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漢陽人문화유적❀490 [훌륭한 분 조 온]국어(국민학교 제 5학년 1학기 국어책, 22 -29쪽).현재는 교과서 개편으로 게재 안됨,펴냄:서기 1986년 3월 1일. 양절공 조온(한양조씨 6세조)조선이 건국되자. 나라의 기초를 다지기 위하여 안팎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래서 능력있고 명망 있는 인재가 많이 필요하였다.조온은 이러한 때에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데 노력한 분이다.평안도에 침공한 왜구를 무찔렀고. 또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분란을 막기 위하여 온 힘을 기울였다.그는 이렇게 나라 안팎에서 일어나는 어려움을 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인을 훈련시키고 호적을 정리하여 나라의 터전을 충실히 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벼슬이 높아졌지만, 그는 거드름을 피우는 일이 없었다. 항상 아랫사람을 따뜻하게 대하고 아꼈으며, 이웃을 가족처럼 사랑하였다.공신에게 내리는 곡식을 곳간에 비축하였다가, 불우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었다. .. 2024. 8. 8. ◐冶谷先生集序[尹東洙] 冶谷先生集事實記略/書先祖良節公遺書後識◑ 冶谷先生集序冶谷先生集序[尹東洙] b026_119a 편목색인[DCI]ITKC_MO_0836A_0010_000_0010_2009_B026_XML DCI복사 URL복사昔黃勉齋論爲學之道曰。眞實心地。刻苦工夫。盖工夫能刻苦而後。可以進德修業。日造乎高明。心地能眞實而後。可以篤志務實。不騖乎虗僞。此易之所以自強不息爲乾之德。而君子之所以必誠之爲貴也。余以勉齋之訓。求之近世。先輩之學。惟冶谷趙先生庶幾乎。先生自少時。慨然有志於學。每日未明而起。盥櫛衣冠。端拱正坐。終日無惓怠之意。非六經四書。不讀。見朱子書。心誠好之。手抄而口誦。其他性理之書。靡不誦究。且記平日所得於耳目心思者。名曰三官記。又抄古人言行之善者。名曰常目編。晨誦庸學一遍。臨卧誦西山夜氣箴。日以爲常。篤學力行之功。老而匪懈。先生之於工夫。可謂刻苦矣。先生資禀篤厚。性行誠愨。宅心則以浮僞爲戒。飭躬則以忠信爲本。盖其所受.. 2024. 8. 6. ♣한양조씨 대종파 지추공 500년 세거지 홍성! (한글번역문)▣한양 조씨 종중 강회서(漢陽趙氏宗中講會序)나는 병오년(1906) 봄에 ≪조씨세가(趙氏世家)≫ 2백질을 인쇄하여 경향 각지의 여러 문중에 분산하여 놓았고, 나머지 쌓아둔 것으로 아직 4,50질 남아있다. 무릇 인쇄한 본뜻은 장차 그것을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쌓아두었다가 사용할 것이다.정미년(1907) 10월에 홍주(洪州) 노은동(魯隱洞) 선영에서 제사를 지낼 때 문중의 청년으로 하여금 경서를 암송하게 하거나 문장을 짓게 하여 성적이 우수한 자를 뽑은 세 사람에게 ≪조씨세가≫ 한질씩 상으로 내렸다. 다음 달 화수회(花樹契) 자리에서 대종손 병한(炳漢)이 소리 높이 외치며 말하기를, “강회의 일은 후배들을 격려하는데 있어 이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다. 다만 영구한 방법과 책략을 도모하여 시행하.. 2024. 8. 6. ●한천 부원군(漢川府院君) 조온(趙溫)의 졸기(卒記)/遺書/墓碑銘● 조광조는 사림파의 영수(領袖)다. 영수는 우두머리 라는 뜻이다, 사학계에서는 사림파가 조선왕조를 반대하고 낙향한 인물들이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조광조의 선조 양절공 조온은 전혀 그런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조온은 조선 개국공신 중 한명이고, 조온의 아버지 양렬공은 이자춘의 딸과 결혼하여 조선왕조와 친족으로 이어져 있다. 그외에도 사림세력이 화를 당한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의 인물 90여명중 70퍼센트 정도가 한양 거주자 였다. 더군다나 세조의 찬탈에 협력한 사람들이 공신책봉을 받았는데 이때당시 훈구파들은 사장학자들이다. 훈구와 사림의 대립은 곧 문학 이냐 도학 이냐의 싸움이었다. 역사 지식이 짧은 사람들이 이걸 이해 못하는 이유는 고려시대를 이해 못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는 사장학과 불교.. 2024. 7. 30. ●조휘(趙暉)조양기(趙良琪)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 기록!!! ●정종실록 5권, 정종 2년 7월 2일 乙丑 8번째기사 1400년 명 건문(建文) 2년■태상왕이 세자에게 나쁘다고 말하여 이무와 조영무를 강릉부와 곡산부에 각각 귀양보내다.동북면 도순문사 영흥 윤(東北面都巡問使 永興 尹) 이무(李茂)를 강릉부(江陵府)에, 서북면 도순문사 평양 윤(西北面都巡問使 平壤尹) 조영무(趙英茂)를 곡산부(谷山府)에 귀양보냈다. 이날 세자가 덕수궁에 조알하니, 태상왕이 다시 세자에게 일렀다."조온(趙溫)은 자부(姊夫)의 아들이고, 조영무(趙英茂)는 번상(番上)하는 군사인데, 내가 그 미천한 것을 불쌍히 여겨 혹은 의관(衣冠)도 주고, 혹은 관작도 제수하여, 입상(入相) 출장(出將)할 때에 따라다니지 않은 적이 없어 드디어 개국 공신이 되고, 지위가 경(卿)·상(相)에 이르렀으니, 모.. 2024. 7. 29. ◐옥대(玉帶)◑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24. 7. 25. ■점필재집 문집 부록 / [신도비명(神道碑銘)]●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점필재집 문집 부록 / [신도비명(神道碑銘)]●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DCI]ITKC_BT_0066A_0310_010_0010_2003_003_XML DCI복사 URL복사덕행(德行), 문장(文章), 정사(政事)는 공문(孔門)의 고제(高弟)로서도 겸한 이가 있지 않았으니, 더구나 그 밖의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재주가 우수한 사람은 행실에 결점이 있고, 성품이 소박한 사람은 다스림이 졸렬한 것이 바로 일반적인 상태이다. 그런데 우리 문간공(文簡公) 같은 이는 그렇지 않다. 행실은 남의 표본이 되고 학문은 남의 스승이 되었으며, 생존시에는 상(上)이 후히 대우하였고 작고한 뒤에는 뭇 사람들이 슬퍼하며 사모하였으니, 어쩌면 공의 한 몸이 경중(輕重)에 그토록 관계될 수 있었단 말인가.공의 .. 2024. 7. 24. 가정집 제3권 / 기(記)금강산(金剛山) 도산사(都山寺) 창건(趙琳) 기문 ▲외려 유래비를 차관님께 소개한 제가 송구스럽네요!!! 통화하면서 사실을 이야기 했더니, 욕만 먹고 통화했네요!!!가정집 제3권 / 기(記)금강산(金剛山) 도산사(都山寺) 창건 기문[DCI]ITKC_BT_0014A_0040_010_0020_2008_001_XML DCI복사 URL복사해동의 산수는 천하에 이름이 나 있는 바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금강산의 기막힌 경치는 첫손에 꼽히고 있는 터이다. 게다가 불서(佛書)에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주재(住在)한다는 설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마침내 인간 정토(人間淨土)라고까지 말하게 되었다. 그래서 천자가 내린 향과 폐백을 받들고 오는 중국의 사신들이 끊이지 않고 길에 이어지는가 하면, 사방의 사녀(士女)들이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서 소에 싣고 말에 싣고.. 2024. 7. 24. ●2세~5세조 總官 활동시대 위치!!!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24. 7. 23. 금포냐? 은주기냐???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24. 7. 23. ▣원나라 세조가 하사한 옥대와 은주기(은잔)!!!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24. 7. 21. ■여원 연합군의 1차 일본 정벌[1차/2차일본정벌때 "東征左副都元帥 조양기"는 없다!!!]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24. 7. 21. ■三秀堂移刻約山堂題詠記■墓碣銘 幷序 [蔡濟恭撰]■行狀[李象靖撰] 玉川先生文集卷之十八 / 附錄■行狀[李象靖撰] a175_420a[DCI]ITKC_MO_0453A_0180_010_0010_2004_A175_XML先生姓趙氏。諱德鄰。字宅仁。自號玉川。又號滄洲。漢陽人。始祖之壽。高麗僉議中書事。數世至仁璧。龍源府院君。我太祖大王姊婿也。見太祖王業漸隆。不仕而老襄陽。襄人爲立忠賢祠以祀之。 國朝贈漢山伯。是生涓。入本朝。以佐命功。封漢平君。世宗朝。右議政府院君。五世而至諱源。娶于英陽而居焉。於公爲五代祖。高祖諱光義。掌隷院判決事。號約山堂。曾祖諱佺。禮賓寺直長。號壺隱。祖諱廷珩。進士。考諱頵。將仕郞。妣豐山柳氏。謙庵先生雲龍之後。宣敎郞世長之女。以孝廟戊戌十二月癸亥生公。幼而聦穎。始受學。不煩提督。將仕公爲之別置學舍。與伯氏持憲公同處隷業。未嘗少違親旨。年十五。做賢良策。筆勢滂沛。辭理洞達。宿儒皆推以爲不可及。二十。中進士。遊泮宮。擧止有常.. 2024. 7. 20. ▣옥천(조덕린)선생문집1,2,3권▣ ▣옥천(조덕린)선생문집1,2,3권▣ 권목차>1. 해제 玉川 趙德隣의 시문집. 18권 9책. 목판본.서문과 발문이 없어 간행연대와 경위를 자세히 알 수 없다. 문집에는 방대한 양의 詩와 편지, 그리고 상소문과 행장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저자가 유람하면서 본 경치와 저자의 심회를 읊은 것들도 있지만, 輓詩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아울러 행장도 많이 집필하고 있다. 그가 쓴 만시와 행장을 보면 당시 소론과 남인의 중심인물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이는 그와 편지를 주고받은 이들을 분석해도 마찬가지이다. 洪宇遠, 洪萬朝, 權大運, 李徽逸, 金邦杰, 沈檀, 李眞望, 權榘, 李光庭, 金聖鐸, 李栽 등이 그들이다. 아울러 편지에는 朴師洙·吳命恒·朴文秀 등 무신란을 평정하기 위해 활약하던 정부 관리들과 적정의 동태에.. 2024. 7. 20. [근대유학문선] 수구(守舊)란 무엇인가? 유영선(柳永善), 『현곡집(玄谷集)』 권10 「야사문답(野舍問答)」 [근대유학문선] 수구(守舊)란 무엇인가?세상이 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세상이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네. 굴원(屈原)의 슬픔이다. 세상이 탁하면 나도 탁하고 세상이 취했으면 나도 취하리. 어부의 지혜이다. ‘여세추이(與世推移)’의 경지이다. 나라가 있을 때에도 ‘여세추이’는 떳떳하지 못했다. 이항복은 어느 날 수박을 선물받자 광해군의 조정에서 타협하는 자신의 ‘여세추이’를 비판하는 뜻임을 알아차렸다. 하물며 나라가 없어진 뒤의 ‘여세추이’는 무엇이었을까? 1912년 호남 유학자 유영선은 영남에서 온 손님과 문답을 나누었다. ‘수구(守舊)’를 붙들 것인가? ‘여세추이’로 돌아설 것인가? 그는 추호도 망설임이 없었다. [번역]현곡(玄谷) 주인이 곤궁한 집에 틀어박혀 세상을 붙좇지 않고, 새것을 싫어하며 .. 2024. 7. 19. 1963년 류시화(柳時華) 서간(書簡) ◐기본정보:1963년 류시화(柳時華) 서간(書簡)◑분류작성주체작성지역작성시기형태사항소장정보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류시화경상북도 영양군1963크기: 21.2 X 40.3장정: 낱장수량: 1재질: 종이표기문자: 한자원소장처: 영양 주곡 한양조씨 옥천종택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안내정보1963년 류시화(柳時華) 서간(書簡)1963년 12월 13일에 안동 하회에 사는 류시화(1901~?)가 4종형 류시연과 함께 비용을 마련하여 선조 월오헌 류일춘(1724~1810)의 『월오헌문집』을 간행하여 영양 주곡의 한양 조씨 옥천종택에 부치면서 동봉한 편지이다. 직접 찾아뵙고 문집을 전해야 하지만 초췌함이 심하여 우편으로.. 2024. 7. 19. 1874년 조성교(趙性敎)가 이관희(李觀熙)에게 보낸 답신 기본정보: 1874년 조성교(趙性敎)가 이관희(李觀熙)에게 보낸 답신분류작성주체작성시기형태사항소장정보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조성교, 이관희1874크기: 23 X 47.5장정: 낱장수량: 1장재질: 종이표기문자: 한자원소장처: 성주 한개 성산이씨 응와종택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현소장처: 안동대학교 박물관 / 경상북도 안동시 송천동[안내정보]1874년 조성교(趙性敎)가 이관희(李觀熙)에게 보낸 답신수취자의 조부 이원조의 시장(諡狀)을 부탁 받고서, 초고(草稿)를 올렸으나, 식견(識見)이 얕고 문장이 졸렬하여 마침내 고인의 훌륭한 행적을 치켜세우지 못했으니, 실로 마음이 부끄럽다는 내용의 답신「凝窩先生年譜」, 이원조, 『凝窩全集』, 여강출판사, 1986『星山李氏世.. 2024. 7. 19. 1874년에 조성교가 안영환에게 보낸 편지 기본정보 : 1874년에 조성교가 안영환에게 보낸 편지분류작성주체작성지역작성시기형태사항인장서명서명(개)연결자료비고소장정보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 개인-생활-서간조성교(趙性敎) / 안영환(安永煥)전라도 전주부 / 전라북도 전주시1874 년 / 고종 11년크기 : -×- / 첩장 , 1 / 종이 / 한자- -개 (-, -, -)- : -은봉종가(隱峰宗家)의 간독(簡牘)1868년 김병학(金炳學) 서간(書簡)1868년 조두순(趙斗淳) 서간(書簡)1868년 민승호(閔升鎬) 서간(書簡)1864년 송병서(宋秉瑞) 서간(書簡)1868년 정건조(鄭健朝) 서간(書簡)1868년 유건환(兪建煥) 서간(書簡)1868년 성재옥(成載玉) 서간(書簡)1868년 성정호(成鼎鎬) 서간(書簡)1869년 성정호(成鼎鎬) 서간(書簡)186.. 2024. 7. 19. 1713년 조덕린(趙德鄰) 서간(書簡) 1713년 조덕린(趙德鄰) 서간(書簡)기본정보분류작성주체작성지역작성시기형태사항소장정보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조덕린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1713크기: 27.7 X 31.8장정: 낱장수량: 1재질: 종이표기문자: 한자원소장처: 영양 주곡 한양조씨 옥천종택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안내정보1713년 조덕린(趙德鄰) 서간(書簡)1713년 6월 9일에 조덕린(趙德鄰)(1658~1737)이 쓴 편지이다. 처음 상대의 위문편지를 받았지만 그간 상장례(喪葬禮)를 치르는 일에 바쁘고 병에 걸리는 등의 이유로 답장을 제때 보내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어서 상대측의 안부를 물었다. 지난겨울부터 이번 봄여름을 거치며 상을.. 2024. 7. 19. 1701년 권기(權愭) 서간(書簡):趙佐郞 服史。仁兄 答狀上。 ▣1701년 권기(權愭) 서간(書簡)▣1701년 10월 13일, 권기(權愭, 1650~1704)가 자형 조덕린(趙德鄰, 1658∼1737) 에게 보낸 답장이다. 상중인 조덕린의 체후가 편안함을 알게 되어 위로가 된다고 했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순흥 수령은 부탁을 들어 주지 않을 것이므로, 경차관에게 부탁을 청하라고 했다. 의성과 신풍 등의 노비 신공을 받지 못한 것과 목화 농사가 잘 안되어 혼인을 앞둔 상황에서 걱정스런 마음을 추록에 적었다.1차 작성자 : 김명자상세정보▣1701년 10월 13일, 權愭가 경차관에게 부탁을 청하기 위해 보낸 편지▣1701년 10월 13일, 權愭(1650~1704)가 자형 趙德鄰(1658∼1737)에게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경차관에게 부탁을 청하라고 보낸 답.. 2024. 7. 18. ◈1711년 조덕린(趙德鄰) 위장(慰狀)◈ ▣1711년 조덕린(趙德鄰) 위장(慰狀)▣ 기본정보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위장내용분류: 종교/풍속-관혼상제-위장조덕린, 이시성경상북도 영양군1711크기: 29.5 X 47.4장정: 낱장수량: 1재질: 종이표기문자: 한자원소장처: 영양 주곡 한양조씨 옥천종택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안내정보1711년 조덕린(趙德鄰) 위장(慰狀)1711년 11월 10일에 조덕린이 상중에 있는 사돈 생원 이시성(1669~1725)을 위로하고 안부를 전하는 위장이다. 상대가 상중에 있는 데 미리 안부 편지를 하지 못한 것을 사과하며, 사위를 통해 그의 상중 안부를 전해 듣고 그를 위로하였다. 이후 자신의 근황을 전하며 鄭査兄이 끝내 돌아가셨다는 것과 子婦가.. 2024. 7. 18. =漢陽趙氏先代事蹟=◐副元帥公(左府都元帥)神道碑文, 贊辭(찬사)- 豐山洪象漢撰◑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24. 7. 17. ■己卯黨禁錄 ■學圃先生文集重刊跋[趙鍾弼] ■己卯黨禁錄趙光祖 孝直。號靜菴。進文。以都憲被謫于綾城。尋賜死。贈領議政。諡文正。漢陽人。金淨 元沖。號沖菴。進文。以刑判流濟州。尋賜死。贈領議政。諡文簡。慶州人。鄭光弼 士勛。號雲汀。進文。領相。以救黨人罷。丁亥。復相。癸巳竄。戊戌還相。其年卒。諡文翼。東萊人。安瑭 彥寶。號永慕堂。生文。左相。薦靜菴。己卯罷相。坐其子處謙獄。被禍。諡貞愍。順興人。金安國 國卿。號慕齋。進文。重試。以參贊罷歸驪州別墅。丁酉。復至贊成而卒。諡文敬。義城人。李耔 次野。號陰崖。進文。以參贊罷。寓居陰城。以山水自娛而終。諡文敬。韓山人。金湜 老泉。號淨友堂。進薦。以大司成竄善山。李信變。亡匿。草疏懷衣帶中自縊。諡文毅。淸風人。金絿 大柔。號自菴。生進。文科。以副提學流南海。壬辰蒙放。諡文懿。光山人。韓忠 恕卿。號松齋。生文。以忠淸水使竄。又被構。死於獄中。諡文剛。淸州人。奇遵 子敬。號服齋。生進文科。以應.. 2024. 7. 16. ■學圃先生文集序[趙亨復]신도비/묘갈명/가장 ▣學圃先生文集重刊跋[趙鍾弼]▣◐學圃先生文集序[趙亨復]▣學圃先生文集卷之二 / 疏 伸救諸賢疏 己卯十一月▣▣學圃先生文集序▣ ◐學圃先生文集序[趙亨復]嗚呼。小子於是集。有不忍讀。亦不敢不讀。不忍讀者。是集故也。不敢不讀者亦是集故也。是集乃己卯名賢學圃梁先生集也。小子以靜菴先生爲祖。何忍讀己卯賢文字耶。然以其不忍也而不之讀。則吾祖不孤之德。又將無所於攷。竟所以不敢不讀也。嗟乎。己卯之賢。孰不爲吾祖道義之友。而先生爲別焉。蓋先生生湖南。自五歲有異行。甫十三。遊先生長者門。莫不見重。弱冠。以致澤自任。其德器之夙就可知。及一見吾祖。遂忘年歸贄如蔡西山之於朱夫子。吾祖亦嘗倚以爲重。有曰芝蘭薰人。有曰秋天皎月。則其志同道同有如是矣。以至上舍之同年也。院宇之同享也。何莫非小子之有感於先生也。而最其吾祖之謫綾城也。綾卽先生鄕也。從遊如平昔。得全困亨之志。逮至十二月二十日。執手相訣。無一言及私事.. 2024. 7. 15. 孤山書院上樑文, 南岳集序 간재(艮齋), 남악(南岳) 조종저(趙宗著, 字경숙(褧叔) ) 先生 1631년(인조 9)~ 1690년(숙종 16), 병참공파 포천중중 南岳集序 간재(艮齋), 남악(南岳) 조종저(趙宗著, 字경숙(褧叔) ) 先生 1631년(인조 9)~ 1690년(숙종 16), 병참공파 포천중중南岳集序[崔錫鼎]鄒孟氏有言曰知譬則巧。聖譬則力。其至爾力也。其中非爾力也。此以造道言。夫文豈異乎是。古稱文章爲不朽盛事。然是猶藝之精者。必有獨得之才邁往之氣。然後方可與論於家數之淺深。不者雖榮華其言。藻繪其色。祗爲弊帚之自珍。黃屋之僭擬而已。曷足貴哉。南岳趙先生。自其先休川公。以文章鳴。緖脉有從來。生禀穎異之資。未齔讀古文。過眼成誦。勝冠已有盛名。顧早嬰痼病。涔淹床笫者踰十年。未克肆力於鉛槧。以充其分量。然論其所就。猶足以追步古作者。一時操觚士。莫或之先。旣以詞賦擢解元。對策屢入高等。坐數奇。晩成一第。而又齟齬窮局於掌制登瀛。不與文苑諸公狎主夏盟。豈不惜哉。竊嘗論之。先生之文。粹然出自經史。取材於韓,蘇。析理於閩洛。平淡之中。自有.. 2024. 7. 14. ㅔ●1681년 김산 직지사사적비(直指寺事蹟碑 )조종저(趙宗著)●金山黃岳山直指寺事蹟碑銘幷 序 ●1681년 김산 직지사사적비(直指寺事蹟碑 )조종저(趙宗著)● ■조종저(趙宗著,1631~1690)[생1660][문1672] 한양인(漢陽人) 병참공파 . 字취숙(聚叔), 號간재(艮齋),남악(南岳).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조중려(趙重呂)이며, 어머니는 지중추부사 신경진(申景珍)의 딸이다. 『남악집(南岳集)』·『간재신사(艮齋新笥)』 "동국제일가람황악산문"이란 편액이 걸려있는 근래에 새로 지은 솟을삼문형식의 위풍당당 황악산문으로 편액의 글씨는 여초(如初) 김응현(金應顯)의 필적이다. [直指寺事蹟碑]한양인 병참공파 조종저(趙宗著,1631~1690)直指寺事蹟碑銘(篆 題)金山黃岳山直指寺事蹟碑銘幷 序通訓大夫前行弘文館修撰知製 敎兼 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趙宗著撰顯祿大夫朗善君兼五衞都摠府都摠管 俁書承憲大夫東平君兼五衞都摠府都摠管.. 2024. 7. 14. ❀始祖 諱之壽 壇所 이하 二世祖 ~ 五世祖 墓所圖❀ 보호되어 있는 글 입니다. 2024. 7. 13. 정랑공 조명 (趙銘)行狀, 仁村趙公墓碣銘 조명 (趙銘) 조선시대사인물조선 전기에, 병조정랑 등을 역임한 문신.이칭자경부(警夫)호(號)인촌(仁村)인물/전통 인물성별:남성, 출생 : 연도미상, 사망 : 연도1478년(성종 9), 본관:한양(漢陽)주요 관직 : 병조정랑조선 전기에, 병조정랑 등을 역임한 문신.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경부(警夫), 호는 인촌(仁村). 태조배향공신이며 개국공신인 조인옥(趙仁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조뇌(趙賚)이고, 아버지는 이조참의 조순생(趙順生)이며, 어머니는 원주원씨(原州元氏)로 사정 원유용(元有容)의 딸이다.[생애 및 활동사항]음보(蔭補)로 출사하여 병조정랑이 되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아버지와 함께 금산에 유배되어 관노가 되었다. 1469년(예종 1) 4월 관노에서 방.. 2024. 7. 12.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의정부(議政府)우의정(右議政)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양경공(良敬公)휘연(諱涓)묘갈명(墓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의정부(議政府)우의정(右議政)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양경공(良敬公)휘연(諱涓)묘갈명(墓碣銘)병서(並序)▣공손이 생각건대 우리의 높으신 조상 추충익대좌명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한평부원군 시호 양경공(推忠翊戴佐命功臣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右議政 漢平府院君 諡號 良敬公)한양조공(漢陽趙公) 휘연(諱涓)의 관석(冠舃)을 간직한 곳이 파주(坡州)의 덕은산(德隱山)기슭 자좌(子坐)의 언덕에 있다.세월이 오래되어 옛 비(碑)가 닳아서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전년 가을 묘사(墓祀)때에 비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논의가 준엄하게 일어나더니, 이어 불초(不肖) 사람에게 명령하여 비문을 지으라는 책임을 맡기었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나이가 많고 기운이.. 2024. 7. 12. 조덕순(趙德純) :조봉대부 사헌부 지평 한양 조공 묘갈명병서〔朝奉大夫司憲府持平漢陽趙公墓碣銘並序〕 조덕순(趙德純) :조봉대부 사헌부 지평 한양 조공 묘갈명병서〔朝奉大夫司憲府持平漢陽趙公墓碣銘並序〕공의 휘는 덕순(德純)이고 자는 현보(顯甫)이며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고려 시대 휘 지수(之壽)는 북쪽 변방 지역으로부터 몸을 일으켜 공훈을 드러내어 쌍성총관(雙城摠管)이 되었고 자손들도 작위를 세습하였다. 휘 인벽(仁璧)에 이르러 조선조 태조(太祖) 누님의 남편이 되었는데, 태조의 왕업(王業)이 날로 융성함을 보고 두 왕조를 섬기지 않겠다 하여 양양(襄陽)으로 물러나 여생을 보냈다. 양양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충현사(忠賢祠)를 세웠으며, 공이 죽자 양렬(襄烈)의 시호가 내렸다. 양렬공의 아들은 휘가 연(涓)으로 태조를 추종하니, 양렬공이 아들에게 “너에게 있어서는 의리에 처하는 도리가 나와는 다르니 너는 .. 2024. 7. 11. 이전 1 2 3 4 5 6 ··· 17 다음 728x90 반응형