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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선조시대(1567~1608)의 영양의 문화와 인물]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12. 29.

[영양의 문화와 인물]

[선조시대(1567~1608)의 영양의 문화와 인물]

1. 선조의 등극과 붕당정치의 전개

임진란이 발생한 선조집권기는 조선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들이 활약한 시대이자 사화(士禍)로 얼룩진 훈구정치기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사림(士林)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붕당정치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조선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자 중요한 시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선조의 왕위계승은 조선왕조 방계에서 왕위를 계승한 첫 케이스이다. 선조 이전은 비록 대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골육상쟁이 있었으나 방계혈통이 대권을 차지한 적은 없었다.

선조 이전의 왕위계승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조 이성계는 신의 왕후 한 씨 소생의 방우·방과·방의·방간·방원·방연 등의 6남과 신덕 왕후 강 씨 소생의 방번․방석이 있었다. 그런데 태조는 겨우 11세의 막내인 의안대군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여기에 위기의식을 느낀 이방원이 1398년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조준, 하륜, 박포, 이지란 등 휘하 부하들을 동원하여 방석과 방번 및 정도전·남은 및 방석의 장인이었던 심효생을 제거한 ‘1차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이후 태조는 상심하여 9월에 세자 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곧 2대 군주 정종이며, 태조는 상왕(上王)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1400년(정종2년) 일명 ‘방간의 난’또는 ‘박포(朴包)의 난’이라 부르는 ‘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여, 방원이 박포와 동복형제인 방과를 제거한다. 결국 이방원이 승리함으로써 정종은 왕위를 방원에게 물려주니, 그가 제3대 태종이다.

이런 골육상잔의 결과는 이성계가 현실적인 힘을 무시하고 대권을 막내 이방석에게 물려주고자 한 잘못된 선택의 결과였다.

태종(재위 1400.11~1418.8)은 정비인 원경왕후 민 씨 사이에 4남(양녕대군․효령대군․충녕대군․성녕대군) 4녀와 후궁 효빈 김 씨(경녕군), 신빈 신 씨(함녕군․온녕군․근녕군) 등의 9명의 후궁에게서 8남 13녀를 두어 총 12남 17녀의 총 29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 숫자는 조선왕조에서 최고로 많은 자녀수를 기록한다. 태종은 1404년(태종 4) 10세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을 세자로 책봉했으나 1418년 세자를 3子인 충녕대군으로 바꾸었다. 이 사건은 우리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 세종이 형인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을 제치고 대권을 장악하여 이후 태평성대를 이루는 데 태종이 결정적인 기여를 한 역사적인 선택이었다.

 

이후 문종이 조선왕조 처음으로 장자로써 왕위를 계승했으며, 이후 문종의 외아들인 단종이 즉위했다. 그러나 1453년 세조의 계유정란과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에 의해서 단종이 물러나고,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한다. 이 사건은 전두환, 노태우 세력이 1979년 10·26사태 이후 12·12쿠데타에 의해서 집권하여 많은 국민적인 저항을 받았듯이, 사육신과 생육신 등의 많은 저항세력을 양산했다.

이후 조선의 정치세력은 한명회, 신숙주, 정인지, 구치관 등의 공신과 윤임과 윤원형 등의 외척으로 구성된 훈구세력이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등장하여 선조가 집권하기 전까지 조선정치를 좌우한다.

예종은 형인 의경세자의 죽음으로 세조의 둘째 아들로써 1년 2개월 집권했다. 예종은 한명회의 여식인 장순왕후 한 씨와의 사이에 대권을 계승할 인성대군을 두었으나 아쉽게도 인성대군이 일찍 죽었다. 예종은 다시 한백륜의 여식인 안순왕후와의 사이에 왕위 계승권자인 제안대군과 나중에 갑자사화의 원인을 제공한 임사홍의 며느리가 되는 현숙공주를 두었다. 그러나 인수대비와 한명회의 결탁에 의해서 왕위계승 1순위인 제안대군을 제치고 의경세자와 인수대비의 둘째아들인 성종이 집권하게 된다.

성종이 형인 월산대군 대신 왕위를 계승한 것은 한명회의 사위인 것이 크게 작용했다. 왕위계승 1순위였던 제안대군과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은 결국 왕위계승을 둘러싼 왕실세력과 훈신의 각축 속에서 희생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성종 이후 연산군은 성종과 폐비 윤 씨의 외아들로 집권하고, 1506년의 중종반정에 의해서 성종과 정현왕후 윤 씨의 외아들인 중종이 집권한다.

중종 이후 집권한 인종은 중종과 장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으나 1년도 집권하지 못하고 일찍 붕어한다. 이후 중종과 문정왕후에서 난 명종(재위 기간 1545.7~1567.8)이 12살에 집권했으나 실질적으로 문정왕후에 의해 국정을 대리로 처리하던 수렴청정이 8년간 지속되었다. 이와 같이 선조가 즉위하기까지는 장자계승원칙은 지켜지지 않았으나 적자계승의 원칙은 지켜졌다. 그러나 이런 적자계승의 원칙이 결국 명종대에서 무너졌다.

명종과 인순왕후 심 씨(人順王后 沈氏, 1532년∼1575년)의 외아들이자 왕위계승 1순위인 순회세자가 1563년(명종18년)10월 23일 열세 살에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은 조선왕실의 후계 문제를 오리무중의 상태로 만든 국가적인 중대사이자 비극이었다. 결국 22년간 재위했던 명종은 정비 1명과 순빈 이 씨, 숙의 신 씨 등 6명의 후궁에게서 자녀를 생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후계자도 제대로 정하지 못하고 1567년(명종22년) 34세에 갑자기 훙(薨; 죽음) 했다.

이후 인순왕후 심 씨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1499년∼1572년)의 합의에 의해서, 중종과 친정의 배경이 없는 후궁인 창빈 안 씨의 둘째아들 덕흥군의 아들인 하성군 이균이 꿈에서 생각해보지 못했던 용상에 오르는 조선왕조 초유의 사건이 발생한다. 이 분이 조선 14대 군주인 선조(1552~1608)이다. 선조는 1552년(명종7년) 11월 11일(임자년 임자월 기축일생) 중종의 7남인 덕흥군 이초(李岧)와 정인지의 증손녀인 하동부대부인 정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덕흥군은 하원군 정, 하릉군 인, 하성군 균 등의 아들을 두었는데, 셋째 아들인 하성군 이균이 조선 최초로 후궁의 후손으로써 대권을 차지하여 조선 최초의 대원군이 되었다. 전 민주통합당 이해찬 대표의 13대조가 바로 선조의 백형인 하원군 정이다.

하성군이 군주가 된 것은 조모인 창빈 안 씨(昌嬪安氏, 1499~1549)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중종은 단경왕후 신 씨, 인종의 생모인 장경왕후 윤 씨, 명종의 생모인 문정왕후 윤 씨 등의 3명의 왕후를 두었다. 후궁으로는 모 방송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여인천하’에서, 문정왕후와 대립각을 세웠던 복성군의 생모이자 ‘뭬야?’라는 용어로 인구에 회자되었던 탤런트 도지원 씨가 열연한 경빈 박 씨, 중종반정의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나중에 조광조를 제거한 기묘사화를 주도한 홍경주의 딸인 희빈 홍 씨, 선조의 조모인 창빈 안 씨, 해안군의 생모인 숙의 홍 씨, 덕양군의 생모인 숙의 이 씨 등 9명이 있었다.

경빈 박씨와 반대로, 창빈 안 씨는 문정왕후와 관계가 좋아서 명종과 창빈 안 씨의 자손들인 영양군과 덕흥군의 소생인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런 인연이 결국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하성군이 후궁의 손자로써 군주로 등극하게 된 결정적인 배경이다. 후궁인 창빈 안 씨 후손은 선조 이후 조선왕조를 이은 왕이 되었다. 이것은 선조의 조모인 창빈 안 씨의 음덕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창빈 안 씨의 묘소는 명당으로 유명한 동작동 국립묘지에 있는데, 후궁 가운데 유일하게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창빈 안 씨 사후 460년이 지난 현재 좌청룡 자락에는 고 이승만 대통령 묘소가 우백호 자락에는 고 김대중 대통령 묘소가 있다. 현재도 전직 대통령을 좌우에 거느린 복이 많은 인물이 창빈 안 씨라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대권구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왕실의 가계와 왕실과 인연을 맺은 외척 및 유력 권세가의 가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선조는 40년 7개월 재위(1567∼1608)하면서 8명의 부인에게서 14남 11녀의 총 25명의 자녀를 두었다.

선조는 정비로 의인왕후 박씨와 계비로 인목대비 김씨를 두었고, 후궁으로 공빈 김 씨·인빈 김 씨·순빈 김 씨·정빈 민 씨·정빈 홍 씨·온빈 한 씨·귀인 정 씨·숙의 정 씨·숙용 김 씨·소원 윤 씨를 두었다. 이 가운데 공빈 김 씨는 임해군·광해군, 인빈 김 씨는 의안군·신성군·정원군·의창군과 정신옹주, 순빈 김 씨는 순화군, 정빈 민 씨는 인성군·인흥군·정인옹주·정선옹주·정근옹주, 정빈 홍 씨는 경창군과 정정옹주, 온빈 한 씨는 흥안군·경평군·영성군·정화옹주를 낳았다.

25명의 자녀수는 태종(12남 17녀)과 성종(16남 12녀) 다음으로 많고, 정종(17남 8녀)과 같다. 선조 다음으로 세종대왕(18남 4녀)과 중종(9남 11녀)이다. 대체적으로 조선전기 보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왕실의 후손이 귀했다.

즉 광해군 1남 1녀, 인조 6남 1녀, 효종 1남 7녀, 현종 1남 3녀, 숙종 6남 2녀, 영조 2남 7녀, 정조 2남 2녀, 순조 1남 5녀, 헌종 1녀, 철종 5남 1녀(다섯 왕자는 모두 일찍 죽음), 고종 6남 1녀를 두었고, 마지막 군주인 순종은 자녀가 없었다. 이와 같이 조선후기의 대권경쟁은 장자상속보다는 형제계승과 방계승통으로 대권을 잡는 경우가 많았다.

선조는 즉위 후 2년 6개월 만에 반남 박 씨 가의 증흥조 박소(朴紹)의 손녀인 의인 왕후를 왕비로 둔다. 의인왕후 박씨(1555~1600)는 그 당시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이라 불릴 만큼 후덕하고 미모도 출중했으나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는 석녀였다. 정식 왕후가 자녀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은 왕위후계구도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결국 후궁 사이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싼 심한 경쟁과 갈등을 유발하게 된다. 특히 공빈 김 씨와 인빈 김 씨의 경쟁은 치열했다.

선조는 명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명종의 3년 탈상이 끝날 때까지 혼인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혈기 왕성한 청년기에 궁중요리를 담당하는 소주방 나인인 공빈 김 씨와 사랑에 불이 붙어 서장자인 임해군(1574~1609)과 서차자인 광해군(1575~1641)을 낳는다. 사실 선조와 공빈 김 씨는 학역재 정인지를 매개로 친인척이 된다. 즉 정인지의 4남 정경조의 아들 정승우의 딸이 공빈 김 씨의 할머니이다.

또한 정인지의 5남 정상조의 아들인 정세호가 선조의 외조부이다. 이와 같이 공빈 김 씨의 할머니와 선조의 생모인 하동부대부인은 6촌간이다. 따라서 공빈 김 씨의 부친인 김희철과 선조가 8촌간이니 공빈 입장에서는 아버지 외가인 진외가의 9촌 아저씨뻘인 선조와 부부관계가 된 것이다.

그러나 선조의 첫사랑인 공빈 김씨(1553~1577)는 1577년 산후 후유증으로 25살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생모이자 강력한 후원자인 공빈 김 씨의 죽음은 광해군이 1592년부터 1608년까지의 세자 시절을 불안하게 보내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공빈 김 씨와 라이벌 관계였던 인빈 김씨(1555~1613)는 공빈 김 씨가 죽은 해에 첫 아들인 의안군을 낳고 이듬해 신성군을 낳았다. 이후 신성군은 광해군의 대권 경쟁자로 부상한다.

인빈 김씨는 4남 5녀(의안군․신성군․정원군․의창군․정신옹주․정혜옹주․정숙옹주․정안옹주․정휘옹주)의 많은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첫째 의안군은 1588년 열두 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둘째 신성군(1578~1592)이 결국 인빈 김 씨의 장남의 역할을 담당했다. 신성군은 그 당시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받던 신립장군의 자녀와 결혼한다. 이때까지 대권 후보는 공빈의 자녀인 임해군과 광해군, 인빈의 자녀인 신성군 등 3명으로 압축되었으나 임해군은 성격상의 문제가 많아 결국 광해군과 신성군의 양자구도로 되었다.

결국 1591년 2월 영의정 이산해· 좌의정 정철· 우의정 류성룡의 의정부 3정승 체제하에서 세자책봉문제인 ‘건저의’가 정국현안으로 부각된다. 이후 광해군으로 책봉해야 한다고 정철이 먼저 주장하다가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던 선조의 노여움으로 정철의 서인이 몰락하는 사건까지 발생하는 ‘건저의(建儲議 )사건’이 발생한다.

이 당시 신성군에게 애정이 많은 선조의 마음을 간파한 이산해가 인빈 김 씨의 오라버니 김공량에게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내세워 신성군을 제거하려 한다고 모함하여 결국 '정여립옥사'로 피해를 본 동인이 서인을 몰락시킨 사건이 바로 '건저의 사건'이었다.

정여립 역모 사건과 기축옥사, 그리고 1591년의 건저의 사건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리는 데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동인들은 서인을 배척할 때 기축옥사를 처리한 정철의 처리문제로 이발·이산해·정인홍 등의 강경파와 류성룡·김성일·우성전 등의 온건파로 의견이 갈렸다.

이때부터 강경파를 북인이라 부르고 온건파를 남인이라 부른다. 남인과 북인이라 부른 이유는 그 당시 북인의 이발이 북악산 아래에 거주하고 남인의 우성전이 남산 아래에 거주했기 때문에 남인이라 불렀다. 한편 선조의 사랑을 받던 신성군이 임란 시 피란 중에 병을 얻어 병사한다. 결국 임진왜란은 신성군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광해군은 세자로 책봉되고 전란 중에 많은 공적을 쌓아 대권에 더욱 다가가는 계기가 된다.

 

한편 의의왕후 박 씨는 아들을 두지 못하여 선조의 애정을 받지 못하다가 1600년 죽는다. 결국 1602년 51세의 선조는 다시 김제남의 딸인 19세의 인목왕후 김 씨를 계비로 맞이하여 1606년 영창대군(1606~1614)을 낳았다. 영창대군의 탄생은 또 다른 대권경쟁에 불이 붙었다. 임란 후인 1599년 주로 남명 조식과 화담 서경덕의 문인으로 구성된 북인은 이산해·홍여순·이이첨·정인홍·이경전·기자헌·허균 등의 대북파와 류영경·남이공·김신국·유희분·박승종 등은 소북파로 갈라졌다. 이러한 대·소북의 분열은 영창대군의 출생 이후에 더욱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1602년 이후에 영의정을 역임하면서 정국을 주도하던 류영경은 인빈 김 씨의 5녀인 정휘옹주의 남편이자 자신의 손자인 류정량을 통하여 선조가 광해군과 갈등의 골이 깊다는 것을 간파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한다. 이후 정인홍·이이첨·이경전 등의 대북파는 광해군을 지지하고 류영경으로 대표되는 소북파는 영창대군을 지지하였으나 갑자기 선조가 서거하는 바람에 류영경의 소북파는 몰락하고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결국 정인홍과 이이첨으로 대표되는 대북파의 지원 하에 집권한 광해군이 영창대군과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 동복 형인 임해군,인조의 동생인 능창군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마저 서궁에 유폐시킴으로써 선조 후손들의 대권경쟁은 결국 골육상쟁으로 결론이 났다.

한편 인빈 김씨의 셋째 아들인 정원군(1580~1619,나중에 원종으로 추존됨)은 구사맹의 다섯째 딸인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 具氏)와 결혼하여 능양군 종·능원군 보·능창군 전을 두었다. 장남인 능양군 종이 바로 1623년 인조반정에 의해 숙부인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인조이다.

결국 공빈 김 씨와 인빈 김 씨와의 경쟁은 처음에는 광해군이 집권하여 공빈 김 씨가 승리했으나 결국 인빈 김 씨의 승리로 결판이 났다. 후궁인 창빈 안 씨의 손자로서 집권한 선조는 적자승계를 원했으나 선조의 바람과 달리 선조 이후의 대권은 후궁인 공빈 김 씨의 자식인 광해군과 후궁인 인빈 김 씨의 손자인 인조가 차지한다. 이것이 선조의 운명이자 역사의 아이러니다.

 

2.선조시대의 정치적 상황

1)16세기 조선의 정치적 상황

16세기 조선사회는 연산군이 재위하면서 무수한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소위 4대 사화(巳火)가 발생한 시기이다. 영남사림의 종장으로 추앙받든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조의제문을 지어 간접적으로 세조의 단종을 죽이고 집권한 것을 훈구파들이 트집잡아 김종직의 문하의 제들들이 제거당하던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그 이후 폐비 윤씨 사사사건에 의해 다시 많는 선비들과 후구파들이 같이 화를 당한 갑자사화가 연산군 시절에 일어났다. 1506년 박원종, 유순정,성안의 등이 주도한 중종반정에 의해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여 조광조,김정, 김식 등의 기묘사림들이 개혁정치를 단행했으나 주초위왕 사건과 위훈삭제 사건에 의해서 개혁파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사림들이 사사되고 귀양가는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중종이 죽고 잠시 인종이 즉위하여 사림정치의 시작되는가 했으나 인종이 즉위 1년도 되지 않고 흉을 당하고 문정왕후의 소생인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주도한 소윤들이 인종의 외삼촌인 대윤의 윤임과 사림파들을 제거하는 사화를 일으킨다. 이것이 1545년 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결국 1567년에 집권한 선조가 즉위하면서 선비들의 집단인 사림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사람정치가 본격화 되었다. 그러나 1575년을 기점으로 동인과 서인으로 붕당되는 을해당론이 발생하여 본격적인 붕당정치가 시작되어 1589년에 많은 동인들이 희생되는 정여립모반사건과 정철의 건저의 사건으로 다시 동인들이 집권하는등 붕당정치가 격화되고 있던 시점에 결국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영양에서도 많은 인물들이 임진왜란에서 맹활약하는데, 이렇게 16세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경험하면서 16세기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2)선조집권기 정치적 변동

①붕당발생(乙亥黨論,1575)

이조전랑직 문제로 구세력을 대표하는 이이의 문인인 심의겸, 신세력을 대표하는 이황의 문인인 김효원이 대립한 사건으로 붕당발생의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영남학파의 동인과 기호학파의 서인으로 붕당되었다. 서인은 대체로 서울근방의 생활근거를 둔 고관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학문적으로 이이, 기대승, 김인후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정책이 주로 현실문제에 역점을 두어 제도개혁을 통한 부국안민에 치중한 반면 동인은 영남의 이황과 조식문인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이밖에도 개성의 서경덕의 문인도 가담하여 심성론에 치중하여 도덕적 자기절제를 통해 부패를 막으려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②정여립 모반사건(己丑獄死,1589)

동인계열의 급진파인 정여립이 전라도 진안에서 대동계를 조직하여 황해도까지 조직을 확대하다 조사를 맡은 서인 정철이 수많은 동인계 인사를 역모사건으로 연루되어 제거한 사건을 말한다.

③정철 건저의(세자책봉 건의) 문제(1591)

좌의정 정철이 인빈 김씨가 신성군을 낳자 빨리 세자를 정할 것을 건의하자 신성군파가 왕을 충동질하여 정철등을 숙청한 사건을 말한다.

④남인․북인 분당(1591)

정철처벌문제를 둘러싸고 이황계열은 온건한 처벌을 주장하고 조식․서경덕 계열은 강경한 처벌을 주장하다가 동인계열이 남북으로 분당되어 선조 후반기는 서인(이이),남인(이황),북인(조식․서경덕)으로 정립되었다.

⑤임진왜란(1592)

조․일 7년전쟁

⑥정유재란(1597)

⑦북인계열 대북․소북으로 분당

정철일파의 실각으로 동인 특히 북인이 우세한 가운데 임진왜란이 시작된 후에 후궁인 공빈김씨 소생인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인목대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추대하려는 세력과의 사이에서 갈등이 야기되었는데 광해군 추종세력을 ‘대북’, 영창대군 추종세력을 ‘소북’이라 하였고, 선조가 돌아가고 광해군이 즉위(1608)하자 임진왜란 중 항일전쟁을 주도했던 대북파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⑧일본과 국교재개(1607,에도막부)

일본의 도쿠카와 막부가 조선과의 국교재개를 간청해와 사명당 유정을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하고 조선인 포로 7천여 명을 되돌려 받은 뒤 국교를 재개하였다(왜란중 포로로 끌려간 유학자중 이황의 문인인 강항이 귀국후 간양록이라는 견문기를 저술, 또한 이탈리아로 팔려간 사람으로 안토니오 코레아가 있다). 이후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에 이르기까지 12회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약 250년간 평화관계를 지속했다.

⑨광해군 즉위(1608)대북파 집권

⑩기유약조 채결(1609)

 

3.선조집권기 영양의 인물과 문화

1)청계 김진과 영양의 교육

16세기 후반 영양문화와 학술을 주도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인물은 청계 김진(1500~1580)이다. 그는 안동 임하 내앞 본가에서 출생하여 1580년 청기 초동 흥림초사에서 서거하였다. 청계 김진은 진사에 합격하고 오직 자제교육과 지방사회에서 교육자로서 사회교화에 힘쓴 인물로 약봉 극일, 귀봉 수일, 운암 명일, 학봉 성일, 남악 복일 등 다섯 아들 모두를 과거에 합격시킨 의성 김씨 천전파 중흥조이다. 특히 학봉은 퇴계의 정맥을 이은 인물이다. 의성 김씨는 서산 김흥락, 김대락, 김동삼 등 독립운동 유공자만 38명에 달한다.

김진이 1550년대 후반부터 영양 청기에서 농장을 경영하면서 영양최초의 서당인 영산서당(英山書堂) 창건을 주도한 것은 영양문화창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청계 김진(1500~1580)등 모두 23명이 1578년에 발의한 영산서당 건립에 동참했다. 영산서당은 1577년(宣祖10) 9월에 그 당시 청기면 초동椒洞 (현 靑杞面)에 일시 우거하던(영양 돈간재 및 주사-경북 기념물 142호. 돈간재 편액은 김진의 증손자 표은 김시온공의 작품) 김진金璡선생이 향내 노소인사 수십 인으로 더불어 주창하고 발기하여 창설하게 되었다. 그 당시 발기인은 김진金璡, 김호金虎, 남문성南文成, 오시준吳時俊, 남필성南弼成, 남천수南天授(남손의 현손으로 참봉), 김응현金應鉉, 오익수吳益壽,오민수吳敏壽(문월당 오극성 부친)형제, 남천흥南川興, 정홍鄭洪, 남윤조南胤曺, 권응우權應虞, 남경南璟, 조광인趙光仁,조광의趙光義형제 등 16인이 각자 곡물 2곡(1斛은 10斗)을 출자하여 그 곡식을 해마다 장리로서 거두어서 장차 서당을 창설코자 하였는데, 청계공靑溪公 김진金璡 선생은 영양이 영해부寧海府에 속하여 인구가 적고 풍속이 미개하여 향풍과 예문이 뒤떨어진 것을 느끼고 타향인데도 불구하고 곡물을 15곡을 회사하여 영산서당 건립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 곡식을 가지고는 서당을 건립할 수가 없어서 매년 향회를 열고 곡물을 거두었는데 이듬해 거둔 곡식이 18석 4두 6승이라 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해 추가로 권성權誠, 남국간南國幹, 박봉서朴鳳瑞, 이귀승李貴承, 남사문南士文, 남사명南士明, 남인록南仁錄등 7인이 가입하였다. 서당을 창설한 후 7년이 지나서 청계선생의 장자인 김극일金克一과 권춘계權春桂, 구찬조具贊祚, 오극성吳克成(吳敏壽의 子)등 4인이 추가로 가입하여 부자간에도 서당건립에 참여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1592년(宣祖25)에 뜻하지 않은 임진란이 일어나자 국사가 어지럽고 인심이 흉흉하여 사람들이 흩어지는 바람에 자연적으로 10여년 간은 향회와 학도의 수업이 1602년(宣祖35)까지 중단되었다.

청계 김진의 팔순잔치는 청기에서 육남매와 일가 친척들이 모여서 할 만큼 청계와 영양의 인연은 깊었다. 결국 81세를 일기로 청기에서 돌아간다.

한편 영산서당은 그 후 이시명李時明선생이 당장堂長으로 있을 때, 시인 백운자白雲子, 권상일權尙逸 선생이 학관學官으로 있었던 일도 있다. 그 때 석계선생은 문풍조성과 사자양성士子養成에 힘을 써서 향내 유림과 더불어 영산서당을 서원으로 승격시킬 것을 주창하여 1655년(孝宗6)에 서원으로 승격 되었다. 숙종 20년에 사액賜額(임금이 서당 이름을 지어준 것) 하였다. 이와 같이 영산서당은 존재 이휘일과 갈암 이현일(1627~1704)의 부친인 석계 이시명(1580~1674)에 의해서 영산서원으로 개창되었으며, 영양 사족의 학문과 문화 활동의 중심 공간으로 기능을 하였다.

이 당시 영양에는 복현될 때까지 향교가 없었으므로 향내 선비들의 수학처修學處로는 영산서원 뿐 이었으나, 숙종 9년에 복현이 되고 영산하에 관아를 영건하고 객사를 신축할 때 건물이 퇴락하므로 부득이 현동으로 이건하게 되었다. 이건한 연대는 상고詳考할 수 없으나 복현한 1683년(숙종9)에 서원으로 승격한지 28년째이니 이때를 전후하여 이건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새로 세운 서원은 마루와 행랑채가 훨씬 넓고 시장과 떨어졌으며 배산임수背山臨水하고 앞에는 층암절벽의 경치가 있으며 강이 있어 학도學徒의 수양과 공부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1694년 (숙종 20)에 ‘영산英山’이라고 사액되었으며, 그 뒤 김성일金誠一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현재는 옛터만이 남아있어 서원터라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참고문헌 : 『전고대방典故大方』『경상북도사』(경상북도, 1983). 『英陽郡誌』

 

2)임진왜란과 영양의 인물과 문화재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영양에서도 국난극복을 위하여 많은 분들이 헌신했는데, 낙안오씨의 오시준과 오수눌 부자, 함양오씨의 오극성,오윤성 형제, 한양조씨의 조광의와 조검.조건.조전 등 그 아들과 조카의 활약상이 두드러 진다. 이 당시 직접 군인으로 전쟁에 참가한 오극성, 오윤성 형제와 제1차 회맹( 선조29년 3월3일), 제2차 회맹 (선조 29년 9월 28일), 제3차 회맹 (선조 30년 정유재란중 9월 22일)의 팔공산 회맹에 오수눌, 조광의, 조검,조전,조건 등의 이름이 보인다. 한편 영해부에는 석계 이시명의 조부인 이함과 형인 이시청이 의병에 참가하였다. 안동과 예안지역의 의병은 조목(趙穆, 1524~1606),안동열읍향병대장(安東列邑鄕兵大將) 김해(金垓, 1555~1593),진사 배용길(裵龍吉, 1556~1609) , 진사 이숙량(李叔樑, 1519~1592), 향병대장에 생원 김윤명(金允明, 1541~1604), 군량도감에 류복기(柳復起, 1555~1617), 향병대장 이정백(李庭栢, 1553~1600)등이 활약했다.

 

(1)낙안오씨와 영양인물 활동상

정축보 서(丁丑譜 序, 1817년, 순조 17)에 의하면, 오씨의 근원은 해주에서 나왔다. 나누어져 낙안군(樂安君)에 봉해진 사람은 고려의 삼사좌윤 오사룡(吳士龍)으로 그가 귤배공(橘杯公)의 비조가 된다. 을축보(1985년)에 의하면, 낙안 오씨는 16개파로 구성되어 있다. 파별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영양에는 국헌(菊軒) 수눌파(受訥派)가 분포하고 있다. 현재 감천리에 세거하고 있다.

오시준(吳時俊, 1527~1613)은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언중(彦中), 호는 미상. 훈련참군별시위(訓練參軍別侍衛) 오명동(吳命同)의 손자이며, 오원로(吳元老)의 아들로서 영해에서 태어났으나, 말년에 영양읍 감천리에 살았다. 1562년(명종 17년)에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제수받았다.

그는 체력과 용맹이 출중하여『육도삼략(六韜三略)』에 통달했으며, 무예로써 명성을 크게 떨쳤다. 1579년(선조 12년) 창주진관구(昌州鎭管區)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조선시대 각 도의 병마절도사 아래에 있던 종3품 무관직)를 제수받았다. 이 때 선조는 그의 재주와 무예를 기리어 진서(陣書)와 손오병서(孫吳兵書)를 하사했다. 1584년(선조 17년) 칠원 현감(漆原縣監)으로 부임하여, 덕으로 다스리며 선정(善政)에 힘썼다. 이 때 현민(縣民)들이 세운 오시준 현감 애민선정 송덕비(吳時俊縣監愛民善政頌德碑)가 있으며, 나라에서는 그의 장재(將才)를 찬양하여 원사비(遠射碑)를 훈련원(訓練院)에 세우기도 했다.

그가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서인의 송강(松江) 정찰(鄭澈)과 교유 할 때 정철은 그의 재주로 크게 등용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귀향하여 청기면에서 김진(金璡)과 교유하며 지낼 때, 고향의 풍속이 문화되지 못함을 개탄하고 김진과 더불어 의연금을 모아서 영산서당(英山書堂)을 세워서 지역의 젊은 선비들을 교양하였다.

그리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연로하여 전장에 참전할 수 없어서 그의 둘째 아들 수눌(受訥)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휘하에 보내 나라 위해 충성토록 하였다. 그는 만년에 소일하고 거처하기 위해 연소정(蓮沼亭)(영양읍 감천리 소재)을 지었다. 현 건물은 창건 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쳐 1960년에 중건한 것이다.

이 정자는 좌우로 무이산(武夷山)과 취소산(吹嘯山)이 둘러 있고 앞으로는 수십 척의 암석이 병풍처럼 둘러있는데 이 절벽은 군내 유일한 천연기념물114호로 지정된 측백 수림이 울창하며 봄과 여름에는 진달래, 철쭉, 개나리꽃이 만발하며 가을에는 단풍나무가 경치를 더 한층 아름답게 한다. 정자 아래로 흐르는 반변천은 그 깊이가 수십 척이며 강가에는 춘추로 수석을 즐겨 찾는 사람들이 많이 온다.

국헌 오수눌(1565~1648)은 오시준(吳時俊, 1527~1613)의 둘째 아들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났다. 1590년(선조 23년) 그가 25 세 때,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될 때 수행하기로 되었으나 발병으로 행하지 못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김성일이 경상우도 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로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고 각 고을에 소모관(召募官)을 보내 의병을 모우는 한편,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일 때, 그는 김성일의 휘하에서 의병활동 고무 · 의병 모집 · 전투력 강화 등의 시행에 많은 공을 세웠다.

또한, 김성일의 창의(倡義)를 효유(曉諭)하고 군성(軍聲)을 떨치게 하라는 명과 부친의 명에 따라, 그는 영해부사 한효순(韓孝純,1543~1622)의 창의에 가담해서, 같이 관병 수천명과 인근 의병과 합세하여 북쪽에서 영덕으로 도주하는 왜병 십수명을 참수하였다. 당시 행재소(行在所)로 임시 수도인 의주(義州)에 있는 선조에게 남쪽의 전황을 알리기 위해, 그는 주건(朱楗) · 김봉정(金鳳楨)과 함께 수개월의 장도와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하였다.

선조는 이들의 충절에 감탄하고 주건은 수문장에, 그에게는 직장(直長), 그리고 김봉정은 부장(部將)으로 임명하면서 그 곳에 머물도록 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그는 권율(權慄) 장군이 전라에서 행주(幸州)로 북진했을 때 권 장군의 진영에 가담하여 공을 세우는 데 일조하였다. 29세인 1594년(선조 27년) 1월 15일에 시행된 별시 무과(別試武科)에 급제했다. 이 해 가을에 창의하여 곽재우 의병장을 찾아 접견하고 의령(宜寧)에 주둔했다. 당시 왜병이 인근 해안으로 퇴각한 지라, 그는 이광악(李光岳)을 부장으로 삼고, 김덕령(金德齡) · 이시언(李時言)을 좌우영(左右營)으로 삼아 배를 타고 동래까지 바로 직행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의 이러한 전공으로 3월~4월 동안 선무랑 군자감 주부(宣武郞軍資監主簿) · 창신교위 훈련원 판관(彰信校尉練院判官) · 현신교위훈련원 첨정(顯信校尉訓鍊僉正) 등을 지냈다.

1597년(선조 30년) 6월 정유재란 때 그는 정기룡(鄭起龍,1562~1622) 대장 휘하의 부대장으로서 28개 군의 관병을 거느리고 고령 녹가전(綠檟田)에서 이희춘(李希春) · 황치원(黃致遠) 장군 등과 함께 왜병 백여명을 토벌했다. 그리고 그는 용담천월변(龍淡泉越邊)에서 정기룡 장군과 합세하여 왜적 수백을 참살하여 적의 왼쪽 귀를 잘라서 달구지에 싣고 체찰사(體察使)에 인계하였는데,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경탄하면서 명장임을 극찬하였다. 같은 해 8월 22일 그는 정기룡 장군과 울산을 진공하여 왜적 4백명을 참수하였으며 왜적은 도산(島山) 소굴로 퇴각했다. 다음날 명나라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도산을 칠 때 그는 정기룡 장군과 함께 선봉으로 유격하여 참수한 왜적이 660여명에 이르렀다.

1598년(선조 31년) 정월에 영해부서(寧海府西) 고은현(古隱縣)(현 영양읍 현리) 창고가 도적떼에 의해 수난을 겪으매 정기룡 장군으로부터 도적을 평정하라는 명을 받고 귀향하였다. 먼저 양친을 배알하고 이날 저녁 창고 주변에 군사를 매복시켜 도적떼를 잡았는데, 모두 고향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죄는 용서할 수 없었으나 정상이 가없고 또한 용서해 주자는 친명을 어기지 못해 모두 용서해 주었으며 창곡(倉穀)을 안전하게 지켰다. 이 때 각지 창곡이 탕진되었으나 이 곳 창고만 보전되어 그해 봄 주위의 여러 읍에 종자로 공급하였다. 도 유형문화재인 현이동모전오층석탑은 임진왜란 때 국헌공 오수눌 장군이 탑 뒤에 숨어 있다가 창고를 탈취하려는 도적 때를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603년(선조 36년) 정략장군 훈련원 습독관(定略將軍訓鍊院習讀官), 1605년(선조 38년) 소위장군(昭威將軍)을 지냈다. 1610년(광해군 2년) 모친 한씨(韓氏)의 병이 극심했을 때 단지(斷指)하여 8년을 연명하게 하였다. 그가 66세 때에 감계정사(甘溪精舍)를 건립하고 매년 중양절에 국화주로 빈객과 오랜 친구를 맞이하여 기쁘게 즐기며 호를 국헌(菊軒)이라 했다.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綠券)에 등록되었으며 문집으로『국헌실기(菊軒實紀)』가 있다.

오수눌과 관련된 관련유적이 1687년 건립된 영양읍 감천1리 835번지에 소재하는 화수재(花樹齋)이다. 일제 강점기 민족혼을 노래했던 항일시인 오일도(吳一島) 선생의 애절한 정서가 전해오는 오일도 생가 우측에 자리잡고 있다. 낙안오씨종택은 오시준의 둘째 아들인 오수눌장군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옆에 오수눌장군을 모시는 사당인 충효사가 방형의 토석담장 안에 별도의 공간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현재 감천마을에는 애국지사이자 항일 시인인 일도 오희병의 생가가 있다. 그의 조부인 오시동(吳時東)이 1864년(고종 1)에 건립하였고,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8호에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감천마을에는 낙안오씨 문중 재실로,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아담한 팔작기와집인 송산재(松山齋)가 있다.

오수눌(吳受訥, 1565~1648)은 본관은 낙안(樂安). 자는 사신(士愼), 호는 국헌(菊軒). 오시준(吳時俊)의 둘째 아들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났다. 1590년(선조 23년) 그가 25 세 때,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될 때 수행하기로 되었으나 발병으로 행하지 못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김성일이 경상우도 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로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고 각 고을에 소모관(召募官)을 보내 의병을 모우는 한편,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일 때, 그는 김성일의 휘하에서 의병활동 고무 · 의병 모집 · 전투력 강화 등의 시행에 많은 공을 세웠다.

또한, 김성일의 창의(倡義)를 효유(曉諭)하고 군성(軍聲)을 떨치게 하라는 명과 부친의 명에 따라, 그는 영해부사 한효순(韓孝純)의 창의에 가담해서, 같이 관병 수천명과 인근 의병과 합세하여 북쪽에서 영덕으로 도주하는 왜병 십수명을 참수하였다. 당시 행재소(行在所)로 임시 수도인 의주(義州)에 있는 선조에게 남쪽의 전황을 알리기 위해, 그는 주건(朱楗) · 김봉정(金鳳楨)과 함께 수개월의 장도와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하였다.

선조는 이들의 충절에 감탄하고 주건은 수문장에, 그에게는 직장(直長), 그리고 김봉정은 부장(部將)으로 임명하면서 그 곳에 머물도록 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그는 권율(權慄) 장군이 전라에서 행주(幸州)로 북진했을 때 권 장군의 진영에 가담하여 공을 세우는 데 일조하였다. 29세인 1594년(선조 27년) 1월 15일에 시행된 별시 무과(別試武科)에 급제했다. 이 해 가을에 창의하여 곽재우 의병장을 찾아 접견하고 의령(宜寧)에 주둔했다. 당시 왜병이 인근 해안으로 퇴각한 지라, 그는 이광악(李光岳)을 부장으로 삼고, 김덕령(金德齡) · 이시언(李時言)을 좌우영(左右營)으로 삼아 배를 타고 동래까지 바로 직행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의 이러한 전공으로 3월~4월 동안 선무랑 군자감 주부(宣武郞軍資監主簿) · 창신교위 훈련원 판관(彰信校尉練院判官) · 현신교위훈련원 첨정(顯信校尉訓鍊僉正) 등을 지냈다.

1596년 3월과 9월의 1차와 2차 팔공산회맹에 영양의

1597년(선조 30년) 6월 정유재란 때 그는 정기룡(鄭起龍) 대장 휘하의 부대장으로서 28개 군의 관병을 거느리고 고령 녹가전(綠檟田)에서 이희춘(李希春) · 황치원(黃致遠) 장군 등과 함께 왜병 백여명을 토벌했다. 그리고 그는 용담천월변(龍淡泉越邊)에서 정기룡 장군과 합세하여 왜적 수만을 참살하여 적의 왼쪽 귀를 잘라서 달구지에 싣고 체찰사(體察使)에 인계하였는데,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경탄하면서 명장임을 극찬하였다. 같은 해 8월 22일 그는 정기룡 장군과 울산을 진공하여 왜적 4백명을 참수하였으며 왜적은 도산(島山) 소굴로 퇴각했다. 다음날 명나라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도산을 칠 때 그는 정기룡 장군과 함께 선봉으로 유격하여 참수한 왜적이 660여명에 이르렀다.

1598년(선조 31년) 정월에 영해부서(寧海府西) 고은현(古隱縣)(현 영양읍 현리) 창고가 도적떼에 의해 수난을 겪으매 정기룡 장군으로부터 도적을 평정하라는 명을 받고 귀향하였다. 먼저 양친을 배알하고 이날 저녁 창고 주변에 군사를 매복시켜 도적떼를 잡았는데, 모두 고향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죄는 용서할 수 없었으나 정상이 가없고 또한 용서해 주자는 친명을 어기지 못해 모두 용서해 주었으며 창곡(倉穀)을 안전하게 지켰다. 이 때 각지 창곡이 탕진되었으나 이 곳 창고만 보전되어 그해 봄 주위의 여러 읍에 종자로 공급하였다. 도 유형문화재인 현이동모전오층석탑은 임진왜란 때 국헌공 오수눌 장군이 탑 뒤에 숨어 있다가 창고를 탈취하려는 도적 때를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603년(선조 36년) 정략장군 훈련원 습독관(定略將軍訓鍊院習讀官), 1605년(선조 38년) 소위장군(昭威將軍)을 지냈다. 1610년(광해군 2년) 모친 한씨(韓氏)의 병이 극심했을 때 단지(斷指)하여 8년을 연명하게 하였다. 그가 66세 때에 감계정사(甘溪精舍)를 건립하고 매년 중양절에 국화주로 빈객과 오랜 친구를 맞이하여 기쁘게 즐기며 호를 국헌(菊軒)이라 했다.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綠券)에 등록되었으며 문집으로『국헌실기(菊軒實紀)』가 있다. 오경선(吳敬先, 1606~1683)은 오수눌(吳受訥)의 아들로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효성이 지극했다. 1637년(인조 15년) 그의 부친이 병환이 깊어 위중했을 때 단지(斷指)하여 구하기도 했는데, 그 사실이『여지(輿誌)』에 적혀 있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증 공조참판(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贈工曹參判)을 증직(贈職)받았다.

임진왜란 당시에 영양에 입향한 인물들이 많았다. 1550년 안동에서 출생한 김우건은 김선평의 13세손으로 임란시 수비면 오기동에 입향하여 안동김씨 현감공파의 입향시조이며 후손들이 오기동과 영양읍에 세거하고 있다.

김구흥은 김녕김씨로 사육신과 더불어 단종복위운동을 꾀하다 죽은 충의공 김문기의 6세손으로 상주에서 임란당시 석보면 소계동으로 입향하였는데 그의 후손들이 소계동에 세거하고 있다.

 

(2)함양오씨 집성촌 대천리와 오극성 장군의 임란시 활약상

①함양오씨 집성촌 대천리와 문화재

함양오씨의 세거지인 영양군 영양읍 대천리와 청기면 청기리 일대에는 오씨 일가의 유적들이 곳곳에 보존되어 있다. 대천리는 옥선대와 비파담을 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이곳은 오랫동안 함양 오씨 대천 종중들이 세거해 온 마을이다. 영해로 통하는 대로가 마을 앞을 지나고, 서쪽으로는 장수 계곡 맑은 물이 흘러서 동천과 합류한다. 마을 입구에 오극성의 장남 용계 오흡이 세 개의 거북바위 위에 건립한 삼구정이 있다. 삼구정을 지나면 도로 좌측으로 문월당 오극성이 태어난 고택이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이곳은 ‘오극성 고택’으로 불리며, 2006년 2월16일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98호에 지정되었다. 이 종택에서 남쪽 언덕으로 몇 걸음 옮기면 오극성이 지은 정자 문월당이 신축되어 있다. 문월당은 문월당 종택 개축시에 뒷산 아래로 옮겨 중건하였기에 근대식 건축 양식을 보인다. 문월당은 임진왜란 때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인 문월당 오극성(吳克成)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자인데, 현재의 건물은 1969년에 중건하였다. 원래 대천 2리에 저택과 정자가 있었으나 화재가 발생하여 영양 서부리로 이건하여 살았다. 그 뒤에 다시 수비면 신원으로 이사하여 약 100여년을 살다가 다시 대천 1리로 옮겨 문월당 종택을 개축할 때 함께 중건한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문월’이라는 아호는 이백의 시 󰡐술잔을 잡고 달에 묻는다 [把酒問月]󰡑에서 뜻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백이 낭만적으로 시를 읊었던 심정과는 사뭇 다르다.

오극성이 지은 <문월당> 시는 충정을 향한 그리움 또는 숭상하던 절개와 지절을 읊은 의미가 더 크기 때문이다.

 

푸른 하늘 저 달은 언제부터 있었는가 靑天有月來幾時

나는 지금 술잔을 멈추고 한번 묻노라 我今停杯一問之

……(중략)

지금 사람은 옛날 달을 보지 못했지만 今人不見古時月

지금 달은 옛날 사람에게도 비쳤다네 今月曾經照古人

옛사람과 지금 사람 물처럼 흐르는데 古人今人若流水

모두 밝은 달을 이렇게 보아 왔으리라 共看明月皆如此

-이 백, 「把酒問月」

 

옛날의 달은 지금의 달과 같은데 古月猶今月

지금 시절은 옛 시절 아니구나 今時非古時

술잔 멈추고 기다린 지 오래인데 停盃邀爾久

봉우리에 솟는 일 어찌 그리 늦나 出峀問何遲

댓잎 성글어 잎 사이로 드는 빛 竹瘦光侵葉

가을날 오동에 가지 뚫는 그림자 梧寒影透枝

능히 천 말의 술도 기울이겠거늘 能傾千斗酒

백 편의 시가 필요한 건 아니네 不必百篇詩

-오극성, 「題問月堂」

 

이 시와 같이 문월당에는 오극성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날마다 시와 술로 여생을 즐겼지만, 마음에는 늘 충절을 품고 나라를 근심했던 뜻이 담겨 있다. 류동수는 「문월당중건기」에서 시에 담긴 의미를 이렇게 풀었다.

“무릇 달은 흐리고 맑음[陰晴], 어둡고 밝은[晦明] 때가 있고, 둥글고 기우는[盈虛]는 이치가 있다. 대개 선생은 마땅히 날마다 충정을 계획하였으나 다 쓰지 않았고, 승리를 하였으나 더불어 공을 다투지 않았다. 그리하여 공훈록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 삼등에 그치고, 벼슬은 낭관에 그쳤다. 이는 모두 흐려서 맑지 않고, 어두워서 밝지 않은 것이다.

‘봉우리에 솟는 일 어찌 그리 늦나[出峀問何遲]’는 말은 후대를 기다리겠다는 뜻일 것이다.” - 柳東銖, 「問月堂重建記」

대천교회 우측 전면에는 오삼성(吳三省, 1641~?) 효자비각이 위치하고 있다. ‘효자청암함양오공삼성지려비(孝子靑巖咸陽吳公三省之閭碑)’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고, 단 칸 규모의 맞배기와집 안에 둘러져 있다. 다시 영해로 가는 도로변에 오르면 얼마 되지 않아 산자락에 펼쳐진 고가들이 눈길을 끈다. 이곳이 고월마을로, 마을 중심부에는 1880년대 건립된 오창범 가옥이 위치하고 있다. 오창범 가옥은 토석담장 사이로 난 3칸 규모의 평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6칸, 측면 4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다. 이어 좁은 길을 따라 산 쪽으로 올라가면 산수유와 향나무가 어우러진 평지가 있고, 그곳에 1948년에 오승봉(吳承鳳)이 건립한 송원정이 있다.

마을 입구에 절벽으로 된 바위가 있는데 이것을 옥선대(玉仙臺)라 한다. 추수(秋水) 엄순봉(嚴舜奉, 1903~1938)이 태어난 마을이다. 엄순봉은 김좌진 장군을 도와 조국의 광복운동을 하였으며 조선인 아나키스트 연맹에 가입하였다. 1935년 상하이 조선인거류민회 부회장으로 일제와 내통하던 이용로(李容魯)를 살해하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6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38년 순국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②오극성,오윤성 형제의 임란시 활약상

함양 오씨의 시조 오광휘(吳光輝)는 고려 때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좌복야를 지냈고, 명종 조에 명주에 출몰한 외적을 격퇴한 공으로 추충정란광국일등공신(推忠靖亂匡國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이어 삼중대광·금자광록대부에 오르고 함양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보성 오씨에서 본적을 나누어 본관을 함양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함양오씨(咸陽吳氏)는 고려 말~조선 초를 이어오면서 대사성을 지낸 오세룡(吳世龍), 이조판서를 지낸 오중원(吳仲元)등 수많은 문관을 배출한 명문가로 자리매김해 왔다.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오극성은 함양군 오현필(吳賢弼)을 상조(上祖)로 한다. 16세를 지나 오중원(吳仲元)이 있으니 벼슬이 태재(太宰)였다. 오중원이 관찰사 오엄(吳儼)을 낳았다. 뒤에 아들 오강(吳江)은 직산현감이며, 손자 오덕산(吳德山)은 통례원 인의이며 증손 오필(吳滭)은 중부장이며 현손 오민수(吳敏壽)는 참봉이다.

조선 초기 창신교위 중부장을 지낸 오필(吳滭, ?~1493)이 청송 진보에서 영양의 하원리로 옮겨왔는데, 바로 함양오씨의 영양 입향조이다. 이후 통정대부를 지낸 오민수를 거쳐 임란 때 많은 공을 세웠던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 1559~1671)과 오윤성 형제가 함양오씨가문을 현달시키는데 공헌한다. 오민수와 무안박씨 박붕의 따님사이에 난 오극성, 오윤성 형제는 임란과 그 이후 17세기 전반기까지의 활약하면서 함양오씨가문을 중흥시킨다. 오극성(吳克成, 1559~1617)은 자는 성보(誠甫)이며, 호는 문월당(問月堂)이고, 본관은 함양이다. 부친은 오민수(吳敏壽)이고, 모친은 무안박씨 박붕(朴鵬)의 따님이다. 1592년(선조25)에 왜적이 침입하여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충성스러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한 절구를 읊었다.

나랏일을 어찌 견디며 말하랴 國事那堪言

외로운 성에 이미 도움 끊어졌네 孤城已絶援

남쪽 고을에 의로운 선비 없으니 南州無義士

누구와 함께 충성스런 귀신될까 誰與作忠魂

-『문월당집』, <見人避亂吟示 壬辰>

임진왜란 때,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1559~1617)은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분연히 일어나, 아우 오윤성과 함께 무과에 응시하여 형제가 나란히 급제, 험난한 구국의 길을 걸었다. 선조께서 그 모습을 남달리 여겨 선전관에 제수하였다. 그 뒤에 적의 정세를 자세히 탐지하여 돌아오는 등 소임을 다하여 충성을 드날렸다. 1596년(선조29)에 황간현감에 제수되어 수령된 자의 기강과 윤리로 모범을 보였다. 1598년(선조31)에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으나, 10월에 통제사 이순신의 막하에 동생 오윤성과 같이 들어가 협찬한 공이 인정되어 삼등 공신으로 공훈록에 올랐다. 1601년(선조34)에 봉상시정에 제수되고 정3품 하계 통훈대부의 품계에 올랐으나 자신을 이익으로 꾀하는 일을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영양 대천리 옥선대 아래에 문월당을 짓고 은거하였다.

1617년(광해9)에 평양을 방문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었다.

죽음을 앞두고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내 평생 나라에 보답하기를 다하였으나 죽어도 오히려 한이 남는다. 너희는 모름지기 부지런히 배우고 입신양명하여 임금 섬기기를 아비 섬기듯 하면 어찌 아비의 뜻을 체득한 효도가 아니겠느냐”라고 하고, 향년 59세로 졸하였다. 문집으로『문월당집』4권2책이 있는데 부록으로『임진왜란일기』가 포함되어 있다.

문월선생문집』은 2권(건 곤) 1책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체제는 다음과 같다. 첫머리는 류치명과 이돈우가 쓴 서문이 장식하고 있다. 권1은 6편의 시와 1편의 상소, 서간문 및 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2는 임진일기(上), 권3에는 임진일기 하편과 <黃間榜諭文>이 실려 있으며 권4는 부록으로 만사, 묘표 등의 행장류와 발문이 실려 있다. 부록으로 「선무원종훈록 전지」와 「장악원계첩」도 별첨되어 있다.

아우 오윤성은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거제도 앞바다에서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영양에서 유일하게 해전에 참전하여 전공을 세운 장군으로 꼽힌다. 문월당은 3남1녀를 두었다.

 

③, 오극성 자녀들의 17세기 활동상

오극성은 오흡, 오익, 오연의 삼형제와 딸 하나를 두었다. 딸은 현감 이대규에게 시집갔다. 세 아들 가운데 맏아들인 용계 오흡(1576~1641)은 대천리에서 태어나 본가를 지키고, 둘째아들인 우재(愚齋) 오익(吳瀷)과 취수당(醉睡堂) 오연(吳演, 1598~1669)이 세상을 피해 청기에서 살았다. 함양오씨의 세거지인 대천리는 옥선대와 비파담을 낀 빼어난 풍광 속에 자리한 마을로, 오랫동안 함양 오씨들이 세거해 온 마을이다. 영해로 통하는 대로가 마을 앞을 지나고 있고, 서쪽으로는 장수 계곡 맑은 물이 흘러서 동천과 합류한다.

마을에는 입구에 용계 오흡이 세 개의 거북바위 위에 건립한 삼구정이 있다. 삼구정은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의 장자인 오흡이 세운 정자이다. 삼구정을 지나가면 도로 좌측변으로 문월당 오극성이 태어난 문월당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오극성 고택’으로 불리며 2006년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98호에 지정되어, 말끔하게 단정되어 있다. 이 종택에서 남쪽 언덕으로 몇 걸음 옮기면 오극성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문월당이 있다. 문월당은 문월당 종택 개축시에 뒷산 아래로 옮겨 중건하였기에 근대식 건축 양식을 보인다.

대천교회 우측 전면에는 오삼성(吳三省, 1641~?) 효자각이 위치하고 있다.‘효자청암함양오공삼정지려비(孝子靑巖咸陽吳公三省之閭碑)’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는 비석을 두른 비각은 단 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다.

다시 영해로 가는 도로변에 오르면 얼마 되지 않아 산자락에 펼쳐진 기와집 들이 눈길을 끈다. 이곳이 고월마을로, 마을 중심부에는 오창범 가옥이 위치하고 있다. 토석담장 사이로 난 3칸 규모의 평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6칸, 측면 4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인 정침이 자리하고 있다. 뒤이어 오창범 가옥 앞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산 쪽으로 올라가면 산수유와 향나무가 조화롭고 양지바른 곳에 1945년에 오승봉(吳承鳳)이 건립한 송원정이 있다.

오극성의 맏아들인 오흡(吳潝,1576~1641)은 자는 선원(善源), 호는 용계(龍溪)이다. 1576년(선조9)에 영양 대천리에서 출생하였다. 성품이 굳건하고 재략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일찍이 13세때 논어와 중용을 배우고 약관무렵에 성재 금난수와 퇴계의 고제인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1541~1596)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익혔다. 이에 간재는 퇴계선생의 필적과 성학십도를 용계에게 주었다. 간재는 농암 이현보의 종손으로 무려 12년간이나 퇴계 밑에서 성리학의 정수를 터득한 퇴계의 고재로 이름과 자 호를 모두 퇴계가 지어줄만큼 퇴계가 신임한 제자로 퇴계의 언행을 모아 저술한 『계산기선록』을 남겼다. 또한 퇴계의 명으로 천문을 관찰하기 위해 선기옥형과 혼천의를 제작하였으며 녹전 원천리에 오계정사를 지어 후학을 가르쳤다. 따라서 용계는 퇴계-간재-용재로 이어지는 퇴계의 재전제자로 볼 수 있다. 광해군조에 이이첨이 모후를 유폐한 데 분개하여 여러 선비와 더불어 그를 참하자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1621년 8월 대북정권의 부패상과 이이첨의 권력농간을 비판하는 상소를 김시추 등 안동과 상주 유생 400여 명이 올린 󰡐청참이이첨소󰡑는 오흡에 의해 작성되었다. 그 뒤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이듬해인 1637년에 삼전도의 굴욕을 겪게 되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향리인 대천리 반월산 아래에 내려와 초옥을 짓고 은거하였다. 삼귀정이라 편액하고 사명대를 지어 숭정처사로서의 삶을 이어가면서 표은 김시온과의 인연이 깊었다. 1639년(인조17)에 그의 절행을 가상히 여겨 승훈랑 호조좌랑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용계문집』2권1책이 있다.

우재(愚齋) 오익(吳瀷,1591 ~ 1671)은 문월당의 2자로 일찍 학문을 접하고 당시 백호(白湖) 임제, 오산(五山) 차천로,월사 이정구와 더불어 시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해월 황여일(1556~1623,병진년 기해월 병오일 계사시생)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한편 난고(蘭皐) 남경훈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난고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해월 황여일은 20세에 학봉의 중형인 귀봉 김수일(金守一,1528~1583)의 딸과 혼인한 인물로 해월은 바로 청기면에 농장과 영산서당을 건립하여 영양의 문화와 교육에 크게 공헌한 청계 김진의 손서이자 학봉의 조카사위가 된다. 이런 연유로 우재는 청기에 기반을 둔 처가와 인연이 깊은 해월문하에서 수학한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해월의 장인인 귀봉은 1555년 사마시 합격후 1569년 가을 운암 김명일, 남악 김복일과 같이 한양에서 과거를 준비하다가 김명일의 죽음으로 과거를 포기하고 내앞과 청기를 오가면서 부친을 봉양하고 백운정과 돈간정을 오가면서 독서로 세월을 보냈는데, 이즈음에 해월도 처가의 청기를 출입하면서 우재에게 학문을 전수한 것으로 보인다. 귀봉의 아들인 김용과 김철은 해월의 처남이다. 따라서 우재는 퇴계-학봉-해월-우재로 이어지는 퇴계의 삼전제자로 퇴계학맥을 이은 영양의 성리학자이다. 한편 서애의 학맥을 이은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에게도 수학함으로서 우재는 학봉과 서애 양 문하에 출입한 인물이다.

1636년에 남한산성의 치욕을 듣고 분개하며, 이때부터 세상에 나갈 생각을 끊고 있었는데, 이 무렵 세상을 피해 청기로 와있던 운천 김용(1557~1620)의 아들이자 학봉의 종손자인 숭정처사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 1598~1669)이 그를 이 고을 이웃에 맞이하여 살게 한 것이다. 오익은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0호인 청계정(靑溪亭)을 짓고 돈간재에서 거처하던 김시온,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 석계 이시명(1590~1674), 석문 정영방(1577∼1650), 영은(靈隱) 조정곤, 임천(臨川) 조정헌, 참의(參議) 신홍립1558~1638)등과 함께 왕래하며 고금을 토론하고 마음속의 느낀 바를 서로 시로써 읊조리며 은자(隱者)의 삶을 영위하였다.

표은 김시온은 현 안동 천전리(내앞) 학봉 김성일의 부친 청계(靑溪) 김진의 증손자이다. 병자호란때 나라가 청에 항복하자 예전에 증조부 청계공이 터전을 이루어 놓은 청기리로 들어가 은거하다가 우재와 땅을 분할해 가질 정도로 절친한 사이가 됐다.

  우재의 처음 호는 청계(靑溪)였다. 정자를 청계정이라 이름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학봉의 부친 청계공의 호와 같고 서로 멀지 않은 지역의 선배에 대한 죄송함이 있었다. 이에 청계란 호를 우재로 바꾸고 정자에도 우재라는 현판을 걸어두었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주는 단서가 해월(海月) 황여일의 연보에 나타나 있다.

  연보 '6년 갑인 선생 59세' 조에 "구월에 오익이 와서 뵙다(九月吳瀷來謁)"라고 되어 있다. 그 아래 주석에 '영양사람 호 청계가 일찍이 문하에서 수업하다(英陽人號淸溪, 曾受業門下)'라고 기록되어 있다. 후인들이 청계공 김진의 청계정을 그대로 우재에게 넘겨 주었다는 말은 사실에 없는 낭설이다. 현재 청계정 현판글씨는 안동 천전리의 김희수(金喜壽)가 쓴 것이다. 우재란 현판도 마루 위에 걸려 있다.

 우재의 저서는 우재문집 4권 2책이 전한다. 현재 우재의 13세손 되는 오병직씨가 공직에서 은퇴하고 고향에 들어와 선대의 유적을 더듬어 연구하고 있다.

  청기리와 대천리에는 삼귀정과 청계정 외에도 오연(吳演)의 강학처인 취수당(醉睡堂)이 남아있고, 우재의 8세손되는 구재(懼齋) 오정교(吳正敎:1825~1897)의 학행을 기려 후손들이 세운 조계정(造溪亭)이 있다. 청기에는 또 우재와 절친했던 표은의 유적인 돈간재(敦艮齋)도 남아 있어 이들 간의 깊은 우의를 다시금 느낄 수 있다.

오익은 임진왜란 이후에 정치에 대해 일체 참여하지 않고, 이황의 성리학에 몰두하여, 인의예지와 소학과 주자가례를 중요시 하는 유학을 바탕으로 후손들에게 학문을 장려하였다. 그는 이시명과 함께 1655년 영산서원을 세워 퇴계와 학봉을 향사하였다. 그는 병자호란 이후 순수처사로서의 삶을 살면서 도학적인 명분과 유가의 마음수양을 위해 삶을 보낸 대표적인 숭정처사였다.

한편 오익의 아들 오이진(吳以晉,1615~1681),오이정(吳以鼎, 1619~1694), 오이승(吳以升, 1624~1660)이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고 화재와 질병이 잦은 청기의 지기를 눌러야 한다는 풍수지리에 의해 영봉대(靈峰臺)를 마주보는 서(芧)밭 밑 찬물난골 입구에 터를 잡고, 우재공파를 형성하였다.

우재공파 집안에는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오극성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을 도와 많은 공을 세웠고, 병자호란 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계획을 반포했을 때, 한양에서 뿐만 아니라 청기와 대천에서도 은둔하고 있었던 은사들을 주축으로 북벌군이 조성되었는데, 그 흔적은 ‘사명대비(思明臺碑)’, ‘대명동(大明洞)’ 등의 비석을 통해 알 수 있다.

청기면 청기리 654에 소재하는 숭조고택(崇祖古宅)은 오행대(吳行大, 1738~1770)가 18세기 후반에 세운 건물로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7호로 2008. 2. 18. 지정되었다.

우재(愚齋) 오익(吳瀷, 1591~1671)의 5세손인 오행대(吳行大)가 서(芧)밭 밑쪽 감나무 아래 초가에서 거처하였는데, 1760년(영조36)대에 현재의 숭조고택의 창고 뒤에 터를 다지고 창고 1동을 먼저 건축하였다. 이후 오행대가 33세로 요절하자 부인 반남박씨(潘南朴氏, 1736~1806)가 1770년(영조46)대에 서밭 밑 초가 앞에 청기천과 전답이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에 축대를 쌓고 숭조고택을 건축하여, 초가에서 이사하였다. 이후 우재의 8세손인 오정교(吳正敎, 1825~1897)는 선대의 업을 이어서 가세를 더욱 확장하고, 저택에 조상을 숭배하는 집이라는 뜻에서 ‘숭조고택(崇祖古宅)’이란 편액을 걸었다.

숭조고택은 전통적인 조선시대 민가인 ㅁ자형의 특징을 보여준다. 경북 북부지방 민가의 건축양식인 전통 기와 저택과 쌀 천석을 저장할 수 있는 창고 1동, 그리고 행랑채를 건축하여 일반 가정집과 구성이 다르다. 건축 연대가 240년 정도로서, 마을 중심부의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규모가 웅장하다. 이곳에는 가신신앙을 위한 성주함과 단지를 묻어 물을 보관하는 물두멍, 시렁, 횃대 그리고 수장시설에는 발디딤판이 설치되어 있다.

1남 2녀를 둔 오정교의 부친 오관협은 재령이씨가와 한양조씨에서 며느리가 보았고, 큰딸은 의성김씨, 작은 딸은 한양조씨의 옥천 조덕린(1658~1737)의 주사손과 혼인함으로써 지역의 유력문벌들과 혼맥을 맺었다.

오정교(吳正敎, 1825~1897)는 자는 중오(重五)이고, 호는 구재(懼齋)이다. 우재 오익의 7세손이고, 오행대의 증손으로, 부친은 오관협(吳觀俠, 1797~1856)이고 모친은 항재 이숭일의 후손인 이광표(李光表)의 딸이다. 1남 2녀를 둔 오관협은 재령이싸가와 한양조씨에서 며느리가 되었고, 큰딸은 의성김씨, 작은 딸은 한양조씨의 옥천 조덕린(1658~1737)의 주사손과 혼인함으로써 지역의 유력문벌들과 혼맥을 맺었다.

오정교는 퇴계학파를 계승한 재령이씨 집안을 외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석보의 여러 인사들과 자연스럽게 교유할 수 있었다. 장성해서 외숙인 이상옥(李相玉)에게 수학하면서, 좌해(左海) 이수영(李秀榮, 1809~1892)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 특히 소와(素窩) 김진우(金鎭宇, 1786~1855)는 오정교를 두고 “반드시 집안의 명성을 떨칠 인물”이라는 평가를 하였다.

오정교는 경전에만 마음을 쏟아서 잡서를 일체 거들떠보지 않았다. 특히 『중용』과 『대학』을 더욱 좋아하였는데, ‘계구근독(戒懼謹篤)’ 네 글자를 평생의 부절로 삼아, 자호하였다. 그래서 절도사 이만백(李晩柏)이 ‘구재(懼齋)’ 두 글자를 써 주었고, 이수영은 여기에 대한 설을 지어주었다.

오정교는 선유의 문집 가운데 특히 『퇴계집』을 좋아하였다. 평소 과거를 통한 출세에 마음을 두지 않았지만, 부친의 명에 따라 과거 공부를 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과거에 대해서 일체 단념하고 홀어머니를 섬기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효행이 남달라서, 늙은 모친을 같은 방에서 기거하며 밤낮으로 식사나 옷, 잠자리, 세면, 세탁 등을 손수 보살피고 챙겨서 극진히 모셨다.

오정교는 선대의 업을 이어서 가세를 더욱 확장하고, 저택에 조상을 숭배하는 집이라는 뜻에서 ‘숭조고택(崇祖古宅)’이란 편액을 걸었다. 오정교는 저술을 좋아하지 않았고, 만년에는 더더욱 실천에 마음을 두었다. 후손들이 그가 남긴 약간의 글을 모아 『구재유고(懼齋遺稿)』 1책을 만들었다.

이외에 문월당 오극성의 11대손인 오승봉(吳承鳳, 1888~1954)은 자는 응상(應祥), 호는 송원(松源), 진암(進庵)이다. 영양읍 대천리에서 출생하였다. 척암 김도화(金道和) 서파(西坡) 유필영(柳必永),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고, 성리학에 잠심하였다. 만년에 송원정을 짓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9권4책의 필사본으로 된『송원유고』가 영양읍 대천리 송원정사에 소장되어 있고, 『진암만록』1책이 편간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 영양의 삼일 운동의 주축이 바로 오익의 10세손인 오석준(吳錫浚, 1876~1951)에게서 시작하였다. 오석준의 손자 오윤승(吳胤承, 1875~1956), 오달승(吳達承, 1889~1953), 오재승(吳載承, 1892~1969) 등도 삼일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구속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으니, 특히 나라의 위세가 어려워졌을 때 나라를 위해 온몸을 던져 항거했다.

문월당 오극성의 3남으로 대천리에서 태어난 취수당(醉睡堂) 오연(吳演, 1598~1669)은 자는 덕원(德源), 호는 취수당(醉睡堂)·돈재(遯齋). 아버지는 현감 극성(克成)과 어머니는 평해황씨(平海黃氏)로 승백(勝白)의 딸이다. 음보로 내금위 선략장군이 되고 행 충무위 부사용직을 지냈으며, 나중에는 승차하여 장략장군 행 충무위 부사과를 맜았는데, 4품직의 품계였다. 취수당 오연이 살았던 17세기는 임진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고 대북파정권이 주도한 광해군집권기와 1623년 인조반정, 1624년 이괄의 난,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1644년의 이자성에 의한 명의 멸망과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자살하면서 청이 중원을 차지하는 명청교체기와 내우외란의 국난기였으며 동북아시아의 일대변혁기였다.

병자호란 당시 경상좌병사 허완장군휘하에서 부지휘관으로 경기도 광주의 쌍령전투에 참전하여 적 두명을 사살하고 호마를 빼앗아 오는등 용맹을 떨쳤다. 이후 1637년 인조의 치욕적인 정축화약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와서 세상을 피해 청기에서 살았다. 이때가 40세였다. 이때부터 표은 김시온과의 교류가 시작되어 숭정처사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바로 청기 초동으로 김시온의 돈간재는 동쪽에 서쪽에는 취수당이 있다. 표은이 술을 마시면 취하고 취하면 잠이 든다는 취수당이라는 호를 오연에게 지어 주었다.

오연이 교류한 인물들은 중앙에서는 인조의 장인인 한준겸(1557~1627), 최석정, 나성두(1614~1663), 유철(1606~1671)등이고 영남지역에서는 창석 이준, 석계 이시명, 표은 김시온, 석문 정영방 등과 은둔처사로서 교류했고, 영양에서는 사월 조임(1573~1644),조정형(1597~1650), 삼수당 조규(1630~1679)등과 교분을 나누었다. 저서로는 『취수집』 2권이 있다.

오연의 두 아들은 오이흥(吳以興), 오이극(吳以極)이다. 오이흥은 토정대부, 오이극은 참의에 증직되었다.

취수당은 청기에서 거주하면서 취수당(경북 유형 제 340호)을 짓고, 사명대를 세우고 대명동이라 각자하여 마을 이름을 초동(椒洞)이라 하고 우재와 표은 등과 더불어 숭정처사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오극성의 아우 오윤성(吳允成, 1563-1627)은 자가 성립(誠立)이다. 1594년(선조27) 갑오 별시 무과에 오극성과 함께 급제하였다. 임란 때 통제사 이순신 막하에서 거제도 앞 바다의 왜적을 대파하여 큰 공을 세웠고, 벼슬은 5품직인 군자감 판관(軍資監 判官)이다. 세상 사람들의 공의 형제무훈(兄弟武勳)을 난형난제라 칭송하였다.

(3)한양조씨의 가계와 임란시 활약상

①②③. 영양의 한양조씨 이야기

17세기 이래 영명한 인물이 계속해서 배출된 일월면 주곡리의 주실마을은 시인 조지훈(본명 동탁, 1920~1968)의 출생지로 유명하다. 그의 부친 신간회(1927)활동을 한 조헌영과 요절한천재 시인 조동진을 기억할 인물들이다. 일월산의 한 자락 끝인 주실마을은 한양조씨의 집성촌이다. 호은공으로 불리는 조전이 그의 아들 정형과 함께 1629년 이 마을에 정착해 역사가 385년 정도 된다.

한양조씨의 시조는 고려시대 첨의중서사를 지낸 조지수(趙之壽)이다. 그 이후 조휘-조양기-조임-조소생으로 이어지는 4대에 걸쳐 99년 동안 영흥의 쌍성총관부는 이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실질적인 한양조씨의 종손은 조돈(趙暾)이다. 그는 조임의 동생으로 고려에 귀화해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탈환에 도움을 주었고 예의판서를 지냈다. 그의 아들은 유명한 조인벽으로 그의 둘째 부인이 이성계의 손위누위였으나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불참하고 강원도 양양에 은거했다. 충현사가 그를 기리는 사당이다.

조인벽은 조온과 조연의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은 아버지와 달리 이성계를 도와 공신으로 좌찬성과 우의정에 올랐다. 16세기 기묘사화에 희생된 개혁 정치가 정암 조광조는 조온의 4대손이고, 조연의 후손들이 바로 주실마을의 한양조씨이다.

조연의 증손자인 조종(趙琮)이 영남입향조로 조연의 아들 조린이 둔 다섯 아들 가운데 둘째인 조운종의 아들 조종이 조광조과 관련된 기묘사화(1519)의 여파로 영주 율지리로 낙향하게 되었다. 조종과 조광조는 9촌간의 일가였기 때문이다. 조종의 모친은 의안대군 이화의 증손녀로 영주 초곡에 문중산소가 있다. 그의 처가는 평해 황씨로 역시 영주에 거주하고 있었다.

조종의 아들들인 인완, 의완, 예완, 지완, 신완,형완 등 여섯 아들 가운데 인완의 둘째는 풍기로 이사했고, 형완은 풍산에 이사했으며 형완의 아들 조원(趙源)이 영양 원리동으로 이사했다.

 

이와 같은 한양조씨들의 선대 세계는 아래와 같다.

시조



우의정 병조참판
영남입향조 풍산 1553영양
조지수 조휘 조양기 조돈 조인벽 조연 조린 조운종 조종 조형완 조원

한양조씨의 영양시대를 연 인물은 조원(1511~?)이다. 그는 함양 오씨 영양입향조인 오필(吳滭)의 따님과 결혼하여 처가가 있는 영양 원당리(현 하원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공신의 후손이라는 후광과 함양오씨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조원은 영양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한양조씨 양경공파 영양입향조인 11세 참판공 휘 원의 종택이 쇠락함에, 99년12월 종택중건 발기인 모임을, 2001년 4월 기공식을 가진 후 2002년 6월 23일 준공식을 거행하여 "思義精舍" 의 완공을 보게 되였다. 현재 일월면 도계리 영양향교부근에 있다. 바로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75호 參判公 宗宅(참판공 종택)이다. 한양조씨의 영양입향조인 조원(趙源)을 기리기 위한 재사가 영양읍 상원2리 비리골 산자락에 있는 상원리 율수당이다. 정면4칸, 측면2칸의 규모로 팔작기와지붕을 이고 있다. 한양조씨 참판공 조원의 종택은 일월면 도계리에 있는 사의정사(思義精舍)이다.

조원은 조광인(趙光仁, ?~1582)과 조광의(趙光義, 1543~1608) 두 아들을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떴다. 그러나 두 형제가 영양 일대의 사족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며, 해동이로(海東二老)라 불리는 등 입지를 굳혀갔다.

조광인(趙光仁, ?~1582)과 조광의(趙光義, 1543~1608) 두 형제는 학봉 김성일을 비롯한 5형제를 모두 과거급제시킨 아버지로 유명한 청계 김진(1500~1580)등 모두 23명이 1578년에 발의한 영산서당 건립에 동참한 것으로 보아 영양의 한양조씨 가문이 사회적경제적인 기반이 단단해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조광인(趙光仁, ?~1582)과 조광의(趙光義, 1543~1608) 형제 가운데 조광의는 음직무관의 종8품직인 수의부위에 임명되는 등 지속적으로 관직을 제수받고 1572년에는 내금위에 들어 갔다. 임란시 군량을 보탠 공으로 정3품 통정대부에 오르고 장례원판결사를 제수받는다.

조광인은 수월 조검(儉, 1570~1644)과 사월 조임(任, 1573~1644) 두 아들을 두었다. 조광의는 조건(趙健), 조전(趙佺), 조간(趙侃), 조신(趙伸) 등 4형제를 두었다. 조검의 자는 자순(子純), 호는 수월(水月)이고, 아들 셋은 정곤․정서․정린이다. 수월헌水月軒은 "물과 달이 어우러진 처마 높은 집"이라는 뜻이다. 충효로서 널리 알려진 수월(水月) 조검(趙儉)선생의 정자다.

선생은 선조 3년(1570)에 원당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 소학을 배울 때 고인들의 가언선행(嘉言善行)을 들으면 심중에 즐겨하고 모방코자 노력하였으며 차차 장성하여 인륜을 두렵게 지키며 언행이 공손하였다. 선생은 조실부모하여 오랫동안 부모를 받들지 못한 것을 종신토록 통한으로 여겼는데, 조모가 겨울에 병상에서 강어(江魚)를 원하였다. 그러나 얼음이 강을 덮어 구하기가 어려워 울며 강 아래 위를 수차 내왕하면서 "부친이 평시에 부모를 섬기는 정성이 지극하셨으니 영검이 계신다면 고기를 구하도록 하여달라"고 애원하니, 갑자기 얼음이 깨지면서 잉어가 얼음위로 뛰어 오르고 또 그것을 까마귀가 물어 선생에게 날라주어 그 잉어를 가져와 조모에게 공궤(供饋,받들어서 먹게하는 것) 한즉 병이 나았다. 이에 모두 효성이 신명을 통하였다고 하였다.

수월헌水月軒은 선생의 충효를 추앙하기 위하여 후일에 자손들이 지은 정자이며 세 칸 겹집으로 左右書室(좌우서실)이며 중간은 마루로서 좁고 난간을 둘렸다. 정자 앞에는 연못을 두어 운치를 가미하였다. 이에 후세 사람들이 수월공의 효성을 본받기 위해, 그 곳을 잉어가 나른 골짜기란 뜻으로 비릿골이라고 하였고, <승정처사 수월공 검축천단비란 비각과 비리동천(飛鯉洞天)>이란 비를 세웠다.

조임(趙任, 1573~1644)은 자는 자중(自重)이고, 호는 사월(沙月)이며, 본관은 한양이다. 그는 임란과 호란 때에 큰 공을 세워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영양 한양 조씨 세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아버지는 조광인(趙光仁)이고, 어머니는 광주안씨 안수인(安壽仁)의 따님으로, 두 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임은 10세 때 부친을 여의고 상(喪)을 집행하는데 성인과 같이 하였으며, 글을 읽을 때에도 나라가 위급함을 당한 안타까움을 탄식하였다. 또한, 일찍이 정암 조광조 선생께 가학의 진수를 이어받지 못하고, 퇴도 선생께 배움을 청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학문에 대한 지향을 보였다. 뒤에 송간(松澗) 김윤명(金允明,1541~1604)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조임은 10세때 부친을 여의고, 영해면 원구2리 옷금 안동 권씨 종가에 장가를 든 후 처외가인 인량리 대흥 백씨인 백장단(白長湍)댁의 재산을 천석 넘게 얻었다. 이 재물을 가지고 이름난 승려인 성지(性智)가 터를 잡은 곳에 집을 세웠다. 또한 종택은 낙동강 지류인 반반천 상류의 옥선대를 바라보는 경승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임란 등의 전란에도 병화를 입지 않아 영양에서 제일가는 명지로 꼽힌다. 월담헌이라는 이름은 주자의 「무이구곡가」에서 취하였고, 현판의 글씨는 서애 류성룡의 제자 창석 이준(李埈)의 친필이다.

어떤 사람이 “그대의 헌함 이름은 ‘달이 빈 산에 가득하고, 물이 못에 가득하다’는 뜻인가?”라고 물었다. 내가 “무이구곡(武夷九曲)은 주자가 산수에 흥취를 붙인 것인데, 나처럼 용렬한 사람이 어찌 현인의 마음과 자취에 비길 수 있겠는가. 다만 물이 못을 이루어 달빛을 더욱 잘 받아들이고, 헌함이 못 위에 있어 맑은 기운을 서로 비추기 때문에 경치에 따라 이름을 붙였을 뿐이네.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약관의 나이로 맏형인 수월(水月) 조검(趙儉)과 함께 화왕성 전투에 진력하니 의병대장 곽재우가 일찍이 보지 못한 일이라며 기이하게 여겼다. 계속 벼슬을 제수받아 1627년에는 자헌대부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시 문을 닫고 폐인으로 자처하며 거처하는 집을 월담헌(月湛軒)이라 명명하고, 이준․ 홍우정․ 이시명 등과 더불어 도의를 갈고 닦으며 세상사에 한탄하면서 생애를 보냈다. 1627년(인조5)에 후금이 침입하는 난이 일어나 나라에서 군량미가 부족해 나라에서 모속령(募粟令)을 내리니 “이 땅에서 먹고 사는 것이 나라 은혜 아닌 것이 없는데 어찌 벼슬에 있지 않다고 하여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곳간을 열어 양곡을 나라에 헌납하였다.

1636년(인조14)에 청이 다시 침입하였으나 이미 70이 가까운 고령이라 몸소 싸움터에 나갈 수 없게 되어 집 뒤에 단을 세우고 매일 밤 목욕재계하고 단에 올라 이 땅에서 오랑캐를 몰아 낼 것을 하늘에 빌었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 화의가 이루어지자 단에 올라 통곡하니 이 단을 향리 사람들이 ‘축천단’이라 불렀다. 축천단 비각은 2009년 현재, 도지정 문화재로 지정하는 심의 단계에 있다

만년에는 경학에 전심하여 자리 곁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논어 구절을 새겨 평생 경계하였다. 평소에는 전장을 갈라 조상을 받드는 제수를 넉넉히 하고, 조카들 중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 주니 영해부사 유대일(兪大逸)이 감탄하기를, “류씨가훈(柳氏家訓) 범씨의장(范氏義庄) 해동대노(海東大老) 산남유일(山南遺逸)”이라고 하였다. 또한, 숙운정( 문화재자료 제 490호로 2005.09.15 지정) 을 지어 벗들과 시가를 짓고, 시사를 논의하였으며, 원근의 후생들을 강학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1644년 3월19일 명나라의 의종황제가 죽고 명이 이자성의 난과 청의 침입으로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필시(絶筆詩)를 한 수 남기고 1644년 7월5일 운명하였다. 그때의 절필시는 다음과 같다.

 

桑海狂灡直北飜 상전이 벽해로 변하는 미친 물결이 정북방에서 몰아치니

尊周一念淚風泉 명나라를 위하는 생각으로 바람부는 구천에서 눈물지운다

丹旌帶去崇禎字 붉은 명정에는 숭정호를 적어 가지고 가니

無愧男兒一死年 남자의 한번 죽는 해로선 부끄럽지 않다

 

만곡 조술도가 묘갈명과 석문 정영방이 묘지명을 지었다.

현재 영양읍 하원리에 있는 사월종택은 그가 1602년에 지었으며 월담헌은 이 집 사랑채의 당호이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하원리 205-1에 소재한 월담헌(月潭軒)과 사월종택(沙月宗宅)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이 집은 사월(沙月) 조임(趙任, 1573~1644)이 조선 선조(宣祖) 35년(1602)에 세운 것이라 전해지는 건물로, 낙동강 동쪽 원류인 반변천(半邊川) 상류의 뛰어난 경승지에 자리 잡고 있다. 안채의 정침(正寢)은 건축수법으로 보아 1592년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건물이라고 추정되지만 월담헌(月潭軒)은 더 후대에 지어진 것이다.

[영양 하담고택]

회나무와 함께 살아가는 오래된 집 하담고택은 조시벽(趙是璧, 1670~1753)이 1700년대에 건립한 한양조씨 사월파 문중의 건물이다. 고택의 앞뜰에는 조시벽의 아들이 심은 회나무가 있다.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41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영양읍 상원리,하원리에 있는 한양조씨 사월파 유적지인 월담헌 및 사고종택과 더불어 문중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곳이다. 고택의 건축은 경상도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민가 형태인 ㅁ자형을 띠고 있으면서도 안채가 독립된 모습이다.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5칸 반이고 지붕은 팔작기와로 만들어졌다. 입구에 평방형의 고인돌이 눈길을 끌고, 안뜰에는 조그마한 연못과 보호수로 지정된 회나무, 향나무가 있어 고택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영양 한양조씨의 분가]

한양 조씨가 영양의 각 지역으로 분가하여 살게 된 것은 영양 입향조인 조원의 손자대에 와서라고 할 수 있다. 조검은 도계리, 조임은 원당리, 조건은 가곡리, 조전은 주곡리 즉 주실마을에 정착하였다. 이는 그것을 밑받침하는 경제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원당리에 정착한 조임은 1636년 병자호란 뒤에 문을 닫고 폐인으로 자처하며 집을 월담헌이라 이름하고, 당시의 제현들인 창석 이준, 석계 이 시명, 만산 나만갑, 두곡 홍우정과 도의를 갈고 닦으며 세상의 일을 한탄하였다. 이때 지은 정자가 하원동에 있는 숙운정(宿雲亭)이다. 숙운정은 원래 월담헌 동편 선유굴 사이에 있었으나 퇴락하여 새로 월담헌 정침에서 수백보 앞에 옮겨 세웠다. 숙운정이라 이름 지은 것은 동진(317~420)의 도연명의 첨단숙운(詹端宿雲,구름이 처마 끝에 자고 간다는 뜻)의 뜻을 취한 것이다.

숙운정은 앞으로 반변천이 흐르고 뒤에는 영혈사의 옛터에 세워놓은 연대암과 원당지 연꽃의 경치가 아름답다. 현판은 중건시 경상감사와 학부대신을 역임한 동곡 조인승선생의 친필이다.

영양입향조 참판공 조원의 손자인 사월선생의 신도비는 한산 이돈우의 비문과 서산 김흥락이 글씨로 하원리 산기슭에 세워져 있다.

한양 조씨 사고파(沙皐派)는 바로 사월 조임의 넷째 아들인 통덕랑 사고 조정옥(趙廷玉)에서 갈린 문중으로, 현재 영양군 영양읍 상원1리 475-1번지에 소재한 사고 종택(沙皐宗宅) 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99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축주는 조시광(趙是光), 조정옥(趙廷玉)으로 건축시기는 18세기 중반이다. 사고 종택은 정자와 별묘까지 갖추어 상류 주택으로서의 격식을 유지하고 있다. 최초 건립연대는 18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나 중건할 때 대규모의 보수가 이루어져 건물에 후기적인 요소가 들어있고, 평면상에 변형된 부분이 많이 보인다.

건축 구성은 전면에 세워진 5칸 규모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ㅁ자형 정침이 자리하고 있다. 정침의 오른쪽 뒤편에는 사당이 별도의 공간을 이루며 구성되어 있다. 정침의 좌측 뒤쪽에는 손자인 주강 조시광이 건립한 주강성이 방형의 토석담장을 두른 별도의 공간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주강정의 전면에는 주사(廚舍)와 별묘(別廟)가 각각 배치되어 있다.

정침은 평면은 중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 온돌방과 마루방을 두고, 우측에 팔작지붕을 얹은 3칸 규모의 사랑채를 배치하였는데, 좌측칸의 마루방과 우측칸의 대청은 좌우로 돌출되어 양 날개집의 형상을 일게 하였다. 안채는 3칸 규모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너방을 두었다. 안방과 건너방의 전면에는 부엌과 고방을 연접시켜 각각 좌,우익사를 이루게 하였다.

주강정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연접시킨 후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 또한 대청의 전면에 사분합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이루게 하였다. 가구는 오량가의 소로수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또한 종택 옆으로 주강(注江) 조시광(趙是光)이 지은 주강정이 자리하고 있다.

 

[한양조씨의 통혼]

영양 입향조인 조원은 함양 오씨, 손자인 조검은 부호로 알려진 무안 박씨 박효장의 사위가 되었다. 또한 영해의 유력사족인 재령 이씨와의 통혼이 이루어져 조전이 재령이씨 영해파 종손인 이신일을 사위로 맞음으로서 양가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서계 이시명이 석보에서 수비로 이사하면서 영양서당의 책임을 맡아 교류가 더 빈번해졌다.

조검․조임․조건․조전․조간․조신 등의 종형제 들과 이시명의 교류로 인하여 조광의의 손자이자 조건의 아들인 조정환이 이시명의 4子인 이숭일을 사위로 맞이했다. 조정환과 조규는 친형제처럼 석계문하에서 같이 공부했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퇴계-학봉-경당-존재-갈암으로 이어지는 퇴계적통을 이은 갈암의 문인록인 『금양급문록』에는 조덕린을 비롯한 한양 조씨가 8명이 포진하고 있다.

한편 영해의 영양 남씨 집성촌인 괴시리 마을로 조검의 아들 조정곤이 남율의 사위가 되었으며 조전은 남율의 아들 남필대를 사위로 맞았다. 또한 조정환은 석문 정영방(1577~1650)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동래 정시와의 통혼이 이루어 졌다. 정영방은 서애의 수제자인 우복 정경세(1563~1633)의 제자로 지보출신으로 영양 연당리에 정착한다.

 

조전의 두 딸은 19세기 퇴계의 적통을 이은 정재 류치명을 배출한 임란 의병장인 기봉 류복기의 자손과 혼인하여 전주류씨왕의 통혼도 이루어 졌다.

조전과 조정형의 대를 이은 조군과 조덕린대에 이르러서는 안동지역의 유력 사족인 진성 이씨 의성 김씨 광산 김씨 안동권씨 풍천 류씨 들과도 통혼이 이루어져 간다.

 

[주실에 터를 잡은 조전과 주실마을]

정묘호란이 막 끝난 1629년 조전과 그의 아들 조정형이 주실마을에 터를 잡는다. 따라서 주실마을의 입향시조는 조원의 손자이자 조광의의 둘째 아들인 조전(趙佺,1576~1632)이다. 조전은 1576년 태어나 자가 여수(汝壽)요 호는 호은(壺隱)이다. 현재 주실마을의 호은종택의 호은은 바로 조전을 말한다. 조전은 형인 조건이 후사없이 일찍 죽어 홀로 가문을 이끌어 나갔다. 임란시 부친인 조광의와 종형제 들과 더불어 의병에 참여하였으며 1632년 57세때 세상을 하직했다. 최산립의 딸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다. 맏아들이 조정형이고 둘째가 조정환이다. 둘째 조정환이 출계하여 큰아버지 조건의 뒤를 이었다.

조정형은 최철과 이명준,김시양에게 배웠다. 울진 장씨 호문의 딸과 혼인하여 군(頵),병(頩),변 삼형제와 네 딸을 두었다.

 

 

4.권춘란,권태일 부자의 활약상

16세기 영양사회에서 매우 주목되는 인물은 권춘란(權春蘭, 1539~1617)이다. 그는 자는 언회(彦晦)이고, 호는 회곡(晦谷)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신라 말기에 왕건을 도와 고창(지금의 안동시)에서 후백제의 견훤을 무찌르는데 공을 세우고 태사(지금의 부총리에 해당) 권행(權幸)의 후예이다.

안동 권씨의 시조인 권행(權幸)의 본래 성(姓)은 경주 김씨이다. 신라와 후백제, 후고구려가 대치하고 있던 시대인 서기 930년(경순왕4) 왕건의 이끄는 고려군이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고창군(高昌郡: 지금의 안동)에서 대치하자 김선평(金宣平), 장정필(張貞弼)과 함께 고려군을 도와 후백제군을 무찌르는 데 공을 세웠다.

이에 왕건이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하여 식읍(食邑)으로 내리고, 권행에게 권씨(權氏) 성을 내린 것에서 안동 권씨가 시작되었다. 안동권씨는 10세(世)를 전후하여 크게 15파로 갈라진다. 그중에서도 추밀원부사공파(樞密院副使公派: 權守平)와 복야공파(僕射公派: 權守洪), 인가파(仁可派), 좌윤공파(佐尹公派: 權至正)에서 인물이 많이 나왔다. 권춘란은 이러한 집안에서 권행의 24세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통예원좌통예(通禮院左通禮) 행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에 추증된 권모(權模)이고, 부친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된 권석충(權錫忠)이다.

권춘란은 1539년(중종34) 지금의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에서 권석충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선천적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고결한 인품을 숭상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주위사람들이 장래에 그가 크게 빛날 것으로 기대했다. 어린 나이에 감히 할 수 없는 주역(周易) 공부에 관심을 보여 틈만 나면 주역의 괘효(卦爻)를 본따서 그렸다. 한번은 이런 그의 행동을 부친이 보고는 “이것은 대인(大人)이 배우는 것이어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권춘란은 오히려 “저는 항상 대인의 뜻을 사모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여 부친이 학문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진 백담 구봉령(柏潭 具鳳齡, 1526~1586)에게 그를 보내는 계기가 되었다.

구봉령은 이황이 제작한 「성학십도」를 바탕으로 「혼천의기설(渾天儀記說)」을 지었다. 혼천의기설은 혼천의(渾天儀)를 내세워 천도를 밝히고, 천도는 임금이 지켜야 할 도리임을 설명한 것이다. 그는 또 용산서당을 세워 제자 교육에 힘쓰기도 하였다. 뒷날 그의 제자들은 구봉령의 서당에 학도묘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뒷날 사액서원인 주계서원의 전신이다. 구봉령은 61세에 졸하였으며, 그의 문하에는 이황의 문인이기도 한 권춘란(權春蘭)과 홍석기(洪錫箕)가 있다. 문집은 『백담집(柏潭集)』이 있다.

본격적인 배움의 길에 나선 권춘란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새벽 일찍 서당 앞에 가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으니, 배움에 대한 열정이 한결같았다. 그리하여 수업의 진도 또한, 남보다 빨랐으며, 스승인 구봉령에게 배운 뒤 이황(李滉)의 문하에 나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미 구봉령을 통하여 선생의 총명과 인품에 대해 알고 있었던 이황은 찾아온 선생을 위해 윗자리를 피하면서 매우 정중히 대하였다고 한다.

회곡 권춘란(晦谷 權春蘭, 1539~1617)은 14세 때 구봉령의 문하에서 배운 뒤에 이황에게 사사하였다. 그는 유가, 도가, 음양가, 법가, 명가, 묵가, 종횡가, 잡가, 농가 등 구류백가(九流百家)의 서적을 두루섭렵하여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주역에 능통했다. 학문과 산수를 지극히 사랑하여 숲속에서 글을 읽고, 도를 강조한 그는 효행과 우의도 아주 깊었다. 어머니가 병중에 계실때는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달여드려 한달 만에 낫게 하였다고 한다.

2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지평 등의 내직과 여러 고을의 수령직을 맡았다. 예문관 검열겸춘추관 기사관을 역임한 뒤에 옥당에 들어갔다. 그는 관직에 있을 때 청렴결백한 관리로써 목민관의 모범이 되었다. 영천군수시절에는 “정민심, 선풍속(正民心, 善風俗)”하는 일을 행정의 목표로 삼아 마을의 노인들을 모셔다가 술과 음식을 잘 대접하여, 마을의 백성들로 하여금 부모를 섬기고 어른을 봉양하는 의리를 깨우치게 하였다. 또한 그는 그 지방의 주민들이 미신을 좋아해서 음사를 숭봉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단호한 철폐령을 내렸다. “귀신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나 또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앞으로 계속 이 같은 괴이한 풍속을 따르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 그후 영주지방의 해괴한 풍속은 자취를 감추었다. 더불어 그의 방 벽에는 “평이근민(平易近民)”이라는 4자를 써붙이고 책상 위에는 『심경』과 『근사록』을 두어 공무의 여가에 보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상일을 싫어한 그였지만 그는 분연히 일어나 사재를 털어 의병을 돕는 한편 의병장 김윤명(金允命) 휘하에 들어가 용전분투했다. 임진왜란이 끝난뒤 다시 고향에 돌아갔다. 말년에는 류성룡과 함께 서미동(西美洞)에 모여 강학과 토론을 하였다. 을사년(1605)에는 크게 훙수가 나서 여강서원이 떠내려가자, 다시 건축할 것을 의논하게 되었는데, 또 홍수가 있을까 근심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서 건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권춘란은 “퇴계 선생의 남긴 발자취가 여기에 있으니, 옮기는 것은 옳지 않다”하였다. 스승 구봉령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가 간병하기를 부모 모시듯 하였고, 결국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문을 교정하여 『백담집』을 완성하였다. 저술로는 「진학도(進學圖)」, 「공자언인록(孔子言仁錄)」이 있다. 뒷날 용산(龍山) 백담사(栢潭祠)에 배향 되었다.

 

그가 말년에 보낸 회곡고택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79호로

청기면 기포리 261번지에 있다.

회곡과 관련된 유물은 회곡고택으로 들어오는 길에 있는 사당에 회곡선생문집(晦谷先生文集), 장곡선생유서통(藏谷先生諭書筒)과 교지(敎旨), 옥관연(玉冠硯), 옥관자(玉冠子), 관인(官印), 호패(號牌), 공신록(功臣錄), 행장기(行狀記) 등

가문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보충해설 *유세통[유서통(諭書筒)]

'유세통'은 '유서통(諭書筒)'에서 온 말로, 유서통은 옛날에 임금이 고관(高官)들에게 중대한 어명(御命)을 내릴 때에 어명을 적은 지령서를 유서(諭書)라고 하였으며, 그 '유서(諭書)를 담은 대나무 통'을 일러서 '유서통(諭書筒)'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유서통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공문서(公文書)이기 때문에 엄중한 보호가 필요했다.

이에 나라에서는 이 유서통을 메고 가는 자(者)에게 만약 길을 가로막거나 시비를 걸거나 방해를 하면 삼족(三族)을 멸한다는 강력한 법을 적용하였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고 보니, 신분이 높지 않던 전령(傳令)들은 이 유서통을 메고 가면서 평소에 천한 신분으로 말미암아 푸대접을 받았던 양반 권력층에 대해서 한 풀이라도 하듯이 갖은 행패를 부리면서 거들먹거려도 감히 그 누구도 대항하며 함부로 다룰 수가 없었다.

따라서 유서통을 멘 전령들은 주막(酒幕)이나 관아(官衙), 심지어는 양반들에게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행패를 부리곤 하였다. 그 이후로 분수도 모르고 함부로 행패를 부리는 자를 일러서 "무슨 '유세통'을 짊어졌냐"고 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유세를 부린다'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춘란(春蘭)의 아들인 권태일(權泰一 ; 1569~1631)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수지(守之), 호는 장곡(藏谷)이다. 춘란(春蘭)의 동생의 자식이나 양자로 들여 대를 이는 아들이며, 김성일(金誠一)의 사위이다. 1599년 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에 임용된 후 내외직을 두루 거쳐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접반사(接伴使)로 가도(?島)에 갔다고 병으로 죽었다.

 

3.회곡고택(晦谷古宅)

명 칭 : 회곡고택(晦谷古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기포리 261

건 축 주 : 권춘란(權春蘭, 1539~1617)

건축시기 : 1592년(추정)

이건시기 : 1738년

문 화 재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9호, 1988.09.22 지정

- 건축 이야기

회곡고택은 권춘란에게 맏아들을 입양한 동생 권춘계(權春桂)가 임진왜란 직전에 지은 것으로 짐작되며, 뒤에 권춘란이 만년에 살던 곳이다. 이후 후손들이 지금의 건물이 있는 영양으로 입향하였다고 하나 고택이 옮겨온 연대는 상세하지 않다. 다만, 사당은 원래 정침의 우측에 있었던 것을 1738년(영조14)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는 기록이 사당의 상량목에 남아 있다.

- 건축 특징

회곡고택은 정침에 있는 안방에서 외여닫이문으로 윗방을 통해야만 안대청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이채롭다.

사당이 고택의 앞에 배치되어 있어 일반적인 종택및 고택의 사당 배치구조와는 다르며, 또한, 사당의 전면에 퇴칸을 둔 구조는 경북북부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라고 하겠다.

권춘계는 권춘란의 동생으로 1544년 안동 동가구리에서 출생하여 백형 권춘란과 더불어 퇴계에게 수핚하고 1584년 청기면 기포로 이거하였다. 약복 김극일과 같이 영산서당에 추입하였다. 아들인 권태일이 형조판서로 이조판서를 추증받았다.

 

임진왜란 당시에 영양에 입향한 인물들이 많았다. 1550년 안동에서 출생한 김우건은 김선평의 13세손으로 임란시 수비면 오기동에 입향하여 안동김씨 현감공파의 입향시조이며 후손들이 오기동과 영양읍에 세거하고 있다.

김구흥은 김녕김씨로 사육신과 더불어 단종복위운동을 꾀하다 죽은 충의공 김문기의 6세손으로 상주에서 임란당시 석보면 소계동으로 입향하였는데 그의 후손들이 소계동에 세거하고 있다.

 

 

[오경선(吳敬先, 1606~1683)]

본관은 낙안(樂安). 오수눌(吳受訥)의 아들. 영양읍 감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효성이 지극했다. 1637년(인조 15년) 그의 부친이 병환이 깊어 위중했을 때 단지(斷指)하여 구하기도 했는데, 그 사실이『여지(輿誌)』에 적혀 있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증 공조참판(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贈工曹參判)을 증직(贈職)받았다.

[박자복 1560-?]

밀양인 박충원의 현손으로 이괄의 난때 영월 가삼리에 이주하다고 있다가 다시 영양군 석보면 택전리로 입향하였다.

양근김씨 영양입향조인 구산 김수근을 기리기 위한 정자가 1941년 중건되었다. 구매리에 있는 구산정이다. 양근김씨(楊根金氏)의 영양 입향조가 되는 사인첨정(舍人僉正) 구산(九山) 김수근(金守瑾) 선생의 정자이다. 선생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익화군(益化君) 의암(毅庵) 김인찬(金仁贊)의 후손으로 경기도 양평에서 영양으로 낙향(落鄕)하였는데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약 400여년이 되는 인종, 명종, 선조 때가 아닌가 생각되나 일설에는 선생의 손자가 입향하였다는 말도 전해오고 있어서 연대가 확실치 않다.

이 정자는 자손들의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사후에 지은 것이다.

字(자)는 義知(의지), 號(호)는 義巖(의암),諡號(시호)는 忠民(충민)은 太祖(태조)李成桂(이성계)를 도와 左名一等功臣(좌명일등공신)으로 議政府(의정부) 左贊成(좌찬성),翼華君(익화군)에 封(봉)해지고 陽根(양근)을 食邑(식읍)으로 下賜(하사)받아서 後孫(후손)들이 金寧金氏(금녕김씨)에서 分貫(분관)하여 本貫(본관)을 陽根(양근)으로 하였다. 양근은 양평을 말한다. 5,357名이 있는 것으로 調査(조사)되었다.

[정곤(鄭熴, 1602~1659)]

본관은 동래(東菜). 자는 여회(如晦), 호는 익재(益齋).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장남. 퇴계 학문의 진수를 모아『이자서절요(李子書節要)』6책을 편찬하였으며, 후손에 의해 목판각자되어 책으로 발간되었다. 12권 6책의 509장의 목판이 임천정원 장판각에 보관되어 있다.

[정승립(鄭承立, 1582~1676)]

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효중(孝仲). 임란공신 참판 정담(鄭湛)의 둘째 아들로 영해에서 태어났으나, 만년에 영양으로 이주했다. 무과에 급제하고 사정원 어모장군 행용양위 부호군(司正院禦侮將軍行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 만년에 세상을 피해 산수를 즐겨 영양으로 옮겨 살았다.

[정요천(鄭堯天, 1639~1700)]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칙(聖則), 호는 눌재(訥齋). 석문 정영방(鄭榮邦)(본 인물편 참조)의 손자로 입압면 연당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직(柳稷)에게 수학하였으며, 경서(經書)와『사기(史記)』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책을 통독하여, 통달하였다. 1660년(현종 1)에 진사가 되었고 1663(현종 4)에 식년방(式年榜)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성균관의 정육품 벼슬)에 임명되고 중학(中學)(서울에 설치했던 4 교육기관의 하나)의 교수(敎授)를 겸하였다. 효성이 지극하고 덕성이 풍부하여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정운상(鄭雲相, 1667~1737)]

본관은 영일(迎日). 자 · 호는 미상.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11세손으로 안동시(安東市) 임하면(臨河面)에서 출생하였으며, 통정대부 훈련원정(通政大夫訓練院正)으로 추증되었다. 안동에서 영양군 청기면 토곡리로 입향하였다.

[정유석(鄭惟碩, 1634~1714)]

본관은 야성(野城). 자는 덕경(德卿), 호는 월잠(月岑). 영해읍 인량리에서 태어났다. 효종 때에 영양군 일월면 가곡리로 입향하였다. 통정대부에 추증되었다.

 

5. 월담헌 및 사월종택, 주곡동 옥천종택 및 한양조씨의 입향,

약산당 –약산 조광의 –경북 문화재 자료 제 81호, 신구2리 197번지

만곡정사- 만곡 조술도(1729~1803), 경북 문화재 자료 제341호 .주곡리 소재

-월잠 종택-

-하담 고택-

-조동흥 가옥-

-주강정 및 사고종택-조임의 4자 사고 조정옥이 건립한 살림집, 상원1리

 

6 .회곡고택과 조선중기 회곡 권춘란의 학문적 업적과 사승관계

[불천위]

오극성, 국불천위 권춘란-유서통(대나무통 임금하사)유세, 석계 이시명,옥천 조덕린

 

큰 아들은 용계(龍溪) 오흡(吳潝 : 1576~1641)이고, 둘째는 우재(愚齋) 오익(吳瀷 : 1591~1671)이다. 셋째는 취수당(醉睡堂) 오연(吳演:1598~1669)이다.

영양 대천리에 있는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32호 삼구정(三龜亭)은 용계(龍溪)가 만년에 지내던 곳이고, 청기리에 있는 청계정(靑溪亭)은 우재(愚齋)가 거처하던 정자이다.

[#삼구정은 용계의 항거정신이 밴 곳]

용계 오흡은 퇴계선생 문하인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의 제자이다. 간재는 농암 이현보의 종손자로 부친은 교수를 역임한 이충량이며 어머니는 박승장의 딸이다.

오흡은 광해조 때, 간신 이이첨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함락되고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자 비분강개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고 고향인 대천리 반월산 아래 초가 정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그 후 원인 모를 화재로 소실되고 맞은편 강둑에 다시 정자를 세워 만년의 강학처로 삼았다. 그리고 정자 옆에는 사명대(思明臺)라는 대를 축조하고 주변에 송, 죽, 매를 가꾸면서 절의를 세워 청나라에 항거하며 끝까지 복종하지 않았다. 나라에서는 용계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호조좌랑 벼슬을 내렸으나 결단코 부임하지 않았다. 침략자는 물론, 그들에게 항복한 조정(朝廷)의 부름까지 단호하게 거부한 철저한 절개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따름이다.

 삼구정 앞에는 정자를 등에 업은 듯한 형상의 세 거북바위가 엎드려 있어 삼구정(三龜亭)이라고 했다. 지금은 정자를 고치면서 터를 돋우는 바람에 거북바위는 땅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정자 앞에는 동쪽에서 맑게 흘러 내려오는 동천과 반변천이 합류되어 계절마다 갖가지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용계의 저서로 용계선생 문집이 있다. 용계의 12세손 오원일씨는 공직에서 은퇴하고 전 영양문화원장을 맡아 지역의 문화재 보호와 선대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고향을 지키고 있다.

[#청계정 또한 우재의 절의를 상징]

우재 오익은 문월당의 둘째 아들이고 바로 용계의 아우다.

청계정 기문에는 구읍지(舊邑誌) 내용을 간추려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학문이 일찍 완성되어 여러 번 대과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약봉(藥峯) 서성(徐渻) 선생을 찾아가 뵈니, 약봉이 대단히 인정해 주었다.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하였으나 우재는 사양하였고 물러나 산수간에 은거하였다.

그 당시 이웃에 사는 표은(瓢隱) 김시온(金是稳) 선생이 절의를 지키며 지내는 것을 보고, 도의(道義)로 사귀며 서로 교분이 두터웠다.

 표은(瓢隱)이 우재(愚齋)에게 남긴 시에

'병으로 인하여 삼년을 누웠으니(因病三秋臥),

팔년 동안 이웃으로 지낸 정 잊기 어렵네(難忘八載隣).

푸른 눈빛으로 바라본 반가움 오히려 옛날부터

사귀어온 인연 같았는데 (眼靑猶似昔),

흰머리 되도록 사귀어도 어찌 이제 막 사귄 사람 같다는

인연일 수 있으리(頭白豈如新)'라고 하면서

표은(瓢隱)이 안동으로 돌아갈 때 산과 토지를 분할하여 한 구역을 떼어 주었다.그러나 우재(愚齋)는 굳이 사양하고 별도로 마을 앞 암석 위의 한 구역을 점지하여 못을 파고 정자를 지어 청계정(靑溪亭)이라 이름하였다. 또 곁을 연어대(鳶漁臺)라 하고 자서(自序)를 남겼으며 앞산 봉우리는 천일봉(天一峯)이라 명명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정재(定齋) 류치명이 지은 행장을 간추려 보면 아래와 같다.

 "…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에게 수학하였고 창석(蒼石) 이준, 참의(參議) 신홍립과 교유하였다. 향시에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불리하였다. 부친상을 마치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항복하자 비분강개한 시를 짓고 세상과 교유를 끊어버렸다.

당시 표은 김시온이 그 지역으로 피란을 오자 함께 의기투합하였다.나중에 표은이 토지를 분할하여 주자 너무 많아 사양하고 연어대 주변에 몇 이랑을 취하여 청계정을 세우게 되었다.

 

석문(石門) 정영방, 영은(靈隱) 조정곤, 임천(臨川) 조정환과

교분이 두터웠고 난고(蘭皐) 남경훈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난고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표은공 같은 높은 정신과 우뚝한 절개를 기려 그와 교유하며

땅을 분할하여 경작하였고 산을 나누어 살았으니 한 구역의 풍광이 마치 어제처럼 완연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표은이 우재에게 땅을 떼어준 부분은 다소간의 차이가 있지만

둘 간의 사상적 교류와 친분은 대단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청계(靑溪)는 나중에 우재(愚齋)로 호를 바꿈]

표은 김시온은 현 안동 천전리(내앞) 학봉 김성일의 부친

청계(靑溪) 김진의 증손자이다.

병자호란때 나라가 청에 항복하자 예전에 증조부 청계공이 터전을 이루어 놓은 청기리로 들어가 은거하다가 우재(愚齋)와 땅을 분할해 가질 정도로 절친한 사이가 됐다.우재(愚齋)의 처음 호는 청계(靑溪)였다. 정자를 청계정(靑溪亭)이라 이름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학봉의 부친 청계공(靑溪亭)의 호와 같고 서로 멀지 않은 지역의 선배에 대한 죄송함이 있었다. 이에 청계란 호를 우재(愚齋)로 바꾸고 정자에도 우재(愚齋)라는 현판을 걸어두었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주는 단서가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의 연보에 나타나 있다.

연보 '6년 갑인 선생 59세' 조에 "구월에 오익이 와서 뵙다(九月吳瀷來謁)"라고 되어 있다. 그 아래 주석에 '영양사람 호 청계(靑溪)가 일찍이 문하에서 수업하다(英陽人號淸溪, 曾受業門下)'라고 기록되어 있다. 후인들이 청계공 김진의 청계정을 그대로 우재에게 넘겨 주었다는 말은 사실에 없는 낭설이다. 현재 청계정(靑溪亭)현판글씨는 안동 천전리의 김희수(金喜壽)가 쓴 것이다. 우재(愚齋)란 현판도 마루 위에 걸려 있다.

우재(愚齋)의 저서는 우재문집 4권 2책이 전한다. 현재 우재의 13세손 되는 오병직씨가 공직에서 은퇴하고 고향에 들어와 선대의 유적을 더듬어 연구하고 있다. 청기리에는 청계정 외에도 오연(吳演)의 강학처인 취수당(醉睡堂)이 남아있고, 우재(愚齋)의 8세손되는 구재(懼齋) 오정교(吳正敎:1825~1897)의 학행을 기려 후손들이 세운 조계정(造溪亭)이 있다.

이 마을에는 또 우재(愚齋)와 절친했던 표은의 유적인 돈간재(敦艮齋)도 남아 있어 이들 간의 깊은 우의를 다시금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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