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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부론면 손곡리 역사공부하기!!! ♣허균과 허난설헌의 스승이였던 손곡 이달 선생 시인의 서당 거주지!!!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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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과 허난설헌의 스승이였던 손곡 이달 선생 시인의 서당 거주지!!!

●蓀谷集序[許筠]

■恭惟 我國家。文運休明。學士大夫。以詩鳴者。殆數十百家。咸自謂人握靈蛇之寶。林然盛哉。摡而揆之。則途有三焉。其和平淡雅。圓適均稱。渾然成一家言者。推容齋相。而駱峯及永嘉父子擅其華。其次則昌大莽莽。富蓄博材。爲一代大方家者。如四佳,佔畢,虛白輩騁其雄。又其次則崷崒峻峭。締思緻巧。以瑰瑋險絶爲貴者。如訥齋,湖陰,蘇相,芝川諸鉅公衒其杰。玆俱韙矣。然其優游敦厚。響正格高。定軌於開天,大曆者。世尠其人。識者猶有所憾云。往在弘,正間。忘軒李胄之始學唐詩。沈著奇麗。而冲菴金文簡公繼起爲韋錢之音。二公足稱一班。而惜也年命恨之。逮在隆,萬間。思菴相知尊盛李。所詠頗淸邵。模揩雖不足。而鼓舞攸賴。晩得崔,白。遂張大楚。所謂夥涉之啓劉,項者非耶。同時有蓀谷翁者。初學杜,蘇於湖陰。其吟諷者旣鴻縝純熟矣。及交崔,白。悟而汗下。盡棄其所學而學焉。其詩本源供奉。而出入乎右丞,隨州。氣溫趣逸。芒麗語澹。其艶也若南威,西子袨服而明粧。其和也若春陽之被百卉。其淸也若霜流之洗巨壑。其響亮也若九霄笙鶴彷像乎五雲之表。引之霞綺風淪。鋪之璧坐璣馳。鏗而厲之。則瑟悲而球戛。抑而按之。則驥頓龍蟄。徐行其所無事。則平波滔滔然千里朝宗。而泰山之雲。觸石爲白衣蒼狗。置在開天,大曆間。瑕不廁王,岑之列。而較諸 國朝諸名家。其亦瞠乎退三舍矣。翁地微。人多不貴重之。所著述累千篇。皆散失無存。不佞少日以仲兄命。問詩於翁。賴識塗向。及其死也。惜其遺文泯沒不傳。爲裒平日所臆記者。詩二百餘首。謀欲災木。又從洪上舍有炯許。續得百三十餘首。令李君再榮合而彙數。類之爲六卷云。夫翁之詩。度越 國家諸名家。豈待鄙文爲不朽哉。雖然。掇拾遺詩。期以傳千載者。不佞心也。其可避汚佛首之誚乎。至於上下數百年。評隲諸老。以及乎翁者。極知僭越而駴一時之人。要之久則論定也。夫豈無一人知言哉。遂書此弁之。翁姓李。名達。字益之。雙梅堂之庶裔孫。蓀谷其自號也。萬曆戊午季春。
陽川許端甫氏序。

▣손곡집(蓀谷集) 서(序)▣
우리나라가 문운(文運)이 크게 빛나, 시로써 이름난 학사 대부가 거의 수백 명이다. 모두 스스로 이르기를 “사람마다 영사(靈蛇)의 보물을 잡았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숲같이 무성하다. 간단히 헤아려보면 세 가지 길이 있다. 화평 담아하고 원적(圓適) 균칭(均稱)하여 혼연히 일가(一家)의 말을 이룬 사람은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을 들 수 있고, 낙봉(駱峰) 신광한(申光漢, 1484~1555)과 영가부자(永嘉父子)1)가 그 화려함을 떨쳤다. 그 다음은 창대(昌大) 망망(莽莽)하고 넓은 재주를 넉넉히 쌓아 한 시대의 대방가(大方家)가 된 사람으로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1420~1488)․점필(佔畢) 김종직(金宗直, 1431~1492)․허백(虛白) 성현(成俔, 1439~1504)과 같은 무리가 웅대하였다.
그 다음은 높고 가파르며 생각이 치밀하여 아름답고도 험하기를 귀하게 여긴 사람으로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1530)․호음(湖陰)정사룡(鄭士龍, 1491~1570)․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1515~1590)․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 1532~1607) 같은 여러 거장들이 건장함을 자랑하여 아름다움이 갖춰졌다.
그러나 부드럽고도 두터워 소리는 바르고 격은 높아서 (당나라) 개원(開元)2)과 대력(大曆)3) 시대의 시에 궤도를 정한 시인은 세상에 적

1) 영가(永嘉)는 안동의 옛이름인데, 흔히 권씨를 가리킨다. 권씨 가운데 부자가 이름난 시인으로는 부자가 모두 대제학을 지낸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과 지재(止齋) 권제(權踶, 1387~1445)를 들 수 있으며, 권제가『영가연괴집(永嘉連魁集)을 엮었다.
2) 당나라 현종(玄宗)의 연호(713~741)인데, 이백과 두보가 활동한 성당(盛唐) 시대이다.
3) 당나라 대종(代宗)의 연호(766~779)인데, 두보가 활동하던 시대이다.2 國譯 蓀谷集

었으니, 시를 아는 사람들이 한스럽다고 말하였다. 홍․정(弘正)4) 연간에 망헌(忘軒) 이주(李冑, ?~1504)가 비로소 당시(唐詩)를 배워 침착 하고도 고왔으며, 충암(冲菴) 김정(金淨, 1486~1520)이 이어서 일어나(당나라 시인) 위응물(韋應物)과 전기(錢起)의 소리를 냈으니, 이 두분은 같은 반열로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아깝게도 오래 살지 못한 것을 한탄해야 하겠다.
융․만(隆萬)5) 연간에 이르러는 사암(思菴) 박순(朴淳, 1523~1589)상공이 성당(盛唐)의 이백(李白)을 받들 줄 알아 읊은 시들이 자못 맑고도 높았으니, 본보기로는 비록 부족하지만 고무되기에는 넉넉하였다. 늦게 최경창(崔慶昌, 1539~ 1583)과 백광훈(白光勳, 1536~1582)을 얻어 드디어 청초한 시를 크게 펼쳤으니, 이른바 과섭(夥涉)이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에게 길을 열어준 것과6) 같지 않은가.
같은 시대에 손곡옹(蓀谷翁)이라는 사람이 있어 처음에 호음(湖陰)에게 두보(杜甫)와 소동파(蘇東坡)를 배웠는데, 그가 읊은 시가 이미홍진(鴻縝)하고 순숙(純熟)하였다. 그러나 최경창, 백광훈과 사귀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진땀이 흘러, 그 배운 것을 모두 버리고 다시 배웠다. 그의 시는 본래 공봉(供奉) 이백(李白)에 근원을 두고 우승(右丞) 왕유(王維)와 수주(隨州) 유장경(劉長卿)에 드나들어 기운은 따뜻

4) 홍치(弘治)는 명나라 효종(孝宗)의 연호(1488~1505)이고, 정덕(正德)은 무종(武宗)의 연호(1506~1521)이다.
5) 융경(隆慶)은 명나라 목종(穆宗)의 연호(1567~1572)이고, 만력(萬曆)은 신종(神宗)의 연호(1573~1620)이다.
6) 과섭(夥涉)은 진(秦)나라 이세(二世) 때에 초나라 장수 진승(陳勝)을 가리키는데, 자가 섭(涉)이다. 어릴 적 시골에서 같이 밭 갈던 친구가 나중에 진승이 초왕(楚王)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대단해진 모습을 보고 ‘많고도 대단하다’는 뜻의 ‘과이(夥頤)’라는 말을 쓴 뒤에 ‘과섭(夥涉)’이라고 불렸다. 진승은 오광(吳廣)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고 대택(大澤)을 공격하여 나중에 초왕이 되었는데, 대택의 공격 덕분에 초나라 항우(項羽)가 패왕(覇王)이 되었으며, 진나라 멸망이 앞당겨져 유방(劉邦)이 함양을 공격하고 항우를 격파하여 한(漢)나라 황제에 즉위하는 계기가 되었다.蓀谷集 序 3

하고 지취(志趣)는 빼어났으며, 빛은 곱고 말은 맑았다. 곱기는 남위(南威)7)와 서자(西子)8)가 고운 옷을 입고 밝게 단장한 것 같고, 부드럽기는 봄볕이 온갖 풀에 내려 비치는 것 같았다. 서리처럼 찬 물줄기가 큰 골짜기를 씻어 내리는 것같이 맑았으며, 높은 하늘에서 학을 타고 피리 부는 신선이 오색구름 밖을 떠도는 것같이 밝게 울렸다. 당기면 노을빛 비단이 바람에 일렁이듯, 펼치면 옥빛 자리에 옥구슬이 구르듯, 쨍그랑하고 소리나게 몰아치면 비파가 슬피 울고 구슬이 울리듯, 눌러서 잡으면 천리마(千里馬)가 멈춰 서고 용(龍)이 웅크리듯, 일없는 때에 천천히 걸음은 평탄한 물결이 넘실넘실 천리 바다로 흘러가듯, 태산의 구름이 바위에 부딛쳐 흰 옷도 되고 푸른 개도 되었다.9) 개원(開元)․대력(大曆) 사이에 두더라도 왕유(王維)와 잠삼(岑參)의 반열에서 조금도 기울지 않고, 우리나라의 여러 이름난 시인들과 비교하더라도 그들 또한 눈이 휘둥그레져 90리는10) 물러설 것이다.
옹은 신분이 미천해 많은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았으므로, 지은 시 천여 편이 모두 흩어지고 남은 게 없었다. 내가11) 소년 시절부터 작은형님의 명으로 옹에게 시를 배워 마침내 향할 길을 알게 되었다. 그가 죽게 되자 그가 남겨 놓은 글이 없어져 전하지 않을 것을 안타깝게 여겨 평소에 개인적으로 기록한 것을 모으니 시가 200여 수 되7) 진(晉)나라 문공이 남위를 얻고는 사흘 동안 정사를 보지 않더니, 그 뒤에 그를 멀리 밀쳐내면서 “후세에 반드시 여색 때문에 나라를 망케 할자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전국책, 위책(魏策) .

 

8) 춘추시대 월나라 미녀 서시(西施)인데, 월나라 왕 구천이 오나라에게 패한 뒤에 그를 오나라 왕 부차에게 바치며 미인계를 썼다. 부차가 서시의 미색에 빠져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월나라가 오나라를 쳐서 복수하였다.
9) 하늘의 뜬구름이 흰 옷 같더니 잠시 사이에 푸른 개같이 변했네. 天上浮雲如白衣, 斯須改變如蒼狗. - 두보 가탄시(可歎詩) .
10) 원문의 ‘삼사(三舍)’는 군대가 사흘 동안 행군하는 거리인데, 1사(舍)가30리이다.
11) 원문의 ‘불녕(不佞)’은 재주가 없다는 뜻인데, 허균이 자신을 낮추는 말로 많이 썼다.4 國譯 蓀谷集

어 판각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상사(上舍)12) 홍유형(洪有炯)의 집에서 130수를 더 얻어 이재영(李再榮) 군에게 합하여 종류별로 편집하게 했더니 6권이 되었다.
옹의 시는 우리나라 여러 이름난 시인들을 뛰어넘으니, 어찌 나의 하찮은 글이 있어야만 오래 전하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남겨진 시를 주워모아 천년 뒤에 전하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마음이니, 부처님 머 리를 더럽힌다는13) 꾸지람인들 어찌 피하겠는가. 위아래 수백년에 걸쳐 여러 노대가를 평정(評定)하여 옹에게까지 이른 것은 분수에 넘쳐 이 시대 사람들을 놀라게 하리라는 것을 잘 알지만, 오래되면 논의는 정해질 것이다. 어찌 한 사람의 지언(知言)이 없으랴. 마침내 이 글을 써서 머리말로 삼는다. 옹의 성은 이(李)요, 이름은 달(達)이며, 자는 익지(益之)이다.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의 서예손(序裔孫)이니, 손
곡(蓀谷)은 그의 자호이다.
만력 무오년(1618) 3월에 양천(陽川) 허단보씨(許端甫氏)14)는 서(序)한다.

12) 명나라나 청나라 때에 국자감(國子監) 학생을 상사(上舍)라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진사를 상사(上舍)라고도 하였다. 홍유형이 1612년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므로 이렇게 썼다면 손곡의 졸년이 1612년으로 확정되며, 이 시가 마지막 작품이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학문하는 사람에 대한 존칭으로도 썼기 때문에, 단정지을 수는 없다.
13) 구양공(歐陽公)이『오대사(五代史)를 지으면서 그 앞에 서(序)나 기(記)를 쓰자, 왕형공(王荊公)이 보고 “부처님 머리에 어찌 똥칠할 수있느냐?”하고 말했다. - 유훈(劉壎)『은거통의(隱居通議) 문장(文章)
6. “부처님 머리에 똥칠하기[佛頭着糞]”이라는 속담이 있다. 원래는『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나오는 말인데, 훌륭한 글 앞에 서문이나 발문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글을 낮추는 표현으로도 썼다.
14) 단보(端甫)는 이 책을 편집 간행한 허균의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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