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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511

◈壬亂忠臣 白旗將軍 趙熊 紀蹟碑◈선조38년 1605에 병조참의증직 ●宣武原從 一等功臣● ◈壬亂忠臣 白旗將軍 趙熊 紀蹟碑◈선조38년 1605에 병조참의증직  ●宣武原從 一等功臣● 2024. 12. 4.
◈조연(趙涓,양경공) 행장(行狀) -홍귀손 저◈ ◈조연(趙涓,양경공)  행장(行狀) -홍귀손 저◈ 공(公)의 성(姓)은 조씨(趙氏)이고, 휘(諱)는 경(卿)이다. 뒤에 고친 휘는 연(涓)이다. 한양(漢陽)의 대족(大族)이다. 증조고(曾祖考)는 조양기(趙良琪)로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을 지냈고, 조고(祖考)는 조돈(趙暾)으로 추충 익대 보리 공신(推忠翊戴輔理功臣) 벽상 삼한 삼중 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용성 부원군(龍城府院君)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제예의사사(制禮議司事) 상호군(上護軍) 행삼중 대광(行三重大匡) 용성군(龍城君)에 추증되었다. 선고(先考)는 조인벽(趙仁璧)으로 추성 양절 익위 보리 찬화 좌명 공신(推誠亮節翊衛輔理贊化佐命功臣)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문하 좌정승(門下左政丞) 판도평의사사(判都評議司事) 영경연사(領經筵事) 한산.. 2024. 12. 1.
●승정원일기 2973책 (탈초본 136책) 고종 25년 5월 12일 계해 20/23 기사 1888년 光緖(淸/德宗) 14년○ 又以禮曹言啓曰, 卽接四館所牒呈, ■고종 25년 (1888년 光緖(淸/德宗) 14년 고종 25년 5월 12일●승정원일기 2973책 (탈초본 136책) 고종 25년 5월 12일 계해 20/23 기사 1888년  光緖(淸/德宗) 14년○ 又以禮曹言啓曰, 卽接四館所牒呈, 則戊子五月館學儒生應製入格進士金炳軾, 直赴殿試乙酉九月秋到記製述入格進士李赫儀, 同年同月館學儒生應製入格幼學朴龍翰·劉南燮·崔商岳·石鍾律·崔商翼·宋在成·吳載復·崔民榮·愼宗駿·金永極, 進士安鍾悳·李肯來·李載覲, 幼學朴勝億, 同年十月館學儒生應製入格生員, 鄭元謨, 幼學呂圭秉·李潤贊·朴載鎬·許玟·柳誠烈·洪愈燮·梁柱玾·李秉彙·鄭翰時·金命鎬·丁璣燮·權文淵·金之鋌·吉鍾林, 同年十一月柑製入格幼學崔運周, 丙戌二月館學儒生應製入格生員金永學, 幼學朴夔祚·金和永·李太洪·劉升烈·韓永五·姜鳳會·趙炳斗·金鎭華·尹.. 2024. 11. 23.
▣ 금마 입향조 한풍군파 14세조 봉수당(鳳首堂) 휘인민(諱仁民) 임곡재(林谷齋) 재실▣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24. 11. 18.
●▣故義兵將成均進士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山西先生趙公神道碑銘 竝書▣남원의병장조경남장군신도비(譯文)● ●남원의병장조경남장군신도비(譯文)●▣故義兵將成均進士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山西先生趙公神道碑銘 竝書▣通政大夫전前비서원승秘書院丞 안동 김녕한安東金甯漢 짓고,崇祿大夫前判敦寧院使海平윤용구(尹用求,1853-1939)글씨 전서도 쓰다. 목릉(선조)임진, 계사년 사이에 왜적이 침입하여 우리 강토를 짓밟고, 우리 백성을 짓이겨 죽임으로써 당시 충의를 지닌 선비들이 견고한 갑옷을 걸쳐 입고, 날카로운 무기를 움켜들고서 적개심을 품은 자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이한 계책을 내고 사기를 북돋아 작은 병사로서 많은 왜적에 대항하여 큰 공을 세운 사람을 꼽는다면 단연 산서 조공을 일컬어 왔다.공은 한양인이며 휘 경남, 자 선술이다. 고려 첨의중서 지수의 후예이다. 조선조 우의정 양경공 휘 연으로부터 벼슬.. 2024. 11. 15.
●17世祖梧竹軒諱宜陽 ●宜陽字義卿號梧竹軒己亥生辛卯司馬文章鳴于世壽同樞戊辰卒有文集◎墓甘泉梧香洞後亥坐配永川李氏父猶龍◎墓館坪沙禮洞艮坐配安東權氏父正元◎墓山谷聖岺酉坐●의양자의경호오죽헌기해생신묘사마문장명우세수동추무신졸유문집◎묘감천오향동후해좌배영천이씨부유룡◎묘관평사례동간좌배안동권씨부정원◎묘산곡성령유좌   백년이 넘은 기록을 평론하자면 보고 아는 것에 미치지 못하는데 미치지 못한다면 어찌해야 좋을까? 이 또한 방법이 있으니 당시의 인정된 평판을 살펴볼 뿐이다. 몸소 살펴보면 상세히 알 것인데 옛사람의 감식안이 지금보다 한 등급 높았으니 함부로 재단할 수 없고, 특히나 후세에 확실한 것을 전하는 것에 비할 바 아니니, 어찌 후세에 모색하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오죽재(梧竹齋) 조공(趙公)의 세대는 이미 백년이나 오래 되었고, 후생인 .. 2024. 11. 14.
◐議政府領議政諡文貞金公諱堉行狀◑ ▲영의정(領議政) 잠곡(潛谷) 김육선생 묘(金堉先生 墓)▲영의정(領議政) 잠곡(潛谷) 김육선생 신도비(金堉先生 神道碑)   소재지 - 경기 남양주시 삼패동 산29-1 일원 ▲잠곡(潛谷) 김육선생 영정이곳은 청풍김씨문의공파(淸風金氏文毅公派) 묘역으로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 김식(金湜, 1482(성종 13-1520(중종 15), 영의정(領議政) 김육(金堉, 1580(선조 13)-1658(효종 9), 예조판서(禮曹判書) 김좌명(金佐明,1616(광해군 8)-1671(현종 12). 병조판서(兵曹判書) 김성응(金聖應, 1699(숙종 25)-1764(영조 40). 호조판서(戶曹判書) 김시묵(金時默, 1722(경종 2)-1772(영조 48)의 묘역이다.김식(金湜)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조광조(趙光祖)와 .. 2024. 11. 9.
◐김육신도비명(領議政諡文貞金公神道碑銘)◑ ▲영의정(領議政) 잠곡(潛谷) 김육선생 묘(金堉先生 墓)▲영의정(領議政) 잠곡(潛谷) 김육선생 신도비(金堉先生 神道碑)   소재지 - 경기 남양주시 삼패동 산29-1 일원▲잠곡(潛谷) 김육선생 영정 ◐김육신도비명(領議政諡文貞金公神道碑銘)◑이곳은 청풍김씨문의공파(淸風金氏文毅公派) 묘역으로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 김식(金湜, 1482(성종 13-1520(중종 15), 영의정(領議政) 김육(金堉, 1580(선조 13)-1658(효종 9), 예조판서(禮曹判書) 김좌명(金佐明,1616(광해군 8)-1671(현종 12). 병조판서(兵曹判書) 김성응(金聖應, 1699(숙종 25)-1764(영조 40). 호조판서(戶曹判書) 김시묵(金時默, 1722(경종 2)-1772(영조 48)의 묘역이다.김식(金湜)은 조선.. 2024. 11. 9.
■경북 예천군/영주시 유적/유물 분포도■ ■경북 예천군/영주시 유물/유적 분포도■◉옥천 조덕린 유택☞경북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 산 112-1◉안동포(모시)시모 청송심씨 유택☞경북 안동시 서후면 저전리 산 4-1◉안동포재배지 苧田里 “星岩亭,雙溪書堂,尊敬齋”(우) 36616☞경북 안동시 서후면 풍산태사로 3411-9☞(지번) 서후면 저전리 397◉산곡(山谷)조원익(趙元益)팔우헌(八友軒) 조보양(趙普陽)잠실헌(潛室軒) 조안(趙晏)幽宅☞경북 예천군 보문면 독양리 산 57◉무섬마을(水島村):조지훈(김난희)처가집(우) 36173☞(지번) 문수면 수도리 237☞경북 영주시 문수면 무섬로234번길 5◉오죽재재실(五竹齋齋室)(우) 36811☞경북 예천군 감천면 석송로 247-6☞(지번)경북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 203◉예천군온천휴양지(우) 36811☞(지번).. 2024. 11. 1.
■영양군/읍, 주실촌(注室村)유적지 조감도■ ■영양군/읍, 주실촌(注室村)■◉영양 수월공휘검(水月公諱儉)유택경북 영양군 일월면 칠성리 산 24(지번주소)영양군 일월면 칠성리 산 24◉영양 월잠종택[英陽 月岑宗宅]:  1804년(순조 4) 가암(佳巖) 조숭도(趙崇道)가 건립한 집으로, 1900년대 중반에 월잠(月岑) 정유석(鄭惟碩)의 종택으로 사용하기 위해 야성정씨 문중에서 매입하였다. 일월산 아래 자리잡은 가곡리는 야성정씨와 한양조씨가 동시에 입향하여 형성된 동족마을이다. 이 마을에 남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 종택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전형적인 ㅁ자형 기와집이다.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가마실길 35-1(지번주소)영양군 일월면 가곡리 289-2◉영양 효석(曉石) 조운해(趙雲海)생가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실1길 11-6(지번주소)영양군 일월.. 2024. 10. 29.
■조선 개국/정사/좌명공신 가문■ 漢陽 趙氏한양조씨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24. 10. 20.
◐영양 하담(荷潭) 조언관(趙彦觀, 1805-1870) 하담고택(荷潭古宅) 경북 문화재자료 제441호◑ ◐영양 하담(荷潭) 조언관(趙彦觀, 1805-1870) 하담고택(荷潭古宅) 경북 문화재자료 제441호◑이 고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공을 세워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사월(沙月) 조임(趙任, 1576-1644)의 손자인 시벽(是壁, 1670-1753)이 1710년 경 건립하였다고 하며, 조선 후기의 학자인 하담(荷潭) 조언관(趙彦觀, 1805-1870)이 태어난 곳이다. 시벽의 아들이 심은 회나무가 있다하여 쌍괴당(雙槐堂)이라고도 한다.고택은 ㅁ자형 건물로 정면 좌측에 팔작지붕의 사랑채가 높게 솟아있고 그 뒤편에 안채가 다른 집과는 달리 지붕이 독립된 구조로 길게 놓여 있다. 영양읍 하원리와 상원리에 있는 한양조씨(漢陽 趙氏) 사월파(沙月波) 종택인 월담헌(月潭軒) 사고종.. 2024. 10. 6.
◐병자호란의 충신, 조득남 장군 정려, 남한산성 북문 전투, 법화골 전투!◑ 경기도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는 지난달 말(2023.10.31.) 남한산성 북문 해체·보수공사가 완료돼 이달 1일(2023.11.1.)부터 북문을 본격 개방하였다.. 조득남 장군은 무인으로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강화까지 호종하였고, 1630년 유흥치의 난과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가도 약탈 때에도 출전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수어사 이시백(李時白)장군 휘하에서 북문을 지키며, 1636년 12월 21일 이후 항쟁(첫째 전투)하여 많은 청나라 군사를 물리치니, 이에 왕이 술을 하사하고 공조정랑에 제수 받았지만, 다음 날 또 전투(두번째전투)에서 출전하여 무수한 화살이 떨어지는 전투에서 장검을 빼어 들고 적진에 뛰어 들어 좌충우돌, 적을 무수히 죽이고 분투하다가 중과부적으로 .. 2024. 10. 4.
■答趙芝園次權命汝韻[답조지원차권명여운]●李尙迪[이상적] ■答趙芝園次權命汝韻[답조지원차권명여운]●李尙迪[이상적]권명여의 운을 차한 조지원에게 답하다. 我車生耳歎薪勞[아거생이탄신로] : 나의 수레 성하게 만들어 땔나무에 애씀 칭찬하고游子何曾仕宦高[유자하증사환고] : 방랑자는 어찌 일찌기 높은 벼슬자리를 밝혔을까.一榻燈明憐各夢[일탑등명련각몽] : 한 책상에 등잔불을 밝히니 각자의 꿈은 가련하고重裘霜薄戀同袍[중구상박련동포] : 무거운 갖옷에 얇은 서리내려 친구를 그리워하네.息機未斷文章業[식기미단문장업] : 기심 내려놓고도 아직 위태한 문장을 끊지 못하고焚筆堪銷意氣豪[분필감소의기호] : 붓을 불태우며 호걸의 의기가 사라짐을 참아내네.日下風流頻計路[일하풍류빈계로] : 하늘 아래 온 세상의 풍류를 길에서 자주 셈하고指頭千里首空搔[지두천리수공소] : 손가락 끝 천리를 향하.. 2024. 10. 4.
◈개성왕씨와 연계??? ■함흥본궁 위치 : 39.870874, 127.566810사포구역 소나무동, 조선공산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 함흥시 2024. 10. 3.
◈조세형조부 조덕삼 장로! ♥choys3000 장애인종인에 대한 갑질하고 인격살인한 내용!!! 2024. 10. 3.
●산서공(山西公) 조경남(趙慶男, 山西雜錄/亂中雜錄) 의병장 신도비명(神道碑銘): 上章涒灘(庚申, 1920)...金寗漢撰(通政大夫全秘書院承 安東人 金寗漢撰(통정대부전비서원승 安東人 김영한찬)(동강 김영한, 東江 金寗漢: 1878~1950,일중 김충현 조부)) △노사집 제18권 / 서(序): 기정진(奇正鎭)■《산서잡록》 서〔山西雜錄/亂中雜錄 序〕유서경(柳西坰)이 말하기를 “역사책에는 감분(感憤)을 느끼게 하는 곳이 많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림자와 같은 말이다. 천 년 전의 흥망으로도 오히려 불평스러운 마음을 갖거늘 하물며 몸소 친히 일을 겪으며 귀와 눈으로 직접 보고 기억한 것이야 그 감분의 절실함을 또한 어찌 역사책에 비교하겠는가. 그렇다면 산서(山西)의 이 기록으로 옹(翁)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가 있다. 그 글은 기록한 것이 넓고 말을 갖추어 좌씨(左氏)가 경전(傳經)을 지은 것과 같으니 곧, 역사가가 쓴 한 체제이고, 그리고 그 뜻은 천 년 전의 불평스러운 남은 분노이니 아, 슬프다.대체로 우리의 선조(宣祖)와 인조(仁祖)의 시대에 천하의 일이 .. 2024. 10. 2.
▣팔우헌집(八友軒集)▣ ▣팔우헌집(八友軒集)▣○ 本集은 八友軒 趙普陽(1709 : 肅宗 35 ~ 1788 : 正祖 12)의 文集이다.○ 本集은 著者의 孫 顯湜ㆍ顯佐가 家藏草稿를 바탕으로 蒐集ㆍ編次하여 李仁行의 校讎를 받아 1831년 경 木板으로 刊行한 初刊本이다.○ 分量은 7卷 4冊으로 總 292板이다.○ 本 影印底本은 서울大學校 奎章閣 藏本(圖書番號 : 古3428-651)으로서 半葉은 10行 20字이고 半郭의 크기는 21.0×16.6(cm)이다.○ 本集의 標點者는 吳圭根이고, 監修者는 趙昌來이다. 한국문집총간 DB에서 사용된 부호는 다음과 같다.。:문장 안에서 구(句)나 절(節)의 구분이 필요한 곳과 문장의 끝에 사용하였다.   묘도문이나 부(賦), 사(辭) 등에서 銘曰, 辭曰 등의 뒤에 사용하였다.   대구(對句), 연구(.. 2024. 9. 30.
玉川公 趙德鄰(조덕린) 선조님 간찰 [원문]自君在府中 恒深世道之憂不得一番相問豈相念之情耶適載叔兄來訪槩聞近來所履之安深慰戀思之情但所謂世道之慮則更有甚於向來者盖以前所未聞者復有詳聞故也爲君之慮莫若早爲自安之計而醫局 之爭本府先輩已定之䂓鄕人遵守而不敢不敬者今幾年所而壞之自君 君將欲置身於何地此事處之不難而君所以爲身謀者太踈而慢以此益望君早爲■■早避善後之計也書不盡意若問之此兄想能道吾意也不宣謹狀辛巳 五月九日 璶鞍馬纔卸高斾戾止得半餉款可謂奇矣冒風雪歸稅安定否弟今日爲宗系事暫往元唐 還過長至祀事徐圖一進耳適憑來便奉謝昨枉仍將筆墨各一侑簡幸領入伏惟兄照至前二日弟德鄰 頓 [번역문]1701년(숙종27)에 5월에 장신이 의국(醫局)의 분쟁에 대한 대처가 잘못되었다며 상대방에게 조언을 하는 간찰과 조덕린이 자신을 찾아온 것에 대한 감사와 함께 붓과 먹을 동봉한 간찰〈1〉자네가 부(府)에 있은 뒤로 .. 2024. 9. 27.
농암 이현보선생 분강서원 상량문(汾江書院上樑文):玉川公 趙德鄰(조덕린) 院書江海 門道由 裔想敬 院書江莎 院書江污 齋正誠 齋復克 분강서원 상량문(汾江書院上樑文) 덕음(德音)을 잊지 못하여 이 높음을 갚으려는 전례를 거행하고, 남기신 영정(影幀)이 엄연하니 공경히 받드는 집을 경영하였다. 영(靈)의 모습은 새롭고 엄숙하다. 농암 선생은 경서를 타고났고 황하와 태산의 기상을 지녀 그 학문이 깊고 정미하였다.학문하고 남는 시간에 벼슬을 하였으나, 높이 현달(顯達: 벼슬, 명성, 덕망이 높아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남)하여 일찍부터 경제의 뜻을 지녔다. 출처가 함께 마땅하였고 충효를 함께 갖추었다. 혼란한 임금을 섬겼으나 곤경에 처해도 더욱 형통하였고 벼슬은 간관에 이르러 바른 도에 숨김이 없었다. 어버이를 매우 정성스럽게 봉양하고 여덟 고을을 다스림에 그 효도의 마음을 미루어 다스렸으.. 2024. 9. 27.
■모계집(慕溪集)부록 一.효충사 일록 4.제영(題詠) P.189 ■모계집(慕溪集)부록 一.효충사 일록 4.제영(題詠) P.189■ 제 영 (題 詠)忠靖之家節孝文 先生繼作世推尊 충정지가절효문 선생계작세추존野鴨無從靈異致 島夷敢拒義聲存 야압무종령이치 도이감거의성존嘉木繁榮終就實 芳泉有味盖由源 가목번영종취실 방천유미개유원院而壇又祠而祭 一廢一興亦理原 원이단우사이제 일폐일흥역이원忠靖의 집안 節孝의 가문에선생이 계속하여 일어나 세상이 추존하였네.들오리의 자취가 없자 영험하고 이상한 일이 일어났으며섬 오랑캐와 겨루어 의로운 소리 있었네.아음다운 나무 번상하여 마침내 열매 맺고아름다운 샘 맛이 있으니 대개 근원에 말미암아서이네.院을 세우고 壇을 마련하여 또 향사하였으나한번 폐하고 한번 흥하는 일 역시 이치이고 근원이라네. [제3대 都有司 姓孫 進士 一元] 2024. 9. 17.
●성균진사조공강유허비음기(成均進士趙綱遺墟碑陰記)/趙綱先生行狀!!!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24. 9. 14.
▣神道碑銘:有朝鮮純忠奮義佐命開國元勳資憲大夫吏曹判書漢山府院君贈謚忠靖漢陽趙公仁沃▣ ▣神道碑銘:有朝鮮純忠奮義佐命開國元勳資憲大夫吏曹判書漢山府院君贈謚忠靖漢陽趙公仁沃▣△한양조씨대종회 인장은 최초 대 종회소인장(고문서참조)입니다. 2024. 9. 13.
●병참공파 상계도와 5자파종회별 8세~31세까지 족보!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24. 9. 11.
●현곡공(玄谷公) 조위한(趙緯韓):출생1567년(명종 22)~사망1649년(인조 27) 조위한(趙緯韓)출생1567년(명종 22)사망1649년(인조 27)■玄谷集卷之十二(십이권) / 記 一首■●襄陽東溟書院創建記 a073_298a [DCI]ITKC_MO_0288A_0130_070_0010_2003_A073_XML 余以中丞。論事過當。斥補于玆土。下車之初。先以興學校育人才爲急務。重創聖廟而大之。改造齋舍而新之。又置學田以爲諸生朝夕之供。而第念校生多有免軍之徒。紛紜雜亂。其中雖有俊秀拔萃之才。不得精業於黌齋。以此列邑皆設書院于靜散地。爲多士修養之所。而顧此邑獨無焉。余慨然興喟。鳩材募工。欲效白鹿之舊制矣。適値朝廷革去本府之大浦鎭。軍器軍糧。移于本府。而萬戶所居之館舍。嵬然獨存。勢將毀撤而補用於官家。余翻然喜曰。此必天公感余愛士之誠。畀此一館。以爲諸生講學肄業之地。何必毀諸。乃因舊館而額之曰。東溟書院。蓋齋房講堂。儼然維新。一鄕之父老諸生。聚而謝焉。余.. 2024. 9. 10.
●현곡공(玄谷公) 조위한(趙緯韓):출생1567년(명종 22)~사망1649년(인조 27) ■조위한(趙緯韓)조위한(趙緯韓): 1658발간玄谷集序 玄谷集卷之一 辭 二首賦 三首玄谷集卷之二 詩○五言古詩 二十七首詩○七言古詩 七首玄谷集卷之三 詩○五言律詩 一百四十一首玄谷集卷之四 詩○五言排律 八首玄谷集卷之五 詩○七言律詩 一百十首玄谷集卷之六 詩○七言律詩 一百二十六首玄谷集卷之七 詩○七言律詩 九十四首玄谷集卷之八 詩○七言律詩 六十四首七言排律 五首玄谷集卷之九 詩○五言絶句 八首六言絶句 四首七言絶句 六十首玄谷集卷之十 詩○雜體 二十七首玄谷集卷之十一 敎書 四首批答 一首疏 三首啓辭 二首玄谷集卷之十二 檄 一首策題 二首論 一首策 一首書 一首序 二首記 一首跋 二首玄谷集卷之十三 墓碣 一首祭文 十五首玄谷集卷之十四 錄 二首●조위한(趙緯韓)조위한(趙緯韓)1567년(명종 22)~1649년(인조 27)■현곡집(玄谷集)1658발간조위한(趙緯.. 2024. 9. 9.
은진현감(恩津縣監) 조강(趙綱)에 대하여..... ●기언 별집 제24권 / 구묘문(丘墓文)■사헌부 감찰 정공(鄭公)휘 약(若) 묘표[DCI]ITKC_BT_0344A_0930_010_0110_2013_008_XML DCI복사 URL복사공은 휘는 약(若)이고 자는 순승(順勝)이며, 성은 정씨(鄭氏)이니 그 선대는 본래 진양(晉陽) 사람이다. 고려 때의 명신(名臣) 정길부(鄭吉孚)의 6세손이며 우리 명종 때의 간관(諫官) 정사현(鄭思顯)의 아들이다. 16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니,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유술(儒術)을 좋아하였다. 우리 선조 22년(1589)에 행의(行誼)로 선발되어 재랑(齋郞)이 되었다. 이듬해에 어머니 이씨(李氏)가 세상을 떠났다. 정씨 선대의 묘소가 모두 상당(上黨)에 있었는데, 인하여 묘소를 지키며 떠나지 않았다.당시에 왜.. 2024. 9. 7.
의병장 조경남(趙慶男): 외세 침략과 국난극복 정신 ▲의병장 조경남장군 신도비, 난중잡록, 춘향전▲舊묘역모습▲新묘역(합장)모습▲新묘역(합장)모습의병장 조경남(趙慶男)외세 침략과 국난극복 정신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외세에 의하여 침략을 받았거나 위협을 받았던 일이 너무도 많았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900여 회나 된다고 한다. 우리의 선조들이 그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을 때 그 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나라를 지키며 우리 민족의 문화를 수호해 온 것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위대했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향토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더욱 더 숭고하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 임진·정유재란 때 우리 고장을 지키기 위한 남원성 싸움은 어떠했는가? 이때만 하여도 우리나라는 북방경비를 위한 수비군과 비변사라는 군사기구가 설치되었었으나 병·농 일치였기에 강한 정예군대는.. 2024. 9. 5.
●漢陽趙氏派宗會序 ●洪北面魯隱洞宗中立約序(大護軍公派宗會規約) ■冶谷先生集卷之五 / 序●漢陽趙氏 湖西地域 大護軍公派(趙璔) 宗會所 "宗會序" b026_176b[DCI]ITKC_MO_0836A_0070_010_0020_2009_B026_XML漢陽趙氏之流落于湖之右者。凡一百五十有餘年。而奄已過五六世矣。衰替不振。故家遺業。無復存者。而尙賴祖宗積善累仁之餘烈。子孫繼繼繩繩。環洪,結,德,禮,唐,沔,瑞,泰之境而散處者。其麗亦夥矣。惟各困于葛藟。鮮相往來。其或邂逅相遇。叙炎凉外。僅能貌相勞苦而已。漠然無情義之交孚。至有功,緦之戚。而不相識面者焉。又况於吉慶禍患之際。能與之有同其憂喜者耶。歲在萬曆丁巳冬。宗丈故承旨纘韓氏。以前榮川郡守。持斧督捕土賊于忠,全,慶三道。便道來謁于良節公廟。于時吾季父嗣守宗祧。因求合湖中宗族爲一會。季父爲之招集。越明年戊午春三月上旬。捕使還自嶺南。遂設一塲燕會而罷。於是。門中長老咸曰。大宗廟在於是。時節.. 2024. 9. 4.
★漢陽趙氏 氏族의 連原!★ 시조는 조지수(趙之壽). 고려때 벼슬하여 중서사(中書事)에 이르렀다. 한양조씨(漢陽趙氏)의 선계(先系)는 고려왕족이였다. ‘갑신단권보(甲申單卷譜)’ 서문에 보면, 조(趙)씨는 본래 고려시 개성의 명망있는 종족(宗族)으로 8세조에 조지수(趙之壽)가 있어 현족(顯族)이 되었다는 내용과 조선왕조실록에 태조 이성계의 글에보면 고려왕족이란 글이 있다.아무튼 한양조씨(漢陽趙氏)는 시조 조지수(趙之壽)의 아들인 조휘(趙暉)가 (★1代 안무고려군민총관부(安撫高麗軍民總管府)→ 2代 심양등로안무고려군민총관부(瀋陽等路安撫高麗軍民摠管府)→3,4代 쌍성등처군민총관(雙城等處軍民總官)★)이 되고, 손자인 동정군좌부도원수(東征軍左副都元帥) 조양기(趙良琪,東征軍將軍 명단엔 없다.)가 2대 쌍성총관(2代雙城摠管) 이 되였으며 증손자인.. 2024.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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