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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 鐵 嶺 衛 = (식민사관식 설명) --- 민족사관위 - 철령위의 새로운 고찰!!!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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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鐵  嶺  衛 =  (식민사관식 설명)

■1387년(우왕 13) 12월에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이 원나라에 속했던 것이므로 요동(遼東)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철령위의 설치를 결정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설장수(偰長壽)를 통해 이듬해 2월 전달되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유사시를 대비해 전국적으로 성을 수축하고, 서북면에 무장들을 증파해 수비를 굳건히 하였다.

또한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사신으로 파견해 철령 이북의 문천(文川)·고원(高原)·영흥(永興)·정평(定平)·함흥(咸興)은 물론 그 북쪽의 공험진(公嶮鎭)까지도 원래 고려의 영토였음을 주장하면서 철령위의 설치를 철회하도록 요구했으나,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앞서 명나라의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는 요동 백호(百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 철령위의 설치를 정식으로 통보해왔다. 서북면도안무사(西北面都安撫使) 최원지(崔元沚) 또한 요동의 도사(都司)가 강계(江界)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요동에서 철령까지 70개의 역참을 설치하려 한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명나라는 강계만호 김완가(金完哥)의 내부(來附)를 계기로 요동의 봉집현(奉集縣)에 철령위지휘사사(鐵嶺衛指揮使司)를 설치하고, 황성(黃城)을 중심으로 민호(民戶)의 초무(招撫)에만 나서고 있었다.

한편 고려는 전국의 정병(精兵)을 총동원하고, 최영(崔瑩)·조민수(曺敏修)·이성계(李成桂)를 각각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좌군도통사·우군도통사로 삼아 이른바 요동정벌을 단행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중단되었다.

이후 명나라는 더 이상 철령위의 설치를 거론하지 않았고, 1393년(태조 2)에는 봉집현의 철령위지휘사사도 현 만주의 철령으로 이전하였다.

톄링(철령) 시 중국의 시  :  톄링은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의 지급시이다. 면적 12,966 km², 총인구는 306만 명이다. 

2. 철령위의 위치에 관한 제설(諸說)

중국학계에서 철령위 문제를 처음 거론한 연구자 명원청계통기(明元淸系通紀) 를 저술한 맹삼(孟森)은 “철령의 원장이 내부(來附)하니 위를 설치하여 그 무리들을 안무(按舞)하였다. 위서(衛署)는 비록 봉집(奉集)에 있었지만 위를 철령으로 이름 붙인 것은 안무의 대상이 철령 사람들, 즉 원래 철령 땅이 할경(轄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볼 때 맹삼도 봉집을 철령위의 첫 치소로 간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15)

광복 후 한국 학계에서 철령위 위치에 대하여 처음으로 고증한 인물은 강상운이다.16) 강상운은 철령위 위치문제에 대하여 언급한 麗明(韓中)國制關係硏究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철령은 지금 어느 지방에 해당 하느냐하는 문제는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 일정하지 않고, 또 고려에서 말한 철령과 명나라에서 말한 철령은 동명이지(同名異地)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고 하였다. 처음 철령위 지휘사의 최초의 소재지는 봉집현이라는 것은 밝혀졌다. 봉집현은 요양 성에서 동북 80리에 있는 봉집대란 곳이나 과연 봉집대에 철령위가 있었는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다. 또 어떤 학자는 강계지방이라고 하는데 여하간 아직 일정한 정설은 없다. 다만 명제(明帝)가 압록강 이남은 고려의 소관이라고 한 적이 있은 즉 철령위도 반드시 만주의 어느 지점인 것 같고 또 고려에서 철령은 고려의 소령(所領)이라고 밝혀 고려의 소관지로 해달라는 것을 청구한 것이라든지 철령을 요구할 적에 고려에서 요동공격을 상의한 것으로 고려 땅으로 들어온 것 같기도 하다.

 

이에 대해 박원호는 철령과 철령위를 따로 구별하면서도 양자가 각각 다른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17) 이병도는 “철령위 위치에 대하여는 학설이 구구하나, 대개 국내의 그것임이 거의 정설로 되어 있으며, 명이 요동으로부터 철령에 이르는 사이에 칠십점을 설치한다는 그 입점수로 보아 국내의 철령임이 틀림없는 까닭이다. 단 항시 준비과정의 임시적인 본위(철령위)는 일제의 와다 세이(和田 淸)의 설과 같이 압록강 방면도 요원(遙遠)하다 하여 지금 봉천 남쪽의 봉집대에 물러와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18)

 

15) 박원호, 앞의 논문, pp.110~111.

16) 박원호, 앞의 논문, p.112.

17) 박원호, 앞의 논문, p.112.

106 고조선연구 제4호

 

김상기도 고려시대사에서 “이 문제의 철령에 대하여 근래에 만주 철령이 아닌가 하는 억측도 있으나 이는 분명히 강원도와 함경남도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 철령을 가리킨 것이다”라고 하였다.19) 김상기는 철령을 함경도 철령으로 보는 것은 이병도와 마찬가지였지만, 철령위 치소의 위치에 대해서는 김상기도 언급하지 않았다. 김용덕도 “명나라가 의미하는 철령, 고려에서 인식한 철령이 다 같이 우리의 안변의 철령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이미 와다 세이(和田 淸)에 의하여 지적되었고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가 새로이 두문의 ‘철령등처방문장괘자(鐵領等處榜文張掛咨)’를 인용 입증하여 명백히 한 바 있었다.”라고 하여 철령의 위치에 대하여만 거론하고 철령위의 치소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20)

 

<지도 1> 이기백 한국사신론 94년판 철령위의 위치도

<지도 2> 2010년 국정교과서 철령위의 위치도

18) 이병도, 한국사 중세편, 을유문화사, 1961, pp.686~687.

19) 김상기, 고려시대사, 동국문화사, 1961, p.646.

20) 박원호, 앞의 논문, p.113. 철령위 위치에 대한 재 고찰 107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학계는 철령위의 존재를 인정하고, 구체적으로는 한반도 함경도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기백,21) 이현희22) 등이 철령위 위치를 동일하게 언급하였다. 그리고 현행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는 글뿐만 아니라 지도도 삽입하여, 학생들에게 철령위의 위치를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23)

 

위와 같이 볼 때, 한국 연구자들의 그간의 연구 결과들은 일제 관학자들이 주장한 내용을 많이 받아 들였다. 즉 철령위가 압록강변에서 시작하여 한반도 동해안의 철령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철령위의 북쪽 땅은 모두 명의 영토로 귀속시키기 위해 철령위를 설치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한국학자들도 대다수가 철령위의 위치에 대하여 함경도의 원산만 일대로 비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일부 학자들은 철령위가 쌍성총관부자리에 설치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24)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에서는 철령의 위치를 모두 함경도 안에 확정해서 표기하고 있다. 위와 같이 철령을 함경도의 원산만 일대로 비정한 주장에 대하여 복기대25)는 과연 ‘원산만 일대가 정말 철령위인가’하는 의문을 제기하여 그에 대한 다른 의견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일인학자들의 말대로 오늘날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서 함경도 원산만까지 국경선을 긋는 작업이 철령위였다면 고려사 「지리지」에 나타난 고려시대 북쪽 국경선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즉 고려사 「지리지」와 일제 관학자들의 주장을 비교해보면 일인학자들은 고려의 영토를 반으로 줄여 말하고 있다.

둘째, 철령위라는 것은 군대의 단위인데 명나라가 한반도 원산만 일대에 철령위를 설치하였다면 그 설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동해바다를 수비하기 위함도 아닐 것이고 고려에 군사적 위협 목적을 가하고자 하였다면 바로 고려의 중심지역 가까운 곳에 하면 되는 것인데 바닷가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군사적 목적으로 철령위를 설치하였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셋째, 고려의 철령위 정벌과정이다. 만약 원산만에 있었다면 고려의 원정군은 바로 원산만으로 가야할 것이다. 그러나 요동으로 출병을 시켰다. 이에 대하여 혹자는 철령위를 설치하고 조종하는 요동도사부터 휘어잡기 위하여 요동으로 출병을 하였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다. 고려의 입장에서 요동도사를 공격한다는 것은 전체적인 명나라와 전면전을 각오하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 고려가 어느 정도 국력을 회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명나라, 더구나 외교문서상에 나타난 것을 보면 명에 한수 접고 들어가는 입장에서 바닷가의 작은 군영을 찾기 위하여 명나라와 전면전을 각오하고 요동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넷째, 철령위를 원나라의 쌍성총관부자리에 설치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더욱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쌍성총관부는 공민왕 때 이미 되찾은 곳이다. 즉 이미 고려 영토에 들어 온 지역이다. 그런데 이곳에 철령위를 설치하였다면 고려가 명에 할양을 했거나 아니면 고려와 명이 전쟁을 하여 고려가 져서 빼앗겼던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할양을 했거나 명에게 빼앗긴 기록은 그 어디도 없다. 그렇다면 쌍성총관부자리는 이미 고려의 영토인데, 그곳에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였다는 논리는 절대로 성립할 수가 없다.

다섯째, 만약 철령위가 원산만 일대에 설치되었다면 그 북쪽은 명나라 땅이 되거나 명의 영향권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조선 세종이 4군 6진을 개척하여 오늘날 한국의 영토가 확정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원산만 일대의 철령위가 명나라 땅이었다면, 세종의 4군 6진은 명나라와 전쟁을 하여 빼앗거나 할양을 받거나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세종은 명에 사대외교를 잘한 임금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런 임금이 명나라를 공격했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 이런 것으로 볼 때 철령위는 원산만 일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명이 설치한 철령위는 다른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21) 이기백, 한국사신론, 일조각, 1993, p.208.

22) 윤내현, 박성수, 이현희, 새로운 한국사, 집문당, 2005, p.325.

23)국사편찬위원회․국정도서편찬위원회, 고등학교 국사, 2010, p.75.

24) 복기대, 앞의 논문, p.303.

25) 복기대, 앞의 논문, pp.303~306.

 

박원호26)는 연구자들이 ‘철령’과 ‘철령위’를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한 데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고 하고, 철령위가 반드시 철령에 설치되어야 할 것이라는 연구자들의 선입견이 그동안 철령위 위치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장애 요소가 되었다고 하였으며, 철령의 환경이 과연 철령위 설치에 적합한 여러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가 하는 문제부터 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우선 명의 위소제(衛所制)에 의하면 1위는 5,600명의 군사로 구성되는데 명대 초기에 편제 정원을 모두 채울 수가 없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3-4천명의 군사가 철령위에 속했을 것으로 보았다. 만약 철령위가 함경도 남단의 철령에 설치되었을 경우, 명군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를 위소제에 입각하여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것을 인용하면

첫째, 철령위를 구성하는 병력이 적어도 3∼4천명의 군사가 철령고개의 어디에 주둔할 수 있을 것이며, 취소둔은 보통 적의 내침을 막는 성곽 안에 주둔하는 것이 상례인데 철령에는 이와 같은 성곽이 있는가가?

둘째, 위소군(衛所軍)은 둔전(屯田)을 통해 군량을 자급하는 것이 원칙인데 철령에 이와 같은 둔전을 확보할 수 있거나, 또는 요동도사로부터 군량을 보급 받을 수 있는 교통로를 장악할 수 있는가?

셋째, 당시 명군이 가장 멀리 남하했던 곳이 강계였는데 현실적으로 고려가 지배하고 있는 철령까지 어떻게 남하할 것이며, 또 철령 이북의 군민을 관할시킬 위소군을 하필 최남단인 철령에 주둔시켜야할 필요가 있는가? 명의 위소제에 입각하여 명군이 봉착하게 될 난관을 점검해 보면 위의 모든 의문에 대해 일단 부정적인 답변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26) 박원호, 앞의 논문, pp.108~121.

 

철령위에 관한 중국학계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반도 내에 철령위(함경도와 강원도 경계)를 설치하여 원나라 쌍성총관부의 영토를 회수하려 하였지만 고려의 반대와 투항한 나하추의 남은 무리들을 안집(安集)해야 하는 임무가 과중하였으며, 양사(糧飼)를 조달하기 어려울까 우려하여 반도 내에 설치하지 않고 요동(봉집현 구 철령성)으로 퇴설하였다.

둘째, 압록강 동쪽 강계에 철령위를 설치하였다가 북원을 치기 위해 정치적 필요에서 철령위를 요동으로 퇴설했다.

셋째, 요동에 설치했는데 고려가 요동에 대해 영토 야심을 품고 요동을 탈취하려는 전쟁을 벌였다.

넷째, 명과 고려 간의 철령위 설치를 놓고 벌인 논쟁은 동일 명칭의 부동한 지점을 두고 생긴 오해 때문이며, 반도 내에 있는 고려 철령과 압록강 이북 봉성(鳳城) 동남쪽 변문에 있는 고성(古城) 철령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 이후 철령위가 봉성에서 봉집현으로 이설되었다.

 

한중일 삼국학자 들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소수학자들이 처음부터 요동에 설치하였다고 보는 반면, 대부분 처음에는 반도 내 또는 압록강변에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고려의 반대로 그리고 북원 세력을 안집하기 위하여 정치적 목적으로 요동으로 퇴설하였다는 것이다.27)

영상한국사_II.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영상한국사 I 035 동북9성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KBS역사저널 그날구독자 71.5만명구독208공유저장 조회수 21,846회 2019. 6. 28.

동북9성의 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가장 유력한 설은 두만강 북쪽 700리 설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에 공험진이 있고, 그 안에 선충령에 비석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1900년대 초부터 일본인 학자들은 함흥평야 일대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한국사 전체를 깎아내리는 식민사학의 영향으로, 고려 영토가 두만강 북쪽까지 개척됐을 리 없다는 가정에서 나온 것이다.

#윤관#동북9성 #위치#세종실록지리지#두만강 #북쪽 #공험진#일본학자들 #함흥평야 주장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 시험 한국사 문제 ..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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