’는 거문고 소리에 실은 탄주자의 마음이다.즉,여자의 마음
을 움직이려고 거문고를 타는 사람의 마음을 뜻하는 것이다.상자 속의 향을
훔칠 수 있는 것(篋香 可偸)은『晉書』<賈謐傳>의 ‘韓壽偸香’에서 유래한 고
사이다.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남녀가 결합함을 이르는 말이다.봉래산이
얼마나 깊으며 약수가 얼마나 멀리 있는 것(蓬山幾重,溺水幾里)에서 ‘蓬山’은
중국 전설에서 나타나는 가상적 靈山인 三神山 가운데에 있으며,신선이 살
고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다고 한다.또 蓬丘,蓬島,蓬萊,蓬山,蓬壺이라고 부
른다.‘溺水’는 신선이 살았다는 중국 서쪽의 전설적인 강이다.길이가 3천 리
나 되며,부력이 매우 약하여 기러기의 털도 가라앉는다고 한다.‘蓬山幾重,
溺水幾里’은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과 가깝게 있으면서도 쉽게 만날 수 없고
안타깝게 여기면서 인용한 고사이다.심신이 모두 지치고 말았다는 것(馘已
黃,而項已枯矣)은『庄子』의 <列禦寇> ‘槁項黃馘’에서 유래한 고사이다.사람
의 목이 말라빠지고 얼굴이 누렇게 되고 건강하지 않은 모습을 형용한다.양
대의 비(陽臺之雨)는『文選』에 실린 초나라 宋玉의 <高唐賦>의 ‘巫山之夢’또
는 ‘巫山之雨’에서 유래한 것이다.남녀간의 密會나 情交를 이르는 말이다.중
국 초나라의 襄王의 선왕이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무산의 神女를 만나 즐
거움을 누렸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陽臺’는 四川省의 巫山縣 부근의 산 이
름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남녀가 密會하는 곳이라 한다.서왕모의 서신(王母
之書)은 서왕모가 동방삭에게 보낸 편지로 반가운 글이라는 뜻이다.서왕모는
먼저『山海經』에서 나타난다.중국 崑崙山에 사는 사람 얼굴에 호랑이의 이
빨,표범의 털을 가진 신선이라고 한다.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불사의 약을 가
진 선녀라고 전해진다.漢代에 서왕모의 이야기가 민간에 널리 퍼졌다.진진
의 우호를 맺는 것(成秦晋之好)은 춘추전국시대 秦과 晋나라 사이에 대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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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혼인을 맺던 세의가 있었음을 이르는데,전하여 남녀가 결혼하는 것을 말
한다.월하노인의 인연을 이루는 것(結月老之繩)은 중국 당나라의 韋高가 달
밤에 어떤 노인을 만나 장래의 아내에 대한 예언을 들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전설에서 월하노인이 가지고 있는 주머니의 붉은 끈으로 남녀의 인연을 맺어
준다고 한다.여기서 최척이 옥영과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결연을 이루고 싶
다는 뜻이다.이 두 고사는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하는 것을 말한다.동혈의
맹세(同穴之盟)는『詩經』의 <王风·大车>의 ‘谷則異室,死則同穴’에서 유래한
고사이다.부부가 죽어서 같은 무덤에 묻힌다는 맹세로,흔히 부부의 금슬이
좋음을 비유한다.여기서는 최척은 옥영에게 ‘부부가 되자는 맹세’라는 뜻이
다.
저는 서울 도성에서 생장하였기 때문에 여인의 정정한 행실에 대하
여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그런데 불행하게도 일찍 부친을 잃었고 자
라서는 난리까지 만났습니다.혼자서 홀어머니를 섬기며 형제도 없이
살면서 남방으로 이리저리 떠돌다 친척에게 의탁하였던 것입니다.나
이 이십이 다 되도록 지아비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이제 하루아침에
전쟁이 터져 도적들이 횡행하고 있습니다.옥 같은 몸을 지키기가 쉽
지 않을 것이며,강포한 자들의 추행을 면하기 어려울까 항상 두렵습
니다.그 때문에 늙은 어머니도 상심하여 저의 신세를 염려하고 계십
니다.그러나 걱정스러운 바는 오히려 넝쿨풀이 의탁할 만한 곳은 반
드시 큰 나무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인생 백 년의 고락이 실로 남
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만일 그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평생을 바라보며 살 수 있겠습니까?그런데 근래 낭군을 뵈오니 말하
는 소리가 종용하고 몸을 놀리는 모습은 한아하였습니다.그리고 성실
하고 믿음직한 기색이 환하게 얼굴에 드러나 있었습니다.훌륭한 지아
비를 구하려 한다면 그대를 버려 두고 다시 누구를 얻을 수 있겠습니
까?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그대의 첩이 되는 편이 나
을 것입니다.하지만 저는 운명이 기구하니 낭군에게 합당하지나 않을
까 하여 두렵습니다.어제 시를 보냈던 것은 음란한 생각을 가지고 했
던 것이 아니었습니다.다만 낭군의 태도를 헤아려 보고자 하였을 뿐
이었습니다.제가 비록 보잘것없으나 애초 저자 거리의 여자는 아니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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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어떻게 남몰래 담을 넘어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반드시 부모님
께 알리고 혼인의 예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그렇게만 된다면 정절
과 믿음을 스스로 지킬 것입니다.감히 남편 반드는 일을 게을리 할
수가 있겠습니까?시를 던져 먼저 욕되게 하였고 스스로 중매하는 더
러운 행실을 다시 저질렀습니다.이제 다시 사사로운 편지를 주고받고
자 한다면 더욱 유한한 정조를 잃게 될 것입니다.이제는 서로의 마음
을 잘 알았으니 부질없이 편지를 전할 필요가 없겠지요.오늘부터는
반드시 매파를 통하여 연락하여야 할 것입니다.제가 거듭 행로의 놀
림을 받지 않게 해주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137)
위의 인용문은 옥영은 최척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의 내용이다.서울 도성
(輦殻之下)은 예로부터 전하는 成語인데 ‘천자가 타는 수레 아래’라는 뜻으로
전하여 ‘京城’을 가리키는 말이다.넝쿨풀이 의탁할 만한 곳은 반드시 큰 나무
이어야 한다는 것(絲蘿所托 必在喬木)은 중국 당나라 杜光庭의『虬髥客傳』의
‘絲蘿非獨生,願托喬木,故來奔爾.’에서 유래한 고사이다.菟絲와 女蘿가 큰 나
무에 의탁한다는 뜻으로 여자가 훌륭한 남자에게 의지하여 그 처첩을 됨을
이른다.남편 반드는 일(案擧之敬)은『後漢書』의 <梁鴻傳>에서 나온 梁鴻의
아내인 孟光의 ‘擧案齊眉’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부부의 도리를 다해 남편을
지극히 공경한다는 뜻이다.서로의 마음을 잘 알았다는 것(肝膽相照)은 송나
라 趙令畸의『侯鯖彔』의 ‘同心相親,照心照膽壽千春.’에서 유래한 것이다.서로
마음을 터놓고 친밀히 사귄다는 뜻이다.
어머니께서 저를 위해 사위를 고르면서 반드시 부자를 구하고자 하
십니다.그 실정이 참으로 애처롭습니다.다만 생각하건대 집안이 부유
하면서 사위가 어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그러나 혹
137)妾生長輦殻之下 粗識貞靜之行 而不幸 早失嚴父 生丁亂難 獨奉偏慈 終鮮兄弟漂淪南土僑寄宗
黨 年垂及筓 尙恐一朝兵戎搶攘 盜賊橫行 則難保珠玉之沈碎 不無强暴之所污 以此老母傷心 以
我爲念 然而猶所患者 絲蘿所托 必在喬木 百年苦樂 實有他人 苟非其人 豈可仰望而終身 近觀
郎君 辭氣雍容 擧止閑雅 誠信之色 藹然於面目 若求賢夫 拾子伊 誰與爲人妻 寧爲老子之妾 而
薄命崎嶇 恐不得當也昨者投書 非爲其誨淫之意也 只欲試郎 君之俯仰也 妾雖無狀 初非依市之
徒 寧有鑽穴之逃心 必告父母 終成委禽之禮 則貞信自守 敢懈擧案之敬 投詩先讀 已犯自媒之醜
行 欲往復私書 尤失幽閑貞操 今旣肝膽相照 不須書札浪傳 自此以後 必以媒妁相通 以母令妾
重貽行路之譏 千萬幸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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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집은 부유하더라도 사위가 그다지 어질지 못하다면 그 가업을 보존
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어질지 못한 사람을 남편으로 삼는다면
비록 곡식이 있다 하더라도 얻어먹으며 살수가 있겠습니까?가만히 보
니 최생은 날마다 아저씨에게 와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충후하고
믿을 직하니 결코 경박한 탕자는 아닐 것입니다.이 사람을 배필로 삼
는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하물며 가난은 선비의 떳떳
한 도리가 아닙니까?불의를 행하며 부자가 되는 것을 저는 조금도 원
치 않습니다.청컨대 그에게 시집을 보내 주십시오.이런 말은 처녀가
스스로 할 말이 아닌 줄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이는 매우 중대한 일
입니다.처녀라 하여 부끄러워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말을
하지 않다가 마침내 어리석은 사람에게 시집가 일생을 망쳤다고 생각
해 보십시오.깨진 항아리가 다시 온전하게 될 수 없고,한 번 물이 든
실이 다시 희게 될 수 없는 것과도 같을 것입니다.울어도 소용이 없
고 후회해도 이미 늦을 것입니다.하물며 지금 저의 신세는 다른 사람
들과 경우가 다릅니다.집안에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데 적병은 이웃
마을에 있습니다.이런 마당에 충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면 어떻게 우리 모녀를 보살펴 줄 수 있겠습니까?차라리 안 씨가 시
집가기를 자원했던 고사를 따르겠습니다.서매가 스스로 남편을 택했
던 고사를 피하지 않으려 합니다.어찌 깊은 방에 숨어 지내며 다만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나 바라보면서 서로 잊는 지경에 빠질 수 있겠습
니까?138)
위의 인용문은 옥영이 어머니에게 최척을 남편으로 섬기고 싶다고 고백한
내용이다.울어도 소용이 없고 후회해도 이미 늦은 것(啜泣何及 噬臍莫追)은
춘추전국시대『左傳』<庄公六年>의 ‘若不早圖,後君噬齊(臍),其及圖之乎?’에
서 유래한 말이다.배꼽을 물어뜯으려 하여도 입이 닿지 않는다는 뜻으로,후
회하여도 이미 소용이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또한 ‘噬臍何及’로 쓴다.차라리
138)母親爲我擇婿 心欲求富 其情則戚矣 第惟家富而婿賢 則何幸 而如或家雖足食 婿甚不賢 則難保其
家業 人之無良 我以爲夫 而雖有粟 其得而食諸 竊覸崔生 日日來學於阿叔 忠厚誠信 決非輕薄宕
子也得此爲配 死無恨矣 況貧者士之常 不義而富 吾甚不願 請決嫁之 此非處子所當自言之事 而機
關甚重 豈嫌於處子 羞澁之態 潛黙不言 而竟致嫁得庸爲壤了一生 則已破之甕 難以再完 旣染不絲
不可復素 啜泣何及 噬臍莫追 況今兒身 異於他人 家無嚴父 賊在隣境 苟非忠信之人 何以仗母子
之身乎 寧從顔氏之請嫁 不避徐妹之自擇 豈可隱匿深房 但望人口 而置於相忘之地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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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씨가 시집가기를 자원했던 고사를 따르고 서매가 스스로 남편을 택했던
고사를 피하지 않으려 하는 것(寧從顔氏之請嫁,不避徐妹之自擇)은 차라리 안
씨가 결혼을 요청하고 서매가 스스로 낭군을 선택한 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뜻이다.‘顔氏’는 어떤 고사에서 유래한 것인지 알 수 없고,‘徐妹’는『左傳』
<昭公元年,二年>의 鄭나라 대부 徐吾犯의 여동생 서매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최랑이 오지 못한 것은 그 몸이 의병장에게 매인 때문이요,까닭도
없이 약속을 저버린 것이 아닌데,그 말을 기다리지도 아니하고 스스
로 파혼하는 불의를 누가 옳다고 하겠습니까?만약 저의 뜻을 꺾고자
한다면 저는 당장 죽어버리겠어요.하늘같은 어머니께서도 몰라주시는
데 남들이 어떻게 제 마음을 헤아리겠습니까?139)
위의 인용문은 최척 의병참여 가고 혼인 날짜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옥영
의 어머니 심씨는 양생과 옥영의 혼인을 허락할 때 옥영이 어머니에게 한 말
이다.하늘같은 어머니께서도 몰라주시는데 남들이 어떻게 제 마음을 헤아리
는 것(母也天只不諒人只)은『詩經』의 <鄘風․栢舟>에서 나온 것이다.‘어머님
을 제게 하늘이신데 절 못 믿으시나요?’의 뜻이다.자신의 의지대로 시집가고
자 하는 여인이 부모에게 하소연하는 내용이다.
이웃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모두 양홍의 처나 포선의 아내도
이보다는 낫지 않을 것이라고 칭찬하였다.140)
위의 내용은 옥영은 최척에게 시집간 후에 효도와 정성을 다 하고 받은 칭
찬이다. 양홍의 처(梁鴻之妻)는『後漢書』의 <梁鴻傳>에서 유래한 고사이다.
양홍의 처는 후한 사람 孟光을 가리킨다.맹광은 아름답지 않지만 매우 어진
인물로 남편인 양홍의 뜻을 따라 검소한 차림으로 패능산으로 들어가 농사와
길쌈을 생업으로 삼고 남편을 지성으로 섬기며 물욕을 버리고 살았던 훌륭한
139)崔從義陳 行止係於主將 非無故負約而已 不俟其言 而徑自破約 不義孰正 若奪兒志之 死而靡他
母也天只不諒人只.
140)遠近聞之 皆以爲梁鴻之妻 鮑宣之婦 殆不能過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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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다.포선의 아내(鮑宣之婦)는『後漢書』의 <鮑宣傳>에서 유래한 고사이
다.포선은 젊어서 아내 桓小君의 부친에게 수학한다.학문을 좋아하고 경전
에 밝아 哀帝 때 諫大夫가 된다.포선이 환소군을 데리고 처음 시집으로 갈
때 환소군이 화려한 치장을 하고 포선을 뒤따르자,포선이 이를 싫어했다 한
다.이에 환소군은 짧은 치마로 갈아입고 포선과 함께 鹿車를 이끌고 시집으
로 간다.시집에서는 매우 어질고 손수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물을 긷는다.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한다.
왕자진이 피리를 부니 달도 내려와 들으려 하는데
푸른 하늘 바다와 같고 이슬도 가득하네
모름지기 우리 함께 푸른 난새를 타고 가리니
안개 낀 봉래산 길 쉽게 찾아가리.141)
위의 인용문은 옥영은 최척이 분 피리를 듣고 읊은 시구이다.왕자진(王子)
은 周나라 靈王의 태자 王子晉을 가리킨다.왕에게 직간한 죄로 서인이 된다.
왕자진이 피리를 불고 鳳凰 소리 내는 것을 좋아하였는데,伊洛 사이에서 노
닐다가 도사 浮丘生을 만나 신선이 되어 학을 타고 다녔다 한다.봉래산(蓬
島)은 蓬萊山의 다른 이름이다.
요대 아득하고 새벽 구름 붉은데
피리 소리 아직도 그치지 않았네.
여음은 공산에 가득하고 달도 지려 하는데
뜰의 꽃 그림자 바람에 흔들리네.142)
위의 인용문은 최척은 옥영이 읊은 시에 대해서 화답하여 읊은 시구이다.
요대(瑤臺)는 중국에서 신선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로부터 부부의 애정이 더욱 돈독하였다.서로 지음이라 생각하며
141)王子吹簫月欲低 碧天如海露凄凄 會須共御靑鸞去 蓬島烟霞路不迷.
142)瑤臺繞渺曉雲紅 吹澈鸞簫曲未終 餘響滿空山月落 一庭花影動香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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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하루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143)
지음(知音)은『列子』의「湯問篇」에서 伯牙는 거문고를 잘 타는데 그의 벗
種子期가 伯牙의 거문고 소리만 듣고도 伯牙의 마음을 잘 알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자기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한 벗을 가리킨다.
저 시는 곧 내 아내가 손수 지었던 것입니다.평소에 다른 사람들이
듣거나 알 수가 없는 시이지요.144)
아내(荊布)는『太平御覽』卷七百十八引 <烈女傳>의 ‘梁鴻妻孟光,荊釵布裙’
에서 유래한 고사이다.梁鴻의 아내 맹광이 늘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삼베
치마를 입었던 것을 가리킨다.자신의 아내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남쪽 越나라에서 온 새는 집을 지을 때 나무의 남쪽 가지에서 짓고,
북쪽에서 온 말은 북풍을 맞으면서 달린다.나는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그래서 더욱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견딜 수가 없구나.145)
남쪽 월나라에서 온 새는 집을 지을 때 나무의 남쪽 가지에서 짓고,북쪽에
서 온 말은 북풍을 맞으면서 달리는 것(越禽巢南,胡馬倚北)은『古詩十九首』
의 <行行重行行>의 ‘胡馬依北風,越鳥巢南枝’에서 유래한 것이다.남쪽 越나
라에서 온 새는 집을 지을 때 나무의 남쪽 가지에서 짓고,북쪽에서 온 말은
북풍을 맞으면서 달린다는 뜻으로 고향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한다는 말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首丘之戀)은 戰國 楚나라 屈原이 지은『九章』의 <涉江>
의 ‘鳥飛反故鄕兮,狐死必首丘.’에서 유래한 것이다.새는 얼마 멀리 가도 나중
에 꼭 자신의 집에 돌아가고,여우는 죽을 때 머리는 꼭 집 있는 방향으로
향하여 죽는다는 뜻으로 역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말이다.
이처럼작가는『詩經』,『史記』,『晉書』,『庄子』,『文選』,『山海經』,『虬髥客傳』,
『後漢書』,『侯鯖彔』,『左傳』,『列子』,『太平御覽』,『古詩十九首』,『九章』등을
143)自此情愛尤篤 夫婦自謂知音 未嘗一日相離也.
144)此詩 乃吾家荊布 所自製也 平生絶無 他人之聞知者.
145)況越鳥巢南 胡馬倚北 且今死日將迫 尤不堪首丘之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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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롯하여 수많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이야기를 전개하였다.중국문학을
통하여 주인공 최척과 옥영의 인물됨과 삶의 태도가 확실히 드러난다.작가
가 중국의 문학에 해박했으며 친연성을 갖고 이 작품에 접근하고 있음을 보
여준다.
2)일본을 보는 이중적 시각
16세기 말엽은 조선역사에서 임진왜란이 온 국토를 휩쓸고 지나간 시기이
다.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일본은 假道入明을 내세우며 조선의 국토를 유린
하였다.조선의 온 국토가 피폐해지고,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수많은 백성
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혀갔다.많은 여인들은 굴욕을 당하였고 농
민들은 기근에 시달리다가 유랑민이 되기도 하였다.그 당시 일반 백성들에
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마 포로가 되는 것과 가족의 이산일 것이다.임진
왜란의 7년 전쟁기간 동안 10만 명 안팎의 사람이 포로로 끌려갔다.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낯선 땅에서 굴욕적이고 비인간적인 생활을 했으며
때로는 서양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다.그래서 임지왜란 때문에
조선 백성들은 일본에 적대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최척전>에서도 조선
백성들이 일본에 당한 고통과 참혹한 현장이 잘 나타난다.그러면서도 주인
공 옥영을 친자식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평범한 일본인 돈우의 모습도 그렸
다.작가의 일본에 대한 이중적 시각,즉 부정적이면서 긍정적인 시각을 잘
나타낸다.
작품 전반부는 정유재란 때 왜병들이 남월을 침범하여 백성들을 죽이고 약
탈하는 것을 통해 일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나타낸다.
① 정유년 팔월 적병이 남원성이 함락하자 사람들은 모두 도망가 숨
었다.최척의 일가도 역시 지리산 연곡으로 몸을 피했다.최척은 옥영
에게 남장을 착용하게 하였다.그러자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그녀를 여자로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산으로 피한 지 여러
날이 자나자 양식이 떨어져 장차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렀다.최척은
몇몇 장정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양식을 구하고 적세도 탐지하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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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일행이 구례로 갔다가 문득 적병과 조우하자 최척은 바위와 수
풀에 몸을 숨겨 화를 피했다.그러나 그날 적병이 연곡으로 들어가 온
산야를 휘저으며 살상하고 약탈하여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았다.하지
만 최척의 일행은 길이 막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사흘이 지나 적병이
물러간 후 최척은 다시 연곡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연곡에서 볼 수 있
는 것은 시체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유혈이 낭자하여 시내를 이룬 모습
뿐이었다.마침 숲 속에서 은은하게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최척이
그 곳으로 찾아가니 온 몸에 상해를 당한 노약자 몇 사람이 있었다.
노인들은 최척을 보자 통곡하며 말했다.
“적병이 산에 들어와서 3일 동안 재물을 약탈하고 인민들을 베어 죽
였으며,아이들과 여자들은 모두 끌고 어제 겨우 섬진강으로 물러갔네.
가족들을 찾고 싶으면 물가에 가서 물어 보게나.”146)
인용문①은 사람을 죽이고 약탈한 잔인한 왜병을 그렸다.정유재란으로 인
해 남원에서 살던 최척은 가족과 남원지방 백성들이 지리산 연곡으로 피난을
갔다가 양식을 구하러 나와 있는 동안 왜적들이 지리산을 3일 동안 습격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죽이고 포로로 잡아갔다.3일 동안 잔인한 왜병들
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기에,시체가 가득하고 피가 흘러 내를 이루었
다고 했을까?
작품 중간 부분은 옥영이 일본에서 주인으로 삼던 돈우란 늙은 왜병을 통
해서 평범한 일본 백성의 일상적 삶과 인간적인 면모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돈우는 참으로 특별한 인물이다.돈우는 옥영을 포로로 잡아 일본으로
데려간 인물이다.그런데 작품에서 돈우를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긍정적인 인물로 설정하였다.
② 이때 옥영은 왜병인 돈우(頓于)에게 붙들렸는데,돈우는 인자한
사람으로 살생을 좋아하지 않았다.그는 본래 부처님을 섬기면서 장사
146)至丁酉八月 賊陷南原 人皆逃竄 陟之一家 避于智異山燕谷 陟令玉英着男服 雜錯於廣原之中 人之
見之者 皆不知其爲女子也 入山累日 糧盡將饑 陟與丁壯 數三出山 求食且覘賊勢 行到求禮 猝遇
賊兵 潛身於岩藪而石避之 是日 賊入燕谷 則但見積屍 遍橫流血成川 林叢間 隱隱有號咷之聲 陟
就訪之 老弱數輩 瘡痍遍身 見陟而哭曰
“賊兵入山,三日 奪掠財貨 芟刈人民 盡驅女子 昨已退屯蟾江 欲求一家 門諸水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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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업으로 삼고 있었으나,배를 잘 저었기 때문에 왜장(倭將)인 평행장
(平行長)이 뱃사공의 우두머리로 삼아 데려왔던 것이다.돈우는 옥영의
영특한 면모를 사랑하였다.옥영이 붙들린 채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
고 좋은 옷을 입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이면서 옥영의 마음을 달래었
다.옥영은 물에 빠져 죽으려고 두세 번 바다에 뛰어 들었으나,사람들
이 번번이 구출해서 결국 죽지 못하고 말았다.147)
③ 돈우의 집은 낭고사(浪沽射)에 있었는데,집에는 늙은 아내와 어
린 딸만 있고 다른 사내는 없었다.돈우는 옥영을 집안에서만 생활하
고 다른 곳에는 일체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이에 옥영은 돈우에게 거
짓말로 일렀다.
“저는 단지 어린 사내로 약질에다가 병이 많습니다.예전에 본국에
있을 때에도 남자들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어 오로지 바느질과 밥 짓
는 일만을 했습니다.”
돈우는 더욱 불쌍하게 생각하여 옥영에게 사우(沙于)라는 이름을 지
어 주었다.그는 배를 타고 장사를 다닐 때마다 옥영을 데리고 가서
부엌일을 맡겼다.그래서 옥영은 배 안에 있으면서 민절의 사이를 왕
래하였다.148)
④ “내가 이 사람을 얻은 지 이제 4년 되었는데,그의 단정하고 고
운 마음씨를 사랑하여 친자식처럼 생각해 왔습니다.그래서 침식을 함
께 하는 등 잠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으나,지금까지 그가 아낙네인 것
을 몰랐습니다.오늘 이런 일을 직접 겪고 보니,이는 천지신명도 오히
려 감동할 일입니다.내가 비록 어리석고 무디기는 하지만 진실로 목
석은 아닙니다.그런데 차마 어떻게 그를 팔아먹고 살 수 있겠습니
까?”
돈우는 즉시 주머니 속에서 은자 10냥을 꺼내어 전별금으로 주면서
말했다.
147)時玉英 則見執於倭奴頓于 頓于老倭 本不殺生 慈悲念佛 以商販爲業 習御舟楫 倭將行長 以爲舡
主而來 頓于愛玉英機警 惟恐見逋 給以華衣美食 慰安其心 玉英欲投水溺死 再三出舡 輒爲所覺.
148)頓于家在浪故射 妻老女幼 無他子男,使玉英居家 不得出入 玉英謬曰
“我本貌小男子 弱骨多病 在本國 不能服役 丁壯之事 只以裁縫 炊飯爲業 餘事固不能也”
頓于尤憐 名之曰沙干 每乘舟行販 以火長置舟中 往來於閩浙之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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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을 함께 살다가 하루아침에 이별하게 되니,슬픈 마음에 가슴이
저리기만 하오.온갖 고생 끝에 살아남아 다시 배우자를 만나게 된 것
은 실로 기이한 일이며,이 세상에는 없었던 일일 것이오.내가 그대를
막는다면 하늘이 반드시 나를 미워할 것이오.사우여!잘 가시게!진중
하시게!”149)
인용문②은 뱃일을 하며 장사를 하던 돈우가 정유재란에 참전하게 되고,
부처를 섬기며 옥영을 돌봐주는 인자하고 다정한 늙은 일본인으로 형상화하
였다.연곡에서 최척과 헤어진 옥영을 왜병인 돈우는 일본으로 가는 길에 배
려하고 아껴 주었다.좋은 옷도 입히고 맛있는 음식도 먹이면서 옥영을 위로
하였다.
인용문③은 돈우가 옥영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고 옥영의 처지를 불쌍하
게 여기고 부엌일만 맡기고 장사를 같이 다니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인용문④는 돈우의 인정 있고 선량한 모습을 그렸다.옥영과 최척이 안남
의 포구에서 기적적으로 만났다.주우가 돈우를 만나 옥영의 몸값을 지불하
고 데려가려 할 때 돈우는 마다하고 이들의 만남을 자신의 일처럼 반기며 오
히려 옥영에게 전별금을 주고 그들의 앞날을 축복하여 보냈다.돈우는 옥영
을 친자식같이 생각하니까 재물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옥영은 이렇게 동정
심이 있는 돈우를 만나서 불행이 극복될 수 있었다.만약에 옥영이 다른 왜
병에게 잡혔다면 옥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알 수 없고,또한,안남에서 최
척을 만났더라도 과연 옥영을 보내줄지 알 수 없는 것이다.돈우는 최척의
가족 재회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은 이 작품의 한 배경이다.이 전쟁 때문에 작품 중의 주인공들뿐
만 아니라 작가 조위한도 가족과의 생사이별의 비극을 당한 당사자이다.이
로 인해 조선 백성들은 일본에 대해서 적개심이 강하다.일본에 대해서 당연
히 부정적인 태도를 가질 것이다.그런데 작가는 보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
149)“我得此人 四年于玆 愛其端懿 視同己出 寢食未嘗小離 而終不知其婦人也 今而目覩此事 天地鬼
神 猶此感動 我雖頑蠢 異於木石 何忍貨此 而爲食乎”
探於囊中 出十兩銀 贐之曰
“四年同載 一朝而別 悵惘之懷 雖切於中 而重逢配耦 於萬死之餘 此人世所無之事 予若隘之 天必
劇之 好去沙干 珍重珍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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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포로로 잡힌 옥영을 배려하고 친자식같이 대했던 늙은 왜병 돈우를 인자
하고 선량한 인물로 형상화하였다.이것으로 보아 작가 조위한이 민족적․정
치적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인간 본연의 자세에 초점을 맞추고 사람의 온
화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데 주력하였다고 할 있다.
한편,이런 묘사는 작가 조위한의 궁극적 소망이라고 할 수 있다.당시 조
선과 조선백성들은 일본에 엄청난 고난과 슬픔을 당하였기 때문에 모든 왜병
들이 돈우처럼 인정 있고 선량한 사람이었으면 하는 소망이고,조선과 일본
의 관계는 돈우가 옥영을 배려하는 것처럼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3)안남으로 향한 공간의 확대
작품에서 주인공들의 고난과 극적인 해후의 한 장소는 安南이라고 되어 있
다.작품의 배경은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와 가까이 있는 나라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안남까지 무대로 설정되었다.역사적으로 조선과 안남은
公式的으로는 사람이나 書信이 왕래한 적이 없다.150)단지 중국을 통한 간접
적 교류가 있었다.하지만 최척과 옥영이 각각 중국과 일본의 상선을 타고
안남으로 오게 된 것이다.
역사에 조선 사신과 안남 사신이 중국 燕京을 무대로 해서 주고받은 몇 편
의 시가 있고,시화와 시집서가 있었다고 한다.芝峰 李晬光은 1597년에 進慰
使로 중국 연경에 가게 되었다.그 때 같은 숙소인 玉河館에 머물었던 안남
사신 馮克寬과 한시로 교류한 적이 있다.馮克寬의 시집인『聖節萬壽慶賀詩
集』에 서문을 써 주기도 하고,『安南國使臣唱和問答錄』이란 제명으로 책을
편찬하기도 했다.李晬光이 馮克寬에게 준 시가 9수이고 馮克寬이 李晬光에
게 준 시가 9수였다.<贈安南國 使臣>二首,<重贈安南使臣 疊前韻>二首,
<又贈安南使臣 疊前韻>二首,<贈安南使臣 又疊前韻>二首,<贈安南使臣 排律
十韻>은 李晬光이 馮克寬에게 준 것이고,<肅次 芝峰使公韻>二首,<肅和兩
次 海東芝峰使公前韻>二首,<喜得海東使公 詩序謹再次韻 以表同使 大筆手澤
150)최신호,「한국과 안남․유구와의 문학교류 시고」,『한국한문학연구』,제5집,한국한문학회,
1980,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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者>二首,<再次韻敬答 海東芝峰大手筆>二首,<肅次芝峰使公 長律十韻>은 馮
克寬이 李晬光에게 준 것이다.이 계기로 李晬光의 한시 작품은 당시 안남의
문인 학자들 사이에 높은 평가를 받았고 널리 애송되었다.정유재란 때 포로
로 일본으로 붙잡혀 갔던 趙完壁이 일본 상선을 타고 안남까지 갔는데 그를
보고 李晬光이 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환대하고 그의 시문을 물어봤다고 한
다.이 사실은 鄭士信의 문집『梅窓先生集』에 있는 <趙完壁傳>에 나타나 있
고,일본학자 岩生成一이 安鼎福 自筆稿本151)이라 해서 <趙完壁傳>을 소개한
것이 있고,李晬光의 문집『芝峰集』에도 <趙完壁傳>을 거론하였다.趙完壁은
안남에서 기후풍토,풍속,언어 문자,특산물 등을 구체적으로 접촉하였다.귀
국한 후에 趙完壁은 그 동안의 자신의 특이한 안남 체험을 조선 학자들에게
전하여 당시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었다.특히 이 시기 일본과 안남이 활발하
게 무역했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말해주는 기록인데 <최척전>에서 묘사된 내
용과 흡사해 보인다.그래서 <최척전>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 멀리 안남
까지 갔다가 중국을 거쳐 귀국한 얘기를 담은 <趙完壁傳>과 유사하다고 하
는 학설도 있다.152)
또한,조위한이 1621년 <최척전>을 쓰기 훨씬 이전에 李晬光은 중국여행
(제3차 중국 여행은 1611년)의 체험을 정리하여『芝峰類說』(1614년)속에 담
았다.이 속에는 당시로는 충격적인 서양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내용이 소상하게 적혀 있다.153)이 책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아주 큰 영
향을 끼쳤다.조위한은 이수광과 같은 시기에 활동한 인물로서 물론 이수광
에게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최척전>의 배경이 멀리 동남아시아에 있는 안남까지 확대돼 있는 것으로
보아 작가 조위한의 세계인식은 더욱 확대되고 구체화됨을 알 수 있다.또한,
조선백성들이 안남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세계관도 점점 넓어졌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경자년 봄에 최척과 주우는 상선을 타고 안남의 사이를 왕래하였다.
151)安南國渡航朝鮮人趙完壁傳について.『朝鮮學報』第六輯.
152)장효현,「<최척전>의 창작 기반」,『고전과 해석』창간호,고전문학연구학회,2006,참조.
153)강동엽,『조선시대 동아시아 문화와 문학』,북스힐,제2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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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일본인 상선 10여 척도 강 어구에 정박하여 10여 일을 함께 머물
게 되었다.
날짜는 어느덧 4월 보름이 되어 있었다.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물은 비단결처럼 빛났으며,바람이 달이 강에 비추고 옅은 안개가 물
위에 어리었으며,뱃사람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지고 물새만이 간간이
울고 있었다.154)
위의 인용문은 <최척전>에서 안남에 대한 내용이다.최척은 중국 상선을
타고 옥영은 일본의 상선을 타고 각각 안남에 이른다.당시 안남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활발한 무역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안남에 대한 분위기
는 아주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느낌을 준다.그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 때문에
국토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아주 고통스럽고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평화
롭고 상업이 발달한 안남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당시 그런 국제 정세에
안남은 작가 조위한 뿐만 아니라 모든 조선 백성들에게 이상적인 곳이라고
인식되었다.최척과 옥영은 이런 평화로운 데서 아름다운 만남을 이룬다.안
남은 조위한의 이상적인 공간이고 그런 평화로운 환경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
이라고 할 수 있다.또한,농업을 중심으로 삼던 조선은 상업 중심의 사회를
지향해야 하며 국가의 경제적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
이다.
3.한국적 정서에 대한 작가의식
앞에서 언급했듯 <최척전>은 무엇보다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적 소설이라
는 측면에서 가장 한국적인 소설로서의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고 한 바 있
다.그 연장선상에서 <최척전>에서 찾을 수 있는 한국적 정서를 보다 구체적
으로 파악해 보려고 한다.특히 작품 전반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정서를 중
심으로 추출하여 한국인의 의식을 파악해 보고자 하는 것이 주된 의도이다.
<최척전>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주요 정서는 다음과 4가지로 압축이 된
154)歲庚子春 陟隨佑與同里 商舡往來於安南 時有 日本舡十餘艘 亦泊於浦口 留十餘日 因値四月 旁
死魄 天無寸雲 水光如練 風息波恬 聲沈影絶 舟人牢睡,諸禽時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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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1)가족애의 고취
<최척전>을 끌어가는 중심 서사 축은 전란으로 뿔뿔이 흩어진 한 가족들
이 다시 재회하기 위해 거치는 험난한 여정과 극복의 모습이다.이를 다시
표현하면 ‘가족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함께 동고동락하는 공동 운명체’
라는 말이다.그리고 이 공동 운명체를 지탱하는 근간은 바로 가족 간의 사
랑이다.그러한 점에서 <최척전>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의식은 바
로 가족 간의 사랑이다.<최척전>을 애정 소설로 간주하는 것도 이와 동일한
관점이다.
<최척전>에서 가족 간의 지극한 사랑은 특히 최척과 옥영의 부부애를 통
해 극대화된다.옥영과 최척 두 사람의 결연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가난하
다는 이유로 옥영의 어머니는 최척과의 결혼을 반대하고,옥영의 설득 후 이
뤄진 결연 역시 매 순간 위기를 맞고 세 차례의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옥영과 최척이 처음 만나 결혼하고 전란으로 헤어진 후 서로의 생사를 알
지 못해 절망과 실의에 빠져 살아가지만 남편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 하
나로 죽음도 불사한 채 망망대해를 건넌다.두 주인공의 결연 후 그들 인생
의 30여 년 간은 줄곧 헤어진 두 사람이 오직 서로를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
끝까지 찾아가는 집념으로 통일돼 있고,결국 만남이라는 희망적 메시지를
이끌어낸다.
두 주인공 이외에 최척의 아버지 최숙과 옥영의 어머니 심씨 부인에게서도
가족애를 발견할 수 있다.우선 최척과 옥영이 정상사의 집에서 결연을 이룬
후 최척은 아내와 함께 장모 심씨도 자기의 집으로 모시고 온다.이를 보아
사돈과 함께 사는 한 가족 문화임을 읽어낼 수 있다.뒷날 임란이 터지고 남
원성이 함락되어 모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도 최숙과 심씨는 살아남아
손자인 몽석을 키우며 오랜 세월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게 된다.이 또한 가
족애의 또 다른 표현이다.
최척의 둘째 아들 몽선의 부인이 되는 홍도에게서도 가족사랑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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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는 중국인으로 나온다.즉 국제결혼이 작품을 통해 제시된 것이다.당시
의 정황으로 보나 인식으로 보나 국제결혼을 언급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
을 것이다.그럼에도 <최척전>에서는 국제결혼을 정식으로 언급하고,조선인
인 몽선의 아내가 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홍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파격적인 설정을 긍정적으로 녹여내는 힘은 바로 가족애에
있었다.즉 홍도가 몽선과 결혼하기 위한 1차적인 이유는 홍도의 아버지인
진위경 때문이었다.진위경은 정유재란의 구원병으로 조선에 출전한 후 생사
를 알 수 없었고,이에 홍도는 아버지의 유골이라도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집념으로 조선에 가고자 했다.이때 조선인 몽선의 구혼 소식을 듣게 되고,
몽선의 아내가 되기를 적극적으로 자원하게 된다.이는 자신의 결혼 조건으
로 상대를 향한 애정보다 효심에 우선을 둔 것으로 이 또한 가장에 대한 애
정과 가족애가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2)생활 철학으로서의 불교의식
<최척전>에서 불교적 색채는 서사 전개의 중요한 순간마다 분명히 나타낸
다.<최척전>을 ‘불교계 소설’로 분류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찾을 수 있
다.먼저 자식이 없는 최척 부부가 아이 점지를 위해 치성을 드리는 모습을
들어보기로 한다.
최척과 옥영은 결혼 후 아이가 없자 매월 날짜를 정하여 만복사를 찾아가
치성을 드린다.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염원을 신앙에 근거하여 이루고자 하
는 부분이다.조선시대가 유교 중심의 사회이면서 불교를 배격했던 사회적
분위기에 비춰 보면 매우 모순된 장면이다.그러나 불교는 단순한 종교라기
보다 생활 철학이자 신앙으로서 한국인의 가슴에 각인된 대표적인 민족적인
종교로서의 위치를 갖추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그리고 이
러한 기자정성에 의해 <최척전>은 장육금불이라는 부처를 전면에 내세우며
신이하고 영험한 신통력을 발휘하며 염원의 숙제를 풀어 주기도 하고 계시하
기도 한다.장육금불은 <최척전>의 진행 과정에서 위기의 순간마다 나타나
신이함을 발휘하기도 한다.다음의 장면을 통해 이러한 점을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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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장육금불이 옥영에게 현몽하여 말씀하였다.“나는 만복
사의 부처로다.삼가하여 죽지 말아라,후일에 반드시 기쁜 일이 있
다.”옥영이 깨어나 그 꿈을 점쳤다.만에 하나같은 희망이라도 없어서
힘껏 먹고 죽지 않고자 했다.155)
꿈에 장육불이 나타나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말씀하였다.“삼가서
죽지 말아라,그러면 후일엔 반드시 기쁜 일이 있다.”잠에서 깨어난
옥영은 몽선에게 말했다.“내가 포로가 되던 날 물에 빠져 죽고자 했
을 때,남원 만복사의 장육금불이 꿈에 나타나 말씀하셨다.‘삼가서 죽
지 말아라,그러면 후일에 반드시 기쁜 일이 있으리로다.’그 후 4년
만에 네 아버지를 안남 바다 가운데서 만났다.이제 내가 죽고자 하는
데 또 꿈이 이와 같으니,네 아버님은 어찌 적의 칼날을 피하지 않았
겠느냐?네 아버지만 살아 있다면 나는 죽어도 살이 있는 것과 같다.
돌아 보건데 무슨 여한이 있겠느냐?”156)
옥영이 며느리에게 말했다.“내가 기운 빠지고 정신이 피곤해서 잠
시 조는 사이에서,장육불이 또 나타나 그때의 말을 일러주시니 아주
기이하구나.”세 사람은 함께 염불을 외면서 빌었다.“부처님이시여.부
처님이시여.저희들을 돌보아 주소서.저희들을 돌보아 주소서.”이틀
이 지났는데,홀연히 돛단배가 아득한 바다 가운데서 다가오고 있었
다.157)
155)一夕 丈六金佛夢玉英 以告曰
“我萬福寺佛也 慎無死 後必有喜”
玉英覺而診其夢 不能無萬一之冀 遂强食不死.
156)忽於一夕 夢見丈六佛 撫頂而言曰
“愼無死 後必有喜”
覺而語夢仙曰
“吾於被擄之日 投水欲死 而南原萬福寺之丈六金佛 夢與而言曰 愼勿死 後必有喜 後四年 得見爾
父於安南海中 今吾欲死 而又夢如是 汝父豈或免於鋒鏑歟 汝父若存 吾死猶生 顧何恨焉.”
157)玉英謂子婦曰
“我氣困身疲彷佛之間 丈六佛又現 其夢云云 極可異也”
三人相對 念佛而祝曰
“世尊世尊 其念我哉 其念我哉”
三日 忽望風帆 自杳茫中出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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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세 인용문 모두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옥영에게 자살을 포기하게 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장육금불의 계시담이다.첫째 인용문은 임진왜란으로 일
본에 끌려가게 된 옥영이 투신자살을 기도했을 때,장육불이 꿈에 나타나 옥
영에게 어려움을 이겨낼 용기를 가지게 하고,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던 끝에
결국 安南海에서 최척과 기적적인 상봉을 하게 된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도 마찬가지로 호족이 명나라를 침입했을 때 서기로 전
장에 나선 최척이 전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죽기를 작정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역시 장육불에 의한 계시로 최척과의 만남을 확신하게 되며 귀국의
의지를 갖고 결국 그들이 죽음을 무릅쓴 항해를 시행하게 한다.
셋째 인용문은 오직 남편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귀국하던 옥영 일행이
해적에게 배를 탈취당하고 무인도에서 식량 부족까지 겹쳐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대목이다.이때도 장육불이 현신하고,이에 옥영,몽선과 홍도 세 사람
이 염불하며 이틀 동안이나 빌게 되는데,마침 지나가던 조선 배가 있어 그
들을 구출하게 된다.
이와 같이 옥영이 위기를 닥칠 때마다 장육불이 꿈에서 나타나 용기를 북
돋워 주고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버팀목이자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다.
옥영이 최척에게 말했다.
“우리가 오늘 같은 날을 만난 것은 만복사 장육금불의 음조가 있었
기 때문입니다.그런데 근래 들으니 금불도 또한 모두 훼손되어 기도
를 드릴 곳이 없다고 합니다.하지만 하늘에 계신 신령만은 아마도 영
원히 불멸할 것입니다.우리가 어찌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크게 재물을 준비한 후 다 함께 황폐한 만복사를 찾아가 방을 깨
끗하게 치우고 재를 올렸다.158)
위 대목은 마지막에 옥영이 최척에게 이런 만남이 있게 된 것은 오로지 만
158)玉英謂陟曰
“吾等之有今日 寔賴丈六金佛之蔭騭 而今聞金像亦皆毁滅 無所憑禱 而神靈之在天 容有不泯者存
吾等豈不知所以報乎”
乃大供具 詣廢寺 潔齋修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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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 장육불의 음덕이라고 말하였다.이것으로 보아 장육불이 최척의 온 가
족 재회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작가 조위한은 후기에서
‘필시 황천후토가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이런 기특한 일을 이루었을 것이
다’라 하여,또한 ‘필부에게도 지성이 있으면 하늘마저 어기지 않는 법이다.
지성을 막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구나!’라 하였다.
이와 같이 <최척전>을 희망으로 끌어가는 중심에는 한국인의 의식 가장
깊은 곳에 내재돼 있는 생활 철학이자 신앙으로서의 불교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3)강인한 여인상
<최척전>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이 바로 강인한 여인상,집념의 여
인상의 모습이다.작중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전란에서 살아남았고,계속 살아남아야 하기 위해 남장을 하며 자신을 포로
로 삼은 주인의 인정을 얻기 위해 성실함을 보이고,또 남편이 살아 있을 것
이라는 기대 하나로 남편을 향해 망망대해를 거침없이 나아가는 옥영의 모습
은 어느 남성보다 더 기개 있는 집념의 여인이자 강인한 여인의 대명사로 장
식된다.
특히 남편인 최척을 만나기 위해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향하겠다는 의지가
아들인 몽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설득시켜 결국 조선으로 돌아갈 준비
를 용의주도하게 실천한다.몽선과 홍도로 하여금 배와 양식을 준비시키면서
조선과 일본의 옷을 마련하게 했으며,두 나라의 말을 익히게 하는 등의 모
습에서는 어떤 남성보다도 강인한 집념이 느껴진다.
“수로(水路)는 험란하긴 하지만 내가 이미 경험을 갖추고 있다.옛날
일본에 있을 때 배를 집으로 삼아 봉에는 민광에서 장사를 하고,가을
에는 유구에서 물건을 팔았다.그래서 수시로 출몰(出沒)하는 거대하고
무서운 파도에도 익숙해 있으며,별이나 조수(潮水)의 흐름을 살펴서
점칠 수 있을 정도로 경험이 매우 풍부하다.험난한 파도도 내가 맡을
것이요,배의 안전도 내가 알아서 하겠다.설사 불행한 일이 생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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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벗어날 방도가 없겠느냐?”159)
옥영은 즉시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옷을 짓고 매일 아들과 며느리
에게 두 나라 말을 가르쳐 익히게 했다.160)
한편 옥영은 잠시이기는 하지만 최척이 의병에 있는 동안 어머니가 이웃의
부자인 양씨와의 혼사를 주선했을 때도 어머니에게 끝까지 부당함을 이르고,
그래도 어머니가 강제로 혼사를 성사시키려 하자 죽음까지 시도했던 여인이
기도 하다.
한밤에 심씨가 깊이 잠들어 있었는데 문득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소
기가 베갯머리까지 세차게 들려 왔다.잠에서 깨어나 딸이 자던 자리
를 어루만져 보니,딸이 그 자리에 없었다.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
히 찾아보니 옥영이 비단 수건으로 목을 매고 창살 아래 엎드려 있었
다.손발이 모두 차고 숨소리가 점차 희미해졌으며,호흡만 목구멍 속
에서 오락가락하였다.심씨는 황망히 목에 메인 수건을 풀고 옥영을
끌어안아 일으켰다.이때 춘생이 등불을 밝히고 와서 물을 몇 모금 입
에 흘려 넣자 옥영이 겨우 입으로 숨을 내쉬었다.잠시 후 옥영이 구
완하였으며,이 이후에는 어느 누구도 양씨 집안과의 혼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161)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 옥영은 오직 남편 하나를 믿고 그를 따르는 절
개 강하고 집념 있는 여인으로서 전통적인 한국의 여인상을 이끌어내고 있
다.
159)“水路艱難 我多備嘗 昔在日本 以舡爲家 春商悶廣 秋販琉球 出沒於驚波 駭浪之中 占星候潮 涉
歷已慣 風濤險易 我自當之 舟楫安危 我自御之脫有不幸之患 豈無方便之道.”
160)卽裁縫 鮮倭兩國服色 日令子婦敎習 兩國語音 而自傳敎之.
161)夜深夢間 忽聞汩汩之聲 覺而撫其女不在焉 驚起索之 玉英於窓下 以毛巾結項而伏 手足皆冷 喉咙
聞汩汩之聲 漸微且絶 驚呼解結 蹴春生點火而來 抱持痛哭 以勺水入口中 小傾而甦 而主家亦驚動
而來救 自後 絶不言梁家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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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포용적인 인간애
<최척전>에는 전란에 얽혀든 동아시아 여러 나라 인물들이 등장한다.명나
라 장군인 여유문,일본인 돈우,항주인 주우,중국 상인 두홍,조선 삭주 토
병의 출신 오랑캐 등이 그들이다.17세기의 시대상에 비춰 조선인이 아닌 외
국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이해관계로 맺어져 있고,특히 전란이라는 아픈 현
실 속에서 조선인들에게 외국인들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은 더더욱 팽배할 때
이다.그럼에도 <최척전>에 등장하는 외국인들에 대한 인물 설정에서는 어느
곳에도 그들을 적대시하거나 배격하는 모습을 찾아내기 어렵다.그러나 이와
는 반대로 전쟁의 참상은 실로 잔인하리만큼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어 실감을
더하게 한다.<최척전>에 제시된 인용문을 통해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먼저 임진왜란에 대한 참상을 표현하는 대목이다.
그날 적병이 연곡으로 들어가 온 산야를 휘저으며 살상하고 약탈하
여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았다.하지만 최척의 일행은 길이 막혀 꼼짝
할 수가 없었다.사흘이 지나 적병이 물러간 후 최척은 다시 연곡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연곡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시체가 여기저기 나뒹굴
고 유혈이 낭자하여 시내를 이룬 모습뿐이었다.마침 숲 속에서 은은
하게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최척이 그곳으로 찾아가니 온 몸에 상
해를 당한 노약자 몇 사람이 있었다.노인들은 최척을 보자 통곡하며
말했다.162)
“적병이 산에 들어와서 3일 동안 재물을 약탈하고 인민들을 베어 죽
였으며,아이들과 여자들은 모두 끌고 어제 겨우 섬진강으로 물러갔네.
가족들을 찾고 싶으면 물가에 가서 물어 보게나.”163)
샛길을 찾아 겨우 고향에 이르러서 보니,담벼락은 무너지거나 깨어
져 있었다.그 밖의 다른 것들도 모두 불타버려 쉴 곳은 물론,곳곳에
162)猝遇賊兵 潛身於岩藪而石避之 是日 賊入燕谷 則但見積屍 遍橫流血成川 林叢間 隱隱有號咷之聲
陟就訪之 老弱數輩 瘡痍遍身 見陟而哭曰
163)“賊兵入山 三日 奪掠財貨 芟刈人民 盡驅女子 昨已退屯蟾江 欲求一家 門諸水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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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가 언덕처럼 쌓여 발 디딜 틈도 없었다.164)
위 인용문을 통해 당시 임진왜란의 참상이 얼마나 컸는지 실감나게 표현하
고 있다.특히 이러한 표현들은 임진왜란을 기록한 사적들의 표현과도 일치
하는 대목으로 사실적 표현으로 평가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범인 일본인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은 찾아
보기 힘들다.오히려 작품의 주인공들과 개인적으로 인연이 맺어진 그들에게
는 호감이 제시된다.다음의 인용문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때 옥영은 왜병인 돈우(頓于)에게 붙들렸는데,돈우는 인자한 사람
으로 살생을 좋아하지 않았다.그는 본래 부처님을 섬기면서 장사를
업으로 삼고 있었으나,배를 잘 저었기 때문에 왜장(倭將)인 평행장(平
行長)이 뱃사공의 우두머리로 삼아 데려왔던 것이다.돈우는 옥영의 영
특한 면모를 사랑하였다.옥영이 붙들린 채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고
좋은 옷을 입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이면서 옥영의 마음을 달래었
다.165)
인용문은 일본인으로 등장하며 옥영을 포로로 끌고 간 왜병 ‘돈우’에 대한
묘사이다.돈우는 옥영을 오히려 잘 대해 주었고 두려움에 떠는 것을 달래주
려고 노력하는 등 적군으로서가 아니라 인정 많은 이웃집 아저씨와 같은 모
습으로 묘사된다.
“인생은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소중하니,가고 아니 가고는
그대의 뜻대로 하시오.게다가 나는 이미 집안 일에 연연(戀戀)하지 않
고 장차 멀리 유람할 계획을 갖고 있소.그런데 어찌 반드시 홀로 한
가지 방책만 고수하여 소심하게 그대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겠소.”166)
마침내 최척은 말 한 필을 얻어 타고 당나라 진중으로 들어갔다.
164)還尋歸路三書夜 僅達其鄕閭 頹垣破瓦 餘燼未息 積屍成丘 無地着足.
165)時玉英 則見執於倭奴頓于 頓于老倭 本不殺生 慈悲念佛 以商販爲業 習御舟楫 倭將行長 以爲舡
主而來 頓于愛玉英機警 惟恐見逋 給以華衣美食 慰安其心 玉英欲投水溺死 再三出舡 輒爲所覺.
166)人生貴於知心 遊息適矣 無論遠近 爾旣無家累之戀 何必塊守一方 蹴蹴靡所騁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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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척은 용모가 준수하고 지략이 심원하였으며,활쏘기와 말 타기를 잘
하고 한문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여공(余公)은 최척을 매우 아껴
같은 막사에서 식사를 하고 잠도 같이 잤다.얼마 뒤 총병(摠兵)이 병
사들을 철수하여 중국으로 돌아감에,최척은 전투(戰鬪)와 삼군의 장부
(帳簿)를 담당하는 임무를 맡아 국경의 관문(關門)을 통과하여 소흥부
(紹興府)에서 살았다.167)
위 두 인용문은 중국인으로서 명나라 장수 ‘여유문’에 대한 묘사 대목이다.
가족을 잃은 슬픔으로 절망에 빠진 최척에게 운명에 연연해하지 말라며 최척
에게 새로운 삶의 방법을 제시해 준다.그리고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게 되
고,최척을 긍휼히 여긴 여유문은 자신의 동생과의 결혼까지를 주선하는 등
최척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호감을 제시한다.
중국 인물로 여유문 외에도 오세영,주우,두홍 등이 등장하지만 역시나 최
척과는 모두 막역한 사이로 묘사되며 형제지간의 우애를 보일만큼 서로에게
좋은 감정들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외국인은 아니지만 <최척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인물이
바로 포로수용소장이다.그는 본래 조선인이었지만 조선 벼슬아치의 가혹한
행정을 견디지 못해 고향을 떠나버린 인물이라는 점으로 보아 그는 참을성은
조금 있는 편이지만 욱하는 성격도 있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그가 행한 대
표적인 사건,바로 포로수용소에 감금된 최척과 몽석을 동정해 군법까지 어
기고 탈출을 돕는 인물이다.실로 인정이 있고 인간적이 면모를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이와 같이 <최척전>에 등장하는 인물들 묘사에서는 어느 누구나 악하게
다뤄져 있지 않다.심지어 자신의 가족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적군에게까지
도 관대함을 보인다.이러한 관대함에 대해 한편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전형적인 휴머니즘
과 희망적 메시지를 전달해 내기 위한 조위한의 의도적인 결과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167)遂以一馬載歸于陳 陟容貌俊爽 計慮深遠 便於弓馬 瞯於文字 余公愛之 共床而食 同衾而寢 未機
摠兵撤歸 以陟隷戰亡軍迫 以過關至姚興居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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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최척전>과 <홍도전>의 관계
<최척전>과 <홍도전>은 기본적인 서사구조가 거의 동일해 이에 대한 영
향 수수 논란이 있어 왔고 이 논란은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특히 <최척전>
이 광해군 13년(1621)에 지어졌고,<홍도전>이 전하는 柳夢寅의『어우야담』
창작 시기 또한 거의 동일해 선후관계의 논란 또한 뜨거운 것이 사실이다.
유몽인(1559~1623)은 명종 4년(1559)에 한양 명례방에서 유당의 3남으로
태어났다.자가 應文,호가 於于堂 또는 艮庵,默好子이다.아버지가 일찍이
돌아가셔서 백형 유몽사의 훈육을 받아서 성장하였고,송승희와 김현성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성혼에게서도 잠시동안 수학하였다.선조 15년 24세에 진
사,31세에 증광문과에서 장원하여,이어서 예문검열,홍문관수찬,삼도순안어
사,홍문관교리,함경도순무어사,평안도 순변어사,사헌부집의,경기도암행어
사,대사성,대사간,도승지,이조참판겸예문관제학 등을 지냈다.
문장이 대단히 뛰어나고 1593년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어 왕세자에게 글을
가르쳤다.1621년 서호에 은거하면서 문집 80여 권과 야담 10여 권을 지어
남겼다.즉『어우집』과『어우야담』이다.1623년 인조반정으로 벼슬을 내놓고
전전하다가 역모로 몰려 <老寡婦詞>로 자신의 굳은 뜻을 보이고 아들과 함
께 사형되었다.168)
견문에 따라 어우야담을 지었는데 이제 10여 권이 되었다.169)
위의 인용문을 보아『어우야담』에 실려 있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유몽인이
마음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견문에 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시와 문장은 아무리 솜씨 있게 지어도 민중이 완상할 수가 없다.소
168)최운식,「어우야담에 나타난 어우당의 설화의식」,『한국민속학』제10집,민속학회,1977,pp.13
8~139참조.
이경우,「어우야담 연구」,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1976,pp.191~194연보.
169)유제한,『어우야담』.
隨聞見者 於于野譚 今成十餘卷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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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총화를 지음은 비단 세교에 보탬이 될 뿐만 아니라 민중이 또한 그
것을 즐겨 본다.170)
위의 인용문을 보아 유몽인의 주장은 소설로 엮어야만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그는 독자를 의식하고 어느 정도는 자신의 생각을 보태어
작품화하였다.
최운식은「어우야담에 나타난 어우당의 설화의식」171)에서『어우야담』의 내
용이 전 5편,59항,527화로 되어 있다고 보고 기술방식을 4가지로 분류하였
다.즉 유몽인이 경험한 것을 중심으로 한 기술,인물을 중심으로 한 일화의
기술,풍자․세교를 위한 견문의 기술,풍속․민간 사유 및 신앙 기술이다.
유몽인이 먼저 인물을 소개하고 그 인물의 행적이나 또 작자가 보고들은 내
용을 기술하며 끝에 세상에 전하는 이야기를 기술한 다음 자신의 의견을 덧
붙이는 방법을 취했다고 하였다.
오경환은「어우야담 연구」172)에서 ‘어우야담은 대부분이 견문한 이야기들을
기록한 것이나,그 이야기들은 기록하는 과정에서 유몽인은 평결 형식을 통
하여 이 책에 자신의 윤리관,사회관,문학관,운명관 등을 개입시키고 있으
며,또한 논․기를 통해서도 그의 그러한 의식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
다.’고 하였다.
위의 분석을 통하여『어우야담』은 유몽인이 사실에 입각해서 자신의 생각
을 부연하여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러면『어우야담』에 실
려 있는 홍도 이야기도 실제의 정생과 홍도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창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홍도전>의 서사구조는 다음과 같다.
① 남원에 정생이란 인물은 홍도와 같은 마을에서 산다.정생은 의기가
호탕하고 퉁소를 잘 불며 노래를 잘 하나 공부는 게을리한다.
② 정생은 홍도에게 구혼하고 결혼하는 날짜를 정한다.
170)유제한,앞의 책.
詩工雖工衆莫之賞 不如著小說叢話 非但裨補世敎 衆亦樂觀之.
171)최운식,앞의 책.
172)오경환,「어우야담 연구」,숭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1988,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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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홍도의 아버지는 정생이 무식하기 때문에 이들의 결혼을 반대한다.
홍도가 아버지를 설득하여 결혼이 성사된다.
④ 결혼 2년 후 몽석이 태어난다.
⑤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정생이 射軍으로서 남원성을 지킨다.그런데 성
이 함락되고 정생의 아버지와 몽석은 지리산으로 피난하여 홍도는
전쟁터에서 정생과 헤어지게 된다.정생은 홍도가 명나라를 군사를
따라갔다는 소문을 듣고 그녀를 찾기 위해 중국으로 간다.
⑥ 정생이 절강에 이른다.달밤에 퉁소를 불자 이웃 배에 있던 사람이
전날 조선에서 듣던 소리라고 외친다.이에 정생이 전날 아내와 화
답하던 가사를 부르고 아내를 만난다.부부가 절강에서 산다.
⑦ 그 2년 후 둘째 아들 몽진을 낳는다.
⑧ 몽진이 17세 되자 아내를 구한다.아버지가 조선에 구원병으로 갔다
가 돌아오지 않아 조선에 가 보고 싶은 한 중국 여인이 자원하고 몽
진에게 청혼한다.
⑨ 무오년 北征 때 정생은 유정의 군사로 뽑혀 부부가 다시 이별하게
된다.만주에서 奴賊을 치다가 정생은 포로로 잡힌다.
⑩ 정생이 포로수용소에서 도망치고 공홍도 尼山에 이른다.그런데 종
기가 심하여 침의를 구한다.이때 미침 만나는 침의가 중국인이고
몽진의 장인이다.함께 남원 옛집으로 돌아와서 같이 산다.
⑪ 다음해 절강에 있는 홍도가 가산을 정리하며 배를 구하고 華·鮮·倭
삼국의 옷을 만들어 절강을 떠나고 조선으로 향한다.도중에 중국인
을 보면 중국인 행세를,일본인을 보면 일본인 행세를 한다.한 달
이십오일 만에 추자도 밖의 가가도에 이른다.통제사의 수선을 만나
구함을 입고 순천을 거쳐 남원의 옛집으로 돌아온다.일가가 모두
무사히 해후한다.
이상과 같이 <홍도전>과 <최척전>의 서사구조는 기본 골격에서 아주 비
슷하다.그리고 거의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니만큼 이 두 작품의 상관
성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이에 관한 그간의 연구에서는 <홍도전>은 선행 작
품으로 <최척전>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견해가 우세했다.
이에 대한 논란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이다.먼저 일반적인 설은 <홍도
전> 선행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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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영은『어우야담』의 설화 <홍도전>이 조위한의 <최척전>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품화하였는가를 검토하였고 설화가 소설화한 모델케이스로 그
구성상의 특색을 보여주었다고 하였다.173)
김기동은 처음에는 조위한과 유몽인은 다 같이 임진란 때 있었던 최척의
얘기와 홍도의 얘기를 듣고,조위한은 <최척전>을 지었고 유몽인은 <홍도
전>을 지었다고 하여 <최척전>을 임진왜란 때의 실화를 소재로 하면서 조위
한이 독창적으로 창작한,즉 실화를 중심으로 보다 사실적으로 기술한 <홍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고찰하였다.174)그러나 그 후 <홍도전>을 지
은 유몽인은 인조 2년(1624)에 조위한보다 먼저 죽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조위한이 <홍도전>을 보고 나서 <최척전>을 지을 수 있다고 하였다.175)
강진옥은 <최척전>과 <홍도전>의 구성을 비교하면서 <홍도전>은 <최척
전>의 모체가 된 이야기로서 <최척전>의 이본이라고 알려져 있다고 언급한
후176),<최척전>이 보다 자세하고 후대에 쓰여졌다는 점만으로도 이 논의는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였다.177)
김장동은 두 작품의 내용을 상세히 비교하면서 유몽인의『어우야담』이 먼
저 나왔고 그 후에 <홍도전>과 깊은 관련을 가진 조위한의 <최척전>이 나
타났다고 하여,<최척전>은 <홍도전>을 제재로 하여 윤색과 창작이 가미되
고 기구한 사연에 개연성을 부여해서 소설화하였다고 한다.178)
박일용은 <최척전>의 전반부는 김시습의 <이생규장전>과 방불하게 현실
세계의 갈등에 서사세계와 서술시각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후반부는
몽유야담 소재 정생과 홍도의 이야기를 부연 확대한 것이라고 보았다.179)그
러나 그 후에 <최척전>과 <홍도전>은 작자의 의도에 따라 같은 사실적 설
화가 하나는 소설로 하나는 전의 형식을 빈 문헌 설화로 지어졌다고 하여 영
173)소재영,『기재기이연구』,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1990,pp.271~284.
174)김기동,『이조시대소설의 연구』,성문각,1974,pp.316~317.
175)김기동,『한국고전소설연구』,교학사,1982,p.228.
176)강진옥,「<최척전>에 나타난 고난과 구원의 문제」,『이화어문논집』제8집,이화여자대학교 한
국어문학연구소,1986,p.228.
177)강진옥,위의 눈몬,p.229의 주7)후반부.그러나 <최척전>이 <홍도전>보다 후대의 작품이라고
하면서도 그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178)김장동,『조선조역사소설연구』,이우출판사,1986,p.150~151.
179)박일용,「조선후기 애정소설의 서술시각과 서사세계」,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학
위논문,1989,p.24.
- 101 -
향관계가 없다고 하였다.180)
정종대는 <최척전>에서는 기존 설화의 수용적 측면이 창조적 시도보다 더
강하여 <최척전>은 설화의 수용에 의한 작품이고 창작성이 결여된 작품으로
보았다.181)
최삼룡은 <최척전>을 <홍도전>을 소설의 소재로 활용한 작품으로 보았
다.182)
김재수는 위와 견해들과 달리 <최척전>을 실화가 소설화된 작품으로 살펴,
사실적 기록문학의 백미로 보았으며,<홍도전>은 유몽인이 남원에 실화가 있
었던 것을 듣고 사건만을 간략하게 서술한 것이고 <최척전>은 조위한이 주
인공으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문학적 수식을 더하여 소설화한 것이기
에 두 작품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183)
박희병은 <최척전>이 <홍도전>보다 먼저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
며 <홍도전>은 최척의 이야기가 유포되는 과정에서 기록된 것이고,<최척
전>은 최척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를 소설화한 것이고 이 두 작품이 서로
아무런 영향관계를 갖고 있지 않고 <홍도전>이 <최척전>의 母話라는 지적
은 타당하지 않다고 하였다.184)
필자 역시 후자의 견해에 동의하는 바이다.이는 우선 작품의 시간적 배경
의 차이에서 알 수 있다.<홍도전>의 사건 전개 배경이 되는 시간적 배경은
임진년(1592)에서 기미년(1619)까지이고 <최척전>의 주요 시간적 배경은 임
진년(1592)에서 경신년(1620)까지이다.이것으로 보아 <홍도전>의 이야기는
한 해 먼저 끝났음을 알 수 있다.그래서 <홍도전>의 저작 시간은 1619년의
이후,<최척전>은 1620년의 이후임을 확인할 수 있다.또 기록된 자료에 따
라 먼저『어우야담』과 <최척전>의 창작 시기,두 작자의 창작지,그리고 교
유관계에 근거한 것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두 작품은 모두 신유년(1621)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
180)박일용,「장르론적 관점에서 본 최척전의 특징과 소설사적 위상」,『고전문학연구』,한국고전문
학연구회,1990.
181)정종대,『염정소설구조연구』,계명문화사,1990,p.217.
182)최삼룡,「한국 고소설의 소재에 대한 연구」,『한국언어문학』제29집,한국언어문학회,1991.
183)김재수,「<최척전>의 소설화 과정」,『광주교육대학교 논문집』제26집,광주교육대학교,1985.
184)박희병,「최척전-16,7세기 동아시아의 전란과 가족 이산-」,『한국고전소설작품론』,집문당,
1990.
- 102 -
다.이때 당시의 각각의 <연보>에 따르면 유몽인은 서호와 송천(서울 근교)
에서 살고 있었으며,185)조위한은 남원의 주포(남원군 주생면 제천리)에서 거
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둘이 교류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또 조위한의『현곡집』에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언급과
그들에 관한 한시가 있지만 유몽인에 관한 기록은 하나도 없다.마찬가지로
유몽인의『어우집』에도 조위한에 관한 기록도 찾아볼 수가 없다.이로 미루
어 보아 이들이 같은 시기를 살았지만 실제로 교류한 적이 없다고 볼 수 있
다.그러면 <홍도전>과 <최척전>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생각하는 논
리는 무리가 될 것 같다.그래서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서 누가 먼저 기술
하였는가 하는 시기는 극히 가려내기 어렵기 때문에 어느 작품이 어느 작품
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는 타당성이 없다.
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의 구도상에서도 차이점이 분명히 인식된다.<홍도
전>은 간략하게 축약되어 있고,<최척전>은 <홍도전>보다 훨씬 장편이다.
또 <홍도전>은 있었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알리려고 하였으나 <최척전>은
독자들에게 흥미와 긴장,감동을 유발하도록 여러 가지 장치를 사용했다.또
<최척전>은 <홍도전>보다 등장인물이 많고 다양하다.각 인물의 이름까지
밝혀져 있고 각 사건에서 적절한 역할을 담당한다.또 그들의 언행을 통하여
인물의 성격도 잘 나타난다.지리적 배경 설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홍도
전>은 지명 설정에서 간략하고 개괄적이지만 <최척전>은 구체적이고,주인
공들의 행동과 함께 지리적 배경도 적절하게 이동한다.그리고 역사적 사건
과도 일치한다.이런 지리적 배경 설정은 작품의 사실성을 더 강하게 인식시
킨다.또한 시간적 설정에서 <홍도전>은 작품의 진행을 통해서 시간이 흐르
는 것을 알 수가 없다.구체적인 시간이 제시되지 않고 막연히 시간의 흐름
을 인식할 뿐이다.이에 비해 <최척전>은 정확한 시간이 설정되었다.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이 진행되며 장소의 이동도 이루어진다.
같은 시기 서로 다른 지역에서 들은 이야기를 각기 자신의 의도대로 <홍도
전>과 <최척전>을 기술하였다.유몽인은 그 기이한 일을 후대에 남기기 위
185)유제한,『어우야담』의 <年譜>에 의하면,광해군 12,13년 사이에는 유몽인이 西湖(『新增東國
與地勝覽』41卷,鳳山郡條에 의하면 西湖는 黃海道 鳳山郡 서남쪽 30리에 있다고 함)와 松泉
(서울의 교외)을 오가며 은거하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 103 -
하여 사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기술하였고,조위한은 최척에게 들은 기이한
이야기에다가 자신의 체험을 결합하고 정확한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여 사실
주의적 소설로 남겼던 것이다.
- 104 -
Ⅴ.결론
<최척전>은 한국 고전 서사문학사에서 실로 다양한 유형을 접목하며 기존
소설들과는 확연히 다른 문학적 분수령을 이루어낸 발군의 작품이다.본고는
특히 <최척전>이 17세기의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소재를 취하여 가감 없는
현실적인 서사 전개로서 높이 평가 받는 대표적인 작품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최척전>을 통한 한국인의 민족적인 정서이자 한국인의 의식을 발견해 내는
동시에 작가의 시대의식과 역사의식을 분석해 보았다.그리고 그 과정 속에
서 <최척전>이 가지는 최상의 가치가 바로 ‘인간애’라는 ‘휴머니즘’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고찰이 가능한 이유는 우선 <최척전>이 만들어진 경위에 관한 분
석에서 얻을 수 있었다.<최척전>은 문학이기에 앞서 실화를 투영하고 있다
는 점,그리고 <최척전> 작품의 근간은 작가 조위한의 사실적인 체험이 고스
란히 반영돼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자신의 체험이자 당시 모든 민중들의 현
실이었던 3대 전란의 체험 속에 전란의 아픔을 보상받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
를 작품을 통해 그려 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가능하다.
<최척전>은 전쟁으로 인해 벌어진 가족사의 비극인 이산의 아픔을 반복
적으로 거론해 내고 있다.그리고 ‘이산’이라는 아픔을 극복해 내는 대안으로
‘가족의 재회’를 이끌어내고 있다.이산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재회’의 방법 말고는 어느 것도 최상의 대안이 될 수 없다.작가 조위
한은 당시 조선의 역사에서,그리고 동아시아라는 역사적 공간에서 어느 누
구도 온전히 비껴갈 수 없었던 민중들의 아픔인 이산의 슬픔을 정면으로 다
루되,모든 가족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재회하는 것을 결말로 제시한다.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냈던 작가의 남원 은둔 시절,조위한
은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는 암울한 시대상을 그 곳에서 재발견했고 동시
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차례로 떠나보내야 했다.그리고 조위한이 당면한 슬
픔은 당시를 살아가는 모든 민중들에게 공통의 아픔이었다.조위한은 이 암
울함에 마냥 체념하기보다 희망을 찾아내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했다.요행히
그에게는 자신의 순탄치 않은 삶의 체험,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시대적
- 105 -
아픔들을 묶어낼 수 있는 탁월한 문인적인 재질이 있었다.조위한은 그 시대
의 암울함을 <최척전>이라는 한 편의 소설에 띄어 내었고,그 암울함을 띄어
낸 <최척전>은 ‘희망’이라는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다시 남원으로 돌아와 유
랑이라는 대장정의 막을 내리게 하였다.그 구원의 메시지를 지탱하고 있는
힘을 <최척전> 이전의 사설들이 갖고 있지 않는 뚜렷한 작가의식에서 나왔
다고 할 수 있다.특히 조위한의 작가의식을 역사와 대외적 공간,그리고 한
국적 정서를 포괄하면서 투철한 인식을 보여준다.중국에 대한 우호적이고
동경적인 의식을 그의 역사관을 통해 뚜렷이 나타내고 있으며,일본에 관한
이중적 시각을 다른 작가들이 갖지 못한 균형감각을 보여주고 있다.누구도
직접 가 본 적이 없는 안남을 만남의 대상으로 확대한 것도 폭넓은 작가의식
의 발라라고 할 것이다.그는 이렇게 분출된 의식을 한국적 정서로 싸매면서
가족애와 인간애라는 본래의 주제로 돌아오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전란이 휩쓸고 간 아픔의 자리를 ‘휴머니즘’이라는 카타르시스로 완벽하게
치유해 낸 <최척전>이야말로 17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휴머니즘 소설이자,가
장 한국적인 매력과 저력을 담아낸 한국적인 소설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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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 -2009년 8월 석사학위논문
■<최척전>에 나타난 작가의식 연구: ●조위한(趙緯韓)조위한(趙緯韓)1567년(명종 22)~1649년(인조 27)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한 청
[UCI]I804:24011-200000238484
A StudyonConsciousnessofWriteronthe<ChoiCheok
Jeon>
<최척전>에 나타난 작가의식 연구
지도교수 김 수 중
이 논문을 문학석사학위 신청 논문으로 제출함
2009년 4월 조선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한 청
한 청의 석사학위 논문을 인준함
위원장 조선대학교 교수 인
위 원 조선대학교 교수 인
위 원 조선대학교 교수 인
2009년 5월 조선대학교 대학원
[목 차]
ABSTRACT
Ⅰ.서론 ···············································1
1.연구 목적 ·················································1
2.연구 방법 ·················································4
3.연구사 개요 ···············································5
Ⅱ.작가 조위한과 <최척전>의 형성 배경 ·········9
1.조위한의 삶과 문학 ······································9
1)한국 고소설의 실명 현상 ····································9
2)<최척전>의 작가 ············································20
3)조위한의 생애 ···············································23
2.<최척전>의 형성 배경 ··································28
1)가탁 방식과 역사적 사실 ···································28
2)현실적 시공간 ···············································35
3)가정사의 체험 ···············································37
4)중국문학에 대한 관심 ·······································39
5)의병활동과 중국 여행 ·······································44
Ⅲ.<최척전>의 작가의식 분석 ····················47
1.역사에 대한 작가의식 ··································47
1)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적 인식 ······························51
2)의병과 관련한 태도 ·········································58
3)호족 명나라 침입 전쟁의 시각 ·····························62
2.대외적 공간에 대한 작가의식 ··························66
1)중국에 대한 동경 ···········································66
2)일본을 보는 이중적 시각 ···································81
3)안남으로 향한 공간의 확대 ·································85
3.한국적 정서에 대한 작가의식 ··························87
1)가족애의 고취 ···············································88
2)생활 철학으로서의 불교의식 ································89
3)강인한 여인상 ···············································92
4)포용적인 인간애 ·············································94
Ⅳ.<최척전>과 <홍도전>의 관계 ·················97
Ⅴ.결론 ············································104
【참고문헌】········································106
ABSTRACT
A Study on Consciousness of Writer on the
<ChoiCheokJeon>
HanJing
Advisor:Prof.Kim Su-Jung.Ph.D.
Dept.ofKoreanLanguage& Literature
GraduateSchoolofChosunUniversity
<ChoiCheokJeon> isliterary workwhich haveguidednew model ofliderary circles thatgrafttogetherwith various types in Korean classicsdescriptionofthehistoryofliteratureandisdifferentcertainly with existing. This manufacture could chase age and history relationship ofwriterstation while have found ethnic emotion as a Korean and consciousness of Korean through <ChoiCheok Jeon>, according to thefact<ChoiCheok Jeon> istherepresentativework thatis evaluated high as a realistic narration developing events by using actualand realistic theme of17th century especially.And the supreme value what <Choi Cheok Jeon> has is 'Human love' 'Humanity'justlyintheprocessabove. Thereason thatthismanufacturecould considerofthemeaning of <ChoiCheokJeon> isfirstlybecauseitisreflectingrealstorybefore literatureandbecauseexperienceofwriter,JoWi-Hanisreflectedon thiswork completely.Wecan understand thisfactsthrough analyses abouthow <ChoiCheokJeon> ismade.Alsoitispossilbletoconfirm what'sthemeaning ofthisliteraturethrough experienceofpain of3 warswhich publicsatthattimeexperiencein realand thingswhich added thestory ofmain charectorof<Hong Do Jeon> who isreal existedtothisworkandintentiontocompensatepainofwars. BeforeChoiCheoktakerepeatedlypainofdispersionthatistragedy offamily which washappenedby thewar.And ithasbeen guiding 'Meetingagainoffamily'asthealternativethathaveovercomepainof 'Dispersion'.Theonly method thatcan curepain ofdispersion could be'Meetingagain'andnowaycouldbethealternativeplaninsteadof "Meetingagain'.WriterJoWi-Handealswithsorrow ofdispersionin publicwhichnoonecouldavoidfrom eventhewriterofthisliterary in history ofEastAsiaand Koreaand show ustheconclusion that familymeetingagainmiraclyeachotherinhappy-end. During retirementin Namwon when he can say itwas the most difficultandhardtimetospendforentirehislife,hehasrediscovered gloomyphaseofthetimethathaven'tseeninanywhereatthesame time,heshouldleavefamilywhohelovedsomuch.Andsorrow which Jo Wi-Han faces wascommon lash to allpeopleswho live atthat same time.Jo Wi-Han setdirections to side thatsearch for hope ratherthan toabandon solely in thischeerlessness.Fortunely hehas thegifted ability asaliterary man tobeabletomix togetherwith ownexperienceoflife,sympathyandthecommonpaininthatperiod. And Jo Wi-Han write a novel, <Choi Cheok Jeon> within cheerlessness ofthe age.Novel,<ChoiCheok Jeon> which has the massageof'hope',cutting offthecheerlessfrom thecontentsandit return to Namwonagain and make it end ofroaming aboutthestory. <ChoiCheok Jeon> is definetly the mostrepresentative humanity novel in 17th that cured perfectly the pain by the war with catharsis-'humanity'aswellasitisthemostcharmingandattractive novel in Korea Ibelie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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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서론
1.연구 목적
한국 서사문학사에서 <최척전>만큼이나 다양한 시각에서 연구된 작품도
드물 것이다.전쟁소설,포로소설(피로소설),애정소설,역사소설,불교소설,사
실계소설 등의 명칭 모두 <최척전>에 부여되는 소설 유형의 용어들이다.이
는 <최척전>이 그만큼 다양한 시각에서 다양한 소설적 요소를 접목하여 다
양한 유형 변화를 시도한 작품임을 보여주는 말이며,동시에 <최척전>이 갖
는 소설사적 가치를 인정하는 표현이다.
<최척전>은 17세기 초에 창작된 소설로서 저작 연대와 작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현존하는 이본으로는 한문본 5종,국문
본 1종,한문 축약본 5종이 전하는데,1)이중 조위한이 <최척전>을 지었다고
하는 근거는 한문본인 <최척전>의 서울대본과 고려대본 마지막에 ‘天啓元年
辛酉閏二月日 素翁題’,‘素翁趙緯韓號 又號玄谷’이라 한 기록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天啓元年’이라는 표현은 明 熹宗 원년으로 광해군 13년,1621년을 의
미하고,‘玄谷’,또는 ‘素翁’은 당시 조위한의 호로 불렸던 것이다.2)이 기록으
로 말미암아 <최척전>이 조위한의 창작품임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없어졌다.
<최척전>은 이명선을 통해 최초로 언급된 이후3)김기동에 와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도되는데,4) 작품이 갖는 문학적 특징과 성격으로 인해 학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모았다.특히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당시의 현실 시간 그대로라
1)지연숙,「<최척전>이본의 두 계열과 善本」.『고소설연구』제17집,한국고소설학회,2004.
지연숙은 본 논문을 통해 규장각본,고려대본,간호윤본이 원본 계열에 속하며,김모본과 천리
대본은 변이가 심한 것으로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김모본을 거쳐 천리대본으로 나아갔다고 밝
힌 바 있다.이는 그간에 선본으로 알려진 것이 천리대본이라는 주장과 달라 관심을 끈다.특히
천리대본은 탈락과 변이가 잦고 오류도 많아 원본에서 가장 멀어진 이본이라고 했다.
2)<최척전>의 작자설에 관한 것은 Ⅱ장에서 보다 자세하게 언급할 것이다.
3)이명선,『조선문학사』,조선문학사,1948.
작품이나 작자에 대한 본격적인 고찰이라기보다는 간단한 언급 정도의 수준이었다.
4)김기동,『이조시대소설연구』,성문각,1974.
작품의 서지사항,작자,창작 동기와 함께 작품 분석을 통해 <최척전>이 불교계 소설임을 언급하
였다.
- 2 -
는 점,임진왜란과 정유재란,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 등 3대 전란을 소재로
가족사의 비극적인 운명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그리고 공간적 배경으로 남
원이라는 현실적 공간에서 출발하여 중국,일본,나아가 당시로서는 상상적
공간인 안남까지 확장되는 방대한 스케일의 구성이라는 점과 각각의 서사 공
간이 작품의 주 무대가 된다는 점 등에서 그러하였다.이러한 서사 공간 배
경의 확장은 지금으로 보아서도 상당히 파격적인 설정이다.이러한 특징으로
<최척전>은 다수의 학자들 사이에서 주요한 관심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대의 작품으로 알려진 허균의 <홍길동전>,권필의 <주생전>에
비한다면 <최척전>에 대한 연구 성과는 많지 않은 편이다.특히 작가에 대한
연구는 더욱 그러하다.이에 대한 이유 중 하나가 작자에 대한 기본적인 자
료 자체가 빈곤했다는 점이다.조위한의 행적은 물론 연보와 행장,문집 어느
것 하나도 확실하게 알려진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다 보니 조위한에
대한 연구는 김기동이『한국고전소설연구』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것을 제외하
면 연구가 거의 진행되지 않다가 최근 민영대에 의해서 많은 자료들이 발굴
되었다.5)
문학,특히 소설 작품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작가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이
뤄져야 한다.문학은 작가의 의도적 산물이자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본
고는 이 점에 주력하여 <최척전>을 작자의 의식과 연계해 고찰해 보고자 한
다.
우선 필자가 <최척전>을 분석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외국인 독자이자 서
사문학을 공부하는 국문학도로서 가장 한국적인 문학,한국인의 의식을 읽어
낼 수 있는 문학을 연구해 보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다.그러한 점에서 <최
척전>은 상당 부분 수긍할만한 작품이라는 판단이 섰다.즉 <최척전>의 가
치를 무엇보다 ‘한국적 소설’이라는 측면에서 찾았다는 말이다.<최척전>은
말 그대로 당시의 현실과 사실을 근간으로 3차례에 이어진 전란이 가져다 준
시대의 아픔을 3대의 가족사를 통해 고스란히 재연해 낸 작품이다.당시의
시대가 던져 준 아픔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민중 모두가 직면한 일반화된
5)민영대는 조위한에 대한 문헌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결과 그의 家藏 筆寫本 <玄谷公年譜>,<漢陽
趙氏世譜>,박세채의 문집인『南溪先生文集』에 실려 있는『知中樞府事玄谷趙公行狀』을 입수하였
고,후손들 집안에 흩어져 전하던『玄谷集』총 14권 중 11,12,13,14권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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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모습이었을 것이고,<최척전>은 대다수의 연구자들이 인정하였듯 사실
계소설로서 지극히 평범한 한 가족의 당면한 전란 속 삶의 이야기를 구체적
으로 묘사해 낸 작품으로서 사실성을 높이 평가받은 작품이다.한 국가의 민
족적인 특질 또는 민중의식을 파악해 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고
난과 역경의 상황에서 민중들이 어떻게 그 역경을 이겨내고 삶을 꾸려 가는
지를 고찰하는 과정이야말로 민중의식을 읽어낼 수 있는 적절한 텍스트라는
판단으로 본고의 텍스트로서 <최척전>을 선택하게 되었다.
<최척전>의 또 다른 매력은 당시 소설의 주된 기제인 전쟁,애정,종교,영
웅성 등 다양한 소재들이 녹아 있다는 점이다.이 한 편의 작품 분석을 통해
당시의 소설적 면모를 상당 부분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또 주요 등장
인물이 많다는 점 또한 두드러진 특징이다.다양한 캐릭터를 분석하는 과정
에서 공통된 한국인의 정서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여기에
<최척전>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갈등 관계에 있는 적대국
의 인물들도 다수 등장하여 이야기를 끌어간다.이 과정 속에서 필자는 한국
인의 삶의 모습뿐만 아니라 당시 민중들의 대내외적인 시각과 시대의식을 동
시에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최척
전>을 분석 대상으로 삼은 것이며,이를 통해 작품에 내재된 한국인의 의식
을 외국인 독자이자 연구자로서 분석해 보고자 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이다.
둘째,<최척전>의 서사구조 속에는 현실이라는 당시의 시대상과 함께 다양
한 문학적 특징들이 복합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그러한 문학적 특징들
을 되짚어 보면서 작자 조위한의 작자의식이 어떠했기에 그러한 문학적 특징
들이 나타난 것인지를 역으로 추적해 보고자 한다.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통
해 궁극적으로 작자가 <최척전>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의도가 무엇인지
를 파악하고 그 의도 속에서 탄생한 작품 <최척전>이 갖는 소설사적 가치를
다시 한 번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이 가능하다고 판단하는 이유는 우선 작품과 작가의 관계가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에서이다.작품은 작가의 산물이고 시대적 산
물이다.그리고 작품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작자에 대한 연구가 선행
되어야 한다는 점은 당연한 귀결이다.문학의 특징 역시 작가의 의도적인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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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로 작품에 녹아져 있는 것이라고 볼 때 문학의 특징을 고찰해 보는 작업은
작가의 포괄적인 의식을 읽어내는 작업이 될 것이다.
2.연구 방법
본고의 목표는 앞서 두 가지로 제시한 바 있다.이 목표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선행되어야 할 것이 바로 작가에 대한 기본적인 자료 고찰과 조위한이
<최척전>의 작가로서의 타당성에 대한 재점검일 것이다.더구나 조위한이 사
대부 가문 출신이라는 점에서 이 작업은 더욱 필요하다.이는 고소설의 특징
중 하나인 ‘실명 현상’에 대한 언급과 함께 제시돼야 할 필요성이 전제되는데,
소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팽배했을 당시임에도 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내
걸고 작품을 창작해 낸 의도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따라서 Ⅱ장에서는 한국
고소설에 대한 당시의 시대적 모습과 함께 작가 조위한의 생애와 작품,그리
고 <최척전>의 작가로서 조위한에 대한 타당성에 대한 고찰이 이뤄질 것이
다.아울러 <최척전>의 특징 중 하나이자 작자의식을 파악할 수 있는 단초가
될 작품과 작자 사이의 연계성에 대한 고찰과 함께 형성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Ⅲ장은 작자의 의식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장이다.특히 작품에 녹
아 있는 대표적인 특징,즉 16,17세기의 굵직한 가장 굵직한 3대 전란을 중
심으로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로 풀어 가고 있다는 점에서 어떻게 이것을 작
품으로 형상화하고 있는지의 고찰을 통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작가의 시대의
식을 살펴 볼 것이다.또 <최척전>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인 확장된 공
간,즉 17세기를 중심으로 당시 변화의 중심에 함께 서 있는 동아시아 3국인
조선,중국,일본,그리고 안남에 이르기까지 각국의 인물들에 대한 형상화
방식과 단락별 서사 구조를 중심으로 특징 분석을 통해 작자 조위한의 대외
적 인식을 함께 고찰해 보겠다.
이어서 <최척전>에 나타난 한국적 정서를 작가의식 연구의 관점에서 분석
해 보고자 한다.한국의 고소설로서 시대와 환경을 뛰어넘어 세계를 무대로
삼은 이 작품의 바탕에 근본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정서를 파악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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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최척전> 이해의 궁극적 과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Ⅳ장에서는 동시기의 작품으로서 영향 수수관계 논란이 일고 있는『어우야
담』의 <홍도전>과의 상관성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작가 조위한은 실제로 3
대 전란을 겪고 그 과정에서 모친과 처자식을 잃은 비운을 겪게 되며,전쟁
에 의병으로 참여하기도 하는 등 <최척전>을 이루는 기본적인 모티프들과
많은 부분들에서 닮아 있다.따라서 작품과 작자의 체험 사이의 간극을 살피
는 것,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허구와 사실을 짚어 보는 것은 작자의 체험이
문학으로 어떻게 형상화되는지 살필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또 동시대의
작품인 <홍도전>과 <최척전> 작품 기본 서사구조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두
작품에 대한 영향 수수관계는 보다 자세한 고찰을 필요로 한다.
3.연구사 개요
<최척전>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요약,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명선은 <최척전>에 대하여 최초로 언급하였는데 작품의 구체적인 내용
과 작가에 관한 고찰은 전혀 없었고 다만 작가와 작품이 있다는 것을 소개하
였다.6)
문선규는 조위한이 <최척전>을 지었음을 밝히고 이 작품이 ‘최척의 고사’
를 기술한 것이라 소개하였으나 그 이상의 자세한 내용과 작자에 대한 언급
은 없다.7)
김기동은 <최척전>에 대하여 제일 먼저 관심을 가지고 서지․작자․창작동
기를 정리하면서 작품을 세밀히 분석하여 불교적인 요소를 가려 뽑아 부처의
가호가 시종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고 보고 불교계 소설로 분류하였다.그리
고 주제도 불교적 요소를 가진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표현한 작품이라 밝혔
다.8)
소재영은 본 작품을 역사적 사실성을 바탕으로 그 위에다 가공적인 인물들
을 등장시켜 만들어낸 역사소설의 성격을 띠는 가정소설로 분류하고 임진왜
6)이명선,『조선문학사』,조선문학사,1948.
7)문선규,『조선한문학사』,정음사,1976.
8)김기동,『한국고전소설연구』,교학사,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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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을 배경으로 한 피로문학으로서의 가능성을 시사하였다.또 조선시대의 작
자들이 가끔 이용하던 假托의 방법을 이용한 작품이라는 견해도 밝혔다.9)
김재수는 본 작품에 대해 사실을 소설화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보면서 ‘사실
적 실기문학의 백미’라고 평가하였다.조위한은 직접 최척에게서 자세한 이야
기를 듣고 탁월한 문장력으로 문학적 수식을 더하고 소설적 구조를 갖추어
사실적인 기록문학으로 저술하였음을 밝혔다.10)
강진옥은 주인공 최척과 옥영이 임진왜란․정유재란․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을 통해 반복되는 만남과 이별을 고난과 구원의 문제로 보았으며,이들
이 고난의 현실 속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실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라고 살폈다.‘역사가 개인을 함몰시키려 하지만 종교는
운명의 늪에서 개인을 구출하여 구원에로 이끌어가며,이 과정에서 부처의
현신은 강한 의지와 고난현실의 대결과정에서 실현되는 끝없는 자기부정과
갱신을 거쳐 존재론적 전환을 이룬 존재의 자기표백’이라고 보는 등 색다른
방향으로 연구하였다.11)
김장동은 본 작품을 역사적인 배경의 소설화라고 보면서 ‘실화가 소설로 전
이된 형태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고찰하였고,실화를 소설화하는 논픽션의 새
로운 소설의 분야를 개척해서 후대 기록문학의 전형적인 선례를 남겼다고 기
술하였다.12)
박일용은 <최척전>을 한국 소설사 초기에 나타난 작품으로 파악하였다.본
작품은 전 시대의『금오신화』에 흔히 보이던 전기성을 완전히 탈피하고 서사
세계의 갈등과 주인공들의 의지가 현실세계에서 펼쳐지는 형식을 획득하는
작품이라고 주장하였다.이 소설이 현실의 갈등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초기소
설의 특징을 견지하고 있으면서도 초기 소설이 후대의 통속적인 일대기 소설
로 이행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형식을 취한다는 작품이라고 주장하기도 하
였다.13)이어서 <최척전>은 애초의 설화를 수용하면서도 주인공들의 결혼과
9)소재영,「기우록논고-피로문학의 가능성시론-」,『상봉김성배박사 회갑기념논문집』,형설출판사,
1977.
______,『임병양란과 문학의식』,한국연구원,1980.
10)김재수,「<최척전>의 소설화 과정」,『광주교육대논문집』제26집,광주교육대학교,1985.
11)강진옥,「<최척전>에 나타난 고난과 구원의 문제」,『이화어문논집』제8집,이화여자대학교 한국
어 문학연구소,1986.
12)김장동,『조선조역사소설연구』,이우출판사,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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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인한 이별의 과정을 독자적인 시각으로 구체화하여 새로운 작품으
로 창작했다고 보았다.결혼과 전쟁으로 인한 이별의 과정은 인간적 애정에
입각하여 결혼을 성취하려는 주인공들의 의지에 대하여 유가적인 당대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기존질서 사이의 대립,중세의 절대적 재앙인 전쟁에 의해
무너지는 민중들의 삶의 토대 등 현실세계의 갈등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형상
화하였다.14)
박희병은 <최척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당시의 전쟁이 조선인의 삶에,그
리고 중국인의 삶에 어떤 운명의 그림자를 드리웠는가를 탐구하는 데에 온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고 보면서 주제는 ‘당시의 전란이 초래한 가족 이산
의 고통과 강한 가족애에 의한 재회의 달성’이라고 하고 <최척전>을 애정소
설로 파악하였다.그리고 본 작품이 사실을 기초로 하여 성립된 소설이라고
하면서 조위한의 저술태도가 사실주의적이라고 주장하였다.구체적인 작가의
실제 삶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작품의 여러 곳에서 작가의
사실주의적 면모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본 작품이 초기소설의 사실주의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면서 17세기 소설로 하여금 사실주의의 진경을 이룩하는
데에 선도적으로 기여한 바가 큰 작품임을 주장하였다.그는 <최척전>을 ‘후
대 더욱 발전된 양상을 보이는 사실주의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작품’으로 파
악하였다.15)
정명기는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본 작품에 대한 반성적 시각과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그 동안 <최척전> 연구의 문제
점과 새로운 연구 방향을 제시하면서 천리대학에서 입수한 새로운 자료 필사
본 <최척전>이 있음을 소개하였다.16)
박태상은 본 작품을 살핀 후 애정소설로 규정하였다.그리고 허균 문학 이
후의 17세기 공백기를 메워준 작품,임진왜란의 참상 고발과 포로문학으로서
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작품,여주인공의 전쟁에 따른 수난과 가족과 이별
의 고통 그리고 남편과의 재회를 통한 사랑의 성취,모색 등을 통하여 애정
13)박일용,「조선후기 애정소설의 서술시각과 서사세계」,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1988.
14)박일용,「장르론적 관점에서 본 최척전의 특징과 소설사적 위상」,『고전문학연구』제5집,고전문
학연구회,1990.
15)박희병,「최척전-16,7세기 동아시아의 전란과 가족 이산-」,『한국고전소설작품론』,집문당,1990.
16)정명기,「최척전」,황패강교수 정년퇴임기념논총『고전소설연구』,일지사,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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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소설이라는 점 등을 열거하여 <최척전>의 소설사
적 위상을 새롭게 조명하였다.17)
김진규는 <최척전>을 ‘포로소설’이라고 규정하며,임란 포로의 체험이 어떻
게 소설적으로 변용되었던가를 살피고 <최척전>이 가지고 있는 ‘포로소설’적
특징을 인간의 존재 양상과 결부하여 분석하였다.18)
민영대는 조위한의 후손을 찾아내『漢陽趙氏世譜』,박세채가 쓴 조위한의
<墓表>,家藏 필사본으로 전하는 <年譜>,<行狀>을 통해서 조위한의 가계,
생애,인물됨,저술,연보에 대해서 연구하였고 조위한의 문학 활동 -漢詩․
辭․歌詞․紀行文(隨筆)․小說 - 에 대해서 살펴보았다.<최척전>과『현곡
집』을 통해서 작가의 체험을 본 작품에서 투영하였음을 입증하였고,이 작품
을 ‘한국 소설사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사실주의에 의한 소설이며 근대 소설
적 성격을 가진 최초의 소설’로 평가하였다.그리고 남녀평등의 애정관을 보
여준 본격적인 애정소설로 파악하였다.19)
이상과 같은 <최척전>에 대한 연구 성과를 보면 작가에 대한 규명 연구,
주제 파악,소설사적 위상 등을 파악할 수 있다.그러나 작가가 소설을 통해
나타내려 했던 시대의식과 대외적 의식에 대한 연구가 다소 결핍됨을 발견하
게 된다.이로 인해 본고에서는 선학들의 연구 업적을 토대로 하여 작품의
문학적 성격과 작품에 반영된 작가의 시대의식과 대외의식을 중심으로 작가
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와 작품의 내용 속에 그의 생각
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피고자 한다.
17)박태상,『조선조애정소설연구』,태학사,1997.
18)김진규,「임란 포로소설 연구-<최척전>을 중심으로」,『동의어문논집』제11집,동의대 국어국문
학회,1998.
19)민영대,『조위한과 최척전』,아세아문화사,1993.
_____,『조위한의 삶과 문학』,국학자료원,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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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작가 조위한과 <최척전>의 형성 배경
1.조위한의 삶과 문학
1)한국 고소설의 실명 현상
한국 고소설의 특징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지만 작가론적 관
점에서 작가 失名 현상이 두드러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현상이다.현전
하는 고소설 작품 수는 약 1,270여 편으로 추정된다.20)그러나 이중에서 작자
의 이름이 알려져 있는 작품은 불과 50여 편을 헤아릴 뿐이다.그것도 작자
를 확연히 알 수 없는 경우까지를 포함한 숫자이다.나머지 작품의 대부분은
작자의 이름을 알 수 없다.그러다보니 작품에 대한 분석에서 일정 부분 한
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올바른 작품 분석을 위해서는 작가 연구가 선행되어
야 하기 때문이다.문학 작품이 작가의식의 산물이자,시대의 산물이라는 점
을 인지할 때 더욱 그렇다.그러한 측면에서 <최척전>은 작가를 분명히 알
수 있어 작품에 대한 분석이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심화되어 이뤄질 수 있다
는 장점이 있다.
그렇다면 왜 대다수의 작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았는지,반면
에 작가 실명 현상이 두드러진 시대에서 작가 ‘조위한’은 굳이 자신의 이름을
숨기지 않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에 앞서 당시 사회에서 관행적인 작자 실명 현상에 대한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는데,다음의 다섯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당시의 시대가 안고 있는 ‘소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인식 때문이
다.21) 조선시대에서 유학은 사상이나 정치적인 면에서 실질적이자,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학문적인 입장에서도 학문의 위계를 철학역사문학의 순
으로 순위를 매겨 왔던 것도 사실이다.여기에서 나온 것이 바로 ‘載道的 문
20)우쾌제,「고소설 명칭․총량 및 연구 경향의 통계적 고찰」,『인천어문학』제5집,인천대학교 국
어국문학과,1989,p.17.
21)김수중,『고전소설과 문학정신』,태학사,2007,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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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관’이고,이는 바로 이 시기를 대표하는 문학관이기도 했다.
조선 전기의 유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문학이란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道를 실천하는 방법론이라는 재도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22) 즉 道를
실어 나르기 위한 도구로서의 문학의 가치이지,문학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특히,소설이 갖는 문학적 특징인 비사실성과 허구성,상말의
사용과 문체의 천박성 등을 들어 당시의 지배층은 이를 배격하였다.
여러 유생들의 독서는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그 근본으로 삼고,『소학
(小學)』과『가례(家禮)』를 문호(門戶)로 삼아서 국가가 양성하는 방법을
따라야 한다.그리고 성현의 친절한 교훈을 지켜서 모든 선(善)이 본래
부터 자기에게 갖추어져 있음을 알고,옛날의 도가 지금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며,모두 몸으로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하여 체(體)를
밝히고,쓰임에 적합한 학문을 해야 할 것이다.그리고 제사자집(諸史子
集)과 문장,과거를 보기 위한 학업은 널리 통달하도록 힘쓸 것이나,마
땅히 내외본말(內外本末)과 경중(輕重),완급(緩急)의 차례를 알아서 항
상 스스로 격려하여 타락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그 외에 황당하고
요망하며 음란한 글은 모두 서원(書院)안에 들여오지 말 것이며,눈앞
에 가까이 하여 도를 문란하게 하고 뜻을 미혹(迷惑)하게 해서는 안 된
다.23)
지난번에 장필무(張弼武)를 불러 만나셨을 때,말씀하시는 중에 ‘장비
의 한 마디 소리가 만군을 달아나게 하였다고 한 말이 정사에는 보이지
않고,『삼국지연의』에만 있다고 들었다.’고 하셨습니다.이 책이 출간된
지 오래되지 않아서 소신은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그런데 둘레의 친
구들을 통하여 그 내용을 들어보니,심히 망령되고 허황함이 많다고 합
니다.천문지리와 같은 책은 전에는 숨겨졌다가 후에 드러나는 일이 있
기도 하였습니다.그러나 사기(史記)와 같은 경우,처음에 잃어버렸던
전(傳)은 후에 와서 억측하기가 어려운데도 설명을 덧붙여 늘렸으므로
22)최운식,『한국고소설 연구』,보고사,2004,p.42.
23)諸生讀書 以四書五經爲本原 小學家禮爲門戶 遵國家作養之方 守聖賢親切之訓 知萬善本具於我 信
古道可踐於今 皆務爲躬行心得明體適用之學 其諸史子集文章科擧之業 亦不可不爲之旁務博通 然當
知內外本末輕重緩急之序 常自激昻 莫令墜墮 自餘邪誕妖淫僻之書 竝不得入院近眼 以亂道惑志.李
滉,<伊山院規>,『退溪集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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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괴이하고 허황된 것입니다.신이 후에 그 책을 보니,과연 무뢰한
사람이 잡된 이야기를 모아 고담(古談)처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이것
은 이것저것 뒤섞여 무익할 뿐만 아니라,의리에도 심히 해롭습니다.주
상께서 우연히 한번 보시기는 하였지만,심히 미안스럽습니다.그 내용
중에서 말씀드린다면,동승(董承)의 의대조서(衣帶詔書)이야기나 적벽
전승(赤壁戰勝)대목 같은 것은 각각 괴이하고,황당한 일이거나 근거가
없는 허망한 말을 부연한 것입니다.주상께서 이 책의 근본을 모르실까
하여 감히 아룁니다.이 책은『楚漢衍義)』와 같은 책으로,이러한 종류
의 책은 하나가 아닌데,모두가 의리를 해치는 것들입니다.시문이 화려
하게 수식된 것은 오히려 괜찮은데,하물며『전등신화』,『태평광기』등
과 같은 책은 모두 사람의 심지(心志)를 오도합니다.주상께서 그것의
무망함을 아시고,이를 경계하신다면 학문의 공에 절실하실 것입니다.24)
위의 두 인용 글을 통해 당시의 유학자들 독서의 대상과 기준이 무엇인지
를 알 수 있다.독서의 대상은 유가의 경전이지 결코 소설이 아닐 뿐더러 소
설류는 ‘도를 문란하게 하고 뜻을 미혹하게 한다’하여 배격되었던 것이다.그
리고 소설이 배격된 이유는 소설의 내용에 담긴 허구성,즉 황당하고 요망하
며 음란하다고 한 것에 따른 것이었다.
소설은 이와 같이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소설이 갖는 문체적인 특징에서도
배격의 대상이 되었다.이것이 현실화 된 것이 바로 정조(1752~1800)의 문체
반정이다.
24)頃日張弼武引見時 傅敎內 張飛一聲走萬軍之語 未見正史 聞在三國志衍義云 此書出來未久 小臣未
見之 而或因朋輩間聞之 則甚多妄誕 如天文地理之書 則或有前隱而後著 史記初失其傳 後難臆度 而
敷衍增益 極其怪誕 臣後見其冊 定是無賴者裒集雜言 如成古談 非但雜駁無益 甚害義理 自上偶爾一
見 甚爲未安 就其中而言之 如董承衣帶中詔 及赤壁之戰勝處 各以怪誕之事 衍成無稽之言 自上幸恐
不知其冊根本 故敢啓 非但此書如楚漢義等書 如此類不一 無非害理之甚者也 詩文詞華 尙且不關 況
剪燈新話太平廣記書 皆足以誤人心志者乎 自上知其誣而戒之 則可以切實於學問之功也.선조 2년 6
월 임진조,『조선왕조실록』권2.
奇大升이 1569년에 선조 임금에게 올린 글이다.이글을 보면 그 당시 궁중에서의 소설의 독서
상황과 당시의 소설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다.이 글에서 기대승은 당시에 널리 읽혀지고 있던
『삼국지연의』,『초한연의』,『전등신화』,『태평광기』등의 소설이 끼치는 부정적 영향을 가리켰다.
소설은 정사에 비하여 ‘괴이하고 황당한 일’이고,‘근거 없는 허망한 말’로 의리를 해롭게 하고,
마음과 뜻을 오도한다고 하여 선조 임금에게 경계하신다면 학문의 공에 절실하실 것이라고 하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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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는 뜻이 순하면서 말이 서로 통해야 귀한 것이다.요즈음 이른바
기교경발(奇巧警拔)하다는 것을 내가 보니,초쇄(噍殺,소리가 슬프고
낮은 것,또는 가락이 유창하지 못하고 낮은 것)하고 비리(鄙俚)하지 않
은 것이 드물다.이것이 패해(稗海)의 수입을 금지하는 까닭이니,반드
시 문체를 변화시키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25)
위의 인용 글을 통해 당시 소설의 문체에 대한 인식,즉 ‘초쇄하고 비리하
여 사대부들이나 문인들의 문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인식을 명확
히 알 수 있다.
요컨대 당시의 소설은 허구적인 이야기로 개인적인 학문의 진보를 가로막
고,사회적인 악영향을 가져올 수 있는 피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소설을 본인이 창작했다고 이름자를 걸 수는 없었을 것이
다.이것이 바로 작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숨길 수밖에 없었던 주요 원인이다.
둘째,소설을 필사하거나 板刻하는 과정에서 작자 이름이 누락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26)소설이 언제 발생했느냐에 대한 논란은 많다.일반적인 입
장에서 볼 때 최초의 한문소설은 조선 세조 때 김시습이 지은『금오신화』로
인정한다.그러나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는 나말 여초의 <조신전>,<수이전>
등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소설의 발생 시기를 소급 적용하기도 한다.그러
나 소설에서 독자의 대중화는 17세기 이후에 와서 이루어졌음에 이견은 없
다.
소설이 대중화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많이 읽혀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
는다.그러나 조선시대 당시만 해도 소설의 유통 구조는 열악했다.초창기에
는 직접 손으로 필사하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15·6세기까지만 하
더라도 거의 모든 작품이 이 ‘전사’라는 방법에 의해 독자들에게 유통되었다.
채수의 <설공찬전>을 당시 사람들이 한문으로 베끼거나 언문으로 번역해서
읽었다는 사실이 전사 유통의 좋은 예가 된다.17세기에 창작된 <구운몽>,
25)敎曰 文字貴於意順而辭達 近日所謂奇巧警拔云者 以予視之 則其不涉於噍殺鄙俚者鮮矣 此所以禁
貿稗海 必以變文體爲眷眷也.『大東紀年』卷五.
정조 임금이 순정한 고문만을 인정하고,소설 같은 새로운 문체를 인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6)정주동,『고대소설론』,형설출판사,1966,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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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남정기>,<창선감의록> 등도 전사에 의해 유통되었고,그 후 사대부가
여인들이 탐독한 소설은 물론 낙선재본 소설들도 거의 전사에 의해 유통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작품이 읽혀지기 위해서는 유통이라는 전제조건이 붙는데,당시
의 유통체계로 볼 때 전사가 유일한 방법이었다.그러나 전사를 하는 과정에
서 과연 원작자의 원본에 얼마나 충실하였느냐는 하는 것은 속단하기 어렵
다.물론,전사자로서의 의무에 충실했다면 원본과 대조해 내용상의 차이가
없이 똑같겠지만,전사자 자체가 다양한 群이었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필요
성이 제기되면 누구나 전사가 가능했고,여기서 전사자는 전사자이기 전에
한 작품에 대한 독자일 수 있다는 점이다.독자는 작품에 대한 기대를 갖게
마련이고,작가의 의도나 서사 전개에 대한 불만을 가질 수도 있다.이러한
욕구를 전사의 과정에서 투영해 내는 것이다.즉 전사의 과정에서 필사자의
임의적인 첨삭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말이다.이로 인해 이야기의 기본 구조
는 같을지라도 표현의 방법에서 시작해서,전개 과정의 일정부분은 다시 가
감이 있게 된다.이렇게 완성된 작품에 작가가 누구인가를 따지는 일은 그다
지 의미 있는 일이 아니다.그러다보니 자연 작가가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는
견해이다.
또 소설 유통의 방법으로서 큰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18·9세기 국문소설
발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바로 소설 낭독자이다.이들은 소설
독자를 문자 해독력이 없는 평민층에까지 확대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
음은 물론,18·9세기 국문소설 발달의 기반을 다지는 데에도 기여한 바가 크
다 하겠다.청중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에 따라 강담사·강독사·
강창사로 구분되기도 했던 이들은 이야기를 얼마만큼 감칠맛나게 잘 전달해
서 청중들로부터 인기를 끄느냐가 중요한 관건이었지 작가가 누구였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대상이 아니었다.낭독사들에 의해 작품은 재해석되게 마련이
었기 때문이다.또 청중 역시 낭독사를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
있느냐가 중요했지 당시 작가가 누구였느냐도 중요한 대상이 아니게 된다.
그러나 보니 자연 작자의 이름은 누락되거나 잊혀지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셋째,이미 존재하여 떠돌던 설화를 수용하여 소설화하였으므로 자기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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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밝힐 수 없었다는 점이다.27)고소설 중에는 설화를 소재로 하여 구성한
작품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대표적인 설화 작품집『破閑集』,『補閑
集』,『櫟翁稗說』등의 시화류에 실린 이야기들과『於于野譚』,『東野彙輯』,『橋
漫錄』,『靑邱野談』의 야담집들에 실린 이야기의 대다수가 당시 전해 오는 설
화들을 채록한 것들이다.그러나 채록하는 과정에서 이야기는 구비문학적 성
격에 따라 가감이 이루어질 것이고,채록하는 작자 자신들도 앞뒤의 문맥이
나 채록 의도에 따라 일정 부분들은 윤색했을 것이다.이러한 이야기 구조를
토대로 본격적인 소설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춘향전>,<심청
전>에서 시작하여 <전우치전>,<임경업전>,<구운몽> 등이 그러하다.
한국의 대표적인 고소설 중 하나인 <춘향전>은 남원지방에서 전해 내려오
는 유명한 배경설화 ‘암행어사 설화’,‘열녀 설화’등이 기본적인 서사구조로 바
탕을 이루고 있다.여기에 당시 사회적인 문제로서 갈등의 화두인 ‘신분제’를
인간의 영원한 로망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뛰어넘어 민중의 염원인 ‘만인
평등’을 이뤄내고 있으니 이는 지극히 낭만적인 해결이자 아름다운 사랑이야
기로 갈무리 된 작품이다.이 대중적인 작품이 명창 판소리꾼들을 만나 더욱
인기를 구가하며 전국으로 확산,유통할 수 있게 된 것이다.특히 오늘날 전
하는 <춘향전>의 이본들은 당시 판소리 창자들의 개인적 취향에 따라 어느
정도의 첨삭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약간씩의 상이한 내용들이 기록으로 전
한 탓일 것이다.
이와 같이 일부 소설의 탄생의 경로 속에는 설화에서 소재를 취하고 거기
에 일정부분 작가의도의 첨삭 등이 이루어져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다.따라서 이렇게 탄생된 작품을 개인의 이름을 걸고 유통시키기는 힘들었
을 것이다.그러다보니 자연 작자 미상의 작품으로 남게 된 것이다.
넷째,여성 작가들로 추정되는 작품들이 있으나 여성의 경우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수 없었다는 점이다.이는 시대상황에 기인하는 것으로 조선 사회는 여
성에 대한 사회의 인식과 이해의 폭이 극히 좁았던 시대이다.28)그럼에도 고
소설 중에는 여성의 의식이나 심리를 잘 나타낸 소설이 많이 있어 여성 작자
27)최운식,「재생설화의 소설화」,『서원 방용구박사 화갑기념논총』,국제대학 인문사회과학연구소,
1975,p.185.
28)김수중,앞의 책,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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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등장을 추정할 수 있다.대표적인 예로 <박씨전>을 들 수 있다.<박씨
전>은 18세기 후반쯤의 작자 미상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박씨전>의 내용
을 살펴보면 남성인물과 여성인물이 능력 면에서 두드러진 대조를 보이며,
이 여성들의 대다수가 남성들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우월성을 보인다.특
히 신선의 딸인 박씨와 侍婢 桂花,만 리를 훤히 내다본다는 胡王后 馬氏와
女刺客 奇紅大 등 이 작품에서는 가히 여인 천하라 할 만큼 여성들이 출중하
고 남성보다 우위에 있다.작품에서의 주인공 역시 이 여성들이며 작품 전편
에서 눈부신 활약상을 보이는데,궁극에 가서는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해내
게 된다.이 영웅적인 여성인물,남성보다 더 우월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아낸
<박씨전>은 그야말로 여성 중심 의식의 소설이다.이런 여러 가지 점들을 통
해 볼 때 이 소설의 작자는 여성이 아니었는지 추측해 볼 수 있지만 작자가
일체 언급돼 있지 않아 입증하기는 어렵다.
남녀가 유별한 조선 사회에서 집 밖의 출입조차 지극히 통제적이고 사회생
활 자체를 꿈꾸기 어려웠던 여성에게는 떳떳하게 이름을 밝힐 수 있는 자리
가 많지 않았다.이런 한계 때문에 여성 작가들은 소설을 창작하고 나서도
자기의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하였을 것이다.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글을
알고 타고난 文才를 지닌 여성들이 있었음은 당연하다.이런 여성들을 중심
으로 당시 여성들,또는 자신들의 욕망과 갈등을 풀어줄 해결책으로 허구의
이야기인 소설은 아주 적절한 대리 만족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17세기 이후
소설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로 여성 독자와 여성 작자의 증가
를 꼽을 수 있을 것인데,여성에게 있어 소설은 경험하고 싶으나 경험할 수
없었던 세상 밖 이야기에 대한 정보지이자 욕망과 갈등 해결의 창구 역할을
했던 때문일 것이다.
다섯째,원고료에 해당하는 돈을 받고 작품을 썼을 경우에 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29)소설을 지으려면 상당한 식견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이러한 식견을 갖추고 있어 소설을 창작하고도 자기의
이름이 세상에 밝혀지기를 꺼려한 사람으로는 몰락 양반층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대대로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 데다가 생활 수단을 갖지도 못하였고,
29)조동일,『한국문학통사3』,지식산업사,1994,p.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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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공․상의 생활 수단을 갖지도 못하였으므로,경제적 어려움이 이만저만
이 아니었을 것이다.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세책가나 방각본 영업
을 하는 상인의 요구에 따라 소설을 써 주고 돈을 받아 생계에 보탤 수 있었
고,소설 속에 몰락한 자기의 처지,몰락하면서 겪게 된 세계와의 대결,그리
고 세상의 형편에 관하여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그래서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소설의 창작에 관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유충렬
전>·<조웅전>과 같은 유형의 군담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당쟁으로 실
세한 몰락 양반층이나 그 후손이라 추정할 수 있다.따라서 <유충렬전>·<조
웅전>과 같은 계열의 작품들은 몰락 양반들의 실세회복의식에서 쓰여졌을
것이라 생각된다.30)
이와 같은 이유들이 고소설의 특징 중 하나인 실명 현상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물론 그렇다고 유학자들에게 소설이 무조건적인 배격의 대
상이었던 것은 아니다.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소설에 대한 효용성이 제기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소설에 대한 효용성을 언급한 몇 가지 사례를 아래와
같이 살펴볼 수 있다.
金鰲居士가 新話를 전하였는데,
白月과 寒梅가 완연히 여기에 있었구나.
잠시 내게 빌려주어 병든 눈을 문질러 닦고 나니,
두통이 이에 따라 거뜬히 나았구나.31)
무릇 역대의 소설들이 있어 多聞에 도움을 주었고,옛날의 일들을
증명하기도 했으니 역시 무시할 수 없다.32)
시험 삼아『三國志』한 匣을 읽어보니 평론이 신기하여 볼만한 것이
30)조동일,『한국소설의 이론』,지식산업사,1977,p.432참조.
31)金鰲居士傳新話 白月寒梅宛在慈 暫借河西揩病目 頭風從此快痊之.金麟厚,『河西全集』.
김인후가『금오신화』를 빌려다 읽고 느낀 것을 시로 표현한 것으로『금오신화』의 내용이 자
신의 병든 눈을 맑게 하고 두통을 낫게 한다고 하였다.소설에 대한 긍정적인 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32)夫歷代之有小說諸書 所以資多聞 證考實 亦不可少也.李晬光,『芝峰類說』.
이수광은『芝峰類說』을 통해 소설은 견문을 넓히고 옛 일을 증명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소설
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며 효용성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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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았고,그 범례 또한 볼만하며,그 서문 역시 하나의 奇字로써 命意하
였고,글 쓰는 법 역시 신기하더라.33)
龍戰,鬼車,雊雜篇을
공자가 남겨둔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다.
말이 세상의 교화에 관계되니 괴이해도 무방하고
일이 사람을 감동시키니 허탄해도 재미있다.
河間傳 그 사연도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
毛穎傳 그것도 모두가 허구이지.
큰 함박의 옛이야기는 莊子의 수법이고
離騷 天問의 가사는 屈原의 필력이다.
여기에『剪燈新話』는 옛 수법을 본받았으니
도깨비 뛰놀며 魚龍도 춤을 춘다.34)
소설에 대한 배격론이 우세한 가운데 이와 같이 일부 몇 학자들을 중심으
로 소설에 대한 효용성과 그에 대한 가치가 언급되기도 한다.그러나 소설에
대한 효용론은 여전히 소수의 의견에 머물렀고 소설이 대중화된 것은 17세기
이후에 들어서의 일이다.
소설에 대한 배격론이 지배적인 가운데도 지금까지 알려진 중요한 소설과
작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시습(1435~1493):『금오신화』
채 수(1449~1515):<설공찬전>
33)試觀三國一匣 其評論 新奇多可觀 其凡例 亦可觀 其序文 亦以一奇字命意 而文法 亦甚奇.安鼎福,
『順菴雜錄』.
안정복은 당시 유행했었던 소설 <삼국지>를 읽고 이야기와 범례가 신기하여 글 쓰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언급하였다.역시 소설의 효용성을 인정하는 대목이다.
34)龍戰鬼車與雜 夫子不刪良有以 語關世敎怪不妨 事涉感人誕可喜 曾見河間記淫奔 復見毛穎錄亡是
濩落大瓠漆園吏 怪詭天問三閭子 又閱此話踵前踐 夔罔騰逴魚龍舞.金時習,<題剪燈新話後>,『梅
月堂文集』下.
김시습은 <剪燈新話>를 읽고 내용이 세상의 교화에 관계되니 괴이해도 무방하고 일이 사람
을 감동시키니 허탄해도 재미있다고 하였다.특히 <전등신화>를 읽고 ‘내 평생 뭉친 가슴 풀어
주네’라고 하는데,이는「전등신화」가 자신의 가슴에 맺힌 불만을 풀어주었다는 의미로서,소설
이 지닌 사회비판적 내용이 독자인 김시습에게 충분히 전달되어 당시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일
정 부분 불만을 해소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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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의(1475~ ?):<대관재몽유록>
신광한(1484~1555):『기재기이』
임 제(1549~1587):<화사>,<수성지>,<원생몽유록>35)
최 현(1563~1640):<금생이문록>
조위한(1567~1649):<최척전>
권 필(1569~1612):<주생전>
허 균(1569~1618):<홍길동전>
윤계선(1577~1604):<달천몽유록>
권 칙(1599~1667):<안여식전>,<강로전>
정태제(1612~1669):<천군연의>
김만중(1637~1692):<구운몽>,<사씨남정기>
조성기(1638~1689):<창선감의록>
홍세태(1653~1725):<김영철전>36)
이정작(1678~1758):<옥린몽>
박지원(1737~1805):<허생전>,<호질>,<양반전> 등
김소행(1765~1859):<삼한습유>
목태림(1782~1840):<종옥전>,<춘향신설>
심능숙(1782~1840):<옥수기>
정기화(1786~1827):<천군본기>
서유영(1801~1874):<육미당기>
남영로(1810~1857):<옥루몽>
박태석(1835~ ?):<한당유사>
정태운(1849~1909):<난학몽>
여기에 한문 단편 작자로서 이옥(1760~1812),김려(1766~1822),안석경
(1718~1774)등이 있으며,이 밖에 <일락정기>를 지은 ‘만와’,<청백운>을
지은 ‘초료산주인’,<절화기담>을 지은 ‘석천주인’,<광한루기>를 지은 ‘수산’,
35)<원생몽유록>의 경우 작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임제와 원호 설이 그것이다.
36)<김영철전>은 권혁래 교수는 최근 박재연 교수가 발견,소개한 장편의 한문 필사본 <김영철
전>을 토대로 원 작가로 ‘김응원’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양승민․박재연,「원작계열 <김영철전>의 발견과 그 자료적 가치」,『고소설연구』,제18집,한
국고소설학회,2004.
권혁래,「<김영철전>의 작가와 작가의식」,『고소설연구』,제22집,한국고소설학회,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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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선기>를 지은 한은규 등이 있으나,현재까지 이들에 대한 실증적인 자료
가 확보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이 중에 <일락정기>를 지은 ‘만와’는 이이
순(1754~1832)일 것이라는 학설이 제기되어 있다.이들 작가들을 종합해 볼
때 몇 가지의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다.
첫째,사대부 출신들로서 손꼽히는 문인 출신이 많다는 점이다.위의 작가
대다수가 당대에 인정받는 문인들임을 알 수 있다.
둘째,사대부 출신 문인들로서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하다는 점이다.
‘세조왕위찬탈’을 계기로 속세와 인연을 끊고 방외인으로 살아간 김시습,‘중
종반정’에 대한 측면 비판을 시도했던 채수,‘신분제’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내세우며 새로운 이데아를 꿈꾼 허균,양반계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사회
를 예견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해 낸 박지원 등이 대표적인 예로 제시될
수 있다.
셋째,강직한 성격으로 유배생활이 잦고 그만큼 굴곡 많고 일생이 불우했던
인물들이 많다는 점이다.조선 후기의 문인 김려(1766∼1822)의 경우,15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27세에 진사에 급제한 전도유망한 선비였으나 32세 되던
1797년,친구 강이천의 옥사에 연루되고 패사소품을 즐겨 썼다는 이유로 문
체 문제에 뒤얽히면서 10여 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그러나 이러한
유배생활은 오히려 그들이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문학적 안목을 기르는 역할
을 하게 된다.신광한 역시 1518년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류가 축출된 기
묘사화 때 기묘사림으로 몰려 여주에 칩거하면서 우울한 중년기를 보냈고,
명나라 대문장가 고천준을 맞는 문사의 엄선에서 뽑혀 문명을 떨쳤던 권필
역시 광해군의 妃인 柳氏의 아우 柳希奮 등 戚族들의 방종을 宮柳詩로써 비
방하여 親鞫 받은 뒤 유배되었다.귀양길에 올라 동대문 밖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주는 술을 폭음하고 이튿날 죽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이름이 알려진 고소설의 작자들은 대체적으로 사대부 출신으
로서 뛰어난 문재를 지닌 인물이 많다는 점,그러면서 동시에 불합리한 현실
과 타협하기 보다는 유배생활을 택할 만큼 강직한 성향을 지녔고 권력을 따
르거나 남의 이목을 중시하기보다는 자신에게 떳떳한 삶을 살아 왔다는 것들
이 인물 유형의 기틀을 이룬다.그리고 이들의 염원 또는 사회와 시대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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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불만 또는 욕구들이 소설에 투영되었다는 점 또한 익히 알려진 사실들이
다.특히 작자와 작품의 성향이 일치한 작품일수록 자신들의 작품에 애써 이
름을 감출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2)<최척전>의 작가
<최척전>의 작가가 조위한이라는 사실에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그
렇다면 조위한이 <최척전>의 작가로 정확하게 인정받은 근거는 어디에 있으
며,또 작가를 드러내지 않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조위한이 소설을 쓴 작자
로서 자신의 이름을 숨기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
다.
<최척전>의 작가가 ‘조위한’임을 알려주는 자료로는 우선 이본들을 제시할
수 있다.현존하는 이본은 한문본 5종,국문본 1종,한문 축약본 5종이 있
다.37) 이중 조위한이 <최척전>을 지었다고 하는 근거는 한문본인 서울대학
본 마지막에 쓰여 있는 ‘天啓元年 辛酉閏二月日 素翁題’라는 기록과,뒤를 이
어 작은 글씨로 ‘素翁趙緯韓號 又號玄谷’이라 한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고려
대학본에도 ‘天啓元年 辛酉閏二月日 素翁題’이라 되어 있다.여기서 天啓元年
은 明 熹宗을 원년으로 광해군 13년인 1621년을 지칭하고 玄谷,또는 素翁은
조위한의 ‘호’이다.또 李德懋의『靑莊館全書』에도 ‘내가 일찍이 소옹의 <최척
전>을 읽어 그 내용을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38)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척전>의 작자는 조위한임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학계에서 <최척전>에 대한 최초 언급은『조선문학사』에서 이명선이 제기
한 것이 처음이다.그는 고소설을 연대순으로 열거하면서 인조대에 조위한이
<최척전>을 지었다고 작자명을 분명히 하였다.이명선 역시 필사본의 마지막
부분에 근거하여 작자를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39)이어 문선규,김기동 등 다
37)지연숙,「<최척전> 이본의 두 계열과 善本」.『고소설연구』,한국 고소설학회,2004.
지연숙은 본 논문을 통해 규장각본,고려대본,간호윤본이 원본 계열에 속하며,김모본과 천리
대본은 변이가 심한 것으로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김모본을 거쳐 천리대본으로 나아갔다고 밝
힌 바 있다.이는 그간에 선본으로 알려진 것이 천리대본이라는 주장과 달라 관심을 끈다.특히
천리대본은 탈락과 변이가 잦고 오류도 많아 원본에서 가장 멀어진 이본이라고 했다.
38)族姪復初光錫條.余嘗讀素翁崔陟傳 而詳知也.李德懋,『靑莊館全書』第15卷 <雅亭遺稿> 7,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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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연구자들에 의해 <최척전>의 작자는 조위한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작자 생존 당시 또는 그의 사후 기록들 중 어느 곳에도
<최척전>에 대한 언급이 없어 미흡한 감이 남아 있음은 사실이다.그의 문집
인『玄谷集』과 송시열이 썼던 <神道碑銘>과 家藏 필사본 <年譜>,<行狀>등
어디에도 조위한의 다른 작품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만 <최척전>에 대한
기록은 없다.
<최척전>은 조위한이 작품을 발표하던 당대에도 이미 읽혔음을 알 수 있
다.작자와 동시대에 살던 이민성의 문집『敬亭集』에 ‘怪哉崔陟傳不知誰小作’
의 기록이 그것이다.40) 이처럼 조위한 당대에 <최척전>이 읽혀졌지만 작자
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그러던 것이 현전하는 사본에는 이름이 밝혀져
있다.작자보다 후대의 인물로서 전자에 언급한 이덕무의『청장관저서』의 기
록과 이수봉의 소장본『어우야담』의 사본에도 <최척전>의 작자가 ‘조위한’이
라는 기록이 전해진다.이로 미루어 <최척전>의 작자는 조위한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또 하나가 전자에서 언급한 이름이 알려진 사대부 작자들에서 찾을 수 있
는 공통점을 조위한에게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조위한의 <연보>와 <행장>에 따른 기록이다.이에 의하면 조위한의
가문 역시 선대로부터 혁혁한 전통으로 이어져 온 대표적인 명문가의 사대부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엄격한 아버지의 가르침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학
업에 정진하여 그는 형제들과 일찍이 학문에 일가를 이루었다.41) 그의 절친
한 친구였던 허균의 문집『惺所覆瓿藁』에는 ‘前五子詩’와 ‘後五子詩’가 소개돼
있는데,‘전오자시’에서 허균은 현곡을 가리켜 ‘문장이 빼어난 다섯 명 중 첫
째가는 인물’이라고 칭찬했다.탁월한 文才였음을 보여주는 말이다.그의 문
집인『玄谷集』등에 남겨진 700여 수의 漢詩에서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특히 그의 한시 중에는 雜體詩가 많다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잡체시는 기존
한시와는 다르게 표현 형식에서 다양한 변화를 가한 것으로 일부에서는 유희
39)민영대,앞의 책,『조위한의 삶과 문학』,p.41.
40)影印 韓國文學集叢刊 76,『敬亭集』卷之四,<題崔陟傳>條.
41)<行狀>,訓迫甚嚴家法 少長日必晨輿 盥櫛拜謁 唯謹有少失儀 卽公輒不降色 其他多類此 以故諸子
擧能啣訓懋學 卒有所成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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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위해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기존의 한시가 갖는 표현의 한계를 극복해
낼 수 있는 대안으로서 권필,성운 등 조위한의 師友들이 잡체시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42)
그러나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조위한의 인생은 그가 살았던 17,18세
기의 현실에서 세 번에 걸친 유배와 파직이 보여주듯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수차례의 무고와 유배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혼란했던 정치상과 백성
들의 곤궁한 삶을 그대로 표현한 <流民嘆>이라는 제목의 국문가사를 지어
광해군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그러나 <流民嘆>은 기록으로만 남아있지 안타
깝게도 현전하지 않는다.43) 57세 때(인조 1년,1623년)에는 仁城君을 비롯한
왕비의 친척과 임금의 친족들이 지나치게 恣行하자 이들의 죄를 논하기도 하
고44),왕비의 친척인 鄭百昌의 잘못을 논박하다 인조에게 미움을 사 외직으
로 쫓겨나기도 했다.이와 같이 탁월한 문인적 자질에 강직한 성향,그리고
실험정신이 강하고 현실 비판 또한 서슴지 않았던 조위한이었기에 아픈 시대
현실에 대한 모색의 일환으로 웅장한 스케일의 <최척전>을 창작할 수 있었
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위한의 생전에,또 그의 생전 기록에서 왜 <최척전>에 대한 언
급이 없는 것인가?이는 아마도 당시 팽배한 소설 배격론의 영향이었을 것이
라는 판단이다.‘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당시의 시각이 워낙 부정적이어서
조위한 역시 작품을 창작한 후 의도적으로 이름을 게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
인다.그러나 작품이 당시 사람들에게 읽혀지면서 작자가 누구인지 모르다가
조위한이 서서히 작자로 알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42)이에 대해서는 이희경의「조위한의 잡체시 연구」,경상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2002참조.
이희경은 이 논문을 통해 조위한의 잡체시 27수에 대한 주제를 분석하였는데,‘인생 무상과
은일 지향’,‘인생 비애에 대한 숭화의식’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다양한 표현 양식의 잡체시를 통
해 조위한의 실험정신이 잘 드러난다고 한 바 있다.
43)<유민탄>에 대한 기록은 조위한의 <연보>와 <행장>에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홍만종의
『旬五志』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44)爲仁城君所斥避啓,『玄谷集』권11,한국문집총간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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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조위한의 생애
玄谷 趙緯韓은 宣祖․光海君․仁祖 3대를 걸친 인물이다.그는 1567년 서울
의 서부 盤石村에서 趙楊庭과 谷山 韓氏 사이의 4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
다.어릴 때부터 학문에 매우 뛰어났고 특히 글 읽기를 즐겼는데,할머니가
그의 글 읽는 소리를 즐겨 듣곤 하였다.45)시에 대한 재주도 뛰어나 10세에
이미 주위를 놀라게 한 시를 지었고,특히 11세 봄에 친구들과 어울려 매화
와 버드나무가 봄을 다투는 전경을 보고 시를 지어 읽는 사람들의 칭송을 받
았으며,이해 겨울에는 전염병으로 인해 避接 나갔다가 죽을 위기를 넘기고
회복되자 시로써 아버지에게 자신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였다.46) 15세에는
『四書三經』을 외웠고,16세에 先秦의 고문을 널리 섭렵하였다.
그는 청년기에 들어서부터 여러 차례 鄕試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과거 시
험에 운이 없어서 늦은 나이인 35세에 이르러서야 겨우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이때 그는 윤근수의 추천을 받아 미관말직인 중림찰방에 임
명되었다.이어 선공감직장,주부,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다가47)광해군 1년
(1609)43세 때에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비로소 본격적인 관계 진출을 시
작하였다.48)성균관전적,좌랑겸춘추관기사관,예조정랑,지제교 등을 지냈다.
광해군 5년(1613)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파직 당하였다.인조반정으로(1623년)
재등용되어 사성겸지제교를 제수 받았으며,사헌부의 장령,집의,편수관 등
을 역임하였다.다음 해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토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
고,병자호란 때도 항전하였다.벼슬은 예조참의,형조․병조․공조참의에 이
45)<行狀>,生稟秀異 已有出群之氣 甫數歲受學 文理大闡 誦讀琅然 吳夫人素鍾愛必引置左右曰 此吾
耳邊絲竹也.
46)<年譜>,輿隣友作柳輿梅爭春詩 入題曰 相爭春色誰先後 陌頭楊柳溪邊梅 見者稱之 十二月得癘疾
是病也幾危 而甦才起作詩 送于判書公所曰 臥病南窓下 思親淚滿巾 父母在何處 遙知父母處 欲去病
未能.
47)<墓表>,詞業早成 顧多厄于有司 萬曆辛丑始登上痒 年已三十五歲 尋除重林督郵 陞少府監直長.
48)<世譜>,己酉增廣第二.
<墓表>,光海初載中文科第二名.
<光海君日記>,己酉出身.
<年譜>,己酉十月登增廣科第二人.
<行狀>,己酉登增廣殿試第二名.
<神道碑銘>,遂登己酉第.
위의 기록들에서 작자가 己酉年에 과거에 급제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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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렀다.
조위한은 명문장가로 광해군의 난정을 풍자하는 <流民嘆>49)이라는 가사를
지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저서로 문집『玄谷集』이 전하며,본고에서 고
찰하고자 하는 한문소설 <崔陟傳>이 있다.조위한이 남긴 글들은 대부분이
그의 문집에 실려 있는데 그가 11세에 지은 시,<流民嘆>,그리고 <崔陟傳>
등에 대한 언급은 없다.그 이외에도 그가 지었던 작품이 상당량 있다고 추
정할 수 있다.50)
조위한이 남긴 작품을 세 시기로 나눠서 살펴보겠다.
(1)은거생활 전 시기(1567~1618).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위한은 10세에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고,
11세 봄에 친구들과 어울려 매화와 버드나무가 봄을 다투는 정경을 보고 시
를 지어 읽는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이해 겨울에는 전염병으로 인해 避接
나갔다가 죽을 위기를 넘기고 회복되자 시로써 아버지에게 자신의 뜻을 나타
내기도 하였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족들을 거느리고 경기도 연천․토산
등지로 피난생활을 하다가 그는 유일한 혈육이던 어린 딸을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잃고 길가에 가매장한 후 시 <哀亡女>51)를 읊었다.임진왜란으로 인
하여 조위한이 가족을 잃은 가장 불행한 체험은 훗날 문학 활동을 하는 데
좋은 기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임진왜란이 끝난 후 그가 실의에 빠져 용
산에 살고 있을 때(선조 32년, 1599년)조찬한․권필․이안눌․임전과 함께
49)‘流民嘆은 玄谷 조위한이 지은 것이다.昏朝의 번거로운 정치와 列邑의 혹독한 賦稅를 개탄하여
그 정경을 자세히 엮어 놓았다.’
洪萬宗,『旬五志』(李民樹 譯),乙酉文庫 65,1974.
50)작자와 특별히 절친 교우 관계를 가졌던 허균의『惺所覆瓿藁』에는 그에게 보냈던 많
은 양의 편지와 그와 관련된 글들이 남아 있는데,조위한의 문집에는 허균에 대한 기
술이나 그와 관련된 작품이 전혀 없다.허균이 광해군 10년 역적으로 몰리어 사형 당
했고 그 후에도 伸寃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글들은 모두 삭제했을 것임은
명백하다.허균을 제외한 이때에 절친한 관계를 유지한 다른 사람들 - 권필,이안눌,
이항복 등 - 과 주고받았던 시들은 많이 전하고 있다.또 <流民嘆>의 경우는 나라의
어지러움과 백성들의 참상을 고발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崔陟傳>은 당시 소
설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지 못하였던 때문에 후손들이 문집을 편찬하면서 수록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이런 이유로 조위한이 후손이 문집을 만들 때 많은 글들을
삭제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51)『玄谷集』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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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일 동안 文酒之會를 즐겼다.헤어질 때 아쉬워하며 <余寓居龍山,與善
述․汝章․子敏․寬甫․留連十餘日,有文酒之會,將散,以五言近體,別汝章>52)
를 지었다.다음해 여름에(선조 33년,1600년)권필과 강화도의 마니산에서
독서하고 겨울에는 장성의 토천으로 가서 동생 조찬한,권필 등과 어울려
<土泉同宿聯句>,<土泉再會聯句>,<述懷聯句>53)를 지었다.이들이 지은 시
는『현곡집』과 조찬한의 문집인『玄洲集』,54)권필의 문집인『石洲集』55)에 다
같이 실려 있다.선조 36년(1603)에 윤근수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나갔으며,
다음 해에 그가 노량에 살던 황정욱을 방문하였을 때 시를 수창하였다.56)선
조 40년(1607)가을에 鴨島에서 崔笠․權韠과 <鴨島述懷>57)를 수창하였다.
조위한이 늦게 관계로 진출하여 광해군 2년(1610)8월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국의 풍물을 견문하고 여행하면서58) 많은 견문시 <遊太
白山>,<白馬江>,<在西湖>,<臯蘭寺次石洲韻>,<萬瀑洞遊楓岳時>,<靑鶴洞
次肅羽韻>,<渡臨津>,<波憾岳陽城>,<長城>,<大凌河>,<小凌河>,<過遼
寧衛>,<題滄浪亭>,<玉河館>,<秦皇島>,<入遼陽城>등과 가족과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시 <憶女兒>,<夢見少女>,<憶伯兄>,<憶舍弟>등을 지었고59),
권필의 부인이 죽었을 때 挽詩 <挽石洲內子>60)를 짓기도 하였다.이 시기에
명의 提督인 한만상과 시를 수창하기도 했다.조위한이 중국에 간 때는 마침
그의 아내가 임신 중이었다.그는 아내에게 반드시 아들을 낳아 달라 부탁하
고 중국으로 향하였다.조선시대 대표적인 사대부로 사당과 사찰을 지날 때
마다 찾아가 정성을 드렸고 <四月八日>을 비롯하여 <雙溪寺>,<禾嚴寺>,
<長安寺>,<新興寺>,<佛日>등 절,부처와 관련된 시를 지었다.그는 순탄
한 벼슬길을 예상했으나 광해군 5년(1613)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삭탈관직을
당하였다.광해군 9년(1617)이항복이 인목대비 폐출을 극력 반대하다가 북청
52)『玄谷集』권6.
53)『玄谷集』권10.<述懷聯句>가 끝난 다음 권필의 跋文의 내용은『玄洲集』,『石洲集』의 내용과
동일하다.
54)『玄洲集』권9.『玄谷集』의 내용과 같은 권필의 跋文이 있다.
55)『石洲集』권8.
56)『玄谷集』권5.
57)『玄谷集』에 <鴨島述懷>가 있음.
58)許筠,<送趙持世赴京序>,『惺所覆瓿藁』권5文部.
59)『玄谷集』권5.
60)『玄谷集』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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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유배 갈 때는 送別詩 <山壇次五峰韻贈別白沙相國>을 지어 전송하였다.
광해군 10년(1618)이항복이 유배지에서 죽자 애도의 시 <哭白沙李相國恒
福> 두 수를 지었다.61)이해에 가정생활이 어려워지고 세상을 잊고 속세와의
인연을 끊기 위해 온 가족을 이끌고 남원의 주포에 와서 은거 생활을 시작하
였다.
(2)은거 생활기(1618~1623)
조위한이 남원 주포에서 은거하는 동안에 뜻 맞는 벗들과 어울려 시를 짓
고 술을 마시고 여행을 즐기며 세상을 잊기 위하여 노력하였다.이곳에 머물
며 그는 도연명의 <歸去來辭>에 차운하여 지은 <次歸去來辭>를 통하여 세
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과 또 옛날부터 불우한 자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
에 슬퍼할 것이 없다는 것,두류산의 그윽하고 깊숙함을 바라보며 인간 세상
의 시비를 잊고자 하며,벼슬은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자연 속에
서 술을 즐기며 때에 따라 농사짓고 음풍농월하며 살고 싶다는 자신이 은거
하는 뜻을 나타냈다.62) 이 무렵 조위한이 동생 조찬한과 함께 몇몇 벗들을
대동하고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여행기록을 <遊頭流山錄>63)으로 남겼다.세
상일을 잊고자 한적한 시골에 은거하면서도 조위한은 당시 고생하는 백성들
의 모습과 망해 가는 나라의 현실을 목도하고 <流民嘆>이라는 한글가사를
지었고 나라 안에 크게 유행시켰으나 광해군에게 미움을 사 위기를 자초하기
도 하였다.64)<최척전>의 마지막 부분에,‘나는 남원 주포에 우거한 적이 있
었다.그 당시 최척이 때때로 나를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위와 같이 이야
61)『玄谷集』권6.
62)민영대,앞의 책,『조위한의 삶과 문학』,p.56.
63)『玄谷集』권14.
64)<年譜>,<行狀>,<神道碑銘>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仁祖實錄』(卷21,7年 己巳條)에도 仁祖가 趙緯韓을 弘文館의 校理로 발령하면서 그의 높은
文名과 <流民嘆>이 걸작임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緯韓少有文名 善諧謔 多爲禮法之士
所詘 昏朝時作流民嘆 備陳其時政亂民困之狀 一時傳之爲絶唱).
또 洪萬宗의『旬五志』(李民樹 譯,乙酉文庫 65권,乙酉文化社,1971,pp.265-268)에도,‘내가
우리나라 가곡 중에서 제일 좋다는 것만 몇 편 뽑아서 여기에 평가해 보기로 한다.…流民嘆은
玄谷 趙緯韓이 지은 것이다.昏朝의 번거로운 정치와 列邑의 혹독한 賦稅를 개탄하여 그 정경을
자세히 엮어 놓았다.이 글은 정협이 지었던 流民圖와 함께 서로 표리가 된다고 하겠다.’라고,趙
緯韓의 <流民嘆>에 대한 평가가 기술되어 있다.
<神道碑銘>,又作流民嘆一篇 極道人民愁苦邦家顚覆狀 主見而惡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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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였다’(余流寓南原之周浦 陟時來訪余 道其事如此)란 기술이 있다.조위한
이 주포에 살았을 때 <최척전>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주포에 낙향하고 온
것이지만 이 시기에 그는 문학 활동에 전념하였다.
(3)인조반정 이후(1623~1649)
조위한은 은거 생활을 하다가 인조반정을 맞아 노년의 나이지만 벼슬 생활
을 다시 시작한다.이때 인성군을 비롯하여 왕비의 가속과 임금의 친족들이
왕의 세력을 믿고 지나친 恣行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서 <爲仁城君所斥引避
啓>65)로 탄핵하였다.조위한은 이것 때문에 외직인 양양 도호부사로 쫓겨났
다.그 곳에서 재직하고 있는 동안에 큰 아들 倚를 사별하고 애도 시 <祭亡
子倚文>을 지었다.그는 만년에 들어 국화 가꾸기를 즐겨하였고 완상한 시를
지었다.66)
조위한은 평소에 사귄 대문장가 허균,권필,이안눌,임숙영,학자이며 정치
가인 김장생,박지계 등과 함께 통쾌하게 술을 마시며 詩會를 즐겼다.그의
문집에 실린 많은 시가 이런 상황을 잘 나타낸다.<醉贈浴川崔使君皓>,<與
天翁子敏夜醉秋娘家因往兩宜堂墟 二首>,<廣遠樓監司慶退甫 暹兵使朴叔燁爲
設餞宴醉後席上口號>,<夜宴樓舡醉歸>,<醉題在閒堂>,<醉呈體使四首> 등
시가 있다.또한 설악산,금강산을 여행하면서 지은 시 <河趙臺>,<鏡浦臺>,
<秘仙亭>,<永郞湖>,<三日浦>,<叢石亭> 등이 있다.허균은 조위한의 시
재능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칭찬하였다.
조지세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지명은 시에 있어서 바르지
않다.구름이 많고 꿈같은 혜택의 기운과 같았다.악양성의 물결이 유
감스럽게도 무릇 십자육자 지명에 위의 네 자를 더하여 그 힘을 씀이
두 자가 많은 것이 유감스럽다.어찌 감히 이치에 있는 것과 같아 살
피지 못한 공이겠는가?67)
65)『玄谷集』권11.
66)『玄谷集』권9.
67)趙持世嘗曰 我國地名入詩不雅 如氣蒸雲夢澤 波憾岳陽城 凡十字六字地名 而上加四字 其用力 只
在烝憾二字 爲功豈不省耶 此言亦似有理.許筠,앞의 책,卷25說部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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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필여장,이안눌자민,조위한지세 나의 재종형 허체자하가 어렸을
적에 친구 이재영과 함께 품성이 어질었다.다섯 사람의 문장이 때에
함께 힘을 써 세상에 떨쳤다.어찌 문인이 목숨에 재앙이 있는데 함께
있었겠는가.68)
위의 두 인용문을 통해 조위한이 문장에 뛰어났고 불우한 현실을 딛고 꿋
꿋하게 자신의 의지를 지켜나갔던 인물이면서 자신의 시 재능을 유감없이 발
휘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2.<최척전>의 형성 배경
1)가탁 방식과 역사적 사실
앞서 언급했듯 소설은 시대의 묘사이고 생활에 대한 표현이다.즉 소설은
시대와 생활의 총체적인 모습을 형상화하는 장르적 특징이 있다.이렇게 형
상화되는 소설의 모습은 작가의 의식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작가 의식의 결
과물이 소설로 태어나기 때문이다.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최척전>의 작
가는 조위한이다.따라서 <최척전>에는 조위한의 의식이 녹아져 있고 독서라
는 소통의 방법을 통해 독자는 그것을 읽어낼 수 있다.
<최척전>의 말미에는 작가가 작품을 쓴 동기가 제시되어 있다.
나는 남원 주포에 우거한 적이 있었다.그 당시 최척이 때때로 나
를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위와 같이 이야기하였다.그리고 그 전말
을 기록하여 후세에 인멸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나는 사
양할 수 없어 그 경개를 대략 기록하였다.69)
조위한의 <연보>에 따르면 실제로 그는 남원 주포에 우거한 적이 있다.그
68)權韠汝章 李安訥子敏 趙緯韓持世 而余再從兄許褅子賀 曁小時呢友李再榮汝仁 五人者 文章俱稀世
而窮於時亦同 豈文人結習 例厄於命也歟.許筠,앞의 책,卷二,詩部二,<前五子詩>.
69)余流寓南原之周浦 陟時來訪余 道其事如此 請乃記其顚末 無使湮沒 不獲已 略擧其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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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최척전>의 주인공인 ‘최척’을 만나 그의 기이한 인생사를 들은 경험이
있고 ‘최척’이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해 달라는 청을 함으로써 조위한이 기록
으로 남긴 것이 <최척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기록하는 방식을 일명 假託의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가탁의 방법은
당시 문인들에게 인기를 끄는 서사전개 방법 중 하나였다.조위한과 막역한
사이였던 권필의 <주생전>이 그러하고 작자 미상의 <운영전>도 가탁의 방
법을 취하고 있다.그 이전의 몽유계소설도 꿈을 가탁하여 작가의 의도를 표
출한 작품류이고 가전체 문학도 다른 사물을 빌려와 가탁의 방식을 사용하였
다.이와 같이 ‘가탁’이라는 방법은 당시 작가의 의도를 포장해 내기에 매우
적절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최척전>의 ‘최척’은 정말 가탁의 인물일까?우선 세 가지로 접
근해볼 수 있다.첫째,최척이라는 인물이 실존 인물인지의 여부이다.실존
인물이라면 <최척전>은 당시의 시대상을 그대로 비춰주는 다큐멘터리식 소
설이 되는 것이다.
‘최척’이라는 인물의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견해가 엇갈린다.양
승민은 실증 자료를 통해 실존 인물이라고 고증하였다.70) 그러나 양승민은
조위한과 최척과의 만남을 주선한 인물로 梁慶遇(1568~?)를 제기하는데,이
에 대한 입증 자료가 없어 단지 추정일 뿐이고,조위한의 연보나 행장 어디
에도 최척과 그에 관한 교우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뿐만 아니
라 당시 남원에서 기록으로 남겨진 임란에 대한 자료 어디에서도 ‘최척’에 대
한 자료는 없어서 <최척전>의 ‘최척’이『도탄집』에 나오는 실존 인물의 ‘최
척’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반면 <최척전>과 비슷한 서사구조를 가진 <홍도전>이라는 작품이 있다.71)
<홍도전>은 정유재란이 끝난 13년 뒤인 1610년에 남원부사로 부임한 어우당
유몽인이 남원 지역에서 들은 이야기를 채록해『어우야담』의 인륜편 ‘효열조’
70)양승민,「<최척전>의 창작 동인과 소통과정」,『고소설연구』제9집,한국고소설학회,2000.
양승민은 이 논문에서 작품에 등장하면서 실존 인물이었던 邊士貞의『桃灘先生文集』을 짤막
한 인용문을 통해 ‘최척’이 남원에서 살았던 실존 인물임을 언급했다.이 자료에 의하면 최척은
당시 변사정의 참모로 書記직을 역임하고 있었다.
71)<최척전>과 <홍도전>은 기본적인 서사구조가 동일해 영향 수수관계에 대한 논란이 있다.이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다음 장으로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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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기록한 것으로 남원 고을의 ‘정생’이라는 인물을 통해 전란의 비극을 표현
한 작품이다.<최척전>과 영향 수수관계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는 작품이기
도 하다.이로 보아 ‘최척’이라는 인물은 조위한이 임의로 끌어온 허구적 인물
일 가능성이 커진다.
둘째,소설화의 접근 과정으로서 ‘최척’을 앞세우고 작가의 의도를 간접적으
로 제시하는 방법이다.첫 번째에서 언급했듯 ‘최척’은 허구의 인물일 수 있
다.그러나 <홍도전>에 나오는 ‘정생’이라는 인물과 아주 유사하다.‘정생’은
실존 인물이다.그런 점에서 보면 ‘최척’은 허구의 인물이되 ‘정생’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에서 허구성을 강화한 작품이 <최척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다.게다가 <연보>를 통해 조위한이 중국을 동경해 왔고 중국여행을 6개월
정도 한 바 있으며,<최척전>에 나오는 3대 전란과 그로 인한 가족들의 죽음
등을 겪은 조위한의 실제적 체험이 <최척전>의 이야기와 상당 부분 유사하
다.그렇다고 보면 <최척전>의 탄생 배경에는 ‘작자 조위한의 실제 체험’과
‘<홍도전>에 실린 정생의 실화’그리고 ‘작가의 허구적 구성’이 3박자를 갖추
어 태어난 것이다.
즉 정생의 실화에 조위한의 체험과 문인적 재질이 합하여 <최척전>이 탄
생되었다.그리고 작자 조위한은 자신의 주된 의도를 <최척전>의 주인공 ‘최
척’을 통해 우회시켜 표현하였다.
그렇다고 볼 때 작가 조위한의 작자의식이 작품에서,그리고 주인공을 통해
서 어떻게 표출되었는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이 작업을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최척전>의 기본적인 서사구조 파악과 조위한의 사실적 체험에
대한 비교,대조가 있어야 한다.
먼저 최척전의 기본적인 서사구조는 다음과 같다.
① 최척과 옥영의 등장 및 소개
․임진왜란 때 최척이란 인물이 아버지와 남원의 만복사 동쪽에 산다.
․어려서부터 의기가 있었고 활쏘기와 사냥을 즐겨하나 학문에는 전혀
뜻이 없다.아버지가 최척을 정상사의 집으로 보내 공부를 시킨다.
․옥영이 서울에서 살다가 임진왜란을 만나 어머니를 모시고 나주 회진
에 피난하다가 남원의 정상사의 집으로 와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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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최척과 옥영의 혼인 과정
․정상사 집에서 옥영이 최척을 오랫동안 지켜본 다음 구혼을 뜻하는 시
를 보낸다.옥영의 종이 춘생이 둘의 중개자 역할을 한다.최척과 옥영
이 서로 편지를 보내고 서로 배필로 결정한다.최척이 아버지에게 혼
사를 주선해 줄 것을 아뢰고 최척의 아버지가 정상사에게 둘의 혼사를
성사시켜 줄 것을 부탁한다.
․옥영의 어머니 심씨가 최척이 가난하기 때문에 혼사를 거절한다.옥영
이 어머니를 설득하여 결혼 날짜로 9월 15일을 잡는다.
③ 최척과 옥영의 혼인 방해 요소(1차 이별)
․최척이 의병에 가게 되고 결혼 날짜가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
․옥영의 이웃에 양씨라는 부호가 이 틈을 타 정상사 부부에게 뇌물을
주고 옥영의 혼사를 부탁한다.
․옥영의 어머니는 양씨와 10월에 결혼하기로 날짜를 잡고 양씨와의 결
혼을 강행하려 한다.이에 옥영이 자살을 시도한다.
․다행히 회생되고 그 이후 누구도 양씨와의 혼사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④ 최척과 옥영의 결혼 및 몽석의 출생
․뒤늦게 최척이 귀가하여 11월 1일 옥영과 결혼한다.
․결혼 후 아이가 생기지 않자 부부가 만복사에 올라가 부처에게 기자정
성을 드린다.부처의 점지로 다음해 10월 등위에 어린 아이 손바닥만
한 붉은 점이 있는 큰 아들 몽석이 태어난다.
․행복한 결혼 생활이 계속되지만 부부의 시 화답과 미래에 불행이 닥칠
것을 예견하고 슬퍼한다.
⑤ 최척 가족의 이별(2차 이별)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최척 가족이 살고 있는 남원성이 함락된다.
․최척의 온 가족이 지리산 연곡으로 피난 간다.
․양식을 구하기 위해 최척이 구례로 나오던 그때 왜병이 연곡을 쳐들어
간다.
․피난민을 무수히 살상하고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간다.
․연곡에 남아 있던 최척의 가족도 포로로 끌려가고 이로 인해 이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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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최척이 가족을 찾기 위해 온 산과 강을 헤매다가 죽어 가는 춘생을 만
났을 뿐 아무도 찾지 못한다.
․몽석은 춘생의 등에 업혀 피난하다가 길가에 잃어버렸고 연곡사의 중
혜정이 데려다 양육한다.
․옥영이 왜병 돈우에게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간다.여러 번 자결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부처에게 계시를 받은 후 돈우와 함께 살면서 중국의
閩浙 지방과 琉球를 오가며 장사를 다닌다.
․최숙과 심씨는 연곡으로 피난하다가 왜병의 습격으로 가족들과 흩어진
다.
․왜병들이 물러난 후 연곡사에서 몽석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와 옛집에
서 산다.
⑥ 가족과의 이산 후 최척의 행적
․최척은 아내를 찾기 위해 명나라 군사 여유문을 따라 중국으로 가고
여유문의 집에서 살게 된다.
․여유문이 그의 동생을 최척에게 아내로 삼도록 권유하는데 최척이 거
절한다.
․여유문이 죽자 최척은 또 다시 갈 곳이 없게 되어 중국 명승지를 유람
한다.
․속세에 뜻을 잃고 방랑하다가 도술을 연마하러 청성산으로 가던 중 주
우라는 친구를 만나 그의 만류로 속세에 머물며 장사를 다닌다.
⑦ 옥영과의 재회
․경자년 4월 초하루 최척이 주우와 안남에 정박한다.
․이날 밤에 이웃 배에서 조선말로 외우는 염불 소리를 듣고 최척이 피
리를 분다.
․염불 소리가 갑자기 그치고 최척과 옥영이 지난 날 불렀던 시를 읊는
소리가 들려온다.이로 인하여 부부가 해후하고 항주에서 산다.
․최척과 옥영이 만난 다음 해 또 부처의 계시로 둘째 아들 몽선을 낳는
다.몽선도 역시 몽석과 같이 등에 붉은 사마귀가 있다.
⑧ 둘째 아들의 출생과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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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午年 몽선이 17세 되자 아내를 구하고자 한다.이웃에 홍도이라는 처
녀가 아내 되기를 자원한다.
․홍도가 젖을 떼기도 전에 그의 아버지 진위경은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조선에 구원병으로 출전하다가 돌아오지 않는다.그래서 조선으로 가
서 아버지를 찾는 것은 홍도의 소원이다.홍도는 다 자라기도 전에 어
머니마저 돌아가시어 이모의 집에서 길러진다.
․홍도의 뜻을 잘 아는 홍도의 이모가 최척 부부에게 청혼하여 이들이
결혼한다.
⑨ 가족과의 3차 이별과 포로 생활
․기미년 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이 일어나자 최척이 오세영에게 서기
로 뽑혀 요양으로 가게 된다.최척과 옥영이 다시 이별한다.
․명나라 군사들이 호족에게 대패하고 최척이 포로가 된다.
․큰아들 몽석의 만남과 포로 생활 탈출,남원으로의 귀향한다.이때 조
선에서 파병되었던 구원병들이 호족에게 항복하고 포로가 된다.최척
이 포로수용소에서 큰 아들 몽석을 만난다.
․최척 부자는 삭주 토병이었던 부자의 도움으로 수용소에서 탈출한다.
최척 부자가 은진에 이르렀을 때 최척은 등창이 심하여 사경을 헤매는
데 이때 마침 진위경을 만나 치료 받고 나아진다.셋이 함께 남원으로
돌아온다.
⑩ 남원에 있던 가족과의 재회
․남원에서 살아남아 있었던 아버지 최숙과 장모 심씨와 재회하게 된다.
․진위경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가 중국에 남아 있는 몽선의 장인임을 안
다.
․만력 연간에 조선으로 원정을 오고 주장의 뜻을 어기게 된다.주장이
장차 군법으로 다스리려고 하기에 밤에 몰래 달아나서 여기게 머물게
되고 영남 대구에서 박씨 사람의 집에 의탁해 침술로 생계를 유지해
온다.
⑪ 옥영의 귀국 결심
․옥영은 명나라 군사가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하려 하는데 부처
의 계시로 포기한다.조선인은 살아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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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귀국을 결심한다.
․몽선이 바다의 위험함을 이르며 만류하는데 홍도는 어머니의 뜻을 따
르도록 몽선을 종용한다.
․옥영이 삼국의 옷을 준비하고 몽선과 홍도에게 조선말과 일본말을 가
르친다.
․경신년 2월 이들이 중국을 출발한다.해로에서 중국인,일본인을 만나
위기를 당하나 그때마다 중국인,일본인 행세를 하여 위기를 넘긴다.
심한 폭풍을 만나 사경에 빠지지만 옥영이 부처에게 기원함으로 가까
스로 살아남는다.해적을 만나 배를 빼앗기고 무인도에 표류한다.
⑫ 남원으로 귀국 후 온 가족과의 해후
․조선통제사의 배를 만나 경신년 4월 순천에 이른다.
․이어 남원에서 온 가족이 해후한다.최척 부부가 만복사에 찾아가 부
처에게 감사의 제를 드린다.
<최척전>은 위와 같이 크게 12개의 서사 단락으로 나눠볼 수 있다.작품에
설정되어 있는 시대배경은 임진왜란인 1592년을 기점으로 정유재란을 거쳐
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이 있을 때까지 약 29년 동안을 다루고 있다.좀 더
상세히 밝히자면 선조 25년에서부터 광해군 13년까지 동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역사적 사실담이다.그리고 이런 시간 설정은 <최척전>의 작가 조위한이
이 시기에 직접 생존하였고,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호족이 명나라를 침입
하자 광해군이 강홍립을 장수로 하여 구원병을 보낸 역사적 사건을 직접 체
험하였거나 목도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척전>의 서사 단락을 보다 확장해 해석해 보면 동아시아 지역을 무대
로 3대 전란이 일어난 29여 년 동안 이산가족들의 재회 과정을 다룬 이야기
임을 알 수 있다.이 과정에서 주인공들은 3번의 이별과 3번의 재회를 거듭
해 반복하면서 전쟁의 참상과 그 직면한 현실에 대응하는 집념과 극복의 모
습을 담아내고 있다.
이 서사구조를 중심으로 조위한의 <연보>와 <행장>,그의 문집인『현곡
집』을 통해 드러나는 실제적인 삶의 모습과 비교해 보겠다.72)
72)민영대는 <최척전>의 작가가 조위한임을 알아내기 위해 후손들을 탐방하여 일화를 채록하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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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현상적 시공간
조위한이 <최척전>을 지은 시기 ‘天啓元年’은 그가 55세였던 광해군 13년
(1621년)에 해당한다고 이미 밝힌 바 있다.작품에 설정되어 있는 시대배경은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을 거쳐 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이 있을 때까지로 약
29년간에 해당한다.즉 조위한 역시 29년간의 작품의 시간을 직접 체험했다
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작품의 주요 배경으로 되어 있는 남원 역시 두 차례에 걸쳐 그가 10여 년
동안이나 살았던 지역이며,<최척전>을 썼던 곳이기도 하다.남원을 찾게 된
첫 번째 동기는 그의 나이 25세(1592년)되던 해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란처
를 물색하다가 어머니의 외척이 살던 남원으로 피란하게 된다.이때 첫 딸이
피난지에서 죽게 되는 비극을 겪고 26세에는 김덕령 장군의 수하에 들어가
왜적을 물리치는 일에 참여하고 명나라 군사들과 교류하였다.73)27세에는 어
머니 韓氏가 사망하고 3년 喪을 마친 후 30세에 상경한다.
두 번째는 조위한이 좀 늦은 나이에 35세의 나이에 ‘진사’로 출사하고 관직
을 제수 받으나 남원에 있던 어머니의 묘를 너무 사치스럽게 고향으로 옮겼
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직 당하였다.조위한이 47세(1613년)되던 해에는
며,<漢陽趙氏年譜>를 입수하였으며,28세손 趙誠明을 만나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家藏 筆
寫本 <玄谷公年譜>와 박세채의 문집인『南溪先生文集』에 실려 있는 <知中樞府事玄谷趙公行
狀>을 입수하였고 후손들 집안에 흩어져 있던『玄谷集』도 확인한 바 있다.이로 인해 조위한의
실제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했다.
73)<神道碑銘>,先是十餘年間倭寇猶未平 嘗從金將軍德齡 試軍旅事 天將有愛公者 公欲隨入朝中博觀
天下.
김덕령(1567~1596)은 본관 광산.자 경수(景樹).시호 충장(忠壯).광주(光州)출생.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장성현감 이귀(李貴)의 천거로 종군 명령이 내려졌으며,전
주의 광해분조(光海分朝)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았다.1594년 의병을 정돈하고
선전관이 된 후,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여러 차례 왜병을
격파하였다.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을 장살(杖殺)하여 체포되었으나,왕명
으로 석방되었다.다시 의병을 모집,때마침 충청도의 이몽학(李夢鶴)반란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자 도중에 회군하였는데,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체포·구금되었
다.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 2)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고,1668년 병조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1678년(숙종
4)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고,1681년 병조판서에 가증(加贈)되었다.영조 때 의열사(義烈祠)
에 형 덕홍(德弘)·아우 덕보(德普)와 병향(竝享)되었고,1788년(정조 12)좌찬성에 가증되었다.
1974년 광주 충장사(忠壯祠)를 복원하여 충훈을 추모하고 있다.생애와 도술을 묘사한 작자·연대
미상의 전(傳記)소설 <김덕령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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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옥사에 연루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게 되는데,이때 자결하려 하나 형의
만류로 그만 두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옥에서 풀려난 후 52세(1618년)되던
무오년(광해군 10년)조위한은 온 가족을 거느리고 남원의 주포74)로 이주하
게 된다.75)가정생활이 어려워지고 세상이 점차 어수선해지자 가족을 이끌고
남원의 남쪽 주포로 이주하여 은거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76) 주포에서 은거
생활을 하던 중 <次歸去來辭>를 지었는데,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과
또 옛날부터 불우한 자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슬퍼할 것이 없다는 것,두
류산의 그윽하고 깊숙함을 바라보며 인간 세상의 시비를 잊고자 하며,벼슬
은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자연 속에서 술을 즐기며 때에 따라 농
사짓고 음풍농월하며 살고 싶다는 자신이 은거하는 뜻을 나타냈다.77)광해군
13년(1621년)에 주포에 머물면서 당시 백성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과 부역에
시달리는 참상을 목도하고 <流民嘆>이라는 우리말 가사를 짓기도 하였다.현
실을 비판한 이 노래가 나라 안에 크게 유행하여 광해군에게 미움을 받아 위
기를 자초하였다.78)
한편 <최척전>에서의 남원은 ‘최척’의 고향이자 사랑하는 아내 옥영을 만
났던 곳이고 동시에 가족들이 모두 함께 행복한 삶을 누렸던 유일한 공간이
다.전란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졌던 최척의 가족들이 결말에 가서 다시 모두
남원에서 해후하게 되며 해피엔딩하게 되는 것도 ‘남원’이라는 공간이 지닌
마음의 안식처이자 유일한 행복 공간으로서의 의미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볼 때 조위한에게서 ‘남원’은 비극적인 장소이자 은일의 공간이다.
조위한이 남원을 찾게 된 이유가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에서 피란처를 찾았던
연유이고,그 와중에 딸의 죽음과 모친상을 당하게 된다.그가 두 번째로 ‘남
74)‘주포’는 현재 사용되지 않는 지명이다.『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남원에서 15리 떨어진 곳이라
표기돼 있『남원지』에는 주포가 옛 행정구역으로 ‘周浦坊’이었으며,뒤에 주포방이 현재의 주생
면 제천리로 바뀌었다고 기록돼 있다.
75)이 사실은 그의 <행장> -‘公與諸遂被逮 居數日而釋 自此禁錮 戊午捲家還南原 有終焉之計 復次
淵明歸去來辭 以見志.’<연보> -‘戊午 公五十二世 正月 家下南原 卜築干周浦蓼水之上’등의 가
록을 통해 알 수 있다.
76)<年譜>,丙丁之後奸佞擅權 威福自作胸襟孔棘 而其中有相功之日 以匡誘批以利害 公自是絶迹交遊
杜門堅守 又恐有無妄之禍 以爲遠遁之計.
<行狀>,公卽南歸築室于蓼水之上 日與一二故人賦詩觴詠 翛然與世相亡 其所以潔身遠遯婆娑丘園.
77)민영대,앞의 책,『조위한의 삶과 문학』,p.56.
78)<神道碑銘>,又作流民嘆一篇 極道人民愁苦邦家顚覆狀 主見而惡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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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을 찾은 것도 그의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이다.이 시기에 그는 거기
서 은일사상을 실현할 수 있었다.따라서 조위한에게 ‘남원’이라는 공간은 가
장 힘든 시기의 ‘은일의 공간’이자 ‘도피의 공간’이기도 하다.
한편 전란을 피해 옥영의 피난 행로는 작자인 조위한의 피란 행로와 아주
유사하다.임진년에 옥영이 서울에서 살다가 난을 피해 나주,회진을 거쳐 어
머니의 외척이 살던 남원으로 와서 정상사 집에 의탁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 비춰 <최척전>은 조위한의 삶의 체험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
을 뿐 아니라 ‘남원’이라는 공간이 갖는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물론 최
척과 조위한이 느끼는 ‘남원’의 공간 이미지는 정반대이지만,가장 어려운 시
기를 ‘남원’에서 지냈던 조위한이니만큼 ‘남원’이 ‘마음의 안식처’또는 ‘행복의
공간’으로 영위되기를 꿈꾸었을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조위한의 염원이 작품
<최척전>에서 최척의 실제적인 고향이자 마음의 안식처이고 기적적인 재회
의 장소로 ‘남원’을 택하게 했던 것이다.
3)가정사의 체험
<최척전>에서 두 주인공 최척과 옥영의 결연은 임진왜란 당시 남원에서
이루어진다.전란을 피해 남원으로 피난 온 옥영이 최척을 알게 되고 옥영의
적극적인 구애와 서로의 의사 타진을 거쳐 계사년인 1593년 두 사람은 결혼
에 이르게 된다.그런데 두 주인공의 이 결혼 대목은 조위한의 동생인 조찬
한의 결혼과 여러모로 유사하다.서울 출생인 조위한과 조찬한이 임진왜란을
만나 남원으로 피난 오게 된 점,그리고 거기서 동생 조찬한과 나주가 고향
인 고흥 유씨와 결혼을 올린 점,결혼을 올린 연도가 계사년이 1593년이라는
점이 모두 동일하다.즉 최척은 실제 인물인 동생 조찬한을 근간하여 탄생한
인물이라는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다만 조찬한의 아내 유씨는 정유재란
을 당하여 절사하게 되는 비운을 겪는다.반면 <최척전>에서 최척은 사랑하
는 아내와 세 번의 이별과 만남을 견뎌내며 다시 모든 가족이 함께 재회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막을 내린다.
실제 동생 조찬한을 대상으로 최척을 설정하였다면 조위한은 세 차례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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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을 통해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이별을 어떻게든 거부하고 싶거나 과거를 보
상받고 싶었을 터인데,이러한 의도적인 포석 하에 구성되어진 것이 바로
<최척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위한은 19세이던 1585년에 남양 홍 씨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얻는
다.그러나 임진왜란을 당하여 피난길에 오르던 길에 유일한 혈육이었던 딸
을 굶주림으로 잃게 된다.첫 부인과도 정유재란으로 사별하게 되어 두 번째
부인을 맞게 되나 그녀에게서도 아들을 얻지 못하고 딸만 두게 된다.그러다
보니 대를 잇고 가문을 이어줄 아들에 대한 조위한의 염원은 남달랐을 것이
다.그러던 광해군 2년 8월인 1610년 예부랑중으로 재직하던 때 사은사 서장
관으로 중국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이때가 마침 부인이 임신 중이었던 시기
이다.조위한은 조선을 떠나면서 부인에게 ‘반드시 아들을 낳아 나를 기다려
달라’79)고 당부할 정도로 아들을 간절히 원하였고 중국으로 향하는 길에도
그의 마음은 오직 아들을 얻고 싶은 마음뿐으로 사당이나 사찰을 지날 때마
다 들어가서 부인이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기원하였다.결혼 후
20여 년이 지나도록 아들을 갖지 못한 그의 자식에 대한 정성을 읽어낼 수
있는 대목이다.조위한은 45세가 된 1610년에서야 겨우 첫 아들 倚를 안아볼
수 있었고 5년 후 둘째 아들 億을 얻게 된다.
이와 같이 아들이 없어 근심하면서 자식을 갈구하는 염원은 <최척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최척이 아내를 맞이한 후로 원하는 바가 뜻대로 이루어졌고 가업도
점차 넉넉하게 되었다.하지만 후사가 늦어지는 것이 늘 근심이었다.
그래서 매월 초하루 날에는 부부가 만복사로 가서 기도를 올렸다.그
다음해 갑오년 초하룻날에도 다시 만복사로 가서 기도하였다.그날 밤
장육금불이 옥영의 꿈에 현신하였다.“나는 만복사의 부처라오.그대의
정성을 가상하게 여겨 기특한 사내아이를 점지해 줄 것이야.아이를
낳으면 반드시 이상한 징표가 있을 것이야.”때가 이르자 과연 한 사
내아이를 출산하였다.그런데 아이 등에 어린애 손바닥만한 붉은 점이
있었다.드디어 그 아이 이름을 몽석이라 하였다.80)
79)<行狀>,必生男子 以待吾還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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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인용문에서와 같이 최척은 결혼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자식이 없자
늘 근심을 갖고 절을 찾아가 지성으로 빌기를 반복한다.그리고 결국 장육금
불의 현신을 통해 꿈에도 그리던 사내 아이 둘을 차례로 점지 받게 된다.
<최척전>과 조위한의 실제의 모습이 똑같은 대목이다.그러나 조위한의 장남
‘倚’는 몸이 약해 안타깝게 16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게 된다.이 슬픔은 그가
지은 祭文을 통해 애절하게 표현된다.
간절히 자식을 염원하며 기원했던 조위한의 실제적인 체험과 바람이 <최척
전>에 그대로 반영되는 한편,<최척전>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큰 아들 몽
석을 기적적으로 다시 만나는 장면을 통해 조위한은 자식을 잃은 슬픔을 의
도적으로 거부하며 다시 재회를 이끌어 낸 것으로 풀이해 볼 수 있다.
4)중국문학에 대한 관심
조위한은 어려서부터 중국에 대한 관심이 아주 컸다.그와 관련한 기록인
<神道碑銘>,<行狀>등에 따르면 조위한은 열다섯,열여섯 살 때 이미 경서
를 외웠으며 先秦古文을 널리 섭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문중에서 전하는
<年譜>나 <墓表>등 작자에 관한 여러 기록에서도 그가 중국의 전적을 두루
섭렵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조위한의 문집인『玄谷集』의 발문을 쓴
조경은은 조위한이 어려서부터 문장을 좋아하여 先秦과 兩漢의 문장이 아니
면 읽지 않았고『太史』와『戰國策』에 심취한다고 하였다.81)이경석은 서문에
서 조위한이 先秦과 兩漢,魏晋의 고문을 안 본 것이 없었으며『詩經』을 읊
어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킬 정도라고 하였다.82) 이것으로 보아 그가 일찍부
터 중국의 고전에 박식했음을 알 수 있다.이렇게 조위한이 어려서부터 중국
문화를 많이 배웠고 문물이 찬란했던 중국에 대한 관심과 동경이 강할 수밖
80)본 논문에 인용된 <최척전>의 번역문은 민영대의『조위한의 삶과 문학』을 참고하였음.
陟娶妻之後 所求如意 家業稍足 而常患繼嗣之尙遲 每以月朔 夫妻往禱於萬福寺 明年 甲午元月 又
往禱之 其夜丈六金身 見於玉英之夢曰
“我萬福寺之佛也 我嘉爾誠 錫以奇男子 生必有異相”
及期而果生男子 背上有赤痣 如小兒掌 遂名曰夢釋.
81)조위한,『玄谷集』,조경의 跋文.
82)위와 같은 책,이경석의 序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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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없었다.
한편 조위한은 벼슬에 오르기 전에 그와 막역한 친구인 허균과 중국 여행
의 험난함을 말하자 조위한은 “우리들이 중국에 태어나지 못한 것이 이미 불
행이라 하겠는데 하물며 행로의 수고로움으로 위대하고 장려한 구경을 폐할
것인가,이는 우물 안 개구리의 소견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 하면서 자신이
과거에 급제하여 사신으로 발탁되면 반드시 함께 중국을 여행을 하기로 약속
하기도 하였다.83)중국에 태어나지 못한 것이 이미 불행이라 생각할 정도로
중국에 대한 동경을 나타냈다.행로가 고생스러워도 각오하려는 의지가 엿보
였다.조위한이 중국을 얼마나 동경했는지,중국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였
는지,중국을 얼마만큼 긍정적으로 생각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광해군 2년 8월(1610년)조위한이 예부랑중으로 재직하던 중 조위한은 때
마침 꿈에도 그리던 중국 여행의 기회를 잡게 된다.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
라에 갈 수 있게 된 것이다.실제로 조위한은 중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느낀
것을 시로 나타내는데,대표적인 작품으로 <渡三又河是日大風>,<大凌河>,
<小凌河>,<過寧遠衛>,<謁夷濟廟>,<入遼陽城二首>,<過李提督如松祠>,
<長城>,<山海關>,<波撼岳陽城>,<題滄浪亭>,<玉河館>,<秦皇島>,<在
西湖>,<遊太白山>84)등을 들 수 있다.이 시들이 지명이나 사당,성 이름을
제목으로 삼아 조위한이 행로를 알 수 있다.그리고 이런 여행 체험은 실제
로 작품 <최척전>에 잘 반영되어 나타난다.특히 <최척전>의 주인공인 최척
의 旅路 地域으로 소개되는 곳곳이 사실 조위한이 이때 당시 거쳐 갔던 지역
이었음을 알 수 있기도 하다.뿐만 아니라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중국고사
의 활용도 중국에 대한 동격의식이 <최척전>에 녹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
들 중 하나이다.
특히 옥영이 정상사 집에서 공부하는 최척의 모습을 살펴보고 자신이 의탁
할 만한 낭군이라고 생각하고 최척에게 청혼의 뜻이 있는 <摽有梅>를 보내
면서 두 사람의 결연은 시작되는데,<摽有梅>는 중국『詩經』의 召南篇에 실
린 고사로 유명하다.<摽有梅>는 매실 열매를 던지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여
인의 노래로 특히 혼기에 차 있는 여인이 구혼의 뜻을 전하는 시로 알려져
83)허균,『惺所覆瓿藁』卷5,文部,<送趙持世赴京序>.
84)조위한의『玄谷集』에 수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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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데,이를 <최척전>에 인용한 것이다.
또 <摽有梅>를 받은 최척이 옥영에게 답신한 글에서 중국 고사의 인용 대
목이 나온다.
아침에 글을 받고는 제 마음이 감동하였습니다.다시 시녀를 만나니
기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매양 거울 속의 그림자만을 바라볼 뿐이
었습니다.또한 그림 속의 사람을 불러낼 수도 없었습니다.거문고 소
리로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상자 속의 향을 훔칠 수 있다는 것을 모르
는 바가 아닙니다.하지만 봉래산이 얼마나 깊으며 약수가 얼마나 멀
리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이리저리 궁리하다 보니 심신이 모
두 지치고 말았답니다.그런데 오늘은 뜻밖에도 양대의 비가 홀연히
꿈에 나타나고 서왕모의 서신이 문득 도착하였습니다.속히 진진의 우
호를 맺음으로써 월하노인의 인연을 이룰 수 있다면 삼생의 소원을 이
루어 동혈의 맹세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글로 말을 다 적을 수
없으니 어떻게 마음을 모두 전할 수 있겠습니까?85)
여기서 시녀(靑鳥)는 반가운 使者나 편지를 이르는 말로 푸른 새가 온 것
을 보고 동방삭이 서왕모의 사자라고 한 漢武의 고사에서 유래한다.<최척
전>에서 ‘청조’는 최척에게 글을 전해준 옥영의 시비 춘생을 가리키는 말이
다.
거문고 소리로 마음을 움직이는 것(琴心 可挑)은 司馬遷의『史記』의 <司馬
相如列傳>의 ‘而以琴心挑之’에서 유래한 고사이다.한나라 때 卓王孫은 음율
을 좋아하고 과부가 된 卓文君이라는 딸이 있다.司馬相如가 卓文君의 마음
을 유혹하기 위하여 거문고를 타고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전한다.여기 ‘琴
心 可挑’는 거문고 소리에 실은 탄주자의 마음이다.즉,여자의 마음을 움직
이려고 거문고를 타는 사람의 마음을 뜻하는 것이다.상자 속의 향을 훔칠
수 있는 것(篋香 可偸)은『晉書』<賈謐傳>의 ‘韓壽偸香’에서 유래한 고사이
다.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남녀가 결합함을 이르는 말이다.봉래산이 얼마
85)朝承玉音 實獲我心 卽逢靑鳥歡喜難勝 每憑鏡裡之影 難喚畵中之眞非不知琴心 可挑篋香 可偸而實
未側 蓬山幾重 溺水幾里 經營計較之際 鹹已黃 而項已枯矣 不意今者陽臺之雨 忽然入夢王母之書
遽爾來報倘 成秦晋之好 結月老之繩 則庶遂三生之願 不偸同穴之盟 書不盡言言豈悉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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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깊으며 약수가 얼마나 멀리 있는 것(蓬山幾重,溺水幾里)에서 ‘蓬山’은 중
국 전설에서 나타나는 가상적 靈山인 三神山 가운데에 있으며,신선이 살고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다고 한다.또 蓬丘,蓬島,蓬萊,蓬山,蓬壺이라고 부른
다.‘溺水’는 신선이 살았다는 중국 서쪽의 전설적인 강이다.길이가 3천 리나
되며,부력이 매우 약하여 기러기의 털도 가라앉는다고 한다.‘蓬山幾重,溺水
幾里’은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과 가깝게 있으면서도 쉽게 만날 수 없고 안타
깝게 여기면서 인용한 고사이다.심신이 모두 지치고 말았다는 것(馘已黃,而
項已枯矣)은『庄子』의 <列禦寇> ‘槁項黃馘’에서 유래한 고사이다.사람의 목
이 말라빠지고 얼굴이 누렇게 되고 건강하지 않은 모습을 형용한다.
양대의 비(陽臺之雨)는『文選』에 실린 초나라 宋玉의 <高唐賦>의 ‘巫山之
夢’또는 ‘巫山之雨’에서 유래한 것이다.남녀간의 密會나 情交를 이르는 말이
다.중국 초나라의 襄王의 선왕이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무산의 神女를 만
나 즐거움을 누렸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陽臺’는 四川省의 巫山縣 부근의
산 이름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남녀가 密會하는 곳이라 한다.서왕모의 서
신(王母之書)은 서왕모가 동방삭에게 보낸 편지로 반가운 글이라는 뜻이다.
서왕모는 먼저『山海經』에서 나타난다.중국 崑崙山에 사는 사람 얼굴에 호
랑이의 이빨,표범의 털을 가진 신선이라고 한다.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불사
의 약을 가진 선녀라고 전해진다.漢代에 서왕모의 이야기가 민간에 널리 퍼
졌다.진진의 우호를 맺는 것(成秦晋之好)은 춘추전국시대 秦과 晋나라 사이
에 대를 이어 혼인을 맺던 세의가 있었음을 이르는데,전하여 남녀가 결혼하
는 것을 말한다.월하노인의 인연을 이루는 것(結月老之繩)은 중국 당나라의
韋高가 달밤에 어떤 노인을 만나 장래의 아내에 대한 예언을 들었다는 데서
유래한다.전설에서 월하노인이 가지고 있는 주머니의 붉은 끈으로 남녀의
인연을 맺어 준다고 한다.여기서 최척이 옥영과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결연
을 이루고 싶다는 뜻이다.이 두 고사는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하는 것을 말
한다.동혈의 맹세(同穴之盟)는『詩經』의 <王风·大车>의 ‘谷則異室,死則同穴’
에서 유래한 고사이다.부부가 죽어서 같은 무덤에 묻힌다는 맹세로,흔히 부
부의 금슬이 좋음을 비유한다.여기서는 최척은 옥영에게 ‘부부가 되자는 맹
세’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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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서울 도성에서 생장하였기 때문에 여인의 정정한 행실에 대하
여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그런데 불행하게도 일찍 부친을 잃었고 자
라서는 난리까지 만났습니다.혼자서 홀어머니를 섬기며 형제도 없이
살면서 남방으로 이리저리 떠돌다 친척에게 의탁하였던 것입니다.나
이 이십이 다 되도록 지아비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이제 하루아침에
전쟁이 터져 도적들이 횡행하고 있습니다.옥 같은 몸을 지키기가 쉽
지 않을 것이며,강포한 자들의 추행을 면하기 어려울까 항상 두렵습
니다.그 때문에 늙은 어머니도 상심하여 저의 신세를 염려하고 계십
니다.그러나 걱정스러운 바는 오히려 넝쿨풀이 의탁할 만한 곳은 반
드시 큰 나무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인생 백 년의 고락이 실로 남
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만일 그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평생을 바라보며 살 수 있겠습니까?그런데 근래 낭군을 뵈오니 말하
는 소리가 종용하고 몸을 놀리는 모습은 한아하였습니다.그리고 성실
하고 믿음직한 기색이 환하게 얼굴에 드러나 있었습니다.훌륭한 지아
비를 구하려 한다면 그대를 버려두고 다시 누구를 얻을 수 있겠습니
까?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그대의 첩이 되는 편이 나
을 것입니다.하지만 저는 운명이 기구하니 낭군에게 합당하지나 않을
까 하여 두렵습니다.어제 시를 보냈던 것은 음란한 생각을 가지고 했
던 것이 아니었습니다.다만 낭군의 태도를 헤아려 보고자 하였을 뿐
이었습니다.제가 비록 보잘것없으나 애초 저자 거리의 여자는 아니랍
니다.어떻게 남몰래 담을 넘어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반드시 부모님
께 알리고 혼인의 예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그렇게만 된다면 정절
과 믿음을 스스로 지킬 것입니다.감히 남편 반드는 일을 게을리 할
수가 있겠습니까?시를 던져 먼저 욕되게 하였고 스스로 중매하는 더
러운 행실을 다시 저질렀습니다.이제 다시 사사로운 편지를 주고받고
자 한다면 더욱 유한한 정조를 잃게 될 것입니다.이제는 서로의 마음
을 잘 알았으니 부질없이 편지를 전할 펼요가 없겠지요.오늘부터는
반드시 매파를 통하여 연락하여야 할 것입니다.제가 거듭 행로의 놀
림을 받지 않게 해주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86)
86)妾生長輦殻之下 粗識貞靜之行 而不幸 早失嚴父 生丁亂難 獨奉偏慈 終鮮兄弟漂淪南土僑寄宗黨
年垂及筓 尙恐一兵戎搶攘 盜賊橫行 則難保珠玉之沈碎 不無强暴之所污 以此老母傷心 以我爲念 然
而猶所患者 絲蘿所托 必在喬木 百年苦樂 實有他人 苟非其人 豈可仰望而終身 近觀郎君 辭氣雍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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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인용문은 옥영은 최척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의 내용이다.서울 도성
(輦殻之下)은 예로부터 전하는 成語인데 ‘천자가 타는 수레 아래’라는 뜻으로
전하여 ‘京城’을 가리키는 말이다.넝쿨풀이 의탁할 만한 곳은 반드시 큰 나무
이어야 한다는 것(絲蘿所托 必在喬木)은 중국 당나라 杜光庭의『虬髥客傳』의
‘絲蘿非獨生,願托喬木,故來奔爾.’에서 유래한 고사이다.菟絲와 女蘿가 큰 나
무에 의탁한다는 뜻으로 여자가 훌륭한 남자에게 의지하여 그 처첩을 됨을
이른다.남편 반드는 일(案擧之敬)은『後漢書』의 <梁鴻傳>에서 나온 梁鴻의
아내인 孟光의 ‘擧案齊眉’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부부의 도리를 다해 남편
을 지극히 공경한다는 뜻이다.서로의 마음을 잘 알았다는 것(肝膽相照)은 송
나라 趙令畸의『侯鯖彔』의 ‘同心相親,照心照膽壽千春.’에서 유래한 것이다.서
로 마음을 터놓고 친밀히 사귄다는 뜻이다.
5)의병활동과 중국 여행
이밖에 <최척전>과 작가 조위한 사이의 상관성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의
병 활동과 조위한이 전란을 통해 가족을 읽고 절망에 빠져 지내다 중국으로
떠나 방랑객이 되고자 하는 부분 등을 들 수 있다.
<최척전>에서 주인공 최척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남원에서 의병에
참여하게 되는데,조위한 또한 임진왜란 당시 남원에 피난 와 있으면서 김덕
령 장군의 수하에 들어가 왜적을 물리치는 일에 참여하고 명나라 군사들과
교류하였다.87)또 조위한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딸과 어머니,그리고
擧止閑雅 誠信之色 藹然於面目 若求賢夫 拾子伊 誰與爲人妻 寧爲老子之妾 而薄命崎嶇 恐不得當
也昨者投書 非爲其誨淫之意也 只欲試郎 君之俯仰也 妾雖無狀 初非依市之徒 寧有鑽穴之逃心 必告
父母 終成委禽之禮 則貞信自守 敢懈擧案之敬 投詩先讀 已犯自媒之醜行 欲往復私書 尤失幽閑貞操
今旣肝膽相照 不須書札浪傳 自此以後 必以媒妁相通 以母令妾 重貽行路之譏 千萬幸甚.
87)<神道碑銘>,先是十餘年間倭寇猶未平 嘗從金將軍德齡 試軍旅事 天將有愛公者 公欲隨入朝中博觀
天下.
김덕령(1567~1596)은 본관 광산.자 경수(景樹).시호 충장(忠壯).광주(光州)출생.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장성현감 이귀(李貴)의 천거로 종군 명령이 내려졌으며,전주
의 광해분조(光海分朝)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았다.1594년 의병을 정돈하고 선
전관이 된 후,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여러 차례 왜병을 격파
하였다.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을 장살(杖殺)하여 체포되었으나,왕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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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잃게 되는 불행으로 실의에 빠지고 세상에 살 뜻을 잃게 된다.이에
의병활동 중 만났던 명나라 장수를 따라 중국 유랑의 길을 택하고자 결심하
나 형의 만류로 포기한 바 있다.
반면 <최척전>에서는 최척이 전쟁으로 가족들이 모두 죽었다고 판단하고
절망에 빠져 중국 여행을 떠나고 한 때 신선술에 탐닉하여 청성산을 향해 가
지만 도중 ‘주우’라는 인물을 만나고 주우의 만류로 청성산행을 포기하고 함
께 장사하는 것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최척전>은 작가 조위한의 삶과 염원이 그대로 표방된 작품
임을 알 수 있다.여기서 <최척전>의 문학적 가치이자 작가의 의식의 소산을
발견할 수 있는데,조위한은 <최척전>을 통해 당대의 현실에 대한 아픔을 가
감 없이 묘사해 놓았다.특히 조위한이 현실에서 이룰 수 없었던 가족 간의
이별을 <최척전>에서는 주인공들의 집념으로 극복해 내며 결국 ‘재회’를 성
취해 나가는 이야기로 전란이 몰고 온 아픔과 절망을 가족애를 중심으로 극
복해 내고 있다.이것이야말로 17세기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최척전>이 갖고
있는 최상의 가치일 것이다.억눌린 슬픔과 아픔으로 절망에 젖은 조위한과
당시 모든 민중들에게 조위한은 <최척전>을 통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희망
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또 작품에 등장하는 최척의 모습 어디에도 양반의 권위적인 면모은 없다.
양반임에 틀림없지만 <최척전>을 통해 형상화 된 최척은 부귀,권력과 출세
를 추구하는 전형적 양반 인물 유형이기보다 가족을 사랑하는 전형적인 한
인간애의 모습을 지향해 내고 있다.동시에 전란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
에 없는 민중의 모습으로 등장하며 ‘고생담’을 나누는 가운데 그로부터 기층
적 삶의 현장에서 갈등하는 민중의 모델로서 대표성을 띤 인물로 나타난다.
조위한은 양반이면서 동시에 결코 양반으로서의 모습이 아닌 가장 인간적인
석방되었다.다시 의병을 모집,때마침 충청도의 이몽학(李夢鶴)반란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
되자 도중에 회군하였는데,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체포·구금되었다.혹
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 2)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고,1668년 병조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1678년(숙종
4)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고,1681년 병조판서에 가증(加贈)되었다.영조 때 의열사(義烈
祠)에 형 덕홍(德弘)·아우 덕보(德普)와 병향(竝享)되었고,1788년(정조 12)좌찬성에 가증되었다.
1974년 광주 충장사(忠壯祠)를 복원하여 충훈을 추모하고 있다.생애와 도술을 묘사한 작자·연대
미상의 전기(傳記)소설 <김덕령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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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의 최척을 통해 입신양명과 유학적 이념을 제거해 버린다.그리고 이러
한 인간적인 면을 부각하는 인물 설정은 비단 최척 뿐만 아니라 작품에 등장
하는 옥영 등 주요,주변 인물 모두에게 동일하게 투영된다.<최척전>에서
등장하는 이들 인물들의 관심사와 이야기의 초점은 오직 당시의 전란이 몰고
온 아픔에 향해 있고,이 아픔은 또 당시를 살아가는 기층 민중,양반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당면한 아픔이요,인간적인 비애가 되어 있다.조위한은 이 인
간적인 비애를 <최척전>을 통해 휴머니즘이라는 장치를 통해 극복해 내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척전>은 불교계 소설,사실계소설,포로소설 등 다양
한 소설 유형 속에서도 무엇보다 휴머니티 강한 인간 중심의 소설로서의 가
치가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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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최척전>의 작가의식 분석
1.역사에 대한 작가의식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최척전>은 작가 조위한이 남원에 거주할 때 최
척을 만나 그의 체험을 전해들은 내용을 적은 것이다.그런데 작품의 내용과
작가의 경험을 대비해 보면 대부분의 내용은 오히려 작가 조위한의 체험이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함을 알 수 있다.
작품의 역사적 배경은 임진왜란,정유재란,그리고 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
쟁 등 실제의 전쟁 선조 25년(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광해군 10년(1618년)에 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도 동시에 작가 조
위한이 살던 시대였다.그러면 조위한이 어떤 의식을 표현하기 위해서 역사
적 사건을 중시하고 있는 것일까?본장에서는 임진왜란,의병참여,그리고 호
족 명나라 침입 사건으로 나누어 조위한이 작품에서 드러낸 시대의식을 살펴
보고자 한다.
임진왜란은 선조 25년(1592년)에 일본이 조선의 땅을 침략한 전쟁이다.이
전쟁으로 인해 조선은 큰 피해를 입었다.이 무렵 明淸교체기를 맞이하여 중
국의 중심 권력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이동할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일본
권력의 구심점은 豊臣秀吉에서 德川家康으로 바뀌기 전이었다.
그 당시에 조선은 일본의 정치 상황에 대한 무지와 東西分黨으로 인한 양
반 관료들의 분열과 대립에서 야기된 南倭北胡의 침입에 대한 국방 대책의
소홀함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조선은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를 가지고 있었
다.핵심 권력자들의 다툼은 국력의 저하는 물론 건국이념 그 자체를 파괴하
게 되었다.이 권력다툼은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중앙으로 진출하려는 사림
세력을 꺾기 위하여 사화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 모두가 자신이 확보한 권력
을 유지하고자 한 것에 기인한다.88)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李珥가 南倭北
胡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는데 국가재정의 허약으
88)이장희,『임진왜란사연구』,아시아문화사,1999,pp.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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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실현되지 못하였다.사회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전쟁을 맞
았다.거듭된 패전을 당했던 조선은 중국 명나라에게 구원 요청을 하였다.임
진왜란은 조선,중국,일본 삼국으로 확대되고 7년간을 진행하였다.당시 중
국 명은 중국 대륙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조공국가와 일정한 정치․경
제적․문화관계를 유지하였다.89) 조선과 중국 명나라는 조공관계였다.이 때
의 조공관계는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보호와 복종의 관계인데,명은 상대국
가가 제3자로부터 침략을 당하거나 내부적 권력 찬탈이 발생하였을 때는 강
력하게 간섭하거나 경고하기도 하고,때로는 불간섭하였다.90)이러한 명과의
관계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명군이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다.그리고 명은
이 조선에서 일어난 전쟁이 중국 중심부로 확산되어 올 것을 우려하여,조선
에 파병함으로써 사전에 그 위험을 차단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조선에 군사를
파견하였다.91)선조 25년(1592년)7월,처음으로 파병했는데 평양에서 대패하
였다.일본군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다음해에 대규모의 파병이 이루어졌다.
조선은 이런 관계로 맺어진 崇明思想이 임진왜란 때문에 더욱 굳어졌다.
그런데 7년간에 걸친 전쟁은 조선에게 큰 사회적 변동을 일으켰다.전란으
로 인한 인명의 손실,田結의 감축과 각종 시설의 파괴는 엄청난 것이었으며
그 복구를 위해서는 오랜 기간에 걸쳐 막대한 노력과 재원을 기울여야 하였
다.또 전쟁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 위정자 층의 무기력과 분열,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그들의 정신적 위축과 지배층으로서의 권위 실추는 그 후 지배체제
의 동요,사회기강의 이완 현상으로 직결되어 가고 있었다.지배층에 대한 불
신과 백성들의 경제적 궁핍이 극심하여지면서 조선 사회의 근간을 이루던 사
회제도와 가치 체계도 변화되기 시작하였다.92)더구나 커다란 전쟁을 치르고
제대로 회복될 시간도 없이 선조가 죽고,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였다.광해군
은 즉위하자마자 유일한 혈육인 형 임해군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가 처형하였으며,93) 많은 이복동생들을 제거하였다.이어 선조의
89)강동엽,「‘최척전’에 나타난 임진왜란과 동아시아」,『동악어문논집』제38집,동악어문학회.
2001,p.134.
90)전해종,『한중관계사연구』,일조각,1970,p.8참조.
91)최소자,『사명당 유정』,지식산업사,2000,pp.404~405.
92)권혁래,『조선 후기 역사소설의 성격』,도서출판 박이정,2000,p.21.
93)『璿源譜略』에 의하면 宣祖는 첫 번째 왕비였던 懿仁王后에게서는 所生이 없었고,後宮인 恭嬪
金씨에게서 臨海君․光海君,仁嬪 金씨에게서 義安君․信聖君․定遠君,順嬪 金씨에게서 順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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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敎에 언급된 일곱 신하 유영경․한응인․박동량․신흠 등을 멀리 유배 보
냈으며 이들 중 더러는 죽음에 이르기도 하였다.즉위 5년에는 癸丑獄事를
일으켜 선조의 嫡統이며 자신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비롯하여 인목대비의
친정 가족들,이외에도 수많은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였다.94)그 사이 조선의
기반마저 흔들리는 위기를 맞았지만 백성들도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겪었다.이것을 다음의 기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先王朝의 癸巳․甲午年 사이에,새로 倭寇의 침략을 겪은 다음이어
서,무명 한 필 값이 쌀 두 되었으며 말 한 필 값이 쌀 서너 말에 지
나지 않았다.굶주린 백성들은 白晝에 사람을 무찔러 죽이고,父子․夫
婦가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그 위에 전염병이 겹쳐서 길에
는 죽은 사람이 서로 베개를 하였으며,水口門 밖에는 시체가 산더미
처럼 쌓여 성보다 두어 길이나 높았으므로 僧徒를 불러다가 매장하는
데 을미년에 가서 겨우 마쳤다.95)
임진년 난리 후로 백성들이 모두 떠나고 흩어져서,비록 大家世族이
라도 모두 생업을 잃고 거지가 되어 돌아다녔으며,여자들은 높고 낮
은 사람을 가릴 것 없이 적들의 손에 몸을 더럽힌 자가 몹시 많았다.
이 중에서 뚜렷이 나타나게 절개를 세운 자는 자정에서 알아보고 旌門
을 세웠다.시체는 쌓여 들에 가득하고 매장된 것은 얼마 없었다.아비
가 자식을 팔고 남편이 아내를 팔았으며,癸巳年 봄에 이르러서는 사
람들끼리 서로 잡아먹고 시체를 쪼개어 앞을 다투어 물어뜯으며,골육
끼리도 또한 서로 죽이는 자도 있었으니,우리 동방에 변란이 있은 후
로 참혹하기 오늘과 같은 때는 없었다.96)
君,靜嬪 閔씨에게서 仁聖君․仁興君 등 13명의 王子와 10명의 翁主가 있었다.臨海君은 光海
君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인바 이미 어머니도 죽었고,이때에 이르러는 光海君의 유
일한 혈육이었다.
94)민영대,앞의 책,『조위한의 삶과 문학』,p.31.
95)先王朝癸巳甲午年間 新經倭寇 木綿一匹直米二升 一馬價不過三四斗 飢民白晝屠剪 至父子夫婦相
殺食 重以疫癘 道路死者相枕 水口門外 積屍如山 高於城數丈 募僧徒埋瘗之 訖乙未乃至(卷一,災
異部,饑荒條).南晩星,『芝峰類說』,卷一,災異部,<饑荒條>,乙酉文化社,1978,p.44.
96)민족문화추진회,『국역대동야승』권14,(『大東野乘』卷55<聞韶漫錄>),1974,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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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안팎이 모두 기근에 허덕이고 양식을 운반하기도 힘든데다가
노약자는 병들어 누웠고 젊은 장정들은 도둑이 되고 만 형편이었다.
더욱이 질병이 심해서 쓰러져 죽는 자 그 수를 알 수 없었으며,심지
어는 父子와 夫婦가 서로 뜯어먹기까지에 이르렀다.노천에 뒹구는 뼈
만 짚단 같이 늘어져 있었다.97)
위의 글을 통하여 당시에 돈 있어도 쌀을 구하지 못하는 경제 상황을 알
수 있다.굶주림이 심해서 부자,부부가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고 전염
병은 성행하여 이로 인해 죽은 사람이 산더미처럼 쌓였다는 당시 전쟁의 실
정이었다.작가 조위한이 이런 정치의 부패와 백성들이 핍박당하는 현실을
보고 <流民嘆>노래를 지었다.이 노래 조선 사회에 크게 유행하여 광해군에
게 미움을 받아 죽을 위기를 초래하기도 하였다.98)
중국 명나라도 재정적 어려움을 초래하였고 세력이 약화되었다.동북지방에
서 세력을 확장하는 女眞族을 견제할 수 없어서 明淸 교체를 하게 되었다.
명에 의하여 좌우되던 17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심세력은 후금에서 청
으로 발전하면서 청으로 옮겼다.
당시의 일본 경우에는 戰國時代 말기에 전국을 통일시키려던 織田信長이
살해되고,부장였던 豊臣秀吉이 권력을 쟁취하였다.豊臣秀吉이 중국 대륙을
정복하기 위하여 조선에게 도움을 청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假道入明’을 구실로 조선을 침략하고 임진왜란을 일으켰다.그러나 전쟁의 목
적을 이루지 못한 豊臣秀吉은 선조 30년(1597년)에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다.
전쟁은 豊臣秀吉의 죽음으로 끝났다.豊臣秀吉의 정치적인 세력 확장이 실패
로 돌아가고 사망한 후에 關東지방에 근거를 둔 德川家康이 실권을 장악하고
德川幕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豊臣秀吉과 달리 德川幕府가 조선에게 수교
를 강력히 요구하여 조선과 국교가 재개되었다.그 이후 약 200여 년간 조선
과 일본의 국교가 지속되어 평화가 형성되었다.한편,임진왜란 때문에 국력
97)李民樹,『懲毖錄』권2(乙酉文庫 33),乙酉文化社,1970,p.188.
98)緯韓少有文名 善諧學 多爲禮法之士所詘 昏朝時作流民嘆 備陳其時政 亂民困之狀 一時傳之爲絶唱.
『仁祖實 錄』권21,7년 기사조,
<年譜>,目賦役重 餓爭載塗 乃以俗諺作 辭意悲惋 曲盡情態 一時膾炙 以此流入宮中 至於光海 中
外物議幾 不免奇禍 秋後當修史白江李公特爲採見其事.
<神道碑銘>,又作流民嘆一篇 極道人民愁苦邦家顚覆狀 主見而惡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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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쇠퇴한 명나라는 새로 발흥한 후금에게 국경을 침범당하여 조선에 구원병
파견을 요청하였다.그 당시 조선은 발흥하는 호족을 무시할 수 없고 임진왜
란 때 구원병을 보내 전쟁을 도와주었던 명나라의 은혜도 저버릴 수 없는 상
황이었다.그런 상황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여 요동출병을 명하였
지만 상황에 따라서 판단하도록 하였다.만약에 명나라가 승리할 수 없으면
호족에게 항복하고 명나라가 승리할 것 같으면 명나라를 위해 끝까지 싸워야
된다고 명하였다.광해군이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물러나고 인조 신정부는
親明排淸政策을 시행하여 청나라에게 두 차례의 호란을 당하였다.결국은 조
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 부속되었다.
이런 시대에 작가 조위한이 <최척전>을 창작하였다.조위한이 이런 현실에
대한 의식은 <최척전>에서 형상화시킨 당시 사람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통하
여 잘 나타나 있다.
1)임진왜란에 대한 역사적 인식
작가 조위한은 선조․광해군․인조 3대에 걸쳐 살았던 인물이다.이 기간 속
에 임진왜란․정유재란․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의
삶은 처절한 전쟁 체험을 피할 수 없었다.조위한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가족
을 거느리고 경기도 연천․토산 등지로 피난하였다가 겨울에는 다시 어머니
의 친정이 있는 남원으로 내려와 피난살이를 하였다.99) 피난길에 유일한 어
린 딸을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잃고 남원에 이르러서 어머니를 잃는 슬픔을
당하였다.정유재란이 일어날 때 전라도 봉산으로 피난하였고 나주에서 신혼
생활을 하던 동생이 걱정되어 내려갔다가 제수의 殉節을 목도하였다.가족을
잃고 상심에 빠져 세상에 살 뜻을 잃은 채 중국의 명승지인 江浙․蘇杭을 여
행하고자 명나라 군사와 약속하고 떠나려다 형 유한의 만류로 포기하였다.100)
조위한은 가족관계에 있어서 안타까운 경험을 하였다.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99)朴應犀之獄條 前判官趙緯韓供 臣率老母避亂南原 兄緯韓扈從全州.이긍익,『燃藜室記述』,卷20.
100)…與天朝將士吳明濟會遊龍山 欲偕入江浙不果 文集有獨身飄泊于龍山 旣無父母又無妻子 不樂於
人世 將有出塵遠遊之志 適遇天將水兵之來泊于江上 得與浙人相善 約與之偕入東吳 浪迹於蘇杭之
間 而爲仲氏泣挽 不得遂去.『玄谷集』卷之十三,<祭亡子倚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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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을 초래할 수 있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反戰의식을 자신의 경
험을 통해 강화시키고 있다.이런 작가의 반전의식을 작품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주의를 주었다.
“네가 공부는 하지 않으니 무뢰한과 다름이 없구나.필경 어떤 사람
이 되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냐?하물며 지금 나라에서 군사를 일으키
고자 고을마다 군사를 모집하고 있지 않느냐?활쏘기나 사냥을 일삼아
늙은 아비에게 근심을 끼치지 말아라.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과거
공부에만 열중하려 보거라.그러면 비록 급제하여 이름을 신적에 올리
지 못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무기를 들고 군사로 종군하는 일만은 면할
수 있지 않겠느냐.성 남쪽에 사는 정상사라는 사람은 내 어린 시절
친구로 학문에 힘써 문장이 훌륭하단다.초학자는 가르칠 만할 것이다.
어서 찾아가 배우도록 하거라.”최척은 그날로 서책을 준비하고 정상
사를 찾아가 배움을 청하고 부지런히 공부하였다.101)
위의 인용문의 내용은 최척의 아버지 최숙이 공부 안하고 친구와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는 최척에게 공부하라고 권유하는 내용이다.공부 시키는 이유
는 자식의 사회적 출세나 가문의 중흥에 있진 않고 전쟁이 일어났으니 과거
에 급제하면 군역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그 당시 양반들의 입신
양명의 관념과 완전히 다르다.<홍길동전>에서 길동이 ‘대장부가 세상에 나
매 孔孟을 본받지 못하면 차라리 병법을 배워 대장인을 요하에 빗겨 차고 동
정서벌하여 국가에 대공을 세우고 이름을 만대에 빛냄이 장부의 快事라102)’라
는 말을 하였다.즉,장부는 모름지기 文이 아니면 武를 통해서 입신양명해야
하는 유가 관념이다.그런데 최척은 이런 文武를 통한 입신양명의 관념에서
벗어나 군역을 면하기 위해서 아버지 친구인 정상사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부
101)其父嘗誡之曰
“汝不學無賴 畢竟做何等人乎 況今國家與戎 州縣方徵武士 汝欲射無獵爲事 貽老父憂 屈首受書
從事於擧子業 雖未得策名 登第亦可免負羽從軍 城南有鄭上舍者 余少時友也 力學能文 可以開導
初學 汝往使之”
陟卽日挾冊 及門請業不輟.
102)경판 24장본 <홍길동전> 부분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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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런히 공부를 하게 된다.전쟁에 참전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한다.
최숙과 최척의 이런 행동이 그 당시 백성들의 참전 기피의식을 볼 수 있다.
만약에 최척이 군사로 징집되면 늙은 아버지가 의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전쟁은 가족 이산을 초래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누구라도 고통과 슬픔을
초래할 수 있는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할 수 있다.여기서 조위
한이 군사 징집을 반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다.즉 반전의식의 발로이다.
“제 주인 댁은 본래 서울 숭례문 밖 청파리에 있었습니다.낭자의
부친은 이경신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다.그러므로 어머니 심씨
홀로 낭자와 함께 살고 있었답니다.낭자의 이름은 옥영으로 낮에 시
를 던졌던 사람이 바로 그 낭자입니다.지난해에는 난을 피해 강화로
갔다가 그곳에서 배를 타고 나주의 회진으로 가셨습니다.그리고 가을
에는 다시 회진에서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이 집의 주인은 우리 마
님과 친척이라서 우리에게 매우 잘해 주십니다.…”103)
위의 글은 여주인공 옥영의 계집종이 춘생은 최척에게 알려준 옥영에 관한
이야기이다.임진왜란 때 옥영은 어머니 심씨를 모시고 서울에서 살다가 전
쟁을 피하기 위하여 배를 타고 강화도 갔다가 나주 회진을 거쳐 어머니의 외
척이 살던 남원으로 왔다.옥영뿐만 아니라 그 당시 전쟁으로 인한 그 당시
사람들이 누구나 다 겪었던 피난 생활이 틀림없다.이 부분은 작가 조위한의
피난 생활과 아주 비슷하다.조위한이 직접 임진왜란을 당하여 고향을 떠나
고 가족을 거느리고 정처 없이 돌아다녔던 고통스러운 체험이 작품에서 자연
스럽게 나타난 것이다.
① 정유년 팔월 적병이 남원성을 함락하자 사람들은 모두 도망가 숨
었다.최척의 일가도 역시 지리산 연곡으로 몸을 피했다.최척은 옥영
에게 남장을 착용하게 하였다.그러자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그녀를 여자로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산으로 피한 지 여러
103)“本家本在京城 崇禮門外靑坡里 主父李景新早沒 寡母沈氏獨與處子居焉 處子名玉英 投詩者是也
上年避亂 自江華乘船 來泊于羅州會津 及秋自會津 轉來于此 此家主人 與兒主母家族待之甚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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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자나자 양식이 떨어져 장차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렀다.최척은
몇몇 장정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양식을 구하고 적세도 탐지하려 하
였다.일행이 구례로 갔다가 문득 적병과 조우하자 최척은 바위와 수
풀에 몸을 숨겨 화를 피했다.그러나 그날 적병이 연곡으로 들어가 온
산야를 휘저으며 살상하고 약탈하여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았다.하지
만 최척의 일행은 길이 막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사흘이 지나 적병이
물러간 후 최척은 다시 연곡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연곡에서 볼 수 있
는 것은 시체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유혈이 낭자하여 시내를 이룬 모습
뿐이었다.마침 숲 속에서 은은하게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최척이
그곳으로 찾아가니 온 몸에 상해를 당한 노약자 몇 사람이 있었다.노
인들은 최척을 보자 통곡하며 말했다.
“적병이 산에 들어와서 3일 동안 재물을 약탈하고 인민들을 베어 죽
였으며,아이들과 여자들은 모두 끌고 어제 겨우 섬진강으로 물러갔네.
가족들을 찾고 싶으면 물가에 가서 물어 보게나.”104)
② 최척은 하늘을 부르짖으며 통곡하고 땅을 치며 피를 토한 뒤,즉
시 섬진강으로 달려갔다.몇 리도 채 못 갔는데,문득 어지럽게 널려진
시신들 속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그 소리는 끊겼다 이어졌다 해서
소리가 나는 것인지 아닌지 분간하기도 어려웠다.가서 보니 피가 얼
굴에 낭자하여 어떤 사람인지 알아 볼 수가 없었다.그가 입고 있는
옷을 살펴보니 춘생이 입고 있던 것과 비슷했다.그래서 최척은 큰 소
리로 불러 말했다.
“너는 춘생이 아니냐?”
춘생이 눈을 들어보더니,얼굴이 비참하게 일그러지며 기어드는 목
소리로 희미하게 몇 마디를 중얼거렸다.
“낭군이시여,낭군이시여!주인어른의 가족들은 모두 적병에게 끌려
갔으며,저는 이런 몽석을 등에 업고 달아났으나 빨리 달릴 수가 없어
적병의 칼에 맞게 되었습니다.그 즉시 저는 땅에 넘어져 기절했다가
104)至丁酉八月 賊陷南原 人皆逃竄 陟之一家 避于智異山燕谷 陟令玉英着男服 雜錯於廣原之中 人之
見之者 皆不知其爲女子也 入山累日 糧盡將饑 陟與丁壯 數三出山 求食且覘賊勢 行到求禮 猝遇
賊兵 潛身於岩藪而石避之 是日 賊入燕谷 則但見積屍 遍橫流血成川 林叢間 隱隱有號咷之聲 陟
就訪之 老弱數輩 瘡痍遍身 見陟而哭曰
“賊兵入山,三日 奪掠財貨 芟刈人民 盡驅女子 昨已退屯蟾江 欲求一家 門諸水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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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 만에 깨어났는데,등에 업혔던 아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춘생은 말을 마치더니 이내 죽고 말았다.최척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땅에 쓰러져 기절했다가 한참 후에야 깨어났다.이윽고 정신을
가다듬어 섬진강(蟾津江)으로 가서 보니,강둑 위에 상처를 입고 쓰러
진 수십 명의 노약자들이 서로 모여서 통곡을 하고 있었다.최척이 다
가가서 묻자,노인들이 대답했다.
“산 속에 숨어 있다가 왜적에게 여기까지 끌려 왔네.왜적들은 여기
에서 장정들만 가려 배에 실어 가고,이처럼 병이 들거나 칼에 찔린
노약자들은 버려두었네.”
최척은 이 이야기를 듣고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하였다.혼자만 온전
하게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자살을 하려고 했으나,주위 사람
들이 만류하여 죽을 수도 없었다.그래서 강의 상류로 터덜터덜 걸어
올라 갔는데,막상 돌아갈 곳도 없었다.샛길을 찾아 겨우 고향에 이르
러서 보니,담벼락은 무너지거나 깨어져 있었다.그 밖의 다른 것들도
모두 불타버려 쉴 곳은 물론,곳곳에 시체가 언덕처럼 쌓여 발 디딜
틈도 없었다.105)
인용문①은 정유재란으로 인해 남원에서 살던 최척의 가족과 남원지방 백
성들이 지리산 연곡으로 피난을 갔다가 양식을 구하러 나와 있는 동안 왜적
들이 지리산을 3일 동안 기습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죽이고 포로로
잡아간 대목이다.최척은 가족과 이별의 아픔을 겪었다.가족과 이별하게 되
어 정신없이 헤매던 최척은 백성들의 희생의 참상을 직접 목도하였다.이 부
분을 통해서 전쟁이 얼마나 많은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는지 여실히
105)陟號天痛哭 僻地嘔血 卽走蟾江 未行數里 許見於亂屍中 呻吟斷續 若存若沒 而流血被面 不知其
何人也 察其衣裳 甚似春生之所着 大聲而呼曰
“爾莫是春生乎”
春生張目視之 喉中作語曰
“郎君郎君 主家皆爲賊兵所掠而去 吾負阿釋 不能趨走 賊引兵斫殺而去 吾偃地卽死半日而甦 不知
背上之兒 生死去留”
言訖而氣盡 不復生矣 陟搥胸頓足 氣絶而卜 旣而復生 無可奈何 起向蟾江 則岸上創殘老弱數十相
聚 而哭往問之 則(曰)
“俺等隱於山中 爲賊所驅及舡 賊抽丁壯同載 推下罹鋒老羸者如此”
陟大聲痛哭 無意獨全 將欲自裁 傍人救止之 踐踐江頭而去無所之 還尋歸路三書夜 僅達其鄕閭 頹
垣破瓦 餘燼未息 積屍成丘 無地着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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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주었다.
인용문②는 최척이 가족을 찾는 과정에서 직접 목도한 것으로서 옥영의 계
집종인 춘생이 도망갔을 때 적에게 칼에 맞게 되고 시체더미 속에서 마지막
죽어가는 모습이다.전란 속에서 이렇게 적에게 상처 입고 고통스럽게 죽는
모습은 비일비재하였을 것이다.잔인한 적병들은 장정들만 가려 배에 실어
가고,병이 들거나 칼에 찔린 노약자들을 버렸다.
위의 글을 통해서 당시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가지게 되었다.정유재란으로 인해 죽음을 당하는 백성들이 不知其數
였을 것이다.이별하게 된 가족 수도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조선
백성들 뿐만 아니라 조선으로 파병된 중국 명나라 구원병들도 많이 죽음을
당하였다.조선 땅에서 유랑하여 가족과 재회하지 못하게 되었다.작품 중에
홍도의 아버지 진위경은 한 예가 된다.홍도가 젖을 떼기도 전에 아버지 진
위경은 유총병을 따라 조선에 출전하였다.그런데 홍도는 장성해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고 생사불명이다.그래서 홍도의 소원은 조선 땅에 가서 아버
지의 넋을 불러놓고 통곡한 뒤,시신을 모시고 돌아와 장례를 지내는 것이
다.106)세상에 태어나서 아버지를 한 번도 못 보는 홍도의 심경을 알 수 있
다.이렇게 홍도처럼 전쟁 때문에 아버지와 이산하게 되는 명나라 아이들과
진위경처럼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국에서 유랑하게 되는 명나라 군사들
이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조선 인구가 많이 유출되었다.이는 역사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선조 32년(1599년)조선에 왔던 명나라 군사들이 철수할 때
그들에게 종속된 조선인들이 그들을 따라 명나라로 들어간 수가 적지 않았다
고 하는데 이후 이들은 山海關 동쪽,南滿洲 방면에서 부락을 이루고 살았고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구가 훨씬 많았다.107)위의 글에서도 이런 묘사가 나
와 있다.적병들은 많은 장정들을 가려 배에 실어 갔다.당시 이렇게 포로 되
어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 백성의 수가 많았을 것이다.작품에서 주인공 옥영
이 왜병인 돈우에게 붙들렸고 일본으로 끌려갔다.최척도 의탁할 곳이 없어
서 마침 명나라 군사들을 만났고 그 중의 여유문을 따라 중국으로 가게 되었
106)(紅桃)常痛其父殁於異域 而生不知其面目也 願一至父死之國 推白骨而來 耿耿冤恨銘于心腑.
107)이채연,『임진왜란 포로실기 연구』,출판사 박이정,1995,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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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렇게 조선의 인구가 밖으로 많이 유출되었다.그리고 수많은 여인들이
적병에게 강제로 욕을 당하였을 것이다.때문에 이런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
하여 이름도 모를 수많은 여인들이 목숨을 초개 같이 버렸으며 殉節한 여인
들 중 이름이 알려진 여인들의 旌門이 현재도 전국의 각지에 많이 세워져 있
는데 이로써 우리는 이때의 상황을 헤아려 볼 수 있다.108)작가 조위한의 동
생이었던 조찬한의 부인 高興 柳氏가 정유재란 때 왜병에 저항하다가 순절하
였다.지금 전라남도 장성군 北一面에 그녀의 旌門이 아직 남아 있다.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에게 초래한 고달픈 삶과 가족과 이산한 슬픔의 묘사
를 보면 조위한이 전쟁에 대해 부정하는 태도를 알 수 있다.즉 반전의식이
다.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전쟁 중에 옥영이 남원으로 피난 와서
최척과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다는 좋은 일도 있었다.이 부분은 조위한의 동
생인 조찬한이 피난하다가 나주에서 高興 柳氏와 혼인한 일과 유사하다.조
위한은 작품에서 전쟁이 백성들에게 초래한 고통과 슬픔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고달픈 삶에서 두 주인공이 전쟁을 계기로 하여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다는 묘사도 하였다.잔혹한 현실이라도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그리고 행복과 불행은 항상 반복 작용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조위한은 조선,중국,일본 넓은 공간배경으로 이 작품을 창작함으로써
자신의 세계의식을 나타낸 것이다.조위한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이
루어졌다고 이해할 수 있다.임진왜란을 통해서 백성들은 자아를 각성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세계와 역사 변화에 대한 인식도 넓혔다.특히
일본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면서 적개심을 품었고,중국 명나라에 대한 崇明
思想을 깊이 확인했다.
요컨대,작가 조위한은 전쟁이 국가나 백성들에게 초래한 참상을 묘사하여
이토록 불행한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된다는 반전의식을 표출했다고 볼
수 있다.
108)민영대,앞의 책,『조위한의 삶과 문학』,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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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의병과 관련한 태도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위한은 남원에서 피난하던 중 구국을 위하여 잠시 의
병에 참여하였다.다음의 글을 통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先時十餘年間,倭寇猶未平,嘗從金將軍德齡試軍旅事.天將有愛公者,公
欲隨入中朝博觀天下.109)
嘗流寓湖南屬倭寇未靖邊搖用兵,公遂從義兵將金德齡陳中.110)
與天朝明將吳明濟會遊龍山, 欲偕入江浙間不果, 文集有獨身飄泊于龍山,
旣無父母又無妻子,不樂於人世,將有出塵遠遊之志,適遇天將水兵之來泊于
江上,得與浙人相善,約與之偕入東吳,浪迹於蘇杭之間,而爲仲氏泣挽,不
得遂去.111)
위의 인용문을 보아,조위한은 임진왜란 때문에 남원으로 피난했을 때 김덕
령 장군의 수하에 들어가 왜적을 물리치는 일에 참여하였다.김덕령(1567~
1596)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웠던 의병장 중의 한 사람이다.그는
선조 26년(1593년)에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虎翼將軍이라는 賜號를 받았으
나 선조 28년(1595년)에 李夢鶴의 亂때 적의 책략으로 적장과 내통한다는 무
고로 받아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옥중에서 죽었다.바로 이때 조위한이 김덕
령 장군의 수하에서 의병 활동을 한 것이다.그는 진정으로 전쟁에 유린된
나라를 보호하고 싶었고,왜병을 미워하여 섬멸하고자 했던 심경을 알 수 있
다.그 과정에서 명나라 군사들과도 교류하고 명나라 장수에게서 특별히 사
랑을 받았다.그 당시 조위한은 피난길에 가족을 많이 잃어버렸기 때문에 세
상을 살 뜻을 잃어서 명나라 군사와 약속하고 중국에 가서 천하를 널리 구경
하고자 계획하였다.그러나 형 유한의 만류로 포기하였다.의병활동은 나라가
어려울 때 강요나 지시에 의한 참여가 아닌 자발적인 것이다.조위한이 의병
109)<神道碑銘>.
110)<行狀>.
111)『玄谷集』卷十三,<祭亡子倚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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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참여한 것은 자신의 忠君사상과 애국의식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최척전>에서 최척은 잠시 동안 의병참여에 관련한 내용도 나와 있다.
남원부 사람으로 전에 참봉을 지냈던 변사정이 의병(義兵)을 모집하
여 영남(嶺南)으로 가려고 하였는데,최척은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했기
때문에 의병에 뽑혀서 동행하게 되었다.최척은 진중(陳中)에 있으면서
옥영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몸이 아프게 되었다.혼례를 치르기로
약속한 날이 되어 소장(訴狀)을 올려 휴가를 청하자,의병장이 화를 내
며 말했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감히 결혼을 하겠다는 말인가?임금께서 몽진
을 하시느라 어가가 산야로 떠도는 중이야.신자들이 병기를 놓을 겨
를 마저 없지 않은가?하물며 자네는 아직 장가를 들 나이도 아니지
않은가?적을 물리친 후에 혼사를 도모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야”
의병장은 끝내 최척의 귀가를 허락하지 않았다.112)
최숙은 그러한 사연을 편지에 자세하게 적어 아들에게 보냈다.최척
은 마침 심하게 앓고 있었다.그 소식을 듣고는 놀라 병세가 더욱 위중
하게 되었다.의병장이 그 이야기를 듣고 최척을 즉시 집으로 돌려보냈
다.113)
최척은 옥영과의 결혼 날짜를 정하고 기뻐하며 손가락을 꼽아 기다렸으나,
그가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했기 때문에 영남으로 가는 변사정에게 뽑혔다.
‘義兵將邊士貞,遣其副將李潛,領兵三百.114)’‘남원의 전 참봉 邊士貞을 2000여
명 모았다115)’라는 기록을 보아 남원에서의 의병활동이 실제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또한,변사정도 역사에 있었던 인물이다.최척은 옥영과의 결혼 날
112)無何 府人前參奉邊士貞 起義兵赴嶺南 以陟有弓馬之才 遂與同行 陟在陳中憂念成疾 及其約婚之
日 呈狀乞暇 則義將怒曰
“此何等時 而敢求婚娶乎 君父蒙塵 鉞在草莽 臣子當枕戎之不暇 而况汝未及有室之年 滅賊而圖婚
亦未晩也”
竟不許.
113)崔淑以書抵其子 具道所以 陟方患病篤 聞此驚感 轉成危革 義將聞之 卽令出送.
114)『宣祖修正實錄』卷27,26년 癸巳 7月條.
115)『燃藜室記述』卷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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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를 지나쳤기 때문에 의병장에게 휴가를 청했는데 거절 당하였다.의병장은
임금께서 난리를 당할 때 신하로서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서 잘 겨를도 없이
왜병과 싸워야 된다고 말하였다.결국 의병장은 최척의 귀가를 허락하지 않
았다.최척의 의병참여는 작가 조위한이 남원에서 의병 활동을 체험한 것에
서 영향을 미친 것을 볼 수 있다.
그 당시 조선 사회는 유교사상으로 국가의 근본을 삼았다.삼강오륜이 생활
의 기본이 되고 忠孝는 유교의 도덕규범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덕목이
다.116)삼강오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강:① 임금은 신하의 근본이다(군위신강)
② 아버지는 자식의 근본이다(부위자강)
③ 남편은 아내의 근본이다(부위부강)
오륜: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는 친애에 있으며-부자유친
②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고-군신유의
③ 부부 사이에는 서로 침범치 못할 인륜의 구별이 있으며-부부유별
116)忠은 원래 자기와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을 다하는 정신자세를 의미하는 개념이었으며,孝는
처음부터 자식의 부모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가리키는 개념이었다.그 후 충의 개념이 군주에
대한 신하의 도덕적 의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어감에 따라 충과 효를 연기(連記)하기 시작
했다.〈순자 筍子〉예론(禮論)에 충신효자(忠臣孝子)라고 하여 충과 효를 대칭적으로 사용한 것
이 처음이며,〈효경 孝經〉에도 충과 효가 연기되어 있다.한대 이후에는 충효로 연기하는 것
이 일반적이었다.그 배경에는 충과 효가 본질에서 동일한 도덕규범이라는 ‘충효일치’의 사상이
있었다.‘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한다.’,‘효로써 군주를 섬기는 것이 곧 충이다.’,‘부모에게
효도하기 때문에 군주에게 충을 옮길 수 있다’,‘충효는 2가지 도리가 아니다’등에서 충과 효
의 가족 내에서 부모의 권위에 복종하는 정신태도와 집권적 정치체제 내에서 군주의 권위에
복종하는 정신태도가 같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따라서 일상적인 가정생활 속에서 부모의
권위에 복종 하는 정신자세가 길러지면 자연히 관료가 되어서도 군주의 권위에 복종하는 정신
자세가 된다는 것이다.그러나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혈연적·자연적이라면 군신관계는 녹사(祿
仕)에 의해 비로소 맺어지며,치사(致仕)하면 군신관계가 해제되는 것이다.충효사상에서는 군
주와 부모의 권익에 대해 신하와 자식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복종할 것을 가르치면서도,한편에
서는 군주와 부모의 잘못을 간쟁하는 것이 신자(臣子)의 도덕적 의무라고 했다.이런 점에서
유교의 충효사상에서 충과 효의 덕목이 모두 권위주의에 바탕을 둔 도덕규범이면서도 아랫사
람의 도덕적 주체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따라서 충효사상은 충
과 효를 동일시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자와 군신 간에 현실적 차이가 있다.자식의 경우는 부모
의 잘못을 간해도 부모가 듣지 않을 경우에는 울면서 부모를 따르는 것이 도리이나,신하의 경
우는 군주가 간언(諫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떠나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고 했다.자식
과 신하의 도덕적 의무에서 이러한 차이가 인정되는 것은 ‘친합’(親合)또는 ‘천속’(天屬)으로
표현되는 혈연적인 부자관계와 ‘의합’(義合)으로 표현되는 인위적인 군신관계의 차이에서 연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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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장유유서
⑤ 벗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뜻한다-붕우유신
위의 규범을 통해서 임금은 신하의 근본이고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義理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즉 신하로서 임금의 권익에 대해 무조건으로 복종
해야 한다.자신의 이익과 임금의 이익을 충돌이 생길 때 자신의 이익에 무
조건으로 포기하고 임금의 이익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평소 배운 것이 무엇이며 읽고 논한 것이 무엇이냐.신하가
忠에 죽고 자식이 孝에 죽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평소 배우고
논한 것이 과연 여기에 있다.어찌 오늘에만 一介 半介의 死忠死孝者가
보이지 않으랴.117)
위의 글은 의병을 촉구하는 내용이다.擧義의 명분을 밝힘에 있어 忠君愛國
이 백성의 의무임을 강조하면서 化家爲國의 儒敎的 倫理觀을 고양시키고 있
다.
작품 중에 변사정,최척 등이 나라가 어려워질 때 자발적으로 의병에 참여
하는 행동은 忠君愛國과 化家爲國의 유교사상을 나타낸다.主辱臣死 정신과
鄕土守護 정신의 표현이다.나라가 침략당할 때 나라와 임금을 지키는 것은
백성의 의무이다.그런데 최척은 임진왜란이라는 조선의 민족적 위기를 당했
음에도 불구하고 옥영과의 결혼 날짜가 다가오자 나라를 보호하는 것을 포기
하고 변사정에게 휴가를 청하였다.이때 개인적 이익과 국가의 이익에 충돌
이 생긴 것이다.변사정은 임금이 난리를 당할 때 감히 혼사에 대해서 말하
느냐 물으면서 거절하였다.개인적 행복을 추구하기 전에 먼저 나라를 구해
야 한다는 작가 조위한이 유교적 忠君愛國 사상을 나타낸다.
그런데 최척의 아버지는 최척에게 편지를 쓰고 양씨 집안과의 혼사 문제
등 그 동안의 모든 사실을 다 알려 주었다.최척은 병이 더 심해졌다.어쩔
수 없이 변사정은 최척을 집으로 보내버렸다.忠君愛國의 면에서 보면 변사
117)吾等平日所學者何事 所讀論者何事 其不在於爲臣死忠 爲子死孝者乎 平日所學所論者 果在於此
則何獨今日未見一介半介死忠死孝者哉.李魯,『龍蛇日記』壬辰 11月 17日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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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公과 私를 구별하지 못하고 公적인 임무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다.이런
면에서 보면 <최척전>은 인간적인 면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3)호족 명나라 침입 전쟁의 시각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최척전>은 임진왜란,정유재란,호족 명나라 침입
전쟁 등 작가가 살던 당시의 시대를 그대로 작품의 배경으로 설정하였다.여
기서는 작가 조위한이 호족 명나라 침입 전쟁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갖는지
살펴보겠다.
7년 간에 걸쳐 진행되었던 임진왜란은 조선에게 뿐만 아니라 중국 명나라
에게도 큰 피해를 입혔다.임진왜란을 치르면서 중국 동북지방 호족이 발흥
하여 명나라를 위협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였다.17세기 초 명나라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국력이 쇠퇴하여 호족의 누르하치가 강성해져 명의
국경을 자주 침범하였다.명나라 神宗은 호족을 막기 위해 대군을 일으키면
서 조선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광해군을 비롯하여 조정에서 이 문제를 어
떻게 처리할지 고민하였다.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 ‘망해가던 나라를 다
시 세워준 은혜(再造之恩)’로 숭앙 받았던 명나라를 버릴 수 없고,가면 갈수
록 강해지는 호족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급기야 광해군 10년(1618년)
명나라는 조선에게 호족을 공격하는 데 구원병 수만 명을 파견해 달라고 요
청하였다.명의 출병 요구를 수용하는 여부를 놓고 벌어진 찬반 논의는 광해
군과 대북파118)사이를 갈라놓았을 뿐 아니라 북인 내부의 균열을 초래하였
다.119)李爾瞻120)등 대북파는 후금에 대해 준열한 斥和論을 견지하면서 명을
도와야 한다는 입장에 섰고,광해군과 그의 입장에 동조하는 신료들은 후금
에 대한 羈縻策을 강조하면서 원병 파견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121)
118)북인은 선조 말년을 거치면서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집권세력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북인들
은 대북파를 비롯하다.
119)한명기,『임진왜란과 한중관계』,역사비평사,1999,pp.244~250.
120)이이첨(1560~1623),조선 중기의 문신.선조 때 대북의 영수로서 광해군이 적합함을 주장했다.
광해군 즉위 후 조정에서 소북파를 숙청했다.영창대군을 죽게 하고 김제남을 사사시켰다.폐
모론을 주장,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인조반정 뒤 참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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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여 요동출병을 명하였지만 상황
에 따라서 판단하도록 하였다.만약에 명나라가 승리할 수 없으면 호족에게
항복하고 명나라가 승리할 수 있으면 명나라를 위해 끝까지 싸워야 된다고
명하였다.
이때 명나라 喬遊擊의 副摠 오세영은 최척을 서기로 삼아 요양으로 출전하
게 되었다.그런데 주장이 적을 가볍게 여기고 싸우다가 전군이 크게 패하였
다.누르하치는 명군만을 살상하고 조선 병사는 유혹하거나 위협하기만 하고
죽이지 않는다는 전략을 세웠기 때문에 최척은 포로가 되어 살아남았고,조
선병으로 출전한 큰 아들 몽석과 호족 포로수용소에서 극적인 만남을 이루었
다.그 당시 喬遊擊이 살아남은 군사 10여 명을 거느리고 조선 진영으로 들
어가 조선옷을 달라고 하였다.강홍립은 조선옷을 지급하여 남은 명군들이
죽음을 면하였는데 종사관 이민환이 이러한 사실이 호족에게 발각될까 두려
워 옷을 뺏고 명군들을 붙잡아 적진에 보내버렸다.강홍립은 형세를 보아 호
족에게 투항하였다.
광해군은 이런 대외 정책이 명분론이나 조선의 국가관의 면에서 비판 받았
다.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백여 년이라,義理로는 곧 君
臣이 恩惠로는 부자와 같다.그리고 임진년에 再造해 준 그 恩惠는 만
세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중략)광해는 背恩忘德하여 천명을 두려
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기미년 오랑캐를 정벌한 때에는 은밀히 帥臣을 시켜 동태를 보아 행동
하게 하여 끝내 全軍이 오랑캐에게 投降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四海에
펼쳐지게 하여,예의의 나라인 三韓으로 하여금 오랑캐와 금수가 됨을
면치 못하게 하였으니,그 통분함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
가.122)
부모와 같은 중국 조정의 은혜를 저버리고 우리 동방 예의의 풍속을
무너뜨려 三綱이 땅을 쓸은 듯 없어졌으니,이를 어찌 차마 말할 수
121)정만조,한충희,김인걸 외,『조선의 정치와 사회』,집문당,2002,p.282.
122)『仁祖實錄』권1,인조 元年 3월 甲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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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겠는가.심지어 사치가 도에 넘치고 형벌이 문란하여 백성들이 곤궁
하고 재정이 고갈되며 내외의 질서가 무너짐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망
치고 종사를 전복하기에 충분하였다.이와 같은 소소한 일들은 자전의
하교에 모두 거론되었으므로 더 이상 재론하지 않는다.123)
조선왕조는 건국 초부터 유교적 도덕왕국의 건설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조선의 국가관은 철저히 유교적 통치원리에 의해 추구되는 이상적 도덕국가
완성을 지향하였다.위의 글은 이런 이념으로 출발하여 조선은 중국 명나라
를 2백여 년 동안 섬기고,義理로는 君臣와 부자 관계임을 밝혔다.그래서 광
해군의 대청정책은 동방 예의의 풍속을 무너뜨려 三綱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이는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임진왜란을 맞은 조선의 정치는 부패해지고 문란하여,재정은
고갈되었고,백성들은 굶주림으로 허덕였다.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더 이상
상처를 입을 수 없었다.자국의 이익을 위해 섬기고 있었던 명나라는 쇠퇴하
여 세력이 강해지는 호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광해군의 현실주의 외
교정책에 입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이런 국익을 우선하는 국제사회의 힘
의 역할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당시 국제사회의 현실을 바라보
던 작가 조위한의 시각은 이 작품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였다.
한편,작가 조위한은 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을 통해서 개인적 의식도 나
타낸다.
그 오랑캐가 말했다.
“두려워 마시오!나 또한 삭주의 사병이었소.부사의 학정이 끝이 없
어,그 고초를 견디지 못하고 가족을 거느리고 오랑캐 땅으로 들어온
지 이미 십 년이나 되었는데,그들은 성품이 강직하고 또한 가혹한 정
치는 없다오.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을진대,무엇 때문에 구차스럽게
아전배들이 채찍질에 시달려야 한단 말이오.오랑캐의 추장이 나로 하
여금 팔천 명의 정병을 거느리고 조선인 포로를 감시하여 도망치는 것
을 방비하게 하였소.지금 그대들의 말을 들어보니 매우 기이한 일이
123)『仁祖實錄』권1,인조 元年 3월 甲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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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내 비록 노추에게 질책을 당하더라도 어찌 차마 그대들을 보내지
않겠는가?”
마침내 늙은 오랑캐는 식량을 마련하고 지신의 아들을 시켜 샛길을
가르쳐 주면서 최척과 몽석을 풀어 주었다.124)
최척은 포로가 되어 호족 포로수용소에서 큰 아들 몽석과 극적으로 만났다.
어떤 오랑캐가 부자가 만나는 기이한 이야기를 듣고 식량을 준비하고 샛길을
가르쳐 최척과 몽석을 풀었다.오랑캐가 원래 조선 삭주 토병이었는데 삭주
목사의 학정에 시달리지 못하고 가족을 데리고 정든 고향을 떠나 호족으로
도망갔다.대부분의 백성들이 학정에 시달리며 살 도리밖에 없었지만,토병은
스스로 자신의 권익을 찾아 대대로 살았던 고국을 떠나 가혹한 정사가 없는
호족의 땅에서 자리를 잡아 팔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게 되었다.그는 조선에
비해 호족은 가혹한 정사가 없다고 하며 호국에서의 생활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고 있었다.그러나 당시 후금과의 전쟁에 명을 도와 참전해야 했던 조선
은 현실에서 호족이 결코 우호적인 존재가 아니었다.조선은 호족과 이런 관
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는 호족을 우호적인 존재로 보았다.또한
유교의 복종을 미덕으로 생각하던 조선 백성들이 의식이 크게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유교라는 대의명분이 아닌 개인의 삶을 우선하는 실리를 추구한
것이다.즉 개인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삭주 토병을 통해서 당시 조선 사회의 정치가 얼마만큼 부패했는지,
백성들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고국을 버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삼각했던 부패의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비판의식의 발로라고 해
석된다.
124)老胡曰
“無怖 我亦朔州士兵也 以府使侵虐無厭 不勝其苦 擧家入胡 已經十年 胡人性直 且無苛政 人生如
朝露 何乃苟趣捶楚之鄕乎 奴酋使我 領八千精兵 管押本國人 以備逃逋 今聞爾輩之言 大是異哉
我雖得責於奴酋 安得忍而不送乎”
明日備給粮粮 使其子指送間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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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외적 공간에 대한 작가의식
1)중국에 대한 동경
작가 조위한은 어렸을 때부터 한문중심으로 교육을 받고 중국 전적을 많이
읽어 자연스럽게 중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갔다.<神道碑銘>에 이미 열여
섯 살에 先秦의 고문을 두루 섭렵했다는 기록이 있다.<行狀>에 열다섯,열
여섯 살 때 이미 경서를 외웠으며 先秦古文을 두루 읽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문중에서 전하는<年譜>나 <墓表>등 작자에 관한 여러 기록에서 그가
중국의 전적을 두루 섭렵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그가 학문에 뛰어나
고 열한 살 때 지었다는 작품들이 지금까지 남아있다.125)조경은 조위한의 문
집인『玄谷集』의 발문에서 그가 어려서부터 문장을 좋아하여 先秦과 兩漢의
문장이 아니면 읽지 않았고『太史』와『戰國策』에 심취한다고 하였다.126)이경
석은 서문에서 조위한이 先秦과 兩漢,魏晋의 고문을 안 본 것이 없었으며
『詩經』을 읊어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킬 정도라고 하였다.127)이것으로 보아
그가 일찍부터 중국의 고전에 박식했음을 알 수 있다.이렇게 조위한은 어려
서부터 중국문화를 많이 익혔으므로 문물이 찬란했던 중국에 대한 관심과 동
경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중국에 대한 강한 동경은 중국으로 여행 가는 한
이유가 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그는 동생 조찬한과 같이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살이를
하였다.피난생활을 하다가 어린 딸을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잃었고,남원에
서 어머니를 잃었다.서른한 살 때 부인과도 사별하였다.정유재란이 일어나
서 다시 전라도 봉산으로 피난하였을 때 호남이 적병에 의해 유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주에서 신혼생활을 하던 동생이 걱정되어 내려갔다가 제수의
殉節을 목도하였다.조위한은 남원에서 피난하던 중 김덕령 장군의 수하에
125)<年譜>에 친구들과 어울려 매화와 버드나무가 봄을 다투는 정경을 보고 지었던 시 ‘相爭春色
誰後先 陌頭楊柳溪邊梅’와 또 전염병으로 인해 避接 나갔다가 죽을 위기를 넘기고 화복하자 아
버지에게 자신의 뜻을 나타냈던 ‘臥病南窓下思親淚滿巾 父母何處去 兄弟在何處 遙知父母處 欲
去病未能.’이라는 시가 있다.
126)조위한,『玄谷集』,조경의 跋文.
127)위와 같은 책,이경석의 序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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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 왜적을 물리치는 일에 참여하였고,이 때 처음으로 명나라 군사들과
교류를 시작했으며 명나라 장수에게 사랑을 받았다.128) 이 시기에 전쟁으로
인해 단란했던 가정이 완전히 해체되었고,난이 끝난 후 오랜 동안 방랑하다
가 고향에 돌아왔으니 모실 부모도 처자도 다 잃어버렸다.그는 세상에 살
재미를 잃고 명나라 장수들과 같이 평소 동경했던 중국의 명승지로 알려진
江蘇省과 浙江省을 여행하기로 하였다.그러나 형 조유한의 만류로 포기하였
다.129)
조위한이 벼슬에 오르기 전에 허균이 중국에서의 여행의 괴로움을 말하자
조위한은,“우리 들이 중국에 태어나지 못한 것이 이미 불행이라 하겠는데 하
물며 행로의 수고로움으로 위대하고 장려한 구경을 폐할 것인가,이는 우물
안 개구리의 소견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 하면서 자신이 과거에 급제하여
사신으로 발탁되면 반드시 함께 중국을 여행을 하기로 하였다.130)중국에 태
어나지 못한 것이 이미 불행이라 생각할 정도로 중국에 대한 동경을 나타냈
다.행로가 비록 고생스러워도 각오하는 의지가 엿보였다.조위한이 중국을
얼마나 동경했는지,중국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중국을 얼마만큼
긍정적으로 생각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그런데 허균은 갑작스러운 병으로
인해 갈 수 없게 되었다.
광해군 2년 8월(1610년)조위한은 예부랑중으로 재직하던 중 사은사 서장
관으로 명나라에 가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중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느낀 것
을 시로 나타냈다.대표적인 작품이 <渡三又河是日大風>,<大凌河>,<小凌
河>,<過寧遠衛>,<謁夷濟廟>,<入遼陽城二首>,<過李提督如松祠>,<長
城>,<山海關>,<波撼岳陽城>,<題滄浪亭>,<玉河館>,<秦皇島>,<在西
湖>,<遊太白山>131)등이 있다.이 시들이 지명이나 사당,성 이름을 제목으
128)<神道碑銘>,先是十餘年間倭寇猶未平 嘗從金將軍德齡 試軍旅事 天將有愛公者 公欲隨入中朝博
觀天下.
129)<年譜>.
『玄谷集』卷之十三,<祭亡子倚文>.
…與天朝將士吳明濟會遊龍山 欲偕入江浙間不果 文集有獨身飄泊于龍山 旣無父母又無妻子 不樂
於人世 將有出塵遠遊之志 適遇天將水兵之來泊于江上 得與浙人相善 約與之偕入東吳 浪迹於蘇杭
之間 而爲仲氏泣挽 不得遂去.
130)허균,『惺所覆瓿藁』卷5,文部,<送趙持世赴京序>.
131)조위한의『玄谷集』에 수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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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삼고 있어 조위한의 행로를 알 수 있다.이런 여행 체험은 작품 <최척전>
에서 잘 반영하였다.또한,중국에서 새로운 문물을 보고 자신의 경이로움을
나타나는 시들도 있다.북경의 저자를 다니던 중 수족관에서 노는 물고기를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며 읊었던 <琉璃甁貯水養紫魚數箇實案上澄澈若空一魚
之影或有大小或成五六殊爲異觀>,악사가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겨울 매화와
흰 눈을 소재로 노래를 지어 부르는 것을 보고 지은 <聽于樂師彈琴>,실물과
거의 같은 조화를 만들어 파는 사람을 보고 느낌을 읊었던 <有賣造花者紅藥
白梅共一紙盆其巧逼眞置諸案上而賦之>,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것
을 보고 읊었던 <鸚鵡>132)등이 있다.이 시들이 작가 중국의 인심이나 풍경
에 대한 관심이 컸던 것을 잘 나타낸다.
또한 조위한은 한문으로 지었던 작품들도 자신이 중국에 대한 동경심을 잘
나타낸다.그는 계축옥사에 연루되었다가 파직․금고 생활을 하던 중 세상에
나오지 않을 계획으로 남원 주포에 내려와 살면서 자신의 은거한 뜻을 나타
내는 <次歸去來辭>를 지었다.세상이 자신을 알자주지 않아도 옛날부터 불우
한 자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슬퍼할 것이 없고 농사지으며 술을 벗 삼고
음풍농월하면서 여생을 보내겠다는 뜻을 담았다.이 작품은 작가가 도연명이
지은 <歸去來辭>의 운을 빌려 지은 것이다.작자뿐만 아니라 전 시대의 이인
로를 비롯하여 성현,정경세,신흠,이안눌,허균 등도 <歸去來辭>에서 운을
빌려 자신들이 은거하는 뜻을 나타냈다.133)이 작품에서 중국의 고사가 상당
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134)아들의 죽음을 애도한 <祭亡子倚文>에서도 중
132)역시『玄谷集』에 수록하고 있다.
133)李仁老(1152~1220)<和歸去來辭>(『東文選』)
成 俔(1439~1504)<次歸去來辭>(『許白堂文集』)
鄭經世(1563~1633)<次歸去來辭>(『愚伏集』)
申 欽(1566~1628)<和歸去來辭>(『象村集』)
李安訥(1571~1636)<次歸去來辭韻>(『東岳集』)
許 筠(1569~1618)<和陶元亮歸去來辭>(『許筠全集』)
申 最(1619~1658)<和歸去來兮辭>(『海東辭賦』)
洪奭周(1774~1841)<和陶歸去來辭>(『淵泉全書』)등이 있다.
134)晉나라 때 문인 潘岳의 秋興이라든가 張翰의 征衣,陝西省에 있는 終南山의 파란 산 기운,戰
國시대 魯나라 사람 顔闔은 魯君의 부름에도 도를 지키고자 끝까지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顔闔鑿壞’,삼국시대 魏나라 사람 管寧이 황건적 난 때 遼東으로 피난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管寧浮舟’,晉나라 혜강이 사형 당할 때 거문고를 타며 ‘廣陵山(琴曲의 명칭)
도 오늘로써 끊어져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或絶響於林丘’,요순시대의
태평대,요임금 때 巢父와 許由가 산 속에서 세상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은거했던 고사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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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의 고사가 많이 나타냈다.135)이런 것으로 보아 작가가 중국의 전고에 두루
박식한 것을 알 수 있고,중국의 문화에 대한 동경심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에는 조위한의 체험을 많이 반영한 <최척전>에서 작가의 중국에 대한
동경을 어떻게 나타내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배경적 측면
<최척전>의 주요 배경은 조선 남원이다.그러나 정유재란으로 인해 가족과
이산하게 된 최척이 의탁할 곳이 없어서 중국 명나라 군사 여유문을 따라 중
국으로 갔고 20여 년 동안 살았다.중국은 최척의 두 번째 고향인 것이다.최
척은 여유문의 집인 浙江省 紹興에서 살면서 여유문과 의형제를 맺었다.여
유문은 병으로 인해 죽자 최척은 또 다시 의탁할 곳이 없어 중국 곳곳을 돌
아다녔다.長江을 따라 湖南省 洞庭湖 주변을 중심으로 四川省 龍門,浙江省
禹穴,雲南省 瀟湘江,湖南省 岳陽樓,江蘇省 姑蘇臺 등 일대 중국 대표적인
명승지를 유람하다가 속세에 뜻을 잃고 四川省의 靑城山에 가서 도술을 배우
려 하였다.예전부터 최척이 사귀었던 친구 주우라는 사람을 만나 그의 만류
로 靑城山행을 포기한 후 상선을 타고 함께 장사를 다니게 되었다.그러다가
안남에 이르고 옥영과 우연히 해후하고 杭州의 湧金門에 정착하였다.湧金門
에서 19년 동안 살다가 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으로 인해 서기로 뽑혀 명나
라 군사를 따라 遼陽으로 북정하였다.명나라가 졌기 때문에 최척은 포로가
되고 삭주 토병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조선으로 돌아왔다.
여기 최척이 유람한 지역들은 풍류와 예술이 함께 어우러지고 당시 중국문
화의 조선 이입과정과 깊은 관련을 가지는 곳이다.당시 조선의 시인묵객이
면 누구나 동경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그리고 四川省의 靑城山은 그 당
시 隱者들이 숨어 장생불사를 꿈꾸며 도술을 연마하는 유명한 산이라고 하였
다.이렇게 중국의 여러 지역을 배경으로 설정하여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은 작가의 중국 여행체험과 중국에 대한 동경에 의해서 이루어진 결과로
인용하였다.
135)아들의 夭死를 孔子의 아들 伯魚,『太玄經』을 지은 한나라 揚雄의 아들 東鳥와 비유하였고,아
들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을 孔子의 제자 子夏나 曾子와 비유하였다.또는 春秋戰國時代 魏나라
사람 東門吳,楚나라 현상 孫叔敖가 어렸을 때 兩頭蛇를 죽였던 고사 등을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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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있다.
(2)인물의 관점
① 여유문
여유문은 정유재란 때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파병된 중국인이다.남원에서
최척을 만나 그의 딱한 사정을 듣고 불쌍하게 여겨 중국으로 데리고 갔다.
여유문은 최척을 매우 아껴 같은 막사에서 식사를 하고 잠도 같이 잤다.그
리고 오갈 데 없는 최척과 의형제를 맺었다.紹興에서 함께 살면서 여유문은
단신인 최척의 처지를 긍휼히 여기고 자신의 동생과의 결혼을 주선했는데 최
척은 가족이 생사불명의 상태에서 새로운 아내를 얻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완강하게 사양하였다.그리고 일찍이 여유문은 오세영에게
최척의 인물됨을 이야기하였기 때문에 후에 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이 일어
날 때 오세영이 최척을 서기로 삼아 데려갔다.결국은 최척은 호족의 포로가
되고 포로수용소에서 큰 아들 몽석을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삭주 토병의 도
움으로 도망가고 귀국하게 된다.최척에게 여유문은 생명의 은이며 고난을
극복하도록 도와준 선한 인물이다.여유문을 통해 최척의 삶이 극적으로 전
환되는 계기를 부여하는 것은 중국의 인물들을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에서 비
롯된 일이다.
② 주우
주우는 최척이 중국에서 사귀었던 중국 친구이다.여유문이 죽자 최척은 세
상에서 살 뜻을 잃고 청성산으로 가서 도술을 배우려 하였다.주우는 이런
사연을 듣고 세상에 그런 이치가 없다고 말하면서 함께 장사를 하며 살아가
자고 권하였다.그는 안남의 포구에서 최척과 옥영이 재화하는 과정에서 일
을 그르칠 뻔한 두홍의 과격한 행동을 자제시키고 매사가 잘 되도록 도운 지
혜로운 인물이다.최척과 옥영이 재회하도록 결정적 동기를 부여한 인물이기
도 하다.생명의 은인보다 더 고마운 사람이라 할 수 있다.그 것뿐만 아니라
주우는 옥영을 데려오기 위해 돈우에게 백금을 주기도 하고 최척과 옥영이
중국에서 살 수 있도록 방을 마련해 주는 등 깊은 우정을 나눈다.최척과 옥
영이 중국에서 살게 되고 훗날 몽선과 홍도의 결혼도 이루어질 수 있게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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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준다.여유문의 선행을 보완하는 구실을 담당하는 인물이다.
③ 오세영
오세영은 중국 소주 사람이다.호족의 명나라 침입 전쟁이 일어났을 때 喬
遊擊의 副摠으로 북정하게 되었다.그는 일찍이 여유문에게서 최척이 재주가
있고 용맹하다는 것을 들어서 최척을 서기로 데려갔다.이렇게 최척을 만주
로 데려갔기 때문에 명나라 군사가 패전한 후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서 아들
을 만나는 계기를 만들어 준 인물이다.최척의 인생행로에 도움을 끼친 인물
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선한 중국인이다.
④ 두홍
두홍은 최척과 주우가 함께 장사를 다닐 때 함께 배를 타고 다니던 인물
가운데 한 젊고 용맹한 장정이다.최척이 안남의 포구에서 이웃 일본 상선에
서 나온 조선말로 읊은 시구는 바로 자신의 아내가 손수 지은 것이라고 확신
하였기 때문에 실성한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주우가 물어도 최척은 목
이 메고 눈물이 떨어져 말을 할 수 없었다.최척은 기운을 차리고 이웃 일본
상선에서 읊은 시구가 자신의 아내가 지은 것이고,시를 읊은 목소리도 자신
의 아내의 목소리와 너무 비슷하다고 말했다.최척은 온 가족이 포로로 잡혀
간 일을 말하자 주변 사람들이 다 놀라고 기이하게 여겼다.이때 두홍이 얼
굴에 의기를 띠고 주먹으로 노를 치면서 분연히 일어나서 일본 상선으로 달
려가 구하여 오겠다고 나섰다.주우가 밤중에 소동을 일으키는 것은 공연히
될 일도 망칠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만류하고 주변에서도 이를 옳게 여기자 분
기를 자제하였다.중국인 두홍을 의협심 강한 청년으로 그리고 있다.
⑤ 홍도
홍도는 중국 명나라 여인으로 정유재란 때 조선으로 파병되었던 진위경의
딸이다.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조선으로 떠나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다 자
르기도 전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셨기 때문에 홍도는 이모의 집에 의탁하게 되
었다.만약에 아버지가 전사하면 조선에 한 번 가서 넋을 불러 놓고 통곡한
뒤 시신을 모시고 돌아와 장례를 지내겠고,아니면 조선에 가서 아버지를 찾
겠다는 것은 홍도의 소원이었다.참 효심이 갸륵한 여인이다.그래서 몽선이
혼처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자 이모에게 중매를 부탁하였다.당시 명나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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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사정으로 보면 대국 명나라의 여인으로 자존심을 버리고 유랑민과 다
름없는 조선인인 몽선의 아내가 되기를 자원한 것이 된다.어떻게 해서든 조
선으로 가야만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조선인과 결혼함에 있어
서 대국 여인의 자존심을 문제 삼지 않은 것이다.홍도의 이런 행동은 자신
의 애정보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더 중요시한 결과로 해석된다.뒤에 옥영
이 귀국을 결심하고 조선으로 향하고자 할 때 몽선은 해로의 어려움 때문에
극구 만류하지만 홍도는 적극 나서서 시어머니를 도와 남원에 도착하였다.
의지가 굳고 효심이 깊은 중국인 여인상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⑥ 진위경
진위경은 홍도의 아버지이다.정유재란 때 조선으로 파병되었다가 귀국하지
못하였다.순천에서 주둔하고 있을 때 적세를 염탐하다가 주장의 뜻을 어기
게 되었고,주장이 군법에 회부할 것을 두려워하여 탈출한 뒤 조선에 머물게
되었다.그는 대구의 박생이라는 사람의 집에 의탁해 침술을 배우고 생계를
유지해 왔다.은진에 이르렀을 때 중병을 얻은 최척을 만나 그를 치료해주고
함께 남원으로 내려왔다.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최척과 사돈임을 알게 되었다.
진위경이 귀국하지 못하고 조선에 머물게 됨으로써 중국에서 아버지의 생사
를 모르는 홍도로 하여금 조선인과 결혼하지 않을 수 없는 직접적인 동기를
부여한다.특별히 동경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이야기의 진행을 돕는 긍정적
인물로 묘사되었다.
⑦ 오봉림
오봉림은 홍도의 이모부이다.홍도가 장성하기도 전에 어머니를 잃자 자신
의 집에 데려다 양육하였다.홍도에게 養育之恩이 있는 사람이다.홍도가 몽
선의 아내를 되기를 자원하자 본래부터 홍도의 뜻을 알고 있는 이모부는 최
척을 만나 홍도의 뜻을 전하여 이들이 결연하도록 도와주었다.오봉림은 의
지할 곳이 없던 홍도를 데려다 양육하고 홍도가 몽선에게 시집갈 수 있도록
주선한 인물이다.
이상으로 보아,<최척전>에서 나타난 중국 사람들은 다 긍정적인 인물이
다.주인공 옥영과 최척 가족의 재회를 직접적이나 간접적으로 돕는 역할을
수행한다.작가 조위한의 중국 사람에 대한 호의적 감정이 작용하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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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있다.
(3)중국문학과의 친연성
최척과 옥영이 서로 보낸 편지 중에 나타난 중국 고사의 인용 사례를 들어
보기로 한다.
옥영은 정상사 집에서 공부하는 최척의 모습을 살펴보고 자신이 의탁할 만
한 낭군이라고 생각하고 최척에게 청혼의 뜻이 있는 <摽有梅>의 마지막 장
을 보냈다.<摽有梅>는 중국『詩經』의 召南篇에 있다.마지막 장은 ‘摽有梅頃
筐墍之 求我庶士迨其謂之’이다.‘던지는 매실 열매 광주리 다 비었네.나를 찾
는 임들아 어서 한 말씀하시라’는 시구이다.이는 매실 열매를 던지면서 남자
를 유혹하는 여인의 노래로 특히 혼기에 차 있는 여인이 구혼의 뜻을 전하는
시로 알려졌다.옥영이 이 시구를 보내는 행동은 사랑 고백이라고 할 수 있
다.최척과 혼사를 이루고 싶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아침에 글을 받고는 제 마음이 감동하였습니다.다시 시녀를 만나니
기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매양 거울 속의 그림자만을 바라볼 뿐이
었습니다.또한 그림 속의 사람을 불러낼 수도 없었습니다.거문고 소
리로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상자 속의 향을 훔칠 수 있다는 것을 모르
는 바가 아닙니다.하지만 봉래산이 얼마나 깊으며 약수가 얼마나 멀
리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이리저리 궁리하다 보니 심신이 모
두 지치고 말았답니다.그런데 오늘은 뜻밖에도 양대의 비가 홀연히
꿈에 나타나고 서왕모의 서신이 문득 도착하였습니다.속히 진진의 우
호를 맺음으로써 월하노인의 인연을 이룰 수 있다면 삼생의 소원을 이
루어 동혈의 맹세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글로 말을 다 적을 수
없으니 어떻게 마음을 모두 전할 수 있겠습니까?136)
위의 인용문은 최척은 옥영이 보낸 <표유매>의 마지막 장을 받은 후 옥영
에게 쓴 답장 편지의 내용이다.시녀(靑鳥)는 반가운 使者나 편지를 이르는
136)朝承玉音 實獲我心 卽逢靑鳥歡喜難勝 每憑鏡裡之影 難喚畵中之眞非 不知琴心 可挑篋香 可偸而
實未側 蓬山幾重 溺水幾里 經營計較之際 鹹已黃 而項已枯矣 不意今者陽臺之雨 忽然入夢王母之
書 遽爾來報倘 成秦晋之好 結月老之繩 則庶遂三生之願 不偸同穴之盟 書不盡言言豈悉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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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다.푸른 새가 온 것을 보고 동방삭이 서왕모의 사자라고 한 漢武의 고
사에서 유래한다.본 작품에서는 최척에게 글을 전해준 옥영의 시비 춘생을
가리킨다.거문고 소리로 마음을 움직이는 것(琴心 可挑)은 司馬遷의『史記』
의 <司馬相如列傳>의 ‘而以琴心挑之’에서 유래한 고사이다.한나라 때 卓王孫
은 음율을 좋아하고 과부가 된 卓文君이라는 딸이 있다.司馬相如가 卓文君
의 마음을 유혹하기 위하여 거문고를 타고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을 전한다.
여기 ‘琴心 可挑’는 거문고 소리에 실은 탄주자의 마음이다.즉,여자의 마음
을 움직이려고 거문고를 타는 사람의 마음을 뜻하는 것이다.상자 속의 향을
훔칠 수 있는 것(篋香 可偸)은『晉書』<賈謐傳>의 ‘韓壽偸香’에서 유래한 고
사이다.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남녀가 결합함을 이르는 말이다.봉래산이
얼마나 깊으며 약수가 얼마나 멀리 있는 것(蓬山幾重,溺水幾里)에서 ‘蓬山’은
중국 전설에서 나타나는 가상적 靈山인 三神山 가운데에 있으며,신선이 살
고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다고 한다.또 蓬丘,蓬島,蓬萊,蓬山,蓬壺이라고 부
른다.‘溺水’는 신선이 살았다는 중국 서쪽의 전설적인 강이다.길이가 3천 리
나 되며,부력이 매우 약하여 기러기의 털도 가라앉는다고 한다.‘蓬山幾重,
溺水幾里’은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과 가깝게 있으면서도 쉽게 만날 수 없고
안타깝게 여기면서 인용한 고사이다.심신이 모두 지치고 말았다는 것(馘已
黃,而項已枯矣)은『庄子』의 <列禦寇> ‘槁項黃馘’에서 유래한 고사이다.사람
의 목이 말라빠지고 얼굴이 누렇게 되고 건강하지 않은 모습을 형용한다.양
대의 비(陽臺之雨)는『文選』에 실린 초나라 宋玉의 <高唐賦>의 ‘巫山之夢’또
는 ‘巫山之雨’에서 유래한 것이다.남녀간의 密會나 情交를 이르는 말이다.중
국 초나라의 襄王의 선왕이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무산의 神女를 만나 즐
거움을 누렸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陽臺’는 四川省의 巫山縣 부근의 산 이
름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남녀가 密會하는 곳이라 한다.서왕모의 서신(王母
之書)은 서왕모가 동방삭에게 보낸 편지로 반가운 글이라는 뜻이다.서왕모는
먼저『山海經』에서 나타난다.중국 崑崙山에 사는 사람 얼굴에 호랑이의 이
빨,표범의 털을 가진 신선이라고 한다.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불사의 약을 가
진 선녀라고 전해진다.漢代에 서왕모의 이야기가 민간에 널리 퍼졌다.진진
의 우호를 맺는 것(成秦晋之好)은 춘추전국시대 秦과 晋나라 사이에 대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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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혼인을 맺던 세의가 있었음을 이르는데,전하여 남녀가 결혼하는 것을 말
한다.월하노인의 인연을 이루는 것(結月老之繩)은 중국 당나라의 韋高가 달
밤에 어떤 노인을 만나 장래의 아내에 대한 예언을 들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전설에서 월하노인이 가지고 있는 주머니의 붉은 끈으로 남녀의 인연을 맺어
준다고 한다.여기서 최척이 옥영과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결연을 이루고 싶
다는 뜻이다.이 두 고사는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하는 것을 말한다.동혈의
맹세(同穴之盟)는『詩經』의 <王风·大车>의 ‘谷則異室,死則同穴’에서 유래한
고사이다.부부가 죽어서 같은 무덤에 묻힌다는 맹세로,흔히 부부의 금슬이
좋음을 비유한다.여기서는 최척은 옥영에게 ‘부부가 되자는 맹세’라는 뜻이
다.
저는 서울 도성에서 생장하였기 때문에 여인의 정정한 행실에 대하
여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그런데 불행하게도 일찍 부친을 잃었고 자
라서는 난리까지 만났습니다.혼자서 홀어머니를 섬기며 형제도 없이
살면서 남방으로 이리저리 떠돌다 친척에게 의탁하였던 것입니다.나
이 이십이 다 되도록 지아비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이제 하루아침에
전쟁이 터져 도적들이 횡행하고 있습니다.옥 같은 몸을 지키기가 쉽
지 않을 것이며,강포한 자들의 추행을 면하기 어려울까 항상 두렵습
니다.그 때문에 늙은 어머니도 상심하여 저의 신세를 염려하고 계십
니다.그러나 걱정스러운 바는 오히려 넝쿨풀이 의탁할 만한 곳은 반
드시 큰 나무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인생 백 년의 고락이 실로 남
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만일 그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평생을 바라보며 살 수 있겠습니까?그런데 근래 낭군을 뵈오니 말하
는 소리가 종용하고 몸을 놀리는 모습은 한아하였습니다.그리고 성실
하고 믿음직한 기색이 환하게 얼굴에 드러나 있었습니다.훌륭한 지아
비를 구하려 한다면 그대를 버려 두고 다시 누구를 얻을 수 있겠습니
까?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그대의 첩이 되는 편이 나
을 것입니다.하지만 저는 운명이 기구하니 낭군에게 합당하지나 않을
까 하여 두렵습니다.어제 시를 보냈던 것은 음란한 생각을 가지고 했
던 것이 아니었습니다.다만 낭군의 태도를 헤아려 보고자 하였을 뿐
이었습니다.제가 비록 보잘것없으나 애초 저자 거리의 여자는 아니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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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어떻게 남몰래 담을 넘어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반드시 부모님
께 알리고 혼인의 예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그렇게만 된다면 정절
과 믿음을 스스로 지킬 것입니다.감히 남편 반드는 일을 게을리 할
수가 있겠습니까?시를 던져 먼저 욕되게 하였고 스스로 중매하는 더
러운 행실을 다시 저질렀습니다.이제 다시 사사로운 편지를 주고받고
자 한다면 더욱 유한한 정조를 잃게 될 것입니다.이제는 서로의 마음
을 잘 알았으니 부질없이 편지를 전할 필요가 없겠지요.오늘부터는
반드시 매파를 통하여 연락하여야 할 것입니다.제가 거듭 행로의 놀
림을 받지 않게 해주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137)
위의 인용문은 옥영은 최척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의 내용이다.서울 도성
(輦殻之下)은 예로부터 전하는 成語인데 ‘천자가 타는 수레 아래’라는 뜻으로
전하여 ‘京城’을 가리키는 말이다.넝쿨풀이 의탁할 만한 곳은 반드시 큰 나무
이어야 한다는 것(絲蘿所托 必在喬木)은 중국 당나라 杜光庭의『虬髥客傳』의
‘絲蘿非獨生,願托喬木,故來奔爾.’에서 유래한 고사이다.菟絲와 女蘿가 큰 나
무에 의탁한다는 뜻으로 여자가 훌륭한 남자에게 의지하여 그 처첩을 됨을
이른다.남편 반드는 일(案擧之敬)은『後漢書』의 <梁鴻傳>에서 나온 梁鴻의
아내인 孟光의 ‘擧案齊眉’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부부의 도리를 다해 남편을
지극히 공경한다는 뜻이다.서로의 마음을 잘 알았다는 것(肝膽相照)은 송나
라 趙令畸의『侯鯖彔』의 ‘同心相親,照心照膽壽千春.’에서 유래한 것이다.서로
마음을 터놓고 친밀히 사귄다는 뜻이다.
어머니께서 저를 위해 사위를 고르면서 반드시 부자를 구하고자 하
십니다.그 실정이 참으로 애처롭습니다.다만 생각하건대 집안이 부유
하면서 사위가 어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그러나 혹
137)妾生長輦殻之下 粗識貞靜之行 而不幸 早失嚴父 生丁亂難 獨奉偏慈 終鮮兄弟漂淪南土僑寄宗
黨 年垂及筓 尙恐一朝兵戎搶攘 盜賊橫行 則難保珠玉之沈碎 不無强暴之所污 以此老母傷心 以
我爲念 然而猶所患者 絲蘿所托 必在喬木 百年苦樂 實有他人 苟非其人 豈可仰望而終身 近觀
郎君 辭氣雍容 擧止閑雅 誠信之色 藹然於面目 若求賢夫 拾子伊 誰與爲人妻 寧爲老子之妾 而
薄命崎嶇 恐不得當也昨者投書 非爲其誨淫之意也 只欲試郎 君之俯仰也 妾雖無狀 初非依市之
徒 寧有鑽穴之逃心 必告父母 終成委禽之禮 則貞信自守 敢懈擧案之敬 投詩先讀 已犯自媒之醜
行 欲往復私書 尤失幽閑貞操 今旣肝膽相照 不須書札浪傳 自此以後 必以媒妁相通 以母令妾
重貽行路之譏 千萬幸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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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집은 부유하더라도 사위가 그다지 어질지 못하다면 그 가업을 보존
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어질지 못한 사람을 남편으로 삼는다면
비록 곡식이 있다 하더라도 얻어먹으며 살수가 있겠습니까?가만히 보
니 최생은 날마다 아저씨에게 와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충후하고
믿을 직하니 결코 경박한 탕자는 아닐 것입니다.이 사람을 배필로 삼
는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하물며 가난은 선비의 떳떳
한 도리가 아닙니까?불의를 행하며 부자가 되는 것을 저는 조금도 원
치 않습니다.청컨대 그에게 시집을 보내 주십시오.이런 말은 처녀가
스스로 할 말이 아닌 줄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이는 매우 중대한 일
입니다.처녀라 하여 부끄러워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말을
하지 않다가 마침내 어리석은 사람에게 시집가 일생을 망쳤다고 생각
해 보십시오.깨진 항아리가 다시 온전하게 될 수 없고,한 번 물이 든
실이 다시 희게 될 수 없는 것과도 같을 것입니다.울어도 소용이 없
고 후회해도 이미 늦을 것입니다.하물며 지금 저의 신세는 다른 사람
들과 경우가 다릅니다.집안에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데 적병은 이웃
마을에 있습니다.이런 마당에 충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면 어떻게 우리 모녀를 보살펴 줄 수 있겠습니까?차라리 안 씨가 시
집가기를 자원했던 고사를 따르겠습니다.서매가 스스로 남편을 택했
던 고사를 피하지 않으려 합니다.어찌 깊은 방에 숨어 지내며 다만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나 바라보면서 서로 잊는 지경에 빠질 수 있겠습
니까?138)
위의 인용문은 옥영이 어머니에게 최척을 남편으로 섬기고 싶다고 고백한
내용이다.울어도 소용이 없고 후회해도 이미 늦은 것(啜泣何及 噬臍莫追)은
춘추전국시대『左傳』<庄公六年>의 ‘若不早圖,後君噬齊(臍),其及圖之乎?’에
서 유래한 말이다.배꼽을 물어뜯으려 하여도 입이 닿지 않는다는 뜻으로,후
회하여도 이미 소용이 없음을 비유한 말이다.또한 ‘噬臍何及’로 쓴다.차라리
138)母親爲我擇婿 心欲求富 其情則戚矣 第惟家富而婿賢 則何幸 而如或家雖足食 婿甚不賢 則難保其
家業 人之無良 我以爲夫 而雖有粟 其得而食諸 竊覸崔生 日日來學於阿叔 忠厚誠信 決非輕薄宕
子也得此爲配 死無恨矣 況貧者士之常 不義而富 吾甚不願 請決嫁之 此非處子所當自言之事 而機
關甚重 豈嫌於處子 羞澁之態 潛黙不言 而竟致嫁得庸爲壤了一生 則已破之甕 難以再完 旣染不絲
不可復素 啜泣何及 噬臍莫追 況今兒身 異於他人 家無嚴父 賊在隣境 苟非忠信之人 何以仗母子
之身乎 寧從顔氏之請嫁 不避徐妹之自擇 豈可隱匿深房 但望人口 而置於相忘之地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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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씨가 시집가기를 자원했던 고사를 따르고 서매가 스스로 남편을 택했던
고사를 피하지 않으려 하는 것(寧從顔氏之請嫁,不避徐妹之自擇)은 차라리 안
씨가 결혼을 요청하고 서매가 스스로 낭군을 선택한 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뜻이다.‘顔氏’는 어떤 고사에서 유래한 것인지 알 수 없고,‘徐妹’는『左傳』
<昭公元年,二年>의 鄭나라 대부 徐吾犯의 여동생 서매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최랑이 오지 못한 것은 그 몸이 의병장에게 매인 때문이요,까닭도
없이 약속을 저버린 것이 아닌데,그 말을 기다리지도 아니하고 스스
로 파혼하는 불의를 누가 옳다고 하겠습니까?만약 저의 뜻을 꺾고자
한다면 저는 당장 죽어버리겠어요.하늘같은 어머니께서도 몰라주시는
데 남들이 어떻게 제 마음을 헤아리겠습니까?139)
위의 인용문은 최척 의병참여 가고 혼인 날짜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옥영
의 어머니 심씨는 양생과 옥영의 혼인을 허락할 때 옥영이 어머니에게 한 말
이다.하늘같은 어머니께서도 몰라주시는데 남들이 어떻게 제 마음을 헤아리
는 것(母也天只不諒人只)은『詩經』의 <鄘風․栢舟>에서 나온 것이다.‘어머님
을 제게 하늘이신데 절 못 믿으시나요?’의 뜻이다.자신의 의지대로 시집가고
자 하는 여인이 부모에게 하소연하는 내용이다.
이웃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모두 양홍의 처나 포선의 아내도
이보다는 낫지 않을 것이라고 칭찬하였다.140)
위의 내용은 옥영은 최척에게 시집간 후에 효도와 정성을 다 하고 받은 칭
찬이다. 양홍의 처(梁鴻之妻)는『後漢書』의 <梁鴻傳>에서 유래한 고사이다.
양홍의 처는 후한 사람 孟光을 가리킨다.맹광은 아름답지 않지만 매우 어진
인물로 남편인 양홍의 뜻을 따라 검소한 차림으로 패능산으로 들어가 농사와
길쌈을 생업으로 삼고 남편을 지성으로 섬기며 물욕을 버리고 살았던 훌륭한
139)崔從義陳 行止係於主將 非無故負約而已 不俟其言 而徑自破約 不義孰正 若奪兒志之 死而靡他
母也天只不諒人只.
140)遠近聞之 皆以爲梁鴻之妻 鮑宣之婦 殆不能過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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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다.포선의 아내(鮑宣之婦)는『後漢書』의 <鮑宣傳>에서 유래한 고사이
다.포선은 젊어서 아내 桓小君의 부친에게 수학한다.학문을 좋아하고 경전
에 밝아 哀帝 때 諫大夫가 된다.포선이 환소군을 데리고 처음 시집으로 갈
때 환소군이 화려한 치장을 하고 포선을 뒤따르자,포선이 이를 싫어했다 한
다.이에 환소군은 짧은 치마로 갈아입고 포선과 함께 鹿車를 이끌고 시집으
로 간다.시집에서는 매우 어질고 손수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물을 긷는다.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한다.
왕자진이 피리를 부니 달도 내려와 들으려 하는데
푸른 하늘 바다와 같고 이슬도 가득하네
모름지기 우리 함께 푸른 난새를 타고 가리니
안개 낀 봉래산 길 쉽게 찾아가리.141)
위의 인용문은 옥영은 최척이 분 피리를 듣고 읊은 시구이다.왕자진(王子)
은 周나라 靈王의 태자 王子晉을 가리킨다.왕에게 직간한 죄로 서인이 된다.
왕자진이 피리를 불고 鳳凰 소리 내는 것을 좋아하였는데,伊洛 사이에서 노
닐다가 도사 浮丘生을 만나 신선이 되어 학을 타고 다녔다 한다.봉래산(蓬
島)은 蓬萊山의 다른 이름이다.
요대 아득하고 새벽 구름 붉은데
피리 소리 아직도 그치지 않았네.
여음은 공산에 가득하고 달도 지려 하는데
뜰의 꽃 그림자 바람에 흔들리네.142)
위의 인용문은 최척은 옥영이 읊은 시에 대해서 화답하여 읊은 시구이다.
요대(瑤臺)는 중국에서 신선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로부터 부부의 애정이 더욱 돈독하였다.서로 지음이라 생각하며
141)王子吹簫月欲低 碧天如海露凄凄 會須共御靑鸞去 蓬島烟霞路不迷.
142)瑤臺繞渺曉雲紅 吹澈鸞簫曲未終 餘響滿空山月落 一庭花影動香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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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하루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143)
지음(知音)은『列子』의「湯問篇」에서 伯牙는 거문고를 잘 타는데 그의 벗
種子期가 伯牙의 거문고 소리만 듣고도 伯牙의 마음을 잘 알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자기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한 벗을 가리킨다.
저 시는 곧 내 아내가 손수 지었던 것입니다.평소에 다른 사람들이
듣거나 알 수가 없는 시이지요.144)
아내(荊布)는『太平御覽』卷七百十八引 <烈女傳>의 ‘梁鴻妻孟光,荊釵布裙’
에서 유래한 고사이다.梁鴻의 아내 맹광이 늘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삼베
치마를 입었던 것을 가리킨다.자신의 아내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남쪽 越나라에서 온 새는 집을 지을 때 나무의 남쪽 가지에서 짓고,
북쪽에서 온 말은 북풍을 맞으면서 달린다.나는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그래서 더욱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견딜 수가 없구나.145)
남쪽 월나라에서 온 새는 집을 지을 때 나무의 남쪽 가지에서 짓고,북쪽에
서 온 말은 북풍을 맞으면서 달리는 것(越禽巢南,胡馬倚北)은『古詩十九首』
의 <行行重行行>의 ‘胡馬依北風,越鳥巢南枝’에서 유래한 것이다.남쪽 越나
라에서 온 새는 집을 지을 때 나무의 남쪽 가지에서 짓고,북쪽에서 온 말은
북풍을 맞으면서 달린다는 뜻으로 고향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한다는 말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首丘之戀)은 戰國 楚나라 屈原이 지은『九章』의 <涉江>
의 ‘鳥飛反故鄕兮,狐死必首丘.’에서 유래한 것이다.새는 얼마 멀리 가도 나중
에 꼭 자신의 집에 돌아가고,여우는 죽을 때 머리는 꼭 집 있는 방향으로
향하여 죽는다는 뜻으로 역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말이다.
이처럼작가는『詩經』,『史記』,『晉書』,『庄子』,『文選』,『山海經』,『虬髥客傳』,
『後漢書』,『侯鯖彔』,『左傳』,『列子』,『太平御覽』,『古詩十九首』,『九章』등을
143)自此情愛尤篤 夫婦自謂知音 未嘗一日相離也.
144)此詩 乃吾家荊布 所自製也 平生絶無 他人之聞知者.
145)況越鳥巢南 胡馬倚北 且今死日將迫 尤不堪首丘之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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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롯하여 수많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이야기를 전개하였다.중국문학을
통하여 주인공 최척과 옥영의 인물됨과 삶의 태도가 확실히 드러난다.작가
가 중국의 문학에 해박했으며 친연성을 갖고 이 작품에 접근하고 있음을 보
여준다.
2)일본을 보는 이중적 시각
16세기 말엽은 조선역사에서 임진왜란이 온 국토를 휩쓸고 지나간 시기이
다.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일본은 假道入明을 내세우며 조선의 국토를 유린
하였다.조선의 온 국토가 피폐해지고,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수많은 백성
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혀갔다.많은 여인들은 굴욕을 당하였고 농
민들은 기근에 시달리다가 유랑민이 되기도 하였다.그 당시 일반 백성들에
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마 포로가 되는 것과 가족의 이산일 것이다.임진
왜란의 7년 전쟁기간 동안 10만 명 안팎의 사람이 포로로 끌려갔다.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낯선 땅에서 굴욕적이고 비인간적인 생활을 했으며
때로는 서양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다.그래서 임지왜란 때문에
조선 백성들은 일본에 적대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최척전>에서도 조선
백성들이 일본에 당한 고통과 참혹한 현장이 잘 나타난다.그러면서도 주인
공 옥영을 친자식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평범한 일본인 돈우의 모습도 그렸
다.작가의 일본에 대한 이중적 시각,즉 부정적이면서 긍정적인 시각을 잘
나타낸다.
작품 전반부는 정유재란 때 왜병들이 남월을 침범하여 백성들을 죽이고 약
탈하는 것을 통해 일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나타낸다.
① 정유년 팔월 적병이 남원성이 함락하자 사람들은 모두 도망가 숨
었다.최척의 일가도 역시 지리산 연곡으로 몸을 피했다.최척은 옥영
에게 남장을 착용하게 하였다.그러자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그녀를 여자로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산으로 피한 지 여러
날이 자나자 양식이 떨어져 장차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렀다.최척은
몇몇 장정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양식을 구하고 적세도 탐지하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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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일행이 구례로 갔다가 문득 적병과 조우하자 최척은 바위와 수
풀에 몸을 숨겨 화를 피했다.그러나 그날 적병이 연곡으로 들어가 온
산야를 휘저으며 살상하고 약탈하여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았다.하지
만 최척의 일행은 길이 막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사흘이 지나 적병이
물러간 후 최척은 다시 연곡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연곡에서 볼 수 있
는 것은 시체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유혈이 낭자하여 시내를 이룬 모습
뿐이었다.마침 숲 속에서 은은하게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최척이
그 곳으로 찾아가니 온 몸에 상해를 당한 노약자 몇 사람이 있었다.
노인들은 최척을 보자 통곡하며 말했다.
“적병이 산에 들어와서 3일 동안 재물을 약탈하고 인민들을 베어 죽
였으며,아이들과 여자들은 모두 끌고 어제 겨우 섬진강으로 물러갔네.
가족들을 찾고 싶으면 물가에 가서 물어 보게나.”146)
인용문①은 사람을 죽이고 약탈한 잔인한 왜병을 그렸다.정유재란으로 인
해 남원에서 살던 최척은 가족과 남원지방 백성들이 지리산 연곡으로 피난을
갔다가 양식을 구하러 나와 있는 동안 왜적들이 지리산을 3일 동안 습격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죽이고 포로로 잡아갔다.3일 동안 잔인한 왜병들
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기에,시체가 가득하고 피가 흘러 내를 이루었
다고 했을까?
작품 중간 부분은 옥영이 일본에서 주인으로 삼던 돈우란 늙은 왜병을 통
해서 평범한 일본 백성의 일상적 삶과 인간적인 면모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돈우는 참으로 특별한 인물이다.돈우는 옥영을 포로로 잡아 일본으로
데려간 인물이다.그런데 작품에서 돈우를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긍정적인 인물로 설정하였다.
② 이때 옥영은 왜병인 돈우(頓于)에게 붙들렸는데,돈우는 인자한
사람으로 살생을 좋아하지 않았다.그는 본래 부처님을 섬기면서 장사
146)至丁酉八月 賊陷南原 人皆逃竄 陟之一家 避于智異山燕谷 陟令玉英着男服 雜錯於廣原之中 人之
見之者 皆不知其爲女子也 入山累日 糧盡將饑 陟與丁壯 數三出山 求食且覘賊勢 行到求禮 猝遇
賊兵 潛身於岩藪而石避之 是日 賊入燕谷 則但見積屍 遍橫流血成川 林叢間 隱隱有號咷之聲 陟
就訪之 老弱數輩 瘡痍遍身 見陟而哭曰
“賊兵入山,三日 奪掠財貨 芟刈人民 盡驅女子 昨已退屯蟾江 欲求一家 門諸水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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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업으로 삼고 있었으나,배를 잘 저었기 때문에 왜장(倭將)인 평행장
(平行長)이 뱃사공의 우두머리로 삼아 데려왔던 것이다.돈우는 옥영의
영특한 면모를 사랑하였다.옥영이 붙들린 채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
고 좋은 옷을 입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이면서 옥영의 마음을 달래었
다.옥영은 물에 빠져 죽으려고 두세 번 바다에 뛰어 들었으나,사람들
이 번번이 구출해서 결국 죽지 못하고 말았다.147)
③ 돈우의 집은 낭고사(浪沽射)에 있었는데,집에는 늙은 아내와 어
린 딸만 있고 다른 사내는 없었다.돈우는 옥영을 집안에서만 생활하
고 다른 곳에는 일체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이에 옥영은 돈우에게 거
짓말로 일렀다.
“저는 단지 어린 사내로 약질에다가 병이 많습니다.예전에 본국에
있을 때에도 남자들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어 오로지 바느질과 밥 짓
는 일만을 했습니다.”
돈우는 더욱 불쌍하게 생각하여 옥영에게 사우(沙于)라는 이름을 지
어 주었다.그는 배를 타고 장사를 다닐 때마다 옥영을 데리고 가서
부엌일을 맡겼다.그래서 옥영은 배 안에 있으면서 민절의 사이를 왕
래하였다.148)
④ “내가 이 사람을 얻은 지 이제 4년 되었는데,그의 단정하고 고
운 마음씨를 사랑하여 친자식처럼 생각해 왔습니다.그래서 침식을 함
께 하는 등 잠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으나,지금까지 그가 아낙네인 것
을 몰랐습니다.오늘 이런 일을 직접 겪고 보니,이는 천지신명도 오히
려 감동할 일입니다.내가 비록 어리석고 무디기는 하지만 진실로 목
석은 아닙니다.그런데 차마 어떻게 그를 팔아먹고 살 수 있겠습니
까?”
돈우는 즉시 주머니 속에서 은자 10냥을 꺼내어 전별금으로 주면서
말했다.
147)時玉英 則見執於倭奴頓于 頓于老倭 本不殺生 慈悲念佛 以商販爲業 習御舟楫 倭將行長 以爲舡
主而來 頓于愛玉英機警 惟恐見逋 給以華衣美食 慰安其心 玉英欲投水溺死 再三出舡 輒爲所覺.
148)頓于家在浪故射 妻老女幼 無他子男,使玉英居家 不得出入 玉英謬曰
“我本貌小男子 弱骨多病 在本國 不能服役 丁壯之事 只以裁縫 炊飯爲業 餘事固不能也”
頓于尤憐 名之曰沙干 每乘舟行販 以火長置舟中 往來於閩浙之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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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을 함께 살다가 하루아침에 이별하게 되니,슬픈 마음에 가슴이
저리기만 하오.온갖 고생 끝에 살아남아 다시 배우자를 만나게 된 것
은 실로 기이한 일이며,이 세상에는 없었던 일일 것이오.내가 그대를
막는다면 하늘이 반드시 나를 미워할 것이오.사우여!잘 가시게!진중
하시게!”149)
인용문②은 뱃일을 하며 장사를 하던 돈우가 정유재란에 참전하게 되고,
부처를 섬기며 옥영을 돌봐주는 인자하고 다정한 늙은 일본인으로 형상화하
였다.연곡에서 최척과 헤어진 옥영을 왜병인 돈우는 일본으로 가는 길에 배
려하고 아껴 주었다.좋은 옷도 입히고 맛있는 음식도 먹이면서 옥영을 위로
하였다.
인용문③은 돈우가 옥영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고 옥영의 처지를 불쌍하
게 여기고 부엌일만 맡기고 장사를 같이 다니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인용문④는 돈우의 인정 있고 선량한 모습을 그렸다.옥영과 최척이 안남
의 포구에서 기적적으로 만났다.주우가 돈우를 만나 옥영의 몸값을 지불하
고 데려가려 할 때 돈우는 마다하고 이들의 만남을 자신의 일처럼 반기며 오
히려 옥영에게 전별금을 주고 그들의 앞날을 축복하여 보냈다.돈우는 옥영
을 친자식같이 생각하니까 재물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옥영은 이렇게 동정
심이 있는 돈우를 만나서 불행이 극복될 수 있었다.만약에 옥영이 다른 왜
병에게 잡혔다면 옥영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알 수 없고,또한,안남에서 최
척을 만났더라도 과연 옥영을 보내줄지 알 수 없는 것이다.돈우는 최척의
가족 재회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은 이 작품의 한 배경이다.이 전쟁 때문에 작품 중의 주인공들뿐
만 아니라 작가 조위한도 가족과의 생사이별의 비극을 당한 당사자이다.이
로 인해 조선 백성들은 일본에 대해서 적개심이 강하다.일본에 대해서 당연
히 부정적인 태도를 가질 것이다.그런데 작가는 보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
149)“我得此人 四年于玆 愛其端懿 視同己出 寢食未嘗小離 而終不知其婦人也 今而目覩此事 天地鬼
神 猶此感動 我雖頑蠢 異於木石 何忍貨此 而爲食乎”
探於囊中 出十兩銀 贐之曰
“四年同載 一朝而別 悵惘之懷 雖切於中 而重逢配耦 於萬死之餘 此人世所無之事 予若隘之 天必
劇之 好去沙干 珍重珍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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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포로로 잡힌 옥영을 배려하고 친자식같이 대했던 늙은 왜병 돈우를 인자
하고 선량한 인물로 형상화하였다.이것으로 보아 작가 조위한이 민족적․정
치적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인간 본연의 자세에 초점을 맞추고 사람의 온
화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데 주력하였다고 할 있다.
한편,이런 묘사는 작가 조위한의 궁극적 소망이라고 할 수 있다.당시 조
선과 조선백성들은 일본에 엄청난 고난과 슬픔을 당하였기 때문에 모든 왜병
들이 돈우처럼 인정 있고 선량한 사람이었으면 하는 소망이고,조선과 일본
의 관계는 돈우가 옥영을 배려하는 것처럼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3)안남으로 향한 공간의 확대
작품에서 주인공들의 고난과 극적인 해후의 한 장소는 安南이라고 되어 있
다.작품의 배경은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와 가까이 있는 나라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안남까지 무대로 설정되었다.역사적으로 조선과 안남은
公式的으로는 사람이나 書信이 왕래한 적이 없다.150)단지 중국을 통한 간접
적 교류가 있었다.하지만 최척과 옥영이 각각 중국과 일본의 상선을 타고
안남으로 오게 된 것이다.
역사에 조선 사신과 안남 사신이 중국 燕京을 무대로 해서 주고받은 몇 편
의 시가 있고,시화와 시집서가 있었다고 한다.芝峰 李晬光은 1597년에 進慰
使로 중국 연경에 가게 되었다.그 때 같은 숙소인 玉河館에 머물었던 안남
사신 馮克寬과 한시로 교류한 적이 있다.馮克寬의 시집인『聖節萬壽慶賀詩
集』에 서문을 써 주기도 하고,『安南國使臣唱和問答錄』이란 제명으로 책을
편찬하기도 했다.李晬光이 馮克寬에게 준 시가 9수이고 馮克寬이 李晬光에
게 준 시가 9수였다.<贈安南國 使臣>二首,<重贈安南使臣 疊前韻>二首,
<又贈安南使臣 疊前韻>二首,<贈安南使臣 又疊前韻>二首,<贈安南使臣 排律
十韻>은 李晬光이 馮克寬에게 준 것이고,<肅次 芝峰使公韻>二首,<肅和兩
次 海東芝峰使公前韻>二首,<喜得海東使公 詩序謹再次韻 以表同使 大筆手澤
150)최신호,「한국과 안남․유구와의 문학교류 시고」,『한국한문학연구』,제5집,한국한문학회,
1980,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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者>二首,<再次韻敬答 海東芝峰大手筆>二首,<肅次芝峰使公 長律十韻>은 馮
克寬이 李晬光에게 준 것이다.이 계기로 李晬光의 한시 작품은 당시 안남의
문인 학자들 사이에 높은 평가를 받았고 널리 애송되었다.정유재란 때 포로
로 일본으로 붙잡혀 갔던 趙完壁이 일본 상선을 타고 안남까지 갔는데 그를
보고 李晬光이 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환대하고 그의 시문을 물어봤다고 한
다.이 사실은 鄭士信의 문집『梅窓先生集』에 있는 <趙完壁傳>에 나타나 있
고,일본학자 岩生成一이 安鼎福 自筆稿本151)이라 해서 <趙完壁傳>을 소개한
것이 있고,李晬光의 문집『芝峰集』에도 <趙完壁傳>을 거론하였다.趙完壁은
안남에서 기후풍토,풍속,언어 문자,특산물 등을 구체적으로 접촉하였다.귀
국한 후에 趙完壁은 그 동안의 자신의 특이한 안남 체험을 조선 학자들에게
전하여 당시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었다.특히 이 시기 일본과 안남이 활발하
게 무역했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말해주는 기록인데 <최척전>에서 묘사된 내
용과 흡사해 보인다.그래서 <최척전>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 멀리 안남
까지 갔다가 중국을 거쳐 귀국한 얘기를 담은 <趙完壁傳>과 유사하다고 하
는 학설도 있다.152)
또한,조위한이 1621년 <최척전>을 쓰기 훨씬 이전에 李晬光은 중국여행
(제3차 중국 여행은 1611년)의 체험을 정리하여『芝峰類說』(1614년)속에 담
았다.이 속에는 당시로는 충격적인 서양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내용이 소상하게 적혀 있다.153)이 책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아주 큰 영
향을 끼쳤다.조위한은 이수광과 같은 시기에 활동한 인물로서 물론 이수광
에게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최척전>의 배경이 멀리 동남아시아에 있는 안남까지 확대돼 있는 것으로
보아 작가 조위한의 세계인식은 더욱 확대되고 구체화됨을 알 수 있다.또한,
조선백성들이 안남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세계관도 점점 넓어졌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경자년 봄에 최척과 주우는 상선을 타고 안남의 사이를 왕래하였다.
151)安南國渡航朝鮮人趙完壁傳について.『朝鮮學報』第六輯.
152)장효현,「<최척전>의 창작 기반」,『고전과 해석』창간호,고전문학연구학회,2006,참조.
153)강동엽,『조선시대 동아시아 문화와 문학』,북스힐,제2장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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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일본인 상선 10여 척도 강 어구에 정박하여 10여 일을 함께 머물
게 되었다.
날짜는 어느덧 4월 보름이 되어 있었다.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물은 비단결처럼 빛났으며,바람이 달이 강에 비추고 옅은 안개가 물
위에 어리었으며,뱃사람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지고 물새만이 간간이
울고 있었다.154)
위의 인용문은 <최척전>에서 안남에 대한 내용이다.최척은 중국 상선을
타고 옥영은 일본의 상선을 타고 각각 안남에 이른다.당시 안남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활발한 무역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안남에 대한 분위기
는 아주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느낌을 준다.그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 때문에
국토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아주 고통스럽고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평화
롭고 상업이 발달한 안남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당시 그런 국제 정세에
안남은 작가 조위한 뿐만 아니라 모든 조선 백성들에게 이상적인 곳이라고
인식되었다.최척과 옥영은 이런 평화로운 데서 아름다운 만남을 이룬다.안
남은 조위한의 이상적인 공간이고 그런 평화로운 환경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
이라고 할 수 있다.또한,농업을 중심으로 삼던 조선은 상업 중심의 사회를
지향해야 하며 국가의 경제적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
이다.
3.한국적 정서에 대한 작가의식
앞에서 언급했듯 <최척전>은 무엇보다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적 소설이라
는 측면에서 가장 한국적인 소설로서의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고 한 바 있
다.그 연장선상에서 <최척전>에서 찾을 수 있는 한국적 정서를 보다 구체적
으로 파악해 보려고 한다.특히 작품 전반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정서를 중
심으로 추출하여 한국인의 의식을 파악해 보고자 하는 것이 주된 의도이다.
<최척전>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주요 정서는 다음과 4가지로 압축이 된
154)歲庚子春 陟隨佑與同里 商舡往來於安南 時有 日本舡十餘艘 亦泊於浦口 留十餘日 因値四月 旁
死魄 天無寸雲 水光如練 風息波恬 聲沈影絶 舟人牢睡,諸禽時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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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1)가족애의 고취
<최척전>을 끌어가는 중심 서사 축은 전란으로 뿔뿔이 흩어진 한 가족들
이 다시 재회하기 위해 거치는 험난한 여정과 극복의 모습이다.이를 다시
표현하면 ‘가족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함께 동고동락하는 공동 운명체’
라는 말이다.그리고 이 공동 운명체를 지탱하는 근간은 바로 가족 간의 사
랑이다.그러한 점에서 <최척전>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의식은 바
로 가족 간의 사랑이다.<최척전>을 애정 소설로 간주하는 것도 이와 동일한
관점이다.
<최척전>에서 가족 간의 지극한 사랑은 특히 최척과 옥영의 부부애를 통
해 극대화된다.옥영과 최척 두 사람의 결연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가난하
다는 이유로 옥영의 어머니는 최척과의 결혼을 반대하고,옥영의 설득 후 이
뤄진 결연 역시 매 순간 위기를 맞고 세 차례의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옥영과 최척이 처음 만나 결혼하고 전란으로 헤어진 후 서로의 생사를 알
지 못해 절망과 실의에 빠져 살아가지만 남편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 하
나로 죽음도 불사한 채 망망대해를 건넌다.두 주인공의 결연 후 그들 인생
의 30여 년 간은 줄곧 헤어진 두 사람이 오직 서로를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
끝까지 찾아가는 집념으로 통일돼 있고,결국 만남이라는 희망적 메시지를
이끌어낸다.
두 주인공 이외에 최척의 아버지 최숙과 옥영의 어머니 심씨 부인에게서도
가족애를 발견할 수 있다.우선 최척과 옥영이 정상사의 집에서 결연을 이룬
후 최척은 아내와 함께 장모 심씨도 자기의 집으로 모시고 온다.이를 보아
사돈과 함께 사는 한 가족 문화임을 읽어낼 수 있다.뒷날 임란이 터지고 남
원성이 함락되어 모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질 때도 최숙과 심씨는 살아남아
손자인 몽석을 키우며 오랜 세월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게 된다.이 또한 가
족애의 또 다른 표현이다.
최척의 둘째 아들 몽선의 부인이 되는 홍도에게서도 가족사랑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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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는 중국인으로 나온다.즉 국제결혼이 작품을 통해 제시된 것이다.당시
의 정황으로 보나 인식으로 보나 국제결혼을 언급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
을 것이다.그럼에도 <최척전>에서는 국제결혼을 정식으로 언급하고,조선인
인 몽선의 아내가 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홍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파격적인 설정을 긍정적으로 녹여내는 힘은 바로 가족애에
있었다.즉 홍도가 몽선과 결혼하기 위한 1차적인 이유는 홍도의 아버지인
진위경 때문이었다.진위경은 정유재란의 구원병으로 조선에 출전한 후 생사
를 알 수 없었고,이에 홍도는 아버지의 유골이라도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집념으로 조선에 가고자 했다.이때 조선인 몽선의 구혼 소식을 듣게 되고,
몽선의 아내가 되기를 적극적으로 자원하게 된다.이는 자신의 결혼 조건으
로 상대를 향한 애정보다 효심에 우선을 둔 것으로 이 또한 가장에 대한 애
정과 가족애가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2)생활 철학으로서의 불교의식
<최척전>에서 불교적 색채는 서사 전개의 중요한 순간마다 분명히 나타낸
다.<최척전>을 ‘불교계 소설’로 분류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찾을 수 있
다.먼저 자식이 없는 최척 부부가 아이 점지를 위해 치성을 드리는 모습을
들어보기로 한다.
최척과 옥영은 결혼 후 아이가 없자 매월 날짜를 정하여 만복사를 찾아가
치성을 드린다.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염원을 신앙에 근거하여 이루고자 하
는 부분이다.조선시대가 유교 중심의 사회이면서 불교를 배격했던 사회적
분위기에 비춰 보면 매우 모순된 장면이다.그러나 불교는 단순한 종교라기
보다 생활 철학이자 신앙으로서 한국인의 가슴에 각인된 대표적인 민족적인
종교로서의 위치를 갖추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그리고 이
러한 기자정성에 의해 <최척전>은 장육금불이라는 부처를 전면에 내세우며
신이하고 영험한 신통력을 발휘하며 염원의 숙제를 풀어 주기도 하고 계시하
기도 한다.장육금불은 <최척전>의 진행 과정에서 위기의 순간마다 나타나
신이함을 발휘하기도 한다.다음의 장면을 통해 이러한 점을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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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장육금불이 옥영에게 현몽하여 말씀하였다.“나는 만복
사의 부처로다.삼가하여 죽지 말아라,후일에 반드시 기쁜 일이 있
다.”옥영이 깨어나 그 꿈을 점쳤다.만에 하나같은 희망이라도 없어서
힘껏 먹고 죽지 않고자 했다.155)
꿈에 장육불이 나타나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말씀하였다.“삼가서
죽지 말아라,그러면 후일엔 반드시 기쁜 일이 있다.”잠에서 깨어난
옥영은 몽선에게 말했다.“내가 포로가 되던 날 물에 빠져 죽고자 했
을 때,남원 만복사의 장육금불이 꿈에 나타나 말씀하셨다.‘삼가서 죽
지 말아라,그러면 후일에 반드시 기쁜 일이 있으리로다.’그 후 4년
만에 네 아버지를 안남 바다 가운데서 만났다.이제 내가 죽고자 하는
데 또 꿈이 이와 같으니,네 아버님은 어찌 적의 칼날을 피하지 않았
겠느냐?네 아버지만 살아 있다면 나는 죽어도 살이 있는 것과 같다.
돌아 보건데 무슨 여한이 있겠느냐?”156)
옥영이 며느리에게 말했다.“내가 기운 빠지고 정신이 피곤해서 잠
시 조는 사이에서,장육불이 또 나타나 그때의 말을 일러주시니 아주
기이하구나.”세 사람은 함께 염불을 외면서 빌었다.“부처님이시여.부
처님이시여.저희들을 돌보아 주소서.저희들을 돌보아 주소서.”이틀
이 지났는데,홀연히 돛단배가 아득한 바다 가운데서 다가오고 있었
다.157)
155)一夕 丈六金佛夢玉英 以告曰
“我萬福寺佛也 慎無死 後必有喜”
玉英覺而診其夢 不能無萬一之冀 遂强食不死.
156)忽於一夕 夢見丈六佛 撫頂而言曰
“愼無死 後必有喜”
覺而語夢仙曰
“吾於被擄之日 投水欲死 而南原萬福寺之丈六金佛 夢與而言曰 愼勿死 後必有喜 後四年 得見爾
父於安南海中 今吾欲死 而又夢如是 汝父豈或免於鋒鏑歟 汝父若存 吾死猶生 顧何恨焉.”
157)玉英謂子婦曰
“我氣困身疲彷佛之間 丈六佛又現 其夢云云 極可異也”
三人相對 念佛而祝曰
“世尊世尊 其念我哉 其念我哉”
三日 忽望風帆 自杳茫中出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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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세 인용문 모두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옥영에게 자살을 포기하게 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장육금불의 계시담이다.첫째 인용문은 임진왜란으로 일
본에 끌려가게 된 옥영이 투신자살을 기도했을 때,장육불이 꿈에 나타나 옥
영에게 어려움을 이겨낼 용기를 가지게 하고,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던 끝에
결국 安南海에서 최척과 기적적인 상봉을 하게 된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도 마찬가지로 호족이 명나라를 침입했을 때 서기로 전
장에 나선 최척이 전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죽기를 작정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역시 장육불에 의한 계시로 최척과의 만남을 확신하게 되며 귀국의
의지를 갖고 결국 그들이 죽음을 무릅쓴 항해를 시행하게 한다.
셋째 인용문은 오직 남편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귀국하던 옥영 일행이
해적에게 배를 탈취당하고 무인도에서 식량 부족까지 겹쳐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대목이다.이때도 장육불이 현신하고,이에 옥영,몽선과 홍도 세 사람
이 염불하며 이틀 동안이나 빌게 되는데,마침 지나가던 조선 배가 있어 그
들을 구출하게 된다.
이와 같이 옥영이 위기를 닥칠 때마다 장육불이 꿈에서 나타나 용기를 북
돋워 주고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버팀목이자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다.
옥영이 최척에게 말했다.
“우리가 오늘 같은 날을 만난 것은 만복사 장육금불의 음조가 있었
기 때문입니다.그런데 근래 들으니 금불도 또한 모두 훼손되어 기도
를 드릴 곳이 없다고 합니다.하지만 하늘에 계신 신령만은 아마도 영
원히 불멸할 것입니다.우리가 어찌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크게 재물을 준비한 후 다 함께 황폐한 만복사를 찾아가 방을 깨
끗하게 치우고 재를 올렸다.158)
위 대목은 마지막에 옥영이 최척에게 이런 만남이 있게 된 것은 오로지 만
158)玉英謂陟曰
“吾等之有今日 寔賴丈六金佛之蔭騭 而今聞金像亦皆毁滅 無所憑禱 而神靈之在天 容有不泯者存
吾等豈不知所以報乎”
乃大供具 詣廢寺 潔齋修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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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 장육불의 음덕이라고 말하였다.이것으로 보아 장육불이 최척의 온 가
족 재회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작가 조위한은 후기에서
‘필시 황천후토가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이런 기특한 일을 이루었을 것이
다’라 하여,또한 ‘필부에게도 지성이 있으면 하늘마저 어기지 않는 법이다.
지성을 막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구나!’라 하였다.
이와 같이 <최척전>을 희망으로 끌어가는 중심에는 한국인의 의식 가장
깊은 곳에 내재돼 있는 생활 철학이자 신앙으로서의 불교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3)강인한 여인상
<최척전>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특징이 바로 강인한 여인상,집념의 여
인상의 모습이다.작중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전란에서 살아남았고,계속 살아남아야 하기 위해 남장을 하며 자신을 포로
로 삼은 주인의 인정을 얻기 위해 성실함을 보이고,또 남편이 살아 있을 것
이라는 기대 하나로 남편을 향해 망망대해를 거침없이 나아가는 옥영의 모습
은 어느 남성보다 더 기개 있는 집념의 여인이자 강인한 여인의 대명사로 장
식된다.
특히 남편인 최척을 만나기 위해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향하겠다는 의지가
아들인 몽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설득시켜 결국 조선으로 돌아갈 준비
를 용의주도하게 실천한다.몽선과 홍도로 하여금 배와 양식을 준비시키면서
조선과 일본의 옷을 마련하게 했으며,두 나라의 말을 익히게 하는 등의 모
습에서는 어떤 남성보다도 강인한 집념이 느껴진다.
“수로(水路)는 험란하긴 하지만 내가 이미 경험을 갖추고 있다.옛날
일본에 있을 때 배를 집으로 삼아 봉에는 민광에서 장사를 하고,가을
에는 유구에서 물건을 팔았다.그래서 수시로 출몰(出沒)하는 거대하고
무서운 파도에도 익숙해 있으며,별이나 조수(潮水)의 흐름을 살펴서
점칠 수 있을 정도로 경험이 매우 풍부하다.험난한 파도도 내가 맡을
것이요,배의 안전도 내가 알아서 하겠다.설사 불행한 일이 생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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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벗어날 방도가 없겠느냐?”159)
옥영은 즉시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옷을 짓고 매일 아들과 며느리
에게 두 나라 말을 가르쳐 익히게 했다.160)
한편 옥영은 잠시이기는 하지만 최척이 의병에 있는 동안 어머니가 이웃의
부자인 양씨와의 혼사를 주선했을 때도 어머니에게 끝까지 부당함을 이르고,
그래도 어머니가 강제로 혼사를 성사시키려 하자 죽음까지 시도했던 여인이
기도 하다.
한밤에 심씨가 깊이 잠들어 있었는데 문득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소
기가 베갯머리까지 세차게 들려 왔다.잠에서 깨어나 딸이 자던 자리
를 어루만져 보니,딸이 그 자리에 없었다.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
히 찾아보니 옥영이 비단 수건으로 목을 매고 창살 아래 엎드려 있었
다.손발이 모두 차고 숨소리가 점차 희미해졌으며,호흡만 목구멍 속
에서 오락가락하였다.심씨는 황망히 목에 메인 수건을 풀고 옥영을
끌어안아 일으켰다.이때 춘생이 등불을 밝히고 와서 물을 몇 모금 입
에 흘려 넣자 옥영이 겨우 입으로 숨을 내쉬었다.잠시 후 옥영이 구
완하였으며,이 이후에는 어느 누구도 양씨 집안과의 혼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161)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 옥영은 오직 남편 하나를 믿고 그를 따르는 절
개 강하고 집념 있는 여인으로서 전통적인 한국의 여인상을 이끌어내고 있
다.
159)“水路艱難 我多備嘗 昔在日本 以舡爲家 春商悶廣 秋販琉球 出沒於驚波 駭浪之中 占星候潮 涉
歷已慣 風濤險易 我自當之 舟楫安危 我自御之脫有不幸之患 豈無方便之道.”
160)卽裁縫 鮮倭兩國服色 日令子婦敎習 兩國語音 而自傳敎之.
161)夜深夢間 忽聞汩汩之聲 覺而撫其女不在焉 驚起索之 玉英於窓下 以毛巾結項而伏 手足皆冷 喉咙
聞汩汩之聲 漸微且絶 驚呼解結 蹴春生點火而來 抱持痛哭 以勺水入口中 小傾而甦 而主家亦驚動
而來救 自後 絶不言梁家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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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포용적인 인간애
<최척전>에는 전란에 얽혀든 동아시아 여러 나라 인물들이 등장한다.명나
라 장군인 여유문,일본인 돈우,항주인 주우,중국 상인 두홍,조선 삭주 토
병의 출신 오랑캐 등이 그들이다.17세기의 시대상에 비춰 조선인이 아닌 외
국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이해관계로 맺어져 있고,특히 전란이라는 아픈 현
실 속에서 조선인들에게 외국인들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은 더더욱 팽배할 때
이다.그럼에도 <최척전>에 등장하는 외국인들에 대한 인물 설정에서는 어느
곳에도 그들을 적대시하거나 배격하는 모습을 찾아내기 어렵다.그러나 이와
는 반대로 전쟁의 참상은 실로 잔인하리만큼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어 실감을
더하게 한다.<최척전>에 제시된 인용문을 통해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먼저 임진왜란에 대한 참상을 표현하는 대목이다.
그날 적병이 연곡으로 들어가 온 산야를 휘저으며 살상하고 약탈하
여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았다.하지만 최척의 일행은 길이 막혀 꼼짝
할 수가 없었다.사흘이 지나 적병이 물러간 후 최척은 다시 연곡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연곡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시체가 여기저기 나뒹굴
고 유혈이 낭자하여 시내를 이룬 모습뿐이었다.마침 숲 속에서 은은
하게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최척이 그곳으로 찾아가니 온 몸에 상
해를 당한 노약자 몇 사람이 있었다.노인들은 최척을 보자 통곡하며
말했다.162)
“적병이 산에 들어와서 3일 동안 재물을 약탈하고 인민들을 베어 죽
였으며,아이들과 여자들은 모두 끌고 어제 겨우 섬진강으로 물러갔네.
가족들을 찾고 싶으면 물가에 가서 물어 보게나.”163)
샛길을 찾아 겨우 고향에 이르러서 보니,담벼락은 무너지거나 깨어
져 있었다.그 밖의 다른 것들도 모두 불타버려 쉴 곳은 물론,곳곳에
162)猝遇賊兵 潛身於岩藪而石避之 是日 賊入燕谷 則但見積屍 遍橫流血成川 林叢間 隱隱有號咷之聲
陟就訪之 老弱數輩 瘡痍遍身 見陟而哭曰
163)“賊兵入山 三日 奪掠財貨 芟刈人民 盡驅女子 昨已退屯蟾江 欲求一家 門諸水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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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가 언덕처럼 쌓여 발 디딜 틈도 없었다.164)
위 인용문을 통해 당시 임진왜란의 참상이 얼마나 컸는지 실감나게 표현하
고 있다.특히 이러한 표현들은 임진왜란을 기록한 사적들의 표현과도 일치
하는 대목으로 사실적 표현으로 평가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범인 일본인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은 찾아
보기 힘들다.오히려 작품의 주인공들과 개인적으로 인연이 맺어진 그들에게
는 호감이 제시된다.다음의 인용문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때 옥영은 왜병인 돈우(頓于)에게 붙들렸는데,돈우는 인자한 사람
으로 살생을 좋아하지 않았다.그는 본래 부처님을 섬기면서 장사를
업으로 삼고 있었으나,배를 잘 저었기 때문에 왜장(倭將)인 평행장(平
行長)이 뱃사공의 우두머리로 삼아 데려왔던 것이다.돈우는 옥영의 영
특한 면모를 사랑하였다.옥영이 붙들린 채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고
좋은 옷을 입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이면서 옥영의 마음을 달래었
다.165)
인용문은 일본인으로 등장하며 옥영을 포로로 끌고 간 왜병 ‘돈우’에 대한
묘사이다.돈우는 옥영을 오히려 잘 대해 주었고 두려움에 떠는 것을 달래주
려고 노력하는 등 적군으로서가 아니라 인정 많은 이웃집 아저씨와 같은 모
습으로 묘사된다.
“인생은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소중하니,가고 아니 가고는
그대의 뜻대로 하시오.게다가 나는 이미 집안 일에 연연(戀戀)하지 않
고 장차 멀리 유람할 계획을 갖고 있소.그런데 어찌 반드시 홀로 한
가지 방책만 고수하여 소심하게 그대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겠소.”166)
마침내 최척은 말 한 필을 얻어 타고 당나라 진중으로 들어갔다.
164)還尋歸路三書夜 僅達其鄕閭 頹垣破瓦 餘燼未息 積屍成丘 無地着足.
165)時玉英 則見執於倭奴頓于 頓于老倭 本不殺生 慈悲念佛 以商販爲業 習御舟楫 倭將行長 以爲舡
主而來 頓于愛玉英機警 惟恐見逋 給以華衣美食 慰安其心 玉英欲投水溺死 再三出舡 輒爲所覺.
166)人生貴於知心 遊息適矣 無論遠近 爾旣無家累之戀 何必塊守一方 蹴蹴靡所騁乎.
- 96 -
최척은 용모가 준수하고 지략이 심원하였으며,활쏘기와 말 타기를 잘
하고 한문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여공(余公)은 최척을 매우 아껴
같은 막사에서 식사를 하고 잠도 같이 잤다.얼마 뒤 총병(摠兵)이 병
사들을 철수하여 중국으로 돌아감에,최척은 전투(戰鬪)와 삼군의 장부
(帳簿)를 담당하는 임무를 맡아 국경의 관문(關門)을 통과하여 소흥부
(紹興府)에서 살았다.167)
위 두 인용문은 중국인으로서 명나라 장수 ‘여유문’에 대한 묘사 대목이다.
가족을 잃은 슬픔으로 절망에 빠진 최척에게 운명에 연연해하지 말라며 최척
에게 새로운 삶의 방법을 제시해 준다.그리고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게 되
고,최척을 긍휼히 여긴 여유문은 자신의 동생과의 결혼까지를 주선하는 등
최척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호감을 제시한다.
중국 인물로 여유문 외에도 오세영,주우,두홍 등이 등장하지만 역시나 최
척과는 모두 막역한 사이로 묘사되며 형제지간의 우애를 보일만큼 서로에게
좋은 감정들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외국인은 아니지만 <최척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인물이
바로 포로수용소장이다.그는 본래 조선인이었지만 조선 벼슬아치의 가혹한
행정을 견디지 못해 고향을 떠나버린 인물이라는 점으로 보아 그는 참을성은
조금 있는 편이지만 욱하는 성격도 있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그가 행한 대
표적인 사건,바로 포로수용소에 감금된 최척과 몽석을 동정해 군법까지 어
기고 탈출을 돕는 인물이다.실로 인정이 있고 인간적이 면모를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이와 같이 <최척전>에 등장하는 인물들 묘사에서는 어느 누구나 악하게
다뤄져 있지 않다.심지어 자신의 가족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적군에게까지
도 관대함을 보인다.이러한 관대함에 대해 한편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전형적인 휴머니즘
과 희망적 메시지를 전달해 내기 위한 조위한의 의도적인 결과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167)遂以一馬載歸于陳 陟容貌俊爽 計慮深遠 便於弓馬 瞯於文字 余公愛之 共床而食 同衾而寢 未機
摠兵撤歸 以陟隷戰亡軍迫 以過關至姚興居焉.
- 97 -
Ⅳ.<최척전>과 <홍도전>의 관계
<최척전>과 <홍도전>은 기본적인 서사구조가 거의 동일해 이에 대한 영
향 수수 논란이 있어 왔고 이 논란은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특히 <최척전>
이 광해군 13년(1621)에 지어졌고,<홍도전>이 전하는 柳夢寅의『어우야담』
창작 시기 또한 거의 동일해 선후관계의 논란 또한 뜨거운 것이 사실이다.
유몽인(1559~1623)은 명종 4년(1559)에 한양 명례방에서 유당의 3남으로
태어났다.자가 應文,호가 於于堂 또는 艮庵,默好子이다.아버지가 일찍이
돌아가셔서 백형 유몽사의 훈육을 받아서 성장하였고,송승희와 김현성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성혼에게서도 잠시동안 수학하였다.선조 15년 24세에 진
사,31세에 증광문과에서 장원하여,이어서 예문검열,홍문관수찬,삼도순안어
사,홍문관교리,함경도순무어사,평안도 순변어사,사헌부집의,경기도암행어
사,대사성,대사간,도승지,이조참판겸예문관제학 등을 지냈다.
문장이 대단히 뛰어나고 1593년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어 왕세자에게 글을
가르쳤다.1621년 서호에 은거하면서 문집 80여 권과 야담 10여 권을 지어
남겼다.즉『어우집』과『어우야담』이다.1623년 인조반정으로 벼슬을 내놓고
전전하다가 역모로 몰려 <老寡婦詞>로 자신의 굳은 뜻을 보이고 아들과 함
께 사형되었다.168)
견문에 따라 어우야담을 지었는데 이제 10여 권이 되었다.169)
위의 인용문을 보아『어우야담』에 실려 있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유몽인이
마음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견문에 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시와 문장은 아무리 솜씨 있게 지어도 민중이 완상할 수가 없다.소
168)최운식,「어우야담에 나타난 어우당의 설화의식」,『한국민속학』제10집,민속학회,1977,pp.13
8~139참조.
이경우,「어우야담 연구」,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1976,pp.191~194연보.
169)유제한,『어우야담』.
隨聞見者 於于野譚 今成十餘卷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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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총화를 지음은 비단 세교에 보탬이 될 뿐만 아니라 민중이 또한 그
것을 즐겨 본다.170)
위의 인용문을 보아 유몽인의 주장은 소설로 엮어야만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그는 독자를 의식하고 어느 정도는 자신의 생각을 보태어
작품화하였다.
최운식은「어우야담에 나타난 어우당의 설화의식」171)에서『어우야담』의 내
용이 전 5편,59항,527화로 되어 있다고 보고 기술방식을 4가지로 분류하였
다.즉 유몽인이 경험한 것을 중심으로 한 기술,인물을 중심으로 한 일화의
기술,풍자․세교를 위한 견문의 기술,풍속․민간 사유 및 신앙 기술이다.
유몽인이 먼저 인물을 소개하고 그 인물의 행적이나 또 작자가 보고들은 내
용을 기술하며 끝에 세상에 전하는 이야기를 기술한 다음 자신의 의견을 덧
붙이는 방법을 취했다고 하였다.
오경환은「어우야담 연구」172)에서 ‘어우야담은 대부분이 견문한 이야기들을
기록한 것이나,그 이야기들은 기록하는 과정에서 유몽인은 평결 형식을 통
하여 이 책에 자신의 윤리관,사회관,문학관,운명관 등을 개입시키고 있으
며,또한 논․기를 통해서도 그의 그러한 의식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
다.’고 하였다.
위의 분석을 통하여『어우야담』은 유몽인이 사실에 입각해서 자신의 생각
을 부연하여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러면『어우야담』에 실
려 있는 홍도 이야기도 실제의 정생과 홍도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창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홍도전>의 서사구조는 다음과 같다.
① 남원에 정생이란 인물은 홍도와 같은 마을에서 산다.정생은 의기가
호탕하고 퉁소를 잘 불며 노래를 잘 하나 공부는 게을리한다.
② 정생은 홍도에게 구혼하고 결혼하는 날짜를 정한다.
170)유제한,앞의 책.
詩工雖工衆莫之賞 不如著小說叢話 非但裨補世敎 衆亦樂觀之.
171)최운식,앞의 책.
172)오경환,「어우야담 연구」,숭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1988,p.130.
- 99 -
③ 홍도의 아버지는 정생이 무식하기 때문에 이들의 결혼을 반대한다.
홍도가 아버지를 설득하여 결혼이 성사된다.
④ 결혼 2년 후 몽석이 태어난다.
⑤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정생이 射軍으로서 남원성을 지킨다.그런데 성
이 함락되고 정생의 아버지와 몽석은 지리산으로 피난하여 홍도는
전쟁터에서 정생과 헤어지게 된다.정생은 홍도가 명나라를 군사를
따라갔다는 소문을 듣고 그녀를 찾기 위해 중국으로 간다.
⑥ 정생이 절강에 이른다.달밤에 퉁소를 불자 이웃 배에 있던 사람이
전날 조선에서 듣던 소리라고 외친다.이에 정생이 전날 아내와 화
답하던 가사를 부르고 아내를 만난다.부부가 절강에서 산다.
⑦ 그 2년 후 둘째 아들 몽진을 낳는다.
⑧ 몽진이 17세 되자 아내를 구한다.아버지가 조선에 구원병으로 갔다
가 돌아오지 않아 조선에 가 보고 싶은 한 중국 여인이 자원하고 몽
진에게 청혼한다.
⑨ 무오년 北征 때 정생은 유정의 군사로 뽑혀 부부가 다시 이별하게
된다.만주에서 奴賊을 치다가 정생은 포로로 잡힌다.
⑩ 정생이 포로수용소에서 도망치고 공홍도 尼山에 이른다.그런데 종
기가 심하여 침의를 구한다.이때 미침 만나는 침의가 중국인이고
몽진의 장인이다.함께 남원 옛집으로 돌아와서 같이 산다.
⑪ 다음해 절강에 있는 홍도가 가산을 정리하며 배를 구하고 華·鮮·倭
삼국의 옷을 만들어 절강을 떠나고 조선으로 향한다.도중에 중국인
을 보면 중국인 행세를,일본인을 보면 일본인 행세를 한다.한 달
이십오일 만에 추자도 밖의 가가도에 이른다.통제사의 수선을 만나
구함을 입고 순천을 거쳐 남원의 옛집으로 돌아온다.일가가 모두
무사히 해후한다.
이상과 같이 <홍도전>과 <최척전>의 서사구조는 기본 골격에서 아주 비
슷하다.그리고 거의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니만큼 이 두 작품의 상관
성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이에 관한 그간의 연구에서는 <홍도전>은 선행 작
품으로 <최척전>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견해가 우세했다.
이에 대한 논란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이다.먼저 일반적인 설은 <홍도
전> 선행설이다.
- 100 -
소재영은『어우야담』의 설화 <홍도전>이 조위한의 <최척전>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품화하였는가를 검토하였고 설화가 소설화한 모델케이스로 그
구성상의 특색을 보여주었다고 하였다.173)
김기동은 처음에는 조위한과 유몽인은 다 같이 임진란 때 있었던 최척의
얘기와 홍도의 얘기를 듣고,조위한은 <최척전>을 지었고 유몽인은 <홍도
전>을 지었다고 하여 <최척전>을 임진왜란 때의 실화를 소재로 하면서 조위
한이 독창적으로 창작한,즉 실화를 중심으로 보다 사실적으로 기술한 <홍도
전>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고찰하였다.174)그러나 그 후 <홍도전>을 지
은 유몽인은 인조 2년(1624)에 조위한보다 먼저 죽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조위한이 <홍도전>을 보고 나서 <최척전>을 지을 수 있다고 하였다.175)
강진옥은 <최척전>과 <홍도전>의 구성을 비교하면서 <홍도전>은 <최척
전>의 모체가 된 이야기로서 <최척전>의 이본이라고 알려져 있다고 언급한
후176),<최척전>이 보다 자세하고 후대에 쓰여졌다는 점만으로도 이 논의는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였다.177)
김장동은 두 작품의 내용을 상세히 비교하면서 유몽인의『어우야담』이 먼
저 나왔고 그 후에 <홍도전>과 깊은 관련을 가진 조위한의 <최척전>이 나
타났다고 하여,<최척전>은 <홍도전>을 제재로 하여 윤색과 창작이 가미되
고 기구한 사연에 개연성을 부여해서 소설화하였다고 한다.178)
박일용은 <최척전>의 전반부는 김시습의 <이생규장전>과 방불하게 현실
세계의 갈등에 서사세계와 서술시각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후반부는
몽유야담 소재 정생과 홍도의 이야기를 부연 확대한 것이라고 보았다.179)그
러나 그 후에 <최척전>과 <홍도전>은 작자의 의도에 따라 같은 사실적 설
화가 하나는 소설로 하나는 전의 형식을 빈 문헌 설화로 지어졌다고 하여 영
173)소재영,『기재기이연구』,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1990,pp.271~284.
174)김기동,『이조시대소설의 연구』,성문각,1974,pp.316~317.
175)김기동,『한국고전소설연구』,교학사,1982,p.228.
176)강진옥,「<최척전>에 나타난 고난과 구원의 문제」,『이화어문논집』제8집,이화여자대학교 한
국어문학연구소,1986,p.228.
177)강진옥,위의 눈몬,p.229의 주7)후반부.그러나 <최척전>이 <홍도전>보다 후대의 작품이라고
하면서도 그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178)김장동,『조선조역사소설연구』,이우출판사,1986,p.150~151.
179)박일용,「조선후기 애정소설의 서술시각과 서사세계」,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학
위논문,1989,p.24.
- 101 -
향관계가 없다고 하였다.180)
정종대는 <최척전>에서는 기존 설화의 수용적 측면이 창조적 시도보다 더
강하여 <최척전>은 설화의 수용에 의한 작품이고 창작성이 결여된 작품으로
보았다.181)
최삼룡은 <최척전>을 <홍도전>을 소설의 소재로 활용한 작품으로 보았
다.182)
김재수는 위와 견해들과 달리 <최척전>을 실화가 소설화된 작품으로 살펴,
사실적 기록문학의 백미로 보았으며,<홍도전>은 유몽인이 남원에 실화가 있
었던 것을 듣고 사건만을 간략하게 서술한 것이고 <최척전>은 조위한이 주
인공으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문학적 수식을 더하여 소설화한 것이기
에 두 작품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183)
박희병은 <최척전>이 <홍도전>보다 먼저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
며 <홍도전>은 최척의 이야기가 유포되는 과정에서 기록된 것이고,<최척
전>은 최척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를 소설화한 것이고 이 두 작품이 서로
아무런 영향관계를 갖고 있지 않고 <홍도전>이 <최척전>의 母話라는 지적
은 타당하지 않다고 하였다.184)
필자 역시 후자의 견해에 동의하는 바이다.이는 우선 작품의 시간적 배경
의 차이에서 알 수 있다.<홍도전>의 사건 전개 배경이 되는 시간적 배경은
임진년(1592)에서 기미년(1619)까지이고 <최척전>의 주요 시간적 배경은 임
진년(1592)에서 경신년(1620)까지이다.이것으로 보아 <홍도전>의 이야기는
한 해 먼저 끝났음을 알 수 있다.그래서 <홍도전>의 저작 시간은 1619년의
이후,<최척전>은 1620년의 이후임을 확인할 수 있다.또 기록된 자료에 따
라 먼저『어우야담』과 <최척전>의 창작 시기,두 작자의 창작지,그리고 교
유관계에 근거한 것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두 작품은 모두 신유년(1621)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
180)박일용,「장르론적 관점에서 본 최척전의 특징과 소설사적 위상」,『고전문학연구』,한국고전문
학연구회,1990.
181)정종대,『염정소설구조연구』,계명문화사,1990,p.217.
182)최삼룡,「한국 고소설의 소재에 대한 연구」,『한국언어문학』제29집,한국언어문학회,1991.
183)김재수,「<최척전>의 소설화 과정」,『광주교육대학교 논문집』제26집,광주교육대학교,1985.
184)박희병,「최척전-16,7세기 동아시아의 전란과 가족 이산-」,『한국고전소설작품론』,집문당,
1990.
- 102 -
다.이때 당시의 각각의 <연보>에 따르면 유몽인은 서호와 송천(서울 근교)
에서 살고 있었으며,185)조위한은 남원의 주포(남원군 주생면 제천리)에서 거
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둘이 교류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또 조위한의『현곡집』에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언급과
그들에 관한 한시가 있지만 유몽인에 관한 기록은 하나도 없다.마찬가지로
유몽인의『어우집』에도 조위한에 관한 기록도 찾아볼 수가 없다.이로 미루
어 보아 이들이 같은 시기를 살았지만 실제로 교류한 적이 없다고 볼 수 있
다.그러면 <홍도전>과 <최척전>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생각하는 논
리는 무리가 될 것 같다.그래서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서 누가 먼저 기술
하였는가 하는 시기는 극히 가려내기 어렵기 때문에 어느 작품이 어느 작품
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는 견해는 타당성이 없다.
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의 구도상에서도 차이점이 분명히 인식된다.<홍도
전>은 간략하게 축약되어 있고,<최척전>은 <홍도전>보다 훨씬 장편이다.
또 <홍도전>은 있었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알리려고 하였으나 <최척전>은
독자들에게 흥미와 긴장,감동을 유발하도록 여러 가지 장치를 사용했다.또
<최척전>은 <홍도전>보다 등장인물이 많고 다양하다.각 인물의 이름까지
밝혀져 있고 각 사건에서 적절한 역할을 담당한다.또 그들의 언행을 통하여
인물의 성격도 잘 나타난다.지리적 배경 설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홍도
전>은 지명 설정에서 간략하고 개괄적이지만 <최척전>은 구체적이고,주인
공들의 행동과 함께 지리적 배경도 적절하게 이동한다.그리고 역사적 사건
과도 일치한다.이런 지리적 배경 설정은 작품의 사실성을 더 강하게 인식시
킨다.또한 시간적 설정에서 <홍도전>은 작품의 진행을 통해서 시간이 흐르
는 것을 알 수가 없다.구체적인 시간이 제시되지 않고 막연히 시간의 흐름
을 인식할 뿐이다.이에 비해 <최척전>은 정확한 시간이 설정되었다.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이 진행되며 장소의 이동도 이루어진다.
같은 시기 서로 다른 지역에서 들은 이야기를 각기 자신의 의도대로 <홍도
전>과 <최척전>을 기술하였다.유몽인은 그 기이한 일을 후대에 남기기 위
185)유제한,『어우야담』의 <年譜>에 의하면,광해군 12,13년 사이에는 유몽인이 西湖(『新增東國
與地勝覽』41卷,鳳山郡條에 의하면 西湖는 黃海道 鳳山郡 서남쪽 30리에 있다고 함)와 松泉
(서울의 교외)을 오가며 은거하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 103 -
하여 사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기술하였고,조위한은 최척에게 들은 기이한
이야기에다가 자신의 체험을 결합하고 정확한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여 사실
주의적 소설로 남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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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결론
<최척전>은 한국 고전 서사문학사에서 실로 다양한 유형을 접목하며 기존
소설들과는 확연히 다른 문학적 분수령을 이루어낸 발군의 작품이다.본고는
특히 <최척전>이 17세기의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소재를 취하여 가감 없는
현실적인 서사 전개로서 높이 평가 받는 대표적인 작품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최척전>을 통한 한국인의 민족적인 정서이자 한국인의 의식을 발견해 내는
동시에 작가의 시대의식과 역사의식을 분석해 보았다.그리고 그 과정 속에
서 <최척전>이 가지는 최상의 가치가 바로 ‘인간애’라는 ‘휴머니즘’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고찰이 가능한 이유는 우선 <최척전>이 만들어진 경위에 관한 분
석에서 얻을 수 있었다.<최척전>은 문학이기에 앞서 실화를 투영하고 있다
는 점,그리고 <최척전> 작품의 근간은 작가 조위한의 사실적인 체험이 고스
란히 반영돼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자신의 체험이자 당시 모든 민중들의 현
실이었던 3대 전란의 체험 속에 전란의 아픔을 보상받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
를 작품을 통해 그려 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가능하다.
<최척전>은 전쟁으로 인해 벌어진 가족사의 비극인 이산의 아픔을 반복
적으로 거론해 내고 있다.그리고 ‘이산’이라는 아픔을 극복해 내는 대안으로
‘가족의 재회’를 이끌어내고 있다.이산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재회’의 방법 말고는 어느 것도 최상의 대안이 될 수 없다.작가 조위
한은 당시 조선의 역사에서,그리고 동아시아라는 역사적 공간에서 어느 누
구도 온전히 비껴갈 수 없었던 민중들의 아픔인 이산의 슬픔을 정면으로 다
루되,모든 가족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재회하는 것을 결말로 제시한다.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냈던 작가의 남원 은둔 시절,조위한
은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는 암울한 시대상을 그 곳에서 재발견했고 동시
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차례로 떠나보내야 했다.그리고 조위한이 당면한 슬
픔은 당시를 살아가는 모든 민중들에게 공통의 아픔이었다.조위한은 이 암
울함에 마냥 체념하기보다 희망을 찾아내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했다.요행히
그에게는 자신의 순탄치 않은 삶의 체험,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시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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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들을 묶어낼 수 있는 탁월한 문인적인 재질이 있었다.조위한은 그 시대
의 암울함을 <최척전>이라는 한 편의 소설에 띄어 내었고,그 암울함을 띄어
낸 <최척전>은 ‘희망’이라는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다시 남원으로 돌아와 유
랑이라는 대장정의 막을 내리게 하였다.그 구원의 메시지를 지탱하고 있는
힘을 <최척전> 이전의 사설들이 갖고 있지 않는 뚜렷한 작가의식에서 나왔
다고 할 수 있다.특히 조위한의 작가의식을 역사와 대외적 공간,그리고 한
국적 정서를 포괄하면서 투철한 인식을 보여준다.중국에 대한 우호적이고
동경적인 의식을 그의 역사관을 통해 뚜렷이 나타내고 있으며,일본에 관한
이중적 시각을 다른 작가들이 갖지 못한 균형감각을 보여주고 있다.누구도
직접 가 본 적이 없는 안남을 만남의 대상으로 확대한 것도 폭넓은 작가의식
의 발라라고 할 것이다.그는 이렇게 분출된 의식을 한국적 정서로 싸매면서
가족애와 인간애라는 본래의 주제로 돌아오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전란이 휩쓸고 간 아픔의 자리를 ‘휴머니즘’이라는 카타르시스로 완벽하게
치유해 낸 <최척전>이야말로 17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휴머니즘 소설이자,가
장 한국적인 매력과 저력을 담아낸 한국적인 소설임에 틀림없다.
- 106 -
【참고문헌】
Ⅰ.자료
<행장>.
<연보>.
<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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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기년』권오.
『현곡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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