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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현주집(玄洲集) 서(序) : 덕수(德水) 이식(李植), 영의정 이경석(李景奭)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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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序
옛날에 소 장공(蘇長公)1이 글을 논하면서 공자(孔子)의 ‘사달(辭達)’이라는 한 구절로 종지(宗旨)를 삼았다.2 해설하는 이는 
“달(達)은 그 뜻을 전달하는 것이니 문사(文詞)는 의미를 전달하는 데 그칠 뿐 거대하고 힘껏 펼쳐낸 것이나 기이하고 아름다운 것을 숭상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만물이 고르지 않음은 이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의미에는 심원한 것과 천근한 것이 있고 사어(辭語)에는 험벽한 것과 평이한 것이 있다. 순 임금 시대와 하(夏)나라, 상(商)나라, 주(周)나라의 문장에서부터 오히려 소박함과 난삽함3의 차이가 있었는데, 하물며 굴송(屈宋)4 이래로는 육의(六義)5가 분파되고 뭇 수레가 나란히 치달림에 있어서랴? 똑같이 각자 자기의 뜻을 말하면서도 이치를 빠뜨림이 없는 데다가, 장식한 수레와 말이 먼 곳에 이르는 듯하고 반점이 있는 호랑이와 표범이 무늬와 색채를 갖춘 듯하니 이는 문장의 지극함이 아니겠는가? 아조(我朝)에서는 경서의 가르침을 숭상하여 문사(文辭)가 고상하고 우아하기만 하였고 한유(韓愈)와 소식(蘇軾)의 문장도 근래에 모범으로 삼았을 뿐이었으니, 진한(秦漢) 제가(諸家)의 우람하고 아름다운 문체6는 아직도 갖추지 못하였다. 융만(隆萬) 이후로는 작가 몇 분이 중국에서 한번 크게 떨쳐 일어났는데7 이때에 이들을 계승하여 화답하려는 이로는 현주(玄洲) 조공(趙公)이 있어 성대하게 명가(名家)가 되었다. 그의 학문은 옛것에 대해 탐색해 보지 않은 것이 


1 소 장공(蘇長公):송나라 소식(蘇軾, 1037~1101)으로, 자는 자첨(子
瞻),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다. 소식이 소순(蘇洵)의 장자인데다 
그 문장이 백대(百代)의 으뜸이라고 할 만했기 때문에 그를 일컬어 
‘장공(長公)’이라고 하고, 그의 아우 소철(蘇轍)은 소공(少公)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소식은 벼슬이 예부 상서(禮部尙書)에 이르렀으며, 
저서에 《논어설(論語說)》, 《구지필기(仇池筆記)》, 《동파지림(東坡志林
)》, 《동파전집(東坡全集)》 등이 있다.
2 공자(孔子)의…삼았다:《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 “말을 할 때에
는 자기의 뜻이 통하게만 하면 된다.”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는데, 동
파가 〈여사민사추관서(與謝民師推官書)〉에서 이를 인용하여 문장을 논
하였다.
3 난삽함[詰屈]:노신(魯迅)은 《한문학사강요(漢文學史綱要)》에서 시경
의 상송(商頌) 5편과 상서(尙書)를 난삽하다[詰屈]라고 평하였다.
서 序 3940 현주집[玄洲集] 상_1
4 굴송(屈宋):전국 시대 초나라 사람들로, 특히 사부(辭賦)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굴원(屈原)과 그의 제자인 송옥(宋玉)을 합칭한 말이다. 
남조 송(南朝宋)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에 “굴원 송옥의 
뛰어난 걸음은, 아무도 뒤따를 자가 없다.[屈宋逸步, 莫之能追.]”라고 
하였다.
5 육의(六義):《시경》의 시를 창작하는 데 활용된 세 가지 수사법인 부
(賦)·비(比)·흥(興)과 이로부터 형성된 세 가지 시의 체재인 풍(風)·아
(雅)·송(頌)을 이른다.
6 진한(秦漢)…문체: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시대의 고문(古文)을 가
리킨다.
7 융만(隆萬)…일어났는데:융만(隆萬)은 명(明)나라 목종(穆宗)의 연
호인 융경(隆慶, 1567~1572)과 신종(神宗)의 연호인 만력(萬曆, 
1572~1615) 연간을 가리킨다. 이때 떨쳐 일어난 작가란 명나라 전
후칠자(前後七子)들을 염두에 둔 듯하다. 전후칠자는 ‘문필진한(文必
秦漢)’을 선언하였고, 그중에서도 특히 이반룡(李攀龍, 1514~1570)
은 “문장은 서경 이후로, 시는 천보 연간 이후로는 모두 볼 것이 없
다.[文自西京, 詩自天寶而下, 俱無足觀.]”라고까지 하여, 서한의 문장
을 매우 고평하였다.서 序 41

 

없었기 때문에 그의 문장은 고문에 대해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위로는 양한(兩漢)8을 따랐고 아래로는 육조(六朝)9에 의지하였으며 또한 공자(孔子)의 사달(辭達)이라는 종지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이미 한 번 몸을 굽혀 과장(科場)에 나아가 도룡(屠龍)10의 명예를 독점하였고, 임금의 명에 따라 지은 관각(館閣)의 작품들은 모두 말에 기대어 즉시 이루어낸11 듯하였으니 당대의 뛰어난 인재
들 가운데 앞서는 이가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바야흐로 ‘문단에서 새로 맹주가 되어 기치를 내걸고 많은 선비를 앞서는 일을 넉넉히 해 볼 여지가 있다’고 기약하였는데, 불행하게도 벼슬길이 때를 만나지 못하여 지방 고을에서 부침한 것이 수십 년이었다. 그는 얻는 게 있든 잃는 게 있든, 기쁨과 슬픔으로 불평한 마음일 때도 한결같이 글 읽는 데12만 전념하였다. 그러므로 문사(文詞)가 

 

8 양한(兩漢):전한(前漢)과 후한(後漢) 시대를 말한다. 여기에서는 양
한 시대의 고문을 뜻한다. 사마천(司馬遷)을 비롯하여, 조조(鼂錯), 
가의(賈誼), 유향(劉向), 동중서(董仲舒), 양웅(揚雄) 등의 문장가들이 
배출되었다.
9 육조(六朝):위진(魏晉)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를 말한다. 여기에서
는 이 시대의 문장을 일컫는다.
10 도룡(屠龍):도룡(屠龍)은 용을 잡는다는 말로, 특별한 재주와 기술
을 뜻한다. 《장자(莊子)》 <열어구(列禦寇)>에 “주평만(朱泙漫)이 지리
익(支離益)에게 용 잡는 기술을 배우느라 천금의 가산을 모두 탕진하
면서 3년 만에 기술을 완전히 터득했으나 써먹을 곳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11 말에…이루어낸:문장 솜씨가 민첩하여 신속하게 지어내는 것을 말
한다. 진(晉)나라 원굉(袁宏)이 환온(桓溫)의 명령을 받고는 그 자리
에서 말에 기대어 금새 일곱 장의 군서(軍書)를 지어낸 고사에게 유
래한 것이다. 《世說新語 文學》 
12 글 읽는 데:원문의 ‘점필(佔畢)’은 경사(經師)가 경전의 뜻을 모르고 
간책 위의 글자를 보고 외워서 사람을 가르친다는 뜻인데 후에는 송
독(誦讀)의 뜻으로 쓰였다.42 현주집[玄洲集] 상_1

 


나오는 것이 끝이 없고 말이 갈수록 기이했던 것이다. 애석하도다, 천구(天球)와 홍벽(弘璧)13이 쑥과 모래, 자갈 우북한 사이에 내버려져서 다만 농부나 목동이 여러 광채가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의심하고 놀라게 하였을 뿐이니 이것이 동서(東序)의 진귀한 보옥(寶玉)14이요 수레를 비추는 보주(寶珠)15라는 걸 어찌 알고서 받들겠는가?
이제 가업을 계승한 공의 두 아들이 병화를 겪은 뒤까지 부친의 유고를 보존하고는 차례를 정해 책을 만들어 완염(琬琰)16과 같은 유고를 전하기를 도모하였다. 내가 매번 읽을 때마다 탁월하다고 여겼는데 유고에서 그 대략을 평가해본다면 소부(騷賦)는 초한(楚漢)을 추수하였고17 산문(散文)과 잡저(雜著)는 좌(左)·

 


13 천구(天球)와 홍벽(弘璧):모두 옥으로 만든 진귀한 구슬이다. 주(周
)나라 성왕(成王)이 죽을 때 생전에 간직하고 있던 보옥과 기물을 진
열해 놓았는데, 서서(西序)에는 적도(赤刀), 대훈(大訓), 홍벽(弘璧), 
완염(琬琰)을, 동서(東序)에는 대옥(大玉), 이옥(夷玉), 천구(天球), 하
도(河圖)를, 서방(西房)에는 윤(胤)나라의 무의(舞衣), 대패, 분고(鼖
鼓)를, 동방(東房)에는 태(兌)가 만든 창, 화(和)가 만든 활, 수(垂)가 
만든 대나무 화살을 진열하였다. 《書經 顧命》
14 동서(東序)의 진귀한 보옥(寶玉):앞에 말한 천구(天球) 등을 가리킨다.
15 수레를 비추는 보주(寶珠):구슬의 광채가 멀리 비쳐 수레 여러 채의 
앞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전국 시대 위왕(魏王)이 제왕(齊王)과 들
에서 만나 자랑하기를 “과인(寡人)의 나라는 소국이지만 그래도 열
두 채의 수레 앞뒤를 비추는 경촌(經寸)의 구슬이 열 개 있다.”라고 
하였다. 《史記 田敬仲完世家》
16 완염(琬琰):완(琬)과 염(琰)은 모두 미옥(美玉)으로 여기에 문자를 
써서 기록을 남겼는데, 간책(簡冊)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아름답게 
말한 것이다. 여기서는 현주의 유고(遺稿)를 말한다.
17 소부(騷賦)는 초한(楚漢)을 추수하였고:소(騷)는 초나라에서 창작되
기 시작되어 뛰어난 작가가 많았는데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을 그 
대표적인 작가로 들 수 있고, 부(賦)는 한(漢) 대의 부가 유명한데 사서 序 43

 

마(馬)18를 법도로 삼았으며 변려체(騈儷體) 글에서는 서(徐)·유(庾)19의 성률을 깊이 얻었고 장편(長篇)과 광운(廣韻)의 시는 충분히 두(杜)·한(韓)20과 함께 내달릴 만하다.21 총괄하자면 그 밝은 지혜가 높고 환하며 재간이 뛰어나고 아름다워 그 웅건하고 분방함이 한계를 둘 수 없는 듯하고 융합하면서도 곡절이 있어 각각 체재를 두었으니, 왕왕 정감이 아리땁게 되고 성령(性靈)이 발동하여 경물이 그의 정신과 만나면 마치 악기 소리가 어울려 서로를 드러내면서 긴 여운을 남기는 것과 같았으리라. 아, 공이 이러한 기예에 대해서는 그것을 풍부하게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등림(橙林)22에 있어서도 때로 썩은 나무가 있고 무기 창고에 있어서도 

 

18 좌(左)·마(馬):《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작자 좌구명(左丘明)과 
《사기(史記)》의 작자 사마천(司馬遷)을 병칭한 것이다.
19 서(徐)·유(庾):남조 송(南朝宋)의 서리(徐摛)·서릉(徐陵) 부자와 북
주(北周)의 유견오(庾肩吾)·유신(庾信) 부자를 말하는데, 보통은 서릉
과 유신을 가리키는 말로 많이 쓰인다. 서릉은 자가 효목(孝穆)으로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고승 보지(寶誌)로부터 천상(天上)의 석기
린(石麒麟)이란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사륙변려문을 잘 지었으
며, 저서로는 《서효목집(徐孝穆集)》과 《옥대신영(玉臺新詠)》이 있다. 
유신은 박학하고 문장이 화려하여 서릉과 함께 명성이 높았다. 그가 
일찍이 양(梁)나라에서 벼슬하여 우위장군(右衛將軍)이 되고 무강현
후(武康縣侯)에 봉해졌다가 뒤에 난리를 만나 이리저리 유랑하였는
데 이때 어지러운 시국을 슬퍼하며 지은 〈애강남부(哀江南賦)〉는 특
히 명문으로 일컬어진다.
20 두(杜)·한(韓):두보(杜甫)와 한유(韓愈)의 병칭이다.
21 장편(長篇)과…만하다:《택당집(澤堂集)》 〈현주유고서(玄洲遺稿序)〉
에는 이 문장 뒤에 “다만 근체시 절구와 율시는 그다지 공력을 들이
지 않았는데 역시 모두 기발하고 자득한 작품이라 송시의 격조로 떨
어지지는 않았다.[惟近體律絶, 不甚著工, 而亦皆奇拔自得, 不落宋調.]”
라는 문장이 있다.
22 등림(橙林):‘등림(鄧林)’의 오기로 보인다. 등림(鄧林)은 고대 신화 44 현주집[玄洲集] 상_1

 

마모되어 무디어진 칼날이 없을 수 없으니 고금의 대가들도 이는 면할 수 없는 것이다. 후생이 까다롭게 따져 함부로 잘못을 지적하는 일을 할 수 있었거니와 이와 같은 자들에 대해서는 공이 이미 웃으면서 하는 대로 맡겨두었던 터였다. 공이 스승으로 삼거나 벗으로 사귄 이들은 모두 일세(一世)의 종장(宗匠)들이다. 가장 더불어 깊이 사귄 이는 우리 숙부 동악(東嶽)23 선생과 석주(石洲) 권공(權公)24이고 소암(踈庵) 임군(任君)25이 그 다음이다. 공의 문장속에 나오는 신령스러운 복숭아나무 숲 이름이다. 과보(夸父)가 태양과 경주를 하려고 해의 그림자를 쫓아다니다가 지친 나머지 쓰러져 죽었는데, 그가 내버린 지팡이 위에 시체의 썩은 물이 흘러내려 지팡이가 복숭아나무로 변하면서 사방 일천 리에 도림(桃林)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列子 湯問》 《山海經 海外北經》 

 


23 동악(東嶽):이안눌(李安訥, 1571~1637)의 호이다. 본관은 덕수(德
水), 자는 자민(子敏),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18세에 진사시에 수
석으로 합격하였으나 동료들의 모함을 받자 과거 볼 생각을 버리고 
문학에 열중하였다. 29세 때 다시 과거에 나아가 문과에 급제하였
다. 함경도 관찰사, 예조 판서, 형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저서에 
《동악집》이 있다. 평생 시를 짓는 데 힘써 4천 3백여 수의 방대한 양
의 시를 남겼다.
24 석주(石洲) 권공(權公):권필(權韠, 1569~1612)로, 본관은 안동(安
東), 자는 여장, 호는 석주이다. 정철(鄭澈)의 문인이다. 임숙영(任叔
英)이 광해군을 비판하는 글로 삭과(削科)된 사실을 듣고 〈궁류시(宮
柳詩)〉를 지어서 풍자한 일로 경원(慶源)으로 귀양가다가 도중에 사
망하였다. 저서로 문집인 《석주집》과 한문소설인 〈주생전(周生傳)〉
이 전한다.
25 소암(踈庵) 임군(任君):임숙영(任叔英, 1576~1623)으로, 본관은 풍
천(豐川), 자는 무숙(茂叔), 호는 소암·동해산인(東海散人)이다. 이식(李
植), 장유(張維), 권필(權韠) 등과 교유하였다. 1611년(광해군3)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정자, 주서를 역임하다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처치
하려는 논의가 일자 병을 핑계로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고, 시사(
時事)를 비판하다가 결국 탄핵을 받아 광주(廣州) 용진(龍津)에 우거하
였다. 인조반정 이후 예문관 검열로 기용되어 홍문관 박사 등을 거쳐 서 序 45

 

은 이분들의 장점을 아울러 가지고 있으면서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지목을 받지 않았으니 그 규모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나는 재능과 학문이 늦게 진보했고 훈고(訓詁)26에만 골몰하였으니 중년에 비록 공을 좇아 배움을 구해 일깨워주는 한 마디 말씀을 들을 수 있었지만 고문대가에 대해서는 항상 망양(望洋)의 탄식27이 있었다. 그런데 내 자신이 생각지도 않게 빈자리를 채워 군자의 수레를 타느라28 사액(詞掖)에서 혈지(血指)를 하게 되었으니29 이것이 어찌 세도(世道)를 개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제 공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되었고, 사헌부 지평에 임용된 상태에서 갑자기 졸하였다. 문집인 《소암집》이 전한다. 

 

26 훈고(訓詁):《상서(尙書)》 〈요전(堯典)〉·〈대우모(大禹謨)〉·〈이훈(伊訓
)〉·〈탕고(湯誥)〉 등의 글을 병칭한 전모훈고(典謨訓誥)의 약칭으로, 
성현의 말씀 즉 경전의 글을 뜻한다.
27 망양(望洋)의 탄식:자기의 좁은 소견으로는 엄청나게 높은 식견을 
따라갈 수 없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에서, 강물 귀신 
하백(河伯)이 북해(北海)에 이르러 그 무한한 경지를 접하고 바다 귀
신 약(若)에게 자기의 처지를 토로하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28 군자의 수레를 타느라:원문의 ‘부승(負乘)’에서 부(負)는 짐을 짊어
지는 것으로 소인(小人)이 하는 일이고, 승(乘)은 수레로서 군자(君子
)가 타는 것이다. 아랫자리에 있어야 할 소인이 윗자리에 있으면 화
를 당한다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주역》 〈해괘(解卦) 육삼(六三)〉에 
“짐을 짊어져야 마땅할 소인이 도리어 수레를 타니 도적을 맞게 될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29 사액(詞掖)에서…되었으니:옥당(玉堂)의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는 뜻으로, 택당의 겸사(謙辭)이다. 사액(詞掖)은 승문원의 별칭 또는 
문사(文詞)를 담당한 관서를 두루 이르는 말이다. 혈지(血指)는 공구
를 다루는 데 서툰 목수는 자신의 손에 피를 나게 한다는 말로, 자신
의 문장 솜씨가 매우 거칠다는 것을 표현하는 겸사이다. 한유(韓愈)
의 〈제유자후문(祭柳子厚文)〉에 “서투른 목수가 나무를 깎으면 손가
락에 피가 흐르고 얼굴에 땀이 나는데, 교장은 곁에서 구경하며 손
을 옷소매 속에 움츠리고 있다.[不善爲斲, 血指汗顔, 巧匠傍觀, 縮手46 현주집[玄洲集] 상_1

 

 

의 두 자제가 서문으로써 나에게 요청하였는데 아마도 이는 내 관직 때문이지 내 학문 때문은 아닐 것이다. 부처의 머리에 똥칠을 하게 되었으니30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공의 휘(諱)는 찬한(纘韓)이며 자는 선술(善述)로 천품이 매우 뛰어난 데다 문무(文武)의 재략(材略)이 있어서 그 관리로서의 재능을 작은 고을에 약간 시험한 것만으로도 분명하게 장·조·습·황(張·趙·襲·黃)31의 풍도가 있었다. 문장에 발현된 것도 대개 근본이 있었을 것이니, 아, 애석하도다. 신사년 초겨울에 덕수(德水) 이식(李植)32은 삼가 쓰다.


昔, 蘇長公論文, 以孔子辭達一句爲宗旨. 說者謂達者, 達其意也, 詞止於達, 不必宏肆奇麗之爲尙, 是固然矣, 然惟物之不齊, 理之殊也. 意有遠近, 袖間.]”라고 하였다.


30 부처의…되었으니:훌륭한 글의 첫머리에 변변찮은 서문을 써서 그 
글을 욕되게 만들게 되었다는 겸사이다. 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오대사(五代史)》를 지었는데, 어떤 사람이 서문을 지어 앞머리에 붙
이려 하자 왕안석(王安石)이 말하기를 “부처의 머리 위에 어찌 똥을 
바른단 말인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隱居通議 卷18 作文法度》
31 장·조·습·황(張·趙·襲·黃):한(漢)나라 때 지방 관원으로 나가 훌륭
한 정사를 펼쳤던 장창(張敞)·조광한(趙廣漢)·공수(龔遂)·황패(黃霸)
를 각각 병칭한 말이다.
32 이식(李植):1584~1647. 본관은 덕수(德水), 호는 택당(澤堂)이고 
자는 여고(汝固)이다. 대사간, 대사성, 대사헌, 형조 판서, 이조 판서, 
예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문장에 뛰어나 신흠(申欽)·이정귀(李廷
龜)·장유(張維)와 함께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로 꼽혔다. 저서에 《택
당집》 등이 있다.
원문서 序 47

 


辭有險易. 自虞,夏,商,周之文, 尙有渾噩詰屈之不同, 況有屈宋以來, 六義派分, 群軌竝騖. 均之各言其志, 無闕於理, 而輪蹄之餙致遠, 虎豹之斑章采, 斯不亦文之至哉. 國朝敦尙經訓, 文辭爾雅韓蘇之文, 以近爲範, 而秦漢諸家宏麗之體, 猶未備也. 逮隆萬以後, 作者數公, 一大振之, 唯時繼而和之者, 有玄洲趙公, 蔚爲名家. 其學於古無所不蒐, 故其文於古無所不備. 上蹈兩漢, 下籍六朝, 而亦不失孔氏辭達之旨. 旣俯就場屋, 大擅屠龍之譽, 其應製館閣之作, 皆倚馬立成, 而一時諸彦, 莫之先也. 世方期以狎盟文囿, 揭旗鼓先多士, 而沛有餘地矣, 不幸仕不遇時, 浮沈州縣數十年, 其有得有喪, 欣戚不平, 一寓於佔畢. 故其出不窮而語益奇. 惜其天球弘璧, 翳鬱於蓬蒿沙礫之間, 徒使田氓牧豎, 見其光怪而疑駭之, 豈知爲東序之珍, 照乘之寶, 而承奉之哉. 今有克家二郞君, 得保遺稿於兵火之餘, 敍次爲帙, 以圖琬琰之傳. 余每讀而偉之, 就評其略, 騷賦則步驟楚漢, 散文雜著則格法左馬, 偶儷之篇則深得徐庾聲律, 詩大篇廣韻則杜韓馳騁之餘也. 摠之光景高朗, 材幹瓌瑋, 其縱橫奔放, 若不可畔岸, 而融化屈折, 各有體裁, 往往情艶機動, 境與神會, 若笙磬相宣而有遺音. 噫, 公之於斯藝, 可謂富有之矣. 至於橙林時有朽株, 武庫不無刓鋒, 古今大家所不能免. 而後生寲識, 妄生疵摘, 若是者, 公已逌然任之矣. 公之所師友, 盡一世宗匠. 最與深者, 吾東嶽叔父及石洲權公, 而踈庵任君爲其次. 公之文, 兼有數公之長, 而無偏至之目, 可見其大矣. 植也材學晩進, 汨沒訓誥, 中年, 雖獲從公游, 荷一言之提警, 其於古文大家, 常有望洋之歎. 不自意承乏負乘, 血指詞掖, 玆豈非世道之慨也. 今二郞君索以序引, 殆是以官而不以學. 佛頭布糞, 可無怍乎. 公諱纉韓, 字善述, 天稟絶人, 有文武材略, 其吏能之少試於下邑者, 焯然有張趙襲黃之風, 其發於文章者, 蓋有所本, 於乎惜哉. 辛巳初冬, 德水李植, 謹敍. 서 序 49


《현주선생집》 서
玄洲先生集序
옛날에 글을 짓는 문학가 중에는 작자(作者)라고 칭하는 이들이 시대마다 각각 있었다. 하지만 시(詩)와 문(文)은 체제가 달라서 대체로 한쪽만 치우치게 짓는지라 사(詞), 부(賦), 변려(騈儷)를 모두 잘할 수 있는 이는 드무니, 최근에 찾아보건대 또 얼마나 수가 적었는가. 영원히 이어질 업적은 또한 어렵도다.현주(玄洲) 조 선생(趙先生)이 수립한 바를 삼가 살피건대, 옛날 작자의 무리가 모든 문체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선생은 세상에 태어나 타고난 재주가 출중하여 남달리 고고하고 호방했기에 어린 시절부터 훌륭한 명성이 이미 성대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천고의 세월을 헤치며 거슬러 올라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널리 통달하였다. 그리하여 그 정화(精華)를 거두어들여 시문이 풍성하고 화려해졌으며 흥을 퍼뜨려 탁월하고 특출해져서 재주가 넘쳤던 육기(陸機)33처럼 문사가 계속 이어져 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을 다듬어 아름답게 글을 지으면서 난삽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사이사이 넣은 점은 또 검각산(劍閣33 육기(陸機):원문은 ‘陸海’인데, 남조(南朝) 양(梁)나라 종영(鍾嶸)의 《시품(詩品)》에 “육기의 문재는 바다와 같고, 반악(潘岳)의 문재는 강과 같다.[陸才如海, 潘才如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50 현주집[玄洲集] 상_1山)이 가로놓여 있고34 첩첩의 높은 산이 뒤섞여 우뚝한 듯해서 사람들이 궁구할 수 없었다.한 번 조정을 환히 비추어서35 천 명 중에 으뜸이 되어 그 성가(聲價)가 한 시대를 경도되게 하였으니, 조정의 모든 관리들 중에 추중하고 존숭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울리는 벗들 중에 절차탁마하면서 영향을 주고받고 형제처럼 지내면서36 서로 화답한 이는 석주(石洲) 권필(權韠)과 동악(東嶽) 이안눌(李安訥)이었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상공은 또 선생과 가장 친밀하고 돈독하여, 깊은 곳에 은거하며 드물게 밖에 나왔으나 유독 조 선생과는 때때로 왕래하였다.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책 상자를 짊어지고 온 선비들이 선생을 앙모하여 의탁함에 한결같이 다 나아오게 해서 진작하게 하시니, 그 배우는 자리37를 통하여 과거에 좋은 성적으로 급제해서 명망34 검각산(劍閣山)이 가로놓여 있고: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검각산이 험준하게 우뚝 솟아 있으니, 한 사내만 관문을 지키면 만 명의 사내라도 열지 못한다.[劍閣崢嶸而崔嵬, 一夫當關, 萬夫莫開.]”라고 하였다.

 

35 한…비추어서:원문은 ‘一掞天庭’인데, 좌사(左思)의 〈촉도부(蜀都賦
)〉에서 “문재를 펼쳐 조정을 환히 비췄다.[摛藻掞天庭]”라고 한 것에 
근거한 표현이다. 여기에서는 현주(玄洲)가 과거에 급제하여 그 문재
가 조정에 드러났다는 말인 듯하다.
36 형제처럼 지내면서:원문은 ‘壎篪’인데, 이는 질나발과 젓대를 합한 
말로 형제간에 친애하여 화목함을 이른다. 《시경(詩經)》〈소아(小雅
) 하인사(何人斯)〉에 “형은 질나발을 불고, 동생은 젓대를 부네.[伯氏
吹壎, 仲氏吹篪.]”라고 하였다.
37 배우는 자리:원문은 ‘函丈之間’인데, 강학하는 자리나 스승 등을 뜻
한다. 《예기(禮記)》〈곡례(曲禮)〉에 “음식을 대접할 손님이 아니면 자
리를 펼 때 자리 간격을 한 길 정도로 한다.[若非飮食之客, 則布席, 席
間函丈.]”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서 序 51

 

(名望) 있는 사람이 된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재주 없는 나이지만 외람되이 선생의 인도를 받았는데, 그 문하에 달려갈 때마다 늘 선생의 책 읽는 소리를 들었다. 당시 선생은 이미 나이 많은 스승으로서 세상의 존중을 받는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학업에 부지런하였으니, 한유(韓愈)가 “공부가 깊은 자는 그 명성이 오래도록 전해진다.”라고 한 말38이 어찌 믿을 만하지 않겠는가.선생이 중원에서 채찍을 잡고 활집을 잡았다면39 탁월한 재주를 지닌 문인이라도 반드시 한 걸음 양보하지 않았다고는 못할 것이다.40그러나 조정의 높은 자리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여, 날면서 날개를 다 펼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금마문(金馬門)과 백호관(白虎觀)41에

 

38 한유(韓愈)가…말:한유의 〈답유정부서(答劉正夫書)〉에 나오는 말이
다.
39 중원에서…잡았다면:춘추시대 진(晉)나라 중이(重耳)의 고사이다. 
망명 중이던 중이가 초(楚)나라에 이르렀을 때, 훗날 자신의 도움으
로 진에 돌아가면 어떻게 보답하겠냐는 초자(楚子)의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진나라와 초나라가 군대를 거느리고 중원에서 만났
을 때 군주를 위해 삼사를 물러나겠습니다. 그래도 전쟁을 중지하자
는 군주의 명을 들을 수 없으면, 왼손에는 채찍과 활을 잡고 오른쪽
에는 활집과 전동을 차고서 군주와 겨루어 보겠습니다.[晉楚治兵, 遇
於中原, 其辟君三舍. 若不獲命, 其左執鞭弭, 右屬櫜鞬, 以與君周旋.]” 
《春秋左氏傳 魯僖公23年》 여기에서는 현주가 중국의 뛰어난 문장가
들과 재주를 겨루어 본다는 뜻이다.
40 한…것이다: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의 〈여매성유(與梅聖兪)〉에 
“소식(蘇軾)의 글을 가져다 읽다가 나도 모르게 땀이 났다. 장쾌하고 
장쾌하도다! 이 늙은이는 마땅히 길을 피해서 그에게 한 걸음 앞서 
나가게 해야겠다.[取讀軾書, 不覺汗出, 快哉快哉! 老夫當避路, 放他出
一頭地也.]”라고 하였다.
41 금마문(金馬門)과 백호관(白虎觀):금마문은 한나라 때 궁문 이름으
로, 학사들이 조서를 기다리던 곳이다. 문 옆에 동(銅)으로 만든 말이 
있어서 금마문이라 불렀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백호관은 후한(
後漢) 장제(章帝) 때 박사(博士)와 의랑(議郞) 등이 모여서 경사(經史)52 현주집[玄洲集] 상_1


서 문채가 나게 글을 다듬는 재주42를 펼치지 못하였고 지방관으로 나가거나 변방을 지키며43 가장 훌륭한 다스림의 공적을 드러냈을 뿐이니, 천리마의 다리는 끝내 묶이고 쇠귀를 잡지 못한 것44과 같았다. 아, 어찌 명이 아니겠는가. 어찌 명이 아니겠는가.선생에게는 유집(遺集)이 있으니, 시가 두 권, 변려문이 한 권, 부와 문도 한 권씩이다. 시율(詩律)이 조화를 이루어서 높이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유풍(遺風)을 따랐고, 옥과 금을 나란히 늘어놓은 듯하여 노조린(盧照鄰)과 낙빈왕(駱賓王)의 방에 충분히 들어갔다.45 상세를 토론하던 곳이다. 《後漢書 卷3 章帝紀》

 

42 문채가…재주:원문은 ‘潤色之才’인데, 글을 꾸며서 문채가 나게 하
는 재주를 말한다. 《논어(論語)》〈헌문(憲問)〉에 “공자가 말하길 ‘정나
라에서 외교문서를 만들 때는 비침이 초안을 작성하고 세숙이 검토
하여 따지며 행인인 자우가 수식하고 동리의 자산이 윤색하였다.’라
고 하였다.[子曰, 爲命, 裨諶草創之, 世叔討論之, 行人子羽修飾之, 東
里子産潤色之.]”라고 하였다.
43 지방관으로…지키며:원문은 ‘銅魚玉麟’이다. 동어는 동어부(銅魚符
)의 준말로, 지방관이 차는 물고기 모양의 구리 부신(符信)이다. 옥
린은 옥린부(玉麟符)의 준말로, 기린 형상을 새긴 옥 부신이다. 수 양
제(隋煬帝)가 번자개(樊子蓋)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서 그에게 옥린부
를 만들어 주며 동수(銅獸) 대신 차게 하여 특별한 우대를 표시했다. 
《隋書 卷63 樊子蓋傳》 동수는 변방을 지키는 장수의 부신이다. 여기
에서는 현주가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삼도 토포사(三道討捕使)
가 되었던 일을 가리킨다.
44 쇠귀를…것:옛날에 제후들이 회맹(會盟)할 때는 쇠귀를 잘라 구슬
쟁반에 담고 그 피로 삽혈(歃血)하였는데, 회맹의 맹주(盟主)가 쇠귀
가 담긴 쟁반을 잡고 삽혈 의식을 주도하였다. 쇠귀를 잡는다는 것
은 여기에서 온 말로, 어떤 영역에서 영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뜻
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애공(哀公) 17년에 “제후의 회맹에
서 누가 쇠귀를 잡는가.[諸侯盟, 誰執牛耳?]”라고 하였다.
45 노조린(盧照鄰)과…들어갔다:방에 들어갔다[入室]는 것은 학문이나 
기예가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자로(子路)를 서 序 53

 

히 서술한 글46은 양웅(揚雄)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궤적을 따랐고, 말을 모아 엮은 글47은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에 뿌리를 두었다. 이에 기이하면서도 운치가 있었고 험벽하면서도 속이지 않아서 옛 사람이 겸할 수 없었던 것을 선생은 겸하여 지녔으니, 또한 훌륭하지 않은가.또 서법(書法) 배우기48를 좋아하여 해서(楷書)와 초서(草書)가 경쾌하고 날렵해서 우군(右軍) 왕희지(王羲之)의 서법을 깊이 터득하였다. 무예 또한 적을 두려움에 떨며 복종하게 할 수 있었으나, 헝클어진 실마냥 어지럽던 발해(渤海)를 다스린 공수(龔遂)처럼 지방을 다스리며 조금 시험해 보았을 뿐이다.49 어찌 하늘은 재능을 내림에는 이렇듯 온전하였으면서 그것을 펼치게 하는 데는 인색하게 구는 듯하였는가. 아, 고관(高官)을 여럿 배출한 집안 출신으로50 큰 길에서 말을 달리듯 공명과 부귀를 누린 자가 칭찬하며 “유는 당에 올랐으나 실에는 아직 들어가지 못하였다.[由也升堂矣, 未入於室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 여기에서는 현주의 변려문 솜씨가 노조린이나 낙빈왕(駱賓王)의 수준까지 올랐음을 말한다.

 

46 상세히 서술한 글:부(賦)를 말한다.
47 말을…글:문(文)을 말한다.
48 서법(書法) 배우기:원문은 ‘臨池’이다. 동한(東漢) 때 초성(草聖)이라 
불렸던 장지(張芝)는 집안의 모든 의백(衣帛)에 글씨를 쓰고 난 뒤 누
이게 하였는데, 연못가에서 글씨 연습을 해서 못물이 모두 검어졌다
고 한다. 《晉書 卷 36 衛恒傳》
49 헝클어진…뿐이다:한 선제(漢宣帝)가 공수(龔遂)에게 발해의 혼란
을 잠재울 방법을 묻자, 공수가 “저는 난민을 다스리는 것은 헝클어
진 새끼줄을 푸는 것과 같아서 서두를 수 없다고 들었으니, 오직 천
천히 한 뒤에야 다스릴 수 있습니다.[臣聞治亂民猶治亂繩, 不可急也, 
唯緩之, 然後可治.]”라고 답하였다. 《漢書 卷89 循吏傳 龔遂》
50 고관(高官)을…출신으로:원문은 ‘重金疊紫’이다. 이는 ‘重金兼紫’와 54 현주집[玄洲集] 상_1

 

얼마나 많았겠냐만, 그들은 자취도 없이 거의 다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선생만은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이나 명성은 더욱 드러나고 있으니, 아마도 조물주가 선생에게 누리게 해 준 것은 저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는 듯하다.선생의 큰아들인 용궁 현감(龍宮縣監) 조휴(趙休) 공이 선생의 문집을 간행하려 하면서 나에게 머리글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불행히도 그가 갑자기 죽어 버렸다. 이에 선생의 막내아들인 학사 조비(趙備)가 지방관 자리를 청하여 임실 현감(任實縣監)이 되어서 비로소 글을 새길 수 있었다. 그가 천릿길에 편지를 보내온 것이 두세 번이었는데 서문을 구하는 뜻이 매우 간절하였으니, 내가 이에 어찌 슬퍼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선생과 지난날 교유하던 벗들은 다들 벌써 구천(九泉)에 있으니, 훌륭한 이에게 서문(序文)을 부탁하는 일51은 아아, 끝이 났도다. 진홍색 휘장52 아래 양웅(揚雄)의 후파(侯芭)53와 같은 이가 없같은 말인데, 한 가문에 황금 인장과 자색 인끈을 찬 사람이 여럿이라는 뜻으로 영화롭고 현달함을 뜻한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 열후(列侯) 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황금 인장과 자색 인끈을 찼다.

 

51 훌륭한…일:원문은 ‘玄晏之托’이다. 현안은 진(晉)나라의 현안 선생
(玄晏先生) 황보밀(皇甫謐)을 말한다. 좌사(左思)는 10년에 걸쳐 삼도
부(三都賦)를 완성했으나 당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았는데, 현안 선
생이 그를 위해 서문을 써 주자 세상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
다. 《晉書 卷92 文苑列傳 左思》
52 진홍색 휘장:후한(後漢)의 마융(馬融)이 호사스러움을 좋아하여 언
제나 높은 당상에 앉아 진홍색 비단 휘장을 치고 생도들을 가르쳤다
고 한다. 후에 진홍색 휘장[絳帳]은 사문(師門)이나 강석(講席)의 경
칭(敬稱)으로 쓰였다. 《後漢書 卷90上 馬融列傳》
53 양웅(揚雄)의 후파(侯芭):원문은 ‘子雲之侯芭’인데, 자운은 한나라 
양웅의 자이고 후파는 양웅의 제자이다. 양웅은 가난하고 술을 좋아서 序 55

 

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 남은 자로는 그저 부제학 신천익(愼天翊)54과 나 같이 쓸모없는55 자가 있을 뿐이다. 문단에 쓸 사람이 없기에 대신 맡아서56 외람되이 이 일을 담당하였다. 아, 내가 어찌 감히 하겠는가. 또 어찌 감히 하지 않겠는가.더구나 나에게는 감회가 있다. 선생은 일찍이 관직을 떠나 교하(交河)에 한가로이 살면서 호숫가에 작은 정자를 짓고는 내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하고 그것으로 만년의 기약을 삼았으니, 누추한 나의 집 또한 선생의 집과 서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호숫가의 작은 정자는 전과 같은데 세대는 이미 변하였으니, 지난 자취를 더듬으며 책을 마주하여 거하여 찾아오는 이가 드물었는데, 거록(巨鹿) 사람 후파만이 항상 그를 따르다가 《태현경(太玄經)》과 《법언(法言)》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그는 또 양웅이 죽은 뒤에 분묘를 세우고 삼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前漢書 卷87 揚雄列傳》

 

54 신천익(愼天翊):1592~1661. 자는 백거(伯擧), 호는 소은(素隱)이다. 아버지는 진사 신인(愼諲)이며, 어머니는 이용(李溶)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4)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 등을 거쳤으나 광해군의 실정에 사직하고 전남 영암에 은거했다. 문장과 시부(詩賦)에 능하여 송시열(宋時烈)도 찬탄하였으며, 아우 신해익(愼海翊)과 함께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저서로 《소은유고(素隱遺稿)》가 있다.
55 쓸모없는:원문은 ‘樗散’인데, 저력산목(樗櫟散木)의 줄임말이다. 쓸모가 없어서 베이지 않고 천수(天壽)를 누린 가죽나무와 상수리나무라는 말인데, 쓸모없고 재능이 없는 사람을 비유한다. 《莊子 逍遙遊, 人間世》
56 쓸…맡아서:《춘추좌씨전》 성공(成公) 9년에 일시(逸詩)를 인용하며 “비단실이나 삼실이 있더라도 골풀이나 띠풀을 버리지 말라. 지체 높은 여인이 있더라도 미천한 여인을 버리지 말라. 모든 군자는 인재가 부족하면 대신 쓰이지 않는 일이 없나니.[雖有絲麻, 無棄菅蒯. 雖有姬姜, 無棄蕉萃. 凡百君子, 莫不代匱.]”라고 하였다.

 

듭 더 통곡한다.
세사 을미년(1655년, 효종6) 가을 7월 초사흘.57
문하 원임 영의정 이경석(李景奭)58이 삼가 서문을 쓰다.

 

57 초사흘:원문은 ‘哉生明’이다. 《서경(書經)》〈주서(周書) 무성(武成)〉의 주에 “재는 비로소이다. 비로소 밝음이 생기니, 그 달의 초사흘이다.[哉, 始也. 始生明, 月三日也.]”라고 하였다.
58 이경석(李景奭):1595~1671. 호는 백헌(白軒), 자는 상보(尙輔). 할아버지는 이수광(李秀光)이고, 아버지는 이유간(李惟侃)이며, 어머니는 고한량(高漢良)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병자호란 때 어명으로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었는데, 이 때문에 훗날 심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저서로 《백헌집(白軒集)》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

56 현주집[玄洲集] 상_1    원문현주집[玄洲集] 57


古昔操觚之家, 以作者稱之者代各有之. 而詩文異體, 類多偏造, 詞賦駢儷, 鮮克全美, 求諸輓近, 又何寥寥. 不杇之業, 其亦難矣. 竊觀玄洲趙先生之所樹立, 可謂古作者之徒而全其美矣, 先生生而秀發, 遠邁不群, 自髫年華問已大. 稍長披遡千古, 博綜百氏. 擷英瞻縟, 播興超峻, 纚纚不竭如陸海之充羡. 琱言瑋撰, 間以詰屈, 亦猶劍閣橫絶, 重巖錯峙, 人莫得以窮也. 一掞天庭而冠千人, 聲價傾一代, 薦紳諸公, 莫不推挹. 儕友中切磨浸灌, 壎箎迭和者, 石洲,東嶽. 而淸陰相公, 又最親厚, 深居簡出, 而獨時時與先生還往. 遠近負笈之士嚮風投歸, 一皆進之而作興之, 由函丈之間而闡巍科爲聞人者非一二. 雖以景奭之不才, 辱先生之提掖, 每趨門墻, 輒聞先生讀書聲. 時先生已以老師爲世所重, 而其勤於業如此, 韓愈氏之言曰, 用功深者, 其收名也遠, 詎不信歟. 如使鞭橐中原, 宗工哲匠, 未必不交讓一頭. 而靑冥蹭蹬, 蜚不盡翰. 金馬白虎未展潤色之才, 銅魚玉麟徒著治行之最, 驥足終馽, 牛耳莫執. 嗟乎, 豈非命也, 豈非命也. 有遺集, 詩二卷,駢語一卷,賦與文亦各一卷.  諧宮叶商, 高追李杜之風, 駢球儷金, 優入盧駱之室. 敷陳則軌乎楊揚馬, 纂言則根於韓柳. 奇而有致, 險而不詭, 古人之所不能兼者, 先生兼有之, 不亦偉乎. 且喜臨池眞草, 翩翩深得右軍之法. 武亦可以威敵, 而薄試於渤海之治繩. 何天之賦材也若是其全矣, 而其施之也如有慳焉乎. 噫, 向者重金疊紫, 躍馬高衢者何限, 而磨滅殆盡. 惟先生沒已久而名益彰, 豈造物者之餉先生, 不在彼而在此也. 先生長胤龍宮使君公, 將梓文集, 屬余引之, 而不幸使君奄圽. 季胤學士乞縣爲任實宰, 始得剞劂之. 千里書來者再三, 徵序甚勤, 余於此, 烏得不悲且嘅也. 先生舊游, 皆已九京, 玄晏之托, 吁其已矣. 絳帳之下, 非無子雲之侯芭, 而今存者, 只有愼副學天翊, 如余樗散. 代匱詞林, 猥當此事. 噫, 余何敢爲. 又何敢不爲. 且余有所感矣. 先生嘗閒住交河, 築小亭於湖上, 命余記之, 以爲晩歲之期, 蓋陋舍亦相望也. 湖小依舊, 人代已變, 撫迹對卷, 重爲之增慟也. 歲舍乙未秋七月哉生明, 門下原任領議政李景奭, 謹序.

 

●오언고시 五言古詩
■쉬파리를 미워하다(憎蒼蠅)


가장 미워하는 것은 쉬파리니 莫憎者蒼蠅
때를 만나 제멋대로 설치는구나 乘時恣橫行
날마다 늘어나고 또 날마다 불어나니 日蕃日又息
수많은 무리들이 이루어졌네 百千徒黨成
봄을 맞아 비로소 붕붕거리며 날더니 方春始薨薨
가을 뒤에도 여전히 앵앵거리며 날고 있네 秋後猶營營
밤에는 대들보나 벽에 모였다가 夜以集樑壁
촛불을 가까이 대면 갑자기 소리 내며 날아가네 近燭乍飛鳴
혹은 밝은 달빛 별빛 따라 或因月星白
어지러운 무리 창문가로 뛰어들고 亂陣投窓楹
아침 햇살이 창으로 비쳐들자마자 朝光纔入牖
힘껏 날아올라 소리가 시끄럽네 決起聲闃轟
모이고 흩어지며 번갈아 속이고 능멸하니 散聚互欺陵
나를 귀머거리나 장님처럼 본 것일세 視我如聾盲
혹은 코끝의 땀을 삼키려고 或嚼鼻端汗
투닥투닥 어지러이 다투고 撲撲相紛爭62 현주집[玄洲集] 제1권 
혹은 어깨와 목 사이를 빨려고 或吮肩項間
어지럽게 침범해 과감히 나를 업신여기네 攘攘敢侮輕
혹은 자고 난 뒤의 눈곱 찾느라 或探睡餘瀝
속눈썹 깨물고 눈동자 뒤지며 嘬睫窮其睛
혹은 귓속의 귀지를 먹으려 或噍耳中聹
들락날락 앵앵 소리를 내지 出入聲甖甖
달게 잘 때야 수모를 당해도 내버려 두지만 酣眠任受侮
팔을 휘두르며 자주 법석을 떨었고 奮臂頻搖傾
부채질에 지쳐 억울하게 침묵하기도 하지만 冤嘿倦塵扇
때로 버럭 소리 지르며 성내기도 한다네 恚呼時一聲
일어나 서서 옷이나 자리 쥐고서 起立攬衣席
신속하게 대문 밖으로 몰아내는데 揮霍驅閈閎
잠깐 쫓겨났다가 곧 일제히 몰려오니 乍出卽齊入
처음에 가득 찼던 무리 또다시 그득하네 始滿還復盈
또한 사사명의 적군이 還如賊史軍
수양성을 유린한 듯하네1 蹂躪睢陽城
품 안으로 뛰어들어 교묘히 속옷2
을 뚫고 投懷巧穿禈
엉덩이와 등 사이로 제멋대로 돌아다니네 臀脊恣遶縈
때로는 숨 쉬는 사이에 時於呼吸間
1 사사명(史思明)의…듯하네: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진원 현령(眞源縣令) 장순(張巡)과 수양 태수(睢陽太守) 허원(許遠)이 수양성(睢陽城)에서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반란병을 맞아 잘 싸웠으나, 성이 포위된 지 몇 달이 지나도록 구원병이 오지 않고 양식도 떨어져 장렬하게 함께 순국한 일을 가리킨다.
2 속옷:원문에 ‘휘(禈)’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곤(褌)’의 오기로 보인다.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오언고시 五言古詩 63
목구멍에 걸려 침에 섞여 나오기도 하지 罥喉隨唾呈
누린내 좋아하여 회와 구운 고기 있는 데 두루 가보고 慕羶遍膾炙
냄새를 쫓아 요리한 음식을 더럽히네 逐臭汚割烹
떼를 이끌고 소반과 사발에 진을 치고 携朋列盤盂
무리를 끌고 와 술잔과 술 단지 엿보네 挈儔窺杯甖
흰 구더기 낳아 몇 번이나 젓갈 위를 덮었던고 産白幾覆醢
검은 점을 찍으러 자주 흰 옥에 다가가네 點黑頻薄瓊
그 가운데 푸른 두건을 쓴 놈3 其中綠幘者
입과 눈이 가장 날카롭고 흉악하지 口眼最利獰
측간을 밟던 다리로 날아서 翻將踏廁股
빙빙 돌다가 밥과 국에 내려앉네 回回坐飯羹
어린애 곤하게 낮잠을 잘 때 嬰兒困晝睡
코가 가려워 깨어 울고 마네 鼻痒驚啼喤
미인은 새벽 화장 그만두니 美人罷曉粧
경대를 내던지고 낮은 등잔 등진다네 投奩背短檠
시녀는 부채를 휘두르는 일에 지쳐 侍婢倦揮箑
적삼 소매로 찻잔을 가리네 衫袖掩茶觥
더운 기운 올라오는 낮고 습한 땅을 좋아하고 熏蒸喜卑濕
밥을 찔 때면 솥을 쫓아가지 饙餾逐鼎鐺
활동과 휴식은 밤낮의 시간을 따르고 動息隨夜晝
성함과 쇠함은 흐린 날 갠 날과 상관 없네 盛衰無陰晴
3 푸른…놈:푸른 두건은 총애 받는 신하의 복식이다. 《문선(文選)》에 실려 있는 심약(沈約)의 〈삼월삼일솔이성편(三月三日率爾成篇)〉의 주석에 “푸른 두건은 총애받는 신하의 관이다.[綠幘, 寵臣之冠.]”라는 말이 보인다.64 현주집[玄洲集] 제1권 
아 너희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으니4 嗟爾麗不億
나의 마음이 어찌 평안할 수 있으리 我懷焉能平
참으로 몰아낼 방법이 없어 驅除諒無術
다만 희화가 수레를 재촉해 가기를5
 원하노라 但願羲催征
어찌하면 유생들을 파내고 焉得掘儒生
너희들을 함양의 구덩이에 묻을까6 塡爾咸陽坑
작은 무리들 매우 시끄러우니 多口劇群小
어찌 시인의 평을 벗어나리오 寧免風人評
일찍이 가시울타리에 앉았던 모습을 풍자했거니와7 曾刺止棘態
4 숫자는…없으니:원문의 ‘려불억(麗不億)’은 숫자가 매우 많다는 뜻이다. 《시경》 〈문왕(文王)〉에는 “상나라의 자손들이 그 수가 억뿐만이 아니었다.[商之孫子, 其麗不億.]”라고 하였다. 
5 희화(羲和)가…가기를:희화(羲和)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신으로, 태양을 실은 마차를 몰고 다닌다. 희화가 여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날마다 우연(虞淵)까지 왔다가 여섯 마리 용을 되돌린다고 한다. 《山堂肆考 卷2 扶桑》 따라서 세월이 빨리 흘러가는 것을 말한다.
6 어찌하면…묻을까:《사기(史記)》 6권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의하면, 진(秦) 승상 이사(李斯)는 ‘유생들이 옛것을 들어 현재를 비난하고, 사적인 학문을 가지고 조정의 정사를 비방하는 습관을 금지시켜야 한다.’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진 시황은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기(秦記)·의약(醫藥)·복서(卜筮)·종수(種樹) 등의 서적을 제외하고 민간에 소장되어 있는 모든 서적을 불태우라고 명하였다. 그다음 해에 방사(方士)와 유생(儒生)이 선약(仙藥)을 구하지 못하자, 노생(盧生) 등이 도망갔는데, 진 시황이 노하여 함양에 있는 유생 460여 인을 구덩이에 밀어 넣어 생매장하였다. 진 시황의 이 일[焚書坑儒]을 전거로 하여 파리에 대한 미움을 표현한 것이다.
7 일찍이…풍자했거니와:《시경》 〈소아(小雅) 청승(靑蠅)〉에 “앵앵거리는 쉬파리 가시나무에 앉았도다. 참소하는 이 끊임없이 참언하여 사방의 나라를 교란하도다.[營營靑蠅, 止于棘, 讒人罔極, 交亂四國.]”라고 하였다. 이 시는 주나라 대부가 유왕(幽王)을 풍자한 시로, 어진 사람이 소인의 비방과 무함을 받는다는 내용이다.오언고시 五言古詩 65
몇 번이나 제녀를 놀라게 했던가8 幾敎齊女驚
구양수는 부를 지어 배척하였고9 歐子賦以斥
한유는 시로써 밝혔다네10 韓公詩以明
비록 만물에 대해 비난할 것은 없으나 雖云物無間
쉬파리를 미워하지 않는 것은 인정이 아니라네 不憎非人情
하늘은 도리어 무엇 때문에 上天顧何意
이들을 길러서 모기 등에와 무리 짓게 하는가 育此黨蚊蝱
나고 나서 멈추지 않으니 生生且不已
만고토록 근심할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네 萬古愁黎愍
누가 천하를 크다고 하는가 誰言四海大
8 몇 번이나…했던가:《시경》 〈제풍(齊風) 계명(雞鳴)〉에 “닭이 이미 운지라 조정에 신하가 가득합니다 하니, 닭이 우는 것이 아니라 창승의 소리로다.[雞旣鳴矣, 朝旣盈矣. 匪雞則鳴, 蒼蠅之聲.]”라고 하였다. 이는 제나라의 어진 왕비가 밤에 임금을 모시다가 날이 샐 무렵이면, 임금을 깨워 정사에 최선을 다하라고 경계하는 노래이다. 
9 구양수는…배척하였고: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쉬파리를 소인에 비겨 미워한다는 뜻을 담아 〈증창승부(憎蒼蠅賦)〉를 지었다. 그는 이 글에 “파리야, 파리야, 나는 너의 살아감을 슬퍼하노라.…네 형체는 지극히 작고 네 욕심은 채우기 쉬우니, 술잔에 남은 찌꺼기나 도마 위에 남은 비린 것 정도로 바라는 바가 아주 적고, 이보다 지나치면 감당하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괴로이 무엇을 구하기에 부족해서 종일토록 윙윙거리며 다니느냐. 냄새를 쫓고 향기를 찾아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어 잠깐 사이에 모여들곤 하니, 누가 서로 일러준단 말이냐.[蒼蠅蒼蠅, 吾嗟爾之爲生.…形至眇, 爾欲易盈, 盃盂殘瀝, 砧几餘腥, 所希秒忽, 過則難勝. 苦何求而不足, 乃終日而營營, 逐氣尋香, 無處不到, 頃刻而集, 誰相告報.]”라고 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10 한유는 시로써 밝혔다네:한유(韓愈)의 시에 “아침에는 파리를 쫓아도 소용이 없고, 저녁에는 모기를 몰아낼 수도 없네. 파리와 모기가 세상에 가득하니, 어떻게 모조리 때려잡을 수 있겠는가.[朝蠅不須驅, 暮蚊不可拍. 蠅蚊滿八區, 可盡與相格.]”라고 하였다. 《韓昌黎集 卷7 雜詩》66 현주집[玄洲集] 제1권 
누가 천지를 광대하다 하는가 誰言天地宏
이 벌레를 피할 길이 없으니 無由避此蟲
천하가 좁다고 길게 탄식하네 長吁隘八紘
비록 그렇긴 하나 어찌 오래 버틸 수 있으랴 雖然詎能久
사물의 이치에는 성함과 쇠함이 있는 법 物理有悴榮
인간 세상 구월 시월엔 人間九十月
눈과 서리가 종횡으로 교차하며 날리네 雪霜交飛橫
한강에선 얼음이 다리를 만들고 江漢氷成梁
번화한 시가엔 매서운 한기 맑다네 九衢凝寒淸
이 무리는 어디에서 죽었을까 此輩何處死
추운 참새는 굶주려 울어대네 凍雀飢嚶嚶
방안이 쓸어버린 듯 깨끗하니 一室淨如掃
바둑판 같은 모습 딱 좋아라 政好圍棋枰
거미줄에 걸린 것들 때때로 보는데 時見掛蛛網
말라 죽은 것들이 서가에 떨어지기도 하네 枯死落書棚
왕왕 햇볕 드는 벽 틈에 往往陽壁罅
조용히 모여 있어 어리석은 삶을 불쌍히 여기네 靜集憐癡生
흡사 원개11의 조정에서 恰如元凱朝
사흉12이 벼슬자리 피하는 것과 같구나 四凶避簪纓
11 원개(元凱):요(堯) 임금 때 고양씨(高陽氏) 아들 여덟이 다 어질고 재능이 있어 그들을 팔개(八凱)라고 하고, 고신씨(高辛氏)에게도 그러한 아들 여덟이 있었는데 그들은 팔원(八元)이라 했다는 데서 온 말로, 어질고 유능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春秋左氏傳 文公18年》
12 사흉(四凶):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 때의 네 악인(惡人)인 공공(共工), 환도(驩兜), 삼묘(三苗), 곤(鯀)이다. 《서경》 〈순전(舜典)〉에 “공공을 유주(幽洲)에 유배하고 환도를 숭산(崇山)에 유치(留置)하고 삼묘를 삼위(三危)로 몰아내고 곤을 우산(羽山)에 가두어 네 사람을 죄오언고시 五言古詩 67
이로부터 알겠네 더위와 추위가 옮겨감에 從知寒暑推
성쇠라는 일정한 길이 있음을 否泰有常程
내 오두막을 깨끗이 하는 것만 못하며 不如淸吾廬
내 집 용마루를 높이는 것만 못하겠군13 不如崇吾甍
몸을 눕혀 대자리에 누워서 倒身臥竹簟
고시를 때로 읽다보면 古詩時目耕
파리가 날개 늘어뜨리고 피하는 걸 보게 되니 方看側翅避
어찌 또다시 심사를 어지럽히랴 肯復擾心兵
모기는 비록 지극히 미미하지만 蚊蟲雖至微
또한 초명을 용납할 수 있다네14 亦能容鷦鵬
미워하지도 않고 또 사랑하지도 않으면 不憎亦不愛
나의 거처는 편안하고 평온하리 吾居安且寧
무엇 때문에 애정과 증오로써 胡爲以愛憎
도량이 작다는 걸 보이리오 器量示硜硜
창승편을 지어서 爲作蒼蠅篇
걱정으로 애타는 이 마음을 위로한다네 慰此憂惸惸
주니, 천하가 다 복종하였다.”라고 하였다.
13 용마루를…못하겠군:파리는 낮고 습한 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14 모기는…있다네:원문의 ‘붕(鵬)’은 ‘명(螟)’의 오자이다. 《안자춘추(晏子春秋)》 〈외편(外篇)〉에 “초명(鷦螟)이라는 아주 작은 벌레가 모기의 속눈썹에 둥지를 틀고 사는데, 날아서 들락거려도 모기는 놀라지 않는다.[東海有虫, 巢於蚊睫, 再飛而蚊不爲惊.]”라는 내용이 있다.68 현주집[玄洲集] 제1권 

통곡하고 싶구나 2수
欲哭 二首
통곡하고 싶으나 통곡할 수 없고 欲哭不可哭
말하고 싶으나 어찌 차마 말하랴 欲說那忍說
태어나 임진년을 만나니 生逢壬辰年
우리 가족 이로부터 결별하였네 我家從此訣
동쪽의 봉화에 밤은 대낮 같았고 東烽夜如晝
조정에선 병사 점고를 재촉하였지 廊廟催點閱
성읍들에선 적의 기세 보고 다투어 달아나니 列城競望風
뭇 개미들이 개미구멍으로 다투어 내달리는 듯 群蟻爭奔穴
강한 예봉에 뛰어들 사람이 없고 强鋒入無人
급한 형세는 불길이 맹렬한 듯 急勢炎火烈
임금과 신하 도읍을 버리니 君臣棄都邑
눈에 눈물이 맺혀 가는 수레 헤매네 淚眼迷歸轍
어머니는 아들 손을 잡고서 慈母執子手
대청에서 내려와 나직이 오열하셨네 下堂泣啜啜
형 세 분과 누이 한 사람 三兄與一妹
나와 함께 모두 목이 메었지 及我皆哽咽
부축하고 이끌어 산성으로 내달리니 扶携走城山
머리를 감싸 안고 달릴 때 마음에선 열이 나는 듯 捧頭肝肺熱
승냥이와 호랑이 무리 방자하게 날뛰니15 豺虎恣縱橫
15 승냥이와…날뛰니:임진왜란 때 침범한 왜적들이 백성들에게 만행을 저지른 일을 비유한다. 오언고시 五言古詩 69
지척에서 제멋대로 깨무는 걸 겨우 면하였네 咫尺免橫囓
해 저물녘 교하16로 향하니 日暮向交河
밤새도록 절뚝거리며 걸었다네 竟夜行蹩躠
흉포한 폭풍은 이미 뒤에서 요란하니 兇飆已攪後
열 걸음에 여덟아홉 걸음 넘어졌네 十步八九跌
여명에 관가 배에 올라탄 뒤 平明上官舟
다투어 건너느라 힘이 다 빠졌고 競渡力所竭
정오에 질풍을 만나니 亭午觸盲風
생사가 짧은 시간에 결판났네 生死須臾決
고생 끝에 큰 둑에 정박하니 艱難泊豐岸
야외의 비가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에게 들이치네 外雨中飢渴
비록 그러하나 등에 어머니를 업고 있으니 雖然背負母
마음엔 잡념이 없고 얼굴엔 기쁨이 넘치네 心死顔融悅
마을에 투숙할 때 이미 캄캄해졌는데 投村已昏黑
쌀가루를 넣지 않은지라 국 마시기 어려웠네17 不糝羹難歠
비틀거리며 송도에 도착할 때는 蹣跚達松都
온 집안사람들 서로 끌고서 갔지 盡室相提挈
아사18가 우리 어머니를 맞으니 亞使迎我母
집안 항렬로는 재종질이라네 族行再從姪
두터운 정으로 소금과 쌀을 보내고 殷勤饋鹽米
16 교하(交河):경기도 파주 지역의 옛 지명이다.
17 쌀가루를…어려웠네:매우 조악한 음식을 먹는 상황을 의미한다. 공자가 진·채(陳蔡)의 사이에서 포위를 당하였을 때에 양식이 떨어져서 7일 동안 화식(火食)을 하지 못하고 콩잎 국[藜羹]에 쌀가루를 타지 못하였다.
18 아사(亞使):개성부에서 관찰사를 보좌하던 도사(都事)를 말한다. 도사의 품계는 종5품이다.70 현주집[玄洲集] 제1권 
정성스러운 뜻으로 술상을 차려주었네 款意杯盤設
우토는 천연의 험한 땅을 차지했으니 牛▩擅天險
지나는 곳마다 모두 험준하다네 所歷悉嵽嵲
소나기에 말이 산길에 쓰러졌으니 急雨馬倒嶺
산비탈의 험준함은 구절판19보다 심하네 峻坂劇九折
어머니는 내 등에서 우시고 母在我背泣
형과 누이는 번갈아 엎어졌네 僵仆兄妹迭
등반하여 겨우 꼭대기에 올랐는데 攀躋僅上上
갑자기 오던 이가 비웃는구나 忽遇來者咥
어째서 여기를 넘으려 하는가 云胡踰此爲
이곳은 실로 적의 요해처라 말하네 此實賊喉舌
뒤로 가고자 해도 뒤는 너무 험하고 欲後後已阻
앞으로 가고자 해도 앞은 너무 깎아지른 듯 欲前前已截
통곡하며 다시 산길을 내려가니 痛哭還下嶺
벗은 몸엔 한기가 써늘하네 赤體寒凜冽
외딴 가게에 늙은 부부 있어 孤店有翁嫗
우리 형편 고단함을 가엾게 여겼네 憐我勢單孑
닭을 잡아 허기진 우리를 위로하고 殺鷄慰苦飢
축축한 옷을 말려주려 섶을 연이어 태우네 燎濕柴仍爇
여름 가을 잇달아 삼베옷을 입으니 夏秋連與麻
오갈 적에 상심하며 걱정하였지 去來憂惙惙
19 구절판(九折阪):촉(蜀) 땅에 있는 공래산(邛郲山) 구절판(九折坂)으로, 길이 이리저리 구부러져 험난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한(漢)나라의 왕양(王陽)이 일찍이 익주 자사(益州刺史)가 되어 순행 중에 구절판에 이르러 “부모가 남겨준 몸을 받들고서 어찌 이렇게 험난한 곳을 자주 다니겠는가.[奉先人遺體, 奈何數乘此險.]”라고 탄식한 후에 병을 이유로 돌아섰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76 王尊傳》오언고시 五言古詩 71
짝 잃은 암컷 새처럼 활시위 소리에 놀라고20 驚弦似羈雌
속박 당함은 포승줄에 묶인 것보다 심하네 局束甚縲絏
산과일을 밤에 주워오고 山果夜拾取
들풀은 아침에 캐어 왔네 野草朝采擷
굶주린 창자 채워도 만족을 모르니 飢腸充不饜
탐욕스러운 마음은 도철21을 본받은 듯 貪饞效饕餮
차마 어머니의 굶주림을 보지 못하여 不忍視母餒
마을을 찾아가 문 앞에 섰다네 尋村立門闑
사람을 보고 양식을 구걸하려 하니 見人欲化糧
얼굴은 붉어지고 입은 재갈을 채운 듯 더듬네 面紅口箝吶
팔월 아오탄에선 八月阿吾灘
허겁지겁 서두르다 고생길에 지쳤다네 蒼黃困据拮
형은 이때 역병을 앓아 말랐는데 兄時病痁瘦
땅에 누워 구토하고 설사하네 偃地嘔且泄
적의 칼날이 이미 뒤따라 왔으니 賊刃已跟隨
부모 형제 죽어서 이별하게 될 듯하네 骨肉應死別
나는 어머니를 업고 십 리를 달아났는데 我負走十里
내 목구멍에선 숨이 자주 끊어졌네 我喉氣頻絶
어머니도 차마 앞으로 나가지 못하시고 母亦不忍前
돌아보고 다시 살피느라 가다가 또 멈추시네 顧復行且輟
풀을 얽어서 푸른 소나무 아래 머무니 構草滯靑松
20 짝…놀라고:일찍이 화살에 짝을 잃고 활시위 소리만 들어도 놀라는 암컷 새처럼 과거의 피해 받은 일 때문에 자주 놀라는 사람을 비유한다.
21 도철(饕餮):전설상의 탐욕스럽고 잔학한 괴물의 일종으로,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악수(惡獸)이다. 종종 탐욕스러운 사람을 비유할 때 쓰이기도 한다.72 현주집[玄洲集] 제1권 
흐르는 달빛을 등졌다네 流光負盈缺
다 떨어진 옷은 허벅다리를 가리지 못하는데 餘鶉未掩骼
북풍은 다시 휭휭 불어 왔다네 朔吹還淅淅
춥다고 부르짖을 때 무릎은 어깨보다 높고 呼寒膝高肩
얼굴은 얼어 터지고 손은 갈라졌네 面皴手龜裂
어머니 나를 향해 우시는데 慈顔向我啼
누더기 옷 터진 채로 손을 호호 부셨네 呵手綻百結
솜이 터져서 -원문 1자 결락- 물고기 비늘이 늘어선 듯하니 絮破□鱗開
조금 민망초와 삽주로 막았다네 細將蓬薊窒
섣달에야 비로소 남쪽 지방으로 가려 하니 臘月始圖南
춥고 배고파 돌아가려는 마음 절실하였네 凍餒歸心切
아들 하나는 임금의 일에 달려가서 一子赴王事
효성을 옮겨 신하의 절조를 구하려 하였지22 移孝求臣節
서쪽과 남쪽으로 갈라지는 기로에 갑자기 이르니 岐路忽西南
까마귀 울음소리에 피가 맺혀 있는 듯하네23 慈烏啼有血
밤에 적의 참호를 지나노라니 賊壕夜經過
심장과 간이 비수에 부서지는 듯 心肝腐寸鐵
입을 꽉 다물고 잔학한 적들을 뚫고 가니 銜枚突蛇豕
22 아들…하였지:현주의 형 조위한(趙緯韓)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김덕령(金德齡)을 따라 종군하였다.
23 까마귀…듯하네:현주가 피난 중 어머니를 걱정하는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백거이(白居易)가 〈자오야제(慈烏夜啼)〉에서 까마귀의 효성을 노래하여 “까마귀가 그 어미 잃고, 까악 까악 구슬피 우누나. 밤낮으로 날아가지 않고, 해가 지나도록 옛 숲을 지키네. 밤이면 밤마다 한밤중에 우니, 듣는 이 눈물로 옷깃을 적시네.…까마귀여 까마귀여, 새 중의 증삼이로다.[慈烏失其母, 啞啞吐哀音. 晝夜不飛去, 經年守故林. 夜夜夜半啼, 聞者爲沾襟.…慈烏彼慈烏, 鳥中之曾參.]”라고 하였다. 《白香山詩集 卷1》오언고시 五言古詩 73
숨이 헐떡거려 목이 메는 듯하네 喘息類含噎
약한 계집종은 가지 못하니 弱婢行不得
추위의 위세가 이미 뼈에 사무쳤네 寒威骨已徹
차마 도중에 죽는 이들을 차마 보랴 忍見半道死
오그라든 시신이 언 자라와 같네 縮屍如凍鼈
고생하며 애써 용성24에 다다르니 辛勤抵龍城
생활의 구차함도 싫지 않네 不惡生理拙
황량한 옛집이 남아 있고 荒涼舊業餘
울타리도 아직 전부 뜯어내지 않았네25 藩籬未全撤
기뻐하는 모자의 즐거움 怡怡母子樂
아마도 헤어지지 않을 수 있으리 庶可保闊契
요기는 사라지려 하고 妖氛向披豁
해와 달은 다시 밝게 빛나도다 日月再昭晢
반악의 수레26를 잡는 일은 비록 그만두었지만 潘輿雖罷攀
증삼의 솥도 벌려 놓지 못함을27 탄식하였네 曾鼎嗟未列
24 용성(龍城):전라북도 남원(南原)의 옛 명칭이다. 용성이 남원의 별호라고 처음 지칭한 것은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에서이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는 남원을 가리키는 말로 용성이라는 말이 사용되지는 않았다. 남원을 가리키는 말로 용성이 널리 사용된 것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이다.
25 황량한…않았네:남원은 선영이 있는 현주의 고향이다.
26 반악(潘岳)의 수레:진(晉)나라의 반악(潘岳)이 어머니를 모실 때 쓰던 가마라는 뜻으로, 고을 수령이 되어 어머니를 봉양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반악의 〈한거부(閑居賦)〉에 “태부인을 판여에 모시고, 가벼운 수레에 오르시게 한 뒤, 멀리 궁성을 유람하고, 가까이 집안 정원을 소요하게 해드린다.[太夫人乃御板輿, 升輕軒, 遠覽王畿, 近周家園.]”라고 하였다. 《晉書 卷55 潘岳列傳》
27 증삼의…못함을:증정(曾鼎)은 증삼(曾參)의 솥인데 이는 아마도 자로(子路)의 솥을 잘못 인용한 듯하다. 공자의 제자 자로가 “내가 옛74 현주집[玄洲集] 제1권 
색동옷 입고 춤추는 일28도 마치지 못했는데 未了舞綵服
순식간에 상복을 입었다네 奄忽加縗絰
자식의 도리로는 입신양명의 효29를 등졌고 子道負立楊
나라 위한 계책은 후직·설30과 어긋났네 國計違稷契
온갖 험한 일 실컷 두루 맛보았노니 險阻苦備嘗
평생은 한순간에 부칠 만하구려 平生付一瞥
날에 어버이를 모시고 있을 때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나는 되는대
로 거친 음식을 먹는다 하더라도 어버이를 위해서는 백 리 밖에서 
쌀을 등에 지고 오곤 하였다.[爲親負米百里之外] 그러나 어버이가 돌
아가시고 나서 내가 높은 벼슬을 하여 솥을 늘어놓고 진수성찬을 맛
보는 신분[列鼎而食]이 되었는데, 다시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어버
이를 위해 쌀을 지고 왔던 그때의 행복을 이제는 느낄 수 없게 되었
다.”라고 술회한 고사가 있다. 《孔子家語 致思》
28 색동옷…일:춘추 시대 말엽 초(楚)나라 은사(隱士)인 노래자(老萊子)는 효자의 모범으로 이름났다. 70세에 어린아이처럼 색동옷을 입고 부모 앞에서 어리광을 부려 부모를 즐겁게 하였다. 한번은 부모가 보고 있을 때 국그릇을 들고 당으로 올라가다가 넘어지자 땅바닥에 누워 어린애의 울음소리를 내었고, 부모 곁에서 새 새끼를 가지고 놀았다고도 한다. 《藝文類聚 卷20 人部 孝》
29 입신양명(立身揚名)의 효:원문의 ‘양(楊)’은 ‘양(揚)’과 통용되는 글자이다. 《효경(孝經)》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에 “이 몸은 모두 부모님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요, 자신의 몸을 바르게 세우고 바른 도를 행하여 이름을 후세에 드날림으로써 부모님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라고 하였다.
30 후직(后稷)·설(契):순(舜) 임금의 두 현신인 농관(農官) 기(棄)와 사도(司徒) 설(契)을 합칭한 말로, 두보의 〈자경부봉선현영회오백자(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 시에, “두릉에 포의의 신하가 있으니, 늙어가매 뜻이 더욱 졸렬해라, 몸을 기약함이 어찌 그리 어리석은지, 나름대로 후직과 설에 비교한다오.[杜陵有布衣, 老大意轉拙. 許身一何愚, 竊比稷與契.]”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오언고시 五言古詩 75
계절은 저물어 가는 시절에 속하는데 天時屬晼晩
산하엔 아직도 눈 내리네 山河猶雨雪
오랑캐를 평정하는 데 어찌 계책이 없으리오 平戎豈無策
누가 나라의 준걸인가 誰是邦之傑
경전을 복습하다가 새 날아간 일31을 깨닫고 尋經悟色擧
주역에 점을 찍다가 우물 친 일을 슬퍼하네32 點易悲井渫
만사가 슬프고 고통스러울 만하나 萬事足悲辛
이 슬픔이야말로 자잘한 게 아니로다 此悲非屑屑
날을 아껴도33 날이 머물지 않으니 愛日日不留
희화의 수레34는 아득하여 끌어당길 수 없네 羲車杳莫掣
아스라한 곳에 홀로 우뚝 섰으니 蒼茫表獨立
곤궁한 처지의 시름은 아득한 바다를 떠도네 窮愁轉溟碣
통곡하고자 하나 통곡할 수 없으니 欲哭哭不可
당신을 위해 한 곡을 부르노라 爲君歌一闋
31 새 날아간 일[色擧]:‘색거(色擧)’는 《논어》 〈향당(鄕黨)〉에 “새가 사람의 기색을 보고 날아올라 한참을 빙빙 돈 뒤 내려와 앉는다.[色斯擧矣, 翔而後集.]”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여기서는 새처럼 기미를 살펴 움직여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32 우물…슬퍼하네:《주역》 〈정괘(井卦) 구삼(九三)〉에 “우물을 깨끗이 치웠는데도 먹어 주지 아니하여 내 마음을 슬프게 하도다.[井渫不食, 爲我心惻.]”라고 하였는데, 공영달(孔穎達)은 주석에서 “자신을 잘 수양하여 고결하게 되었으나 등용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자신이 학문을 통해 수양하였으나 등용되지 못하는 현실을 슬퍼한다는 의미이다.
33 날을 아껴도:한(漢) 양웅(揚雄)은 《법언(法言)》 〈효지(孝至)〉에서 “효자는 날을 아낀다.”라고 하였다.
34 희화(羲和)의 수레:고대 신화에 따르면 희화(羲和)가 새벽마다 여섯 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에 태양을 싣고 용을 몰아 허공을 달려 서쪽의 우연(虞淵)에까지 이르러 멈춘다고 한다. 《山海經 卷10 大荒南經》76 현주집[玄洲集] 제1권 
통곡하고자 하나 통곡할 수 없고 欲哭不可哭
말하고자 하나 어찌 차마 말하랴 欲道那忍道
살아서 정유년 가을을 만났으니 生丁丁酉秋
이 난리는 하늘이 만든 거라네 喪亂天所造
호남 영남 사람 다 전멸하게 되었고 湖嶺入鏖糟
견융35은 거의 서울을 함락했네 犬戎幾陷鎬
나는 이때 금성36에 있었는데 我時在錦城
사태를 파악하는 게 참으로 빠르지 못했네 見事苦不早
아들 없는 숙모를 염려했으니 無男念叔母
과부로 살면서 병들고 늙으셨지 孀居病仍老
배를 마련해 온 식구를 태우고서 具舟載一室
돛을 펼쳐 바닷속 섬으로 들어갔네 張颿入海島
닻을 내리고 삼향37에 쉬었는데 下碇憩三鄕
바닷가 진지 부서진 보루에 가까웠네 海戍近殘堡
원수가 출정의 기일을 놓쳐서 元戎失師期
적들은 들이닥쳐 곧장 칠 형세였지 賊逼勢直擣
우리 배를 향해 시끄럽게 떠드니 嗷嘈向我船
간이 사그라지고 입술이 바싹 마르네 肝銷口吻燥
두세 명의 평생 벗 平生二三友
눈앞에서 도륙 되었다네 目下剔肝腦
늙고 병든 숙모를 허둥지둥 모시고 가니 遑忙奉老病
달아나려다 넘어지고 거꾸러졌네 欲走顚且倒
35 견융(犬戎):견융은 고대 융족(戎族)의 한 부류인데, 여기서는 왜적을 가리킨다. 
36 금성(錦城):전라남도 나주(羅州)의 옛 지명이다.
37 삼향(三鄕):전라남도 무안군 삼향면 일대를 가리킨다.오언고시 五言古詩 77
창졸간에 처자식을 잃으니 蒼卒失妻兒
하늘에 물을 길이 없었네 無由問窮昊
종들은 다 흩어져 달아나고 僕徒盡散走
갓난아기 강보에서 울어대는데 赤子啼襁褓
차마 길가에 버리지 못하고 不忍棄道周
직접 혼자 안고 기어갔네 匍匐手自抱
밤에 승달산38을 넘으니 夜踰承達山
젖을 못 먹은 아이는 계속 울어대네 呱仍絶乳夭
사방에 적의 불빛이 벌거니 四面賊火紅
몸을 장차 어떻게 보존해야 하나 身首將安保
피하여 달아나려 낮엔 가파른 산에 오르고 避奔晝上崢
몸을 보호하러 밤엔 풀 섶에 의지하네 庇身夜依草
몰래 승냥이 호랑이 굴을 통과하니39 潛穿豺虎窟
위험에 이르지 않은 적이 없네 岌險無不到
아내40는 흉한 칼날에 세상을 떠났으리라 생각하니 謂妻已凶鋒
혈혈단신으로 부질없이 슬퍼하네 孑孑空自悼
굶주림이 극도에 이르고 갈증도 심하니 飢極渴亦甚
눈으로 살펴도 흑백을 구별 못 하네 目視昧白皁
앞길을 물을 데가 없으니 前途問莫憑
하늘을 우러러 말없이 기도할 뿐 仰霄唯默禱
밤이 깊어 갑자기 사람을 만났는데 夜深忽遇人
38 승달산(承達山):전라남도 무안군에 있는 산 이름이다. 
39 몰래…통과하니:왜적의 소굴을 지나감을 비유한다.
40 아내:현주의 첫 번째 부인인 류씨(柳氏)로 지평(持平) 은(溵)의 딸이다. 정숙(貞淑)하고 부도(婦道)가 있었는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적을 만나 스스로 목을 찌르고 죽으니 나주(羅州) 초곡(草谷)에 장사 지냈다.78 현주집[玄洲集] 제1권 
나를 보고 놀라며 위로하네 見我驚且勞
나에게 아들이 누구냐고 묻길래 問我子誰某
나는 성명을 알려 주었네 我以姓名告
그는 듣고서 놀라며 말하기를 他聞愕且云
본 바를 알려주길 청합니다 請以所見報
낮에 내가 몽탄41을 건널 적에 晝余過蒙灘
노약자들이 다급해 하며 떠들썩하더이다 老弱急且噪
한 부인이 반드시 죽겠다고 다짐하며 有婦誓必死
물에 뛰어들어 세 걸음을 걷더군요 赴水足三蹈
여종 두엇이 부여잡고 울다가 數婢扶且泣
물에 빠진 부인을 건져 부엌에서 옷을 말렸지요 拯溺燎于竈
이분이 아무개 집안 부인이라 하던데 云是某家娘
바로 당신의 부인이 아닌지요라 하네 無乃吾兄嫂
과연 그러해서 그곳에 가서 서로 만났으니 果然卽相遇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리네 眼水劇翻潦
생사의 기로에서 다시 만나니 死生得更逢
번뇌가 사라지려는 듯 似欲豁煩惱
옥가락지를 팔아서 나의 허기를 구제하고 賣環救我飢
밥 한 그릇을 늙은 숙모께 드리네 一飯資主姥
나는 이미 그대를 만났으니 我言旣見君
이제부터는 죽어도 좋다고 하였네 自今死亦好
저녁에 흙다리를 향하는데 乘昏向土橋
손을 끌고서 강굽이를 따라갔네 提挈循江隩
적진이 사방에 펼쳐져 있으니 賊壘四羅列
41 몽탄(蒙灘): 전라남도 무안군에 있는 여울 이름이다. 오언고시 五言古詩 79
어찌 흰 칼날을 무릅쓰고 가랴 白刃詎可冒
힘이 다 빠져 들 가운데 섰다가 力盡立中野
이끌고 부축하여 숲 깊은 곳에 엎드렸네 携扶伏林奧
해 나오자 적들이 고슴도치 털처럼 모여들어 日出賊蝟集
들녘을 모조리 뒤지네 原野窮探討
아내는 사세가 이미 급하니 妻云勢已急
당신은 달아나 도적을 피하는 게 좋겠다고 하네 子可走避盜
내 즉시 적진을 뚫고 나가니 我卽突賊出
종 한 명이 앞장을 섰네 一奴爲前導
탈출하여 험한 길을 가노라니 脫身走峻途
간담이 바람 속 깃발처럼 흔들렸네 膽掉似風纛
적은 떠나고 이미 해는 져서 캄캄한데 賊去已曛黑
새가 알 품던 둥지를 그리워하듯 하였네 如鳥戀巢菢
넝쿨 풀에는 핏자국이 흐릿하고 蔓草血糢糊
열 식구의 흔적은 빗질한 듯 사라졌네 十口跡如掃
그대가 엎드렸던 수풀을 찾아가니 尋君所伏林
시신이 풀 더미에 버려져 있네 僵屍委草藁
차던 칼을 목에 꽂았으니 頸揷所佩刀
가슴을 치면서 곧은 절개에 통곡하네 搥胸哭貞操
창졸간에 형세가 곤궁하고 군색해져 造次勢窮蹵
진실로 강포한 짓을 면하기 어려웠으리 固難免强暴
차분히 칼로 자살하니 從容齒劍死
장한 절개는 해가 밝게 빛나는 듯 壯節日杲杲
내가 무슨 면목으로 혼자 살까 獨生我何面80 현주집[玄洲集] 제1권 
죽어 멱모42를 덮을 만하네 死可蒙幎帽
맨몸으로 용진산43으로 가니 赤身走聳珍
정신은 날로 약해지네 精爽日以耗
굶주림을 참은 지 팔구일 忍飢八九日
발이 부르터서 빨리 걷지 못 하네 足繭行未躁
죽음의 문턱에서 좋은 벗을 만나니 垂死見良友
이별이 안타까워 연연하는 마음 더해졌네 惜別增戀嫪
암혈에서 나에게 시를 부쳤는데 巖中寄我詩
지금까지도 그 문채에 감탄한다네 至今歎文藻
하물며 의로운 선비를 얻음에랴 何況得義士
금과 옥도 보배가 아니로다 金玉亦非寶
내 비록 면식이 있지 않았지만 我雖不識面
그 스스로 내 성과 호를 안다고 하였네 自言知姓號
얼고 주린 내 몸을 거두어 收我凍餒骨
실로 온화한 태도로 먹이고 따뜻하게 해 주었네 煦濡實哺燠
생각지 못했네 썩어버린 창자의 不謂腐餘腸
빈 곳이 곡물로 채워지게 될 줄을 轉枵充粱稻
또한 예상44에서 굶주리다가 還如翳桑餓
42 멱모(幎帽):염습할 때에 죽은 사람의 얼굴을 덮어 싸는 헝겊으로 네 귀에 끈을 달았다.
43 용진산(聳珍山):광주시(光州市) 광산구(光山區) 임곡동과 본량동·지산동 경계에 있는 산이다. 장성에서 남쪽으로 내려선 능선이 본량에서 솟아 배산을 이룬다. 동쪽으로 황룡강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어등산과 마주보고 있다.
44 예상(翳桑):옛 지명으로 심하게 굶주리는 것을 상징하는 말로 쓰인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 조돈(趙盾)이 이곳에서 굶주리고 있는 영첩(靈輒)을 보고 먹을 것을 주어 구제해 주었다. 그 뒤에 영첩이 진나라 영공(靈公)의 갑사(甲士)가 되어 위험에 처한 조돈을 다시 구해 주어 오언고시 五言古詩 81
배 두드리며 화락하고 자득한 채45 누워 있는 것과 같네 叩腹臥熙暭
그 이래로 오랫동안 보지 못하였으니 邇來久不見
가난과 병으로 둘 다 머리 세었으리 貧病兩首皓
전란의 먼지 아직도 가득하고 兵塵尙澒洞
콩잎만 먹느라46 시름 하며 근심하네 食藿憂懆懆
만 번 죽을 위기에서 이 삶을 억지로 지탱하니 萬死强此生
남은 뼈는 이미 누렇게 말랐도다 殘骸已黃槁
마침내 일 년을 보냈으니 居然送寒暑
가을바람에 몇 번이나 대추를 딸까 秋風幾剝棗
어떤 때는 지난 일에 촉발되어 有時觸往事
주르르 눈물 흘리며 후회한다네 汍瀾泣悔懊
통곡하고자 하나 진실로 통곡할 수 없으니 欲哭諒不可
그대를 위해 큰 소리로 노래하노라 爲君歌浩浩
좋은 벗은 석주 권필(權韠)
47이고 의사는 김창효(金昌孝)를 가리킨다.은혜를 갚았다. 《春秋左氏傳 宣公2年》
45 화락하고 자득한 채:이에 해당하는 원문 ‘희호(熙皥)’는 ‘희희호호(熙熙皥皥)’의 준말로 화락(和樂)하고 자득(自得)한 모양을 말한다. 《노자(老子)》 제20장에 “세속의 중인들 희희낙락하여, 마치 푸짐한 잔칫상을 받은 듯, 봄날의 누대에 오른 듯하네.[衆人熙熙, 如享太牢, 如登春臺.]”라고 하였고,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성왕의 백성은 자득한 듯하느니라.[王者之民, 皥皥如也.]”라고 하였다.
46 콩잎만 먹느라:생활이 곤궁하고 고달픈 것을 말한다.
47 권필(權韠):1569~1612. 호는 석주(石洲),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장(汝章)이다. 이정귀(李廷龜)가 명나라 사신을 맞게 되어 문사(文士)를 엄선할 때 야인으로 뽑혀 문명을 떨쳤다. 임숙영(任叔英)이 광해군을 비판하는 글로 삭과(削科)된 사실을 듣고 〈궁류시(宮柳詩)〉를 지어서 풍자한 일로 경원(慶源)으로 귀양가다가 도중에 사망하였다. 조찬한(趙纘韓)·이안눌(李安訥)·허균(許筠) 등과 교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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