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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 나라 세워가자! 미국은 자주독립을 원하는 조선 민중들의 뜻과는 정반대로 조선을 미국의 지배하에 두려 했다???

by 晛溪亭 斗井軒 2025.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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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 나라 세워가자! 미국은 자주독립을 원하는 조선 민중들의 뜻과는 정반대로 조선을 미국의 지배하에 두려 했다???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 기사입력 2024/12/25 [17:29]

[사람을 찾아서] (31)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 나라 세워가자!:자주시보

 

[사람을 찾아서] (31)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 나라 세워가자!

20세기는 혁명의 시대였다.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은 현실사회주의(Real socialism) 국가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을 탄생케 했다. 영국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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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혁명의 시대였다.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은 현실사회주의(Real socialism) 국가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을 탄생케 했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1917~2012)은 저서 『극단의 시대(상)』에서 소련이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대한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본주의를 구제했다고 평가했다.

 

“히틀러 독일에 대한 승리는 기본적으로 적군(赤軍, Red Army)에 의해서 쟁취된 것이었고, 오직 적군에 의해서만 쟁취될 수 있었던 것이다. 파시즘에 맞선 자본주의–공산주의 동맹의 이 시기, 기본적으로 1930~1940년대–는 여러 점에서 20세기 사의 중심이자 결정적인 시기이다. 여러 점에서 그 시기는 세기 대부분 동안 –짧았던 반(反)파시즘 시기를 제외하고는–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상태였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관계로 볼 때 역사적 역설의 시기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는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와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으로 양분되면서 냉전으로 돌입하게 된다.

 

미국은 세계 패권을 위한 대 蘇聯(소련) 反共(반공) 정책과 함께 식민지 민족해방 투쟁에 대한 반혁명 침략 정책을 추진하여 세계 곳곳에서 충돌을 일으킨다.

 

이 같은 미국의 반혁명 침략 정책은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국은 자주독립을 원하는 조선 민중들의 뜻과는 정반대로 조선을 미국의 지배하에 두려 했다.

 

황금수, 동지 권오연이 맡긴 가방 속 철학·역사·경제·문학 서적으로 학습하다

 

황금수는 해방 후 겨우 열 살을 갓 넘긴 소년이었지만 레포(レポ)로 활동한다. 황금수가 운동을 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한문 해독 능력과 청년운동 오르그(org)였던 권오연을 만났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진보적 사회 과학 서적은 대개 한문이 많이 섞여 있어 황금수의 한문 해독 능력은 청년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당시 청년들은 대부분 한문 공부를 안 한 사람들이어서 황금수가 대신 읽고 잘 알 수 있도록 쉽게 말해주었다. 그는 서당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공부하면서 여기에 문학과 철학 그리고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청년들에게 설명하기가 더 쉬웠다.

 

여기에 황금수를 운동에 끌어들인 권오연이 철학, 역사, 경제, 문학 서적 30여 권이 들어 있는 두꺼운 가죽으로 된 가방을 황금수에게 맡겼다. 일종의 운동가를 위한 학습 서적 가방이었다. 

 

황금수는 가방에 있는 마분지로 만든 『자본론』(서울출판사)과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 그리고 중국에서 건너온 『대중 철학』과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고함』을 마오쩌둥이 만든 소책자 요약본 등을 통해 철학을 학습했다. 

 

그리고 중고등학생을 위해 소련 아카데미에서 만든 『세계사교정』 4권과 월북 이후에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역임한 전석담(全錫淡, 1916~?)의 『朝鮮史敎程』을 통해 역사도 알게 된다. 

 

또한 자본주의 경제를 해석한 『돈』과 『조선경제사』 그리고 『경제학 입문』 등도 학습하면서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막심 고리키의 단편집과 장편소설 『어머니』 등 문학 서적도 읽었다.

 

특히 황금수는 문학을 좋아해 1946년 2월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朝鮮文學家同盟, 文盟)의 김기림, 오장환, 유진오 등과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시를 무척 즐겨 읽었다. 또한 시집, 시조집, 산문집, 단편소설, 장편소설 등도 시간 나는 대로 사서 틈틈이 보았다. 

 

해방 이후 문화계 단체 조직은 조선문학건설본부(1945.8.16.)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1945.9.17.)이 조선문학동맹(1945.12.13.)으로 통합된다. 이후 조선문학가동맹(위원장 홍명희)으로 개칭되면서 진보적 민족 문학 건설을 주장했다. 

 

황금수는 조선문학가동맹이 1947년에 발행한 『年刊 朝鮮詩集』을 학습하면서 시를 음미하고 의식을 키워나갔다. 『年刊 朝鮮詩集』의 서두에는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싸우는 시’라는 지침이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을 좋아했던 소년 황금수

황금수는 현재 종이로는 600페이지 두께 정도 되지만 당시는 마분지로 만든 300페이지 분량의 시집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시를 거의 암송할 정도였다. 

 

대표적으로 일제 말기 친일 시를 쓰지 않으면서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문학대중화운동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다가 1948년 월북한 오장환(1918~1951)의 『저무는 역두에서』는 황금수가 즐겨 외우는 애창 시였다. 

 

황금수는 이 시를 1945년 연말에 알게 되었다고 기억했다. 또한 그는 “『저무는 역두에서』는 연말 고향으로 가는 귀성 기차를 타려고 역에서 기다리면서 해방 후 공간의 심정을 열정적으로 읊은 감동적인 시로, 병든 역사는 일제 강점 하의 분노와 애환이며 온갖 비애가 함축돼 있다고 생각된다”라고 시의 내용도 해석해 주었다.

 

“저무는 역두(驛頭)에서 너를 보냈다. 

비애(悲哀)야!

 

개찰구에는 

못 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 

병든 역사(歷史)가 화물차에 실려 간다. 

 

대합실에 남은 사람은 

아직도 

누굴 기다려

나는 이곳에서 카인을 만나면 

목놓아 울리라

 

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노선(路線)이

너의 등에는 지도처럼 펼쳐있다”

 

또한 저자를 모르지만, 일제가 패망한 지 얼마 안 되는 상황에서 애국자 행세를 하는 친일 매국노를 꾸짖는 시를 황금수는 일부 외우고 있었다. 

 

‘엊그제엔 저자를 데리고/ 인경을 치고/ 태극기를 애국자 행세/ 그들이 가지고 있는 넋은...’

 

이 글을 읽는 독자분께서 시 제목과 저자를 찾아주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해방은 민중에게 흥분과 감격 그리고 새 세상 건설을 위해 역사의 주체로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으로 나오게 했다. 수많은 정당과 사회 문화 운동단체가 출현해 새 세상을 꿈꾸었다.

 

황금수 또한 나이가 어렸지만, 권오연 동지의 지도를 받으며 레포로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준비 없는 싸움은 진다’고 하는 철학으로 조직 구성원이면 누구나 매일 같이 토론하고 또 학습하였다.

 

문학을 좋아했던 소년 황금수는 권오연의 가방 속 진보 서적에 대한 학습으로 세상에 눈을 떴다. 그러나 황금수는 학습의 기회와 기쁨을 누릴 겨를도 없이, 1945년 연말 신탁통치반대(信託統治反對, 반탁) 투쟁의 격랑에 휩싸인다.

 

소련의 ‘신탁통치’는 조선에 자치적 행정권을 주고, 열강은 뒤에서 협의·자문 구실

황금수가 기억하는 당시 대구 신탁통치 시위이다.

 

“그때 신탁 지지하고 반대하는 시위를 지금 생각해 보면 100여 명. 대열을 지어서 시위하는 거를 볼 수가 있었고. 그때 이승만, 김구는 그 반탁 속에 있었고. 그리고 진보 좌파 쪽 사람들은 지지 쪽에 있었지만, 처음에 반대를 하다 지지로 돌아섰다.”

 

좌와 우의 대립은 점점 깊어지고 사회적, 경제적 혼란도 야기되었다. 특히 청년운동은 신탁통치 반대 정국을 통해 좌·우익으로 극명하게 쪼개지면서 충돌한다.

 

애초 청년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좌익 계열은 미군정의 탄압과 신탁통치 정국에서의 우익 계열의 공세, 즉 찬탁은 ‘반민족=공산당’이라는 이념에 밀렸다. 반면 우익 계열의 청년운동은 반탁운동과 임정 지지를 통해 합법 영역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해 갔다.

 

좌익 계열의 청년단체는 전국청년대표자회의(1945년 10월), 조선청년총동맹(1945년 12월), 조선민주주의청년동맹(1946년 4월)을 거치면서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되었다.

 

우익 계열의 청년단체는 독립촉성청년연합회(1945년 11월), 독립촉성중앙청년회(1945년 11월),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단체총연맹(1945년 12월), 반탁전국학생총연맹(1946년 1월), 전국학생총연맹(1946년 7월)이 결성되면서 대부분 학생운동으로 흡수되었다.

 

리영희 교수는 『曆正 : 나의 청년시대 – 리영희 자전적 에세이』(창작과비평사, 1998)에서 ‘신탁통치 반대’ 데모의 대열에 자진해 나간 것에 대한 회한(悔恨)의 자기비판 글을 실었다.

 

“오늘 해방된 지 38년이 지나도록 분단이 계속될 줄 알았다면 나는 차라리 신탁통치를 수락함으로써 민족분단의 비극을 예방하는 데 찬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식민지 연장과 같이 생각했던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랬듯이 즉시 독립에의 정열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Anti-Trusteeship’과 ‘信託統治反對’의 플래카드가 나부끼는 화물자동차에 올라타고 확성기로 외치고 다녔다. 이것이 일종의 대중연설의 첫 경험이 되었다.

같은 ‘신탁통치’라는 용어였지만, 미국의 제안은 4대 열강의 직접적 행정관리 하의 방식이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소련안은 한(조선)민족에게 자치적 행정권을 주고 열강은 다만 뒤에서 협의·자문하는 방식이었다는 중요한 차이점을 안 것은 20년 가까이 지나 언론계에 들어가 독자적 연구를 하게 된 뒤의 일이다.

(중략)

내가 존경하고 있던 김구 선생이 신탁통치의 성격을 이해하고 그것을 지지했더라면 나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훗날의 이승만 씨 집권과 그의 타락·부패한 친일파들의 반민족적 정권 유지의 원초적 협조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회한이 지금에도 가시지 않고 있다. ‘신탁통치=공산당’의 당시의 정치투쟁의 단순 논리의 의미를 내가 종뚫어볼 능력이 없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승만과 그 추종세력이 ‘반탁(反託)’의 여세를 몰아 민족분단, 단독정부 수립으로 민족의 순수한 열망을 악용할 줄은 더욱 몰랐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 나라 세워가자!

반탁의 소용돌이 뒤에 미국이 있다는 것을 민중은 나중에 알게 된다. 

무엇보다 그때까지 친일파는 매국노요 민족 반역자였는데, 반탁운동으로 애국자로 둔갑 됐다. 친일파가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좌익세력은 매국노 민족 반역자가 되었다.

 

반탁 투쟁은 즉시 독립을 원하는 조선 민중에게 호소력이 컸고, 수세에 몰린 우익이 공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반탁 투쟁을 주도한 것은 김구가 이끄는 중경 임정 측이었다.

 

황금수는 당시 소년들과 벽보 부착과 선전으로 투쟁한다.

 

“동네 또래 아이들 한 50여 명 정도를 데리고 전봇대 벽보 부착 투쟁을 하는데, 내가 골목대장이어서 동네 아이들을 부르면 모두 즐겁게 나와 도와주었어요. 동무들을 길에 일렬로 한 백 미터 이상 세워놓고는 전신주 또는 벽에 위에서부터 아래로 붙여놓으면 뜯으려고 하여도 쉽게 뜯어지지 않았어요. 당시 주요 벽보 내용은 ‘미군 놈 물러가라’, ‘이승만, 김구 백색테러 중단하라!’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황금수는 해방 이후 풍경에 대해 미군이 들어오기 전후로 달랐다고 이야기했다.

 

“해방 당시 스스로 만들고 지킨 ‘자원적 질서’라 하여 새 나라를 만들기 위해 모두 노력하였다. 남녀문제는 우리 공동의 일이라며 서로를 존중했다. 공중화장실에서는 줄서기가, 극장 안에서는 내뿜는 담배 연기로 자욱한 것이 금연으로 달라졌다. 버스와 기차역에서도 차표를 사기 위해 모두 줄을 섰다.

술 마시는 것도 달랐다. 일제 강점기 때는 말도 못 꺼냈던 이야기, 애국 운동 등도 나오기 시작했다. 술 마시고 해롱해롱하며 신세타령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나온 시가 김기림의 새나라송頌이었습니다.”

 

‘거리로 마을로 산으로 골짜구니로

이어가는 전선은 새 나라의 신경

이름 없는 나루 외따른 동리일망정

빠진 곳 하나 없이 기름과 피/골고루 돌아 다사론 땅이 되라

 

어린 기사들 어서 자라나

굴뚝마다 우리들의 검은 꽃묶음

연기를 올리자

김빠진 공장마다 동력을 보내서

그대와 나 온 백성이 새 나라 키워 가자 

(중략) 

용광로에 불을 켜라 새 나라의 심장에

철선을 뽑고 철근을 늘이고 철판을 피리자

세멘과 철과 희망 위에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 나라 세워가자.’

 

황금수는 “오장환은 주로 서사시를 쓰지만, 김기린은 서정시로 엄혹한 해방공간 투쟁 중에도 정서적으로 낭만적 희망을 준 시인이었다. 항상 낙천적으로 인간 자체가 낭만적이라면서 김기림의 새나라송을 좋아했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나 미국이 들어오면서 자유를 빙자하여 질서는 무너지고 중구난방이 되었다고 황금수는 분노했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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