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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증소김공행장[橧巢金公行狀]안동(安東)김씨諱신겸(信謙)行狀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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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인 민우수(閔遇洙, 1694~1756)는 본관이 여흥(驪興)으로,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암(貞菴)이다. 문충공(文忠公) 민진후(閔鎭厚, 1659~1720)의 아들이며,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의 손자이자,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외증손이다. 그의 가계에서 알 수 있듯이 민우수는 서인의 학맥을 띠는 인물로서, 호락논쟁(湖洛論爭)과 노소(老少) 대립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여흥 민문(驪興閔門)은 본래 회덕ㆍ유성 지역의 재지사족이었는데, 과거로 중앙 정계에 진출할 경우 주로 사관(史官)으로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7세기에 이르면 20세 민광훈(閔光勳)을 파조로 하는 삼방파(三房派)가 활약하면서 조선 후기의 중요한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우선 민광훈이 1628년(인조6)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그 아들 민기중(閔蓍重)ㆍ민정중(閔鼎重)과 손자 민진장(閔鎭長)이 장원하여 삼세문장(三世文章)으로 명성을 얻었다. 특히 21세 민시중ㆍ민정중ㆍ민유중과 22세 민진주(閔鎭周)ㆍ민진장ㆍ민진후(閔鎭厚)ㆍ민진원(閔鎭遠) 등이 학문적ㆍ혈연적으로 송시열(宋時烈), 송준길과 연계되면서 정치적으로 서인ㆍ노론으로 정체성을 띠게 되었다. 민유중이 송준길의 사위가 되면서 그의 자손들이 송시열 문하에서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여 효종~숙종대에 양송(兩宋)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한 것이다. 아울러 이를 기반으로 서울과 회덕ㆍ유성을 오가며 사(士)와 대부(大夫)로서의 삶을 영위하였다.

정암집 제13권 / 행장(行狀)

증소 김공 행장〔橧巢金公行狀〕  안동(安東)김씨 諱신겸(信謙)

공은 휘가 신겸(信謙)이고 자가 존보(尊甫)이니, 안동(安東) 김씨이다. 고려 태사(太師) 선평(宣平)의 후손이니, 우리 조정의 청음(淸陰)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현손이자 문곡(文谷)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의 손자이다. 부친 휘 창업(昌業)은 성균관 진사이고 호는 노가재(老稼齋)이며, 모친인 유인(孺人) 이씨(李氏)는 종실(宗室)인 풍성군(益豐君) 속(涑)의 따님이니, 계유년(1693, 숙종19) 2월 8일에 공을 낳았다.

공을 낳은 지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유인이 별세하니 부친 가재공이 고생스럽게 애쓰며 정성스럽게 훈육하여 공이 생장했다.

11세에 처음 학교에 들어갔는데 특출하여 빠르게 발전하였다.

13세에 글을 잘 지을 수 있었으니 중부(仲父)인 농암 선생(農巖先生)이 공의 필력을 매우 칭찬하여 옥간(玉簡)을 주어 장려하였다.

15세에 아내를 맞이하여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의 사위가 되었다. 이공(李公)이 공과 함께 역사를 논평함에 공이 막힘없이 응대하여 이공이 매우 기특해 하였으니, 공이 이때부터 식견이 날로 넓어졌다.

약관에 상서(庠序 향교)에서 수학하여 사우(士友)들과 논의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외하며 따랐다.

신축년(1721, 경종1) 가을에 진사시에 장원하였으나 차고 넘치면 마침내 기울게 된다는 것을 스스로 경계로 삼아 대과(大科)는 한 번도 응시하지 않았다.

임인년(1722)에 백부 충헌공(忠獻公)이 건저(建儲 세제를 세움)의 일로 인해 소인들의 심기를 거슬러서 이 충문공(李忠文公) 등 여러 공들과 함께 화를 입었는데, 공도 연루되어 안변부(安邊府)에 유배되었다.

을사년(1725, 영조1)에 유배에서 풀려 돌아와서 효릉 참봉(孝陵參奉)에 제수되고, 또 내시교관(內侍敎官)과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당시 시국이 어렵고 근심스럽기에 피하여 운둔하는 데에 뜻을 두어 보령(保寧)의 청연(靑淵)에 살 곳을 정해 거주하려고 했는데, 집이 채 완공되기도 전에 무신년의 역난(逆亂)을 당해서 제천(堤川)과 영월(寧越) 사이로 피난했다가 난이 그치자 다시 청연으로 돌아왔다.

무오년(1738, 영조14) 2월 7일에 별세하니 향년 46세이다. 애초에 결성현(結城縣) 괴곡면(槐谷面)에 장사 지냈는데, 임신년에 양지현(陽智縣) 호구산(壺口山) 오좌(午坐) 언덕으로 천장했다. 부인인 유인 이씨(李氏)는 처음 장단(長湍)에 장사 지냈다가 역시 옮겨서 공과 합장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사리에 통달하고 돈후하고 확고하며, 온화하면서도 강건하고 과감하며, 기량은 우뚝하고 풍채는 헌걸차고 청수하며, 마음에 품은 바는 항상 초연히 혼탁한 세상 너머에 있었다.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모친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평생의 슬픔으로 여겼는데, 어려서 숙부 포음(圃陰) 선생께 《소학(小學)》을 배울 때 〈제의(祭義)〉의 ‘우로에 두려운 마음’이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오열하여 소리를 내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셨으니 포음 선생이 그 어짊을 칭찬하였다. 부친 가재공을 섬김에도 자식의 도리를 온전히 다하다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 신임년의 시변(時變)을 만나 화염(禍焰)이 급박하였는데도 신종(愼終)의 예를 조금도 유감이 없게 하였고, 성복(成服)하자마자 즉시 유배지로 가는 백부의 행차를 따랐는데, 이로부터 무더위에 내리는 장맛비를 무릅쓰고 고생하며 경황이 없었지만 오히려 소식(素食)을 바꾸지 않았다.

중형(仲兄)과 함께 기거하였는데 아버지처럼 섬겼다. 중형의 병을 간호하는 십수 년 동안 몸이 여위도록 정성과 힘을 다하여 의복과 침구 및 수저와 젓가락으로부터 소변을 받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직접 조사하고 살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았고, 겨울에도 밤새도록 청사에서 약을 달이고 죽을 써서 손이 동상에 걸렸다. 중형의 병이 위독해졌을 때는 매일 저녁 몸소 가묘(家廟)에서 기도하여 본인의 몸으로 대신하기를 바란 것이 수십 일인데 이때 비 오듯 눈물을 흘려서 옷깃과 소매가 모두 문드러지니 둘째 형수가 그 옷을 남겨 두어 후손에게 보이고자 하였고, 이웃 사람들까지도 역시 대부분 감탄하며 눈물을 흘렸다. 중형이 복용한 약물이 대부분 진귀하여 비용이 수백, 수천 냥이나 들었는데 약을 잇댈 수 없게 되자 공이 그 전답과 집을 모두 팔아서 공급하였다. 그러한 마음을 미루어서 내외 존속을 섬김에 있어서 마음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고, 변고(變故)가 일어난 때에도 또 일마다 정성을 지극하게 하여 사리에 맞게 하였다.

흉도들이 이 충문공의 가족을 도륙하려고 할 때 충문공의 손자인 봉상(鳳祥)은 나이가 겨우 16세였는데 곧 수노(收孥)를 입게 되어 군현에서 한창 급하게 체포하려고 하였다. 이때 공이 몰래 이 유인(李孺人)과 도모하여 끝내 봉상이 온전할 수 있게 하였으니, 한(漢)나라 이고(李固)의 아들 섭(爕)이 살아난 것과 매우 유사한데 그 어려움은 이섭의 경우의 배가 된다.

당시 흉흉한 분위기가 하늘에 가득 차고 염탐이 종횡하였는데, 공은 김 충헌공의 조카로서 이 충문공의 사위가 되어 흉도들이 더욱 꺼리는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평소 알고 지내던 친구 가운데 재화(災禍)를 만난 자에 대해서는 주선하고 도와주는 데 있어서 조금도 두려워함이 없었다. 벗 가운데 뒷일을 부탁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위해 경영하여 시종일관 게을리 함이 없어서 그 남겨진 고아를 자식처럼 보살피고 전후로 장례를 맡아 치른 십수 건의 일은 모두 친히 장지(葬地)를 살피고 몸소 공사를 감독하여 배고픔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를 꺼리지 않았다. 이것은 모두 공의 인의(仁義)와 충신(忠信)이 발현된 것이다.

공은 제부(諸父)들께 배웠는데 삼연 선생(三淵先生 김창흡(金昌翕))께 가장 오래 배웠으니, 일찍이 양근(楊根) 벽계(蘗溪)와 설악산(雪嶽山)의 영시암(永矢庵)에 가서 모시면서 도의(道義)와 문장으로부터 사물의 상도(常道)와 권도(權道)의 지극함에 이르기까지 정밀하게 물어보고 익숙하게 강학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그 단아하고 고상한 정취가 완전히 서로 부합하였다. 그러므로 삼연 선생이 공을 사랑하고 허여함이 매우 지극하여 부자 사이의 지기(知己)가 되었는데, 임종할 때 평소 도(道)에 들어갔던 단계를 다 알려주어서 행장을 찬술하게 하였으니, 의발의 의탁함이 공에게 있는 것이다.

공은 어려서 큰 뜻이 있어서 개연히 고인의 뜻과 사업을 흠모하여 공업과 문장이 백세토록 민멸되지 않게 할 것을 생각하였다. 그런데 중도에 세상의 화를 겪어서 감분(感憤)하고 스스로 힘써서 마침내 가정의 학문에 전심치지하여 심오한 이치를 더욱 천명하여 스스로 터득한 것이 많았는데, 반드시 몸소 힘써 실천하였다. 이는 공의 내면이 관대하고 공이 생각을 신중하게 하되 무엇보다 격물치지의 공부에 힘을 써서 성현의 서적을 읽으면서 글자의 뜻을 찾고 구절의 의미를 따지되 반드시 모두 끝까지 궁구하지 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도(天道)의 극치와 조화의 본원 및 천하국가의 치란과 흥망성쇠의 이치를 배움에 묵묵히 이해하고 마음으로 통하여 남김없이 꿰뚫었고, 비록 농잠(農蠶)과 곡물을 심고 기르는 방법 및 산천풍속과 조수초목의 마땅함도 모두 상세하게 이해하여 정추와 본말을 하나라도 빠뜨리는 것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앎은 마땅히 실천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고, 실천은 효성과 공손함을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 선대(先代)에 자제를 가르친 방법이 비록 옛사람의 방법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역시 본디 보고 느껴 황송하여 몸이 떨리는 공효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우리들이 이미 선배가 되었는데 후배들이 보고 본받을 만한 점이 없어서 소학(小學)이 어떤 일인지 알지 못하니, 지금 마땅히 먼저 나로부터 시작하여 이 병폐를 바로잡으리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공이 집안에서 행한 효성과 우애는 본디 지극한 정성이 드러나는 점이 있되 일상생활의 언행에 반드시 옛 가르침을 상고하고 모두 법도를 준수하였다. 그러니 오래도록 그것을 견지하여 수양함에 미쳐서는 덕성이 온전히 아름다워지고 내면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발현되어 활짝 피어났으며, 그 인품이 청명하고 깊고 높아서 엄하게 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친애할 수 있게 하되 업신여기게 할 수는 없게 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식견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서 중대한 일을 잘 판단할 수 있었으며 사정을 헤아리고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거의 틀림없어서, 충헌공(忠獻公)과 이 충문공(李忠文公)이 더욱 의지하여 모든 일을 대부분 공의 의견을 들은 뒤에 결정하였으니, 유독 신축년(1721, 경종1) 때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다. 정미년(1727, 영조3) 봄에 공이 어떤 벗에게 들러서 말하기를 “내가 근래 영남(嶺南)에 가서 물정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조만간 반드시 거병(擧兵)의 일이 생길 것이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놀라서 묻기를 “어찌 그렇겠는가?”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영남 사람들은 일의 선악을 막론하고 선입견을 위주로 하여 굳게 지켜서 견고하여 깨트릴 수 없네. 지금 이들이 흉도들의 꾐에 미혹됨이 이미 심하니 만약 흉도들이 뜻을 얻게 되면 틀림없이 영남 사람들과 합세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네.”라고 하고는 이어 한숨을 쉬며 한탄하였다. 그해 가을에 흉도들이 국정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 다음 해 봄에 난이 일어나니 공의 말에 확실하게 부합하였다.

또 말하기를 “저들이 이른바 ‘탕평(蕩平)’이라고 하는 두 글자는 그 계책이 교묘하다. 이는 성상께서 왕위를 계승하신 뒤에 저들이 그 의론을 지키고자 하였지만 장차 흉악한 역난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하여 대번에 얼굴빛을 바꿔서 사람들에게 기롱과 지적을 받기를 원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경서의 뜻을 견강부회하여 성상께서 마음으로 하고자 하는 바를 깊이 점치고는 그대로 교묘한 환관들에게 세력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을 열어주었다. 게다가 무신년 이후로는 조정에서 곧 난을 평정한 공로를 이 무리들에게 돌리자 이 무리들 역시 편안히 공신(功臣)으로 자처하였으니 뿌리내림이 더욱 견고하여 돌연히 뽑아 버리기 어렵다. 박필현(朴弼顯)과 박필몽(朴弼夢) 무리들은 겉으로 드러난 종기와 같아서 비록 매우 위태롭고 사악해도 그것을 터뜨리면 병이 나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무리들은 몸속의 종기가 몰래 오장육부를 좀먹는 것과 같아서 사람들이 아무도 그 사실을 알 수 없으니, 이 때문에 그 증세를 다스리는 것이 더욱 어렵다. 게다가 그 병은 폐병이 옮겨서 전염시키는 것과 같아서 이후 10년이 지나면 사대부 가운데 장차 사대부로서 지녀야 할 본연의 의론을 견지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게 될 것이니 어찌 슬퍼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후 10년 안에 세도(世道)와 인심이 과연 모두 남김없이 무너져 사라졌으니 공의 말과 같았다.

공은 일찍부터 관유안(管幼安)과 도연명(陶淵明)의 사람됨을 흠모하여 처세에 대한 그들의 법도를 항상 본받아서 실행하고자 하였다. 변고(變故) 이후로는 세상에 대한 생각이 더욱 희박해져서 생업을 접고 형에게 의지하였는데, 홀로 평상 하나에서 거처하였으니 고요하기가 마치 선승 같았다. 성문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것이 10여 년이었는데 이사를 하게 되었을 때 몸에 소지한 물건은 단지 도서 몇 짐뿐이었다. 두건과 신발은 해져서 기웠는데 혹 겨울에 저고리와 바지가 없더라도 담담히 개의치 않았다. 항상 집안 후생들에게 훈계하여 가르치기를 “오늘날 화를 당한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자처할 바는 오직 옛날의 왕위원(王偉元)과 우리 조정의 조창강(趙滄江)을 본받을 만하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시론(時論)에 간여하게 된다면 비록 그 말이 완벽하게 훌륭하더라도 오히려 불가할 텐데 하물며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닌 경우에야 어떠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공이 자신을 지키고 사람을 가르친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겸산(兼山) 유숙기(兪肅基)가 일찍이 이르기를 “근세에 학문으로 이름이 난 사람들 가운데 공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자는 없다. 학문의 강령은 단지 ‘거경(居敬)’ㆍ‘궁리(窮理)’ㆍ‘역행(力行)’일 뿐이니, 공은 이 3가지 항목에 대해 함께 수양하고 아울러 진전하여 어느 한 방면에 치우치는 병폐가 없었다. 이는 안목이 높고 심력이 범상하지 않아서 공부를 날마다 권면하여 절로 그만 둘 수 없는 점이 있음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학문에 힘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덕성과 재능이 이미 이루어지고 규모와 기상이 순정하게 흠이 없었는데, 불행하게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한스러운 것은 단지 오래 살지 못하여 채 원숙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으니, 공을 아는 자들이 이 말을 두고 공을 제대로 평가한 말이라고 여겼다.

아아! 공의 고아한 자품과 엄정한 연원으로 또 이처럼 힘써 행하여 부단히 전진하여 정심(精深)한 경지에 도달하였으니, 하늘이 만일 공으로 하여금 더 오래 살 수 있게 했다면 그 학문이 날로 더욱 진전하여 위로 천리(天理)에 통달하는 것을 그 경지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공의 목숨을 앗아가 버려 성덕(盛德)과 대업을 끝내 다할 수 없게 하였다. 이것은 실로 사문(斯文)의 천고의 한이니, 어찌 유독 나 한 사람만의 사사로운 애통함이겠는가.

공이 영월에 있을 때에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집을 짓고는 그 벽에 쓰기를 ‘증소(橧巢)’라고 하였으니, 당시 배우러 오는 자들이 ‘증소 선생(橧巢先生)’이라고 칭하였고, 시문 약간 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이(李) 유인은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염결하였고 총명하며 높은 식견이 있었으니, 공이 항상 벗으로 여겨서 종신토록 손님처럼 공경히 대하였다. 유배 중에 유인이 세상을 떠났는데, 공이 슬퍼하며 참담해하여 공의 나이가 한창 장성한 때였으나 다시 장가들지 않았다.

장남 양행(亮行)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고, 차남 지행(贄行)은 요절하였다.

지금 양행이 공의 묘소를 새로 개수하고 또 장차 글을 잘 짓는 이에게 글을 청하여 묘문(墓文)에 새기려고 하는데, 우수(遇洙)가 오래도록 공을 좇아 수학했다고 하여 행장을 부탁하였다. 돌아보건대 우매한 내가 일찍부터 공의 훈도를 입었으니, 비록 힘써 실행하지 못하여 책선하고 권면하는 공의 뜻에 부응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에 감발된 것은 많았다. 또 홀로 세상에 남아 거듭 변고를 겪어서 도덕과 의리를 사모함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니, 비록 질병으로 신음하고 정신이 더욱 소진되어 글 짓는 일을 감당할 수 없지만 이에 실로 감히 사양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마침내 대략 한두 가지 사실을 기록하고 아울러 기록해 준 글을 근거로 하여 눈물을 흩뿌리며 차례대로 서술하여 입언군자의 채택을 대비한다.

[주-D001] 청음(淸陰) 문정공(文正公) : 김상헌(金尙憲, 1570~1652)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ㆍ석실산인(石室山人)ㆍ서간노인(西磵老人),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636년 예조 판서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화론(主和論)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저서에 《청음집(淸陰集)》 등이 있다.

[주-D002] 문곡(文谷) 문충공(文忠公) : 김수항(金壽恒, 1629~1689)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23세 때 알성시 문과(謁聖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이조 참판ㆍ대제학(大提學)ㆍ우의정ㆍ영의정 등을 역임했다. 저서에 《문곡집(文谷集)》이 있다.

[주-D003] 농암 선생(農巖先生) : 김창협(金昌協, 1651~1708)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 또는 삼주(三洲),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669년(현종10) 19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1682년(숙종8)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집의(執義)ㆍ헌납(獻納)ㆍ대사간(大司諫)ㆍ동부승지(同副承旨)ㆍ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하고, 청풍부사(淸風府使)로 있을 때인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아버지 수항이 진도(珍島)에 유배된 뒤 사사(賜死)되자 영평(永平)의 산중에 은거하였다. 갑술옥사(甲戌獄事) 후 아버지의 죄가 풀리고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받지 않았으며, 그 후에도 대제학(大提學)ㆍ예조 판서ㆍ돈녕부지사(敦寧府知事) 등 여러 차례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저서에 《농암집》, 《농암잡지(農巖雜識)》, 《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 등이 있다.

[주-D004] 이이명(李頤命) : 1658~1722.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지인(智仁) 또는 양숙(養叔), 호는 소재(疏齋),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주-D005] 스스로 경계로 삼아 : 김신겸의 집안이 대대로 권세가 극성(極盛)했기 때문에 김신겸이 스스로 성만(盛滿)을 경계한 것이다.

[주-D006] 백부 충헌공(忠獻公) : 김창집(金昌集, 1648~1722)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영의정을 역임한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의 장남이다. 1684년(숙종10) 공조 좌랑에 재직할 때 정시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 참의를 지냈고 이후 각 조의 판서와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당시 정국을 주도하던 노론의 핵심 인물로서, 1721년(경종1) 세제의 대리청정이 실현되려다가 실패하자, 이를 주모한 이이명 등과 함께 관작을 삭탈당하고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압송되어 이듬해 4월 성주(星州)에서 사사되었다.

[주-D007] 임인년에 …… 입었는데 : 여러 공들이 화를 당한 것은 1722년에 발생한 임인옥사를 가리키는데, 이는 신축년(1721)에 있었던 왕세제를 세우는 문제로부터 비롯하였기 때문에 건저(建儲) 때문에 소인들의 심기를 거슬렀다고 한 것이다. 신축년 8월에 노론 대신들이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로 세우자고 주장하면서 경종의 신병을 이유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제의했고, 소론은 왕세제의 대리청정에 대해 반대하여 노론과 격렬한 분쟁을 일으켰다. 또한 소론의 김일경(金一鏡)이 대리청정을 추진한 노론 사대신은 왕을 군부로 대접하지 않는 역신이라고까지 몰아붙였다. 이를 빌미로 결국 소론은 노론을 차례로 파직시키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듬해 임인년에는 남인 목호룡(睦虎龍)을 매수하여 노론 측 일부 인사가 경종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고변을 하게 해 임인옥사(壬寅獄事)를 일으켰다. 임인옥사를 주도한 소론 대신들은 노론 사대신을 포함하여 60여 명을 처형시키고 관련자 170여 명을 유배시키거나 치죄하여 축출하였다.

[주-D008] 을사년에 …… 돌아와서 : 을사경화(乙巳更化) 때의 일을 가리킨다. 1725년(영조1) 2월에 영조 즉위 직후 소론 정권이 무너지고 노론 정권으로 교체된 을사환국(乙巳換局)이 발생했는데, 영조는 즉위 초의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소론을 몰아내고 자신의 지지 세력인 노론을 정계로 불러들여 노론정권을 구성하면서 노론 사대신을 위시하여 임인옥사에서 죽거나 처벌된 사람들의 죄를 모두 없애고 그 충절을 포상하는 을사처분을 단행하였다.

[주-D009] 청연(靑淵) : 충청남도 보령시(保寧市) 청소면(靑所面) 성연리(聖淵里)이다. 참고로 성연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성당리(聖堂里)ㆍ청연리(淸淵里)ㆍ양지리(陽地里)ㆍ음지리(陰地里)ㆍ성동(城洞)을 병합하여 성당과 청연의 이름을 따서 성연리라 하고 청소면에 편입하였다. 김신겸의 《증소집》에 청연과 관련된 시문이 다수 있다.

[주-D010] 무신년의 역난(逆亂) : 1728년(영조4) 3월 소인과 남인의 일부 세력이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하고자 일으킨 반란으로, 이인좌(李麟佐)가 거병하였으므로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한다. 이인좌는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에 진입, 청주성을 점령하고 서울을 향해 북상하여 목천, 창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에 이르렀다.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의 관군과 싸워 안성에서 패한 그는 죽산으로 도피하였으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대역죄로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능지처참되었다. 이인좌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으나 이후 정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반란군 주모자가 대부분 소론측 인물이었기 때문에 조정 내에서의 소론의 입지가 약화되었지만 영조에게는 탕평책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는 명분을 주었기 때문에 왕권은 오히려 강력해졌다. 이인좌의 반란은 결과적으로 영조의 탕평 정국의 기반을 다지게 하는 구실이 되었으며, 영조는 이를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주-D011] 포음(圃陰) 선생 : 김창집(金昌緝, 1662~1713)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명(敬明), 포음(圃陰)은 호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고, 어머니는 안정 나씨(安定羅氏)로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따님이다. 여섯 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났는데, 형 창집(昌集)ㆍ창협(昌協)ㆍ창흡(昌翕)ㆍ창업(昌業)과 함께 문장대가로 당시 육창(六昌)이라 불렸다. 조봉원(趙逢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82년(숙종8) 20세로 《징회록(澄懷錄)》을 편집하였고, 1684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교관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사사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00년 아버지의 유문인 《문곡집(文谷集)》을 간행했다. 1710년 왕자사부(王子師傅)를 거쳐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를 지냈다. 문장과 훈고(訓詁)에 능하고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제자로는 유척기(兪拓基) 등이 있고 저서로는 《징회록》 1권과 《포음집》 6권이 있다.

[주-D012] 우로에 두려운 마음 :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말한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가을에 서리와 이슬이 내리거든 군자가 그것을 밟아보고 반드시 슬픈 마음이 생기나니, 이는 날이 추워져서 그런 것이 아니다. 또 봄에 비와 이슬이 내려 땅이 축축해지거든 군자가 그것을 밟아보고 반드시 섬뜩하게 두려운 마음이 생겨 마치 죽은 부모를 곧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된다.[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 春雨露旣濡, 君子履之, 必有怵惕之心, 如將見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이 내용은 《소학(小學)》 〈명륜(明倫)〉 편에도 보인다.

[주-D013] 신종(愼終)의 예 : 예법과 정성을 다해서 상례(喪禮)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학이(學而)〉에 “죽은 이에 대하여 상례를 신중히 하고 제사에 정성을 다하면 백성의 덕이 후한 데로 돌아갈 것이다.[愼終追遠, 民德歸厚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14] 성복(成服) : 상을 당한 뒤 초종(初終), 습(襲), 소렴(小斂), 대렴(大斂) 등을 마친 뒤 상복으로 갈아입는 절차를 가리킨다.[주-D015] 소식(素食) : 상중에 고기와 술을 먹지 않고 하는 채식을 가리킨다.

[주-D016] 중형(仲兄) : 김언겸(金彦謙)으로 안동 권씨(權氏) 성(渻)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제행(悌行)과 딸 셋을 두었다. 자세한 행적은 미상이다.[주-D017] 수노(收孥) : 죄인의 아내와 자식까지 연좌하여 관청 노비로 만들거나 죽이는 것을 가리킨다.

[주-D018] 한(漢)나라 …… 것 : 이고(李固)는 후한 충제(冲帝) 때의 태위(太尉)로, 충제가 죽었을 때와 질제(質帝)가 시해되었을 때에 모두 청하왕(淸河王) 유산(劉蒜)을 옹립하려고 노력하다가 권신인 양기(梁冀)의 비위를 거슬러 죽음을 당하였다. 이때 이고의 문하생 왕성(王成)이 13세 된 이고의 아들 섭(燮)과 함께 서주(徐州)로 도망친 뒤 섭의 성명을 바꿔 주가(酒家)에서 고용살이를 하게하고 자신은 점쟁이 노릇을 하며 생활하였다. 그리고 암암리에 만나 학문을 익히게 하다가 대사령(大赦令)이 내리자 향리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렇게 이고의 아들 섭은 부친의 문생인 왕성의 보살핌을 입어 난을 모면하고 죽지 않을 수 있었다. 《後漢書 卷63 李固傳, 李爕列傳》

[주-D019] 그 …… 일어나니 : 무신년(1728) 3월에 소인과 남인의 일부 세력이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하고자 난을 일으킨 것을 가리킨다.

[주-D020] 경서의 뜻 : 《서경》 〈홍범(洪範)〉에 “편벽(偏僻)됨이 없고 기욺이 없어 왕의 의(義)를 따르며, 뜻에 사사로이 좋아함을 일으키지 말아서 왕의 도(道)를 따르며, 뜻에 사사로이 미워함을 일으키지 말아서 왕의 길을 따르라. 편벽됨이 없고 편당함이 없으면 왕의 도가 탕탕하며, 편당함이 없고 편벽됨이 없으면 왕의 도가 평평하며, 상도(常道)에 위배됨이 없고 기욺이 없으면 왕의 도가 정직할 것이니, 그 극에 모여 그 극에 돌아올 것이다.[無偏無陂, 遵王之義; 無有作好, 遵王之道; 無有作惡, 遵王之路.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無反無側. 王道正直. 會其有極, 歸其有極.]”라고 하였다.

[주-D021] 박필현(朴弼顯) : 1680~1728.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아버지는 박태춘(朴泰春)이다. 1723년(경종3)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해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임명되었으나, 1725년에 사헌부와 사간원으로부터 간신의 아들이라는 탄핵을 받아 낙향하였다. 1727년에 다시 사간원으로부터 필우(弼禹)ㆍ필기(弼夔)ㆍ필룡(弼龍)과 함께 노론 대신 김창집(金昌集)에게 배은망덕한 행위를 했고,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추종했으며, 정호(鄭澔)를 참소해 유배시켰다는 등의 죄목으로 4형제 모두 탄핵을 받았다. 1726년 이인좌(李麟佐)가 상주로 이주했을 때 그와 만나 사생지교(死生之交)를 맺고 반란의 뜻을 품은 뒤 묵동(墨洞)에 있는 서제(庶弟) 만호(萬戶)의 집에서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 및 호남의 한세홍(韓世弘)과 자주 모여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짰다. 그러던 중 태인(泰仁)의 현감으로 부임하자 마침 무장(茂長)에 유배되어 있던 종형 박필몽(朴弼夢)을 대장으로 삼아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1728년 3월에 최규서(崔奎瑞)의 고변(告變)으로 역모의 윤곽이 드러나게 되어 이인좌가 청주에서 난을 일으키자, 중앙에서는 그를 태인 현감의 자리에서 몰아내려 했으나 곧이어 반란에 가담하였다. 이인좌가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태인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금구(金溝)를 거쳐 전주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전주성에서 반란에 가담하기로 약속했던 전라감사 정사효(鄭思孝)가 사태가 반군(叛軍)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태도를 돌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면서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반란 계획이 부하들에게 발각되어 모두 도주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에 가속(家屬)들 몇 명만을 거느리고 아들과 함께 상주에 숨어 있다가 상주의 영장(營將) 한랄(韓㻋)에게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지금 사대부는 남인(南人)ㆍ소북(小北)ㆍ소론(少論)을 막론하고 모두 이 반란에 가담했으며 평안병사 이사성이 맹주(盟主)’라는 흉서(凶書)를 남기고는 그 자리에서 아들 박사제(朴師濟)와 함께 참수(斬首)되었다.

[주-D022] 박필몽(朴弼夢) : 1668~1728. 본관은 반남, 자는 양경이다. 1710년(숙종36)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1716년 병신처분으로 노론이 승리하자 지평에서 경성 판관으로 좌천되었다. 1721년(경종1) 김일경(金一鏡)ㆍ이명의(李明誼)ㆍ이진유(李眞儒) 등과 함께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사대신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함으로써 신임사화를 일으켰다. 소론이 재집권하자 다시 지평이 되었다. 그 뒤 헌납ㆍ부제학ㆍ승지ㆍ대사성ㆍ이조 참의ㆍ참찬을 지냈다. 1724년(영조 즉위년) 도승지가 되었으나, 실록청에 사사로이 출입한다는 사헌부의 탄핵과 노론의 공격을 받아 갑산으로 귀양 갔다. 1728년(영조4)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키자 유배지에서 빠져나와 반란파인 태인 현감 박필현(朴弼顯)의 군대에 몰래 들어가 서울로 진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도에 숨고, 이어 검모포로 가서 잔여세력과 합세하여 다시 거병을 시도하려다가 잡혀 서울로 압송된 뒤 능지처참 당했다.

[주-D023] 관유안(管幼安) : 삼국 시대 위(魏)나라 관녕(管寧)으로, 유안은 그의 자이다. 어렸을 때 화흠(華歆)과 나란히 앉아 글을 읽다가 화흠이 문밖에 지나가는 벼슬아치를 보러 가자 관녕은 즉시 그와 자리를 나누어 앉아 친구로 여기지 않았을 정도로 개결하였다. 한(漢)나라 말기 황건적의 난 때 요동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에서 따르는 사람이 많아 한 고을을 이룰 정도였고, 이들에게 시서를 강론하여 교화를 이루었다. 누차 소명(召命)을 받았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항상 검은 사모(紗帽)를 쓰고 목탑(木榻)에 앉아 고결한 모습을 보였으므로 세상에서 현자로 칭송했다고 한다. 《世說新語 德行》 《三國志 卷11 魏書 管寧傳》

[주-D024] 왕위원(王偉元) : 왕부(王裒)로, 위원은 그의 자이다. 진(晉)나라의 은자(隱者)로, 아버지 왕의(王儀)가 사마소(司馬昭)의 사마(司馬)로 있으면서 직간을 했다가 그의 노여움을 사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였는데, 왕부는 이를 애통해한 나머지 조정이 있는 서쪽을 향해 앉지도 않았으며 조정에서 벼슬을 주겠다고 여러 번 불러도 응하지 않았다. 언제나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 절을 하고 무덤가의 잣나무를 부여잡고 울었는데 그 눈물로 인해 나무가 말라 죽었고, 《시경》을 읽다가 〈육아(蓼莪)〉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3번을 반복하여 읽으며 눈물을 흘렸는데, 그의 문인들이 스승의 슬픔을 자아낼까 봐 〈육아〉는 폐하고 읽지 않았다고 한다. 《晉書 卷88 王裒列傳》

[주-D025] 조창강(趙滄江) : 조속(趙涑, 1595~1668)으로, 창강은 그의 호이다. 자는 희온(希溫),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고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화조(花鳥) 화가로 꼽힌다. 조속의 아버지 조수륜(趙守倫)이 광해군 때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자, 조속은 광해군을 불공대천의 원수로 여기고,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면서도 녹훈(錄勳)을 사양하였다. 윤증(尹拯)은 중부(仲父) 윤순거(尹舜擧)를 대신 해서 쓴 창강에 대한 제문에서 그를 진나라 왕부와 같은 사람이라고 평하였다. 《明齋遺稿 卷33 代仲父祭趙滄江文》

[주-D026] 유숙기(兪肅基) : 1696~1752.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자공(子恭), 호는 겸산(兼山)이다. 김창흡(金昌翕)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33년 명릉 참봉(明陵參奉)으로 벼슬길에 들어가 효릉 참봉(孝陵參奉),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를 거쳐 금구 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 뒤 임피 현령(臨陂縣令)과 전주 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소학》과 경서(經書)를 매일 정독하며 이론과 실천의 부합에 힘썼다. 저서로 《겸산집》이 있다.

[주-D027] 거경(居敬)ㆍ궁리(窮理) : 거경과 궁리는 정주학(程朱學)의 학문 수양 방법으로, 거경은 내적인 수양법으로 자신을 반성하여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고 기거동작(起居動作)을 삼가는 것이며, 궁리(窮理)는 외적인 수양법으로 널리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여 정확한 지식을 얻는 것이다. 참고로 《주자어류(朱子語類)》 권9 〈학(學)3〉에서 주희는 “배우는 자의 공부는 오직 거경과 궁리 두 가지 일에 달려 있으니, 이 두 가지 일은 상호 발명된다. 궁리를 능히 하면 거경 공부가 날로 더욱 진전되고, 거경을 능히 하면 궁리 공부가 날로 더욱 치밀해질 것이다.[學者工夫, 唯在居敬窮理二事, 此二事互相發. 能窮理, 則居敬工夫日益進; 能居敬, 則窮理工夫日益密.]”라고 하였다.

[주-D028] 역행(力行) : 《중용장구》 제20장에 “학문을 좋아함은 지(智)에 가깝고, 힘써 행함은 인(仁)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앎은 용(勇)에 가깝다.[好學, 近乎知; 力行, 近乎仁; 知恥, 近乎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9] 부단히 …… 도달하였으니 : 학문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옳은 방도를 찾아서 지속적으로 노력하여 정심한 경지에 도달한 것을 말한다.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군자가 깊이 나아가기를 옳은 방도로써 하는 것은 자연히 터득하고자 해서이니, 자연히 터득하면 처하기에 편안하고, 처하기에 편안하면 자뢰함이 깊고, 자뢰함이 깊으면 좌우에서 취하여 씀에 어디서나 그 근원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연히 터득하고자 하는 것이다.[君子深造之以道, 欲其自得之也. 自得之, 則居之安; 居之安, 則資之深; 資之深, 則取之左右逢其原, 故君子欲其自得之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30] 증소(橧巢) : 증(橧)은 새둥지처럼 섶[薪]을 쌓아 놓고 그 위에서 자는 것을 말한다. 상고 시대 백성들은 집이 없어서 여름이면 섶을 모아 놓고 그 위에서 살았는데, 마치 새둥지와 같았다. 《예기》 〈예운(禮運)〉에 “옛날 선왕이 집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 때에는, 겨울엔 동굴에서 살고 여름엔 나뭇가지를 모아 만든 보금자리 위에 누워서 지냈다.[昔者先王未有宮室, 冬則居營窟, 夏則居橧巢.]”라고 하였다.

ⓒ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 김진경 (역) | 2018

[橧巢金公行狀]  = 安東金信謙=

公諱信謙字尊甫。安東金氏。麗太師宣平之後。我朝淸陰文正公之玄孫。文谷文忠公之孫。考諱昌業。成均進士號老稼齋。妣孺人李氏。宗室益豐君涑之女。以癸酉二月初八日生公。未踰月。孺人卒。稼齋公辛勤撫育以生。十一歲始就學。而奇偉驟進。十三能作文辭。仲父農巖先生亟賞其筆力。賜玉簡以奬之。十五授室。爲李忠文公頤命之婿。李公與之評史。公應對無礙。李公深奇之。公自是知見日廣。弱冠遊庠序。與士友論議。人多畏服。辛丑秋魁進士。自以盛滿爲戒。大科則未嘗赴焉。壬寅伯父忠獻公以建儲忤羣小。與李忠文諸公同被禍。公坐謫安邊府。乙巳放還。除孝陵參奉。又除內侍童蒙敎官。俱不仕。以時事艱虞。意在遯藏。卜居保寧之靑淵。築室未成。値戊申逆亂。避地堤川寧越之間。亂已還靑淵。戊午二月初七日卒。享年四十六。始葬結城槐谷面。壬申遷于陽智壺口山午坐之原。配孺人李氏。始葬長湍。亦遷而合葬焉。公爲人。通達而敦確。和平而剛毅。器宇高嶷。風標頎秀。襟期所存。常超然於垢氛之外。性至孝。以不識慈顔。爲沒身之悲。幼受小學于叔父圃陰先生。至祭義雨露怵惕之語。嗚咽不成聲。泣下沾襟。圃陰稱其仁。事稼齋公克盡子道。及其喪。値辛壬時變。禍焰迫急。而愼終之禮。一毫無憾。才成服。卽隨伯父赴謫之行。自是衝冒暑雨。顚頓蒼黃。而猶不變素食。與仲兄同居。事之如父。而侍疾十數年。竭誠盡瘁。自衣褥匙箸。以至溲溺之節。皆親自檢視。不假之人。寒月徹夜。廳廡燖藥煮粥。手爲凍瘃。及至病谻。則每夕躬禱家廟。冀以身代者數十日。涕淚如雨。襟袖盡腐。仲嫂爲留其衣。以示後昆。隣人亦多感歎泣下。所用藥餌多珍貴。糜錢至累百千。而猶不繼。則公盡賣其田舍以供之。推以事內外尊屬。無不盡心。其在禍故之日。又能隨事致誠。合於事宜。凶徒將屠戮李忠文之家。忠文之孫鳳祥年才十六。將被收孥。郡縣逮捕方急。公密與李孺人謀。卒使鳳祥獲全。絶類漢李固子爕之生。而其難則倍之。時火色彌天。譏𧨝縱橫。公以金忠獻之從子。爲李忠文之婿。尤爲凶徒所忌。而於其平日知舊遭刑禍者。周旋庇恤。無少懾畏。朋友有托以後事者。則爲之經紀。終始罔倦。撫其遺孤若子姓。前後營葬十數。皆親自相地。躬董畚鍤。不憚饑渴寒暑。此皆公仁義忠信之發也。公學於諸父。而事三淵先生最久。嘗往侍于楊根蘗溪及雪嶽之永矢庵。自道義文章。以至事物經變之極。靡不精叩熟講。而其雅趣高情。亦泯然相契。故三淵愛予深至。爲父子間知己。而臨歿盡告其平昔入道次第。俾述行狀。盖衣鉢之托在此矣。公少有大志。慨然慕古人志業。思以事功文章不朽於百世。而中經世禍。感憤自厲。遂專意於家庭之學。益闡蘊奧。多所自得。而必以身體力行焉。盖公中閎善思。最用力於格致之功。其讀聖賢之書。莫不字求其訓句探其義。而必皆硏窮到底。故其學於天道之極致造化之本原。天下國家治亂興衰之理。默識心通。透徹無餘。而雖農蠶種藝之法。山川風俗鳥獸草木之宜。亦皆曉解纖悉。精粗本末。未之或遺也。嘗曰知當以行爲重。而行當以孝弟爲先。吾先世敎子弟之法。雖不能盡如古人。亦自有觀感竦動之效。及至今日。吾輩已作前輩。而後生無所觀法。不知小學之爲何事。今當先從吾始。以矯此弊。故公之居家孝友。自有至誠著見處。而其日用言動之間。必稽古訓。悉遵繩墨。及其持養之久。則德性完茂。英華暢發。淸明淵崇。不嚴而威。使人可親而不可慢也。公自少識慮絶人。能斷大事。料事知人。十中八九。忠獻公及李忠文公深加倚仗。凡事多待公而决。盖不獨辛丑之際爲然也。丁未春。公過一友人而言曰。吾近往嶺南。熟察物情。早晩必有稱兵之事矣。其人驚問曰豈其然乎。公曰嶺人毋論事之善惡。以先入爲主。牢不可破。今此輩被凶徒誘惑已深。若凶徒得志則必與嶺人合勢稱亂。仍歔欷憂歎。其秋凶徒當國。而翌年春亂作。其言鑿鑿符驗。又曰彼輩所謂蕩平二字。其計妙矣。盖聖上嗣服之後。渠輩欲守其議論。則將無以自拔於惡逆。又不欲遽換頭面。受人嗤點。故傅會經訓。以深卜上意之所欲爲。而仍開其巧宦之捷徑。况自戊申之後。朝家便以平亂之功。歸之此輩。此輩亦晏然自處以功臣。植根益固。難猝拔也。盖顯夢輩如癰疽之外見。雖甚危惡。决之則病可瘳。此輩如內腫之陰蝕臟腑。而人無以知之。所以其證尤難治也。且其病如瘵疾之轉相傳染。此後十年。士大夫將無一人持本色議論者。寧不哀哉。其後十年之間。世道人心。果皆壞喪無餘。如公之言。公夙慕管幼安,陶淵明之爲人。其處世節度。嘗欲倣而爲之。而禍故以後。世念益薄。破産依兄。獨處一榻。蕭然如禪衲。足不入城闉者十餘年。其有遷徙。隨身行李。只圖書數擔而已。巾屨穿結。或冬月闕襦袴。而澹然不以爲意。常訓諭一家後生曰。今日禍家諸人所自處者。惟古之王偉元與本朝趙滄江可法也。若不能然而干預時論。則雖使其言盡善。猶爲不可。况未必是乎。公之守己與敎人。大約類此。兪兼山肅基嘗謂近世以學爲名者。無可幾及於公者。盖學問綱領。不過曰居敬窮理力行而已。公於斯三者。交修並進。無墮落一偏之弊。由其眼目高心力絶異。功夫自有日勉而不能已者。所以從事未久。德器已成。規模氣像。粹然無疵。不幸早世。所留恨者。只是未熟耳。知公者以爲知言云。嗚呼。以公資禀之高。淵源之正。又力行深造之如此。天苟假之以年。則其學之日新上達者。將不知其所際。而奪之斯遽。使盛德大業卒莫之究。此實斯文千古之恨。豈獨余一人之私慟也。公之在越中。因樹爲屋。書於其壁曰橧巢。一時從學者稱爲橧巢先生。有詩文若干卷藏于家。李孺人孝友潔淸。聰明有高識。公常友視之。終身相待如賓。及孺人歿於謫中。公悲傷慘怛。年紀方盛而不復娶。男長亮行有一子一女皆幼。次贄行夭。今亮行新改公墓。又將請文於作者。爲墓道之刻。謂遇洙久從公遊。托以狀德之文。顧以顓蒙。夙被誘掖。雖行之不力。不能副責勉之意。然其感發於中心者多矣。且獨留人世。累更變故。所以懷慕德義。日深一日。雖疾病呻吟。精神益耗。無以堪筆硯之役。而於此實有不敢辭者。玆乃略紀一二。兼据叙述文字。揮淚詮次。以備立言君子之採擇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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