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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현주집(玄洲集) : 都承旨 玄洲 趙纘漢◑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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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집(玄洲集) : 都承旨 玄洲 趙纘漢

기대승의 문인이자 손자사위인 조찬한은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불릴 만큼 문화가 크게 발달했던 시대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그의 문재(文才)에 대해 한문사대가로 저명한 이식과 허균 등이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책은 문장 구사가 아름답고 주로 역학을 다룬 것으로, 저자의 문장과 학문 경향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발간사]
(재)한국학호남진흥원은 호남권 한국학 진흥과 민족문화 균형 발전을 위하여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가 공동 출연한 학술기관입니다. 개원 1년의 성과를 상재합니다.
본원은 그동안 고문서 수집 집성, 근대 문집의 표점 영인, 고문서·일기·선현 문집 국역을 진행하였습니다. 이상의 과제는 두 범주로 요약됩니다.
하나, 호남한국학 기초자료 발굴
둘, 호남 사상ㆍ생활문헌 국역

이상의 연구사업은 서세동점 이후 구학(舊學)ㆍ구습(舊習)으로 폄하되었던 전통적 학술사조와 생활세계를 탈근대 차원에서 재구성한다는 목표 아래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지난 위망과 극단의 세월에 덧씌워진 ‘소국 트라우마’ ‘문명콤플렉스’와 같은 문화심리의 질곡을 걷어내고자 합니다. 또한 호혜 공존의 생활지혜 나아가 법고창신(法古創新) 연구혁신(沿舊革新)의 사유 역정이야말로 당당한 새로운 미래 설계의 자양임을 웅변하고 싶습니다.
20198월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원장 이 종 범

현주집(玄洲集)해제(解題)

강동석 전주대학교 객원교수

1. 개요

조찬한(趙纘韓, 1572~1631)은 후세에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불릴 만큼 문화가 크게 발달했던 시대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그는 선조(宣祖), 광해군(光海君), 인조(仁祖) 등 세 분의 임금을 모시고, 호조(戶曹)와 형조(刑曹)의 좌랑(佐郞), 정언(正言), 좌부승지(左副承旨), 우승지(右承旨), 참의(參議) 등을 역임하며 능치자(能治者)로서 임무를 완수했으며, 그 부임지에서의 심회를 노래했던 낭주록(朗州錄), 선주록(善州錄), 상주록(尙州錄), 회주록(淮州錄)과 유람을 노래했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 유파곶록(遊葩串錄)그리고 사신 접대에 대해 심회를 남겼던 빈접록(儐接錄)등을 남긴 능문자(能文者)로서의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일찍이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은 조찬한의 글에 대하여,

내가 매번 공의 글을 읽을 때마다 탁월하다고 여겼는데 유고해제解題 1718 현주집[玄洲集] _1에서 그 대략을 평가해본다면 소부(騷賦)는 초한(楚漢)을 추수하였고 산문(散文)과 잡저(雜著)는 좌마(左馬)를 법도로 삼았으며 변려체(騈儷體)는 서유(徐庾)의 성률을 깊이 얻었고 장편(長篇)과 광운(廣韻)의 시는 두한(杜韓)과 함께 달리는 데도 넉넉하다고 할 수 있다. 총괄하면 그 밝은 지혜가 높고 환하며 재간이 뛰어나고 아름다워 그 웅건하고 분방함이 한계를 둘 수 없는 듯하고 융합하면서도 곡절이 있어 각각 체재를 두었으니, 더러 정감이 아리땁게 되고 성령이 발동하여 경물이 그의 정신과 만나면 마치 악기 소리가 어울려 서로를 드러내면서 긴 여운을 남기는 것과 같았으리라.”

라고 하였다. 당시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로서 저명했던 택당현주집(玄洲集)해제(解題)

강동석, 전주대학교 객원교수

 

1. 개요

조찬한(趙纘韓, 1572~1631)은 후세에 목릉성세(穆陵盛世)라고 불릴 만큼 문화가 크게 발달했던 시대의 대표적인 문인이다. 그는 선조(宣祖), 광해군(光海君), 인조(仁祖) 등 세 분의 임금을 모시고, 호조(戶曹)와 형조(刑曹)의 좌랑(佐郞), 정언(正言), 좌부승지(左副承旨), 우승지(右承旨), 참의(參議) 등을 역임하며 능치자(能治者)로서 임무를 완수했으며, 그 부임지에서의 심회를 노래했던 낭주록(朗州錄), 선주록(善州錄), 상주록(尙州錄), 회주록(淮州錄)과 유람을 노래했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 유파곶록(遊葩串錄)그리고 사신 접대에 대해 심회를 남겼던 빈접록(儐接錄)등을 남긴 능문자(能文者)로서의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일찍이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은 조찬한의 글에 대하여,“내가 매번 공의 글을 읽을 때마다 탁월하다고 여겼는데 유고해제解題 1718 현주집[玄洲集] _1에서 그 대략을 평가해본다면 소부(騷賦)는 초한(楚漢)을 추수하였고 산문(散文)과 잡저(雜著)는 좌마(左馬)를 법도로 삼았으며 변려체(騈儷體)는 서유(徐庾)의 성률을 깊이 얻었고 장편(長篇)과 광운(廣韻)의 시는 두한(杜韓)과 함께 달리는 데도 넉넉하다고 할 수 있다. 총괄하면 그 밝은 지혜가 높고 환하며 재간이 뛰어나고 아름다워 그 웅건하고 분방함이 한계를 둘 수 없는 듯하고 융합

하면서도 곡절이 있어 각각 체재를 두었으니, 더러 정감이 아리땁게 되고 성령이 발동하여 경물이 그의 정신과 만나면 마치 악기 소리가 어울려 서로를 드러내면서 긴 여운을 남기는 것과 같았으리라.”라고 하였다. 당시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로서 저명했던 택당이 남긴 최고의 찬사인 것이다. 곧 소부로부터 산문, 잡저, 변려, 장편, 광운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창작에 능했으며, 심지어 중국의 대문장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그 문재(文才)가 넉넉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글이 문집의 서문이므로, 성격상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고 좋을 말을 으레 써 주는 것은 관례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실정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그마저도 할 수 없는 일임을 감안한다면, 조찬한의 문인적 재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 동쪽 오나라에 육기와 육운이 있다지만 그대의 학문이 가장 박식하여 막힌 곳이 없구려 호탕한 문채의 뛰어난 기법은 극치이면서 엄숙한 옛 법을 갖추고 있도다해제解題 19 밝고 빛난 벽제기름 발라 놓은 듯하고 갑 속에서 갓 나온 용천검(龍泉劍)이로다굴원과 가의의 보루를 비로소 무너뜨리고반고와 장형의 진영을 새롭게 눌렀도다라고 읊었다. 그는 병한잡술(病閑雜述)에서 명대(明代)의 전후칠자(前後七子)에 우리나라의 문인들을 견주어 권필, 이안눌, 조위한, 허체(許䙗), 이재영(李再榮) 등을 전오자(前五子), 정응운(鄭應運), 조찬한, 기윤헌(奇允獻), 임숙영(任叔英), 1명 미상(未詳) 등을 후오자(後五子)로 일컬어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설정한 바 있다.

위의 작품은 후오자시(後五子詩)의 두 번째 작품으로 조찬한을 평한 시이다. 특히 시에 능했던 진()나라의 시인 육기(陸機)와 육운(陸雲)에 견주고, 막힘이 없는 박식함, 호탕한 문체, 엄숙한 옛 법 등 시 창작에 있어서 훌륭함을 갖춘 조찬한을 찬미한 것이다. 이에 굴원(屈原)과 가의(賈誼)의 부()보다 뛰어나고 반고(班固)와 장형(張衡)의 문재를 넘어섰다는 표현은, 허균이 조찬한에게 줄 수 있는 극칭인 것이다. 주지하듯 허균은 당대 정치가이자 문인으로 또 평론가로서 이름이 있었으니, 그에게 저와 같은 평을 받았다는 것은 문재가 분명 대단했음을 방증한다.하지만 서문에서, “그러나 조정의 높은 자리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여, 날면서 날개를 다 펼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으며, 조찬한 자신도 시를 노래하며, “세상에 붙어살며 곤액만 넉넉하구나, 멀리 바라보며 부질없이 탄식을 하니.”라고 하거나, “병이 들어 요와 안석을 사랑하노니, 사립문을 닫고서 답답함을 견디고 있네.”라고 하였으니, 그 문재의 명성에 견준다면 대단히 출세를 20 현주집[玄洲集] _1하였거나 부귀를 누렸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면도 있다.

조찬한의 문집 현주집15() 5()이다. 차남인 조비(趙備, 1616~1659)1654년 임실에 부임하면서, 이듬해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의 서문을 받아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 초간본이다. 1710년에 1백여 본을 목활자로 인출(印出)한 것이 중간본이다. 이것이 국립중앙도서관장본(國立中央圖書館藏本, 도서번호: 일산3648-72-17)이며,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79집의 영인본(影印本)이다. 구성은 크게 시집(詩集, 1~9), 여집(儷集, 10~11), 부집(賦集, 12~13), 문집(文集, 14~15) 등 네 부분으로 되어 있다.

 

2. 행력

조찬한의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증조고(曾祖考)는 참판(參判) 조방언(趙邦彦, 1469~1532)이며, 증조(曾祖)는 현령(縣令) 조옥(趙玉)이며, 선고(先考)는 증판서(贈判書) 조양정(趙揚庭), 선비(先妣)는 청주한씨(淸州韓氏) 한응성(韓應星)의 따님이다. 그는 4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는 선술(善述)이고, ()는 현주(玄洲)이다. 둘째 형은 지국(持國) 조유한(趙維韓, 1558~1613)이고, 셋째 형은 지세(持世) 조위한(趙緯韓, 1567~1649)으로 모두 저명한 인사였다.권필(權韠)술회 연구(述懷聯句)부지(附識), “지난해 겨울, 내가 남쪽으로 가다가 오산(鼇山-전라남도 구례군 문척면의 금오산(金鰲山)을 말함)에 이르러 조군 선술(趙君善述-조찬한)이 진원(珍原)의 토천(土泉-장성(長城)의 옛 지명)에 새로 집을 짓고 해제解題 21산다는 말을 듣고 즉시 눈을 무릅쓰고 찾아갔더니 지세(持世-조위한의 자())도 그곳에 있었다. 두 분이 나를 보더니 반가워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밤이 깊도록 연구(聯句)를 짓고 날이 밝자

작별했다.”라고 했다. 이로 보면, 조찬한은 1600(선조 33) 29세의 나이에 장성에 이사하여 기거했음을 알 수 있다.1605(선조 38), 조찬한의 나이 34세에 정시(庭試)에서 장원을 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가 되었고, 이어 전적(典籍, 6)을 거처 호조좌랑(戶曹佐郎), 형조좌랑(刑曹佐郎, 6)을 역임하였다.

1611(광해군 3) 40세에는 정언(正言, 6)이 되어, “전중(殿中)의 직책은 그 임무가 극히 중하므로, 문관ㆍ무관ㆍ문음을 병용하는 것은 대체로 폭넓게 뽑아서 정밀하게 고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찰 정민흥(鄭敏興)은 사람됨이 거칠고 비루하여 집에 거하면서 부정한 행실이 많이 있었습니다. 본직에 제수되자 사람들이 다들 침을 뱉고 욕을 해대니, 이와 같은 사람을 대관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소서.”라고 탄핵하였지만, 임금은 정민흥은 바로 정개청(鄭介淸)의 아들이다. 조정에서 그를 수용한 것은 의도가 있어서 한 일인데, 전후로 그를 공박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 내가 몹시 이상히 여긴다. 탄핵하지 말라.”라는 답을 들은 후, 파직되었다. 이후 사헌부에서 조찬한을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킬 것을 청했지만 윤허하지는 않았다.

1612(광해군 4) 41세에는 전라남도 영암(靈巖)의 군수가 되었고, 당시낭주록을 지었다. 2년 후에는 경상북도 영천(榮川)의 군수가 되었고,영주록을 지었다. 그러나 1617(광해군 9), 이경기(李景基)가 우두머리로 있는 백마적(白馬賊-베로 말의 옷22 현주집[玄洲集] _1을 만들어 입고 다녔으므로 백마적이라고 불림)이 영천군에서 체포되었지만, 그의 무리들이 옥문을 부수고 탈취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군수인 조찬한을 붙잡아 국문할 것을 명하고, 유비(柳斐)로 군수직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조찬한은 서울에 도착하여 용서를 받았다.

1618(광해군 10) 47, 형 조위한(趙緯韓)과 함께 두류산을 유람하며유두류산록을 지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분병조(分兵曹) 참의(參議, 3)에 제수되었다. 다음 해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고, 다시 이듬해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1621(광해군 13) 50세에는 경상북도 상주(尙州)의 목사(牧使)가 되었고, 당시상주록을 지었다. 다음 해에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 등과 함께 파곶(葩串-현 충청북도 괴산(槐山)에 있는 화양동(華陽洞) 구곡(九曲) 중의 제9)을 유람하고서 유파곶록을 지었다.

1624(인조 2) 53, 이괄(李适, 1587~1624)의 난에 어가(御駕)가 남천(南遷)할 때 뒤쳐졌다는 이유로, 헌부(憲府)에서 우승지 조찬한은 서울을 떠날 적에 늦게야 행재소(行在所)에 왔으므로 그때에 이미 물의가 있었고 대간의 비평까지 받았는데 곧 후설(喉舌)의 중요한 지위에 제수되었으니, 체차를 명하소서.”라고 했지만, 임금은 조찬한은 늦게 온 잘못이 있기는 하나 실로 병 때문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헌부가 재차 아뢰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가 되었다가, 강원도 회양 부사(淮陽府使)가 되어 회주록을 지었다. 다음 해 명()나라 조사(詔使) 강일광(姜日廣), 왕몽윤(王夢尹)이 오자 이들을 대접하고 빈접록을 지었다. 1629(인조 7)에는 경해제解題 23상북도 선산 부사(善山府使)로 나가 선주록을 지었다.

1631(인조 9)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3월 한설(韓渫)의 고변(告變)이 있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문초를 당했다. 그가 건강이 악화된 것은 이와 무관하지는 않다.1655(효종 6)에 아들 조비(趙備)가 임실(任實)에서 이경석(李景奭)의 서문과 신천익(愼天翊)의 발문을 받아 문집을 간행했다.

 

3. 작품

조찬한이 어울리는 벗들 가운데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면서 영향을 주고받고, 형제처럼 지내면서 서로 화답한 이는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 동악(東嶽) 이안눌(李安訥, 1571~1637),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 등이 있었다. 모두 문학으로 당세를 풍미했던 인물들로서, 그들은 문화ㆍ사상적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업적을 많이 냈다. 조찬한 역시 시()와 부(), 변려(騈儷)와 문()을 적지 않게 창작하여 이들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꽃을 재촉하는 비봄신의 소식을 찾을 길이 없어서봄이 와도 봄을 깨닫지 못하겠다 부질없이 말했지깊은 밤 운무 끼고 비 잠깐 지나더니온 성의 복사꽃 자두꽃이 고운 시절 만들었네누가 알았으랴 한마디 말없이 변하게 하니24 현주집[玄洲集] _1남몰래 모든 꽃에 붙어서 마음껏 찡그리게 할 줄피기를 재촉한 것은 아니고 지기를 재촉한 것이니내일 진흙에 떨어지는 것을 차마 보겠는가이식은 조찬한의 시에 대해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유풍(遺風)을 따랐고, 옥과 금을 나란히 늘어놓은 듯하여 노조린(盧照鄰)과 낙빈왕(駱賓王)의 방에 충분히 들어갔다.”라고 하였다. 성당(盛唐)의 시는 논할 것도 없고 초당(初唐) 시인의 글조차도 넘나들었음을 칭송한 것이다. 위의 작품은 어떻게 보면 이러한 평에 대한 근거이자 이유를 극명하게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곧 어떤 시적 기교를 추구하기보다는 시언지(詩言志)’라는 시의 고유성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험벽한 글자를 사용하거나 어려운 전거를 활용하는 송풍(宋風)에 비하여, , , 운무, 도리(桃李) 등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인간이 느낀 그대로의 감정의 결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또한 그가 남긴 낭주록, 유두류산록, 상주록, 유파곶록, 회주록, 선주록등은 영암, 영천, 지리산, 괴산의 파곶, 회양, 선산 등에 부임하며 당시 느낀 심사를 있는 그대로 투사한 것이다. 다만 낭주록의 경우 시 3수가 전부이며, 상주록1, 회주록3, 선주록1, 빈접록4수이므로 ()’은 책이 아닌 기록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시뿐만 아니라 조찬한은 당시 짓기 까다로웠던 변려문조차도 유려하게 지었다. 추송구원서(追送九畹序)벗 구원(이원춘(李元春))이 자못 정성을 들여 변려 서문을 써 달라고 하였는데, 해제解題 25내가 벼슬살이에 바쁜 이유로 겨를이 없었다. 구원이 하직하고 떠나는 날에 이 일로 성이 나서 말을 하기에, 곧장 숙직 중에 붓을 눌려 짧은 서문을 이루어 뒤에 부친다.”라고 하거나, 삼호정서(三湖亭序)에서 백헌(이경석(李景奭))이 굳이 청하기에 변려문을 짓다.”라고 했으니, 당시 저명한 문인들에게 부탁을 받음은 물론, 변려문의 창작에 대한 자부심도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양호의 동쪽 기슭과 마포의 서쪽 지류 사이에 있어 그윽함이 시골의 집이 아니요 강가의 다락과도 크게 다르니, 산세가 구불구불 이어지고 물살은 굽이도는 곳이다. 숲 언덕에 높은 용마루 세우니 비단 같은 밝은 노을을 가르고, 바위 위에 높이 대들보를 세우니 무늬 진 짙은 안개를 뚫고 솟았도다. 기둥엔 붉은색을 칠하지 않아 더없이 소박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촌스럽지 않고, 두공엔 비취색으로 모양을 새기지 않아 번거로운 무늬를 숨기면서도 더욱 선명하다. 화려하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으니 바로 군자가 집으로 삼는 곳이요, 높지도 않고 넓지도 않으니 곧 천지신명이 도우신 것이라. 더구나 처한 곳은 산과 들을 겸하고 커다란 강과 호수를 다 차지했으니, 농사를 짓고 남새밭을 가꾸면서 번수와 벗하고 소평과 이웃이 될 만하며, 낚시를 하고 그물질하면서 임공을 생각하고 여망을 떠올릴 만 함에랴. 겹겹이 쌓인 안개가 자욱이 끼어 흩어지지 않을 때면 꽃섬은 은빛 포구 가운데서 경계를 이루고, 긴 눈이 계속 이어져 녹지 않을 때면 옥빛 모래가 뿔 모양의 푸른 섬을 뒤덮는다. 갓 피어난 노을이 광염을 토할 때면 처마에는 남포(南浦)의 구름이 아직 머물고, 석양이 붉은빛을 거둘 때면 주렴에는 서산의 비가 걷힌다.26 현주집[玄洲集] _1이 글은 보만당(保晩堂)을 자호로 삼은 이정귀(李廷龜, 1564~

1635)에게 조찬한이 준 것으로서, 제목은 보만정서(保晚亭序)이다. 굳이 변려체(騈儷體)로 장르를 구분하지 않아도 대우(對偶)가 잘 맞으며, 리듬감도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대개 변려체가 한 구 내에서의 대우를 보이는 것이 일방적이라면 양호의 동쪽 기슭과 마포의 서쪽 지류 사이에 있어 그윽함이 시골의 집이 아니요, (중략) 화려하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으니 바로 군자가 집으로 삼는 곳이요.”라고 하여 단락 내에서의 대우마저도 신경 써서 창작했으니, 그 섬세함과 창의적 발상 자체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조찬한은 자주(自注)월사 상국께서 청하기에 변려문을 짓는다.”라고 썼으니, 이원춘이나 이경석에게 준 글과 마찬가지로 그의 변려체 창작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인다. 조찬한은 변려문과 유사한 분량의 부()도 남겼다. 이식은 서문에서 상세히 서술한 글은 양웅(揚雄, BC.53~AD.18)과 사마상여(司馬相如, BC.179~BC.117)의 궤적을 따랐다.”라고 평했으니, 역시 부 작품 또한 여느 작품처럼 작품성이 높았음을 시사한다. 주지하듯 전한(前漢)시대 사마상여는 부에 있어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 초사(楚辭)를 이은 송옥(宋玉), 가의(賈誼), 매승(枚乘) 등에 이어 이소재변(離騷再變)의 부()’라고도 평을 들을 정도로 부를 잘 지었다. 대표작인 자허부(子虛賦)와 그 후편 상림부(上林賦)는 그를 대변할 정도이다. 양웅 역시 감천부(甘泉賦), 하동부(河東賦), 우렵부(羽獵賦)등을 지어 간언(諫言)했으니, 부를 통해 임금에게 간했던 것이다. 조찬한의 벼슬 또한 정언(해제解題 27)이었으니, 부를 지어 충()으로써 간한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예컨대 적전부(籍典賦)에서,우리 성상께서 즉위하신 지 십삼 년에비로소 예사(禮司)에게 명하여적전의 의식을 거행하니이는 자성(粢盛)을 중시하고, 백성을 중시하신 뜻이라네

(중략)

이제 옛날 제왕의 법도를 회복하려고 그 법도를 계승하니백성의 복이라네

백성의 복일 뿐 아니라 종묘사직의 복이라네

라고 하여, 적전의 예식에 대하여 칭송하고, 나아가 그것이 옛 법의 회복이자 백성에게 올바른 정사가 펼쳐질 것이라는 애민사상으로까지 귀결시키고 있다. 이는 어머니에 대한 아픔을 지닌 광해군에게 지극한 간언이라기보다 전아한 문학작품을 통해 올바른 정사에 대해 간언할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온당하다. 산문에 대해서, 조찬한은 고문의 격식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이식은 말을 모아 엮은 글은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에 뿌리를 두었다.”라고 조찬한의 산문에 대해 평가를 했으니, 어쩌면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승상 제갈량에게 어린 임금을 당부하는 내용으로 상정하여 지28 현주집[玄洲集] _1은 조서짐은 평소 난세를 평정하여 태평한 시대로 되돌릴 재주가 부족하였음에도 쇠퇴한 국세를 복구시킬 뜻만은 간절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으니 하수(河水)는 어느 때에나 맑아질 것이며, 세월은 흘러가는 물과 같은데 창업은 오늘에 그치고 말았도다. 지난번 양손을 잃은 탓에 어느 겨를에 상호 공생의 형세를 보장하겠는가. 사직의 안위가 이때 달려 있으니 비록 자중하고자 하나, 도원(桃園)의 향불이 아직 식지 않았으니 혼자만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노라. 오직 성패는 하늘에 달려 있어 비록 백등(白登)의 다급함은 면했다 하나,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니 창오(蒼梧)의 순행(巡幸)을 되돌리지 말라. 이제 마지막 윤음(綸音)으로 나의 어진 보필에게 누를 끼치니, ()은 이윤(伊尹)과 여상(呂尙)과 나란히 달린다 해도 부끄러울 것이 없고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에 비교해 보아도 지나치게 겸허하다. 지금 천하가 세 나라로 정립(鼎立)하게 된 것은 누구의 힘이란 말인가. 온 나라를 통일시키는 그날도 반드시 올 것이다. 더구나 뒤를 이을 임금은 나이가 어리고, 국가란 공공의 기물(器物)이다. 보필할 만하면 보필하는 것이지 부자의 사사로움이 끼어들기 어렵고, 어진 이에게 줄 만하면 어진 이에게 주는 것이지 군신의 의리에 구애돼서는 안 된다. 오직 경의 재능이 저들에 비해 열 배나 되기에 홀로 남은 어린 임금을 부탁하는 것이다. , 짐은 두 번 말하지 않을 것이니 그대도 다시 사양하지 말라. 이 옥궤(玉几)에 기대어 고신(孤臣)을 어루만지며 울음을 삼키니, 저 백운(白雲)을 타고 고황제(高皇帝)를 뵐 때 무슨 말을 아뢰랴.해제解題 29이는 삼국시대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에게 후주(後主)를 부탁하는 상황을 빌려 지은 조서(詔書)이다. 내용도 그러하고 제목 역시 의탁고승상량조(擬托孤丞相亮詔)’라고 했으니 중국의 고사를 비의하여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의 작품 외에도 은나라 고종이 부열에게 너를 장맛비로 삼을 것이다라는 명을 내린 내용으로 상정하여 지은 제서[擬殷高宗賜傅說用汝作霖雨制],한 고조가 한신을 대장군에 배수한 내용으로 상정하여 지은 제서[擬漢高祖拜韓信爲大將制], 송나라 한림학사 구양수 등이 당사를 진헌한 내용으로 상정하여 지은 표문[擬宋翰林學士歐陽脩等進獻唐史表], 장량이 사호를 초청하는 편지[張良請四皓書]등 모두 같은 성격의 작품들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고문이란 사륙변려체의 유행에 반()하는 형식의 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성현의 도를 담아낸 글을 말한다. 그 성현의 도란 천도(天道)를 향해 가는 인도(人道)의 노력이고, 가장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인()이며, 그 표현은 효제충신(孝悌忠信) 등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한유가 그러했고, 유종원 역시 그러한 글을 지어 훗날 저명한 문인으로 평가받은 것이다.

조찬한의 글 역시 마찬가지이다. 제갈량의 충()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여타 산문의 핵심은 충에 있다. 따라서 조찬한이 추구한 산문세계는 고문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문집에 실려 있지는 않지만 청구영언(靑丘永言)해동가요(海東歌謠)에 수록되어 있는 시조 貧賤를 소개하고자 한다.30 현주집[玄洲集] _1청구영언(靑丘永言)진본貧賤權門에 드러가니 침 업슨 흥졍을 뉘 몬져 江山風月을 달라 니 그그리 못

(현대어 풀이)

가난과 천함을 팔고자 하여 권세 있는 문에 들어가 봤지만 덤 없는 흥정을 누가 먼저 하자고 하는가 강산과 풍월을 달라고 하니 그건 그렇게는 못하겠구나논어부와 귀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지만 그 올바른 도로써 얻지 않으면 그 부와 귀에 거처하지 않아야 한다. 빈과 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그 올바른 도로써 얻지 않으면 그 빈와 천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 군자가 인을 떠나면 어떻게 명성을 완성할 수 있겠는가. 군자는 밥을 먹는 동안이라도 인을 떠나서는 안 되고 순간순간에도 인에 반드시 거처하고 위급한 상황에도 인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君子去仁, 惡乎成名. 君子無終食之間, 違仁, 造次, 必於是, 顚沛, 必於是.]”라고 했다. 곧 부귀는 사람들 모두 좋아하는 것이지만 올바른 방법으로 얻지 않았다면, 차라리 빈천함만 같지 않다는 것이다. 주자(朱子)사서집주(四書集註)를 내면서 주석마다 지행해제解題 31(知行)을 강조한 것처럼, 조찬한 역시 위의 작품에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사상을 작품에 녹여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문집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23.8*17.9cm

계선(界線) 1225

주쌍행(註雙行)

상하향(上下向) 이엽화(二葉花)문어미(紋魚尾) 32.2*21.1cm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 5층 고문헌실 소장

초간본(初刊本)은 조찬한의 둘째 아들 조비(趙備)1654년 임실에 부임하면서, 이듬해 이경석(李景奭)의 서()를 받고, 이후에 문인 신천익(愼天翼)이 교정과 시체별(詩體別) 재구성, 그리고 저작 연대순 배열, ()을 붙임으로써 완성되었다. 이에 앞서 맏아들 조휴(趙休)는 병란(兵亂) 당시에도 선고(先考)의 신주(神主)와 유고(遺稿)를 지고 다녔을 정도로 효심이 지극했으며, 용궁(龍宮-경북 예천) 현감으로 내려간 1641년 이식(李植)의 서문을 받아, 문집을 정리하고 간행하려고 했는데 병으로 죽었다. 이러한 공이 뒷받침 되었기에 초간본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초간본은 1669년에 임실 객관(客館)에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되었다.32 현주집[玄洲集] _1중간본(重刊本)은 손자 조귀상(趙龜祥)이 무주 부사(茂朱府使)로 부임하여, 1710년에 1백여 본을 목활자로 인출(印出)한 것이다. 초간본과 체제나 구성은 같지만, 권말에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쓴 묘갈명(墓碣銘)과 조귀상(趙龜祥)의 중간지(重刊識)가 실려 있는 차이가 있다. 현재 한국문집총간79는 이를 저본으로 하여 영인한 것이다.

삼간본(三刊本)1927, 후손 조병주(趙柄柱)가 간행했다. 송규헌(宋奎憲)의 발문을 추가고 경성 흥문당(興文堂)에서 석인본(石印本)으로 간행한 것이다.구성은 크게, 운문 권1부터 권9까지, 산문 권10부터 15까지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산문은 변려체(騈儷體), 부체(賦體), 산문체(

文體) 등으로 구분하고 있으니, 이식이 서문에서 말한 선생에게는 유집(遺集)이 있으니, 시가 두 권, 변려문이 한 권, 부와 문도 한 권씩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권수별로는, 1부터 권9까지 총 590여 수의 시()가 권마다 체제별로 실려 있다. 즉 권1은 오언고시(五言古詩) 34, 2는 칠언고시(七言古詩) 43, 3은 오언절구(五言絶句) 25, 4는 칠언절구(七言絶句) 140, 5는 오언율시(五言律詩) 92, 6은 칠언율시(七言律詩) 220, 7은 오언배율(五言排律) 25, 8은 칠언배율(七言排律) 4수와 조체(操體) 1수와 육언시(六言詩) 1, 9는 연구(聯句) 6수와 차운한 회문시(回文詩) 1수가 있다. 각 권 맨 앞에는 저작 편수가 적혀 있고, 시의 제목에는 출전과 저작 시기가 적혀 있어 같은 저작 연도순으로 배열했음을 알 수 있다. 주목되는 것은 칠언율시가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으며, 배해제解題 33율시,육언시, 연구시, 회문시 등 시 안에서의 장르별 창작이 고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회문시의 경우, 비록 1수만이 실려 있기는 하지만, 창작이 쉽지 않음을 감안한다면, 조찬한이 문학 작품의 창작에 있어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문학적 완성도를 높이려 노력했음을 방증한다.

10부터 권11까지는 변려문(騈儷文)이다. 10에는 변려체로 지어진 조() 1, () 2, () 1, () 5, 치어(致語) 3, () 2, 교서(敎書) 8, 비답(批答) 1, 하전(賀箋) 5편이 있다. 11에는 제() 1, () 5, () 10, () 1, () 2, 상량문(上梁文) 1, () 1, () 1편이 있다. 10과 권11의 편차가 유사한 것을 보면 권11이 속집(續輯)의 성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와 마찬가지로 권 앞에는 전체 작품 수가 수()로 표기되어 있다. ()는 전언한 바 있는 승상 제갈량에게 어린 임금을 당부하는 내용으로 상정하여 지은 조서이며, ()은나라 고종이 부열에게 너를 장맛비로 삼을 것이다라는 명을 내린 내용으로 상정하여 지은 제서이니, 역시 중국의 고사를 전용하여 나라의 현신(賢臣)’을 강조한 충서(忠書)이다. ()가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데, 대부분 증서(贈序)와 송서(送序), 누정서(樓亭序)에 대한 것이다. 애석주서(哀石洲序)는 권필의 억울한 죽음

을 애도한 글이다. 12부터 권13까지는 사부(辭賦)이다. 12는 부() 6, () 2, () 1편이 있다. 부는 앞서 인용한 적전부외에도 차운한 부가 3편이 있다. 13은 부() 24편과 사() 2편이 있34 현주집[玄洲集] _1으니, 역시 속집의 성격을 지닌다. ()기룡사(騎龍辭)거범사(擧颿辭)는 용을 타고 범에 올라 탄 것을 노래한 것으로 자신의 이상을 노래한 것이다. ()칠각(七覺)으로 사부(辭賦) 어느 곳에도 두지 않고 독립하여 두었다. 대개 글이 짧으면 사()에 두고, 길면 부()에 두는 것이 통례인데, 2,946 ()이므로 별도로 둔 것이다. 백실선생(白室先生)과 현동자(玄侗子)의 문답을 두고 일곱 가지의 깨달음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훈자부(訓子賦)는 자식에게 당부하는 요목을 두었고 특히 효()를 강조한 글이다. 14부터 권15까지 문()이 실려 있다. 14는 제문(祭文) 14, () 1편이 실려 있다. 15는 서() 23, () 15, () 4, () 1, () 1, () 2, () 4, () 2, () 1, 지명(誌銘) 4, 통문(通文)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제문(祭文)은 죽은 아내에게 쓴 것을 비롯하여,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을 도왔던 임환(林懁, 1561~1608)의 제문, 벗 김창효(金昌孝)의 제문 등이 있으며, 고려시대의 문신 김주(金澍)에게

쓴 제문 등은 그의 충()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또 월출산(月出山)의 구정봉(九井峯)과 천왕봉(天王峯)에서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글을 포함하여 기우문(祈雨文)7편이 있다. ()연명(硯銘)으로 벼루의 평평함, 물이 마르지 않음, 닳지 않음, 확고한 덕, 유익한 세 벗 등 선비와의 공통점을 언급한 글이다. 지명(誌銘)은 지명 1, 묘갈(墓碣) 2, 묘표 음기(墓表陰記) 1편이 있다. 통문(通文)은 강원도 회양의 향교 중수(重修)이다. 해제解題 35

 

5. 맺으며

본서는 한문학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목릉성세(穆陵盛世)에 공적ㆍ사적으로 학문적 성과를 많이 낸 조찬한의 문집을 번역하고 주석을 가한 책이다. 주지하다시피, 조찬한이 살았던 시기는 외적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 발생했으며, 내적으로 심한 붕당정치에 인조반정(仁祖反正) 같은 큰 사건들도 있었다. 국내외적으로 혼란했던 이 시기에, 많은 문인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문집으로 남겼으며 이를 통해 당대 문화를 이해할 수 있었고 이를 거울삼아 두 번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다. 특히 성과를 많이 내었던 허균은 물론이고, 이안눌, 권필, 이식 등 내로라하는 문인들에 대해 연구하고 고찰하여 풍성한 자료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교유하고 그들에게서 최고의 찬사를 받았던 현주 조찬한에 대한 국역과 주석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아 많은 아쉬움이 있었다. 이에 한국학호남진흥원에서 주관하여 여러 선생님과 협업하여 현주집을 번역하고 주석을 낸 것은 한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그의 후손들 그리고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 조선 중기의 문학, 사상, 역사 등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시 한 번 한국학호남진흥원과 역자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36 현주집[玄洲集] _1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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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目次 56 현주집[玄洲集] 상_1

발간사…………………………………………………………………………………… 3
《현주집(玄洲集)》 해제(解題)… ……………………………………………………17
서 序 ……………………………………………………………………………………37
현주집 제1권
오언고시 五言古詩
쉬파리를 미워하다 憎蒼蠅 …………………………………………………… 57
통곡하고 싶구나 欲哭 二首 …………………………………………………… 64
명고 임전 의 고검편에 차운하다 次鳴皐古劍篇韻 任錪 …………………… 78
산곡의 〈증취암선사〉 운을 써서 양자점 경우 에게 주다 ………………… 80
用山谷贈翠巖禪師韻 贈梁子漸 慶遇
호남으로 가는 척형 나수재를 이별하며 주다 ……………………………… 82
贈別戚兄羅秀才之南中 
수궁행 守宮行 …………………………………………………………………… 84
긴 빙판 長氷坂…………………………………………………………………… 87
동악 이안눌에게 부쳐서 보내다 寄贈東岳李安訥 ………………………… 89
양어사의 초상 楊御史畫像 …………………………………………………… 93
강가 정자에서 배를 드러내고 누워 坦腹江亭 ……………………………… 96
고한행 苦寒行 …………………………………………………………………… 98

두 번째 其二……………………………………………………………………… 100
조이숙 희일 에게 주다 贈趙怡叔 希逸 ……………………………………… 102
대루원에서 선잠이 들어 강동 옛집을 꿈꾸다 ……………………………… 104
待漏院假寐 夢江東舊居
임명고를 애도하며 挽任鳴皐 ………………………………………………… 106
소자실 광진 을 애도하며 挽蘇子實 光震 …………………………………… 110
이창기에게 주다 贈李昌期 …………………………………………………… 113
장난삼아 윤경열광계에게 단선가를 지어주다 戲贈尹景悅團扇歌 光啓 ……… 118
차가운 가을 줄이 되기를 원하네 願作冷秋菰 ……………………………… 120
딸의 죽음을 슬퍼하다 悼女 …………………………………………………… 122
용암사에 투숙하다 投龍巖 …………………………………………………… 127
구정봉에 투숙하다 投九井峯 ………………………………………………… 131
용암사에서 출발해 도갑사에 투숙하다 自龍巖投道岬 …………………… 136
귤 안에서 바둑을 두다 橘中對棋 ……………………………………………… 139
형가를 애도하다 哀荊軻 ……………………………………………………… 142
집영대 集靈臺 …………………………………………………………………… 145
맛좋은 술이 궁벽진 골목에 없으랴 美酒無曲巷 …………………………… 147
오희가 五噫歌 …………………………………………………………………… 149
흙다리 아래에서 신발을 줍는 그림에 쓰다 題圯下取履圖………………… 150
빠르게 흐르는 여울 急灘 ……………………………………………………… 153
광유편 曠遊篇 …………………………………………………………………… 155
장안사에서 사상 최현 의 시에 차운하다 長安寺 次使相韻 崔睍 ………… 160
꿩 사냥을 바라보다 觀獵雉 …………………………………………………… 162
현주집 제2권
칠언고시 七言古詩
변산가 邊山歌 …………………………………………………………………… 167
혼돈가 混沌歌 …………………………………………………………………… 173
큰 눈 大雪………………………………………………………………………… 177
박연가 朴淵歌 …………………………………………………………………… 191
등협선루가 登挾仙樓歌 ………………………………………………………… 196
강태초 항 에게 주다 贈姜太初 沆 …………………………………………… 200
해남에 가는 김형헌을 보내며 送金亨獻之海南……………………………… 213
나무 심는 노래 種樹行 ………………………………………………………… 217
쥐가 달걀을 훔치다 鼠偸卵 …………………………………………………… 219
송군수 희조 에게 개를 청하며 乞狗于宋君受 熙祚 ………………………… 221
사문도에서 마사군을 그리며 沙門島憶馬使君 ……………………………… 225
미인행 美人行 …………………………………………………………………… 230
영남으로 부임하는 이립 영공에게 주다 贈而立令公赴嶺南 …………… 233
이입지 춘원 가 장흥으로 부임하는 것을 보내며 送李立之赴長興 春元 ……… 239
은대옥배가 銀臺玉盃歌 ………………………………………………………… 244
예천사의 시에 차운하다 次倪天使韻 ………………………………………… 249
영동으로 가는 학곡홍서봉에게 주며 이별하다 贈別鶴谷之嶺東 洪瑞鳳 ……… 252
용사 龍梭 ………………………………………………………………………… 257
성주화 醒酒花 …………………………………………………………………… 260
칼코등이를 바라보며 視刀環 ………………………………………………… 262
양어사 호 화상가 楊御史畫像歌 鎬 …………………………………………… 265
알성행 謁聖行 …………………………………………………………………… 269
보리 익는 시절 麥秋 …………………………………………………………… 271
산단화가 山丹花歌 ……………………………………………………………… 274
선비를 사랑하는 벽 愛士癖 課題 ……………………………………………… 277
상여가 그릇을 씻는 그림에 쓰다 題相如滌器圖 …………………………… 280
시가 완성되자 금포를 하사하다 詩成賜錦袍 課題 ………………………… 283
옥석각 과제 玉舃閣 課題 ……………………………………………………… 285
구학정 관등가 龜鶴亭觀燈歌 ………………………………………………… 288
고목나무 등걸의 매화 임 처사에게 주다 古査梅 贈林處士 ……………… 294
청음 김상헌 숙도 이 나에게 준 죽음 조희일 이숙 의 시에 ……………… 301
차운해서 나에게 주었길래, 그 시에 차운해서 이에 청음에게 주다8 현주집[玄洲集] 상_1
次淸陰 金尙憲叔度 次竹陰 趙希逸怡叔 贈我韻贈我 仍贈淸陰
소암 무숙 임숙영 의 시에 차운하여 주다 次贈疎菴 任叔英茂叔 ………… 305
소암의 조춘행에 차운하다 次疎菴早春行 …………………………………… 308
정상인에게 주다 贈淨上人 …………………………………………………… 312
몽선요 夢仙謠 …………………………………………………………………… 316
초천가 椒泉歌 …………………………………………………………………… 320
일본에 가는 이상고 경직 를 전송하는 시 送李尙古赴日本詩 景稷 ……… 324
이 사과 징 에게 그림을 구하는 시 乞畫于李司果詩 澄 …………………… 328
한양협소행 나수양에게 빨리 써서 주다 漢陽俠少行 走贈羅守讓 ………… 334
대동강설마행 평안 방백에게 주다 大同江雪馬行 贈平安方伯 …………… 338
다시 소암 시에 차운하다 再次疏庵韻………………………………………… 342
또 소암의 〈춘우행〉시에 차운하다 又次疏庵春雨行………………………… 344
장안사 승담로장가 長安寺 僧曇老丈歌 ……………………………………… 348
현주집 제3권
오언절구 五言絶句
고목나무 古卉 …………………………………………………………………… 353
연경으로 가는 친구에게 차운해서 주다 次贈友人赴燕 …………………… 354
또 又 ……………………………………………………………………………… 355
또 又 ……………………………………………………………………………… 356
또 又 ……………………………………………………………………………… 357
또 又 ……………………………………………………………………………… 358
남농팔영 南農八詠 ……………………………………………………………… 359
등화 燈花 ………………………………………………………………………… 361
연악산에서 여러 공의 분운시에 차운하여 절구시 열 수를 짓다 ………… 362
次淵岳諸公分韻詩 作爲十絶 壬戌
두 번째 其二……………………………………………………………………… 363
세 번째 其三……………………………………………………………………… 364
네 번째 其四……………………………………………………………………… 365
다섯 번째 其五…………………………………………………………………… 366
여섯 번째 其六…………………………………………………………………… 367
일곱 번째 其七…………………………………………………………………… 368
여덟 번째 其八…………………………………………………………………… 369
아홉 번째 其九…………………………………………………………………… 370
열 번째 其十……………………………………………………………………… 371
현주집 제4권
칠언절구 七言絶句
무은암. 벽 위의 시에 차운하여 김덕윤에게 주다 霧隱庵 次壁上韻 贈金德潤 ………375
백구의 부채에 시를 적어 드리다 題贈伯懼扇 ……………………………… 376
보광사의 좋았던 일을 추억하며 반환 어른 홍천경 께 보내다 …………… 377
追憶普光勝事 贈寄盤桓丈 洪千璟
취랑에게 뒤늦게 보내다 追寄翠娘 …………………………………………… 378
외딴집의 한낮 흥취 幽居午興 ………………………………………………… 379
물이 바위에 미끄러지다 水滑石 ……………………………………………… 380
목장 牧場 ………………………………………………………………………… 381
양릉 兩陵 ………………………………………………………………………… 382
용문산 龍門山 …………………………………………………………………… 383
대제사 大堤詞 …………………………………………………………………… 384
가을밤 오자영에게 주다 秋夜 贈吳子英……………………………………… 385
고을 성벽의 새벽 경치郡城曉景 ……………………………………………… 386
옥봉의 옛 별장 玉峯舊莊 ……………………………………………………… 387
백암 십영 白巖十詠 …………………………………………………………… 388
석전제에서 음복하는 날 모재의 〈권제생소학〉시에 차운하여 지어서 ……… 392
그대로 향교 유생들에게 보이다
釋奠飮福日 次慕齋勸諸生小學韻 仍示校儒10 현주집[玄洲集] 상_1
꾀꼬리 流鸎 ……………………………………………………………………… 393
석천주인의 시에 차운하여 짓다 次石泉主人韻……………………………… 394
즉사 김 정자에게 주다 卽事 贈金正字 ……………………………………… 395
이른 봄 早春……………………………………………………………………… 396
등화 燈花 ………………………………………………………………………… 397
구학정에서 감회가 있어 龜鷦亭有感 三首…………………………………… 398
장문원 長門怨 …………………………………………………………………… 400
한식 寒食 ………………………………………………………………………… 401
춘일즉사 春日卽事 ……………………………………………………………… 402
이자강과 쌍청당에서 함께 술을 마시다 與李子剛共酌雙淸堂 …………… 403
또 이별하며 주다 又贈別 ……………………………………………………… 404
삼월 보름날 밤에 쌍청당에서 달을 완상하다 三月望夜 雙淸堂賞月………… 405
꽃샘바람 妬花風 ………………………………………………………………… 406
삼월 이십일 이후 비 내리는 가운데 마침 공사가 없어 쌍청당에서 …… 407
잠들었다가 빗소리로 인해 깨어나다
三月念後 雨中適無公事 就睡雙淸 因雨聲睡起
채련사 采蓮詞 …………………………………………………………………… 408
초봄의 꾀꼬리 新鸎 …………………………………………………………… 409
달밤에 서울의 옛 친구를 그리워하며 月夕 有懷洛中故交 ………………… 410
서쪽 정자에서 취하여 권 처사에게 준다 西亭子 醉贈權處士 …………… 411
전가즉사 田家卽事 ……………………………………………………………… 412
이 내한이 준 시에 차운하다 次李內翰贈韻 ………………………………… 413
차운하여 오 종사 숙 에게 부치다 次寄吳從事 䎘 ………………………… 414
제민루에서 김장원에게 주다 濟民樓 贈金壯元……………………………… 415
성산 한 별좌의 시골집 城山韓別坐野莊 …………………………………… 416
호서 방백 이입지 춘원 의 시에 차운하다 次湖西方伯李立之韻 春元 …… 417
봉서정 鳳棲亭 …………………………………………………………………… 418
문경현에서 수재 권상정에게 주다 聞慶縣 贈權秀才尙正 ………………… 419
이입지를 남겨두고 떠나며 留別李立之 ……………………………………… 420
백마강 白馬江 …………………………………………………………………… 421
세포에서 봄에 배를 띄우다 稅浦泛春………………………………………… 422
만성재에 쓰다 題晩省齋………………………………………………………… 423
전의를 출발하여 정선 군수 정공의 별장으로 향하다가 말 위에서 읊조리다……… 424
發全義 向鄭旌善野莊 馬上口占 ………………………………………………… 424
괜한 흥이 일어 이사앙에게 주다 漫興 贈李士仰 …………………………… 425
고향 생각 憶鄕…………………………………………………………………… 426
광주 목사 홍낙부 명원 에게 주다 贈光州牧洪樂夫 命元…………………… 427
김 첨지의 강가 누각에서 밤에 술 마시며 자점양경우과 함께 창화하다……… 429
金僉知江閣夜飮 與子漸唱和 梁慶遇
완산에 있으면서 장성으로 부치다 在完山寄長城…………………………… 430
욕천 공관에서 浴川公館………………………………………………………… 431
정랑 최유장의 은거지에서 쓰다 題崔正郞孺長幽居………………………… 432
변 막부에게 주다 贈邊幕府 …………………………………………………… 433
유선사 遊仙詞 …………………………………………………………………… 434
궁중사시사 宮中四時詞 ………………………………………………………… 437
또 又 ……………………………………………………………………………… 439
동악에게 주다 贈東岳…………………………………………………………… 441
밤에 비바람이 크게 일기에 서울 집을 추억하다 夜來風雨大作 仍憶京第 …… 443
심씨 집안 모정에 쓰다 題沈家茅亭 …………………………………………… 444
취해서 송군수에게 주다 醉贈宋君受 ………………………………………… 445
두 원수가 군대를 이끌고 투항했다는 소식을 길에서 듣고는 …………… 446
비분강개하여 읊다
途聞兩元帥以其軍生降 憤慨而吟
반환에게 서둘러 써서 주다 走贈盤桓………………………………………… 448
중흥사 성민의 시축에 차운하여 짓다 中興寺 次性敏軸韻 ………………… 449
민옥의 시축에 차운하여 짓다 次敏玉軸韻…………………………………… 450
반구정 새벽에 읊다 伴鷗亭 曉吟 ……………………………………………… 451
파곶으로 향하던 때 길에서 본 경치를 읊다 向葩串時 途中卽景 ………… 452
빗속에 성으로 돌아가다 雨中歸城 …………………………………………… 454
황령사 黃嶺寺 …………………………………………………………………… 455
골짜기를 나와 휴아와 이별하고 다음날 아침 말 위에서 우연히 읊다 ……… 456
出洞別休兒 翌朝馬上偶吟
창석의 시냇가 집 蒼石溪堂 …………………………………………………… 457
부옹의 시에 차운하여 주다 次贈浮翁韻 …………………………………… 458
철산 鐵山 ………………………………………………………………………… 461
관부를 나서며 出府 乙丑 淮州錄 ……………………………………………… 462
마하현을 내려가며 풍악산의 진면모를 처음으로 바라보다 ……………… 463
下磨訶峴 始望楓岳眞面
장암 壯巖 ………………………………………………………………………… 464
장안사 長安寺 …………………………………………………………………… 465
정양사 正陽寺 …………………………………………………………………… 466
4월 14일 孟夏小望 ……………………………………………………………… 467
왕소군 王昭君 …………………………………………………………………… 468
이 원외 경석 에게 주다 贈李員外 景奭 ……………………………………… 470
삼귀정 팔영 청음이 시를 굳이 써 달라기에 응하다 ……………………… 472
三龜亭八詠 應淸陰苦索
비오리 花鴨 ……………………………………………………………………… 475
달천 㺚川 ………………………………………………………………………… 476
한식 寒食 ………………………………………………………………………… 477
부지암으로 여헌 장현광 을 방문하다 不知巖訪旅軒 張顯光 ……………… 478
장여헌의 궁벽한 거처에 쓰다 題張旅軒幽居………………………………… 479
춘회즉사 春晦卽事 庚午………………………………………………………… 480
마을 시내 추일즉사 村溪 秋日卽事 …………………………………………… 481
외로운 기러기 斷鴈 …………………………………………………………… 482
이사특에게 주다 贈李士特 …………………………………………………… 483
신부 新婦 ………………………………………………………………………… 484
낙화에 대한 원망 절구 4수 두보의 시체를 본받다 落花怨 四絶 效老杜體 ……… 485
누암의 초루에서 주인을 조롱하다 樓巖草樓 嘲主人 ……………………… 486
환란을 겪은 뒤 정자용이 시 써주기를 애써 청하여 억지로 쓰다 ……… 487
經患後 被鄭子容苦索 强題目次 13
기와가 준 시에 또 차운하다 又次畸窩贈韻 ………………………………… 488
현주집 제5권
오언율시 五言律詩
임척제 광윤 에게 주다 贈林戚弟 光胤 ……………………………………… 491
서울을 떠나며 發京口…………………………………………………………… 492
임자정을 추억하며 주다 追贈林子定 ………………………………………… 493
천마산으로 향할 때 이희주의 집 앞의 큰 고개를 넘으며 ………………… 494
向天磨時 越李希珠家前大嶺
날이 어두워져가자 운거동 입구로 들어가며 읊조리다 …………………… 495
向暝 入雲居洞口 口占
달빛을 타고 술 마시기를 꾀하다 乘月謀酌 ………………………………… 496
파사성 婆娑城 丙午 …………………………………………………………… 497
선조대왕 만사 宣祖大王挽詞…………………………………………………… 498
두 번째 其二……………………………………………………………………… 499
장난삼아 석주에게 주다 戲贈石洲 …………………………………………… 500
석주에게 주다 贈石洲…………………………………………………………… 501
신여현에 대한 만시 挽愼汝顯 ………………………………………………… 502
백선명 진남 의 아내에 대한 만시 挽白善鳴妻 振南………………………… 503
동지사로 가는 이창기를 보내며 送冬至使李昌期 ………………………… 504
당산을 떠나며 發堂山 壬子 …………………………………………………… 505
인촌을 출발하며 發印村 ……………………………………………………… 506
광산으로 가는 도중에 光山道中 ……………………………………………… 507
적성에서 뱃놀이 船遊赤城 …………………………………………………… 508
섬호 진여옥 경림 에게 주다 贈剡湖陳汝玉 景琳 …………………………… 509
두 번째 其二……………………………………………………………………… 510
섬호가 준 운에 차운하다 次剡湖贈韻 ……………………………………… 511
두 번째 其二……………………………………………………………………… 512
귤옥 윤광계 의 운에 다시 차운하다 再次橘屋韻 尹光啓 ………………… 513
민사립의 호정에서 벽 위의 시에 차운하다 閔思立湖亭 次壁上韻 ……… 514
돌아오는 제비 응제시 歸燕 課製 …………………………………………… 515
가을 매미 秋蟬…………………………………………………………………… 516
한가로이 지내며 눈 앞 풍경을 읊다 閑居卽事 ……………………………… 517
창석 이준 의 〈성암〉시에 차운하여 짓다 次蒼石星巖韻 李埈……………… 518
취해서 진퇴격을 써서 시를 지어 단곡 김지선 연형에게 주다 …………… 519
醉中用進退格 贈丹谷年兄 金止善
진안 마이산 鎭安馬耳山………………………………………………………… 520
신 박사천익의 시에 차운하여 지어서 그 막내 동생인 좌랑해익을 애도하다…… 521
次愼博士 天翊 韻 悼其季佐郞 海翊
비 내린 뒤에 훈도가 술을 가지고 와서 권하기에 술자리에 나아가………… 523
서둘러 써서 사례하다
雨後訓導持酒來勸 卽於酒席 走謝
달빛 아래 거닐며 맑은 연못을 굽어보다 步月俯玩淸池 …………………… 524
초여름에 친구에게 주다 首夏贈友 …………………………………………… 525
두 번째 其二……………………………………………………………………… 526
쌍청당 취해서 권공이 준 시에 차운하여 짓다 雙淸堂 醉次權公贈韻 …… 527
자발 양형우 이 준 시에 차운하여 짓다 次子發贈韻 梁亨遇 ……………… 528
고갯길에 투숙하다 投嶺路 …………………………………………………… 529
은주암 隱舟巖 …………………………………………………………………… 530
강을 읊다 咏江 遊頭流錄 丁巳 ………………………………………………… 531
봉성에 투숙하다 投鳳城 ……………………………………………………… 532
석문 石門 ………………………………………………………………………… 533
쌍계사 雙溪寺 …………………………………………………………………… 534
불일암 佛日 ……………………………………………………………………… 535
옥소암 玉簫菴 …………………………………………………………………… 536
신흥동 神興洞 …………………………………………………………………… 537
두 번째 其二……………………………………………………………………… 539
동악이 준 시에 차운하여 짓다 次東岳贈韻 ………………………………… 540
앞의 시에 다시 차운하여 짓다 再次前韻 …………………………………… 541
두 번째 其二……………………………………………………………………… 542
화담 花潭 ………………………………………………………………………… 543
봄날 만흥 春日漫興……………………………………………………………… 544
교하 별장에 투숙하다 投宿交莊 ……………………………………………… 545
권 수사 상정 에게 주다 贈權秀士 …………………………………………… 546
천향정에서 밤에 술 마시고 신 찰방 상철 을 이별하며 주다 …………… 547
天香亭夜飮 贈別申察訪 尙哲
창석의 계당에서 우복 정경세 을 만나다 蒼石溪堂 會愚伏 鄭經世 ……… 548
명연 鳴淵 ………………………………………………………………………… 550
길을 따라가며 沿路……………………………………………………………… 551
개구암 開口巖 …………………………………………………………………… 552
차운하여 박 상사의 계당에 쓰다 次題朴上舍溪堂 ………………………… 554
두 번째 其二……………………………………………………………………… 555
순상의 시에 차운하다 次巡相韻 ……………………………………………… 556
다시 차운하다 再次……………………………………………………………… 557
병이 낫다 病起…………………………………………………………………… 558
이충의에게 주다 贈李忠義 …………………………………………………… 559
가을 뒤 즉사 秋後卽事 ………………………………………………………… 560
초당에 쓰다 題草堂……………………………………………………………… 561
고산 찰방 허적 에게 주다 贈高山察訪 許 …………………………………… 562
풍악산을 읊다 咏楓岳 ………………………………………………………… 564
강 천사의 한강 시에 차운하다 次姜天使漢江韻 …………………………… 565
두 번째 其二……………………………………………………………………… 567
세 번째 其三……………………………………………………………………… 568
택당에게 주다 贈澤堂…………………………………………………………… 569
성주 촌가에서 우연히 쓰다 星州村舍偶題…………………………………… 571
도리사 桃李寺 …………………………………………………………………… 572
은진현에서 전주를 향해 일찍 떠난 일을 추억하여 기록하다 …………… 573
追記恩津縣早發向全州16 현주집[玄洲集] 상_1
이월 초자의 일로 한양에 갔을 때 봉정에 이르다 ………………………… 574
二月 以醮子赴洛時 到鳳亭 辛未
조령 鳥嶺 ………………………………………………………………………… 575
누암에서 세낸 배가 역풍에 막혀 겨우 가흥에 도착하니 다시 육로를 취하다 …… 576
樓巖雇船 阻逆風 僅達可興 還取旱路
만성재에 쓰다 題晩省齋 ……………………………………………………… 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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