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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용주유고 제18권 / 신도비(神道碑)]▣南冥 曺先生神道碑銘 幷序▣▣영의정한음이공신도비명병서〔領議政漢陰李公神道碑銘幷序〕▣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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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유고 제18권 / 신도비(神道碑)]

▣南冥 曺先生神道碑銘 幷序▣

吾道之東久矣。本朝列聖率先登道岸。斥異端尊孔軌。以菁莪棫樸養庠膠。以玄纁禮幣聘嵒穴。至中仁明三世。尤加意斯術。於是松都得徐花潭。湖西得成大谷。湖南得李一齋。南冥先生竝峙于嶺南。實拔乎其萃。先生嶺之三嘉人也。隱於頭流山下。踐蹈矩矱。佩服仁義。必嚌胾準繩。學以顏子爲準繩。志以伊尹爲標的。陋巷之不知。單瓢之不憂。千駟之不顧。萬鍾之不受。囂囂自得。絶未有舍所樂爲世意。徵招之禮。歷三聖不解益勤。先生不得已而起赴闕下。上賜對前殿。卽明廟時也。上首問爲治爲學之方。俱質言理對。又問三顧草廬事。先生對曰。圖復漢室。必資英雄。故至於三顧。上稱善。翌日還山。初。先生辭丹城縣監也。仍上疏劇言國事非。天意去。人心離。上及慈殿乘輿。亡少忌諱。明廟怒其語太直。欲罪之。賴大臣力救而止。其后宣廟元年。先生上封事。論人主出治之本。又論胥吏專國之弊。數十百言掣領痛快。曲折摐摐。識者以爲覰破二百年國家養瘍。雖倉,扁何以加。疏入。上優批以答。召旨粟肉前後相銜者累年。先生一決去就。不復幡然。壬申春。先生寢疾。本道以聞。上遣中使問疾。至則先生已逝矣。訃聞。特命贈司諫院大司諫。蓋嘗欲以命先生者申其志。又命有司賜賻。又命儀曹賜祭。郞將文以祭。嗚呼。先生之道。在易蠱之上九。惟持道德。不偶於時。而高潔自守者是已。然其志以君民爲憂。故率所發於口。不徒爲處士之大言也。昔羊裘男子。與帝共臥外無聞半辭裨補漢室。泰原周儻。伏而不謁而已。是雖宿高士名於一時。雲臺博士范升之譏隨其后。先生則不然。所上封事。無非匡君之事。拯民救世之策。千秋之士必有讀未半。廢書而泣者矣。惜也聖聖相繼。而不能盡用其言。歸咎無處。寧獨先生之不幸。絅生也後。去先生之世。幾乎百有餘載。唯其昔客南土。過先生桑梓鄕。峭壁謁霄。玉流噴壑。不受一塵之惹者。呪若挹先生之謦欬其側也。徘徊悵然。慕之者久之。今先生之後孫察訪晉明,晉士俊明等。與嶺之人士謀曰。朝家始贈先生以諫議。后加贈議政。且有諡。於法宜樹豐碑於墓道。至今無顯刻。不肖敢以煩執事。某禮辭曰。惡惡可。不佞直拘曲士耳。安敢形容老先生盛德。戴穢佛頭之譏是懼。然南冥先生之爲秋霜烈日。至今不泯於婦孺田畯之口。某雖不敏。獨後是歟。遂先敍先王就賢體遠之異數。仍及先生出處語默大節。若夫先生爲學次第。入道憤孟。文章奇古。先生道義友大谷成先生備勒麗牲之石。不遺錙銖。他人畫蛇足則妄也。先生諱植。字楗中。號南冥。曺故爲官族。自麗入我朝。名卿大夫不絶。有諱彥亨。選爲吏曹正郞。至承文院判校以卒。先生皇考也。娉李原之女生先生。先生娉南平曺氏生子。名次山。苗而不秀。置便房生若而人。俊明,晉明。孫也。先生墓在頭流之雲洞山天齋後。先生沒五年。學者創德川,晦山兩處書院俎豆之。於乎。先生人品甚高。器局峻整。識與不識。見先生莫不加敬。先生於人少許可。獨於退溪先生。不以無一日雅爲嫌。往復書牘甚數。必稱先生。后之論者或以爲二先生不相能。異哉。銘曰。

方丈之山嵒嵒而萬丈。先生之氣象兮百世所仰。雙溪之水泓澄而蕭瑟。先生之道德兮愈往而潑潑。帷君子所愼進退出處兮。不以道曷取夫隱遯。道之難行兮寧卷而懷兮。滋蘭九畹。先聖王不徒徵辟而褒美之兮。蓋將風之乎天下之士。山海之洞雲物不改兮。負鼇蟠螭者先生神道碑耶。我命刻之。起遐想於綠竹猗猗。

[남명 조 선생 신도비명병서[南冥曺先生神道碑銘幷序〕]

우리 도가 동쪽으로 온 지 오래되었다. 본조의 여러 성군이 솔선하여 도의 언덕에 올라 이단을 배척하고 공자의 법도를 존숭하여서 청아(菁莪)역복(棫樸)으로 유생을 기르고 비단과 예물로 초야의 은자를 불러들였다. 중종, 인종, 명종 3대에 이르러선 더욱 여기에 뜻을 다하니 이때 송도(松都)에서는 서화담(徐花潭 서경덕(徐敬德))을 얻었고 호서에서는 성대곡(成大谷 성운(成運))을 얻었고 호남에서는 이일재(李一齋 이항(李恒))를 얻었다. 남명 선생은 이분들과 나란히 영남에서 우뚝 섰으니 진실로 무리 중에 빼어난 분이셨다.

선생은 영남의 삼가(三嘉) 사람이다. 두류산(頭流山) 아래에 은거하여 법규를 실천하고 인의를 시행하기를 반드시 고기 씹듯이 하였다. 학문은 안자(顔子)를 모범으로 삼았고 뜻은 이윤(伊尹)을 목표로 여겼다. 누추한 거리에 사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도시락밥과 표주박 물을 마시면서도 근심하지 않았으며, 천승의 높은 벼슬도 돌아보지 않고 만종의 많은 봉록도 받지 않았다. 홀로 자득하여 자신의 즐거움을 버리고 세상에 나갈 뜻을 결코 가지지 않았다.

은자를 초빙하는 예가 3대의 성군을 거치면서 더욱 부지런히 행해지고 느슨해지지 않아서 선생은 어쩔 수 없이 일어나 대궐로 나아갔다. 성상이 전전(前殿 사정전(思政殿))에서 사대하였으니 이때가 명종 때였다. 성상께서 제일 먼저 나라를 다스리고 학문을 하는 방법을 물었는데, 솔직한 말로 이치에 맞게 대답하였다. 또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일을 물었는데, 선생이 대답하기를,

“한나라 왕실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웅의 힘을 빌어야 했기 때문에 세 번까지 찾아가기에 이른 것입니다.”

하자, 성상께서 훌륭하다고 칭찬하셨다. 다음날 산으로 돌아갔다.

전에 선생이 단성 현감(丹城縣監)을 사양할 때 곧이어 상소를 올려 국사가 그릇되고 하늘의 뜻이 떠나고 인심이 이반되었음을 극력 간하고, 위로 자전(慈殿,문정왕후)과 성상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거리낌 없이 언급하니, 명종께서 그 말이 너무 직설적인 것에 분노하여 선생을 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신(大臣)이 힘써 구명한 덕분에 중지되었다.

그 후 선조 원년(1568)에 선생은 봉사(封事)를 올려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논하였고, 또 서리들이 국사를 전행(專行)하는 폐단을 논하였는데, 백 마디의 말이 핵심을 찔러 통쾌하였고 까닭을 일일이 밝힌 것이 조리가 있었다. 식자들이 국가가 2백 년 간 키워온 문제점을 간파하였다고 평가하였으니 비록 창공(倉公)과 편작(扁鵲)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상소가 들어가자 성상은 후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소지(召旨)와 곡식, 고기가 이어진 것이 전후로 여러 해였지만 선생은 한 번 거취를 정하고는 다시 번복하지 않았다.

임신년(1572, 선조5) 봄에 선생의 병이 깊어져 본도(本道)에서 조정에 보고하자 성상이 병문안하도록 중사(中使)를 보냈는데, 도착했을 땐 이미 선생은 돌아가시고 난 후였다. 부음을 듣고 특별히 명하여 사간원 대사간에 증직하였으니, 이는 일찍이 선생에게 이 관직을 명하고자 했었기 때문에 그 뜻을 편 것이다. 또 담당관에게 명하여 부의(賻儀)를 내렸고, 또 예조에 명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여 낭관이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아, 선생의 도는 주역고괘(蠱卦)의 상구(上九)에 해당한다. 오직 도와 덕을 지키며 때를 만나지 못하여 고결하게 자신을 지킬 뿐이었다. 그러나 그 뜻은 임금과 백성을 걱정하였기 때문에 입에서 내는 대부분 말이 단지 시골 선비의 큰소리만은 아니었다.

옛날 양가죽 옷을 입은 남자가 황제와 함께 누워 잤다는 것 말고는 반 마디 말이라도 한나라 왕실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태원(泰原)의 주당(周黨)은 엎드리기만 하고 배알을 하지 않았으니 비록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비로 당시에 이름이 났음에도 운대 박사(雲臺博士) 범승(范升)의 비판이 그 뒤를 따르게 된 것이다. 선생은 그렇지 않아서 선생이 올린 봉사는 임금을 바로 잡는 일, 백성과 세상을 구원하는 방책이 아닌 것이 없었으니 천 년 후세의 선비들 중 반드시 반을 읽기도 전에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릴 자가 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성군이 잇달아 왕위를 이었지만 그 말을 다 채용하지 못하고 허물을 돌릴 곳이 없었으니 어찌 선생 혼자만의 불행이겠는가.

나는 후세에 태어나 선생이 살았던 시대와 거의 백여 년이나 차이가 난다. 옛날에 남쪽에서 객지살이할 때에 선생의 고향을 들렀었는데, 깎아지른 절벽이 하늘까지 닿고 맑은 물이 계곡에서 뿜어 나와 더러운 먼지 한 점도 용납하지 않았다. 황홀히 마치 선생의 기척이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듯하여 한참 동안 슬픈 마음에 서성이면서 그리워하였다.

지금 선생의 후손 찰방 진명(晉明)과 진사 준명(俊明) 등이 영남의 인사들과 상의하기를,

“조정에서 처음에 선생에게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증직하였고 뒤에 의정(議政)을 더 증직하였으며 또 시호가 있으니, 법으로 보면 마땅히 묘소에 공적을 새긴 큰 비석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비석이 없으니 저희가 감히 이 일로 집사께 번거로이 부탁을 드립니다.”

하였다. 나는 예로 사양하기를,

“어찌 가당키나 한 말인가. 나는 그저 보잘것없는 선비일 뿐이네. 어찌 감히 선생의 성덕을 형용할 수 있겠는가. 부처 머리에 똥칠한다는 비난이 두렵구먼. 그러나 남명 선생의 추상과 같고 태양과 같은 기상은 지금까지 아녀자며 어린아이며 농부의 입에서 사라지지 않으니, 내가 비록 불민하지만 어찌 그들에게 뒤지겠는가.”

하고, 마침내 선왕이 어진 이에게 나아가 배우고 멀리 있는 신하를 살피는 특별한 은혜를 먼저 서술하고 이어서 선생의 출처(出處)와 어묵(語黙)의 큰 절개를 언급하였다.

선생의 학문의 차례나 도에 들어가기 위한 분발과 맹렬함, 그리고 문장의 뛰어남과 예스러움은 선생께서 도의(道義)로 사귀었던 대곡(大谷) 성 선생(成先生 성운(成運))이 상세하게 기록한 묘갈명에 빠짐없이 들어있으니 다른 사람이 사족을 붙이는 것은 망녕된 일이다.

선생의 휘는 식(植), 자는 건중(楗中), 호는 남명(南冥)이다. 조씨는 본래 대대로 벼슬한 집안으로 고려 때부터 조선에 들어와서까지 이름난 경(卿)과 대부가 끊이지 않았다. 휘 언형(彦亨)은 이조 정랑에 선발되어 승문원 판교로 생을 마감했는데, 선생의 부친이다. 이원(李原)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남평 조씨(南平曺氏)에게 장가들어 아들 차산(次山)을 낳았는데, 대성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측실을 두어 몇 명의 자식을 두었다. 준명(俊明)과 진명(晉明)은 손자이다. 선생의 묘는 두류산 운동(雲洞) 산천재(山天齋) 뒤에 있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5년 뒤에 학자들이 덕천(德川)과 회산(晦山) 두 곳에 서원을 창건하고 제사를 올리고 있다.

아, 선생의 인품이 매우 고상하고 기국이 준엄하여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선생을 만나면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은 다른 사람을 잘 인정하지 않았는데, 유독 퇴계 선생에게만은 단 하루도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꺼리지 않고 매우 자주 서신을 왕래하면서 꼭 선생이라고 칭하였다. 훗날 논하는 자들이 간혹 두 선생이 서로 잘 지내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상한 일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방장산은 높아서 만 길이나 솟아있고 / 方丈之山嵒嵒而萬丈
선생의 기상은 백대토록 추앙받네 / 先生之氣象兮百世所仰
쌍계의 물은 깊고 맑아 소슬하고 / 雙溪之水泓澄而蕭瑟
선생의 도덕은 갈수록 더욱 생기 넘치네 / 先生之道德兮愈往而潑潑
군자가 삼갈 바는 진퇴와 출처이니 / 帷君子所愼進退出處兮
도에 맞지 않았다면 어찌 은둔하였겠나 / 不以道曷取夫隱遯
도를 행하기 어려워 / 道之難行兮
차라리 거두어 가슴에 품었으니 / 寧卷而懷兮
구원에 난초 심은 군자라네 / 滋蘭九畹
선왕이 징초하여 포상까지 하였으니 / 先聖王不徒徵辟而褒美之兮
천하의 선비들을 풍동하기 위해서라네 / 蓋將風之乎天下之士
산해정 골짜기 경물은 변하지 않았는데 / 山海之洞雲物不改兮
자라 등에 서린 용, 선생의 신도비라네 / 負鰲蟠螭者先生神道碑耶
내 여기에 명하여 새기노니 / 我命刻之
무성한 푸른 대나무 회상하기 위해서라네 / 起遐想於綠竹猗猗

[주-D001] 남명 …… 신도비명:

이 글은 조식(曺植, 1501~1572)에 대한 신도비명이다. 조식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中), 호는 남명(南冥)이다. 이 신도비명은 조식이 시호를 받은 1615년 이후에 지은 것으로 보이나, 그 이상은 자세하지 않다.

[주-D002] 청아(菁莪)와 역복(棫樸):

〈청아(菁莪)〉는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이고, 〈역복(棫樸)〉은 〈대아(大雅)〉의 편명으로 두 편 모두 인재를 양성하는 교화를 말한 것이다.

[주-D003] 법규를 …… 시행하기를:

원문은 ‘패복인의필제자준승(佩服仁義必嚌胾準繩)’인데, ‘준승(準繩)’을 오기로 판단한 저본의 난외주에 따라 빼고 번역하였다.

[주-D004] 위로 …… 언급하니:

남명이 올린 소의 내용 중에 “자전은 심궁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선왕의 외로운 아들일 뿐이다.”라는 언급을 가리킨다. 《南冥集 卷4 行狀, 韓國文集叢刊 31輯》

[주-D005] 창공(倉公)과 편작(扁鵲):

편작은 전국 시대 때의 명의(名醫) 진월인(秦越人)이고, 창공은 한(漢)나라 명의 순우의(淳于意)로 제(齊)에 벼슬하여 태창장(太倉長)이 되었으므로 세칭 태창공(太倉公)이라고도 한다. 《史記 卷105 扁鵲倉公列傳》

[주-D006] 후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1571년(선조5)에 내려진 비답으로, 한국문집총간 31집에 수록된 《남명집(南冥集)》 권3 〈교지(敎旨)〉에 실려 있다.

[주-D007] 선생의 …… 뿐이었다:

조정에 나아가 정사에 참여하지 않고 초야에서 자시의 덕과 도를 닦으며 고결함을 지킨 남명의 삶을 《주역》의 효사에 기대어 설명한 것이다. 고괘(蠱卦) 상구(上九)의 효사(爻辭)에 “왕후를 섬기지 않고 그 일을 고상히 한다.〔不事王侯, 高尙其事.〕”라고 하였는데, 정이(程頤)의 주석에, “선비가 스스로 고상히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만 있지 않다. 도덕(道德)을 품고서 때를 만나지 못하여 고결함으로 스스로 지키는 자가 있으며, 만족함에 그치는 도(道)를 알고 물러가 스스로 보존하는 자가 있으며, 자신의 능력을 헤아리고 분수를 헤아려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음에 편안한 자가 있으며, 청렴하고 깨끗하여 스스로 지켜서 천하의 일을 좋게 여기지 않고 홀로 그 몸을 깨끗이 하는 자가 있으니, 처한 바는 비록 득실(得失)과 대소(大小)의 차이가 있으나 모두 스스로 그 일을 고상히 하는 자이다.” 하였다.

[주-D008] 옛날 …… 못했다:

양가죽 옷을 입은 남자는 후한(後漢) 때의 엄광(嚴光)을 말하는데, 광무제의 친구였지만 광무제 재위 이후 성명을 바꾸고 양가죽을 입은 채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했었다. 후에 광무제의 부름을 받고 궁궐로 찾아가 함께 잠을 잘 정도로 편안하게 굴었지만 결국 벼슬하지 않고 다시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後漢書 卷83 嚴光列傳》

[주-D009] 태원(泰原)의 …… 것이다:

주당(周黨)은 후한(後漢) 때 태원(太原) 광무(廣武) 사람인데, 그는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연간에 의랑(議郞)으로 초빙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고, 광무제가 인견하자 자신의 뜻을 지키고 싶다고 아뢴 뒤에 드디어 평생 민지(澠池)에 은거하였다. 그는 광무제가 인견했을 때 부복(俯伏)하기만 하고 배알(拜謁)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박사(博士) 범승이 “신하로서의 예의가 없다.”라고 탄핵한 것을 말한다. 《後漢書 卷83 周黨列傳》

[주-D010] 대곡(大谷) …… 묘갈명:

한국문집총간 28집에 수록된 《대곡집(大谷集)》 권하에 〈남명 선생 묘갈(南溟先生墓碣)〉이 실려 있다.

[주-D011] 구원에 …… 군자라네:

초(楚)나라 굴원(屈原)이 조정에서 모함을 받고 쫓겨난 뒤에도 계속 인의(仁義)를 고수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내가 구원의 땅에 이미 난초를 심어 놓고는, 다시 백 묘(畝)의 땅에다 혜초를 심었노라.〔余旣滋蘭之九畹兮, 又樹蕙之百畝.〕”라고 읊었다. 《楚辭 離騷》

[주-D012] 산해정(山海亭):

남명이 김해(金海) 탄동(炭洞)에 지은 정자이다.

[주-D013] 무성한 푸른 대나무:

덕이 높은 군자를 상징하는 말이다. 《시경》 〈기욱(淇奧)〉 편에서 위무공(衛武公)을 칭송하여 “저 기수 물굽이를 굽어보니, 푸른 대나무가 무성하도다. 아름답게 문채 나는 우리 님이여, 깎고 다듬은 다음 또 쪼고 간 듯하네.〔瞻彼淇奧, 綠竹猗猗。有斐君子, 如切如磋, 如琢如磨.〕”라고 하였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이라나 김하라 (공역) | 2015

 

용주유고 제18권 / 신도비(神道碑)

▣領議政漢陰李公神道碑銘 幷序▣

故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漢陰李公。葬在楊根之龍津江上。漢陽趙絅刻其墓碑曰。昔我宣祖大王平夷難還舊都。以恢中興之業。聽輿人之誦。咸曰。姓李三相輔之翼之。左之右之。以有今日云。三相卽李完平,李鼇城,漢陰公也。公於三相中年最少才最雋。協心同德。與俱上下。知有國而不知有身。公實爲最。公諱德馨。字明甫。其居在漢山陰。故自號漢陰。其先廣州人。有諱集。以文行致大名。當恭愍世。賊僧旽惡而欲害之。負其父唐。逃隱永川。旽誅。仕爲判典校寺事。事載麗史。與鄭圃隱相善。及卒。圃隱以詩哭。遁村是也。入我朝。曰仁孫。曰克均。父子爲相。李氏遂大顯。克均被燕山甲子禍。於公五代祖也。諱世俊。府使。爲公高祖。諱守忠。贈吏部尙書。爲公曾祖。諱振慶。賢而蚤世。贈貳公。爲公祖考。考諱民聖。知中樞。贈領議政。室文化柳氏。縣令禮善之女。公生於嘉靖辛酉。生有異質。沈毅醇謹。不喜嬉戲。八歲入學。刺口難疑。非孺子爲者。未舞象。卓然早成。楊蓬萊士彥携遊山水間。有唱斯和。愈出愈佳。蓬萊嗟賞曰。子我師也。公所吟綠陰白煙等四句。刻之錦水溪石。至今宛然。二十。對策登上第。由槐院薦史苑。時外舅鵝溪公方主中祕書。公嫌不應講。宣廟將講綱目。命選備顧問才臣五人。出御府冊界之。公與焉。一時榮之。壬午。詔使王敬民來游漢江曰。聞東國李某好人。得見不。公以外臣無私交辭。王公書贈一絶。敍曰。聞君風度出乎類。余雖未獲交贄。贈此以爲神交云。俄拜弘文正字。且賜暇。與白沙同升。淸選之極。栗谷公方握文衡主是選。有一宰夜抵栗谷所曰。兩李果人望。公如未諳意向薦之。恐壞了時事。栗谷曰。薦人在得人。胡論意向。其人爭之不得。夜深乃去。明年。上幸瑞蔥臺。公應製居第一。自是戰藝常冠軍。然不欲多上人。公志也。嘗於庭試。同進者出噎媢語。公遂稱疾讓登。聞者偉之。陞副修撰。歷正言,副校理。爲選曹員外。戊子。日本玄蘇,平義智來聘。公以吏曹正郞任宣慰。一倭望公儀觀。不覺起敬。及入京享燕。蘇等請報聘甚力。公正色曰。交隣修好。舍信義無適。日爾國封疆臣。挾我亡虜沙火同。憑陵我邊陲。係虜我人民。爾國莫之禁。信義惡在。語未卒。蘇,智遣卒倭。不踰月。執沙火同及被擄髦倪百餘指以獻。上嘉之。特拜直提學。賜銀帶。庚寅。陞同副承旨。歷右副,副提學,諫長,國子,銓議。辛卯。超拜。禮曹參判兼大提學。時年三十一。自春亭以后典之衡者皆用宿德峻秩。未有如公妙齡得之者。當時老於文學及畜銳超乘者不止若而人。至登壇執牛耳。咸曰。莫先李某。壬辰。島夷爲封豕長蛇。荐食我國。宣言要見李某議媾。宣廟歷問于朝。囁嚅不能對。公進曰。急病。臣職也。請單騎馳至駒城。翟氛散漫。無隙可投。還到漢江則大駕已西狩矣。從間道及平壤。賊逼浿水。又請見公。公又請往。單舸會江中。群臣諸將望見者。無不變色易容。公見賊。氣自若責之曰。爾等無故興兵。壞百年好何。蘇等曰。吾欲入大明。朝鮮不假軍塗之故。公乃竦顏折之曰。爾欲寇我父母國。我國有亡而已。何以和爲。其後蘇等嘖嘖稱公曰。對壘辭語。無異昔日樽俎間。信難及也。公夜渡大同。上謁帳殿。與大戎鼇城合力陳乞救天朝事。大臣難之。公抗言不已。議遂定。駕次定州。乃遣公行。與鼇城班荊而別。其贈處之言。壹似申胥我能興楚者。人皆知公必能辦此也。及至遼。雀立不轉。沫血飮泣。上巡按書者六。巡按郝杰歎公竭蹶露衷。不暇以聞。便宜發祖承訓等三將。先嘗倭少䘐。天子於是赫怒。大發兵李如松爲大都督。諸將賈勇競勸。一鼓而熸丸都賊屯。於是東人廩廩。始有恢復之望矣。明年。公以都憲出儐都督。左參幕籌。右主軍餉。雖以都督之嚴。遇事肯䋜則必問公斷。當是之時。血流原野。都鄙赤立。公徒以忠義激瘡痍心。飛輓未嘗乏絶。兵馬賴以飽騰。卒使天兵長弟復三京如指掌焉。論其功懋。孰與高下。上嘉悅。增秩大司寇。夏四月。公導天兵入漢陽。汛掃廟社灰燼大臨。故老餘存者無不涕泣。見公如見父母。京城新刳於兵。饑疫交熾。父子齩骨之民。嗷嗷荊棘中。僵殍縱橫道路。公拮据卒食之踦。賑活翳桑。殆不可數。又鳩書籍散逸者。以備講帷。頃公代鼇城授本兵。與西厓柳相撫綏都民。甲午。丁內艱。上以爲虞危未弭。李某國之楨幹。一日不可無。命起復。公九上章辭不報。下峻批至曰。予不以賊不退爲憂。以卿不出爲憂。公不得已飮泣赴朝。拜吏判。陳時務八條。鑿鑿中端。若兪,扁之用藥。皆可以起死回生也。其中穀飢民丁壯充禁旅。號曰訓鍊都監。凡戈楯炮鈹。皆放戚啓光書也。廣設屯田于中外。以贍國用。以足軍餉。趙營平之策。無以過也。識者謂中興之本。實在此擧云。乙未。移兵書。丙申。湖西賊夢鶴稱兵陷二邑。洪州牧洪可巨討誅之。餘黨被逮。誣引公名。若己酉之變李相浚慶名出賊口者。公席藁待命。上數下溫諭。且使參鞫。公十上章。堅懇不已。始釋本兵。丁酉。倭再𦧟我郊。天子遣四大將帥兵十萬。御史楊鎬爲監軍。楊公年少作氣勢。奴視天下士。東人聞聲洶洶。上察群臣。唯公曾入李提督幕府。得上下心。命公往擯。楊公一見傾倒。公乃言曰。今賊氛甚惡。渡漢不鼂伊夕。一失天塹。雖天兵之威。難以爲力。楊公聞言。卽投袂入城。責戰益急。麻貴鐵騎縱。鏖賊稷山素沙郊。京都再安。公力居多云。楊公乘勝而南。圍淸正於蔚山。鏟其外壘。賊衆多死。淸正郤入土空。雌聲乞降。會天大雨雪。軍馬餒而股弁。天兵遂左次。公雖在危急中。意氣自如。楊公獨視偉之曰。李某雖在中朝。當端委廊廟。尙屈百僚。異哉。上聞卽爰立作相。時年三十八。無何。陞左台。劉提督綎引兵南下。宣廟祖送。劉斤斤言本國文武備具者第一人吾與之俱。足矣。上顧右相李恒福曰。意有在耶。對曰。必是李某。上遂命從行。劉喜曰。吾濟矣。至順天。賊酋行長窮蹙死咋。殲可指日。劉性狡獪。恐人分功。陰諭行長遁。公鉤得其狀。令統制使李舜臣約水軍提督陳璘。隘諸要港大破之。行長堇以身免。綎聞之大恚曰。李某墮我三十年勳名耶。己亥。洪汝諄摘此媒孼公。公卜上章乞解。上批曰。卿之心事如靑天白日。狂風驟雨雖或間發。其體自若。卿旣內省不疚。劉氏之子。焉能害之哉。公猶不自安。累控解相印。授判中樞。辛丑。以都體察使鎭南徼。肅軍政爬民瘼。湖嶺以寧。公長於料敵。敵之情僞。效於指詘。倭使橘知正把書契來。虛喝求和。公以爲此馬島諼。非日本事也。郤而不內。且語橘倭曰。天朝以女倭傾側反覆。留兵本國以備非常。女敢於此時以躛言慢我。仍集天兵之落南不歸者。娖隊馳告郉軍門。博諭帖張諸釜營。賊關口而退。壬寅。入爲領議政。癸卯。白虹貫日。上命二品以上言事。公進言忤旨。遞拜領中樞。時策宣武扈聖等勳開局。宣廟下敎曰。李某當倭寇充斥日。單騎見賊酋。非忘身徇國者不能。趣命錄勳。公八上箚辭。上不許。及勘勳。時相柳永夢人指公箚曰。此實錄也。漢老辭勳宜矣。遂不錄。物議譁然。戊申。宣廟上賓。梓宮在殯。人告臨海叛。三司直請按律。光海下大臣議。公與左相李恒福。同言恩當掩義。鄭寒岡逑以都憲。陳疏主全恩。李相元翼箚辭亦主全恩。時論鵲起呶呶。目全恩爲護逆。殊不知尺布之謠文帝終身病之也。先是。天朝以舍長立庶。不許光海封典。至是告訃使李好閔至京。則輒遣嚴萬差査臨海病狂狀。擧朝錯愕。留噤而已。不敢措一辭。公趨而進曰。以弟證兄。雖下國不敢聞命。差官聞是語。不復更問。蓋萬曆末。建儲久未定。雖藩國請封。皇朝例以靳許。故光海命公爲陳奏使。公兼程疾行。二十七日入京。五閱月。幹事而回。光海大悅。陞公父通政判決事。官其子六品。錫田土臧獲倍敦。己酉春。復拜領議政。辛亥。鄭仁弘誣詆晦,退兩先生。公三上箚。痛卞仁弘之妄。壬子春。海西獄起。癸丑應犀之獄䴢起。考一連十。誣引狼籍。至焄宮禁。比壬子尤慘。讒諂態臣先中君心。光海親鞫慮囚無虛日。入侍諸臣震慴。公守正不阿。務在平反。被誣者頗釋。群宵甘心永昌大君。指爲禍本。大君才八歲矣。嗾三司請甸磬。又欲驅大臣庭請。大司憲宋淳,大司諫李冲揚言殿上曰。廷議皆以大臣不率百官伏閤爲非。居無何。爾曕直怵大臣曰。朝議欲致辟於永昌。大臣只請出置。非吾等爲宗社意也。公笑而不動。草啓猶持前議不少變。瞻等慍而無奈何。始公與鼇城議斷此事。鼇城曰。若出永昌於外而止。吾等無以死爭理。故公詘意從之。然請出永昌。亦非公之素云。永昌旣詘。猰狗狧穅。必欲及米。臺官尹訒,鄭造,丁好寬等訟。共發廢母后論。公謂鼇相曰。生乃見此事。何可一刻容忍。我心如焚。今日請與君進一箚。首以盡誠李安慈殿。反覆開陳。仍切刻言群小無天不道。叩頭流血。期以回天。庶幾哉吾責塞矣。鼇相曰。不可。吾啓辭未半。上或震電馮。或臺諫狙擊。吾何從畢吾說。然茲事體大。終必詢大臣。吾等少安毋躁。瀝盡肝血於獻議中。何磨厲如之。公亦然之。俄鼇相先被參去。公獨奈何哉。國舅金悌男被誣矺死。眈眈慈殿迫無日也。廷臣方議告延興訃于慈殿。公引春秋子無讎母絶母等語爲立議頭腦。群宵大愕。爾瞻,纘男拉惺,鼎吉爲助。操戈弩眼。以爲黨逆無過李某。三司竝請按律者浹月。光海不許。秪命削職。公退歸龍津。眷顧王國。仰屋咄咄。繼之以泣。却食不食。夜不能寐。遂得疾日惡。竟不起。卽十月九日也。春秋五十三。訃聞。光海震悼。命復原官。於是上自大夫士之賢者。下至吏胥軍旅闤闠小民。聞公之卒。無不咨嗟涕洟曰。吾其如何。或罷市巷哭。或相率出貨財裞其門。趾相嚙不止。噫。此在宋時。京師之民哭司馬溫公如是云。抑不知公何以得此於人。公之純忠一德。自壬辰浹人心腹。刃莫畢屠。斯民者三代之直道而行者也。其欲爲公死無所辭。奚收司之律足顧。公事宣廟二十九年。始也左詩右書。賁飾文治。人莫敢望焉。然功用旣興則未也。及至龍蛇大難。洪水滔天。二百年宗社生靈。呑吐於鯨鰐之喙。公以孤身重趼奔命。凡上之所急。下之所戴眼顒望者。出隻手掉寸舌。無不得意。此之爲功。雖古誰亢。公猶執謙。避之不居。君子以是尤多公云。公事光海。自戊申始也。當是時。新遭天崩之痛。虞危萬端。公之竭忠盡智。追先后之際遇。欲報新君者。諸葛武侯之心也。觀於戊申新政箚。公可謂社稷臣也。縷縷數千言。上言全臨海。次言畏天命。中言盡孝母后。下及輔道儲位。開言路。內忠直。嚴宮禁戚畹事。出入詩書易春秋。指前代以爲鑑戒。光海如用其中什一二。安有癘憐王事者。悲夫。唯公一人之身。遇宣廟則謀行功從。夷亂安邦。如坂上走丸。遇光海則其所匡君者。人以爲誹。其所盡忠者。人以爲訐。逢君從臾之徒。擧文罔而閃鑠之。公安得脫乎。千秋之士。必有讀公文於邑流涕者矣。公歿未幾。鼇相謫北靑。梧相配洪川。輿人所誦姓李三相。不死則遷。邦國安得不殄悴而卒之亡也。公精神秀朗。風度凝遠。未弱冠。人見者咸以公輔歸之。所與遊未嘗見公有喜慍色。處群從間常持卑。克伐嫮誕。一不出諸口。兒時見鄕族之貧無者。必思濟之。及貴。內外親戚無疏遠如歸。至於事親。每懷孺慕之心。天植然也。白沙李相。與公肝膽相照。死生靡間。公捐館時含沙待影者何限。白沙作公誌。不遺一事。戒公胤子勿泄。斷公平生曰。推賢讓能似子皮。應待賓客似叔向。知無不言似宋璟。尊儒樂善似留正。不立私黨似司馬光。世以爲知言。公文章出於六經。佐以洛建諸老書。斷事則主魯史聖經。稽古之力。藉涑水資治。泛濫外家。爲深博無涯涘。凡所述作。立就數千言。故丙丁年間。天將文移書牘旁午。左酬右酢。公筆居多。有韻之文。風流雅致。如其人云。夫人姓李氏。領議政山海之女。牧隱先生穡之後。婉嫕有操。事舅姑佐君子。皆盡禮敬。壬辰亂節死。年二十八。旌其門。贈貞敬夫人。生三男一女。長如圭。通政判決事。次如璧。縣監。早世。次如璜。嘉善監司。女適府使鄭基崇。廁室男三。如璞,如𤧭,如璇。女三。郡守李憕,醫官許楘。一早寡。判決生四男。象乾禁府都事。象坤,象謙,象鼎。判書李基祚,壬人崔有石,洪彙,李龜徵。壻也。縣監無子。以判決第四子象鼎爲后。監司一子。象震。六女。進士吳挺奎,參議睦行善,縣監鄭儋,壬人趙德潤,李玄年,進士徐來益。鄭基崇生四男。珍,錀,鈱,鈗。錀文科府尹。士人李明徵,正字韓五相。其壻也。內外孫曾凡幾人。公歿後十一年。仁祖大王正宗祊。公嗣子如圭始請諡狀于太學士鄭公經世。上太常入奏。諡以文翼。又四十年。公孫都事象鼎。奉鼇相所爲竁銘及愚伏堂所爲諡狀。扣不佞于靑城山。涕泗而言曰。祖父之墓木不翅拱矣。於令式宜有顯刻。而顧諸父諸兄不克永世。今不肖獨存。且念今之世。與大父幷世者不憖遺一人。聞大父風烈。跂而慕之者亦少。竊聞執事樂道人之善。多銘賢大夫功德。敢籍先靈。以樂石顯刻累執事。不佞於是蹴然辭曰。先相國韙忠大業。不獨人口皆碑。太史氏旣已大書特書之不足也。奚待老傖之翦翦冷言。況不佞。委巷晩出也。雖嘗承之。幸忝文任。蓬心蒿目。隔重膜作者蹊徑。何敢形容大君子事蹟。此事之屬惡可輕。願子更思之。都事公揖而退而復進者三。觀其色。不得拙文。不休不去。意者繆謂不佞稍能耳剽壬辰戊申事。性且不喜諛。如是強之歟。義實有不得竟辭者。遂剟李,鄭二公所撰檃括焉。又續以謏聞之萬一。序而銘之。銘曰。

維廣李先。遁翁其倡。孝節竝峙。于后趾美。忠僖橋梓。天全魄毀。淮水不絶。維嶽降神。維公繼起。公之器宏。訖自髫齓。覯者嘖嘖。天人之對。拉鼂駕董。一發破的。翔于郞署。盛之玉堂。天寵日渥。峻之文柄。才踰而立。國朝疇敵。逮于壬辰。鯨浪掀天。天步跼蹐。公於是時。南北唯命。誓天殲賊。口伐虺毒。誠動帝庭。師渡鴨綠。長轂雷野。大礮震堞。蟻屯褫魄。三京盡復。山河湔羞。公不有力。出入矢石。雍容無怖。經理攸伏。上籍其實。錫秩三事。群黎加額。哭廟灰燼。糜粥餓隷。若乳于席。簽丁較技。庸備禁旅。厓相與畫。火鷄之訌。孰警長沙。危妥擔釋。統制偕璘。幾馘呑舟。惟公之策。魚水穆廟。退讓南宮。大樹是則。于白猿春。靈壇夜矣。大節尤卓。三進及霤。知死不回。目無鼎鑊。鑿齒磨牙。祥麟屛迹。嘔血仰屋。一昔訃聞。當宁亦恫。奈何乎國。癸亥改玉。天日重明。公名始易。好丘龍津。宰木已拱。公事如昨。刻詩牲繫。如復見公。庶過者式。

영의정 한음 이공 신도비명병서〔領議政漢陰李公神道碑銘幷序〕▣

고(故)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한음(漢陰) 이공(李公)은 양근(陽根)의 용진(龍津) 강가에 묻혔다. 한양의 조경이 그 묘비를 새긴다.

과거 우리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 왜란을 평정하고 한양으로 환도하여 중흥의 대업을 넓혔다. 여러 사람들의 칭송의 소리를 들으니 모두 이씨 성을 가진 세 분의 정승이 보익하여 좌우에서 도왔기 때문에 오늘이 있었다고 하였다. 세 분의 정승은 바로 이완평(李完平 이원익(李元翼)), 이오성(李鰲城 이항복(李恒福)), 한음공이다. 공은 세 분 정승 중에서 나이는 가장 어리고 재주는 가장 뛰어났는데, 협심하여 함께 일하면서 오직 나라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것은 사실 공이 으뜸이다.

공의 휘는 덕형(德馨), 자는 명보(明甫)이고 한산(漢山)의 북쪽에 기거했기 때문에 ‘한음(漢陰)’이라고 자호 하였다. 공의 선조는 광주(廣州) 사람인데, 휘 집(集)은 학문과 행실로 크게 이름이 났다. 공민왕 때에 적승(賊僧) 신돈(辛旽)이 미워하여 해치려고 하자 부친 당(唐)을 업고 영천으로 도망가 숨어 지내다가, 신돈이 주살되고 나서 벼슬하여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는데, 이 사실이 고려사에 실려 있다. 정포은(鄭圃隱 정몽주(鄭夢周))와 교분이 두터웠는데 죽을 때 포은이 시를 지어 곡을 하였으니, 이 분이 바로 둔촌(遁村)이다.

조선에 들어와 인손(仁孫), 극균(克均) 부자가 정승이 되었는데 마침내 이씨가 크게 현달하게 되었다. 극균은 연산군 갑자년(1504, 연산군10)에 사화를 당하였는데 공에게 5대조가 된다. 휘 세준(世俊)은 부사를 지냈는데 공의 고조부이고, 휘 수충(守忠)은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는데, 공의 증조부이다. 휘 진경(振慶)은 어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의정부 찬성에 증직되었으니 공의 조부가 된다. 부친 휘 민성(民聖)은 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화(文化) 유씨(柳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니 현령 예선(禮善)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신유년(1561, 명종16)에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자질이 뛰어나 침착하고 굳세며 순박하고 신중하여 장난치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덟 살에 학당에 들어가 어렵고 의심스러운 곳을 논하는 것이 어린 아이의 행동 같지 않았다. 열다섯 살이 못 되어 탁월하게 일찍 학문을 성취하였다.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데리고 산수 간을 유람하면서 함께 시를 수창(酬唱)하는데 시를 지을수록 더욱 훌륭해지니, 봉래가 감탄하면서 “그대가 나의 스승이다.”라고 칭찬하였다. 공이 읊은 녹음백연기(綠陰白煙起)’ 등의 네 구가 금수(錦水 영평(永平) 우두연(牛頭淵))의 시냇가 바위에 새겼는데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이다.

스무 살에 대책문(對策文)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에 천거되었으나, 당시 장인 아계공(鵝溪公 이산해(李山海))이 승정원의 도승지여서 공은 피혐하여 강연에 응하지 않았다. 선조께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강독하면서 질문에 대답할 재주 있는 신하 다섯 명을 선발하고 왕실의 책을 내어 그들에게 주라 명하였는데 공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으니, 당시에 모두 영예로 여겼다.

임오년(1582, 선조15)에 조사(詔使) 왕경민(王敬民)이 와서 한강에서 유람하면서 말하기를,

“듣자니 조선에 이모(李某)가 훌륭한 사람이라던데 만나볼 수 있습니까?”

하였다. 공이 신하는 사사로운 교분을 가지지 않는다며 사절했는데 왕공이 시 한 수를 써서 주면서,

“그대의 풍도가 출중하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비록 교분을 얻지는 못했지만 이것을 드려 마음의 사귐으로 삼고자 합니다.”

라고 썼다.

얼마 있다가 홍문관 정자에 제수되고 또 사가독서의 명을 받았으니,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와 함께 최고의 청선(淸選)에 오른 것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공이 당시 문형(文衡 대제학)을 맡고 있어 이 선발을 주관하였는데 한 재상이 밤에 율곡의 처소에 와서,

“두 이씨는 과연 인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께서 만일 그들의 의향을 알지 못하고 천거한다면 시사(時事)를 망칠까 걱정입니다.”

하였다. 율곡이 답하기를,

“사람을 천거하는 것은 사람을 얻고자 하는 것인데 어찌 의향을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자, 그 사람은 언쟁을 벌이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이듬해에 성상이 서총대(瑞蔥臺)로 행차하였는데, 공이 응제에서 일등을 하였다. 이때부터 문예를 다툴 때면 항상 무리 중에 으뜸이 되었다. 그러나 남의 위에 서는 것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공의 뜻이었다.

한번은 정시(庭試)에서 함께 나간 사람이 볼멘소리로 시샘하는 말을 하자 공이 마침내 병을 핑계 대고 과장에 오르지 않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공을 위대하게 여겼다. 부수찬에 승진하고 정언과 부교리를 거쳐 이조 원외랑이 되었다.

무자년(1588, 선조21)에 일본의 현소(玄蘇)와 평의지(平義智)가 내빙했는데 공이 이조 정랑으로 선위사(宣慰使)의 임무를 맡았다. 한 왜인이 공의 의관(儀觀)을 멀리서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존경심을 일으켰다. 서울에 들어와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는 현소 등이 보빙(報聘)해 줄 것을 매우 간절히 청하였다. 공이 정색하며 말하기를,

“이웃 나라와 외교하여 우호를 닦는 데 신의를 버리고서는 할 수 없다. 일전에 너희 나라 봉토의 신하가 우리나라에서 도망친 사화동(沙火同)을 옆에 끼고서 우리나라 변방을 침범하여 우리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는데도 너희 나라에서는 그것을 금하지 않았으니 신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였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소와 평의지는 부하 왜졸(倭卒)을 파견하여서 한 달을 넘기지 않고 사로잡은 사화동과 잡혀간 노인과 아이들 백여 명을 헌납하였다. 성상이 가상히 여겨 특별히 직제학에 제수하고 은대(銀帶)를 하사하였다.

경인년(1590)에 동부승지로 승진하고 우부승지, 부제학, 대사간, 대사성, 이조 참의를 거쳤다.

신묘년(1591)에 예조참판 겸 대제학에 자급을 넘어 제수되었는데 당시 나이가 서른 한 살이었다.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 이후 문형(文衡)을 맡을 사람으로 모두 오랜 덕망과 품계가 높은 사람을 임명했었으니 공처럼 어린 나이에 이 자리에 오른 사람은 있지 않았다. 당시 문학에 노성하고 학문을 쌓아 출중했던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는데, 문단에 올라 우이를 잡는 대제학의 자리에 있어서는 모두 “이모(李某)를 앞설 자는 아무도 없다.”라고 말하였다.

임진년(1592)에 섬나라 오랑캐가 큰 돼지와 뱀처럼 거듭 우리나라를 침략하고는 반드시 이모를 만나 강화를 의논하고자 한다고 선언하였다. 선조는 조정에 두루 물었는데 모두 우물우물하고 대답하지 못했다. 공이 나아가 말하기를,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것이 신하의 직분입니다.”

하고, 혼자 말을 타고 급히 달려 구성(駒城 경기도 용인)에 이르고 보니 적의 기세가 널리 가득하여 뚫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돌아서 한강에 도착하니 대가(大駕)가 이미 서쪽으로 간 뒤였다. 샛길을 따라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적이 대동강에 가까이 접근해 와서 다시 공을 만나기를 청하였다. 공이 다시 가기를 청하여 혼자서 배를 타고 강 가운데에서 만나니, 멀리서 바라보던 여러 신하와 장수 중 얼굴빛이 변하고 용모를 바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공은 적을 만나 태연한 기색으로 그들을 꾸짖었다.

“너희들이 아무 이유 없이 병사를 일으켜 백년간의 우호를 무너뜨리는 것은 어째서인가?”

현소 등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명나라에 들어가려 하는데 조선의 군대가 지나갈 길을 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러자 공이 준엄한 얼굴로 잘라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 부모 나라를 침범하려고 하는데 우리나라가 망할지언정 어찌 동조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 뒤로 현소 등이 끊임없이 공을 칭찬하기를,

“전쟁 중에 말하는 태도가 지난날 연회에서 말할 때하고 전혀 다르지 않으니 참으로 남이 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공은 밤에 대동강을 건너 장전(帳殿)에서 성상을 알현하고 병조 판서 오성(鰲城 이항복)과 협력하여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할 것을 아뢰었다. 대신이 어렵게 여겼는데, 공이 맞서서 끊임없이 말하자 마침내 의론이 결정되었다.

대가가 정주에 머물게 되자 드디어 공을 파견해 떠나게 되었다. 오성과 자리를 함께 가진 후 이별하는데 공이 친구들과 주고받은 말이 하나같이 신포서(申包胥)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일으킬 것이다.’라고 한 말과 같았으니, 사람들은 모두 공이 반드시 이 일을 성사시킬 것임을 알았다. 요동에 이르러서는 그 자리에 움직이지도 않고 우뚝 서서 피눈물을 흘리고 울음을 삼키며 순안 어사(巡按御史)에게 글을 올린 것이 여섯 차례나 되었다. 순안 어사 학걸(郝杰)이 공이 온힘을 다해 진정을 드러낸 것에 탄복하여 보고할 겨를도 없이 임의대로 조승훈(祖承訓) 등 세 장수를 출동시켜 먼저 왜적과 접전하여 약간의 패배를 맛보았다. 이 소식에 천자가 몹시 진노하여 이여송(李如松)을 대도독(大都督)으로 삼아 대군을 출동시켰다. 여러 장수가 용기를 자랑하고 앞 다퉈 권면해서 한 번 전투로 평양의 적진을 격멸하였다. 이에 두려움에 떨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회복할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듬해, 공이 대사헌으로 나가 도독을 접빈하면서 한편으로는 군막의 작전계획에 참여하고 한편으로는 군량의 공급을 주관하였다. 비록 준엄한 도독이라도 중요한 문제를 만나면 반드시 공의 판단을 물었다. 이때에 산과 들에 피가 흐르고 도시와 시골이 텅 비었는데 공이 다만 충의(忠義)로써 다치고 상처 입은 사졸과 백성의 마음을 격려하며 군량을 운송하여 한 번도 부족하거나 떨어진 것이 없었다. 덕분에 병사와 군마가 덕분에 배부르고 기운차서 결국 명나라 군대가 차례로 삼경을 손쉽게 회복하게 되었으니, 그 공훈을 논하자면 누가 공과 더불어 높고 낮음을 따질 수 있겠는가. 상이 훌륭히 여겨 기뻐하여 형조 판서로 벼슬을 올려주었다.

여름 4월에 공이 명나라 군대를 인도하여 한양에 입성하였다. 공은 종묘와 사직의 불타고 남은 재를 말끔히 쓸어내고 대성통곡을 하니 남아있던 원로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공을 부모와 같이 보았다. 서울은 이제 막 병화로 폐허가 되어버려 굶주림과 역병이 교대로 극성을 부려서 백성은 부자간에 서로 뼈를 씹는 고통 속에서 울부짖었고 너부러진 시체가 도로에 여기저기 가득하였다. 공은 끼니가 끊어진 사람들을 부지런히 걷어 먹였으니 굶어죽게 생긴 사람을 구휼해 살린 것이 이루다 셀 수 없다. 또 산실된 서적을 모아 강연에 대비하였다. 얼마 후 오성을 대신하여 병조 판서에 제수되어 서애(西厓) 유상(柳相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도성의 백성을 안무하였다.

갑오년(1594)에 모친상을 당했다. 성상께서, 걱정과 위험이 아직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나라의 기둥인 이모(李某)가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상중이지만 조정에 나올 것을 명하였다. 공은 아홉 번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지만 허락을 받지 못하였고, 준엄한 비답을 내려 심지어는,

“나는 적을 물리치지 못하는 것이 걱정이 아니라 그대가 나오지 않을 것이 걱정이다.”

라는 말까지 하였다. 공은 부득이 눈물을 삼키고 조정에 달려갔다.

이조 판서에 제수되어 시무 8조를 진달하였는데, 모두 조리에 맞아서 마치 유부(兪跗)와 편작(扁鵲)이 약을 쓰는 것과 같아 기사회생시킬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중에는 기민을 구제하고 정장(丁壯)을 금군에 충원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이라고 명칭하고 모든 창과 방패와 포(炮)와 피(鈹)의 제도를 척계광(戚繼光)의 책에서 본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안팎으로 널리 둔전(屯田)을 설치해서 국가의 비용을 넉넉하게 하고 군량을 충족시키는 것은 조영평(趙營平)의 계책도 이보다 낫지는 않다. 식자들이 중흥의 근본이 사실 이 시무 8조에 있다고 하였다.

을미년(1595)에 병조 판서로 옮겼다.

병신년에 호서의 역적 이몽학(李夢鶴)이 군대를 일으켜 두 고을을 함락했는데, 홍주 목사(洪州牧使) 홍가거(洪可巨)가 그를 토벌하여 주살하였다. 잔당들이 체포당하자 공의 이름을 무고하게 끌어들였다. 마치 기유년(1549, 명종4)의 변란 때 재상 이준경(李浚慶)의 이름이 적의 입에서 나왔던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공이 석고대죄 하였는데 성상이 여러 차례 온유(溫諭)하고 또 국문(鞫問)에 참여하게 하였다. 공은 열 번이나 상소를 올려 고집스럽게 그치지 않고 간청하자 비로소 병조 판서의 직임을 해지해주었다.

정유년(1597)에 왜적이 재차 우리 국경을 침범하자 천자가 병사 10만을 거느리게 하고 네 명의 대장을 파견하였는데 어사 양호(楊鎬)를 감군(監軍)으로 삼았다. 양공은 나이가 어리고 기세를 부려서 천하의 선비들을 얕보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의 평판을 듣고 마음이 흉흉하였다. 성상이 여러 신하 중에서 오직 공만이 예전에 이 제독(李提督 이여송)의 막부에 들어가 위아래의 마음을 얻었던 것을 살피고 공에서 가서 접빈하도록 명하였다. 양공은 공을 보고 단번에 경도되었다. 공이 드디어 말하였다.

“지금 적의 분위기가 매우 험악하여 아침저녁 사이에 한강을 건널 것입니다. 일단 천연의 요새를 잃고 나면 비록 천병의 위세로도 힘을 쓰기 어려울 것입니다.”

양공이 그 말을 듣고 즉시 소매를 털고 성으로 들어가 전투를 더욱 다급하게 책려하여 마귀(麻貴)의 철기병이 출동해서 직산(稷山)의 소사평(素沙坪) 교외에서 적을 무찔렀다. 서울이 다시 안전해진 것은 공의 공로가 컸다. 양공은 승승장구하면서 남쪽으로 내려와 울산(蔚山)에서 가등청정(加藤淸正)을 포위하고 바깥 진영을 밀어버리니 적의 무리가 대부분 죽었다. 가등청정이 급히 토굴로 숨어들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항복을 빌었다. 마침 하늘에서 눈이 크게 내려 군사와 말이 굶주리고 매우 두려워하여 명군이 마침내 퇴각하게 되었다. 공은 비록 위급한 상황에 있었지만 의기(意氣)는 전과 같았다. 양공이 혼자서 그 모습을 보고 위대하게 여기면서,

“이모는 명나라 조정에 있다 하더라도 마땅히 관복을 차려입고 묘당에 서서 백관을 굴복시켰을 것이다. 훌륭하다!”

라고 말하였다. 성상이 이 말을 듣고 즉시 재상으로 삼았으니 당시 나이가 서른여덟 살이었다. 얼마 있지 않아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제독(提督) 유정(劉綎)이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는데 선조가 전송하였다. 유정이 우리나라에서 문무를 모두 겸비한 제일인자와 함께 간다면 만족스럽겠다고 정성스레 말하였다. 상이 우상 이항복을 돌아보며,

“의중이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라고 묻자,

“필시 이모를 말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성상이 마침내 공에게 따라갈 것을 명하니, 유정이 기쁘게 말하기를,

“내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였다.

순천(順天)에 이르러 적의 우두머리 소서행장(小西行長)이 궁지에 몰려 다 죽게 되어 섬멸할 날을 손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정의 성품이 교활하여 다른 사람이 공을 나눠 가질까 걱정해서 몰래 소서행장이 도망가도록 해주었다. 공이 그 사실을 알아내고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에게 수군제독 진린(陳璘)과 약속하고 요해처인 뱃길을 막고서 그들을 대파하게 하였다. 소서행장은 겨우 자신의 몸만 죽음을 면했다. 유정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성을 내며,

“이모가 내 삼십 년 훈호(勳號)를 떨어뜨린단 말인가!”

라고 말하였다.

기해년(1599)에 홍여순(洪汝諄)이 이 일을 끄집어내어 공에게 죄를 전가시켰다. 공이 열 차례 상소를 올려 해직을 청하였는데, 성상이 비답하기를,

“경의 마음은 청천백일과 같아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일이 간혹 일어나더라도 그 본체는 여전하다. 경이 이미 스스로를 살펴보아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유씨(劉氏)의 아들이 어찌 그대를 해치겠는가?”

하였다. 그래도 공은 스스로 편안하지 않아 누차 청한 끝에 재상에서 물러나서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신축년(1601)에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남쪽 지방을 진무(鎭撫)하여 군정을 엄하게 하고 백성의 괴로움을 해결해주니 호남과 영남 지역이 평안해졌다.

공이 적의 사정을 헤아리는 데 뛰어나서 적의 진위(眞僞)를 손가락을 꼽은 듯이 정확히 맞추었다. 왜사(倭使) 귤지정(橘智正)이 문서를 가지고 와서 거짓말로 큰소리치며 강화를 요구하였다. 공은 이 일은 대마도의 속임수이지 일본이 만든 일이 아니라고 하며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귤지정에게 말하기를,

“명나라에서 너희 왜인들이 삐딱하게 굴고 이랬다저랬다 한다고 여겨 우리나라에 비상시를 대비해 군대를 남겨두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네가 감히 거짓말로 우리를 속이려든단 말인가?”

하였다. 그리고 남쪽에 뒤떨어져 돌아가지 못한 명군을 모아 대오를 정돈하여 형 군문(邢軍門 형개(邢玠))에게 치계하고 널리 부산진(釜山鎭)에 고유문을 내거니 적이 입을 다물고 물러갔다.

임인년(1602) 조정에 들어와 영의정이 되었다. 계묘년(1603)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일이 있었는데, 성상이 2품 이상의 관원에게 각자의 생각을 말하게 하였다. 공이 올린 말이 뜻을 거스르자 체차되어 영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당시 선무 공신(宣武功臣)과 호성 공신(扈聖功臣) 등의 책훈에 관한 개국(開局)이 있었는데, 선조께서 하교하기를,

“이모는 왜구가 온 나라를 가득 메웠던 날에 혼자 말을 몰아 적의 우두머리를 만났으니, 자신의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고, 급히 명을 내려 녹훈하게 하였다. 공이 여덟 차례 차자를 올려 사양하였지만 성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공훈을 논정(論定)할 때, 당시 재상이던 유영경(柳永慶)이 되레 공의 차자를 지목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한노(漢老 한음)가 녹훈을 사양한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하였다. 마침내 녹훈되지 않으니 여론이 시끄러웠다.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선조께서 승하하시고 재궁(梓宮)이 아직 빈소에 있었는데, 임해군(臨海君)의 반란에 대한 고변이 있자 삼사가 곧장 법률에 따라 처리할 것을 청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는데, 공과 좌상 이항복이 한목소리로 의리보다는 은혜를 앞세워야 한다고 말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대사헌으로서 상소를 올려 목숨을 보전할 수 있게 은전을 베풀기를 주장하였다. 재상 이원익(李元翼)도 차자를 올려 목숨을 부지하도록 은전을 베풀길 주장하였다. 시론이 시끄럽게 일어나서 목숨을 살려줄 것을 주장한 사람들을 역적을 보호하려 한다고 지목하였으니, 한 자의 베도 함께 입어야 한다는 노래가 종신토록 문제(文帝)를 괴롭혔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것이다.

이에 앞서 명나라 조정에서는 장자를 버리고 서자를 세웠다는 이유로 광해군의 봉전(封典)을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고부사(告訃使) 이호민(李好閔)이 연경에 이르자 곧바로 엄일괴(嚴一魁)와 만애민(萬愛民) 두 차관을 보내 임해군의 미친 증세를 조사하게 하니 온 조정이 허둥지둥 깜짝 놀라 입을 다물고 있을 뿐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공이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아우더러 형의 증세를 증명하게 하는 것은, 비록 하국(下國)이라도 감히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하자, 이 말을 들은 차관들이 다시 더는 묻지 못했다. 만력 말엽에 세자의 자리를 오랫동안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번국에서 아무리 책봉을 요청하여도 명나라 조정에서는 으레 허락을 잘 해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광해군은 공을 진주사(陳奏使)에 임명하니, 공이 여정을 재촉하여 27일 만에 연경에 들어갔다가 5개월 동안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광해군이 크게 기뻐하며 공의 부친을 통정대부 판결사로 승진시키고 공의 아들에게 6품의 관직을 내려주었으며 토지와 노비를 배나 두터이 내려주었다.

기유년(1609, 광해군1) 봄에 다시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신해년(1611) 봄에 정인홍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두 선생을 무고하였는데, 공이 세 차례 차자를 올려 정인홍의 망녕된 행동을 통렬히 변론하였다.

임자년에 해서(海西) 옥사가 일어났다. 계축년(1613)에는 박응서(朴應犀) 옥사가 크게 일어났는데, 한 사람을 조사하면 열 사람이 연루되어 무고하게 끌어들이는 일이 어지럽게 많았고 심지어 궁내에까지 불길이 번져 임자년에 비해 더욱 참혹하였다. 참소와 아첨을 일삼는 태신(態臣)들이 임금의 마음을 미리 맞추니 광해군이 직접 국문하여 죄수의 죄를 따지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다. 입시하는 여러 신하는 두려워 떠는데 공은 정도를 지킬 뿐 영합하지 않고 오직 억울한 죄를 풀어주는 일에 힘썼으니, 무고를 받은 자들이 꽤 많이 풀려났다.

여러 소인배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화의 근원이라고 기꺼이 지목하였는데, 대군은 겨우 여덟 살이었다. 삼사를 사주하여 대군을 전인(甸人)에게 넘겨 목매달아 죽일 것을 청하고, 또 대신을 대궐 뜰에 몰고 가 청하고자 하였다. 대사헌 송순(宋淳)과 대사헌 이충(李沖)이 전상(殿上)에서 큰 소리로,

“조정의 의론이,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합문(閤門)에 엎드려 간청하지 않는 것은 그릇된 일이라고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이이첨(李爾瞻)이 대신을 직접 겁주며 말하기를,

“조정의 의론이 영창대군을 사형에 처하게 하고자 하는데 대신께서는 단지 내쫓자고 청하니, 종묘사직을 위하는 우리들의 뜻과는 다릅니다.”

하였다. 공이 웃으며 약간의 동요됨도 없이 이전의 의견을 견지한 채 조금도 바꾸지 않고 장계를 작성하였다. 이이첨 등은 화가 났지만 어찌하지 못했다. 처음에 공이 오성과 이 일을 의논해 결정할 때에 오성이 말하기를,

“만일 영창대군을 밖으로 내쫓는 데에서 일이 끝난다면 우리가 죽음으로 다툴 이유는 없습니다.”

라고 했기 때문에 공이 뜻을 굽히고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영창대군을 내쫓자고 청한 것도 공의 본래 뜻은 아니었다.

영창대군이 이미 쫓겨난 후에, 개가 겨를 핥으면 반드시 쌀을 먹으려 든다더니 대관 윤인(尹仁), 정조(鄭造), 정호관(丁好寬)등이 시끄럽게 떠들며 함께 폐모론(廢母論)을 내놓았다. 공이 오상(鰲相 이항복)에게 말하기를,

“살아서 결국 이러한 일을 보게 되었으니 어찌 한순간이라도 참을 수 있겠습니까. 내 마음이 타는 듯합니다. 오늘 그대와 함께 차자를 올려서, 첫머리에 정성과 효도를 다해서 자전(慈殿 인목대비(仁穆大妃))을 편안하게 하셔야 함을 반복해서 개진하고, 이어서 소인들의 천리를 무시하고 도리를 지키지 않는 행태를 분명하게 말한 다음 머리를 땅에 찧고 피를 흘려서 성상이 마음을 돌리시길 기약합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책임을 거의 다하는 것일 겁니다.”

하였다. 오성이 말하기를,

“안 됩니다. 우리가 말을 반도 아뢰기 전에, 상이 혹 진노하거나, 대간이 혹 기습 공격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말을 다 마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일은 중대한 일이니 반드시 대신들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진정하고 조급하게 굴지 말고서 의견을 올릴 때 진정을 다 쏟아낸다면, 앞일을 대비하는 것이 이만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공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오성이 먼저 탄핵을 받고 떠났으니, 공이 혼자서 어찌할 수 있었겠는가.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이 무함을 당해 죽자 궁궐 깊은 곳에 계신 자전에게 해가 닥칠 날이 곧 다가오고 있었다. 조정신료들이 자전에게 연흥군(延興君 김제남)의 부음을 아뢰는 문제에 관해 한창 의론할 때, 공이 춘추에 자식이 어미를 원수로 여기거나 어미와의 인연을 끊는 법은 없다는 등의 말을 인용하여 핵심을 세워 논의를 펴자 여러 소인들이 크게 놀랐다. 이이첨과 한찬남(韓纘男)이 이성(李惺)과 박정길(朴鼎吉)을 끌어들여 도움을 받아 험악한 기세로 눈을 부라리며 이모보다 더한 역당은 없다고 말하였다. 삼사가 죄를 다스기를 청한 지 여러 달이 되었지만 광해군은 허락하지 않고 다만 삭탈관직만을 명하였다.

공은 물러나 용진(龍津)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나라 걱정에 여념이 없어서 지붕만 쳐다보고 탄식하며 계속해서 눈물만 흘렸다. 음식을 물리고 먹지 않으며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해 마침내 병을 얻어 날로 악화되어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그날이 바로 10월 9일이었으니 공의 나이 쉰세 살이었다.

부음이 보고되자 광해군은 몹시 슬퍼하며 원래의 관직으로 회복시킬 것을 명하였다. 이에 위로 어진 사대부로부터 아래로 서리와 군사와 시정의 소민들에 이르기까지 공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어찌해야 하나.”라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시장판을 치우고 골목에서 곡을 하는 이도 있고 서로 이끌고서 재화를 내어 공의 집에 부의를 하느라 발걸음이 계속 이어져 끊이지 않았다. 아, 송(宋)나라 때 경사(京師)의 백성이 사마온공(司馬溫公 사마광(司馬光))을 곡한 것이 이와 같았다고 하니, 공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이러한 마음을 받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공의 순수한 충심과 한결같은 덕이 임진년부터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젖어들어 적의 칼날이 백성을 다 죽일 수 없었으니, 이 백성은 삼대의 곧은 도를 행한 자들이다. 공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사양하지 않으려 했을 것인데 어찌 법사의 형률 따위를 돌아보겠는가.

공이 선조를 섬긴 것이 29년이다. 처음에는 한편으로는 시(詩), 한편으로는 서(書)로 문치(文治)를 아름답게 장식하여 다른 사람이 감히 바라지 못했지만, 아직 공업을 세웠다고 하기에는 일렀다. 임진년과 계사년 병란이 일어나 큰물이 하늘까지 넘쳐흘러 2백년 종묘사직의 백성이 고래와 악어의 아가리에 삼켜질 때에 공은 혼자 몸으로 발이 부르트도록 명을 받들어 바삐 다녔다. 성상이 급히 여기는 일과 아래에서 기대에 가득 차 바라는 일을, 한손을 내밀고 한 치의 혀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이루지 못한 것이 없으니, 이렇게 세운 공로에 대고 비록 옛사람이라도 누가 더 낫다고 하겠는가. 그런데도 공은 오히려 겸손을 지키며 공로를 사양하고 차지하지 않았으니, 군자가 이 때문에 공을 더욱 훌륭하다고 한 것이다.

공이 광해군을 섬긴 것은 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 때부터이다. 그때 막 임금이 승하하신 슬픔을 만나서 걱정스럽고 위급한 일이 만 가지였다. 공이 충성을 다하고 지혜를 모두 동원하여 훌륭한 선왕을 만나 예우를 받았던 은혜를 미루어 새로운 군주에게 보답하고자 하였으니, 그 마음은 제갈 무후(諸葛武侯)의 마음이었다. 무신년에 올린 새로운 정치를 아뢰는 차자를 보면 공을 사직신(社稷臣)이라고 이를 만하다. 계속 이어지는 수천 자의 말은, 제일 먼저 임해군(臨海君)을 살려줄 것을 말하고, 다음으로 천명을 두려워할 것을 말하고, 중간에 모후에게 효성을 다할 것을 말하였고, 마지막에 세자를 보도(補導)해 줄 것과 언로를 개방할 것과 충직한 이를 받아들일 것과 궁궐의 기강을 엄히 세울 것과 농업을 걱정할 것과 《시》, 《서》, 《역》, 《춘추》를 열람하여 전대를 교훈으로 삼을 것을 언급하였다. 광해군이 만일 그 가운데 열 중 하나나 둘만 사용했더라면 나환자가 임금을 불쌍하게 여기는 일이 있었겠는가.

슬프다! 오직 공은 혼자의 몸으로 선조를 만났을 때는 계책이 시행되고 공이 뒤따라 난리를 평정하고 국가를 안정시킨 것이 마치 판 위에서 구슬이 달리듯 했고, 광해군을 만났을 때는 공이 임금을 바로잡은 일을 사람들은 임금을 비난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그 충정을 다 바친 것을 사람들은 임금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임금의 비위를 맞추는 무리가 법망을 들어서 위협의 칼날을 번뜩였으니 공이 어찌 벗어날 수 있었겠는가. 먼 훗날의 선비 중에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공의 글을 읽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공이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오상(鰲相)은 북청(北靑)으로 유배되고 오상(梧相 이원익)은 홍주(洪州)로 유배되었다. 대중들이 칭송한 이씨 성의 세 정승이 죽지 않으면 유배를 갔으니 나라가 어찌 병들고 시들어서 결국에는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공은 정신이 아름답고 풍도가 심원하여 약관도 안 되어 공을 본 사람들이 모두 재상감이라고 평가하였다. 더불어 교유한 사람들은 공이 얼굴에 기쁘고 노한 빛을 띤 것을 본 적이 없으며, 당형제와 여러 자질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항상 겸손함을 지켜 자랑하거나 과장하는 말을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어렸을 때에는 향리의 친족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반드시 그들을 구제할 것을 생각하였고, 귀해진 후에는 가까운 친척이건 먼 친척이건 관계없이 내외친척들이 자기 집에 드나들 듯하였다.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항상 어린아이가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을 품었으니, 천성이 그러한 것이었다.

백사(白沙) 이상(李相 이항복)이 공과는 속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로 살거나 죽거나 변함이 없었다. 공이 돌아가셨을 때 음해하려는 자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백사는 공의 묘지를 지으면서 한 가지 일도 빼놓지 않았고, 공의 맏아들에게 발설하지 말 것을 경계하며 공의 평생을 단언하기를,

어진 이를 추대하고 능력 있는 이에게 양보하는 것은 자피(子皮)와 같고, 빈객을 응대하는 것은 숙향(叔向)과 같았으며, 알고서 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송경(宋璟)과 같고 유자를 존대하고 선을 즐거워 한 것은 유정(留正)과 같으며, 사사로이 당을 만들지 않은 것은 사마광(司馬光)과 같았다.”

라고 하니, 세상에서 딱 맞는 평가라고 하였다.

공의 문장은 육경(六經)에서 나온 것으로 낙건(洛建)의 여러 노유(老儒)의 책에 도움을 받았다. 일을 결정하는 데에는 《춘추》 경서를 위주로 하였고, 옛일을 살피는 것은 속수(涑水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힘을 받았다. 유가 이외의 학문도 두루 섭렵하여 조예가 깊고 넓어 끝이 없어서 글을 지을 때 그 자리에서 수천 자의 말을 써 내렸다. 그러므로 병신년(1596, 선조29)과 정유년(1597) 사이에 명나라 장수와 주고받은 문서와 편지가 한창 많았는데 공이 쓴 글이 대부분이었다. 운문에 있어서 풍류와 아치가 그 사람다웠다고 한다.

부인의 성은 이씨(李氏)이니 영의정 산해(山海)의 따님으로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유순하고 지조가 있어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보필하면서 모두 예의와 존경을 다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절개를 지켜 죽었는데 나이 스물여덟 살이었다. 정문(旌門)을 세우고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맏아들 여규(如圭)는 통정대부에 오르고 판결사를 지냈으며, 둘째 아들 여벽(如璧)은 현감을 지냈는데 일찍 죽었고, 셋째 아들 여황(如璜)은 가선대부에 오르고 감사를 지냈다. 딸은 부사 정기숭(鄭基崇)에게 출가하였다. 측실에게서 아들 셋을 두었는데 여박(如璞), 여방(如𤧭), 여선(如璇)이다. 딸도 셋을 두었는데, 감군 이증(李憕)과 의관 허목(許楘)에게 각각 출가하였고 한 명은 일찍 과부가 되었다.

판결사는 아들 넷을 낳았는데 금부도사 상건(象乾), 상곤(象坤), 상겸(象謙), 상정(象鼎)이다. 판서 이기조(李基祚), 사인 최유석(崔有石)ㆍ홍휘(洪彙)ㆍ이귀징(李龜徵)은 사위이다. 현감은 아들이 없어서 판결의 넷째 아들 상정을 양자로 삼았다. 감사는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상진(象震)이다. 딸은 여섯을 두었는데 진사 오정규(吳挺奎), 참의 목행선(睦行善), 현감 정담(鄭儋), 사인 조덕윤(趙德潤)ㆍ이현년(李玄年), 진사 서내익(徐來益)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정기숭은 아들 넷을 낳았으니 진(珍), 윤(錀), 민(鈱), 윤(鈗)이다. 윤(錀)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부윤을 지냈다. 사인 이명징(李明徵), 정자 한오상(韓五相)이 그 사위이다. 내외 손자와 증손들이 몇 사람 있다.

공이 돌아가신 후 11년 뒤에 인조대왕께서 종사를 바로잡자 공의 사자(嗣子) 여규(如圭)가 태학사 정경세(鄭經世) 공에게 시장(諡狀)을 부탁하여 태상시에 올려 아뢰자 문익(文翼)이라고 시호를 내렸다. 또 40년 후에 공의 손자 도사 상정(象鼎)이 오상(鰲相)이 지은 묘지명과 우복당(愚伏堂 정경세(鄭經世))이 지은 시장을 받들고 청성산(靑城山)으로 나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조부의 묘목이 한 아름이 훨씬 더 됩니다. 법도에 따라 마땅히 비문을 새겨야 하지만 제부(諸父)와 제형(諸兄)들이 수를 다 누리지 못하시고 지금은 저 혼자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지금 세상에 조부님과 같은 세상을 사셨던 분이 한 분도 남아있지 않고, 조부님의 풍모와 공렬을 듣고 발돋움해서 사모하는 사람 또한 적습니다. 집사께서 다른 사람의 선행을 말씀하시기를 즐거워 하셔서 어진 대부의 공덕에 대한 명문(銘文)을 많이 지으셨다고 들었기에 감히 돌아가신 분의 혼령을 빌어 비문을 새기는 일로 집사를 번거롭게 해드립니다.”

하였다. 이 말에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사양하였다.

“돌아가신 상국의 위대한 충정과 대업은 사람들이 모두 입으로 칭송할 뿐만 아니라, 이미 사관이 대서특필하기에도 부족한데 어찌 늙은이의 천박한 말이 필요하겠는가. 하물며 나는 후미지고 좁은 골목에 사는 후배라네. 비록 일찍이 명을 받아 요행히 문임(文任)을 맡긴 했지만 지식이 천박하고 시야가 좁으며 겹겹 꺼풀에 가로막혀 짓는 것이 신통치가 않는데 어찌 감히 위대한 군자의 사적을 형용할 수 있겠는가. 어찌 이 일을 가벼이 맡기겠는가. 그대는 다시 생각해 보시게.”

도사는 읍을 하고 물러났다가 다시 세 번이나 찾아왔는데, 그의 기색을 살펴보니 보잘것없는 내 글을 얻지 않고서는 그만두지도 떠나려고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마도 내가 임진년과 무신년의 일에 대해 얻어들은 것이 있다고 잘못 알고서, 성격이 아첨을 좋아하지 않아 이처럼 강경하게 부탁한 것이리라. 의리상 끝까지 사양할 수 없어 마침내 이공(李公 이항복)과 정공(鄭公 정경세) 두 공께서 지으신 것을 대략 갈무리하였다. 또 만분의 일이나마 조금 들은 것을 이어서, 서문을 쓰고 명문을 짓는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광주 이씨 선조 중에 / 維廣李先
둔촌이 제일 먼저 이름이 났으니 / 遁翁其倡
효행과 절의 나란히 우뚝하였네 / 孝節竝峙
후손이 아름다운 자취를 이었으니 / 于后趾美
충희공 부자는 / 忠僖橋梓
천명을 보존하기도, 체백을 훼손하기도 하였네 / 天全魄毁
회수가 끊어지지 않아 / 淮水不絶
산악에서 신을 내려 / 維嶽降神
공이 그 뒤를 이어 일어나셨네 / 維公繼起
공의 광대한 기량은 / 公之器宏
어려서부터 뛰어나서 / 訖自髫齓
보는 이들 칭찬이 자자하였네 / 覯者嘖嘖
천리와 인사를 논한 대책문은 / 天人之對
조조를 꺾고 동중서를 능가하니 / 拉鼂駕董
한 발에 과녁을 꿰뚫었네 / 一發破的
낭서에 오르고 / 翔于郞署
옥당에서 성대해지니 / 盛之玉堂
임금의 총애가 날로 두터워졌네 / 天寵日渥
우뚝한 문형의 자리에 있었던 건 / 峻之文柄
갓 서른을 넘긴 나이였네 / 才踰而立
국조에 누가 대적하리오 / 國朝疇敵
임진년에 이르러 / 逮于壬辰
큰 파도가 하늘까지 치솟아 / 鯨浪掀天
국운이 위태로웠네 / 天步跼蹐
공이 이때에 / 公於是時
남으로 북으로 명을 받들며 / 南北唯命
적을 섬멸하리라 하늘에 맹세하였네 / 誓天殲賊
구변으로 흉포한 적을 치고 / 口伐虺毒
정성으로 천자의 조정을 움직여 / 誠動帝庭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왔네 / 師渡鴨綠
수레바퀴가 들판을 울리고 / 長轂雷野
대포가 성을 진동하자 / 大礮震堞
모여 있던 개미 떼의 혼이 달아났네 / 蟻屯褫魄
삼경을 모두 회복하고 / 三京盡復
산하가 치욕을 씻어낸 것이 / 山河湔羞
공의 공로가 아니던가 / 公不有力
화살과 돌 사이를 출입하면서도 / 出入矢石
조용하고 두려움 없었으니 / 雍容無怖
경리 양호(楊鎬)가 탄복하였네 / 經理攸伏
성상이 그 사실을 알고 / 上籍其實
삼공의 관직을 내리니 / 錫秩三事
뭇 백성이 우러러 보았네 / 群黎加額
잿더미 된 종묘에서 통곡하고 / 哭廟灰燼
죽을 쑤어 굶주린 백성을 먹여 / 糜粥餓隷
배불리 먹이고 편안히 살게 하였네 / 若乳于席
정장을 군적에 올려 기예를 겨루게 하여 / 簽丁較技
금군의 충원에 대비한 것은 / 庸備禁旅
서애공과 함께 세운 계획이라네 / 厓相與畫
정유년의 병란 때 / 火鷄之訌
누가 장사처럼 경계하였던가 / 孰警長沙
위태로움을 편안히 해서 중임을 다했네 / 危妥擔釋
통제사가 진린(陳璘)과 함께하여 / 統制偕璘
적을 몇이나 베고 배를 몇 척이나 깨뜨렸나 / 幾馘呑舟
오직 공의 책략이었네 / 惟公之策
선조와는 더없는 군신 간이었으니 / 魚水穆廟
남궁에서 물러나 양보하여 / 退讓南宮
대수장군을 본받았네 / 大樹是則
무신년 봄에 / 于白猿春
제단이 밤처럼 캄캄하였는데 / 靈壇夜矣
대절이 더욱 우뚝하였네 / 大節尤卓
세 번이나 간절히 간언을 올려서 / 三進及霤
죽을 줄 알면서도 돌이키지 않았으니 / 知死不回
형벌은 안중에도 없었네 / 目無鼎鑊
적들이 이를 갈고 어금니를 깨무니 / 鑿齒磨牙
상서로운 기린이 자취를 감추고 / 祥麟屛迹
피를 토하며 천정만 올려다 보았네 / 嘔血仰屋
하루아침에 부음을 아뢰니 / 一昔訃聞
금상도 애통해하였네 / 當宁亦恫
나라를 어이 할고 / 奈何乎國
계해년에 반정하여 / 癸亥改玉
하늘 해 다시 밝아져 / 天日重明
공에게 비로소 시호가 내렸네 / 公名始易
좋은 무덤 터 용진에 / 好丘龍津
묘수는 벌써 아름드리 되었건만 / 宰木已拱
공의 일은 어제와 같네 / 公事如昨
비석에 시를 새겨 놓으니 / 刻詩牲繫
다시 공을 보는 듯하네 / 如復見公
지나는 자는 예를 갖추라 / 庶過者式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이라나 김하라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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