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漢陽人문화유적❀519 ●현곡공(玄谷公) 조위한(趙緯韓):출생1567년(명종 22)~사망1649년(인조 27) ■조위한(趙緯韓)조위한(趙緯韓): 1658발간玄谷集序 玄谷集卷之一 辭 二首賦 三首玄谷集卷之二 詩○五言古詩 二十七首詩○七言古詩 七首玄谷集卷之三 詩○五言律詩 一百四十一首玄谷集卷之四 詩○五言排律 八首玄谷集卷之五 詩○七言律詩 一百十首玄谷集卷之六 詩○七言律詩 一百二十六首玄谷集卷之七 詩○七言律詩 九十四首玄谷集卷之八 詩○七言律詩 六十四首七言排律 五首玄谷集卷之九 詩○五言絶句 八首六言絶句 四首七言絶句 六十首玄谷集卷之十 詩○雜體 二十七首玄谷集卷之十一 敎書 四首批答 一首疏 三首啓辭 二首玄谷集卷之十二 檄 一首策題 二首論 一首策 一首書 一首序 二首記 一首跋 二首玄谷集卷之十三 墓碣 一首祭文 十五首玄谷集卷之十四 錄 二首●조위한(趙緯韓)조위한(趙緯韓)1567년(명종 22)~1649년(인조 27)■현곡집(玄谷集)1658발간조위한(趙緯.. 2024. 9. 9. 은진현감(恩津縣監) 조강(趙綱)에 대하여..... ●기언 별집 제24권 / 구묘문(丘墓文)■사헌부 감찰 정공(鄭公)휘 약(若) 묘표[DCI]ITKC_BT_0344A_0930_010_0110_2013_008_XML DCI복사 URL복사공은 휘는 약(若)이고 자는 순승(順勝)이며, 성은 정씨(鄭氏)이니 그 선대는 본래 진양(晉陽) 사람이다. 고려 때의 명신(名臣) 정길부(鄭吉孚)의 6세손이며 우리 명종 때의 간관(諫官) 정사현(鄭思顯)의 아들이다. 16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니,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유술(儒術)을 좋아하였다. 우리 선조 22년(1589)에 행의(行誼)로 선발되어 재랑(齋郞)이 되었다. 이듬해에 어머니 이씨(李氏)가 세상을 떠났다. 정씨 선대의 묘소가 모두 상당(上黨)에 있었는데, 인하여 묘소를 지키며 떠나지 않았다.당시에 왜.. 2024. 9. 7. 의병장 조경남(趙慶男): 외세 침략과 국난극복 정신 ▲의병장 조경남장군 신도비, 난중잡록, 춘향전▲舊묘역모습▲新묘역(합장)모습▲新묘역(합장)모습의병장 조경남(趙慶男)외세 침략과 국난극복 정신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외세에 의하여 침략을 받았거나 위협을 받았던 일이 너무도 많았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900여 회나 된다고 한다. 우리의 선조들이 그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을 때 그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나라를 지키며 우리 민족의 문화를 수호해 온 것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위대했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향토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더욱 더 숭고하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 임진·정유재란 때 우리 고장을 지키기 위한 남원성 싸움은 어떠했는가? 이때만 하여도 우리나라는 북방경비를 위한 수비군과 비변사라는 군사기구가 설치되었었으나 병·농 일치였기에 강한 정예군대는.. 2024. 9. 5. ●漢陽趙氏派宗會序 ●洪北面魯隱洞宗中立約序(大護軍公派宗會規約) ■冶谷先生集卷之五 / 序●漢陽趙氏 湖西地域 大護軍公派(趙璔) 宗會所 "宗會序" b026_176b[DCI]ITKC_MO_0836A_0070_010_0020_2009_B026_XML漢陽趙氏之流落于湖之右者。凡一百五十有餘年。而奄已過五六世矣。衰替不振。故家遺業。無復存者。而尙賴祖宗積善累仁之餘烈。子孫繼繼繩繩。環洪,結,德,禮,唐,沔,瑞,泰之境而散處者。其麗亦夥矣。惟各困于葛藟。鮮相往來。其或邂逅相遇。叙炎凉外。僅能貌相勞苦而已。漠然無情義之交孚。至有功,緦之戚。而不相識面者焉。又况於吉慶禍患之際。能與之有同其憂喜者耶。歲在萬曆丁巳冬。宗丈故承旨纘韓氏。以前榮川郡守。持斧督捕土賊于忠,全,慶三道。便道來謁于良節公廟。于時吾季父嗣守宗祧。因求合湖中宗族爲一會。季父爲之招集。越明年戊午春三月上旬。捕使還自嶺南。遂設一塲燕會而罷。於是。門中長老咸曰。大宗廟在於是。時節.. 2024. 9. 4. ★漢陽趙氏 氏族의 連原!★ 시조는 조지수(趙之壽). 고려때 벼슬하여 중서사(中書事)에 이르렀다. 한양조씨(漢陽趙氏)의 선계(先系)는 고려왕족이였다. ‘갑신단권보(甲申單卷譜)’ 서문에 보면, 조(趙)씨는 본래 고려시 개성의 명망있는 종족(宗族)으로 8세조에 조지수(趙之壽)가 있어 현족(顯族)이 되었다는 내용과 조선왕조실록에 태조 이성계의 글에보면 고려왕족이란 글이 있다.아무튼 한양조씨(漢陽趙氏)는 시조 조지수(趙之壽)의 아들인 조휘(趙暉)가 (★1代 안무고려군민총관부(安撫高麗軍民總管府)→ 2代 심양등로안무고려군민총관부(瀋陽等路安撫高麗軍民摠管府)→3,4代 쌍성등처군민총관(雙城等處軍民總官)★)이 되고, 손자인 동정군좌부도원수(東征軍左副都元帥) 조양기(趙良琪,東征軍將軍 명단엔 없다.)가 2대 쌍성총관(2代雙城摠管) 이 되였으며 증손자인.. 2024. 9. 1. ■赤壁賦 ■현주집 제13권 부賦 적벽부 赤壁賦 -170 반적벽부 反赤壁賦 -176■赤壁賦歲庚申時九月後重陽先望日。先生與客。舟游石壁。于時驟雨旋止。狂飆忽息。水淸若空。纖纊初濯。刺鏡面而遐遡。覽形勢之紆直。執巵酒以相醻。流左右而遊目。紛錦累而繡堆。杳霞連而霧屬。遠而望之兮。龍鱗之照爛。近而察之兮。驚虎豹之藏蹲。雕山骨之戍削兮。琢雲根以頹疊。怳如女媧之所鍊兮。塞天竇而餘素質。又如大禹之所鑿兮。決龍門而河道闢。若非鬼運而神輸兮。疇克岸委而崖積翠。疑長鯨之曝鬐兮。白訝防風之朽骨。夫何造化之神權兮。幻至奇以無迹。於是先生執酌流眄。嚄然長歎曰。厥初開張。孰主張是。其始芒芒。我昧斯理。若以設此者。爲有意於固國。崤函漢方兮。無柰秦楚之亡。若以設此者。爲無意於固國。胡然周遭兮。屹若長城與巨防。況箕檀至於濟麗兮。孰有恃此以威敵。絗先朝蜑子之充斥兮。慘王師望風而魚肉。至今江波之嗚咽兮。想魂悲而鬼泣。天之設.. 2024. 8. 28. 承政院左承旨趙公玄洲諱纘韓墓碣銘/通川郡守趙公墓碣銘 :考諱緯韓。 承政院左承旨趙公玄洲諱纘韓墓碣銘五月十五日 a140_494d 편목색인[DCI]ITKC_MO_0404A_0740_010_0100_2003_A140_XML DCI복사 URL복사故承政院左承旨玄洲趙公卒後五十九年。其孫龜祥乃以顯碣請。世采辭不敢。顧有義不敢終辭者。謹敍而銘之。敍曰公諱纘韓。字善述。漢陽府人也。鼻祖諱之壽。高麗僉議中書事。至孫諱良琪。年十三爲摠管破哈丹兵。大被元世祖奬賜。自是襄烈公諱仁璧,良節公諱溫。當本朝興運。或晦或顯。各行其志。名德勳庸。一世無兩焉。曾祖諱邦彥。參判。祖諱玉。縣令贈參判。考諱揚庭。贈判書。妣贈貞夫人韓氏。縣監應星之女。公以隆慶六年正月某甲生。幼有異質。儼然若成人。判書公家法素嚴。公旣服訓。讀書務記覽。才思橫逸瓌奇。殆不可涯涘。名譽益盛。間中司馬試。萬曆三十三年魁庭試。宣廟奇其文。以御筆批點。特命直赴殿試。始隷成均館.. 2024. 8. 27. [춘향전 탄생 이야기]이몽룡은 실존 인물이며, 작가는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 의병장이다!!! ▲맨우측 - 한양조씨 산서공파 조광숙 종부님.[춘향전 탄생 이야기]□이몽룡은 실존 인물이었다이러한 주장을 한 대표적 인물이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였던 설성경 교수인데, 그는 성이성의 8대 후손 종진(鍾震)이 1863년(철종 14)에 펴낸 『계서일고(溪西逸稿)』와 성이성의 4대손 교와(僑窩) 성섭(成涉,1718∼1788)이 지은 필원산어(筆苑散語) = 교와문고 3권의 내용을 기초로 하고, 다른 여러 자료를 면밀하게 검토하여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교와문고」는 성이성의 4대 후손 성섭이 지은 책으로 그동안 일부분이 「필원산어」라는 이름으로 전해져왔으나, 창녕 성씨 가문의 사위였던 故 이휘교(영남대 중문과) 교수가 3권짜리 전권을 보관하고 있다가 발견되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자료이다. 춘향전의 주.. 2024. 8. 26. ♣양양수군만호대포영(襄陽水軍萬戶大浦營)【襄陽東溟書院記】 http://yangyang.or.kr/yangyang/2014/2014_njd.pdf양양수군만호대포영(襄陽水軍萬戶大浦營)【襄陽東溟書院記】余以中丞.論事過當.斥補于玆土.下車之初.先以興學校育人才爲急務.重創聖廟而大之.改造齋舍而新之.又置學田以爲諸生朝夕之供.而第念校生多有免軍之徒.紛紜雜亂.其中雖有俊秀拔萃之才.내가 중승(中丞)으로서, 일을 지나치게 논의하다가, 좌천되어 이 땅에 처음 왔다. 먼저 학교를 일으켜 인재육성을 급무로 하고, 향교를 크게 중창, 재사를 새롭게 개조하였으며, 또 제생의 아침저녁의 제공을 위하여 학전을 설치하여 다만 생각하건데 군역을 면제받은 무리가 많이 뒤섞여 어지럽고 그 중에는 비록 재주가 출중한 준수도 있었다.不得精業於黌齋.以此列邑皆設書院于靜散地.爲多士修養之所.而顧此邑獨無焉.학교에서 정통의.. 2024. 8. 23. ●龍洲遺稿 卷十一 / 序《玄谷集》序/《漢陰先生文集》序 ●知中樞府事玄谷趙公行狀●●龍洲遺稿 卷十一 / 序 《玄谷集》序 昌黎氏論文章曰:“水,氣也;言,浮物也。水大而物之浮者大小畢浮。” 蘇長公亦曰:“昌詩不如昌其氣。” 不佞於是迺知文章以氣爲主之說,古今不可易也。吾宗人玄谷翁生當隆、萬盛際,稟氣固厚。才結髮,喜文章,文非先秦、兩漢,不讀也;詩非開、天大家數,不眼之也。其所嚌胾,最深於太史氏及戰國弘辯之說,以助其氣,以資其筆勢。由是名噪一國,人不敢顏行抗其氣。掉鞅藝苑,破的澤宮,名標一頭,殆無虛歲。主司以得失翁爲憂樂,同進之士以莫先翁爲戒。顧坐時命,屢屈公車,至髮種種,乃始得之。然翁則猶然笑之,不少挫其氣。八角磨盤之勇,愈往愈壯。 天啓年間,不佞忝入玉署,與翁同儤直,是時翁年過耳順矣。聽其譚論,則河決而峽潰也;視其符彩,則巋然靈光也。叩其竹素之業,則惠施五車,不足當其意也,不佞作而面歎者良久。翁歿十年于茲,嗣子億氏宰南縣,付翁集于剞劂氏.. 2024. 8. 23. ●양양동명서원(창건)기:襄陽東溟書院(創建)記▣ ▣동명서원(창건)기(東溟書院 (創建)記)▣내가 중승(中丞)으로 있을 때에 사건을 논하는데 너무 지나치다고 배척을 받아 이 땅으로 보직되었다. 수레를 내리면서부터 먼저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기를 것을 급무로 삼아 향교(鄕校/聖廟)를 중창하여, 크게 짓고 재사(齋舍)를 개조하여 새롭게 하였다. 또 학전(學田)을 마련하여 제생을 조석 식사의 이바지 거리로 삼았다. 그런데 생각건대 교생들중에 군(軍)을 면하려는 자가 많이 있어 떠들고 소란을 피우므로 비록 준수하고 뛰어난 인재가 있어도 오히려 재사(黌齋)에서 착실히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렬읍(列邑)에서도 모두 서원을 한적한 곳에 지어 많은 선비의 학업을 닦는 장소로 삼고 있는데 돌아보건대 이 읍에만 홀로 없으므로 나는 분개한 마음으로 탄식하면서.. 2024. 8. 22. ●桂窩趙公諱備字士求墓誌銘[李端夏][朴世采] 桂窩集附錄桂窩趙公墓誌銘[李端夏]桂窩趙公之喪。余狀其行。將以求銘於當世能言之士。事久未就。時益艱虞。二孤俾余遂誌諸墓。則余不忍以不文終辭。謹就前狀。略加增損而序之曰。公諱備字士求。桂窩其號也。趙氏系出漢陽。其上祖良琪在麗朝破哈丹。官爲揔管。是生暾。暾生仁璧。兩世俱以邊功。官至府院君。仁璧生溫。以開國定社功。亦封府院君謚良節。又傳四代至公高祖諱邦彦禮曹參判。曾祖諱玉綾城縣令贈吏曹參判。祖諱揚庭 贈吏曹判書。考諱纘韓左承旨。世號玄洲。有文章重名。妣幸州奇氏。僉正孝曾之女。高峰先生大升之孫。以萬曆丙辰十二月初一日。生公于滎川衙舍。玄洲公方守本郡。郡在小白山下。仍以命公小字。及長。公又取小山叢桂之義。以名其窩云。公聦晤夙成。文藝絶倫。弱冠淹貫羣書。尤以筆法擅名。旁通繪畫篆刻之流。靡不精詣而不屑爲也。所與遊皆一世名勝。人益艶稱之。辛未丁玄洲公憂。時年甫十六。隨伯氏廬墓盡禮。乙亥中進士第七名。丁.. 2024. 8. 22. ●玄洲集敍[李植]●玄洲先生集序[李景奭] ●玄洲集敍[李植]昔。蘇長公論文。以孔子辭達一句爲宗旨。說者謂達者。達其意也。詞止於達。不必宏肆奇麗之爲尙。是固然矣。然惟物之不齊。理之殊也。意有遠近。辭有險易。自虞,夏,商,周之文。尙有渾噩詰屈之不同。況有屈宋以來。六義派分。群軌竝騖。均之各言其志。無闕於理。而輪蹄之餙致遠。虎豹之斑章采。斯不亦文之至哉。國朝敦尙經訓。文辭爾雅韓蘇之文。以近爲範。而秦漢諸家宏麗之體。猶未備也。逮隆萬以後。作者數公。一大振之。唯時繼而和之者。有玄洲趙公。蔚爲名家。其學於古無所不蒐。故其文於古無所不備。上蹈兩漢。下籍六朝。而亦不失孔氏辭達之旨。旣俯就場屋。大擅屠龍之譽。其應製館閣之作。皆倚馬立成。而一時諸彦。莫之先也。世方期以狎盟文囿。揭旗鼓先多士。而沛有餘地矣。不幸仕不遇時。浮沈州縣數十年。其有得有喪。欣戚不平。一寓於佔畢。故其出不窮而語益奇。惜其天球弘璧。翳鬱於蓬蒿沙礫之間。徒使田氓牧豎。見其光怪而疑.. 2024. 8. 21. [溪陰集:正郞公派 溪陰 趙彭年(1549 : 明宗4 ~ 1612 : 光海君4)의 文集] [溪陰集:溪陰 趙彭年(1549 : 明宗4 ~ 1612 : 光海君4)의 文集] [기사전거] : 行狀(崔時弼ㆍ李毅敬 撰), 墓表(洪良浩 撰, 耳溪集 卷35), 本集內容 등에 의함[편찬및간행] 저자의 시문은 詩賦, 雜著 도합 500여편이 家藏되어 왔다. 저자의 후손 趙得河가 가장초고를 바탕으로 수집 편차한 것을 1894년에 후손 趙冕衡에게 繕寫를 부탁하여 간행 준비를 마쳤으나 간행하지는 못하였다. 그 후 문집 간행을 위해 都有司 朴鼎陽을 중심으로 康津에 사는 후손 조면형이 校正을 맡고, 靈巖에 사는 후손 趙昌河가 재정을 맡고, 영암에 사는 崔善尙 등이 監印을 맡아 1898년 11월에 문집의 판각을 시작하여 1899년 4월에 靈巖에서 목판으로 문집을 간행하였다.《초간본》 이 본은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982.. 2024. 8. 21. ▣亂中雜錄의 사학사적 고찰: *<논문>: 亂中雜錄 의 史學史的 考察 ▣亂中雜錄의 사학사적 고찰: *: 亂中雜錄 의 史學史的 考察 【국문초록】난중잡록은 남원출신의 조경남이 쓴 임진왜란과 호란(여진족의 침입)을 기술한 당대사로 8권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 의병사 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로 이미 활용되고 있는 책이다.본고에서는 이 중 임진왜란 기술에 관한 내용을 서지학적 측면과 사학사적 측면에서 분석 정리하고 연구하였다. 조경남은 문중에서는 상급 사족(士族) 양반으로 미화하려 했으나 연구결과 그는 한미한 하급 양반이었고, 그는 임진왜란 5-6년간 남원부의 서기직으로 근무했다. 또한 정유재란 때에는 장수로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참살함에 직접 참여하여 전과를 올리는 병법에 밝은 사람이고 이를 적절히 적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후에 진사시험에 합격했으나 이 신분으로 지역.. 2024. 8. 19. 이전 1 2 3 4 5 6 7 8 ··· 35 다음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