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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대고구려의 제 18대 태왕인 고국양태왕(※본명:고이련. 재위시기는 384년~391년:총 7년.)의 재위시기 도중인 386년경의 대고구려의 판도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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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우리 한국문명의 대고구려(※기원전 233년~668년:총 900년.)의 제 19대 태왕인 광개토태왕(※본명:고담덕. 재위시기는 391년~413년:총 22년.) 바로 이전의 태왕 즉, 대고구려의 제 18대 태왕인 고국양태왕(※본명:고이련. 재위시기는 384년~391년:총 7년.)의 재위시기 도중인 386년경의 대고구려의 판도입니다.

중국문명은 5호 16국 시대가 개막되어 대혼란기였었지요. 우리 한국문명의 대백제(※기원전 18년~660년:총 678년.)는 중국문명이 대혼란기임을 최대한 활용해서 중국대륙의 동해안지대로 대대적으로 침공하여 정복전쟁을 펼쳐나가서 중국대륙의 동해안지대를 해외 식민지로써 다스리기 시작했을 때임은 물론이거니와 기존에 우리 한국문명의 가야연맹체(※기원전 100년~562년:총 662년.)의 여러 소국들이 진출하여서 해외 식민지로써 다스리던 일본열도로 새롭게 진출하여 일본열도의 가야계 소국들을 정복하고 일본열도에다가 새롭게 백제계 소국을 세워나갈 시대이지요.

우리 한국문명의 동부여(※기원전 233년~494년:총 727년.)는 대고구려의 북방인 북만주에 자리잡고 있었고, 몽골초원의 남부지방인 남몽골에는 거란족이, 만주대륙의 동부지방인 동만주 즉, 연해주에는 숙신족(=말갈족. 고대의 여진족이지요.)이 동부여의 직할지배에서 아주 잠깐 독립한 채로 자리잡고 있었죠.

우리 한국문명의 또다른 국가인 대신라(※기원전 57년~935년:총 992년.)는 곧 대고구려의 광개토태왕에게 무력으로 흡수당할 동예(※?~?)와 별 다를 바 없이 큰 존재감이 없었던 시절이였었죠.

https://elfqkr.tistory.com/entry/%EC%9E%A5%EC%88%98%EB%8C%80%EC%A0%9C%EA%B8%B0?category=699494

https://elfqkr.tistory.com/entry/%EC%95%88%EC%9B%90%EB%8C%80%EC%A0%9C%EA%B8%B0%E5%AE%89%E5%8E%9F%E5%A4%A7%E5%B8%9D%E7%B4%80?category=699494

https://blog.naver.com/khtsnv/22004951976

https://blog.naver.com/koreapower35/221519034710

이는 보시다시피 대고구려의 제 19대 태왕인 광개토태왕 즉위 이후 대대적인 정복전쟁을 실시하면서 확장된 대고구려의 최대판도입니다.

이는 이후의 제 20대 태왕인 장수태왕(※본명:고거련. 재위시기는 413년~491년:총 79년.)과 제 21대 태왕인 문자명태왕(※본명:고나운. 재위시기는 491년~519년:총 28년.)의 수성(=유지.) 및 대대적인 정복전쟁을 지속해 대고구려의 최전성기(=최절정기, 태평성대, 태평성세, 극성기.)로 이어지게 되죠.

대고구려는 그야말로 동양문명권에서 가장 최강의 강대국(=패권국.)으로 발돋움을 하였으며, 동양문명권의 모든 국가, 제부족들이 대고구려를 상국(=상방.), 대국(=대방.), 황제국으로 떠받들었을 정도이지요. 특히나 중국문명의 위진남북조(=남북조.)의 시대때의 분열왕조들은 우리 한국문명의 대고구려와 대백제에게 도저히 맥을 추지 못했을 정도이지요.

게다가 북중국의 북위 제국(=북위. 386년~534년:총 146년.)은 대고구려에게 일방적으로 맞고있던 입장인 대백제에게도 대백제가 해외 식민지로써 직접적으로 통치, 지배하고 있었던 중국대륙의 동해안지대에서 총력전, 전면전쟁을 벌이다가 연거푸 참패를 면치 못해 패주해버릴 정도였었으니, 당시 우리 한국문명의 대고구려와 대백제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였었는 지 알 수 있겠죠.

 

대백제(=대륙백제. 기원전 18년~660년:총 678년.)이 중국대륙의 동해안지대를 직접적으로 통치, 지

   이는 보시다시피 중국의 역사서들 중에서 하나인 남제서 백제전에서 우리 한국문명의 대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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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보시다시피 중국의 역사서들 중에서 하나인 남제서 백제전에서 우리 한국문명의 대백제(=대륙백제. 기원전 18년~660년:총 678년.)의 영광에 대한 기록이 말살된 모습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자세히 보시면 아시겠지만, 남제서 백제전의 기록 도중에 무려 총 15줄 324자가 지워져있지요.

이는 중국의 기록편찬자가 남제서 백제전에 기록된 대백제가 중국대륙에서 가장 기름진 땅 즉, 노른자위인 동해안지대를 직접적으로 통치, 지배하며 위세를 떨치자 중국의 북위 제국(=북위. 386년~534년:총 146년.)과 남제 제국(=남제. 479년~502년:총 23년.)이 대륙백제에게 도저히 맥을 추지 못하였었다는 기록이 기재된 것을 보고 수치심과 열등감이 들어서 고의적으로 삭제시킨 것이 분명해 보이지요. (※중국의 역사서에는 중국이 5호 16국 시대와 위진남북조의 시대때 우리 한국문명의 대고구려와 대백제에게 맥을 추지 못했었던 기록들이 중국의 입맛에 맞게 많이 각색되어져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박창화 선생께서 대고구려의 자체적인 역사적 기록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사초, 고구려사략을 필사해 편찬한 고구려사초, 고구려사략 필사본에서 영락대제기, 장수대제기, 안장대제기, 안원대제기를 살펴보면 중국의 5호 16국 시대, 위진남북조의 시대때에 중국의 분열왕조들이 대고구려를 상국, 대국, 황제국으로 섬기며 칭신납공을 해온 기록들이 기재되어있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마치 도구를 사용해 온 힘을 다해 긁어낸 것처럼 기록이 삭제된 것에 대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으니까요. 실제로 중국은 자국에 대한 수치심 혹은 열등감이 드는 역사적 사건들은 사실여부를 떠나 아예 왜곡해서 기재하는 경우가 대단히 유별난 편입니다. 가장 단적인 예로 40년 전인 1979년경에 중국이 베트남으로 대대적인 침공을 해서 중월전쟁이 일어났었는데 중국군이 베트남의 2선급 군대와 민병대에게 일방적으로 처참하게 깨진 뒤 패주해서 망신만 당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국의 바이두 백과사전에는 중국이 그저 베트남을 상대로 이겨서 혼내줬다고만 적혀져있지요. 정말 여러분들이 봐도 기가 막힌 중국 특유의 춘추필법이지요? 현대사만 봐도 이럴진데 그 이전의 역사 더 나아가 고대사는 정말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 대백제가 자체적으로 기록한 역사서들인 백제삼서 즉, 백제기와 백제본기 그리고 백제신찬이 발견되게 해야만 할 것입니다.

또한 박창화 선생께서 대백제가 백제삼서 외에 자체적으로 기록한 역사서들 중에서 하나인 백제왕기를 필사해 편찬한 백제왕기 필사본을 보다 심층깊게 연구하여서 우리 한국문명에서 대신라의 청해진과 더불어 동양문명권의 보편적인 해양(상)의 패권국으로써 위세를 널리 떨쳤었던 국가인 대백제(=대륙백제.)의 영광을 해외에 적극적으로 홍보하여 우리 한국문명을 세계화시키는 것에 대해 우리 한국인 모두가 부단히 노력해나가야만 하겠습니다. 

정말 중국문명과 함께 역사적, 전통적으로 항상 동양문명권을 양분, 반분할 정도로 실로 웅장하였던 우리 한국문명의 국제적 위상에 대한 재정립, 재조명이 그 무엇보다도 절실하니 말이죠.

 

 

대한민국파워 : 네이버 블로그

대한민국파워입니다. 대한(大韓)을 대한(大韓)답게 만드는 데에 최선을 다할 대한(大韓)의 인민(국민, 시민)이며, 정치-외교적 성향은 민족주의, 국가주의 성향이며, 사회-경제적 성향은 사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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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감숙성 張掖을 흐른는 黑水는 하무제 이후에 적용된 짝퉁 입니다. 즉, 지금의 燉煌은 한무제 때 이동되어 설치된 짝퉁 입니다.

堯 임금이 도읍한 平陽은 넓게 해석하면 西域이며, 좁게 해석하면 지금의 大月氏(파미르 고원 일대로 추정)로 입니다. 즉, 堯舜과 夏, 商 때의 雍州(冀州와 梁州)는 大月氏의 위치와 일치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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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장대제기(安藏大帝紀)

제의 휘는 , 자는 이며, 명치대제의 큰 아들이다. 모친은 태후로 태자의 딸이다.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렸다. 모친이 엄하게 교육한지라 예의를 익혔으며 근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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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는 휘가 <보연宝延>이고 자는 <흥수興壽>이며, 명치제(明治帝)의 둘째 아들로서, 모친은 <경鯨>태후이다.  용모와 예의범절이 아름다웠고 기사도 잘하였다. 신장은 7척 5촌이었다. 크게 헤아렸고 무술에 통달하였으며,  또한 능히 상의 뜻을 받들어 모실 줄도 알았다.

명치제(明治帝>는 평소에 제와 대행에게  “너희는 형제간에 전위하라.  한 마음이면 몸이 나뉘었어도 두 사람이 아닌 것이다.”라 일렀다.

 

그랬다. 대행은 항상 제와 함께 기거하고, 같은 것을 먹고 마시며 의복도 하나같이 입었었다.  쌍둥이로 태어났기에 대행이 앓거나 괴로울 땐 제가 항상 곁을 극진하게 지켰으며 함께 다니지 않는 곳이 없었다.  죽음이 임박하자 <초운椘雲>황후에게 꿇어앉아 새보를 바치라 명하였고, 이에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대장大藏>으로 년호를 바꿨다. 후에 세종경황제(世宗景皇帝)로 존호되었다.

신해{AD531} 대장(大藏) 원년, 5월 7일, 상은 <초운椘雲>황후와 함께 황산 행궁의 빈전에서 즉위하였다. 춘추 53세였다. 상이 <초운椘雲>을 다시금 황후로 삼으려 하자, <초운椘雲>이 나이가 들었음을 들어 고사하였다.

 

그리하여 <덕양德陽>공주를 황후로 삼았다. <초운椘雲>이 낳은 대행의 딸이며 춘추 32세였다. <초운椘雲>은 태후로 삼았다. 춘추 61세였다. 황상의 조카 <각恪>태자를 동궁으로 삼았다. <초운椘雲>이 낳은 대행의 아들이고 <덕양德陽>의 동복 오빠이며, 보령 35세였다. <은銀>공주를 동궁정비로 삼았다. 보령 32살이었으며 <욱勗>태후 소생 상의 딸이었다. <경양慶陽>공주를 동궁차비로 삼았다. 보령 23살이고 <안양安陽>공주 소생인 상의 딸이었다. <정양正陽>공주를 동궁보비로 삼았다. 보령 24살로 <초운椘雲> 소생 대행의 딸이며 <리鯉>태자의 정비였다.  <인양寅陽>공주가 상의 아들 <의성義成>태자를 낳았다. <양의신梁義臣>을 중외대부로, <연학淵学>을 사농경으로, <양박梁博>을 민부상서로, <주금령朱金鈴>을 우시중으로, <계춘량桂春良>을 좌시중으로, <선정宣蜓>을 여승상으로 삼았다. 
  

<순恂>태자비인 <화양華陽>공주를 부황후로 삼았는데, 춘추 21살이었으며, 위(魏)主 <원각元恪>의 딸 <호胡>태후 태생이다. 평양궁 <굉녀宏女>와 홍원궁 <루씨婁氏>를 별궁 황후로 삼고, 금원(錦院)의 <진晋>귀비를 소후로 삼고는, 두루 돌아 승은을 내리고 위무하였다.

 

상이 젊은 시절엔 다른 이의 눈치를 보지 않고 분 바르고 눈썹 그리는 이들을 찾아가 함께 하였던 이들이 여럿이었으나, 장성한 이후론 점차로 안으로 들이더니만, 즉위 초엔 종실의 딸들에게 저녁을 감당하라 명을 하였으며, 아울러서 공경들의 집으로 몰래 찾아가서 예쁜 처나 딸들이 있음을 알기만 하면 즉각 불러들여 승은을 입혔더니, 찾아와 저녁을 감당할 여자들이 남아나지 않음이 점차 심하여 졌고, <초운椘雲>이 말려도 듣지 않았다. 게다가 <초운椘雲>궁도 여러 번 드나들더니 수절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6월, 위(魏)主 <원공元恭>이 사신을 보내 부의를 바쳐왔더니,
상이 <화양華陽>후를 데리고 서쪽의 전각에서 그 사신을 만나보았으며  “<이주세융爾朱世隆>이 정사를 틀어쥐었고, <중원仲遠>은 서주(徐州)에 진을 쳤으며, <이주조爾朱兆>는 병주(幷州>와 분주(汾州)에 머무르고 있고, <천광天光>은 장안에 자리를 잡더니, 각자가 탐욕스럽고 포악하며 약탈하고 있어 정령이 통하지 않고 조세가 걷히질 않으니, 천하가 난리를 생각하고 있다. <이주세융爾朱世隆>이 세인의 마음을 잃었음을 알 만하다. <고환高歓>은 <이주조爾朱兆>에게서 군병을 빌어 신도(信都)를 나가서 <원량元朗>을 임금으로 세우고 <이주세융爾朱世隆>를 토벌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더니만, 10월엔 <이주조爾朱兆>를 광아(廣阿)에서 크게 깨뜨리고 업(鄴)의 땅으로 진격하였으며, 그 세력이 크게 떨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농경 <연학淵学>을 형부상서로, 시어사·부마도위인 <왕서王胥>를 사농경으로, <진관晋冠>을 예부상서로, <진덕晋德>을 경조윤으로, <안양安昜>공주를 림총대부로, <우건충于建忠>을 대부경으로 삼았다. 
  

 

11월, 황후가 <평성平成>태자와 용산의 행궁으로 갔다.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과 통정하거나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과 통정함이 날로 심하여져도, 상은 이를 금하지 않았다. 상 또한 <초椘>태후와 온궁으로 가더니 <평성平成>이 모아놓은 여인들을 탐하였고, 이르지 못할 곳이 없었다.  상은 주목(朱木)으로 별도의 새 궁전을 웅장하게 지으려고, 내외의 장인을 불러 모았다.

 

이때 태후 <초운> 61세, 안원대제 <보연> 53세, 황후 <덕양> 32세, <각> 태자 35세, <각>태자 비 <은> 32세, <정양> 24세, <경양> 23세, <평성> 14세, <루홍원> 31세, <화양> 21세, <진금> 38세이다.

 

임자{AD532} 대장(大藏)2년, 춘정월, 병인일 초하루에 상이 <초椘>태후와 함께 용산의 온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원종原宗>이 <구형仇衡>을 폐하고 <구형仇衡>의 동생 <구해仇亥>를 세우더니만, 종당에는 그 자리를 빼앗고, 그 나라를 군과 현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자 가야의 제 족속들이 불복하여 화가 그칠 날이 없었다.
  

<덕양德陽>황후가 용산의 온궁에서 <평안平安>공주를 낳았더니, 상은 <평성平成>에게 명하여 씻도록 하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이르길 “아들 낳는 즐거움이 오늘 같은 적이 없었다.”라 하였으며, 황후에게는 가장자리를 붉은 구슬로 치장한 무지개 옷을 내려주고, <평성平成>에게는 비단 면류관 일습을 내려주고 친밀하게 대하여 주었다.

 

동궁은 자신의 딸 <숙淑>공주를 <평성平成>의 비로 삼아서 나라를 물려주고 싶었기에 <은銀>공주에게는 <평성平成>의 보비가 되라고 명을 내렸고, <숙淑>공주는 주상의 침전에 바쳤더니 주상이 허락하였다.

<고환高歓>이 업(鄴)을 공격하며,
땅굴을 파고 불을 질렀더니 성이 무너져 땅속으로 꺼져 내렸다.  17일에 업(鄴)을 빼앗고 <유탄劉誕>을 사로잡았고 <원량元朗>을 업(鄴)으로 옮겼다. <고환高歓>은 스스로 승상·주국·대장군의 자리에 올랐으며, 아들 <고징高澄>은 표기대장군을 삼았다. 나이 열한 살에 능히 전쟁에 임하였었다. <고환高歓>은 이때 나이 서른일곱이었다. 그의 처 <루婁>씨는 <루사덕婁師德>의 피붙이였으며, 힘이 엄청 세어서 능히 <고환高歓>을 도와서 진을 치거나 말을 탈고 달리기가 나르는 것 같았다.

 

<고환高歓(496-547)><루씨婁氏> - <고징高澄(521-549)>

 

<원공元恭>은 <이주조爾朱兆>의 딸 <이주매爾朱梅>를 처로 삼았으며, <이주세융爾朱世隆>은 <이주조爾朱兆>·<천광天光>·<탁율度律> 등과 함께 임금을 바꾸어 세우고 서약하여 서로 간에 친목을 도모하였다.

 

<곡사춘斛斯椿>과 <하발승賀拔勝>은 이들을 도모하고자 <이주세융爾朱世隆>에게 <이주조爾朱兆>와 <천광天光> 등을 불러들이라고 권하였다. 이에 이들은 낙양으로 가서 <고환高歓>을 함께 토벌하였다. <천광天光>이 장안을 나서려 하자 <하발악賀拔岳>이 간하길 “만약을 모를 뿐더러 관중에 진을 두어 근본을 든든히 하고나서 정예군을 나누어 보내 다른 무리들과 합세하면, 진격하여 이기기도 좋고 물러나 지키기도 좋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천광天光>은 이 말을 따르지 않고 장안을 출발하여 업(鄴)으로 왔고, <이주조爾朱兆>는 진양(晋陽)에서, <탁률度律>은 낙양에서, <중원仲遠>은 동도에서 모두들 업으로 모여들어 군대를 합쳤더니 20만군이 되었고, 원수(洹水)로 와서 진을 쳤더니, <고환高歓>이 <고오조高敖曹>와 출격하여 이들을 대파하였다. <이주조爾朱兆>는 진양으로 달아났고, <중원仲遠>은 동도로 달아났다.

4월, <곡사춘斛斯椿> 등이 <이주세융爾朱世隆>·<천광天光>·<탁률度律> 등을 죽이고
그 목을 <고환>에게 보냈고, <고환>은 낙양으로 들어가 <원공元恭>을 유폐하고 <원수元脩>를 세웠다.  좌보 청하공(淸河公)<곡춘谷瑃>이 작위가 올라서 태보·상주국(上柱國)이 되었다.
 

5월, <숙淑>공주가 <평성平成>의 처가 되었다. 공주의 보령은 16살이었다. <평성平成>은 15살이고 키가 공주보다 컸고, 공주는 <평성平成>에 비하여 볼기가 컸는데, 서로가 자신이 키가 크거나 볼기가 크다고 자랑하며 지려들지 않았다.

 

이에 상이 웃으며 이르길 “ 볼기가 커도 좋고 키가 커도 좋다. 내 자손은 필시 키도 크고 볼기도 크겠구나.”라 하였다. <숙淑>은 동궁 <각恪>의 딸이고 <은銀>공주 태생이었다. <각恪>은 <평성平成>을 후사로 삼아서 장차 보위를 물려주고자 함이었다. <고환>이 문하외성에서 <원공元恭>을 짐독으로 죽였다. 나이 35살이었다. 이 자가 절민제(節閔帝)이고, <원굉元宏>의 조카이다. 모든 벼슬아치들이 모여서 수(殊)에 대한 예의로 장사하여 주었다.

 

<평성平成>이 <홍원紅院>에게 가서 거짓으로 제라 하고는 명을 내려 통음하였다. 훗날 상이 <홍원紅院>에게 갔더니 <홍원紅院>이 묻기를 <평성平成>의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를 물었고 상이 답하길 “그가 즉 나인데, 어찌 진짜와 거짓을 따진단 말이오.”라 하였더니, <홍원紅院>이 아뢰길 “저 역시 그리 알아서 감히 거스르지 않았었습니다.”라 하였다. 이 이후로 <평성平成>은 수차 <홍원紅院>을 찾아가더니 독차지하여버렸다.

 

<홍원紅院>이 말하길 “전하가 첩을 사랑하심이 이처럼 밝은 해와 같으시며, 첩이 나이 들었음을 꺼려하여 헌신짝 버리듯 하지 않으셨습니다.”라 하였다. <평성平成>이 그녀가 눈물 흘리는 것을 보더니만 팔뚝을 칼로 베어서 서로 저버리지 말자고 맹서하였다.

6월, 상이 <홍紅>황후에게 명하여 <평성平成>과 함께 수림 온궁으로 가라 하였다.  
태보 상주국 청원공(淸原公) <곡춘谷瑃>이 나이 69살에 죽었다. <곡춘>은 용모가 아름답고 <태종太宗>{라운}을 섬기어 용양신이 되어 오랫동안 궁중에 있으면서 대부(大府)의 재물과 보화를 관리하였었으며, 천부령(泉府令)으로도 있으며 여러 번 금·은·동전을 주조하기도 하였었다. 처와 딸 및 여동생도 상의 총애를 받아 후궁에 줄 이어 머물렀다.

 

권력이 내외관계에 따라 기울었었다. 그리고 사람됨이 공손하며 조신하였고 단정하고 깔끔하였으며 다른 사람들과 아랫사람들을 아꼈다. 사정이 급한 이가 있으면 그 곤궁함을 구휼하였으며, 자손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형제간에는 우애로 지내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현명하다고 칭송하였다. 그리고 규방문을 단속하지 않아서 아래 위를 가리지 않고 놀아남이 무상하였음에도, 마음 편히 먹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수만금의 큰 재물을 모았는데, 황금을 땅속에 묻어두어 자손을 위한 것이 백만금이 되었고, 궁중의 진보들도 <곡춘>에게 돌아간 것이 심히 많았다.

 

그의 조상은 <병屛>태자의 후손으로, <장張>황후의 금척· 대수장 70근· 금어· 옥마 등을 집안에서 귀히 여겨 전해왔다.

 

추모(장씨) - 병屛(BC35- ) 

여러 세대를 지나오면서 혼백이 쇠락하여 빈한하여졌어도, 그것들을 지켜냈고 팔아먹지는 아니하였던 것이다. <곡춘>의 부친 <곡겸谷蒹>은 비구니를 처로 얻어 <곡춘>을 낳았다. 꿈속에서 <추모>께서 찾아와 이르시길 “내가 <정공鄭共>을 너에게 주어 아들이 되게 하겠노라.”라 하였기에,  초명은 <공태수共太守>이었고, 하사받은 성과 이름이 <곡춘>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곡谷>씨가 크게 일어났다. <곡춘>은 밖으로는 검소해 보였어도 내면은 호화로웠다.

 

집안에는 많은 미녀를 모아두었고, 낳은 자녀는 수백 인이 되었으며, 모두들 미려하고 명민하였다. 형제숙질 간에 서로 혼인하여 좋은 씨앗이 밖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허락지 않았고, 오로지 후궁으로 들어간 이들만 뛰어난 자손을 낳았다. 일찍이 딸 <곡비谷霏>가 상의 명령으로 <왕훈王勳>에게 하가하였는데, 비록 <왕훈>이 통정하였어도 그의 정기가 이르지 못하게 하여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하였다.

 

상이 이 말을 듣고 <곡비>가 <왕훈>의 자식을 낳지 않음을 책망하였더니, <곡비>가 아뢰길 “첩의 집안 딸들은 왕의 자식을 낳지 않습니다. 단지 <곡>씨의 아이를 낳을 뿐 다른 사람들의 아이는 낳지 않습니다.”라 하였다. 그래도 상의 명령으로 아이를 낳게 하자 궁리 끝에 <곡춘>과 합방하여 아들 <곡표谷彪>를 낳았다.

 

그 아이의 외모가 <왕훈>을 닮지 않았고, 그 용모와 말하는 품새나 행동거지가 <곡춘>과 같았더니, <왕훈>이 이를 알아차리고 말하길 “이 아이는 내 처의 동생이오.”라 하였다.

 

<왕王>황후가 죽고 <왕훈>의 총애가 쇠하여졌기에, 다시금 후궁으로 들어가 여러 왕자들과 상통하여 아이를 낳았으니, <왕훈>의 처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왕훈>은 <곡비>를 궁인으로 삼아서도 다스릴 수가 없었으니, 단지 자신을 절제할 뿐이었었다.

7월, <고환>이 <이주조爾朱兆>를 치고 진양(晋陽)을 빼앗아 대승상부로 삼았으며,
<이주조爾朱兆>는 <수용秀容>에게 패하여 도망가서 해(奚)왕 <사출査出>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고환>이 아들 <고징高澄>을 시켜서 비단과 명주 및 귀한 노리개와 마름질 한 말가죽 그리고 붉은 옥 등을 바쳐왔으며, 자기는 <고루高婁>태자의 후예라고 하면서 주변을 지키는 신하가 되겠다고 청하였다.

 

추모(계루) - <고루高婁(BC35-32)> 

상이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문장文藏>의 처 <연화淵華>가 딸 <성成>을 낳았다.  이전에 상이 <문장>의 집을 찾아가 공자(孔子)의 초상을 찾아뵈었다. <연화淵華>와 함께 잠자리를 하고나서 이르길  “ 공자 성인께서도 아실 것이니, 필시 내게 아들 하나를 주실 것이오.”라 하였었는데, 지금 딸을 낳았더니 상이 취하여 공주로 삼은 것이었다.

 

<연화>는 <양의신> 소생 <연학>의 딸인데, 온유하고 아리땁고 문장에도 능하였으며, <문장>과 서로를 아끼다가 부부가 되었더니, 선제께서도 말릴 수 없었었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또 상의 총애도 받게 된 것이었다. 모녀 모두가 내한(內翰)의 중진이 되었다. 이때 나이 스물 둘이었다.


11월, 위(魏)가 <호胡>태후의 장례를 치렀다. 
<순恂>태자도 가서 참례하였다. 상은, <화양華陽>황후와 함께 서전(西殿)에서 은혜를 베푸는 뜻으로 조의를 표하고 나서 술을 들고 고기를 먹으며 이르길 “나는 재색이 그대의 어미와 같은 딸을 하나 낳았으면 하오.”라 하였더니,

 

<화양>이 아뢰길 “폐하, 어찌 재색을 말씀하십니까? 어미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는데도 떼거리 놈들에게 내돌려 욕보임을 당하고는 끝내는 물속에 던져졌습니다.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지만 몸도 더럽혀졌었습니다. 이러할진대, 어찌 본받을 일이 되겠습니까? 첩은 딸을 가지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비감함이 남아 있으니 자식을 잉태하여도 상서롭지 않을 것입니다.”라 하였으나, 상은 따르지 않고 후를 껴안고 장막으로 들어가 하루가 다하도록 지냈다.

 

<고환>을 보아서 감히 불순하지는 않았었다. <호>태후는 물에 던져졌다가, 창을 꼬나든 무리들에게 내돌려 간음을 당하면서도 목숨은 건지고자 하였었으나 종당엔 그리 되지 못하였고 시신이 물가에 버려졌었다. 얼굴과 눈이 살아있는 것 같아 어부가 배 안으로 건져 올려서 또한 음행하고는 궁둥이 살을 떼어내고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이런 일들이 있었기에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고환>이 딸을 <원수元脩>에게 처로 주었다. 이에 상이 이르길 “<이주영>이가 딸을 <원자유>에게 주고 나서 죽음을 당하였는데, <고환>이 또 <이주영>에게 배우다니 죽음을 당하고 싶단 말인가?"라 하였다.

 

이에 <융隆>태자가 주청하길 “신이 알기에는 <고환>이는 사람됨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냥 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거친듯 보이지만 치밀하고, 능대능소하기 때문입니다.”라 하였다. <초운椘雲>태후가 상의 아들 <금扲>태자를 낳았다. 상이 친히 닦아주고 위로하면서, 이르길 “환갑이 된 나이에 이리도 훌륭한 아이를 낳았으니, 비록 기쁜 일이지만 감히 기쁘다는 말을 못하겠소.”라 하였더니, 태후가 제를 껴안아 입을 맞추면서 말하길 “부부의 즐거움이 이런 것인데, 당신은 무슨 말씀이시오?”라 하였다. 상은 못이기는 듯 태후가 아이를 낳은 곁에서 밤을 지냈다.

 

계축{AD533} 대장(大藏) 3년,

 

춘정월, 경인일 초하루, 포진궁(抱真宮)에서 조하를 받았다. 종실의 딸 10인이 저녁을 감당하였는데, 5인이 승은을 입었다. <보군宝君>태자비·<태원太原>공주(29세)·<숙평叔平>공의 비<사완謝婉(21세)>·<육陸>태자비<붕萠>공주(19세)·<흥효興孝>태자비<평원平原>공주(35세)·<평성平成>태자비<숙淑>공주(17세)였다.

 

상은 <숙淑>공주에게 밤새도록 잠자리 시중을 들라 명하였다. 상은 손수 그녀의 변을 받아서 옥구슬인양 아꼈다. <각恪>태자가 글을 올려 스스로 동궁 자리를 내어놓으며 아뢰길 “신은 성격이 나태하고 돌아다니며 놀기를 좋아하니 마땅치도 않습니다. 강호에 머물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신의 자식 <평성平成>은 학문하기와 예의 지키길 좋아합니다. 동궁자리를 그 아이에게 물려주게 하여주시길 청하옵니다. 그리되면 신은 마음 편히 살면서 병을 돌보며 구름 밖을 소요하고자 하옵니다.”라 하였더니, 상은 그의 성품이 지나치게 맑고 차가움을 아는지라 힘들여 말릴 수도 없어서, <평성平成>을 동궁으로 삼았다. <각恪>을 한왕(漢王)으로 고쳐 봉하고, 그 지위는 동궁보다 높게 하였다. <은銀>공주를 동궁정비로, <경안慶安>공주를 한왕(漢王)정비로, <선완宣婉>을 한왕(漢王) 귀빈으로 삼았다. <정양正陽>공주를 <왕서王胥>에게 처로 주고 2품의 작위로 하였다.

2월, 동궁이 업(鄴)으로 가서 <옥릉玉陵>공주에게 혼인하여 돌아왔다.
역시 <호胡>태후의 딸이다. 아비는 <담복談福>이라고 한다. 또는 <원역元懌>의 소생이라 하기도 한다. <고환>이 득세하더니 <이주조爾朱兆>를 습격하여 적홍령(赤谼岺)에서 크게 이겼다. <이주조爾朱兆>는 궁산(竆山)으로 도망하여 들어갔다가 <사출査出>과 <고환>이 보는 앞에서 스스로 목을 매니 후하게 묻어주었다.

 

 <사출査出>은 해(奚)왕이다.

<모용소종慕容紹宗>이 <이주영>의 처자 및 <이주조爾朱兆>의 남은 무리를 데리고 <고환>에게 찾아가 항복하였더니, 모두를 후하게 대하여 주었다. <이주영>의 딸인 <원자유>의 처가 미모임을 보더니만 장막으로 들어가 통음하고, 말하길 “신은 황후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응당 황후를 충심을 다하여 보살펴 드릴 것입니다.”라 하였더니, 후{<원자유>의 처}가 말하길 “따라죽지 못하여 떠돌다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승상께서는 가련하게 여겨주시길 바랍니다.”라 하였다.

 

이때부터 <고환>의 총첩이 되어 아들 <유浟>를 낳았다. 이 여인이 <죽竹>비이며, <원공元恭>의 처였던 <매梅>비와 함께 둘 다 <고환>의 후궁으로 들어갔다. 3월, 중외대부 <양의신梁義臣>이 이부상서를 겸하게 되어 사람을 가려 뽑아 임용하는 일을 담당하더니,  항상 제의 침소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여우같은 여인들을 들여보냈다. 권력이 내외에 기울게 되었더니, 그 시절 사람들은 피리로 천하를 감당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상이 미행하여 <봉희峰嬉>의 장원에 머무르며 즐기다가 돌아오는 길에 금산(鳹山)을 지나게 되었다.

 

산수가 밝고 지초가 하늘거림을 보더니 풀밭에 앉았고, 저 앞마을의 큰 농막에 대해 물었더니 행주(幸州)자사 <이의신李義臣>의 집이었다. <이의신>은 재주가 많아서 선제가 아끼던 여인이었던 <하선賀仙>을 처로 맞이하였다.

 

상 또한 일찍이 <하선>을 탐하고 사랑하였었으나,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하게 되어져 각기 헤어져서 10여년이 지났다. 홀연히 옛 일이 생각나자 <용랑龍郞>에게 가서 불러오라 명하였다. 이때, <하선>은 홀로되어 살면서 자신의 아들 <의경義卿>과 함께 상을 지키고 있었다. 햇볕은 따듯하고 날씨도 좋아 춘심이 사방에 짙었는데, 갑자기 <용랑>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선>에게 서찰을 주자 4배 한 후 엎드려 읽었고 쓰여 있길 “우연히 이곳에 이르렀던 중인데, 경이 홀로되어 있음을 들었소. 옛 정이 생각나니 서로 만나보고 싶고 같은 마음이라면 하룻밤 묵고 회포를 풀고 싶소. 어찌 생각하시오?”라 하였더니, 속옷을 가뿐히 하고 고운 옷차림으로 싫은 기색 없이 따라 나섰다.

 

<하선>은 서찰을 보더니만 정신이 아뜩하여져서, 엎어지고 넘어지며 찾아왔고, 상은 부둥켜안고 숲속에서 흥건하게 즐기고, 몹시 기뻐하며 “일어나보시게.”라 하더니, 이르길 “내가 곧 자네를 보살피고 높이 받들어서 하늘에 구멍을 내겠네.”라 하였다.

 

<하선>이 아뢰길 “첩의 아들 <의경>은 나이가 열 셋인데, 가히 그 아버지를 대신할 만합니다. 첩이 어찌 다른 사람의 자식을 낳았겠습니까? 첩의 지아비는 ‘성상께서는 <의경>과 함께하여 다스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이 “재물은 먹고 살만은 하였소?”라 물었더니, <하선>이 아뢰길 “무논에다 농사짓고 산에서 땔나무 하였더니, 배고픔과 추위는 면할 수 있었습니다. 어찌 부귀를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라 하였다.

 

이윽고 <의경>을 적어랑(籍圉郞)으로 삼고, <하선>은 잠실부인을 삼아서 집과 마른 땅을 주었으며, 누차 오가면서 승은을 내렸다. <하선>의 나이는 30세로 <하국賀國>의 딸이었다.

4월, 동궁이 <옥릉玉陵>과 함께 돌아와서 말하길
“<원수元脩>는 <고환>을 제압하려고 멀리 있는 관중(関中)과 결연하길 바라고 있습니다.”라 하였더니, 상은 <원수元脩>가 위(魏)의 천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잃었던 <화양華陽>·<옥릉玉陵>·<평양平陽> 등과의 관계회복을 되찾으려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양의신梁義臣>이 동궁대부를 겸하게 되었다. 동궁이 <양의신>을 좋아하여 대부로 삼아달라고 청을 하였고, 상은 동궁을 아끼어 허락한 것이었다. <양의신>이 비로소 동궁과 오가게 되었다. 이때, 조정은 조용하고 평안한 나날이 오래도록 유지되었더니, 상하가 사치하고 무리들은 먹고 마시며 음란하기를 즐거움으로 삼았으니, 앉아서 얘기를 나누면 헛된 것이고 미워하는 기운이 일어 널리 퍼졌으니,한 사람이 거둔 것을 열 사람이 먹어대는 격이었다. 태종(太宗)의 다스림이 점차 쇠하고 있었으니, 식자들은 이를 걱정하였다.
  

<홍紅>황후가 <평성平成>의 딸 <계운桂雲>공주를 낳았고, <덕양德陽>황후가 <평성平成>과 함께 위안하였다. <홍紅>후의 여동생 <금란金蘭>이 비로소 <평성平成>의 사랑을 받았다. <□>공주가 상의 딸 <아蛾>를 임신하자, 상은 옷을 내려주고는 빈번히 잠자리로 불러들였다.
  

거란의 왕 <가시돌加尸突>이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먹혀 죽어서, 그의 처 <초언酢彦>이 자신의 아들 <오시돌娛尸突>을 세우려 하였다. 이에 <가시돌加尸突>의 동생 <호돈好頓>은 북거란의 왕이 되어 습(霫)의 군병을 이끌고 와서 습격하여 <초언酢彦>을 사로잡아 처로 만들고 <오시돌娛尸突>을 아들로 삼았다.

 

이 시절, 거란에는 호랑이가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잦았으며, 세간에서는 "호랑이가 흥하면 나라도 갈라지지 않을 정도로 흥한다."고 하였다. 사농경 <왕서王胥>가 좋은 밭을 기록한 장부 8,500권을 대부(大府)에 바쳤다. 상이 <덕양德陽>후와 함께 이를 받고나서, 군신들에게는 잔치를 베풀고, 좋은 밭을 만든 관청의 기공들 5천여 사람에게는 상을 내렸다. 장장 9년에 걸쳐서 이룩한 것이었다. 명을 내려 새로운 세법을 반포하고 고르게 세금을 매겼다. 이 밭은 3배를 매겼다.

8월, 상이 미행을 나갔다가 형부상서 <우건충于建忠>의 집에 이르러
농사를 돌아보았으며, 술상을 대하고 이르길 “지난날 형황께서 <대방청大房淸>의 집에 가시어 농경을 살피시고 칭찬하여 이르시길 ‘뜻하지 않게, 금일 <안국공安國公>을 다시금 뵙게 되었소.’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짐이 오늘 여기에서 또한 <안국공安國公>을 뵙게 되었소.”라 하였더니,

 

<우건충于建忠>이 아뢰길 “신은 본디 농부였었기에 이 일을 하기는 용이합니다. <대방청>이 농사일을 쉽게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라 하였다. 아마도 <대방청>이 <우근충>과는 우호를 나누었던 듯하고, <우건충>은 바탕이 성실하고 때가 묻지 않았었기에, 이리 말하였을 것이다.

 

이에 그의 처가 끼어들어 아뢰길“<대방청>이 이룬 것은 예술이어서 설사 조금을 하여도 세밀하였고, <우건충>이 해놓은 것은 힘으로 밀어댄 것이라 설사 많은 것을 해내었어도 김을 매거나 풀을 벤 것뿐입니다.”라 하자, 이에 <우건충>은 화가 나서 자신의 처를 질책하며 말하길 “당신은 세 아들 때문에 <대방청>을 비호하였소. 삿된 일이오.”라 하였다.

 

그의 처가 <대방청>과 상통하여 세 아들을 보았었기에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대방청>은 얼굴과 행동거지가 멋졌고, 상대의 안중을 엿보면서 아첨하는 것 같았으나 속으론 실속 있으며 강직하였다. <우건충>은 겉은 소박하고 속으로도 실속 있어 보였으나, 투기하고 시기하는 병이 좀 있었다.

 

<대방청>은 번번이 남을 칭찬하여 이끌어주고 남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 일을 원만히 풀어내었었다. <우건충>은 일을 보면 해가 저무는 것도 몰랐더니, 검소하고 부지런하기가 크게 지나쳤다. 다른 이들이 이를 비웃었더니, 이들이 뜻은 공중{公衆}을 위한 뜻은 아니라 여기고, 사가로 물러나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던 듯 농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즈음, 처 <해숙觧淑>은 얼굴이 예쁘고 영리하고, 나이가 40이었음에도 항상 젊은 며느리 같아서 선제와 상을 모시면서 모두에게 승은을 입더니, 지금에 이르러선 상의 자식을 가지게 되었기에, 상이 누차 그의 집으로 가서 총애를 끊지 않았었다. 사람들은 처의 음덕이라 하였다.

갑인{AD534} 대장(大藏) 4년,

 

춘정월, 갑오일 초하루, 수림(獣林)의 온궁(溫宮)에서 조하를 받았다. 상은 <숙淑>공주 및 <옥릉玉陵>공주와 내기바둑을 하여 벌거벗고 춤을 추었으며 손수 칼로 고기를 끊어다 두 공주를 먹였고, 동궁에게는 <초운椘雲>궁으로 가보라고 명하였다.  

 

상은 또 <하양河陽>궁으로 가서 위(魏)의 황궁이 복 받길 기원하고는, 노래하여 이르길 “나이 쉰다섯에 오직 반가운 것은 봉새 무리가 날아오는 것뿐인데, 봄이 되니 모란꽃도 가슴을 열고 놀란 개미도 문을 활짝 여는구나.”라 하였다. 
  

 

2월, 위(魏)의 영녕사(永寧寺)에 큰 불이 나서 백장탑(百丈塔)이 재가 되어 보는 이들이 모두 통곡하니 울음소리가 성과 대궐에 진동하었다. <호胡>태후가 병신년에 세운 것인데, 18년을 있다가 사라진 것이었다.  9층 불탑으로 매층이 열 길이고 꼭대기에 열 장 높이의 절이 있었고 여덟 길 높이의 금불상이 있었다.

 

상은 이 화재 소식을 듣더니 <화양華陽>·<옥릉玉陵>·<태원太原>·<금양金陽>공주들과 함께 <호胡>태후를 기리는 7일 도장을 열고, 승려 천 명을 먹여주었다. 불교가 다시 흥성하였다.

 

※ 북위 영녕사(永寧寺)

북위(北魏) 숙종(肅宗) <원후元珝(510-528) 肅宗 孝明帝 재위 515-527>치세에 창건된 낙양의 영녕사에는 고대 중국 최고 건축물 중의 하나인 9층탑이 있었다탑의 높이가 90장이고,  그 위에 다시 10장 높이의 상륜부가 있어서 100리 성밖에서도 탑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탑의 전체 높이 1천 척은지금의 단위로 환산해도 136.7 미터에 이르는,  6세기 초에 세워진 건축물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단한 규모의 불탑이었.

   

영녕사는 북위 후기에 해당하는 희평熙平 원년(516)에  영태후(靈太后) 호씨胡氏 <호선진胡仙眞(486?-532)>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건립된 지 20년이 조금 더 지난 영희永熙 3(534)에 소실되고 말았다영녕사 적지는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市에서 동쪽으로 15km 지점에 있는 한위낙양성지(漢魏洛陽城址) 안에 있다.

   

영녕사는 후기 북위의 도성이었던 낙양의 중요한 불교사찰로 당시 북위 궁성의 서남쪽에 세워졌으며. 전체 면적이 9만 평방미터에 달했다. 영녕사는 불탑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사찰이었으며, 황제와 태후가 예불을 올리는 황가 전용의 사찰이었다.

 

3월, 동궁이 <옥릉玉陵>을 데리고 위(魏)에 갔다. 친척인 <원수元脩>가 우리의 도움을 받고자 누차 만나보길 부탁하였기 때문이었다. 동궁이 <원수元脩>를 만나서 서로 아형이라 불렀으니 정의가 한데 묶인 삼단처럼 친밀하였다.

이때 <우문태> 27세, <원수> 25세, <평성> 17세이다.

 

<우문태宇文泰>가 하주(夏州)에서 평량(平凉)으로 들어가 <하발악賀拔岳>의 무리를 통솔하니, <원수元脩>가 <우문태>를 대도독으로 삼았고, <이호李虎>를 낙양으로 보냈다. 
  

 

4월, 계축일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상이 <덕양德陽>을 데리고 <초운椘雲>궁으로 갔다.  

 

갑인일에 선제의 제2황후였던 <경鯨>공주가 춘추 70에 죽었다.

 

후는 <경鯨>후 소생인 <수성壽星>의 딸이며, 태종(太宗)과 선제를 섬겼으며,

자신의 말년을 살피기가 심히 가지런하여

선제 말년부터는 머리를 자르고 비구니가 되었다가 지금 죽었던 것이다.

 

상과는 같은 어머니 소생이어 보살피고 아끼는 마음이 도타웠었다.

 

상의 아들 <리鯉>와 <릉陵> 두 태자를 낳았다.

 

<경鯨>태후 무덤 옆에 장사하고, <리鯉>태자가 맡아 모시라 명하였다.

 

담덕談德(??) - 경鲸(392-462)

경鲸(용언龍彦) - 회일懷衵(410?- ) 경鲸 태자의 장자

회일懷衵(병련丙連) - (447-522)

수성壽星(鲸) -  (465-534) 

 

<우문태>가 <후막진열矦莫陳悅>을 쳤더니,

<후막진열>이 벌판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우문태>가 이윽고 진(秦)과 롱(隴)을 평정하고 관중으로 들어가 도읍하였고,

이에 <고환>과 <원수元脩>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게 되었다.

 5월, <원수元脩>가 하남(河南)의 군병을 불러 모아 낙양의 남쪽에서 크게 사열하고는

낙수(洛水)의 북쪽으로 가서 망산(邙山)을 경계로 하였다.

 

우리의 동궁을 진양(晋陽)왕·좌표기대장군을 삼아서 함께 자신의 군대를 사열하고,

겉으로는 양(梁)을 치겠다고 하였으나 속으로는 실제 <고환>을 토벌할 속셈이었다. 
  

신라의 <철부哲夫>가 죽었다.

 

글과 글자에 능하였으며 웅장한 지략도 있었다고 한다.  

 

<연화淵華>가 동궁의 아들 <희喜>를 낳았다.
  

 

6월, <고환>이 주군 곁의 악한들을 제거하겠다면서

군사를 억지로 이끌고 남쪽을 나갔으나,

군세가 <원수元脩>의 신하들을 당할 수 없었기에

각자가 살아남기를 도모하며 감히 거역하지 못하였다.

 

<고환>은 <원수元脩>의 계략이 궁하여지니 <우문태>에게로 달아나려 하였다.

 

이에 <배협裴俠>이 말하길

 

<고환>을 도모하려면 임금을 세워야 하니 근심스런 사태에 이를 것이고,

<우문태>에게 도망가자니 장래를 생각하여 할 것이오.

<우문태>는 3군의 추대로 102곳의 땅을 의지하고 있어 이미 창을 잡고 있는 것이니,

어찌 달래서 그 창의 손잡이를 받을 수 있겠소.

이러다가 끓는 물을 피하려고 불 속으로 들어갈까 두렵소이다."라 하였다.  


7월, 형혹성(熒惑星)이 남두성(南斗星)으로 들어갔다.

 

<원수元脩>는 하교(河橋)에 10여 만병을 둔치고 있었는데,

<고환>이 수일동안에 900여 리를 행군하여

이미 하(河)의 북변 10여 리에 다다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심은 흉흉해지고 군병들은 싸울 뜻을 잃었다.

 

<원수元脩>는 곧 낙양을 버리고 서쪽으로 도망할 생각이었고,

우리 동궁에게는 귀국하기를 권하였다.

 

동궁은 부득이 하여 공주를 데라고 말과 나란히 걸었다.

 

<분장芬長>과 <화백華栢>을 시켜 미륵창을 세우고 밤에 길을 나섰더니,

이미 시작부터 성중에선 북소리가 났으며,

<원수元脩>는 서쪽으로 도망하였는데 죽은 이가 반을 넘었다 하였다.

 

종실은 크게 어지러워졌고,

성난 백성들은 난리를 피우며 종실의 부녀를 억지로 능욕하였더니,

곡성이 하늘을 울렸다.

 

찾아와 동궁에게 의지하려는 종실이 점차로 많아지니 먼 길을 떠날 수도 없어졌다.

 

그런데 <고환>은 이 소식을 듣더니,

변고가 생길까를 걱정하여 병사를 보내서 우리 동궁을 호위하여 환국하게 하였다.

 

여러 공주들은 변고가 생겼음을 듣자 울부짖을 뿐

누가 흉사를 범하였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이에 상이 여러 공주들과 아들딸들에게 이르길

 

"<원수元脩>가 <원공元恭>을 죽인 일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오직 우리나라만이 조종이 계신 이래로 효도와 우애를 근본으로 삼았더니,

형제간에 서로 잔혹함이 없었다.

천하 만고 어느 곳에서나 법으로 삼을만한 것이다.

이런 법도가 끊겼었다면 어찌 위(魏)와 다름이 있었겠느냐?

너희들은 이것을 진정 깨우쳐야 할 것이며,

그런 자리에 있지 않은 이들도

아무렇게도 다투거나 서로 잔혹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 하였다.


8월, <원수元脩>가 장안으로 들어가더니,

자신의 여동생 <풍익馮翊>공주를 <우문태>에게 처로 주었다.

 

<고환>은 <원수元脩>를 추적하였으나 잡지 못하여 동관(潼関)을 공격하여 빼앗고

전진하여 화음(華陰)에 주둔하고는 <후경候景>을 보내서

형주(荊州)를 쳐서 빼앗았다. 
  

 

10월, <고환>이 <원선견元善見>을 제로 하였다.

 

<옥릉玉陵>의 조카였으며, 나이는 열 하나이었다.

 

<원선견元善見>의 아비 <원단元亶>은 제위에 오르지 못하고 아들이 임금이 되었더니,

뒤이어서 마음의 병이 생겼다.

 

<원단元亶>은 <원역元懌>의 아들이고, <옥릉玉陵>의 이복 오빠였다. 
  

<우문태>가 동관(潼関)을 공격하여 되찾고

지키던 병사 7천과 <원수元脩>를 구해냈더니, <우문태>는 대승상이 되었다.

 

<고환>은 낙양으로 하여금 서쪽을 위협하여

<우문태>의 남쪽이 양(梁)과 가까이 되게 하고는 업(鄴)으로 도읍을 옮겼다.

 

사흘이내에 40여만 호를 옮겼더니,

어지러운 이리떼 같은 모습이 한도 끝도 없이 줄을 이었다.


윤12월, <우문태>가 <원수元脩>를 짐독으로 죽였다.

 

나이 스물다섯이었으며, 시신은 불사(佛寺)로 옮겨졌다. 이가 효무제(孝武帝)이다.

 

간의대부 <송구宋球>가 통곡하며 피를 토하기 수일이 되었어도,

<우문태>는 그가 이름 있는 유학이어서 감히 죄를 줄 수 없었다.

 

<원수元脩>의 종형인 <원보거元宝炬>를 임금 자리에 앉혔다.

 

이에 앞서서 <원보거元宝炬>의 여동생 <평원平原>이 미색이어

<원수元脩>가 후궁으로 들였었고, <우문태> 또한 몰래 통정하였더니,

<원수元脩>가 노하여 <우문태>를 죽이려 하였다.

 

이를 <원보거>와 상의 하였고,

<원보거>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 한 나머지 <우문태>에게 알렸다.

 

<우문태>가 <원수元脩>는 간교한 종매 세 명과

또한 간교한 그의 처 <풍익馮翊> 때문에

제위에 오르지 못하였으며 불사에 갇혔다가 끝내는 죽음을 당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원수元脩>는 재질이 부족하고 <고환>을 도모할 마음이 남아있었기에 도망하였었고,

<우문태>를 도모하려다가 죽었으니, 자신의 목숨이 어찌 될지를 몰랐던 사람이었다.

 

간교한 세 자매 때문이라는 얘기는 <우문태>가 떠드는 것에 불과 한 것이었다.  
  

효자와 효손에게 양친전(養親錢) 100냥 및 옷과 술을 하사하였고,

양처·현부·자부·자모 및 애부·애모하는 자와 의형·의제 하는 이들에게는

옷과 술 및 쌀과 고기를 하사하였고,

백관과 글을 읽는 이들에게는 큰 초를 각각 200자루씩을 하사하였고,

의부·의자 하는 현명한 이들에게도 상을 내렸다.
  

<우문태>는 <독고신獨孤信>과 <양충楊忠>을 시켜서 형주(荊州)를 공격하다

<후경候景>에게 쫓겨 양(梁>으로 도망하였는데, 끝내는 형주(荊州)를 빼앗았다.

 

 

 


 

 

을묘{AD535}을묘 대장(大藏) 5년,

 

춘정월, 무술일 초하루,

상이 동궁·<초운椘雲>·<덕양德陽>·<숙淑>·<옥릉玉陵>을 데리고

대궁(大宮)에서 조하를 받았다.  
  

<고환>이 계호(稽胡){산융山戎}인 <유이승劉彛升>을 격파하고

그의 아들 <고징高澄>을 돌려받았다.

 

<고징高澄>은 당시 나이 열 넷이었는데,

항상 자신의 어미 <루婁>씨를 증(烝)하였고,

그리하다가 15일 밤에 아비가 없는 틈을 타서 아비의 첩인 <정鄭>씨를 범하였다.

 

<정鄭>씨는 <고환>에게서 죄를 받을까 무서워서 애걸하였었지만,

<고징高澄>은 짐승 같은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억지로 그녀를 통음하였고,

연거푸 여러 날을 즐겼다.

 

<정鄭>씨는 일찍이 자신의 여종을 꾸짖은 적이 있었더니,

이 여종은 마음에 독기를 품게 되었으며 이 음탕한 일을 알고 있는지라,

<정鄭>씨를 죽이려고 <고환>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일러바쳤다.

 

<고환>은 세인들이 조롱할 것을 두려한 나머지 <고징高澄>을 곤장 100대를 쳐서

<루婁>씨와는 뚝 떨어진 곳에 가두어버렸다.

 

<사마자여司馬子如>가 들어와 <고환>을 찾아보더니 말하길

 

"내 아들도 내 첩을 통음하였습니다.

아들은 크게 되면 에미를 범하고,

딸들은 크게 되면 애비를 범하는 것이 인간들의 본성인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숨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어찌 간악한 비첩의 말을 믿어 대본(大本)를 위험하게 하십니까?

<고징高澄>은 바로 큰 기둥입니다."라 하였더니,

 

<고환>도 그렇다 여겨서 고변한 여종을 죽이고

<루婁>씨와 <고징高澄>을 이전과 같이 아끼게 되었으며,

 

이르길

 

"<사마자여>가 내 처자를 온전하게 하였다."라 하면서, 금 서른 근을 하사하였다.

 

<고징高澄>이 <정鄭>씨와 <루婁>시를 자행하였던 것을 미워하거나 화내지 않았다.

 

모두가 <고환>이 <고징高澄>을 곤장 친 것은 진솔한 것이 아니었으며,

다만 사람들의 이목 때문이었다고 여겼다.  

 

<고환>이 <사마자여>를 시켜서 동관(潼関)을 공격하고 화주(華州)를 습격하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사신들을 칼질하였더니,

<왕태王態>가 놀라 일어나서 몽둥이로 이들을 물리쳤다.

<원보거元宝炬>가 <을불乙弗>씨를 처로 하였다.


2월, <소연蕭衍>이 <진관晋冠>을 사신으로 보내어

금불상과 단향 및 봉차와 귤당 등을 바쳤다.

 

이 시절, <진관晋冠>은 양(梁)과 토산물과 재화를 교역하였고,

왕래하는 선박이 끊이지 않았었다.
  

 

3월, <고환>이 <유이승>과 화친을 약속하고 딸을 처로 주었는데,

그들이 방비하지 않음을 보고 습격하였더니,

그들의 북부왕이 <유이승>을 참하고 투항하였다.

 

남은 무리들이 <유이승>의 아들인 남해왕을 다시금 세웠더니,

<고환>이 진격하여 남해왕을 사로잡았고,

그들의 황후와 여러 왕들 및 공경들 이하 400여 명과

화족(華族)과 이족(夷族) 5만여 호까지 <고환>에게 귀의하였다.
  

26일, <고환>이 <원수元脩>의 처를 팽성(彭城)왕 <원소元韶>에게 처로 주었다.

 

<원소元韶>는 <원자유元子攸>의 형인 <원소元劭>의 아들이며,

<원수元脩>와는 재종 형제간이었다.

 

<원소元韶>는 모습이 부녀자 같이 예쁘고 여렸다.

 

그리하여, <원수元脩>의 처가 그에게 오가면서 상통한지 오래였더니,

<원수元脩>가 피살되었단 소리를 듣고는 <원소元韶>의 처가 되기에 이르렀다.

 

<고환>의 장녀이다.
  

<우문태>가 <소작蘇綽>을 좌승으로 삼았다.

 

<소작>은 송(宋)에서 묵형(墨刑)을 받고 쫓겨나자 <우문태>의 휘하로 들어갔으며

새 이름을 얻었다.

 

<우문태>는 창지(倉池)에서 물고기 잡이를 구경하며 얘기를 나누다가

그물을 잊어버리고 돌아갔다.


4월, <고환>이 <고오조高敖曹>와 <후경候景> 등을 시켜서

양(梁)을 정벌하여 일진일퇴하였다.

 

<우문태>가 <고환>의 죄 20가지를 열거하였다.

 

<고환> 또한 <우문태>를 역도라 하면서

100만 군병을 일으켜서 서쪽을 토벌하는 중이었다. 
  

 

5월, 안평(安平)과 장무(章武)등 여러 군(郡)에 큰 비가 내리고

홍수가 크게 일어 매우 많은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고 무너졌다.

 

죽은 이들이 200여 사람이나 되어, 명을 내려 진휼하게 하였다.  

 

<인양寅陽>공주가 상의 아들 <효성孝成>태자를 낳았다.

 

<인양寅陽>은 <덕양德陽>의 동복 여동생으로, 이 때의 나이는 스물넷이었다.

 

애초엔 <진晋>태자비가 되었었는데,

요즈음 들어서 상의 총애함이 점차 극진하여 졌었고,

상의 두 아들 <의성義成>과 <효성孝成>을 낳은 것이다.

 

이에 상은 그녀를 아껴서 황후로 봉하고자 하였더니,

<덕양德陽>이 <진晋>의 처를 빼앗는 것은 할 일이 아니라 하며 말렸다.

 

그러자 상은 <평산平山>공주를 <진晋>태자에게 처로 주었다.

 

<덕양德陽>후의 소생인 상의 딸이었고, 당시 나이는 열다섯이었다.

 

<진晋>태자는 심히 즐거워하였고, 이어서 자신의 처 <인양寅陽>을 바쳤다.

 

<평산平山>은 명랑하고 예뻤으며 영리하여 상이 그녀를 아끼고

하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다가 <진晋>에게 특별히 내린 것이다.

 

상으로 내린 진보도 엄청 많았다.


7월, <양의신>이 동궁의 아들 <춘성春成>을 낳았다.

 

그녀의 어미가 한미한지라 태자가 되지는 못하였으며,

다만 소후라고 부르게 하였고, 태자의 예와 같이 하여 옷을 하사하였다.
  

 

8월, <고환>이 봄부터 백성 10만 명을 징발하여 낙양의 궁전을 철거하여

그 자재를 업(鄴)으로 실어 날랐으며,

또한 7만 6천명을 징발하여 업(鄴)에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
  

<우문태>가 <조강趙剛>을 시켜서 <고환>의 신하인 <이민李愍>을 유혹하여

형주(荊州)의 동부를 가지고 <우문태>에게 투항하게 하였고,

또한 <소연蕭衍>에게로 가서 설득하고 권고하여

<하발승賀拔勝>과 <독고신獨孤信> 등을 보내게 하였다.  

 

<우문태> 어미의 조카인 <왕초세王超世>가 진주(秦州) 자사가 되더니

교만하여져서 재물을 상으로 나누어주었다.

 

<우문태>가 법령을 가중하여 그를 죽였다.

 

사람들은 차가운 독기가 내종형에게도 이르렀다 하였다.
  

 

10월, 동도(東都)에 지진이 일었다.

 

상은 역대의 제와 후들의 산릉을 수리하고 엄히 수호하라 명하였다.

 

몽조(夢兆)를 당하고, 땅 또한 지진이 일어나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11월, <고환>이 둘째 아들 <고양高洋>을 표기대장으로 삼았고,

의전은 태원공(太原公)과 같게 하였다.

 

이 때 나이는 여덟 살이었으니, 그 속뜻은 알 만하였다.

 

일찍이 <고양高洋>은 헝클어진 실을 다스림에 칼로 잘라놓고 말하길

 

“헝클어진 실은 잘라버릴 뿐입니다.”라 하였더니,

 

<고환>은 <고양高洋>을 현명하다 추켜 주며 이르길

 

“나보다 낫구나.”라 하였다.

 

<고환>은 잘라버림으로 다스리겠단 말인가?

 

<고양高洋>의 포악함은 모두 <고환>이가 그리 만들었기 때문이다.

 

<주紂>의 죄 또한 그 아비가 아들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임금된 자의 아들 교육은

<고환>이 <고양高洋>을 내버려 둔 것 같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양음楊愔>이 <고양高洋>의 사마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복잡하고 어지러운 일을 명쾌하게 처리 할 때 사용하는

도난마(快刀亂麻)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12월, 우레가 있었다.

 

돌림병이 크게 돌았더니, 상은 의원과 약재를 백성들에게 보내라 명하였으며,

색사에 조심하고 반찬을 줄이고 기원하였다.

 

빨리 질병을 멎게 하여 백성을 구하고자 도장을 열었다.  

 

<옥릉玉陵>이 딸 <청릉靑陵>공주를 낳았다.

 

상이 <옥릉玉陵>을 위무하고 아끼는 것이 지나치자,

<옥릉玉陵>은 날마다 제의 침소로 들어가 총애를 받는 것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원보거>가 사신을 보내 준마와 옥 및 비단을 바치며 아뢰길

 

“신은 폐하의 외가 자손이오며,

신의 처 <을불乙弗>은 토곡(吐谷)을 잇고 있으며 또한 을불대제로부터 나왔습니다.

이러한즉 신 부처 둘은 폐하 집안의 사람인 것입니다.

지난번 서로 만나 뵈었을 땐 <고환>에게 핍박을 당하느라 쉴 겨를이 없었기에

동쪽으로 찾아 뵐 수 없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신의 청을 불쌍하고 가엽게 여겨주시길 바라옵니다.

팔 한 쪽의 힘을 빌려주신다면 7묘를 회복하고

영원토록 구생간의 예의를 지키겠습니다.”라 하였다.

 

상은 후하게 음식을 먹여서 돌려보냈다.

 

이 시절, <고환>과 <우문태>는 여색외교(女色外交)로 노를 저어 다가왔으나,

상은 든든히 지키면서 어느 쪽을 편들지도 않고 그 와류에 빠져들지도 않았다.  

 

유연(柔然)왕 <두병頭兵>이 <고환>에게 청혼하였고,

<고환>은 상산(常山)왕의 여동생을 <란릉蘭陵>공주로 삼아서

<두병頭兵>에게 처로 주고는 <두병頭兵>을 시켜서 <우문태>를 치라고 하였고,

이에 <우문태> 또한 유연(柔然)과 혼인하였으니,

그 추한 작태는 막심하였고, 천박하다 할 만하였다.

 

 

 

 



 

병진{AD536} 대장(大藏) 6년,

 

춘정월, 임인일 초하루, 용산의 온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해(奚)왕 <사출査出>이 입조하여

자신의 종제인 <유이승劉彛升>의 원통함을 털어놓자 상이 이르길

 

“<유이승>은 망녕되게도 스스로를 존대하려 하였다가 멸망한 것이오.

그대는 의당 삼가 봉역을 지키고, 신중히 처신하여 허튼 움직임을 하지 마시오.”

라 하였다.
  

상이 <화양華陽>과 <옥릉玉陵>을 데리고 <하양河陽>궁으로 가서 연회를 열고

오래 사시길 기원하였다.

 

후는 고국의 어려움을 들어 사양하였으나 상이 이르길

 

“여자는 지아비 집안을 따라 향락하실 일이지, 어찌 친정집을 걱정하십니까?”

라 하였다.

 

<하양河陽>은 나이 열다섯에 태종(太宗)에게로 와서 5남 7녀를 낳았으며,

위(魏)의 공주 출신 가운데 우두머리였다.

 

이때, 환갑을 맞이하였더니 내외의 사람들이 축하하는 때인지라

빛나게끔 준비를 하였고 이날 밤엔 상이 손수 등희(燈戱)를 거행하였다.
  

<소연蕭衍>이 자신의 아비를 위해 황기사(皇基寺)를 지었다.

 

<홍弘>씨를 무고하여 겁박하고 살해하였으며,

그녀 집의 거대한 목재를 몰수하여 사찰을 지었다.  

 

"그리하는 것도 효행이던가?"라고 사가가 탄식하였다.  


2월, <고환>이 자신의 아들 <고징高澄>을 병주(幷州)자사로 삼았다.

 

나이 열다섯이었으며, 좀 있다가 상서령 영군·경기(京畿)대도독을 얹어주었다.

 

사람의 임용과 법을 집행함에 엄준하고, 일을 처리함에 엉거주춤함이 없었더니,

중외가 놀라서 움직임이 빨라졌다.

 

병주(幷州)별가 <최섬崔暹>이 좌승이 되었다.  

 

병자일에 <홍紅>황후가 <계음桂陰>공주를 낳았다.
  

 

3월, 8일, 제(齊)의 <도홍경陶弘景>이 단양(丹陽)의 모산(茅山)으로 숨어들더니,

시 한 수를 읊었다.

 

“<이보夷甫>의 소임은 흩어져 산만하고, <평숙平叔>은 앉아서 의론하나 공허하다.

세월이 지나면 소양전(昭陽殿)이 선우궁(単于宮)이 됨을 어찌 깨달을 수 있었겠는가.

제(齊)의 사람들은 무사{武事}는 익히지 않고

다투어 도리{道理}만을 이야기하는구나."라 하였는데,

 

<왕연王衍>과 <하연何晏> 등이 그러하였었다.

 

소양(昭陽)은 이후에 <후경后景>의 거처가 되었다.


5월, 상은 봄과 여름이 가물었더니 기우제를 올리고 이르길

 

"짐이 덕이 없어, 지난해엔 물난리가 났고, 올해엔 가뭄이 들었다.”라고 하더니,

황태자에게 정사를 살피라 명하고는,

밖으로 나가 행궁에 머물면서 감선하고 자책하였다.

 

동궁은 나이가 비록 열아홉이었으나 큰 정사를 능히 처결하였고,

아울러서 <양의신>의 보좌함이 있었더니, 낭패 된 일이 없었다.

 

이에 상은 동궁과 <양의신>에게 정사를 맡기고는,

날마다 후비들과 더불어서 시나 읊고 술 마시며,

산궁 및 수루와 온수 및 무림 간을 오가며 스스로 즐거이 지냈다.

 

<양의신>은 음란하고 거친 여인이긴 하였으나 능히 현명한 이에게 일을 주어,

시시때때로 생기는 정사에 잘못됨이 없었으니 백료들이 그녀를 좋아하였다.


8월, 황충이 크게 일자 동궁은 <양의신>과 함께 교외로 나가서

황충을 잡아서 먹었으며 창고를 열어 백성을 진휼하였고,

관청의 소를 풀어서 먹을 것이 없는 백성에게 하사하였다.  

 

<고환>이 둘째 아들 <고양高洋>을 시켜서 옥기·법주·준마·명주 등을 바쳐왔으며,

딸을 바치겠다고 청하였다.

 

<고양高洋>은 당시 나이 아홉이었으나 숙성하여 성인 같아보였다.

 

상이 후하게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숙淑>공주가 동궁의 딸 <준俊>공주를 낳았고,

<붕萠>공주가 상의 딸 <호蝴>공주를 낳았다.


9월, <두병頭兵>의 사신 <우고진래宇古晋来>가 불로주와 누런 낙타 30필을 바쳤다.

 

<우고진래>가 말하길

 

“ 천산(天山) 북쪽에 선인이 있는데,

겨울을 춥지 않게 여름을 덥지 않게 할 수 있으며,

신병들이 그를 호위하고 있어서 돌궐의 창으로도 그를 관통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원종(原宗)이 제를 참칭하고 년호를 건원(建元)이라 고쳤다.

 

이에 상이 화가 나서 원종(原宗)을 정벌하고자 하며 이르길

 

“ 태종(太宗) 이래로 글을 중시하였던 폐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소.

정벌하지 않으면 버릇을 고칠 수 없을 것이오.”라 하였더니,

 

<양의신>이 간하여 아뢰길

 

“지금 그를 정벌한다면 필시 대비하고 있을 것이어 그의 꼬임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니,

 잠시 그의 뜻이 교만하게 놓아두어서

하늘이 벌하기를 기다림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때, <명농明穠> 또한 함부로 제를 칭하긴 하였으나

사신을 보내와서 신하를 칭하였으며 바치기가 지난날과 같아 정벌하지 않았다.  
  

<하발승賀拔勝> 등이 양(梁)에서 장안으로 돌아갔다.

 

<소연蕭衍>이 남쪽 동산에서 연회를 열어 전송하였다.

 

<하발승>은 은혜에 감사하여 도중에 금수(禽獸)를 만났어도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어서 쏘지 않았다.

 

<후경候景>이 <하발승>을 협박하자 <하발승>은 배를 버리고 산으로 도망하였으며,

얼고 굶주려 길에서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살아 돌아간 자가 또한 말하길

 

“마음은 이미 탈신하여 홀로 돌아왔으니 평온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관중에 큰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를 뜯어먹으니

죽은 이가 열에 일곱 여덟이나 되었다.

 

상은 이 소식을 듣더니 탄식하며 이르길

 

“기근이 심하기가 이 지경에 이르다니, 삿되구나.

우리나라는 옛 법도를 좇았더니 서로를 뜯어먹는 변란은 없었소.

<추모>의 덕이 어찌 크지 않았겠소?” 라고 하였다.

 

<고환>이 기근으로 인하여 <우문태>를 치고자,

양(梁)과 화친을 약조하여 놓고 동관(潼関)으로 진격하였다.  

 

<원선견元善見>의 아비 <원단元丹>의 부음이 다다르자,

상은 <옥릉玉陵>과 함께 단궁(檀宮)에서 애도하고,

<융隆<태자에게 명하여 업(鄴)으로 가서 조상하고 법식에 맞게 부의하라 하였다.

 

 

 

 

 

 


정사{AD537} 대장(大藏) 7년,

 

춘정월, 정유일 초하루,

<문장文藏>의 처 <연화淵華>가 상의 딸 <당唐>공주를 낳아서 조하를 미루었다.  

 

상이 우산(牛山)의 릉으로 가서 안장(安藏)대제를 지내고

한왕(漢王) 부처를 위로하였다.  

 

<고환>의 군병이 포판(蒲坂)에 다다랐다.

 

<우문태>는 <고환>과 맞싸우지 않고 작은 관문을 몰래 빠져나가

<두태竇泰>를 공격하여 죽였다.

 

<고환>은 하(河)가 얇게 얼어 구원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고오조高敖曹>는 혼자 나아갈 곳이 없어서 상락(上洛)을 공격하여 빼앗았으나

화살을  세 곳에 맞아 상처가 심하여 락주(洛州)로 돌아갔는데,

끝내는 무너지더니 <우문태>에게 귀복하였다.

 

<우문태>는 괴리(槐里)에서 신성한 옥새를 얻자 크게 사면하였다.
  

 

3월, 동궁이 <은銀>공주와 함께 군과 읍을 순행하여 백성을 진휼하고 치료하였다.

 

이 시절, 창고엔 10년 치의 양식이 있었고,

의원에는 10번이나 쓸 수 있는 약재가 있었으니,

설사 가물고 황충이 일어도 백성들을 굶기지 않았으며,

병이 들어도 많은 이를 구할 수 있었다.  

 

우산(牛山)에 안장탑(安藏搭)을 5층으로 세웠다.
  

 

6월, <고환>이 분양(汾陽)의 천지(天池)에 이르렀더니

기이하게도 돌들이 점괘 문양을 숨기어 솟아있었고,

여섯 왕과 물귀신 셋을 숨기고 있는 것이 락서(洛書)와 관련된 조짐이었다.

 

랑중 <두필杜弼>이 <고환>에게 선위 받으라고 꼬였더니,

<고환>은 지팡이를 높이 쳐들고 그를 꾸짖어 쫓아버렸다.


7월, <고환>이 <이해李諧>를 <소연蕭衍>에게 보냈다.

 

<소연>이 얘기를 듣고 크게 놀라서 말하길

 

“ 업(鄴)에도 사람이 있으니, 이제부터는 남과 북이 좋게 지낼 것이고,

반드시 형편에 맞는 예를 표해야 할 것이오.

지나치게 높은 자리를 증직하여 설전이 있게 될 것이고,

좋은 일을 이뤄냈다 하여도 잠시간만 좋을 뿐이오.”라 하였다.  

 

<독고신獨孤信>과 <양충楊忠>이 양(梁)에서 나와 <우문태>에게 귀의하였고,

<독고신>은 부모를 산동 땅에 내버려두고 마음에 두지도 않은 채 말하길

 

“주군을 섬기면서 두 마음을 품을 수는 없습니다.”라 하였다.

 

<소연>은 <우문태>와 <고환>이 서로 다투니

그들의 은밀한 곳과 그들의 뛰어난 점을 살피게 하였다.
  

 

8월, <우문태>가 <고환>에게 귀의하였다.  

 

농사만 짓고 있던 <우근于謹>을 전봉으로 삼았으며,

또한 유연(柔然)을 시켜서 <고환>을 치게 하였다.
  

<소연>이 아육탑(阿育塔)으로 나가서 삭발하고

무애회(無礙會)를 열어서 크게 용서하였다.

 

<우문태>가 괴리(槐里)의 신성한 옥새를 가진 건,

<고환>의 6왕 3천(三川) 건,

<두병頭兵>의 천산(天山) 선인(仙人) 건,

<소연>이 탑을 짓고 삭발한 건.

 

모두가 불경스러운 일이었고, 이렇게 빠져들었으니,

개돼지 같은 무리이었다고 할 만하였다.  

 

<강음江陰>공주가 <양의덕楊義德>에게 하가하였다.


9월, <우문태>와 유연(柔然)이 혼인을 약속하였다.

 

유연(柔然)은 <란릉蘭陵>과 혼인하고 나서 배신하고는

<고환>의 분양(汾陽)과 삼퇴(三堆)를 침략하였다.

 

이에 <고환>이 출격하여 쫓아내고,

측근들을 불러서 그를 진정시키고 말 잘 듣게 할 방도를 상의하였더니,

 

모두들

 

“ 유연(柔然)은 동쪽의 황상에게는 복종하고 있으니,

동쪽 황상의 조서를 얻을 수 있다면, 싸우지 않고도 진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 하였다.

 

<고환>도 정말로 그렇겠다고 여기어,

<이정李挻>을 시켜 찾아와서 보물 및 말과 향 및 약재를 바치고,

다시금 딸을 바치겠다고 청하였다.

 

상이 이제 늙어서 장가들 수 없다고 사양하였더니,

<이정>이 아뢰길

 

“폐하께서는 춘추가 오히려 넉넉하시고 용체는 건장하시며 여유로우신데,

어찌 제사 하나를 걱정하시며 신의 외로운 충정을 짐스러워 하십니까?

그리하시면, 스스로 가져오는 것은 거절하고

다른 이에게 베풀기만 하시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이며,

빼앗기만 하시고 취하지는 않는 것이 됩니다.”라 하였다.

 

상은 종실들과 의논하더니, 피륙과 비단을 <고환>에게 보냈다.

 

<고환>은 크게 들떠서 처와 상의하며 말하길

 

“동쪽의 황제께서는 7척 5촌의 키에 엄청나게 건장하고 힘도 세신데,

우리 딸이 감당하겠소?”라 하였더니,

 

<루婁>가 웃으며 말하길

 

“<우미虞美>는 병풍하나로 가리고도 능히 항왕{초 패왕 항우}>을 녹였는데,

항차 임금의 딸이야 어떠하겠습니까?”라 하였다.

 

<고환>이 딸에게 훈계하길

 

“지아비 되시는 황제를 잘 모시어 섬기고,

나이 드셨음을 싫어하지 말거라.”라 하였더니,

 

딸이 아뢰길

 

“신하는 주군을 위해 죽고, 처는 지아비를 위하여 죽습니다.

어찌 감히 늙었다 고 마다하겠습니까?

오로지 아버님이 명을 내리시면 딸은 응당 즐거이 따르겠습니다.”라 하였다.

 

<고환>은 기뻐서 딸을 어루만져주었다.

 

<진하真賀>는 <대혼大渾>의 딸이어서,

<원선견元善見>의 수양누이동생으로 삼아서 <청하淸河>공주로 봉하고,

꽃마차 100량에 말 마차 1000량을 딸려서 보냈더니,

그 위풍의 성대하기가 먼 옛날에도 없었다.

 

상은 외부상서 <송松>태자와 홍로경 <담위談緯>를 보내

국경언저리로 가서 맞이하게 하였다.

 

이때, <우문태>의 사신 또한 도착하여 유연(柔然)과 군병을 합쳐서 <고환>을 토벌하고

그 땅을 함께 나누어 가지겠다고 청하였더니,

 

상은

 

“ 유연(柔然)>은 <란릉蘭陵>과 혼인하고서도 <고환>을 배반하였으니,

믿을 수 없겠다."고 일렀고,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윤9월, 임술일 초하루,

 

상이 <녕양寧陽>공주와 <음陰>태자를 대동하고

남구(南口)에서 <청하淸河>공주를 맞아들였다.

 

이때, <고환>은 20만병을 이끌고 <우문태>의 포진(蒲津)을 공격하였으며,

<우문태>는 기근으로 인하여 장수와 사졸이 만 명을 넘지 못하였으니,

모두가 나서도 막아내기 어려웠다.

 

8일, 상이 <청하淸河>공주를 데리고 백암(白岩)을 지나는데,

공주는 상을 보고나서도 풍채는 물 뿌려 매만진 듯하고 흰 수염이 늘어져 있어서,

아직도 알아채지 못한 채로, 기쁘고 들떠서 말하길

 

"내 지아비께서는 오시는 것이 왜 이리 늦으시나요?

집을 떠나온 내내 밤마다 꿈을 꾸었습니다."라 하였다.

 

상은 크게 기쁜 나머지 "진정 내 처로구나."라 하고는 끌어안고 장막으로 들어갔다.

 

군신들이 만세를 부르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이윽고 상이 공주와 함께 행궁의 신전에서 합환하였다.

 

공주는 보령 13이었고, <고환>의 셋째 딸이었으며,

그 어미 <루婁>씨는 <루사덕>의 혈족이었다.

 

배신(陪臣){공주에 딸려온 신하}들에게는 술을 내려주었다.

 

다음날 상은 공주를 데리고 신전에서 조례를 받으며,

 

이르길

 

"새 황후는 나를 위해 멀리에서 찾아왔소.

그대들은 수복을 누리고 아들을 많이 낳을 수 있도록 빌어야 할 것이오."라 하였다.

 

11일, 백암(白岩)을 떠나 내시(內市)에 이르렀다.

 

같은 수레에서 잠자고 일어났었으며, 공경 이하 70명이 수레를 따랐고,

정결한 남녀를 가려 뽑아 성장을 시켜서 수레를 끌게 하였었다.

 

행렬이 지나간 주군은 금년의 조세를 면하였다.


10월, <청하淸河>공주를 제3황후로 봉하고,

졸본으로 가서 종실과 위(魏)의 공주 등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고환>이 <우문태>와 사원(沙苑)에서 싸우다가 크게 지고 돌아갔다.

 

상은 새 황후가 슬퍼할까 걱정되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으며,

황후는 날마다 좋은 소식을 기다렸다.

 

이에 상은

 

“자네는 나의 처가 되었으니, 오로지 지아비 섬기기를 힘써야 하거늘,

어찌 친정집 일을 골똘히 생각하는고?

아들 낳고 딸을 낳아 지아비를 즐겁게 하는 것이 처 된 자의 도리이니,

정성을 다하여 밤의 법도를 생각하며 단지 나만을 생각하여야 할 것이데,

얼마나 한가하면 타인을 생각한 달 말인고?

친정 아비 또한 외인이니 깊게 걱정하지 말 것이야.”라 하였다.

 

후는 사죄하더니 다시는 싸움에 대하여 묻지 않았으며,

낮이면 용모를 다듬고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으며,

밤이면 잠자리에서 교태로써 모시기를 힘썼다. 
  

 

11월, <양의신>을 우시중으로, <문장文藏>태자를 이부상서로 삼았다.

 

<양의신>은 눈을 크게 뜨고 <문장文藏> 부리길 작은 아이 같이 하였다.
  

 

<화양華陽>이 상의 딸 <홍양紅陽>공주를 낳았다.

 

새 황후가 <홍양紅陽>을 입힐 옷을 만들었더니,

 

<화양華陽>이 말하길

 

“동생은 나와 함께 한 지아비를 모시고 있네.

만 리 먼 곳에서 어찌 골육을 다시금 만나보길 바라고 있소.

다만 <고환>승상이 우리를 돌봐주지 않을까나걱정하시오”라 하였더니,

 

조카인 후가 답하길

 

“형님께서는 그를 의심하지 마세요. 그는 진정 충신입니다.

하물며 저를 형님의 동생이 되게 맺어준 사람이잖습니까.”라 하였다.

 

 

 

 


무오{AD538} 대장(大藏) 8년,

 

춘정월, 신유일 초하루, 일식이 있어 조하를 미루었다.

 

<고高>황후와 함께 별일 없이 내전에서 <루婁>씨의 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유연(柔然)의 <우고진래宇古晋来>가 말하길

 

“오는 도중에 공물로 가져오던 코끼리를 <고환>의 군대에게 털려서 잃었습니다.”

라 하였는데, 때마침 <고>황후와 정을 나누고 나온지라 이간하려는 것으로 여기고

그 정황을 묻지 않았다.

 

나중에 들으니 <원선견元善見>이 그 코끼리를 타고 다니고 있으며

연호도 원상(元象)으로 바꾸었다 하니 마음이 상하여 이르길

 

“그럴 줄 몰랐는데 <고환>승상이 내 코끼리를 빼앗았소.”라 하였다.

 

그러자 후가 몰래 <루婁>씨를 시켜 코끼리 세 마리를 바치게 하였다.

 

암컷 두 마리와 수컷 한 마리였다.

 

상은 황후와 함께 그 코끼리를 올라타고 나서 이름을 지어주길

 

“오처상(吾妻象){내 처의 코끼리}”이라 하였다.  

 

<옥릉玉陵>비가 상의 딸 <홍릉紅陵>공주를 낳았다.
  

 

2월, 황산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거란의 왕인 <호돈好頓>이 넘쳐나던 그의 여자와 호피 300장 및

양 1,000필과 소 100필을 바쳐왔다.

 

대략 <고환>이 딸을 보낸 것을 흉내 낸 것이었다.

 

상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호돈好頓>을 우대장·연산공(燕山公)으로 봉하였다.


3월, <우문태>는 사인 <원익元翌>의 딸을 <화정化政>공주로 삼아서

<두병頭兵>의 동생 <탑한塔寒>에게 처로 주었으며,

또한 <원보거元宝炬>를 시켜 <을불乙弗>씨를 폐하여 비구니로 만들었고,

부풍(扶風)왕 <부孚>를 시켜서

<두병頭兵>의 딸 <욱구려郁久閭>를 맞이하게 하였다.

 

<두병頭兵>은 수레 700대와 말 만 필 및 낙타 2천 필을

흑염지(黑鹽池) 부근으로 보내서

<우문태>가 보낸 <로박의鹵薄儀>를 만나게 하였으며,

<부孚>를 숙위하며 <욱구려>에게 남쪽으로 향하라 청하였더니,

 

<욱구려>가 말하길

 

"나는 아직 위(魏)주를 본 적이 없다."라 하였다.

 

유연(柔然)의 딸은 동쪽을 향하여 섰고 위(魏)의 사신은 남쪽을 향하여 섰다.

 

17일, <원보거元宝炬>는 <욱구려>와 합근하였으나 음양이 맞질 않아서,

몹시도 <을불乙弗>을 생각하였다.
  

<명농明穠>이 소부리(所夫里)로 도읍을 옮기고

거룻배와 군함으로 <소연蕭衍>과 내통하였다.

 

자칭 남부여(南夫餘)라 하였으며 재능 있는 이를 얻어 반역하고자 하였다.


5월, <원보거元宝炬>가 또 글을 올려 말하길

 

“신은 유연(柔然)의 <두병頭兵>가한의 딸을 처로 들였습니다.

 

처의 어미는 <재치才治>후이며 선선(鄯善)공주 소생으로 <원동原同>가한의 딸입니다.

 

<원동原同>가한의 아비는 광개(廣開) 상황(上皇)의 아들인 <경鯨>태자입니다.

 

엎드려 듣건대 <경鯨>태자는 역시 폐하의 외증조이시라 합니다.

 

신의 처는 <경鯨>태자의 증손입니다.

 

신의 부처 모두가 폐하의 혈족이오니, 영원히 변방의 병풍이 되겠습니다.

 

지난 정월에 신 처의 아비인 <두병頭兵>가한께서 폐하께 코끼리를 바쳤는데,

<고환>이 탕산(碭山)에서 약탈하였기 심경이 매우 편안치 않습니다.

 

폐하의 승은이 <고환>의 딸이 미치는 곳으로 행하지 않고,

멀리 떨어진 신에게 나타나신다면, 신 또한 딸을 바치고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라는 등등이 쓰였다.

 

상은 그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고 이르길

 

“자네의 주인은 외예(外裔)이고, 내 처 역시 위(魏)의 공주요.

<원선견元善見>은 나의 종질이고, 그대의 주인 또한 내 종제가 되오.

누구의 말을 들어주고 누구를 박대할 수 있겠소?

서로들 주어진 땅을 지키고 침입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오.

스스로 공론하여 보면 바른 길을 걷게 될 것이고,

형제들 간에 서로 잔혹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오.

코끼리가 내게 오고 못 오고는 내가 뜻하는 바는 아니었었소.

내가 어찌 <고환>승상이 코끼리를 약탈한 자라고 할 수 있겠소.”라 하였다.


7월, <고환>이 <후경候景>과 <고오조高敖曹>를 시켜서

<독고신獨孤信>을 금용(金墉)에서 포위하였다.

 

<후경>이 낙양 안팎의 관사 및 사찰과 백성의 가옥을 불태웠다.

 

타지 않고 남은 것은 열에 두셋 정도였다.  

 

8월, <우문태>가 <독고신>을 구원하고 곡성(穀城)에 다다랐더니,

<고환>의 장수인 <대문貸文>과 <도원道元>이

1천 기병으로 날쌘 것만 믿고 앞으로 나아갔다가

밤중에 <우문태>의 장수 <이필李弼>과 효수(孝水)에서 맞닥뜨렸다.

 

<이필>이 군사들에게 명하여 굳은 땅을 두드리며 섶을 끌어 먼지가 일게 하였더니,

<대문>이 도주하자 <이필>이 쫓아가서 참하였다.

 

<도원>도 단기로 잡힘을 면하긴 하였으나, 1천의 기병은 모조리 죽음을 당하였다.

 

<우문태>의 군대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더니,

<후경>은 밤중에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이에 <우문태>는 경기병으로 <후경>을 쫓아 하(河) 북변에까지 다다랐다.

 

<후경>은 하교(河橋)의 망산(邙山) 아래에 진을 치고 <우문태>와 맞붙어 싸웠다.

 

<우문태>의 말은 화살을 맞아 놀라 달아났으며 <우문태>는 말에서 떨어졌고,

<고환>의 군병이 쫓아오니 좌우가 모두 흩어졌는데,

도독 <이목李穆>이 말에서 내려 <우문태>의 등줄기를 채찍으로 내리치며 이르길

 

“ 롱동(籠東)군사인 네 주인은 어디로 가고 너 혼자만 여기 남았느냐?"라 하였다.

 

추적하여 온 자들은 그가 귀인인가를 의심해보지도 않고 내버려두고 지나쳤다.

 

<이목>은 <우문태>에게 말을 주어 함께 달아났다.


<우문태>의 군병들이 다시 떨쳐 일어났고,

모아져서 대군이 되어 <고오조>군이 있는 곳으로 이르렀다.

 

<우문태>가 깃발을 세우자 <우문태>의 군병은 용맹함을 다하여 그들을 공격하였고,

일군이 모조리 무너지자 <고오조>는 단기로 하양(河陽)으로 달아났다.

 

남성(南城)을 지키던 <고영락高永楽>은 원한이 있었던지라 들이지 않았다.

 

<고오조>가 칼을 뽑아 성문을 찍었으나 뚫리지 않았다.

 

추병이 다가오자 <고오조>는 다리 밑으로 숨었고,

추병들이 그의 하인이 금대를 차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물어서 알아냈다.

 

<고오조>는 목이 떨어짐을 면할 수 없음을 알아 머리를 부르르 떨며 말하길

 

“자네의 개국공을 데려와라.”라 하였더니,

 

추병이 그의 머리를 잘라서 돌아갔다.

 

<고환>은 이것이 애통하였으나

<고영락>에게는 곤장 200대를 내리고 죽이지는 않았다.

 

대략 자기 종조부 형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상은 이 소식을 듣고 이르길

 

“<우문태>는 롱(籠)의 군사자리를 즐기더니 채찍을 맞고 죽음을 면했다.

<고오조>는, 깃발을 세우자 진이 무너졌고,

종자가 그 허리띠를 매고 무적을 호언하다 <고오조>를 따랐다.

용감하였으나 교만 방자하여 다른 이가 원한을 가지게 하였으니, 명장은 아니었다.

그는 죽어도 마땅하였다.”라 하였다.

이 때 <우문태>의 군대가 또 <고환>의 연주(兗州)자사를 죽이고

그의 정예군사 1만5천을 사로잡아서 하(河)수에 이르렀더니,

죽은 이가 만 명이 넘었다.

 

망산(邙山)에서 싸우다가 여러 군대가 모두 하교(河橋)를 건넜지만,

유독 <만사락万俟落>은 병졸들을 붙잡아놓고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말하길

 

“<만사락万俟落>은 여기에 남을 것이다. 올 수 있는 자는 와도 좋다.”라 하였다.

 

<우문태>의 군대는 그 남은 군대가 두려워서 물러갔다.

 

<고환>은 일찍이 <만사락>의 아비를 존경하여 각별한 예법으로써

손수 말위에 오르는 것을 도왔었더니,

<만사락>은 그 은혜에 감복하여 죽기로 싸웠던 것이고,

죽기로 싸우겠다는 표정이 밖으로 내비치니 <우문태>의 군대가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전쟁에서 승패는 군사의 많고 적음에 따르는 것이 아니고

죽기로 싸우겠다는 의지가 굳세고 굳세지 않음에 달린 것이다.

 

<우문태>가 작은 군대로 항상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그들이 죽기로 싸웠기 때문이다.

 

망산(邙山)의 싸움에서 <고환>은 <고오조>를 잃더니만 비로소 결사적으로 싸웠고,

그리하여 승리를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동이 틀 무렵부터 싸우기 시작하여 수십 합이 되기 전에 기력이 다하고

사방이 막혀서 서로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고환>의 군대는 물러나려 하지 않았었으니 격렬하여졌었고,

<우문태>의 군대는 자만하였으니 얻은 것이라고는

<우문태>가 스스로가 강함만을 믿다가 무리의 말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우문태>는 잡힌 몸으로 장안으로 돌아왔고,

<고환>의 군대가 장안을 점거하였더니 난리가 나고 끝내는 무너졌다.  

 

우시중 <양의신>이 동궁의 아들 <하성夏成>을 낳았다.

 

상은 3품들의 딸을 뽑아 들이지 않고 성골을 취하려 하였는데,
동궁은 <양의신>을 아끼기가 이러하였더니, 많은 종실들이 달가워하지 않았다.  

 

10월, <우문태>는 <고오조> 및 <두태竇泰>와 <대문貸文>의 머리를

<고환>에게 보냈으나,

속으로는 싸우고자 하여 옥벽성(玉壁城)을 쌓아 험한 요새로 만들었다.

 

<고환>이 절을 세우고 중이 되는 것을 금하였다.

 

대략 백성들이 부역을 피하려 하였으며,

비구승이 200만이 되고 절의 수가 3만이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상도 또한 불교를 금하지 않았었더니 백성이 비구승으로 되는 일이 점차 많아졌다.

 

태안지세에서는 나타나지 않아야 할 일이었다.  

 

<고징高澄>이 이부상서가 되어 인물들을 받아들여 그들과 함께 연회를 열고 즐기며

시부(詩賦)를 강론하였더니 많은 문인들이 그를 따랐다.

 

 

 

 

 

 


기미{AD539} 대장(大藏) 9년,

 

춘정월, 을묘일 초하루, 상이 <고高>황후와 함께 수림의 온궁에서 조하를 받았다.  

 

무진일, <홍紅>황후가 상의 아들 <신忄+甲>태자를 낳았더니,

명을 내려 동궁의 아들로 하였다.
  

2월, 상이 <경鯨>태후와 함께 종실들에게 황산의 별궁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경鯨>태자 양덕비(讓德碑)를 능묘 옆에 세웠다.
  

종녀원(宗女院)을 세우고

<양의신>을 제거(提擧)로 <곡신谷晨>을 제교(提敎)로 삼았다.

 

<곡신谷晨>은 <곡춘谷瑃>의 딸이며, 이때 나이는 열아홉이었다.

 

<양의신>이 낳은 <곡영谷盈>의 동생이다.

 

내한(內翰)은 단지 <용容>공주의 연고이어서

이를 별도로 세우고 종녀 들을 가르치게 한 것이다.
  

<우문태>가 행대(行臺)를 두었다.

 

학생들은 해가 뜨면 다스리는 관리로 일을 하고 해가 저물면 돌아와 강론하였다.

 

대략 우리의 무장(武藏)제도를 취한 것이다.

 

<우문태>의 사람됨이 세밀하여,

다른 사람이 잘 하는 것이 있기만 하면 필히 그것을 본 땄다.

 

그의 사신이 오갔으니 반드시 살피고 돌아간 것이 있었을 것이다.


3월, 상이 종녀원(宗女院)으로 가서 <곡신谷晨>에게 승은을 입혔다.

 

애초에 <양의신>은 <곡신>의 아비 <곡춘>으로 인하여 등용되고

높은 자리에 올랐기에 그 은혜를 보답하고자 성의를 가지고 <곡신>을 가르쳤다.

 

<곡신>은 예쁘기도 하고 재주도 있어서 <양의신>은 그녀를 아꼈으며,

다른 사람에게 출가하지 말라 하면서 말하길

 

“우리들은 성상의 아들 낳기를 담당하여야 한다.”라 하였다.

 

이번 봄 들어 성상을 깊이 사모하고 사랑하여 슬프게 노래를 불렀다.

 

상이 이를 듣고는 이윽고 원전으로 가서 정을 통하였더니,

종녀들은 만세를 부르며 서로 경하하였고, 축하선물도 산같이 쌓였다.  

 

<숙淑>공주가 상의 딸 <언偃>공주를 낳았다. 
  

 

5월, <원선견元善見>이 <고환>의 딸을 처로 들였다.

 

나이 스물이었고, <고高>후의 언니였다.

 

애초 <원선견元善見>은 11살에 보위에 섰었고,

<고환>의 딸은 15살이었는데, 하루는 좌우에 시립하였다가 상통하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원선견元善見>의 나이 16살이 되었고,

임신하게 되자 후로 세운 것이다.

 

<원선견元善見>은, 비록 <고환>은 싫어하였지만,

자신의 처는 아꼈으며 걱정하기도 싫어하였다.

 

상이 동궁을 업(鄴)으로 보내서 그들의 혼인을 축하하고

꿩 털로 꾸민 수레를 그녀에게 선물하였다.

 

<고高>후 또한 예물을 보내주었다.
  

<원보거元宝炬>의 사신이 와서 누런 낙타 20필 및 장안의 미녀 20명과

포도주 만 동이를 보내고, <고환>을 토벌하여 주십사 청하였더니,

상이 위무하고 타일러서 돌려보냈다.

 

<고高>황후는 <우문태>의 사신을 물리치지 않음에 화를 내고 음식을 먹지 않았다.

 

상은 대의를 지키느라 훤히 알면서도 끊어내기는 어려웠다.


6월, <고환>이 장정 40만을 징발하여 업(鄴)에 성으로 쌓았다.

 

40여 일만에 새로운 궁전이 완성되더니, 크게 사면하고 년호도 흥화(興和)로 고쳤다.

 

<원선견元善見>부처는 새로운 궁으로 들어갔으며 백료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소연蕭衍>은 선행을 잘하고 악행을 행하지 않았지만, 악행은 사라지지 않았다.

 

<주기朱异>가 아부하는 이를 정사에 등용하길 30년에,

많은 이가 뇌물을 바치고 속이고 숨겼으니,

보고 듣는 것은 동산과 집뿐이고, 희롱하고 좋아하는 것은 음식과 성색뿐이었으니,

끝내는 잠시 동안의 흥청거림이었으며 목욕하는 날엔 거마가 문전에 가득하였다.
  

죽내령(竹內令) <음진陰震>을 포효대부(褒孝大夫)로 삼았다.

 

<음진>은 죽내령으로서 한 불효자를 다스리기 위해,

불효하게 된 연유를 물었더니 답하길

 

"자식의 불효는 아비의 자애롭지 못함에서 연유하는 것이니,

내게 묻지 말고 먼저 아비를 따져봄이 옳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음진>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고,

아전이 그 자를 어찌 처결해야 하냐고 물었더니,

 

<음진>은 노하여 이르길

 

"저 자가 불효한 것은 모두 그대들의 죄요.

어찌 아비가 자애롭지 않았다하여 불효하였노라 말할 수 있소?

그대들이 이 자를 무죄로 한다면 삿된 일이고,

아비의 자애롭지 못함을 말하는 것은 불효 중의 불효이오.

불효한 이를 길러내는 마을은 없애버리지 않을 수 없소."라 하였다.

 

이윽고 <음진>은 그 마을 사람들과 죄를 묻는 아전들도 모조리 잡아들였더니,

아전들은 굴복하기도 하였기만 두렵기도 하여 그 불효한 이를 끌어내어

저자에서 목을 베었다.

 

이때부터 죽내(竹內)의 사람들은 서로가 깨우쳐주어 효도하게 되었다.

 

상은 이 소식을 듣더니 이르길

 

"<음진>은 효를 다스리는데 귀재요.

이 사람을 포효대부로 하지 않는다면 누가 능히 포효대부를 할 만하겠소."라 하였다.


8월, 상이 처음으로 <연화淵華>의 딸 <선병善屛>에게 승은을 내렸고,

나이 열 하나였다.

 

공주의 호칭을 내리고 수양딸로 삼았는데, 재색이 당대의 제일이었다.
  

양로연을 열고, 국로인 <풍신馮信> 등에게 옷과 술을 내렸다.

 

재능을 시험하여 출사할 이를 골랐다.

 

이 일은 포효대부 <음진>이 주관하게 하였다.  

 

동궁사인 <음창陰昌>이 또 음란하고 추잡하게 동궁을 섬겼으며,

또다시 민간의 딸 셋을 동궁으로 천거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경부로 하옥되어 죄를 받게 되었다.

 

상은 지친인지라 죄를 면하여 주고 진주릉(眞珠陵)을 지키게 하였다.

 

<음창>은 황상의 동생인 <음陰>태자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어미 <녕양寧陽>은 <덕양德陽>후의 동복 여동생이었다.

 

사람들은 <음陰>씨가 제일인데,

<음진>은 선하기로, <음창>은 악하기로 그렇다 하였다.

 

 

 

 


경신{AD540} 대장(大藏) 10년,

 

춘정월, 을묘일 초하루, 포진궁(抱真宮)에서 조하를 받았다.

 

상은 주목으로 궁을 짓는 일을 크게 벌였더니,

아직 이루어지지 않자, 장인과 감독하는 이 다섯을 내쳤다. 
  

 

2월, <원보거元宝炬>가 <을불乙弗>이 그리워서 은밀히 령을 내려

머리를 기르고 돌아오라 하였다.

 

<욱구려>는 이를 듣고 노하여 <두병>에게 일러바쳤고,

 

<두병>은 화가 나서 이르길

 

"거짓으로 멈칫멈칫 하는 것으로 보아 시커먼 족제비였구나."라 하고는

군병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원보거>는 탄식하여 말하길

 

"어찌 딸 하나로 위하여 백만 군병을 일으킨단 말인가?"라 하였다.

 

<우문태>는 <원보거>에게 <을불>을 죽이라고 재촉하였고,

<원보거>는 하는 수 없이 울면서 사약을 내렸다.

 

<을불>은 울면서 말하길

 

"첩에게 생긴 이 일은 폐하의 뜻이 아니니, 비록 죽더라도 한은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지존께서는 천만세하시고 천하는 강녕하길 바랍니다."라 하고는

스스로 목매 죽었다.

 

맥적애(麥積崖)에 굴을 뚫어 장사하여 주고 적릉(寂陵)이라 하였다.

 

혹자는 <원보거>가 <을불>과 바깥의 전각에서 몰래 정을 통하자

<욱구려>가 밀고 들어가서 죽였으며,

<원보거>가 죽은 <을불>을 껴안고 통곡하자,

<욱구려>는 그 시신을 탈취하려다가

독 기운이 묻어서 넘어지더니 병들어 죽었다고 한다.

 

양 처가 일시에 죽었다.

 

몸은 만승지존이 이었으나

처와는 몰래 정을 나눠야 하였었으니 처량하였다 할만 했다.

 

<을불>의 시호는 문후(文后)로, <욱구려>의 시호는 도후(悼后)로 하였다.

 

<두병>은 <을불>이 죽었다는 소리에 회군하였으니,

자기의 딸이 죽은 것은 알지 못하였다.

 

<고환>은 이 일로 다시금 <두병>과 화친을 약속하였다.

 

<두병>의 변덕스럽기가 이러하였다.


윤5월, 정축일 초하루, 일식이 있었다.

 

상은 차를 마시고 몸을 정결히 하였으며 사흘간 성색을 접하지 않았다.

 

명을 내려 적자촌(賊子村)의 사람으로 갇혀있는 이를 풀어주라 하였다.

 

이 시절 불효한 자는 얼굴을 지졌으며,

이 불효하였던 이들이 함께 그 마을을 다스리게 하였더니,

원망하는 소리가 상에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동궁이 <진양晋陽>궁으로 가 <고高>황후를 핍박하여 정을 통하였다.

 

<고高>후는 피하려 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고,

그리하여 울면서 상에게 고하였더니 상이 이르길

 

"그가 천자가 될 것인데, 그대는 장차 그를 어쩌려 하는가?

서로 즐기지 않겠다는 것인가? "이라 하였다.

 

이에 <고高>후는 상의 속뜻을 알게 되었고, 이후 동궁과 함께 흠뻑 좋아지냈다.
  

유연(柔然)이 사자 두 마리를 바쳐왔는데, 암컷은 크고 수컷은 작았다.

 

락관(楽官)에게 명하여 노래를 짓고 춤을 추니,

자모곡(子母曲)과 월면곡(月面曲)이었다. 
  

 

7월, <원종原宗>이 죽었다.

 

딸 <지소只召>가 다스리게 되었고, 그녀의 아들 <심맥深麥>은 나이 일곱이었다.

 

<지소只召>는 스스로 보위에 서지 않고 <심맥深麥>을 세워서

품에 안고 정사를 처결하였다.

 

<원종原宗>은 불도를 좋아하였고 <지소只召>는 선도를 좋아하였다.

 

<지소只召>에게는 지아비가 셋이 있었다.

 

<입종立宗> 및 <태종苔宗>과 <황종荒宗>이 그들이며, 달마다 번갈아서 입시하였다.

 

<심맥深麥>은 <입종立宗>의 아들이다.

 

혹자는 <원종原宗>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상은 그가 왕을 참칭하여도 불문에 붙였다.


9월, <연회燕會>가 우산성주와 경계를 다투더니 일 만병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이에 우산성주 <왕식王息>이 5천의 기마병으로 맞닥뜨려 쳐서 대파하였다.

 

<명농明穠>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연회燕會>를 차꼬를 채워서 돌려보냈다.
  

 

11월, 상이 사신을 업(鄴)으로 보내서

청하(淸河)의 문의(文宜)왕 <원단元亶>을 제사하였다.

 

<원단元亶>은 <고高>황후의 양아비로 <옥릉玉陵>의 오빠다.

 

<고高>황후가 어미가 보고 싶어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화양華陽>이 상의 딸 <백릉白陵>공주를 낳았다.
  

 

12월, <우문태>가 토곡혼과 상통하더니 유연을 제압하고자

토곡혼에게 <고환>을 토벌하라 시켰으니, 그 계책이라는 것이 가위 궁색한 것이었다.

 

상이 <선병善屛>을 맞이하여 3품 다의로 삼았다. 이때 나이는 열둘이었다.

 

총애가 후궁으로 기울었다.  

 

<고>황후가 딸 <분양汾陽>공주를 낳았더니,

<고환>의 사신이 와서 축하하고 공물을 바쳤다.  

 

동궁이 초운궁을 들렀고, 또 진양궁도 들렀다.
  

유연이 토욕혼과 사이가 나빠졌다.

 

토곡혼의 왕 <과려夸呂>는 청하(靑河)의 서쪽인 복사성(伏俟城)에 있었으며,

그들의 관제 복야와 상서 등은 한(漢)의 제도와 같았다.

 

 

 

 

 

 


신유{AD541} 대장(大藏)11년,

 

춘정월, 계유일 초하루,

상은 <홍紅>황후와 동궁을 데리고 우두전(牛頭殿)에서 조하를 받았다.  

 

토곡혼의 왕 <과려夸呂>가 그의 예부상서 <을불희乙弗熙>를 보내어 입조하고

한혈마 30필, 낙타 50필, 서왕모 벽해군{푸른 바다 치마} 및 불로주 등을

공물로 바쳤다.

 

미천(美川)의 후예임을 자칭하였으며,

혈족간의 서열을 살펴 서로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상은 황상의 동생인 <흥문興文>태자를 보내어 그 나라로 따라가 보게 하였다.
  

 

2월, <고환>의 사신이 와서 명주실과 약재 및 옥기 등을 바쳐왔다.  

 

<명농>이 <양梁> 사람인 화공과 악기를 갖게 되었으며,

<심맥>과는 새로이 화친하였다.

 

<심맥>은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삼아 병사{兵事}를 맡겼다.

 

<이사부>는 <지소>의 정부로 <태종>이다.
  

<연화>가 상의 딸 <경京>공주를 낳았다. <문장>의 딸이라 하기도 한다.

 

그 어미 <양의신>은 동궁의 딸 <백란白鸞>공주를 낳았다.
  

유연(柔然)이 찾아와 딸을 바치고 신하의 나라가 되겠다고 청하였다.

 

상은 길이 멀어서 구원하여 주지 못하였었다고 언급하였다.

 

유연(柔然)의 사신은 비밀지도를 내어놓고 손으로 사잇길을 짚어 보이며,

왕래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 길이 바로 북한로(北漢路)이다.


3월, 태복경 <부성芙星>을 유연(柔然)으로 보내서, 백마를 예물로 내고,

성상의 금닉분(金溺盆){금으로 만든 요강}을 유연(柔然)의 공주에게 하사하였다.
  

 

5월, <음진陰震>에게 명하여 5부의 효자․열녀․충노․의우 등 48인을 포상하였다.

 

작위를 더해주고 옷과 술 및 거마와 영예로운 일산을 주었다.
  

 

10월, 서하(西河)로 거둥하여 부로에게 술을 내려 농사에 부지런하였음을 위로하였다.

 

농사기술이 좋은 20인을 상을 내려 농사(農師)로 삼았다.
  

 

12월, <고환>의 아들 <고징>의 처 <풍익馮翊>이 아들 <효완孝琓>을 낳았다기에,

홍로경 <고은高銀>을 보내서 옷을 하사하고

<고高>황후가 사사로이 보내는 옷과 음식도 내려주었다.

 

 

 

 


임술{AD542} 대장(大藏)12년,

 

춘정월, 정묘일 초하루, <제운齊雲>공주가 죽었다.

 

인품이 어질었던 종실의 여자였고, 향년 85세였다.

 

조하를 폐하고 상청을 지켰다.

 

그녀의 아들 <운연雲連>은 <연連>씨의 주인{공경대부}이다.
  

<홍紅>황후가 동궁의 딸 <백치白雉>공주를 낳았다.  

 

홍로경{고은}이 업에서 돌아와 말하길

 

 “ 산동 땅은 큰 풍년이 들어 곡물 한 가마니의 값이 9전이었다.”고 하였다.

 

상이 <이주언爾朱彦>에게 명하여 산동의 곡물을 사들여서

배로 남구(南口)로 실어 나르게 하였다.
 

 

3월, 동궁이 <선병善屛>의 궁으로 갔다.

 

큰바람으로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렸다.  

 

<숙淑>공주가 동궁의 딸 <선仙>공주를 낳았다.
  

 

4월에 우박이 내리자, 상은 음식을 줄이고, 조언을 구하기도 하였고,

스스로 하늘에도 빌었다.  

 

남월(南越)사람 <조신趙信> 등 57인이 표류하여왔다가 귀화하였다.


5월, <흥문興文>태자가 <夸呂과려>의 딸 <을불乙弗>씨와 혼인하여 돌아왔다.

 

<청해靑海>공주였다.

 

토곡혼 국은 동서가 4천 리에 남북으로 2천 리였다.

 

염지(鹽池)와 기름진 벌판이 있으며, 목축이 성행하였다.

 

그들의 복사성(伏俟城)엔 한(漢)인들이 많았으며, 문물을 완전히 갖추고 있었고,

관작은 한(漢)의 제도 하나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유연(柔然)보다 나앗다.

 

그 곳의 왕과 공경 들은 모두 <모용외> 형의 후예들인데,

지금의 왕 <과려>는 미천제의 10세손이라 하였다.
  

<부성芙星>이 유연(柔然)의 왕자 <우뢰근宇雷近>과 더불어

<섭聂>공주를 배종하여 왔다.

 

상은 서해의 행궁에서 맞아들였고 합근하였다.

 

공주는 나이가 12살이었으며, 얼굴과 모습이 절세미인이었고 가무도 잘 하였다.

 

누런 낙타 천 두, 흰 코끼리 암수, 말 만 필, 꽃마차와 7백 대의 수레,

시신 3백 인이 딸려 왔다.

 

이들을 공주의 궁 밖에 머물게 하고, 새로이 저택을 지어주었다.

 

<우뢰근>이 상께 아뢰길

 

“<과려>는 속임수가 많으니 믿어서는 아니 됩니다.

청컨대 혼인을 물리시지요.”라 하였더니,

 

상이 이르길

 

“이미 혼인한 여인인데, 어찌 버릴 수 있겠나.

게다가 <을불>은 나의 처도 아니니, 염려하지 말게나."라 하였다.

 

이 이후로 상은 청해궁{<을불>씨의 궁}>에 가더라도

<연연궁{<섭>공주의 궁}>의 사람들이

<흥문>태자가 <과려>의 딸 <을불>씨와 혼인한 것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였다.

11월, <담위談緯>의 아들 <온薀>이 상의 수양아들이 되어

위(魏)로 가서 <후詡>의 딸 <수양橾陽>공주와 혼인하였는데, 나이는 열다섯이었다.

 

<고환>이 옥벽(玉壁)을 포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9일엔 큰 눈을 만나자 돌아왔다.  

 

<고환>이 <이원충李元忠>을 복야로 삼고자 하였는데,

 

<고징>이 아뢰길

 

“<이원충>은 술을 지나치게 마시니 복야로 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 하였고,

 

<이원충>의 아들은 자신의 아비에게 간하기를

 

“술을 삼가는 게 어떠신가요?”고 하였더니,

 

<이원충>은

 

“내가 보기엔 복야가 술만 못하다.

네가 만약 복야가 되고 싶다면, 너나 술을 마시지 말거라.”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주복야라고 불렀다.

 

 

 


계해{AD543} 대장(大藏)13년,

 

춘정월, 신유일 초하루, 대궁에서 조하를 받았는데,

봉황이 주목궁(朱木宮)으로 날아와서 울었다.

 

이에 상은 <섭聂>공주와 주목궁의 전각으로 들어갔으며, 봉황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좌시중 <계춘랑桂春娘>을 좌승상으로 삼았고,

그녀 지아비 <루사덕婁師德>은 우승상으로,

<계춘경桂春卿>은 좌시중으로, <주금령朱金鈴>은 우시중으로 삼았다.  

 

<고>황후가 <포덕布德>태자의 아들 <양洋>을 낳았다.

 

<고환>이 자신의 아들을 시켜서 찾아와

비단과 명주 만 필 및 황후 적복 일곱 상자를 바쳤다.

 

이에 상은 소라나전 공예품과 금 주발 일습을 <고환>의 처 <루婁>씨에게 보내주었다.
  

<우문태>의 사신이 와서, 토산물을 바치고,

자신의 처 <풍익>이 지난겨울에 아들 <각覺>을 낳았음을 고하였다.

 

이에 상은 <풍익>에게 옷을 하사하였다.

 

<풍익>은 오빠를 죽인 원수의 자식을 낳았으니, 그 심정은 참담하였을 것이다.

<고징>이 어사중위 <고중밀高仲宻>의 처 <이李>씨를 억지로 간음하자,

<고중밀>이 노하여 호뢰(虎牢)의 수장인 <해수흥奚壽興>을 죽이고

그 성을 들어 <우문태>에게 투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상이 <고>황후에게 이르길

 

“우리나라의 신하들은 자기의 처가 임금의 승은을 입게 되면 좋아하는데,

그대의 나라 신하들은 노여워하고 있소. 그것은 불충이오.”라 하였더니,

 

<고>후가 아뢰길

 

“당신은 만년천자이시지만, 제 아비는 당신 집안 달빛{여식}의 자식 놈인데

어찌 그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이에 상은 웃으며 이르길

 

“그대도 그 본바탕을 알고 있은 즉 감히 나를 업신여기지 마시게나.”라 하였더니,

 

후가 말하길

 

“ 저의 근본은 비록 그러하여도, 지금은 당신의 처이오니,

당신이 바로 제 몸이십니다.

어찌 그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겠습니까?

어서 저에게 절 해보세요.”라 하였다.

 

이리하여, 상은 후에게 절을 하였고,

후는 상을 품에 안고 즐거워하며 말하길

 

“당신은 제 지아비이십니다.”라 하였다.

 

상은 정사에 권태를 느끼더니,

날마다 <고>황후 및 <섭>공주 등과 희롱하며 망측하기가 이러하였고,

아무 때나 음사에 빠지더니, 끝내는 허리아래가 습하고 시들하기에 이르렀고,

탕약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2월, <선병>을 동궁의 보비로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선병>은 문장과 색사에 능하고 젊기도 하여,

상이 여러 번 당해내기가 어려워하더니, 마침내 동궁에게 내려 주게 되었던 것이다.  


3월, <고환>은 <우문태>와 망산에서 싸워서 크게 이겼다.

 

<진원강陳元康>은 <우문태>를 추격하여 장안으로 들어가길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고중밀>이 호뢰를 바친 것을 그대로 놔둘 수 없었음이었다.

 

이에 <우문태>가 군대를 이끌어 응징하여 백곡(栢谷)을 쳐서 빼앗고,

하교(河橋)의 남쪽 성을 포위하였다.

 

<고환>이 십만 군으로 하(河)의 북쪽에 다다르자,

<우문태>는 군대를 전수(瀍水)로 물리고,

상류에서 큰 배들에 불을 붙여서 하교를 불태우려 하였다.

 

<곡률금斛律金> 등이 작은 거룻배 100여척에 기다란 쇠사슬을 싣고서

큰 배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다가온 큰 배에 쇠못으로 못질하고

쇠사슬을 하변으로 당겼더니, 다리가 불태워짐을 막을 수 있었다.

 

이에 <고환>은 하를 건너서 망산에 자리 잡고 진을 쳐서 여러 날을 머물렀다.

 

<우문태>가 야밤에 망산을 기어올라 <고환>을 습격하였다.

 

척후 기병이 고하길

 

“<우문태> 스스로가 40 리에 거적을 깔고, 마른 밥을 먹으며 따라왔다.”고 하였다.

 

이에 <고환>이 말하길

 

“그 놈 자신도 목말라 죽을 지경일 것이다.

진영을 바로하고 그놈들을 기다리자.”라 하였다.

 

동이 틀 무렵에 양 군이 서로 조우하였다.

 

<팽락彭楽>이 수천 기를 이끌고 <우문태>군의 북쪽을 쳤더니,

탈진하여 무너져 내리기에, <우문태>의 군영으로 들이쳤다.

 

<고환>은 <팽락>이 배반한 줄로 의심하였는데, 홀연 서북쪽에 먼지가 일더니,

 

<팽락>의 사자가

 

“싸움에서 이겼으며, <우문태>의 대도독인 임조왕(臨洮王)<동東> 등의 벼슬아치들과

돕는 자를 48명이나 사로잡았다.”고 보고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승승하며 <우문태>를 공격하여 크게 이겼고,

목을 벤 것이 3만여 급이었다.

<고환>이 <팽락>에게 <우문태>를 추격하라 명하였다.

 

심히 궁색하여진 <우문태>가 말하길 

 

 “어리석은 사내자식이구나.

오늘 내가 없어지면, 내일 어찌 너는 살아있겠느냐? 그렇지 않겠느냐?

어찌하여 군영으로 돌아가서 금보를 서둘러 수거하지 않는 것이냐?”라 하였다.

 

<팽락>은 그의 말을 좇아서 <우문태>의 금대와 한 자루를 챙겨 돌아왔다.

 

<고환>은 <팽락>이 <우문태>를 놓친 것에 노하여 참살하려 하였다.

 

칼날을 들어 곧 내리치려는 이가 셋이었는데,

<팽락>은 애걸하여 5천기를 주시면 다시 가겠노라 하였다.

 

<고환>이 이르길

 

“그 놈을 놓아줄 땐 무슨 속셈이었고? 그런데 다시 잡겠다고?"라 하였다.

 

명주 3천 필을 <팽락>의 등짝에 꾹꾹 눌러서 하사하였다.

 

다음 날 다시 싸움이 붙었다.

 

<우문태>의 중군과 우군이 합세하여 <고환>을 쳐부수고,

그의 보졸들을 포로로 잡았다.

 

<고환>은 말을 잃게 되자 따르는 이의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났으며,

보병과 기병 일곱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추격병이 다가오자, 도독위인 <흥경興慶>은 허리춤에 화살 100개가 있어서

그것으로 항전하다, 화살이 떨어지자 죽었다.

 

<하발승>이 <고환>을 매우 급하게 추격하였다.

 

이에 < 유홍휘劉洪徽>가 <하발승>에게 화살을 쏘아서 두 발을 적중시켰고,

<단소段韶> 또한 활을 쏘아 <하발승>의 말을 맞혀 쓰러뜨렸다.

 

이에 <고환>은 잽싸게 피하여 도망하였고,

<하발승>은 궁시를 지니지 않았던 것을 한탄하며 말하길

 

“하늘의 뜻이로다.”라 하였다.

 

이때, <우문태>의 좌군인 <조귀趙貴> 등 다섯 장수가 밀리게 되고,

<고환>의 군대가 다시금 떨쳐 일어났으니,

<우문태>가 맞붙어 싸웠으나 또한 불리하였다.

 

해가 저물자 <우문태>는 도망하고, <고환>은 <우문태>를 쫓았다.

 

<독고獨孤>와 <우륵于勒> 등이 흩어진 군졸을 모아

후방에서 <고환>의 추격병을 쳤다.

 

추격병은 놀란 나머지

<우문태>가 온전하게 우군을 만나고 <우혜于惠>가 야밤에 물러가면,

<고환>의 군병이 그들을 추격할 것임에, 분위기가 스산하였다.

 

<우혜>가 말하길

 

“장안에서 죽으나, 이곳에서 싸우다 죽으나 차이가 있겠는가?!”라 하고는

 

군영을 차리고 먹기를 마치더니,

깃발을 세우고 뿔피리를 불어서 흩어진 군졸을 불러 모았으나, 돌아오는 것이 더뎠다.

 

뒤쫓는 이들도 복병이 있을까 의심스러워서 위협할 수도 없었다.

 

<우문태>는 이윽고 관문을 들어섰다.

 

사자가 해(奚)에 이르렀더니 무력으로 막아서기에,

<자회子繪>와 <진원강陳元康>의 사기를 북돋워주었더니,

하늘이 내린 때라 여기고 추격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여러 장수들 모두는, 벌판엔 푸른 풀도 없고, 사람들과 말들이 피곤하니,

멀리까지 추격하는 것은 옳지 않겠다고 하여, 그만두게 되었다.


돌궐은 유연(柔然)의 속국이었는데,

요사이 들어 점차 강성하여지더니 서쪽으로 뻗어 나아갔고

<형陘>이 해(奚)왕 <사출査出>과 경계를 다투었다.

 

<사출>이 토문(土門)을 위해 친히 정벌을 나갔고,

돌궐은 토문(土門)이 <호죽好竹>을 죽였음에 사신을 보내 급한 사정을 알렸다.

 

돌궐이 공격하기를 습(霫)부로 돌렸고,

우연은 돌궐을 구원하려 왔다가 토문에 의해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함에 상이 랑장 <하건夏乾>을 보내 경기 5천을 끌고 가서 돌궐을 격파하였다.

 

돌궐은 이 이후로 우리를 원망하게 되었다.
  

 

5월, <후경>이 호뢰를 깨고 <고중밀>의 처자식을 업으로 보냈다.

 

<고징>이 검은 속옷 바람에 이들을 마나보고 나서 말하길

 

“오늘이 어떻소? 치마를 찢어서 죽는 것도 또한 괜찮소만?”이라 하였더니,

 

이에 <이李>씨가 아양 떨며 말하길

 

“천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니, 침첩이 되길 원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고징>은 <이李>씨를 씻겨서 음욕을 채웠다.

 

<이李>씨는 음란한 여인으로 요염한 자태를 가졌기에,

후에 <고양高洋>의 처 <이李>씨와 결연하여 <연燕>의 화를 불러 키웠고,

<고환>의 혈족도 모조리 죽여 버렸으니, 또한 보복한 것이다. 이게 운명이런가?  

 

<숙淑>공주가 상의 아들 <임任>태자를 낳았다.
  

<고환>의 처가 누차 찾아와 입조하길 바라더니, <포덕布德>의 일로 찾아오게 되었다.

 

상이 <고>후와 함께 남구로 맞으러 나갔고,

<루>씨에게 황후가 입는 적복을 하사하였다.

 

상이 <루>씨에게 먼저 절하고 모후라 불렀더니,

<루>씨는 상을 부황이라 하면서 만세를 하였다.

 

군신들 모두는 <루>씨를 태후폐하라고 불렀다.

 

이때 그녀의 나이 마흔 넷인데도 통통하고 건장하며 아직 젊어보였다.

 

상과 희롱하는 것이 부부처럼 보였고,

밤이 되면 <고>황후와 나란히 누워서 승은을 입더니만, 울면서 <고>후에게 이르길

 

“내 부황은 천자 중의 천자이시다.

무얼 바라고 중원천자 때문에 고생하였었단 말이냐.

중원천자는 싹싹 빌며 애걸하여야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환>의 처 武明皇后 <루소군婁昭君(500~562)>은

고구려 대승상이었던 <루사덕婁師德(484-525)>의 친척이며

고후 <고진하高真賀(525-?)>는 <고환>과 <루소군>의 차녀이다.


  

 

11월, <문장>태자에게 명을 하여 우승상 <루사덕>과 <루>태후를 곁에서 모시며

진양(晋陽)으로 가서, <고환>을 찾아보게 하였더니, 예물을 바침이 심히 성대하였다.

 

<루사덕(484-525)>은 525년 대승상의 지위에 올랐으나 42살의 나이로 죽으니

안장대제가 태보 위원공으로 추봉하고

<루사홍>으로 하여금 그 직위를 세습토록 하였다.

안원대제기의 <루사덕>은 <루사홍>의 오기이다.

 

 

 

 

 


갑자{AD544} 대장(大藏)14년,

 

춘정월, 상이 <고>황후와 함께 포진궁의 우두전에서 조하를 받았다.  

 

<선병>공주가 <탕궁湯宮>태자의 아들을 탕궁(湯宮)에서 낳았고,

이름을 <양성陽成>이라 지었다.  

 

<옥릉>비가 딸 <황릉黃陵>을 낳았다.  

 

<루사덕> 등이 북녘의 의원 <설준薛俊> 등 다섯을 데리고 찾아왔다.

 

상이 <루사덕>에게 이르길

 

“별다른 얘기 들은 것은 없었소?”라 하였더니,

 

<루사덕>이 아뢰길

 

“<우문태>가 근자에 육조지치(六條之治)를 행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고,  

둘은 도탑도록 가르치는 것이고,

셋은 땅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며,

넷은 현자를 발탁하는 것이고,

다섯은 구휼함과 옥사를 올바르게 함이고,

그 여섯은 균등한 조세와 부역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옛날의 제도였으며,

해(奚)와 습(霫)으로 흘러들어 가더니만 <우문태>의 땅에 이르렀고,

부국강병의 방법으로 긴요하게 쓰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쓰고 있는 것을 들여다보면,

이 제도를 도입하기가 어렵지 않으면 시행하기가 어렵고,

시행하기가 어렵지 않으면 꾸준하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지금 이후로 그 령을 지키며

다시금 육조지치를 시행하셨으면 하고 청하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은 “좋겠소.”라 답하였다. 
  

 

3월, 갑신일 초하루에 유연의 사신 <오고식五皐式>이

해(奚)왕의 사신인 <한질寒疾> 및 실위(室韋)의 사신인 <언우彦雨>등을

데리고 찾아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모두에게 빈관에 머물게 하여 기녀와 찬을 내려주었다.



7월, 계미일 초하루, 상이 <덕양>후를 데리고 수림의 온궁으로 들어가더니,

황태자인 <평성平成>에게는 감국 하라 명을 내리고는,

허리나 아랫배가 아픈 병을 치료하였다.
  

<우문태>가 <소도蘇綽>의 가감률(加减律)을 도입하고 새로운 량형제도를 만들었다.

 

<고징>은 <최섬崔暹>을 등용하고, 권세가와 귀족들을 탄압하더니,

<사마자여司馬子如>를 옥으로 잡아넣었다.

 

그러자, <고환>이 그를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가장 높은 자리를 주어서 관리들이 끼치는 폐해를 살피라 하고는,

술 100 병및 양 5백 마리와 쌀 5백 석을 하사하였다.

 

어찌 써버릴지가 어려워 자신의 아비에게 말하길

 

“어미를 치붙었던 어린 자식을 구해주었다가 이리 되었습니다.

모욕을 당한 것이 <최섬>의 간교함 때문이 아니라면

그것은 <고징>의 악행일 것이고,  <고징>의 악행이 아니었다면

<고환>의 흉계 때문일 것입니다.”라 하였다.

 

<사마자여>는 입을 손으로 가리어서 말하길

 

“그대의 아버지가 다른 이들의 말을 들어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니,

그대가 당당하게 자립하면 조그만 아들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을 것이오.”라 하였다.

 

이로 인하여 <고환>은 점차로 호걸들을 잃게 되었고,

<사마자여>와 <후경> 등도 모두 반역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고환>은 망산에서 당한 것이 분하여 <하발승>의 여러 자식을 모조리 죽였다.

 

동쪽에 있었던 <하발승>은 이 소식을 듣고 분하고 한이 넘쳐서 병들어 죽었고,

그러자 <고환>은 쾌재를 불렀다.

 

<우문태>는 늘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길,

모든 장수가 적을 대하게 되면 얼굴색이 동요하지만,

유독 <하발승>만은 싸움에 임하면서도 평상시와 같았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자식들을 애통해 하는 것이 이와 같았었다.     


10월, <창滄>태자가 업으로 갔다.

 

이때에 <고환>은 분주(汾州) 산간 속의 계호(稽胡)를 공격하고

그곳의 100여 가를 포로로 잡아다가 여러 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창>태자 또한 그 노비를 받았기에 업에 있는 저택으로 보냈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 명을 내려서 그들을 풀어주게 하였지만,

그 노비들은 떠나지 않았다.
  

<심맥>이 흥륜사를 짓고 외국의 승려를 맞이하였더니,

나라 안의 승려 중 간교한 이들은 몰래 상통하더니 국경을 넘어 도망하였다.

 

그리하여 그리하지 못하도록 령을 반포하였다.  

 

상이 <사응謝應>의 집으로 가서 <방魴>공주의 주검에 곡하였다.

 

<평천平川>공주를 <사응>에게 처로 삼아주었다.

 

 

 


을축{AD545} 대장(大藏)15년,

 

춘정월, 경진일 초하루,

상이 동궁에게 명하여 <덕양>후와 함께 우두전에서 조하를 받게 하였다.  

 

<고징>의 사신이 와서 <루>씨가 아프다고 하였더니, <고>후가 돌아가고파 하였다.

 

이에 상이 동궁에게 명하여 <고>후를 더리고 진양으로 가보라 하였는데,

월해(月海)에 이르자

<이주문爾朱文>이 세력이 불어나더니 반란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상이 <고>후에게 명하여 동궁의 비가 되라 하고, 소후라 칭하였다.

 

<양의신>을 대승상, <문장>과 <연화>를 각각 좌․우시중으로 삼았다.
  

 

2월, <우문태>가 유연과 토곡혼을 잃더니, 전적으로 돌궐에 매달렸다. 돌궐의 주인인 <토문랑土門狼>의 아들 <이질伊質>은 <니사도泥師都>의 후예인데, 돌궐산에서 여러 대를 거쳐 살면서 유연의 용병으로 엎드려 살면서 부를 모으고 번창하더니, 인접한 호족들을 집어삼키거나 아울렀다가, 지금 <우문태>에게 탈취 당한 것이다.


3월, 을묘일 초하루, 상은 병이 두루 깊어지더니, 경진일에 죽었다.
동궁이 손가락의 피를 내어 입에 흘려 넣었더니 회생하였다. <덕양>후에게 옥새와 어보를 전하게 하고, 색을 밝히지 말고 선정을 베풀고 장례는 검소하게 하게 이르라고 명하고는 죽었다. 동궁이 우두전에서 즉위하고 백단문(白檀門)의 위에 올라 백관들의 산호를 받았다. 월황(月煌)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춘추 67세였다.

 

출처: https://elfqkr.tistory.com/entry/안원대제기安原大帝紀?category=699494 [바람따라구름따라:티스토리]

 

영락대제기

전하여오길 제의 휘는 이다. 모친은 씨로서 상태후로 불렸으며, 천원공(天原公) 의 딸이다. 꿈속에서 신록과 교호하여 제를 낳았다. 모습은 그윽하면서도 크고 듬직하였으며, 큰 무인의 기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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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여오길 제의 휘는 <담덕談德>이다.

 

모친은 <연淵>씨로서 <천강天罡>상태후로 불렸으며,

천원공(天原公) <연림淵琳>의 딸이다.

 

꿈속에서 신록과 교호하여 제를 낳았다.

 

모습은 그윽하면서도 크고 듬직하였으며, 큰 무인의 기풍을 가졌었다.

 

<수림>이 나라를 물려준다고 명하였기에,

장자이었던 <강岡>은 양보하고 선종(仙宗)이 되었다.

 

어릴 적부터 군대의 일을 좋아하여 병서를 읽었으며,

정사에 간예하였더니 <연도淵鞱>가 범접하지 못하였다.




영락대제 원년{AD391}신묘,

 

6월 대행을 고국양에 장사하였다.

 

순장을 금하고 진귀한 보물도 부장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단지 연호(烟戶){守墓人}를 두고 비석{碑}만을 세워서 공덕을 기록하라 하였다.

 

<천강天罡>을 황태후로, <토산吐山>을 황후로 세우고,

<적積>태자를 태보로, <연억淵億>을 좌보로, <붕련朋連>을 우보로 삼았고,

<면형免衡>은 중외대부로 삼았는데, <연림淵琳>의 서자였으며,

그의 어미는 <면가免柯>의 딸로서, <면형免衡>을 <면가免柯>의 손자로 삼았다.

 

상이 동궁에 있을 때 여러 번 의롭게 직간하였더니,

이때에 이르러 발탁되어 <연도淵鞱>를 대신하게 되었다. 


7월, <내밀奈宻>이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며 부의하고는

두 딸을 바치면서 시첩으로 삼아주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상이 군신들에게 이르길

 

“지금 4해(四海)의 모든 나라들이 연호(年號)를 세우지 않은 곳이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없는 지가 오래되었소.

3대 시절에 건원하던 예를 살펴서 응당 새 연호를 세워야 할 것이오.”라 일렀더니,

 

이 명을 따라서 <춘春>태자가 호를 지어 올리길,

영락(永楽)을 연호로, 평안(平安)을 휘호로 하자고 하였다.

 

상이 그리 하자고 하였다. 

 

상이 태후에게 아뢰길

 

“백제(伯帝){先帝 故國襄大帝의 형 小獸林大帝}의 딸 <평양平陽>은

짐을 섬김에 깔끔하고 정숙하였었으며, 지금 다시 딸을 낳았고,

여러 번 자신의 동생 <강岡>에게 일러서 짐에게 사위를 양보하게 하였습니다.

그 공이 적지 않으니, 역시 후로 삼으려합니다. 어떠신지요?”라 하니,

 

<천강>이 아뢰길

 

“천하의 일은 오로지 폐하께서 주관하시는 것인데,

어찌 노첩이 알겠습니까?”라 하였다.

 

상은 이에 <면형免衡>에게 명하여, <평양平陽>을 새 궁전으로 맞아들이도록 하여,

황후로 책봉하고 <토산吐山>의 경우와 하나같게 하였다.

 

<평양平陽>은 <수림제>의 원비인 <연燕>씨의 소생인데,

젊어서는 선약{仙藥} 일을 즐겨 하였고, 요조{窈窕}의 덕이 있었으며,

행실은 맑았고 정조를 지켜서,

나이가 2기{24살}가 넘도록 다른 이를 곁눈질 하지 않아 왔다.

 

상이 잠저시절에 <평양平陽>을 궁인으로 삼았더니,

승은을 입어 딸{가련}을 낳았었고, 이제 다시 딸을 낳고는 황후로 높아진 것이었다.

 

나이는 서른 셋 이었다.

 

후는 성덕이 있어서, 상은 큰 일이 있을 때 마다 꼭 의논하고 행하였다.  


 9월, 상이 태후와 두 후와 함께 졸본의 시조 사당을 찾아 사위하였음을 고하고,

종척들에게 연회를 베풀었으며, 죄인들을 풀어주고,

사궁(四窮)들을 구휼하고 백성들에겐 재화를 나누어주었으며,

효행한 이들을 포상하였다.

 

 

10월에  서도로 돌아와서도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12월, <수림제>의 원비인 <연燕>씨를 <연燕>태후로 하고,

연공 및 궁실·거마·노비를 내려주어 태상후<해觧>씨와 하나같게 하였다.

 

<평양平陽>의 동생 <강岡>을 선왕(仙王)으로 삼고, 도장을 3일간 열어주었다. 

 

<연도淵鞱>에게는 책성(柵城)을 지키라 명하였다.

 

이때  <>태상후 69세, <燕>태후 52세, <淵琳> 63세, <천강>태후 37새,

영락대제 <담덕> 18세, <천을> 21세, <천성>{두양} 25세?, <평양>후 33세.

<토산>후 19세, <가연> 16세, <용덕> 15세, <붕련> 41세, <사구> 23세, <春> 32세,

 

<내물> 42세, <실성> 33세, <눌지> 3세,

 

<근구수>{응신} 72세?, <침류> 42세?, <진사> 40세?, <오호사자키>{인덕} 37세?,

<아신> 20세, <전지> 1세이다.

 

 

 

 


영락대제 2년{AD392}임진,

 

정월, <서구胥狗>를 보내 <내밀奈宻>의 딸을 맞이하게 하여,

<운모雲帽>와 <하모霞帽>를 좌·우소비로 삼고,

<보금宝金>은 비 들이 머무는 궁전의 대부로 삼았다.

 

<보금>은 <내밀>의 조카이었고, 키도 크고 유식하였다.

 

<보금>은 <내물<의 사촌 동생이다.

말흔(술례) - 말구(휴례) - 내물(350-402)

말흔(유모) - 대서지(예생) - 실성(359-417)

 

홀로 된 공주 <천성天星>을 처로 주었다.

<천성天星>은 태상후 <해觧>씨의 소생이었다. 

 

 

3월, 토후(吐后({토산吐山}가 아들 <경鲸>을 낳고,

태후{천강}는 딸 <천룡天龍>을 낳았다.

 

나라의 토지신과 조종을 모시는 사당을 세웠다. 

 

 

5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상이 태후와 함께 온탕에 가서 선제를 기리는 도장을 7일간 열었다.

 

두 후{평양과 토산)도 상을 따라갔었다. 

 

 

7월, 상이 4만병을 이끌고 친히 <진사辰斯>를 정벌하여,

석현(石峴)에서 <진가모>를 참하고,

네 길로 나누어서 그들의 성과 성채 12개를 빼앗았다.

 

 

9월 군대를 옮겨서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3천 5백을 사로잡았고,

유민과 잡혀갔던 이들 만여 명도 데리고 돌아왔다.

 

백성들 모두가 머리에 수유가지를 꽂고 축하하였다.

 

이것이 9월 9일의 풍속으로 되었다. 

 

 

10월엔 또다시 수군과 육군을 이끌고 일곱 길로 나누어서

관미성(関彌城)을 주야 20일을 쉼 없이 공격하여 빼앗았다.

 

그 성은 사면이 가파르고 험하며 해・수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하여 <진사辰斯>는 이 성은 함락되지 않으리라 여겨,

그의 처 <가리佳利>와 함께 구원(狗原)에서 사냥하면서

열흘 여를 우리가 물러나길 기다렸다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놀라자빠져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가리佳利>가 <침류>의 아들 <신莘>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영락대제 3년{AD393}계사,

 

5월, 상이 태후와 함께 온탕의 도장엘 갔다.

 

 

새고기가 올라온 것을 보고는 무슨 새인가 물었더니,

 

 

포곡(布穀)이라 답하기에, 물리라고 하였다.

 

 

<평양平陽>이

 

“태후께서 좋아하신다.”고 하였더니,

 

상은

 

“태후께만 드리시오.”라 하였다.

 

이에 태후가

 

“폐하께서 아니 드시는데 어찌 감히 첩이 먹겠습니까?”라 하였다.

 

 

이때부터 나라사람들은 포곡(布穀)>을 먹지 않았다. 

 

 

 

 

7월 거란을 쳐서 천서(川西)를 빼앗았다. 

 

상은 두 후(后)에게 명하여, 친히 나라 안의 건장한 여인들을 가려 뽑아 병사로 삼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연습시키게 하였다.

 

 

 

 

<평양平陽>후의 꿈에 부처가 오시어 동자를 내려 주며 이르길,

 

 

“이 아이가 무량수(無量壽)이니라.”고 하였다.

 

 

상이 이 말을 듣고 <평양平陽>과 도성 세 곳에 절을 짓게 명하였으며,

불도를 널리 퍼지게 하였다.

 

 

이것이 九寺의 유래이다. 

 

 

 

 

8월, <아신阿莘>이 우리가 거란을 정벌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우리의 나라 안이 비었을 것으로 여기고,

 

<진무真武>로 하여금 석현(石峴)과 관미(関彌)성을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여름부터 왜가 신라를 누차 침략하였다.

 

 

 

금성(金城)을 닷새 동안 포위하였다가 물러나니,

 

 

추격하여 독산(獨山)에서 협공하여 모조리 죽였다.

 

 

 

이를 독산참왜(獨山斬倭)라 한다. 

 

 

탐라(耽羅)主 <월손月孫>이 찾아와서 항복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내물왕 38년(393년)

여름 5월,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으니,

모든 장병들이 나아가 싸우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지금 적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깊이 들어 와서 죽음을 각오하는 마당에 있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성문을 닫았다. 적은 성과없이 물러갔다.

왕이 먼저 용감한 기병 2백 명을 보내 그들의 퇴로를 막았다.

그리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협공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죽은 적병과 포로로 잡힌 적병이 아주 많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왕 17년 수사(水蛇:계사393)

5월, 야인(野人)이 쳐들어오자 그 공효(功)없이 물러감을 기다렸다가 추격하여

독산(獨山)에서 크게 쳐부쉈다.

7월, 부여(扶余)가 수곡(水谷)에서 대패하였다.

<남당유고 신라사초>

 

아신왕 2년(393년)

봄 정월, 왕이 동명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또한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

진무를 좌장으로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진무는 왕의 외삼촌으로서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많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가을 8월, 왕이 진무에게

"관미성은 우리 나라 북쪽 변경의 요새이다.

그 땅이 지금은 고구려의 소유로 되어 있다.

이것을 과인은 애통해 하니, 그대는 응당 이 점에 마음을 기울여,

이 땅을 빼앗긴 치욕을 갚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왕은 마침내 1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계획하였다.

진무는 병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석현 등의 다섯 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먼저 관미성을 포위했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둘러 싸고 굳게 방어하였다.

진무는 군량의 수송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영락대제 4년{AD394}갑오,

 

2월, <평양平陽>이 아들 <거련巨連>을 낳았다.

 

생김새가 심히 듬직하고, 목소리도 웅장하였으며,

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앉을 수 있었다.

 

상이 말하길,

 

“이 애가 태조를 닮았구나.”라 하고는,

 

 

후에게 이르길

 

 

“그대가 선(仙)하기를 좋아하더니만 이렇게 훌륭한 아이를 낳았소.

선{仙}이 불{佛}보다 못한 것이 아닌가 보오.”라 하였다.

 

선원(仙院)들을 수리하라고 명하였다. 

 

 

7월, <진무真武>가 또 쳐들어왔다.

 

 

상이 기병 5천으로 수곡성(水谷城) 아래에서 기다렸다가 맞싸워

거의 모두를 참살하였다.

 

남은 무리는 골짜기에 숨었다가 야밤에 달아났다. 

 

 

8월, 남쪽 변방의 일곱 성을 수리하게 하였다.

 

백성들의 노고가 심하였기에, 잠시 절과 선원을 짓는 공역을 쉬게 하였다.

 

 

 

 

<연도淵鞱>를 우보로 삼았다.

 

 

 

 


영락대제 5년{AD395}을미,

 

2월, 태후가 온탕에서 아들 <담총談聦>을 낳았다. 

 

 

상은 비리(卑離)가 점차 왕의 가르침을 어기기에,

 

 

친히 파산(叵山)·부산(冨山)·부산(負山)을 정벌하여 염수(鹽水)까지 이르면서,

그들의 부락 700여 곳을 깨뜨렸고, 소·말·양·돼지를 노획한 것이 만으로 셈이 되었다.

 

 

두 후 역시 말을 타고 상을 따랐다.

 

 

상은 <토吐>후는 임신 중이라 말렸는데도 듣지 않았다.

 

 

돌아와서 딸을 낳았더니, 이름을 <삼산三山>이라 하였다. 

 

 

8월, <진무真武>가 또 빈틈을 노려 쳐들어오니,

상이 기병 7천을 몰아 패수(浿水) 위쪽에서 8천여 급을 노획하였다. 

 

 

 

말갈이 신라의 실직(悉直)을 침입하였다. 

 

 

 

11월, <아신阿莘>은 패수(浿水)>에서의 수치를 씻으려고

 

 

7천병으로 한수(漢水)를 건너 청목령(靑木岺)에 이르렀다가,

큰 눈을 만나 많은 이가 얼어 죽으니,

 

 

 

군사를 돌려 한성(漢城)으로 돌아가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영락대제 6년{AD396}병신,

 

 

3월, 상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대방(帶方)과 백제를 토벌하여, 10여성을 함락시키고,

그 동생을 인질로 잡아 돌아왔다. 

 

 

 

 

5월, 왜가 사신을 보내 토산물과 미녀 5명을 바치고서 선록(仙籙)을 달라고 하였다. 

 

 

<운모雲帽>가 아들 <각언角彦>을 낳았다. 

 

 

 

4월, <모용수>가 죽고, 아들 <모용보>가 섰다.

 

 

 

 

이때 왜는 응신왕{근구수}이 75세의 나이로 394년에 죽고

근구수의 아들 인덕왕{오호사자키(大雀)}397년에 즉위하니

공위(空位)의 기간이었다.

 



 

 

 


영락대제 7년{AD397}정유,

 

 

정월, 두눌원(杜訥原)에서 크게 사열하고, 날쌘 말과 용맹한 이를 귀하게 쳤더니,

귀하지 않는 자가 지나치게 많았다. 

 

 

<평양平[陽>이 아들 <두련斗連>을 낳았다. 

 

 

신라는 가뭄이 들고 황충이 일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아신阿莘>은 <전지腆支>를 왜에 볼모로 보냈고,

 

왜는 딸을 <전지腆支>에게 처로 주었다. 

 

<아신>은 태자 <전지>를 작은 할아버지인 <오호사자키>{인덕}의 즉위식에

축하 사절로 보낸 것이며, 이때 <전지>는 7살이었다. 

<오호사자키>는 딸 <팔수>를 <전지>와 짝 지워 준다.

 

 

7월, 상이 태후와 함께 온탕에 갔다.

 

 

태상황 천원공(天原公) <연림淵淋>이 산궁에서 죽으니, 춘추 69세였다.

 

상황의 예로써 장사하였다. 

 

 

 

 

<해觧>태후가 북도(北都)의 온궁(溫宮)에서 살고자 청하니, 허락하였다.

 

 

 

 


영락대제 8년{AD398}무술,

 

3월, 태후가 딸 <희喜>를 낳았다.

 

 

<아신阿莘>이 <사두沙豆>를 좌장군으로 삼고, 쌍현성(﨎峴城)을 쌓았다. 

 

 

군사(軍師)를 북맥(北貃)으로 보내 막사국(莫斯國)과 가태국(加太國)을 초략하였더니,

남녀 300인이 소와 양으로 세공을 바치기로 약속하였다. 

 

 

 

8월, <아신>이 들어와 노략하며 한산(漢山)의 북책에 이르자,

별이 군영 안으로 떨어지며 벽력같은 소리를 내어,

 

이르길,

 

“네가 조상의 나라를 치면 반드시 망할 것이다.”라 하였다.

 

 

 

<아신>은 크게 두려운 나머지 돌아가서 서대(西臺)에서 활쏘기를 연습하면서,

 

 

 

말하길

 

“함부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구나.

애오라지 지키기나 해야겠다.”라 하였다.

 

 

 

상은 이를 듣고 그를 비웃으며, 말하길

 

“안으로는 악행을 쌓으면서,

밖으로 의를 내거는 놈은 바로 이렇게 되는 것이다.”라 하였다. 

 

 

 

9월 <춘>태자가 고쳐 찬수한 유기(留記) 70권을 바치니,

 

상이 황금 100근을 하사하였다.

 

<춘>태자는 효성으로 <해>태후를 섬기면서,

 

 

자신의 비인 <천을天乙>과 함께 유기(留記)와 대경(代鏡)을 고쳐

 

파묻혀서 10여년을 보내며 개수한 것이었다.

 

 

나라 안의 악행과 악습을 없애고

조종 열위 분들께서 하신 여러 훌륭하신 말씀과 이루신 업적을 드높이는 일들은

 

 

가히 정경(政鏡)으로 삼을 만한 것이었다. 이때 나이 39살이었다.

 

 

위(魏)의 <탁발규>가 12월에 칭제하였으며,

 

원조 (遠祖)<탁발모>이하 27인을 모두 황제로 하였다.

 

 

6세조<탁발력>은 신원(神元)황제, 5세<탁발사>는 문(文)황제,

 

 

4세<탁발불정>은 사(思)황제, 5세<탁발록관>은 ■황제,

4세<탁발울률>은 ■■황제, 3세<탁발예괴>는 열(烈)황제,

 

 

 

<탁발십익건>은 소성(昭成)황제, 아비<탁발식>은 헌명(獻明)황제로 하였다.

 

 

 

 


영락대제 9년{AD399}기해,

 

5월, <토>후가 아들 <해蟹>를 낳았다. 

 

<운모雲帽>가 아들 <엽언葉彦>을 낳았다.

 

 

상이 <하모霞帽>에게 이르길

 

“당신 언니는 벌써 아들 둘을 낳았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낳지를 못하는가?”라 하니,

 

 

 

<하모霞帽>가 아뢰길

 

“소첩이 총애를 많이 받고도 아직 낳지 못하는 것은

황령께서 살펴주시지 않으심입니다.

아무리 빌어보아도 조상신을 섬김만 같지 못할 것 같습니다.

<동명>신묘를 알현하였으면 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은 <하모霞帽>를 데리고 용산에 가서 아들을 빌었으며,

 

평양(平壤)으로 돌아와서는 <옥모玉帽>상(像)을 배알하였다.

 

 

 

 

이때 왜가 신라의 변방을 침범하였고,

 

<하모霞帽>는 병사를 내어 구해주시길 청하였다.

 

상이 <서구霞帽>에게 명하여 5천 기병을 내었더니,

 

<내밀奈宻>이 사신을 보내 왜가 이미 물러갔음을 고하고,

 

<운모雲帽>의 태자 생산을 경하하였다.

 

 

 

 

이에 상은 얼굴에 기쁨을 내비치며, 이르길

 

“본시 같은 뿌리로 태어났으며,

또다시 원앙의 인연을 맺은 이래로 이렇게 많은 아들을 낳았으니,

함께 남북의 땅을 다스리자.”라 하였다.

 

사신은 머리를 조아려 감사하고 떠나갔다.

 

상은 이 두 비를 거둔 이래 은총을 더하여 주었고 <내밀>을 한 집안으로 여기어,

상을 내린 것이 매우 많았다.

 

 

후에 사람들이 임금께서 남기신 말씀을 글로 쓰고 아름답게 꾸며서

악부사(楽府詞)를 지었다.

 

<보금寶金>에 관한 일 또한 그 노래에 실려 있다. 

 

 

 

 

 

7월, 신라에 황충이 일었다는 소식을 듣고

백제에게 명하여 신라에 곡식을 날라다 주라고 하였다.

 

 

 

<아신>은 밖으로는 따르는 척하고 안으로는 어기면서

왜와 교혼하여 근심거리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왜 또한 천명을 알아 감히 위엄을 범하지는 못하고 성심으로 공물을 바쳤다.

 

이에 <아신>은 스스로 백성들을 괴롭히고 병마를 대거 징발하게 되었더니,

 

 

많은 백성들이 식량을 가지고 신라로 귀부하였다.

 

 

 

상이 신라 백성들을 구휼하고자 국경으로 곡식을 운반하게 하였더니,

 

 

 

<내밀>이 고하여 아뢰길

 

“성상께서 지극히 걱정하여 주신 덕택에 하루 밤의 뇌우로 황충이 씻겨나갔고

곡식도 살아났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길

 

“그대의 나라도 마땅히 <동명>신을 섬겨야 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운모雲帽>를 <용덕勇德>의 처로 주었다.

 

이때 신라는 색공으로 고구려와 연합하고, 백제는 왜와 혈연으로 연합하였디.

 

 

 

 


영락대제 10년{AD400}경자,

 

 

2월, <모용성慕容盛>이 3만병으로 신성(新城)에 침입하였다.

 

 

 

선봉인 <모용희慕容熙>는 남소(南蘇)로 돌아서 들어왔다.

 

 

 

이에 상은 정예기병 8천으로 곡림(鵠林)에서 <모용희>를 쳐서 대파하였다.

 

 

이때 <담덕> 27세, <모용성> 28세, <모용희> 16세이다.

 

 

 

<붕련朋連>과 <용신龍臣>은 신성에서 큰 싸움을 벌였고,

 

 

하(河)의 위쪽까지 추격하여 매우 많은 이들을 목 베고 붙잡았다.

 

 

 

상은 거듭 장무(章武)의 서쪽을 쳐서 700여 리의 땅을 넓혔으며,

5천여 호를 옮겨 놓고 돌아왔다.

 

 

 

왜가 신라에 침입했다는 소식에,

 

<서구胥狗>와 <해성觧猩> 등을 보내 5만병을 끌고 가서 구원하여

 

왜를 물러나게 하였다.

 

 

임나(任那)·안라(安羅)·가락(加洛) 등 모두가 사신을 보내 입조하였다.

 

남방이 모두 평정되었다. 

 

 

6월, 초하루 경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상은, 태후를 모시고 온탕에 가서,

농사짓는 노인 100명과 효자와 순손 37명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상이 태후께

 

“해가 빛을 잃어 비록 사람들에게 재앙이 되더라도,

임금이 마땅히 선행하며 잘못을 뉘우치면 하늘 역시 마음을 돌릴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아직 근력이 좋으시니 백성들에게 잔을 돌려서 위로 좀 해주시지요.”

라 부탁하였고,

 

태후가

 

 

“설사 폐하의 하교가 없으셨더라도,

첩이 어찌 삼종(三從)의 도리를 모르겠소.”라 답하고,

 

소매를 걷고 술잔을 돌렸더니, 백성들 모두가 감동하여 눈물을 지었다. 

 

 

 

 

8월, 태후를 모시고 서천(西川)을 순시하며,

백성들과 여러 선원{仙院}들에 하교하고, 뛰어난 인재들에게 상을 내렸다.

 

 

 

5부에 명하여 각기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게 하였고,

 

 

 

조서로 이르길

 

“나라에 인재가 있음은 집에 용마루 대들보가 있음과 같은 것이오.

사람들이 어미를 귀히 여기고 나라가 인재를 귀히 여기면,

응당 나라엔 항상 인재가 모자라지 않을 것이고,

어미들은 항상 즐거워 할 것이오.”라 하였다. 

 

 

 

 

 

<평양平昜>이 <초련楚連>을 낳았다.

 

 

 

 

 

 


영락대제 11년{AD401}신축,

 

3월, 태후가 딸 <명明>을 낳았다. 

 

 

<내밀>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고하길

 

“신은 금년 이래 노병이 점차 깊어지고 있습니다.

조카 <보금>이 폐하의 슬하에서 오랫동안 있으면서,

공주와 혼인하여 손자{족손}를 낳았다 들었으나,

한 번도 보지를 못하여 눈물이 흐르는 것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은 늙어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저의 소생 자식들은 모두 어립니다.

응당 <보금>이 공주와 짝을 이루어 임금의 자리에 앉게 되면

당연히 폐하의 자손이 영원토록 남방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보금>을 공주와 함께 보내주시길 엎드려 원하옵니다.

신은 공주와 손자{족손}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고 죽는다면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상은 이를 듣고 측은히 여기어, 말하길

 

“그러하겠다. 짐이 밝게 살피지 못하였노라.”라고 하였다.

 

 

 

상은 곧 공주를 불러 묻기를

 

“누님은 <보금>과 함께 이미 아들 셋을 낳았소.

부부라면 마땅히 그 나라로 따라 가야 할 것이오”라 하였더니,

 

 

 

<천성>이 아뢰길

 

“첩 또한 오랫동안 부왕을 뵙고 싶었습니다.

저희들을 보내 주시길 청하옵니다.”라 하였다.

 

상은 관리에게 명하여, 수레 천 량을 잘 꾸며서 딸려 보내게 하고는,

 

 

 

이르길

 

“사사로이는 나의 누님이나, 도리를 따지면 부녀가 되오.

그대의 시아비를 잘 섬기고, 짐의 얼굴이 욕되게 하지 마시오.”라 하였더니,

 

<천성>이 네 번을 절하고 떠나갔다.

 

귀하게 치장한 아름다운 마차의 행렬이 100 리를 이었더니,

 

 

신라 사람들은 이들을 맞이하길 하늘같이 하였다.

 

<내밀>은 공주를 매우 어여삐 여기더니 병이 나아졌다.

 

이에 공주가 기뻐하여,

 

 

 

아뢰길

 

“첩이 좀 더 일찍 왔었더라면 부황의 병이 일찍 나으셨을 걸 그랬습니다.

늦게 온 것이 한이 됩니다.”라 하였더니,

 

<내밀> 역시 그렇게 여기어 공주가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상은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여,

 

하사한 의약·진미·관(冠) 모두가 줄을 이었으니, <옥모>시절의 배가 되었다.

 

 

 

 

이 해에 신라는 가물었었으나,

공주가 국경으로 들어서자 큰 비가 내리고 곡식들이 살아났었다.

 

 

 

신라의 세간에서는 이를 낭주우(娘主雨)라 불렀다. 

 

 

이 해 8월에 <모용성>이 적도에게 피살되었다. 스물아홉이었다.

 

 

 

 

혹자는 <정丁>태후가 자신이 아끼는 <모용희慕容煕>를 세운 것이라고도 한다.

 

 

 

 


 

영락대제 12년{AD402}임인,

 

2월, <춘春>태자를 금성(金城)으로 보내 <내밀奈宻>을 조상하고,

<보금宝金>을 신라의 주인으로 <천성天星>을 <신라>의 비로 책봉하였다.

 

 

<천성天星>의 장녀 <효진曉辰>은 <내밀奈宻>의 친아들인 <눌지訥祇>의 처로 삼았다.

나이는 11살이었다. 

 

 

 

4월, <붕련>·<용신>·<서구> 등을 보내서 거란을 정벌하여

 

그 주인 <오귀烏貴>를 사로잡고, 구려성(句麗城)·대극성(大棘城) 등을 빼앗았다.

 

 

 

내친김에 <모용귀慕容皈>를 숙거(宿車)에서 치고, 그 선봉을 참하였다.

 

 

<단개귀段開皈>는 성을 버리고 서쪽으로 도망하였고,

 

<모용희慕容熙>도 도망하여 요수(遼隧)를 지켰다.

 

 

 

이리하여 요동이 모두 평정되었다.

 

 

상이 <해>태후를 모시고 란궁에서 3일간 큰 연회를 열었다.

 

 

 

<모용위慕容暐>의 딸과 <모용준慕容雋>의 딸 등에게 술을 따르게 하였더니,

 

<해>태후가, <모용황>에게 당하던 시절의 얘기를 하더니만,

 

 

 

상에게 아뢰길

 

“노첩이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폐하의 영웅하심을 목도하였습니다.

이제 죽는다 한들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지난날, <모용황>이는 교만・방자하고 호색하여 요절하였고,

 

 

<모용준>이와 <모용위>도 제 아비를 닮더니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의당 너그럽고 인자하시며 즐겨 덕을 베푸셔야 할 것이며,

 

 

<모慕>씨 여자들에게도 보복하지 마시고 아울러서

의당 색사에도 신중하셔야 할 것이며,

용맹함도 절제하시어 무력에만 빠지지도 마시고 글도 닦으시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세요.”라 하니,

 

 

 

상이 이르길

 

 

“나라의 땅을 넓게 여는 것이 동명(東明)의 뜻이었음에도

 

대무(大武)・태조(太祖)・미천(美川)께서도 이를 미처 이루지 못하셨었습니다.

허나, 짐이 이미 그 뜻대로 닦아 놓았으니,

너무 지나친 염려는 없으시길 바랍니다.”라 하였다.

 

 

 

두 후에게도 이르길

 

 

 

“아녀자들이 사람을 따름에는 삼종지도(三從之道)가 있음인데,

물・불과 끓는 가마솥으로 뛰어들지언정 어찌 적들에게 욕을 당한단 말이오?

 

 

나는 늘 주(周)태후께서 <모용황>이의 비위를 맞추다가

 

 

자식{모용식慕容式}을 낳은 것이 부끄러웠었소.

그대 등은 만일에라도 그런 꼴을 당하게 되거든 자진하시오.”라 하고는,

 

보검을 두 후에게 건네주었다.

 

 

 

<해觧>태후도 이 소리를 듣더니만 무안함을 어쩌지 못하는 듯 스스로를 책망하였다.

 


5월, 태후와 함께 온탕에 있는 도장으로 가서 주기제(周紀祭)를 올렸다.

후 또한 따라 갔었다. 

 

 

6월, 또 고국원으로 가서 연(燕)을 멸하였음을 국원릉(國原陵)에 고하였으며,

 

또한 국양릉(國襄陵)에 주기제(周紀祭)를 올렸다.

 

 

상이 두 후와 종척들에게 이르길

 

“처가 남편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신하가 임금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며,

노비가 주인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것은 도리가 바로 선 것이오.

 

 

그러나 처가 아들을 따르는 것은 구차한 것이고,

 

 

동명께서 따라죽는 것을 금하신 것 또한 구차한 것이었소.”라 하였더니,

 

 

 

두 후가 아뢰길

 

“첩들도 따라 죽길 원하옵니다.”라 하였다.

 

상은 아무 말 없이 눈물 흘리며,

 

 

 

이르기를

 

 

 

“인생이란 대저 떠도는, 주기(周紀) 60년인, 한바탕의 꿈과 같은 것이거늘,

이 몸은 어찌하여 허둥대며 황망해 한단 말인가?!”라 하였다.

 

태후 또한 눈물지으며

 

“첩이 옳은 도리를 몰랐기에 명줄에 욕심을 내고 죽지 않았었으며,

부끄러움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참회하기에 이르기도 어려웠었습니다.”라 하였더니,

 

상은

 

“그것은 선문의 유풍 때문이었지, 태후의 죄는 아닙니다.

 

색두(索頭)에서 자식이 서면 어미를 죽게 하는 것도 악습이고,

<여치呂雉>가 <쾌噲>와 통정하고

<모돈>에게 옷을 풀어헤친 것도 추한 일이었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춘>태자가 아뢰길

 

“사람 됨됨이 차이는 털끝 하나 차이이서,

죽기도 어렵지만 살아있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아들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성인께서도 밝히셨습니다.”라 하였다.

 

 

 

그러자, 상은 <운모>와 <하모> 두 비에게

 

 

갈잎피리를 불고 춤을 추게 하고는 자리를 파하였다.

 

 

9월, 동명대제를 거행하였다.

 

 

 

왜・신라・진(秦)・연(燕)・진(晉)>・맥・백제・가야의 여덟 나라 여인들이

춤사위를 올리고 곡을 불어 바쳤다.

 

나라가 있어온 이래 처음으로 있었던 성대한 의식이었다.

 

 

 

상이 왜의 사자에게 이르길

 

 

“너희 나라는 멀리 물 가운데 떨어져있으면서도 성심으로 조공하길

 

백년이 지났음에도 한 점 변함이 없었으니, 충성스럽다 할 것이다.

오늘 춤사위를 밟는 것으로 보아, 너희나라의 풍속을 알 만하다.

돌아가거든 너희 왕에게 일러서, 후궁에 딸을 바치고,

아들을 보내와서 학문하게 하며, 영원한 신민이 되어,

너희나라에 두루두루 짐의 가르침이 미치게 하라.

뿐만 아니라, <보금>은 짐의 고굉지신의 나라이고, 그의 처가 짐의 딸이거늘,

너희의 왕은 <아신>과 더불어 혼인하고 <보금>을 도모하려 하였다.

결단코 불가함이다.

이날 이후로는 <보금>과 화친하고 서로 혼인함이 좋겠다.”라 하였다.

 

 

왜는 <미해美海>를 사위로 삼고 화친하였다.

 

 

 

<미해美海>의 나이는 겨우 10살이었다.

 

 

 

 


영락대제 13년{AD403}계묘,

 

정월, <보금>이 <미품美品>을 보내 입조하여 왔다.

 

<작鵲>태자의 후예로, 자신을 낮추어 예의를 차릴 줄 알고 식견에 뛰어났으며,

일찍이 <보금>을 따라 들어왔었기에 우리의 예절에 익숙하여 있었다.

 

지금에 와서 <보금>이 각간의 자리를 주고 군사와 정사의 일을 맡겼다 하였다. 

 

 

3월, 왜主가 아들인 <맥수麥穗>를 보내서 딸을 호송하여 후궁에 바치며,

 

 

아뢰길

 

 

 

“신 <인덕仁德>은 먼 해상에서 태양과 함께 있으며

아직 황상의 교화에 젖지 않았더니, 오래도록 마음속엔 모자람이 있었습니다.

 

 

언뜻 듣자오니, 황제 폐하께서는 성덕은 3황을 능가하고

 

공은 5제를 넘어서셨기에 5부와 8맥(貊)이 자식들을 보내와 첩을 살고 있으며,

남쪽 땅을 복속하시고 삼한(三韓) 땅을 아우르셨으며

 

서쪽으로는 두 진{秦,晋}의 땅을 억누르고 계신다 하오신데,

신에게 명하시길 딸을 바치고 신의 땅에서 영원토록 주인노릇 하라고 하시면서

대대로 친하게 지내자 하셨다니,

신은 두렵기도 하지만 기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규(溈)의 법도를 따라 감히 두 딸을 바치오니,

예의를 차려서 애교를 떨지 못하여도, 실은 부끄러워하는 섬의 습속 탓이오니,

버리지 않으시면 다행이겠습니다.”라 하였다.

 


상이 그 누가 이 글을 지었느냐 물었더니,

 

 

 

사신이 아뢰길

 

“<맥군貊君>과 <문장文藏>이 글을 지었으며,

모두가 우리 사람들이 그 밑에 들어가 스승으로 삼은 자이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은 <연도淵鞱>에게

 

“왜가 우리에게서 배운지 50년에 불과한데도 그 이룸이 이러하거늘,

우리나라는 글을 익힌 지 300년이 되었는데도 거꾸로 이와 같지 못하잖소.”

라 말하였더니,

 

<연도淵鞱>가 아뢰길

 

“문(文)을 중히 여기면 무(武)가 무너지고, 무(武)를 중히 여기면 문(文)이 쇠하여지니,

이 둘 모두 잘되어지기는 어렵습니다.

신이 유(幽)와 기(冀) 땅에 가서 보았더니,

漢인들은 글을 깨우친 자가 백에 하나도 되질 않아 금수의 행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백년대계를 위하여서는 허술하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연도淵鞱>는 <천강天罡>의 오빠로서 <평산平山>공주를 짝하였다.

 

선제 즉위 8년에 궁중의 재상이 되어 웃전 모시는 일을 도맡았었고, 큰 잘못은 없었다.

 

상은 그가 그 일을 맡은 지가 오래되었음에 <면형免衡>이 대신하게 하고

외방으로 내보내 책성을 지키게 하였다가 우보로 올렸더니,

태후와 함께 큰 정사에 간여하였는데 일하는 것이 부지런하고 착실하였다.

 

이에 상이 기뻐하여 이르길

 

“경은 척족이면서도 마음 씀씀이 백성들에게 교만하지 않고

정사에 있어서도 게으르지 않았으니,

짐에게는 충성스런 신하로서 20여년을 하루같이 한 것이오.

설사 <장자방>의 수는 없다 할지라도 <통筩>이 되기엔 충분하오.

누구의 공적인들 기뻐할 일 아니겠소!” 라 하였다.

 

그의 처 <평산平山> 역시 상이 어여삐 여겼음에도,

상이 뛰어나게 노력하시는 기풍에 눌려서,

감히 자행하지 않고 맑고 깔끔하게 본분을 지켰더니,

두 후와 함께 곤덕(坤德)이 있다고 국인들이 칭송하였다. 

 

 

7월, <아신阿莘>이 <보금>의 나라를 침입하기에,

상이 군병을 파하라고 명하였더니, 능히 교전하지 못하고 멎었다.

 

 

 

 


영락대제 14년{AD404}갑진,

 

 

정월, <해>태후가 북도에서 죽어 국원릉에 장사하였다. 춘추 82세였다. 

 

 

 

5월, 용성{後燕}이 반란하여 <붕련>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더니,

<모용희>가 죽기로 버티어 빼앗지는 못하였다. 

 

 

 

이때, 왜가 대방에 쳐들어왔기에

 

 

<붕련>에게 군사를 움직여 왜선(倭船)을 공격하게 하였더니,

목을 베고 사로잡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들은 해적 무리들이었으며, <인덕>이 알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인덕>은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고,

 

 

상은 <서구>를 왜의 땅으로 보내어 그 진상을 알아보게 하였다. 

 

<천성>이 사람을 보내어 아뢰기를,

이 해의 2월에 <보금>의 조상 사당을 배알하였으며,

<동명>의 단상을 만들었고 <중천제>와 <옥모>의 상도 만들어 궁중에 두고는

<보금>과 함께 조석으로 참배하여 성상을 위해 빌고 있다고 하였다. 

 

 

태후가 딸 <길吉>을 낳았다.

 

 

 

 


영락대제 15년{AD405}을사,

 

 

정월, <모용희>가 자신의 처와 함께

장무성(章武城)으로 쳐들어왔다가 대패하여 물러갔다.

 

<모용희>는 바탕이 무모하고 사나웠으며 아리따운 여인에게 빠지더니,

어리석은 <모용성>을 죽이고 스스로 보위에 올랐으며, 폭력만을 행사하였더니,

그의 무리들은 복종하지 않았다. 

 

 

2월, <탁발규>가 사신을 보내서 낙타를 바치고,

자신은 <을두지>의 외예라 하면서,

<동명{東明}>이 이루려 하셨던 바를 함께 이루자고 청하였다. 

 

 

 

 

4월, <보금>이 왜구 3백을 독산{獨山}에서 목을 베었는데,

 

 

이들은 지난해 쳐들어왔던 왜의 잔적이었다.

 

 

 

왜의 땅은 큰 섬이 많고 서로가 다른 무리들이어서

<인덕>의 교화가 전부에 미치지는 못하였음에 이러한 일들이 있었다고 하였다. 

 

 

 

 

7월, <서구>가 왜에서 돌아와서 왜의 풍습과 산천 및 물길에 대하여 아뢰었다. 

 

 

 

이 해 9월, <아신>이 죽자,

비밀에 붙여 발상하지 않고 왜에 있던 <전지>를 맞아들였다.

 

<아신>의 막내 동생 <설례>가 중형인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보위에 올랐었고,

 

 

<전지>는 왜에서 따라온 지키는 이들과 함께 섬으로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해충> 등이 <설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아들여 보위에 세운 것이었다.

 

<전지>의 처 <팔수>는, <인덕>의 딸이고,

<서구>의 첩과는 같은 어미를 두었는데, 섬 중에서 자식을 낳았더니,

 

그 이가 <구이신久爾辛>이다.

 

 

 

 


영락대제 16년{AD406}병오, 정월, ■■가 태어났다. 

 

 

12월, <모용희>가 거란을 친히 치려 형북(陘北)에 이르렀다가,

 

 

군병을 몰래 움직여서 돌아 들어와 목저성(木底城)을 쳤으나, 크게 패하고 물러갔다. 

 

 

<호련胡連>을 <용덕勇德>태자비로 삼았다.


 

 

 

영락대제 17년{AD407}정미,

 

 

정월, 신축일 초하루, 연(燕)이 대사면(大赦免)을 하고, 년호를 건시(建始)로 바꿨다. 

 

 

2월, 궁실을 늘려지었다. 

 

<붕련>과 <해성>에게 명하여 5만병을 이끌고나가 <모용희>를 정벌하게 하였더니,

 

 

장무(章武)의 서쪽에서 싸웠다.

 

 

모조리 죽여서 쓸어내고, 개갑(鎧甲){갑옷} 만 벌을 노획하였으며,

군자{전쟁용 소모품} 및 기계{무기류}는 그 수를 셀 수도 없었다.

 

 

사구(沙溝) 등 여섯 성을 빼앗았다. 

 

 

 

 

 

4월, <모용희>의 처 <부苻>씨가 죽었다. 

 

 

7월, <모용운>이 <모용희>를 죽인 후 왕이 되었으며,

초하루 무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풍발>과 <고운>은 <모용희>를 죽이고 나서 찾아와 용서를 빌고 조공을 약속하였다.

 

 

 

 



영락대제 18년{AD408}무신,

 

3월, <고운>이 찾아와 공물을 바쳤다.

 

<고운>은 <고루>의 후손이었다.

 

미모로 인하여 <모용보>와 <모용희>의 처 <부苻>씨에게 총애를 받았었다.

 

<부苻>씨가 죽자 <모용희>가 해치려들었더니,

 

<모용운>은 <풍발>과 함께 <모용희>를 죽이고,

신하되기를 청하며 찾아와 의탁하였었다.

 

상은 그가 <동명>의 서류이었던 까닭에 우대하여 주었었다. 

 

 

<전지>는 자신의 이복동생인 <여신餘信>을 상좌평으로 삼고 군정을 위임하였다. 

 

 

왜가 신라의 대마도(對馬島)를 침범하였다. 

 

 

<호련胡連>이 <용덕勇德>의 아들 <호경胡景>을 낳았다.

혹자는 <장수제長壽帝>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영락대제 19년{AD409}기유,

 

4월, <거련巨連>을 동궁태자로 삼고,

장자<경鲸>에게는 선왕(仙王)이 되라고 명하였다. 

 

 

 

7월, 나라의 동쪽에 독산(禿山) 등 여섯 성을 쌓고

 

 

평양 백성들을 옮겨 둔을 치고 살게 하였다.

 

 

8월엔 남쪽을 순시하고 그 성들의 백성들을 살폈다. 

 

 

 

 

10월, 위(魏)에서는 <탁발규>의 아들 <탁발소>가 아비인 <탁발규>를 죽이고

스스로 보위에 섰다가, 적형인 <탁발사>에게 토벌당해 죽었다.

 

 

<탁발규>는 애초에 어미의 여동생인 <하란賀蘭>의 미모를 보더니만

연통하고 싶어 하자,

 

그 어미는

 

“유부녀와 놀아나면 변고가 생기는데, 어찌 할 테냐?”라 하였더니,

 

 

<탁발규>가 그녀의 남편을 죽이고 그녀를 거두어서 <탁발소>를 낳았더니,

<탁발소>가 흉악한 이리같이 무도하더니 필경엔 <탁발규>를 죽인 것이었다.

 

<탁발건>과 <탁발규> 모두는 첩의 자식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아무리 영특하면 무엇 하겠는가.

 

 

 

상이 동궁에게 이르길

 

“<탁발식>과 <탁발소> 모두가 어미를 치붙고 아비를 죽였다.

경계하지 않아도 되겠느냐?”라 하였다.

 

이 달에 <풍발>이 <고운>을 죽이고 스스로 보위에 섰더니,

 

 

 

상은 또 동궁에게 이르길

 

“<고운>은 자신의 미모 때문에 사람을 섬기다가 귀하여 졌으며,

필경엔 자신의 주인을 죽였고, 또한 미모를 사랑하다가 <풍발>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사람들의 임금 된 자는 남색과 어여쁜 암컷들을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어여쁜 암컷들은 수컷을 죽이는 흉기이고,

남색은 자손이 끊기게 하는 적이다.”라 하였다. 

 

 

태후가 딸 <충忠>을 낳았다.

 

 


영락대제 20년{AD410}경술,

 

정월, <풍발> 정벌을 의논하던 중인데,

 

동부여가 반란하였기에 그 보답으로 여성(餘城)을 토벌하고

 

그 왕 <은보처恩普処>를 붙잡아서 돌아오기에 이르렀다.

 

64성 1,400여 촌락의 우두머리 모두를 다른 이들로 갈아치웠다.

 

이 일로 <풍발>을 치는 것은 그만두게 되었다. 

<천룡天龍>을 동궁상비로 <삼산三山>을 동궁차비로 삼아주고,

상이 세 명의 후와 함께 동궁과 두 명의 동궁비를 대접하여 흥이 높아지매,

 

 

동궁을 달래어 이르길

 

“네가 이 두 여인을 아끼고 이외의 다른 여인들을 탐하지 않는다면,

가히 나를 능가할 것이다.

허나, 나처럼 호색하면, <고운>과 <탁발규>의 꼴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 하자,

 

 

 

태후가 아뢰길

 

“조종이 있어온 이래에 처를 둘만 두신 주상이 계셨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고운>과 <탁발규>를 들어서 경계하려 하십니까?”라 하였다.

 

 

 

이에 상은 크게 진노하여 국그릇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이르길

 

“예쁜 암컷들은 사내를 죽이는 흉기란 말입니다.”라 하니,

 

태후는 당상에서 내려가 죄를 청하였고,

두 동궁비와 동궁이 슬퍼하며 애원하였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진노가 가라앉았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상은 자주 크게 진노하였다. 

 

 

<내밀>의 아들 <보해宝海>가 래조하였다.

 

<마연馬連>을 그에게 처로 주었다.

 

 



영락대제 21년{AD411}신해,

 

 

정월, <풍발>이 사신을 보내와서 아뢰길

 

“신은 앞서서 신하였던 <고운>이 남긴 조서에 따라 보위를 이었고,

 

 

<고운>의 딸을 처로 삼았으며, 세세토록 조상나라의 신하가 되겠습니다.

삼가 저희 땅에서 나는 것들을 챙겨 바치며 성의를 표합니다.”라 하였다.

 

상은 사신을 참하고 죄를 물으려 하였으나,

<연도>와 <붕련>이 간하여 말려서 그만두었다. 

 

 

 

 

5월, 상이 세 명의 후와 함께 온탕 도장으로 가서 여름을 지내고 란궁으로 돌아왔다. 

 

 

<보금>이 <보해>를 돌려보내주기를 청하자, <마련馬連>을 따라가게 하였다. 

 

 

 

<마련馬連>이 <보준宝俊>을 낳았고, <토>후가 <감산甘山>을 낳았다. 

 

동궁봉례 <부운芙雲>이 아들 <황晃>을 낳았다. <연긍淵兢>의 처였다. 

 

 

 

 

7월, <풍발>이 딸 <락랑樂浪>을 유연(柔然)의 <곡률斛律>에게 처로 주었다.

 

 

 

 


영락대제 22년{AD412}임자,

 

 

3월, <풍발>이 딸을 후궁에 바치면서

 

 

장무(章武)와 숙거(宿車) 땅을 떼어주길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6월, <걸복국인乞伏國仁>의 아들 <구부究府>가 <건귀乾皈>를 죽이자,

 

<건귀乾皈>의 아들 <치반熾磐>은 하남왕(河南王)을 자칭했다. 

 

 

 

7월, <마련馬連>이 글을 올려 돌아오고 싶다고 청하기에

<보해>에게 함께 들어오게 하였고, <천성天星>의 옛 궁에서 살게 하였다.

 

 

 

 


영락대제 23년{AD413}계축,

 

2월, 태후가 딸 <호태瑚太>를 낳았다.

 

이때 보산 59세였는데도 젊은 며느리처럼 늘 예쁜 옷을 입었으며 순산하였다.

 

사람들이 <상尙>태후의 후신이라고 여겼다. 

 

 

 

8월, <보금>이 <천성>과 함께 랑산(狼山)에서 <동명>신상을 배알하였더니,

색색인 구름이 휘둘러 일어나고 저절로 누각이 만들어졌으며

향내도 자욱하여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더니 선사를 보내 달라고 하였으며 도장도 열고 싶어 하기에,

 

상이 <경鯨>태자에게 명하여 가보게 하였다.

 

 

 

<보금>은 평양대교를 만들어 황은에 답하였다.

 

 

 


영락대제 24년{AD414}갑인,

 

5월, 상이 태후와 함께 온탕에 갔다.

 

 

6월엔 국양릉을 찾아뵙고 비류의 온탕궁에서 머물다가,

병이 들자 두 후와 동궁 및 두 동궁 비를 불러서 전위하였다.

 

동궁이, 고사하였으나 하는 수 없어서, 북도의 주유궁(朱留宮)에서 즉위하였다.

 

 

7월에 상이 주유궁에서 춘추 39세에 죽었다.

 

<평양平陽>후도 따라 죽었다.

 

황산(黃山)에 장사하였다.

출처: https://elfqkr.tistory.com/entry/영락대제기?category=699494 [바람따라구름따라: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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