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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집 제13권 부賦 적벽부 赤壁賦 -170 반적벽부 反赤壁賦 -176
■赤壁賦
歲庚申時九月後重陽先望日。先生與客。舟游石壁。于時驟雨旋止。狂飆忽息。水淸若空。纖纊初濯。刺鏡面而遐遡。覽形勢之紆直。執巵酒以相醻。流左右而遊目。紛錦累而繡堆。杳霞連而霧屬。遠而望之兮。龍鱗之照爛。近而察之兮。驚虎豹之藏蹲。雕山骨之戍削兮。琢雲根以頹疊。怳如女媧之所鍊兮。塞天竇而餘素質。又如大禹之所鑿兮。決龍門而河道闢。若非鬼運而神輸兮。疇克岸委而崖積翠。疑長鯨之曝鬐兮。白訝防風之朽骨。夫何造化之神權兮。幻至奇以無迹。於是先生執酌流眄。嚄然長歎曰。厥初開張。孰主張是。其始芒芒。我昧斯理。若以設此者。爲有意於固國。崤函漢方兮。無柰秦楚之亡。若以設此者。爲無意於固國。胡然周遭兮。屹若長城與巨防。況箕檀至於濟麗兮。孰有恃此以威敵。絗先朝蜑子之充斥兮。慘王師望風而魚肉。至今江波之嗚咽兮。想魂悲而鬼泣。天之設此抑何意歟。客有出位者。應聲答曰。以余所料。似非偶耳。今者昧朝。木道將啓。天乃晦冥大雨。以風倒海翻山。混混濛濛。江商下碇。陸旅止轄。船于此地。神所難卜。然而先生猶且怡然。不以爲惑。回風止兩。如叱老僕。爰開爰霽。曾不瞬息。旣申之以睛景。又重之以明月。秋江淨兮如練。壁色露兮無隔。榜人喜兮棹謳發。芳酒御兮嘉蔬錯。江妃出兮水神嬉。巢鶻起兮潛蛟躍。豈非神明之默佑。快先生之淸賞。俾揮毫而摛藻。摸勝區之景象。答造化於千古。有今日之高躅。是知先乎蘇子幾千年兮。無是作於赤壁。後乎蘇子幾千年兮。亦無作於赤壁。然則天之創赤壁。非爲吳蜀也。爲蘇子也。安知今之有石壁。非爲歷代固國而威敵。只爲先生一言而設也。言未旣。先生乃揮手止之。微笑不答。俛然放筆。如有慙色。
●적벽부[赤壁賦]
歲庚申時 해는 경신년이요
九月後重陽先望日 때는 구월 중양절 뒤 망일 앞이라
先生與客 선생이 객과 더불어
舟游石壁 석벽 아래에서 뱃놀이를 하는데
于時驟雨旋止 이때에 소나기가 내리다가 곧 그치고
狂飆忽息 거센 바람이 갑자기 멈췄네
水淸若空 물이 하늘처럼 맑아
纖纊初濯 가는 솜을 처음 빤 듯하니
刺鏡面而遐遡 거울같은 수면에 배를 저어 멀리 거슬러 올라가
覽形勢之紆直 구부러지고 곧게 뻗은 형세를 구경하네
執巵酒以相酬 술잔을 잡아 서로 주고 받고
流左右而遊目 좌우로 흘러가며 두루 바라보니
紛錦累而繡堆 비단과 수놓은 천이 어지러이 쌓여 있는 듯하고
杳霞連而霧屬 노을과 안개가 아득히 이어졌네
遠而望之兮 멀리 바라보니
𢥠龍鱗之照爛 용비늘이 번쩍거리는 듯한 광경에 두려워하고
近而察之兮 가까이 살펴보니
驚虎豹之藏蹲 범과 표범이 숨어서 웅크리고 있는 듯한 광경에 놀라네
雕山骨之戌削兮 바위산을 깎아서 우뚝 세워 놓고
琢雲根以頹疊 벼랑을 쪼아서 겹겹이 쌓아 놓았으니
怳如女媧之所鍊兮 황홀하게도 여와가 달군 돌이
塞天竇而餘素質 하늘의 구멍을 막고도 본래의 재료가 남아 있는 듯하고
又如大禹之所鑿兮 또 대우가 뚫은 것이
決龍門而河道闢 용문산을 터주어 물길이 통한 것 같네
若非鬼運而神輸兮 만약 귀신이 운반해 나른 것이 아니라면
疇克岸委而崖積 누가 언덕을 쌓고 벼랑을 쌓을 수 있었겠는가
翠疑長鯨之曝鬐兮 푸른 빛은 죽은 큰 고래의 지느러미 같고
白訝防風之朽骨 흰 빛은 죽은 방풍씨의 뼈 같네
夫何造化之神權兮 어째서 조화옹의 신묘한 권한은
幻至奇以無迹 지극히 기이하게 만들어 놓고도 자취가 없는가
於是先生執酌流眄 이에 선생이 술잔을 잡고 주위를 둘러보며
嚄然長歎曰 큰소리로 길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厥初開張 처음에 펼쳐질 적에
孰主張是 누가 이것을 주재했는가
其始芒芒 시초가 아득하니
我昧斯理 나는 이 이치를 모르겠네
若以設此者 만약 이 석벽을 만든 것이
爲有意於固國 나라를 굳게 지키는 데 뜻이 있었다면
崤函漢方兮 효산·함곡관과 한수·방성산으로
無柰秦楚之亡 진나라와 초나라의 패망을 어찌하지 못했는가
若以設此者 만약 이 석벽을 만든 것이
爲無意於固國 나라를 굳게 지키는 데 뜻이 없었다면
胡然周遭兮 어찌하여 둘러싼 형세가
屹若長城與巨防 장성과 거방처럼 우뚝한가
況箕檀至於濟麗兮 하물며 기자·단군에서 백제·고구려에 이르기까지
孰有恃此以威敵 여기에 의지하여 적을 위협한 이 누가 있었던가
緬先朝蜑子之充斥兮 생각건대 선왕대에 오랑캐 가득하여
慘王師望風而魚肉 참혹하게도 국가의 군대가 바람에 쓰러지듯 도륙되었네
至今江波之嗚咽兮 지금에 이르러 강물결이 오열하여
想魂悲而鬼泣 혼이 슬퍼하고 귀신이 우는 것 같으니
天之設此抑何意歟 하늘이 이 석벽을 만든 것은 또 무슨 뜻인가?” 하였다
客有出位者 객 중에 자리에서 나온 자가 있어
應聲答曰 소리내어 답하기를
以余所料 내가 헤아린 바로는
似非偶耳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今者昧朝 지금 어스름한 새벽에
木道將啓 뱃길로 떠나려 하는데
天乃晦冥大雨 하늘이 어두침침하고 큰 비가 내려
以風倒海翻山 바람에 산과 바다가 뒤집히니
混混濛濛 어둑하고 흐릿하여
江商下碇 강의 상인이 정박하고
陸旅止轄 육지의 나그네도 수레를 멈췄습니다
船于此地 이곳에서 배로 가는 것은
神所難卜 신도 점치기 어려운 것인데
然而先生猶且怡然 선생께서는 오히려 편안히 계시며
不以爲惑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回風止雨 회오리 바람이 비를 그치게 하는 것이
如叱老僕 마치 늙은 종을 꾸짖는 것 같아서
爰開爰霽 곧 날씨가 갬에
曾不瞬息 잠깐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旣申之以晴景 이미 맑은 경치가 펼쳐지고
又重之以明月 또 밝은 달이 거듭 비추니
秋江淨兮如練 가을 강물이 누인 명주실처럼 깨끗하고
壁色露兮無隔 석벽의 색이 눈앞에 있는 듯이 드러났습니다
榜人喜兮棹謳發 뱃사공이 기뻐하여 뱃노래 부르고
芳酒御兮嘉蔬錯 향기로운 술 마시고 맛좋은 채소 섞어 먹으니
江妃出兮水神嬉 강비가 나오고 수신이 즐기며
巢鶻起兮潛蛟躍 둥지의 송골매가 일어나고 숨은 교룡이 뛰어오릅니다
豈非神明之默佑 이 어찌 신명이 묵묵히 도와서
快先生之淸賞 선생이 실컷 완상하게 해주어
俾揮毫而摛藻 선생으로 하여금 붓을 휘둘러 문재를 펴서
摸勝區之景象 아름다운 지역의 경치를 모사하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答造化於千古 천고에 조화옹에게 답하여
有今日之高躅 오늘날의 고아한 자취가 있게 되었습니다
是知先乎蘇子幾千年兮 이에 소식의 앞에 몇 천년 동안
無是作於赤壁 적벽에서 이러한 작품이 없었고
後乎蘇子幾千年兮 소식의 뒤에도 몇 천년 동안
亦無作於赤壁 또한 적벽에서 이러한 작품이 없음을 알겠습니다
然則天之創赤壁 그렇다면 하늘이 적벽을 만든 것은
非爲吳蜀也 오나라와 촉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爲蘇子也 소식을 위한 것이니
安知今之有石壁 지금 석벽이 있는 것이
非爲歷代固國而威敵 역대로 나라를 굳게 지켜 적을 위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只爲先生一言而設也 단지 선생의 한 마디 말을 위해 만든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하니
言未旣 말이 끝나기도 전에
先生乃揮手止之 선생이 손을 흔들며 그만두게 하고
微笑不答 미소지으며 답하지 않고서
俛然放筆 구부정 붓을 놓으니
如有慙色 부끄러운 기색이 있는 듯하였네
<前赤壁賦〉
蘇軾
壬戌之秋七月旣望에 蘇子與客泛舟하여 遊於赤壁之下하니 淸風은 徐來하고 水波는 不興이라 擧酒屬客하여 誦明月之詩하고 歌窈窕之章이러니 少焉에 月出於東山之上하여 徘徊於斗牛之間하니 白露는 橫江하고 水光은 接天이라 縱一葦之所如하여 凌萬頃之茫然하니 浩浩乎如憑虛御風而不知其所止하고 飄飄乎如遺世獨立하여 羽化而登仙이라 於是에 飮酒樂甚하여 扣舷而歌之하니 歌曰 桂棹兮蘭漿으로 擊空明兮泝流光이로다 渺渺兮余懷여 望美人兮天一方이로다
客有吹洞簫者하여 倚歌而和之하니 其聲이 嗚嗚然하여 如怨如慕하며 如泣如訴하고 餘音嫋嫋하여 不絶如縷하니 舞幽壑之潛蛟하고 泣孤舟之嫠婦라 蘇子愀然正襟危坐而問客曰 何爲其然也오 客曰 月明星稀에 烏鵲南飛는 此非曹孟德之詩乎아 西望夏口하고 東望武昌이라 山川相繆하여 鬱乎蒼蒼하니 此非孟德之困於周郞者乎아 方其破荊州 下江陵하여 順流而東也에 舳艫千里요 旌旗蔽空이라 釃酒臨江하고 橫槊賦詩하니 固一世之雄也러니 而今安在哉오 況吾與子는 漁樵於江渚之上하여 侶魚鰕而友麋鹿이라 駕一葉之扁舟하여 擧匏樽以相屬하니 寄蜉蝣於天地요 渺滄海之一粟이라 哀吾生之須臾하고 羨長江之無窮이라 挾飛仙以遨遊하며 抱明月而長終이나 知不可乎驟得일새 託遺響於悲風하노라
蘇子曰 客亦知夫水與月乎아 逝者如斯로되 而未嘗往也며 盈虛者如彼로되 而卒莫消長也니 蓋將自其變者而觀之면 則天地曾不能以一瞬이요 自其不變者而觀之면 則物與我皆無盡也니 而又何羨乎리오 且夫天地之間에 物各有主하니 苟非吾之所有인댄 雖一毫而莫取어니와 惟江上之淸風과 與山間之明月은 耳得之而爲聲하고 目寓之而成色하여 取之無禁하고 用之不竭하니 是는 造物者之無盡藏也요 而吾與子之所共樂이니라 客이 喜而笑하고 洗盞更酌하니 肴核이 旣盡이요 盃盤이 狼藉라 相與枕藉乎舟中하여 不知東方之旣白이러라
■反赤壁賦
壬戌之秋。余在商邑。如有不豫。臥吟村榻。客有自外者。勸余持酒浮舟于洛曰。今茲歲紀。屬于壬戌秋之旣望。又値此月。此非蘇仙游赤壁之夕歟。是用騷林墨壇好事之徒。莫不提壼挈榼。爭泛江湖者。蓋以是月與日。歲常有焉。難遇者年。百歲忽然。佳期易還。時不可失。盍從我而游洛。踵前脩之奇躅。余乃听然露矧。應聲而笑曰。嚮者蘇子之遊。初非擇年於今歲。又非卜夜乎今日。又非選勝於赤壁。又非倍興於此夕。偶然作賦於前後。便成勝迹於千億。苟有蘇子之名之大。又有蘇子之才之逸。雖非今歲之歲。雖非今月之日。雖非赤壁之游。隨所遊之勝迹。今者旣無蘇子之大名。又無蘇子之逸才。徒務襲其年月。欲踵美而追懷。雖使載酒百瓮。鼓吹十行。浮萬斛之舟。建千尺之檣。乘滿空之風。張蔽海之席。出蒼梧而浮孟渚。掠渤澥而漂碣石。歷桑若兮尋蓬瀛。舞淸飆兮歌素月。苟無蘇子之所賦。等井蛙之自多。迹雖勝而且奇。人孰聞而知耶。今客不反其本。徒欲逐末。客之好名。不幾惑歟。而況以赤壁之游。揣蘇子之迹。欲以記勝。只露其阨。旣無取乎蘇子。又何慕乎赤壁。嘗念中流翫景。出於自然。弔古興懷。亦所必然。何自哀其短生。漫託羨於江水。爰一哀而一寬。近婦人而女子。況乎淸風自風。明月自月。江自江兮山自山。蘇自蘇兮客自客。又何必取之而用之兮。爲自家之翫物。是知區區於死生之際。屑屑於取舍之間。此余所以哀蘇子之阨。而竝與赤壁而爲阨者焉耳。余方以大氣爲舟。以至理爲楫。以黔羸爲蒿工。以造化爲賓客。刺乎漭沆之口。涉乎混茫之洋。浟浟橫騖乎寂寞之濱。汎汎中流乎無何有之鄕。將落帆於大道之窟。且下碇於玄牝之門。奚暇與客游洛之濱。況風利不得泊也。謹謝客。客於是憮然失色。逡巡避處。乃逸而遁。杳不知所。
壼 : 壺
蒿: 篙
〈後赤壁賦〉
蘇軾
是歲十月之望에 步自雪堂하여 將歸于臨皐할새 二客이 從予라 過黃泥之坂하니 霜露旣降하고 木葉盡脫이라 人影在地어늘 仰見明月이라 顧而樂之하여 行歌相答이러니 已而요 歎曰 有客無酒요 有酒無肴로다 月白風淸하니 如此良夜何오 客曰 今者薄暮에 擧網得魚하니 巨口細鱗이 狀如松江之鱸라 顧安所得酒乎아 歸而謀諸婦하니 婦曰 我有斗酒하여 藏之久矣라 以待子不時之需로라
於是에 携酒與魚하고 復遊於赤壁之下하니 江流有聲하고 斷岸千尺이라 山高月小하고 水落石出하니 曾日月之幾何완대 而江山을 不可復識矣라 予乃攝衣而上하여 履巉巖하고 披蒙茸하여 踞虎豹하고 登虯龍하여 攀棲鶻之危巢하고 俯馮夷之幽宮하니 蓋二客之不能從焉이라 劃然長嘯하니 草木震動이라 山鳴谷應하고 風起水涌하니 予亦悄然而悲하고 肅然而恐하여 凜乎其不可留也라 反而登舟하여 放乎中流하여 聽其所止而休焉이러니 時夜將半에 四顧寂寥러니 適有孤鶴이 橫江東來하니 翅如車輪이요 玄裳縞衣로 戞然長鳴하여 掠予舟而西也러라
須臾에 客去하고 予亦就睡러니 夢에 一道士羽衣翩躚하여 過臨皐之下라가 揖予而言曰 赤壁之遊樂乎아 問其姓名하니 俛而不答이라 嗚呼噫嘻라 我知之矣로라 疇昔之夜에 飛鳴而過我者가 非子也耶아 道士顧笑하고 予亦驚悟하여 開戶視之하니 不見其處러라
●반적벽부[反赤壁賦]
壬戌之秋 임술년 가을에
余在商邑 내가 상읍에서
如有不豫 기쁘지 않은 기색이 있어
臥吟村榻 마을 평상에 누워 읊조렸네
客有自外者 밖에서 온 객이
勸余持酒浮舟于洛曰 나에게 낙수에서 술을 가지고 배를 띄우길 권하며 말하기를
今茲歲紀 지금의 해와 때는
屬于壬戌秋之旣望 임술년 가을 기망에 속하고
又値此月 또 이 달을 만났으니
此非蘇仙游赤壁之夕歟 이는 소선이 적벽에서 노닐던 저녁이 아닙니까
是用騷林墨壇好事之徒 이때문에 소인묵객 중 호사자들이
莫不提壼挈榼 술병을 가지고 나가서
爭泛江湖者 다투어 강호에 배를 띄우지 않는 자가 없으니
蓋以是月與日 이 달과 이 날은
歲常有焉 해마다 항상 있지만
難遇者年 이 해는 만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百歲忽然 백년이 순식간에 지나가
佳期易還 아름다운 시기가 어느덧 돌아왔으니
時不可失 이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盍從我而游洛 어찌 나를 따라 낙수에서 노닐어
踵前脩之奇躅 선현의 빼어난 자취를 계승하지 않습니까?”하니
余乃听然露矧 내가 이에 빙그레 치아를 드러내고
應聲而笑曰 응답하여 웃으며 말하기를
嚮者蘇子之遊 예전에 소식이 노닌 것은
初非擇年於今歲 애초에 이 해로 연도를 택한 것이 아니요
又非卜夜乎今日 또 오늘 날짜로 밤을 정한 것이 아니며
又非選勝於赤壁 또 적벽으로 승경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又非倍興於此夕 또 이날 저녁에 흥이 배가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偶然作賦於前後 우연히 전후로 부를 지어
便成勝迹於千億 곧 억만년토록 이름난 고적이 되었으니
苟有蘇子之名之大 진실로 소식의 훌륭한 명성이 있고
又有蘇子之才之逸 또 소식의 빼어난 재주가 있다면
雖非今歲之歲 이 해가 아니더라도
雖非今月之日 이 달의 이 날짜가 아니더라도
雖非赤壁之游 적벽에서 노닐지 않더라도
隨所遊之勝迹 노닌 곳마다 이름난 고적이 될 것입니다
今者旣無蘇子之大名 지금 이미 소식같은 훌륭한 명성이 없고
又無蘇子之逸才 또 소식같은 빼어난 재주도 없는데
徒務襲其年月 단지 그 연·월·일을 애써 인습하여
欲踵美而追懷 아름다운 자취를 계승하여 옛일을 회상하고자 하는군요
雖使載酒百瓮 비록 술 백 동이를 싣고
鼓吹十行 악대가 열 줄로 늘어서며
浮萬斛之舟 만 곡을 실을 만한 배를 띄우고
建千尺之檣 천자 되는 돛대를 세워
乘滿空之風 하늘에 가득한 바람을 타고서
張蔽海之席 바다를 덮을 만한 돛을 펼치고
出蒼梧而浮孟渚 창오산을 나와 맹저에서 떠다니고
掠渤澥而漂碣石 발해를 스쳐지나 갈석에서 표류하며
歷桑若兮尋蓬瀛 부상과 약목을 지나 봉래와 영주를 찾아가서
舞淸飆兮歌素月 맑은 바람에 춤추고 밝은 달을 노래하더라도
苟無蘇子之所賦 진실로 소식이 지은 부가 없다면
等井蛙之自多 스스로 과시하는 우물 안 개구리와 같으니
迹雖勝而且奇 행적이 빼어나고 기이하더라도
人孰聞而知耶 누가 듣고서 알아주겠습니까
今客不反其本 지금 객은 그 근본을 돌이키지 않고
徒欲逐末 단지 말엽적인 것만 쫓고자 하니
客之好名 객이 겉치레를 좋아하는 것이
不幾惑歟 미혹됨에 가깝지 않습니까
而況以赤壁之游 하물며 적벽에서 노닌 일로
揣蘇子之迹 소식의 자취를 헤아리건대
欲以記勝 승경을 기록함으로써
只露其阨 단지 자신의 곤액을 드러내고자 했을 뿐이니
旣無取乎蘇子 이미 소식에게서 취할 점이 없는데
又何慕乎赤壁 또 어찌하여 적벽을 흠모합니까
嘗念中流翫景 일찍이 생각건대, 중류에서 경치를 완상한 것은
出於自然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요
弔古興懷 옛일을 추모하며 감회가 인 것도
亦所必然 또한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何自哀其短生 어찌 인생의 짧음을 스스로 슬퍼하며
漫託羨於江水 덧없이 강물을 부러워한단 말입니까
爰一哀而一寬 이에 한 번 슬퍼했다가 한 번 풀어지는 것은
近婦人而女子 부인과 여자에 가깝습니다
況乎淸風自風 하물며 맑은 바람은 바람대로
明月自月 밝은 달은 달대로
江自江兮山自山 강은 강대로 산은 산대로
蘇自蘇兮客自客 소식은 소식대로 객은 객대로 각자 있는데
又何必取之而用之兮 또 어찌 굳이 그것을 취하여 써서
爲自家之翫物 자신의 완물로 만든단 말입니까
是知區區於死生之際 이에 생사의 갈림길에 구구히 얽매이고
屑屑於取舍之間 출처(出處) 사이에 연연함을 알겠으니
此余所以哀蘇子之阨 이것이 내가 소식의 곤액이
而竝與赤壁而爲阨者焉耳 적벽과 더불어 함께 곤액이 된 것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余方以大氣爲舟 나는 이제 대기로 배를 삼고
以至理爲楫 지리로 노를 삼으며
以黔嬴爲蒿工 검영으로 뱃사공을 삼고
以造化爲賓客 조화옹으로 빈객을 삼아
刺乎漭沆之口 크고 넓은 바다의 입구에서 배를 저어
涉乎混茫之洋 혼돈[混茫]의 바다를 건너서
浟浟橫騖乎寂寞之濱 적막한 물가에 유유히 종횡으로 내달리고
汎汎中流乎無何有之鄕 무하유지향에서 두둥실 중류를 떠다녀
將落帆於大道之窟 장차 대도의 굴에 돛을 내리고
且下碇於玄牝之門 또 현빈의 문에 닻을 내릴 것이니
奚暇與客游洛之濱 어찌 객과 더불어 낙수 가에서 노닐 겨를이 있겠습니까
況風利不得泊也 더구나 바람이 빨라서 정박할 수 없습니다.”하고
謹謝客 삼가 객에게 작별인사를 하니
客於是憮然失色 객이 이에 민망해하며 낯빛이 변하여
逡巡避處 궁벽진 곳으로 물러나서
乃逸而遁 이윽고 숨었으니
杳不知所 묘연하여 간 곳을 알 수 없었네
●玄洲趙公墓碣銘
●左承旨玄洲趙公墓碣銘
故承政院左承旨玄洲趙公卒後五十九年。其孫龜祥。乃以顯碣請世采。辭不敢。顧有義不敢終辭者。謹敍而銘之。敍曰。公諱纘韓。字善述。漢陽府人也。鼻祖諱之壽。高麗僉議中書事。至孫諱良琪。十三。爲摠管。破哈丹兵。大被元世祖奬賜。自是襄烈公諱仁壁。良節公諱溫。當本朝興運。式晦式顯。各行其志。名德勳庸。一世無兩焉。曾祖諱邦彥。參判。祖諱玉。縣令。贈參判。考諱楊庭。贈判書。妣眞夫人韓氏。牙山縣監應星之女。公以隆慶六年正月某甲。生。幼有異質。儼然若成人。判書公家 法素嚴。公旣服訓。讀書務記覽。才思橫逸瑰奇。殆不可涯涘。名譽益盛。間中司馬試。萬曆三十三年。魁庭試。宣廟奇其文。以御筆批點。特命直赴殿試。始隷成均館爲學諭。陞典籍。歷刑, 戶二曹佐郞。拜司諫院正言。由兵曹佐郞。出爲靈巖郡守。未幾罷歸。復拜正言兼知製敎。出爲榮川郡守。比坐事罷拜三道討捕使。時劇盜蟠湖, 嶺。朝廷憂之。俾公往治。公出入諸路。間發將吏。督察悉獲捕斬。盜患遂止。褒加通政階。入爲禮曹參議。轉同副承旨。時光海政亂。奸凶得志。金墉之禍方生未艾。公不樂在朝。無何。復求出爲尙州牧使。途中有詩曰。聞來世故心如 醉。看到時危鬢已蓬。安得滄波無限月。解官歸作釣魚翁。及至鄭愚伏 經世, 李蒼石峻在境。相得驩然。嘗共游隣邑鳳笙亭。山水奇邃。酒酣鄭公謂曰。時事罔極。如有菟裘之計。捨此奚適耶。公決意歸休。諸公遂出 力。經理精舍。公又爲文而證之。會仁祖反正。奸凶伏誅。諸公皆趨召。公亦秩滿歸。拜刑曹參議兼承文院提調。差朝京使。嬰黃疸症。不克行。旣而帥适叛書至。上南狩。公疾方力。乃得追赴行在。言路以此劾公。未幾。除左承旨。憲官復理其論。竝推銓部。適淸陰金公尙憲佐銓。對辭頗 峻。憲官引避。至稱公有前愆。蓋指昏朝銀臺事也。夫知人固未易。公旣 以當時黽勉一出。爲不慊於志。請外思退甚勤。其平生畜積可見。今乃因緣層激。若務相勝。則殆亦不得公本實而然也。是必有能衷之者。復拜刑曹參議承文院提調。未幾。出爲淮陽府使。時詔使姜曰廣王夢尹至。儐使北渚金公瑬。啓公有華國才。命召。沿途酬唱。多出公手。仲氏玄谷公緯韓。亦以襄陽守竝召。一時滎之。八拜銀臺。乃以病聾疏辭。復歷禮曹參議, 出爲善山府使。秩滿歸猝。患面疽不起。實崇禎四年九月某甲也。葬于交河孟谷卯坐之原。公天資絶人。氣岸魁偉。廓而能約。肅 而能和。履家以禮。臨政以仁。恬於勢利。氷檗自厲。加有文武材略。出入中外。聲績甚茂。可以輔翼當世。顯功名於春秋。竟亦未究也。少事親 至孝。値倭難。背負母夫人。轉避山谷間。不闕甘旨。見者皆服。每以仕不逮養。爲終身痛。對珍味。悲咽不忍食。有一娣窮居。奉之如親。至老不懈。燕居。必夙興櫛靧。正襟端坐。望之凜然不可犯。敎子弟嚴而有法。閨庭之間。內外斬斬。若朝廷焉。累典雄府。平恕威重。民懷吏畏。每多去後思。至其鋤奸剸煩。遇事風生。削平萑苻。常有餘裕。罷官之日。行橐垂罄。常丐貸於人。素履然也。喜讀先秦古文。以極群書。靡所不窺。其爲文章汪洋大肆。衆體俱備。鉅細隨意。尤長於騷賦騈儷。識者以爲能得楚, 漢六朝遺法。要其所就。固非可以一時小家論者晩好臨池深造鐘王蹊逕邂逅揮洒。人必藏而珍之。是故。所友善如石洲權公韠, 東岳李公安訥, 疏庵任公叔英。號稱藝苑鉅匠。而莫不斂袵推先。後進如李白軒景奭。吳天坡䎘, 愼素隱天翊輩。率從公愛業講畫以成名焉。識量宏遠。性雖嫉惡。然未嘗揚人過失。唯聞深河兩元帥生降。憂憤特甚。以詩見志。其曙於大義類此。在朝未嘗作權要迹。所至輒與儒士賢豪游。往往有物外高趣。最留意斯文。嘗刻高峯。退溪往復書尺。以及遺文賴而不墜。又躬祭金公澍, 河公緯地。仍創來格廟。以祀金公。方陳俎豆。有靈虹起自舊墓。直抵廟門。觀者異之。公几再娶。前夫人柳氏。持平激之女。貞淑有婦道。丁酉之難。遇賊自剄死。葬于羅州草谷。後夫人奇氏。僉正孝曾之女。卽高峯先生大升孫也。莊嚴有法度。事公終始無違。庚子九月卒。年八十二。祔葬公墓左。生二男二女。長休。縣監。次備。校理。昆季以文行名。相繼早世。人多惜之。女適李尙弼。縣監。洪處大。知事。內外孫曾總若干人。銘曰。
世稱詞章。於道不尊。屈馬徐庾。夫豈輕論。
惟彼政能。人輒競長。亦有大者。張趙龍黃。
公於二事。昭在耳目。緃饒軒輊。而莫能椽。
最是居家。孝與禮須。矧所扶植。卓節宏儒。
志存名敎。行著秉彝。斂茲衆美。乃困鴻罹。
高名奇藝。完者或難。庶久而明。非所敢權。
鬱鬱交山。帶河襟海。我揭其迹。俾無後昧。
崇禎紀元後六十三年庚午六月。潘南朴世采。謹撰。
文集一件。崇禎八十三年己丑三月。藏于赤裳山城。
■현주 조공의 묘갈명
■玄洲趙公墓碣銘
고(故)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현주(玄洲) 조공(趙公)이 돌 아가신 지 59년째 되는 해에 그 손자 귀상(龜祥)이 묘갈명을 지어 달라고 나에게 청했는데 감히 지을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하지만 의리상 감히 끝내 사양하지 못할 점이 있기에 삼가 서술하고 명을 짓는다.
공의 휘(諱)는 찬한(纘韓), 자는 선술(善述)로 한양부(漢陽府) 사 람이다. 시조 휘 지수(之壽)는 고려 때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냈다. 손자 휘 양기(良琪)에 이르러 열세 살에 총관(摠管)이 되 어 합단(哈丹)의 군대를 쳐부수고 원(元)나라 세조(世祖)에게 크 게 칭찬을 받았다. 이때부터 양렬공(襄烈公) 휘 인벽(仁壁), 양절 공(良節公) 온(溫)은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할 때에 자취를 감추 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며 각기 그 뜻을 행하여 명망(名望)과 공훈(功勳)이 당대에 비길 자가 없었다. 증조 휘 방언(邦彦)은 참판 (參判)을 지냈고, 조부 휘 옥(玉)은 현령을 지내고 참판에 추증되 었으며, 부친 양정(楊庭)은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모친 진부 인(眞夫人) 한씨(韓氏)는 아산 현감(牙山縣監) 응성(應星)의 따님 이다.
공은 융경(隆慶) 6년(1572, 선조5) 정월 모일(某日)에 출생하였 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자질이 있어 의젓하여 마치 어른 같았다. 판서공(判書公 조양정(趙楊庭))은 가법(家法)이 본디 엄했는데 공 은 가르침을 잘 따라서 독서할 때 박람강기(博覽强記)하는 데 힘 썼고 재주와 생각이 자유분방하고 특출나서 거의 한계를 지을 수 없어 명예가 갈수록 높아졌다. 중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 고 만력(萬曆) 33년(1605, 선조38) 정시(庭試)에 급제하였는데 선조(宣祖)가 이때 지은 과문(科文)을 빼어나게 여겨 어필(御筆) 로 비점(批點)을 찍어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도록 특별히 명 하였다. 처음에 성균관(成均館)에 소속되어 학유(學諭)가 되었 다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고 형조와 호조의 좌랑(佐郞)을 역임 하고서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병조 좌랑을 거쳐 외직 (外職)으로 나가 영암 군수(靈巖郡守)가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파직되어 돌아왔다. 다시 정언 겸 지제교(正言兼知製敎)에 임명 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영천 군수(榮川郡守)가 되었는데 연이어 어떤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고 삼도토포사(三道討捕使)에 임명되었다. 이때 대도(大盜)가 호남과 영남에 창궐하니 조정에서 이를 근심하여 공으로 하여금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공은 각 도(道)를 드나들며 간간이 장리(將吏)를 선발해 독찰(督察)하여 도적을 모 조리 잡아 참수하니 도적에 대한 걱정이 마침내 사라진지라 포상 하여 통정(通政)의 품계를 내렸다.
조정으로 들어와 예조 참의가 되었다가 동부승지로 옮겼다. 이 때 광해군이 정사(政事)가 혼란하여 간흉(奸凶)들이 득세하여 금 용(金墉)의 화변(禍變)35이 막 발생하여 그치지 않으니 공은 조정 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외직을 청 해 상주 목사(尙州牧使)가 되었다. 부임하는 도중(途中)에 시를 지으니,
聞來世故心如醉 세상 일 듣다 보니 마음에 취한 듯한데
看到時危鬢已蓬 위태로운 시국 보며 살쩍이 벌써 세었네
安得滄波無限月 어찌하면 푸른 물결의 무한한 달빛 아래
解官歸作釣魚翁 벼슬 그만두고 돌아가 낚시하는 늙은이 될꼬
라고 하였다.
부임하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와 창석(蒼石) 이준(李峻)이 이 지역에 살고 있어 의기가 투합하여 즐거워하였 다. 일찍이 인근 고을의 봉생정(鳳笙亭)에서 함께 노닐었는데 산 수(山水)가 빼어나고 그윽한 곳이었다. 술기운이 오르자 정공(鄭公)이 그에게 이르기를, “시국(時局)이 망극(罔極)하니 만일 토구(菟裘)의 계획을 세운다면 이곳을 놔두고 어디로 가시겠소?” 라고 하니, 공은 돌아가 은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공들이 물력 (物力)을 내어 정사(精舍)를 지었는데 공이 또 글을 지어 이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
마침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여 간흉들이 형벌을 받아 죽고 공들도 모두 소명(召命)에 응하였다. 공도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형조참의 겸 승문원제조(刑曹參議兼承文院提調)에 임명되고 조 경사(朝京使 명나라에 가는 사신)에 차출되었는데 황달병에 걸려 가지 못하였다. 이윽고 부원수(副元帥) 이괄(李适)이 반역하였다는 글이 이르자 임금이 남쪽으로 몽진했는데 공은 질병에도 막 무릅쓰고 가서야 비로소 행재소(行在所)에 뒤미쳐 갈 수 있었다. 간관(諫官)이 이 일로 공을 탄핵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좌승지 에 제수되자, 사헌부 관원이 다시 그 문제를 거론하면서 전조(銓曹 이조(吏曹))까지 아울러 추고(推考)하였다. 마침 청음(淸陰) 김 상헌(金尙憲)이 이조 참의로 있으면서 대답한 말이 자못 준엄하 자 헌관은 인피(引避)하면서 공에게 이전의 잘못이 있다고 말하 기까지 하였는데 이는 혼조(昏朝 광해군) 때 승정원의 승지로 있 던 일을 지적한 것이었다. 무릇 사람을 아는 일은 본래 쉽지 않 다. 공은 이미 당시에 억지로 애써 한번 벼슬에 나오는 것을 마 음에 좋지 않다고 여기면서 외직을 청하고 매우 부지런히 물러 날 생각을 했으니 평생 쌓은 뜻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도리 어 격렬한 논쟁을 기회로 삼아 서로 이기기만 힘쓴다면 거의 또 한 공의 본래 모습을 알지 못하고 그러한 것이다. 이는 반드시 헤 아릴 수 있는 이가 있을 것이다.
다시 형조참의 겸 승문원제조에 임명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외직으로 나가 회양 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 이때 조사(詔使) 강왈광(姜曰廣), 왕몽윤(王夢尹)이 우리나라에 오자 빈사(儐使) 북저(北渚) 김류(金瑬)가 공이 나라를 빛낼 재주가 있다고 아뢰자, 소환하라고 명하니 조사를 맞이해 오는 길에서 주고받 은 시가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중형(仲兄) 현곡(玄谷) 위 한(緯韓) 역시 양양 군수(襄陽郡守)로 아울러 소명을 받으니 당시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조정에 들어와 승정원에 임명되었 는데 난청을 앓고 있다는 이유로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다시 예조참의를 거쳤다가 외직으로 나가 선산 부사(善山府使)가 되어 임기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갑자기 얼굴에 생긴 종기를 앓다 일어 나지 못하였으니, 숭정 4년(1631, 인조9) 9월 모일이었다. 교하 (交河) 맹곡(孟谷) 묘좌(卯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남보다 뛰어나고 기개(氣槪)가 걸출하여 드넓으면서도 능히 간약(簡約)하였고 엄숙하면서도 능히 온화(溫和)하여 예(禮)로써 가정에서 행하고 인(仁)으로써 정사에 임하였 고 세리(勢利)에 담담하고 빙벽(氷檗)으로 자신을 경계하였다. 더하여 문무(文武)의 재략이 있어 내직과 외직을 출입하면서 명성과 공적이 매우 높았으니 당대의 정사를 보좌하여 역사에 공 명(功名)을 드러낼 만하였는데 결국 또한 뜻을 다 펴지 못하였다. 어린 시절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는데 왜란을 당해 어머 니를 등에 업고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고서 좋은 음식 올리는 일 을 빠뜨리지 않으니 보는 사람마다 모두 탄복하였다. 늘 벼슬하 느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는 것을 종신(終身)의 아픔으로 여기 고 진미(珍味)를 대할 적마다 슬픔으로 목메어 차마 먹지 못했다. 또 가난하게 사는 누이가 한 명 있었는데 어버이처럼 받들면서 늙어서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평소 지낼 때 반드시 일찍 일어 나 빗질하고 세수하고서 옷깃을 바르게 여미고 단정히 앉으니 바 라보면 엄숙하여 범할 수 없엇다. 자제를 가르칠 때는 엄하면서 도 법도가 있었고 규중(閨中)에서 내외(內外)를 엄숙히 단속하여 마치 조정(朝廷)과 같았다. 여러 차례 큰 고을을 맡으면서 공평하 고 너그러우면서도 위엄이 있어 백성은 사랑하고 아전은 두려워 했기에 매양 떠나간 뒤에 그리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농간을 없 애고 번다함을 줄이는 문제에 있어서는 일을 만날 때마다 바람이 이는 것처럼 신속하였고 도적 소굴을 평정(平定)할 때는 늘 여유 가 있었다. 관직에서 물러나는 날에 행낭이 비어 있어 늘 남에게 노자를 빌렸으니 평소 소박한 처세가 그러하였던 것이다. 선진(先秦)의 고문(古文)을 즐겨 읽으면서 온갖 서적까지 나아 가 살펴보지 않은 책이 없는지라 그 문장이 끝없이 넓고 거침없 이 쏟아내어 여러 문체를 두루 구비하여 길건 짧건 마음대로 지 었는데 그중에도 소(騷)·부(賦), 변려(騈儷)에 더욱 뛰어났기에 식 자(識者)들이 초(楚), 한(漢), 육조(六朝)의 유법(遺法)을 능히 터득 하였다고 하였다. 요컨대 그 성취한 바는 참으로 한때의 소가(小家) 정도로 평가할 수 있는 분이 아니었다. 만년에 서예를 좋아하여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의 필법의 경지에 깊이 나아갔는 데 휘호한 글씨를 어쩌다 만나면 사람들이 반드시 보관하면서 귀 하게 여겼다. 이런 까닭으로 벗으로 어울려 지내는 이들로 이를 테면 석주(石洲) 권필(權韠),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소암(疏庵) 임숙영(任叔英) 같은 분들은 예원(藝苑 문단)의 거장이라고 일컬어졌는데도 모두 옷깃을 여미며 공을 추존(推尊)하였다. 그 리고 후배로 이를테면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천파(天坡) 오숙(吳䎘), 소은(素隱) 신천익(愼天翊) 같은 이들이 다들 공을 종유 하여 수업하고 강론하여 명성을 이루었다.
선생은 식견과 도량이 원대하여 성품이 비록 악을 미워하였으 나 일찍이 남의 과실을 드러낸 적이 없었는데 오직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두 원수(元帥)가 살아서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특히 심하게 우울해 하고 분노하면서 시를 지어 속마음을 나타내었으 니 그 대의에 밝음이 이와 같았다. 조정에 있을 때는 일찍이 권세 가(權勢家)에 발길을 들이지 않았고 이르는 곳마다 유사(儒士)와 현호(賢豪)들과 종유하여 종종 속세를 벗어난 고고한 의취가 있 었다. 사문(斯文)에 가장 뜻을 두어 일찍이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두 분이 주고받은 편지를 간행하면서 빠뜨린 글까지 포함하니 이에 힘입어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 또 김주(金澍), 하위지(河緯地)를 직접 제사 지내고 이어 내격묘(來格廟)를 창건하여 김공을 제사 지냈는데 막 제기를 진설하고 있을 때 신령한 무지개가 옛 묘에서 떠올라 곧장 사당 문앞까지 뻗으 니 보는 이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공은 모두 두 번 장가 들었다. 전부인 류씨(柳氏)는 지평(持平)은(溵)의 따님으로, 정숙(貞淑)하고 부도(婦道)가 있었는데 정유 재란(丁酉再亂) 때 왜적을 만나 스스로 목을 찌르고 죽으니 나주 (羅州) 초곡(草谷)에 장사 지냈다. 후취 부인 기씨(奇氏)는 첨정(僉正) 효증(孝曾)의 따님으로, 바로 고봉 선생 대승(大升)의 손녀이 다. 장엄(莊嚴)하고 법도(法度)가 있어 공을 섬길 때 시종일관 뜻 을 어김이 없었는데 경자년(1660, 현종1) 9월에 별세하니 향년 82세이며 공의 묘 왼편에 합장(合葬)하였다. 2남 2녀를 낳으니 장남 휴(休)는 현감, 차남 비(備)는 교리이다. 형제가 문행(文行) 으로 이름났으나 연이어 요절하니 애석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았 다. 따님들은 현감 이상필(李尙弼), 지사 홍처대(洪處大)에게 시 집갔다. 친손, 외손, 증손은 모두 약간 명이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世稱詞章 세상에서는 사장(詞章)을 일컬어
於道不尊 도(道)보다 높지 않다 하는데
屈馬徐庾 굴마(屈馬)와 서유(徐庾)를
夫豈輕論 어찌 가벼이 논하겠는가
唯彼政能 오직 저 정사(政事)의 재능은
人輒競長 사람들 번번이 뛰어남을 다투는데
亦有大者 또한 그중에 훌륭한 자들 있었으니
張趙龔黃 장조(張趙)와 공황(龔黃)이라네
公於二事 공은 이 두 가지 일에 있어
昭在耳目 사람들에게 환히 알려져 있으니
緃饒軒輊 설령 실컷 평가할 수는 있더라도
而莫能椓 공을 해칠 수는 없을 것이네
最是居家 무엇보다 집에서 평소 지낼 때
孝與禮須 효와 예를 실천한 것인데
矧所扶植 하물며 부식(扶植)한 바가
卓節宏儒 우뚝한 절의(節義)의 대유(大儒)임에랴
志存名敎 명교에 뜻을 두었고
行著秉彝 행실은 강상(綱常)을 드러냈네
斂茲衆美 이 많은 미덕을 거두고서
乃困鴻罹 되레 기러기처럼 그물에 곤욕을 당했네
高名奇藝 높은 명성과 빼어난 예능은
完者或難 온전히 하기가 어렵기도 하겠지만
庶久而明 오래 지나면 저절로 밝혀지리니
非所敢權 감히 저울질할 바가 아니라네
鬱鬱交山 울창한 저 교산은
帶河襟海 강을 띠로 두르고 바다를 옷깃으로 삼았네
我揭其迹 나는 공의 사적을 게시하여
俾無後昧 후일에 묻히지 않게 하노라
숭정(崇禎) 기원 후 63년 경오년(1690, 숙종16) 6월에 반남(潘南) 박세채(朴世采)는 삼가 짓는다.
-문집 1질은 숭정 83년 기축년(1709, 숙종35) 3월에 적상산성(赤裳山城)에 보관하였다.
■跋 :玄洲集跋[愼天翊]
我東雖稱小華。地實偏薄。前後詞匠大家云。皆未免局量淺狹。倘非風 習所移歟。先生述作。獨超然橫越。直得楊馬眞派。籠駕王楊盧駱。仍之 李杜韓柳之體。异乎偉哉。天翊自稚少。得侍軒屛。不但於文辭爲然。廓 而約。肅而和。履家以禮。牧民以仁。旣賢且才。何施不宜。而適値昏朝。荏苒下列。翰墨之不得售。固其所矣。命也奈何。季子備以校理。出倅任 實。幸裒刊若干首。以圖不朽。知余迷蒙。以其門人之故。委書請跋。辭謝不獲已。略陳如右。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愼天翊。謹跋。
■현주집 발문 -신천익-玄洲集跋 愼天翊
우리나라는 비록 소중화(小中華)라 일컬어지지만 땅이 치우 치고 척박하기에 앞뒤로 문장 대가(大家)라고 하는 분들이 모두 국량(局量)이 얕고 좁음을 면치 못했으니 혹여 풍습(風習)에 변화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선생의 저술은 유독 초연하게 우뚝 뛰어올라 양웅(揚雄)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진정한 후계를 곧 바로 잇고 왕발(王勃), 양형(楊炯), 노조린(盧照鄰), 낙빈왕(駱賓王)을 앞지르고 이백(李白), 두보(杜甫),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의 문체를 따랐으니, 기이하면서도 위대하다. 나 천익(天翊)후대은 어릴 적부터 선생을 곁에서 모시는 기회를 얻었는데 다만 문 장(文章)만 그런 게 아니었으니 드넓으면서도 간약(簡約)하고 엄 숙하면서도 온화하였고 예(禮)로써 가정에서 행하고 인(仁)으로 써 백성을 다스리셨다. 현철(賢哲)한 데다 재기(才氣)도 있었으니 어디에 쓰인들 맞지 않았겠는가만, 마침 혼조(昏朝 광해군)가 집 권한 때를 만나 낮은 자리에서만 맴돌았으니 문재(文才)를 인정 받아 발휘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운명이니 어 찌하겠는가. 선생의 막내아들 조비(趙備)가 교리(校理)로서, 임실 (任實)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다행히 약간의 작품들을 모아 간행 하여 불후(不朽)하게 전하기를 도모하면서 내가 어리석음을 알면 서도 선생의 문인이라는 연고로 편지를 보내 발문을 청했다. 나 는 사절하다가 그만두지 못해 위와 같이 대략 서술한다. 통정대부(通政大夫)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신천익(愼天翊)은 삼가 발문을 쓴다.
■識 :玄洲集識[趙龜祥]
先祖考遺稿。先君子莅任縣時入梓。藏其鋟板於客館矣。己酉年。客館回錄。鋟板竝爲灰燼。不肖孫龜祥。惟恐久而失其傳也。更以鑄字。印出百餘件於茂朱府。今頒於祖考子孫及若干親舊間。仍識其始末焉。時崇禎後再庚寅也。
현주집 지 –조귀상-
玄洲集識 趙龜祥
-돌아가신 조부의 유고(遺稿)는 선친(先親)께서 임실현에 부임하셨을 때 간행하고 객관(客館)에 그 판목(板木)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기유년(1669, 현종10)에 객관이 불타 버릴 때 목판까지 모두 재가 되었다. 불초한 손자 귀상(龜祥)은 행여 오래 지나 전해지지 못할까 염려하여 다시 활자를 가지 고 무주부(茂朱府)에서 백여 본(本)을 인출(印出)하였다. 지금 선조(先祖)의 자손들 및 약간의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어 그 전말(顚末)을 기록한다. 지금은 숭정(崇禎) 기원 후 두 번째 경인년(1710, 숙종36)이다.-
옮긴이
이관성(李灌成)
고려대 석사, 원광대 박사를 졸업하였다. 현재 한국호남학진흥원 연구원으로 있다. 역서로 《두시경전》과 《예원치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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