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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 한양조씨 의 유래와 내력[정리중...]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14.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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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조씨 의 유래와 내력[정리중...]

관적(貫籍)은 대략 한 종족(宗族)이 한 지역에 누대를 살면서 걸출(傑出)한 인물이 배출될 때 비로서 득관(得貫)을 하는 국성(國姓-土姓)이 있고 나라에 큰 공이 있을 때 왕이 내리는 사성(賜姓)이 있는가 하면 외국에서 들어온 귀화민이 정착하면서 지명을 따서 관(貫)을 삼는 외래성(外來姓)으로 분류가 된다. 우리 한양조씨는 고려 고종(高宗45-1258) 때 동북면 쌍성 총관부 총관(摠管) 조휘(趙暉)가 한양에서 나왔다하여(고려사 130권 열전43-고종 45 戊午 11월 條= 趙(조)暉(휘)本(본)漢(한)陽(양)府(부)人(인)後(후)徙(사)居(거)龍(룡)津(진)縣(현)高(고)宗(종)45年) 한양조씨가 되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개적(改籍)하여 본관을 한양으로 사용하는 종족(宗族)이 생기었다.

역사적 실존 인물로 사실적 관계로 살펴보면 누대를 한양에서 세거 하다가 용진으로 이사하여 쌍성 총관이(1258년11월)된 조휘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최초 원한양 조씨가 있고 조선이 개국하여 개경(송악)에서 한양부로 천도(遷都)함에 조정(朝廷)을 따라와 정착 하면서 개적한 한양 조 씨가 있으니 조영무의 후손이고 별도로 개적한 조논걸(趙論傑)과. 조방보(趙邦輔) 조방좌(趙邦佐) 형제 후손들이 있다.

 

 

 

 

관적(貫籍)은 대략 한 종족(宗族)이 한지역에 누대를 살면서 걸출(傑出)한 인물이 배출될 때 비로서 득관(得貫)을 하는 국성(國姓-土姓)이 있고, 나라에 큰 공이 있을 때 왕이 내리는 사성(賜姓)이 있는가 하면, 외국에서 들어온 귀화민이 정착하면서 지명을 따서 관(貫)을 삼는 외래성(外來姓)으로 분류가 된다.

 

우리 한양조씨는 고려 고종(高宗45-1258) 때 동북면 쌍성총관부 총관(摠管) 조휘(趙暉)가 한양에서 나왔다 하여(고려사 130권 열전43-고종 45 戊午 11월 條= 趙(조)暉(휘)本(본)漢(한)陽(양)府(부)人(인)後(후)徙(사)居(거)龍(룡)津(진)縣(현)高(고)宗(종)45年) 한양조씨가 되었는데, 누대를 한양에서 세거 하다가 용진으로 이사하여 쌍성총관이(1258년11월) 된 조휘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한양조씨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개적(改籍)하여 본관을 한양으로 사용하는 종족(宗族)이 생기었는데, 역사적 실존인물로 사실적 관계로 살펴보면 

 

1)조선이 개국하여 개경(송악)에서 한양부로 천도(遷都)함에 조정(朝廷)을 따라와 정착 하면서 개적한 한양조씨가 있으니 조영무의 후손(충무공파, 영흥조씨)이고,

2)별도로 개적한 조논걸(趙論傑)(논걸공파, 철원조씨))과

3)조방보(趙邦輔), 조방좌(趙邦佐)형제 후손들(제주조씨)이 있다.

 

이들은 현대에 와서 우리와는 법적으로 동성동본이나 사실은 동성동본이족(同性同本異族)인 셈이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서 시조의 독자인 2세조 휘(暉)는 초대 쌍성총관으로서 화주이북 12성을 공이하 4대 99년간 세습하여 통치하여 왔으며, 그의 아들 양기(良琪)가 1281년(충렬왕7)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일본정벌에 참가했고 21세 때 합단의 침입을 대파한 공으로 원나라 세조로부터 금포와 옥대를 하사받았다. 양기의 아들 돈(暾)은 1356년(공민왕 5) 쌍성수복 작전 때 공을 세워 예빈경이 되고 이듬해 평양에 침입한 홍건적을 대파 1등공신으로 판사농시사(判司農寺事), 밀직부사(密直副使), 공부상서(工部尙書),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오르고 1375년(우왕 1) 삼중대광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졌다.

 

 

돈(暾)은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벼슬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그 중 맏아들 인벽(仁璧)은 홍건적을 물리쳐 평양을 회복하고 김용을 토벌하고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로 수차에 걸쳐 왜구를 토벌하였고, 정화공주와 결혼하여 이성계의 매부가 되었으며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에 봉해졌으나 천명(天命)이 조선으로 돌아감을 보고 양양으로 퇴거하여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니 양양인이 그 충절을 사모하여 충현사 동명서원을 세워 모시고 조선조에서 증좌정승 시호 양렬공(襄烈公)을 하사하였다.

 

 

조선조에 와서 인옥(仁沃)은 개국1등공신, 이조판서로 전제개혁과 숭유억불정책으로 건국의 기초를 다졌으며 한산군에 봉하고 시호 충정공(忠靖公), 부조묘를 명하고 태조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온(溫)은 개국 정사 좌명의 3공신으로 수주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고 장정들을 군적에 등록시켜 군사력을 강화시켰으며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한천부원군에 봉하고 시호는 양절공(良節公)이니 부조묘를 명하였다. 연(涓)은 조선이 건국되자 대장군 별운검이 되어 왕을 호위하였고 야인이 쳐들어오자 적장 피아손을 죽이고 두만강을 건너 적의 근거지를 쳐부수고 돌아왔으며 좌명공신 우의정 한평부원군에 봉하고 시호는 양경공(良敬公)이니 부조묘를 명하였다. 후(侯)는 지돈녕부사로 시호는 안정공(安靖公)이며, 사(師)는 호가 가천재(嘉川齋)로 중추원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친인 양렬공을 따라 양양에서 수학하시며 대효로써 이름을 드날렸다. 완(琓)은 지중추원사로 형인 첨지공 의(儀)가 무후조졸하여 적통을 받아한풍군(漢豊君)으로 추봉하니한양조씨의 대종손이 되었으며, 혜(惠)는 판중추부사로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원기(元紀)는 연산군이 사초를 보려하자 이를 막아 귀양살이를 하였으며 청백리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으며, 한양조씨 최초의 족보 [갑신단권보]를 창간하였다.

 

 

한양 조씨의 가문을 더욱 빛낸 사림파의 영수 광조(光祖)는 개국공신 온(溫)의 현손으로 14세 때 어천도 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 원강(元綱)을 따라가 희천에 유배중인 김굉필에게 글을 배웠다. 그는 성리학 연구에 힘썼으며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역설했다. 중종 때 대사헌(大司憲)에 있으면서 신진사류인 30대의 소장학자들을 요직에 안배하는 한편,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내는 등 과격한 개혁을 단행하여 마침내 훈구파의 반발을 야기시켜 남곤·심정 등이 주동한 기묘사화에 피화되어 능주(綾州)에 유배, 배소에서 죽음을 당했다. 이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며 문묘와 심곡서원, 죽수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율곡 이이는 김굉필·조광조·정여창·이언적을 가리켜 <동방사현>이라 칭송하며 평생토록 숭배하였다 한다.

 

 

그 밖의 인물로는 중종 때 대사간(大司諫)·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현곡공(玄谷公) 위한(緯韓)과 그의 동생으로 시문에 능한 현주공(玄州公) 찬한(纘韓)이 유명했다. 공근(公謹)은 선조(宣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위성공신에 오르고 한흥군에 봉해졌으며, 인조 때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고,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를 지낸 경(絅)은 청백리에 녹선되어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글씨에도 뛰어나 당대에 명성을 떨쳤고 시호는 문간공(文簡公)이다. 극선(克善)은 호 야곡(冶谷)으로 도덕과 학행으로 세인의 추존을 받을뿐만 아니라 대효로 정려와 어찰을 하사받고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목공(文穆公)이다. 

 

장령 중여의 아들 종저(宗著)는 사학·천문·산수·의학에까지 박통하여 문명을 날렸으며, 충정공 인옥(仁沃)의 아들 뢰(賚)는 예조판서(禮曹判書)을 지내고 효행으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안평대군 일파로 몰려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한 파서공(坡西公) 순생(順生)과 그의 아들 명(銘), 시인 수삼(秀三), 화가로 이름난 중묵(重默) 등이 유명했는데, 수삼(秀三)은 현종 때 문장과 시로써 여섯 차례나 중국을 왕래하여 명성이 높았으며, 서예와 중국어에도 능통했다. 그의 손자 중묵(重默)은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렸으며 희원 이한철과 더불어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알려졌다.

 

득남(得男)은 공조정랑으로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 외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여 정려 충신각과 경기병마사를 추증받았으며, 웅(熊)은 임진왜란때 의병을 모아 탄금대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여 정려 충신각과 병조참판을 추증받았고, 경남(慶男)은 호가 산서(山西)로 의병장이 되어 왜적을 물리쳐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주포서원에 배향되었다. 성교(性敎)는 대제학과 예의판서를 역임하고 시호는 문헌공(文憲公)이며 그의 아들 종필(鍾弼)은 관찰사와 공조판서를 지내고 융희2년(1908년) 한양조씨 대종회를 창립하였다.

 

 

이렇게 조선조에서 세도를 떨친 한양 조씨는 근대에 와서도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어 나라와 가문을 위해 공헌했다. 독립운동가 인원(仁元)의 아들인 유석 병옥(炳玉)은 대학생으로 한인회·흥사단 등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해방이 되자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여 내무부장관으로 치안유지 및 6.25전쟁때 대구를 사수하였다. 그 후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으며, 1955년 민주국민당이 민주당으로 개편될 때 최고위원이 되어 야당을 영도했으며, 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신병으로 미국 육군병원에서 영면하였다. 저서로「민주주의와 나」·「나의 회고록」등이 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으며 한양조씨 3대 도유사(대종회장)로 『기해대보』를 발간하였다.

 

 

청록파 시인 및 지조론으로 널리 알려진 지훈(芝薰)도 해방 후부터 6·25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문단의 선구자로 민족적 정서운동에 앞장섰으며, 종신토록 고려대학교단에서 문학을 피력하였고, 사회활동에 이바지함이 지대하여 후에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가 여러곳에 세워졌다.

 

시인 병화(炳華)는 명예철학 문학박사, 경희대(학장,교육대학원장)와 인하대(학장,부총장,대학원장)교수, 시인협회장,문인협회이사장,세계시인대회장 등 역임하였으며, 예술원회장, 계관시인, 아시아자유문학상, 국민훈장모란장, 금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이 밖에도 법무부장관과 대법원장을 지낸 진만(鎭滿), 제헌의원을 지낸 헌영(憲泳), 법무부장관을 지낸 병일(炳日), 국방부장관을 지낸 성태(誠泰),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과 국회의원 주일대사 제10대 한양조씨대종회장을 역임한 세형(世衡), 유석 병옥박사의 아들로 민한당 총재를 지내고 국회부의장에 이른 윤형(尹衡)과 그 아우 민주당 대표 국회의원 순형(舜衡), 검사 국회의원 헌법재판관을 역임하고 현재 11대 한양조씨대종회장인 승형(昇衡), 치안본부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종석(鍾奭), 검사와 국회의원을 지낸 찬형(贊衡), 국회의원을 지낸 종호(鍾昊), 시형(始衡), 경목(庚穆), 병봉(炳鳳), 일문(一文), 진형(鎭衡), 성준(誠俊),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를 지내고 한양조씨대종회 종통수호위원장인 홍은(弘殷), 남부대학교와 광주과학대학을 설립한 재형(載衡), 화학계의 거두 前성균관대학장을 지내신 광하, 세계문화사의 권위자 동일(東一)교수, 사학계의 권위자 동걸(東杰)교수 등 많은 유명인사를 배출시킨 한양조씨는 선현의 유지에 맥을 더하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한양조씨는 남한에 총64,881가구, 273,40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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