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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주련(山寺柱聯)♣

♠용산재(龍山齋) 주련(柱聯):中堂遺稿♣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8. 23.

□ 위 용산재기龍山齋記는 강씨문중에서 문제가 있다하여 용산재사실기龍山齋事實記의 형식으로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훼손된 용산재기龍山齋記의 복원은 문중에서 의논 중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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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재(龍山齋)◈

♠용산재(龍山齋) 주련(柱聯)♣

 

◐忠信謙恭 處世之方충신겸공 처세지방

☞충성과 믿음과 겸손함과 공경을 다함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니

◐承先裕後 戒之勿替승선유후 계지물체

☞선대를 계승하여 넉넉히 후대에 전하고 경계하며 바꾸지 말라.

◐黍稷非馨 惟德是馨서직비형 유덕시형

☞서직黍稷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오직 덕이 있어야 향기롭고

◐儉勤孝友 齊家之法검근효우 제가지법

☞검소 근면하고 효도하며 우애가 있음은 집안을 다스리는 법도이다.

◐金玉非珍 惟善是珍금옥비진 유선시진

☞황금과 옥이 보배가 아니라 오직 착함이 있어야 보배이니라.

[성파星坡 하동주河東州가 쓴 용산재龍山齋 현판/편액/주련]

[龍山齋記] 

雪梅谷之東 有臨溪亭 西有至愚堂 則其西北有隅曰龍山齋者 惟我七代祖 處士公及本生 高祖梅竹軒公之祭閣也 而若其歲一祭之典 則處士公之子兄弟三府君 亦幷享於此 盖從厚也 吾雪梅之姜 皆祖臨溪公 而臨溪公之五代孫 汝完骨相奇偉志氣磊落 才器溫人 竗年己有老成之名 人以身通六藝 稱世以國家靈期 是處士公其仲子來運號至愚堂 孝行旌閭 又其次孫暹 孝友懿行 鄕黨取範 則梅竹軒公也 公之諸孫曾 或嗣至愚堂公伯季氏之後 或承至愚堂公之祀 則今吾杏亭之族 皆梅竹軒公之孫 而祖處士公矣 故昔我先父兄 懼先德之或泯 香火之不虔謀所以承裕之策 而各損錢穀置 所謂宗契 及小宗契者 積年歲之功 祭田旣饒 則又蓄其餘 以爲後日建閣需用之資 及甲戌春 仲父元祚招門少輩謂曰 先人之業 不可不述 此可念也 僉曰唯唯 遂相地於龍池洞 超工鳩材 不幾月乃了役 越明年夏四月會宗族淫落 著其楣曰龍山齋 因地名地 其制爲五架 室于東西 堂于中正 面而門 土築而垣 可以公祭祀會宗族邀明舊也 是役也幹其事者 吾兄璿杭與炳觀也 再從兄橍及炳郁炳碩從而協贊焉 嗚呼 齋旣成 合有記實之文以視來來 而世變一就慘極 日當時主事諸公零落殆書 誰可堪爲之耶 稍知其顚末者 獨余在 然余亦不學老便衰 鳥敢當哉 無念今昔爲發一涕而已 余慴吾齋旣成 然成之非難 守成爲難 而守成之道 亦非有他也 詩曰 無念爾祖 聿修厥德 吾宗世以儒素著 而縱無圭組之蟬奕 然猶得列於南鄕士家之數者 莫非吾祖先行孝積德之餘休也 凡我諸族出入於斯齋者 居家而事父母必而祖先之所以事父母者事之 由其親以廣其思 則必以祖先之所以慕祖先者 吾亦如之 吾門之昌大 從可卜 而此齋之成 永有辭於來百 惟吾與諸族 盖相勉勵哉

檀紀四六六年 三月三十日 後孫 珠杏 撰

▣용산재기 龍山齋記▣ 

설매곡雪梅谷 동쪽에 임계정臨溪亭이 있고 서쪽에 지우당至愚堂이 있으니 바로 그 서북쪽 모퉁이에 위치한 이름하여 용산재龍山齋는 우리 7대조상 처사공處士公이 태어난 근본인 곳이고 고조高祖 매죽헌공梅竹軒公의 제사 지내는 곳이다. 해마다 제사 지낼 때에는 처사공의 아들 삼형제 분을 여기에서 병향幷享¹⁾하게 되니 대개 지극함을 따름이었다. 우리 설매곡雪梅谷에 사는 강씨姜氏가 모두 임계공臨溪公의 후손이요 임계공의 5대손 여완汝完이 골격이 준수하고 지기智器가 출중하여 젊을 적에 노성老成의 이름을 가졌고 남들도 몸소 육예六藝²⁾에 통달한 사람이라 일컬었으며, 처사공의 둘째아들 래운來運은 호號가 지우당至愚堂이니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았고 또 그 다음 손자 섬暹은 효우에 대한 행실이 고을에 모범이 되었으니 이 어른이 곧 매죽헌부군梅竹軒府君이다. 공의 손자와 증손이 혹은 지우당至愚堂 공의 제사祭祀를 받들게 되니 지금 행정杏亭의 종족은 모두 매죽헌공梅竹軒公의 자손으로 처사공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예전 우리 선부형先父兄³⁾께서 선조의 덕의를 모르고 제사에 정성이 없을까 두려워하여 거기에 대책을 세우고 각기 전곡錢穀⁴⁾을 내어 종계宗契와 소종계를 만들어 그것을 여러해로 길러 취토取土⁵⁾를 만들고 그 남은 것을 저축하여 뒷날 재실 건축의 자본을 세웠다.

갑술년甲戌年 봄에 중부仲父⁶⁾께서 문자질門子姪을 불러 말하기를 “선조의 재실을 아니 지을 수 없다.”하거늘 모두 옳다하고 용지동에 터를 마련하고 목공을 부르고 재목材木을 내어 몇 달 만에 역사를 마치고 이듬해 여름에 종족을 모아 낙성연落成宴을 베풀고 그 재실 이름을 용산재龍山齋라 하니 이는 땅 이름을 취함이었다. 그 제도가 4칸이요 동서로 방을 두고 가운데에 청을 만들고 정면에 문을 내고 흙으로 담장을 세우니 선조의 제사를 받들고 종족을 모으고 손님을 맞이하는데 공헌貢獻이 될만하다. 이 일에 노력한 이는 우리 형 선항璿杭과 병관炳觀이요. 재종형 윤橍과 병욱炳郁 병석炳碩이 협찬協贊하였다. 재실이 이미 이룩되었으니 마땅히 기문을 지어 후세에 보임이 옳으나 세변世變이 날로 참혹慘酷하여 또 다시 추진위원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누구가 그 기문을 하겠는가. 그 전말을 아는 이가 오직 나 뿐이었으나 나 역시 배우지 못하고 늙고 쇠약하여 어찌 감히 감당하겠는가. 옛과 지금을 생각하고 눈물을 안 흘릴 수 없다. 내 두려워하건대 우리 재실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이름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지키는 방법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시전詩傳에 말하기를 “너의 선조를 생각하거든 그 덕을 닦으라.”고 하였으니 우리 종족이 대대로 유교儒敎를 숭상崇尙하여 비록 큰벼슬은 없었으나 유림 집으로 손꼽고 있는 것은 이것이 모두 우리 선조께서 효덕을 쌓은 소치所致라 하겠으니 우리 종족이 이 재실에 출입하는 자 가정에서 부모 섬길적 반드시 우리 선조께서 부모섬기는 것과 같이 섬겨 그 어버이를 말미암아 그 생각을 넓혀 나가면 선조께서 선조 섬긴을을 우리 또한 할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우리 문중 번창함을 이로 쫓아 알 것이요 재실 건축이 길이 빛날 것이니 힘쓰지 않을 것인가.

단기 4266년 3월 30일 후손 주행珠杏 짓다.

 

【주석】

병향幷享¹⁾ : 사당이나 서원 등에서 여러 위패를 나란히 봉안하여 놓고 함께 제향하는 일

육예六藝²⁾ :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의 학문을 말한다.

선부형先父兄³⁾ : 돌아가신 아버지의 형, 큰아버지.

전곡錢穀⁴⁾ : 돈과 곡식

취토取土⁵⁾ : 장사를 지낼 때, 구덩이의 네 귀에 조금씩 놓기 위하여 길한 방위에서 흙을 떠 옴

중부仲父⁶⁾ :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둘째인 사람, 둘째아버지

 

□ 위 용산재기龍山齋記는 강씨문중에서 문제가 있다하여 용산재사실기龍山齋事實記의 형식으로 보관하고 있다고 합니다. 훼손된 용산재기龍山齋記의 복원은 문중에서 의논 중이라 합니다.

 

[龍山齋記]

姜於晉陽 鄕望也 中世以來 聲明文物 咸稱雪梅 其基祖曰臨溪公諱某 歷五世 有處士諱汝完 與其兄梅溪汝寬 師事錦陽李先生 學行器度 俱爲一時推擬 處士公有三子 仲曰至愚堂諱來運 以孝表閭 其次孫諱暹 號梅竹軒 亦有行誼 至愚公兄弟後 並不嗣 一以梅竹軒後 後之 及至至愚公宗胄 亦由梅竹軒諸孫入系 蓋自處士公 別爲一支 其祚胤之蕃 門欄之張 大抵皆出梅竹軒公 德之有流 可知也 於是相與推原所本 集貲設契 以爲虔奉二公之圖 積之累年 祭田祭器 旣巳具修而無闕矣 乃復載其贏衍 營建齋舍龍池之洞 而扁曰龍山 臨溪公 先自有亭 而至愚公 亦有舊堂可識故 是齋之置 專屬二公 而至愚公兄弟 歲薦之節 亦姑由是擧之 以其事出一家 無間去就 異日力到 或能各自立齋 亦美事也 姜君珠杏 具其事實如此 請余記之 齋之役 始於甲戌春 而飮落於乙亥首夏 倡議而綱紀者 元祚氏 珠杏之仲父也 幹事而効能者 珠杏兄瑢杭 及其族人炳觀 而珠杏 寔爲之奔奏先後焉今數十年間 諸公 皆不在 而獨珠杏 無恙 感故事 不忍泯沒 其情可念 余亦前年 屢過至愚堂 拜其主人雪獄公 而與其子炳昌兄弟 好也 及今思之 懷不自已 嗟夫 人家保存 亶由報本之誠 而其道 不離乎日用平常之間 撥其本而求其枝葉之茂無是道也 平常之中 自有悠久之義 其諸姜氏 宜各惕念 而益思無忝焉哉

歲甲午端陽節 聞韶 金榥 記

 

[용산재기 龍山齋記]

진양에서 강씨는 명망이 있어 중세中世 이래 문물을 밝히고 가르치니 모두가 눈 속의 매화라 일컬었다. 그 터에 자리한 조상을 말하기를 임계공의 이름은 모某로 5세대가 지나니 처사處士 이름이 여완汝完이 있었고 그의 형 매계梅溪 여관汝寬과 함께 금양錦陽 이李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행실과 법도와 도량을 배워 함께 하니 일시에 의심을 몰아냈다.

처사공處士公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가 말하기를 “너무 어리석다. 제삿날은 집에 와서 움직여야 하고 위문에도 상복을 입혀 표시해야 한다.”라고 했다. 그 둘째는 이름이 섬暹이고 호號가 매죽헌梅竹軒으로 또한 의리에 맞게 행동했다.

 

□ 위 문소 김황金榥이 쓴 용산재기龍山齋記는 김황선생의 사후 흩어져 있던 글들을 모아서 12책으로 발간 됐는데 그때 선생이 쓴 원문이 아니라 수정된 글로 책에 기록됐다고함. 따라서 강씨문중에서는 다시 기문을 만들기로 했다고 함. 현재 위 2개의 용산재기가 용산재龍山齋의 편액으로 걸려 있지 않는 이유라고 함.

다만 이것도 역사의 기록이라 그 사실을 남김으로서 왜곡된 역사가 얼마나 많은 문제를 낳는지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지우지 않음.

◐俛宇先生文集卷之百四十 / 記  龍山齋記 壬寅◑

중당유고 02 : 中堂遺稿  용산재에 대한 기문 龍山齋記-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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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대곡면 설매리 진주강씨 용산재 龍山齋

대곡면 설매리 692(월암로 105-19)에는 진주강씨晉州姜氏 매죽헌梅竹軒 여완汝完을 향사는 용산재龍山齋가 있다. 이곳은 위치기반고도계가 해발 55m로 표시하고 「위도35°17'20"N 경도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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