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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조경남장군 신도비, 난중잡록, 춘향전
▲舊묘역모습
▲新묘역(합장)모습
▲新묘역(합장)모습
의병장 조경남(趙慶男)
외세 침략과 국난극복 정신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외세에 의하여 침략을 받았거나 위협을 받았던 일이 너무도 많았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900여 회나 된다고 한다. 우리의 선조들이 그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을 때 그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나라를 지키며 우리 민족의 문화를 수호해 온 것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위대했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향토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더욱 더 숭고하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 임진·정유재란 때 우리 고장을 지키기 위한 남원성 싸움은 어떠했는가? 이때만 하여도 우리나라는 북방경비를 위한 수비군과 비변사라는 군사기구가 설치되었었으나 병·농 일치였기에 강한 정예군대는 조직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화포나 화약은 있었으나 그 성능이 신통치 못하고 중요 무기는 활과 창, 칼 정도였다. 이때 왜군은 신예 무기인 조총으로 무장을 하여 우리나라를 침범하였다. 조정에서는 명나라에 원군을 청하고 군사를 모았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런 국난을 당하자 민족과 나라를 위하여 전국에서 수 없는 의병이 일어났다.
의병들은 침략군의 점령지 전후방에서 왜군을 공격하여 큰 타격을 주었는데, 의령에서 곽재우가, 옥천에서 조헌이 의병의 깃발을 높이 들었고, 영규가 이끄는 승병 부대는 청주성 싸움에서 승리했으며 조헌과 영규는 금산싸움에서 최후까지 싸우다 전사하여 칠백의총에 묻혔다. 호남에서는 고경명, 김천일, 양산숙, 최원,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켰고, 함경도에서는 정문부 등이 일어났고, 묘향산에 있던 휴정(서산대사)는 전국 사찰에 격문을 보내 승병을 일으켰다. 서산대사의 제자 유정(송운대사)는 금강산에서, 처영은 호남에서, 영규는 호서에서 일어나 각각 승병을 이끌고 왜적과 싸웠다. 우리 고장 남원에서는 조경남과 김완, 정사달, 정사진, 양덕해, 박언량, 박계성 등이 일어나 분탕질하는 왜적을 물리쳤다. 이와 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병들이 궐기하였는데, 이 의병운동이야 말로 일단유사시에 발휘되는 애향의식과 민족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으며, 국난극복의 원동력이 되었다.
정유재란 남원성 싸움의 의병활동
정유재란 남원성 싸움은 선조 30년인 1597년에 남원성을 공격한 왜군과 이를 맞아 싸운 조(朝)·명(明)연합군과의 전투를 말한다. 당시 왜군 56,800여명과 조·명 연합군은 4,000여명, 성내 주민 6천여명이 음력 8월 13일부터 16일 까지 큰 싸움이 벌어져 민·관·군 일만여명의 순절자를 내고 남원성은 무너졌다. 명나라 원군으로 왔던 양원은 명나라로 도망가고, 승리에 도취된 왜적들은 가는 곳마다 분탕질이요, 약탈이며, 특히 남원성 에서는 많은 문화재와 도공들을 납치해 갔으며, 코 베기를 시작하였다. 이때 분연히 일어난 의병장 조경남을 중심으로 한 남원의 의병들은 왜적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는데, 1597년 9월 22일 불우치(부처 모퉁이, 남원시 주천면 호기리 산 94번지) 싸움에서 5명을 사살했으며, 9월 23일 궁장현(弓藏峴, 남원시 주천면 용담리 산 169번지, 활개미 고개라고도 부르는데 불우치 건너편에 있다) 싸움에서 36명의 왜적을 주살했으며, 10월 9일 산동촌 싸움에서 5명의 왜적을, 10월 24일 함양 음리 싸움에서 18명, 12월 7일 산음 사촌 싸움에서 123명의 왜적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의병장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 지방유형문화재 107호, 임진·정유난에 자신이 의병활동을 한 내용과 남원성 싸움, 당시 국내외 정세 등을 기록한 일기)을 보면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의 전황과 남원의 의병들의 생생한 활동 상황을 알 수 있다.
난중잡록에 나타난 불우·궁장현 싸움
난중잡록의 정유년 9월 22일∼23일 일기를 보면 불우치와 궁장현 싸움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요약하면,
○ 9월 22일 불우치(佛隅峙) 싸움
내가 왜적 5명을 불우치에서 죽였다. 그 머리는 베지 않았다. 이때에 정, 양 제형과 이곳에 있으면서 낮에는 산에 올라가고 밤에는 막사에 모이기로 하였다. 날마다 왜적의 동태를 바라보는데 도로에 왜적이 연락부절 되었다. 왜군들은 두려워 할만한 사람이 없다고 여겨서 그런지 행군함에 있어서 습격에 대비하는 태도가 없었다. 내가 여러 형더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슴아프다. 흉적들이여, 부끄러울 지고, 우리나라여! 영남에서 사변을 당하였을 때 사람들이 군사에 익숙치 못하여 각자 살길을 도모하는데, 곽재우는 한 비난한 서생으로 남보다 자진하여 일어나 혹은 공격하고, 혹은 추격하여 매우 많은 적을 베니, 우도의 여러 고을이 12일 동안에 수복되었소…오직 우리도 예의고을이라 일컬어 왔고, 충절과 효행이 고금에 드러났으니 왜적이 우리 고장에 들어온 뒤로 한 사람도 의를 들고일어나 왜적을 토벌하여 사로잡고 목베어 바치는 사람이 없소.'
○ 9월 23일 궁장현(弓藏峴) 싸움
우리 군사가 왜적 36급을 궁장동에서 죽였다. 이 날 새벽에 가족을 숲속에 숨기고 몇 사람의 하인을 거느리고 왜적을 토벌한다고 성명하니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20여명이었다. 영암사람 김완과 정사달, 정사진 형제, 박언량 등과 28명이 되었다. 요천강변의 방암봉에 올라가 숨어서 망을 보니 흉적 50여명이 임실 오수로부터 소와 말을 몰고 축천정(향교동 경찰서
부근)을 지나 곧장 동도역(東道驛, 도통동 고개부근) 소로를 향하여 행진하고 있었다. 나는
왜적들이 궁장현을 거쳐 구례로 향할 것이니 궁장현은 길이 좁고 좌우가 막힌 곳이 많아 추격하여 죽일 수 있을 것이요 라고 말을 끝내니 적병이 과연 궁장현으로 향했다. 우리는 마침내 고함을 치며 활줄을 세게 당겨 전진하니, 적병들이 칼을 뽑고, 총을 안고 돌아가는데 나를 따라 죽기로 나선 자는 6명뿐이었다. 나는 총을 가진 자 3∼4명을 쏘아 죽였다. 적은 많고, 우리는 적어서 대적하기 어려웠으나, 왜적 선봉 5명을 죽이고 죽기를 결심하고 싸웠다. 정군이 발목을 부상하고, 왜적이 박언량을 치자 언량은 활로 막아 활이 쪼개져 몽둥이를 들고 대적하였다. 나와 김완도 죽기를 각오하고 혈전하는데 김완의 활이 또 부러지니 한 놈의 왜적이 김완을 쫓아가서 위급하므로 한 살로 쏘아 죽였다. 적병 15∼6명이 죽고 진시(辰時)부터 싸워서 신시(申時) 유시(酉時)에 이르기까지 싸워 많은 왜적이 죽었는데 그 수효는 36명이었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았다. 산꼭대기에 앉아서 군사를 쉬게 하고 싸움터를 돌아보니 비린내나는 피가 강을 이룰 지경이었다. 다음날 아침 김씨, 박씨 몇 사람이 싸움터에서 적의 머리를 베어왔다.
풍신수길, 의병을 조심하라
남원 의병의 활동은 남원성을 공략하기 위하여 숙성령(주천면 용궁리 소재)을 넘어오는 왜적을 정유년 8월 9일 박계성이 둔산령(수지면 호곡리 견두산 소재)에서 맞아 싸우다 전사한 것을 시작으로 12월까지 이어진다. 남원 의병의 활동범위는 남원을 비롯해 경상남도 함양과 산음, 전라남도 구례와 주변의 섬진강까지 매우 넓었는데 지리산 주변의 협곡이나 능선 등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신출귀몰하게 복병전과 기습전을 펼쳐 왜군에 많은 타격을 주었다. 궁장현이나 부처 모퉁이는 모두 주천천을 사이에 둔 협곡이었으며, 함양의 음리나 산음의 사촌 싸움 등도 마찬가지였는데 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도 관군보다는 의병을 조심하라는 지시를 내릴 만큼 의병의 활동은 왜군에게 관군보다도 더 두려운 존재였다.
애향 정신 곧 나라사랑
정유재란이 끝난 지 어언 400여년, 그때의 처절함을 상기하면서 남원의 의병이 이룩한 전공을 되새긴다. 성은 무너지고, 남원 고을 밖의 수령들은 모두 도망을 치고, 가까운 전주성은 싸움한번 못하고 비워주어 세자와 중전이 피난을 가는 판국에 국가 존망이 위태로울 때에 의병들은 분연이 일어나 왜적을 기습하고 향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려 항전하니 왜적들은 관군보다도 의병을 더 무서워하였고 전의를 잃은 왜적은 퇴각하게 되었다. 남원의 의병은 예의고을이라 일컬어 왔고, 충절과 효행이 고금에 드러난 남원에 왜적이 들어온 뒤로 내가 사는 고장을 지켜야 나라가 산다는 애국충정의 정신에 분연히 일어난 일이었기에 오늘 우리는 이름 없는 의병의 공을 높이 받들어 모시어 그들이 남긴 애국충절을 만세에 전하기 위한 노력을 다해야 한다.
남원문화원에서는 정유재란때 활동한 조경남 의병장을 비롯한 의병들이 분탕질하는 왜적을 맞아 용전분투하고 크게 승리한 궁장현(弓藏峴) 전적지에 정유재란 의병전적기념 조형물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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