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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terrasanta/
◉김상원(테오필로). ◉세례 : 수원교구 과천본당. ◉소속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1996년 수도원 입회. ◉2005년 사제서품. ◉2006년 7월 20 성지 예루살렘 입국. ◉예수님 무덤성당 소임. ◉2009년 9월 12일 : 세례자 요한 광야 수도원. ◉2010년 8월 20 : 예수님 무덤 성당에서 살고 있음.
1. 성지 이스라엘을 시작하며...
샬롬!
약속의 땅!
예수님께서 나시고, 살으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신앙의 땅!
이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신앙의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성지 이스라엘은 과거 2천여년전의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내일을 여는 파견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성지순례를 다녀간 이들에겐 지나간 발자취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그리고 순례를 준비하는 이들에겐 유익한 정보가 되기를 기대하며 그동안 보고 듣고 공부한 것들을 형제 자매들과 함께 나누려 합니다.
무엇보다도 순례를 할 수 없는 이들에게 생생한 체험의 장이 될 수 있도록 가능한 자세하게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자료를 등록하겠습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여러가지 제약으로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제공하지 못하는 점 이해를 바랍니다.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예루살렘에서
김상원 테오필로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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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필로
2. 성지 순례의 의미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성지중의 성지인 예수님 무덤 성당에 살면서 종종 회의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너무도 다양한 방문객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이다. 이곳은 전 세계에서 오는 모든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곳이기 때문에 마치 해변 가에서나 볼 수 있는 여자들의 옷차림부터 반바지차림의 슬리퍼에 러닝 차림의 구경꾼들이 있는가 하면 순례자를 자처하면서 보여주는 무질서함과 이기적인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많은 상념들이 지나가곤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바로 그곳,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리라는것을 선포하는 그리스도 신앙인들에게 가장 소중한 장소에서 마음을 내려놓고 잠시 기도할 시간도 없이 총총걸음으로 왔다가 후다닥 사라져 가는 우리 순례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삶의 비애가 느껴지기도 한다.
반면 가끔 타 종파인 이슬람 순례자들이지만 하얀 순례복으로 통일하여 정갈하게 옷 입고 신발을 벗어들고 예수님의 무덤을 들어가기 위해 긴 줄에 서서 하염없이 경건하게 기다리는 모습은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
동일한 장소이지만 어떤 이들에겐 신발을 벗어(참고: 탈출 3,5) 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방문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느 곳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들에게 성지(聖地)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엄밀한 의미에서 순례기 다운 최초의 순례기라고 말할 수 있는 ‘에제리아 순례기’를 통해서 순례의 의미를 나누어 보고자 한다.
얼마 전 이태리 중부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주었던 아레조(Arezzo)의 수도원 도서관에서 1884년에 발견된 에제리아(Egeria 또는 Aetheria) 순례기는 기원 후 381-384년경 스페인지방에 살고 있던 한 수녀가 동쪽에 있는 성지를 순례하면서 보고 들을 것을 기록한 것으로 아쉽게도 중간 부분만이 전해져 오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전반부는 여정에 따른 묘사로 이집트에서 성산 시나이를 거쳐 예루살렘을 지나 콘스탄티노플까지 순례하면서 성지와 순교자들의 무덤을 참배하거나 수도자나 은수자들을 방문한 기록이다. 그리고 후반부는 당시 예루살렘의 전례에 대한 기록으로 특별히 부활시기의 전례와 신심행사를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어 전례사 연구에 중요한 문헌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이 산도, 예루살렘도 아닌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날이 올 것(요한 4,21-24 참조)이라고 말씀 하셨고,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살지 않으며(사도 17,24 참조), 바오로 사도는 우리들 자신이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2코린 6,16 참조)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신전 중심이었던 로마의 다른 종교들과 달리 마음의 종교, 내면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특정한 장소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그리스도교가 태동하는 순간부터 박해의 역사였고, 이제 막 피어나려고 하는 그리스도교의 싹을 잘라 버리기 위해 골고타와 예수님의 무덤 위에는 이미 로마의 신전이 들어서 있었던 상황이었다.
세상 어느 곳에서나 진리의 영 안에서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그리스도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선포한 밀라노 칙령(313년)으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고, 그 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돌아가신 골고타와 묻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무덤 위에 대 성전이 지어짐으로써(336년) 커다란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요르단의 마다바(Madaba)에서 발견된 6세기의 모자이크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비잔틴 시대에는 이미 예루살렘을 세계의 중심으로 그리고 있고, 예루살렘의 중심에는 부활 대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성지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내면의 종교였던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예수님 부활 대성당(십자군 이후에 ‘무덤 성당’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됨)과 특정한 ‘장소’를 중심으로 재편되었음을 의미하고 아울러 세계 곳곳에서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순례자들이 죽을 위험과 온갖 불편함을 마다하고 척박한 동방의 땅으로 향하도록 한 것은 무엇일까? 오늘날은 비록 교통의 발달과 풍부한 자원들의 도움을 받아 편안하고 안락한 순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만 성지 이스라엘을 순례하고자 하는 이유는 예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믿는 신앙의 근원에 가 보고자 하는 열망이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 하셨던 갈릴레아 호수가를 걸어 보고 싶고, 요르단 강에 손을 담가보고 또 십자가 지고 가신 그 고통의 길을 걸어 보고 예수님의 무덤에 들어가 거룩한 돌에 입 맞춰 보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순례 행위를 통해 순례자들은 신앙의 거룩한 근원과 교감하며 구원의 체험, 거룩함의 체험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미 4세기에 동방의 성지를 찾아 떠났던 에제리아의 경우가 그랬다. 여성의 몸으로써 이국 만리인 동방을 향해 떠나고자 했던 간절함은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달려왔던 마리아 막달레나의 마음(요한 20,1-18 참조)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구원의 역사가 선포되고 이루어진 예수님의 땅을 직접 가서 봄으로써 성경의 말씀을 더욱더 가까이 느끼고자 하는 열망은 성지의 성스러움을 더했을 것이다.
더구나 4세기 이후 예루살렘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흔적이 묻어 있는 수많은 장소들에 기념 성전들과 수도원들이 지어졌다. 아울러 성지순례를 할 수 있도록 로마제국은 도로와 숙박시설들 제공하였고 또한 로마 병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성경의 사건들이 일어난 ‘중요한 장소들을 보고 싶은 열망’은 신자들로 하여금 순례의 길을 떠나게 했다.
이제 성스러운 장소는 성스러움을 표현한 성전 건축물들과 특별한 신심 행위들로 그 장소만의 특별한 전례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성지는 특별한 장소로서 ‘그 곳’만의 성스러움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성경의 사건들이 일어난 장소는 다른 장소와는 구별되는 특별한 장소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성지 팔레스티나의 성스러움은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전하고 있는 전승과 성경에 대한 회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성스러움이었다. 그것은 순례자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를 떠나 성경의 장소인 바로 ‘그 곳’에서 현재가 아닌 과거 예수님의 시간으로 소급되어 일어나는 성스러움인 것이다.
순례자들이 바라보는 것은 몇 백 년 후에 지어진 기념 건물이나 풍경 그 자체가 아니라 그곳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회상하는 일이며, 그것을 통해 복음과 전혀 무관한 이방인이 아닌 예수의 선포를 직접 듣는 대상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성지의 어느 특정한 ‘장소’ 안에서 경험하는 시간은 항상 ‘지금 현재’가 아닌 성경이 의미를 전해주는 바로 동일한 ‘시간’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순례자가 느끼고 체험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성경의 존재 의미인 ‘예수님의 선포’를 직접 듣게 되는 것이다.
일반 여행객들은 방문하는 곳의 외적인 모습에 의해 감동을 받는 것이라면 순례자들은 전승과 성경에 의한 ‘교회의 증언’을 통해서 먼 과거에 ‘그 곳’에서 일어난 일을 회상하면서 성스러움에 잠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례지에서의 성스러움의 경험은 언제나 성경과 전승이 전해주는 ‘회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렇게 성경과 전승의 말씀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성지 이스라엘을 폴 사바티에는 '제5의 복음'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알지 못하는 순례자들은 일반 여행객들이 느끼는 감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성경을 알고 있는 순례자들, 성경에 대한 앎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특별한 관련이 있다고 고백하는 순례자들은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장소에 대한 경외심을 통해서 새로운 부활을 체험하게 된다. 마치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에 들어가 빈 무덤인 것을 발견하고는 ‘보고 믿었던 것’처럼 막연하게 들어 알고 있던 성경의 말씀들은 예수님의 증언에 대한 회상을 통해 신앙의 빛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순례자들이 그리스도가 서 있던 곳! 가르치던 곳! 기도하던 곳! 그리고 고통 받던 곳에서 서 있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 해 주는 영적인 다리 위에 서 있는 것이며 거룩한 성경상의 과거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지순례가 단순한 여행과 비교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성경에 대한 경외심’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이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다. 예수님이 느끼셨을 베들레헴 구유의 불편함을 직접 느껴보고 싶어 성탄 구유를 만들었던 마음이고, 예수님이 짊어지셨을 무거운 십자가의 고통을 직접 느껴보고 싶어 했던 성 프란치스코의 간절한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바로 안락한 삶의 자리를 떠나 구원의 현장으로 떠나게 하는 마력일 것이다.
에제리아의 순례기에서 반복되어 언급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목적지인 어떤 성지에 도착하면 관습에 따라 그 장소와 관계되는 성경 구절과 시편을 낭독했습니다. 그리고 봉헌 예절을 마치고 사제들과 수도자들의 안내로 가까운 성지로 갔습니다.”
“우리는 목적지인 성지에 도착하면 먼저 기도하고 그 다음에 성경 낭독 그리고 적당한 시편을 읊은 후 다른 기도를 하는 관습을 지켰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는 언제나 성지에 도착할 때마다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성당에 도착하면 우리는 관습대로 기도하고 해당되는 성경과 시편을 낭독한 후 마지막 기도를 마치고 내려왔습니다.”
에제리아가 어느 장소를 방문하든지간에 습관이 되어 지켰던 것은 바로 기도와 그 장소에 맞는 성경 구절의 낭독, 시편낭독, 기도로 이어지는 전례였고 성지를 순례하는 은총의 표시이기도 하였다.
성지 순례를 하면서 성경의 내용이 순례자들에 의해 단순히 확인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선포되고 읽혀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성경이 단순히 책장에 꽂혀 있는 먼지 수북한 한권의 책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선포를 통해서 살아 있는 생명의 복음이 된다는 것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너희는 모두 받아 마셔라......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께서 수난 전날 제자들과 최후 만찬을 드시며 하셨던 이 말씀은 이제 사제의 손 안에서 미사성제를 통해서 오늘 이 자리에서 기억되고 재현되는 것이다.
전승과 성경의 증언으로 인해 거룩했던 성경의 장소는 이제 다시 말씀이 읽혀지고 선포되면서 다시금 거룩한 장소로 변화한다. 이와 같이 말씀이 선포되는 전례는 단지 성스러움을 기념하는데 그치지 않고 성스러움을 직접 만들어 내게 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즉, 성스러움을 찾아 떠나온 순례자들이 성경의 바로 그 장소에서 행하는 회상과 기념을 통해서 성스러움은 지속되는 것이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성지에서 거행되는 기념과 신심행위들의 중요성과 특수성은 그 전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전 생애가 과거의 시공간 안에서 새로운 시공간 안으로 생생하게 살아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지의 성스러움을 통하여 세상 어느 한 장소에 한정되지 않고 진리의 영 안에서 예배하는 세상의 모든 곳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불행히도 예수님의 기적들과 말씀을 들으며 따라 다녔던 수많은 군중들 중 대부분이 구경꾼들이었듯이 오늘도 무덤성당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중에서 구경꾼들을 가려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성스러운 공간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불행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온갖 군상들 안에서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오늘도 바람결이 스쳐 지나간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루카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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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지순례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우리 신앙인들에게 삶은 ‘순례의 여정’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지순례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과 같고, 삶의 의미는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귀결되게 됩니다.
따라서 성지 순례는 이미 2천 년 전에 이 세상에서 당신의 마지막 한 방울의 피와 물까지 전부를 우리들에게 내어 주셨던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나의 삶의 모습을 재조명해 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성지 순례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아는 것만큼’ 보고 느낄 수 있으며, ‘아는 것만큼’ 예수님의 사랑을 보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성지 순례를 준비하면서 가장 필요한 준비는 신구약 성경을 통독하는 것입니다.
탈출기의 여정을 따라 이집트에서 요르단을 거쳐 성지 이스라엘을 순례하신다면 최소한 구약성경의 모세 오경과 신약의 4복음서를 통독하시길 권고 합니다.
성지 이스라엘만 순례 하신다면 최소한 4복음서를 통독하고 오시고, 터키와 그리스를 순례 하신다면 신약성경을 통독하시고 떠나시길 권고 합니다.
성경을 모르고 순례를 하는 것은 일반 여행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성 예로니모)
예레 9,22 주님을 아는 것이 참지혜다
콜로 1,10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면에서 그분 마음에 들고 온갖 선행으로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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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지순례지는? (장소 선정) 어디를?
시간적인 제약을 받으며 살고 있는 우리들에겐 삶의 우선순위, 중요도가 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성지(聖地)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장소인 팔레스티나 전역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교회는 초세기부터 예수님과 관련한 장소를 ‘거룩한 땅’즉, '성지'라고 불러 왔습니다. 그리고 차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사도들, 순교자들 그리고 여러 성인들과 관련된 장소까지 거룩한 장소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나와의 관련성 안에서 관계 맺어지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 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순위를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첫 째 :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성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가 묻어 있는 성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장소와 공생활의 장소 그리고 죽으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신 예루살렘이 중심이 될 것입니다.
둘 째 : 그 다음에 중요한 성지는 성모님과 사도들의 숨결이 묻어 있는 장소들입니다. 성모님 성지는 교회가 확증한 성지들이며, 사도들의 성지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한 장소와 순교지입니다.
셋 째 : 그 다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계시하고 있는 구약 성경의 장소들일 것입니다. 세 번째를 특별히 언급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순례하면서 어떤 순례팀들은 예수님과 관련된 장소들을 도외시 하면서 구약 성경의 장소들을 찾아 다니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성경의 장소도 아닌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현장을 더 찾아 다니는 모습을 모격하곤 합니다. 물론 억지 끼워 맞추기를 하면 이리저리 다 한 실에 꿰여 지겠지만...
넷 째 : 그 다음으로 언급할 수 있는 성지는, 교회가 공경하는 성인 성녀들의 성지입니다. 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르기 위해 성인들의 삶의 장소를 순례하는것도 신앙에 유익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장소는 예수님의 발자취가 묻어 있는 곳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두 번째와 세 번째에 대해서는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모님과 사도들의 성지들이 구약성경의 장소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주일 미사 때 신앙고백을 하듯이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가 교회 정통성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활 초기에 친히 말씀하신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루카 7,28)는 말씀은 구약 성경의 어느 인물들 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세례자 요한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장소의 우선성을 언급하는 것은 짧은 시간 안에 신약에서 구약성지의 모든 것과 아울러 성모님과 사도들의 성지를 한꺼번에 순례 하려는 태도를 경계하라고 권고하고 싶어서입니다. 물론 충분한 시간적인 여유를 가진 순례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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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성지순례 기간은? 얼마간?
장소가 선정이 되었다면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기간입니다. 성지 순례는 무엇보다 여유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장소에서 성경의 말씀을 읽고 음미하고 묵상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후다닥 사진 찍고 돌아서는 순례는 순례가 아니라 관광입니다.
많은 욕심을 버리세요. 순례의 시작은 욕심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짧은 기간 동안 모든 것을 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욕심입니다. 여러 장소들을 찍고 다니지 말고 스펀지에 물이 잠기듯 성지의 장소에서 묶고 머무르며 기도 할 수 있는 여백의 시간이 중요합니다.
처음 순례를 계획하시는 분들은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한지 계산이 서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 가톨릭 신자들의 경우 보통 성지 이스라엘을 4박 5일 기간으로 순례를 합니다. 출애굽 경로를 따라 이집트-요르단-이스라엘을 보통 10일 일정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이태리를 포함해서 2주일 기간으로 계획하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굉장히 짧습니다. 오고 가는 시간(비행기)을 빼고 나머지는 이집트에서 시나이산을 거쳐 이스라엘로, 그리고 다시 이스라엘에서 요르단을 거쳐 이스라엘로 들어오게 되는데 대부분 버스 안에서 시간이 소비됩니다. 가장 중요한 이스라엘에 들어오면 녹초가 될 수도 있겠지요.
출애굽 경로를 따른 성지순례는 대단히 매혹적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간입니다. 순례자들이 차를 타고 이집트에서 요르단을 거쳐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출애굽의 경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간을 걸어갔던 '길'입니다. 그 광야는 '머무름'의 장소입니다. '영혼의 쉼터'입니다. 군인들이 행진하듯 힘차게 걸어 나간 길이 아닙니다. 그 길 안에서 머무르며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만났고 또 하느님과 함께 했습니다. 그 광야의 여정은 버스를 타고 지나가면서 '바라보는'(관광) 장소가 아닙니다. 뙤약볕을 걷고 체험해야 하는 체험의 영역에 속한 곳입니다. 그 안에서 목마름을 느껴보고 그 목마름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반추해 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곳입니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아픔이 아니듯, 그저 스쳐 지나가는 차창밖의 광야는 내 삶과는 무관한 한폭의 풍경화일 수 있습니다.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순례를 한다면 가장 좋겠지만 짧은 시간이라면 우선 순위의 장소를 선택 하시고, 그 다음으로 넉넉한 기간을 갖는 것이 현명할것 같습니다.
이스라엘만 순례를 하더라도 최소 10일 정도의 기간을 권하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중요한 장소에서 머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께 함께 머무르자고 권했지만, 이제 주님께서는 여러분과 함께 머무르고 싶다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루카 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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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필로
6.지도 신부 없이 순례자들만 순례하는것에 대해.....
요즘 들어 우리 가톨릭 신자 성지순례자들도 영적 지도 신부 없이 순례자들만(개인 배낭 순례자들이 아닌 단체 순례자들) 달랑 오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 사정이야 있겠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면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자들만이 오는 성지순례 팀들을 보면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마치 잔칫집에 포도주(술)가 빠진 것과 같은, 마치 신랑이 빠진 신혼여행처럼 가장 중요한 알맹이가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성지순례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는 신자들의 무지에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보입니다. 성지순례를 계획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장소와 일정 그리고 순례 비용이겠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영적 지도를 해 주시고 성지에서 기념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신부와 함께 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잘 알고 있을 성지순례 여행사가 신자들로만 구성해서 성지순례를 온다는 것은 신자들의 신앙의 유익을 고려하지 않은 순례를 계획한 것이고, 순례 여행사로서의 소명의식이 결핍되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 중 사목자를 초대하여 순례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신앙의 공동체가 달랑 신자들만이 온 경우를 보면 과연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신앙이 무엇인지, 평생 단 한 번의 성지 순례를 하면서 편리함이나 경제적인 판단으로 모든 것을 너무 간과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새기게 합니다.
평생 한번 할 수 있는 성지 순례인데 전례를 거행하고 영적인 지도를 할 수 있는 신부 없이 여느 관광지처럼 여기는 순례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지 이스라엘은 다른 일반 성지들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히 구별된 장소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전 생애와 관련 된 바로 '이 곳'이라는 특수성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목자를 이야기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노예생활에서 기나긴 광야의 여정을 거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했던 모세가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구원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목자와 양의 관계로 양은 참 목자를 떠나서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가련한 존재일 뿐 아니라 착한 목자로 인하여 우리들은 천사들보다도 더욱더 축복받은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구세사를 이끌었던 목자들의 공통점은 신앙의 인도자라는 데에 있습니다. 연약한 양들이 어둠속을 걷지 않고 바른 길로 걸어가게 하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참 목자(요한 10,11)일뿐 아니라 진리를 깨우쳐 주는 바른 길의 인도자라는 것입니다(신명 1,5; 느헤 8,8; 루카 24,27; 사도 11,4; 17,3 등 참조).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사도 8,31)라고 고백하며 자기 곁에 앉기를 청했던 에티오피아 내시처럼 우리들의 순례 여정에는 목자가 필요합니다.
영적 지도 신부 없는 성지 순례는 빵점이라고 이야기 하는 이유는 목자와 양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닙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성사의 교회’입니다. 주님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보고 느낄 수 있도록 끊임없는 사랑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이야기 하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눈에 보이는 예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성사입니다.
특별히 성사를 언급하는 것은 성지순례를 하면서 순례자들이‘매일미사’를 하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모습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례주년을 태어나게 했던 성지의 바로 그 장소에서 전례주년에 따른 매일 미사를 한다는 것은 전례주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교회는 신자들이 신앙의 신비를 더욱 더 잘 깨달을 수 있도록 절기의 순환에 따라 주님의 축제들을 더욱더 장엄하게 드러내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의 전 생애를 3년 주기인 전례주년으로 지정하여 거행하고 있는 것이 매일미사입니다.
순례자들이 성지 이스라엘에서 드리는 미사는 ‘매일미사’가 아닙니다. 성지 이스라엘은 주님의 전 생애를 기념하는 장소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던 바로 그 장소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을 선포하셨던 바로 그 장소에서 사제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의 그 말씀’을 직접 듣게 되는 것이 바로 성지에서 봉헌하는 미사의 의미입니다. 순례자들은 사제를 통해서 2000여 년 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었던 바로 그 복음의 말씀을 ‘지금 그 자리에서’직접 듣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셨던 그 말씀을 이제 사제를 통하여 바로 ‘그 자리’에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선포될 때 신자들은 사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지 이스라엘만이 가질 수 있는 전례의 특수성입니다.
성지 이스라엘에서 유별나게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이 장소’라는 공간이 갖는 탁월성입니다. 그 탁월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전례이며 그 구원의 기쁨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 각 장소에 대한 장엄 전례인 대축일 미사가 됩니다.
시간적인 제약 때문에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차례대로 묵상할 수 없을지라도 주어진 시공간 안에서 예수님의 전 생애 즉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활과 수난과 부활을 아우르는 신앙의 신비를 묵상하고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지 순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곳저곳 많은 곳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장소인‘바로 그곳’에서 드리는 기도와 묵상이며, 이것이 가장 잘 표현 되는 것이 모든 신심행위를 포함한 전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름같이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광야냐?, 갈대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세례자 요한은 이 모든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너희들이 보려고 했던 것, 찾고자 하는 것은 예언자(루카 7,24-26)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지 순례를 통해서 찾고자 하는 것, 보려고 하는 것은 다른 외적인 것들이 아니라 ‘말씀이신 하느님’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던 ‘바로 그곳’에서 예언자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말씀’뿐입니다. 그 말씀은 성사인 전례 안에서 사제를 통해 보고 들을 수 있으며 그때 우리는 그 말씀들을 우리들의 가슴에 새길 수 있게 됩니다.
요즘 각 교구에서 부제들이나 서품을 받은 새 사제들이 성지순례를 하고 있는 것은 매우 좋은 현상입니다. 이 새 사제들이 나중에 본당에 가게 되면 신자들과 성지순례를 하면서 보다 나은 앎의 조건에서 순례자들을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제들 중에 성지순례를 하지 못하신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여건이 된다면 주님의 땅을 아직도 밟아 보지 못한 사제들을 모시고 함께 순례의 여정을 걷는 것은 어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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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성지순례가 일상의 탈출?
사람들은 늘 일상의 탈출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쳇바퀴 도는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고픔이며 또한 멈출 수 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삶의 굴레에서 해방되고자 함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배낭을 메고 훌훌 떠나갈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래서인지 순례자들의 모습 속에서도 순례자다움보다는 일상의 탈출을 꿈꾸고 있는 모습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순례자들에게서 순례자다운 경건함과 신앙의 뜨거움을 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신(마르 10,27)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실 거라는 작은 믿음으로 참고 인내하게 됩니다. 다만 일상의 삶으로 되돌아가 엠마오로 돌아가는 제자들이 느꼈던 그 뜨거움을 느낄 수 있기를 빌면서……. 왜냐하면 일상을 탈출한 사람들만이 진리는 비범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있음을 깨달을 수 있기에 말입니다.
서론을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먼저 일상의 탈출을 꿈꾸었던(?) 한 여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바로 6세기경에 살았던 은수자인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17년 동안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거리의 여성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28세 때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들과 함께 순례길을 떠나는데 순례 도중에도 악습을 고치지 못하고 열심한 순례자들을 타락시켰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성당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 같아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쪽 구석에 서 있게 됩니다. 그리고는 눈을 들어 마리아상을 바라보는데 성모님께서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이에 자신의 잘못을 크게 깨달은 후 기쁜 마음으로 성당 안에 들어가 기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요르단으로 가서 여생을 지내라는 음성을 듣고서 은수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녀는 요르단 광야에서 47년 동안이나 아무도 만나지 않고 홀로 살았다고 합니다.
당시 팔레스티나에는 한 곳에서만 43년 동안 살면서 하느님을 섬기는 조시무스(Zosimus)라는 열심한 수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요르단으로 향하다가 기도 시간이 되어 시편 기도를 하는데 “신부님, 나는 여자인데 당신의 겉옷을 던지면 나를 볼 수 있습니다”라는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됩니다.
조시무스는 마리아에게 성체를 영해주고 다음 해에 만나기로 하고 돌아왔고, 약속된 날에 다시 영성체를 해주었습니다. 그 후 약속한 다음 장소로 갔으나 마리아는 이미 운명하고 있었고, "가련한 마리아는 장사지내 달라고 청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와디켈트 성 조지 수도원에 있는 성화. 왼쪽이 조시무스 수도자, 앙상하게 뼈만 남은 마리아의 모습은 고행을 상징한다.
일상의 탈출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일상 안에 계신 하느님과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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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성지순례 지도 신부님들께!
성지순례에서 사목자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순례자들을 인솔하는 지도 신부가 얼마만큼 준비를 했느냐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보다 잘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지의 각 장소들은 전대사의 은총이 주어진 곳이기에 어느 곳보다도 회개의 여정, 참회의 여정을 가장 잘 이끌어 줄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 성지 이스라엘은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3년간의 공생활을 통하여 친히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수난 당하시고 영광을 드러낸 유일회적이며 탁월한 장소입니다.
신부님들이 성지순례 지도 신부로 오시는 것은 ‘매일미사’를 드리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신비가 선포된 바로 그 거룩한 장소에서 순례자들은 사제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의 선포’를 직접 듣게 되는 것이 바로 성지에서 봉헌하는 미사의 의미입니다. 순례자들은 사제를 통해서 2000여 년 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었던 바로 그 복음의 말씀을 직접 듣게 되는 것입니다.
사제들은 미사 전 기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미사이듯 정성을 다하여 미사를 집전하기를!’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셨던 그 말씀을 이제 사제이신 당신의 입을 통하여 바로 ‘그 자리’에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선포될 때 신자들은 사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지 이스라엘이 가질 수 있는 전례의 특수성입니다.
교회는 신자들이 신앙의 신비를 더욱더 잘 깨달을 수 있도록 절기의 순환에 따라 주님의 축제들을 더욱더 장엄하게 드러내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의 전 생애를 3년 주기인 전례주년으로 지정하여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례주년 안에서 매일미사는 전례 주기(가·나·다해)와 시기(대림·성탄·사순·연중시기)와 기념일(대축일·축일·기념일 그리고 주일과 평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전례가 성지 순례 기간 중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지에서 순례자들이 봉헌하는 미사는 비록 짧은 여정일지라도 예수님의 전 생애에 대한 신앙의 체험이 되어야 합니다.
성지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기념 성당들은 예수님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장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지 이스라엘에서 유별나게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이 장소’라는 공간이 갖는 탁월성입니다. 그 탁월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전례이며 그 구원의 기쁨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 각 장소에 대한 장엄 전례인 대축일 미사가 됩니다.
시간적인 제약 때문에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차례대로 묵상할 수 없을지라도 주어진 시공간 안에서 예수님의 전 생애 즉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활과 수난과 부활을 아우르는 신앙의 신비를 묵상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사목자들은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도 신부님께서는 성지순례를 계획하면서 여행사와 어느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지 미리 결정하고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루살렘 성지 안내소에서는 순례자들을 위해 2달 전부터 미사 예약(성지의 모든 성당들)을 받습니다. 성지순례 여행사의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님의 구원의 업적이 특별히 두드러진 장소에서 순례자들이 미사를 할 수 있도록 미리 예약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오는 순례자들의 공통된 마음은 가능하면 가장 중요한 성지에서 미사를 드리고 싶어 하기 때문에 늦게 예약을 하게 되면 원하는 곳에서 미사를 하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각 성지의 고유 미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각 성지의 고유 미사는 전례주년에 우선하며 대축일 미사로 봉헌할 수 있습니다.
붉은 색으로 표시한 것은 우리말 미사경본에서 중심 미사로, 나머지는 미사경본 뒤쪽에 부록으로 구성을 했습니다.
□ 나자렛과 갈릴래아 주변
o 나자렛 :
- 주의 탄생 예고(성모영보) 기념 미사
-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기념 미사
- 동정성모 신심미사.
-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축일 미사.
- 노동자의 주보 성 요셉 미사.
o 카나 :
- 주님의 첫 기적 미사
- 혼인 서약 갱신식
- 중재자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미사.
-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미사.
o 타볼산 :
- 주님의 거룩한 변모 미사
- 성 모세 ․ 성 예언자 엘리아 기념 미사
o 탑가 ․ 가파르나움 ․ 티베리아 :
- 빵과 물고기의 기적 기념 미사
- 성 베드로 사도 기념 미사
- 모든 사도들의 기념 미사
- 성체성사 기념 미사
o 참 행복 선언 성당 :
- 참 행복 선언 기념 미사
□ 예루살렘
◉ 무덤성당 :
- 주님의 부활 기념(무덤과 경당)
- 거룩한 십자가 신비 기념(골고타)
- 동정 마리아의 통고 기념(골고타)
- 우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기념
-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 기념
- 주님의 수난 기념
-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 등
◉ 최후의 만찬 기념 경당과 작은형제회 관구본부 수도원 :
-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기념 미사
- 성령강림 미사
- 영원하신 대사제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기념
-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념미사
- 성 토마스 사도 기념
◉ 겟세마니 성당 :
-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신 주님 기념 미사
- 주님의 붙잡히심 기념
- 동정 성모 마리아의 승천 기념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 기념
- 주님의 수난 기념
- 성시간
◉ 채찍 성당 :
- 주님의 채찍 맞으심 기념
- 주님께서 사형 선고 받으심 기념
- 우주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 사도 성 바오로의 체포 기념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기념
- 거룩한 십자가 신비
- 주님의 수난 기념
- 성전에 봉헌하심 기념
- 왕관을 씌우심 기념
- 십자가의 길 기념
o 베다니아 :
- 라자로의 부활 기념
- 거룩한 마르타와 마리아 기념
o 베파제 :
-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
o 도미누스 플레빗 :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 흘리심 기념
- 주님의 재림 기념
◉ 올리브 동산 :
- 주님의 승천 기념
- 주님의 재림 기념
o 아인카렘 :
- 동정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기념
- 세례자 요한 탄생 기념
- 중개자이신 복되신 동정녀 기념
- 광야의 세례자 요한 기념
- 성 자카리아와 성녀 엘리사벳 기념
o 엠마우스 :
- 엠마우스로 가는 두 제자 기념.
- 클레오파와 시메온 기념
□ 베들레헴
o 성탄성당 :
- 주님 성탄 기념
- 목자들에게 알리신 복된 소식 기념
- 주님의 공현
- 복되신 동정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녀 기념
-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기념
- 교회학자 성 예로니모 기념
o 목자들의 들판 :
- 주님 성탄 기념
- 목자들에게 알리신 복된 소식 기념
- 주님의 공현
□ 기타 지역
o 예리코 ․ 요르단 강 :
- 주님의 세례 기념
- 주님의 단식 기념
- 주님께서 자카리아의 집에 들어가심 기념
- 광야의 세례자 요한 기념
- 세례자 요한의 순교 기념
o 자파(텔아비브) :
- 사도 성 베드로 기념
o 느보산(요르단) :
- 성 모세 기념
o 다마스코(시리아) :
- 사도 성 바오로의 회개 기념.
o 이집트 :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이집트 피난 기념
o 시나이산(이집트) :
- 주님의 거룩한 변모 미사
- 성 모세. 성 예언자 엘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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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기념교회 위주로 성지순례? 를 하는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에게!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올려져 있는 내용의 글을 보고서 몇 자 적습니다. 내용을 그대로 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반적인 성지순례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기념 교회 위주로 성지순례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성지라고 하는 bible site는 거의 국립공원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입장료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성지를 제외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정말 힘들게 성지 순례를 하였는데 가야 할 곳은 가지 않고 기념 교회 위주로 성지 순례를 하시는 것을 볼 때 가슴이 아픕니다.”
어느 목사님이 남기신 글입니다. 우선 하나씩 살펴보지요.
①“일반적인 성지순례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 기념 교회 위주로 성지순례를 한다?”
일반적인 성지순례와 특별 성지순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순례자 각자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준비 했느냐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정도에 따른 구분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준비를 잘 한 순례자들은 그들만의 특별한 순례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용을 아끼기 위해 기념 교회 위주로 성지순례를 한다고 하셨는데, 현재 성지의 성당들 중에도 입장료를 받고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저희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관리하고 있는 성지 중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고 있는 곳은 ‘가파르나움 성지’입니다. 이곳의 입장료 수입은 성지의 고고학 발굴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에 속한 성당들이 입장료를 받고 있습니다. 이들 성지는 주님의 기도 성당, 성 안나 성당 그리고 베드로 회개 성당 등이 그러합니다. 그 외 성지의 성당 중 입장료를 받는 성당은 없습니다.
성지의 기념 성당들이 입장료를 받지 않는 것은 성당은 기도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박물관 입장료처럼 돈 주고 들어가야 하는 곳은 아닙니다. 다만 몇몇 기념 성당에서 입장료를 받는 것은 성당 유지 관리를 위한 필요성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기념 성당이 입장료를 받는다고 해도 비용을 아끼기 위해 들어가지 않을 가톨릭 신자들은 없을 것입니다. 순례의 목적이 기념 장소를 방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성지라고 하는 성경의 장소(bible site)는 거의 국립공원이 되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지라고 하는 ‘거룩한 땅’은 성경의 장소(Bible site)가 되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과 관련해서 언급되는 장소를 가리켜 특별히 거룩한 땅 즉 ‘성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거룩한 땅’이란 그 땅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심의 표현으로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성경의 장소라고 하는 것은 구약 성경과 신약성경의 주 무대가 되었던 팔레스티나 전 지역뿐만이 아니라 그리스와 터키와 이라크와 이란, 이집트를 아우르는 중동의 전 지역이 구세사의 무대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장소는 현재의 이스라엘에 한정시킬 수 없는 말이며, 한정시킨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전역이 국립공원이 된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떤 구약성경의 장소들은 국립공원으로 지정 되어 관리되고 있고 어떤 장소들은 유대교 정통파 신자들이 그 근처에 키부츠를 만들어 구약 성경의 장소들을 기념하고 있는 곳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장소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관리되는 곳은 몇 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관련된 신약성경의 장소들 중 몇 군데는 이스라엘 건국 후에 발견되어 이스라엘 정부가 발굴작업을 한 후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곳들이 있지만 이것 또한 몇 개 되지 않습니다. (코라진, 베싸이다, 쿠르시 국립공원.... 등)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의 시대가 끝나고 종교 자유가 주어지면서 성지 이스라엘에는 수많은 기념 성당들이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군대에 의해 대부분 파괴 되었고 그 후 이슬람에 의해 점령된 성지를 십자군들이 탈환(1099년-1291년)합니다. 그 후 다시 한 번 성지에 수많은 기념성당들이 지어지지만 1187년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에게 패한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이슬람에게 내줘야만 했습니다. 성지 수복을 위한 여러 차례의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고 성지 팔레스티나는 이슬람 치하에 놓이게 됩니다. 십자군 전쟁이 완전히 끝나기 이전인 1229년부터 작은형제들(프란치스칸들)은 성지에서 현존하면서 이슬람에게 빼앗긴 기념 성지들을 되찾아 놓았기 때문에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롭게 성지 순례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그리스도인들의 성지가 박물관(터키의 성 소피아 성당)이 아니고 국립공원(구약의 성지들처럼)이 아닌 기도 하는 성당으로 남겨진 것은 십자군 전쟁 와중에도 이슬람 정권 안에서 순교하며 지켜온 작은 형제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비잔틴 시대 그리고 십자군들에 의해 지어졌던 기념 성당들을 모두 다 되찾은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관련한 신약의 장소들에만 기념 성당을 지은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장소들에도 수많은 기념 성당들을 지었습니다. 작은형제들이 되찾을 수 있었던 성지들은 거의 대부분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성지들뿐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런 성지들 몇 군데는 아직도 이슬람이나 유대인들의 관리 하에 있는 곳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성지들은 모두 58개 기념성지(이스라엘-55 지역과 시리아-2, 요르단-1개 지역 포함)와 유다 지역의 성지들 중 유대교나 이슬람 소속이 3개 그리고 정교회와 공유하는 곳이 3곳이고 정교회 소속인 곳이 10 곳으로 모두 74곳의 기념성지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많은 기념 성지들과 마찬가지로 구약 성경의 장소들에 들어섰던 기념 성전들 또한 대부분 이슬람에 의해 회교 사원으로 변경되었고 오늘날에는 유대교 회당으로 바뀐 곳들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개신교 순례자들은 기념성당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꺼려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가톨릭을 마리아의 교회라고 이단시 하는 교파들에겐 예수님 기념 성당들 또한 모두 이단으로 보일 것이고 그러한 기념성당에 들어가는 자체가 꺼림칙하게 느껴지기에 성당이 없는 구약성경의 장소들인 국립공원들을 더욱 선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신교 순례자들이 즐겨 찾는 마싸다 유적지 위에도 비잔틴 시대의 성당 유적이 있었던 곳이라고 미리 설명해 준다면 아마도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가톨릭 순례자들도 쿰란 유적지 등 신자들에게 유익이 되는 국립공원의 성경 유적지들은 필수적으로 방문 하고 있습니다.
③‘입장료가 있기에 중요한 성지를 제외한다. 정말 힘들게 성지 순례를 하는데 가야 할 곳은 가지 않고 기념교회 위주로 성지순례를 하는 것을 볼 때 가슴이 아프다.’
순례자들이 성지 성지순례를 떠나가는 것은 말씀이 ‘선포되고 행해진’ 성경의 장소를 직접 가봄으로써 성경을 더욱더 정확하게 알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순례자들이 성경의 장소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순례의 가장 일차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과거의 흔적들을 바라보면서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며 성스러운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지에 있는 기념 교회들이 바로 그러한 곳들입니다.
구원의 사건이 일어났던 바로 그곳!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셨던 바로 그곳!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고 죽으시고 부활 하신 바로 그곳에 세워진 교회를 이르러 기념 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념 교회 위주로 순례를 하는 것을 볼 때 가슴이 아프시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이것이 전승을 부정하는 목사님들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번 보시죠.
성경의 장소(Bible site)를 성경의 장소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는 어느 지명을 예로 든다고 할 때 그 지명의 정확한 위치까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나요? 그렇다면 당연히 고고학 발굴 자료에 의해서겠지요? 수천년에서 수백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던 지역을 고고학 발굴을 해서 그 장소가 성경의 장소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발굴된 유물들에 의해서 밝혀지게 됩니다. 발굴된 유물들이 어느 시기와 장소였다고 확증하는 것은 역사적인 기록이나 서적들 그리고 특정 시대의 문화 양식들을 포함한 ‘전승’에 의해서 추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지의 어느 곳을 파서 모자이크가 나오면 이것은 비잔틴 시대의 양식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고 또 모자이크의 문양들을 통해서 성당이 있었던 장소인지 유대교 회당이 있었던 장소인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확증할 수 있는 근거 자료가 전승입니다.
기념 성당들이 있는 모든 곳들을 보면 비잔틴 문화의 특징이었던 모자이크들을 발굴하여 볼 수 있도록 한 것은 바로 그곳이 비잔틴 시대의 기념 성당이 있었던 자리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에게 가장 근접한 시대의 전승에서 예수님의 흔적이 있었던 곳임을 확인하고 기념 성당이 지어졌던 장소라는 말이 됩니다.
성지에 살면서 보면 가톨릭 신자들의 성지 순례와 개신교 신자들의 성지 순례 장소는 확연히 다르게 나타납니다.
목사님의 이야기대로 가톨릭 신자들은 예수님의 흔적이 남아 있는 기념교회 위주의 순례를 하는 반면 개신교 신자들은 기념 성당 안에 들어오는 것을 꺼려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반면 구약의 성지들,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가는 몇몇 국립공원들을 선호하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그러한 국립공원들이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장소라면 토를 달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겠지요. 그러나 므기또(구약의 성왕인 요시아 왕이 전사한곳이며 묵시록에서 언급하고 있는 아마겟돈 이라는 곳)나 마싸다(유다 1차 독립 전쟁에서 패한 유대인들이 마지막으로 항거한 천연의 절벽 요새이며 로마군이 3년간에 걸쳐 토담을 쌓고 올라오자 마지막엔 모두 자결한 곳. 헤로데의 궁전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필리스티아인과 유다인들 간의 전쟁의 장소였던 쉐펠라 지역 등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선순위에 한참 뒤에 있는 장소들을 찾아다니면서 성지순례 한다고 하는 이들을 보면…….목사님 표현처럼 그리스도 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쓰라립니다.
저는 신약성경의 장소들 그 중에서도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장소들이 다른 어느 성경의 장소들보다도 중요시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단식을 하시고 유혹을 당하셨던 예리코에 있는 ‘유혹의 산’이 이집트에 있는 시나이 산 보다도 더 소중한 곳이고, 므기또나 엔게디 그리고 마싸다 보다도 세례자 요한의 숨결이 묻어 있는 아인카렘 성지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순례자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열린 마음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면 지금까지 믿고 고백하던 신앙에 회의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새로움의 시작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있다"
(묵시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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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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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이 산(Mount Sinai, 히: הר סיני - Har Sinai)
시나이 반도는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역삼각형의 반도로 동서의 최대 너비는 210km, 남북의 최장 길이는 385km이다. 서쪽으로 수에즈만 및 수에즈 운하와 동쪽으로 아카바만 및 네게브 사막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 및 가자 지구와 인접해 있고 북쪽은 지중해, 남쪽은 홍해와 접해있다. 시나이 반도는 1967년 ‘6일 전쟁’때 이스라엘군에게 점령당했다가 1979년의 평화조약 규정에 따라 1982년 이집트에 반환되었다.
시나이 반도는 아프리카 북부지역과 아시아 남부지역을 가로지르는 광대한 건조지대에 속하며 토지의 높낮이가 완만한 북부의 지중해 연안지역에서는 겨울에 비교적 많은 125㎜의 강우량을 보이고, 여름은 건조하고 몹시 덥다. 남부 산악지대는 겨울에 비가 조금 내리며 얼음으로 덮이기도 한다. 여름엔 타는 듯한 뜨거운 햇살이지만 밤이 되면 서늘해진다. 시나이 반도에서 농업은 지중해 연안과 오아시스 주변을 제외하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시나이 반도의 산악지대와 메마른 내륙에서 유일하게 살아갈 수 있는 베두인들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낙타나 양, 염소를 치며 유목 생활을 하고 있다.
남부 고산지역에 있는 대표적인 산으로는 카타리나 성녀의 시신이 발견된 가장 높은 카타리나 산(2,642m)이 있고 모세가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시나이 산(2,285m)이 있다.
시나이 반도가 인류 역사 안에서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것은 기원전 1260-1220년 사이에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탈출하면서 구원 역사의 핵심 장소로 시나이 산이 선택된다.
탈출 19,1-2 :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바로 그날,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 그들은 르피딤을 떠나 시나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진을 쳤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그곳 산 앞에 진을 쳤다.
이스라엘 에일랏의 타바 국경
타바 국경에서 성 카타리나 수도원까지 220km - 노선 버스가 없으므로 택시를 타야 한다.
파라오의 딸에게서 자라난 모세는 어느 날 이집트인이 한 히브리인을 때리는 것을 보고 그 이집트인을 죽이게 된다. 그리고 이 일이 탄로 난 것을 알고는 미디안의 광야로 피신해 갔다. 모세는 광야에서 치포라와 결혼하고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집안에서 양 떼를 치는 목자생활을 하게 된다(출애 2,18; 3,1; 4,18; 18,1).
모세는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히브리어로 황량한 지역, 사막, 광야를 의미)으로 갔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불꽃 가운데에서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신비로이 나타나신 야훼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집트의 손에서 울부짖는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데려갈 것을 명하셨다(출애 3,1-12).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아뢰어 “있는 나”라는 이름을 계시 받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탄생하게 된다(출애 3,13-15 참조).
탈출 3,2-6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는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모세는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저 떨기가 왜 타 버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떨기 한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그분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불타는 떨기나무의 동정녀.
FROMENT, Nicolas, The Burning Bush, 1476, Wood, 410 x 305cm, Cathedrale Saint Sauveur, Aix-en-Provence
모세를 부르심
BOTTICELLI, Sandro, The Trials and Calling of Moses, 1481-82, Fresco
Cappella Sistina, Vatican
모세는 야훼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홍해 바다를 건너 주님께서 약속한 가나안으로 들어가면서 다시 이곳 시나이 산으로 와 머문다. 그리고 우리가 구약(舊約)이라고 부르는 하느님과의 사랑의 언약을 이곳 시나이 산에서 맺게 된다. 하늘 가장자리에 닿을 것만 같은 시나이 산의 최고봉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게 된 것이다.
탈출 19,20 :“주님께서는 시나이 산 위로, 그 산봉우리로 내려오셨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 모세를 그 산봉우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갔다.”
탈출 31,18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모세와 말씀을 다 하신 다음, 당신 손가락으로 쓰신, 돌로 된 두 증언판을 그에게 주셨다.”
Moses on Mount Sinai Jean-Léon Gérôme -1895-1900
Moses with the Ten Commandments by Rembrandt (1659)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고 선언(탈출 19,5-6 참조; 레위 26,12; 에제 36,28; 로마 9,26; 2코린 6,16; 히브 8,10)하신 곳이 바로 시나이 산이다.
탈출 19,3-6 : 모세가 하느님께 올라가자, 주님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셨다. “너는 야곱 집안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알려 주어라.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인들에게 알려 줄 말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와서 주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법규를 일러 주자 온 백성이 한목소리로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탈출 24,7-8 : 그러고 나서 계약의 책을 들고 그것을 읽어 백성에게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모세는 피를 가져다 백성에게 뿌리고 말하였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이리하여 메마르고 황량한 시나이 광야는 거룩하고 신성한 장소가 되었다. 역사가 아만토스(K.Amantos)는 고대 세계에서 “시나이반도처럼 아무런 보잘 것 없는 곳이 이처럼 거룩하고 전설적인 곳이 된 곳이 없었다.”고 언급한 바로 그 장소가 된다.
이후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돌아서서 반역할 때 항상 예언자들을 보내어 ‘광야’로 돌아오라고 하는 그 광야의 중심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상기시켜 주는 시나이 산이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호세 2,16 참조)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적인 체험은 바로 출애굽 사건(탈출 20,2; 신명 5,6; 26,8; 여호 24장; 다니 9,15)이며 모세 오경의 중심 사상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구약성경의 핵심 신학이 흘러나오는 원천이 되는 곳이 바로 시나이 산의 계약에 있다. 시나이 체류 이야기는 출애굽기 19장 1절부터 레위기 전체와 민수기 10장 10절까지 연결되는 모세 오경에서 가장 방대한 분량이기도 하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탈출 20,1-17)을 받고 다시 부름을 받아 시나이 산에서 사십 주야를 머무르며(24,12-18) 성소와 예배에 관한 계약의 법(20,22―23,19)을 받았다.
탈출 20,1-17 : 그때 하느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
인류 역사상 모세만큼 위대한 사람도 없다. 모세는 야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탄생하도록 이끈 하느님의 중개자였다. 모세의 위대함은 야훼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듯이 ‘많은 예언자들은 꿈과 환시 속에서 야훼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되겠지만 야훼 하느님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은 모세 단 한명 뿐이었다’(민수 12,6-8참조). 그러한 모세도 40년 동안의 광야 여정을 마치고 약속의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예리코가 내려다보이는 느보산에서 생을 마감한다. 외형적으로는 므리밧 카데스 샘에서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쳐서 물이 솟아나게 한 사건(민수 20,11-12; 신명 32,51 참조)에 있지만 약속의 땅은 모세를 포함한 출애굽 세대에게 허락된 몫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후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보고 사귀시던 모세와 같은 예언자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신명 34,10 참조).
신약성경은 예수를 모세와 대조시키면서 예수는 새로운 법을 가르치는 제2의 모세로 묘사하고 있다. 모세는 광야에서 구리뱀을 들어 죄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렸지만 예수는 자신을 십자가에 들어 올려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것이며(요한 3,14-15), 모세는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백성에게 주었지만 예수는 자신을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주었다(요한 6,22-59). 모세는 계약을 맺으며 짐승의 피를 뿌렸지만 예수는 단 한번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완전한 제사를 바쳤고(히브 9,19-28),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요한 1,17).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마태 17,1-9; 마르 9,2-10; 루카 9,28-36)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면은 예수님이야말로 율법과 예언서에서 예언한 인물이며 수난을 통해서 그 예언을 완성할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느님의 산’의 위치에 대한 학자들 간의 몇 가지 주장들은 있지만 전통적으로 아랍어로 ‘에벨무사’라고 부르는 시나이 산을 모세의 산으로 여기고 있다. 이것은 초기 전승들에 기인하는데 3세기경부터 이집트에서 온 은수자들이 불타는 떨기나무 주위에 정착하면서 수도생활을 하였고, 4세기경에 이곳을 순례하면서 순례기를 남긴 에제리아 수녀의 기록 그리고 헬레나 성녀가 세운 성당과 그 후 유스티누스 황제의 성당 등이 그것이다.
지리적인 요인으로는 델타지역에서 탈출해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이 반도 남단에 있는 구리와 터키옥 광산에 이르는 옛 이집트 도로를 따라 쉽게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카데스에서 이곳까지는 가는데 거의 열하루가 걸린다(신명 1,2).
이스라엘 전승에서는 모세가 계약을 맺은 장소를 ‘하느님의 산’(출애 24,13; 3,1참조)이라고 하며, 북쪽의 전승(E-엘로힘계·D-신명기계)에서는 호렙, 남쪽의 전승(J-야훼계·P-제관계)에서는 시나이 산이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시나이 산과 호렙 산은 서로 다른 산이 아니라 동일한 산이라고 보는 것이 학자들의 통설이다.
기원전 9세기의 예언자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두 죽인 일 때문에 이제벨이 죽이려고 하자 브엘세바를 떠나 ‘사십일’(오랜 세월이라는 뜻)을 밤낮으로 광야를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당도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곳에서 주님의 계시를 받았다(1열왕 19,1-18 참조).
1열왕 19,8 :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으로 힘을 얻은 그는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
‘시나이’라는 이름은 사계절을 다스리는 신인 메소포타미아의 ‘달 신’(Sin)에서 유래되었다. 이 산은 일찍부터 성스러운 산으로 ‘야훼의 산’이라고 불렸고, 아랍사람들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산이라고 하여 ‘에벨무사’(Jebel Musa)라고 부른다. 화강암과 바위투성이의 첫눈에 위험스럽고 접근하기 어려운 산맥으로 이루어진 불모의 이 산은 마치 “우렛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고 짙은 구름이 산을 덮은 가운데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산을 뒤흔들며 주님이 불 속에서 내려오실 것만 같다.”(탈출 19,16.18 참조)
구약성경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서는 시나이 산이 세 번 언급된다(무으민 23,20; 뚜르 52,1; 틴 95,2). 메카에서 계시되어 유일신론과 메시지 그리고 부활을 다루고 있는 제23장 ‘무으민’ 20절에서는 모세가 창조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들은 축복받은 산에서 축복 받은 나무 올리브가 자라나는 것을 이야기 한다.
무으민 23,20 : 시나이 산에서 나무를 자라게 하여 이것으로 올리브 기름과 식용 양념을 생산케 하였노라. 메카에서 계시된 이슬람의 기본 원리인 유일신과 메시지 및 부활과 보상을 다루고 있는 제 92장 ‘뚜르’에서는
뚜르 52,1 : 뚜르 산으로 맹세하사 (여기서 ‘뚜르’는 일반적인 산 또는 시나이 산으로 알려져 있는 산이다.) 그리고 메카에서 계시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푼 은혜와 부활에 대한 믿음의 주제를 다루고 있는 제 95장 “틴”에서 시나이 산을 두고 맹세함으로써 모세를 위대한 예언자로 믿고 있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에서도 중요한 성지가 되었다.
틴 95,2 : 시나이 산을 두고 맹세하며 같은 뿌리인 야훼 하느님을 믿으면서 서로 원수가 되어 갈라져 있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그리고 유대교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상념에 젖게 된다. 서로 다름을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함께 바라보는 동일한 것에 대해 나눌 수는 없을까? 같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서로를 저주하는 세상이 아니라 같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서로에게 축복해주는 세상이 될 수는 없을까? 신학이나 이념이 아닌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인 사랑의 이름으로 서로 내어주고 헌신하며 일치하는 모습 속에서 각자가 믿는 증거하는 신앙을 살아갈 수는 없을까?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해발 2285m의 시나이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일반 순례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꼬불꼬불한 낙타길(정상까지 약 4.4km)이 있는데 이 길은 산 정상 근처까지 낙타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길로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1시에서 2시 사이에 손전등을 밝히고 굽이굽이 올라가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십계명을 받은 곳이라고 해서 모세의 산이라고 부르는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낙타에서 내려 750여 돌계단을 더 올라가야 한다. 한라산(1950m)보다 훨씬 높은 시나이 산의 높이에 처음부터 기세가 꺾일 수도 있지만 카타리나 수도원이 해발 1500m의 위치에 있음을 상기한다면 충분히 걸어 올라갈 수 있는 높이이기도 하다. 평소 운동을 한 사람들에겐 2시간 반 정도면 걸어 올라갈 수 있다.
다른 길은 카타리나 수도원 뒤편에서 3700여개의 돌계단이 놓여 있는 직선거리의 길(약 2.6km)이다. 수도원에서 아론과 엘리야 예언자가 머물렀다는 샘까지는 약 1.6km이고 이곳에서 1km를 더 올라가면 정상에 이른다. 땀 흘리며 이 계단길을 만들었을 초세기의 수도자들은 천국으로 안내하는 계단이라고 믿었을듯하다.
실지로 카타리나 수도원의 아빠스였던 ‘성 요한 클리마코’는 수도생활과 성화를 위해 필요한 가르침으로 600년 경에“천국의 계단”(Ladder of Paradise)을 남겼다. 천국의 계단은 예수의 30년 숨은 생활에 맞추어 30개의 층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수도생활로 불림을 받은 이들을 천국의 문까지 인도하는 계단이 될 것이다. 마지막 30장은 정화·조명·일치를 다루는데 수덕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소 무욕에 있으며 수도생활의 최고 단계는 외적인 평화를 누리는데 있다.
천국의 계단 이콘, 12-13세기 작품
가파르고 좁은 이 계단길은 주님의 자비를 구하며 오르는 길(주님, 자비를 베푸소서!)이기도 하다. 한참을 오르다 보면 능선의 정상에 ‘고백의 문’이 있다. 초세기 순례자들은 이곳에 이르면 시편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무릎을 꿇고 죄를 고백하였다고 한다. 조금 더 올라가면 다른 문이 하나 더 있는데 은수자 스테파노 성인은 이곳에서 순례자들에게 고백성사를 주었다고 한다.
시편 24,3-4 :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
숨을 헐떡이며 조금 더 오르다 보면 정상에 조금 못 미쳐 작은 평지에 사이프러스 나무와 샘, 작은 경당이 있는 곳이 나온다. 이곳은 전승에 의하면 모세는 이곳에 아론과 원로들을 남겨놓고 홀로 산 정상으로 올랐다고 한다.
탈출 24,1-2 :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의 원로 일흔 명을 데리고 주님에게 올라와, 멀찍이 서서 경배하여라. 너 모세만 주님에게 가까이 오고 다른 이들은 가까이 와서는 안 된다. 백성은 아예 산으로 올라와서는 안 된다.”
또한 엘리야 예언자가 피신했던 곳이라 엘리야의 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곳이 엘리야가 피신했던 동굴, 하느님을 만났던 동굴이라고 한다.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나는 모습은 산전수전 다 겪고 난 후의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1열왕 19,11-13 :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이곳에서 다시 750여 계단을 더 올라가면 모세가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최고봉이다. 이곳은 카타리나 수도원으로부터 716m 높이 그리고 엘리야의 샘에서 157m 높이이다. 이곳에는 모세를 기념하여 4세기경에 기념성당이 들어섰고, 유스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유스티아누스 성당은 산 정상에 길이 21m, 폭 11.50m로 상당히 큰 규모로 지어졌다. 14세기에는 회교사원도 산 정상에 지어졌었다. 삼위일체에게 봉헌된 현재의 작은 경당은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지은 성당 터의 폐허위에 1933년에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상주하는 수도자는 없고 다만 정교회 수도자들이 기도를 위해 찾아오는 특별한 날에만 개방한다.
383년 시나이 산을 순례한 에제리아 수녀는 시나이 산을 방문한 느낌을 이렇게 남기고 있다. “한가지 기묘한 것은 ― 이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로 생각됩니다만, 하느님의 영광이 내려왔던 중앙 봉우리가 그렇게 높다 해도 산 밑에서는 그것을 느낄 수 없고 절정에 올라가 봐야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그곳을 구경하고 내려와서는 올라가기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다르다고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오전 10시에 하느님의 성산 시나이의 절정에 도착했습니다. 이 산이 구름에 덮혔던 그날 주님의 영광이 내려와 법을 주었던 곳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지금은 여기에 넓은 장소가 없기 때문에 작은 성당이 하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매우 아름다운 성당이었습니다.”
성녀 카타리나의 시신이 발견된 성 카타리나 산 위에는 성녀 카타리나에게 봉헌한 경당이 서 있다. 시나이 산 정상에서 멀리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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