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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334

한양조씨양절공휘온지묘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16. 7. 10.
한양조씨 제주도 입도조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16. 7. 2.
[기획인물재조명6] 천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난세의 충신, 조 명(趙 銘)” [기획인물재조명6] 천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난세의 충신, 조 명(趙 銘)” ▲ 조명묘소 천안하면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선조 충신 조명(趙銘)이라는 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조명에 대해 재 조명해 보자. 조선조 세조(世祖)가 된 수양대군 유(首陽大君 유 字는 粹之)는 권력에 눈이 멀어 나이 어린 조카인 단종(端宗)을 권좌에서 내치고 그도 모자라 사약(死藥)을 먹여 죽였다. 이 때 이 일을 주도한 간신배들이 있는가 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많은 충신(忠臣)들이 분연이 일어나 단종 복위에 목숨을 내놓았다. 조명의 부친인 순생(順生)이 이에 연루 됐다 하여 전라도 고성으로, 그의 아들인 명은 금산으로 귀양을 보냈다. 조명(?~1478) 관향은 한양(貫鄕 漢陽)이.. 2016. 2. 16.
“난세의 충신, 조 명(趙 銘)” 충남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석곡리 산 44-1 “난세의 충신, 조 명(趙 銘)” ▲ 조명묘소 천안하면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선조 충신 조명(趙銘)이라는 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조명에 대해 재 조명해 보자. 조선조 세조(世祖)가 된 수양대군 유(首陽大君 유 字는 粹之)는 권력에 눈이 멀어 나이 어린 조카인 단종(端宗)을 권좌에서 내치고 그도 모자라 사약(死藥)을 먹여 죽였다. 이 때 이 일을 주도한 간신배들이 있는가 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많은 충신(忠臣)들이 분연이 일어나 단종 복위에 목숨을 내놓았다. 조명의 부친인 순생(順生)이 이에 연루 됐다 하여 전라도 고성으로, 그의 아들인 명은 금산으로 귀양을 보냈다. 조명(?~1478) 관향은 한양(貫鄕 漢陽)이.. 2016. 2. 12.
저전리 쌍계서당,성암정,존경재 저전리(苧田里)'安東布 始母 靑松沈氏할머니' 모시밭이 많다고 모시밭이라 불렀는데 한자 표기로 모시 저(苧)자에 밭 전(田)자를 써서 저전이라 하였다. 자연마을은 모시밭, 거리마, 정외, 조랏, 양지마, 삼거리, 무지랑 등 7개이며 206 가구에 616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옛 부터 한양조씨들이 모여 살았다. 한양조씨 저전세거지향 최근에 건립한 "한양조씨 모시밭 입향 행적사" ▼한양조씨 문중의 "오른쪽 앞 쌍계서당 & 왼쪽 위 성암정" 새로 대문은 보수 성암정(星巖亭) 제비원 석불에 "나무아미타불"을 새겼다고 전해지는 주사 조병태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961년 세운 정자. ▼앞 왼쪽 성암정, 위쪽 오른편 쌍계서당 ▼맨 위쪽 쌍계서당 쌍계서당(雙溪書堂) 한양조씨 시조의 13세 손인 조적의 증손자인 조덕.. 2016. 1. 20.
돈녕공재실준공 ◈판돈령공(휘慈,7세, 양경공파) 재실 "敦寧齋" 준공식이 2013년 11월 30일 충북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 1098-5번지 장미산자락 세장지 앞에서 계기(繼基) 양경공파종회장 등 병참공파 임원과 후손 등 60명이 참석하여 거행되었다. 대형(大衡:거창안의종중종친) 회장과 성도(成道) 이사가 건축 전 과정을 관리 감독하였으며 특히 재실 건립에 공이 큰 성훈(成薰) 감사에게 감사패를 수여하였다. 재실은 대지 560㎡(170평)에 종인의 모금과 종재 등 총 1억4천여만 원을 들여 재실 65㎡(19.5평), 삼문 8㎡(2.5평) 등 2동 73㎡(22평)을 건립하였다. 24883 2014. 8. 4.
◈ 한양조씨 의 유래와 내력[정리중...] ◈ 한양조씨 의 유래와 내력[정리중...] 관적(貫籍)은 대략 한 종족(宗族)이 한 지역에 누대를 살면서 걸출(傑出)한 인물이 배출될 때 비로서 득관(得貫)을 하는 국성(國姓-土姓)이 있고 나라에 큰 공이 있을 때 왕이 내리는 사성(賜姓)이 있는가 하면 외국에서 들어온 귀화민이 정착하면서 지명을 따서 관(貫)을 삼는 외래성(外來姓)으로 분류가 된다. 우리 한양조씨는 고려 고종(高宗45-1258) 때 동북면 쌍성 총관부 총관(摠管) 조휘(趙暉)가 한양에서 나왔다하여(고려사 130권 열전43-고종 45 戊午 11월 條= 趙(조)暉(휘)本(본)漢(한)陽(양)府(부)人(인)後(후)徙(사)居(거)龍(룡)津(진)縣(현)高(고)宗(종)45年) 한양조씨가 되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개적(改籍)하여 본관을 한양으로 사용하.. 2014. 3. 1.
문간공 조경(趙絅)선생 추모시(신도비에서.....) 龍洲神道碑(趙絅) 公諱絅。字日章。姓趙氏。本漢陽人。趙氏始大於高麗。有僉議中書事之壽。是爲始祖。中書二世 曰暉。曰良琪。皆爲雙城摠管。又三世禮儀判書暾,漢山伯仁璧,右議政涓。皆以功烈貴。議政相太宗。諡良敬。於公爲七世祖。曾祖折衝將軍贈吏曹參判壽崑。祖工曹佐郞贈吏曹判書玹。父司贍寺奉事贈議政府左贊成翼男。二世皆以行藝特聞。母贈貞敬夫人柳氏。籍文化。贈承政院左承旨愷之女也。萬曆十四年十月六日。公生於漢陽之崇敎坊。柳夫人賢。敎養有方。生五年。始就學。十年。學旣通。能自力讀書。亦無他嗜好遊戲。十三。柳夫人歿。其居喪毀 慼。一如成人。明年。贊成公聘宋夫人。夫人父宋公見之嘆曰。他日童子必貴。家當受厚報。弱冠文詞蔚然有聲。白沙李相國恒福,車太常天輅皆許以爲奇才。二十七。選司馬試。明年四月。贊成公歿。李爾瞻已貴。欲與之私相善久矣。知公居喪之節。以爲守禮之士。非禮不可。必加禮厚奉給。遂欲深結之也。及光.. 2009. 1. 17.
2.신묘보서(辛卯譜序)-1651효종2년 2.신묘보서(辛卯譜序)-1651효종2년 2.신묘삼권보서(辛卯三券譜序)-1651효종2년 생각컨대 우리 한양조씨는 멀리서부터 대를 이어왔으며, 고려(高麗)로부터 국조(國朝)에 들어오면서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장사(莊士)가 계속하여 왔으며, 그 종파와 지파의 가지와 잎사귀가 번성히 불어나 사방에 퍼졌으므로 그 수가 몇백천인지 알 수가 없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문절공(文節公)께서는 덕을 쌓은 거룩한 분으로 우러러 본원(本源)의 깊고 먼 것을 생각하고 우리나라에 보첩(譜牒)이 전해지지 않음을 개탄하였다. 그리고 형제가 모르는 사람같이 멀어질 것을 염려하여 드디어 그 선인 상서공(尙書公) 충손(衷孫)의 뜻을 따라 세보(世譜)를 지었으니 위로는 쌍성총관(雙城摠管)으로부터 아래로는 한천(漢川), 한평(漢平)의 6세에.. 2008. 12. 16.
八友軒 泉谷書堂 {八友軒 泉谷書堂} 천곡서당은 산곡동(山谷洞)수구(水口) 독서동(讀書洞)에 1754년경에 팔우헌(八友軒) 조보양(趙普陽) 선생이 창건하여 원근학동(遠近學童)을 수학하고 향토사림(鄕土士林) 들의 강학(講學)의 장소이었는데, 1868년 산곡동 강당에 천곡서원을 창설하기 위해 이건 하였으나 1871년 조령(朝令: 毁撤令)에 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3년에 현지로 이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당에는 팔우헌 문집(八友軒 文集)과 학동에게 수업하던 박동록(泊董錄)외의 고서 천 여권이 있다고 전해진다. 천곡서당은 대문채(솟을 대문)에 들어서면 우측(원래는 대문과 마주치는 것으로 추측)에 천곡서당이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남향한 전면3칸에 일자형 누각 건축으로 중앙에 마루를 만들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고 툇마.. 2008. 12. 13.
1.甲申單券譜序 (1524년중종19년)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08. 12. 4.
族譜僞作[족보위작]件에대한 小考[소고] ■族譜僞作[족보위작]件에대한 小考[소고]■ 족보를 갖추고 있느냐, 없느냐에따른 양반인정 문제는 지금의 현 상황에서는 판단하기가 애매한 부분이 많다. 전세계적으로 볼때 대한민국의 족보가 제일로 잘되어있다고 한다. 세계속에서 인정받은 대한민국의 족보!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허무맹랑한일부터해서 여러 모순 덩어리가 넘쳐난다. 누구나 관심을 갖고 상식이 통하는 선상에서 관찰하여 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첫째! 개별 문중의 始祖[시조]: 족보를 구비하고 있는 한국 성씨집단의 대다수가 이부분에서는 공교롭게도 극소수의 성씨를 제외하고는 僞作是非[위작시비]에 걸려든다. 事大主義思想[사대주의사상] 에 오랜기간 물들어 있던터라 시조의 출신지가 中國에 편향되어 있고, 신분또한 中國의 皇孫[황손]을 비롯하여 대개가 名門門.. 2008. 9. 2.
★충정공 부조묘(충북 금왕읍 유촌리) 한양조씨 5세조 충정공 휘인옥 종가 세거지인 충북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 마을을 순례하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길은 참으로 감회가 새롭고 기쁜 마음으로 다녀올 수가 있었고, 충정공 21대 종손이신 성도님과 차대종손인 범희씨를 만나고 돌아와 어느때보다도 흐뭇한 순례길이 된거 같습니다. 따사로운 봄향기가 물씬 풍기는 고곳의 유적지는 감회에 젖게 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유포삼거리 자린고비 조륵선생 유래비 표지석 ▲유포리/유촌리/삼봉리 삼리접경지에 세워져 있는 12세조 진사공 휘경유허비 천장의 굴비를 형상화한 유래비 자린고비는 천하에 인색하기로 소문난 구두쇠를 가리키는데,그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 시대에 충북 음성에 살았던 '조륵' 이란 인물이다. 그는 장독대에 빠진 날파리 다리에 묻은 간장이 아깝다며 단양 장벽루 .. 2006. 5. 1.
가천재공휘사지묘 & 재실위치도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06. 1. 18.
2005년 시조중서공시제(제향위주사진)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05.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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