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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八友軒 泉谷書堂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08.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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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友軒 泉谷書堂}

 <1754년경에 창건된 천곡서당은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시설이다.-전면 3,측면 2칸의 일자형 평면으로 팔작기와지붕이다.>

 

천곡서당은 산곡동(山谷洞)수구(水口) 독서동(讀書洞)에 1754년경에 팔우헌(八友軒) 조보양(趙普陽) 선생이 창건하여 원근학동(遠近學童)을 수학하고 향토사림(鄕土士林) 들의 강학(講學)의 장소이었는데, 1868년 산곡동 강당에 천곡서원을 창설하기 위해 이건 하였으나 1871년 조령(朝令: 毁撤令)에 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3년에 현지로 이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당에는 팔우헌 문집(八友軒 文集)과 학동에게 수업하던 박동록(泊董錄)외의 고서 천 여권이 있다고 전해진다.

 

천곡서당은 대문채(솟을 대문)에 들어서면 우측(원래는 대문과 마주치는 것으로 추측)에 천곡서당이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남향한 전면3칸에 일자형 누각 건축으로 중앙에 마루를 만들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고 툇마루가 전면 세 칸을 차지하고 있다. 어린이들의 교육공간으로 소규모이긴 하지만 이 건축물이 갖는 의미는 깊다.

 

인간은 자연환경에 지배를 받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마산이라고 하는 현(玄)은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기상을 주면서 호연지기를 배울 수 있고 산 밑에 펼쳐진 마을은 배가 떠나가는 듯한 행주형(行舟形)이라고 하는 것은 진취적인 심성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 자리한 ‘양계초려’와 ‘팔우헌’ 그리고 ‘천곡서당’의 공간들은 모두 와우형(臥牛形)지형의 풍수설에 해당한다고 하지만 그 의미는 물형에 의한 비교를 풍수에서는 물형설(物形說)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풍수적으로 와우형(臥牛形)의 양택지는 좋은 터라고 한다. 즉 길지(吉地)속에 ‘천곡서당’이 있는 셈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천곡서당’은 마을의 학동들에게 꿈을 키워주고 수신(修身)할 수 있는 교육공간으로 터를 잡은 것이다. 그 터 잡기(토지 이용)의 지혜를 풍수설과 역학을 통해서 얻은 셈이다. 그 만큼 이 지역이 유교문화권으로서 유교적 풍수지리사상에 의존하여 입지와 토지이용 그리고 조경(식재)을 조화로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천곡서당의 건축적 구조와 공간적 구획이 교육공간이면서 사랑채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
특히 동서로 길게 자리잡은 대지 위에는 기존의 대문채가 헐려 없어진 채로 새로운 대문이 그리고 풍수적으로 와우형(臥牛形)의 양택지는 좋은 터라고 한다. 즉 길지(吉地)속에 ‘천곡서당’이 있는 셈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천곡서당’은 마을의 학동들에게 꿈을 키워주고 수신(修身)할 수 있는 교육공간으로 터를 잡은 것이다.

 

그 터 잡기(토지 이용)의 지혜를 풍수설과 역학을 통해서 얻은 셈이다. 그 만큼 이 지역이 유교문화권으로서 유교적 풍수지리사상에 의존하여 입지와 토지이용 그리고 조경(식재)을 조화로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천곡서당의 건축적 구조와 공간적 구획이 교육공간이면서 사랑채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

특히 동서로 길게 자리잡은 대지 위에는 기존의 대문채가 헐려 없어진 채로 새로운 대문이 전통식으로 세워지기는 하였지만 당초의 대문의 위치에는 폐허가 된 담장의 잔해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교육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서당은 작은 누각의 형태로 철학적 교육공간을 느끼게 한다. 뿐만 아니라 기와 잇기와 난간의 조형성은 천곡서당의 특징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합각벽이 완만하게 삼각을 이루면서 팔작기와지붕으로 되어있고, 작지만 날렵한 기와선이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누다락형태로 띄워진 툇마루와 그 난간은 계자난간으로 구성되어 계자난간 사이에 풍혈이 12개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풍혈(風穴)은 구름, 꽃, 동물.....의 모양으로 뚫려져 있다. 그러나 널판지(목재판)를 일정한 모양으로 도려냈다고 해서 일명 목혈(木穴)이라고도 하는 풍혈의 조형은 이 댁만의 독특함을 표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변화무쌍한 목혈은 모두 12개로서 제각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 댁의 내력으로 보아 음양오행설과 12간지를 응용하여 조형화하여 건축되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즉 목혈의 조형을 동일한 모양으로 반복하지 않고 가변성을 줌으로써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관리상태와 노후된 부분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원형의 목혈이 아닌 평널을 끼워넣어 풍혈의 조형미를 반감시키고 있다.

 

그렇지만 천곡서당은 작고 단순한 기능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건축물이 주는 이미지(Image)는 18세기 중엽에 팔우헌(八友軒)선생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전통적 건축물로서 공적인 공간이다. 뿐만 아니라 팔우헌공(公)은 자연과 더불어 맑고 깨끗하게 살아가는 선비의 기개와 넉넉한 포용력으로 너그럽고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지조를 지키면서 유학자다운 모습을 후손들에게 남겨주었고, 그 생활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져있는 철학적 건축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손들에는 ‘孝悌는 本이오 文藝는 末’이라고 강조하여 사람됨이 먼저임을 깨우치도록 교훈하고 있다. 즉 인성교육의 필요성과 인간의 도덕성 함양에 대하여는 누구나 절감하고 있지만 경제, 정치, 사회, 문화가 아무리 발전된다 해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사람이 바르지 않으면 모든 것은 왜곡되고 혼탁해질 수 밖에 없다는 현실에서 다시 한번 되새김해 볼 명구라고 생각된다.

 

팔우헌공(八友軒公)이 건립한 천곡서당의 조형적 의미가 더 하는 것도 이러한 인간적 심성이 우러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 서당의 난간에 뚫어진 풍혈의 다양한 형태에서 천곡서당의 철학적 의미가 학문과 예술이 접목되면서 가정교육이 쇠퇴해지고 있는 오늘날 전통문화의 가치를 깨닫게 한다.

 

이와같이 예천지방 특유의 건축공간이 본채(안채와 사랑채)와 팔우헌 그리고 천곡서당에서 복합적 기능미를 창출하고 있다. 즉 그것은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의 어울림으로 인간적 삶의 공간의 진수를 보여주면서 ‘孝悌的空間’이 곧 ‘文藝的空間’임을 암시한다.

팔우헌(八友軒) 조보양(趙普陽, 1709~1788)

성명 : 조보양(趙普陽) , 1709년 ~ 1788년
본관 : 한양(漢陽)
: 인경(仁卿)
: 팔우헌(八友軒)
출신지 : 예천군 감천면 돈산리
입사경로 : 1773년 증광 문과에 합격.
내관직 : 사헌부 감찰, 병조 좌랑, 예조 좌랑,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

  조보양(趙普陽, 1709~1788)은 예천군 감천면 돈산리 출신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인경(仁卿), 호는 팔우헌(八友軒)이다. 아버지는 정헌대부동지중추부사를 지낸 趙元益)이고, 어머니는 예안이씨(禮安李氏) 이기만(李基晩)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통감』을 배우는데 범례에 해박하고, 정통과 정통이 아님을 능히 구분하였다. 형 둔암(鈍巖) 조규양(趙葵陽)과 더불어 문장이 뛰어나 주변 사람이 난형난제라 하였다. 소은 李景翼), 난졸재 이산두(李山斗), 청대 權相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47년(영조 23)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1773년(영조 49) 증광문과에 합격하였다. 이때 조카인 조석회(趙錫晦)도 함께 급제하여 영조임금이 한집안에 두 명이나 급제하였다고 칭찬하였다. 관직은 사헌부감찰, 병조좌랑, 예조좌랑,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을 지냈다. 예조좌랑 당시 왕실의 외척인 정후겸에게 모욕을 당하자 주위가 만류하는데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를 봉양하는 데 힘을 쏟았다. 부모님을 봉양함에 정성을 다하여 음식의 맛을 미리 보고 맛난 것만 올리고, 오물이 묻은 부모님의 옷은 직접 빨았다. 어머니의 병환이 깊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려 완쾌를 기원하였으나 끝내 효과가 없자 크게 애통해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70세라는 고령인데도 3년간 시묘 살이를 하였다.

 
이때 바람이 불거나 눈비가 내리면 “솜옷을 입고 방 안에 있어도 추운데 땅속에 계시는 아버지는 얼마나 추울까?” 하면서 통곡하였다 한다. 조보양은 어릴 적부터 천부적인 품성과 자질이 남달리 빼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비록 늦은 나이에 벼슬을 하였으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였다. 위기지학을 실천하여 어버이에 효도하고, 자신을 낮추고, 글을 읽으며 산수를 벗하기를 즐겨 하였다. 스스로 호를 팔우헌(八友軒)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일생 동안 산, 물, 바람, 달,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의 여덟가지를 벗 삼아 지낸다는 데서 지은 것이다.

 
성리학 연구에 힘을 쏟아 당시 뛰어난 유학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청빈한 벼슬 생활과 덕행과 효행을 몸소 실천하고 연구하여 후진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감천면 돈산리 산동마을에 천곡서당(泉谷書堂)을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박손경, 정범모, 이상진 등과 교류하였다.
문집으로 『팔우헌문집(八友軒文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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