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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癸卯年四恩亭定期總會(06.15.木.11時~~~)♣
▣조광보(趙光輔) : ?~? 일명은 광보(廣輔), 호는 방은(方隱)이다. 1507년 남곤 등에 의하여 박원종, 노공필(盧公弼) 등을 해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잡혀 국문을 당하였으나 도리어 유자광 등 고관들을 꾸짖으며, 형장을 받는 중에 통곡을 그치지 않아 광인(狂人)으로 여겨져 석방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명 광보(廣輔). 호는 방은(方隱). 연산군 때 임사홍(任士洪)이 권력을 장악하여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무인인 박영(朴英)에게 그를 참살(斬殺)하라고 권한 바 있으나 실행되지 못하였다.
1507년(중종 2) 참의 유숭조(柳崇祖), 호군 심정(沈貞), 전 승지 남곤(南袞) 등에 의하여 박원종(朴元宗)·노공필(盧公弼) 등을 해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의관(醫官) 김공저(金公著), 서얼(庶蘖) 박경(朴耕) 등과 함께 잡혀 국문을 당하였다.
대궐마당에서 국문을 당하면서 옛 글을 소리내어 외우다가 입회한 유자광(柳子光)에게 무오년에 현량(賢良)을 모함하여 죽인 소인이며 아첨하는 신하라고 매도하였고, 박원종에 대하여서도 폐주(廢主: 연산군)의 나인을 첩실로 거느리고 있음을 힐책하였다.
동석한 성희안(成希顔)을 향하여 명유(名儒)이면서 유자광을 섬긴다고 비난하였고, 사신(史臣) 강홍(姜洪)·이말(李抹) 등에게는 사관(史官)으로서 자기의 말을 특서하여 둘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결국 장형(杖刑)을 당하자 통곡을 그치지 않아 박원종 등으로부터 광인(狂人)으로 인정되어 석방되었다. 식견이 고명하였으나 거짓으로 미친체하여 스스로를 감추었다는 평을 들었다.
[中宗朝]
2년 정묘(1507)에 참의 유숭조(柳崇祖), 호군 심정(沈貞), 장악원 정(正) 김극성(金克成)과 상인(喪人)인 전 승지 남곤(南袞) 등이 은밀히 아뢰기를, “의관(醫官) 김공저, 서얼(庶孽) 박경(朴耕), 유생 조광보ㆍ이장길(李長吉) 등이 박원종(朴元宗)과 노공필(盧公弼) 등을 해치려고 한다.” 하였다.대궐 뜰에서 국문할 때 낙형(烙刑)을 써서 대신을 모해하고 조정을 변란케 했다는 자백을 받기에 이르렀다. 김공저와 박경을 베고 연루된 사람들을 죄의 경중에 따라 차등 있게 귀양 보냈다. 심정, 남곤, 김극성 등을 논공(論功)하여 가자(加資)하였다. 유숭조는 미리 저들의 음모를 대충 알면서도 곧장 고하지 않고 있다가 심정이 장차 아뢸 뜻이 있음을 듣고 발각될까 두려워 자기 죄를 면하려고 아뢴 것이라 해서 장형(杖刑)한 다음 귀양보냈다. 《동각잡기》
○ 조광보를 대궐 뜰로 잡아들이니, 큰 소리로 옛 글을 외우다가 유자광을 보고 큰 소리로 부르기를, “유자광은 소인인데, 어찌 이 자리에 있는가. 무오년에 어진 사람들을 모함해서 김종직(金宗直) 같은 사람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는데, 이제 또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가. 상방검(尙方劍)을 얻어서 아첨하는 신하의 머리를 베고 성스러운 임금을 받들고 어진 재상을 임명하면 훌륭한 정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성희안(成希顔)이 묻기를, “아첨하는 신하란 누구인가.” 하니, 조광보가 말하기를, “바로 유자광이다.” 하고, 박원종에게 말하기를, “너가 성스러운 임금을 추대했으니, 공이 과연 크지만, 어찌 폐주(廢主)의 나인[內人]을 데리고 사느냐.” 하고, 또 성희안에게 눈짓하며 말하기를, “그 전에 한훈(韓訓)이 너를 명유(名儒)라 했거늘, 이제 어째서 유자광과 함께 일을 하느냐.” 하였다.또 사관 강홍(姜洪)ㆍ이말(李抹)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강홍아, 네 아비가 죄 없이 피살되었다. 너희들은 사관이니 마땅히 내 말을 특별히 써 두라.” 하였다. 장(杖)을 열대 남짓 맞고도 통곡만 하고 마니, 박원종이 말하기를, “참으로 미친 병이 든 사람이로다.” 하고 그만두었다. 《동각잡기》
○ 처사(處士) 조광보는 식견이 고명하나 거짓 미친 체하며 스스로 감추었다. 연산조 때 임사홍(任士洪)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고 조정이 어둡고 어지러워 이미 구할 수 없었다. 하루는 분노하여 송당(松堂) 박영(朴英)에게 말하기를, “너는 무부(武夫)로서 이런 놈을 베어 죽이지 못하는가. 너가 죽이지 않으면 내가 마땅히 너를 죽이리라.” 하니, 박영이 말하기를, “한 역적을 죽여서 나라의 근심이 풀린다면 진실로 달게 여기는 바이나, 후세 역사에 ‘임사홍을 도살(盜殺)했다.’고 쓴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자, 처사가 웃고 말았다.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 박경의 자는 백우(伯牛)이며, 박강(朴薑)의 서자(庶子)요, 박은(朴訔)의 손자이다. 글씨를 잘 쓰고 학행(學行)이 있었다. 선산(善山)에 살면서 정붕(鄭鵬), 박영(朴英)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고 사이가 좋았다. 강목 교수청(綱目校讐廳)에 참여하다가 김일손(金馹孫)이 인정하여 ‘잠부’라고 칭찬하였다. 박경이 일찍이 말하기를, “유자광이 무오년의 사화(史禍)를 얽어서 만들었으니, 제거하는 것이 낫다.” 하였다. 남곤이 이 말을 듣고 심정 등과 함께 변복(變服)하고 대궐에 들어가서 거짓 고했다. 《박씨가승(朴氏家乘)》
○ 대간이 남곤 등이 고변(告變)한 것은 공을 세우려고 꾸민 것이라고 탄핵하고 박경 등의 처자식을 석방하기를 청하였다. 얼마 안 되어 유자광은 죄로 죽었고 남곤은 마침내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였다. 《박씨가승》
승지 남곤이 친상을 당해서 집에 있는데, 문사(文士) 문서구(文瑞龜)한테 김공저와 박경이, “유자광이 무오년의 옥사를 만들어서 선비들을 모조리 죽이고 마침내 폐주로 하여금 살육을 맘대로 즐기게 하였으니, 이 사람을 없애 지하에 있는 사람들의 원통함을 조금이라도 풀어주는 것이 낫겠다.”고 했다는 말을 듣고, 남곤이 문서구의 말을 가지고 변복한 채 대궐에 들어가 위에 고변하여 옥사를 만들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자 대간이 남곤을 탄핵했다 운운. 《당적보(黨籍補)》
○ 남곤과 심정이 고변할 적에 박영이 달려가 정붕에게 말하니, 정붕이 지팡이에 기댄 채 잠자코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이는 필시 문세고(文世皋)의 짓이다. 백우(伯牛) 박경의 자 는 어리석고 학식이 없으니 불측한 화를 당할 것이요, 조광보 같은 이는 반드시 면할 것이다.” 하더니, 과연 박경은 죽고 조광보는 화를 면했다. 《명현록(名賢錄)》
○ 이계맹(李繼孟)은 중종 반정 초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박경의 옥사에 연루되어 진도(珍島)로 귀양갔다가 두어 달 만에 상이 그에게 죄가 없음을 알고 불러서 전라 감사에 임명하였다.
상방검(尙方劍) : 상방은 임금의 일상 생활에 관한 물건을 저장하고 봉양하는 곳을 말하는데, 한 나라 성제(成帝) 때에 주운(朱雲)이 임금에게, “상방에서 말을 베이는 칼[斬馬釰]을 신에게 빌려 주면 아첨하는 신하 한 사람의 머리를 베어 버리겠습니다.”고 한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도살(盜殺) : 공자의 춘추 필법(春秋筆法)에 분명하게 죽이지 않고 암살한 것은 반드시 도살이라고 쓴 데서 나온 말이다.
강목 교수청(綱目校讐廳) :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교정(校正)하는 기구.
잠부(潛夫) : 후한(後漢) 때 왕부(王符)는 학식이 높은 선비인데, 외가의 지체가 낮았기 때문에 대우를 받지 못하자 스스로 ‘잠부’라 칭하고, 저서도 《잠부론(潛夫論)》이라 하였다.
유배지에서의 최후
정국1등공신에 책봉되었지만 유자광의 몰락은 곧 닥쳐왔다. 연산군 때 두 사화의 원흉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중종 2년(1507) 윤정월에 조광보(趙光輔)라는 인물이 핵심 대신인 박원종(朴元宗)ㆍ노공필(盧公弼) 등을 죽이려고 한 사건이 발각되었는데, 그는 국문을 받으면서 유자광이 무오사화를 일으킨 소인이라고 비판했다. 유자광은 “김종직의 남은 무리가 비밀히 중상하려 하니 마음놓고 서울에 있을 수 없다”면서 시골로 물러가겠다고 밝혔다(중종 2년 2월 2일).
그러나 대간은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두 달 가까이 탄핵을 지속했고, 마침내 유자광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중종은 일단 유자광을 파직시켰다. 그러나 대간은 만족하지 않았고, 갑자사화도 그가 주모했다는 죄목까지 추가했다. 결국 당시의 가장 핵심적인 실세인 좌의정 박원종도 대간에 동의함으로써 유자광은 두 번째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중종 2년 4월 13ㆍ16ㆍ22ㆍ23일).
유자광은 처음에는 평해(平海, 지금 경상북도 울진)로 유배되고 정국공신에서도 삭훈되었으며, 자손들도 멀리 귀양갔다. 그때의 사평(史評)은 유자광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압축하고 있다.
유자광은 무오년의 옥사를 주창하고 다시 갑자년의 사화를 일으켜 사대부가 다 죽고 종사가 거의 뒤집어질 뻔했는데도 목숨을 보전해 천명대로 살게 되었으니, 유배지에서 죽더라도 나라를 그르친 자의 경계가 될 수 있겠는가? - 중종 2년 5월 1일
이 사평대로 유자광은 5년 뒤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73년에 걸친 파란 많은 인생이었다. 야사([음애일기〔陰崖日記〕] 등)에 따르면 그는 유배된 뒤 눈이 멀어갔다고 한다. 이듬해에 “익대공신은 그 자신이 애쓴 공로이니 되돌려주라”는 조치가 내려졌지만(중종 8년 11월 12일) 그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철회되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강고하게 이어지고 있다.
▣기묘명현 회곡(晦谷) 조광좌(趙光佐)
이름 : 조광좌 [趙廣佐]
생년 : 1483
몰년 : 1521
역할 : 조선 중기의 문신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계량(季良), 호는 회곡(晦谷)이다. 아버지는 군수(郡守)를 지낸 조훈(趙勛)이다. 성균관 유생이던 1507년(중종 2)에 박경(朴耕)과 김공저(金公著)의 옥사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이 후 1518년(중종 13)에 좌랑(佐郞), 1519년(중종 14)에 지평(持平)에 올랐다. 그러나 그 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발발하자 조광조(趙光祖)의 붕당으로 몰려 관직을 잃었으며, 1521년(중종 16) 신사무옥(辛巳誣獄)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장살(杖殺) 당하였다.
●한양조씨(漢陽趙氏), 출생~사망 : 1483 ~ 1521
조선 중기의 문신. 일명 광좌(光佐). 자는 계량(季良). 도총제 모(慕)의 증손으로, 군수 훈(勳)의 아들이다. 1507년(중종 2) 성균관유생으로서 박경(朴耕), 김공저(金公著)의 옥사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1518년 좌랑, 1519년 지평이 되어 '중종반정시 공신으로 책봉된 자 중에 공이 없이 책봉되어 녹을 받고 있는 자가 매우 많으니, 지금 용단을 내려 가려내지 않으면 뒤에 폐단이 많을 것이다. '라고 간언하였으나 '공의 유무를 다시 확인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이미 공신으로 정하여진 바를 고친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하답으로 거절당하였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趙光祖)의 붕당으로 몰려 삭직되었고, 1521년 신사무옥 때 연루되어 장살당하였다. 시호는 회곡(晦谷)이다.
성당가까운 보라동 동네, 양촌마을 길가에 아주 오래된 느티나무가 서있습니다. 용인시가 관리하는 보호수라고 했고 약400년의 수령이라고 했습니다. 나무높이가 20m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묘사화때 회곡 조광좌가 식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는 팻말이 세워저 있습니다. 나무를 심었다는 회곡(晦谷) 조광좌(趙光佐)는 조선중기의 문신이었다지요. 용인의 향토유적인 '사은정(四隱亭')에서 성리학의 대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를 위시해서 중종때의 유학자로 식견이 높았던 방은(方隱) 조광보(趙光輔) 그리고 음애(陰崖) 이자(李耔)등과 함께 강학하던 사이였답니다. 기묘사화때 조광조(趙光祖) 일당으로 몰려 삭직된 분이랍니다. 방은 조광보 와 회곡 조광좌는 형제로서 정암 조광조와 10촌형제간이었다하고 지금의 용인 보라동에 살았고 음애 이자는 인근 지곡동에 살았다고 하니 또다른 감흥이 솟는군요. 가끔 우람한 이 느티나무밑을 지나면서 심은분이 역사적인 인물임을 확인하고나니 숙연해 집니다.
※올해는 사은정보존회에서 통합대종회 임원들을 초대하여
회장은 참석을 못하고 대부분 모든 임원들이 참석하였다.
◐사은정[四隱亭, Saeunjeong Pavilion]
사은정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615번지[기흥구 사은로 161]에 있다. 2001년 3월 17일 용인시의 향토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사은정(四隱亭)은 본래 조선 중종 조의 명현이며, 동방4현 중의 한 사람인 정암 조광조 선생을 비롯하여 중종 때 유학자로 식견이 높았던 방은 조광보, 기묘명현 회곡 조광좌, 목은 이색(한산인(韓山人,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의 후손인 음애 이자 등 4현(四賢)이 모여 학문을 논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음애가 조수재(趙秀才)에게 보낸 글 중에 “정암, 방은.회곡 형제와 음애가 도의로써 사귐을 맺어 서로 더불어 즐거워하였고, 또 그 선대 산소와 전원이 가까운 곳으로서 한양 남쪽 용인에 터를 잡아서 정자를 짓고 사은이라 하였는데 대개 농사(耕)짓고, 나무(薪)하고, 낚시질(釣)하며, 나물(菜)캐는 네 가지의 뜻을 취한 것이다”고 하였다. 보존회 관계자는 “지은지 500년이 지난 사은정을 외형을 보존하고 현인들 가르침을 후세에 전해주기 위해 사적비를 건립했다”고 했다. [2020.06.15.월.건립]
경(耕) 신(薪) 조(釣) 채(菜)의 즐거움을 위한 정자. 사은정은 네 가지 즐거움을 뜻한다. 즉 밭을 갈고, 나무를 하고, 낚시질을 하며, 나물을 캔다는 뜻이다. 이 네 가지 즐거움이야말로 노년의 인생을 더욱 윤택하게 할 수가 있다. 사은정은 이 네 가지 즐거움을 함께 즐기기 위해서 세워진 정자이다. 그리고 네 분의 선조들을 위하여, 후손들이 몇 번을 중수하면서 그 뜻을 기린 정자이기도 하다.
처음 사은정이 지어진 것은 1,500년대 초일 것으로 보인다. 이 정자를 처음 지은 이유는 조선조 중종 때의 명현이자, 성리학의 대가인 동방사현 중 일인인 정암 조광조(1482 ~ 1519), 중종 때의 유학자인 방은 조광보, 회곡 조광좌,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기묘사화 때 연루되어 화를 당한 임애 이자(1480 ~ 1533) 등이, 도의로 친우를 맺고 노년의 생활을 즐기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 정조 20년인 1796년에 정암과 음애. 회곡 선생의 후손들이 중건을 하면서, 서재를 짓고 방을 드렸으며 단청도 다시 하였다고 하였다. 아마도 처음에 사은정을 건립하였을 때는 단순한 정자만 있었던 것 같다. 그 뒤 고종 13년인 1876년에 정자가 퇴락하여 후손들이 중창하였으며, 1925년과 1988년에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사은정은 기묘명현들의 생존시부터인 16세기초부터 이 고장에 전해오는 유서깊은 정자이며 지금도 정범조, 이용구, 조철, 민종현등의 묵적이 중수기에 남아있고 2백여년전에 현액한 현판이 현존하고 있다.
용인 정신병원에서 신갈 오거리 길을 비켜서, 민속촌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면 지곡동이 된다. 이 길로 가다가 민속촌이 나타나기 전 우측에 주유소가 있고, 그 옆길로 들어가면 사은정이 있다. 사은정은 민속촌의 옆 야산 언저리에 자리하고 있다. 뒤로는 소나무와 바위들이 흰 눈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전국의 정자들은 사계절 언제 찾아가든지, 나름대로의 정취가 있다. 사은정 역시 겨울 경치도 아름답다.
사은정의 앞으로는 지곡리의 들이 펼쳐진다. 주변에는 낮은 야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쌓아 아늑하다. 뒤 야산에서 나무를 하고, 들판으로 나가 나물을 캤을 것이다. 그리고 앞의 너른 곳에 밭을 갈아 먹거리를 장만하고, 멀지 않은 내로 나가 낚시를 하면서 하루해를 즐겼을 것이다. 사은정은 그런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어 네 분의 선조들이 마련한 정자이다.
겨울에 보는 사은정은 아름답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진 사은정은 중앙에 계단을 놓았다. 중앙의 계단은 장대석으로 하였으며, 계단 양 옆이 돌출이 되게 하여 멋을 냈다. 마름모꼴의 잘 다듬은 주춧돌을 놓고, 전면과 측면은 계자각 난간을 둘렀다. 우측으로는 한 칸 방을 드려 겨울철에도 묵을 수 있게 하였으며, 방과 대청을 나란히 놓고, 좌우에 개방된 툇간을 놓았다. 툇간은 본 건물보다 돌출이 되게 구성해 여유를 보인다.
■소재지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사은로 161(지곡동 615)
■건립 시기 : 조선 초기
■문화재 지정 : 용인시 향토유적 제50호(2001.3 지정)
■건물규모 및 구조 : 정면 3칸, 측면 2칸, 한식 골기와 팔작지붕, 온돌방과 대청, 툇간과 계자각 난간
사은정은 한국민속촌 옆 두암산 아래 위치하고 있는데, 남부 컨트리클럽 진입로에서 왼쪽에 있다.
사은정(四隱亭)은 조선 중종 때 명현이며 성리학의 대가이자 동방 4현 중 한 사람인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19)와 그의 종형제로 식견이 높았던 방은 조광보 . 회곡 조광좌 형제와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기묘사화 때 연루되어 화를 당한 음애 이자 등이 도의로 벗을 맺고 경서의 뜻을 강론하고 밝히면서 서로 즐거워하던 곳이다.
사은(四隱)이라는 이름은 "밭 갈고(耕), 나무하고(新), 낚시질하고(釣), 나물 캐는(菜) 네 가지의 즐거움"을 취한 것이라 한다.
정조 20년(1796)에 정암과 음애, 회곡 선생의 후손들이 힘을 합하여 정자를 중건하였는데 서재를 다시 짓고 방도 만들었으며 단청도 다시 하였다. 고종 13년(1876)에는 정자가 지은 지 오래되어 훼손되었으므로 후손들이 중창하였으며 1925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그 후 1988년에 후손들이 현재의 건물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집인데 방과 대청을 좌우에 나란히 놓았으며 전면에 개방된 툇간을 두고 계자각 난간을 설치하였다. 대청 안에는 중건, 중수기, 현판이 걸려있다.
정자 뒤쪽 언덕 위에는 소나무 사이로 바위가 드러나 있으며 전면으로는 지곡리의 들이 펼쳐지고 낮은 야산들이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어 풍광이 매우 좋다. 사은정은 16세기 이래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용인지역을 대표하는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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