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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조수삼(19세기)-사마시에 합격한 날♥ ■사마창방일구호칠보시(司馬唱榜日口呼七步詩)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12. 30.

♥조수삼(19세기)-사마시에 합격한 날♥
[여항문화]
■사마창방일구호칠보시(司馬唱榜日口呼七步詩)

二首 ·
● 腹裏詩書幾百擔(복리시서기백담) 
☞배 안에 시와 글이 거의 백 짐은 되는데
● 今年方得一襴衫(금년방득일란삼) 
☞금년에야 한 난삼을 얻었네
● 傍人莫問年多少(방인막문년다소) 
☞곁에 있는 사람들아! 나이 많고 적음을 묻지 마라
● 六十年前二十三(육십년전이십삼) 
☞육십 년 전에는 나도 23살이었네
 
●腹裡詩書幾百擔. 今年力得一襴衫.
●傍人莫問年多少, 六十年前二十三.
뱃속에 든 시와 책이 몇 백 짐이던가.
올해에야 가까스로 난삼을 걸쳤네.
구경꾼들아 몇 살인가 묻지를 마소
육십 년 전에는 스물셋이었다네.
흉년 들면 장리 쌀이 고달팠지.
양떼를 모는 듯한 채찍질이 고달팠고
호랑이를 보는 듯 아전 때문에 고달팠지.
걱정은 즐거움의 근본이고
괴로움도 즐거움의 근본이어서,
고생이 다하면 즐거움이 온다고
옛부터 옳은 말씀이 전해 온단다.
괴롭게 행해야 어진 선비가 되고
듣기 싫은 말도 해야 밝은 임금을 깨우친단다.
너희들도 보아라. 부귀한 사람에게도
괴로움이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단다.
부자는 도주와 의돈을 넘어서려 괴롭고
양반은 공 ∙ 경 ∙ 재상에 오르려고 괴로워한단다.
괴로울 것이 없는데도 스스로 괴로움을 구하여
마음대로 살아갈 수가 없단다.
내가 캐는 씀바귀가 비록 쓰다고 하지만
배불리 먹고나면 두 다리 펴고 잔단다.“
이 이야기를 내가 몰래 들어보니
장저와 걸닉이라도 만난 것 같아,
두 번 절하고 도를 들으려 하였더니
늙은이는 벌써 구름낀 언덕으로 사라졌네.
돌아와 이 말을 차례대로 써두고
몸에 지니며 때때로 어루만지네. 
 
■이는 지은이 조수삼(趙秀三)이 83살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고 지은 것으로 “사마창방일 구호칠보시(司馬唱榜日 口呼七步詩)”라는 제목이 붙은 자전적인 한시입니다. 그는 역관중인(譯官中人)이라는 신분 탓으로 벼슬을 하지 못하다가 83살이 되어서야 노인에 대한 예우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오위장(五衛將)의 벼슬을 받은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83살이 된 지금에야 과거급제한 뒤에 입는 옷 “란삼(襴衫)”을 입었다고 고백하지만, 자신의 배에는 지은 시와 글이 백 짐은 되며, 육십년 전에는 겨우 23살이었다고 말하면서, 나이 적고 많음을 묻지 말라고 합니다. 

●조수삼은 60살이 돼서야 벼슬에 나아간 강세황보다 더 훨씬 늦은 나이에 겨우 벼슬자리 하나 받지만 자부심과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시를 씁니다. 그는 송석원시사(宋石園詩社, 서울의 중인계층들이 인왕산 아래에 있는 옥류동(玉流洞) 송석원에서 결성한 문학단체)의 핵심적인 인물이지요.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그는 김정희ㆍ한치원 등 당대의 사대부ㆍ세도가들과도 친밀히 지냈고, 청나라를. 6차례나 다녀왔으며, 전국 각지를 여행하며 자연과 풍물을 읊은 시를 많이 남겼습니다. 특히 61살에 함경도지방을 여행하면서 민중들의 고난을 담은 《북행백절(北行百絶)》, 도시생활인의 생활을 산문으로 쓴 뒤 칠언절구의 시를 덧붙인 《추재기이(秋齋紀異)》는 그의 성가를 드높였습니다.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송석원(松石園)은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일대를 부르는 지명이다. 인왕산에서 흘러 내리는 옥류동 계곡이 이곳을 관통하였으며, 계곡 주변의 경관이 뛰어나 조선 시대 중기부터 많은 양반과 중인이 찾는 곳이었다. 특히 중인 계층을 중심으로 위항 문학 운동이 일었는데, 옥류동 계곡에 천수경이 송석원이라는 집을 짓고 살면서 그를 중심으로 열린 옥계시사 또는 송석원시사가 널리 알려졌다. 송석원시사의 부흥을 계기로 이 일대의 지명은 옥류동 계곡을 말하는 옥계(玉溪) 대신 송석원이라 불리게 되었다. 

●천수경 사후 송석원의 주인은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장동 김씨라 불린 신 안동 김씨와 여흥 민씨를 거쳐 1910년경에 윤덕영이 송석원을 가지게 되었다. 윤덕영은 일제 강점기에 옥인동 땅의 절반 이상을 사들이고, 송석원 터에 프랑스풍 건물인 양관(洋館)이 중심이 된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는 저택을 지었다. 양관은 한국 전쟁 전후에 한국통일부흥위원단 청사로 쓰이다가 1966년에 불탔고, 1973년에 철거되었다. 해방 이후 옥류동 계곡 주변에는 많은 주택이 들어섰고, 주민들은 여전히 그 일대를 송석원이라 부른다.

■조수삼(趙秀三)의 본관은 한양(漢陽). 초명은 경유(景濰). 자는 지원(芝園)·자익(子翼), 호는 추재(秋齋)·경원(經畹). 아버지는 가선대부 한성부좌윤 겸 오위도총부부총관(漢城府左尹兼五衛都摠府副摠管)에 추증된 조원문(趙元文)이다. 여항시인 조경렴(趙景濂)의 동생이고, 조선 말기의 화원(畫員)인 조중묵(趙重默)은 그의 손자이다.

 

구자균(具滋均)은 『한국평민문학사(韓國平民文學史)』에서 조수삼의 신분은 서리(胥吏)일 것이라고 추정하였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대개 역과중인(譯科中人) 출신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수삼은 신분의 제한으로 1844년(헌종 10) 8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핵심적인 인물로 활동했으며 정이조(丁彛祚)·이단전(李亶佃)·강진(姜溍)·조희룡(趙熙龍)·김낙서(金洛瑞)·장혼(張混)·박윤묵(朴允默) 등 여항시인과 사귀었다.

 

그리고 김정희(金正喜)·김명희(金命喜)·조인영(趙寅永)·조만영(趙萬永)·한치원(韓致元)·남상교(南尙敎)·이만용(李晩用) 등 당시의 쟁쟁한 사대부 문인과도 친하게 지냈다. 특히, 조인영·조만영은 풍양 조씨 세도정치의 중추인물이다. 이들은 조수삼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관직에 나간 이력이 없는 조수삼의 삶은 여행으로 특징지어 진다. 1789년(정조 13) 이성원(李性源, 1725-1790)을 따라 처음으로 중국에 간 이래로 여섯 차례나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이때에 당대 중국의 일류문사인 오숭량(吳崇梁)·유희해(劉喜海)·강련(江漣)·주문한(朱文翰) 등과 사귀었다. 그리고 전국에 발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국내 각지를 빠짐없이 여행하며 많은 시를 남겼다.

 

조수삼의 시는 대개 전기·후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전기에서는 생활주변이나 자연을 소재로 하여 대상과의 조화를 추구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후기로 올수록 사회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 많아진다. 또 장편시도 눈에 뜨이게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김정희는 두보(杜甫)의 시풍과 근접한다고 평하고 있다.

 

홍경래(洪景來)의 난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서구도올(西寇檮杌)」, 관북지방을 여행하면서 당시의 민중의 비참한 생활상을 묘파한 「북행백절(北行百絶)」 은 조수삼 시가 지니는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밖에도 「석고가(石鼓歌)」·「억석행(憶昔行)」·「병치행(病齒行)」 등도 장편거작으로 인구에 회자되던 작품이다.

 

그리고 당시의 도시하층민들의 생기발랄한 모습을 산문으로 쓰고 칠언절구의 시를 덧붙인 형식으로 되어 있는 「추재기이(秋齋紀異)」, 중국 주변의 여러 나라에 대한 짧은 산문과 시의 결합으로 구성된 「외이죽지사(外夷竹枝詞)」 등은 한문학사상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저서로는 『추재집』 8권 4책이 있다.

▣春日山齋次 白鶴山房韻(송석원에 올라 (登松石園))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

☞북쪽 개울 맑은 그늘 저녁에 오르니,

꽃잎 질펀히 날려 푸른 이끼에 점 찍혔네.

☞인간 세상 봄빛이 어디에서 끝나는가,

온 세상의 영웅이 곧 이 잔에 있거늘.

☞온갖 곳이 희미하여 안개 노을이 쌓였는데,

한 세상 쓸쓸히 석양이 지는구나.

☞수양버들이 물을 쓸고 꾀꼬리는 우는데,

동호의 옛 낚시터가 꿈속에 있네.

◐北澗淸陰晩始開。북간청음만시개。

◑飛花狼藉點蒼苔。비화낭자점창태。

◐人間春色終何處。인간춘색종하처。

◑海內英雄卽此杯。해내영웅즉차배。

◐萬境依迷烟霞積。만경의미연하적。

◑一生怊悵夕陽來。일생초창석양래。

◐垂楊拂水幽鶯囀。수양불수유앵전。

◑夢在東湖舊釣臺。몽재동호구조대。

(大東詩選 卷9)

이 시는 조수삼(趙秀三)이 1786년(정조10)에 결성했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옛터를 찾아 자신의 감회를 읊은 칠언율시로 회(灰)운이다. 봄날을 맞아 송석원에 올라서 호기로운 기분과 한가롭게 지내고 싶은 소망을 드러냈다. 수련은 송석원의 봄 풍경이다. 인왕산 기슭의 송석원 옛터에 저녁에 오르니 개울의 맑은 그늘에 꽃잎이 날려 이끼 위에 떨어진다고 했다. 위항시인들이 모여 시를 겨루던 곳을 방문한 감회다. 함련은 봄날의 취흥이다. 온 세상에는 봄빛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세상의 영웅호걸이라도 한 잔 술의 기분만 하겠느냐고 호방한 기분을 드러내었다. 세도정권의 중심인물이었던 김좌근의 아들로 승승장구했던 이력으로 보아 이런 호기를 부렸을 만하다. 경련은 앞날의 어두움이다. 저녁이 되자 사방이 안개와 노을로 희미해지고 쓸쓸하게 석양이 진다고 하여, 날이 저물어 감을 뜻할 뿐 아니라 자신의 처지도 암울해 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미련은 자신의 소망이다. 송석원 옛터에는 수양버들이 물에 늘어지고 꾀꼬리가 우는데 꿈결인양 동호의 옛 낚시터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한가로운 전원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다.

편찬및간행

저자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閭巷 詩人의 한 사람으로, 兩班이 아니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 가계와 행력이 문헌상에 많이 나타나 있지 않다. 저자의 신분에 대해서, 본집 序에는 “樞密院使를 보좌하는 書記”라고 하였고, 권2 〈林將軍小刀歌〉에서는 “靑海從事로서 軍儲를 按察하였던 인물”이라고 하였으며, 권4 〈將遊藥山出城作〉에서는 “細柳營의 從事官”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中人에 속한 인물이다. 趙熙龍의 「壺山外史」에 따르면, 저자는 풍채가 수려하고 문장과 시에 뛰어났으며 여섯 차례나 중국에 드나들며 중국의 유명한 문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였다고 하였다.

문집에 관련된 기록을 보면, 저자는 1789년에 李性源을 따라 중국에 처음 갔을 때 「秋齋集」과 「經畹詩叢」 15책을 가져가 중국의 문인 朱文翰과 江漣에게 보이고 序文을 받아왔는데, 이것이 본집에 실려 있는 서문이다. 이외에도 「秋齋詩稿」, 「秋齋奇異」, 「秋齋詩集選」, 「經畹總集」 등이 필사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鉛活字本 「秋齋集」 권말에 1865년에 宋伯玉이 지은 「추재시고」 발이 있는데, 이 발문에서 송백옥이 우연히 市廛에서 「추재시고」를 구하여 뒤에 跋을 써서 저자의 손자인 趙重默에게 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저자의 사후에도 세상에 다수의 필사본이 유통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산외사」에는 저자의 시문을 趙寅永이 간행하여 세상에 전하려고 한다는 기록이 있으나, 당시에 간행된 문집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간행되지는 않은 듯하다.

저자의 문집은 寶晉齋의 창업주 金晉桓에 의해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1982년에 보진재에서 발간한 「寶晉齋七十年史」에 의하면, 평소에 저자의 시를 애송하던 김진환이 저자의 시를 6, 7년 동안 편집하여 吳世昌의 題字를 받아 1939년 8월에 자신의 아들 金洛勳이 경영하는 보진재에서 鉛活字로 인행하였다. 이 사실은 속표지의 ‘京城 寶晉齋 刊行’이라는 기록과 뒤표지에 붙은 板權紙에 의해서 확인된다. 卷首題 아래에 校正者로 張鴻植과 李柱浣이 기록되어 있는데, 자세한 인적 사항은 未詳이다. 이 초간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675),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220), 성균관대학교 존경각(D3B-1050)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939년에 연활자로 인행된 초간본으로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장본이다.

序(朱文翰ㆍ江漣 撰), 跋(宋伯玉 撰), 壺山外史(趙熙龍 撰), 寶晉齋七十年史(寶晉齋, 1982) 등에 의함

구성과내용

본집은 8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머리에 金命喜와 坦翁, 申㦉이 쓴 3편의 題辭가 있다. 다음에 중국인 朱文翰과 江漣이 쓴 2편의 序가 있다. 각 권마다 목록을 두었다.

1권부터 6권까지는 저자가 지은 1,500여 수의 詩가 수록되어 있다. 시들은 대략 연대순으로 배열되었으나, 8세 때 지은 오언시 〈詠鶴〉과 12세 때 지은 〈擬古少年行〉이 권1의 처음에 실리지 않은 것을 보면 정확하게 연대를 따져서 배열한 것은 아닌 듯하다. 초반부의 시는 대개 중국과 우리나라를 여행하면서 쓴 기행시들이 주류를 이루어 〈燕行留別〉, 〈葱秀途中〉, 〈憶昔行〉 등의 많은 작품들이 있다. 후반기에 갈수록 사회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 많이 눈에 띈다. 권1에 실린 〈上元竹枝詞〉 15수는 踏橋, 石戰, 九食 등의 정월 대보름 풍속을 소재로 지은 연작시로, 농민들의 생활을 묘사하였다. 권2에 실린 〈西寇檮杌〉은 洪景來의 난을 소재로 한 시로 1,800여 자가 한 편을 이루는 五言詩이다. 저자는 이 작품에서 난이 일어난 원인과 경과, 난을 평정한 결과, 그리고 난을 그치게 할 방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권3에 실린 〈北行百絶〉은 저자가 62세 때 함경북도를 200여 일간 여행하면서 직접 본 농민들의 생활상을 묘사한 100편의 시를 모아 놓은 것으로, 각 편마다 숫자를 붙였고 地名을 附記하여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하는 데 유익한 작품이다. 또 〈次耕織圖韻〉 46수는 耕織圖의 韻에 따라 밭 갈고 김매고 누에 치는 일 등의 농민들의 생산 활동을 소재로 지은 연작시이다.

唱和한 詩들을 보면, 저자는 상당히 폭넓은 교유 관계를 지닌 인물로 보인다. 우선 국내에서는 秋史 金正喜, 山泉 金命喜, 楚亭 朴齊家, 雲石 趙寅永, 石厓 趙萬永, 羽堂 趙秉鉉, 游荷 趙秉龜, 經山 鄭元容, 彝齋 權敦仁 등 당시 쟁쟁한 사대부들과 교유했을 뿐 아니라, 本集 안에서는 西社 또는 西園이라고 칭하는 松石園詩社에 속하는 漁山 丁彝祚, 疋漢 李亶佃, 畫舫 盧允迪, 匏園 鄭大重, 書隱 曺俊民, 野航 金學淵, 而已广 張混, 朴允默, 金洛瑞, 趙熙龍 등과 교유하였다. 또한 6차례의 연행을 통해 중국의 일류 문사들인 吳崇梁, 劉喜海, 江漣, 朱文翰 등과 교유하여, 朱文翰과 江漣은 본집의 서문을 써 주기까지 하였다.

권7에는 〈高麗宮詞〉 22수, 〈奇異〉 71수, 〈外夷竹枝詞〉 83편과 功令詩가 실려 있다. 〈고려궁사〉는 저자가 「靑湖牌史」를 보고 요령을 얻어 중국의 詩體의 일종인 〈竹枝詞〉를 모방하여 지은 시로, 고려 시대의 秘事 또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七言絶句의 형식으로 읊은 것이다. 〈기이〉는 제목 아래 간단한 인물 중심의 일화를 적고 그 내용을 七言律詩로 읊은 것인데, 소재로 다룬 71명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온갖 신분의 사람들을 포괄하였으며, 이름이 없으면 별명이나 모습을 묘사하는 식으로 각각 짧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어, 약동하는 조선 후기 서민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외이죽지사〉는 중국과 우리나라를 제외한 83개국의 풍물을 읊은 것으로, 편 끝에 첨부된 海中諸國과 日本雜詠까지 합하여 모두 133章으로 되어 있다. 저자가 중국 이외의 세계에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 준다. 공령시는 일종의 科體文으로, 저자가 과체문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권8에는 序(5), 記(12), 傳(6), 文(5), 箋(1), 啓(1), 書(7), 贊(2), 銘(2), 跋(1), 識(1), 書後(2), 雜著(7), 賦(2), 歲時記가 있다. 序에는 趙萬永의 회갑에 써 준 〈石厓趙公週甲壽序〉, 趙寅永의 50세에 써 준 〈雲石趙公五十壽序〉가 있으며, 〈允五詩序〉와 〈李伯相廷稷天籟詩序〉에는 시에 있어 기교보다는 老蒼함을 추구해야 하며, 시는 사실적이어야 한다는 그의 詩觀이 나타나 있다. 記에는 〈濟南亭重修記〉, 〈震默大師影堂重修記〉, 〈風詠樓重修記〉 등과 같이 건축물에 대한 중수기와 〈溫井記〉, 〈驅儺記〉, 〈胡翰林畫像記〉 등의 글이 있다.

[溫井記]

溫泉下有硫黃。故味燥性溫。出于礜石者悍熱。然治病勝於硫黃出者。出于丹砂者。味甘而氣不臭。可以延齡養生。丹砂泉天下惟出於驪山。漢之甘泉唐之華淸是也。若礜石出者。亦千百之一也。硫黃泉在在是已。治一切瘡瘍瘇濕麻痺如神。此古人所論著也。余自幼少多病。喜浴溫泉。驪山余未見也。如薊州之行宮。鳳城之湯站。曁東國之宣川煕川平山明川諸泉。粤已一再至。然一例皆硫黃泉。而獨平山泉熱且悍。突趵高尺許。又可湘菜茹燖雞豚云。意或礜石出者非耶。溫陽之溫泉。自勝國時鳴于國中。逮我列聖朝甞屢幸焉。今泉傍有行宮。泉上有湢殿。宮之東有二癈井。卽舊湢云。繚周垣而爲闕門。內而婦寺供御之所。外而臣僚扈從之次。畢備星羅。大抵多傾圮隳。帷帳簾薄屛障几案。凡諸進奉器物。委積於塵埃。而尙不至甚腐敗不可用。盖英廟庚午以後。訖無御幸。距今八十有五年。父老亦無在者。當時事莫從而聞之。可歎也。吾王庶幾無疾病。顧誠斯民之喜幸也。湢殿南北五楹。東西四楹。碧石函其中爲二井。若同室而格其中。井深可六尺。縱可常而橫可尋。三窾其傍。以洩蓄水。出之殿壁之下。故內二井曰上湯曰中湯。外出者曰下湯。水從上湯西北出。折而東出中湯。又折而南則外出爲下湯。熱不甚。始入灼如也。久坐溫溫可愛。若塞窾蓄水則一食頃。二井滿數尺。亦不以水旱冬夏而嬴縮炎凉也。自上湯至下湯。計不下十餘步也。令範其地而鑄巨鼎。待薪樵而煖之。雖日腁千僮之指。必不能若是其無間斷也。吁甚異哉。井無龜龍魚蟹荷芰菱芡。寶玉之玩。雕琢之巧。如驪山薊州者。而石材精良。製作完緻。有足以仰見祖宗盛際事功之鉅麗。規模之宏樸。洵非今人所可慕效彷彿。士庶人毋敢浴上湯禮也。惟我先大王下敎若曰使予方御溫井。民病可瘳也。予將撤洗而與之。况非日用而不過備豫者乎。自今永寬兩井之禁。使吾民共沐恩波。咸躋壽域。大哉王言。此聖德事也。於是乎聾喑跛躄癰瘇瘡痍。杖者舁者負者載者。踵相接於道。而四時無虛日。雖病甚者。不旬日則臥而來步而歸。呻而入歌而出。嗚呼。泉之靈至於此乎。泉之靈至於此乎。歲甲午秋仲。余有癬疥之病。來浴於井。居數日而曰瘳。試飮井水甘。又小硫黃氣。抑所謂丹砂出者此歟。或曰是井也。浴之則病瘳。久不浴則病復作。噫。是豈井之故也。病浴于井者。皆六氣感其外。七情傷其中。沉淫錮結。久而乃發。其治之也。亦將涵潤滲漉消瀜蕩滌。沉淫者洗濯之。錮結者解散之。然後始去。則夫豈有亟至之患哉。徒見肌體之差可。去之若將凂焉。稍久而疾復作。則曰井乎井乎。豈不愚之甚者。余聞廣東有桃花泉。北人之商販者。一與土人交媾。歸未半路而大瘋瘡發。百藥罔效。不得已還飮桃花泉。則不日而爲平。人故多老於其地者。雖飮泉而無男女之事者。無恙而歸。余未知其說信然。然亦其人自取之已。豈曰桃花泉使之然哉。余將歸。記或人說爲井訟。而兼以戒來浴者云爾。

●조선시대 온천 전문가인 조수삼의 온양온천 체험기(1834년)●

옛날 백성은 병이 나도 의원을 찾기 어려웠다. 그저 인근에 온천이 있으면 몸을 담가 병을 치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름난 온천이면 왕과 귀족들의 전유물이 되어 얼씬하기 어려웠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가장 애호하던 온천이 온양에 있었다. 영조는 이 온천을 백성에게 개방하였다. 이에 온천은 사람들로 메워졌다. 조수삼(趙秀三)은 온천욕에 대한 글을 남겨 사람들의 경계로 삼게 하였다.

온천의 밑에 유황이 있으므로 그 물맛이 떫고 성질이 따스하다. 여석(礜石)에서 분출하는 것은 세고 뜨겁지만 병을 치료하는 데는 유황에서 분출하는 것보다 낫다. 단사(丹砂)에서 분출하는 것은 맛이 달고 냄새가 나지 않아 수명을 연장하고 양생하는 데 도움이 된다.1) 단사 온천은 천하에서 오직 여산(驪山)에서만 나는데 한나라의 감천궁(甘泉宮)과 당나라의 화청궁(華淸宮)이 그러 한 예이다.2) 여석 온천 또한 백 개나 천 개 중 하나 정도로 귀하다. 유황 온천은 곳곳에 흔하게 있는데, 일체의 종기나 습종(濕腫), 마비 증세 등을 귀신같이 치료한다. 이러한 것은 옛사람들이 지은 글에 나온다.

 

내가 어릴 때부터 병이 많아 온천욕을 좋아하였다. 중국의 여산은 내가 본 적이 없지만 계주(薊州)의 행궁(行宮)이나 봉성(鳳城)의 탕점(湯站),3) 그리고 우리나라 선천(宣川)과 희천(煕川), 평산(平山), 명천(明川) 등의 온천은 한두 번 가보았다. 그러나 하나같이 유황온천이었다. 오직 평산의 온천은 뜨겁고 세며 물이 한 자 정도의 높이로 솟구쳐 나오는데, 또 야채를 데치거나 닭과 돼지를 삶을 수도 있다고 한다. 아마도 여석에서 나오는 온천이 아닌가 싶다.

 

온양온천은 고려 때부터 우리나라에서 명성을 날렸고 우리 역대 임금님들이 여러 번 나들이를 하셨다. 지금 온천 곁에 행궁이 있으며 온천 위쪽에 욕실 전각이 있다. 행궁 동쪽에 쓰지 않는 온정이 둘 있다. 예전 목욕간이라 하는데 담장을 두르고 궐문이 만들어져 있다. 안쪽으로는 시중드는 궁녀와 내시들의 처소, 바깥쪽으로는 호종한 신하들의 숙소가 두루 잘 갖추어져 총총히 늘어서 있다. 대부분 기울어지고 무너졌지만, 휘장이나 발, 병풍, 서안 등 여러 가지 임금께 올리던 기물들은 먼지 속에 버려진 채 쌓여 있어도 아직은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못쓰게 되지는 않았다. 대개 영조 경오년(1750) 이후 거둥이 없었으니 지금까지 85년이 되었다. 부로들도 남아 있는 이가 없어, 당시의 일을 얻어 들을 데가 없으니, 탄식할 만하다. 우리 임금님은 질환이 없는 듯하니, 이것이 진실로 우리 백성들이 기뻐하고 다행으로 여기는 것이다.

 

욕실 전각은 남북 방향으로 기둥이 다섯이고 동서 방향으로 기둥이 넷이다. 옥돌로 함 가운데를 빙둘러 붙여서 두개의 온정을 만들었다. 마치 한 방인 것 같지만 가운데를 막아 놓았다. 온정의 깊이는 6자 정도인데 세로는 16자가 되고 가로는 8자가 된다. 그 곁에 세 개의 구멍이 나 있어 그곳에서 고인 물이 흘러나온다. 전각의 벽 밑으로 나오기 때문에 안쪽의 두 온정을 상탕(上湯), 중탕(中湯)이라 하고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하탕(下湯)이라 한다. 온천수가 상탕 서북쪽에서 분출되어 동쪽으로 꺾여 중탕으로 들어가 분출되고 다시 남쪽으로 꺾어지면 바깥으로 나와 하탕이 된다.

 

온천수는 그다지 뜨겁지는 않아 처음에는 뜨겁지만 한참 앉아 있으면 따뜻하여 좋아할 만하다. 만약 분출되는 구멍을 막아 물을 고이게 해놓으면 밥 한 끼 먹을 정도의 시간에 두 온정에 몇 자 높이로 찬다. 가물다거나 아니면 겨울이나 여름이라 하여 수량이 줄어들거나 수온이 변화하지는 않는다. 상탕에서 하탕까지의 거리는 적어도 10여 보는 족히 될 듯하다. 그 땅 크기만큼 큰 솥을 만들고 땔감을 준비하여 물을 덥히고자 한다면 날마다 천 명의 젊은이들이 손에 굳은살이 배도록 일을 하더라도 온천에서 끊임없이 뜨거운 물이 나오는 것처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 참으로 기이하다.

 

온정에는 여산(驪山)이나 계주(薊州)와 같이4) 거북이나 물고기, 게와 같은 동물이나 연꽃과 마름과 같은 물풀도 없고 완상할 만한 보옥이나 기교있게 아로새긴 치장도 없지만, 돌의 재질이 뛰어나고 제작이 완벽하고 치밀하다. 조종(祖宗)의 태평성세에 공업이 위대하고 화려하며 규모가 굉장하면서도 질박하였다는 것을 우러러 살필 수 있다. 정말 요즘 사람들이 사모하여 비슷하게나마 본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비나 서민들은 감히 상탕에서 목욕을 하지 않는 것이 예의다. 그런데 오직 우리 돌아가신 선왕께서 하교하시기를 “나에게 온정에 가라고들 하는데, 백성들도 병을 치유해야 한다. 내가 목욕을 하지 않을 때는 백성에게 주어라. 게다가 매일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예비용으로 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제부터 영원히 두 온정의 출입을 금지하는 규정을 풀어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하늘의 은혜로운 물에 함께 목욕을 하여 모두 태평성대에서 천수를 누리게 하라.” 하셨다. 위대하도다, 대왕의 말씀이여. 이는 성덕(聖德)의 일이다.

 

이에 귀가 먹은 자, 말을 못하는 자, 다리를 저는 자, 종기나 부스럼이 난 자 등이 지팡이를 짚고 들 것에 실리고 등에 업히고 수레에 실려서 줄줄이 길을 메우며 찾아와 사시사철 빈 날이 없게 되었다. 비록 병이 심한 자라 하더라도 열흘이 되지 않아 누워서 왔다가 걸어서 돌아가게 되었고 신음하면서 들어왔다가 노래를 부르면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아아, 온천의 영험함이 이런 정도라니!

 

갑오년(1834) 8월 내가 옴이 걸려 온천에 목욕하러 왔는데, 머문 지 며칠만에 나았다. 온천의 물을 마셔보았더니 달콤하고 또 약간 유황 냄새가 났다. 이른바 단사에서 분출하는 온천이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은 이 온천에서 목욕을 하면 병이 낫지만, 오래 목욕을 하지 않으면 병이 재발한다고 한다. 아, 이 어찌 온천 때문이겠는가? 병이 들어 온천에서 목욕을 하는 사람은 모두 바깥으로부터 육기(六氣)5)의 병증에 걸리고 칠정(七情)이 그 마음을 손상시켜 음침한 기운이 굳게 엉겨 오래되면 병이 생긴다. 이를 치료하자면 또한 적셔주고 걸러주며 씻어줄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음침한 것은 씻어내고 엉긴 것은 풀어준 다음에야 비로소 병이 사라지게 된다. 그러니 어찌 갑작스럽게 이르는 병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저 살갗에 조금 차도가 있는 것만 보고 마치 오래 있으면 몸이 더럽혀질까 재빨리 가버렸다가, 조금 있다가 질병이 다시 도지게 되면, ‘온천 때문이다’, ‘온천 때문이다’ 하니, 어찌 심히 어리석은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듣자니, 광동(廣東)에 도화천(桃花泉)이 있는데, 북쪽에서 온 등짐장사들이 한번 그곳 사람과 정을 통하게 되면, 돌아가는 길에 반도 못 가서 큰 종기가 생겨난다고 한다. 백약이 무효라서, 부득이 도화천으로 되돌아와 물을 마시면 하루도 되지 않아 정상이 되고 이 때문에 그 땅에서 늙어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한다. 또 온천수를 마시더라도 남녀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은 아무 탈 없이 돌아간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이 사실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사실이라도 그 사람이 자초한 일일 뿐이니, 어찌 도화천이 그렇게 한 것이라 하겠는가?

 

내가 장차 돌아가려 할 때 어떤 사람의 말을 기록하여 온천의 입장을 밝히고, 겸하여 목욕하러 오는 사람을 경계한다.

 

1) 오잡조(五雜組)》에 따르면 온천수 아래에는 주사나 유황, 여석이 있다고 하였는데 여석은 독성이 매우 강한 물질이다.

2) 여산에 있는 감천궁(甘泉宮)은 한무제(漢武帝) 때의 피서궁이며 화청궁(華淸宮)은 당명황(唐明皇)이 지은 별궁(別宮)으로 양귀비(楊貴妃)와 온천욕을 즐기던 곳이다. 감천궁에 온천이 있다는 기록은 확인하지 못하였다.

3) 모두 중국으로 사신 갈 때 행로에 있어 들르던 곳으로 온천이 있었다.

4) 여산(驪山)에 당 현종(玄宗)의 별궁 화청궁(華淸宮)이 있는데, 매년 10월 1일 양귀비(楊貴妃)를 데리고 가서 온천욕하고 놀았다. 계주(薊州)의 행궁(行宮)에 온천이 있고 그곳이 화려하였다.

5) 한의학에서 한(寒), 열(熱), 조(燥), 습(濕), 풍(風), 화(火)의 여섯 가지 병증(病症)을 말한다.

 

<해설>

우리나라에 이름난 온천이 많았다. 이수광(李睟光)은 『지봉유설』에서 우리나라 도처에 온천이 있는데 평산(平山),연안(延安),온양(溫陽),이천(伊川),고성(高城),동래(東萊)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 중 이천의 갈산(葛山)이 가장 최고라 하였다. 또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온양의 온천은 한 온정에서 찬 물과 뜨거운 물이 동시에 나온다고 하였고 길주(吉州)의 온수평(溫水坪)에는 길가의 개울에 온천수가 거세게 분출하여 한겨울 눈 속에서도 김이 몇 리에 걸쳐 자욱하다고 하였다. 또 울진과 삼척 경계의 온천은 바위에서 물이 나와 폭포를 이룬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 이러한 기이한 온천이 많았다. 그 중에서 왕실에서 자주 이용하던 온천이 바로 온양에 있었다. 온양온천은 세종과 세조가 자주 찾았고 그 이후에도 꾸준히 왕실에서 애용하였던 듯하다. 아예 그곳에 행궁을 세웠는데 위의 글에서 보듯 상당히 화려한 시설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온양온천은 임금이 사용하는 온정과 백성들이 사용하는 온정이 따로 있었다. 제일 위쪽 상탕은 임금이 이용하고 하탕은 백성이 이용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세조 때 이미 확립되어 임금이 직접 사용하는 온정 외에는 일반 백성도 자유롭게 사용하게 조처하여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정신을 잊지 않았다. 영조는 여기에 더하여 상탕과 중탕 모두를 백성들이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하였다.

 

금제가 풀리자 사람들이 온양온천으로 몰려들었다. 들것에 실려 온 자는 걸어서 가고 신음하면서 온 자는 노래하면서 돌아갔다니, 병이 나은 백성들은 영조의 성덕을 노래하였음직하다.

 

그러나 온천이 만병통치의 효험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온천에 와서 몸을 씻으면 병이 낫기는 하지만 한참 지나면 다시 병이 도진다고 불평을 하였다. 조수삼은 병이 갑자기 이르는 것이 아니요 또 한꺼번에 낫는 것이 아니므로, 온천욕을 만병통치의 약으로 여겨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전설에 나오는 도화천을 예로 들었다. 도화천에 온천욕을 온 이가 그곳 사람과 정을 통하면 창병이 생겨 온천욕을 하여야만 병이 나았다. 결국 병 때문에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조수삼은 온천욕에 매달리는 것이 도화천의 정사와 같다고 하였다.

 

온양온천은 온천욕을 위한 공간이지만 역사가 서려 있는 문화의 공간이기도 하다. 정조는 온양온천에 느티나무를 세 그루 심었는데 사도세자가 이곳을 찾은 것을 기념해서다. 그리고 비를 세웠는데 바로 영괴대비(靈槐臺碑)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영괴대기(靈槐臺記)』에 온양온천의 행궁 그림이 채색으로 그려져 있다. 지금 그곳에는 온양관광호텔이 들어섰다. 서민이 이용하기 어려우니 세조나 영조의 여민동락의 뜻이 근대에 다시 퇴색한 것이라 하겠다.

 

* 온양온천의 역사에 대해서는 김남기, 「조선왕실과 온양온천」(『문헌과해석』3 23호, 2003년 여름)에 자세하다.

[驅儺記]

高辛氏有不才子。死爲耗鬼。入人家則窮窶乃已。此不經之甚也。嶺南俗尤信之。每自歲除日。操梃麾爇炬火。鼓譟而群逐之。使聽之者苦失屢夜睡矣。周禮有方相氏大儺之儀。古之人其或取斯說乎。雖然鬼陰物也。宜其逐之乎夜。而今乃繼之於晝者。抑何意也。余甞聞兩峯羅君聘曰能見鬼。鬼亦於白晝與人雜處。而但人近則避。遂作鬼趣圖而傳之。余未知其說信然否。不爾則今夫弄貨幣作威福。輸公物於尾閭者。卽人而可逐也。如余之無才識徒哺啜。日耗廩粟者。又當在逐中也。其或有寓於是乎。噫。時余在嶺南觀察幕中故云爾。

[養素閤記]

余當寒有病。而所處公舘。虛踈多風。每睡時入小閤中。坐不能矯首。臥不能展膝。始則氣悶欲叫起撒狂。然顧其溫密。便於調養。故着力忍耐。一再宿則漸覺安適。久之遂以謂高堂大廈。無足居也。是便是安。樂而至於相忘也。今天下廣大。而人之處之也。軒豁暢快者少。局促迫隘者多。往往有過妄謬悖之事。使其人皆能動心忍性而安樂之。夫豈或如是也哉。盖躁人居多氣使之然也。此君子所以素其位而行。不願乎其外也。取以名吾閤曰養素。作斯記以告同志者。

 

傳에는 〈鬻書曺生傳〉과 〈崔烈婦傳〉, 〈金將軍傳〉, 〈東里先生傳〉, 〈李亶佃傳〉 등이 있는데, 특이한 것은 전마다 끝에 ‘經畹子曰’이라고 하여 자신의 贊을 붙인 점이다. 또한 〈經畹先生自傳〉이 있어 간략하나마 저자의 삶의 노정을 볼 수 있다. 文에는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에 대한 祭文과 〈合祠五忠文〉, 그리고 〈康草堂上樑文〉이 있는데, 개인에 대한 제문이 없는 것도 한 특징이다. 書에는 중국의 문사인 劉喜海에게 보내는 편지가 3편이고, 나머지는 崔生, 吳生 등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잡저에는 〈不可說說〉, 〈記文可尙事〉, 〈定州陳弊事目公移文〉, 〈謾錄〉, 〈賣盆松者說〉 등이 있다. 〈세시기〉는 우리나라의 歲時 風俗을 기술한 것으로, 신라와 고려 때의 舊俗을 倂記하였다.

권말에 「壺山外史」, 「對山集」, 「碧梧堂遺稿」에 실린 저자의 傳이 附記되었고, 1865년에 지은 宋伯玉의 跋이 있다.

 

※ 참조: 위 조삼수와 조중묵의 내용은 인터넷 검색시 한양인으로 기록이 되였습니다 . 그간 대종회에서 검토로 하고 연구로 했지만, 우리의 전대 족보에도 없고, 어디 파인지로 파악이 않되여 대종회 차원에선 나중이라도 후손들이 차자와서 확인한 경우 임원회의를 거처 처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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